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대체로 심각한 , 대개는 유쾌한 : 기원석, 『가장낭독회』(아침달, 2024) 임지은,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민음사 , 2024)
50년 오코노미야키 외길을 걸어온 장인에 관한 영상을 본 적 있다. 5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대왕오코노미야키를 어떻게 뒤집는지가 그 영상의 주요 관전 포인트로, 대가가 오랜 세월 축적해온 뒤집기 노하우는 어떤 거대한 형태의 반죽도 완미하게 보존해낼 것이었다. 뒤집기의 시간. 장인이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듯 연장을 꼭 쥔다. 화면 너머 결기가 느껴진다. 패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일본 예능 특유의 효과음과 성우의 내레이션 역시 긴장을 더한다. 덩달아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모두의 비장감이 극에 달한 절체절명의 뒤집기 순간, 보고 말았다. 별안간 흩어져 뿌려지는 양배추, 엉망으로 찢겨 나가는 반죽, 동그란 형태는커녕 최초 반죽 당시로의 원점 회귀, 이 모든 아비규환의 현장을. 아아, 잔인해라. 이 실패가 심지어 슬로모션으로 재생된다.
일순간 저항할 틈도 없이 실소가 터져 나온다. 최소한의 오코노미야키 모양 정도는 유지되길 바랐다는 카메라맨의 떨리는 손, 당황한 패널들의 웅성거림,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아랑곳 않고 원래 이런 거라는 듯, 늘상 그래왔다는 듯 뻔뻔하게 양배추 잔해들을 그러모으는 장인. 구멍 난 반죽을 덤덤히 메울 뿐인 그녀의 모습 뒤로 성우의 엄숙한 내레이션이 화룡점정이다. ‘그렇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다……!’
기원석과 임지은의 시를 나란히 읽는다는 것은, 이 장인의 비장과 골계, 긴장과 이완, 엄숙과 폭소, 그 몇 초 상간을 계절 단위로 늘여 슬로모션 형태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텐데, 일단 두 시인은 오코노미야키와 무관하고 50년 대가는 더더욱 아닌 젊은 시인들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겠다. 다만 한 시인은 “언어의 와해와 사고의/망상”을 기술하고 “행간을 최대화하”(기원석, 「CONFIDENTIAL」)는 방식으로 쓰고, 다른 한 시인은 “작은 것을 더 작게 말하”(임지은,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2」)는 방식으로 쓴다. 전자가 함양해야 할 자세는 “비난하기 모든 걸/해석 또는 축소/해석하기 인간을/경멸하기”(기원석, 같은 시)라 한다. 후자는 “행복엔 잘잘못이 없”(임지은, 같은 시)으니, 그냥 “뭐든 사랑해 버”(임지은, 「기본값」)리라 한다. 시 안에서 ‘현실’과 ‘이상’이 응전할 때, 그리하여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이 대립할 때 우리는 시인의 포즈를 어렴풋이 발견하게 되는데, 기원석의 그것은 비장이고 임지은의 그것은 골계라는 점은 언뜻 그들의 지향이 정반대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된 감각이 있다면, ‘독자의 부재’에서 비롯한 위기의식 그리고 그들의 시가 높은 확률로 실패하리라는 직감 같은 것이다. 가령 그 제재의 은유가 명백히 ‘시집’일 기원석의 「바게트」를 보라. 행인들을 향해 바게트 좀 사시라 권해도 별 소득이 없어 “요즘 누가 바게트를 먹겠”냐는 푸념만 하던 제빵사는 결심을 굳힌다. 그냥 “바게트로 그의 독자를/두들겨” 패기로. 자신에게 남은 “몇 톨의 독자들”마저 박박 긁어내던 제빵사는 급기야 “부러진/바게트를 행인들의 입에 쑤셔 넣”기 시작하고, “바게트에 두들겨 맞은 독자들/비명이 언덕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관찰자 (화자)는 중얼거린다. “사악한 위트를 곁들인 비유/퍽퍽한 의식 덩어리로 /만든 이런 바게트를/누가 먹을 일은 없겠지”.
