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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 2024년 가을호(제47호)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오병량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문학동네, 2024)

황사랑 문학평론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움베르트 에코는 장 클로드 카리에르와의 대화에서 “현대의 매체들은 빠른 속도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기에 “시간의 파괴 작용에 대한 저항력을 증명한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책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1) 에코의 말처럼 우리는 책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며 책의 온존을 바라곤 한다. 그런데 최근 시집의 출판 경향을 보면 책조차 SNS를 닮은 매체가 되어가는 듯하다. 계절이 바뀔 때면 출판사마다 신작 시집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갓 등단한 신인들 역시 빠른 속도로 첫 시집을 출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지형도가 변하며 시집의 다양성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기도 하고, 기다려왔던 시인들의 출간 소식이 들릴 때마다 설레는 마음이지만 더 오래 보고 싶은 시집들을 남겨두고 다른 시집으로 넘어가야만 할 때가 오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이번에 마주한 오병량의 첫 시집은 등단 후 11년이 지난 후에서야 묶였다는 점에서 시류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는 시집이었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매 순간 확인하고 다른 이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되기를 내려놓음으로써 시인이 된 고백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에 나타나는 주제가 ‘죽음’이라는 것에 수긍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고봉준 평론가가 시집의 해설에서 “책등을 잡고 흔들면 부스스 소리를 내며 ‘죽음’이라는 단어가 떨어져 내릴 정도”라고 평한 것처럼2) 오병량의 시는 각기 다른 죽음들로 둘러싸여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은 가족들의 죽음부터 같은 동네의 소년과 소년의 누나, 여러 종류의 새와 고래들의 죽음까지. 그런데 제각각처럼 보이는 죽음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할머니의 죽음에 연이어 할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되는 이야기나(「호랑이꽃」) 익사한 소년과 목매어 죽은 그 애의 누나, 소년이 죽은 곳에서 발생한 또 다른 죽음(「대홍수」), 계속해서 쌓이는 새들의 사체와(「다만, 다만의 말로 쓴」) 고래들의 떼죽음(「자매결연」)등을 보면 죽음은 하나의 사건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닌 연속적으로 나타난다. 즉 오병량의 시에서 죽음은 종결되지 않으며 현재적인 성격을 가진다.

종일 마른 비 내리는 소리가 전부인 바다였다
욕실에는 벌레가 누워 있고 그것은 죽은 물처럼 얌전한 얼굴,
구겨진 얼굴을 거울에 비추면
혐오는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나는 미개한 해변 위에 몇 통의 편지를 찢었다
날아가는 새들, 날개 없는 새들이 폭죽처럼 터지고
파도가 서로의 몸을 물고 내 발끝으로 와 죽어갔다
한번 죽은 것들이 다시 돌아와 죽기를 반복하는 백사장에서
떠난 애인의 새로운 애인 따위가 그려졌다 다시
더러워지고는 했다

그대의 손등처럼 바스락거리는 벌레가 욕실에 있었다 벌레는,
곱디고운 소름 같은 어느 여인의 잘라낸 머리칼 같았다
나는 위독한 여인 하나를 약봉지처럼 접고
오래도록 펴 보았다 많은 것이 보이고
슬펐으나 한결같이 흔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애먼 얼굴을 거울 안에 그려두었다
잘린 머리칼을 제자리에 붙여주면 어여쁘고 흉한,
평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위독한 미소의 여자가
커다란 가위를 든 채 거울 밖에 있었다

이 위태로움을 어찌 두고 갈 수 있을까? 그대여,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고 쓴 그대의 편지를
두어 번 더 기억하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슬픔에 비겁했다, 생각할수록 자꾸 여며지는 백사장
말하자면 그건 소용없는 커튼, 소용없는 커튼은
창밖을 곤히 지웠다 도무지 펄럭이지 않았다
파도는 죽어서도 다시 바다였다
죽을힘을 다해
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 같았다

- 「묻다」 전문


  그런데 죽음이 종결되지 않고 연속해서 발생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앙리 르페브르가 현대 사회는 공포 안에서 비극이 일반화되고, 그로 인해 비극이 희미하게 지워졌다고 말한 것처럼3) 비극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화자들은 쉽게 공허해지고 권태를 느끼며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도 죽음의 연속성과 더불어 회피적이고 무기력한 화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시는 벌레와 파도, 위독한 여인과 죽음을 권하는 편지 등 죽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하여 볼 것은 시가 욕실과 바다라는 두 공간을 오가며 진행된다는 점이다. 1연에서 욕실은 ‘죽은 물’과 같은 얌전한 벌레가 있는 곳이며, 바다는 새들과 파도가 죽어가는 곳이다. 화자는 욕실의 바닥에서 벌레를 응시하다 거울로 시선을 옮긴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혐오를 느끼지만 이내 바다라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간다. 이때 욕실에서 바다로 이동할 때 거울은 화자가 있는 공간을 바꿔주는 매개가 된다. 1연에서 거울을 보는 화자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지만 2연에서 거울을 보는 화자는 타인에 대한 죄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자를 지배하는 두 감정은 욕실에 있던 화자를 순식간에 바다로 이동시켜 버린다. 즉 시인은 화자가 가진 자기혐오와 죄책을 깊게 들여다보기보다는 회피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좁은 욕실이 아닌 넓은 바다에 있어도 화자가 보게 되는 것은 죽음들뿐이다. ‘날아가는 새들’과 ‘날개 없는 새들’이 터져 죽는 곳, 파도가 자신에게로 밀려와 죽는 해변. 화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죽어가는 장면은 화자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죽음들은 결코 화자를 떠나지 않을 것을 예감하게 한다. 이처럼 죽음이 도처에 깔려 있어도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듯4) 화자는 죽음을 ‘볼 수’ 있어도 자신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특히 2연에서 나타나는 거울 속의 여자에 대한 묘사를 보면 더욱 그렇다. 병증이 깊은 여자와 함께한 과거의 기억들은 당시에는 강렬한 슬픔이었겠으나 현재는 퇴색되어 화자에게 “흔한 것”이 되었다. 이는 죽음을 바라보는 오병량 시의 화자들의 공통된 태도이다. 시에서 죽음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지만 화자들은 그 어떤 죽음에도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연속적인 죽음에 슬픔을 표하면서도 담담한 어조로 죽음을 관망하는 화자에게선 어떤 의지도 찾아볼 수 없는 무기력함이 느껴진다.(“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 「편지의 공원」) 그러나 자기 앞에 놓인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도망친 화자에게는 해소되지 않는 슬픔과 공허만이 남을 뿐이다.
  시의 마지막 연에서 주지하듯 “슬픔에 비겁”한 태도가 오병량 시의 화자를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증오하는 연인이나(“죽었으면 좋겠어, 날 증오한다는 사람의 발은 귀엽다” - 「입술은 어떻게 갈라졌고 왜 뼈처럼 부러지지 않는가」) 나르시시스트인 연인의 곁을 지키다가도(“당신은 당신에게 말을 합니다 … 질문이 많은 사람이 줄곧 따르는 사람이어서 나는 여러 번이나 믿었습니다” - 「유독」) 결정적인 순간에 ‘너’의 곁에서 도망친다.(“나는 병실을 나왔어” - 「모조로 피는 장미」) 다가오는 듯 하다가도 곧 도망치는 회피적인 화자지만, 1연에서 파도의 죽음만을 보던 화자가 바다를 “죽을힘을 다해/죽는 연습을 하는 최초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작은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비록 자신은 죽음이나 타인들로부터 도피하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죽음으로 향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나아가려는 몸짓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망설임 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가장 바라는 것은 화자가 아닐까.

