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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조시학 | 2024년 봄호(제90호)

푸른 언어가 들려주는 삶의 균형

백애송 문학평론

2016년 『시와 시학』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평론집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말』, 『트렌드 포에트리, 틈의 계보학』, 연구서 『이성부 시에 나타난 공간 인식』이 있음.

김현장 시인은 2022년 중앙일보 신춘시조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2020년 제12회 목포문학상 남도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23년에는 첫 시조집 느루를 발간하였다. 김현장 시인의 시를 관통하는 시어는 푸르다이다. 각각의 시편에 푸른빛”(「겨울 아침에」), “푸른 눈”(「게르」), “쪽빛 하늘”(「빈집」), “푸른 문장”(「상처를 깁다」), “푸른 바탕”(「엇결」)의 이미지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러한 푸른 언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은 무엇일까.

푸른색은 희망, 자유롭고 평등한 마음, 휴식, 안정 등을 의미한다. 김현장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희망과 자유, 휴식에의 의미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지치고 힘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김현장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희망은 일상의 삶에서 찾고자 하는 균형에서 엿볼 수 있다. 일상의 삶과 내면을 조화롭게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에 시인은 텅 빈 집을 보면서도 삶을 읽어내고, 상처를 통해서도 삶의 의미를 읽어낸다.

시는 시인이 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진술한다. 때문에 내적 의미는 은폐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좋은 시는 은폐와 드러내기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제 면모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견고한 언어와 균형 잡힌 시조의 리듬을 통해 김현장 시인은 현대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또 현대인들의 삶에 정신적 위안을 주고자 한다.

 

금기의 문장들 겨울 담을 넘어갑니다

물기 많은 무언의 바람 소리 방문 여닫고

결핍된 기억들마저 차갑게 말라갑니다

 

껍질뿐인 둥지 위 새살 돋듯 돋아나는

공평하게 지워져 간 슬픔의 시간들이

귀 안쪽 깊숙한 곳에서 공명처럼 울립니다

 

밤새 떨던 백구가 물고 온 아침 햇살

머뭇거리는 태양의 궁리를 바라보다

갈대숲 마른 덤불 사이 푸른빛을 퉁겨봅니다

― 「겨울 아침에전문

 

이 시에는 겨울 아침 풍경이 그려져 있다.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 일상으로 복귀하는 아침이다. 겨울에는 금기의 문장들 겨울 담을 넘어가고, “물기 많은 무언의 바람 소리 방문 여닫는다. “결핍된 기억들마저 차갑게 말라갈 정도로 겨울의 추위는 매섭다. 이와 같이 첫째수에서 겨울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둘째수에서는 차가운 시간들을 견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껍질뿐인 둥지 위 새살 돋듯” “슬픔의 시간들이” “공평하게 지워져가고 있는 것이다. 늘 슬픔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삶을 살아가는 일이 힘겨울 것이다. 이 슬픔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삶의 마디가 되어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셋째수에서는 겨울 밤, 밤새 밖에서 떨던 백구가 아침 햇살을 몰고 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햇살을 몰고 온다는 것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슬픔, 괴로움 등에서 벗어나 주어진 삶을 더 지혜롭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에 시인은 머뭇거리는 태양의 궁리를 바라보다갈대숲 마른 덤불 사이 푸른빛을 퉁겨본다.

 

시간의 경계를 지운 유목의 유전자가

초원 앞에 섭니다. 머리칼 헤집는 바람

습관성 탈골일까요?

손차양 끝

별을 봅니다

 

비스듬히 내려앉은 지구의 푸른 눈

초원 위 슬픈 중력이 뼈를 깎는 시간

남겨진 이야기들이

하얗게

날립니다

 

화석무늬 피어나는 저 단단한 대지에

초록의 얼굴로 앵글이 닫혀옵니다

내 몸에 피어나는 가시

빛살로

쏘는 아침

― 「게르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몽골이다. 몽골에는 가축을 방목하여 목초지를 찾아다니며 이동하는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이 있다. 유목민들은 주로 가축과 함께 초원이나 반사막지대에 거주한다. 이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몽골의 전통 가옥인 게르이다. 게르는 구조가 단순하여 쉽게 분해하고 조립할 수 있어 이동 생활에 적합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몽골에서 많이 사용한다.

시간의 경계를 지운 유목의 유전자가” “머리칼 헤집는 바람이 부는 초원 앞에있다. 초원 위에는 유목민들의 남겨진 이야기들이/ 하얗게날린다. 유목민들의 삶은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다르게 보인다. 길 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고, 한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불완전한 삶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주민들이 가축을 식량의 수단으로만 삼아 울타리를 치고 사육하는 것에 비한다면 또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유목민들은 가축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고,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점점 개인주의로 바뀌어가며 늘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의 삶과는 대조적이다.

손차양 끝/ ”, “지구의 푸른 눈”, “초원 위 슬픔 중력이 뼈를 깎는 시간”, “내 몸에 피어나는 가시/ 빛살로/ 쏘는 아침의 시어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몽골의 어느 초원 위에 있는 듯하다. 몽골의 초원 위에서 별을 바라보며 자신의 내력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들이 모여 햇살로 되비친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몽골을 몽환적이면서도 현존에 뿌리를 내린 장소로 재해석하여 보여주고 있다.

