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2024년 봄호(제45호)
비(非)체험과 세계의 탈(脫)-구축 ㅡ 젊은 시인들의 첫 시집 읽기
1.
밀란 쿤데라는 서정성은 자신의 고유한 영혼과 그 영혼을 들려주고 싶은 욕망이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시인은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에 대해 쓸 때에도 자신의 초상을 만드는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텍스트의 안과 밖, 혹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는 특수관계가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시인과 화자는 별개의 존재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고, 역사적으로 이 특수관계를 끊으려는 다양한 문학적 실험도 반복적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시에는 여전히 이 연속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기형도의 화자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라고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텍스트 안에서 말하는 ‘나’와 텍스트 바깥의 ‘시인’, 즉 기형도를 동일 인물로 경험하면서 읽는다. 문학 교과서는 시는 허구(‘시적 허구’)의 일종이고, 시인과 화자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고백’이라는 특유의 시적 장치로 인해 독자는 여전히 화자의 목소리를 시인의 복화술로 인식하려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과 화자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대답은 교과서적이긴 해도 설득력이 크진 않다. 시인과 화자가 같지 않다는 사실이 그들 사이의 특수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여전히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기형도라는 시인의 형상을 떠올린다. 이러한 동일성은 시적 장치의 효과, 즉 의도된 동일성이고, 그것은 1인칭 화자인 ‘나’와 고백적인 목소리가 결합하여 발생시키는 시적 효과이다. 요컨대 어떤 시가 고백적인 성격을 띨수록 ‘화자=시인’이라는 고안된 동일성의 강도 역시 증가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성의 효과가 바로 시인과 화자 사이에 연속성을 한층 강화한다. 이처럼 시에는 시와 삶이라는 사건의 연속성, 작품과 일상이라는 주체의 연속성을 발생시키는 매듭 같은 것이 존재한다.
이 매듭을 의도적으로 없애려는 노력도 존재한다. 특정한 시적 주체의 감정이나 태도가 전략적인 고안물인 경우가 그렇다. 남성 시인이 여성 화자를 등장시킬 때, 여성 시인이 남성 화자를 등장시킬 때, 성인 시인이 어린 화자를 등장시킬 때, 나아가 시가 비인칭적인 목소리로 발화될 때, 시인과 화자 사이에 전제된 연속성은 급격하게 약화한다.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표현하기보다 세계 구성의 의지를 전면화할 때, 즉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여 세계나 ‘화자=주체’의 태도를 통해 자신이 표현하려는 바를 드러내려고 할 때도 이러한 경향이 분명해진다. 경험의 재현이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일이 선행될 때, 화자는 경험적 주체에서 벗어나 그 세계의 일원으로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이 경우 시를 쓴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그 가상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인물=화자’의 느낌과 감각을 언어화하는 일이 된다. 일반적으로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적인 주제를 탐사하는 것은 소설 특유의 방식이다. 1인칭 고백체 소설이나 예술가 소설의 경우처럼 작가와 특수관계에 있는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작가와 인물의 거리가 좁혀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장르적 특징은 아니다.
2.
왜 시는 이 특수관계의 흔적을 지우기 어려울까?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가 체험의 직접적인 재현 또는 변용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시와 소설은 모두 체험에 근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두 장르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시를 쓰는 사람은 물론이고 독자도 시가 체험의 일차적 재현이거나 변용이라는 이해 위에서 그것을 읽는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때 나는 노트 앞에 앉아 있었고 시를 쓰려던 참이었으며 노란 테니스공 하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첫 문장을 시작하려던 찰나 공이 제멋대로 날아가 창문에 부딪히더니 펑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마침 내 원룸 앞을 지나가던 사람도 함께 쓰러졌다 나는 시를 쓰려던 참이었는데 쓰러진 그를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커다란 솥에 넣고 뚜껑을 닫아버렸다 나는 시를 써야 하는데 경은 바깥을 바라보며 계속 짖었다 컹컹 돌아보면 멧돼지가 앞발로 대문을 긁고 있었고 떡 하나 주는 대신 나는 그를 솥에 넣어버렸다 다시 시를 쓰려던 찰나 배달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짜장면 한 그릇을 들이밀었다 시킨 적 없는데요, 그럴 리 없습니다 난 이 한 그릇을 위해 수십 년을 달려왔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와 그의 배달 가방과 짜장면을 몽땅 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노트를 들여다보려는데 또 한 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옆집에 누수가 있습니다 공무원은 누수를 잡아야 한다며 끝없이 떠들었고 빨리 시를 써야 하는 나는 옆집 배관을 통째로 뜯어내 그와 함께 솥에 밀어넣었다 이제는 잘 닫히지 않는 뚜껑을 온몸으로 내리누르며 써야 하는 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써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써버린 것 같기도 하고 절대 쓸 수 없을 것 같기도 한데 순간 고개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던 올리브나무 아래였고 도자기로 만든 작은 절이었고 텅 빈 운동장이었고 희망목욕탕 옥상이었고 그리고 세상은 깜빡깜빡 자꾸만 찰나의 순간들이 반복되었고 변함없는 마음이 있기는 한 건지 생각하다 눈을 뜨면 다시 빈 노트 앞이었다 - 한여진, 「초기화」 전문(『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 2023))
이 시는 체험에서 ‘한 발짝’ 떨어진 작품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 발짝’은 우리가 시적 변용(變容)이라고 말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한여진의 시에는 시인이 건축을 전공하고 건설사의 현장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경험한 일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선 언니’처럼 경험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개입하기도 한다. 한여진의 시는 이처럼 경험을 적극적으로 변용하되, “쓴다”와 “쓰지 못한다”(「솥」)라는 진술의 공존으로 요약되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투사함으로써 낯선 세계를 구축한다. 이 시의 화자는 노트를 펼치고 시를 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여 화자의 시 쓰기를 방해한다. 가령 손에 쥐고 있던 테니스공이 창문에 부딪혀 창문이 깨지고, 원룸 앞을 지나가던 행인이 그 유리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 등이 그렇다. 뒤를 돌아보니 “멧돼지가 앞발로 대문을 긁”고 있고, “배달 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시킨 적 없는 짜장면 한 그릇을 들이밀기도 한다. 한여진의 시에서 ‘솥’은 글쓰기의 여성적 기원(“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사람”(「솥」))이다. 하지만 이 시에서 ‘솥’은 글쓰기를 방해하는 것들을 처리하는 임시방편으로 기능한다. 이 시의 화자는 카프카의 등장인물처럼 “빨리 시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쫓기고 있다. 글쓰기에 대한 이 강박의 원인을 찾는 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글쓰기를 방해하는 일들이 계속 발생하고, 그런 가운데 화자의 글쓰기가 진행된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이 시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무수한 요인과의 싸움 과정을 메타적인 언어로 작품화함으로써 모든 글쓰기가 그 싸움의 과정 안에서 행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누수를 잡아야 한다며 끝없이 떠드는 공무원이 등장하는 비(非)시적인 사건 자체가 시(詩)의 일부임을 상기하자. 즉 ‘글=시’는 그것을 중단시키려는 것과의 싸움 바깥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글쓰기는 이 싸움에 노출되어 있다.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시시각각 발생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견디면서 행해지는 것이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옆집에 누수가 있다고 떠들어대는 공무원이나 시킨 적이 없는 짜장면을 들고 나타난 배달 기사인지 가사(家事)나 출근처럼 생계를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일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 싸움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경우 “그게 뭐였더라 써야 할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미 써버린 것 같기도 하고”처럼 그동안 생각해 둔 것들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빈 노트’ 또는 이 시의 제목인 ‘초기화’는 뜻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이 사라지는 그 경험이 아닐까. 이 시는 경험적 내용과 상상적 요소를 혼합하여 시작(詩作)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상적 질서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비경험적·상상적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지리멸렬한 일상적 시간을 고스란히 반복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상투성을 적절하게 회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년이었던 그해 여름, 나는 반쯤 녹아 있었고. 여자애들은 정글짐에 엉켜 논다. 긴 머리 애들이 거꾸로 매달려 서로의 얼굴에 머리카락을 스쳐 댄다. 그늘에 던져 놓은 크고 작은 가방들, 오디오 플레이어의 트랙을 따라 흥얼거리는 소리. 여자애들은 자꾸 나를 불렀는데 가방을 멘 나는 수돗가에 서 있다. 여자애들은 가짜 여자 같았고 가짜 어른 같았고 나는 가짜 소년.