한때 따뜻했다는 어떤 것이라 해도
너는 믿지 않는다
진심이라면 눈앞에 보이라며 손바닥을 펼쳐 보인다
뿌리가 보이는 나무 같아, 뿌리가 보이는 나무는
이미 죽은 나무 같아서
손가락을 천천히 접어주었다
희망의 주인은 오직 희망이어서
결국 뒤척이다 떨어지는 꿈의 주변에 내가 있다
나는 산 채로 잠시 죽어서
벌레 먹은 잎 속에 담긴 벌레의 입 모양으로
살아지지 않을 꿈을 헛되이 깨물고 있다
(…)
어쩌자고 옆에 없는 사람이
하필 죽은 것처럼 믿어져서 이불을 두드리던 날도 있다
죽고 싶다던 너는
어떤 희망을 사랑하기로 했던가

나 없으면 너
정말 죽을까, 태초에 세상을 만든 사람의 자세로
내게 눈빛을 내려줄 것만 같은 아침이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예술,
예술이다 예술, 나는 크게 떠들며
말없이 우는 소리를 내야 했다

안간힘,
마지막 한
인간의 힘으로
지저귀고 있었다

- 「결벽」 부분


  「결벽」은 오병량 시의 특징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아니지만 화자의 구체적인 목소리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이 시에서도 ‘너’와 화자의 관계는 위태롭다. 둘은 대화를 나누기보다 질문을 쏟아내기에 급급하고 나는 ‘너’를 설득하기보다 말없이 눈을 감기를 택한다. 이제까지 시의 화자가 세계와 ‘너’로부터 회피했다면 위의 작품에서는 화자보다 ‘너’에게서 세계를 향한 부정적 시선이 드러난다. ‘너’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고자 하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결벽」에서는 화자가 ‘너’의 곁을 떠나기보다 ‘너’에게 다가가 “손가락을 천천히 접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짐작하건대 이것이 화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일 것이다. 손을 잡아주지는 못하지만 희망이 없는 세계에서 너의 곁에 있으려 하는 마음. “애쓰는 마음”(「호랑이꽃」)은 세계를 의심하는 ‘너’와 ‘너’에게서 도망치려는 ‘나’를 붙잡아둔다. 다가오지 않을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지만 헛됨 가운데에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인간의 일이라면 오병량 시의 화자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헛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넘치는 지혜와 부를 누리고서도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왕이 떠오른다.(“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 「전도서」 1:2) 오병량 시의 화자 역시 무력감을 온몸으로 표하며 모든 것이 헛되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그의 시를 만나게 된 듯하다. 하지만 “그립다,/죽겠습니다”(「시인의 말」)라고 도망치면서도 결국 너의 곁에 서 있으려는 화자의 모습은 얼마나 덧없고 또 아름다운가.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하며 누구보다 느린 속도로 헛된 일을 배워가는 화자의 마음이 오래 간직되었으면 한다.

추천시 : 「묻다」, 「대홍수」, 「결벽」
  • 1) 움베르토 에코 · 장 클로드 카리에르, 『책의 우주』, 임호경 역, 열린책들, 2011, 36쪽.
  • 2) 고봉준, 「상실 이후」, 오병량, 『고백은 어째서 편지의 형식입니까?』, 문학동네, 2024, 112-113쪽.
  • 3) 앙리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박정자 역, 기파랑, 2005, 108쪽.
  • 4)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321쪽.