임지은의 「독자 연구」에서도 다른 듯 비슷한 광경이 포착된다. 지독하게 안 읽(히)는 시대, 그리하여 분실될 위험조차 없는 책의 세계. 만에 하나 분실되더라도 “냄비 받침을 주시하라!”라는 행동 강령만 따르면, 책은 어김없이 그곳에서 ‘받침’의 용도를 다하고 있을 세계. 어쩐지 낯설지 않다. “독자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궁금”해 서점에 가본 화자는 쓰디쓴 낙담만 안고 귀가하고, 그곳에는 유일한 독자, “우리 엄마”만이 있을 뿐이다.
이 공통된 위기의식과 실패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고, 이는 결국 시인의 포즈가 시와 현실을 매개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접맥될 것이지만, 그 여부와 별개로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선행하려 한다.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다……!’라 말할 수 있는 세계가 비단 오코노미야키 장인의 세계뿐이겠는가.
기원석: X 버튼과 R 버튼
어떤 작품은 연극적이지 않으면서도 강렬하게 극적일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작품은 철저히 연극적이면서도 ‘극적’이라는 표현만으론 회수되지 않는다. 기원석의 『가장낭독회』는 후자에 속한다. 극 텍스트 형식의 수록작 다수가 스스로 일종의 ‘극시’ 되기를 겨냥하는 듯 보이지만, 연기자들의 사념으로 소용돌이치는 독백의 상당 부분이 대상에게든 관객(독자)에게든 ‘가닿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꾸준한 거절과 반송을 경험 중인 기원석의 화자들이 품고 있는 파토스에 주목해보자. 「스노볼」의 화자는 자신이 상대(‘너’)로부터 받은 달을 돌려주려 하지만,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달이” 되굴러온 바람에 곤란한 처지이다. 계속 두면 달은 부피를 늘려 불면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나 화자는 차마 그에게 달을 재반송하지도 못한 채 “부풀어 오르는 구석으로” 떠내려가기를 선택할 뿐이다. 「미싱」의 화자도 마찬가지이다. 화자는 매일 아침 어딘가로 답장을 보내는데, 그 답장은 읽힌 흔적조차 없이 깨끗한 형태로 반송되어 온다. 동등히 성실한 응답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도 “나는 미싱을 돌렸다”는 화자의 진술은 그/그녀의 새벽이 그리움missing이라는 감정의 노동을 땀땀이 반복해야 할 시간임을 확인시킨다. 뿐만 아니라. ‘수수’ ‘주주’ ‘우우’라는 세 명의 천사가 등장하는 「깍두기」 안에서 말 그대로 깍두기인 ‘우우’는 나머지 둘의 싸움에조차 끼지 못한다.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나도 여기 있는데……”와 같은 울먹임에서 드러나는 ‘우우’의 소외는 “수수와 주주의 분노를 극적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그렇게 화자들이 내면에 서서히 공글려오던 슬픔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형태로 급전회한다. 신세 한탄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소외, 반복된 무관심에서 비롯한 무력감, 대상에게 번번이 가닿지 못하는 거절감이 귀결되는 곳은 결국 가차 없는 복수심이라는 감정의 대단원이다. 특히 여기서 이 파토스의 폭발이 ‘시인’–‘독자’의 관계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은 앞선 화자들이 간절하게 송신하려던 것들의 정체가 ‘시’였을지 모른다는 사유의 단서를 남긴다.
앞뒤로 배치된 「현대시작법」과 「현대시독법」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이 안에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기만하는 관계에 불과하다. 독자들은 신이 시인에게 준 하나의 주사위를 훔치는 존재이자, “독자를 괴롭히는 장난은 그쯤 하”라며 언제든 돌아서버리는 매정한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때 “총알 한 발이” 독자의 뒤를 관통하고, 작가는 그런 “독자의 고통과/독자의 주검과/독자의 분노를/낱낱이 헤아리”다가 “세계의 틈에 책갈피를 끼”우고 마는 식의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때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작가는 유력한 용의자로 전환된다. 시인이 꿰뚫어 본 창작과 독해의 본질이 이런 풍광에 있다면, 세상의 모든 낭독회는 “낭독할 시가 아닌 가짜 문장들”(「가장낭독회」)과 위선의 파토스로 낭자한 곳이 된다.