 

쪽빛 하늘

마당에 내려와 서걱인다

 

모두 떠난

기와집

잡풀만 쑥쑥 자라

 

앙다문 널판문 틈새로

다시 본다. 숨결을

― 「빈집전문

 

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리면서 시골에 빈집이 많아졌다. 그러다 한때 역으로 귀농, 귀촌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시골 빈집들이 다수 채워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비어 있는 곳이 많다. 위의 시 빈집은 이처럼 텅 비어 있는 빈집에 시인의 공허한 내면을 이입하여 보여주고 있다.

시 속 배경이 되고 있는 빈집에는 텅 빈 마당에 잡풀만 무성할 뿐이다. 현재는 이 기와집에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한때는 기와집 아래 많은 식구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였을 것이나, 마당에 내려앉은 쪽빛 하늘잡풀만이 집을 지키고 있는 현재의 모습에서 쓸쓸함이 묻어난다.

하지만 시인은 앙다문 널판문 틈새로과거의 숨결다시 본다”. 미약하게나마 과거의 온기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시인은 일반적인 문법 순서를 바꾸는 도치를 사용하여 셋째수에서 숨결을 강조하고 있다. 빈집에 다시 온기가 돌기를 바라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다. 지금은 잡초만 있는 마당이지만 언젠가는 이 마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 쪽빛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엊그제 난 상처 위 딱지가 앉았다

세균과 전쟁에서 승리한 백혈구에게

한 번쯤 정말 고맙다

말하고 싶은데

 

푸른 문장 사이로 완곡한 그늘이

균열된 담벼락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고요가 각질처럼 쌓여

아픔이 밀려오고

 

주름 접힌 발자국 모르는 척 따라가면

덜컹이며 흘러가는 네모난 시간들

칼 지난 물의 뼈 사이로

감쪽같이 사라지는

― 「상처를 깁다전문

 

상황과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처가 나서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린다.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 한 번쯤은 생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도 상처는 피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엊그제 상처가 났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 위에 딱지가 앉았다”. 백혈구가 세균과 전쟁에서 승리한것이다. 이에 시인은 백혈구에게 한 번쯤 정말 고맙다말하고 싶은데그러지 못하였다.

푸른 문장 사이로 완곡한 그늘이/ 균열된 담벼락처럼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늘은 빛을 가려주어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시인에게도 그늘 즉, 쉼의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주름 접힌 발자국 모르는 척 따라가보고자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덜컹이며 흘러가는 네모난 시간들감쪽같이 사라지는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삶에서 발견된 어느 한 순간이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어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삶의 고삘 늦춰봐요

둥우릴 거부하며,

생이 편마모로 지워져 가고있죠

몸에서 피는 단문의 말

거미줄에 넘어지죠

 

관계와 관계 사이

까칠한 목소리들

산채로 박리된 마음 허물 뒤 숨어들죠

휘어진 그 결을 따라

거친 호흡 돋아요

 

형태 잃은 무채색 구름

푸른 바탕에 해체되도

날카로운 촉수에 앙상한 미소는 남죠

한겨울 마른 가지로

민무늬 숲을 이루죠

― 「엇결전문

 

대패질을 할 때 결이 매끄럽게 밀리는 쪽을 순결이라 하고, 거스러미가 일어나 엇나간 결을 엇결이라고 한다. 시인은 엇나가 있는 나무의 결을 인간관계에 비유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도 있지만 예상하지 못하였던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까칠한 목소리들과 대척해야 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럴 경우에는 맞서서 대응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삶의 고삘 늦춰보라고 권한다. “생이 편마모로 지워져 가고” “몸에서 피는 단문의 말은 거미줄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여기에서 끝은 아닐 것이다.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셋째수에서 발현된다. “날카로운 촉수에 앙상한 미소는남아있기 마련이다. 이 미소는 한겨울 마른 가지로나마 민무늬 숲을이루어 삶을 다시 이어나가게 할 것이다.