추천 콘텐츠

황사랑 몫 없는 자들의 광장 : 배수연,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문학과지성사, 2024) /윤은성, 『유리 광장에서』(빠마, 2024)

 미래의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공간이 주어질까. 기술의 발전으로 지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화하거나 가상현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미래는 이제 인간에겐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팬데믹을 거치며 깨달은 것은 인간에겐 자신을 보호해줄 사적 공간 외의 공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의 변화를 목격하고, 나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발견하며, 친밀한 이들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 말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자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잘 알고 있다는 뜻"1)이라는 에드워드 렐프의 말처럼 인간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장소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소들은 인간의 삶을 지탱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장소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시점에서 많은 이와 관계 맺는 장소이자, 가장 문제적인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단연 광장일 것이다. 그리스의 아고라(Agora), 로마의 포럼(Forum)을 거쳐 현재의 광장은 사람들을 위한 장터부터 공연과 전시, 종교적 행사나 군중의 집회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장이 중요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2)이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나타나는 광장도 현실의 광장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문학 안에는 시대를 반영하고, 시민을 대변하면서도 시인의 시 세계를 드러내는 다양한 광장들이 존재한다. 최근 출간된 배수연의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과 윤은성의 『유리 광장에서』에서도 타자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결의 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랄한 상상력과 단단한 실천으로 이루어진 광장을 함께 거닐어보자. 이분법을 넘는 걸음들  배수연의 세 번째 시집은 동화적인 상상력이 흩어져 있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맥을 함께하면서도 경계가 희미해지는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모두가 혼자 있지만 같은 노래를 듣는 집이나(「모두네 집」), 컬렉션과 컬렉터의 위치가 동등해지는 갤러리(「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청소부와 손님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는 호텔(「마리골드」) 등 사회가 구분해놓은 경계는 배수연의 시에선 무의미한 것이 된다. 청소 노동자와 손님, 컬렉션과 컬렉터와 같이 마주칠 일 없는 이들을 한곳에 배치함으로써 배수연의 시 세계는 만들어진다.  시에 등장하는 동물 타자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거위나 두더지(「모두네 집」), 광대 역할을 맡은 앵무새(「광대 없는 마을」), 컬렉션이 된 갈치와 악어(「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터진 포대 안을 처리하는 비둘기(「개발팀」)처럼 시 속 동물들은 극에 따라 얼마든지 역할을 바꿀 수 있는 배우처럼 시와 시 사이를 건너다니며 경계를 허무는 데 일조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위들이다. 거위는 어린 시절에 함께 놀던 친구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화자의 심술에 낯선 동물이 되기도 하며(「거위와의 목욕」),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다가도 자유롭게 헤엄치며 동물적 특성을 드러낸다(「반짝이는」).  의인화가 일반적으로 부재한 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3)이라면 배수연 시의 동물들은 의인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의인화에 한정되지 않으려는 듯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거위의 말들(“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처럼 거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 동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를 보면 배수연의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란 없으며 개념들은 넓게 풀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 [……] 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 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 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부분  그런데 배수연 시의 떠다니는 이미지들 속에서 건져지는 것이 있다. 시인은 의미가 고착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몫 없는 자들의 곁에서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알려지지 않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공부하며(「독서 모임」), 광대가 받는 박수를 원하는 왕을 만들어내고(「새 하늬 마 높」), 항상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들을 등장시킨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거위들이 선택한 것이 청소부라는 점은 시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 청소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거위는 계속해서 일을 하고(「거위와 모과」), 스스로가 청소부에 적임자임을 강조하는 거위의 모습에서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모두네 집」)] 그들은 언제까지나 청소부의 자리에 머무르며 사회가 원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지만 줄을 잘 서는 거위들과 마주칠수록(「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화자의 부끄러움은 배가된다.  앞서 인용한 시에서 화자가 거위와 마주친 곳은 높은 빌딩의 근사한 식당이다. 식사를 즐기는 화자 앞에서 거위는 장소에 개의치 않고 “청소 일”을 알아보았다며 말을 건넨다. 어디서든 청소부를 자처하는 거위에게 높은 빌딩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거위와 함께 읽은 책의 주인공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며 이루지 못한 꿈을 갈망한다. 하지만 거위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관심 밖의 일이며, 사람들이 부와 행복을 과시하는 곳이라도 거위에겐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불과하다. 그렇게 보면 거위는 착취 구조에 무지하기에 역설적으로 착취 구조에서 해방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살아가는 거위를 보고 죄책을 느끼는 것은 화자이다. 