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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영화가 있는 문학의 오늘 | 2024년 봄호(제50호)

무한경쟁사회의 사다리와 재투성이 소녀들 ㅡ 김이은의 『하인학교』를 중심으로

신수진 문학평론, 아동문학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를 수료했다. 2014년 한국안데르센상 아동문학·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었다.

0. 소설의 멀티콘텐츠화 시대                                                                    

과거의 전통적인 미디어는 방송국이 주체가 되어 제작하고 사회성을 고려하여 통제되며 제한된 채널을 통해 정기적으로 상영된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해 일방향성을 지녔다. 하지만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는 OTT 서비스가 활성화되면서 콘텐츠는 가구 단위로 관람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에 따라 소비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독자 환경의 변화도 소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설의 전성기 시절 소설은 스토리를 다루는 중심 콘텐츠로 기대를 받았지만 지금 후위로 밀려있다. 매체의 변화와 독자의 변화는 새로운 글쓰기가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암시한다.

소설이 지적재산권에 해당하는 콘텐츠와 동일시될 때 콘텐츠로서 소설의 가치는 얼마나 호환되느냐에 달려있다. 소설이 영화를 비롯한 인접 장르로 재가공되거나 국내를 넘어 해외로 수출될 수 있는 확장성은 이제 소설가의 작업 방식 또한 바꿔놓았다. 작가 홀로 탈고하는 집필 형태가 아니라 작품이 파급력을 갖고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협업하는 시스템도 등장하고 있다. “작가의 현장은 미디어 안에 있으며 작가의 이야기가 책이라는 매체로 천 명이 본다면, 미디어를 통해서는 수십만, 수백만 명이 보게 되는 일이 가능해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콘텐츠의 공급량에 의해 문학이 존재가치를 잃고 작가가 위기를 맞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진입장벽이 열리고 독자가 작가를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독자들은 작가의 위상을 작가가 오랜 시간 공들여 구축한 세계관이자 고유한 문장력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상력의 수준으로 범박하게 가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쓰고 있는 이 서사가 독자와 얼마나 호흡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는 최근 우리 문화 현장에서 소설을 드라마나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고 본문에서 다룰 김이은의 하인학교 역시 영상물로 제작될 예정이다.


1.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문학의 유형이자 경계로서 장르는 사전적 의미로 정의하고 분류하기 어렵다. 장르는 혼재되며 재건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현대 문학에서 보수적이고 견고한 프레임으로 자리했던 장르의 개념은 현재 다양한 매체에서 융합되고 창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에 대한 이분법적 체계에서 순수 문학의 개념을 정통 문단 소설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호명된 것이 장르 문학이다. 장르 문학은 판타지, 로맨스, 추리, 스릴러, 공포, 과학, 무협 등 특정 소재나 주제로 특화된 양식에 대한 분류로 여겨진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같은 플롯 차원이나 웹소설 같은 매체적 차원의 용어와도 혼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순수 문학이라는 용어가 주류 문학, 제도권 문학, 정통 문학, 본격 문학 등의 의미로 통용되며 그 권위를 인정받아왔다. 그리고 1990년대 인터넷의 보급으로 PC통신이 유행하면서 판타지, 로맨스, SF등의 장르 소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인터넷 소설이라 불리는 소설들이 대거 등장했고 2010년대에는 웹소설 시장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장르 문학의 위상이 높아져 소수 마니아들의 전유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인정을 받고 인기를 누리기에 이르렀다.

장르 문학은 문학의 다양성을 충족시키는 한편 순수 문학이 주도해왔던 문학사에서 관습과 클리셰비현실성과 판타지를 바탕으로 하여 문학적 가치보다 상업성과 흥행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이라는 의미로 치부되어왔다. “상업성의 추구는 동시대의 요구를 파악하고 호응을 유도해냄으로써 독자의 관심과 소통을 통해 성장해가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킬 만한 자극적이고 유행에 민감한 부수적인 요소에 치중할 수 있다. 또 장르 문학은 문학적 허구성에 대한 해석이 순수 문학과 다르기에 소설의 허구성을 현실의 개연성이나 설득력의 맥락 안에서 적용하지 않고 상상을 무한대로 활용하는 특징을 띤다.