지금까지 김현장 시인의 시를 살펴보았다. 김현장 시인의 시에는 일상에서 포착된 삶의 언어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이 삶의 언어를 통해 희망을 보여주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언어예술이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언어라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김현장 시인의 언어는 대상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한 언어가 아니라, 대상을 순간적이고 직관적으로 통찰하여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대상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시의 언어가 잘 구사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로 하여금 깨우침의 사유방식에 도달하도록 하고 있다. 물론 시조는 정형 미학이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는다. 고도의 압축과 절제 속에서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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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세계에의 불만을 토로하고, 내심 ‘변화’를 소망하는 목소리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을 단지 ‘젊은 세대의 몫’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사회제도의 정의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범주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단순히 철없는 젊은이의 치기로 격하할 뿐만 아니라 연령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세계와 불화하는 이의 고통을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흠결 탓으로 귀결시키기 쉽다는 점에서 그들에의 적극적인 타자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MZ스러움’은 특정 연령대나 세대의 기질적인 본성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태도 중 하나다. 일찍이 ‘꼰대’라는 단어가 그렇게 되었듯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이질감을 느끼는 자라면 누구나 MZ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화제는 ‘MZ스러운’ 태도를 촉발하는 ‘현실’이란 대체 무엇이며 ‘MZ스러움’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발현되는 것이냐는 질문으로까지 확장될 터, 지금이야말로 현실에 발붙인 채 그를 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이라는 장르가 앞에 나설 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누가, 어떤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품에 안고 두 권의 시집을 펼친다. 두 시집은 지금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묘사하는 데에 적지 않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물론 두 시집의 화자들이 취하는 태도가 같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아침부터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서 “창문을 열지 않”(「골목의 증식」)고, “아픈 사람들의 전화를 받지 않”(「실업자가 야구 보는 이야기」)는 남현지의 화자와, “단돈 칠만 원”이라는 호객 행위에 굳이 “없어 인마”(「신년 운세」)라고 엄포를 놓고, 소비자에게 자신—혹은 자신이 만든 상품—이 어떤 이득을 제공할 수 있는지 어필해야 하는 “홈쇼핑” 방송에서 대뜸 “귀엽다”(「도전! 판매왕」)는 말을 꺼내놓는 고선경의 화자는 일견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현지의 시 중 “고통 없는 세계” 같은 건 “상상을 안”(「빛의 생산」) 한다는 말이나, 고선경의 시 중 “진정한 서울 시민은 1호선에 출현하는 빌런들에 익숙해”(「남영」)진 사람들이라는 견해와 같이 시집 곳곳에 산재한 증언들로부터 한 줄기의 비관을 발견해낸 독자라면 이들 사이에 세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공통된 인식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질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대들, 어떻게 살고 있는가? 2. 서랍 속 테라리엄  남현지의 시에서 가장 먼저 알아볼 수 있는 소망은, 시집의 해설이 언급하고 있듯 화자 자신을 안전한 공간에 ‘안치’하려는 감각이다. 안정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 소망은 ‘집’ ‘실내’ ‘직업’ ‘소속감’ 등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나며, 화자가 의도적으로 타자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게끔 한다. 이처럼 극도로 정돈된 남현지의 세계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마음에게는 미안하지만 / 그것은 이미 / 언어의 것이 아”(「골목의 증식」)니냐는 물음에서부터 드러나듯, 남현지의 시 세계에서 ‘마음’은 더는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래도 정제되지 않은 마음이 인간을 뒤흔들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이 곤란에 빠진 자에게 건넬 만한 가장 보편적인 조언으로 손꼽히는 세계에서 마음이 설 자리는 너무도 비좁다. 그래서일까? 남현지의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는 대체로 “고뇌, 열망, 후회”(「피서」) 같은 건 알 게 뭐냐고 되묻거나, “아줌마가 싫”다는 이에게 “아줌마도 싫어하는 것이 많”(「복도식으로」)으니 괜찮다고 되받아치는 식으로 마음의 진동을 애써 묵살하곤 한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마음이 소거된 도시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행복한 일상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리라.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약속이 남아 있다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요가 매트를 찾으며 더 건강하게 튀긴 이 감자칩과 저 감자칩 사이 최저가와 할인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에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번에 한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전문  표제작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마트를 거닐며 어떤 “감자칩”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출발한다. 이때 화자는 선택지 사이에서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멀티버스의” 체험을 하는데, 그것은 화자에게 아주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변화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소비자에게 끊임없이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선택 한 번 한 번의 영향이 막강함은 구태여 나비 날갯짓과 태풍의 비유를 가져오지 않더라도 자명한 것이다. “그 모든 시간이 / 나의 선택이었다고 /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는 화자와 “투자에 성공”하고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는 화자 사이에는 어떤 선택의 차이가 있었을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화자는 끝도 없이 신중해진다. 그러한 관점에서 “안녕을 물어도 되는 상황인가 / 호칭은 적절한가 / 무례한 단어는 없었는가” 지속적으로 자문하면서도 “이토록 신중해도 /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이해”(「거래처에서 배운 것」)하는 화자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선택이라는 행위는 개인의 자유를 극한까지 보장하는 것으로 언뜻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과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회구조나 시스템의 책임을 축소하는 뉘앙스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근거가 되기 쉽다. 다시,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는 목소리로부터 ‘누칼협’1)이라는 조롱이 힘을 얻는 것이다.