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조시학 2024년 가을호(제92호)
단시조를 통해 살펴보는 장소애場所愛와 사물들
이애자 시인은 2002년 『제주작가』 신인상과 제5회 대구시조시인협회 전국시조공모 장원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으로 『송악산 염소 똥』, 『밀리언달러』, 『하늘도 모슬포에선 한눈을 팔더라』, 『풀각시』 등이 있다. 이애자 시인은 단시조를 통해 자신의 시세계를 풀어놓는다. 단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의 세 줄로 이루어진 짧은 시로 우리나라 전통 시가 형식 중 하나이다. 이 단시조 안에 담겨 있는 절제미를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제주에 대한 장소애(場所愛)와 사물을 관통하는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짧은 호흡 안에 시대에 대한 사유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장소애(場所愛)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는 물리적인 공간을 넘어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다. 물론 자신이 경험하는 장소가 어디냐에 따라 다른 발화의 형태가 나타날 것이다. 장소는 개인이 속해있는 사회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개인적 경험을 뛰어넘어 사회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장소에 대한 경험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정한 장소를 경함하고, 그 장소와 배경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장소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푸-투안은 “모든 사람은 그의 감정을 가지고 장소를 대하게 되는데 이것을 장소감이라 하고, 이 장소감은 반드시 장소애를 낳는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특정한 장소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애자 시인에게 애정이 가는 장소는 제주이다. 시인은 이러한 장소를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삶의 의미와 주제 의식을 부여한다.
산적하기 딱 좋은 가슴 밑이 숭이라더라
열 달 배불렁 맹(命)이 딱 그 거 매기라
북촌에 들걸랑 바람아! 애기무덤 솔 솔 흥글당* 가라
*4.3희생자 유적지 너분숭이 애기돌무덤
* 흔들다
― 이애자, 「너분숭이*」 전문
위의 시에서는 비극적인 현대사를 풀어내고 있다. 인간의 삶은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그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제주의 4.3 사건, 광주의 5·18민주화운동, 여수와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여순사건 등 우리의 삶은 굴곡진 역사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인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시를 통해 각인시킨다. 너분숭이는 4.3유적지 중 하나로 애기돌무덤이다. 너분숭이 4.3기념관이 있는 북촌 마을은 4.3사건의 최대 피해 마을이다. 당시 330호의 집이 불타고, 50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4.3기념관 옆에는 그 당시 임시 매장한 어린아이들의 무덤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고 보내야 했던 어린아이들. “열 달 배불렁 맹(命)이 딱 그 거 매기라”. 어린 나이의 자식을 보내야 했던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참담했을지는 말로 다 표현이 되지 않는다. 이에 시인은 “북촌에 들걸랑 바람아! 애기무덤 솔 솔 흥글당 가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들이 더 이상 외롭지 않도록, 꽃이 피어보기도 전에 떨구어져야 했던 그러한 상황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그리고 부모와 떨어져야 하는 아픔을 다시 겪지 않도록 북촌 마을에 드나드는 바람에게 잠시 애기무덤을 흔들다 가라고 말이다.
섬에선 모든 길들이 바다의 목줄이다 구불구불 더 이상 운명이 아닌 굽은 생
물결을 답습한 길이 바다를 끌고 간다
― 이애자, 「고내리」 전문
고내리는 제주시 애월읍에 있는 농촌 마을이다. 제주도라는 섬에서는 “모든 길들이 바다의 목줄이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바다를 통해 삶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함부로 가지 못하도록 길이 바다에게 목줄을 채워놓았으리라. 바다는 목줄이 채워져 있으니 답답하겠지만, 이에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것은 많은 희생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바다는 자신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길은 “구불구불 더 이상 운명이 아닌 굽은 생”이다. 이 길을 따라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길은 오늘도 길라잡이 역할을 자처하며 “바다를 끌고 간다”.
「너분숭이」와 「고내리」가 제주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장소라면 다음의 시 「길상사에서」는 시인의 시선이 확장됨을 확인할 수 있다.
진영각 난간에 앉아 절 구경에 흠뻑인데
불철주야 수행에 뿌리내린 나무들 위로
후드득 빗방울들이 죽비처럼 내려친다
― 이애자, 「길상사에서」 전문
이애자 시인의 장소애가 제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뿌리내린 장소에 대한 유대감도 중요하지만, 시인은 발길이 닿는 곳 모든 곳에 애정을 쏟는다. 길상사는 서울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길상사를 방문하였다. “진영각 난간에 앉아 절 구경에 흠뻑인데”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이 시인의 눈에 포착되었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풍경도, 수행하고 있는 나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순간을 포착하여 시의 언어로 옮겨놓는다. 비를 맞으며 나무도 수행을 하듯 인간에게도 살아가면서 수행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나를 고집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할 때, 어떠한 상황에 지혜롭지 못하게 대처할 때 등 매 순간 수행을 필요로 한다. 이럴 때 죽비로 정신을 깨우쳐주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적 삶의 질이 달라지지 않을까. “불철주야 수행에 뿌리내린 나무들 위로/ 후드득 빗방울들이 죽비처럼 내려”치고 있다.
