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2024년 여름호(제46호)
내가 없는 곳에 나는 있다 ―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동방정교회의 사상에서 엿볼 수 있는 부정신학(不定神學)은 신에 대한 앎은 적극적인 규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신은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존재이기에, 인간이 내리는 어떠한 규정도 신을 올바르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부정신학이 무신론이나 반신론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점이다. 부정신학은 신은 ‘~이 아니다’라고 부정해 나감으로써 오히려 신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긍정한다. 물론 부정당하는 순간에도 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계시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부정신학은 신을 인식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는 불가지론과도 작별한다. 부정신학에서 신은 그곳에 임하지 않는다고 말해짐으로써 그곳이 아닌 곳에 임하는 존재다.
한재범의 첫 번째 시집을 앞에 두고 부정신학을 떠올린 이유는 시인이 ‘나’를 탐구하는 방식이 부정신학의 방법론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 화자, 자아 “세 항의 결합을 의심”하며 특히 “화자와 자아가 정교하게 거리를 두게”(이수명, 추천사) 하는 한재범의 시작법(詩作法)은 말하는 ‘나’와 말 속의 ‘나’, 둘 중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나’가 없음을 드러냄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각각 행위와 사건과 서사를 촉발하는 ‘나’의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비워내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나’의 존재를 보여준다.
예컨대 시집의 첫 번째 순서로 수록된 「▭」에서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있다’는 확인으로 끝나는 “종이 상자”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면 재미있는 시가 된다.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 어제는 종이 상자가 필요했는데 종이 상자는 이만원 이상 무료 배송이었다 어제 종이 상자를 주문했는데 종이 상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손 앞에 종이 상자가 있다”. 네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의 전문이다. 이 시의 묘미는 ‘아직’ 오지 않은 종이 상자가 ‘이미’ 손 앞에 놓여 있는 아이러니와 그 배후를 추측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겠지만, 시의 앞뒤를 견고하게 막고 있는 ‘있다’라는 동사에 주목하는 독해도 가능하다. 한재범의 시에서 ‘나’는 마치 종이 상자처럼 속이 텅 빈 기표일지언정, 주체의 필요나 의지와 무관하게 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앞서 말한 아이러니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 ‘나’가 여기 없다고 말할 때 ‘나’는 벌써 거기 있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이 자연스럽다 자연을 입은 듯 익숙하다 나는 풍경처럼 흔들린다 짝다리 짚으며 어서오세요 한다 풍경화처럼 보기 편한 그림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옷이다 이 옷은 겨울옷도 되고 여름옷도 된다 계절은 순환되고 유니폼은 반복된다 매일 입는 이것은 이제 나 같다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이 내게 어울린다 나는 겨울에도 있고 여름에도 있다 유니폼 안에서 자유롭다 울타리 안에서 양을 모는 목양견 같은 그림이다
목양견은 그림을 벗어나지 않고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끝내 목양견을 벗어난다 나는 벗어나지 않는다 남들 앞에서 옷을 벗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런 게 될 수 없고
내가 아닌 몸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저런 몸을 갖고 싶다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 유니폼은 일정하고 내게 자연스럽기에
유니폼을 입고 집까지 간 적도 있다 사장님은 내게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한다 저는 정말 없어요 사장님 저는 이미 충분해요 바깥의 유니폼이 말한다
-「유니폼」 전문
인용한 시에서 ‘나’는 위축되어 있다. “풍경처럼 흔들”리는 ‘나’는 “매일 입는” 유니폼과 동일한 선상에 놓이는데, “자연을 입은 듯 익숙”한 유니폼과 ‘나’의 관계는 자연스럽다 못해 서로 구분조차 되지 않을 지경이다. 심지어 주체는 “유니폼 바깥의 나는 나 같지 않다”고 말하며, ‘나’가 유니폼을 입는 게 아니라 유니폼이 ‘나’를 입는 것처럼, 마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축소된 것처럼 보이는 ‘나’의 위상은 후반부에 이르러 끝끝내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그려진다. 그림이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도 자신의 존재를 손쉽게 벗어날 수 있는 “목양견”과 달리 ‘나’는 “나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나는 그런 게 될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유니폼을 입는다 유니폼 안에서 나는 유일하다”라는 구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나’의 왜소함이라기보다는 ‘나’의 유일함이다. ‘나’라는 단독자는 끝끝내 존재한다.