하인으로 들어가 주인이 된다는 충격적인 교훈하에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들의 하인학교 생활은 파국으로 치닫는 부와 계급에 대한 욕망도라는 전형성을 띤다. 하인학교라는 비밀 기관에서 기업의 오너를 결혼 타겟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도록 하여 조직적으로 계급 전복을 꾀한다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극적인 전개는 분명 기존의 순수 문학과는 다른 문법으로 써졌다. 최근 우리 소설의 한쪽에서는 영미권 스릴러 소설처럼 수준 높고 영향력 있는 장르 소설을 표방하며 소설의 저변을 확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 이야기의 원형을 변주하는 하인학교의 스토리                            

하인 학교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부추겨 대중의 호응을 유도한다. 봉건사회의 전유물이자 차별적인 신분을 가리키는 하인이라는 용어를 소환한 것은 우리의 내면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계급, 서열, 구분짓기 같은 욕망을 들춰내기 위함이다. 여전히 하인이 존재하고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학교가 존재한다는 이 소설에는 여러 이야기의 원형들이 변주되고 있다. 예컨대 주인공이 비참한 환경 속에서도 비상한 능력을 타고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영웅 서사의 패턴을 따른다. 존귀한 태생이었으나 어떤 사연에 의해 유기된 인물은 극한의 상황에서도 목숨을 부지해 후일을 기약한다. 성장과정에서 마주하는 필연적인 고난은 모험을 떠나도록 추동하며 이때 사태를 해석해주고 방향을 지도해줄 조력자의 등장으로 세계의 관문을 통과해간다. 영웅은 그 지난함 속에서 비로소 거듭나 자신과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세계를 지키고 사랑 따위를 보상으로 얻어 귀환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한서정이 늙은 부모를 한순간에 잃고 오빠로 알고 컸던 아버지의 빚 때문에 도망다니며 겪는 고초를 그 시작으로 한다. 아버지마저 자살하자 세상은 거대한 골리앗이 아니라 상처받은 다윗에 의해 발전한다는 하인학교에 입성하지만 이진욱의 사랑에 의해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함을 깨닫는다. 영웅 서사 패턴에 부합하는 이 소설은 극한의 여정을 주인공에게 부여하고 올바른 선택으로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완결한다.

한편 정이화, 전금희, 한서정으로 이어지는 성공 스토리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재투성이 소녀 신데렐라는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지만 요정 할머니의 도움으로 무도회에서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님을 만나 다락방을 벗어난다. 여기 등장하는 세 여성은 신데렐라의 계보를 따라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만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러한 순간이 왔을 때 그것을 간과하지 않는다. 하인학교의 목표가 각 기업 오너들의 신상을 면밀히 파악하고 결혼 상대자가 된다는 것인데 결혼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이 경로 또한 매우 동화적이다.

그러나 사람의 출생, 경력, 취향까지 조사한 뒤 대본대로 마음을 훔치는 전방위적 공작은 아름다운 신데렐라 스토리를 농락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불순하다. 이는 점차 가속화되고 정교화되고 있는 불평등과 양극화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발로한다.


3. 주제의식과 대중성을 위해 고안된 서바이벌 양식                        

하인 학교에 드러난 환경 설정의 과장성과 과격함은 작가의 주제의식과 연관성을 띠는 한편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다. 먼저 주제의식과 관련하여 적자생존의 현실을 비판하고자 거북할 만큼 암울한 인물들의 사정이 전시된다. 이들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짓밟히고 유린당한다. 한서정이 하인 학교에서 만난 오윤주, 엘리사, 손보미 등의 동기들이 그랬고, 전금희나 정이화도 그랬다. 세상의 비정함을 여실히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비윤리적인 서바이벌 장에 들어가게 되는 동기를 정당화한다.

이 모든 잔혹성과 불합리성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작가는 하인 학교라는 경기장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반복되는 성공과 실패를 하나의 놀이처럼 구성한다. 로제 카이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특징을 네 가지로 구별한다. 첫째 놀이는 참여자가 정해진 규칙을 가지고 외부의 도움 없이 경쟁하는 것이다. 둘째 놀이는 참여자의 의지나 자질과 무관하게 운명이나 요행에 따라서도 승부가 결정된다. 셋째 놀이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일시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이 되어보는 모의 훈련이다. 넷째 놀이는 신체의 과격한 행동을 수반하기도 하므로 순간적으로 현기증이나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놀이는 연령이나 문화를 초월하여 참여할 수 있고, 무목적성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인 학교에서의 경우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 선택의 여지 없이 참가하게 된 것이므로 이들에게 하인 학교의 수업은 실패하면 바로 죽음으로 직결되는 데스게임인 것이다. “입학과 동시에 신체포기각서에 사인하는 셈인 하인학교의 무도한 설정과 참여자들의 비극적인 전사가 결합되어 하인 학교의 내부를 훔쳐보도록 해 흥미를 극대화한다. 또한 교육 속에서 놀이의 의미를 완전히 전복하고 가장 비교육적인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질시켜 바로 그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알게 한다.

