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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4년 가을호(제77호)

비평·제도·대화 - 최근 비평의 존재 방식 논의에 대한 단상

고봉준 문학평론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 고석규 비평문학상(2006), 젊은평론가상(2015), 시와시학 평론상(2017) 수상.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 『문학 이후의 문학』이 있음.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 재직하고 있음.

1.

 

편집자의 요청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비평에 대해 짚어달라는 것이었다. 지난 10년간 비평이 새로운 의제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에서 출발해 그 원인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인 듯했다. 추측건대 기획자는 기후, 돌봄, 생태, 동물, 식물, 비인간을 둘러싼 논의가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문학적 소재로서 다루어진다는 것 이상의 질문을 담고 있는 비평적 담론이 많지 않다.”1)라는 지적과 의견을 같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0년간의 비평에 대한 나의 판단은 편집자의 그것과 조금다르다. 나는 “2010년대 중반이라는 전환기를 통과하며 비평이 다양한 혁신과 쇄신을 모색해왔다”2)라는 진단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 모색의 구체적인 내용은 박동억3)과 장은정4)이 잘 요약했다. 물론 그 혁신과 쇄신의 모색이 문단비평이라는 제한된 범위에 집중되어 문학 바깥과의 연관성이 약했다고 지적한다면 얼마쯤 동의한다. 다만 경험칙 이외의 근거는 없지만 제도에 관한 쇄신과 변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기후, 돌봄, 생태, 비인간 등으로 집약되는 비인간적 전회(nonhuman turn)에 관한 논의는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이며, 그것은 일찍이 우리가 경험한 적이 없는 규모의 담론이다. 어쩌면 그 엄청난 규모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 제대로 포착되지 못하고 한때의 유행처럼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비평에 있어 지난 10년이 뜨거운 시간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짧은 기간에 비평적 의제가 너무 많았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다양한 비평적 흐름이 각자의 방향을 좇느라 서로의 주제를 상호 간섭하는 일에 소홀하면서 팬데믹 이전과 이후의 담론 사이의 연속성을 억누르는 의식적단절5)이 존재하느냐에 대해 후속 논의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비평의 흐름을 잠시 살펴보자. 세월호 참사 직후에 비평의 주된 관심은 재난애도문제였다.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민낯을 통해 우리가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국가(정부)’의 역할에 대한 물음, ‘애도()가능성을 문학이 어떻게 떠안을 것인가에 대한 사유, 그리고 재난을 매개로 한 공동체적 연대의 구축 등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평적 응답의 주요 내용이었다. <304 낭독회>는 이 모든 응답의 중심이었다. ‘용산참사-4대강 사업-세월호 사건으로 연결되는 신자유주의적 현실은 문학과 그 바깥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촉발시켰다. 줄곧 문학의 자율성을 외치던 문학인들조차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학과 정치(또는 문학의 정치)’라는 논제는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담론적 계기가 되었다. 2016페미니즘 리부트이후부터 최근까지 한국 문학, 특히 비평은 엄청난 속도의 질주를 거듭해 왔다. 이 기간은 문학의 뉴 노멀(new normal)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수행된 비평 작업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던 문단 시스템에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부정할 수 없다. 신경숙 표절 사태로 촉발된 문학 권력 논쟁,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 김금희, 최은영 등의 이상문학상 거부와 윤이형의 절필 선언, 김봉곤과 김세희의 소설에서 촉발된 재현의 윤리 논쟁,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싸고 전개된 젠더/페미니즘/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의……. 이 모든 사건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하나의 그릇에 담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이 변화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은 사실이다.

이 글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비평에 대한 비평이 아니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단안에서 발생한 구체적 논란에 대한 뒤늦은 의견 표명도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비평/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는 이른바 비평적 대화 국면의 방향과 내용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텍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진 않지만 넓게 보면 최근의 비평 경향에 대한 소영현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몇몇 평론가들의 응답,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전유하여 비평적 대화라고 명명되는 흐름에 포함되는 비평이 이 글이 시야에 넣고 있는 전부이다.

 

 

2.

 

우리는 문학장에서 부정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것이 항상 비평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매번 비평이 대중 앞에 소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비평이 문학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판단, 따라서 비평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주요 문예지와 문학출판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특정 비평가의 책임을 따지는 것과 일반명사인 비평에 책임을 묻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무수한 비평가가 고루 책임을 나눈 것”6), 즉 비평가 집단 모두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차별적 평등주의는 사태를 왜곡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는 비평이라는 단어를 일반명사로 사용하여 발화할 때, 그래서 비평의 문제가 비평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든 비평가에게 적용될 때 발생한다. 비평에 관한 담론이 어떻게 이 일반화의 문제를 피할 수 있을까? ‘비평에 대한 비판이 종종 제도의 문제를 경유하여 제기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제도자체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실현되기 어렵고, 특히 어떤 문제들은 아예 선험적 조건”7)으로 받아들여져 사실상 난공불락이다. 그래서 비평에 대한, 혹은 제도에 대한 담론은 언제나 제도자체가 아니라 사람, 즉 주체의 문제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별다른 의심 없이 비평/가가 한국 문학을 만드는 제도에 깊이 관련되어 있”8)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비평가는 늘 권력과 힘,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책임의 주체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때 비평이 제도, 권력, 힘이라고 지칭되는 근거가 어떤 작품이 문예지에 실릴지를 결정하는 것, 어떤 작품이 문학상을 받을지를 심사하는 것은 문학 제도 내에서 비평의 아주 주요한 기능 중 하나다. 문예지에 게재되었던 작품들, 혹은 문예지에 자기 작품을 게재한 바 있는 작가의 작품들, 혹은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이 책으로 묶여 독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비평이 수행하는 추천심사의 기능은 가히 한국 문학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9)라는 것이라면 책임의 주체로서의 비평가는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비평가 가운데에는 “2023년에 비평가는 유령이다.”10)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작품에 대해 비평을 쓴다는 것이 괜한 권력 행사처럼 보일까 두려운 마음”11)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줄곧 비평장이 세 층위로 분할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비평 활동을 해왔다. 이들 세 층위를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중심, 주변, 그리고 그 바깥 정도가 될 듯하다. (어떤 이는 이러한 공간적 구분을 <백화점-마트-전통시장>이라고 냉소하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1-2-아마추어>로 분할되어 작동하는 프로야구 시스템이 더 적절한 비유일 듯하다.)

최근 비평계의 관심은 2010년대 중반 이후 비평의 존재 방식에 관한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비평 기능의 협소화”12)를 지적하는 소영현과 그 평가에 반론을 제기하는 젊은 평론가(최가은, 이지은, 성현아 등)의 반론이 논의를 견인하고 있다. 소영현은 2000년대 비평을 대상으로 비평의 형질 변경(‘지식인-비평가비평이 작가-비평가비평으로 이동과 그 귀결로서의 기획자-비평가리뷰어의 등장), 비평의 에세이화 경향, ‘비평하는-에 주목하는 비평적 목소리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지은은 소영현은 현재의 비평장을 거대한 몰락의 서사 안에서 이해한다.”13)라고 규정하고 페미니즘적 전회 이후의 비평이 제 역할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비평 정신의 발현으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개별 작품에 밀착된 비평은 소영현에게 비평이 권위를 잃고 이론을 물리치고 작품 자체로 내려앉은” ‘비평의 리뷰화에 가깝지만, 성현아에게 이것은 작품으로 흘러넘친 현실로의 거리 좁힘이자 다가섬’”이고, 나아가 새로운 독해의 도구를 길러내려는, 자발적이고도 치열한 비평적 시도이다.”14) 성현아는 최근 비평에 제기된 비판(“다른 이들을 지도하거나 교정하려 들지 않기에 무해하다는 점을 자랑삼는 최근 비평의 경향이 첨예한 비판 정신을 잃고 문학 너머를 성찰하지 못하는 협소한 비평에 머물게 된다는 우려”15))심정적으로 동의를 표시하면서도 비평의 리뷰화 경향 속에 비평가들의 능동적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최가은 역시 자신이 “‘피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으로 비평 활동에 임하는 중임을 강조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비평의 권좌를 가루가 되도록 부수는 것만이 반드시 좋은 태도’”가 아님을 강조한다.