화자는 청소부로 살아가는 거위 앞에 항상 손님으로 누군가의 노동의 혜택을 누려왔다는 부끄러움, 행복한 이들 사이에서 일할 거위의 불행을 단정 짓는 편협함에 대한 부끄러움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은 화자를 수직적 공간에서 내려와 거위와 누울 수 있는 수평적 장소로 이끈다. 경계를 구분하는 수직적 문법을 탈피하고 무해한 거위와 누운 곳이야말로 화자가 원하는 장소일 것이다. “아무도 부탁한 적 없”(「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는 행동을 함으로써 거위와 화자는 우화가 아닌 현실에서 함께하게 된다. 서로 다른 부끄러움을 견디며 거위들과 책을 읽는 것, 근사한 곳에서 내려와 청소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정기 모임」), 기록되지 않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을 [“동대문 미싱사는 이런 말을 하지 않고, / 기록되지도 않는다”(「일요일」)] 몫 없는 자들에 대한 애정4)이 아니면 무어라 불러야 할까. 항상 의자에 앉을 수는 없어서 모자가 발명되었어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나는 모자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 [……] 더 좋은 모자를 줘, 더 좋은 의자를 줘, 더 멋지고 더 가치 있는! 진실을 잘 이용해야 해 진실은 쉽게 녹지 않으니까 진실을 휘젓다 지친 사람들 그들의 비석 앞에 꽃과 모자가 놓여 있네 모자를 맞대고 오래오래 행진했어 실패라는 생각에 괴로울 때면 종종 모자 안의 코끼리를 쓰다듬지 인명 없는 미술사를 읽는 기분으로 흰 연기로 색색의 카펫을 짜는 기분으로 해방되는 기분으로 - 「모자의 기분-광장에서」 부분  거위와의 만남에서 보이듯 배수연은 경계를 구분하고, 계급을 나누는 이분법을 탈피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시에서 모자는 의자를 대신해 사회적 계급을 상징하게 된 물건이다. 기존의 세계가 권력을 가진 이에게만 의자를 허락하여 수직적인 계급 구분을 뚜렷이 했다면, 모자로 구분되는 세계는 모두를 광장이라는 수평적 공간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기존 체제와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세계가 계급을 나누는 방식이 더욱 교묘해졌을 뿐, 계급은 여전히 견고하게 남아 있다. 되레 간편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자는 어디에서든지 서로의 계급을 확인할 수 있어 모자를 향한 욕망을 부추기고, 누구나 멋진 모자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더 많은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모자가 전부인 세계는 군중을 어리석게 만든다. 사람들은 현재의 모자에 만족하기보다 더 좋은 모자를 쓰기 위해 아우성치고, 이미 멋진 모자를 가진 왕과 판관들도 자신의 모자에 만족하지 않는다. 모자에 현혹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 했던 이들은 죽고 묘비만이 남아 세계의 폐쇄성을 확인시켜준다. 화자가 서 있는 광장은 이 모든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혼돈의 장소이다. “구두닦이와 빵 장수 왕과 판관들 농부와 마술사 유모와 화가의 무리” 등 모자를 바꾸기 위해 모여든 이들과 죽은 자들의 묘비, 모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헹가래하는 군중이 함께하는 어지러운 곳에서 화자는 거위와 함께 책을 읽었던 것처럼 이들과 모자를 맞대고 행진한다. “실패라는 생각에” 무너질 때마다 모자 안의 코끼리를 만지며, 상상력에 기대어 다시금 몫 없는 자들과 함께 걷는 것이다. 성호를 긋는 마음으로 걷고 또 걷는(「예술가」), 몫 없는 자와 거위들을 하나로 잇는 마음은 이분법에서 해방될 하나의 미래를 바라며 행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산책」)는 화자의 고백처럼 작은 발걸음들이 모여 이분법을 부수는 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은. 우리는 배수연의 시를 통해 이분법을 넘어 화자와 거위, 두더지, 악어, 앵무새 들과 함께 행진하는 광장을 그리게 된다. 아무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아무나와 걸을 수 있는 광장을. 희미한 연대의 광장  윤은성의 두 번째 시집은 투명한 눈물들로 이루어진 슬픔의 기록 같다. “슬픔을 얼굴에 눌러 붙인 물고기들”(「둑과 빛과 물의 시」)처럼 “어디에서도 잠은 슬펐다고”(「멀다」) 고백하며, “슬픔으로 빌린 / 집”(「영원과 하루」)에 초대되는 화자를 보면 우리도 슬픔의 한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이 감지하는 깊은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목격한 죽음과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물을 걷기 위해 먼 길을 다녀”(「물 긷는 아이들이 지나가」)와야 하는 소년 소녀 들의 이야기부터, 여름날을 채우던 “죽은 교사들”(「우리의 물이 우리를」)의 소식, 비난받는 소수자들과 함께하며 “먼 / 미래를 보여준 사람”(「좁고 긴 옷」)의 부고와 “크레인도 아닌 전신주 위에 올라가”(「창문을 열다가」) 목소리를 내던 여자의 이야기를 화자는 지나치지 못한다.  또한 시인에게 비인간 존재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의 시는 고양이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과 겹쳐 보게 하고(「선반 달기」), 닭이나 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을 조명하며(“닭과 소와 돼지가 차례로 앓거나 / 물에 잠겨 죽거나 / 한꺼번에 묻히거나”, 「행사장」), “너무 크거나 작아서 / 발견되지 않는 죽음들”(「둑과 빛과 물의 시」)에게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음을 쏟는 대상이 많아질수록 시인이 겪게 되는 슬픔이 더욱 깊고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전제해야지만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것5)처럼 윤은성은 사회적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뿐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비인간들을 동일 선상에 놓으며 그들과 함께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실천으로 엮인 시는 슬픔을 껴안은 채로 행동하는 화자를 만들고(“지금 아프다고 우리 함께 울고 웃고 // 무슨 이상한 계절을 불러오게 되더라도 // 외쳤어야 맞아”, 「확성 빛 겨울」), 우리는 윤은성의 시를 통해 문학과 정치가 불가분의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기억하니 우리는 음악과 지구과학을 같은 날 배우고 함께 옥상에 올랐잖아 구름 사이로 빛이 보이면 무언가 알아챈** 것만 같은 기분도 들고 소나 강아지의 이마를 만지는 것 같은 부드러운 떠가는 시간을 촘촘히 알 것 같았잖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엎드려 울기밖에 할 수 없더라도 시간에 맞추어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었잖아 그때도 이걸 알았던 기분이야 내가 사는 도시에선 자주 광장으로 사람이 모이고 흩어져 계속 말하려고 하는데 어쩐지 여기에서 외치는 기도가 멀리까지 가닿지 못하는 기분도 들고 [……] 내 목소리가 지상에서 또 지하에서 잠시 울리고 사라져 우리가 붙들고 모이는 게 미래를 등지고 선 사람들이 몸을 되돌려보려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조용한 기도라고 하자 유리와 안개를 동시에 깨뜨리고 밖에서 안으로 집어넣는 손들을 알아채려 잠시 모였다고 하자 * 교사 보란을 통해 과학 교과목이 따뜻할 수도 있겠다고 상상함. ** 동물해방 운동을 했던 혜린과의 대화에서 “알아채다”라는 말을 전해 받음. - 「유리 광장에서」 부분  하지만 분배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숨 쉬는 것만큼 당연해서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는 위기들에 마음을 쏟고 행동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또 외로운가. 