 

4. 두 주인공의 병렬적 배치를 통한 두 가지 경우의 수                      

하인학교는 총 6장으로 입학」, 「졸업생」, 「수업」, 「시험」, 「졸업」, 「에필로그라는 비교적 순행적인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입학이 한서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졸업생은 전금희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안과 밖, 실패와 성공, 도전과 성취 같은 대립항 위에 두 인물을 병렬시켜놓은 이 배치에서 전금희가 통과의례를 거친 승자로서 하인학교를 둘러싼 인물들의 입장을 조종하며 필요하다면 제거할 수도 있는 반면, 한서정은 아직 통과의례 중에 불과하므로 외롭고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인학교에는 절대적 유폐와 고립, 일방향적인 정보와 통제, 일원화된 목표와 수단만이 있다.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아주 잠깐 행복을 느끼던 묵호 바닷가에서 한서정의 아빠는 파도가 오면 뱃머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나아가야 한다고 일러준다. 그 말은 훗날 한서정이 절체절명의 기로에 설 때마다 부표가 되어준다. 공교롭게도 전금희가 결혼한 백성철 회장의 아들 백도현도 역경을 뚫고 나가는 인생이 바로 서핑이라며 파도를 예찬한다. 백도현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뇌하는 인물로 성장해간다.

전금희와 한서정은 하인 학교에서 살아남아 재벌의 마음을 얻는다. 그러나 전금희는 그저 이름 없는 하나의 점처럼 살았더라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하거나 나 스스로 괴물이 되어간다고 느끼니까.”라고 자조한다. 흡사한 행보를 보여주던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결정체에 따라 자기 자신을 회복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 것이다.

한편 대중 드라마를 꼭 첫 회부터 보지 않아도 중도 진입이 가능하듯이 하인학교는 어떤 장에서 독해를 시작해도 전반적인 줄거리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장편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인공과 중심 스토리가 있고 대립 구도를 이루는 인물군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진행될 때마다 작가가 중간중간 요약하고 정리해주는 대목들이 있다. ‘편집자적 논평은 사건의 본질이나 의미에 대한 작가의 의견과 해석이 투영되기도 하고 갈등 양상 속에서 어느 한 측면에 대한 옹호나 정당성이 반영되기도 한다.


5. 학교의 본질과 사회비판의식                                          

교장 정이화는 학생들에게 선언한다. “바깥세상에서는 학교가 무슨 성인군자를 길러내는 곳이라고 포장하고 선전하지만 실상은 너희들도 잘 알 것이다. 학교는, 우열을 가려내기 위한 곳이다. 학교를 거치면 알게 된다. 누가 우성이고 열성인지. 누가 잘났고 못났는지. 너희의 가격을 매기는 곳이 바로 학교다.” 밑바닥 인생과 재벌의 인생이라는 판타지 학원물 같은 설정을 태연히 앞에 두고 소설은 거짓, 음모, 위선으로 점철된 계급사회를 내파해간다.

삶을 장악하거나 유린당하는 인물들, 재화를 독점하거나 소외되는 인물들, 소설에는 이런 식으로 특정 요소가 전면화된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이 대비되고 선악의 구도가 배치된다. 이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 몰입을 가속화해 주인공의 인격에 이입되도록 한다. 탄광촌에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가출과 자살을 견디면서도 전국 경시대회에서 삼등도 한 계집애였던 전금희의 환경은 많이 보아온 메뉴얼이다. 대중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해왔던 서사들은 누적되어오면서 일정한 패턴으로 고착된다. 염세적인 아버지와 그 희생양으로서 무력한 어머니의 장면은 상투성과 감정 과잉이라는 장르 문법의 특징을 갖는 동시에 전금희라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물의 출현을 예고한다.