바람이 불면 소리는 이쪽까지 들려올 것이다. 팔에 들러붙은 모래알이 손끝에 까끌댄다. 여자애들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빼앗아 본다. 돌이 흙으로 흐트러질 때까지. 소년이었던 것 있니, 나는 가짜였던 적 없다.
최초의 폭염들 속에서 녹아 버린 소년과 소녀. 나는 기꺼이 나의 증인이 된다. 그것은 내가 식혀야 하는 땀이다.
- 허주영, 「소녀와 남자애」 전문(『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민음사, 2023)
허주영의 시는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네 문장이 아름다운 건 비어 있기 때문이라고”, “아름답게 비어 있다”(「돌잡이의 비디오」)라는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허주영의 시에서 비어 있음(空)은 결핍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의 시에서 ‘나’는 텅 빈 기표, 혹은 다른 정체성이 채워질 가능성의 기호이기도 하다. 정체성의 논리에서 비어 있음은 곧 다른 것(정체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가능성은 한편으로는 ‘나’라는 대명사를 끊임없이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고 - “나는 열다섯 개의 소녀”(「B컷의 커버」) 같은 진술이 대표적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변신(metamorphosis)이라는 실존적 사건의 첨점(尖點)으로 작용한다. 이것이 바로 체험과의 관계에서 허주영의 시가 한여진보다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이다. 허주영에게 ‘나’는 서정시 특유의 구심력을 응축하고 있는 대명사가 아니라 원심력을 지닌 부유(浮游)하는 기표/기호에 가깝고, 그런 한에서 그녀의 시는 체험을 재현하거나 변용한다는 익숙한 원칙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소년이었던 그해 여름”이라는 진술처럼 이 시의 화자는 ‘소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러한 시적 설정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연속성을 뒤흔드는 효과를 연출한다. 이 시에는 ‘나=소년’과 ‘여자애들’이 등장한다. 장소는 ‘정글짐’과 ‘수돗가’가 있는 학교 운동장. 여자애들이 반복적으로 부르지만 ‘나’는 가방을 멘 채로 수돗가에 서 있다. 이 상황 설정은 ‘나’와 ‘여자애들’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화자는 느닷없이 ‘여자애들’을 가리켜 “가짜 여자 같았고 가짜 어른 같았”다고 말한다. 세다가 자신을 향해서도 “나는 가짜 소년”이라고 진술한다. 여기에서 ‘가짜’라는 기호는 이전의 진술을 부정한다. 그렇다면 이전의 진술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여자애들’과 ‘나’가 ‘소녀와 남자애’의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런 논리는 어떻게 성립될까? 화자인 ‘나’는 소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소년’이라고 소개한, 그러니까 “가짜 소년”인 것이다. 이때의 ‘가짜’는 생물학적 사실과 경험적·심리적 인식 사이의 차이를 뜻한다. 즉 ‘가짜 여자’란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가짜 소년’이란 실제로는 ‘소년’이 아님에도 ‘소년’으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여자애들과 나는 멀찍이 떨어져 서로를 빼앗아 본다”라는 진술처럼 이 장면에서 ‘나’는 ‘여자애들’의 무리에 섞이지 못하고 겉돈다. “최초의 폭염들 속에서 녹아 버린 소년과 소녀”라는 진술처럼 한여름의 폭염이 그러한 정체성 혼란의 원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소년’이라는 기호로 인해 잠시나마 불안정해진 정체성이 ‘가짜 소년’이라는 기호로 인해 되돌아옴으로써 이 시가 시인의 체험에 대한 진술이라는 위상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허주영의 시는 반복적으로 ‘나’라는 기호로 귀환하는 형태를 띤다.
3.
시인과 화자 간의 거리가 멀어지면 시적 진술을 체험의 재현이나 변용으로 읽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언어가 체험의 산물로 읽히지 않기를 원할 때 시인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개입시킨다. 이때 시는 체험이 아니라 구성/구축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체험으로서의 시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의존한다면, 구성/구축으로서의 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를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임으로써 지금-이곳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등장시킨다. 시인에게 이 세계에 대한 통제권이 존재하는지, 혹은 무의식이나 말놀이처럼 또 다른 질서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지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우 시가 이미 존재하는 세계의 재현이나 변용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는 인간, 상식, 법 등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와 달리 기호로 축조된 이질적인 세계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구성/구축에의 의지는 대개 현실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문학적 허무주의자들의 시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 경우 시인은 가상의 질서, 즉 세계를 먼저 축조한 다음 그 내부에 인물과 사건을 배치하는 순서로 작품을 구성한다. 전통적인 소설 구성의 방식이 그렇듯이 이때 세계는 인물이나 사건에 선행하며, 그것은 시간적인 순서만이 아니라 가치의 층위에서도 그러하다.
이 동물은 햇살을 담기 위해 길러집니다. 그 속엔 거울이 있고, 고원이 있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다시 바라보면.
안개 속입니다.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 흉곽에 구름을 충전하고 싶습니다. 손금이 달라질 때마다.
네비게이션을 켜듯 길을 잃고 싶어요. 등 뒤를 더듬거리면 분명 문이 있는데. 열리지 않습니다.
병원에 갈래요. 엑스레이를 찍을래요. 내 속에 들어온 구름의 자잘한 속살까지 엿듣고 말래요.
뢴트겐 사진을 전구에 구겨 넣자. 창밖에 산맥이 펼쳐집니다. 뼈를 읽어주는 빛. 환함이 말을 겁니다.
귓속말을 바라보는 일. 어쩌면 늘 하는 일. 두근거림 속에 더 이상 동참만 하고 싶진 않아요.
세상의 끝을 관람하고 싶었는데, 그게 알파카인 걸까요? 홍차를 마시면 가슴 안에 불이 들어오고.
엑스레이 속에 해가 떠오를 겁니다. 온 방이 타오를 겁니다. 물위에 불이 붙을 정도로. 눈이 멀 것 같은.
모두가 앞을 못 본다면 도리어 세상이 눈 뜬 일. 그때도 가로지른다면.
고기를 씹으며 눈 감아도 빛이 보이고. 이것은 오래된 중얼거림.
몽실한 머리를 보세요. 귀여움이고, 그러니 잔인함이고. 블랙홀을 예수라 믿으며 자신을 파고든 사람들처럼.
소용돌이칩니다. 사라지지 마세요. 모두 다 우연이니까. 알파카의 털 속으로 파도가 치고. 복슬복슬 물살을 들이마시면.
이 거짓말을 전부 겪은 일입니다. 눈 뜨면 변기 위에서의 주절주절. 커피숍에서 안데스 고원으로.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 다시 눈 뜨면 으악으악.