감정은 판단을 동반한다. 부정적인 감정은 필시 부정적인 판단을 데려온다는 뜻이다. 시어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와 환멸에 기반한 화자들의 분노는 시에 대한 독자들의 의미 부여 자체를 지독히 냉소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이는 결국 시의 의미를 진맥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강경하게 거절하는 방식으로 극대화된다. 당장 「야광꼬리달린하마에 대한 나폴리식 경고문」은 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보시오, 독자 당신. 지금부터 이 책에 대한 어떠한 의미화 작업도 수행하지 마시오. 시를 수용하지도, 재가공하지도 말며 심지어는 어떤 것도 느끼지 마시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시 앞에서 취해야 할 “N급 비밀에 준하는 행동 요령”에 다름 아니외다!
이 모든 분노는 “내가 당신에게 돌려준 그걸 결코 내게 주지 마”(「마지막 시」)라는 비장한 선언으로 요약될 텐데, 이 시집을 관통하는 여섯 편의 「튜토리얼」 연작을 짚어보면 그 내면에의 망명이 종국에 어디를 향하고자 했던 것인지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낭독자와 독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각자가 읽는 자신에게 집중할” 뿐인 공회전의 낭독회 현장을 「튜토리얼」(p. 13)이 보여준다면, 「튜토리얼」(p. 16)은 ‘정’이라는 인물의 대사를 빌려 “시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 곧 “시인의 협소한 상상력을 스스로 까발리는 자충수”라는 자기 검열을 드러낸다. 기실 ‘정’의 발화는 어떠한 작법도 독법도 없는 시의 교시 불가능성과 달성 불가능성을 겨냥하지만, 그의 말이 되돌아가야 할 곳은 그 자신이기에 결국 ‘죽음’으로부터 고발되고 만다.
이 과정 전반에 드리우는 비장감은 「튜토리얼」(p. 75)에 이르러 한 작가를 강렬히 적대하는 ‘너’의 언어—“이런 걸 쓰고도 순진한 척 작가 행세를 하다니 넌 표절자야 배신자야 기만자야 남의 문장에 빌어먹고 살 새끼야 너 따위에게 속을 줄 아냐?”—로 강화된다. 기억할 사실은 비난 대상이 된 작가는 기시감을 유발하는 글을 쓴 죄밖에 없다는 점이다. 연이어 ‘너’가 읽은 “조잡한 누더기” 같은 시는 “나도 이렇게만 썼으면 몇십 편이고 몇백 편이고 쓸 수 있”다는 질투로 심화되고, ‘너’는 급기야 써 내려온 것들을 지우고 잠들어버린다. 이렇듯 인물들의 나르시시즘적 내면묘사와 자문자답의 형태가 텍스트 전체에 우세해질 때, 스스로 파토스의 스펙터클이 되어 비장미를 육화하려는 시의 언어화 과정도 두드러진다.
시에 예정된 고통과 몰락에, 또 그것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비탄을 내비치는 비장감이 시의 부활과 자신의 존엄 간 융합을 담보하는가. 대관절 무엇이 그의 화자들을 이토록 견딜 수 없게 만들며 이렇게까지 거칠게 불화시킨단 말인가. 이 지독한 비장은 무엇을 위함인가. 시의 자기애를 제어하기 위함인가, 자기애에 조력하기 위함인가. 택일의 기로에 놓인 기원석의 화자들은 앞선 「튜토리얼」(p. 43) 속 ‘너’의 수면 행위와 교묘하게 맞물려 들어가는 「튜토리얼」(p. 75) 속 가상공간을 향한다. 이쯤에서 이러한 ‘튜토리얼’ 형식과 게임으로 주조된 기원석의 세계관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플레이어도 이 세계를 클리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며, 실제로도 그 모든 NPC가 플레이어(화자)에게 지령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 세계만이 덩그러니 남았을 뿐이다.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은 비현실 안에서 ‘화자’는 이제 자신이 “하나의 NPC가 되”(「튜토리얼」, p. 75)려는 결심을 내린다.