위의 시에서 시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친구와 함께 보낸 다정한 과거를 떠올린다. “부드러운 / 떠가는 시간” 속에서 무언가 깨달은 것 같으면서도 어떤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고, 서로에게 의지하여 보낸 기억들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화자는 광장에 선다. 그러나 화자가 처한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다. 현재의 화자는 엎드려 울기만 했던 과거보다 자주 목소리를 내고, 기도도 해보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화자는 “무엇을 더 느끼고” “나이를 더 먹어야” 하느냐며 절망에 빠지는 듯하다.  이때 화자가 선 광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윤은성은 첫 시집 『주소를 쥐고』(문학과지성사, 2021)에서부터 광장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었는데 첫 시집의 광장이 쓸쓸함이 깃든 곳이거나(「비단길앞잡이」) “살갗을 할퀴는”(「장미 광장」) 상처를 내는 곳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광장은 희미한 연대가 이루어지는 실제적인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유일한 물리적 공간"6)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쉽도록 도시의 중요한 장소에 위치한다. 많은 장소가 그러한 것처럼 광장의 성격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며 사람이 모이지 않은 광장은 빈터일 뿐이다.  그런데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외치는 화자의 목소리는 사람을 모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생태주의에 관심을 보이지만 다른 사회적 갈등과 다르게 생태주의는 대중의 결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7)는 말처럼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은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리를 부수고 화자의 곁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광장은 공공장소이지 거주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듯 함께 모인 이들조차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해산되고, 화자의 목소리는 유리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진다.  이같이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연대의 불안정성을 거듭 확인하게 되는 유리 광장에서 시인은 홀로 허망함과 미움을 삭일지언정 희미한 연대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더 많은 참여를 만들어내고, 더 오래 참여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아는 듯하다. 때문에 무자비한 손들을 알아채기 위해 모인 광장에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기대오고, 조용한 기도로 사람들과 연결된다. 이것이 윤은성의 시가 몫 없는 자들을 위한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온화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너무 멀리서 헤맨 날이면 자다 깨어나 안을 것을 찾아서 내가 얻어 온 모든 체온이 도는 몸을 천천히 뻗어봐. [……]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서로를 알아채며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안아주고 있었어. 파도보다 오래 더 오래 다시 모르는 아픈 물결까지 붙잡아주고 있었어. 안다고, 안다고 붙잡아주고 있었어. - 「사슴뿔청각」 부분  시인에게 광장은 그가 지키고자 하는 생태계이기도 하다. 위의 시에서는 물의 광장으로서의 바다가 나타난다. 바다는 새로운 물결이 기존의 물결과 더해져 ‘하나의 물결’을 만드는 끊임없는 생성의 장소이다. 그러나 투명한 파도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시인은 바다의 포용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물고기들의 떼죽음과(「둑과 빛과 물의 시」), 조개들의 죽음, 바다에 터를 둔 사람들의 이주는(「행사장」)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다.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바다 생물의 사체가 함께 놓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현실에서 화자는 바다가 더 나쁜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어린 청각을 통해 목도한다. “자라다 말고 색이 변하”(「사슴뿔청각」)는 어린 청각의 현실이 말간 얼굴로 첨벙거리는 아이들의 미래인 것만 같아 화자는 두려움에 떨고 “시를 잃어버린 것 같”(「창문을 열다가」)은 기분에 휩싸인다.  두렵고 슬픈 마음에 무너져 내리는 시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광장에서 만난 동료들이다. 슬퍼하는 시인에게 전해진 체온과 전달된 언어(「생일 세계 공원」) 그리고 그림자(「모르는 일들로부터」) 등 동료들에게 받은 것들은 시인을 허무의 파도에 쓸려가지 않게 하는 안전망이 된다. “파도보다 오래” 화자를 끌어안는 포옹을 통해 시인이 낙담과 허무에 잠식되지 않고 일어날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가지처럼 빛처럼 단단하고 부드럽게” 서로를 안아주는 연대는 약하지 않다. 서로의 고통까지 보듬어줌으로써 희미할지언정 끊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동하는 궤적들의 묶음으로서 우리의 ‘함께 내던져져 있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8)이라면,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우리가 ‘지구에’ 함께 내던져져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윤은성이 보여주는 장소들에서 우리는 모두 몫 없는 자들이 된다. 사회가 정한 계급, 성별, 종차를 넘어 우리는 무너져가는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에 속한 자들 The Earthbound’9)이 되고 그제야 우리는 몫 없는 자들의 슬픔을, 언어가 없는 이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을 견디고 묵묵히 기도하며 나아가는 시 앞에서 나는 기꺼이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서 있는 자리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며(「구름이 있는 광장에 모여서 우리는」) 곧은 마음으로 걷는 시인과 다양한 생명체들을 잇는 광장에서 만나고 싶기에. 시인이 그리는 안전한 미래에 멸종하지 않은 우리가 있기를 바란다. 1)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상실』, 김덕현 외 옮김, 논형, 2005, p. 25. 2) 프랑코 만쿠조 외, 『광장』, 장택수 외 옮김, 생각의나무, 2009, p. 5. 3) James J. Paxon, 『The Poetics of Personific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 13. 4) 자크 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08, p. 11. 5) 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p. 48, 64, 68~69. 6) 프랑코 만쿠조 외, 같은 책, pp. 6, 19. 7)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녹색 계급의 출현: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이규현 옮김, 이음, 2022, p. 13. 8) 도린 매시, 『공간을 위하여』, 박경환 외 옮김, 2016, 심산, p. 284. 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p. 124.