- 변윤제, 「알파카의 세계」 전문(『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
변윤제 첫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에는 ‘알파카 공동체’라는 장(章)이 포함되어 있다. ‘알파카 공동체’는 ‘알파카’가 등장하는 아홉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서 ‘알파카 공동체’라는 제목은 특정 작품의 제목이 아니라 ‘알파카’가 등장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홉 편에 등장하는 ‘알파카’라는 언어 기호가 지시하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이것은 ‘알파카’가 단일한 기호가 아니라는 의미인데, 따라서 독자는 ‘알파카’가 낙타과 포유류를 가리키는 지시적 기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읽어야 한다. 그것은 낙타과 포유류를 가리키는 기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알파카 양’, ‘알파카 부인,’ ‘알파카는 대필 작가’, ‘주식회사 알파카 건설’ 등처럼 사전적인 의미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기능한다. 변윤제의 시에서 ‘알파카’는 일종의 증식하는 기호이고, 그것은 포유류라는 대상에서 출발해 미지의 대상 X를 향해 나아가는 불확정적인 기호이다. 이처럼 언어 기호를 상식, 즉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규칙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시(詩)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알파카’라는 언어 기호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안정적인 의미체계를 불확정적으로 만들겠다는 뜻이며, 언어 기호의 이러한 유동적 성격은 결국 그것이 특정한 의미와 안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시 세계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효과로 이어진다. 이처럼 특정한 기호가 이미 존재하는 기능, 즉 경로에서 벗어나거나 새로운 용법으로 무한히 증식하는 방식은 시적 진술, 그러니까 화자의 발화를 시인의 복화술, 즉 경험의 언어로 해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경험은 안정적인 의미의 공동체를 전제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데, 끊임없이 다른 의미를 향해 증식하는 기호는 언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무력화함으로써 그러한 공동체의 발생-유지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품을 읽을 때 독자의 의식은 텍스트에 집중될 뿐 그 바깥과의 관계에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특정한 언어를 커뮤니케이션의 맥락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방식을 발명하는 것이 시(詩)의 장르적 숙명이라면 시적 진술이 경험의 층위로 환원되지 않는 것 또한 장르적 특징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공동체(‘알파카 공동체’)는 공통의 가치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는 모임(共同體), 즉 이질성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알파카 공동체」)이 아니라 텅 빈 중심에 연루된 공동체(空同體)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공동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호가 원심력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시인이 다양한 용법을 지닌 ‘알파카’라는 기호가 등장하는 부(部)에 ‘공동체’라는 명칭을 부여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만일 그것이 단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였다면 애초에 ‘공동체’라는 명칭은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시를 보자. 화자는 알파카를 ‘이 동물’이라고 지칭하면서 “안데스 고원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는 알파카”라고 진술한다. 독자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안데스 산맥을 비롯한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낙타과 포유류의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의 생각을 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오히려 화자는 이 ‘알파카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싶어요”라고 진술한다. ‘네비게이션’이 이미 존재하는 질서, 즉 상식의 표상이라면 길을 잃고 싶은 것은 그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2~3연에서 시인은 이 욕망을 ‘엑스레이’, “내 속에 들어온 구름”, “뼈를 읽어주는 빛”처럼 ‘내면’과 ‘빛’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한다. 이것은 ‘알파카의 세계’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면에 속한다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하지만 ‘알파카’라는 단어의 미끄러짐을 통해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내면을 비추는 ‘빛’에 의해 드러나는 세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히 3연에 등장하는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 (…중략…) 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였군요.”라는 진술에 이것이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거짓말은 전부 겪은 일입니다.”라는 진술은 1연에 등장하는 “내비게이션을 켜듯 길을 잃고 싶어요”와 마찬가지로 모순적인 발화이다. 이 진술에 도달하면 독자는 ‘거짓말’과 ‘겪은 일(경험)’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여기에서 ‘거짓’과 ‘사실’이라는 두 가지 판단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이 ‘사실’이라는 진술, 또는 ‘사실’이 ‘거짓’이라는 진술은 양극단의 판단을 뒤섞음으로써 그것에 대한 진위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은 시인의 시작(詩作) 스타일을 암시하는 듯하다. 시인은 자신의 시세계가 ‘거짓’과 ‘사실’이라는 대척점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은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미학적 정언명령에 대한 자신만의 응답(“새로워지라니 참 진부한 얘기”)이기도 하다.
lecture:
마지막 인간을 상상해봅시다.
자신을 꼭 끌어안고 어둠 속을 걷는, 최후의 인간을 말이죠.
그 무렵 지구는 정말로 따뜻했습니다. 누구도 쓸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인류의 기원은 어류였습니다. 진화학적으로 인중은 그 단서가 됩니다. 영혼이 헤엄치는 형태로 움직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주는 일종의 거대한 아쿠아리움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우리의 거주지를 구성하고 있는 유리는 특수하게 고안된 것으로 두께는 육십 센티입니다. 이쪽으로 와서 모형을 만져보시겠어요?
여기서는 모든 소리가 반향됩니다. 자신이 던진 질문을 대답으로 듣는 동안, 누군가는 우리를 들여다볼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을 상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로 나온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상을 잊지 않는 자세가 중요하겠습니다. 여전히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자, 다 함께 몸을 창가로 돌려봅시다. 저기, 녹아서 흘러내린 지구를 보세요. 꼭 쉼표 같지요. 바로 옆에 있는 게 물고기자리랍니다. 마치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조상들은 얼음낚시를 즐겼습니다. 빙판에 구멍을 뚫고 기다리면 입 벌린 물고기들이 숨을 쉬러 올라옵니다. 그때를 노려 재빠르게 낚아챕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함부로 열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면 얼어붙어 야광 별이 된 조상들을 기리며 잠시 묵념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런데 브라더, 우주에도 유령이 올 수 있을까?
- 조시현, 「28880314」 부분(『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
조시현의 『아이들 타임』은 최근 출간된 시집 가운데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과 가장 거리가 먼 시집이다. 이 시집은 과학소설(SF)과 같은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텍스트의 내부와 외부 사이에 연속성이 개입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시인은 인간이 멸종된 미래의 시점에서 한때 지구 표면에서 생존하다가 멸종한 인간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이 회고가 발화되는 지점이 지구 바깥이라는 점, 요컨대 지구 바깥의 우주-공간에서 멸망한 지구를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텍스트 내에서 ‘인간(적인 것)’이 틈입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다. 인용시의 각주 1에는 “공식적으로 지구 인간은 2500년대 멸종되었다. 상기 자료는 A808에 거주하던 시스터(2870~2984)의 일기에서 발췌하였다. 지구로 꾸준히 송신했으나 아직까지도 수신 확인이 되지 않는 걸로 보아 생존자는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이것은 19~20세기에 유행한 다양한 서사, 즉 소설, 영화, 연극 등의 도입부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시·공간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다시피 현존하는 대부분의 서사 형식, 특히 과학소설(SF)은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공간적 세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해리 셸던: 은하 기원 11988년에 태어나 12069년에 죽음.”(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나 “오래전에 밸런타인 마이클 스미스라는 이름의 화성인이 살았다.”(로버트 A. 