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자에게 모두 너의 선택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냐 일갈하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복도’ ‘골목’ ‘마트’…… 인간의 몫로는 오직 비좁은 통행로만을 남겨둔 채 고통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남현지 시집의 공간들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현실의 은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집을 두고 세계를 비관한다거나 자신만의 작은 낙원에 숨어든다고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인데, 그것은 남현지 시집의 화자들이 끝내 버리지 못한 한 줄기 마음의 잔재 때문일 것이다. 남현지의 화자는 세계와의 거리를 두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곁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욕망을 내심 품고 있다. 예컨대 「가이드」에서 화자는 특정 모임의 맞춤 티셔츠일 것이 분명해 보이는 티셔츠를 세탁기에 돌리며 “소속이 있다면 기쁠 것이”라고 되뇐다. 하지만 티셔츠가 줄 수 있는 소속감은 그것을 벗는 순간 사라지고 말 정도로 얄팍하다. 세탁기와 같은 기계가 티셔츠를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담보하는 반면, 인간은 그럴 수가 없어서 안내문을 동봉한다고 이야기하는 남현지의 화자는 얼핏 인간에 대한 어떠한 낙관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화자는 시의 마무리에서 이미 “없어진 단체의 티셔츠를 입고 잠든다”. 면으로 만든 티셔츠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내면에 미래에 대한 기대가 서려 있음은 자명하다. 동네에서 은행이 철수하고 있다 은행은 이제 우리가 귀찮구나 교회는 더 늘어났으니까 신은 아직 우리가 필요한 거 같지 핸드폰 가게처럼 아직도 우리를 원해 커피도 준다 마시고 가 마셔도 돼 더 달라고 해도 돼 쓸데없는 걸 사라고 하지 않아 우리가 사 모으는 건 마지막 모자 마지막 손가방 마지막으로 짜인 부드럽고 질기며 화사한 것이다 아침마다 침을 흘리면서 꽃을 보게 돼 사진을 찍어서 보내 좋은 말만 하고 싶어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어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도록 달콤한 것으로 다 발라버리고 싶어 티브이를 틀어봐 설악산이 우리를 모집해 단풍이 붉게 들었대 날씨가 아주 좋대 좋은 것을 줄게 오래 간직했던 것을 줄게 말린 나물을 줄게 보험도 줄게 이건 수를 놓은 손수건이고 네 배냇저고리야 옷은 잘 다려 입고 햇볕을 많이 쫴야 돼 그런 걸 자꾸 잊어버리게 돼 — 「철수」 전문  오직 필요와 쓸모만으로 작동하는 세계에서 “쓸데없는” 것들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화자는 은행이 “우리”를 두고 철수하고 오직 “교회”라는 믿음의 장소만이 건재한 동네에서 “하나 마나 한 말만 하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어떤 마음에도 남지 않”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래서 “달콤한 것” “꽃” “단풍” “햇볕”…… 전부 한순간 우리에게 찾아왔다 사라지는 것뿐이지만, 그래서 이득이나 필요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세상에 쓸모의 유무나 필요의 정도로 재단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간직할 수도 박제할 수도 없게 증발해버리는 한순간의 기쁨 같은 것이 아닐까? 배냇저고리를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고 해서 그때의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 아님에도 오래된 배냇저고리를 건네주는—높은 확률로 부모님일—이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그런 “마음”들이야말로 체념과 절망의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는 자가 내일을 꿈꿀 수 있도록 손을 내미는 “보험”이 아닐지 조심스레 곱씹게 된다. 3. 정신 차려,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2)  일찍이 프리드리히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실로 인간은 고통받으며 강해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미 흉터가 된 상처에도 종종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강해졌다는 사실만을 위안 삼아 지난날의 고통을 전부 ‘필요한 것’이었다고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선경의 두번째 시집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은 그것이 ‘살아남은’ 청년이 지난 1년을 기록한 수기임을 숨기지 않는다. 구태여 ‘살아남은’ 청년이라고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주변에 많은 이별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이별은 종종 연인 간의 헤어짐처럼 관계의 단절일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죽음의 형태를 띤다. 「신년 운세」로 시작해 「망종」을 지나, 「핑크 뮬리」가 만개하는 10월을 경유하여 다시 “12월 31일”이 오는 동안 화자는 “장례식”에 가기 위해 “기차”(「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를 타고, 이미 “죽은 친구”를 “햄버거 배달”(「가벼운 노크」)원으로 다시 만나기도 하며, 심지어는 “내가 죽”(「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어버리는 식의 기묘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시 속 청년의 1년 중 대부분을 아우르는 감각은 다소 염세적이라고 읽을 수 있을 만큼 통렬한 현실에의 반감이다. 침대에 모로 누워 울다가 씨발! 하고 외쳤다 씨발…… 나직하게 읊조릴 수도 있었지만 누구라도 들어 주었으면 해서 소리를 질렀어 검은 고양이를 제외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가 울든 말든 검은 고양이는 똥 싸고 물 마시고 제 몸을 할짝거렸다 왜 아무도 없지? 집을 나설 때마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과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자객으로 육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숨지 않아도 세상은 나를 숨겨 준다는 것, 아아 안전해 그런데 나는 왜 한겨울에도 맨발에 슬리퍼만 신는 걸까 발끝에서 가볍게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빗길 위로 미끄러진 적이 있는데 누구라도 죽이고 싶은 날에는 세상이 온통 자객 같았다 그런데 그냥 누워서 비 구경 했어 창가의 침대에서도 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아아 시원해 고양이가 물 먹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검은 고양이는 빗물을 좋아하는지 깨끗한 물을 좋아하는지 아니 물을 좋아하긴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 태어난 지 서른 해가 되어 가는데 여전히 태어난 게 저주스럽다 나에게 어떤 세상을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우선 세상을 좋아하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되물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 「검은 고양이와 자객」 부분  「검은 고양이와 자객」에서 화자는 노골적으로 세상에 대한 불호를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이 화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의 존재를 숨겨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아무리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눈물을 쏟아도 세상이 그것을 묵살하므로 화자는 세상에 뜬소문으로만 존재하는 “자객”에 비견된다. 함께 사는 검은 고양이에게조차 애정 어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화자가 원하는 것은 일정 수준의 유대감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관심이 주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고선경의 화자들이 “집이나 학교가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생각이 착각인 것을 아는”(「핑크 뮬리」)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을 취하기 위해 뼈를 내줄 수밖에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고선경의 화자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유머, 즉 현실을 웃어넘겨버리는 가벼운 태도다.