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반려를 사랑하는 일 ― 김지연론
반려를 사랑하는 일
-김지연론1)
1.
김지연의 단편 「반려빚」은 빚을 껴안고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경제적 빈곤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현은 동성 연인 서일을 위해 무리하게 대출을 받지만 서일은 전세 사기를 당하고 연이어 운영하던 가게까지 망하는 불운을 겪는다. 느닺없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겠다며 떠난 서일은 빚을 갚겠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정현은 이별의 충격과 빚의 압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녀의 친구 선주는 정신 차리라 하지만 정현은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면서 마음으로 서일을 정리하지 못한다. 반려를 원했던 정현에게 남은 것은 ‘반려빚’뿐이다. “서로에게 영순위”(p.166)가 되는 인생의 반려자를 위해 진 빚에서 겨우 해방되었을 때 정현은 “0이 된 기분”(p.188)을 느낀다.
「반려빚」은 빚이라는 소재를 사랑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 소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철저히 연애 소설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2)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현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다. 특히 그녀가 겪는 경제적 빈곤이 정서적 빈곤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은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다. 어느 쪽이 더 절망적인가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청년 세대의 빈곤은 만연해 있다. 그 어떤 시대의 청년들보다 가난하다는 현재 한국 사회의 청년 세대는 취업난과 주거난, 여기에 전세 사기라는 악재를 겪는다. 서일을 향한 감정의 지출에 비례하는 정현의 무리한 대출은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비춰보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술은 사랑의 대가를 ‘반려빚’으로 치르는 정현을 비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녀가 대단한 욕망 때문에 빚을 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저 맘 편히 레드 콤보 한 마리를 시켜 먹고” 치킨을 먹으며 볼 왓챠를 정기구독”(p.165)하고 편안한 소파가 들어갈 만큼은 넓은 집, 기왕이면 그 집이 자가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하기를 꿈꿨다. 정현의 물질적·정신적 소망은 평범하고 순수하다. 정현에게 약점이 있다면 그녀를 주눅 들게 하는 ‘부채감’이다. “사귀는 동안 정현은 서일에게 자주 부채감을 느꼈”고 “왜 빚진 마음이 드는지, 왜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지 알 수 없었다”(p.170). 그녀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잘못하지 않아도 서일에게 미안해했고 빚은 그 부채감을 만회하기 위한 결과였다. 자존감이 낮은 정현은 “그냥 호구 잡힌 채로, 목줄 매인 채로 살고 싶”(p.174)다는 생각할 정도로 서일에게 지나치게 의존해왔다. 문제의 원인은 정현의 나약한 심성과 이로 인한 불균형한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현처럼 가진 것 없는 청춘이 연인과 같이 살 원룸을 구하기 위해 경제적 고통을 감수한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에게 아낌없이 다 주고 싶었을 뿐”(p.187)인 그녀의 특별할 것 없는 욕망을 무너뜨리고 계산 없이 살고 싶은 꿈을 ‘망한 삶’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반려빚」은 사랑 때문에 진 빚을 다 갚고도 “진짜 반려”(p.184) 같은 전세대출금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삶, ‘반려빚’의 압박에 포위된 삶의 실상을 세밀하게 그린다.