하인라인의 『낯선 땅 이방인』) 같은 진술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이 지구에서 멸종한 이후의 미래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는 시적 설정에 동의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설정은 우리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겨준다. 동시대의 다른 공간(대안적 세계)을 상상한 시는 많았으나 미래, 그것도 우주적 시간에 근거하여 창작된 시는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詩) 장르가 상대적으로 공간에 대해서는 개방되어 있으나 시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시는 현재, 혹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이때의 ‘과거’는 한 개인이 기억할 수 있는 생애에 한정되거나, 역사적 시간을 배경으로 할지라도 수 세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에게 시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관한 이야기인 셈이다. 반면 조시현의 시는 인간종이 지구에서 멸절한 이후인 2888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관례를 벗어난다는 점에서 비(非)시적인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시현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인간이 멸종한 이후의 세계, 즉 포스트 휴먼의 세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웹소설에 등장하는 세계를 원용하여 포스트-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감각을 시화(詩化)한 변혜지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과 상당히 유사하다. “마지막 인간을 상상해봅시다.”, “저기, 녹아서 흘러내린 지구를 보세요.” 등의 진술에서 암시되듯이 시인은 지금 우주에서 멸망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상상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우주로 나온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지금 ‘우주’에 머물고 있다. 이때의 ‘우주’란 지구를 포함하는 세계가 아니라 지구의 바깥을 뜻한다. 한때 인간은 ‘지구’에서 살았으나 오래전에 지구와 함께 멸종했다. SF소설의 한 장면을 닮은 이러한 설정은 현대시가 소위 인류세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일까? 인용시에 한정하여 말하자면 “플라스틱은 아주 고요하고 느리게 인간의 혈관을 차지했다. 2050년대를 기점으로 인간의 혈관에는 피가 아닌 플라스틱이 흐르기 시작했다.”라는 각주 2의 내용처럼 미세먼지와 미세 플라스틱으로 표상되는 기후 위기와 생태재난에 대한 경고일 듯하다.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는 이러한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은 문학은 물론이고 우리 시대의 문화 전반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징후적 현상이다. 다만 조시현의 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SF소설과 유사한 시적 설정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오랫동안 재생산되어 온 시 장르의 암묵적인 시간 감각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특히 기후 위기에서 기원한 포스트-아포칼립스적 감각은 시가 이미-항상 시인의 체험의 산물이거나 그것의 변용이라는 상식적 믿음을 벗어난다. 이러한 설정은 현실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현실이라는 이름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환기하는 데 한층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가령 시가 지금-이곳의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할 때, 그것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현실에 연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 웹소설을 원용한 변혜지의 시나 SF소설의 설정을 차용한 조시현의 시에서 ‘세계’는 그 자체로 지금-이곳의 현실과 경쟁하는 대안적인 의미를 지닌다. 어떤 시인의 시가 직접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대신 세계 구성의 의지가 드러낼 때, 그것은 언어가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원심력의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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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대표적인 체험의 장르라고 인식된다. 이것은 체험의 변용이나 허구적 구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시가 일상적 체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독자가 화자의 목소리를 시인의 고백으로, 그리하여 텍스트와 내부와 외부를 연속적인 것으로 경험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가 체험의 산물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시인과 화자 사이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배치함으로써 시가 체험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닐 수 있음을, 따라서 시가 전적으로 고백의 장르만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러한 거리감은 시인이 웹소설이나 하위장르 등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텍스트의 배경으로 전유할 때 한층 도드라진다. 이러한 장르적 혼합과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표면적으로 그것은 시가 직접적인 체험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를 통해 환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시는 재현적 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텍스트의 내외부가 연속적인 관계라는 기존의 가정은 깨진다. 하지만 최근 시에서 이러한 장르적 혼합은 세계의 문제, 즉 미학적 장치 이전에 특정한 세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드러내려는 기획의 일환처럼 보인다. 이때 외삽(外揷)되는 세계 - 가령 조시현의 과학소설(SF) - 는 시인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지금-이곳의 문제성에 대해 말하기 위해 차용하는 대안적 세계로서의 성격을 띤다. 현실, 즉 상징계의 질서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시인들은 상징계 바깥의 질서를 원용하여 지금-이곳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세계와 삶의 진실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상징적 질서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할 때, 시인은 미적 가상을 대안적 세계로 호출한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세계’를 통해 지금-이곳을 경험하고 있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스트릿 문학 파이터」)에 대한 고선경의 시가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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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세계의 상실에 반(反)하여 첫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문학사상사, 2012) 이후, 김지윤은 시쓰기와 비평 활동을 병행하며 시에 대한 탐색을 넓혀왔다. 비평은 작품 외부의 영역, 즉 시가 생산되는 환경으로서 시대적 담론과 매체 그리고 독자에 대한 관심을 넓히는 계기였을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은 시인이자 평론가인 김지윤이 그간 확장해온 시와 세계에 대한 고민을 응축해서 보여준다. 첫 시집에서 세계와 타인을 향한 사랑의 언어로 자신을 각인시켰던 시인은 이제 이렇게 묻는다. 디지털 정보로 환원된 세계에서 우리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지를, 만약 의심의 여지없던 것들이 가짜임을 알게 된다면 무수한 당위에 대해 "아니, 그런 게 아니야라고 있는 힘을 다해서"(「당연한 말」) 말할 수 있는지를. 이 시집은 우리가 이미 수긍해버린 당연하고 익숙한 당위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며 보이는 세계를 향한 확신과 믿음에 괄호를 친다. 투명하리만치 선명하고 확실한 것들, 다시 말해 디지털 공간으로 흡수된 지식과 앎에 대한 문장에 빗금을 긋고, "빗금 그어진 문장 /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빗금으로부터」)는 도전적 제안을 걸어온다. "빗금을 닮"은 "세상의 층계"를 뒤집어 "새로운 방향으로" 보자는 그의 제안은 삶의 위기를 복구하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몇 편의 시에서 언뜻 드러나는 것처럼 이 위기의 배경은 디지털화가 초래한 세계의 증상들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랭던 위너의 말을 참조하면, 그는 컴퓨터 혁명을 가속화하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인공지능 같은 기술만이 아니라 우리의 '텅 빈 마음'이라고 언급하며 도구적 진보에 따른 새로운 제도,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감성만이 아니라 권력 행사의 새로운 맥락들에 대한 반성과 토론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바 있다.1) 시인의 위기의식 역시 이러한 비판과 멀리 있지 않다. "속은 텅 비어 있을지라도" "빨리 더 빨리, 속도를 내자"(「대나무」)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는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서 나아가 새로운 신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삶의 위기라 인식하는 시인은 곧 도래할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을 우려한다.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을 예측하게 하는 첫 번째 징후는 정보신화(mythinformation)라는 이데올로기와 디지털화의 가속화 속에서 자아와 세계가 표백되고 있다는 것이다. 