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

민가경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주요 논문으로 『김말봉 소설에 나타난 여성 인물의 ‘광녀-대본’ 양상 연구』(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가 있고, 주요 평론으로 「지금, 여기, 회색지대, 그리고 “빨강” - 이유리론」 등이 있다. 현재 《내일을여는작가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詩)의 틈(間), 시간(時間)의 음(音)1)



호모 클리마투스의 비유와 진실


  그동안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여기서 방점은 너무, 이 두 글자에 찍히고,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지겨운 동굴 생활을 청산한 인간이 정착하여 부족을 이루고, 전쟁하고, 문명을 세우고, 또 허문다. 르네상스를 거쳐, 달나라 여행을 간다. 이 범박한 정리 너머, 너무나도 착실하게 호모 클리마투스homo-climatus가 되어온 인간은 1.45도 뜨거워진 지구, 20분에 하나꼴로 잃어온 생물종들을 보며 뒤늦게 읊조린다. 파훼되었다. 이제 “파종은 끝났다”(「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기후 위기’라는 진단도 점잖은 바야흐로 ‘기후비상’. 이제 우리 호모 클리마투스에겐 이런 일들이 남았다. 산호초, 극지방, 습지와 운무림의 생태가 사라진다. 킬리만자로 만년설이 녹는다. 해안과 강이 범람하고, 작은 도서 국가들이 가라앉는다. 2050년경 지구 식물종의 15~37%가, 2100년경 현존하는 동물의 4분의 1이 사라진다. 환경 난민이 되어 대규모 이주 행렬을 잇는다. 참신한 전염병과 온열질환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들어 번번이 진로를 방해한다. 식량과 물 안보 등 정치 어젠다가 부상할 때마다, 인간은 지론만 있고 지혜는 없는 자기 한계를 뼈아프게 실감한다. 플루토늄과 플라스틱을 위시한 인류의 희망(이었던 것)이 새 시대를 여는 강력한 지질학적 증거가 되어 돌아왔듯, 인류 문명의 기초 요소가 되어온 모든 도구가 인류를 가장 취약하게 만드는 결정적 한 방이 되어 귀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비유가 아니다.

  어쩌면 작금의 진짜 문제는 비유로 환원해선안될 각별한 진실에 비유를 들이밀어버린 데에서 비롯한 것일지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기술이 상황을 타개할 것이라는 믿음, 그 견고한 믿음이 오늘도 착실히 쌓고 있는 멸망 크레딧, 그렇게 하나 둘 격파되어가는 티핑 포인트는 차치물론하고, 자기 작동 원리에 신실할 뿐인 ‘복잡계로서의 지구’가 인간에 ‘소외’되었다는 식의 비유가 통용되는 현실은 인류가 이미 자기 진단의 감각마저 상실했을지 모른다는 서늘한 경고를 던진다. 그저 ‘자연-권’을 행사 중일 뿐인 지구는 어느새 인간을 향해 이글대는 복수심을 주체 못하고 스스로를 불태우기 시작한 신파 멜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이러한 소묘 방식에는 인간이 진지한 반성에 임하기만 하면 끓는점을 향한 지구의 질주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는 만용의 혐의가 짙게 깔려있다. 자랑할 역사가 기껏 만년도 안되는 인간이 자기 신분을 망각하지 않고서야 이토록 당당하게 오답을 내놓을 순 없다. 하루아침 모든 개체가 동시에 절멸하는 전격적인 사건으로 ‘멸망’을 이해하려는 손쉬운 믿음 역시 그 오판에 적잖은 몫을 보탠다. CO2와 N, 흙과 물, 빙하와 바다를 자기 악력으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덮어두기식 믿음은 아쉽게도 단 하나의 사실만 덮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

  이렇게 또 다른 대타화 단계에 진입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 모든 진실과 비유, 믿음과 기만의 틈바구니를 면밀히 살펴보는 작업 아닐까? 무려 45억년 동안 쓰인 이 행성의 역사책은 연속 두 줄 이상 속 편한 문장으로 이어진 적 없는 ‘종말론의 필연’이었다.

우뚝 솟은 하나의 진실과 덧칠된 비유만으로 축약되기엔 너무 아득하게 오래인 ‘시간’이 이미 지구의 모든 존재를 선행한다. 이 사실은 다시금 무언가를 믿어보고 싶게 만드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기를 ‘이로써 인류가 희망을 확보했다’거나, ‘인간의 책임 우선성을 회피해도 괜찮다’는 식의 이해로 비약하면 곤란하다. 과거 다섯 번의 대멸종과 지금 도래 중인 여섯 번째 대멸종의 차이 - 인간이라는 내부요인이 그 멸종의 압도적 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 - 까지 사상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이번 멸망이 인간이 직접 경험 중인 첫 번째 멸망이라 해서, 혜성 충돌, 대륙판 이동, 화산 폭발로도 완전히 장악되지만은 않은 지구의 시간성까지 절하할 순 없다는 말이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이런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마다 대안적 가치로 호명되어왔다. 그러나 당장 육박해오는 ‘자본 난민’의 위기 앞에서 ‘기후 난민’의 공포는 상대적으로 멀어 보이고, 그 겨를까지 비집고 들어가기에 오늘날 시의 존재감은 이미 너무 희박해진 것 같다. 또 시의 미학성은 실리를 염두하는 방식보단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벌려내며 발생한 간극에서 주로 출몰하기에, 독자의 생태적 감성을 자극하기 위한 선전도구 되기를 자처하지 않거니와, 두려움을 환기하는 ‘공포의 발견술’ 되기는 더더욱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니 더러는 백 줄의 시구보다 단 한 줄의 1.5도 라이프스타일 운동 구호 제창이 더 긴요해 보일 때도 있다. 하물며 문학장이 각종 인류세 담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시를 읽는 우리가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세상의 일들이 그리 많아진 것 같지도 않다. 당장 러브버그와 모기 포비아로 잠 못 이룬 우리의 여름밤을 떠올려보면 때때로 이 모든 이야기가 너무도 고아한 별나라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조 : 배음의 정치, 포네의 시간


  이 멸종의 시간을 같이 버티어 줄 만큼의 가치가 아직 문학에 남아있다는 게 이 글이 당도하고자 하는 거친 결론이다. 이는 곡진한 사유의 결과보다 차라리 간절한 선언에 가깝다. 그간 다수의 기후문학 논의가 최소한의 윤리적 혹은 당위적 선언을 배제하지 못했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채택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주목해봄직한 논의로는 임태훈의 논의2)가 있다. 임태훈은 그간 “모든 비인간 존재들을 압도해 최상층 위계에 올라”서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온 재난 서사와 기후 소설이 엄연히 구분됨을 짚어내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기후변화의 준원인”이고 “온갖 사물 간의 얽힘과 스며듦도 연루되어 있”기에 클라이-파이Cli-fi의 역사적 과업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재차 생각하”고 “미래의 비/인간/형을 발명하는 일”에 있다고 제시하였다. 또한 “소중한 삶의 터전으로 간주되는 자연을 더 이상 현대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태적 아노미”의 징후를 포착하고, 2020년대 기후-시의 개념을 “자연을 투명하거나 실체가 없는 하나의 기후나 계절로 표현하는 일군의 작품”으로 정립한 박동억3)의 논의 역시 무력한 인간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던져야만 할 근원적 질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 기후 문제를 범지구적이고도 행성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 SF의 성과 역시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해봄직하다. 근대 사실주의 문학의 경향을 벗어나 시공간을 재구성하고 다양한 비판적 사고실험을 통해 비인간과 인간을 얽어놓은 SF 장르는 이미 인류세를 지나는 문학장 내 강력한 정동의 매개물이 되었다. 물론 저 먼 바깥 우주를 향한 인간의 도피를 촉발하며 “땅으로부터 뿌리는 뽑아내고 또 다른 전좌를 초래”하거나, “파멸을 ‘가정적 미래’로 연기시”키는 작업들이 객체를 향한 인간의 무감함을 심화4)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SF가 인간의 자기-준거성이 세워온 ‘사회적인 것’들의 토대를 허물고, 재구성하며, 물질의 귀환을 촉진해온 것은 주지의 활약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SF가 “현실과 허구 사이의 밀착과 긴장”을 내포한 모든 매체를 포괄하는 “서사 예술의 한 형식”5)이라 했을 때, SF시란 무엇이며 타 매체의 SF적 형식으로부터 변별될 수 있는 시적-서사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된다. 장르별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과학 기반의 허구를 통해 ‘지금-여기’에 일어날 법한 것을 구조화하는 것이 SF 서사의 기본 공식이라면, 우리가 시에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SF적 상상력은 결국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연대기적 나열로부터 시간을 구출해내는 것, 요컨대 낯선 시적 대상의 본질 밑에 놓인 새로운 시간성을 발견해내는 일 아닐까? “은유의 강력한 결합적 양식으로서의 시”6)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머나먼 시간성을 지금-여기의 필연으로 땋기에 가장 넉넉한 장르인 까닭이다.

  그리고 바로 이 맥락에서 “모든 텍스트의 원천은 결국 시간을 감각의 형식으로 붙잡아보려는 안간힘”7)이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2차원 아닌 3차원(전후, 좌우, 상하)의 입체적 흐름을 따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자문하고 자답해 온 신해욱의 시를 살펴보자. 신해욱의 시는 늘 예정된 미래대로 흘러가기를 최대한 망설이며 다른 시공에 자신을 옮겨놓기를 기꺼이 택한다. 이 흔적들을 보기 위해 먼저 우리 시간의 스케일을 ‘시분초침’ 단위에서 ‘자연사’ 단위로 확장해보자.

  시인의 근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에는 동일한 제목의 표제작이 총 네 편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자면 “자연의 가장자리로부터 다시/맨발로 나타”난 인간이 ‘남’의 그늘, 양분과 자유를 누리고 ‘남’이 베푼 망각의 은혜에 과하게 도취되어온 역사 그 자체이다. 이 네 편을 이어 붙여보면 흡사 한 편의 대서사시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자신이 지구의 밭에 심은 무허가 작물을 보며 그것이 ‘불로초’냐는 인간의 우문 그리고, 그 찰나에 깃든 “영생의 기분”은 자연의 생몰에 관여해온 인간의 방식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한지를 되비춘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 번째 표제작 속 ‘우리’는 불을 “우리의 불”로 인식하며 그것을 “비로소 일렁이는 것, 비로소 따뜻한 것”과 같은 주관적 인식 하에 소유한다. 그들이 자기 바깥으로부터 낚아채온 종자로 번식해온 인간의 ‘의존의 역사’는 두 번째 표제작 속 ‘파종’의 계절에 이르러 다음 선언과 함께 중단된다. “파종은 끝났다.” 뒤이어 시인은 서너번째 표제작 속 ‘첫눈’과 ‘봄비’의 계절을 경유하여 인간이 자기 인식적 경험의 저장고에 축적해온 모든 것에 그 고유의 소유격을 되돌려준다.


