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조시학 2024년 봄호(제90호)
푸른 언어가 들려주는 삶의 균형
김현장 시인은 2022년 중앙일보 신춘시조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2020년 제12회 목포문학상 남도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23년에는 첫 시조집 『느루』를 발간하였다. 김현장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시어는 ‘푸르다’이다. 각각의 시편에 “푸른빛”(「겨울 아침에」), “푸른 눈”(「게르」), “쪽빛 하늘”(「빈집」), “푸른 문장”(「상처를 깁다」), “푸른 바탕”(「엇결」)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러한 푸른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
푸른색은 희망, 자유롭고 평등한 마음, 휴식, 안정 등을 의미한다. 김현장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희망과 자유, 휴식에의 의미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지치고 힘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김현장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희망은 일상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균형에서 엿볼 수 있다. 일상의 삶과 내면을 조화롭게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에 시인은 텅 빈 집을 보면서도 삶을 읽어내고, 상처를 통해서도 삶의 의미를 읽어낸다.
시는 시인이 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진술한다. 때문에 내적 의미는 은폐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좋은 시는 은폐와 드러내기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제 면모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견고한 언어와 균형 잡힌 시조의 리듬을 통해 김현장 시인은 현대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또 현대인들의 삶에 정신적 위안을 주고자 한다.
금기의 문장들 겨울 담을 넘어갑니다
물기 많은 무언의 바람 소리 방문 여닫고
결핍된 기억들마저 차갑게 말라갑니다
껍질뿐인 둥지 위 새살 돋듯 돋아나는
공평하게 지워져 간 슬픔의 시간들이
귀 안쪽 깊숙한 곳에서 공명처럼 울립니다
밤새 떨던 백구가 물고 온 아침 햇살
머뭇거리는 태양의 궁리를 바라보다
갈대숲 마른 덤불 사이 푸른빛을 퉁겨봅니다
― 「겨울 아침에」 전문
이 시에는 겨울 아침 풍경이 그려져 있다.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는 아침이다. 겨울에는 “금기의 문장들 겨울 담을 넘어”가고, “물기 많은 무언의 바람 소리 방문 여닫”는다. “결핍된 기억들마저 차갑게 말라”갈 정도로 겨울의 추위는 매섭다. 이와 같이 첫째수에서 겨울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둘째수에서는 차가운 시간들을 견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껍질뿐인 둥지 위 새살 돋듯” “슬픔의 시간들이” “공평하게 지워져”가고 있는 것이다. 늘 슬픔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힘겨울 것이다. 이 슬픔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삶의 마디가 되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셋째수에서는 겨울 밤, 밤새 밖에서 떨던 백구가 아침 햇살을 몰고 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햇살을 몰고 온다는 것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슬픔, 괴로움 등에서 벗어나 주어진 삶을 더 지혜롭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시인은 “머뭇거리는 태양의 궁리를 바라보다”가 “갈대숲 마른 덤불 사이 푸른빛을 퉁겨”본다.
시간의 경계를 지운 유목의 유전자가
초원 앞에 섭니다. 머리칼 헤집는 바람
습관성 탈골일까요?
손차양 끝
별을 봅니다
비스듬히 내려앉은 지구의 푸른 눈
초원 위 슬픈 중력이 뼈를 깎는 시간
남겨진 이야기들이
하얗게
날립니다
화석무늬 피어나는 저 단단한 대지에
초록의 얼굴로 앵글이 닫혀옵니다
내 몸에 피어나는 가시
빛살로
쏘는 아침
― 「게르」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몽골이다. 몽골에는 가축을 방목하여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이동하는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있다. 유목민들은 주로 가축과 함께 초원이나 반사막지대에 거주한다. 이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몽골의 전통 가옥인 게르이다. 게르는 구조가 단순하여 쉽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 이동 생활에 적합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몽골에서 많이 사용한다.
“시간의 경계를 지운 유목의 유전자가” “머리칼 헤집는 바람”이 부는 “초원 앞에” 있다. 초원 위에는 유목민들의 “남겨진 이야기들이/ 하얗게” 날린다. 유목민들의 삶은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인다. 길 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고, 한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불완전한 삶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주민들이 가축을 식량의 수단으로만 삼아 울타리를 치고 사육하는 것에 비한다면 또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유목민들은 가축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고,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점점 개인주의로 바뀌어가며 늘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삶과는 대조적이다.
“손차양 끝/ 별”, “지구의 푸른 눈”, “초원 위 슬픔 중력이 뼈를 깎는 시간”, “내 몸에 피어나는 가시/ 빛살로/ 쏘는 아침”의 시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몽골의 어느 초원 위에 있는 듯하다. 몽골의 초원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자신의 내력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들이 모여 햇살로 되비친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몽골을 몽환적이면서도 현존에 뿌리를 내린 장소로 재해석하여 보여주고 있다.