계간 문학과사회 황사랑 배수연윤은성공간장소광장연대랑시에르 2025
황유지 어떤 이야기는 쓰여지지 않는다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월간 현대문학 황유지 그림자애도일상취향강화길명학수홍성욱빔벤더스 2025
황유지 사랑은 슬라임처럼 1인칭 슬픔을 두고

그런 염려를 한다. 나의 공감이나 이해가 뜻하지 않은 폭력을 포함하고 있지나 않을지. 해석의 욕망이 문학을 비좁게 만들지나 않을지. 부러 애써 덮어두었던 마음을 까불리고 파헤쳐 남루하게 만들지나 않을지. 그러나 염려는 금세 불식된다. 발화를 언어화라는 상징계의 지적 작업을 통과하는 일로, 발설을 입 밖으로 마음을 꺼내놓고자 하는 어쩌지 못하는 열망이라는 정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발화 이전에 뭉근히 부풀어져 끓어 넘치고자 하는 발설의 욕구가 문학의 안쪽에는 틀림없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글은 발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생존을 위한 기술(技術), 생존에 대한 기술(記述)이기도 하다. 살려고, 살기 위해 쓰는 것이다. 유수연의 시만큼 오직 정념으로 넘실대는 시가 또 있을까. 사람의 에너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고 할 때 그 화살은 안에서 밖으로 또는 그 반대로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내부를 향해 운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가 닿는 단어는 침잠쯤일 텐데, 내부로 파고드는 이 에너지는 일상에서 사람을 감추는 방식에 가깝겠지만 시에서라면 이보다 자신을 전면화하는 방식도 없겠다. 그러니까 그는 “진심을 들키고 싶었다”(「생각 담그기」, ①)1)는 것이다. 그가 들키고 싶은 이 에너지의 실체는 바로 슬픔이다. 시집에는 슬픔이 내내 노크한다. 내심 드러내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토록 감정에 깊숙이 젖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담은 게 나를 말한다”(「생각 담그기」,①)는 시인에게 그릇의 모양이야 하마 어떤 것으로든 변하는 것, 그러니까 그에게 감정이란 차라리 인식과 긴밀하고 그 반대편에 육체성은 자리한다. 어떤 날에는 그나마 손에 쥠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고자 하기도 하지만(“서로의 것을 만져 간신히 살아 있음을 느낀 날”) 그럴 때마다 번번이 애인의 등만 보았던 셈이다(“같이 누웠지만 등을 돌리고 자다 깨는 날”,「새로운 일상」,①). 그런 감정이 그릇의 내용이면서 그 모양을 결정하는 가치인 반면 몸은 어쩐지 죄책감과 결부된다. 몸이란 “배가 고프면 슬퍼지고 저녁노을만 봐도 누군가 보고 싶다 착각하게 되”(「조가만가」,①)는 식이라, 배고프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건 종국에 압도하는 그리움을 이길 자신이 없다는 뜻일 테다. 무엇이 이토록 두려운가? 죄책감의 모양새로 오는 두려움은 어떤 면에서는 종교에 밑그림을 둔 것처럼도 보인다. “교복을 입은 채 죽음을 작정했던 이유는/ 들키고 싶지 않은 일로” 두겠다는 고백은 “생각으로 지은 죄는 모두 용서받고 싶었다”(「그림자」,①)는 간곡함에 닿는다. 어떤 종교에서는 자살과 낙태, 동성애 같은 것을 죄의 세목에 둔다. 소년의 죄가 죽음의 작정에 있는지 죽음충동에 이르게 한 일에 있는지 혹은 그 이후에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라도 구원을 구해보려 애쓰는 모습((「온라인 열반」,②)2)만은 삶의 안간힘 쪽에 방점을 찍는다. 분명한 것은 그에게 죄책감을 안기는 것 역시 슬픔이나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죽음에 의한 상실이거나 이별에 의한 상실, 그건 나의 탄생과 직결되는 이일 수도 있고 나와 연인이란 이름으로 연결되어 있던 이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첫 번째 시집에 가득한 죽음의 이미지 중 바다로 가라앉는 어린 죽음은 기시감을 드리우며 살아있는 자의 슬픔을 추동한다. 손아귀에 돌돌 말아 소복이 담아내는 국수 한 그릇에서 동그랗게 손을 잡는 아이들과 놀란 눈동자를 떠올리는 것은 흔히 국수가 생명줄을 상징한다는 믿음의 반대편에서 깊숙이 가라앉고만 죽음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내가 본 가장 슬픈 정수리”가 “놀란 눈동자”(「개평」)란 말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젖혀 가라앉음으로부터 두 눈을 부릅뜬 최후의 순간을 국수 그릇에 동동 띄운다. 그럴 때 남은 자의 삶이란 타인의 몫에서 공으로 얻은 일부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애초 “나의 형제는 배다른 슬픔”(「기쁨 형제」,①)이라는 말에는 나의 존재 역시 슬픔이라는 전제가 도사린다. 그러니 이 시인은 슬픔의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자체가 슬픔이고, 그에게 들어오는 것이 슬픔이 된다. 도처의 슬픔을 내버려 둘 수가 없다. 이를테면 ‘슬픔-되기’. 우리는 이걸 1인칭 슬픔이라 부르기로 하자. 화자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슬픔이 된다. 화자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슬픔을 남겨놓고 빠져나간다. 그렇게 1인칭 슬픔은 점점 더 견고해진다. “슬픔이 바나나보다 빨리 익”어서 “한 겹 까기 전에 으깨진다”. 짓무른 슬픔은 “믹서에 집어넣고 꿀을 한 바퀴 돌”리니(「슬픔이 익을 동안 나눠 잊을까요」,①) 걸쭉해진다. 이런 순간에 슬픔이라는 감정은 바나나 셰이크의 이미지로 흘러내린다. 유수연의 시에는 이렇게 감정이 물성을 띠는 순간이 있다. 기분이나 느낌, 정동이나 정념 등으로 불러야 할 감정(의 잔여물)들이 물질로 변형되는데, 이 물질화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마치 슬라임slime을 닮았다. 유동성이 있는 끈끈한 물질의 총칭인 슬라임은 점균류를 뜻하기도 한다. 미생물이 군집을 이루어서 큰 유동적 유기체를 형성한 것 말이다. 그러니까 유수연의 슬픔은 슬라임화 되며 물성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생명체로 재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슬픔은, 응당 자라난다. 