이 진술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1, 2, 3부의 도입이 「튜토리얼」 연작을 경유했던 것과 달리, 유독 마지막 4부만은 「마지막 시」를 우선 경유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그건 그곳에 비로소 분노도 회한도 다 빠져나간 화자의 고백—사실 “더 치열하게 나와 겨루는, 나의 슬픔과 나의 열망과 나의 생을 걸고 하는 독서, 그리고 반복, 나의 숙명 같은 반복, 그것들을 되찾”고 싶었을 뿐이라는 고백. 그리고 그런 내게 시 쓰기란 “불화와 분쟁과 대립”을 감수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뒤이은 「튜토리얼」(p. 108)에는 시인이 자기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등장해 이 모든 것이 “삶과는 전혀 닮지 않은 괄호 안에 강박적으로 삶을 욱여넣은/기원석의 플레이 기록”이었고, “사실 기원석의 삶은 튜토리얼에 그쳤”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삶이나 튜토리얼 대신 시나 쓰면서” ‘당신’을 기다리겠으며, 그 본편에서는 “자신의 남은 ( )을 너희를 향해 열어두”었노라 한다. 이 괄호 열기란 자기 표백을 위해 쓰던 괄호를 이제는 ‘당신’이 틈입할 공간으로 쓰겠다는 선언이자 더는 숨지 않겠다는 결심 아닌가. 그렇게 마지막 「튜토리얼」(p. 113)에 당도하면, 이제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탈출할수는 없”는 그곳, 즉 ‘시’로 돌아가 정면으로 응전하겠다 말하는 다짐이 우뚝 솟아 있다.
시인이 이미 짚어냈듯 “모두가 성공했고 이야기가 거기서 끝났”(「멀티엔딩」)대도, 극이 끝나고 조명이 켜지면 우리 삶은 강박적으로 원래 있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언젠가 식사가 끝나”(「이야기꾼」)야 하는 세계의 원리가 그러하듯, 어떤 풍성한 발화 형태를 갖고 있대도 세상 모든 이야기는 종결의 필연이다. 그러니 이야기꾼의 근본 감정이 고통일 수밖에.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엔딩’에의 강조는 그만큼 강렬한 ‘재개’에의 욕구이기도 할 터. 이제 그는 “암전은 하나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부록 「제목을 입력해주세요」)함을 알기에, ‘엔딩’과 ‘재개’라는 무한 순환 고리 아래 “믿기/믿지 않기”(「CONFIDENTIAL」)의 간극을 펼쳐내며 시 쓰기의 반복, 그 진자운동을 시작하겠다 말한다.
물론 시 쓰기라는 정황에 대한 지시로 다수 수렴 중인 기원석의 삽화적 세계관과 그 변형 과정이 그리고 그의 내면적 서술 방식이 우울한 투정의 관습에서 탈출해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에 부친다. 또 그가 고안한 통사적이고 수사적인 방식이 관객–독자를 화자의 의식 안으로 끌고 들어오기에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에 부치려 한다. 그러나 시에 조의를 표한 그 자리에서 바로 자기 시를 재개하려는 포즈와, 갈까 말까 묻다가 기어이 부정확성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은 분명 중요하다. 괄호 치고 취소 선 긋고 싶을 감정의 잔여물과 시어에 내포된 모든 어둠마저 ‘되풀이해 읽어달라’는 시인의 당부는 신인의 ‘정면 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 성그나마 치열한 분투는 하나의 ‘엔딩’을 딛고 새로운 시작 (詩作)으로 나아갈 동력이 될 것이다. 많이 비장하라. 이제는 엔딩이 당신을 무서워하도록.