이렇듯 한재범의 시에서 ‘나’는 “정말 없”는 동시에 “이미 충분”한 이중적인 위상을 갖는다. ‘나’는 왜소하고, 무력하고, 텅 비어 있는 존재인 동시에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군림한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나’는 거기 있다. “껍질을 까지 않아도 바나나는 거기 있다”(「웃긴 게 뭔지 아세요」)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한재범은 의미의 낙차가 큰 문장들을 의도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예컨대 “삼다수는 맛이 있다고 한다 나는 물맛도 모르는데 지금도 살아 있다 말라 죽지 않고 지금 카페에 앉아 있다”(「삼다수」)는 구절은 긍정과 부정을 반복함으로써(있다–모른다–있다–않다–있다)1), ‘나’의 취향 ‘없음’과 ‘나’의 살아 ‘있음’을 대조하고, 결국은 후자의 사실을 돋보이게 만든다. ‘나’를 지우는 언술이 도리어 ‘나’를 강조하는 언술로 귀결되는 한재범의 시에서 ‘나’는 “쌓는 소리”와 “무너뜨리는 소리”를 “구별할 수 없”는 이상한 건축물처럼 느껴진다.
반복건대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가 ‘나’를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쩔 땐 저를 뜯어버리고 싶어요 새 페이지가 필요해요”라고 말하는 「연습생」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같은 몸”으로 “어쩔 수 없”는 “맥박”을 공유한다. ‘그’는 ‘그’에게 “둘도 없는 연습장”이다. 어떠한 그림과 지움도 ‘그’ 안에서 반복될 뿐이다. ‘그’는 ‘그’와 “함께 숨을 쉬고 뱉고 살아 있다”. 「유원지」에서도 마찬가지다.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나’의 몸은 “계속해서 놀이기구를 벗어나려고” 하지만 끝내 몸은 놀이기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영혼과 몸의 관계도 그렇다. “몸에 잘 맞지 않아 // 마음에 들지 않는 몸처럼” 영혼은 “자꾸만 내 몸을 벗어나려고”하지만 결국 영혼은 몸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로부터의 탈주는 유원지의 놀이기구처럼 “재미를 발생시키기 적합한 놀이”지만 그 놀이의 결과는 언제나 주체가 “내가 나라는 사실을”,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무인 매장에 갔다 사장 대신 키오스크가 있다 누가 보면 내가 사장이다 누가 들어오면
나를 해명해야 할 거 같아
무인 매장에 서 있다 이 길목에는 무인 매장이 많다 무인 매장에는 없는 것 빼고 다 있고
사장님이 보고 계신다 카메라 너머로 이러면 공간 낭비잖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무인 매장에 서 있다 누가 나를 다녀갔을까 창밖으로 무인 매장을 본다 무덤처럼
눈 감지 않는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거기 안 계세요? 소리가 들려 나갔는데
무인 매장에 서 있다 사장님이 퇴직금으로 차린 매장이다 우리는 한날한시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했다
-「없는 게 없는」 전문
한재범의 시가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은 ‘공간성’이다. 앞서 언급했듯 의도적으로 축소된 주체들은 때때로 낯선 공간에 던져지거나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감각하는데(승강기, 유원지, 동물원, 휴양지, 박물관, 화장실, 폐공장……), 그곳에서조차 주체는 ‘나’의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예컨대 「승강기」에서 낯섦(“처음 들어가본 건물”)과 익숙함(“매일 보던 얼굴”)을 동시에 느끼는 주체는 “승강기 조명 아래서 마주치는 나는 새것 같다”고 말하지만, “버튼을 누르면 지상과 다른 곳에 도착하도록 설계된” 승강기도 ‘나’를 ‘나’가 없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한다. ‘나’에게 ‘나’가 없는 곳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ou, 없다 + topos, 장소)’이고,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게 하는 버튼은 승강기에 없다”. 모든 공간은 ‘나’를 경유해 특정한 장소로 의미화되어 버린다.