욕망을 최소화하여 씀씀이를 줄인 뒤 여행으로 소비의 플렉스를 즐기다 “다시 허리띠를 조이는 삶으로 돌아”(p.187)가는 정현의 모습은 목적과 돈의 균형 있는 배분이라는 경제 주체의 합리성과 거리가 멀다. 생존 소비에 치중하는 정현의 소비 패턴은 저성장 시대의 생존법으로, 이때 돈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정현이 매순간 돈을 의식하며 돈에 지배당한다는 사실은 요행을 바라지 않고 살아온 그녀가 자주 로또를 사는 장면에도 나타난다. 그것은 성실함과 노력만으로 행복할 수 없는 시대의 불안을 드러낸다. 서일에게 빚을 다 정리했다 말하고 자신이 구입한 로또의 마지막 번호를 물어보려 전화까지 하는 정현의 행동은 사랑에 “합리적 판단을 신속하게 내릴 수”(p.176) 없었던 그녀의 성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서일의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서일의 전화번호로 받은 낯선 초등학생은 로또 번호를 묻는 정현의 뜬금 없는 질문에 자신이 가르쳐준 번호로 삼촌이 4등에 당첨된 적이 있다며 당첨되면 반을 줄 거냐고 묻는다. 정현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초등학생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며 당돌하게 전화를 끊는다. 이 처량하고 우스운 에피소드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물신주의와 투기 욕망에서 정현이 얼마나 어수룩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서일 때문에 사람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 정현에게 더 큰 문제는 그녀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정현은 또래보다 한참 낮은 자신의 신용 점수가 “자신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설명”(p.172)하고 있으며 자신이야말로 사회에서 믿지 못할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정현 스스로 느끼는 모멸의 감정은 ‘반려빚’의 가장 큰 해악일 것이다. 정현은 서일을 사랑했을 때보다 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빚을 다 갚고 나자 그제야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회에서 “욕망을 최소화한 채 수십 개월을 버텨”내는 정현에게 사랑과 행복은 사치이다. 자신을 쑥이나 마늘 같다고 생각하며 “먹으면 사람이 되게 해준다고 소문이 나서 다들 잘근잘근 씹어먹으려고 손을 뻗치”(p.184)려 한다는 정현의 암울한 상상은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서 보잘 것 없으며 늘 이용만 당한다는 자기 비하가 담겨 있다. 정현은 죽을 때까지 로또를 사더라도 1등이나 2등에 당첨되지 않을 것이고 “어디 가서 사기나 안 당하면 다행”(p.187)이라고 말한다.
인생 역전의 희망은커녕 빚과 사기를 두려워하는 시대, 정현이 느끼는 모멸감은 사회적 감정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죄로 괴로워하며 살고 있으니 장수는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고 살아 있는 동안 빚을 다 갚는 수밖에 없”(p.167)다는 체념, 그리고 “남을 등쳐먹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p.174)에서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는 “열심히 셈하고 값을 따져”봐야 한다. 「반려빚」에 나타난 빈곤은 사회적인 것이다. 정현은 빚을 갚고 “0이 된 기분”을 느끼지만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p.188)하다. 가진 것 없고 계산에 서툰 정현에게 “0이 된 기분”은 평정심이 아니라 힘겨운 자기 소진의 결과이다. 그녀는 이제 빚도 없지만 반려도 없다. 경제적 빈곤은 삶에 두려움을 만든다. 그러나 「반려빚」의 진짜 두려움은 진정한 반려 관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2.
김지연의 소설에서 동성 커플은 반려의 한 형태로 종종 등장한다. 이들의 사랑은 경제적인 이유로 좌절되거나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여 있다.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크든 작든 사회에서 무시받고 거부당하는 것 같은 모멸감을 느낀다. 여러 가지 기준으로 열등한 집단을 범주화하고 멸시하는 통념이나 문화의 위력을 나타내는 모멸의 구조 안에서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개별성은 인정받기 어렵다.3) 『마음에 없는 소리』(2022)에서 동성 연인은 이유 없이 욕을 듣거나 경멸의 눈초리를 받고(「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아버지는 ‘나’와 여자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사랑이 뭔지 아느냐며 무시를 한다(「사랑하는 일」). 경제적 궁핍 역시 이들을 모멸감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 인물들은 “뭐든 늦된 편”으로 잘하는 일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굴 드라이브」), 모욕을 견디며 늘 “죽고 싶다고 생각”(「마음에 없는 소리」)을 한다. 고향에 있든 서울에 있든 이들은 불안과 박탈감 등 부정적 감정을 자주 경험한다. 「굴 드라이브」에서 필리핀 이주 여성 미셸이 들려준 굴 유생에 관한 이야기처럼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유생으로 부유하다가 굴 상자에 실려 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하다. 김지연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이 아니라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다는 듯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괴로움을 느끼고(「그런 나약한 말들」) 연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울음을 터뜨린다(「사랑하는 일」). 