임지은: Alt 키, Shift 키와 Ctrl 키
시는 또 어떤 포즈를 개발할 수 있을까. 모든 게 바삐 돌아가는 월스트리트에서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로 공백되기를 자처했던 바틀비처럼, 바쁘디바쁜 현대사회 한복판에 누워 일어날 생각을 않는 시는 어떤가? 가령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지면으로 옮겨내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된다는 상상으로 상궤를 벗어나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다가 “똑똑하다는 것은 자신이 별로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아는 것이 시작”(「똑똑」)이라는 뜬금없는 말로 딱딱한 의성법을 똑똑하게 녹여보는 것은? 또 “이층 버스를 타고 싶었다고/콜럼버스처럼 외딴곳에 도착하고 싶었다고/그려 본 적 없는 캔버스에 써 내려간 이야기는 옴니버스라”(「유턴하는 생활」)거나, “본전을 뽑아야 한다지만/풀도 아닌데 왜 뽑아야 하는지/잘못 난 사랑니 같아서 뽑아야 하는지”(「무한리필」, 이상 강조는 인용자)와 같은 얼렁뚱땅 라임으로 느슨해진 포엠 신Poem Scene에 긴장을 제공해보는 것은? “모자 속에 사는 사람”(「모자 (속에 사는 사)람」)의 이름을 적당히 괄호 쳐 ‘모자람’으로 명명해보는 시시껄렁 농담도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지하철 역사에 울리는 안내 방송 「발 빠짐 주의」는 “바빠짐 주의, 바빠짐 주의”로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렇듯 임지은 시의 장막이 제일 처음 걷히는 지점은 그리 심각하지 않은 방식으로 난데없는 웃음을 유발하는 몇몇 대목이다. 일상의 몇몇 순간을 교묘한 언어유희로 시침질해 고안한 이 ‘꾸며진 자연스러움’은 과연 ‘기지wit’에 다름 아니다. 이에 더해 “엄마를 그리워하는 서정시”를 쓰다가도 “코끝이 찡해지는 감수성이 나와 어울리지 않”(「파꽃」)아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시인의 고백이 불쑥 튀어나오면, 젠체하지 않는 명랑에 문득 신용을 내주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 임지은의 시가 “정말 창피한 건 모르는 걸 아는 척하는 것”(「병원에 갔어요」)임을 아는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건 열어 보지 않아도/이미 알 수 있다는 믿음으로” 껍질을 잔뜩 부풀려 “어떤 의미에서든 물건이 되려”(「과대 포장」)는 존재 양태가 있다면, 임지은의 시는 단지 이렇게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주의: 안에 든 것이 뭔지 알 수 없음”(「밀봉된 캔의 역사」).
그러나 이렇게 ‘척’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아는 것을 얼마나 다르게 보고 또 어떻게까지 다르게 말할 수 있는가는 다른 문제일 텐데, 임지은에게는 그러한 시적 감각이 넉넉히 구비돼 있다. 그건 이번 시집 전반을 꿰는 ‘둥글둥글함’1)이라는 한 오라기 실을 따라가 보면 된다. 그녀가 포착한 사물의 세계는 ‘지구는 둥그니까’ 굴러가는 지구설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기보다,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사물들」)라는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리에 입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둥근 것을 좋아해서” 도처에 “학원 병원/식물원 동물원 유치원” 같은 ‘원’들이 널리게 된 서울은 제아무리 “동그란 웃음”이 가득하대도 그리 화기애애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이 관찰의 모양이 천진하다 해서 그 사유의 각까지 무딘 것은 아닐 터. “시간이 원을 좋아해서/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식물원에 와서 쓰는 동물원 시」)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우리 앞에 굴러온다.