인용한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무인 매장’은 ‘아무도 없는’ 장소라는 점에서 한재범의 시적 상상력을 촉발하는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무인 매장에서도 주체는 “나를 해명해야 할 거 같”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 안에서 ‘나’의 존재는 두 개의 시선으로 분화되어 그려진다. 첫 번째는 무인 매장에 서 있는 ‘나’의 시선이고, 두 번째는 창밖으로 무인 매장을 보는 ‘나’의 시선이다. 이러한 시선의 분화는 ‘나’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 ‘나’의 존재감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시선에 대한 ‘나’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이는 「박물과 나」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선 시와 비슷하게 자연사박물관 앞에 서 있는 ‘나’와 자연사박물관 밖에 서 있는 ‘나’의 시선을 모두 보여주는 시는, ‘있는’ 것들을 서술하다가 돌연 “자연사박물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며 낙차를 발생시킨다. 물론 이때 강조되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나’의 존재, 없음을 보고 있는 ‘나’의 존재다. “무인카페에 오면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나’는,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해놓고도 “말이 조금 많아지”(「무인 카페」)는 것으로 끝난다.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해 “창밖을 보면 창 안의 내가 보”일 뿐이다. 분화된 시선의 소실점은 결국 ‘나’라는 주체다.
소변기가 물을 내린다 소변기 앞에 아무도 없다 나는 가만히 본다 적막이 침묵에 오줌을 누는 장면
넘쳐 쏟아지지 않을 만큼 물이 쏟아지고 이곳에 나는 있다가도 없다 소변기 앞은 매번 그렇다
사람이 있거나 없다 더럽히는 물과 씻기는 물이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타일과 타일 사이 나는 이곳에 없지만
나를 마주 보지 않아도 내가 있듯이 물이 넘치지 않아도 소변기가 여기 있다 넘치지 않도록 잘 조절해서 그러나
이곳은 화장실이다 화장실은 거울이 많고 늘 젖어 있다 소변기의 잘못은 아니다 나는 화장실 밖에 있고
길을 떠도는 개를 보기도 했다 개에게 길은 화장실이지만 소변기는 없다 개에게 화장실은 길밖에 없고
소변기는 없지만 가끔 물이 쏟아진다 물은 넘치지 않는다 개가 지나칠 때 소변기의 물이 내려가지 않듯이
물이 쏟아질 때 개는 지나치지 않는다 집과 집 사이 쏟아지는 물을 나는 가만히 맞는다 떠도는 개처럼 더럽혀지고
깨끗해진다 길은 화장실처럼 젖는다 그러나 화장실에 개가 있을 리 없고 나는 사람이 아닌 적 없다
- 「사거리」 전문
지금까지 살펴봤듯 한재범의 시는 ‘나’라는 자연스러움, ‘나’라는 안정과 반복을 거부하면서도, 결국 ‘나’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주체의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시에 있어 완고한 벽과 같은 ‘나’는 “두드릴수록 벽은 벽이 되지 다른 게 되지 않는다”(「기호와 기후」)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재범의 시에서 ‘나’로부터의 탈주는 “나를 떠나는 일”인 동시에 “내게로 돌아오는 일”(「불성실」)이다. “내가 있어도 없어도 무방할 이미지”(「아직 여기」)는 결국 ‘나’에 의해 완성된다. 인용한 시에서 “아무도 없”는 소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쏟아지”는 소변기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나는 있다가도 없다”, “나는 이곳에 없지만 // 나를 마주 보지 않아도 내가 있듯이” 등의 사유, 즉 ‘나’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 텅 빈 공간과 텅 빈 ‘나’는 결국 ‘나’의 시선과 사유로 채워진다. 물론 그러한 시도가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재범의 시적 주체가 계속해서 ‘나’로부터의 탈주를 시도하는 것은 “없어져도 모를 만큼” 많은 ‘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무언가 놓고 온 기분”(「놓고 온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계속해서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김정배를 부정해야만 / 김정배는 실재할 수 있다”(「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덧붙여 적어 두고 싶은 것은 한재범의 시가 몇 가지 언어적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 ‘나’의 불가피함이라는 주제를 너무 많이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요컨대 한재범의 첫 번째 시집에 ‘왜Why’라는 질문에 답할 만한 시는 많지 않다. ‘나’의 불가피함은 왜 중요한가. 불가피한 ‘나’는 어떤 세계를, 어떻게 마주하는가. 혹자는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오래된 시독의 답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와 대결하지 않고 ‘나’에 대해 골몰하는 ‘요즘 시’의 경향을 세대론적, 시대론적 특성으로 비평하는 순간, 그것은 젊은 시인과 젊은 시에 대한 의도치 않은 한계 짓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이제는 그만둬야겠지 / 나를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의 말’) 시인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추천시 : 「▭」, 「사거리」, 「무림의 은둔 고수 나 김정배」
- 1)‘하다’와 ‘않다’, ‘있음’과 ‘없음’을 맞대응시키는 방식은 한재범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최다영 역시 “‘존재’와 ‘존재의 부재’가 맞부딪치는 구도가 자주 그려지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그러한 특징을 언급한다(최다영, 작품 해설, 「일인극 튜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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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기 시인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걷는사람, 2024)에는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본래 얼굴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개인성의 표지이자 소통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인의 ‘얼굴’은 주체의 온전한 존립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눈코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옮겨 다녔다/바람에 지워지는 모래 언덕처럼”(「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정체불명의 것은 추상적인 내 얼굴뿐이다”(「구체적인 의자」),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현기증」)와 같은 대목들로부터 포착되는 ‘얼굴’의 가변성과 추상성은 완결되지 못한 ‘나’의 취약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철이 벗겨진 대문처럼 내 얼굴에는 푸른 녹이 슬었다 열렸다 닫히며 아무나 드나들었다”(「러시아 소설 같은 밤」)라는 구절로 암시되는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그지 못한 시인의 ‘얼굴’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외부의 침범을 수시로 허용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틈입과 함께 균열되는 시인의 ‘얼굴’은 “복수의 나”(「기분 탓」)가 탄생하는 장소가 된다. 