“눈이 왔다 첫눈이었다

우리는 유성생식을 했다

무허가의 시설로부터 다시
우리는 맨발로 다시 태어나

맨발은 추위의 것
시간은 미래의 것

(……)

손바닥을 보았다 바닥은 검댕의 것
손금은 생명의 것

창밖을 보았다 소멸은 눈송이의 것
부재는 빈 집의 것

(……)”
ㅡ 세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비가 왔다 곡우였다

거름은 나무의 것
모이는 새의 것

우리는 먹이를 먹었다

자연의 가장자리에 들어
먹이는 우리의 것
우리의 먹이를 먹었다

촉촉하구나 촉촉하다
촉촉한 등은 개구리의 것
촉촉한 흙은 지렁이의 것
미끄러지며 목을 넘어가는
먹이는 우리의 것
누가 먹던 우리의 것

(……)

거름은 나무의 것
삶은 자연의 것

못물은 모의 것
촉촉한 혀는 우리의 것

(……)”

-네 번째 수록된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부분


  이 모든 대서사시의 방점은 결국 “미래는 시간의 것”이라는 문장에 찍히며, “죽은 동물의 냄새”를 풍길 뿐인 인간이 논하는 ‘영생’이 얼마나 ‘음담’에 불과한지를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니 이 네 편을 연속적인 흐름 안에서 읽는 것은 시간성에 대한 인간의 오해를 바로잡는 시인의 작업으로 보아야한다.

  신해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규칙을 고안해 틈을 벌려내본다. 「카운트」 속 “하나에서 열까지”를 계수 중인 화자는 ‘우리’를 “선험에 갇힌” 채 “못 한 것의 못 함에 붙들리는 영벌에 처해진” 존재요, 그 “영벌에 걸맞은 잘못을 두고두고 저지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소묘한다. 이 때 “우리의 열은 뜨겁고” 그 열은 “생활의 열보다 빠르”다. 숫자를 도통 천천히 셀 줄 모르는 인간에게 세상은 분열, 증식의 오류, 뒤척임, 섣부름과 같은 혼란의 필연이다. 계수의 명령에 따라 “세라는 대로 열까지” 고분고분 수를 세는 동안 인간의 미래는 “차례차례 곪아갈 것”이고, 이 때 자기 세계와 허구를 연결시킬 모종의 틀을 전혀 고안해내지 못한 인간은 “전생을 못마치고 미리 깨어난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반면 더 이상 ‘카운트’ 하지 않고 ‘구구단’을 통해 “하나에서 열을 만드는 놀이(「구구단」)”를 하는 세계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놀이란 “둘은 사라지게 하고/당장에 셋을 낳고/넷을 잃기로” 하거나 “다섯과 여섯 사이에는 일곱과 여덟을 만드는” 등 자신이 직접 “숫자가 되어”가는 놀이이다. 숫자가 만들어지고 또 사라지고, 낳아지고 또 제거되는 과정은 1부터 10까지의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상태에 의해 증식되는, 요컨대 ‘구구단’이 “생물로 가득”한 ‘생물성’으로 빚어지는 과정과 나란히 놓인다. 인간이 실재를 과학적으로 부호화하고자 만든 ‘계수의 법칙’이 그린 결말과 ‘구구단’의 결말은 그 결을 달리한다. 수는 자신이 수량화하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정작 ‘카운트’를 추구하는 건 세계의 모든 것을 시간의 선후와 그에 따른 인과로 설명하려는 경험론자들과 그들의 협소한 과학주의이다. 그들이 가진 “맹목의 질료들을 있는 그대로 구원하는 일”(「클론」)에 관심 없는 시인은 「파훼」에 당도해 그 경험들을 찢어내는 방식으로 “경험의 틈”을 벌려낸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자기 허구의 세계, 즉 자신의 시를 깃들게 할 뿐이다.


“(……)삼각자에 찔려 경험론자의 경험이 대신 찢어지고 경험의 틈이 벌어지고

벌어진 틈으로 미지의 액체가 콸콸 흘러 흙이. 숲이. 습함이. 병듦이.

상처는 생각보다 깊고 여름은 비참하게 길고 병듦이. 붉음이. 시듦이. 슬픔이.

보잘것없는 상념이. 건조불멸의 시름이. 어지러운 빈혈의 마음이.

깜부깃병에 휩쓸린 보리밭이. 개구리밥에 뒤덮인 연못이. 향토색에 찌든 자연이.
(……)”

-「파훼」 부분


  그동안 근대적 세계관은 삼각자의 정밀한 수치, 치밀한 눈금, 날카로운 계산을 통해 차이를 빚고, 그 차이를 근거로 양자가 대립하는 세계를 구축해왔다. 근대 이성이 “찾지 못한 깊이”에 의해, “부러진 삼각자에 찔려”, “잘못 깊어진 것들에 의해”, 그리고 “잘못 찾은 깊이”에 의해 세계는 줄곧 ‘파훼’되어왔다. 그 때 시신도, 유족도, 곡소리도 없이 장례를 치르던 삼복염천의 상갓집(지구) 속 시인은 이성과 비이성의 ‘틈’을 재차 벌리고 그 안에 “누가 잡초를 움켜쥐고 통곡”하는 소리를 발생시킨다. 그러니 이제는 몸을 활짝 젖히고, 들을 귀를 겸비한 채로 ‘포네phone’들의 시간을 맞이하면 된다.

  시각 중심주의가 우리의 형이상학에 깊이 스며드는 동안, 인간은 시각적·과학적 번역에 의해 세계를 지성의 대상으로 해석해왔는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다른 생명존재와 공유하는 ‘비음성’을 잊어버린 우리는 명료한 언어를 취하지 않는 모든 소리를 너무 쉽게 ‘헛소리’로 여겨왔다. 세계라는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대한 세심한 청각적 번역을 방기하며 줄곧 굴러온 역사 안에서, 신해욱은 마치 잠수함의 산소 농도가 떨어지는 것을 제일 먼저 감지해내는 토끼처럼 인간의 가청권내에선 감지할 수 없는 신호들을 포착한다8). 마치 바탕음 속 배음처럼 신해욱의 시적 상상은 문장이 되지 못한 묵음들, 유의미하게 발화되지 못한 포네들을 시어와 시어 사이에 삽입해낸다. “말씀에 섞인 광물의 소리. 파문을 일으키는 폐수의 소리”(「비굴착식 승강형 맨홀보수기계장치」)에의 자처가 바로 그것이다.



조율 : 묵음의 크레센도


  신해욱이 절단된 시간의 파편들을 잇대는 성실한 직조공이라면, 윤혜지는 비가시화된 죽음 안에서 잊혀진 시간들을 건져 올리는 예민한 조율사이다. 윤혜지의 그것을 읽노라면 시 한편이 채 전개되기도 전에 엉겁이 흐른 느낌에 당황하게 될 것인데, 독해를 반복하면 행간을 잇는 시인의 사인파가 개인 단위에서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시공간을 뛰어넘어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제일 먼저 윤혜지가 소묘하고 있는 멸망의 오늘에 주목을 요한다. “피와 빵과 비누 따위를 얻기 위해 수도꼭지든 뭐든 다 팔아먹고 거리로 나온” 아파트의 사람들, 그러나 “더 이상 팔아먹을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아파트의 “또 무엇을 떼어 낼까 골몰”하는 얼굴들은 자본의 명령에 과잉-충성해온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학’에 다름 아니다. 작중 ‘굴착기’라는 표상은 자기가 세계를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한 곳으로 빚어냈다 착각하지만, “모든 것을 으스러뜨”리며 “쇠와 쇠가 부딪히는 냄새”로 진동하게 만들어온 경제와 생산, 기술과 개발의 논리를 표상한다. 이 ‘굴착기’에 의해 “파헤쳐지는 침묵”이란 세계가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굴착해온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묵음 형태의 멸망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사로잡힌 세계」).

  아울러 「모든 것을 내려놓은 고양이」 속 “불이 난 광경을 쳐다보며 하나둘 덧문을 닫는 우리의 이웃들” 역시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 파편화된 우리의 생을 보여준다. “조각 케이크 같이 나눠진 세계를 믿는 자들”이 이 모든 대지를 경제 생산의 질료로 여기며 그것들을 자기 맘껏 분화시켜도 되는 대상으로 여겨온 ‘망상의 공동체’를 영사한다. “몰두일까 외면일까”에 대한 시인의 물음 앞에, 이 모든 ‘불구경’이 사실은 가장 차가운 ‘냉담’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가 몹시도 몰두해온 것들의 결과가 이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부조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안에는 이렇게나 무거운 진실이 매립되어있다. 우리의 직관과 직감이 보내고 있는 위기감, 이 묵음의 경고는 이미 크레센도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해왔다. 게다가 시인의 이러한 질문에는 인간이 스스로 각성하거나 구원하는 메시아가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땅은 결국 자신의 시간과 아상(我相)대로 그 모든 계획과 무계획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의 가장자리를/걷는 사람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줍는다

혹은 죄악 혹은 돌과 나무조각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두고
탐색
작은 것들을 옮겨 담는다

모래를 밟고 서서 물을 바라보는 건 낡고 근사하다 첫눈에 대해 말하는 노인들 같다
계절이 시작되면 그들은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했다 이상하지, 오래된 사람들은 늘 처음을 말하고

조개 줍는 사람들 곁에 앉아 조개에 붙은 모래알을 털어냈다 해안가 침식이 심각합니다 너도나도 모래를 퍼가서요 멸종은 조개가 아니라 모래에게 도래한 것 같아요

저기
온갖 것을 묻힌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갔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한다

무릎까지 차오른 바닷물 속에 손을 넣는다

모래를 퍼내면 모래는 느리게 밀려간다 더 깊은 곳으로

평범한 것들이 마음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등 뒤에 사람들만 볼 수 있는 사건을

잠깐 쥐었다 놓아도 쥔 감각을 놓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집에 가면
목이 긴 유리컵에 조개껍질이 한가득이다
그것을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을 골라 따뜻한 국물 속에 넣고
죽은 것의
숨구멍끼리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야지 생각했지만 곧 잊혔고, 모두가, 물가에 있었던 기억마저도 쓸려가고, 수심이 깊어져 이제 아무도 조개를 줍지 못할 곳까지 모래는 깊고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빈 곳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그런 적이 있었지 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

무너지는 것도 반복이라고

노인들도 죽고 이제 눈 이야기 해줄 사람도 없다 처음을 발음 할 사람도

- 「음악 없는 말」 전문


  “지나간다 지나갔다”거나, “닿았다 떨어진다”거나, “쥐었다 놓는”다거나, “생각했지만 곧 잊혔다”는 공허한 진술의 반복이 이 시에 환기하는 주된 분위기는 잡히지 않을 것처럼 희미하고 허망한 정서이다. “곧 멸종되는 조개를 주으며” “물의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들”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현재요,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이라고” 말하는 “오래된 사람들(노인)”이 살아내고 있는 것은 과거라 가정하고, 이 희뿌연 시공간 배경과 시적 대상들을 교차시켜보자. 그럼 생명의 밀물과 썰물이 모든 것을 영점으로 되돌려놓는 풍광과 포개어질 것이다. 조개와 모래의 멸종, 그리고 이 생몰의 무한한 작용 옆에서 “그런 적이 있었지”라는 진술이 채 종료되기도 전에 “각자가 멸종되고//무너지는” 흐릿한 장면은 “노인들의 죽음”과 함께 까마득한 미래로 순식간에 이동한다. 이제 그 곳에는 “눈 이야기 해줄 사람”과 “처음을 발음할 사람”조차 없다.