소설 속 인물들은 결혼에는 관심이 없지만 새로운 반려 만들기에 적극적이라는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일」에서 ‘나’는 사랑하되 섹스는 하지 않으려는 동성 연인 영지와 합의 하에 ‘오픈 릴레이션십’을 갖기로 한다. ‘나’는 섹스가 없다면 영지가 동성 친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영지는 섹스를 중시하는 ‘나’를 이해한다며 다른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허락한다. 영지는 이 ‘새로운 방식’의 사랑에 만족하지만 ‘나’는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랑하는 일」은 섹스를 관계의 증명이자 사랑의 동력으로 삼는, 이성애와 동성애 모두에 내재한 성애 중심적 사고를 비판한다. 이 작품에서 서술자 ‘나’는 남동생 영호와 달리 무보수 노동을 끊임없이 요구하던 아버지와 대면함으로써 정상 가족의 신화를 희화화한다.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중매로 만난 그들은 두 번 만나 결혼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 동생 영호는 임신중절 대신 선택한 결혼으로 가정을 꾸렸다. 집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영호는 육아와 집안일은 하지 않는다. 서술자의 눈에 비친 혈연가족은 이해와 사랑이 아니라 관습과 실수로 만들어진 부조리극과 같다.
“직계존속에게서 다른 건 아무 것도 물려받고 싶지 않”(p.241)으면서 아버지를 통해 할머니에게 물려받아야 할 집만 받겠다는 ‘나’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사이가 좋지 않은 남동생과 다를 바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을 한 ‘나’는 “나 중심의 서사가 있”(p.249)고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부정하면서 전개된다”(p.250)고 말한다. 자기 존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나’가 전통적 가족의 젠더 질서에 분노하면서도 상속을 챙기는 것은 ‘집’을 가부장적 길들임의 장소가 아니라 레즈비언인 ‘나 중심의 서사’로 탈환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아버지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통제했던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 중심의 서사”는 그렇게 재편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일」이 보여준 ‘정상 가족’과 이성애 규범에 대한 비판은 페미니즘소설에서 새로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희생자 딸의 서사는 미투 운동과 한국 문학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서사의 관습이 되었다고 할 만큼 익숙한 주제에 속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은 이성애 정상성에 반대하며 퀴어적 관계를 옹호한다. 캐나다로 도피하지 않고 함께 어디든 가겠다고 속삭이는 ‘나’와 영지의 모습은 ‘생활동반자법’ 논의가 시작된 2010년대 이후 가족 개념의 변천, 다시 말해 가족이 혈연에서 개인들의 연대와 우정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가족이 다양한 형태로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섹스 없는 동맹의 형식으로 ‘사랑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일」의 서술자는 가족의 사랑이 계속되기 어려운 반면 ‘나’와 영지는 “우리가 합의한 일종의 공동선”(p.253)이 있어 계속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통 가족과 성애 중심적 사고를 거부하는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관념에 어떤 탈주선을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을지, 그것이 어떻게 가족 공동체를 넘어선 ‘공동선’이 되는지는 불분명하다.김지연의 소설은 생활동반자들이 만드는 다른 삶이나 비전보다는 젠더 규범이 강제하는 불합리한 현실에 더 집중한다. 김지연의 소설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여전히 집단과 사회적 약자 사이의 갈등이 첨예하다. 그래서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사회적 관행들에 민감하다. 「공원에서」를 보면 여성이지만 남자 같은 외양을 가진 ‘나’는 공원에서 모르는 남자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한다. 폭행 사건 이후 그녀는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 하나에도 신경이 쓰인다. ‘여자’와 ‘개 패듯 팼다’는 단어와 속담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주인공의 지적 탐구는 성차별이 종(種)차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만큼 영민하지만 유부남과 만나는 자신의 사랑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문제는 개인으로서 그녀가 자기 마음의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인데 세상이 벌써 상식과 도덕의 잣대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것을 추문으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남성 중심적 사회의 폭력을 설명하는 일이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라는 것을 김지연 소설의 서술자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p.275)다. 