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럭키슈퍼」)이라는 말처럼, 유머를 유머로 만들어주는 것은 껍질처럼 쓰디쓴 현실이다. 이 세계가 분명히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세계를 비꼬는 유머로 웃을 수 있다. 때로는 세계를 깎아내리고, “1호선 빌런”(「남영」) 혹은 자기를 비하하며 함께 웃고, 그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 그리하여 누군가와 함께 웃는 일은 양자 간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느 정도 합치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세계를 비꼬고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세계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함에 더불어 적어도 그 기분만은 조금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남현지의 시집이 세계를 버텨나가는 힘으로 ‘기분’ ‘마음’과 같은 무형의 가치를 건넸던 것처럼, 고선경의 화자에게 있어 유머는 “공이 날아오기 전에 / 나를 먼저 깨뜨려 놓는”(「산성비가 내리는 대관람차 안에서」) 방식으로 삶을 연장해나가려는 나름의 생존 전략처럼 느껴진다. 더하여 고선경의 화자가 단지 세계를 증오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불행과 불운 사이를 거닐다 문득 거기에 온기가 있다는 것”(「체리의 서약」)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얀 머그잔 속 부풀어 오른 우유 거품을 바라본다 왜 이런 것이 나를 끓게 하는지 넘치게 하는지 알 수 없다 기다리라는 문자 메시지 하나에 시간은 무수히 알을 까게 되는데 씁쓸한 시나몬 향을 맡다 보면 담배를 배우고 싶어져 그런 것이 나의 최선은 아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태어나는 기분 우유 거품 아래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도 같다 침착하게 식어 가기 최선을 다해 가라앉기 나는 이제 그런 것을 배우고 싶어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은색 스푼이 거품을 걷어 내면 날벌레 한 마리 떠올라 있을지라도 나는 커피를 다 마시고 남은 거품의 자세 넘치지 못하지만 부푼 채로 멈춰 있다 빈 잔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어 내 어깨를 붙잡는 차가운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부드럽게 감싼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 — 「카푸치노 감정」 전문  “끓음과 넘침의 시간을 지나” “침착하게 식어”가는 삶을 배우고 싶다는 화자. 하나의 시기가 끝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스스로 선고하고 있는 화자는 이제 “거품”으로 표현되는 지난날을 청산하고자 한다. 정말이지 그의 말대로, “이대로 다른 것을 따라 넣을 수는 없”다. 그 잔여물이 새롭게 따라 넣을 음료의 맛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듯 새로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지난날이 전혀 돌아볼 것이 못 될 만큼 끔찍하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삶을 견디려 안간힘을 쓰는 청년이 1년간 남긴 기록에는 끝없는 자기 비하나 체념의 유머뿐만 아니라, 그가 그 1년을 버티게 만든 아름다운 지점 또한 무수히 존재한다. “무수한 별, 아름다움 / 어둠 속에서 맑은 물이 쏟아지는 소리 / 사람의 것과 사람의 것 아닌 아름다움 /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폭설도 내리지 않고 새해」)처럼 읽는 이의 머릿속을 선명하게 채우는 시청각적 감각들은 이 시집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독자의 가슴속에 심장처럼 남아 온기를 더해준다.  그리하여 시집의 마지막 시, 「팬레터—12월 31일」에 다다라 화자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으니까 기대하자 더 많은 걸”이라고 속삭인다.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은 친구를 추억하며 적어 내려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해당 시에는 친구와의 아름다웠던 추억과 더불어 혼자 남겨진 화자의 외로움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하지만 화자는 이 외로움에 천착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해도 충분해지지 않으니 기대해보자며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새해는 기다려지고, ‘나’는 “너의 팬”이라고. 이토록 단단한 심장을 가진 화자에게 응원의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것은 제 삶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에 부쳤던 시기가 우리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리라. 4. 내일의 태양  영화 「해피엔드」(네오 소라 감독, 2025)에서 주인공 ‘유타’는 말한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즐겁게 죽자.” 근미래의 일본,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지진과 오보 사이를 방황하며, 사람들은 강력한 통제와 결속을 원하는 쪽과 시민을 옭아매려는 공권력에 맞서 자유와 평등을 촉구하는 쪽으로 분열한다. 유타는 그중 어느 쪽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만 몰두하는데, 이러한 동태는 앞서 언급한 그의 발언과 얽혀 그를 세간에 대한 ‘유의미한’ 관심은 하나도 갖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회의주의자로 보이게 만든다. 유타의 음악 파트너이자 소꿉친구 ‘코우’ 또한 이러한 판단에 공감하여 ‘조금은 생각을 하라’는 일갈을 하는데, 소위 말하는 ‘MZ 세대’의 일원으로서, 유타의 위와 같은 발언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라는 평가에는 반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영화의 결말부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기와 불안, 양극화…… 이 영화의 배경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와도 상당히 닮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작중 선생님의 대사를 끊임없이 곱씹게 된다. ‘너희 세대에 조금 더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젊은 두 혁명가를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 그 대사를 말이다.  ‘희망에 대한 믿음’. 희망이라는 관념에 또 하나의 관념을 덧댄 이 마음은 훼손되기 쉽고, 그래서 세계의 척박함이 강조되는 시대에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가 득세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남현지와 고선경의 시집에서 명확하게 빛나는 인간의 마음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이렇듯 눈부신 희망의 증표에 대고, “우리의 불행도 우리를 이해시키지 못하”(고선경, 「눈도 내리지 않는데 고백」)는 세상에서 위로랍시고 ‘어쨌거나 다 괜찮아질 거야’ 따위의 근거 없는 전망을 붙이고 싶지는 않다. 세상은 앞으로도 줄곧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시험할 테고 괜찮지 않아도 사람은 살아야 한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러므로 두 권의 시집을 통과한 독자가 붙일 수 있는 것은 아주 미약한 마음뿐이리라. 그리하여 지금, 인간을 숨기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밝고 수다스러운 세계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다. 그대들, 잘 지내시나요? 1) '누가 그거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하기라도 함?'의 줄임말. 주로 부당함이나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자에게 그 모든 일이 전부 피해자의 '선택'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그에 딸려 오는 고통도 모두 본인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조롱하는 데에 쓰인다. 2) 2012년 TV 예능 프로그램 에서 하하의 콩트 캐릭터인 '하이브리드 샘이 솟아 리오레이비'가 지은 정형돈의 딸 이름. 해당 장면을 캡처한 사진은 2025년 현재까지도 삶의 팍팍함을 유머로 승화할 때 곧잘 인용되고 있다.