  이 급격한 미래로의 전환은 시 안에 등장하는 ‘온갖 것’들을 관찰 중인 화자의 정체를 되묻게 만든다. “관상하다, 같은 어려운 말로 쓰지는 않을 것”이라는 표현만 보아서는 경외심을 갖고 무언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그 ‘온갖 것’들의 생몰을 미리 간파하고 있는 절대자로 보이기도 한다. 관찰이나 사유를 제외하고 시 속 화자가 하고있는 동적행위란 무언가를 “잠깐 쥐었다 놓는” 행위, 즉 ‘장악(掌握)’이 유일한데, 무언가를 손안에 잡아 쥐고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장악’은 이 화자가 마냥 평범하고 단순한 관찰자로 배치되지만은 않았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쥔 감각을 놓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는 화자의 진술은 그것들을 손아귀에 잡아 쥐는 화자의 태도가 마냥 성급한 거나 폭력적이지만은 않아 보이고, 나름 슬로우모션의 윤리를 고수 중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닳은 돌들을 “함부로 쌓지 않고 바다로 던져버리고” “그것의 고리에 영영 붙어 있을 흰 그림자”가 “헤엄치는 모습”을 끈기 있게 지켜봐주는 「희고 흰 빛」 속 화자의 태도에서도 관찰된다.

  이 절대자는 세계가 “땅속 기름과 가스파이프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미적 구성체”9)라는 사유의 확장을 유도한다. 즉 세계가 바깥에 노출되어있는 구조물보다 매립되고 감춰져있는 메커니즘의 작용에 의해 영위된다는 사고를 촉구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윤혜지의 화자 역시 매끄러운 지구 표면 위로 드러난 벚꽃의 탐스러움을 향해 “진짜 아름다우면 도리어 가짜”라 말하는 반면, “아름다움은 죽은 것들의 몫”이라고 말한다(「작은 종」). 시인이 포착중인 아름다움은 정녕 이런 것이다. 현실의 지평 아래 고여 있는 죽음들 – 가령 “화약과 산딸기와 죽은 짐승이 타는 냄새”, “냄새를 뿜으러 천천히 떠다니는 죽은 별들” - 이 그것이다. 요컨대 시인은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죽음, 무언가의 내부에 고여 있는 것들 안에서 다만 세계의 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 가득한 벽을 수집하는 사람이 고고학자만 있는 건 아니”라는 문장(「큰 동물의 작은 뺨」)처럼, 윤혜지는 매립된 진실의 발굴을 시인된 자신의 본령으로 관철시킨다.

  서로 전혀 다른 결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앞선 신해욱의 파동과 윤혜지의 파동은 서로의 위상을 보강하며 그 진폭을 확대한다. 그들이 공명하는 지대는 ‘생명이 소음의 필연’이라는 믿음의 지대이다. 무소음은 우리 청각을 본능적으로 불편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반면, 백색의 소음에 둘러싸인 순간 우리 귀는 비로소 이완된다. 이러한 소음의 세계에 활자 예술을 대입해보면, 시는 우리의 가청권과 시간적 인식 바깥에 존재하는 잊혀진 소리들의 귀환을 촉진하기 위해 스스로 백색 소음이 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백색소음이 “감각의 대상” 아닌 “감각의 조건”, 즉 “소리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소리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조건”10)이 되듯, 시 역시 세계의 진실에 의해 죽지 않으면서도 세계에 진실을 던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순연 : 멸망 속 유머레스크


  앞선 윤혜지를 비롯한 젊은 시인들의 근래 시편들 속 유감없이 발휘되는 묵시록적 상상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SF시, 기후문학, 생태문학의 타이틀을 자처하거나, 시어에 위압적인 기후 현상과 인간의 심적 위기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아도, 그들의 시는 종말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 성찰을 완곡한 방식으로 던진다. 다만, 구원과 종말, 생과 죽음, 천국과 지옥의 교차 아래 등장하는 그들의 절대자 형상은 모두를 멸하러 온 심판자나, 구하러 온 메시아도 아니요, 세계의 멸망에 가슴을 찢고 포효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경유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심장한 의미를 던진다.

  그 중 한여진의 시 「힐튼호텔」(《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도 석가모니 이후 세상에 내려와 모든 중생을 구제한 절대자 미륵보살이 등장한다. 영업이 종료된 호텔에서 “결국 미래가 오고 말았다”는 말과 함께 깨어난 미륵보살은 아무도 없는 텅 빈 호텔의 곳곳을 돌아보며 생명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처를 향해 말한다. “당신도 죽고 당신의 약속도 죽고 구제해야 할 중생도 없는” 이곳이 어쩌면 “너무 늦게 도달해버린/천국”.

  이렇듯 모든 게 절멸해버린 공간에서 천국을 발견한 미륵보살은 “처음으로 살아 있는 몸”이자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가 되고, “부처가 되지 못한 자신의 얼굴”에서 엉뚱하게도 “애틋한 것, 어여쁜 것, 수줍은 것, 가여운 것, 어지러운” 한낱 마음들을 읽어낸다. 이 ‘마음’의 정체는 대관절 무엇이건대 한여진의 시적 주체들이 그것을 찾아 부질없이 헤매게 할까. 이는 「내일 날씨」 속 ‘화자’와 ‘기린’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는데, 과거(“지금과는 달랐”던 날씨)-현재(“이전 같지 않은” 날씨)-미래(“오늘과는 분명 다를” “내일의 날씨”)라는 선형적 시간 매트릭스 안에서 화자는 자신이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이미 여기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화자가 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다음 수록작 「검은 절 하얀 꿈」 속 “겨울이 도착하고 있는” ‘절’과 ‘꿈’으로, “죽지 않고 도착”한 그곳에서 화자는 “곧 내가 찾는 것을/찾게 되리라” 예감한다.


“(……)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되었다가 나를 이 절로 보낸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절에 있다 그것은 이 절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절 마당에 있는 연못도 아니고 연못에 기울어진 버드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버드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
내가 찾는 것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이 되는 그것은 불빛 그것은 굴러가는 토마토 그것은 이국의 사람들이 마시는 뜨거운 홍차 그것은 향기 그것은 허기 그것은 치통 그것은 늙은 개의 얼굴 그것은 울리지 않는 전화벨
그것에 손을 가져가면 순간 사정없이 깨어져

무수히 많은 파편들은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다
눈을 질끈 감는다
(……)”

-「검은 절 하얀 꿈」 부분


  “하얀 눈/정지한 세상/고요하고 무궁하게” 존재하는 꿈결 속에서 그녀가 찾아낸 “무수히 많은 파편들”, 즉 “흐르고 넘어지고 흐르고 슬프고 흐르고 흐른 채 나에게 도달”한 그것, 동시에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그것은 앞서 살핀 시 속 미륵보살에게 도달했던 마음 -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은” 그것과 - 나란히 놓인다.

  이렇게 마음을 찾아 헤매는 인물들의 여정은 「겨울소설」 속 “살려고 쓰는 나와/쓰기 위해 산다던 너”의 존재에서 구체화된다. 작중 귤 농장에는 “혼나지 않기 위해 귤을 따야만 했던” 추억을 공유중인 ‘나’와 ‘너’가 있다.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오늘도 쓰고 있는” 그들은 “귤 한 알 열릴 때까지/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를 가늠 중인데, 여기서 그들의 ‘쓰기’는 무언가를 기록하고 집필하는 행위뿐 아니라,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소모하는 차원의 행위까지 포괄하며 중의성을 띠게 된다.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이
거대한 기록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
침대보엔 마른 귤껍질들이 뒹굴었고
우리가 속삭인 비밀들을 먹고 자란
귤나무는 다음해 무엇을 피워낼까

(……)
마을 너머에 살던 어른들이 찾아와 항의를 했지
귤을 먹었더니 글쎄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나

그건 귤껍질의 흰 속살처럼
달걀의 속삭임처럼 병아리의 마음처럼
작은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었지
시키면 팔꿈치를 핥고
독뱀을 잡아 멀리 풀어준 일을
어떤 나무는 악취 탓에 뽑히기도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도록 태어난 사람의 운명을
모든 여행자는 끝내 정착하고 만다는 사실을
가여워하던 너와 나의 전부가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노래가 되었는데 그래도
끝나지 않던 얘기들

농장 주인에게 흠씬 맞은 날
황금빛 알갱이 같은 눈물이 툭툭 쏟아지고

다 때려치우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무를 키워내고 또 귤 한 알 열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데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니
귤을 까서
서로의 입에 넣어준다

(……)
다 때려치우고 따듯한 귤이나 되고 싶다 생각한다“

-「겨울소설」 부분


  “이런 건 상품 가치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과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 사람들의 말이 논하는 쓸모의 경제는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려의 대상이 전혀 아니다. “속삭인 비밀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틔워낸 귤나무와 “작은 너와 나의/이야기들”로 틔워낸 한 알의 귤은 “서로의 입에 넣어”지는 순간 “끝나지 않던 얘기들”이 된다. 이 식목 작업이 형상화하는 시간-쓰기, 글-쓰기, 이 모든 걸 종합하여 ‘계속 쓰-기’가 틔워낸 상징적 결과물 ‘귤’ 한 알이며, 이 하나의 실과(實果)는 결국 한 편의 시가 된다.