이 소설은 누구도 피해자인 여성의 경험을 진심으로 듣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약자에게 모멸감을 주는 사회에서 그녀는 말할 수 없다. 엄마도 유부남 기영도 그녀의 말은 경청하지 않은 채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언어에 내재한 성(종)차별적 사고처럼 세계가 그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의혹은 사실이 된다. 「공원에서」의 주인공이 비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같은 언어라고 해도 누군가의 말은 공유되지 못하고 묵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피해자가 되고 나서야 언어의 위계를 실감한다. 기영과 자신은 “애초에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p.277)던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사전에는 인간의 온갖 차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애초에 그것은 “인간 행위의 다수 항으로 만든 것이”(p.271)어서 다수 항이 아닌 여성이나 동물은 자신을 표현할 언어가 부재하다. 「공원에서」의 ‘나’가 여성과 개를 혐오하는 언어의 관습을 지적한 것은 남성을 기준으로 표준화된 휴머니즘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5)가 출간되자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테일러가 그것을 비꼬기 위해 『짐승의 권리 옹호』를 발표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여성의 권리라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책은 여성이 권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면 동물의 권리까지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냐고 주장했다.4) 소설에서 ‘나’는 공공 장소에서 자신을 폭행한 남성을 찾듯 공용의 언어가 여성과 동물을 혐오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낸다.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감지하기 어려운 폭력이지만 김지연의 소설에서 무형의 폭력은 한 사람의 존엄성을 소리 없이 파괴한다.
「공원에서」는 ‘나’의 적대감과 복수심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나’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개의 활력과 온기를 느끼면서”(p.281) 모욕을 극복할 용기를 얻는다. 이 소설에서 여성과 동물은 열등한 집단에서 반려종으로 거듭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가족이나 연인이 주지 못한 것을 개는 ‘나’에게 준다. “개 같은 것들”은 종차별적 언어 관습을 패러디하고 반격하는 말이 된다. 익숙한 말이 “원래 통용되는 의미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다른 의미로 조합”(p.282)함으로써 「공원에서」는 남성 폭력의 서사를 새로운 반려 관계로 되받아 쓰고 있다. 김지연의 소설은 이성애 정상성만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의 빈틈에서 뜻밖의 연결을 만든다.
3.
『태초의 냄새』(2023)는 코로나가 시작해서 종식될 까지의 시간을 다룬다. 그것은 주인공 K에게 냄새를 제대로 맡지 못하는 후각 이상이 생기고 그것이 더 심해지기만 하는 시간이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광범위하게 연결된 감각이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K는 마시던 와인에서 죽어가는 곤충 냄새를 맡는다. 냄새는 포도나무에서 시작한다. 나무에는 벌레가 붙어 있을 테고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벌레가 식물을 먹는 벌레라면 와인에서 나는 냄새는 식물의 냄새일 것이라고 K는 추측한다. K는 코로나 부작용 때문에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을 생각할 수 있었다. K가 그동안 자신이 죽인 곤충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상황은 앞으로 그가 냄새로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각자의 고유한 기록이다. K는 외할머니가 들려준 “날 때부터 누구나 냄새를 갖지만 살다 보면 점점 더 자신에게 꼭 맞는 냄새를 갖게 된다”(p.19)는 말을 떠올린다. 그러나 K의 증상은 이 말과 점점 어긋난다. 『태초의 냄새』에서 냄새가 개인의 감각을 넘어서 자연과 다른 생명과 연결되는 감각이라는 점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속성과 유사하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은 느슨하면서도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문자 그대로 서로의 숨을 공유하고 있었다”(p.25)는 것이 드러났고 K의 후각 이상은 이 연결과 공유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코로나 초기 K는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욕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하”(p.49)고 싶어하지 않는 보통의 선량함을 지닌 시민이다. 그 때 운이 좋아서 바이러스를 피했다고 생각한 K는 외할머니도 과거 연인이었던 S도 운이 좋았다면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K가 사람들의 생사를 운과 불운에 달렸다고 보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과 불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S의 죽음은 불운이지만 K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P에게는 좋은 운이었다. 