건조한 우울을 머금은 정은기의 문장들은 ‘복수의 얼굴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 세계를 배회하는 자의 궤적과도 같다. 그렇다면 정은기의 화자가 지닌 ‘얼굴’이 결핍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년 시절의 고독은 ‘나’가 근원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관계의 불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나’의 내면은 불신과 상처로 가득 채워진다. “분장한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금이 간다 얼굴이 깨지면 진짜가 나올까”(「그런 사이」)라는 화자의 물음에는 위장된 얼굴들이 연출하는 관계의 공허함,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고독과 허무가 배어있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은 더욱 내밀한 형태의 관계맺음인 사랑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낫」이라는 작품에는 떠나간 ‘너’와 남겨진 ‘나’가 등장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부재하는 ‘너’는 ‘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나의 얼굴’이 된다. ‘나’의 존재성을 대별하는 기호인 ‘얼굴’은 이별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너’의 부재를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되면서 ‘나=부재’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만일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관계의 불투명성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조우와 섞임이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우리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관계를 부단히 지속하려고 하는가. 장시 「사유지」에서 통증을 수반한 타자와의 섞임은 ‘얼굴’의 균열을 넘어 온몸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살갗을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대는 ‘나’는 “이제 시는 그만 쓰자”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면서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에겐 점점 팽창하는 그림자와 갈피없이 흩어지는 고백들만이 남는다. 시인은 ‘얼굴’을 통해 관계를 쌓고, 그 허물어짐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나’의 존립 불가능성은 시인의 발화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활의 어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얼룩, 얼굴」이라는 시에서,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을 구석구석 조”이는 ‘나’의 행위는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지탱해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번듯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내 “어디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음을 덤덤하면서도 서글픈 어조로 고백한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린다”라는 화자의 언술을 통해 전달되듯이, 가족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얼굴’에 조금씩 전해져오는 통각으로 뚜렷이 각인된다. 이러한 자조는 “지금까지 내가 쓴 계약서는 모두 무효가 되었고”(「누구나 다 하는 생각」)라는 다른 시의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집을 얻거나 직장에 다닐 때,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시를 잡지에 실을 때조차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사회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상징하는 계약서는 ‘문서화된 얼굴’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평생 써온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다. “요즘은 출신이라는 말도 잘 안 쓰는데 저에게는 죄책감이 큰 말이거든요 시인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 말입니다”(「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라는 진솔한 고백을 읽으며,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씁쓸한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시인이라는 직함은 돈이 최우선의 가치로 변질된 세상에서 문학의 순정을 지키려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숭고한 ‘관사(冠詞)’일까, 혹은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아들이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맞닥뜨린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화자는 ‘이력서’를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집 밖에서 방황하며(「변명」),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군요”라는 ‘미국 유학파 출신’ 면접관의 차가운 물음에 위축되고 만다(「인터뷰」).