  창작을 향한 작가 자신의 고백처럼 읽히는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를 통해 논의를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작중에는 “자신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을 만들며” 남을 죽이는 방식으로 오래 살아남아온 남자 형상의 절대자가 등장한다. 또 “쓸모 있어지기 위해” 노래, 시, 그림과 소설을 만드는 ‘원숭이’, 그리고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들”을 만들겠노라 다짐한 화자(‘나’)가 등장한다. 이 몽상 공간 속 ‘원숭이’는 화자의 분신으로 보이며, ‘원숭이’의 결과물은 자기 목적(쓸모)을 달성하지도, 절대자의 그것을 능가하지도 못한 채 소진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낮과 밤/밤과 낮//그 틈 속”을 몸소 경험한다. 그리고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은 평생 시차에 시달린다”는 사실과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생체시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이는 ‘나’의 창작 동기의 변화로 이어진다. 다음 인용을 확인하라.


“(……)
그리고 생각한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그리고 오래 살았다는 남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나의 미래를”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부분


  직접 ‘시간의 틈’을 언급하며 그 안에 놓인 “진짜 이름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즉 잊혀진 것들을 복원하겠다는 의지를 직접 언명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실상 시인 자신의 맹랑한 목소리로 들리지 않는가. 동시에 “오래 살았다는 남자”, 즉 절대자를 찾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의 이름을 지어주게 될 시간”을 “나의 미래”로 선포하는 대목은 당당함을 넘어 도발적이다. 꿈속에서 자신이 결코 도달할 수 없던 초월자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화자의 방식은 기존 묵시록 계열의 시편 속 무력한 화자들의 형상과 엄연히 구분된다.

  이 외에도 「Beauty and Terror」 속 “번지는 불길 앞에서 우리는 곧 재가 될 사람들”이라는 진술이나 “아주 먼 훗날//자 여기 이런 것이 있었다”는 진술이 참담한 기후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결말이라도 당신과는 나누지 않겠다”고 신에게 선포하는 화자는 비극적 관념론의 감성적 분신되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요컨대 한여진에게 ‘죽음’이란 “당신은 당신의 결말을 향해 우리는, 우리의 결말을 향해” 가는 일이고, ‘삶’ 역시 “너는 너의 일을 하”듯이 “생은 생의 일을 하는 것”(「터널 지나기」, 《자음과모음》 2024 봄호)에 불과하다.

  대신 한여진은 “어딘가에 들러붙어 까만 얼룩을 남기는” 존재들이 드리운 현재성의 그림자 속에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에 하나의 “까만 얼룩”을 새겨주기 위해 먼저 죽음을 향해 앞질러갈 뿐이다. 우리가 이 종말을 모면할 방도는 없지만, “구원을 기도하는 고전적 비극의 장엄한 레퀴엠” 되기를 거부하는 이 ‘가벼움의 감응’은 자신이 무엇을 남기고 죽어야 할지에 대한 통렬한 고민을 토대로 써내려간 “반음계주의적 ‘유머레스크’11)”이다. 「겨울소설」 속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곱씹음 역시 멸망 안에서 시인이 자기 시적 세계를 어떻게 주파해야 할지에 대한 내면의 고민이고 응답이다. 미리 종말의 시간을 상상함으로써 현재를 연장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면, 미리 종말의 시간을 삶으로써 종말을 순연해보려는 자들이 있다. 여기서 한여진의 시는 명백히 후자이다.



씀의 씀씀이 : 짜고 맞추고 잇기


  안정된 기후가 영속될 것이라는 믿음, 매끈한 과학 진술과 기술이 예고하던 해피엔딩……. 이 모든 전망이 사실은 인간의 지독한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의사 진술’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진술 심지어는 사이비 진술로 곡해되어왔던 시의 시간도 현실과 허구, 진실과 비유가 뒤섞이는 세계의 극공에서 되찾아진다. 아니, 되찾아진다는 말보다는 줄곧 거기, 내재적이고 시간적인 객체들의 레퓨지아로 존재해왔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다만 지금 우리가 견지해야 할 것은 종말이 확정된 순간에라야 문학의 효용도 극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단발성의 믿음보다, ‘계속 쓰-기’를 통해 진실 아닌 진리를 꾸준히 입증하려는 시간성의 믿음일지 모른다. 들을 귀 없는 곳에서 ‘계속 쓰-기’를 향한 믿음을 붙드는 일이 너무 쉽게 ‘문학의 불가능성’이나 ‘무용론’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진정성에의 주창이 ‘소박한 자기 변론’이라는 오해로 직결되지 않기를 바란다.

  또 그에 못지않게 공식화할 토대를 잃어버린 ‘진정성’에 대한 근본적 차원의 고민도 요구된다. “더 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본연의 모습이 되는 과제에 있다”12)는 공식 앞에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이 결국 ‘자기성’, 즉 ‘인간성’에 있다는 식의 오해는 곤란하다. 석탄의 힘을 전면에 걸고 내달려온 식민주의 정치, 편리와 효용을 구호로 걸고 줄곧 작동해 온 경제의 뿌리를 파헤쳐보면 결국엔 세심하지 못한 ‘진정성’의 논의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는가. 또 자연, 비인간에 대한 지나친 개념화, 대상화가 역설적으로 다른 담론을 지배하며 발생해온 또 다른 진정성의 왜곡도 논외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바다거북과 북극곰이 인간과 대립하고 있긴 한 걸까? 자연과 지구는 반드시 조화와 협력으로 채색되어야만 하는 관계인가? 이 기후 격변이 곧 비인간의 정치적 복수이며 연결성의 회복만으로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도 결국엔 기후에 적응할 방법을 이론적으로 규명하려는 인간의 욕망 아닌가? 이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멸망 안에 비멸망이, 종말 안에 구원이 이미 들어가 서로를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한다. 동시에 이 모든 물음은 비인간의 행위소가 되려는 우리 열망이 결국 또 다른 주체의 답습 아닌지에 대한 통렬한 자기 점검과 나란히 놓여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오늘의 기후 문학이 지구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는 모종의 투시주의를 자처하며 지구를 주어로 삼고, 스스로 그 주어되기를 자처하는 식의 공회전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이 행성은 항상 각양각색의 생명체,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져 온 것들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뒤섞고 각축해온 과정 그 자체였다. 그 모든 과정과 담론을 선행하는 유일한 명제가 ‘시간’이라면, 시인은 당김음의 작용 안에 존재하는 ‘과거’의 기억, 지나간 선율 속에 지속 중인 ‘지금’의 진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결정의 음을 기대하며 당겨쓴 ‘미래’13)의 틈에서 시작(詩作)을 매일 새로이 시작(始作)한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간의 파동과 마찰로 짜인 한 편의 론도. 초저주파와 저주파에 흩어진 자모음을 잇대어 만든 한 편의 교향곡. 나는 그 선율이 시와 다르다면 또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신해욱, 한여진의 시집은 다음과 같다. 신해욱,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2009년.; 『syzygy』, 문학과지성사, 2014년.; 『무족영원』, 문학과지성사, 2019년.; 『자연의 가장자리와 자연사』, 봄날의책, 2024년.;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 2023년.; 윤혜지의 시는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참조한다. 『시보다 2022』, 문학과지성사, 2022년.; 『시소 두 번째 : 2023 시소 선정 작품집』, 자음과모음, 2023년. 이하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인용할 경우 본문에 작품명만 표시한다.
  • 2) 임태훈, 「기후소설cli-fi를 어떻게 읽고 쓸 것인가?」,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 3) 박동억,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 『현대시』 2023년 7월호.
  • 4) 티모시 모턴, 『하이퍼 객체』,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년, 212쪽.
  • 5) 이지선, 「트리니티의 오펜하이머와 코펜하겐의 하이젠베르크」,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175-178쪽.
  • 6) 최진석, 「행성의 시학: 인류세와 기후위기 시대의 시적 조건들」, 『한국시학회 제52차 전국학술대회 논문집』, 한국시학회, 2023년, 60-68쪽.
  • 7) 신해욱, 『창밖을 본다』, 문학과지성사, 2021년, 22쪽.
  • 8) “(...)우유를 먹고 자란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지붕 위에 던진 젖니를 모아/차근차근 탑을 쌓아보면 어떨까//(...)그런 탑의 꼭대기에 까마득히 서서/젖니를 혀 밑에 숨긴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모르는 이야기에 닿으면 좋을 텐데.//내 목에는 묵음들이 가득 고여 있으니까.//묵음들 속에는 생각이 없으니까.//내가 놓친 소리들이 가청권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뮤트」)
  • 9) 티모시 모턴, 앞의 책, 216쪽.
  • 10) 신해욱, 앞의 책, 16-17쪽.
  • 11) 이진경·최유미, 『지구의 철학』, 그린비, 2024년, 408-410쪽.
  • 12) 찰스 귀논, 『진정성에 대하여』, 강혜원 옮김, 동문선, 2005년, 19쪽.
  • 13) 에드문트 후설, 『시간의식』, 이종훈 옮김, 한길사, 1996년, 87-89쪽.

추천 콘텐츠

최다영 기계기담(機械奇談)