계간 문학과사회 신은조 남현지고선경MZ희망마음 2025
민가경 아이( )마음 ― 김복희, 『장타령』 외 9편

김복희가 내놓은 열 편의 신작 시와 에세이에는 이런 표현이 되풀이된다. "아 이 마음." 대관절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관데 그렇게 '마음' 앞에 가로놓인 괄호 안을 자꾸만 헤집고 기웃거려보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는 것일까. 마음 앞에서 여전히 체계적일 수 있다고 단단히 오해 중인 나. 그렇게 점점 더 체계적으로 오인되는 마음의 세계. 그 괄호를 특정한 하나의 마음으로 기입하기가 도리어 난망해진다. 마치 「춘향이 집 가리키기」의 화자가 "'나는'으로 시작"하여 '나'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 속, 술어의 배합에 의해 숱한 가능성들로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나에게 나를 내"밀고 "되돌려받"고 있는 것처럼, 이 '마음'들도 자기 자신을 여러 줄 쓰고 또 거듭 지우며, "나는 / 나는 있다 / 나는 여기 있다"를 반복 중인지도 모른다. 말 없는 새 인간과 말하는 기계 인간을 지나, 죽어서도 말하는 귀신까지 지나쳐 온 시인이라면, 어쩐지 호랑이와 도깨비가 등장하는 전래 동화나 불가사리 설화 같은 초인과론적 테마를 경유해 시를 건네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방점은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요소를 유연히 패러디하여 펼쳐낸 타령의 재해석에 찍혀야 할 것 같다. 이 젊은 시인이 고전을 해체해 새로운 고전을 고안하며 겨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립각을 세워 세련되고 깔끔한 여과물을 건져내는 일보다, 역으로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켜 그녀만의 독특하고 혼종적인 오늘의 오드라덱을 건져내는 일이었을 테니.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를 잊어보아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김복희 시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가끔 그 시의 견고한 짜임을 벗어나 일상의 비근한 곳에 한번 가보아도 좋다는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사물과 제재의 맹아와 뿌리를 해체 중인 시인이 생의 풍부함을 제시할 자리일지 모르니까. * 「불가사리가」에는 오로지 침묵으로 말해지는 존재인 '불가사리'가 그 제재로 등장하고, "나에게 성 없다면 무엇 이어지랴" 물음을 던지고 있는 화자 '나' 역시 출현한다. 그런 '나'의 진술로 범박하게나마 유추하건대, '나'는 성(性)이자 성(姓)이라는 중의적 '성'의 연쇄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해보며, "다른 꾀 낸다"는 차원에서 기왕의 민간 설화 속 불가사리를 그 상상에 결합해내려는 듯하다. 불가사리가 환경조건에 따라 자기 생식법을 조정하고 자연적 성전환에 의해 유·무성 생식의 경계를 무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타령과 함께 입안에서 불가사리를 퉤 뱉어내는 '나'는 기실 '성'을 없애려는 기획을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주체인 셈이다. 기존 설화 속 승려의 밥알로 빚어진 불가사리가 쇠를 먹고 거대한 몸집의 '불가살'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각종 문명의 수단들을 삼킨 혼종적 존재로서의 불가사리가 탄생하는 과정과 동궤를 그리며 김복희 시 안에서 전유된다. "꾀바른 불가사리"에 대한 타령이 시작된 후 불가사리는 자연·문화의 어렴풋한 경계뿐 아니라 성분화 이전의 태곳적까지 넘나드는 시간 축 위에서 숱한 문명의 지표들을 삼키는데, 화자는 이러한 불가사리를 깡깡 부수려는 사람들을 보며 잘못의 근원이 단지 '불가사리'인지 아니면 거대한 혼종적 존재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한 '나'인지를 묻는다. 그러다 문득 "성 없어도 사는데 / 아무 지장 없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생존 양식을 긍정하고, 동시에 "죽을 수 있어서 신통하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영생에 대한 연민을 보탠다. 요컨대 성분화 이전과 이후로 분기되는 모든 존재 양식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양자를 향한 긍정과 다독임을 하나의 '가' 형태로 번갈아 펼쳐내는 것이다. 또한 제목부터 동명의 속담을 내건 「밤비에 자란 사람」은 연한 밤비를 맞고 자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재해석을 예고한다. 이때 차용되는 제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인데, 그 도깨비는 으레 우리 관념 속 위용 넘치는 모습은커녕 어째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고 있는 초라한 행색이다. 그 가방 안에는 "당신을 걸고 씨름을 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하루치의 시간이 담겨 있고, 그 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 원하는 것"이라는 점은 기실 작중의 도깨비가 계절을 관장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아프고 연한 이들도 도깨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샅바를 잡고 씨름하"노라면 어느 순간 "씨름이 다 뭔지" 싶어질 것이고, 도깨비의 조화 안에서 비로소 "아픈 계절 사라지고 도깨비불 무성한 날"이 올 거라 한다. 즉 도깨비와 화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타령은 기존 도깨비의 용맹함과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계절 바뀔 때 / 더 아픈 사람들", 그리고 "밤새 기침하"는 마른 존재들의 "기침 따라 후렴하는" 양태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령'이라는 양식의 반복적 등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하나의 긴 구전 서사를 너스레나 타령 형태로 엮고 민담적 삽화를 구수한 언어로 우려내는데, 그 안에는 남북한 상공을 지나가는 산타랄지, 밤비에 자란 말라깽이 도깨비랄지,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호랑이와 같이 '환상적인 제재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패러디'나 호의를 베풀다가 살의에 노출된 곰의 이야기나 불가사리 노래와 같이 '환상적이지 않은 제재의 환상적인 것으로의 패러디'가 가득하다. 물론 그 제재들의 속성이나 의미의 파악이 선결되지 못할 경우 이 영리한 설계가 무용해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 비틀린 와중에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곡진한 시적 대상들의 '마음'이 비춰질 때, 독자들은 기계적인 호기심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그 유쾌하고 정감 있는 활동 그 자체에 이끌려 가게 된다. 