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기분 탓」)지만,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앞에서조차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집 전반에 감도는 소외의 윤곽은 “숨을 쉴 때마다 말라 가는 얼굴”과 “나를 뱉어내는 재채기”(「나의 폐」)의 건조함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얼굴’의 균열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좌절을 겪어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시인의 좌절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나)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동자가 되어 세속적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이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노동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교환가치로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노역, 즉 현실이 무용(無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규정한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유용성만을 뒤쫓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예컨대 정은기의 시에서 목적지향적인 삶의 형식은 ‘나’의 존재성을 뒤흔드는 폭력으로 간주된다. “나는 목적지와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삶을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시간이라 설명하는 것은 운전수들의 말이다/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자의 변명이거나/이를 꽉 물고 그 누군가의 속을 휘저어 놓는 자들의 습관이다”(「비슷한 말」)라는 대목에서처럼, 정은기의 화자는 맹목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세계를 장악한 ‘운전수들’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이 마치 자명한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양 설파한다. ‘운전수들’이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기심은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휘젓는 일마저 합리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은기의 시에 나타나는 ‘얼굴’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단순히 ‘나’의 왜소한 자아를 표상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균열된 ‘얼굴’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과 이기심으로 규정하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기꺼이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의 초상이다. ‘얼굴’은 현실의 감관(感官)이기에, 정은기의 시는 훼손된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어두운 상흔으로 응결되어 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타자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비록 “유리보다 쉽게 부서지는 주먹과 머리로,”(「인터뷰」) 견고한 현실의 벽에 몸을 부딪는 ‘불가능한 투쟁’일지라도. “들켜버리기를 기대하며 꼭꼭 숨었다 발각되기만을 바라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꼭꼭, 숨어라」)라는 표현에는 열림과 닫힘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그의 문장에 고인 따뜻함과 섬세함이, 건조하게 닫힌 우리의 ‘얼굴’을 열어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추천 작품: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사물의 방향」, 「건너편」
미래의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공간이 주어질까. 기술의 발전으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화하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미래는 이제 인간에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인간에겐 자신을 보호해줄 사적 공간 외의 공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하며, 친밀한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1)이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처럼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많은 이와 관계 맺는 장소이자, 가장 문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광장일 것이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을 거쳐 현재의 광장은 사람들을 위한 장터부터 공연과 전시, 종교적 행사나 군중의 집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장이 중요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2)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광장도 현실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안에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민을 대변하면서도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광장들이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배수연의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과 윤은성의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결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단단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광장을 함께 거닐어보자. 이분법을 넘는 걸음들 배수연의 세 번째 시집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맥을 함께하면서도 경계가 희미해지는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두가 혼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듣는 집이나(「모두네 집」), 컬렉션과 컬렉터의 위치가 동등해지는 갤러리(「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청소부와 손님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호텔(「마리골드」) 등 사회가 구분해놓은 경계는 배수연의 시에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청소 노동자와 손님, 컬렉션과 컬렉터와 같이 마주칠 일 없는 이들을 한곳에 배치함으로써 배수연의 시 세계는 만들어진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 타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거위나 두더지(「모두네 집」), 광대 역할을 맡은 앵무새(「광대 없는 마을」), 컬렉션이 된 갈치와 악어(「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터진 포대 안을 처리하는 비둘기(「개발팀」)처럼 시 속 동물들은 극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배우처럼 시와 시 사이를 건너다니며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위들이다. 