운과 불운도 삶의 불가사의함을 일시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노력으로 어찌해볼 수 있는 문제라는 듯, K는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P를 끌어안고서 세상에 있는 것 중 무취인 것을 떠올려보았다. 기화되지 않는 고체 상태의 어떤 것들은 냄새가 아예 없지 않나?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된 지금 K는 모든 사물에 냄새가 있었다고 느꼈다. K는 냄새를 맡으려 좀 더 노력하는 척을 하다가 웃으며 다시 P를 떼어냈다. 이번에는 P도 순순히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해변에 가득한 모래에도, 무색 무취 무미라고 느꼈던 물에도 냄새는 있었다. K는 다시 텐트로 돌아와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면서 그걸 새삼 깨달았다. 물의 향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태초의 냄새』, pp.88~89)
코로나는 우리에게 세계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는가를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K는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자 비로소 모든 사물에 냄새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냄새는 한 사람의 고유한 체취와 기억, 사물의 특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정보다. 증상이 나타나기 전 K에게 냄새는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 때 K는 물에도 냄새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P의 냄새는 좋아했지만 물은 무색, 무취, 무미하다고 느꼈다. K의 감각은 인간 이외의 사물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데 둔감했다. K는 “이제 냄새에 관해서라면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냄새에 무감각한 K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감각을 알아차린다.
이 소설에서 K의 신체는 기후 위기 시대의 증상을 앓고 있다. 병원에서 K의 후각 이상을 일종의 시스템 에러에 비유하고 기능을 되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한 것은 코로나 사태가 인간이 지구 시스템에 일으킨 에러였다고 바꿔 읽어도 무방하다. 코로나 이후 수많은 후유증들이 그러했듯 K의 증상은 의학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이 소설에는 이처럼 낯설고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이 삽입되어 있다. K와 P가 여행지에서 들은 모감지나무의 저주도 그 중 하나다. 그들은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에 재미 삼아 들어갔다가 그 곳에 있던 고등학생에게 아파트의 불운을 전해 듣는다. 수십 년 된 모감지나무를 함부로 베어버린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잇달아 사고가 났고 관계자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가 저주를 내렸다고 말한다. 약속 장소에서 P를 기다리다가 문득 P가 있을 것 같다고 느껴지면 정말 P가 그곳에 있었다는 K의 일화도 합리적인 사실관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K의 설명대로 “뇌에 입력되지는 않았지만 뭔가를 동물적으로 느낀”(p.105) 이런 일들은 인간의 이성 바깥의 경험이 이미 우리의 일상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소설에서 코로나는 낯설고 불가사의한 이야기이다. 『태초의 냄새』는 환경적 불가사의함으로 규정되는 기후 위기 시대에 어울리는 소설의 접근법이다. 불가사의함은 근대 소설에서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결코 있을 법 하지 않은 것의 중요성과 마주하는 상황에 내몰린 적이 없다. 그러나 기후 변화는 비인간의 힘이 인간 사고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암시하고 실제로 증명해 준다.5) 알려진 대로 코로나는 기후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K가 겪는 감각과 대상 사이의 교란과 침해가 “유령의 냄새”라는 점은 생태적 위기로서 코로나와 일치한다. 코로나는 바이러스는 K가 사는 “시의 경계를 뚫”(p.24)고 “서로의 숨을 공유”(p.25)하는 사람들을 감염시킨다. 코로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난폭한 침해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환경 파괴, 지구 온난화로 서식지를 잃은 동물들이 인간과 뒤섞이고 접촉한 결과가 코로나이기 때문이다. K는 바이러스의 전파, 죽어가는 곤충, 일상을 뒤덮은 유령의 냄새처럼 보이지 않게 위력을 발휘하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모두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K가 맡는 “유령의 냄새”는 죽음의 잔해이다. K는 그것을 “시체도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썩어 문드러진 이가 결국 유령이 되어”(p.230) 머물다 간 자리의 냄새 같다고 묘사한다. 처음에 와인에서 죽어가는 곤충 냄새를 맡았던 K가 나중에 타르트에서 구린내를 맡는 것은 시신과 그 부패 과정을 연상시킨다. 이 소설에서 코로나는 죽음의 역습이다. 죽음은 문명 사회가 위생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격리시켜온 것이다. 시체를 악취 없이 신속하고 완벽하게 기술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죽음을 사회 생활의 배후로 밀어버린 것이다.6) 그 결과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졌고 사람들이 서로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되었다. 