쪽빛 하늘
마당에 내려와 서걱인다
모두 떠난
기와집
잡풀만 쑥쑥 자라
앙다문 널판문 틈새로
다시 본다. 숨결을
― 「빈집」 전문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리면서 시골에 빈집이 많아졌다. 그러다 한때 역으로 귀농, 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시골 빈집들이 다수 채워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비어 있는 곳이 많다. 위의 시 「빈집」은 이처럼 텅 비어 있는 ‘빈집’에 시인의 공허한 내면을 이입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 속 배경이 되고 있는 빈집에는 텅 빈 마당에 잡풀만 무성할 뿐이다. 현재는 이 기와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한때는 기와집 아래 많은 식구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였을 것이나, 마당에 내려앉은 “쪽빛 하늘”과 “잡풀”만이 집을 지키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시인은 “앙다문 널판문 틈새로” 과거의 “숨결”을 “다시 본다”. 미약하게나마 과거의 온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시인은 일반적인 문법 순서를 바꾸는 도치를 사용하여 셋째수에서 ‘숨결’을 강조하고 있다. 빈집에 다시 온기가 돌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지금은 잡초만 있는 마당이지만 언젠가는 이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 “쪽빛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엊그제 난 상처 위 딱지가 앉았다
세균과 전쟁에서 승리한 백혈구에게
한 번쯤 정말 고맙다
말하고 싶은데
푸른 문장 사이로 완곡한 그늘이
균열된 담벼락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고요가 각질처럼 쌓여
아픔이 밀려오고
주름 접힌 발자국 모르는 척 따라가면
덜컹이며 흘러가는 네모난 시간들
칼 지난 물의 뼈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 「상처를 깁다」 전문
상황과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처가 나서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린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 한 번쯤은 생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도 상처는 피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엊그제 상처가 났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 위에 “딱지가 앉았다”. 백혈구가 “세균과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에 시인은 백혈구에게 “한 번쯤 정말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였다.
“푸른 문장 사이로 완곡한 그늘이/ 균열된 담벼락처럼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늘은 빛을 가려주어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에게도 그늘 즉, 쉼의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주름 접힌 발자국 모르는 척 따라가”보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덜컹이며 흘러가는 네모난 시간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에서 발견된 어느 한 순간이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어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삶의 고삘 늦춰봐요
둥우릴 거부하며,
생이 편마모로 지워져 가고있죠
몸에서 피는 단문의 말
거미줄에 넘어지죠
관계와 관계 사이
까칠한 목소리들
산채로 박리된 마음 허물 뒤 숨어들죠
휘어진 그 결을 따라
거친 호흡 돋아요
형태 잃은 무채색 구름
푸른 바탕에 해체되도
날카로운 촉수에 앙상한 미소는 남죠
한겨울 마른 가지로
민무늬 숲을 이루죠
― 「엇결」 전문
대패질을 할 때 결이 매끄럽게 밀리는 쪽을 ‘순결’이라 하고, 거스러미가 일어나 엇나간 결을 ‘엇결’이라고 한다. 시인은 엇나가 있는 나무의 결을 인간관계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예상하지 못하였던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까칠한 목소리들”과 대척해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럴 경우에는 맞서서 대응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삶의 고삘 늦춰”보라고 권한다. “생이 편마모로 지워져 가고” “몸에서 피는 단문의 말”은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여기에서 끝은 아닐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셋째수에서 발현된다. “날카로운 촉수에 앙상한 미소는”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 미소는 “한겨울 마른 가지로”나마 “민무늬 숲을” 이루어 삶을 다시 이어나가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김현장 시인의 시를 살펴보았다. 김현장 시인의 시에는 일상에서 포착된 삶의 언어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이 삶의 언어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언어예술이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언어라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김현장 시인의 언어는 대상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한 언어가 아니라, 대상을 순간적이고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상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의 언어가 잘 구사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깨우침의 사유방식에 도달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시조는 정형 미학이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고도의 압축과 절제 속에서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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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마음." 