위에서 언급한 몇 사람을 포함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등단하여 비평 활동을 하는 젊은 평론가들의 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즉 그것을 문학 제도권이 수호해온 문학성을 허물고 문학장을 재구축하려는 시도”16)비평장에 진입한 새로운 주체들이 나름의 지향과 의지를 가지고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활동하는 수행성”17)이라고 평가할 것인지의 문제, 나아가 그들의 글쓰기가 제도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구체적인 충돌의 지점이다. “문학장의 재구축이라는 표현처럼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각과 존재하고, 선험적인 제한 조건을 인정하면서도 능동적 실천”,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활동하는 수행성”, “우리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책임과 실천과 수행같은 긍정적 실천성을 읽어내려는 시각이 존재하는 듯하다.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나는 그것을 지금 판단할 이유가 없고, 아울러 젊은 비평가들의 활동을 제도라는 선험적 조건을 앞세워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주요 문예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비평 지면은 물론이고 문예지 전체의 방향 또한 젊은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일부, 즉 편집위원이 아닌 비평가는 호명에 의해 글을 쓰지만 기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집위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지금은 젊은 평론가들이 주요 문예지를 주도하고 있고, 그들이 선호하는 일군의 젊은 평론가들이 호명의 과정을 거쳐 제도에 안착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행위 일체를 온전히 능동적 실천으로 간주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겠지만, 지금이 비평의 자리가 협소해진 시대라고 해서 비평적 활동 일체를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대학에서의 문학 연구가 그러하듯이, 비평 또한 역사성을 지닌다. 비평 형식은 평론가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현존하는 비평이 만드는 것주어지는 것사이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현존하는 비평은 이미-항상 복잡한 논리와 욕망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평의 존재 방식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최근의 비평적 논의를 읽다 보면 불현듯 자꾸만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사실 소영현이 지적하고 있는 비평의 존재 방식에 대한 문제는 오래전부터 반복적으로 제기된 것들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비평의 존재 방식에 관한 문제는 곧 제도와 연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논의에 편집위원’, ‘문학 권력’, ‘위계’, ‘시스템’, ‘문학상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 제기가 대개 콤플렉스의 산물 정도로 치부됨으로써 비평적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반면 소영현이 최근 발표한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은 상당한 후속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다시피 문학 권력비판에 대한 이전의 반응은 만약 문학 권력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문학 그 자체의 힘이라는 뜻일 것이다. (…중략…) 문학에는 그런 것들을 강제하는 힘이 있다. 그것이 문학 권력이다.”18) 정도였다. 소영현의 글이 주로 문학과 사회라는 매체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나는 최근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비평가들의 의지와 노력, 예컨대 비평가는 스스로 예속된 주체임을 인식하며 동시에 그 예속화에 저항해야 한다.”라는 진술에 걸려 있는 진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저항은 다짐이나 선언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각종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지목되었던 평론, 특히 주요 문예지를 주도하고 있는 평론가들 또한 비슷한 태도와 다짐을 갖고 비평 활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을 의심하거나 냉소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어떤 이들은 권력으로 지목되거나 비판을 받는다. 결국 문제는 비평장에서, 문단/문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어떻게 저항을 실행할 것인가를 구체화하는 일이며, 이 지점에서 각자의 전략적 선택은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제도의 바깥에서 그것을 비판하는 일은 쉬워도 제도 안에서, 제도의 부분으로 기능하면서 그것과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갖는 취약성은 그것이 이미-항상 제도에 포획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즉 제도의 바깥은 그것이 내부화되는 순간 정당성과 힘을 상실한다. 과거 문학 권력비판론자들의 한계도 바로 그것이었다.

비평에 대한 제도의 영향력은 단순하지 않다. 한국에서 비평은 출판저널리즘과 대학, 즉 학계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문단학계를 왕래하면서 활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평론가가 영향력 있는 평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이중성은 문단과 학계를 바쁘게 오가면서 활동해야 하는 열정의 문제가 아니다. 주요 문예지에 글을 발표하고 대형출판사에서 평론집을 출간하는 일이 비평가/연구자로서 상징 자본을 쌓는 것과 무관하지 않으며, 메이저 문예지의 편집위원이라는 상징 자본은 대학에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것은 과거, 아니 현재에 주요 문예지의 편집위원들이 대학에 자리를 얻은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90년대 이후 패턴화된 비평가의 생존방식이었고, 이 시스템은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제도에 저항한다는 것은 곧 상징 자본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대다수 평론가가 주요 문예지의 청탁-원고의 종류와 상관없이-을 거절하지 않는/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도의 영향력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읽은 비평에서 발견한 아래의 문장은 비평의 저항과 관련하여 무척 인상적이었다. 제도 안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이 종종 간과하는,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되어 인용해 둔다.

 

짧게 덧붙이자면 비평장이 공회전한다거나 침체되었다는 진단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동안, 특정한 비평적 경향에서 소외되는 작품들이 생기지는 않았는지를 물어볼 필요도 있다. 가령 문예지의 기획이 계절을 바꾸어 재생산되는 현상은 메타비평적 진단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형성되는 모종의 분위기로 인해 호명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작품들의 행방을 묻는 일 역시 중요할 것이다.19)

 

3.

 

제도에 관한 어떤 이야기는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한정된 지면에서 누군가를 언급하는 것은 이미-항상 선별적인 언급이 될 운명이기에 모두를 언급할 수 없다면, 아무도 언급하지 않을 것”20)이라는 이은지의 주장이 그렇다. “비평이 평론가를 소외시킨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평론가로서 그가 경험한 상처와 감정적 앙금의 깊이를 헤아릴 능력이 내게는 없다. 그러나 평론가의 비평 행위는 가장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방식으로조차 언제나 선별하고 평가하며 불러들이거나 배제하는 제도적 기능을 수행한다.”21)라는 홍성희의 말처럼 비평적 글쓰기는 호명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그 호명은 무대 위의 조명과 같아서 특정한 대상을 비추는 순간 나머지 전체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는 배제의 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누구도 호명하지 않는, 그리하여 모두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선택-배제의 문제를 논리적으로만 이해하면 어떠한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선택이 항상, 반드시 배제로 귀착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선택이 비평가의 자발적 판단이 아닌 제도의 효과로 행해질 때, 그리하여 비평가 집단의 선택이 몇몇 이름에 집중될 때, ‘선택은 결국 배제의 효과를 낳을 것이다. 최선교가 호명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작품들의 행방을 묻는 일이라고 이야기한 것에도 이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비평, 특히 문학장의 문제를 선택의 다양성이 결여된 것에서 찾을 수도 있겠다. 독자들은 주요 문예지와 대형출판사가 저마다의 문학적 기준, 혹은 미적인 지향에 따라 작동한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주요 문예지와 문학출판의 단행본 리스트를 살펴보면 의외로 동질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비평의 선택이 조금 더 적극적이어도 좋을 듯하다. 비평에 있어 공평무사함이 언제나 좋은 태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제도의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 몇 년 사이에 두 차례 쇄신을 단행한 자음과모음의 사례는 상당히 징후적으로 느껴진다. 2010년대 중반 이후, 페미니즘 리부트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의를 거치면서 비평은 윤리적 전회를 감행했으며, 최근 비평계의 화두인 대화소통문제 역시 그 연장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비평적 대화라는 흐름을 견인하고 있는 자음과 모음편집위원들의 실험은 제도에 관한 문제를 사유할 때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한다.