공동체적 삶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어떤 사람의 생의 의미가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달려 있다”7)는 점에서 상호의존적이다. K의 삶 곳곳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던 냄새는 타인과 사물, 자연과 연관되어 있다. K가 좋아하는 P의 냄새를 맡을 수 없자 울고 싶어졌던 것은 냄새가 타인의 의미와 기억을 만드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K는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을 악취가 났던 곳이라는 기억으로 뒤덮어버리고 마는”(p.100) 상태에 빠진다.이 악취는 실체가 없지만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공원에서」에도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악취를 맡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과 기영에게서 나는 악취를 피해 공원으로 간다. “유령의 냄새”도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하지만 K에게는 도피처가 없다. 마스크 해제가 발표된 이후 “K의 코는 완전히 고장나버렸다”(p.113).
『태초의 냄새』는 K의 증상을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둠으로써 코로나 이후 세계의 불확실성을 강조한다. K는 도처에서 유령 냄새를 맡는다. K가 P에게서 유령의 냄새를 맡지만 자기 자신에게서는 악취를 맡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타자를 경계하고 혐오하기 쉽다. 유령의 냄새는 떨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문명사회가 만든 독립적 인간이 허상에 불과하며 타자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제한적인가를 알려준다. 『태초의 냄새』는 지금 여기에서 뭔가를 해결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코로나라는 이야기의 핵심은 안다고 믿었던 세계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와인과 곤충 냄새처럼 무관해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연결되어 있고 어느 날 유령의 냄새가 안온한 일상을 위협한다. 사랑하는 P가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싫은 냄새를 풍기는 P”가 되었을지라도 그를 끌어안고 진짜 냄새를 확인하려는 K의 모습은 이 불확실한 세계를 “자신의 몫”(p.113)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태초의 냄새』는 무자비한 변화 속에서도 타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인간을 긍정하는 이야기이다.
김지연의 소설에서 ‘사랑하는 일’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지연의 소설에서 반려 관계는 혈연가족과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친족Kin으로서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인간의 삶은 반려를 떠나서 살 수 없으며 ‘개’와 ‘유령’과 같은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소설에는 깔려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마주하는 타자성의 의미가 언제나 매끄럽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일’에는 종종 사랑할 수 없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기성의 질서와 규범에 적대적이다. 인물들은 이상적인 삶을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미래의 가능성과 실패 사이에서 ‘자신의 몫’으로 생존하기에도 어려운 처지에 있다. 사회나 가족, 관습이 한 사람의 존재를 이해하고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김지연 소설의 인물들은 희망을 찾는다기보다 고통을 견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그럼에도 김지연의 소설에서 가장 새로운 관계들은 모욕과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빈곤과 폭력이 일상이 되고 공멸로 치닫는 기후 위기 시대에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김지연의 소설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보다 지금 여기에 무감각해지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의 소설은 지금 여기에 응답하는 이야기이다. 고통 뒤에는 뜻밖의 연결이 있다는 응답. 사랑하는 일은 아직 가능하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해변에서 주운 쓸모없는 것들」 「굴 드라이브」 「그런 나약한 말들」 「마음에 없는 소리」 「사랑하는 일」 「공원에서」(『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 「반려빚」(『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태초의 냄새』(현대문학, 2023).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전청림, 「망한 삶의 천재」, 김멜라 외 지음,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p.241.
- 3)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p.41.
- 4) 마고 드멜로, 『동물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통찰하는 인간동물학 집대성』, 천명선·조중헌 옮김, 공존, 2018, pp.523~24.