또한 앞선 기원석의 시가 그린 반복적 순환 고리와 비슷하게, 임지은에게서도 “유턴의 유턴의 유턴을 반복하”며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유턴하는 생활」)가는 환원의 이미지가 발견된다. 여기서 ‘네모’와 ‘세모’는 반을 접어도 여전히 ‘네모’ 또는 ‘세모’를 유지하는 정확성의 문법을 따르는 반면, 동그라미는 마치 “보름달을 접으면 반달”인 것처럼 “접으면 접을수록 원으로부터 멀어지고”야 마는 불확정성의 문법을 따른다. 앞 문단에서 우리는 다종, 다기, 다양한 모양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화자를 만났다. 때문에 ‘원’을 접는 행위는 “네모를 깨뜨릴 수 있는 용기가” 되고, 이것이 동그랗게 순환하는 ‘시간’을 접는 제의적 행위로 전환되면 “지금 여기, 먼저 와 있는 미래를 찾을 수도 있”(「네모 없는 미래」)는 가능성까지 될 수 있다. “네모 안에 둥근 속을 감추고 있”는 세탁기의 모양을 관찰하다가 알칼리도 산성도 아닌 중성세제를 넣고는, “옳고 그름 사이에서 인생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작동”(「세탁기 연구」)함을 짚어내는 화자의 진술은 사실상 그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임지은의 시 안에서 획일성의 불합리를 향한 뾰족한 시선이 어떻게 둥글둥글한 일상 언어와 이중적으로 교직되는지에 주목해보면, 그 시의 융통성을 마냥 허허실실의 모양으로 독해하기 어려워진다. 이는 가장 일상적인 안식의 공간이 어떻게 존재 근본의 위태함과 불안을 동시에 견디는 시간으로 교직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둘 때도 잘 드러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시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을 만큼 깊게 심취해 있는 ‘잠’의 세계에 참입해봄 직하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임지은식으로 전유해보면, “토끼의 비극이 시작된” 지점은 거북이가 결승선에 통과하는 동안 “누구도 /토끼를 깨워 주지 않았다는”(「토끼잠」)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 이후 조각 잠을 자기 시작한 토끼의 수면 공간에는 자신과 바깥세상이 불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존재 근본의 불안이 깃들며 미세한 틈이 발생한다. 앨리스의 수면 역시 “깨고 싶으면 절대 깨어나지 못하고/깨어나기 싫어야 깨어날 수 있”(「앨리스 나라의 이상함」)는 양가적인 경험으로, 그 안과 바깥 간의 의도가 균열하는 동안 숙면이 슬금슬금 새어 나갈 것이다. 종합건대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말이 곧 “조금만 살아 있어도”(「가장 좋은 저녁 식사」) 된다는 말로 치환되는 임지은의 수면 공간은 현실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도저한 불안을 껴안으며 죽음에 한발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게다가 그런 일상의 수면이 기어이 ‘꿈’이라는 몽상 공간으로 한 걸음 더 강행되는 날에는 그 의미가 ‘시–쓰기’에 대한 정황과 맞물리며 보다 심원해진다. 먼저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2」에서 시인–화자가 ‘시’와 ‘꿈’이라는 사건을 나란히 둔 채 미세한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해보자. 마치 우리의 꿈이 매일의 수면과 무관하게 이따금씩만 찾아오듯, 시인에게 시 역시 아주 많은 “쓰지 않는 날” 가운데 “아주 가끔” 찾아오는 사건으로 서술된다. 특히 여기서 화자는 “시가 당신을” 쓰는 사건을 기다릴 뿐이며 “책상에 엎드려 꿈꾸는 것이” 차라리 “시적인 사건”에 가깝다고 짚어내고 있다. 또 “꿈을 꾼다는 건 좋아하는 발자국을 모으는 일이”(「자는 동안」)라는 대목도 눈여겨봄 직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으레 발자국을 ‘남기는’ 일에 집중할 때 임지은의 화자들이 이미 지나가고 뒷모습 형태로만 남은 걸음의 자국들을 ‘모으는’ 사후적인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시인의 관점에 대입해 그 의미를 확장해보면, 고안해낸 언어를 지면에 발자국처럼 찍어 ‘남기는’ 행위보다 이미 떠나 흔적 정도 남은 존재의 잔해들을 언어로 회수하는 행위에 그 시의 본령이 놓인 셈이다.
이에 더해 「미스치프와 시 쓰기」에 등장하는 창작자 ‘가브리엘’ 역시 글의 말미에 한 문장을 덧댈지 말지 한참 고심하는 자신을 보며 “문득 자신이 시인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고 진술하지 않는가. 아무도 요구하지 않은 마지막 터치를 위해 심각해지는 태도가 ‘시인다운 것’으로 언명될 때, ‘시인은 시를 짓는 주체인가?’라는 물음이 ‘시는 그 자신을 짓는 주체인가?’라는 물음으로 다시 씌어진다. 임지은에게 시의 다음 문장이 향하려는 벡터 방향은 오로지 시만이 아는 것이다. 그것이 어느 날 남기고 갈 흔적을 기다리며 한 줌 불안과 함께 적당한 달관의 잠을 취해보는 일은 곧 시인의 존재 미학이자 자아 실험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 언어는 필요 없”(「입장들」)다.