특히 그 개별적 마음의 주관성이 집요하게 관조될 때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은 시인이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그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알려는 '조심(照心)'의 태도이다. 마음은 형태도, 질감도, 파동도, 이름도, 소문도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데, 조심은 이러한 마음을 '비추는' 또 다른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은 어쩌면 어떤 윤리의 영역보다 말 그대로 마음의 실상을 비추어 보려는 미적 영역에 가까운 셈이다. * 그런 김복희식 전유의 서막을 여는 「장타령」은 한국판 집시이자 악사(busker)의 전신이었던 '각설이'의 타령을 시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본 것이겠다. "각설이 온 마을 온 집 구걸하듯 / 시작하겠다"고 자신의 등장 목적을 알리며 시작되는 타령은 기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에 내포된 일방향적 관계를 비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이인 '나'가 '너'의 곳간을 개방하라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보리알"과 "깨끗한 잠"처럼 초라한 것에 불과할지언정 '나' 역시 네게 개방할 인심이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고기」 또한 속담 '까마귀 고기 먹다'의 유래를 해부 중인데, 그건 염라가 저승사자 강림에게 부친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까마귀가 강림에게 향하던 도중 탐스러운 말고기에 사로잡힌 바람에 존재들의 생사가 선입선출 아닌 무작위의 원리로 바뀌게 된 일화이겠다. 여기서 시인의 해체적 상상력이 뻗어 나가는 곳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추동된 까마귀의 실수로 인해 "아무 비둘기나 거두어 가"는 것을 제 상숫값으로 취급하게 된 '죽음'의 원리를 시정해보려는 자리에 있지 않다. 단지 이 생과 사의 딜레마적 순환 안에서 내일이 담보되지 않은 존재들의 연약한 생이 어떻게 "오늘 본 아름다운 것"과 "오늘 본 귀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 초점해보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작은 부리로라도 무언가를 먹겠다는 생의 의지를 보며 차라리 그 "강냉이"를 "더 잘게 부숴 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같이 살아가 보려는 것 같다. 강림의 적패지 안에 "이제 없는 비둘기가 / 그려져 있는" 광경을 "오늘 본 / 아름다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보려는 것도. 그뿐만 아니다. 「나는 새에게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할 수 없음」 속 화자는 "딸기 한 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자코 본다". "집중해서 조금만. / 조금만 더" 관찰한다. 은근과 끈기의 관조 다음, 화자는 어렵사리 "딸기는 파리하고 여위고 마르며 닫고 막고 막힌 과일"이라 나열한다. 이때 딸기를 설명하는 수과(瘦果, achene)의 어원 '카이네인(χαίνειν, khaínein)'이 입을 크게 벌리는 행위에서 유래하였듯, 화자는 딸기를 '수과'로 취급하기 위해 "한 입을 갖추어 / 내민다". 그리고 "혀에게 지고 이에게 지는 단단한" 그것의 미덕처럼 딸기를 "새가 먹을 수 있게 조금" 남겨두기로 한다. 이때 딸기는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온 것(which is coming)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론 화자의 관찰에 의해 '딸기'를 이루는 낱낱의 속성을 합쳐야만 오는 '온 것(the whole thing)', 즉 '전부'의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섬세함은 장악 또는 파악의 욕망보단 인간의 한계에서 그 제재에 어떻게든 닿아보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로 읽혀야 한다. 당장 「부처님 가운데 토막」 속 "아무리 쓸어도 만져지지 않"는 "갈피 안의 몇 글자"를 헤아려보려는 화자가 바로 그 모델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갈피'는 "건드릴 수 있"을지언정, 채 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라는 진술은 엄연히 "손끝에 걸리던 것"들의 '갈피'를 최대한 섬세히 살펴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어쩐지 "오늘 만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개 허리를 "살살 더듬"으려던 아이의 자세와 닮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복희의 많은 시적 대상들은 자기 의도와 실제 행위가 초래한 영향 간의 낙차로 인해 숱한 탄식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곰의 친절」 속 곰은 작은 토끼를 돕고 싶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단순한 호의가 상대를 죽이는 살의가 됐다나 뭐라나. 에세이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속 호랑이 된 남자 역시 엉겁결에 "아내를 죽이고 노모마저 죽인 살인자", 아니, 살인 호랑이가 되어버렸다나 뭐라나. 이렇게 호랑이 담배 연기 뒤로 흩어지는 설화와 함께 흘러 들어온 시인의 질문 "여기서 호랑이 됨은 일종의 은유일까요"의 의미만은 가볍지 않은 것이라, 부유하지 못한 채 다만 무겁게 침전될 뿐이다. 그 낙차는 「하려던 말의 반만 하는 모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중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세계는 온통 말로 이뤄져 있어 몹시 험한 곳인데, "말 흘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그림자를 지고 따라오는 존재들"이 툭 튀어나온단다. 그래서 존재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최선 같은데, 막상 존재들은 "그림자를 밤에 숨겨서라도 세상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어" 하고, 빛도 안 드는 비 오는 날 굳이 밖으로 나가 "살아 움직이려고 냄새 풍기려고 / 마음 움직이려고" 한단다. 이렇게 재차 화자의 선의를 좌절시키는 존재 본질의 속성이 괴리로 발현될 때, 화자는 존재를 존재로서 만드는 장소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지, 그리고 "생각 속에도 세상이 있"긴 한 건지 질문하다가, 결국 "망아지 송아지 강아지는 어디로 올까"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제목처럼 '하려던 말'의 절반만 내뱉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마음이라는 내부에 간직해 은밀히 보호하려는 노력과, 온전히 통제되지 않고 바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존재를 속수무책 물끄러미 바라봐주려는 노력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복희의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존재들이 거니는 "계절과 계절 사이"는 사실 그 미지의 기표 틈으로 연약한 너와 내가 갈피갈피 교통하는 공간이자, 서로를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진 장소 아닐까. 