「흰」에서 진술하듯이 사람들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보다는 디지털 공간에 전시된 선명하고 확실한 정보에 열광한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신의 일상을 매순간 업로드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디지털 공간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어떤 색도 스미지 못하는 흰 것의 코팅된 표면" 앞에서 "탄성을 지르는 배경"에는 "흰 것은 안전하고 흰 것은 친절하고 흰 것은 평화로우니 / 흰 것엔 그리움도 고통도 죄도 없"다는 헛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흐릿하고 모호한 불확실성의 세계와 달리 "모두가 갖고 싶어 하는 흰 것들이 광고판에서 / 브라운관에서 / 스크린에서 /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마주할 때마다 "나도 희어지고 싶"(「흰」)다는 욕망을 감추지 못한 채 0과 1로 설명되는 투명한 자아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흰 것"에 비유된 디지털 공간은 환하고 매끄러운 화면 위에 당신이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선명하게 전시해 주는 가능성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곳에는 길을 헤매거나 잃지 않고 삶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법이 널려 있고, 영원히 젊음을 잃지 않을 건강 비결도 몇 번의 검색으로 알아낼 수 있다. 물론 그 대가는 얻는 것에 비하면 미약하다고 느껴지는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정보이다. 그런데 랭던 위너는 이를 경고한다. 빅데이터와 컴퓨터의 결합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해악은 "영구적이고 전면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감시 시스템의 구축과 여기서 촉발되는 정치 질서의 구조 변동"이라고 지적한다. 2) 정보가 투명화되고 자아의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는 건 곧 감시 시스템 속에서 자율성의 박탈과 자아의 소멸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디지털 공간에 접속해서 진짜 '나'를 대면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 채 열광하는 이들을 향해 시인은 경고한다. 0과 1의 조합으로 태어나는 디지털 자아를 진짜 '나'라고 믿게 될 때, 정보로 환원될 수 없는 '나'-감각의 주체요, 관계적 주체인 내가 빛 속으로 사라지리라는 것을. 자꾸만 작아지는 세상 속에 사네 무언가 얻으려면 끝없이 무언가 써야 하지 돈을 쓰고 데이터를 쓰고 포인트를 쓰고 자꾸만 더 쓰라 하는 광고 속 주술의 노래 시간을 쓰고 꿈을 쓰고 진심을 다 써 버리면 비우고 비워서 비누처럼 작아져 반짝이는 가벼운 거품이 되네 여기는 모두 작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적게 분노하고 적게 대화하고 적게 꿈꾸며 작은 휴대폰 화면, 사각 모니터 위에 머리를 파묻고 140자 글자 제한 속에 언어를 줄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하거나 아예 침묵하고 …(중략)… 작디작은 세상에 작디작은 사람들 너무 작아서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고 아니 그냥 세상에 잠시 묻어 있던 얼룩처럼 희미해지며 사라져 가는 - 「소인국」 부분 "작은 휴대폰"이야말로 자신을 타인과 연결시키며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라고 믿는 마음은 더없이 견고해져 간다. 내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증거가 되어버린 디지털 기기가 사실은 소비 욕망이라는 무한회로를 작동시키는 버튼임을 모르는 이는 없지만 "무언가 얻으려면 끝없이 무언가 써야 하"는 자본의 진리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게다가 얻기 위해 쓰는 것인지, 쓰기 위해 얻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소비의 주체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잃을 무렵 '레벨업' 된다. 접속하는 주체는 "가벼운 거품"처럼 중력의 무게를 잃고 마침내 신체적 감각의 퇴화를 맞이한다. 이 시는 디지털 기기에 중독된 현대인에 대한 비유만은 아니다. 자본과 공모한 디지털 기술보다 더 우려되는 사실은 접속의 주체가 감각을 소거하는 대신 주어지는 확실성의 세계에 속하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불을 밝히는 액정 위로 떠오르는 선명한 이미지와 투명한 의미로 구성된 세계를 보라. 머뭇거리거나 지체할 필요 없이 클릭 한 번으로 신속하게 욕망을 호출하고 간편 결제만으로 즉각 욕망을 충족시키는 쾌락 시스템의 가속화는 각자가 지닌 고유한 색을 표백하듯 희게 만들고 결국에는 우리가 서로의 색을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표백과 감각의 마비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시인은 묻는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가 드리울 곳 없이 환하게 밝혀진 매끄러운 평면에서 “조용히, 무감히, 가만히”(「산성의 바다」) 감각을 잃어가며 "저도 모르는 새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감각이 마비된 신체처럼 "같은 맛과 같은 소리만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세계는 "하나의 기억과 하나의 말만 남는 지옥"과 같지 않은가? 시인에게는 더 이상 세계를 감각하지 못하는 것이 나와 다른 존재인 타인이라는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더 이상 당신의 색을 기억하지 못해 // 너무 멀리서 따로 헤매며 / 서로의 색깔 사이에 벽이 생겨 / 점점 더 옅어져 흐려지고 빛바래고 / 그늘지고 얼룩지고 더렵혀졌지"(「색상표」)라는 진술처럼 디지털화되는 삶의 조건 속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감각을 잃은 채 세계를 상실하는 중이다. 두 번째 위기의 징후는 삶이 축적된 시간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 4·3의 비극을 담은 「큰넓궤」, 「헛묘」와 같은 시들이 말하듯 역사는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매해 봄이 돌아오듯 죽은 자들의 이야기는 "하염없이 계속되는 메들리"(「봄」) 혹은 "정녕 끝나지 않는" 노래가 되어 산 자들에게 전해지고, 우리는 "문득 스치는 바람"으로 옛 냄새를 기억하듯이 그들과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기억하며 시간의 깊이를 헤아리기 마련이다. 땅과 꽃들이 보여주는 생장과 소멸의 반복 혹은 유한한 삶을 지닌 생명들이 서로의 시작과 끝을 잇대면서 만들어가는 끝나지 않는 서사야말로 시인이 되찾고 싶은 세계이다. 세계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역력하게 드러내는 청유의 문장을 유심히 보라. “흐르고 뒤섞고 흔들자 / 스미고 들끓고 녹자 / 우리가 만나서 하나 되기 위해 // 천천히 서로를 향하여 한 마디, 한 마디씩 한 박자, 한 박자씩"(「화음」) 다가가자는 시인의 요청은 타인과 공존하는 삶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사랑을 담았던 첫 시집의 진심과 다르지 않다. 다만 두 번째 시집은 세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에 저항하는 실천을 수행한다. 감각의 퇴화가 곧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주장하면서 시인은 이를 거부하기 위한 소요를 일으킨다. 확실하고 견고한 말들에 빗금을 긋는 것이 소요의 시작이었다면, 더 과감해진 시인은 "지우개를 들고 다니는 사람"(「미니멀리즘」)이 되어 감각을 옥죄는 "영원 확신 이치 같은 말들을 지운 자리에 그림을 그리"며 세계의 흔적을 복원하기도 하고, "큰 소리로 소란스레 / 바람을 일으키면서"(「사과 한 알」) 전속력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속살 드러낸 난만한 붉음"을 현현하기도 한다. 언어를 빌어 감각의 소요를 일으킴으로써 의미에 붙들린 세계에 다시 감각을 불어넣는 것, 이것이 바로 소요를 실천하는 시쓰기이다. "무언가 사라져 가는 자리에 어른거리는 그런 것들만 사랑했"(「피로의 필요」)던 시인은 디지털 시대의 상식과 신념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방인-되기를 자처하기도 한다. 투명한 존재만이 허용되는 세계에서 자기 스스로를 "낯선 몸”, “난민", "철새", "외계인"(「낯선 몸」)이라고 명명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국적 없는 이방인이자, 번역되지 않는 말로 존재하겠다고 선언한다. 더없이 자유로운 거침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세계의 상실을 거부하는 소요로서의 시쓰기는 시인이 지녀온 다정한 목소리에 실려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김지윤 시인의 고유한 음색이자 태도라는 점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느 때보다 어둡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말을 건넬 수 있는 건 어떤 마음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자아의 소멸과 세계의 상실이 곧 닥치더라도, '너'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해서가 아닐까? 사실 '너'는 '나'를 증명하는 '나'의 진짜 세계니까 말이다. 어딘가 도착할 거란 약속은 할 수 없어 그냥 함께 큰 공을 굴리고, 그 길을 따라가 얼마나 멀리 굴러갈지, 상상해봐 둥근 것에는 가장자리도 모서리도 없으니 어디까지 가고 싶어? 멀리. 오래 걷고 길게 헤매자 가다가 쉴 땐 초라한 모닥불 곁에 더불어 앉자 작은 불씨가 꺼지지 않게 바람을 등지며 우린 훼손되지 않아 멸종되지 않아 그러니 부디 계속 살아가줘, 이 어둡고 깊은 숲 속에서 - 「헨젤과 그레텔」 부분 '우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멸종되지 않도록 끝까지 함께 걷고 헤매자는 간곡한 청유에는 목적지가 없다. "멀리", "계속"이라는 부사가 암시하는 건 애초부터 우리에겐 목적지가 없다는 것뿐.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세계는 "어둡고 깊은 숲 속"과 같아서 좀처럼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숲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처럼 세계의 상실에 직면하게 될 위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조건임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디지털 공간으로 수렴되는 사회적 관계나 삶의 양식들은 '나'와 세계(타인)가 맺는 실존적 관계를 형해화하고 각자의 삶이 "마음껏 혼자가 될 수 있"(「리얼리티 마이너스」)는 자유를 누리게 한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 맛보는 자유가 실은 현실의 '나'를 불안과 고립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시인이 세계의 상실을 거부하며 소요를 일으키는 건 불안과 고립에 반하여 우리 모두가 세계와 연결된 존재임을 확인하기 위한 일이다. 