사물들
시인의 시선은 사물에도 향한다. 주위에서 흔히 놓치기 쉬운 사물들이 시인의 손끝을 통해 한 편의 시가 된다. 시인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물들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다만 그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을 놓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애자 시인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사물들을 명명하여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외에 내포된 의미를 읽어내고자 한다. 자칫 밋밋하여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사물이 식탁 위 서술이 되고 삶의 지혜를 선사한다.
물외가 족히 이백팔십짜리 족(足)이다
장마에서 뽑아낸 초록, 그냥 졸이 아니다
우기의 위기를 넘는 장족의 발전이다
― 이애자, 「식탁서술」 전문
위의 시에는 식탁 위의 풍경이 서술되어 있다. 물외는 토종오이로 주로 여름철에 즐겨 먹는다. 오늘 시인의 식탁에는 아마 “이백팔십짜리” 물외가 반찬으로 올랐으리라. “이백팔십짜리” 크기의 물외라니 크기가 굉장하다. 장마에서 이 초록을 뽑아내었으니 당연히 생의 마감에 이르지만, “그냥 졸이 아니다”. 식탁 위에 한 상을 차려놓았으니 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장족의 발전”인 것이다. 이러한 장족의 발전이 있는 식탁의 풍경은 생각만으로도 넉넉함과 따뜻함을 선사한다. 물외만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물외가 있는 식탁에 함께 앉은 가족들의 삶의 질 또한 발전하였을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가족을 식탁으로 불러 모으기보다 배달된 음식을 들고 각각 자신의 방으로 향하게 한다. 시대가 변화하면서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며 예의와 인성에 대해 이야기 하던 귀한 시간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한 식탁에 둘러앉은 시인의 집에서는 상대를 위한 배려와 이해심이 넘칠 것이다.
다음은 ‘물외’에 이은 ‘노각’이 들려주는 여름이다.
반 쪼갠 노각에서 말발굽이 우르르르
다가닥 닥닥 도마 위 각 잡힌 일렬횡대
칼 받고 대오를 이른 노장의 수가 깔렸다
― 이애자, 「복선(伏線)」 전문
오이의 일종으로 늙은 조선오이를 ‘노각’이라 부른다. 노각을 반으로 쪼개니 그 안에서 “말발굽이 우르르르” 몰려 나온다. 시인은 노각의 ‘씨’를 ‘말발굽’에 비유하고 있다. 노각의 단면에 있는 오이의 씨가 말발굽 소리를 연상시킨 것이다. 도마 위에서 “다가닥 닥닥” “각 잡힌” 말발굽 소리가 “일렬횡대”한다. “칼 받고 대오를 이른 노장”은 당연히 도마 위 칼질을 하고 있는 시인일 것이다. 상상력을 증폭시켜 확산된 이미지가 노장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 몸은 쇠약해졌을지 몰라도, 나이가 가져다준 연륜은 청년에 비교할 수 없다. ‘노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증명하듯 삶의 지혜는 하루아침에 마련되지 않는다. 연륜이 쌓일수록 깊어지는 삶의 지혜를 시인은 늙은 오이를 통해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이 시를 통해 시인이 마련해놓은 최고의 복선(伏線)이다.
이애자 시인은 제주의 아픈 역사도 지나칠 수 없고, 보편적인 삶의 편린들도 지나칠 수 없다. 어쩌면 삶의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하나씩 풀어내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단시조를 통해 제주의 풍경과 제주의 역사, 그리고 제주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깊이 있는 표현은 단시조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다. 네 마디씩 세 번 이어지는 단시조의 짧은 호흡에는 역사의 무게와 진중하고 깊이있는 삶의 연륜이 담겨 있다. 여기에 담겨 있는 단시조들을 통해 짧은 형식 안에 절제된 언어로 독자의 감정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내공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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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 늦었구나, 한목숨 먼 길 뜨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 없고 불현듯 떠오른 그 말 “급할수록 돌아가라.” ― 김범렬, 「번개 배달 한때」 전문 현대 사회는 배달의 시대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빠른 소비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음식과 물건이 주문과 동시에 집 앞까지 전달되는 편리한 환경이 일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로 위에서는 빠르게 질주하는 오토바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에는 배달 음식이 실려 있고, 라이더들은 음식이 식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속도를 높인다. 배달 라이더들의 증가는 생활의 편리함도 가져왔지만, 동시에 속도 중심의 문화가 만들어낸 양가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배곯을까” 하는 절박함 속에서 더 빠르게 배달해야 하는 상황이 “시간 다툼 귀청 마구 찢어댄다”. 배달 라이더들은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보다도 더 긴박한 것은 촉박한 시간 안에 배달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콧대 높은 고층빌딩”이 즐비해 있는 도시에서, “검붉은 놀 드리울” 해질 무렵이 되어도 라이더들의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갈 길 바쁜 교차로에 신발 한 짝 나뒹”구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한다. “한목숨 먼 길 뜨고” 난 뒤에야 “아뿔싸! 한발 늦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바삐 서둘렀던 시간들이 결국 사고를 낳고, 한순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생명을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만든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빨리빨리 서두른 탓”에 이미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돌아갈 길섶”조차 남아 있지 않다. 뒤늦게 후회하더라도 되돌릴 방법은 없다. 