대관절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관데 그렇게 '마음' 앞에 가로놓인 괄호 안을 자꾸만 헤집고 기웃거려보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는 것일까. 마음 앞에서 여전히 체계적일 수 있다고 단단히 오해 중인 나. 그렇게 점점 더 체계적으로 오인되는 마음의 세계. 그 괄호를 특정한 하나의 마음으로 기입하기가 도리어 난망해진다. 마치 「춘향이 집 가리키기」의 화자가 "'나는'으로 시작"하여 '나'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 속, 술어의 배합에 의해 숱한 가능성들로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나에게 나를 내"밀고 "되돌려받"고 있는 것처럼, 이 '마음'들도 자기 자신을 여러 줄 쓰고 또 거듭 지우며, "나는 / 나는 있다 / 나는 여기 있다"를 반복 중인지도 모른다. 말 없는 새 인간과 말하는 기계 인간을 지나, 죽어서도 말하는 귀신까지 지나쳐 온 시인이라면, 어쩐지 호랑이와 도깨비가 등장하는 전래 동화나 불가사리 설화 같은 초인과론적 테마를 경유해 시를 건네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방점은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요소를 유연히 패러디하여 펼쳐낸 타령의 재해석에 찍혀야 할 것 같다. 이 젊은 시인이 고전을 해체해 새로운 고전을 고안하며 겨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립각을 세워 세련되고 깔끔한 여과물을 건져내는 일보다, 역으로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켜 그녀만의 독특하고 혼종적인 오늘의 오드라덱을 건져내는 일이었을 테니.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를 잊어보아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김복희 시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가끔 그 시의 견고한 짜임을 벗어나 일상의 비근한 곳에 한번 가보아도 좋다는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사물과 제재의 맹아와 뿌리를 해체 중인 시인이 생의 풍부함을 제시할 자리일지 모르니까. * 「불가사리가」에는 오로지 침묵으로 말해지는 존재인 '불가사리'가 그 제재로 등장하고, "나에게 성 없다면 무엇 이어지랴" 물음을 던지고 있는 화자 '나' 역시 출현한다. 그런 '나'의 진술로 범박하게나마 유추하건대, '나'는 성(性)이자 성(姓)이라는 중의적 '성'의 연쇄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해보며, "다른 꾀 낸다"는 차원에서 기왕의 민간 설화 속 불가사리를 그 상상에 결합해내려는 듯하다. 불가사리가 환경조건에 따라 자기 생식법을 조정하고 자연적 성전환에 의해 유·무성 생식의 경계를 무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타령과 함께 입안에서 불가사리를 퉤 뱉어내는 '나'는 기실 '성'을 없애려는 기획을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주체인 셈이다. 기존 설화 속 승려의 밥알로 빚어진 불가사리가 쇠를 먹고 거대한 몸집의 '불가살'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각종 문명의 수단들을 삼킨 혼종적 존재로서의 불가사리가 탄생하는 과정과 동궤를 그리며 김복희 시 안에서 전유된다. "꾀바른 불가사리"에 대한 타령이 시작된 후 불가사리는 자연·문화의 어렴풋한 경계뿐 아니라 성분화 이전의 태곳적까지 넘나드는 시간 축 위에서 숱한 문명의 지표들을 삼키는데, 화자는 이러한 불가사리를 깡깡 부수려는 사람들을 보며 잘못의 근원이 단지 '불가사리'인지 아니면 거대한 혼종적 존재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한 '나'인지를 묻는다. 그러다 문득 "성 없어도 사는데 / 아무 지장 없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생존 양식을 긍정하고, 동시에 "죽을 수 있어서 신통하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영생에 대한 연민을 보탠다. 요컨대 성분화 이전과 이후로 분기되는 모든 존재 양식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양자를 향한 긍정과 다독임을 하나의 '가' 형태로 번갈아 펼쳐내는 것이다. 또한 제목부터 동명의 속담을 내건 「밤비에 자란 사람」은 연한 밤비를 맞고 자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재해석을 예고한다. 이때 차용되는 제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인데, 그 도깨비는 으레 우리 관념 속 위용 넘치는 모습은커녕 어째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고 있는 초라한 행색이다. 그 가방 안에는 "당신을 걸고 씨름을 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하루치의 시간이 담겨 있고, 그 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 원하는 것"이라는 점은 기실 작중의 도깨비가 계절을 관장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아프고 연한 이들도 도깨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샅바를 잡고 씨름하"노라면 어느 순간 "씨름이 다 뭔지" 싶어질 것이고, 도깨비의 조화 안에서 비로소 "아픈 계절 사라지고 도깨비불 무성한 날"이 올 거라 한다. 즉 도깨비와 화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타령은 기존 도깨비의 용맹함과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계절 바뀔 때 / 더 아픈 사람들", 그리고 "밤새 기침하"는 마른 존재들의 "기침 따라 후렴하는" 양태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령'이라는 양식의 반복적 등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하나의 긴 구전 서사를 너스레나 타령 형태로 엮고 민담적 삽화를 구수한 언어로 우려내는데, 그 안에는 남북한 상공을 지나가는 산타랄지, 밤비에 자란 말라깽이 도깨비랄지,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호랑이와 같이 '환상적인 제재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패러디'나 호의를 베풀다가 살의에 노출된 곰의 이야기나 불가사리 노래와 같이 '환상적이지 않은 제재의 환상적인 것으로의 패러디'가 가득하다. 