세계에 대한 감각의 회복은 '나'와 세계의 연결망을 확인하는 일과 다름없다. 헨젤과 그레텔, 두 아이처럼 우리도 어둠 속에서 서로가 옆에 있음을 느끼고 확인하며 걸어야 한다. 다른 존재와 더불어 걷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내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증거이며, 서로가 서로를 증명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믿으면서 "부디 계속 살아가" 줄 것을 요청/약속해야 한다. 고양이로부터 배운 것 진수미는, 시란 "이름 붙일 수 없는 망가짐"(시인의 말)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12년 만에 출간된 그의 세 번째 시집은 시를 쓴다는 것이 고양이라는 존재, 영화라는 장르와 인접한 행위이며, 고로 시는 고양이나 영화로 환유될 수 있음을 선포한다. 시인이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시집 한 권 분량의 문자가 사라진 걸 알게 된 후였으리라 추정된다. "너의 오두막을 불태"우라고 말한 니체의 책에 달린 끈을 씹어먹은 고양이가 무심하게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까닭은 고양이 집사인 시인이 스스로 불태우지 못한 시를 대신 불살라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을 주고자 한 것. 시인은 (어느 정도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 했겠지만) 결국 고양이가 "나의 별, 나의 종교 / 나의 고향"임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렇게 해서 시와 고양이는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환유적 관계가 되었다. 시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고양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고양이만으로도 시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떻게 시의 환유가 될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영화 이미지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시 이미지는 사실상 그 내적 원리의 측면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그러나 (좀 억지를 쓰자면) 진수미에게 시와 영화는 은유적이기보다는 환유적이다. 시인은 폭력의 현장이나 재난 상황에 발생하는 타인의 고통이 재현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데, 영화 이미지를 통해 재현 가능성을 발견한다. 진수미의 시쓰기는, 파편적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언뜻 드러내는 영화 이미지들을 참조점으로 삼으며 시적 이미지를 증식시키는 방식으로 시를 전개한다. 진수미의 시는 의미를 명명하지 않고 의미화를 지연시키며, 말로 붙잡으려고 하면 달아나는 고통을 단지 지시한다. 진수미의 시에서는 시 이미지와 영화 이미지가 서로를 지시하며 연합체를 만들어가는 환유적 관계에 놓여 있다. 유사성과 총체성을 거부하되 파편적인 이미지의 증식을 도모하며 환유적 세계를 만들어가는 이 시집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혐오가 야기한 고통의 순간들을 가리킨다. 사회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을 불러내 희생자의 고통을 환기하게 하는 시는 읽는 이의 마음까지 분노와 슬픔에 빠져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다음 페이지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이 '수미계(界)' 특유의 비합리성, 즉 "망설임과 단호함을 동시에 품"을 수 있고, "일상과 초월을 구별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을 꿈꾸는"3) 이른바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관습적 경계를 사뿐히 밟고 넘어가는 명랑함 뒤에는 시가 무엇이어야 한다는 자기규정에 머물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고, 세계의 폭력과 고통을 끝까지 응시하겠다는 결단도 있다. 그러한 응시의 산물인 이 시집은 시인이 밝힌 대로 "세상이라는 끔찍한 로또를 맞게 해주신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정시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우리가 노력해서 이룬 것은 아니나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폭력과 고통의 만연을 낱낱이 기록하며 대체 '아버지'가 만든 세계가 왜 이 모양인지를 묻는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언어와 문화와 규범을 가르치고 상징적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이끌어 주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분으로부터 선물받은 "생은 한없는 모욕"이자 "순종과 굴종 사이에서 눈알을 굴리는"(「처형의 이듬」) 눈치 게임 같기만 한데, 안간힘을 다해 이긴다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매인지 사랑인지 모르는 고통뿐인 삶인데, 삶을 자꾸 축복이라고 말하는 건 무슨 이유인가. 시인은 삶이 끝나지 않는 모욕과 같은 이유를 알고자 하지만 삶이란 언제나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는 문제이다. 사유란 언제나 사후적이고, 삶은 이미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니까 삶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쇄적 덩어리 혹은 "삶이란 / 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 개똥의 다른 이름"(「젖어서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삶이 개똥인 이유는, 더럽거나 하찮아서가 아니라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연출되지 않은 채로" 갑작스레 발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서로 상관없는 일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건의 연합체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삶이 개똥이란 말은, 그것이 감각의 대상일지언정 논리적인 사유의 대상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진수미가 삶을 그럴듯한 아름다운 대상에 빗대거나 총체적이고 최종적인 의미로 상징화하는 것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잘 뭉개진 똥처럼 파편적 이미지를 통해 감각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로 완성된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환유를 통해서만 지시될 수 있는 사건이다. 인접성의 논리에 기인한 환유란 대상에 대한 개념적 규정이나 이해가 아니라 단지 지시일 뿐이듯이 삶도, 끝나지 않는 여행처럼 지금 여기가 아닌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이행 중인 상태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나는 삶은 여행이라는 비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당신의 혐오 당신의 근심」)라고 말했던 건, 삶은 다시 돌아올 집이 없는 끝없는 나아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삶의 주체인 '나'는 한 곳에 고정된 집과 같이 변함없는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이질적인 '나'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 '나'의 바깥에 있는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삶은 타자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자 그들의 질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삶은 "고통으로 달구어진 신을 신"(「듣는다」)는 것처럼 왜 이리 견디기 힘든 것일까? 3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너처럼 나 역시 한 발짝 딛을 때마다 "이다음 발은 / 싱크홀"(「죽은 자의 휴일」)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왜 가시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건가요?"(「심해어」)라는 질문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여기 실린 46편의 시가 말하듯이 진수미가 시를 쓰는 이유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난데없는 발길질처럼 날아드는 폭력 앞에서 쓰러진 희생자들의 고통과 그것을 목격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들추며 시인은 타자들이 던진 질문의 답을 구하고 있다. 아침이 왔다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 밥을 주고 스트레칭하고 더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뼈가 부러졌다 모든 게 망가졌다...(중략)... 통증에 계단이 나 있다면 고통의 나선계단을 다 같이 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이 서있는 당신을 향해 고개 젖힐 것이다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다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다// 그래서일까요, / 통증의 시간은 식물을 닮았어요 / 다른 시간의 가지를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 줄기 끝 / 붉은 꽃을 매달고 화분 밖으로 팔을 내뻗는 게발선인장처럼 - 「푸른 잎 우주_20140416」 부분 도심이 좋아요. 보도블록과 낯선 이들을 사랑합니다. 어깨를 치고 툭 지나가도 만난 적 없는 궤도들처럼 강을 건너 여기, 남쪽, 춤추기 좋은 조명과 음악에서 여자가 빠져나온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돌아서는 순간, 금속, 날카로운 끝이 아랫배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통증, 떨리는 나이프, 파르르 존재여, 관통하려면 부디 고속 열차의 스피드로 ...(중략)...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여 여자, 한복판, 찔렸다...... 무표정한 당신, 사실의 톤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묻는다면, 양파의 궤도로써 도는 세계여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벗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10번 출구에서 돌아보라 -강남역에서」 부분 이 시들은 세월호 참사와 강남역 살인 사건을 환기한다. 