1. 머리 셋 달린 여우 기이한 짧은 이야기를 기담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여러 설화와 전래동화의 모티프를 차용하거나 기이한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정우신의 이번 신작시들은 언뜻 기담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 제주설화 삼두구미 본풀이의 모티프를 활용한 「삼두구미(三頭九尾)」는 이러한 신작시들의 입구가 되어주는 시처럼 보인다. ‘삼두구미’는 머리 셋에 꼬리가 아홉 개 달렸으며 시신을 파먹는 늙은 땅귀신 요괴를 가리킨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삼두구미는 가난한 나무꾼의 세 딸을 돈을 주고 데려와 사람 다리를 주면서 먹도록 하는데, 먹지 않고 거짓말을 한 첫째와 둘째는 그 사실을 들켜서 죽게 되지만, 막내는 다리를 불에 태운 뒤 그 가루를 보따리로 싸서 자신의 배에 묶어놔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삼두구미의 아내가 된 막내는 달걀과 무쇠, 버드나무로 괴물을 퇴치한 후 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 보낸다.2) 무엇보다 「삼두구미」에서 주목되는 건 이러한 삼인 분할의 모티프가 시의 형식과도 긴밀히 이어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두구미의 머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듯, 발화자 ‘나’ 역시도 셋으로 분할되어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삼두구미가 삼킨 두 딸이 각각 머리 하나씩을 차지한 형태로 본래의 삼두구미와 합일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설화 속에서는 첫째와 둘째가 백골만 남았을지언정, 그 혼이 삼두구미의 육신과 합쳐진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처럼 온전히 분리되지도 온전히 합일되지도 않은 채 존재 양태의 변모를 거듭하는 삼두구미의 형상은 발화 측면에도 반영되어 있다. 光.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습니다. 滅. 나를 구하다가 죽었습니다. 歸. 나는 편리합니다. (…) 歸.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돕니다. 光. 나만 네모 방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滅. 동그라미가 돌아갑니다. (…) 光. 나는 滅과 歸로 쏙 들어갔습니다. 滅. 나는 나를 말려놓고 공중제비를 돕니다. 歸.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삼두구미(三頭九尾) 중에서 각 행 앞에 붙은 한자들은 光(광), 滅(멸), 歸(귀)로서, 발화의 주인인 삼두구미의 세 머리를 지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의 산문에 따르면 이 한자들은 각각 ‘발광’, ‘자살’, ‘귀의’를 의미하며, “비극의 삼각형”을 형성하는 꼭짓점이라 한다.3) 그렇다면 이 비극의 삼각형은 미쳐서 죽었다가 원점으로 돌아가 미쳐서 죽기를 다시 반복하는 일련의 순환을 표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관련해 이들이 “네모 방을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세 사람이 방의 각 꼭짓점에서 출발해 일정한 방향으로 도는 귀신 술래잡기를 연상케 하는데, 셋만으로는 게임을 끝낼 수 없다는 점도 이러한 무한 순환의 굴레를 암시한다. 한편 이처럼 각 행을 서로 다른 머리들의 교차하는 발화로 읽을 때, “빚이 무거워 나는 죽 늘어졌”다는 목소리에서 ‘빚’은 팔려가는 조건으로 받은 돈을 지시하므로, ‘滅’에 해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두 딸 중 하나일 것임을 알게 한다. 맨 마지막 연은 둔갑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光’이 ‘滅’ 속에 숨고 ‘滅’은 ‘歸’ 안에 숨게 되므로, “입속의 꼬리가 움직이”는 건 세 머리가 마트료시카처럼 합쳐진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은 아침이 되면 하나로 존재하다가 밤이 되면 합일체 속에서 차례로 튀어나와 셋으로 분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첫 연에서 “나는 나를 찾다가 튀어나왔”다는 그 장소는 바로 삼두구미 자신의 몸이라 할 수 있다. 또 “오늘도 아침이 왔”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이러한 루틴은 정확하게 설정된 기계처럼 끝을 모르고 계속 반복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복제, 클론, 리플리컨트 모티프와 순환의 질서는 정우신의 시 세계에서 빈번히 다뤄져왔다. 특별히 양순모는 정우신의 시에서 활용되는 반복 장치가 “고통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반복이 아니라, 거듭 그것들로 회귀하기 위한 반복”4)임을 포착한 바 있다. 요컨대 정우신의 화자들은 불행에 중독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정우신의 시에서 미분 작용을 수행하는 존재들에 주목할 것을 청하는데, 정우신에게 “미분은 ‘입체’에서 다시금 ‘육체’로 재탄생하는 과정의 ‘조건’이자 동시에 그 ‘방법론’”5)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볼 때, 삼두구미로 대표되는 육체 분할의 반복 양상은 정우신의 시 세계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상상, 삼각형의 꼭짓점을 형성하고서 자동 반복되는 순환의 되풀이를 설정하는 구도는 다른 신작시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일한 개체의 복제, 일정한 순환 피드백의 반복, 설정된 입력값에 기반해 출력물을 산출하는 성질은 무엇보다도 기계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기계기담이라 명명하고서 다른 시들을 더 따라가보자. 2. she knows it's too late as we're walking on by6) 「샐리」에서도 ‘샐리’의 리플리컨트들이라 할 수 있는 샐리2, 3, 4가 등장한다. 심지어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층층이 샐리가 서 있다”는 언급을 통해 더 많은 복제 샐리들, n명의 샐리들이 같은 건물에 존재하고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클론 모티프는 “손톱을 모은다”는 언급과 만나며 자연히 쥐둔갑 설화를 떠올리게 한다. 쥐가 손톱을 먹으면 손톱의 주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둔갑한다는 해당 전래동화를 따라, 이 복제 샐리들은 샐리가 자신의 손톱을 통해 증식시킨 인물들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세부 정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약을 타러 지하로 내려간다”는 언급을 통해 극도로 통제된 병동이 배경인 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을 뿐이다. 샐리는 매일 볼펜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에 몰두하는데, 샐리2가 그 볼펜을 빌려 교정기를 떼어내고는 떼어낸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다. 뒤꿈치를 찌르는 일만이 목적이었다면 날카로워진 볼펜으로 해도 되었겠지만, 반드시 뜯어낸 교정기여야만 했다는 점에서 교정기를 뒤꿈치에 밀어 넣는 행위가 중요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행을 하는 것일까. 마지막 연에서 샐리가 손톱을 “아물어가는 곳마다/힘껏 밀어 넣는” 유사한 이미지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이 손톱 둔갑에는 기한이 있으며 기한이 다하면 살이 아물어버림과 동시에 둔갑 상태가 끝나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샐리는 리플리컨트들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손톱을 충전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럴 경우 샐리2가 교정기를 뒤꿈치에 찔러넣는 이유는 아물지 않는 상태를 지속하려는 다른 방편으로도, 혹은 뒤꿈치가 아물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여 손톱을 더 보충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른다면 이 리플리컨트는 왜 생을 지속하고 싶어하지 않는 걸까. 촘촘한 감시망과 통제를 견디며 갇혀 사는 삶, “I’m free to be whatever I/Whatever I choose”가 불가능한 일상에 일찍이 진절머리가 난 걸까. 그런가 하면 비상구에서 다른 샐리들을 기다리는 샐리의 모습은 탈옥을 계획하는 수감자를 연상케 하는 면이 있다. 어떤 방과 “다음 방”에서 “15분과 30분”간 이루어지는 일정한 루틴을 매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샐리는 그보다 더한 “한 시간과 세 시간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인내심 강한 샐리는 “샐리3과 샐리4가 계단에서 내려오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말 그대로, “Sally can wait”. 그러나 기다릴 수 있는 것과 너무 늦어버린 것은 다르다. 시 전반에 드리운 디스토피아적 정조에 기대볼 때 샐리에게는 그러한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고, 어쩌면 샐리도 그걸 안다. 3. 버들치와 모자 한편 이러한 복제 모티프는 환유의 활용과 더불어 더욱 생동감 있는 시적 효과를 얻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버들치」를 들 수 있다. 이 시에서 ‘버들치’도 크게 세 갈래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실제 어류로서 버들치를 지시하거나 ②사람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비유하거나 ③그러한 마른 외양과 피로한 행색으로 인해 버들치에 빗대어지는 사람들을 환유적으로 지시한다. 손가락이라는 원관념의 활용도 두드러지는 가운데, 환유적 의미의 버들치와 보조관념으로서의 버들치가 다채롭게 교차되며 삼각형의 각 변을 오가는 것이다. 가령 “버들치는 렌즈를 닦는다”는 문장에서 버들치는 손가락이나 사람으로 읽을 수 있으며, “버들치는 검수원을 만나기 전 버들치를 먹는다”고 할 때 앞의 버들치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뒤의 버들치는 조리된 생선을 의미한다. 특별히 사람으로서의 버들치는 “버들치와 대화한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어느 개인의 독자적인 속성과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일상을 겪는 여느 서민들을 일괄적으로 아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십분마다 뛰쳐나가고 두 시간씩 이동”했다가 “종점에서 졸고” “물비린내 가득한 방으로 돌아”오는 피로한 출퇴근의 루틴은 이를 대표한다. 방에서 방으로 복귀하는 이러한 고단한 루틴을 ‘n번째 버들치’가 차례로 이어받으며 “이십 년”에 걸쳐 수행하는 모습은 각 인간의 고유한 개체성이 소거되고 루틴을 주인 삼아 루틴의 종속물로 전락하는, 마치 기계의 소모품과도 같은 현대 노동자들의 초상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하급 노동자 일반이 언제든 대체 가능한 것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서로는 서로의 리플리컨트나 다름없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무형의 루틴이 지키고 영속해야 할 최우선순위로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임시직 버들치로 소모되다 퇴장하는 이들은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버들치가 “상점 유리나 거울에 난 손자국을 보면 견디기 힘들”어지는 이유는 다른 버들치들의 존재를 상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제 것처럼 느껴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이 한여름의 댐처럼 단번에 쏟아질 때 버들치는 자신이 몇 번째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동안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왔다 ― 「버들치」 중에서 이와 더불어 “한강대교 펜스를 붙잡는” 모습은 익숙한 재현 문법을 따라 죽음에 대한 지향을 연상하게 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버들치가 흘러나”오는 환상적인 결말은 그간 주어 자리에 놓여 있던 버들치 대신, 사람의 형태를 그려보게 한다. 내내 버들치가 손가락을 가진 것 같은 이미지를 그리도록 하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사람의 손가락에서 버들치가 흘러나오도록 하여 전도된 이미지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략된 주어의 자리에는 자연히 사람이 놓이게 되면서 익명의 군중이나 노동 부품으로서의 ‘n번째 버들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상하도록 이끈다. 버들치가 된 인간을 버들치로만 남겨두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버들치」에서처럼 환유의 대상으로 전도가 일어나는 양상은 「진」에서도 발견된다. 이 시는 ‘진’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어떤 얼굴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의 루틴은 휴일마다 “오렌지 스웨터를 입고/에코백을 들고 외출”하는 것이다. 오렌지빛과 강렬한 태양빛의 색채적 유사성으로, 빛이 내리쬐는 모습은 “햇살의 소매가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된다. 특별히 주목되는 건 모자를 쓰고 있던 진이 결말부에서는 “누군가의 머리 위에 얹”히며 모자가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진이 쓰고 있던 모자는 진이 된다. 「삼두구미」에서 자신이 접촉한 사물의 일부가 되는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더 나아가 접촉한 사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연에서 “얼굴을 기다”리는 이유는 자기가 얹힐 머리를 찾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방 안에 수북한 “주인 없는/머리카락” 다발 또한 모자와 함께 달라붙을 머리카락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실종된 빛 앞서 이번 신작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삼각형의 꼭짓점을 주축으로 순환의 되풀이가 자동 반복되는 양상을 언급했는데, 「파동 일기」에서도 “나의 꼭짓점으로/모이는 어둠”이 거론된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비극의 삼각형’은 빛과 어둠, 화자를 각각 세 꼭짓점에 두고서 이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간 정우신의 시에서 빛은 “어둠의 긴 머리카락을 뒤집어쓰고 개미를 주워 먹는”7) 것과 같이 포식을 즐기는 유생물, 특별히 “뱀처럼/별처럼 (…) 움직임을 따라 하며 우리를 조롱하”8)는 교활한 모습으로 자주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시에서는 가시성을 중심으로 하여 빛과 어둠의 고유한 속성에 더욱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야가 점점 줄어든다 태양의 샌드백 모래사장에 빛을 줄줄 흘리고 한발 앞에 서 있던 빛이 안면에서 일렁인다 (…) 헛디디고 데이고 나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어둠 (…) 가스불 앞에 서면 이마 앞의 어둠이 부르르 떤다 ― 「파동 일기」 중에서 하강 이미지가 두드러지는 가운데, 「파동 일기」는 시력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화자에 의해 발화된다.‘일기’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이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日부터 土까지 이어지는 요일에 따른 분절이다. 각 요일에 해당하는 내용을 그날의 일기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도 목요일에 해당하는 일기에는 木 대신 目이 ‘목’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데, 이는 시각과 관련된 빛의 속성이 이 시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월요일에 그는 마치 “샌드백”이 찢어져 모래가 쏟아지는 것과 같이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을 느낀다. 그는 “한발 앞에” 존재하는 빛을 그 온기와 일렁임으로 감각하지만 빛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또 그는 “벽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불을 켜려다 “반찬통”을 넘어뜨리기도 한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모든 활자”는 “재가 되어”간다. “헛디디고/데이”는 일은 그의 일상이 되며, 눈과 눈 사이에 형성되어야 할 한 소실점인 “꼭짓점”에는 빛의 상이 형성되는 대신 “어둠”이 모인다. 토요일에 그는 “가스불”바로 앞에서도 가스불의 외양을 보지 못하고 가스불에 무언가가 끓는 것을 눈앞의 어둠이 떨리는 것을 통해 감지한다. 일요일에 “안면에서 일렁”이던 것이 빛이었다면 이제는 어둠이 그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실명에 가까워지는 일상은 일기라는 제목과 요일 표기에서 암시되듯이 되풀이되며 더욱 심화될 것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1) 근작시인 「전자 늑대」도 빨간 모자와 늑대 동화를 차용하고 있다. 2) 이러한 삼두구미 모티프는 정우신의 이전 시에서도 발견되는 것 같다. 복제인간 이미지를 주로 활용하는 그에게 자가복제적 키메라와 같은 형상의 삼두구미는 매력적인 소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들에게 남은 다리를 나눠 줬어요. 어떤 끝이 뒤돌아 나를 탄생시켜요. 삭제하고 싶니. 너의 몸. 너의 의식. 이리로 오렴. 바깥으로 오렴. 여기에는 너의 불행들이 있다. 태워 주마.” 정우신, 「주술」, 『비금속 소년』, 파란, 2018. 3) 정우신, 「그것과 그것들」. 4) 양순모 해설, 「달리기, 비극적」 『미분과 달리기』, 파란, 2024, 128쪽. 5) 양순모, 같은 글, 132쪽. 6) Oasis, 중에서 7) 정우신, 「사제의 뜰」, 『비금속 소년』. 8) 정우신, 「네온사인」,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포지션 최다영 정우신시집 2025
민가경 감응感應과 감수感受의 디졸브