 

우리는 공유재로서의 잡지의 존재 방식과 그 창조적 분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잡지의 틀에 관해 고민했다. 그 실천 방안의 하나가 편집권 자체를 분유한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이른바 문단의 여러 제도 가운데 꾸준히 비판되어온 것이 바로 편집위원제도의 운용 방식이다. (…중략…) 안팎에서 비판되었던 문학권력이 탄생되는 데도 이 제도가 모종의 역할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을 일부 개방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문학 잡지 기획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중략…) 주제나 지면의 형식도 일절 정해두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를 할 수도, 좌담을 할 수도, 작품만 실을 수도 있다. 의제를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고, 필진도 편집자의 취향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할 수 있다.22)

 

2019년 여름 자음과모음은 혁신호를 출간하면서 공유재로서의 잡지의 존재 방식과 그 창조적 분유의 가능성을 실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다소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문예지의 편집위원제도가 문학권력문제와 연결된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편집위원의 권한을 분유하겠다는 것이 이 실험의 핵심이다. 비평은 애초에 문화산업의 일부로 출발했기에 자본의 개입은 개별 비평가나 독자가 극복하거나 물리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험적 조건”(인아영)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문예지의 존재 방식을 공유재로 설정한 대목은 다소 놀랍다. 이것은 실제로 문예지가 공유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편집위원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유함으로써 많은 문학인이 참여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겠다는 다짐이라고 이해된다. 왜냐하면 commons, 즉 공유지나 공공재는 문턱이 존재하지 않아 누구든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발행 주체와 권한/책임이 명확한 문예지에 문턱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공성 문제는 오늘날 공공미술 분야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하다. 가령 정부나 지자체가 예술가들에게 공동의 작업공간을 제공했을 때 표면적으로 그곳은 공공과 공유의 공간이라는 말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공통재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들이 활동을 통해 이 공적 공간을 대안적인 성격을 지닌 공통장으로 전유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슈인데, 이것은 공유지, 공공재, 공통재 등이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활동을 통해 전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비추어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자. 그러면 출판 자본과 편집위원시스템이 결합되어 작동하는 문예지를 어떻게 공통재(commons)로 바꿀 것인가가 편집위원들의 고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음과모음의 제안은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을 일부 개방하는 것이다.23) 물론 이러한 실험이 과거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투고제를 시행한 『21세기 문학의 사례나 몇몇 문예지에서 자유 비평 지면을 할애한 것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방은 그 정도와 영역을 결정하는 권한이 편집위원에게 있다는 것, 특히 게스트 에디터제도를 도입해도 게스트를 선발 권한이 편집위원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자음과모음편집위원들의 고민과 실험의 가치를 비난할 생각이 없다. 다만 제도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자음과모음의 실험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편집위원의 권한과 역할의 축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편집위원의 권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게다가 편집위원이라는 제도의 문제를 게스트 에디터라는 사람의 문제로 치환하면 동일한 문제의 반복을 피하기 어렵다. “필진도 편집자의 취향과 영향력을 발휘하여 정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결국 (비정규) 편집위원이 한 사람 추가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의 취향과 영향력에 따라 필진이 결정되는 것과 같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편집위원이라는 제도가 문학권력으로 비난받지 않기 위해 편집위원의 역할과 권한을 축소하는 것,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역할과 권한을 포기하는 방식이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의 비평은 어쩌면 조금 더 힘을 가져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그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비평이 문학의 권력과 위계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화 그 자체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대화를 통해 읽고 쓰는 이들이 함께하는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 그리고 삶의 감각과 문학의 경험에 대한 질문과 인식을 불러오는 것이다.24)

 

2023년 여름 자음과모음“4년 만에 다시 작은 혁신을 하면서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라는 방향성을 제시했다. ‘대화 장치라는 표현에는 한국 문학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대화의 재능과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이 투영되어 있다. 홍성희는 비평이 중심이 되어 문학에 대한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자음과모음의 제안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했다. “이전의 혁신호에서 가리고자 했던 비평의 권력적 측면을 오히려 전면화하면서 그 권력을 비평의 효능감으로 직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있는 힘껏 솔직하지만, 권력을 담는 그릇으로 대화라는 단어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재차, 수사적인 방공호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25) 나는 자음과모음이 제시하는 대화가 기만적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화수사적인 방공호에 불과한 것인지는 당장에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화적 비평, 혹은 비평적 대화의 긍정성이 어느 정도 열려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비평적 대화가 궁극적으로 동시대 문학이라는 장의 구성과 참여를 위한 것이라는 지점에서는 주저하게 된다. 저기에서 이야기되는, 그러니까 비평적 대화를 통해 구성되어야 하는 동시대 문학의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그것이 몇몇 대형 문학 출판사와 거기에서 발행하는 메이저 문예지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일지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동시대라는 개념이야말로 한낱 수사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굳이 대화를 통해 다시 구성해야 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대화가 아니라 불화로 나아가야 한다”26)라는 지적은 설득력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비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들, 이른바 선험적 조건처럼 주어진 것들에 대해 질문하지 못할 때, 동일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되돌아오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 1)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9쪽.
  • 2) 강동호, 「대화적 비평을 모색하며」, 계간 『문학과 사회』 2023년 가을호, 33쪽.
  • 3) “평론가들은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뿐만 아니라 정동, 포스트 휴먼, 인공지능, 생태주의와 같은 의제에 예민하게 반응해왔고, 그와 관련된 사례와 작품을 세심하게 접근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85쪽.
  • 4) “2020년 팬데믹 이후, 비평장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하다. 팬데믹을 기반으로 한 기후 위기와 비인간에 대한 재인식, 인간 사회 속에서의 돌봄, 그리고 2018년부터 본격화된 에세이 열풍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장은정, 「연대 실패」, 웹진 『비유』 63호, 2023.3.
  • 5) 장은정, 같은 글.
  • 6)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89쪽.
  • 7 인아영, 「다가오는 것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287쪽.)
  • 8) 진송, 「한국문학에서 동시대적 화자의 재구성」, 웹진 『비유』 64호, 2023.12.20.
  • 9) 같은 글.
  • 10) 위의 글에서 재인용.
  • 11) 김정빈, 「비평가의 권위와 전문성, 그리고-」, 웹진 『비유』 34호, 2020.09.29.
  • 12) 소영현, 「비평을 찾아서: ‘K-’ 시대의 비평」,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15쪽.
  • 13) 이지은, 「라운드어바웃」,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56쪽.
  • 14) 같은 글, 59쪽.
  • 15) 성현아, 「비평(非平)한 비평(批評)」,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28쪽.
  • 16) 같은 글, 34쪽.
  • 17) 인아영, 「다가오는 것들」, 계간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286쪽.
  • 18) 권희철, 「눈동자 속의 불안-2015년 가을호를 펴내며」, 계간 『문학동네』 2015년 가을호,
  • 19) 최선교, 「대화의 조건-『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를 읽고」,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겨울호, 33쪽.
  • 20) 이은지,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77쪽.
  • 21)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12쪽.
  • 22) 안서현, 「새로운 ‘자음과모음’을 열며」, 계간 『자음과모음』 2019년 가을호, 4쪽.
  • 23) “문학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 한 출판사에 모여 기획과 청탁을 통해 문학 담론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뒤엎을 수 없다면, 완전히 열려 있는 일부 지면을 통해 그 폐쇄성을 극복해보고 싶었다.” 노태훈, 「게스트 에디터를 닫으며」,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봄호, 4쪽.
  • 24) 안서현, 「대화 장치로서의 문예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여름호, 4쪽.
  • 25) 홍성희, 「두께만큼 깊은」,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 18쪽.
  • 26) 박동억, 「누구에게 말 건넬 것인가」, 계간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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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미래를 꿈꾸는 서정시는 현재의 삶을 구할 수 있는가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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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1)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 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 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 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3)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오문석, 「서정적 경험으로서 '상호침투'」, 『한국시학연구』 제80호, 2024, 132면. 2) 고봉준, 「서정의 고고학」,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 b, 2020, 239~42면. 3) 성현아, 「시와 복고: 다시 만난 서정」,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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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가은 사랑을 사랑하라 ―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