어린 전금희가 겪은 세상은 끝없이 자신의 필요를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대였을 것이다. 이런 인물에게 결핍으로 남는 것은 조건 없는 관계다. 자신의 대체불가능성을 통해 존재를 승인받아왔기 때문에 더욱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고 외부의 기준을 선망하게 된다. 하인학교에서 가학적인 시험을 통과해 재벌가에 간 후 그녀는 신분을 위조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백성철 회장 곁에서 그룹을 이끌고 자녀들이 후계자로 성장하도록 보좌한다. 그녀의 위치는 아무리 하인학교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과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전금희가 승승장구할수록 그녀의 최후는 예견된다. 전금희와 꼭 닮았다고 평가되는 한서정도 불안을 증폭시킨다. 예컨대 조직의 보스는 공동체의 일원이지만 공동체 그 자체이기도 한데 이러한 주체 권력은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기인한다. 사건의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조직원들과 달리 보스는 전체의 조감도를 갖고 조직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일을 해나갈 때마다 능력이 신장되는 것은 명령하고 보고받는 보스가 아니라 어려움을 돌파하며 실전 경력을 쌓아가는 그의 부하다. 그래서 1인자는 2인자에 의해 교체되고 또 다른 시대의 서막은 열린다.


6.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1인자와 2인자의 원리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과 다르지 않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는 주인과 노예의 지배와 예속관계를 논하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존재는 불평등한 상태로 귀결되는데 지배자는 자신의 존재를 본질로 하는 자립적 의식을 획득하지만 피지배자는 타자에 대한 그의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 의식을 갖게 된다. 주인은 사물을 지배하는 자이지만 노예는 사물에 속박된 자로서 주인은 사물에 대한 향유만을 누리고 노예는 사물을 가공하게 되어 이들의 불평등한 관계는 곧 역전된다.

전금희는 자신을 키워냈지만 조종하는 정이화를, 한서정은 자신을 이용해 목적을 이루려는 전금희를 넘어서기 위해 분투한다. 백성철 회장과 재혼하고 성공적으로 입지를 다져가는 전금희는 극심해지는 정이화의 협박과 갈취에 고통받는다. 하인학교는 미천한 과거를 빌미로 비자금을 요구하고 불응하는 경우 공개 석상에서 폭로하고 죽음으로 몰아가 본보기 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정이화는 자신이 죽음을 택했던 학생들을 살린 교육자라고 자부한다. 그래서 졸업생들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내 합법적인 학교를 설립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도탄에 빠진 인물을 구하는 자신의 사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메시아적인 자아도취에 빠져있는 셈이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는 합리성을 거스르고 오로지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하나의 꼭두각시 집단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불온하다.

주인과 노예의 상태는 고정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역전될 수 있는 구조를 내장하고 있다. 주인은 노예를 통해서만 사물과 관계하지만 노예는 사물이 갖는 자립성을 독파하는 가운데 사물에 대한 지배력을 갖게 되고 스스로 자립적 의식을 깨우치게 된다. 하인학교의 교장 정이화는 학생들 그러니까 노예와 다를 바 없이 수동적인 상태의 학생들에 대해 주인 행세를 한다. 정이화는 학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세상의 모든 재화나 권력과 관계하며 이 결과물을 소유하게 된다. 교장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학생들이라는 타자에 의존하면서 비자립적 의식을 갖게 되는 것과 달리, 학생들은 불가피한 훈련을 통해 자립적 의식을 획득하게 되면서, 교장과 학생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의식 상태가 역전되듯 지배하고 복종하던 관계에서 의존하고 해방되는 관계로 전이된다.


7. 낭만적 사랑과 구원                                                  

낭만적 사랑으로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 삶을 꾸리게 되는 결말 또한 장르 문법인 클리셰에 해당하는 것인데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기에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서사 패턴이다. 한서정이 이진욱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은 달걀 모양의 키링으로부터 비롯한다. 이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단번에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라는 저 유명한 소설의 구절은 에밀 싱클레어가 방황을 딛고 성숙된 자아로 거듭나게 되는 순간에 대한 세례다. 싱클레어의 영혼을 압도한 막스 데미안은 결국 자기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구현된 존재다. 한서정도 이진욱을 통해 새롭게 각성한 영혼을 발견하지만 이진욱은 살해당한다.