그 공간과 장소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일 테다. 이 마음들은 수많은 괄호에 의해 부연될 수 있는 공백이면서, 동시에 어떤 확률에선 전혀 설명될 수 없는 영원 미결의 공백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김복희의 글에서 "아 이 마음"이 노래화되어 의미 없는 여음구로서 각각의 타령들을 하나로 집합시키는 hook처럼 기능하고 있는 이유이다. 음성적 효과를 보존한 대신 의미만은 비워놓아 갈 길 잃은 마음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곳. 어딘가로 직접 향하고 싶긴 한데 결정적으로 그 접근법을 잃어버린 어떤 마음이 "아 이 마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마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니까. 조심도, 무심도 아닐 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월간 현대문학 민가경 김복희생 마음장타령보조 영혼스미기에 좋지희망은 사랑을 한다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포지션리뷰 2025
백애송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인간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내면화 백애송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새로운 사회적 환경과 인간관계 속에서 다양한 사고방식이 파생되면서 우리의 삶은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이러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김범렬 시인의 시는 당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탄탄하고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깊은 사유를 환기하기도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감정 또한 분명히 달라지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들을 모든 사람들이 망각해 버린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 김범렬 시인은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어루만지듯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탄주(彈奏)되는 삶의 풍경 여름 한낮 탄주한다, 소낙비 오락가락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 경계 긋고 난센스 불가촉천민 간담 그리 서늘케 한.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 빠끔 낯 비춘다. 내로남불 청개구리 부르튼 입술 띄울 무렵 우화를 마친 쓰르라미 자연섭리 깨우친 듯. 말모이를 섬긴 걸까, 노랫말 줍는 그들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듣는 너나 나나 간절히 간구하는가, 목 떨구는 해바라기. 하늘 문 열고 닫는 해거름 멈칫 선다. 세상 물정 어둔 친구 금싸라기 안겨줄까?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마을 어귀 줄을 잇고. ― 김범렬, 「여름 한낮 판타지아」 전문 “여름 한낮”의 풍경은 가야금이나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힘차게 “탄주(彈奏)”하고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한여름의 날씨는 오락가락 소낙비를 뿌리며 변덕스러운 기운을 드러낸다. 이 소낙비는 “윗마을 아랫마을 논두렁길”을 경계로 삼아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을 만들어낸다. “불가촉천민”이라는 표현은 경계로 구분된 계급사회와 신분 차별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촉천민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도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차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난센스”처럼 느껴지며, 보는 이로 하여금 서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연은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한다. 소낙비가 지나간 뒤 “먹장구름 틈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는 것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내로남불 청개구리”와 같은 고단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연섭리 깨우친 듯” 흘러가는 “우화”의 시간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쓰르라미가 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삶 또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환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노랫말 줍는 그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산골짜기 울린 경전 새겨”들으며 “간절히 간구”할 수 있다. “세상 물정 어둔” 순수한 이들이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간의 탐욕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는 여전히 “섣부른 투기꾼 행렬만” 줄을 잇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 시는 여름의 한낮 풍경을 인간 사회의 모습에 빗대어 보여준다. 여기에 ‘판타지아(fantasia)’적 상상력을 결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배곯을까,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 검붉은 놀 드리울 즘 그 무슨 경종 울리나, 명치 끝 때리는 바람.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군다. 번개 배달된다기에 배꼽시계 수선 떤 날 아뿔싸! 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계간 시조시학 백애송 김범렬여름 풍경배달 라이더달빛장미비누내면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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