- 5) 아미타브 고시, 『대혼란의 시대: 기후 위기는 문화의 위기이자 상상력의 위기다』,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1, p.48.
- 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죽어가는 자의 고독』, 김수정 옮김, 문학동네, 2012, p.92.
- 7) 같은 책, pp.4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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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정은기 시인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걷는사람, 2024)에는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본래 얼굴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개인성의 표지이자 소통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인의 ‘얼굴’은 주체의 온전한 존립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눈코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옮겨 다녔다/바람에 지워지는 모래 언덕처럼”(「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정체불명의 것은 추상적인 내 얼굴뿐이다”(「구체적인 의자」),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현기증」)와 같은 대목들로부터 포착되는 ‘얼굴’의 가변성과 추상성은 완결되지 못한 ‘나’의 취약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철이 벗겨진 대문처럼 내 얼굴에는 푸른 녹이 슬었다 열렸다 닫히며 아무나 드나들었다”(「러시아 소설 같은 밤」)라는 구절로 암시되는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그지 못한 시인의 ‘얼굴’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외부의 침범을 수시로 허용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틈입과 함께 균열되는 시인의 ‘얼굴’은 “복수의 나”(「기분 탓」)가 탄생하는 장소가 된다. 건조한 우울을 머금은 정은기의 문장들은 ‘복수의 얼굴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 세계를 배회하는 자의 궤적과도 같다. 그렇다면 정은기의 화자가 지닌 ‘얼굴’이 결핍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년 시절의 고독은 ‘나’가 근원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관계의 불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나’의 내면은 불신과 상처로 가득 채워진다. “분장한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금이 간다 얼굴이 깨지면 진짜가 나올까”(「그런 사이」)라는 화자의 물음에는 위장된 얼굴들이 연출하는 관계의 공허함,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고독과 허무가 배어있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은 더욱 내밀한 형태의 관계맺음인 사랑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낫」이라는 작품에는 떠나간 ‘너’와 남겨진 ‘나’가 등장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부재하는 ‘너’는 ‘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나의 얼굴’이 된다. ‘나’의 존재성을 대별하는 기호인 ‘얼굴’은 이별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너’의 부재를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되면서 ‘나=부재’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만일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관계의 불투명성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조우와 섞임이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우리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관계를 부단히 지속하려고 하는가. 장시 「사유지」에서 통증을 수반한 타자와의 섞임은 ‘얼굴’의 균열을 넘어 온몸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살갗을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대는 ‘나’는 “이제 시는 그만 쓰자”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면서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에겐 점점 팽창하는 그림자와 갈피없이 흩어지는 고백들만이 남는다. 시인은 ‘얼굴’을 통해 관계를 쌓고, 그 허물어짐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나’의 존립 불가능성은 시인의 발화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활의 어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얼룩, 얼굴」이라는 시에서,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을 구석구석 조”이는 ‘나’의 행위는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지탱해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번듯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내 “어디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음을 덤덤하면서도 서글픈 어조로 고백한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린다”라는 화자의 언술을 통해 전달되듯이, 가족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얼굴’에 조금씩 전해져오는 통각으로 뚜렷이 각인된다. 이러한 자조는 “지금까지 내가 쓴 계약서는 모두 무효가 되었고”(「누구나 다 하는 생각」)라는 다른 시의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집을 얻거나 직장에 다닐 때,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시를 잡지에 실을 때조차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사회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상징하는 계약서는 ‘문서화된 얼굴’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평생 써온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다. “요즘은 출신이라는 말도 잘 안 쓰는데 저에게는 죄책감이 큰 말이거든요 시인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 말입니다”(「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라는 진솔한 고백을 읽으며,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씁쓸한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시인이라는 직함은 돈이 최우선의 가치로 변질된 세상에서 문학의 순정을 지키려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숭고한 ‘관사(冠詞)’일까, 혹은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아들이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맞닥뜨린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화자는 ‘이력서’를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집 밖에서 방황하며(「변명」),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군요”라는 ‘미국 유학파 출신’ 면접관의 차가운 물음에 위축되고 만다(「인터뷰」).