우리는 우리는 방류하기로 한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거기에 홀로 있고 당신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나도 다음 열차로 올라갔습니다 좌석은 매진되어 전철을 타고 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껴서 답답하게 올라가니 슬픔보다 더위가 나를 지배했습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는 것에 먼저 반응합니다 땀흘려 이룬 모든 일이 허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사랑이 먼저 흘러가버렸네요 흐름의 시작을 찾을 수 없는 유수와 같은 시절이었습니다 -「소양강 소로우」,②부분 흐르는 물에 훌훌 풀려 떠내려가 버린 사랑도 그런 모양새다. 당신은 먼저 서울로 가고 나는 거기에 있다가 곧장 뒤따르지만 그 짧은 간극은 서로를 찢고 사랑을 흩트려 놓는다. 이 시에서 소양강은 잃어버린 사랑의 모습을 하고 한 덩어리로 출렁인다. 소양강이 한 덩이 슬라임의 모양으로 가만히 출렁일 때 그 출렁임이 소리 없이 흐느끼는 어깨의 움직임을 닮은 건 그가 흘러가 버린 사랑을 ‘유수’에 대비시키고 그러한 인연(緣)의 숙명을 자신인 양 일체화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제목을 ‘유수연’으로 바꾼 들 어색함은 없는 것이다. 이 조로한 슬픔을 어쩌나. 그런가 하면 시집에 보란 듯이 넘쳐나는 것 또한 사랑이다. 사랑과 행복이 이토록 열렬하게 말해지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랑과 행복은 썩 달콤하지 않다. 우리는 이제와 실컷 발화되는 사랑에 대한 열쇠를 첫 번째 시집의, “서사 없이도 사랑은 가능하다”(「유지」,①)는 문장으로부터 얻어올 수 있다. 인간의 행위와 관련되는 사건을 언어적으로 재현하는 사실적 기록 양식이라는 ‘서사’가 없다는 것을 문맥에 맞게 한 단어로 교체하여 문장을 다시 쓰자면 ‘이 사랑은 사후적이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유수연의 시에 그토록 넘쳐나는 사랑은 서사가 불가능한 종료, 사건의 종결과 대상의 부재로부터 비롯되는 후경인 것이다. 시의 발화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성’에서 비롯한다는 신형철의 말처럼, 이 시인은 내내 어쩔 수 없음을 발화한다. 어쩔 수 없어서 발설한다. 그에게 사랑의 종결이란 아직 오지 않은 일로, 그건 차라리 너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에게 사랑은 금세 사라지곤 하는 느낌이 아니다. 사랑은 느낌이 아닙니다 갈증과 배고픔은 느낌이에요 해결하면 사라지는 것 사랑은 사라지지 않아요 -「행복1」,②부분 느낌이라는 층위에서 나와 너는 대체로 타자라는 신형철의 말을 좀 더 당겨오면, 그저 나는 나이고 너는 너라는 느낌만 있을 뿐이고, 사랑이란 느낌의 세계 안에서 드물게 발생하는 사건일 거란다. 느낌의 세계 안에서 서로가 구성하는 공동체인 사랑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랑이란 사건은 서로의 느낌 안에서 그 찰나의 조우를 찾아내는 가능성에 대한 능력인 셈이다. 다시 시로 돌아와, 시인은 이 정의 안에서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고 홀홀하게 빛나는 고독을 그물 안에 남는 물고기처럼 떠올린다. “내 마음도 통과되는 줄 알았는데/ 여과하고 남아버린 게 있”(「정중하게 외롭게」,②)다. 그래서 나는 남고 너는 없다. 사랑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그 느낌을, 너는 네가 나를 사랑하는 그 느낌을 각자 느끼면서 그 느낌으로 마주치는 아주 짧은 그 순간의 발견, 그 사랑을 유수연식으로는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애인」,①)로 다시 쓸 수도 있겠다. 시인은 이미 “내 몸을 초과하는 마음이 너무 많아”(「수련이 피기까지」,①) 죄가 되는 사랑을 놓쳐버리기로 했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더니(「고백」,①)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나 못 헤어지겠어, 나 아직 안 헤어졌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 “같은 슬픔만 계속 채워내는 중”이다(「종 다양성 슬픔 무성히」,②). 그러니 두 번째 시집에 와서 그의 사랑은 가능성으로 열려있다기보다 일말의 가능성마저 폐기함으로써 되레 자유로워진다. 마음껏 사랑 이후의 사랑을 발화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도 소용없다. “여태 나가지 않”을 줄 몰랐기에(「당기시오」,②). 그리고 그런 게 사람의 사랑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사랑은 밖에서 와 내 안에 있다가 어느 순간 바깥을 향해 홀로 걸어 나간다. 손바닥 사이로 몸을 늘어뜨리며 스르르 흘러버리는 슬라임처럼 사랑은 어느새 내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 사랑은 그렇게 남겨지지도 않고 그러쥘 수도 없다.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일을 그렇게 오래 시킬 줄은 몰랐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을 생각으로 일을 했는데 너무 오래 하다보니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두릅을 두고 왔다 약수를 지날 때쯤 알게 되었다 두릅에 대한 걱정보다 두릅을 두고 올 수밖에 없게 한 일들이 계속 생각났다 왜 내가 두릅을 가져올 수 없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걸까 왜 내가 두릅을 먹을 수 없게 이런 일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일까 (중략) 철이 있는 것은 철에 먹어야 하는데 내일 회사에 가서 가져올게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되진 않겠지 그리 촉촉하고 생기 있던 것이 하루 만에 마르진 않겠지 -「두릅을 두고 왔다」,② 부분, 강조는 인용자 이 시는 첫 연, 첫 행에 떡하니 결론을 내놓고는 혹시 내일은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써 내려간다. 이 시의 첫 문장은 “하루 만에 먹지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는 현재완료형인 것이다! 이 능청스러움을 봤나! 생기를 잃어가는 두릅 앞에 오래 일하느라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 앞섰던 사정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일이 되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두릅이 더 시들 거라는 현상이 데려오는 엄정한 사실 뿐이다. 회사에 가서 가져와도 그건 먹지 못할 거다. 화자야말로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다. 