거위는 어린 시절에 함께 놀던 친구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화자의 심술에 낯선 동물이 되기도 하며(「거위와의 목욕」),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다가도 자유롭게 헤엄치며 동물적 특성을 드러낸다(「반짝이는」). 의인화가 일반적으로 부재한 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3)이라면 배수연 시의 동물들은 의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의인화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듯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거위의 말들(“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처럼 거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를 보면 배수연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란 없으며 개념들은 넓게 풀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부분 그런데 배수연 시의 떠다니는 이미지들 속에서 건져지는 것이 있다. 시인은 의미가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몫 없는 자들의 곁에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며(「독서 모임」), 광대가 받는 박수를 원하는 왕을 만들어내고(「새 하늬 마 높」), 항상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들을 등장시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위들이 선택한 것이 청소부라는 점은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 청소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거위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거위와 모과」), 스스로가 청소부에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모두네 집」)] 그들은 언제까지나 청소부의 자리에 머무르며 사회가 원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줄을 잘 서는 거위들과 마주칠수록(「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화자의 부끄러움은 배가된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화자가 거위와 마주친 곳은 높은 빌딩의 근사한 식당이다. 식사를 즐기는 화자 앞에서 거위는 장소에 개의치 않고 “청소 일”을 알아보았다며 말을 건넨다. 어디서든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에게 높은 빌딩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거위와 함께 읽은 책의 주인공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한다. 하지만 거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며, 사람들이 부와 행복을 과시하는 곳이라도 거위에겐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거위는 착취 구조에 무지하기에 역설적으로 착취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거위를 보고 죄책을 느끼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거위 앞에 항상 손님으로 누군가의 노동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부끄러움, 행복한 이들 사이에서 일할 거위의 불행을 단정 짓는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은 화자를 수직적 공간에서 내려와 거위와 누울 수 있는 수평적 장소로 이끈다. 경계를 구분하는 수직적 문법을 탈피하고 무해한 거위와 누운 곳이야말로 화자가 원하는 장소일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는 행동을 함으로써 거위와 화자는 우화가 아닌 현실에서 함께하게 된다.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견디며 거위들과 책을 읽는 것, 근사한 곳에서 내려와 청소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정기 모임」), 기록되지 않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동대문 미싱사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 기록되지도 않는다”(「일요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애정4)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항상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모자가 발명되었어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나는 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 [……] 더 좋은 모자를 줘, 더 좋은 의자를 줘,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진실을 잘 이용해야 해 진실은 쉽게 녹지 않으니까 진실을 휘젓다 지친 사람들 그들의 비석 앞에 꽃과 모자가 놓여 있네 모자를 맞대고 오래오래 행진했어 실패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면 종종 모자 안의 코끼리를 쓰다듬지 인명 없는 미술사를 읽는 기분으로 흰 연기로 색색의 카펫을 짜는 기분으로 해방되는 기분으로 - 「모자의 기분-광장에서」 부분 거위와의 만남에서 보이듯 배수연은 경계를 구분하고, 계급을 나누는 이분법을 탈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모자는 의자를 대신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게 된 물건이다. 기존의 세계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만 의자를 허락하여 수직적인 계급 구분을 뚜렷이 했다면, 모자로 구분되는 세계는 모두를 광장이라는 수평적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기존 체제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가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더욱 교묘해졌을 뿐, 계급은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다. 