이번 오은경의 신작시 속 덤덤한 시적 자아들은 온 세계를 과거 '너'라는 상관물을 회상하기 위한 공간으로 재구성 중이며, 그 공간을 조밀한 언어로 구축하는 작업에 천착해 있다. 그 공간은 밀폐된, 그러나 거의 텅 빈 하나의 집 또는 방의 형태를 띠는 데, 인물들이 그 공허 안에 충만한 기억들을 부단히 감각하며 순정하게 읊조리는 독백은 지울 수 없는 예민함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기실 그 안에는 '너'의 사라짐을 참지 못하는 '나'의 속수무책 마음들이 존재한다. '나'의 왕성하지 않은 제스처, 격렬하게 표출될 줄 모르는 회환을 통해 드러나는 '나'-'너'의 약한 관계성, 즉 '나'만 '너'의 부재를 받아들이면 되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화자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그런 오은경의 시 겉면에는 '능동성'이 묻어 있다. '나'는 '너'에게 노출되지 않은 채 '너'만 '나'에게 노출시키고자 하는 마음, 그리하여 '너'의 심연을 헤아리고 반추해보려는 마음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작시를 살펴보기 전, 잠시 시인의 첫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의 표제작을 경유해보자. 작중 화자는 의자처럼 앉아 있던 당신의 지난밤을 좇아 "의자가 놓인 곳이라면” “어디든 앉아 당신의 지난 일들을 보고 듣고 있다. 달랑 의자 하나 남은 방 안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당신'의 관점을 반추 중인 화자는 유리 벽이 창밖과 자신을 가로막고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모종의 안전감을 확인한다. 이 화자의 심연에 두드러지는 것은 자기 인식과 언어의 틀 안에서 상대를 개념화하고, 파악하며, 기억해보려는 능동의 모습이다. 신작시 「달라지는 것과 달라지지 않는 것」 역시 비슷한 시적 풍경이 연출된다. 그곳엔 "네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끼면서도 정작 더없이 쓸쓸해보이는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과거 '너'가 잠들어 '나'를 보지 못할 때, 즉 '너'를 일방적 관점으로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안전감을 느끼며 '너'를 보고 만질 수 있었다. 즉 시각 정보의 격차 안에서 우위를 점할 때라야 '나'는 '너'를 능동적으로 전유할 수 있었다. 과거 함께했던 시간 동안, '나'는 '너'가 잠들었을 때 "다녀가도 모를" 형태로 존재했으며, 아침이 완전히 오기 전에 "떠날 장소를 고민하고 있"었다고 진술된다. 그러나 반대로 '너'가 완전히 떠나 "너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된 현재, 그러나 "모든 것이 그대로이면서, 너만 보이지 않는 방"은 화자로 하여금 이 모든 능동성이 확보되기 어려운 환경이 됐음을 각인시킨다. 이제 화자는 과거 자신을 향한 '너'의 시선이 발생했던 각도와 위치를, 즉 "너의 두 눈이 보았던 장면을 상상하고 싶어"한다. 화자는 정작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않으려"는 자신의 태도와 그 바람이 모순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상상을 감행한다. 왜냐하면 이는 앞으로 "네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은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는 작업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꺼지는 법이 없는 스탠드"를 의도적으로 켜두는 능동의 제스처는, 이제 밤마다 그것을 대신 꺼줄 '너' 없음을 내면화하는 제의적 의식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가 드러내지 않은 서로의 부분에 대해 완벽히 단절된 오은경의 화자들은 서로 대면하여 그 부분을 소통하려는 노력보다 "나의 반대편에 앉은 그"로부터 '너'에 대한 이해의 단서를 얻는 식의 우회적인, 혹은 유폐적인 소통에 자족한다는 점도 독특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스탠드 불빛의 보조가 필요한 저녁부터 동틀녘까지의 어두운 시간대였고, '너'가 떠나간 뒤 '나'가 꿈속에서 마주하는 '너'의 얼굴은 오로지 '한낮'의 형태였음을 기억해보자. 화자들이 꿈속에서 보는 고정불변의 '너'는 끊임없이 변하려 드는 현실의 속성, 즉 삶의 불확정성과 대칭된다. 생각해보면 삶에 절실한 것들은 높은 확률로 '환상'과 '꿈'처럼 변치 않는 형태로 드러난다. 동시에 영구적으로 변치 않는 '너'를 볼 수 있는 순간은 '한낮'처럼 제한적인 시간대('오후')에 불과하며, 그런 '너'는 아름다운 환상의 빛처럼 발생하고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결국 "네가 나타나지 않아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오후"의 현실은 내일도, 모레도, 끊임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 안에서 "집안은 계속 어질러지고, 설거지는 반복되"기에 “유령이라는 환영을 따라 집안을 쓸고 닦아"야 할 것이다. 이때 '너'를 향한 화자의 정념 역시 무한대로 되풀이될 것이 예고된다. 결국 시 제목이 지시하듯, 화자는 '너' 없이 정체된 공간 안에서 수시로 변하는 정념들에 휩싸이기를 반복할 것이며, 고정불변하는 '너'를 파악하고 개념화하려는 어떤 능동적인 제스처도 그 안에서 발생하는 강력하고 변화무쌍한 '정념'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 요컨대 능동의 겹을 파고들어 오은경의 시 가장 안쪽까지 침투해 보면, 태초에 어떤 불가피한 수동성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에게 다가설수록 궁극적으론 '너'와 멀어질 수밖에 없던 경험이 '나'에게 정념 형태로 귀환해 번번이 결정적인 태클을 걸기 때문이다. 이는 '나'가 단지 두 갈래의 수동을 취하게끔 만든다. 하나는 '너'와 '나'를 동일시하는 불건강한 형태의 태도로 작동하거나, 다른 하나는 아예 '너'에게 나아가는 일 자체를 단념시키는 억압적 태도로 작동한다. 전자는 오로지 '너'의 완전함에 의해서만 '나'의 완전함을 취득할 수 있다는 식의 소극성으로, 후자는 일상적 행복과 절연되어 방에 흘립한 채 떠나간 '너'를 반추하며 온 세계를 빈 방으로 인식해버리는 폐쇄성으로 드러난다. 가령 「디저트」 속에는 디저트 생지를 굴리고 그 형태를 빚기 위해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마가 필요"함을 자각하며 "사람들 눈에, 왜 꼭 다른 사람이 필요"한지에 대해 묻는 화자가 등장한다. 화자는 과거 '너'라는 롤러에 접착되어 "떼어낼 수 없을 때까지 / 작아져"갔던, 거의 사라지기 직전의 반죽 같던 '나'를 회상한다. 그때의 '나'는 "너의 보폭"을 "넓지도 좁지도"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 어떤 절대적 기준치로 간주하고 있었고, '너'와의 밀접함 안에서 온전함을 획득하려 했다. 정반대로 어떤 화자들은 각종 회상을 동원해 떠나간 '너'를 재구성하며 '너'의 절대적 불가해성을 실감하는데, 그 과정에서 어떤 정념에 속수무책 감수되어 헐벗은 존재처럼 소묘된다. 이 존재의 사후적 재구성은 「거미줄」에서 잘 드러나는데, 화자는 거미의 실재를 그 당시엔 알지 못하더라도, 실타래와 같은 거미줄의 흔적에 의해 그것이 존재했었음을 사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있다. 나는 춥고 물은 따듯하다 물이 따듯해서, 아니면 물을 맞아서 추운 걸까? 차라리 물이 된다면 추위도 느끼지 않게 될까? 느낀다와 느껴진다가 다른 것처럼 물이 쏟아진다 내가 나가거나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는 이상은 계속해 물을 맞을 수 있다 춥지 않을 수 있다 - 「거미줄」 부분 여기서 화자는 제아무리 따뜻한 속성을 가진 물이라 해도, 그것이 자신에게 끼얹어진 이후엔 결국 차가운 물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한다. 화자는 자신이 직접 물이 되지 않고서야 화자는 물의 속성(따뜻함)을 온전히 향유할 수 없음을 깨닫지만, 이 과정은 자신이 절대 물이 될 수 없음을 다시금 되새기는 과정에 진배없다. 뿐만 아니라 화자는 「친구」가 등장한 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꿈속에서 "친구의 얼굴은 변하지 않고 언제라도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고 묘사한다. 앞선 시의 세계관처럼, 이 시 안에서도 고정불변하는 누군가의 모습은 오로지 꿈 안에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과 몽상 공간을 가로지르는 친구와 '나'의 만남은 기실 "잠들어 있었을 뿐"인 '나'와 "내가 깨어날 때까지 / 기다렸"던 친구의 '엇갈림'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현실에서 번번이 어긋나야 꿈속에서 만날 수 있는 그들의 관계엔 절대 좁혀지지도 극복되지도 않는 간극이 설정된다. 그러나 그 간극은 "그 애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적힌 공책을 뒤늦게 따라 읽을 때 비로소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되는 형태, 그리하여 비로소 "친구에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형태로도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화자가 직접 강조하고 있는 "느낀다와 느껴진다"의 차이 역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곧 '감응'과 '감수'의 차이, '능동'과 '수동'의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겨울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 것은 어느 아침, / 화장실에서였다"는 화자의 말은 '실감하다'와 같은 능동적 감응 능력과 별개로, 겨울의 계절성을 "실감하게 된" - 즉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불현듯 실감하게 '되어버린' - 화자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렇게 감응과 감수의 차이를 식별하는 것이 오은경 시를 독해함에 있어 중요해지는 이유는, 언제나 미지의 '너'에게마저 속절없이 감수되는 화자들이 겪고 있는 현상을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배제한 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오은경이 소묘하는 사랑은 언제나 미스터리와 불안에 깊이 침윤돼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피기 위해 「빈방」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집'이 결국 누구의 집인지, 또 여기서 혼용되는 '집'과 '방'이 결과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지 초점해 보자. 