시들어 가는 두릅에 포개진 사랑의 유효기간만이 그저 안타까워진다. 아름다운 사람이 더러운 마음을 가지지 못한 것을 참을 수 없다 더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름다우면 어떤 더러운 마음을 가졌는지 알아내고 싶다 이 진심을 너는 이해할 수 있지 서로 통하는 게 있으니 우리가 만나는 것을 남에게 들키지 않기로 했다 들키지 않는 동안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 같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약점을 만들고 싶었다 -「정말 너무 진심」 부분 이 시에는 기어이 너의 ‘약점’이 되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똬리 틀고 있지만, 다음 두 편의 신작시에는 모종의 다른 의지랄지 애쓰는 모양이 엿보인다. 특히 이 시에는 타자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들어앉아 있는데, 강조한 부분이 그 지점이다. 매달리는 건 아니야 버티는 건 더더욱 아니지 흔들렸어 끈 없이 달아둔 거 같아 넘어지지도 못하게 삼각지에서 그네 탔던 거 기억하지, 기억해주면 좋겠는 이야기를 고르고 골랐어 (중략) 거울 앞에서 춤을 출 수는 있는데 거울이 없어지고는 어떻게 추는 걸까 쟤들도 그러겠지 시는 어떻게 쓰는 걸까 나는 답할 수 있어 쓰다 보니 그냥 써지게 된다고 왜 내 입장을 넣으면 계속 사람이 이해될까 내가 여기 있는 게 내가 거기 없을 이유는 아니잖아 다시는 안간힘이라는 말은 쓰지 않을 거야 나도 흔들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부분, 강조는 인용자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흔들리는 건 지탱해주고 있다는 거”(「선선한 슬픔」,②)라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마리오네트처럼 누군가 정수리를 당겨주는 중인 걸까, 이 시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비비언 고닉은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인 역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면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여전히 마음은 ‘너’를 맴돌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제 그 마음을 조금 옮겨 너도 지금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을 균형을 잡는데 쓰고자 마음먹어 본다. 그러다 보면 시를 묻는 사람들과 시로 답하며 사람을 헤아려보게 될 것도 같다. 너도 숱한 사람들 중의 하나라고 치환해 보면 너의 마음도 하릴없이 이해될 날이 있을 것도 같다. 죽어도 준치가 아니라 썩어도 준치, 나를 원하는 이를 원하지 않는 것보다 얘만 나를 원하는 게 죽기보다 썩은 준치를 택한 것 같다 (중략) 다정한 사람 다정한 사람에게 다정히 말하는 게 잘못일 수도 있다는 다정한 사람에게 한 번 더 만날까요 익숙해지는 미안함을 미루지 못했다 오늘도 노고가 많았다 마무리가 마무리를 지으며 돌아간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날 기회는 있고,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오랜만에 문장에 밑줄을 긋고 품고 있던 느낌을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뒤집으며 작은 멍을 꾹꾹 눌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부분, 강조는 인용자 그 사랑이 너와 관련 없음을 표방함으로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새로운 시작은 그리 쉽지 않다. 노력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상하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사람은 그런 거라고”(「슬픔이 익을 동안 나눠 잊을까요」,②) 너는 말했고, “썩은 게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익어가기로”(「제철 행복」,②)한 적도 있다. 그런데 실은 “내가 먹지 못하는 건 썩은 것을 삭혔다 말하는 것들”(「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이다. 그런 증명을 위해 까치발을 들어온 관계라면 썩음을 인정하는 순간 끝장나기 마련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오직 과거의 너에게만, 너라서 가능했던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른 사람과 앉아 시도하는 이 시큰둥한 만남은 그러나 오래 품고 있던 마음을 이리저리 뒤적여보게도 한다. 도무지 적당한 마음으로는 쓸 수도 살 수도 없었을 그가 사랑을 궁구하는 방식은 이제부터 조금 달라질까? 영화 <오키쿠와 세계>(2023)에서 몰락한 무사의 딸 오키쿠가 아버지와 함께 제 목소리를 잃고 얻은 것은 공동주택의 인분을 수거하는 천민과의 사랑이었다. 잃으면서 얻는 이 관계는 영화 속에서 온통 ‘똥’으로 연결된다. 다소 찌푸려질지는 몰라도 어떤 물성은 관계를 잇고 감정을 이리저리 옮겨놓아 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물성은 그렇게 감정의 조작을 더러 돕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지를 못하는 마음을 지극히 밀어 붙여보는 건 살아보려고 그런다. 살기 위해 쓴다. “빈 괄호처럼 나 아팠다”(「종려」,②)는 말이 마음에 밑줄을 긋는다. 그 밑줄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얕게 긁힌 상처를 닮았다. 누구보다 슬픔도 사랑도 많은 이 시인의 빈 괄호는 결핍이기만 하지 않고 시를 써나가게 하는 웅숭그린 어둠, 발설을 기다리는 깊은 입이기도 할 것이다. 대신 앓아줄 수도 없는 그것은 슬라임처럼 나만 남겨놓고 빠져나간 사랑 뒤에 남은 1인칭 슬픔의 얼굴이다. 그에게 조물거리면 마음이 가라앉는다는 투명한 슬라임 하나 마련해주고 싶어진다. 1) 유수연,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창비, 2023. 본문 인용 시 시의 제목만 밝히고 시집명은 ①로 표기. 2)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젖어드네』, 문학동네, 2024. 본문 인용 시 시의 제목만 밝히고 시집명은 ②로 표기.

월간 현대시 황유지 유수연정념사랑슬픔1인칭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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