되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자는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어 모자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고, 누구나 멋진 모자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모자가 전부인 세계는 군중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자에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모자를 쓰기 위해 아우성치고, 이미 멋진 모자를 가진 왕과 판관들도 자신의 모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자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던 이들은 죽고 묘비만이 남아 세계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서 있는 광장은 이 모든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돈의 장소이다.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등 모자를 바꾸기 위해 모여든 이들과 죽은 자들의 묘비, 모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헹가래하는 군중이 함께하는 어지러운 곳에서 화자는 거위와 함께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이들과 모자를 맞대고 행진한다. “실패라는 생각에” 무너질 때마다 모자 안의 코끼리를 만지며, 상상력에 기대어 다시금 몫 없는 자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예술가」), 몫 없는 자와 거위들을 하나로 잇는 마음은 이분법에서 해방될 하나의 미래를 바라며 행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산책」)는 화자의 고백처럼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이분법을 부수는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은. 우리는 배수연의 시를 통해 이분법을 넘어 화자와 거위, 두더지, 악어, 앵무새 들과 함께 행진하는 광장을 그리게 된다. 아무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무나와 걸을 수 있는 광장을. 희미한 연대의 광장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은 투명한 눈물들로 이루어진 슬픔의 기록 같다. “슬픔을 얼굴에 눌러 붙인 물고기들”(「둑과 빛과 물의 시」)처럼 “어디에서도 잠은 슬펐다고”(「멀다」) 고백하며, “슬픔으로 빌린 / 집”(「영원과 하루」)에 초대되는 화자를 보면 우리도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감지하는 깊은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목격한 죽음과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와야 하는 소년 소녀 들의 이야기부터, 여름날을 채우던 “죽은 교사들”(「우리의 물이 우리를」)의 소식, 비난받는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먼 / 미래를 보여준 사람”(「좁고 긴 옷」)의 부고와 “크레인도 아닌 전신주 위에 올라가”(「창문을 열다가」) 목소리를 내던 여자의 이야기를 화자는 지나치지 못한다. 또한 시인에게 비인간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양이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게 하고(「선반 달기」), 닭이나 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을 조명하며(“닭과 소와 돼지가 차례로 앓거나 / 물에 잠겨 죽거나 / 한꺼번에 묻히거나”, 「행사장」), “너무 크거나 작아서 / 발견되지 않는 죽음들”(「둑과 빛과 물의 시」)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음을 쏟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시인이 겪게 되는 슬픔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전제해야지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것5)처럼 윤은성은 사회적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인간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으로 엮인 시는 슬픔을 껴안은 채로 행동하는 화자를 만들고(“지금 아프다고 우리 함께 울고 웃고 // 무슨 이상한 계절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 외쳤어야 맞아”, 「확성 빛 겨울」), 우리는 윤은성의 시를 통해 문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하니 우리는 음악과 지구과학을 같은 날 배우고 함께 옥상에 올랐잖아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소나 강아지의 이마를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떠가는 시간을 촘촘히 알 것 같았잖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엎드려 울기밖에 할 수 없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었잖아 그때도 이걸 알았던 기분이야 내가 사는 도시에선 자주 광장으로 사람이 모이고 흩어져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어쩐지 여기에서 외치는 기도가 멀리까지 가닿지 못하는 기분도 들고 [……] 내 목소리가 지상에서 또 지하에서 잠시 울리고 사라져 우리가 붙들고 모이는 게 미래를 등지고 선 사람들이 몸을 되돌려보려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조용한 기도라고 하자 유리와 안개를 동시에 깨뜨리고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손들을 알아채려 잠시 모였다고 하자 * 교사 보란을 통해 과학 교과목이 따뜻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함. ** 동물해방 운동을 했던 혜린과의 대화에서 “알아채다”라는 말을 전해 받음. - 「유리 광장에서」 부분 하지만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해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위기들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외로운가.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친구와 함께 보낸 다정한 과거를 떠올린다. “부드러운 / 떠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보낸 기억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화자는 광장에 선다. 그러나 화자가 처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다. 현재의 화자는 엎드려 울기만 했던 과거보다 자주 목소리를 내고, 기도도 해보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화자는 “무엇을 더 느끼고”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느냐며 절망에 빠지는 듯하다. 