사랑을 사랑하라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1) 1  '사랑'이 무엇일까? 역사가 오랜 시간 직면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적대와 혐오, 분열과 갈등. 우리 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이란 오히려 이런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특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소수자와 약자, 타인 및 '나'와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을 향한 오늘날의 적의와 냉소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유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는 동시에, 폭력은 오직 또 다른 폭력을 낳기만 하는 지옥과 같은 풍경. 이런 때 사랑은 어딘가 순진하고 순정한 무엇, 때로는 음험하고 지배적인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의 문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누락된 사랑, 무언가가 함부로 전제된 사랑의 문제일까?  '사랑'을 '윤리'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 지성사의 논쟁 테이블에서 '사랑'이 꾸준히 배제된 현상이 그것에 내재한 모호함을 충실히 사유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사랑의 본래적 위험성이 철저히 멸균된 '안전한' 사랑에의 열망. 세계의 복잡성을 하나의 당위로 봉합하는 무책임한 약속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집착. 이처럼 사랑에서 중요함-위험함을 박탈하는 온갖 종류의 사고는 '사랑' 자체는 물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타자와 윤리의 문제, 또한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의 문제를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적용하는 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사랑을 제대로 예찬할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의 사랑론은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 모두의 '사건'으로 지속시킬 힘을 알려준다. 본질과 구별되는 사랑의 논리, 사랑의 특수한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내재한 그런 힘에 있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2)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3)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동일성의 무자비한 폭력과 차이의 무차별적인 관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사랑'을 사유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하나의 만남"(33쪽)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은 통념과는 달리 정태적이고 순수한 개념이거나 행위자의 부차적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자연적 상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지대. 이와 같은 속성이 부각되는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문학의 오랜 친구이다. 대다수 서사의 원형에 비극적인 사랑의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문학과 사랑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내용에 국한된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자 믿음으로서, 우리가 다룰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각오'로서 문학과 동행한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평론집은 우리에게 그 오랜 사실을 새삼 환기하려는 것 같다. 2  황도경의 일곱 번째 비평집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는 우리 시대가 좀처럼 쉽게 발음하려 하지 않는 두 단어들, 그러니까 사랑과 비평을 나란히 내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다. 비평가는 서사와 서사 속 인물들의 행위, 말, 심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입는 모든 종류의 함께-있음을 '사랑의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그들 이야기와 장면의 세부가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선언으로 비평가에게 당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 내가 상대에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중략..)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4)  우연하고 우연적인 만남,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들과의 무분별한 마주침은 적의와 혐오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어떤 종류의 우연한 만남은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부터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분열과 분리의 감각을 하나의 통합된 도덕적 세계의 형상을 향해 떠미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을 “견고한 구축”으로, 말하자면 마치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처럼 우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행위가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황도경에게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언감생심”으로 만드는 "절망과 분노"(3쪽)의 시대인 한편, 그럼에도 한켠에선 "사소하지 않은" 사랑의 선언들로 충만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비평가는 총 세 가지 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사랑의 테마를 재구축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평론집의 구성과 배치는 각각 사랑에 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부 '사랑의 각오'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바깥은 여름』의 소설집과,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단편 소설을 거쳐, 2부 '사랑의 방식'에서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승우 『목소리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수완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의 한국 소설과 더불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및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 영화 ,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이옥'에 대한 비평으로 이를 증명한다. 3부 '사랑의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김영하 『작별인사』,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같은 비교적 최근 문학 작품들은 물론이고 영화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이동하며 사랑을 마주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오', '방식', 그리고 '질문'을 '사랑'과 나란히 놓는 이 평론집의 배치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속격 조사 '의'의 두드러진 역할을 상기한다. '의'라는 조사의 존재는 사랑을 다양한 속성을 소유하는 사물처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 뒤에 놓인 단어들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 사랑의 방식, 사랑의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오'라는 최종 형식 또는 태도로 종합하려는 비평가의 욕망에 닿을 때, 우리는 사랑이 제 본위를 언제나 초과하는 형식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는 법, 달리 말해 우연성을 함께 있음으로 지속시키려는 예의 그 힘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은 비평집이 구체화한 순환의 논리처럼 각오-방식-질문 그리고 다시 각오로 돌아오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의 삶보다 나 자신을, 내 삶을 끌어안고 사느라 전전긍긍이었다고, 아버지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돌아올 적이면 놓지 않던 아버지의 손에 담겼을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의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와 아버지가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렸을 만다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삶을 끝냈건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게 출렁거려서, 나는 억울하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때 왜 그랬느냐고, 소설 속 '나'를 따라 구시렁거렸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손도,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넨 적 없는 나는 그리움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마음을 소설 속 말로 대신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고. (217쪽)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스스로의 삶과 나란히 두며 읽는 글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가 평론집의 '중간'을 표시한다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다.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와 전직 경찰관이었던 나의 아버지"(214쪽) 사이를 소설의 문장과 비평의 문장으로 부단히 겹쳐 놓는 비평가의 자기 글쓰기는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타자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자, 타자 그 자체를 향한 '질문'이며, 또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삶의 '각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마주친, 나의 아버지와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현실의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언가/누군가와의 만남이 어떻게 방식과 질문 그리고 각오를 아우르며 차이로서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것은 이 모든 '선언'이 언어와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바디우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우연성을 시간 속으로 고정시키는 일. 그것은 언어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선언'에서 촉발되고, 이 출현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충실하게 지속하도록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비평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설 속 아버지를 겹쳐놓으며 반복하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모든 마주침의 철저한 우연성과 여전한 타자성은 물론이고, 그것의 지속성, 끈덕짐, 약속과 충실성을 수행적으로 실현한다. '알지 못한다'는 말로 끈덕지게 마주하는 우리의(타자의) 세계. 이 사랑의 방식은 곧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필멸의 삶을 살고 있으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신의 삶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인식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리고 신이란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라고. 나는 이 사랑의 신을 믿고 싶다. (192쪽)  미래를 낙관하기. 다소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낙관'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필멸의 삶에 가능한, 그리고 가능해야만 하는 유일한 태도일 수도 있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혹은 이천사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 우리의 유한한 생에서도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 덕분일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래의 기억'인 이유는 타인의 기억이란 결코 온전한 내 것일 수 없는, 제대로 도착한 적 없고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의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말한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미래의 기억'이 다름 아닌 나와 너의 무한한 다시 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의 선언이 남기는 찜찜하고 불가해한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기억을, 그리하여 미래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아내, 아들, 동생이 된 자리에서 그들은 신, 아버지, 남편, 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 하느님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며,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식을 죽이고자 했을까? 남편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삭은 왜 에서를 편애했을까?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337쪽)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충만한 기쁨보다는 부당한 부조리만을 더 많이, 더 자주 남기는 세상을 향해 섣부른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동시에, 우리가 앞서 살핀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문장의 반복을 통한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339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우리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문장의 반복을 통해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을,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할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각오-방식-질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각오'라는 최종의 형식을 향해 운동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내재한 위험성과 그 위험성을 통과하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지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의지가 매순간 새롭게 선언되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7쪽)이다. 그러나 사랑의 징표인 고통과 고통의 표식인 사랑은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고 선후관계를 마구 뒤집으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 존재를 쉽사리 증명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그것을 감내하며 다른 생성을 추동하려는 투지, 말하자면 사랑의 방식을 이행하고 질문을 이어가려는 “시간 속으로의 참여"5)를 마주하는 이에게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비평가가 작품이라는 우연성과의 마주침을 “시간 속으로의 참여"로 내던질 수 있는 계기는 단어와 문장, 그로 인한 삶들의 겹침에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비평가가 발견한 '눈'의 겹침은 사랑의 '각오'를 촉발한 한 사례로 보인다. 이때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중략..) 그때 눈은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몸이자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할 최후의 보루로서의 몸이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내'가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과 폭력의 역사를 주시하기 위해서는 눈의 통증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픈 눈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4쪽)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라간 많은 먼지와 재가 결합한 것이고, 하얀 눈송이 안에는 수많은 결속을 통해 이루어진 텅 빈 공간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가볍다는 것은, 눈이 근본적으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눈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기도 하다. 검은 나무들을 심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나무들을 덮어주기를 기대했던 것도, 눈이 갖는 잠재적 비상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33쪽)  한강의 작품에서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통증'은 같은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은,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고정된 단어는 역사적 의미에 철저히 종속된 무엇인 동시에, 그 의미를 스스로 초과하고 다른 의미를 파생하는, 단지 유한하지만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발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눈'과 '눈'의 겹침으로 발견을 다시 쓰는 비평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르와 문법,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사랑의 선언들은 반드시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다시 찾아내야만 하"6)기 때문이다. 사랑에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고안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질문을 생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신성할 만큼 총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재발명되는 것으로 지속되는 무엇이다. 랭보와 바디우의 연이은 이 선언에 더해 『사랑의 각오』의 비평가는 메리 올리버의 질문을 되새기며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한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184쪽) 1) 이 글은 황도경의 비평집 『사랑의 각오』를 다룬다. 이하 문장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년, 27쪽. 3)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같은 쪽. 4)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5~57쪽. 5)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9쪽. 6)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62쪽.