물론 그 제재들의 속성이나 의미의 파악이 선결되지 못할 경우 이 영리한 설계가 무용해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 비틀린 와중에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곡진한 시적 대상들의 '마음'이 비춰질 때, 독자들은 기계적인 호기심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그 유쾌하고 정감 있는 활동 그 자체에 이끌려 가게 된다. 특히 그 개별적 마음의 주관성이 집요하게 관조될 때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은 시인이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그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알려는 '조심(照心)'의 태도이다. 마음은 형태도, 질감도, 파동도, 이름도, 소문도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데, 조심은 이러한 마음을 '비추는' 또 다른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은 어쩌면 어떤 윤리의 영역보다 말 그대로 마음의 실상을 비추어 보려는 미적 영역에 가까운 셈이다. * 그런 김복희식 전유의 서막을 여는 「장타령」은 한국판 집시이자 악사(busker)의 전신이었던 '각설이'의 타령을 시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본 것이겠다. "각설이 온 마을 온 집 구걸하듯 / 시작하겠다"고 자신의 등장 목적을 알리며 시작되는 타령은 기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에 내포된 일방향적 관계를 비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이인 '나'가 '너'의 곳간을 개방하라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보리알"과 "깨끗한 잠"처럼 초라한 것에 불과할지언정 '나' 역시 네게 개방할 인심이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고기」 또한 속담 '까마귀 고기 먹다'의 유래를 해부 중인데, 그건 염라가 저승사자 강림에게 부친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까마귀가 강림에게 향하던 도중 탐스러운 말고기에 사로잡힌 바람에 존재들의 생사가 선입선출 아닌 무작위의 원리로 바뀌게 된 일화이겠다. 여기서 시인의 해체적 상상력이 뻗어 나가는 곳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추동된 까마귀의 실수로 인해 "아무 비둘기나 거두어 가"는 것을 제 상숫값으로 취급하게 된 '죽음'의 원리를 시정해보려는 자리에 있지 않다. 단지 이 생과 사의 딜레마적 순환 안에서 내일이 담보되지 않은 존재들의 연약한 생이 어떻게 "오늘 본 아름다운 것"과 "오늘 본 귀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 초점해보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작은 부리로라도 무언가를 먹겠다는 생의 의지를 보며 차라리 그 "강냉이"를 "더 잘게 부숴 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같이 살아가 보려는 것 같다. 강림의 적패지 안에 "이제 없는 비둘기가 / 그려져 있는" 광경을 "오늘 본 / 아름다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보려는 것도. 그뿐만 아니다. 「나는 새에게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할 수 없음」 속 화자는 "딸기 한 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자코 본다". "집중해서 조금만. / 조금만 더" 관찰한다. 은근과 끈기의 관조 다음, 화자는 어렵사리 "딸기는 파리하고 여위고 마르며 닫고 막고 막힌 과일"이라 나열한다. 이때 딸기를 설명하는 수과(瘦果, achene)의 어원 '카이네인(χαίνειν, khaínein)'이 입을 크게 벌리는 행위에서 유래하였듯, 화자는 딸기를 '수과'로 취급하기 위해 "한 입을 갖추어 / 내민다". 그리고 "혀에게 지고 이에게 지는 단단한" 그것의 미덕처럼 딸기를 "새가 먹을 수 있게 조금" 남겨두기로 한다. 이때 딸기는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온 것(which is coming)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론 화자의 관찰에 의해 '딸기'를 이루는 낱낱의 속성을 합쳐야만 오는 '온 것(the whole thing)', 즉 '전부'의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섬세함은 장악 또는 파악의 욕망보단 인간의 한계에서 그 제재에 어떻게든 닿아보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로 읽혀야 한다. 당장 「부처님 가운데 토막」 속 "아무리 쓸어도 만져지지 않"는 "갈피 안의 몇 글자"를 헤아려보려는 화자가 바로 그 모델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갈피'는 "건드릴 수 있"을지언정, 채 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라는 진술은 엄연히 "손끝에 걸리던 것"들의 '갈피'를 최대한 섬세히 살펴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어쩐지 "오늘 만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개 허리를 "살살 더듬"으려던 아이의 자세와 닮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복희의 많은 시적 대상들은 자기 의도와 실제 행위가 초래한 영향 간의 낙차로 인해 숱한 탄식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곰의 친절」 속 곰은 작은 토끼를 돕고 싶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단순한 호의가 상대를 죽이는 살의가 됐다나 뭐라나. 에세이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속 호랑이 된 남자 역시 엉겁결에 "아내를 죽이고 노모마저 죽인 살인자", 아니, 살인 호랑이가 되어버렸다나 뭐라나. 이렇게 호랑이 담배 연기 뒤로 흩어지는 설화와 함께 흘러 들어온 시인의 질문 "여기서 호랑이 됨은 일종의 은유일까요"의 의미만은 가볍지 않은 것이라, 부유하지 못한 채 다만 무겁게 침전될 뿐이다. 그 낙차는 「하려던 말의 반만 하는 모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중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세계는 온통 말로 이뤄져 있어 몹시 험한 곳인데, "말 흘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그림자를 지고 따라오는 존재들"이 툭 튀어나온단다. 