속도를 미덕처럼 여겨온 ‘빨리빨리’ 문화는 배달 라이더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하나라도 더 배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곡예에 가까운 운전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결국 빠름을 추구하는 속도가 오히려 비극을 초래한다는 사실은 그동안 우리가 생명의 가치를 얼마나 쉽게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고요한 응시와 삶의 내면화 보름달 입맞춤한다, 소금쟁이 잠든 호수. ― 김범렬, 「달빛 호수」 전문 김범렬 시인의 시조는 현실 사회의 역동적인 풍경과 도시의 긴장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은 한편으로는 고요한 자연의 풍경과 사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내적으로 성찰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위의 시 「달빛 호수」를 통해 고요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다. 그리고 호수에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반영되어 보인다. 시인은 이를 호수와 달의 ‘입맞춤’이라 표현한다. 충만한 보름달이 호수를 비추고, 호수는 온몸으로 달빛을 감싸 안으며 고요한 정경을 이루고 있다. 잠든 소금쟁이가 떠 있을 정도로 바람 한 점 없고, 물결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호수이다. 살아가면서 시 속에 그려진 풍경처럼 잔잔한 순간을 얼마나 마주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러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시 속에 한 폭의 풍경처럼 담아내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평온하고 조화로운 시간이 마치 멈춰 있는 듯하다. 이 시는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을 붙잡아 고요한 사유의 시간을 만들고 있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은 짙붉던 장미꽃 한 송이 피죽도 못 먹은 듯, 본디 넌 사랑의 화신化身 여태 불 밝히지 못한. ― 김범렬, 「겨울 장미」 전문 장미는 열정과 사랑을 의미하는 동시에 가시를 지닌 존재로서 아름다움 속에 내재한 고통과 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꽃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피어나는 계절은 5월이다. 그런데 시 속에 그려진 장미는 ‘겨울 장미’이다. 피어나기 어려운 계절에 피어난 장미는 환영받지 못한 채 제 빛깔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 “마주보면 금세라도 와락! 껴안을 것” 같지만 한때 “짙붉던 장미꽃”은 “피죽도 못 먹은 듯” 색이 바래 있다. 본래 장미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지만 “여태 불 밝히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누군가를 향했던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따뜻한 계절에 피어나 사랑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추운 겨울 피어나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장미. 시인은 이러한 겨울 장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과 고독, 기다림의 감정을 중첩하여 보여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존재들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를 희생하며 타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하고, 그 과정을 마치 자신의 업보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다음의 시 「비누」가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눈길 주면 또 줄수록 닳아지는 몸맨두리 문대면 거품 게운다, 꽃무지개 띄울 듯이…. 언제나 어디서나 부리는 몸 한결같이.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본다.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한 떠꺼머리 뉘 봐줄까. 웬일일까, 분내 살내 몸 냄새가 그곳에서 배어난다, 바람 부는 그날따라 몸 부푸는 몸피, 몸피. 빛 쏟을 짬도 없이 폭죽 펑펑 터뜨린 날, 눈이 번쩍 귀가 쫑긋 번갯불 불똥 튄 날. 업보라는 짊어진 짐 내려놓을 그때까지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을 터. ― 김범렬, 「비누」 전문 위의 시조는 비누의 특성을 인간의 삶과 연결하여 표현하고 있다. 비누는 사용할수록 닳아서 없어지지만,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꽃무지개 띄울 듯” 나오는 거품으로 사물과 삶을 더욱 깨끗하게 만든다. 비누는 자신을 소모하면서 삶을 더 환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사라져가면서도 “제 그림자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급할수록 느린 걸음 세상 물정 굽어”보며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빛 쏟을 짬도 없이” 하얀 거품을 폭죽처럼 펑펑 터뜨리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것을 업보처럼 받아들인다. 이때 비누의 업보는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끝내 닳아 소멸하는 운명이라 할 수 있다. “겨워도 예삿날처럼 눈곱 낀 안구眼球 닦”으며 세상을 좀 더 맑고 깨끗한 만들고자 한다. 인간의 삶 역시 비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의 시간이 다하면 소멸하게 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삶의 소임을 다하려 한다. 유한한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고, 타인을 위해 배려하고 헌신하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개인의 삶은 소멸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군가의 삶을 더 맑고 빛나게 하는 흔적을 남기게 된다.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현대 사회에서 김범렬 시인이 견인한 현실은 시어가 지닌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구체적이면서도 간명하게 드러난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기에 김범렬 시인은 오늘의 시대를 다시 응시하며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삶의 모습들을 찾아내어 경고와 위로를 건넨다. 탄주하는 여름 한낮의 풍경과 배달 라이더, 묵묵히 자신을 내어주는 비누, 겨울에 피어난 장미와 적막한 호수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다양한 장면들은 시인의 성찰을 거치며 시조 특유의 리듬 속에서 의미로 충만해진다. 시인의 언어는 시인이 직접 삶을 체화하여 행간에 의미들을 담아냈기에 자연스럽게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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