계간 문학인 최가은 사랑비평리뷰 2025
최다영 What is Love :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 /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봄날의책, 2024)

What is Love1)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봄날의책, 2024) 너도 사랑해버리지 않게 조심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인식인가, 관습(적 반응)인가, 선언인가, 계약인가. 물론 층위가 다르므로 모두 정답일 것이다. 지배적인 미디어 문법의 경우, 일련의 반응을 거쳐 어떠한 상태의 지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인식에 도달한 뒤, 계약으로써 배타적 관계를 결단한다. 서로를 익명의 군중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하기를 합의하기에, 어느 때든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기대를 품고 요구할 수 있는 상대로 자신을 설정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인식에 그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저 계약만으로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혹은 암묵적인 합의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미 사랑의 수행을 한다. 그런가 하면 우정에서의 친밀감과 로맨스의 구분이 쉽지 않은 무연정자는 특권화되는 사랑의 위계를 거부하며, 모노가미 사랑으로 진입하더라도 이는 상대가 요청하는 책임감의 결심에 가깝다. 성적 접촉을 (식으면 식었지) 사랑의 필수 요소나 심화된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무성애자에게 파트너십의 약속은 섹슈얼한 행위의 전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 폴리아모리에게 사랑은 모노가미로 상상되지 않거나 그러한 관계가 다중화된다. 자신의 상태와 반응에 사랑이라는 명명을 붙이길 거부하는 이들도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간 우리 비평은 규범적 인식 틀에서 사랑으로 명명되지 않았던 사랑들, 승인과 무관하게 이미 자유롭고 활발히 존재하고 있던 퀴어한 사랑들을 가시화함으로써 우리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음을 세밀하게 포착해왔다. 동시에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급진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사랑의 퀴어함에도 주목하여 유의미한 성취를 축적해왔다. 이렇듯 그간 비평에서 ‘퀴어한’ 사랑들과 사랑의 ‘퀴어함’을 적절히 자리매김해왔다면, 이처럼 무수한 사랑이라는 포스트잇 아래 각자 전제하는 사랑이 어떠한 함의와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다채롭게 정의되는 다른 사랑들에 대한 사전을 우리 안에 더 많이 확보하여 획일화되지 않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상상 가능한 사랑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성애의 규범화를 비판하고 성적인 것을 주변화하고자 하는 무성애적 관점으로 이전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전체’로서의 개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데이터베이스 섹슈얼리티와 같이 사랑의 대상을 재고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의 첫 생애부터 함께한 시어일지라도, 언젠가부터 시집을 펼치면 사랑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어가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동원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랜 의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랑’을 자주 말하는 시인들에게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간혹 사랑이 봉합을 위한 기능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사랑이라는 시어의 어떠함을 신뢰하는 걸까.  그러한 작업의 출발지로서 이 글은 사랑이라는 시어가 자주 발견되는 최근의 두 시집 속 사랑의 양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 시집 모두 사랑에 대한 독특한 함의를 보여주는데, 유선혜 시집의 경우 가장 동시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눈여겨봐야 할 시집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은 모두 ‘멸종’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공유하고 있어 최근 포스트아포칼립스 시들이 자주 발견되거나 멸종, 멸망 등의 시어가 잦다는 진단5)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시에서 이러한 시대적 정조를 함께 포착할 수도 있을까. 백인경 시집의 경우 표제작 외에 ‘멸종’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동에서도 다소 멀어 보이지만, 종말과도 같은 끝의 순간과 침범에 대한 인식이 사랑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의 지형도를 차례로 따라가보자. 큐트니스 매니페스토 The Cuteness Manifesto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해, 라고 발음하는 수밖에 없다고. - 「마녀와 로봇의 사랑」 부분  사랑을 모른다면서 왜 사랑을 말해야만 하는 걸까. 그에 앞서 유선혜 시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구멍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구멍」은 각 존재의 “비물질적인 부분”에 있는 구멍을 상상한다.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의 / 타고난 결핍 / 타고난 허무 / 타고난 무의미 / 타고난 균열 / 타고난 어긋남”이 구멍이라 칭해지는데,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으로 인해 존재들 간에는 강한 인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구멍의 명령은 “빈 곳을 채워 넣으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허기에 패배하여 일단 “뭐든 입에 넣고 보는”(「괄호」) 장면이 빈번히 등장한다. 구멍에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슬픔에 의해 상시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것인데, 이로 인한 과식은 다시 슬픔을 형성하고 슬픔은 또다시 허기와 과식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형성된다.6) 이들은 “폭식과 거식의 배턴 터치”를 멈출 수 없다. “자살 기도 직전에”도 “짜장면 (먹어줘)”(「집단 상담」)를 외친다.  한편 구멍은 몸에 난 상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구멍은 화자들 대부분이 일상을 잘 챙기지 못하고 방치하는 점과 연관된다. 가령 「괄호」에서 “괄호 쳐버린”다는 건 시급한 일을 당장 해결하지 않고 미루는 것을 뜻하는데, 정작 괄호를 쳐야 하는 일이 “과도한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을 괄호 친 결과 머리에 딱지가 지고 그걸 뜯으니 구멍이 난다. 딱지가 생길 시간조차 못 참고 뜯어버리는 모습은 허기를 못 참고 음식을 퍼먹던 모습과 겹쳐진다. 「악의 문제」에서도 ‘나’의 방은 온갖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데 이 시집에서 방이나 행성은 화자의 확장된 몸이자 내면을 포함하므로 엉망진창인 방의 모습은 함부로 다뤄지고 방치되는 것이 생활 영역에 한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자주 일상의 방법을 잊어버리”(「흑방의 메리」)는 이들은 “겨우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사이비 리듬」)는 일조차 버겁다. 회피가 습관이 되어 관계에서의 미묘한 감정적 균열마저 방치해버린다(「아이」). 이처럼 망가진 일상을 방치하여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는 아물지도 못하게 계속 헤집는 동안 구멍은 자꾸만 커져간다.  먹어봤자 슬퍼지고 뜯어봤자 커지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당장의 슬픔과 욕구에 복종하는 화자들. 이는 만성적 우울감의 한 증상인 걸까[“나는 단지 우울하다고만 했다”(「반납 예정일」)]. 그러나 이를 단순히 불행에 길들여진 병리적 증상으로만 진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그보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헤집고 뜯어버리는 태도에 다시 주목해보자. 이 화자들은 조금 다치거나 망가질수록 오히려 “안심”(「물어뜯기」)한다. 얼마간 불행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이들은 나아가 일부러 상처를 키워서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 마음을 쏟아 사랑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제 상처를 귀여워하며 반려 구멍 삼아 키우는 것이다[“제가 키우는 귀여운 구멍이랍니다”(「괄호」)].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에서도 ‘나’는 종양을 침입자나 오염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더러운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귀여운” 덩어리가 자라났다는 것에 놀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며, 악의는 없었다며 종양을 변호하기도 한다. 왜 제 상처를 귀여워하고 상처에 사랑을 퍼붓고자 하는 걸까.  여기서 귀엽지 않은 것들마저 열렬히 귀여워하는 유선혜만의 독특한 사랑의 양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귀여움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당대의 중요한 감수성을 함께 암시한다. 