이진욱이 유일한 생의 증명 아니었던가. 그조차 죽어버려 한서정은 이제 영혼의 고아가 되었다.”라는 서술은 한서정이 원점에서부터 다시 결단해야 한다는 것을 종용하는 장면이다. 서정은 타겟이었던 강준석에게 사건의 전말을 고백하지만 강준석은 한서정을 감싸준다. 한 사람은 죽음으로 여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른 한 사람은 결혼으로 여자에게 새 삶을 준다. 작가는 인물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묘사하면서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고 이 절대적 사랑으로 한서정의 삶은 구원에 이른다.

다만 이진욱이 키링 속에 하인학교의 모든 정보가 들어있는 usb를 남겼음을 알게 된 한서정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뇌한다. 이는 개인적 행복에 자족하는 것을 넘어서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선택하기 위해 예비된 주인공의 면모로 볼 수 있다. “하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깨달은 유일한 하인학교의 졸업생으로 한서정은 이전의 졸업생들과 다른 미래를 열어갈 것이다.


8. 나가며                                                              

하인 학교는 세상의 바깥에 있는 곳이다. 살인적인 경쟁 체제로 점철된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패자부활전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인 학교가 기획한 것은 이력을 조작해 기업의 오너와 결혼함으로써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이다. 타인의 성공에 기생할 것을 모의하고 자신마저 기만하는 것은 부도덕한 사기에 불과하다. 승자독식의 세계에서 낙오한 재투성이 소녀들의 갱생 프로젝트가 전제도 방법도 잘못되었다는 점에서 이 가공할 설계는 애초부터 성공하거나 지속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투신 레이스가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기원했다는 점은 상기해볼 만하다.

하인 학교는 호화로운 솔라즈 리조트 아래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공간이기에 마치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가상의 스테이지로 보인다. 하인 학교 안에는 바깥 세상보다 더 무자비한 룰, 그러니까 아무런 룰도 없다는 그 룰밖에 존재하지 않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곳에서 준비가 되면 밖에서 실제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오는 것이다.

하인 학교는 시험이나 결혼과 같은 제도에 부합하기만 하면 공정하고 합법적으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의미와 가치를 획득했다고 여기는 세태를 돌아보게 한다. 인정 투쟁의 본질이 서바이벌 게임의 형식으로 탈바꿈한 하인 학교 내부의 소란들과 똑같이 바깥 세상의 모든 경기도 결코 정당하지 않을 때가 많다. 하인 학교의 내부는 바깥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또 다른 난투극의 현장이며 유일한 생의 순간들일 뿐이다. 하인 학교가 벌이는 비현실적인 짓들 때문에 마치 바깥 세상이 진짜이고 하인 학교는 가짜이며 그저 바깥 세상을 축소해놓은 모조품에 불과하다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미국의 디즈니랜드를 예로 든다. 디즈니랜드는 미국 자체가 거대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디즈니랜드는 캐릭터들의 이미지가 구현되어 있고 모든 것이 유치하게 반짝이는 가짜에 불과해 그런 디즈니랜드의 바깥에는 진짜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진짜라는 건 없다. 시뮬라크르는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을 숨긴다. 지금 우리가 본 것들이 모조리 허구이고 환상이니 여기에 속지 말고 진짜 실재와 진실을 찾자고 하는 플라톤 식의 대립적 이분법이 아니라 모두가 떠다니는 기호에 홀려 있을 뿐 현대 소비 사회의 총체가 그런 시뮬라시옹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보드리야르의 철학적 함의다.

마찬가지로 하인 학교는 시험만 통과하면 모든 것이 가능한 곳 즉 꿈과 희망이 가득한 것처럼 꾸며져 있어서 가짜인 줄 알면서도 도취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거짓말 같은 설정에 혼미해져 헷갈리기 시작한다. 하인 학교는 모의 실험장이고 진짜 세상은 바깥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하는 이 전도를 통해 한국 사회의 기득권이 구조적 불평등 같은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거대한 하인 학교라는 것을 알게 한다. 하인 학교는 한국 사회 전체가 곧 하인 학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거기에 있다.
  • 1) 윤승일, 「새로운 작업 메커니즘―장르소설, 협업, 미디어」, 《문학의 오늘》, 46호, 2023년 봄호.
  • 2) 신수진, 졸고 「순수 문학과 장르 문학의 지평」, 《문학의 오늘》, 46호, 202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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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불확실한 세계에 던지는 소설의 질문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계간 창작과비평 김주원 가족 서사우정폭력가해자피해자기후(climate)불평등 2025
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계간 파란 정원 단속정체성시선타자고맥락저맥락윤혜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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