이 시는 당장 '나'가 "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있는 건지, 혹은 듣기 싫어하고 있는 건지 그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시작한다. 즉 시는 "너에 관한 이야기"를 교란시키며 모호하게 전개되는 데, 확실한 것은 화자가 어제 '너'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고, 그 이야기가 "전부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고 술회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야기도 마냥 전부는 아닌 "특정한 무언가"에 불과했지만, 화자는 그 이야기의 온당한 수신 대상이 애초에 '너' 하나였기에 발신을 강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 "배달을 마친 기분"이었음을 회고하는 화자는, 그러나, 어떤 상념과 함께 불특정 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가 아니고, 네가 아니어도 수많은 사람이 떠난다.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반복된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지연되어도 너는 온다고 말했다. 나는 철석같이 믿었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너는 집을 치워두지 않았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투룸이었지만, 방이 하나여서, 너의 마음이 언제 풀릴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열릴 수도, 열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방문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소파에 기대어 누웠으나, 문을 열지 못해서, 여러 번 집 밖을 오가며, 층수를 세었다. 겨울나무에 가려진 창문 안쪽이 환하게 불 켜져 있었다. 주황색 전구 불빛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불빛 때문에 네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방의 상태, 심지어는 너의 부재와도 상관없이 네 방은 네 방이었다. - 「빈방」 부분 그리고 화자는 갑자기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뜬금없는 말을 한다. 뒤이어 나열되는 문장은 그 말이 과거 "수많은 사람이 떠난" 경험으로부터 산출된 결론임을 암시하고, 오랫동안 화자의 세계에 고유한 '나'는 없었고 단지 고유한 '너'들만 있었다는 사실이 추론된다. 그런 너와 나'들'의 관계는 마치 “투룸이었지만, 방이 하나"인 관계였고, 네가 "방문을 걸어 잠그"면 나는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문을 열지 못하"는 위치에 있었다. 심지어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감안해야 했다. 또 '나'는 멀리 떨어져 네 방의 불빛 유무를 관찰하는 형태로만 '너'에게 가닿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네 "방의 상태"를 알지 못하며, "너의 부재와도 상관없이 네 방은 네 방"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문 앞을 가리고 서서, 나를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너'를 보아도, 나는 단지 이것이 "나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는 일밖엔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네 애인'의 등장은 "우리가 다 같이 소파에 앉"거나 "방에 들어가 쉬"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질적 존재가 기실 '나'였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남기며, 화자의 불안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짐작해 보게 한다. 결국 시는 '너'가 "애인과 헤어졌다"는 문장과 함께 그 결말을 회수하지 않고 끝나는데, 이는 결국 '너'의 다음 결정을 기다리며 여전히 네 앞에 대기 중일 '나'의 초라한 자리를 가늠케 한다. 앞선 오은경의 시편에서 거듭 발견된 '반복' 패턴은, 돌아올 거라는 '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었"던 '나'의 모습 역시 되풀이될 것이라는 추측을 유도한다. 이렇게 화자들이 감수 중인 사랑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너'의 방이 내게 허용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그 방이 누구에 의해 어떤 일방적 형태로 소유되거나 분유되고 있는지, 또 그곳에서 화자가 배치된 곳이 화자 내면에 어떤 불안 요소로 작동 중인지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책더미」 속 떡갈고무나무와 자기 방을 번갈아 묵상 중인 화자를 살펴보자. 더 이상 잎을 틔워내지 못하는 떡갈고무나무는 "앙상한 가지 그대로 겨울과 봄 지나 / 계속 같은 자리에 남아 있"는 고정불변의 상태인 반면, 화자의 방에 쌓인 책탑은 필연적으로 시간 변화에 구애받는다.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높이 쌓는" 책탑이 어느새 무너졌다는 것은 결국 "어떤 시간이 지나 있음을 실감"케 하는 지표가 된다. 작중 '너'는 그런 내 방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심한 존재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나 역시 너의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기실 '너'가 매번 달라진다는 사실을 적잖이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가 '너'의 "바뀐 머리, 옷차림 같은 것"에는 또 금방 적응하고 있다는 점은, 사실 '나'가 '너'의 최소한의 변화를 은밀하고도 꾸준하게 추적 중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특히 화자는 "너무 큰 불안에 시달린 나머지" '너'가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오피스텔 입구에서 서성이"기까지 했다고 진술하는데, 그 대상도 원인도 알 수 없는 불안은 어쩌면 '나'가 단 한 번도 "네 방에 가본 적 없다는 사실", 즉 '너'에게 흐른 시간의 근원적 지표가 되는 공간에 가닿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우리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화자들의 불안은 상대의 유동성, 즉 미스터리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나' 역시 지니고 있을 미스터리에 일말의 불안이나 조급증도 느끼지 못하는 '너'의 불변성에서 비롯한 것인가? 우리는 그 정답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단지 '너'에 대해 주어진 희박한 단서와 그 틈 안에서 사랑을 감당 중인 화자의 모습을 볼 뿐이다. 시인의 근간 『산책 소설』 속 산문에 등장하는 시인의 다음 질문 역시 화자들의 사랑을 식별하기 위한 중요한 힌트로 작용한다. "나는 얼마나 화자와 가까우면서도 또 화자가 아닐까?"1) 모름지기 창작자라면 한 번쯤은 대면해 봤음직한 이 질문이 오은경 시 안에서 유달리 중요한 까닭은 그녀의 시작(詩作)이 결국 위 물음 위에서 다양한 형태에 의해 발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 없기에 상당 부분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그녀의 인물들도 기실 위 질문에 대한 집요한 탐구 위에 제출되고 있는 현재진행형 답변이다. 이 과정에서 '너'와의 거리감을 꾸준히 제어 중인 능동적인 '나'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너'의 유동성에 활짝 열려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나'의 수동성과 교차하며 끈질기게 이어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하게 읽어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들의 능동과 수동이 서로의 정반대로 존재하며 대립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의 정체성을 구분하고 보존해 주는 관계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화자들의 감수 능력은 오로지 감응으로부터 벗어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감수와 감응의 능력은 언제나 '나'가 자기 자신을 떠나 번번이 다른 형태의 '나'를 경험하기 위해 서로 안에서 변주되는 움직임에 가깝다. 요컨대 오은경의 시 안에서 감수는 자기 안에 감응을 끌고 들어오고 있고, 반대로 능동성 역시 자기 안에 수동성을 끊임없이 끌고 들어오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치 책 탑이 무너질 만큼의 어떤 시간 변화가 발생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던 '너'로 인해 '나'의 마음이 "지루하거나 지칠 때면" 의도적으로 책 탑을 밀어버리는 '나'의 행위처럼 말이다. 또 동시에 완만히 책 탑을 쌓아나가는 행위가 '너'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정념에 몸을 맡겨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적당한 능동과 수동을 구사하며 서로를 깎고 마모시킬 때 빚어지는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관계가, 다만 영영 서로를 소멸시키지 않고 존속시키는 사랑이 될 것임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1) 오은경, 『산책 소설』, 현대문학, 2021, 100쪽.