이때 화자가 선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윤은성은 첫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에서부터 광장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첫 시집의 광장이 쓸쓸함이 깃든 곳이거나(「비단길앞잡이」) “살갗을 할퀴는”(「장미 광장」) 상처를 내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광장은 희미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6)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쉽도록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위치한다. 많은 장소가 그러한 것처럼 광장의 성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며 사람이 모이지 않은 광장은 빈터일 뿐이다. 그런데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외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모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갈등과 다르게 생태주의는 대중의 결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7)는 말처럼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를 부수고 화자의 곁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광장은 공공장소이지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함께 모인 이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산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이같이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연대의 불안정성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유리 광장에서 시인은 홀로 허망함과 미움을 삭일지언정 희미한 연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더 많은 참여를 만들어내고, 더 오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하다. 때문에 무자비한 손들을 알아채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오고, 조용한 기도로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윤은성의 시가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온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너무 멀리서 헤맨 날이면 자다 깨어나 안을 것을 찾아서 내가 얻어 온 모든 체온이 도는 몸을 천천히 뻗어봐. [……]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채며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어. 파도보다 오래 더 오래 다시 모르는 아픈 물결까지 붙잡아주고 있었어. 안다고, 안다고 붙잡아주고 있었어. - 「사슴뿔청각」 부분 시인에게 광장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는 물의 광장으로서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는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물결과 더해져 ‘하나의 물결’을 만드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소이다. 그러나 투명한 파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시인은 바다의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물고기들의 떼죽음과(「둑과 빛과 물의 시」), 조개들의 죽음, 바다에 터를 둔 사람들의 이주는(「행사장」)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바다 생물의 사체가 함께 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실에서 화자는 바다가 더 나쁜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어린 청각을 통해 목도한다. “자라다 말고 색이 변하”(「사슴뿔청각」)는 어린 청각의 현실이 말간 얼굴로 첨벙거리는 아이들의 미래인 것만 같아 화자는 두려움에 떨고 “시를 잃어버린 것 같”(「창문을 열다가」)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렵고 슬픈 마음에 무너져 내리는 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광장에서 만난 동료들이다. 슬퍼하는 시인에게 전해진 체온과 전달된 언어(「생일 세계 공원」) 그리고 그림자(「모르는 일들로부터」) 등 동료들에게 받은 것들은 시인을 허무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이 된다. “파도보다 오래” 화자를 끌어안는 포옹을 통해 시인이 낙담과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일어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주는 연대는 약하지 않다. 서로의 고통까지 보듬어줌으로써 희미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궤적들의 묶음으로서 우리의 ‘함께 내던져져 있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8)이라면,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에서 우리는 모두 몫 없는 자들이 된다. 사회가 정한 계급, 성별, 종차를 넘어 우리는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에 속한 자들 The Earthbound’9)이 되고 그제야 우리는 몫 없는 자들의 슬픔을, 언어가 없는 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서 있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곧은 마음으로 걷는 시인과 다양한 생명체들을 잇는 광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시인이 그리는 안전한 미래에 멸종하지 않은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 p. 25. 2) 프랑코 만쿠조 외, 『광장』, 장택수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9, p. 5. 3) James J. Paxon, 『The Poetics of Personif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3. 4)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p. 11. 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p. 48, 64, 68~69. 6) 프랑코 만쿠조 외, 같은 책, pp. 6, 19. 7)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 13. 8) 도린 매시,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외 옮김, 2016, 심산, p. 284. 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p. 124.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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