물론 위 문장을 언어에 대한 절대적 비신뢰나 언어의 무능에 대한 경계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언어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말에도 창문이 있고 먼지가 쌓인다는 것을” 잘 아는 시인은 다만 먼지를 떨어내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오해와 다툼과 싸움이/같은 뜻이”(「정리하지 않은 게 정리」) 아님을 짚어내는 작업, 즉 단어 간 차이를 섬세하게 사상하는 작업에 천착한다. 헤집어지고, 얼버무려지고, 툭 튀어나오고, 놓쳐지고, 잘게 부수어져 “낱낱이 된 감정을 조립”하고, “어떤 조각으로도/대체되지 않”는 시어의 형해를 보존하되, 의도로 지나치게 빽빽해진 나머지, 자칫 갇혔다가는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두부 되기를 경계할 뿐이다. 너무 무결한 의미들로 점철되어 “두 눈이 멀어 버릴 것같”이 흰 두부가 되는 것을, 임지은의 시는 원치 않는다. “끝끝내 출구를 몰라서 헤매”면서 “아주 더디게 천천히 상해”온 “상한 두부 요리 같은 것”(「상한 두부 한 모」)이 되기를 다만 바랄 뿐이다.
나는 자꾸 이 ‘상한 두부 요리’가, 그 시적 인식이 소박할지언정 사람 마음을 울리는 시로 읽힌다. 애써 말랑말랑해보려는 시어, 그 안의 적절한 안간힘, 이 모든 것을 후숙시켜 버무려낸 기지의 손맛을 느끼는 동안, 식탁 위에 시 언어가 지닌 밝음이 일순간 찰랑이고 사라진다. 시가 우리에게 주는 좋은 것들 중에 ‘삶의 긍정’도 있다면, 적어도 이 식탁에서만큼은 무르고 상한 삶도 긍정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포만한 시이다.
비장과 골계의 디졸브
시가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그래서 자꾸 실패할 것만 같을 때, 자기 안에 각종 사물과 행위와 감정에 눅진한 실체를 우려내어 더 깊어지려는 비장한 시가 있다면, 자기를 희석시킬 골계 한 컵을 들이부어 담백해지려는 시도 있다. 여기에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그 둘이 서로를 간간하게 쳐다보고 있는 완전한 하나로서의 양면임을 안다. 비장과 골계는 어떤 면에서 반대 방향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이 아니다. 기억하라. 시는 이 어드메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것이지, 단 하나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이렇게 보니 “둘로 시작해서 하나로 끝나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임지은, 「덕수궁에 왔다가 들어가지는 않고」)은 것 같다. “유한한 지면 앞에서 예정된 패배를 맞이하”(기원석, 「튜토리얼」, p. 16)는 것이 시의 숙명이라 말하면서도, “다음 이야기/그다음 이야기를/쓰고 기다리”(기원석, 「멀티엔딩」)는 사람이기를 택한 시인과 “시에 정신을 팔고 있지 않으면 아픈 것들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임지은, 「기본값」)진다는 한 시인의 고백은 과연 상통한다. 다시금 떠올려보니, 비장감 넘치던 오코노미야키 장인이 화려한 골계와 유머의 귀재가 되고 또 그 반대가 되는 데까지 단 몇 초면 충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 실패가 아니었다……! ’
- 1) ‘골계’라는 단어의 어원은 “돌제골계(突梯滑稽)”, 즉 둥글둥글한 성격과 모양으로 융통성 있게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각지지 않고 둥글게 돌아가며 기름같이 가죽같이 부드럽게 살며 문설주나 닦을 것인가?(將突梯滑稽, 如脂如韋, 以潔楹乎?)”(굴원, 「복거(卜居)」, 『초사(楚辭)』, 유성준 옮김, 혜원출판사, 1992,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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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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