이때 귀여움이란 대상을 장악 가능한 형태로 데포르메 모에화하는 심리적 안정화 기제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래 지속되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일종의 충동이자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귀여움의 핵심은 “모든 진지한 것이 귀여움으로 녹아내리게 하는 데”7) 있다. “목적 없는 표면들로 욕망을 분산시킴으로써”8) 감당도 통제도 안 되는 일상적 위기에 심각성을 소거해 어떻게든 수용 가능한 형태로 변형하는 것이다. 가령 남자에게 뺨을 맞는 순간 배경으로 등장하는 “”(「우리는 못 말려」), “이건 내 폐예요 / 조금 지저분하죠? / 제가 골초라......”(「임무」) 너스레를 떠는 모습 등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진지함을 사소하게 만드는 데 복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귀여움은 종말의 정동이 팽배한 오늘날, 만성적으로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생존의 기술과 연관된다.9) 강아지 고양이가 귀여운 이유가 뭔지 아니? 귀엽지 않은 개체는 인간이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란다. […] 창밖에는 모텔을 나오는 연인들의 풍경뿐입니다. 그러니까 생존은 아 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게 그때 생각난 문장. 애인은 당분이 듬뿍 들 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귀여운 컵에 담긴 푸딩과 요거트를 퍼 먹을 것입니다. 나와 애인은 발암물질과 인공감미료도 아 주 많이 먹을 것입니다. - 「원룸에서 추는 춤」 부분  귀엽지 않으면 죽는 건 비단 동물들에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귀여워하기’를 넘어 자신을 사랑스러운 소비 상품으로 만드는 ‘귀여워지기’ 또한 생존 본능에 근거한 행동으로서 중요하게 포착되기 때문이다.10) “자신의 수동성을 극복하는 데 관심이 없는”11) 것처럼 보이고 “불가피한 것에 자발적으로 항복”12)을 미리 해버리는 유선혜의 화자들은 전 지구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귀여움이 동시대적 감각이 된 현실을 시사한다.  한편 구멍은 개인의 가장 깊은 심연이기 때문에 숨겨야 할 치부이기도 함을 유선혜의 화자들은 학습을 거쳐 알고 있다. 제 속을 보여주고 싶다 못해 날것의 장기 그대로를 꺼내 보이고 싶은 과잉 고백 욕망의 시기를 지나, 이제 속내를 적당히만 보여주는 ‘나’는 누군가 자신의 구멍을 들여다본다면 어김없이 떠나가버릴 것임을, “어떤 풍경은 흐릴수록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다. 그렇기에 사랑은 일부러 흐리게 보는 “착각”으로 정의된다(「임무」). 서로의 심연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저 아름답다고 일부러 착각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까지 해가면서 사랑은 왜 굳이 해야만 하는 ‘임무’가 되는 걸까.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끝을 모르(게 되)는 마음으로서, 예정된 종말을 망각하고 현실을 낙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는다.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 넘어지”(「빈맥」)는 모습에서 암시되듯 사랑은 예정된 결말을 잊어버리게 함으로써 자꾸만 미래를 기약하게 한다. “손쉽게 꿈을 꾸고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아이들을 낳고 싶어”(「지질시대」) 하도록, “끝도 모르면서 번식하”(「뼈의 음악」)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사랑은 양가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사랑은 ‘이별’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어떤 무모함으로써 종말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자, 그렇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외면하도록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종의 도피적 속성을 지닌 사랑은 일상을 방치하여 구멍을 커지게 하던 모습과 겹쳐진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타인을 구겨 넣”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고집스러운 빈자리”(「구멍」)가 결코 메워지지 않는 건 이러한 연유이다. 사랑이 구멍을 메울 거라 ‘착각’하지만 실상 구멍은 나날이 커지고 그에 따라 더욱 강하게 서로를 빨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선혜의 시에서 사랑은 멸종을 잊게 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멸종을 동반한다. 앞서 각 존재가 본래적으로 가진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 또한 필연적인 충돌과 파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멸종으로 이어진다(「아쿠아리움」, 「충돌에 관한 사고실험」).13) 이때 운석은 사랑이라는 회피-방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구멍의 파괴성을 상징한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다가오는 “운석”이 단지 이별의 기척이나 동시대 종말론적 위기의 유비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사랑과 멸종 사이의 독특한 인과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린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사랑과 멸종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무한한 순환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했”다는 언급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생존의 역사”, 멸종하여 사랑하고 다시 멸종하는 “그런 이상한 되풀이”(「어떤 마음을 가진 공룡이」)는 사랑과 멸종의 순환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유선혜의 화자들은 늘 과잉 진실성 욕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14) 심연을 숨기고서만 가능한 사랑의 기만을 끝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유선혜 시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사랑하긴 하는데 사랑해서 버겁고 버거워서 해치워버리고 싶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 사랑을 망쳐버리기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을 끝으로 몰아넣는 신”이 되기를 자처하여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폭탄이 불량이 아니라는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생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원룸에서 추는 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번식은 징그러운 일이 된다. 녹차가 든 잔이 넘어지고 온 집 안으로 물기가 흘러 들어간다. 원래부터 축축했는지 그저 잔을 넘어뜨린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온통 젖어버린 건지 알 수 없어지고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 유성생식은 그런 징그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낳고, 태어나고, 자라고, 나는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타일 사이사이의 검은 자국들을 박박 문질러 닦는다. 너는 자꾸만 발자국을 남기고 곰팡이는 자라나고 우리의 미래는 끈끈하게 퍼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 그래,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부분  이 시는 전반에 드리운 가난으로 말미암아 나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사랑의 유지마저 확답할 수 없는 청춘의 무기력한 초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보다 주목되는 건 “낳고, 태어나고, 자라”는 일의 징그러움에 대한 감각이다. “습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곰팡이는 다소 더러운 환경에서 안심을 느끼는, 그리고 그런 자신을 더럽게 여기는 유선혜 화자들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바람은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의 미래는 뛰어놀 거실이 없다”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곰팡이처럼 하찮은 존재로서 자신의 유성생식이 “징그러운” 것이라는 거부감 또한 드러내는 것이다. 번식 행위를 통해 비참한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음은 물론, 외형상 아름답지 않은 벌레를 사랑하여 벌레의 알을 배고 싶다던 강박적인 진술과 마찬가지로(「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겹고 징그럽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큐트 가속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번식 가능성의 제로 지점에 다가가”15)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끝내버리고자 하는 충동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멸종은 다시 사랑을 형성하는 것이 되므로, 사랑은 제대로 끝날 수도 없다. “어떤 심각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상승”이자 “끝없이 미완성 상태로 남는 만성적인 애틋함의 연장”16)만이 이어진다. 차라리 모든 게 끝나버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퇴행”17)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절대 극점에 도달하지는 않으면서 예정된 끝을 잘게 쪼개 끝을 미룰 뿐이라는 무력감이 시집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이 시집에서 무언가를 쪼개거나 미분하는 이미지가 빈번한 이유도 이와 같다.18) 그러나 이들이 다만 무기력한 되풀이만을 그리는 건 아니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건 멸종을 미루며 “삶의 입자를 쪼개”(「여자친구」)는 데 골몰하는 일이 아니라 박자를 못 맞추더라도 자유롭게 추는 “춤”이다(「제2외국어」, 「줌바 버전」). 