사회적 재난이나 폭력 사건에서 희생자가 된 타인의 고통은 저절로 사그라들지 않고 식물의 푸른 잎처럼 화분을 넘치며 자라나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깨를 치고 툭 지나가도 만난 적 없는 궤도들처럼" 살아가는 타인의 고통이란 이해의 영역 밖이겠지만, 시인은 화자를 통해 타인인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고,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약속은 우리가 타자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는 '죽음의 공동체'(알폰소 링기스)임을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다. 진수미 시의 화자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타자를 돌보고 '죽어가는 타자'와 고통을 나누기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세계의 시간에서 절연되는 시간을 경험하고 견"4)디는 중이다. 달리 말하면 희생자들의 고통을 향해 손을 내미는 화자는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공간인 "푸른 잎 우주"에 속해 있는 것이다. 물을 주지 않아도 자라나는 선인장처럼 통증이 "가지를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점점 더 자라나는 '20140416'이라는 행성에. 타자의 고통을 응시하는 화자가 마주한 진실은 사회라는 삶의 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가장 취약한 생명들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여성'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도 운이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문장은 강남역 사건 이후 추모를 위해 모인 이들이 여성 혐오라는 폭력에 반대하며 외친 구호이다. 그러나 사법계는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지자체들은 서둘러 '여성안전 특별치안대책'을 마련했다. 공식적으로는 여성혐오가 이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라고 했지만 실은 간접적이고 광범위한 원인이며 여성을 향한 폭력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언론은 앞다투어 지자체들이 시행한 '여성안전 특별치안대책'으로 인해 성범죄가 감소되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인가?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인 여성은 아직 남성 주체가 정복하지 못한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이며, 동일화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질문은 여성을 해부하고 있는데도? 성차별과 여성혐오는 이 세계의 폭력이 더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젠더 갈등이나 극단적 페미니즘 등 문제의 원인을 발명해낸다고 해서 타자를 향한 주체의 폭력이 멈출 리 없다. 희생자와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따져 물으며 폭력의 원인을 분배하고 폭력을 이해해주는 방식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종식시키지 못한다. 시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타자의 고통에 대한 응시와 그것의 시적 이미지는 폭력에 반대하고 타자의 고통에 동참하게 한다. 이 시집의 4분의 1에 가까운 시들이 영화 이미지를 끌어들인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시에서 언급된 영화 이미지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타자를 향한 폭력을 보여준다. 여성만이 아니라 소수자, 이방인, 경제적 취약층이나 하위계층에게 가해지는 혐오와 폭력은 그들을 삶의 밑바닥으로 밀어내며 인간으로서의 권리마저 박탈하지만 그것은 대개 불가피한 운명이나 불행한 사건으로 기록되곤 한다. 예컨대 연인에게 강간당하는 여자(「세 겹의 죽음」, 「카사밀라의 재회」), 기계에 몸이 빨려 들어간 비정규직 노동자(「개미는 애인이라도 있지」), 국경과 국경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바깥으로 추방된 난민들(「누군가는 달이 없어졌으면...... 하고 빌었다」), 혐오와 차별의 시선에 의해 검열받는 연인(「모두가 쿠로브스키 부인」) 등 성적, 계급적, 인종적 타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영화 이미지를 통해 더 선명하게 노출된다. 영화의 삽입은 파편적 이미지를 호명하는 일에 불과해 보이지만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말처럼 이미지와 이미지가 연결될 때 일으키는 섬광은 우리에게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게 하는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장 뤽 고다르)5) 그러니 시를 써야 한다. 눈 위에 기침을 하자던 김수영의 말처럼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김수영, 「눈」)를 뱉어내듯이 시를 써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더 많은 이미지가 탄생할 수 있게 시를 써야 한다. 집사 시인들이여 이제 A4 용지 대신 고양이 몸에 시를 찍어냅시다 그리하면 온 집안에 시어들이 솜털처럼 날아다니는 기적이 생길 것입니다 시와 함께 자고 시와 함께 기침하며 깰 것입니다 김수영의 시를 떠올립시다 로션 바를 때도 얼굴에 처덕처덕 시어가 달라붙어 시의 육체와 하나된, 진정한 시인으로 육화될 수 있습니다 ...(중략)... 이뿐이겠습니까? 양피지처럼 덧쓰기 가능합니다 고양이 털피지는 무궁무진 상상초월 연속발생 재질입니다 - 「여기, 털피지의 기적」 부분 진수미는 "너무 열심히 시를 쓰는 한국 시인들"에게 제안한다. 당신이 종이로 찍어낸 시집을 출간하여 명성을 얻고 문학사에 길이 남겠다는 작심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면, 다만 가슴속 가래를 뱉어야 시원한 게 인간의 생리이듯 시를 써야만 살 것 같은 시인의 생리에 따라 시를 쓰는 시인이라면, 정말 그런 시인이라면 유한한 종이 대신 "무궁무진 상상초월 연속발생"하는 고양이 털로 만든 '털피지'에 시를 찍어내자고 강력히 말한다. 좀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고양이 털에 찍힌 시가 온 집안을 날아다닐 테고, 아무리 털어내도 겉옷과 속옷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는 몸의 일부로 육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고양이 털처럼 온 사방에 난무하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에 비로소 도달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온과 불경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데나 달라붙는 고양이 털처럼 자유로워진 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마구 쏟아내며 타자의 고통에 침묵하는 일이야말로 삶을 모욕으로 만드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진수미는 시를 쓰는 일이 자신의 오두막에 불을 지르고 자기라는 작은 세계 밖으로 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 시인이다. 자기라는 진공의 상태 바깥에 서면 다른 "존재의 기척"이 자신을 깨우고(「센세라는 이름의 고양이」) 그들의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야기의 대부분은 고통의 발신이고 그것을 응시하는 일은 시인 자신이 끝낼 수 없는 고통에 붙들리는 일이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영원히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고통을 맞이하듯 가혹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이 고통스러워졌을 무렵 집사인 시인에게 주인인 고양이가 가르쳐주었다. 사랑에도 마침표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못할 일도 아니라고.(「번갯불에 똥덩어리」) 참으로 타당한 그 말에 '수미계(界)'에는 다시 계속 쓸 수 있다는 용기가 차오른다. 시인은 가래를 뱉듯 시를 쓴다. 삶을 모욕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김지윤과 진수미의 시집은 다른 목소리로,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한다.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요구는 예술과 혁명의 생리이므로 그들은 작은 혁명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탐욕과 이기가 낳은 무책임이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빠뜨릴 때, 무지와 맹목이 불러일으키는 차별과 혐오가 소수자와 약자를 향할 폭력이 될 때, 타인의 슬픔이 조롱당하고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금지될 때 시는 더 나은 세계를 요구하는 문장이 되고자 도약을 준비한다. "모르는 죽음들, 애도하지 않은 상실 / 꺼져 버린 등불들"(김지윤, 「B-side」)을 밝히기 위해 문장의 온도를 달구고, "파괴의 신이 공동체의 이름으로 낫을 휘두"(진수미,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앨리스」)르며 약자를 위협할 때 그 앞에서 스크럼을 풀지 않을 견고한 문장들을 결속시킨다. 이들이 안온한 서정시를 쓰지 못하는(않는) 것은 세계의 상실과 폭력에 맞서 자신이 쓸 수 있는 최선의 시를 쓰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최선의 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을 실천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요구하는 문장들이다. 1) 랭던 위너, 『길을 묻는 테크놀로지』, 손화철 옮김, 씨아이알, 2010, 172쪽. 2) 위의 책, 165-170쪽. 3) 진수미의 두 번째 시집 『밤의 분명한 사실들』(민음사, 2012) 뒷표지에 실린 추천사. 4) 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자들의 공동체』, 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2013, 250쪽. 5)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오윤성 옮김, 레베카, 2017, 214-219쪽 참조.