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기분 탓」)지만,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앞에서조차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집 전반에 감도는 소외의 윤곽은 “숨을 쉴 때마다 말라 가는 얼굴”과 “나를 뱉어내는 재채기”(「나의 폐」)의 건조함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얼굴’의 균열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좌절을 겪어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시인의 좌절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나)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동자가 되어 세속적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이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노동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교환가치로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노역, 즉 현실이 무용(無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규정한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유용성만을 뒤쫓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예컨대 정은기의 시에서 목적지향적인 삶의 형식은 ‘나’의 존재성을 뒤흔드는 폭력으로 간주된다. “나는 목적지와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삶을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시간이라 설명하는 것은 운전수들의 말이다/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자의 변명이거나/이를 꽉 물고 그 누군가의 속을 휘저어 놓는 자들의 습관이다”(「비슷한 말」)라는 대목에서처럼, 정은기의 화자는 맹목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세계를 장악한 ‘운전수들’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이 마치 자명한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양 설파한다. ‘운전수들’이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기심은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휘젓는 일마저 합리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은기의 시에 나타나는 ‘얼굴’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단순히 ‘나’의 왜소한 자아를 표상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균열된 ‘얼굴’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과 이기심으로 규정하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기꺼이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의 초상이다. ‘얼굴’은 현실의 감관(感官)이기에, 정은기의 시는 훼손된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어두운 상흔으로 응결되어 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타자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비록 “유리보다 쉽게 부서지는 주먹과 머리로,”(「인터뷰」) 견고한 현실의 벽에 몸을 부딪는 ‘불가능한 투쟁’일지라도. “들켜버리기를 기대하며 꼭꼭 숨었다 발각되기만을 바라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꼭꼭, 숨어라」)라는 표현에는 열림과 닫힘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그의 문장에 고인 따뜻함과 섬세함이, 건조하게 닫힌 우리의 ‘얼굴’을 열어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추천 작품: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사물의 방향」, 「건너편」
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체포조를 가동하여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등을 구금하려 했던 정황을 살피면, 계엄령 선포 이전의 행위에도 해당 포고령을 소급하여 적용하려던 악의를 확인할 수 있다. 5·18 민주화 운동과 제주 4·3을 다룬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에 한국의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한 출판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통탄스럽다. 한강 작가가 박근혜 정부 때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그의 책 『채식주의자』가 유해 도서로 지정되어 폐기 처리되었던 것과 아주 다르지 않다.1) 출판 검열은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만 행해지는 특수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우리 곁에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 현대 필화사 1』의 권두에서 임헌영 작가는 ‘필화(筆禍)’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필화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상이나 의사를 자유롭게 나타내는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개인이나 집단에 국가가 가하는 제재와 압력, 형벌 등에 대한 총칭”(4쪽)이다. 그는, 필화는 권력을 지닌 세력이 행사하는 명백한 폭력이므로 허위나 날조를 제재하는 벌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문학뿐 아니라 영화, 공연, 정치, 언론 등에서도 이와 같은 탄압은 일어나기 때문에 필화는 통념과는 다르게 문학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임헌영은 문학을 비롯하여 영화나 공연, 정치나 언론 전반에서 일어났던 필화사건을 두루 다루고 있다. 더불어 더욱 다양한 소통 매체들이 생겨난 현대에서의 필화는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수단으로 인간이 행사하는 모든 의사소통에 대한 직간접적인 제재 일체”(5쪽)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화의 핵심은 무력을 사용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탄압했느냐의 문제다. 서문에서 그는, 반나치적이라고 판정받은 인사들의 저작물을 태웠던 1933년의 분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유태인 미술가 미하 울만이 설치한 작품 ‘도서관’의 안내판 문구를 인용한다. “그것은 다만 서곡이었다. 책을 태운 자들은 결국에는 사람도 태울 것이다.”라는 하이네의 비극 『알만조르』에 나오는 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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