서툴더라도 춤을 추며 무한 순환의 리듬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보려는 수행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멸종의 댄스」에서 “과거로 가자, [...] 사라진 동물들과 함께, 덜덜 떨며 문명 이전의 춤을 추자” 권유하는 건 “과거”와 같은 모습일 ‘미래’의 멸종 속에서 이미 사라진 동물들과 평등하게 지구 “퇴장”을 맞을 것에 대한 유쾌한 지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수(水)속성 마음  유선혜의 화자들이 삶의 기본적인 생활 영역들을 방치하고 허기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백인경의 화자들은 인내심도 강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주고서라도 글씨를 교정하고 싶”(「악필」)다는 단정함에 대한 바람은 유선혜의 시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산다는 건 어쩌면 / 일종의 유행성 허세에 불과”(「OOTD」)함을 알면서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백인경의 시에는 사물이 단단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몸 또한 건축물과 같이 중심과 균형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견고한 상태가 한순간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경계가 무너져 침범당하고 마는 장면 또한 어김없이 이어진다. “풍경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모래사장의 테두리를 흐트러트리는 파도”(「운동성」)에 의해 결국 발끝이 젖어버리고, “주먹 속에 표정을 가”두지만 “모래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OOTD」)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렵게 유지해온 최선도 예외는 아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악필」)는 진술은 실상 최선을 다하는 삶에 지쳐가고 있음을 암시하며, “평생 맛있어지는 일에만 골몰해온 것 같은 / 한 컵의 최선”인 파르페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면서 / [......] / 울기 시작”한 ‘너’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쌓은 “정직한”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마스킹」). 어쩌면 “바람이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배열과 // 동시에 / 볼링 핀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 그런 힘”(「독설가」)은 백인경 시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방식에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이 수반된다. “최선을 다해 낯설게 바라보다가 / 무뎌져버린 낮들이 있지?”(「백일장 키즈」) 묻는 건 마음에 흠집을 내가면서 감정에 무딘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는 시집 속 인물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백인경에게 마음은 쉽게 짓무르며 망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한 접촉에도 금방 뒤섞이고 상해버리는 성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기어코 상처를 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마음은 한없이 취약한 수(水)속성으로 그려진다. 파문을 넓게 퍼뜨리거나 축축해지는 모습, 불어서 퉁퉁 부풀어버리는 것까지 모두 물의 속성에 기인한다. 아이들마저도 눈물 없는 “바삭한 슬픔”(「파우더형 인간」)이 필요해서 울지 않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껍질의 채도가 높아질수록 상하기 쉬운 마음이”(「크로마키」) 되어버리는 것 또한 섞일수록 상해버리는 마음의 성질을 암시한다.  이러한 무른 마음을 예기치 못한 침범이나 뒤섞임으로부터 보호하기라도 하듯, 이 시집에는 벽이나 문, 테두리가 경계를 구획하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여장에 대한 소망을 늘 품고 있었던 ‘그’의 “옷장”에 “가득 찬 레이스 속옷”(「캐시어스 클레이, 자주색 비키니 옷장」)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마음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문 안쪽에 걸어 잠가 보호하는 양상을 대표한다. 「유기」에서는 “마음이 / 밖으로 튀어나와버릴까 봐” 겁이 나 “현관문을” 언제나 “극도로 조심스럽”게 여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음을 문 안에 소중히 숨겨놓으며 산책을 나갈 때도 혹여나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쥔 주먹”으로 “너무 많은 목줄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 [......] // 물가에 벗어둔 낯선 신발”(「악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나, “우리 반 아닌 애들 다 나가라고!”(「이동 수업」) 소리치는 장면은 완고하게 세워둔 마음의 벽이 외부인에 의해 침입당하며 돌연 그 분리가 무너질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그러한 이들이 침범에 대비하여 마음을 단련시키는 양상은 자주 육체단련이 되기도 하다. 턱과 목 사이에 / 방울토마토 하나를 끼운 듯한 자세 / 그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 그 상태를 의식적으로 유지하세요 // 선생님은 그러고선 늘 사라진다 // [......] // 창가 화분 위로 연두색 방울토마토 한 알이 안간힘을 다해 붉어지는 동안 /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덩그러니 살아 숨 쉬는 일에 열중한다 // 언제나 갈비뼈를 닫는다는 느낌으로 호흡하세요 / 또다시 마음을 다친다면 /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한 탓일 테지 / 고개를 끄덕이면 턱 아래 방울토마토가 으깨질 것 같다 // [......] // 오늘 내일은 조금 뻐근할 거예요 /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좋은 상처가 필요하거든요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지만 // 의심이 쌓일수록 베개가 높아졌다 / 밤새 축축한 믿음이 목 소매를 물들였다 - 「올바른 자세」 부분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열중”하는 신체 변화는 방울토마토의 익어감으로 전이된다. 이때 흥미로운 건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하면 “마음을 다친다”는 인과 관계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동안 도리어 몸에 상처가 나는데, 이 “좋은 상처”는 다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도 결국 어딘가는 다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음을 알게 된 ‘나’는 원했던 답을 얻었음에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자는 동안 베개가 “축축”해진 건 기껏 꿈속에 가둬놓은 노력이 무색하게 수속성 슬픔이 꿈을 비집고 흘러나올 정도로 화자가 깊이 상처받았음을 알게 한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이 다쳐야 하는 이 법칙은 다른 수록시들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비단 운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혹사시켜가며 마음을 지켜내고자 하는 분투가 시집 전반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글루」는 마음의 성벽을 오래 지켜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벽에 기대면 자기 체온에 벽이 녹을까 봐 이글루의 가운데에 가서 앉는다. 어딘가에 기대지 못할지언정 그게 ‘나’에게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열이 펄펄 끓도록 앓은 다음엔 / 벽이 더 단단해졌다”는 언급 또한 몸이 아플수록 마음이 단련되는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과 그러한 마음의 성벽을 기어코 열어젖히기 위한 다른 최선이 만난다면 어떨까. 마음과 마음의 만남 또한 문이라는 경계를 매개로 알레고리를 그린다. 「가정식 희망」에는 식당으로 착각하고 문을 열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대기 번호를 받아 들고 “열리지 않을 문 밖에서 / 언제까지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가정식 요리, 즉 문 너머 누군가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노력을 증명받는 것이다. “의지의 발현이 중요했고 / 노력했다는 게 중요했고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증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제스처에 중독된 듯한 사람들이 늘어가며 문밖의 줄이 길어질수록 “잘못 보관해 다 버리게 생긴 희망들이 쌓여”간다.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쪽도,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응하는 쪽도 모두 각자의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충족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안간힘으로 애써 유지하던 경계는 결국 침범당해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몸을 훈련해서 마음을 잘 닫아두더라도 도리 없이 마음을 다치고야 마는 것 또한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양상이다. “담장 밖에서 별안간 넘쳐 온 불편함”(「담론 [fence]」), “마음의 균열”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이스트」) 쓰는 노력 등은 단단히 잠가두었던 마음이 결국 다른 마음과 뒤섞여 부패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벽이나 문으로 마음의 안팎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가 결국 그 경계가 무너지고 마는 건 백인경이 그리는 사랑의 양상과도 긴밀히 이어진다. 