* 변선우, 『비세계』 (타이피스트, 2024) 어떤 시집은 그 안에 도깨비도, 금도, 은도 등장하지 않지만, 읽는 내내 어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홀린 듯 거닐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변선우의 『비세계』가 그것이다. 그 유체의 세계를 장악하기 위한 도깨비방망이도, 방법론과 같은 도구도 나는 갖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곳에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 관문은 다름 아닌 하나의 회전문이겠다. 변선우의 세계는 그 "경계에 당도하여, 문을 밀어 열 듯. 선을 넘어 입장"(「비세계」, 11쪽) 할 때, 비로소 발명된다. 나는 회전하므로 입장이 번복됩니다. // 내부와 외부는 나로 하여금 교차합니다. // 나의 내부는 외부가, 나의 외부는 내부가 되어 // 공존을 도모합니다. // 그러므로 나는 반복적으로 중단을 사유합니다. // 내 몸에, 이 순간에 도사리는 안과 밖이 // 이토록 함께 간섭하다니. // 나는 놀라움으로 하여금 조작을 하여 // 회전문을 더욱 빠르게 작동합니다. // 더욱 빠르게 넘나듭니다. // 그래서 경계는 도리어 뚜렷해지며 // 내부는 능숙하게 외부가 되고, 외부는 능숙하게 내부가 됩니다. // 그럴수록 나는 바깥을 몽상합니다. // 그럴듯하게 중단을 사유합니다. - 「회전문」 108쪽 부분 변선우의 화자들은 대체로 어떤 경계에 놓여있다. 강렬한 몰입을 요구하면서도 어지러운 몽상으로 구성된 그 경계는, 화자로 하여금 각종 사물의 운동 에너지를 자기 신체에 결합하게 한다. 요컨대 그 세계가 생경함을 넘어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화자들의 몸이 그 세계의 운동 방식을 구사하는 유기체 그 자체로 변모되어 가는 순간에 있다. 마치 인용한 시 속 화자가 회전문의 움직임을 자기 몸짓으로 구사하며, 몸 내부가 이미 외부에 의해 만져지고 있듯, 또 동시에 그 외부가 이미 내부에 의해 만져지며 내외부의 상호 간섭 그 자체로 조형되어가고 있듯 말이다. 그건 「자전하다」 속 어항의 곡면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작중엔 "어항 / 그 속에 왜곡된 내 얼굴이 두둥실 커져가"는 것을 관찰 중인 화자가 등장하는데, '나'의 얼굴이 "인공 물풀 인공 자갈 인공 불가사리 둘을 집어삼켜" 어항 전부를 왜곡하게 된 순간, 화자는 또 다른 '그'로 변모하게 된다. 그렇게 어항을 바라보는 '나'와 '그', "서로의 위/아래가 // 서로의 아래/위를 겨누기 시작할 때" 화자의 몸은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 아닌 것을 향해 굴러가려는 '자전'(自轉)의 새로운 자전(自傳)을 써 내려간다. 종합하자면 변선우의 세계에는 각자 완전히 분리되어 닫힌 '구조'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정반대인 듯 보이는 관념조차 어느 순간엔 서로가 서로에게 삼투돼 있고, 또 서로를 왜곡하며 비틀어 내고 있다. 이 중첩된 두 개의 꿈이 한 권의 시집 안에 지극한 추상성으로 얽히고 뒤섞이고 있으니, 아득해지지 않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세계-비세계의 혼란 안에서 우리는 "몇 번이나 태어나기라도 한 듯" "이건, 꿈이 아닌가"(「태몽」) 곱씹기도, 또 더러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쥔 채 "너무 졸려 쪼개다가 잠들어 버"(「제정신세계」, 60쪽)리기도 한다. 이 가능 세계들은 "한 몸이 되지는 않았지만 죄어들"(「미스터리와 미저리」)듯 서로를 휘감고, 그 안에 휘말린 우리는 '내가 나비 꿈을 꾼 장자인지, 내가 장자 꿈을 꾼 나비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지금 내가 '비세계' 꿈을 꾸는 '세계'를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세계' 꿈을 꾸는 '비세계' 그 자체를 지나가는 중인지 알 수 없어 헤맨다. 즉 10편의 연작시 「비세계」와 11편의 연작시 「제정신세계」는 서로에게 대중없이 교차하며, 서로에게서 구별되려는 "구조를 경계하"(「오토와 마톤」)고 있으니, 오로지 이 세계들의 "표면과 배면은 가능 세계의 한통속"(「비세계」, 91쪽)이라는 사실만 기억하라. 이를 위해 우리는 단지 이 모든 시적 대상들이 서로에게로 횡단하고 있다고, 또 서로에 의한 분유를 이행하고 있다고 믿어보자. 그리고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흐름'이라고 읊조려 보자. 당장 그 시가 "말이 되는대로 / 말이 옮는 대로", 또 "옮아오는 대로 / 붙어 가는 대로" 흘러가기를 겨냥 중이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흐름이"고 "겹침이며 / 사사건건의 앙갚음"(「태도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 시 세계의 유연함은 그곳을 구성 중인 모든 존재자들이 '유체'로 실재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니, 서로에게 "빈틈없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사건"이 되거나 "모두 어딘가로 흘러 들어" 세상을 "뒤집힌 실재"(「용혈수」)로 만들고 있는 광경이 그리 이상할 것만은 아니다.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넘어가고, 그 공간에서 또 다음 공간을 생성하는 일에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는 세계는 새삼 문학이 '문학성'이라는 어떤 고정된 자질을 갖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이 흐름을 조금 더 실감해 보려거든 수록작 「복도」 위를 한번 거닐어 보자. 작중에는 자기 자신을 "기나긴 몸짓"이라 고백 중인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어디론가 흐르고 있"고 "힘을 다해 펼쳐져 있"기에 고래를 만나면 고래에게 읽힐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동시에 자신의 몸은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 몸이며, 복도에 놓인 문들의 "무수한 손잡이"를 잡고 돌리기만 하면 어떠한 변신도 감행할 수 있는 변형의 몸이 된다. 그렇다면 이 흘러가는 몸은 사실상 어떤 애매성 안을 기어이 빈손으로, 무념으로 횡단해 가려는 일체의 시도 그 자체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시도에 앞서 존재에 요구되는 것은 그 미지를 비집고 들어가기 위한 '용기' 인지도 모르겠다. 이 용기를 갖기 위해서는 서로를 간섭하고 비트는 세계의 지형적 속성을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그 존재의 움직임을 구성하는 '지속'과 '정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변선우의 시 안에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나" 묻던 어느 화자의 발은 "점점 바닥에 들러붙어 면의 일부로 수렴하기 시작"(「잡초와 산책의 방」)하며 정지상태에 접어들기도 한다. 아니면 아예 정반대로 걸음을 멈춘 한 화자가 걸음을 재개하기 위해 "발바닥을 경우처럼 옮겨, 정지를 배반하"(「제정신세계」, 84쪽)기도 한다. 어떤 화자는 "담을 넘을래. 정지선을 침범할래. 저촉하거나 부정할래."(「자화상」)라고 말하는데, 또 어떤 화자는 "갈던 먹은 놓"고 "입장은 번복"(「유체들」)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이러한 번복과 배반은 어느새 존재의 움직임을 넘어 세계의 내외적 원리, 가령 시간과 같은 원칙에도 적용된다. 일례로 「식물의 말」 안에서 시간은 유동하는 물질을 만나 흐르고, 또 어떤 힘에 점유되어 멈추기를 반복한다. 요컨대 흐름이 있는 곳에 배반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게도 유체들의 끊임없는 유동을 촉진 중인 '유연한 세계'의 비밀인 것이다. 이렇게 "진종일 돌아다니고 있"는 것들이 "미개와 문명의 차이"를 교란하며, 또 "거리를 빚어보"기도, "거리를 잊어보"(「유체들」)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혼은 돌고 돌아 수집"(「지속」)된다고 변선우의 시는 말하고 있다. 물론 「비세계」(30쪽)엔 힘을 잃어버린 신이 실수로 떨어트린 후라 크레피탄스로 인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버리기도 할 것이다. "세계는 쟁취에 점령"당하고, "인류는 (육안상) 멸종"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완고하던 유산들이 하나둘 가루가 되어 가는 기분"에 "이제 무엇이 흘러들까" 하는 화자의 허망한 물음 뒤로, 인류는 자신의 "땅콩만 한 믿음"을 쥐고 "땅에다 용기를 묻는" 정도의 일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수도 있다. 같은 원리로 "제정신이 자꾸만 / 제정신을 해산"하기도 하는 제정신세계는 더러 "점과 선을 반복"(「폭탄 마니아」, 70쪽)해 어떤 폭탄을 생성하기도 하리라. 여기서 '점'은 종결되어 닫힌 하나의 끝이고, '선'은 완결되지 않아 어디로 확장될지 모르는 무한한 것이라 했을 때, 무한함과 유한함이 서롤 만지며 발생시키는 '무한히 유한한 움직임'은 더러 폭탄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더러 "종교가 되고, 맹종의 대상이"(「폭탄 마니아」, 126쪽) 되기도 할 것이며, 이러한 세계에선 미미한 깃털마저 화자를 아프게 만들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엔가 화자는 깃털의 무게마저 감당되지 않아 "쥐고 있던 깃털을 쏟아버리"고 "책상으로 가 엎질러진 채"로, "주인공처럼" 굴고 있는 자신의 삶이, 이 실패의 필연이 "너무도 분"(「제정신세계」, 136쪽)하다고 문장을 휘갈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깨어진 삶의 파편 속에서 '나'가 무수한 거울 속 '나'들의 모습으로 조합될 때, 그리하여 "입술을 오므린 내가 거울 속에 많아"질 때, "서로에게 실패를 말하기 위해 밀려온 느낌"으로 풍만해지는 삶의 숨은 진실은 또 다른 "거울의 진의"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거울이 된 세계가 서롤 반사해 내는 동안 "나는 무수한 나를 통해 자세해지고 명백해"진다는 사실도 드러날 것이고, "저마다 세계가 되어가"는 각각의 조각들이 "나를 호흡하는 기분"을 제공하며 우리의 몸을 "규칙적으로, 또 불규칙적으로 이어져 있는 조각의 조합"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규칙과 비규칙이 '나의 호흡'을 빚어내는 세계의 "한가운데에서 시를 쓰고 있다"(「비세계」, 30쪽)는 화자의 고백이 유달리 돌출되는 것은 「제정신세계」(24쪽) 속 "시는 개시한다"는 정황과 「비세계」(30쪽) 속 "시인은 시작한다"는 정황이 세계-비세계를 진즉부터 매개하고 연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한 세계 속 시인이 '시작'할 때, 그 배면의 비세계에선 시의 '개시'가 이미 발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인'과 '개시하는 시'의 넘나듦 안에서, 우리는 단지 우리의 호주머니에 어떤 맨질맨질한 '돌멩이'가 하나씩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 시인이 말하기를 그 '돌멩이'는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냉정해질 수 있다 한다. 아니면 어떤 환상을 통해 "현실의 틈을 벌려" 당신을 "풀어지면서, 연약해지면서, 뜨거워"질 수 있게, 혹은 "희멀게질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단다. 그 돌멩이는 한 개의 거울 속 하나의 상으로 고정된 당신을 깨트려 무수한 파편 안에서 셀 수 없이 다양해질 수 있는 당신을 발견케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돌멩이'를 감히 '시'라고 바꿔 읽어본다면, 이 미적인 시 세계와 지적인 시 세계가 빚어낸 오묘한 리듬 혹은 그 리듬의 배반 안에서, 당신도 한 번쯤은 정처 없이 흘러볼 수도 있는 것이다. 추천 작품: 「회전문」, 「비세계(30쪽)」, 「폭탄 마니아(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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