월간 현대시 민가경 오은경둘이 거리로 나와산책 소설한 사람의 불확실현대시작품론 2025
민가경 아이( )마음 ― 김복희, 『장타령』 외 9편

김복희가 내놓은 열 편의 신작 시와 에세이에는 이런 표현이 되풀이된다. "아 이 마음." 대관절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관데 그렇게 '마음' 앞에 가로놓인 괄호 안을 자꾸만 헤집고 기웃거려보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는 것일까. 마음 앞에서 여전히 체계적일 수 있다고 단단히 오해 중인 나. 그렇게 점점 더 체계적으로 오인되는 마음의 세계. 그 괄호를 특정한 하나의 마음으로 기입하기가 도리어 난망해진다. 마치 「춘향이 집 가리키기」의 화자가 "'나는'으로 시작"하여 '나'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 속, 술어의 배합에 의해 숱한 가능성들로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나에게 나를 내"밀고 "되돌려받"고 있는 것처럼, 이 '마음'들도 자기 자신을 여러 줄 쓰고 또 거듭 지우며, "나는 / 나는 있다 / 나는 여기 있다"를 반복 중인지도 모른다. 말 없는 새 인간과 말하는 기계 인간을 지나, 죽어서도 말하는 귀신까지 지나쳐 온 시인이라면, 어쩐지 호랑이와 도깨비가 등장하는 전래 동화나 불가사리 설화 같은 초인과론적 테마를 경유해 시를 건네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방점은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요소를 유연히 패러디하여 펼쳐낸 타령의 재해석에 찍혀야 할 것 같다. 이 젊은 시인이 고전을 해체해 새로운 고전을 고안하며 겨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립각을 세워 세련되고 깔끔한 여과물을 건져내는 일보다, 역으로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켜 그녀만의 독특하고 혼종적인 오늘의 오드라덱을 건져내는 일이었을 테니.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를 잊어보아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김복희 시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가끔 그 시의 견고한 짜임을 벗어나 일상의 비근한 곳에 한번 가보아도 좋다는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사물과 제재의 맹아와 뿌리를 해체 중인 시인이 생의 풍부함을 제시할 자리일지 모르니까. * 「불가사리가」에는 오로지 침묵으로 말해지는 존재인 '불가사리'가 그 제재로 등장하고, "나에게 성 없다면 무엇 이어지랴" 물음을 던지고 있는 화자 '나' 역시 출현한다. 그런 '나'의 진술로 범박하게나마 유추하건대, '나'는 성(性)이자 성(姓)이라는 중의적 '성'의 연쇄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해보며, "다른 꾀 낸다"는 차원에서 기왕의 민간 설화 속 불가사리를 그 상상에 결합해내려는 듯하다. 불가사리가 환경조건에 따라 자기 생식법을 조정하고 자연적 성전환에 의해 유·무성 생식의 경계를 무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타령과 함께 입안에서 불가사리를 퉤 뱉어내는 '나'는 기실 '성'을 없애려는 기획을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주체인 셈이다. 기존 설화 속 승려의 밥알로 빚어진 불가사리가 쇠를 먹고 거대한 몸집의 '불가살'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각종 문명의 수단들을 삼킨 혼종적 존재로서의 불가사리가 탄생하는 과정과 동궤를 그리며 김복희 시 안에서 전유된다. "꾀바른 불가사리"에 대한 타령이 시작된 후 불가사리는 자연·문화의 어렴풋한 경계뿐 아니라 성분화 이전의 태곳적까지 넘나드는 시간 축 위에서 숱한 문명의 지표들을 삼키는데, 화자는 이러한 불가사리를 깡깡 부수려는 사람들을 보며 잘못의 근원이 단지 '불가사리'인지 아니면 거대한 혼종적 존재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한 '나'인지를 묻는다. 그러다 문득 "성 없어도 사는데 / 아무 지장 없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생존 양식을 긍정하고, 동시에 "죽을 수 있어서 신통하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영생에 대한 연민을 보탠다. 요컨대 성분화 이전과 이후로 분기되는 모든 존재 양식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양자를 향한 긍정과 다독임을 하나의 '가' 형태로 번갈아 펼쳐내는 것이다. 또한 제목부터 동명의 속담을 내건 「밤비에 자란 사람」은 연한 밤비를 맞고 자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재해석을 예고한다. 이때 차용되는 제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인데, 그 도깨비는 으레 우리 관념 속 위용 넘치는 모습은커녕 어째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고 있는 초라한 행색이다. 그 가방 안에는 "당신을 걸고 씨름을 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하루치의 시간이 담겨 있고, 그 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 원하는 것"이라는 점은 기실 작중의 도깨비가 계절을 관장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아프고 연한 이들도 도깨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샅바를 잡고 씨름하"노라면 어느 순간 "씨름이 다 뭔지" 싶어질 것이고, 도깨비의 조화 안에서 비로소 "아픈 계절 사라지고 도깨비불 무성한 날"이 올 거라 한다. 즉 도깨비와 화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타령은 기존 도깨비의 용맹함과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계절 바뀔 때 / 더 아픈 사람들", 그리고 "밤새 기침하"는 마른 존재들의 "기침 따라 후렴하는" 양태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령'이라는 양식의 반복적 등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하나의 긴 구전 서사를 너스레나 타령 형태로 엮고 민담적 삽화를 구수한 언어로 우려내는데, 그 안에는 남북한 상공을 지나가는 산타랄지, 밤비에 자란 말라깽이 도깨비랄지,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호랑이와 같이 '환상적인 제재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패러디'나 호의를 베풀다가 살의에 노출된 곰의 이야기나 불가사리 노래와 같이 '환상적이지 않은 제재의 환상적인 것으로의 패러디'가 가득하다. 물론 그 제재들의 속성이나 의미의 파악이 선결되지 못할 경우 이 영리한 설계가 무용해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 비틀린 와중에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곡진한 시적 대상들의 '마음'이 비춰질 때, 독자들은 기계적인 호기심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그 유쾌하고 정감 있는 활동 그 자체에 이끌려 가게 된다. 특히 그 개별적 마음의 주관성이 집요하게 관조될 때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은 시인이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그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알려는 '조심(照心)'의 태도이다. 마음은 형태도, 질감도, 파동도, 이름도, 소문도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데, 조심은 이러한 마음을 '비추는' 또 다른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은 어쩌면 어떤 윤리의 영역보다 말 그대로 마음의 실상을 비추어 보려는 미적 영역에 가까운 셈이다. * 그런 김복희식 전유의 서막을 여는 「장타령」은 한국판 집시이자 악사(busker)의 전신이었던 '각설이'의 타령을 시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본 것이겠다. "각설이 온 마을 온 집 구걸하듯 / 시작하겠다"고 자신의 등장 목적을 알리며 시작되는 타령은 기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에 내포된 일방향적 관계를 비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이인 '나'가 '너'의 곳간을 개방하라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보리알"과 "깨끗한 잠"처럼 초라한 것에 불과할지언정 '나' 역시 네게 개방할 인심이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고기」 또한 속담 '까마귀 고기 먹다'의 유래를 해부 중인데, 그건 염라가 저승사자 강림에게 부친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까마귀가 강림에게 향하던 도중 탐스러운 말고기에 사로잡힌 바람에 존재들의 생사가 선입선출 아닌 무작위의 원리로 바뀌게 된 일화이겠다. 여기서 시인의 해체적 상상력이 뻗어 나가는 곳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추동된 까마귀의 실수로 인해 "아무 비둘기나 거두어 가"는 것을 제 상숫값으로 취급하게 된 '죽음'의 원리를 시정해보려는 자리에 있지 않다. 단지 이 생과 사의 딜레마적 순환 안에서 내일이 담보되지 않은 존재들의 연약한 생이 어떻게 "오늘 본 아름다운 것"과 "오늘 본 귀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 초점해보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작은 부리로라도 무언가를 먹겠다는 생의 의지를 보며 차라리 그 "강냉이"를 "더 잘게 부숴 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같이 살아가 보려는 것 같다. 강림의 적패지 안에 "이제 없는 비둘기가 / 그려져 있는" 광경을 "오늘 본 / 아름다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보려는 것도. 그뿐만 아니다. 「나는 새에게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할 수 없음」 속 화자는 "딸기 한 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자코 본다". "집중해서 조금만. / 조금만 더" 관찰한다. 은근과 끈기의 관조 다음, 화자는 어렵사리 "딸기는 파리하고 여위고 마르며 닫고 막고 막힌 과일"이라 나열한다. 이때 딸기를 설명하는 수과(瘦果, achene)의 어원 '카이네인(χαίνειν, khaínein)'이 입을 크게 벌리는 행위에서 유래하였듯, 화자는 딸기를 '수과'로 취급하기 위해 "한 입을 갖추어 / 내민다". 그리고 "혀에게 지고 이에게 지는 단단한" 그것의 미덕처럼 딸기를 "새가 먹을 수 있게 조금" 남겨두기로 한다. 이때 딸기는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온 것(which is coming)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론 화자의 관찰에 의해 '딸기'를 이루는 낱낱의 속성을 합쳐야만 오는 '온 것(the whole thing)', 즉 '전부'의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섬세함은 장악 또는 파악의 욕망보단 인간의 한계에서 그 제재에 어떻게든 닿아보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로 읽혀야 한다. 당장 「부처님 가운데 토막」 속 "아무리 쓸어도 만져지지 않"는 "갈피 안의 몇 글자"를 헤아려보려는 화자가 바로 그 모델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갈피'는 "건드릴 수 있"을지언정, 채 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라는 진술은 엄연히 "손끝에 걸리던 것"들의 '갈피'를 최대한 섬세히 살펴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어쩐지 "오늘 만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개 허리를 "살살 더듬"으려던 아이의 자세와 닮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복희의 많은 시적 대상들은 자기 의도와 실제 행위가 초래한 영향 간의 낙차로 인해 숱한 탄식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곰의 친절」 속 곰은 작은 토끼를 돕고 싶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단순한 호의가 상대를 죽이는 살의가 됐다나 뭐라나. 에세이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속 호랑이 된 남자 역시 엉겁결에 "아내를 죽이고 노모마저 죽인 살인자", 아니, 살인 호랑이가 되어버렸다나 뭐라나. 이렇게 호랑이 담배 연기 뒤로 흩어지는 설화와 함께 흘러 들어온 시인의 질문 "여기서 호랑이 됨은 일종의 은유일까요"의 의미만은 가볍지 않은 것이라, 부유하지 못한 채 다만 무겁게 침전될 뿐이다. 그 낙차는 「하려던 말의 반만 하는 모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중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세계는 온통 말로 이뤄져 있어 몹시 험한 곳인데, "말 흘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그림자를 지고 따라오는 존재들"이 툭 튀어나온단다. 그래서 존재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최선 같은데, 막상 존재들은 "그림자를 밤에 숨겨서라도 세상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어" 하고, 빛도 안 드는 비 오는 날 굳이 밖으로 나가 "살아 움직이려고 냄새 풍기려고 / 마음 움직이려고" 한단다. 이렇게 재차 화자의 선의를 좌절시키는 존재 본질의 속성이 괴리로 발현될 때, 화자는 존재를 존재로서 만드는 장소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지, 그리고 "생각 속에도 세상이 있"긴 한 건지 질문하다가, 결국 "망아지 송아지 강아지는 어디로 올까"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제목처럼 '하려던 말'의 절반만 내뱉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마음이라는 내부에 간직해 은밀히 보호하려는 노력과, 온전히 통제되지 않고 바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존재를 속수무책 물끄러미 바라봐주려는 노력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복희의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존재들이 거니는 "계절과 계절 사이"는 사실 그 미지의 기표 틈으로 연약한 너와 내가 갈피갈피 교통하는 공간이자, 서로를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진 장소 아닐까. 그 공간과 장소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일 테다. 이 마음들은 수많은 괄호에 의해 부연될 수 있는 공백이면서, 동시에 어떤 확률에선 전혀 설명될 수 없는 영원 미결의 공백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김복희의 글에서 "아 이 마음"이 노래화되어 의미 없는 여음구로서 각각의 타령들을 하나로 집합시키는 hook처럼 기능하고 있는 이유이다. 음성적 효과를 보존한 대신 의미만은 비워놓아 갈 길 잃은 마음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곳. 어딘가로 직접 향하고 싶긴 한데 결정적으로 그 접근법을 잃어버린 어떤 마음이 "아 이 마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마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니까. 조심도, 무심도 아닐 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월간 현대문학 민가경 김복희생 마음장타령보조 영혼스미기에 좋지희망은 사랑을 한다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포지션리뷰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