그래서 존재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최선 같은데, 막상 존재들은 "그림자를 밤에 숨겨서라도 세상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어" 하고, 빛도 안 드는 비 오는 날 굳이 밖으로 나가 "살아 움직이려고 냄새 풍기려고 / 마음 움직이려고" 한단다. 이렇게 재차 화자의 선의를 좌절시키는 존재 본질의 속성이 괴리로 발현될 때, 화자는 존재를 존재로서 만드는 장소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지, 그리고 "생각 속에도 세상이 있"긴 한 건지 질문하다가, 결국 "망아지 송아지 강아지는 어디로 올까"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제목처럼 '하려던 말'의 절반만 내뱉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마음이라는 내부에 간직해 은밀히 보호하려는 노력과, 온전히 통제되지 않고 바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존재를 속수무책 물끄러미 바라봐주려는 노력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복희의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존재들이 거니는 "계절과 계절 사이"는 사실 그 미지의 기표 틈으로 연약한 너와 내가 갈피갈피 교통하는 공간이자, 서로를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진 장소 아닐까. 그 공간과 장소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일 테다. 이 마음들은 수많은 괄호에 의해 부연될 수 있는 공백이면서, 동시에 어떤 확률에선 전혀 설명될 수 없는 영원 미결의 공백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김복희의 글에서 "아 이 마음"이 노래화되어 의미 없는 여음구로서 각각의 타령들을 하나로 집합시키는 hook처럼 기능하고 있는 이유이다. 음성적 효과를 보존한 대신 의미만은 비워놓아 갈 길 잃은 마음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곳. 어딘가로 직접 향하고 싶긴 한데 결정적으로 그 접근법을 잃어버린 어떤 마음이 "아 이 마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마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니까. 조심도, 무심도 아닐 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백애송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방식이 파생되면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김범렬 시인의 시는 당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탄탄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깊은 사유를 환기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정 또한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들을 모든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듯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탄주(彈奏)되는 삶의 풍경 여름 한낮 탄주한다, 소낙비 오락가락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 경계 긋고 난센스 불가촉천민 간담 그리 서늘케 한.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 빠끔 낯 비춘다. 내로남불 청개구리 부르튼 입술 띄울 무렵 우화를 마친 쓰르라미 자연섭리 깨우친 듯. 말모이를 섬긴 걸까, 노랫말 줍는 그들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듣는 너나 나나 간절히 간구하는가, 목 떨구는 해바라기. 하늘 문 열고 닫는 해거름 멈칫 선다. 세상 물정 어둔 친구 금싸라기 안겨줄까?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마을 어귀 줄을 잇고. ― 김범렬, 「여름 한낮 판타지아」 전문 “여름 한낮”의 풍경은 가야금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힘차게 “탄주(彈奏)”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한여름의 날씨는 오락가락 소낙비를 뿌리며 변덕스러운 기운을 드러낸다. 이 소낙비는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을 경계로 삼아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은 경계로 구분된 계급사회와 신분 차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난센스”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로남불 청개구리”와 같은 고단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섭리 깨우친 듯” 흘러가는 “우화”의 시간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쓰르라미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랫말 줍는 그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들으며 “간절히 간구”할 수 있다. “세상 물정 어둔” 순수한 이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는 여전히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줄을 잇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 시는 여름의 한낮 풍경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빗대어 보여준다. 여기에 ‘판타지아(fantasia)’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배곯을까,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 검붉은 놀 드리울 즘 그 무슨 경종 울리나, 명치 끝 때리는 바람.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군다. 번개 배달된다기에 배꼽시계 수선 떤 날 아뿔싸! 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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