우선 백인경에게 사랑은 “댐의 안팎처럼 문을 가운데 두고 / 서로 다른 습도에서 / 같은 자세로 기대앉는” 것으로 정의된다. 완고한 경계인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공간을 보호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수문이 열리는 순간은 허가 없이 찾아”오고야 만다(「아가미」). 이와 유사하게 「몰입」에서는 화자가 기계 소리의 방해로부터 벗어나 생각을 계속하기 위해 내면의 내밀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림자의 윤곽이 상해갈수록 / 생각의 테두리가 단단해”짐에 따라 화자는 “더 이상 /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몸이 구덩이와 섞일수록 내면에 둘렀던 경계가 더욱 단단해져 내면의 주인인 ‘나’조차도 입장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팎 분리라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할수록 그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의미가 전환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랑은 그토록 두려워하던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인 뒤에야 가능해지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얼렁뚱땅 오렌지」에서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낯설어지지 않는 상태를 사랑이라 보는 것 같다. 일부러 스스로를 상처 입혀 마음을 무뎌지게 하는 연마로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뒤섞임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무뎌짐’이 ‘익숙함’으로 긍정됨으로써 사랑이라 재명명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마음이 수속성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애착의 형태」에서 화자가 ‘당신’의 형태에 자신을 꼭 맞추고서 그의 “늑골의 곡선을 베”낄 수 있게 되는 것도, 맞닿는 대상의 형태에 따라 있는 그대로 상대를 수용하고 자유자재로 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물의 성질에 근거할 것이다.  「마음의 준비」에는 함께 살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강아지를 돌보고 사랑할 때의 생활 습관들을 이제 더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나열된다. 이어 무너진 마음이 건물의 파괴에 빗대어지는데, 단순히 강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을 허물”어버리는 것을 넘어 집-마음을 구성했던 건축자재들마저 모조리 삼킬 거라 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랑의 양상은, 사랑하는 대상을 문 안 자신의 공간에 들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우리’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우리’의 루틴을 만들어 마음을 동기화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랄수록 내 집이 폐허가”(「유기」) 된다는 건 사랑의 깊이를 누적시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므로 종말 또한 예정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사랑이 끝나면 그저 그 대상을 제 마음의 안에서 밖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리’를 이루었던 공간으로서의 마음이 모조리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사랑의 종말에 의해 파괴되는 건 사랑과 함께 변형되고 재구성된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치명적인 것이 사랑이기에 백인경의 화자들은 마음을 열어보이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마음의 벽을 견고히 지켜내고자 하는 걸까.  이처럼 백인경에게 사랑은 불가침의 영역에 상대를 겨우 맞아들여 상처의 주고받음을 허용하고자 하는 결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에 의해 새롭게 뒤섞일 마음을 향해 조심스럽게 진입했을 때, 안간힘을 다해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턱 밑에서 방울토마토가 톡 으깨짐으로써 다른 풍경의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1) 이하 본문에서 유선혜 시집의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은 「괄호」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여자친구」로, 「그게 우리의 임무지」는 「임무」로,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아이」로, 「구멍의 존재론」은 「구멍」으로 표기한다. 2) 유수연, 「사랑은 잊히고 근육은 남는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2024. 3) 에밀리 정민 윤, 「나의 첫 이별 후 아빠는 내게 최초의 이메일을 보냈다」, 2024년 겨울호. 4) 에밀리 정민 윤, 같은 시. 5) 어쩌면 이는 시대적 위기와 긴밀히 얽힌 현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해 사라 아메드에 의해 다루어지는 사랑의 정치학이 주목된다(사라 아메드, 6장 '사랑의 이름으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6) 슬픔과 허기의 상관관계는 「일란성 슬픔 쌍둥이 슬픔」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허기는 슬픔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괴물”과도 같은 “허기”를 달래고자 밤에 라면을 먹어도 오히려 “두 배로 불어나는 슬픔을 겪”는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허기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구멍과 같다. 7) 한편 인아영은 '귀여움'이 무력하고 연약한 것에 대한 욕망이자 수동 공격이라는 양가성을 지니며,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을 교환 논리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비판적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스템에 대한 순응이자 저항으로서 귀여움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pp. 114~15). 8) Amy Ireland·Maya B. Kronic, 『Cute Accelerationism』, Urbanomic, 2024, p.4. 논외로, 고선경과 유선혜를 함께 주목할 때 동시대 시에 나타나는 귀여움에 대해 더욱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9) Ibid., p. 13. 10) "특정한 자기 인식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귀여움"은 "자신을 대상으로 보고, 좋아하고,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다"(Ibid., p. 31). 그리고 이는 "소비와 자기 소비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Ibid., p. 20)와 맞닿는다. 김홍중은 “스스로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유지"시키고 "영원한 유아에 머무르"며 양육되기를 자처하는 귀여움 지향이 민주화 이후의 생명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 69). 이러한 2000년대적 "존재론적 유아들"(같은 책, p. 71)로 포섭되는 것을 넘어, 오늘날에는 자기 소비로써 귀여움의 조합들을 끊임없이 갈아 끼우는 양상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11) Ibid., p. 5. 12) Ibid., p. 6. 13) 그런데 이러한 충돌과 파괴는 한편으로 내면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 세계관의 법칙에 따르면 "내면이 멸종한 행성을 /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외로움이 있어"서 몸과 몸이라는 물질의 맞부딪침은 외로움들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번지"(「충돌에 관한 사고실험」)게 한다. 그렇기에 유선혜 시에서 내면은 폐쇄적이거나 단일성에 갇히지 않는 내면이라 할 수 있다. 「마녀와 로봇의 사랑」에서는 방이나 행성, "껍데기" 안에 있는 "진짜 내가" 내면에 해당하는데, '너'의 "심장을 주물럭거리는" "누군가"(「Nirvana」)는 이미 무수한 타인과 섞인 '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너'가 자신의 내면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타인의 외로움에 침범된 내면이기 때문이다. 14) 이 시집에서 허기와 구토감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려지는 이유는 유선혜의 화자들이 허기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과도하게 진실하고자 하는 충동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묻는 이들은 "기어이 써버리"(「반납 예정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15) Ibid., p. 4. 16) Ibid., p. 14. 17) Ibid., p. 5. "그녀는 전생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로는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여자친구」). 18) "영에 한없이 다가가지만 절대 영이 될 수 없는 /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도착하지는 못하는 / 리미트 영의 마음 // 끝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 /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영으로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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