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포지션 2024년 가을호(제47호)
일상의 전개도― 임승유 『생명력 전개』(문학동네, 2024)
전개도(展開圖, development figure)는 3차원의 입체도형을 2차원의 평면 위에 펼쳐놓은 그림이다. 예컨대 정육면체를 전개도로 표현하면 여섯 개의 정사각형이 십자가 모양을 그리는 형태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것은 똑같은 입체도형을 서로 다른 전개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인데1), 이에 대해서는 길게 설명하는 대신 입체도형이 점과 선의 연결, 즉 ‘관계’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만 적어 두자. 똑같아 보이는 일상도 알고 보면 서로 다른 전개도를 가지고 있으며, 차이의 핵심은 주체가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던 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승유의 『생명력 전개』를 읽고 나면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혹시 알고 있었어?”라는 질문들에 쉬이 대답할 수 없게 된다. ‘나’의 ‘일상’을 ‘나’가 ‘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어려운 일,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하루 되풀이되는 일상이지만 그 안에는 “모르고 지내다가 만져보고 알게 되는”(「모두 도망이라도 간 듯 조용하다」) 것이 너무 많다.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놓은 것 그전에는 베란다 한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전문
‘알 수 없는 대상으로서의 일상’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익숙한 일상은 언제 낯설어지는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이 전에 본 기억이 없는 것처럼 감각될 때 낯설어진다. 예컨대 인용한 시에서 “하얀색 바구니”는 낯익은 사물이다. ‘나’는 바구니에 얽힌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역사 이전에는, 다시 말해 ‘나’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 그 사실을 마주할 때 바구니는 불현듯 낯설어지며 익숙함으로부터 멀어진다. 따라서 화자는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맥락과 인과, 즉 장면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승유의 시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는 안다고 믿었던 일상을 모르게 되는 순간과 자주 마주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존재 역시 자주 의심하게 된다 – 조금 전 인용한 시의 제목은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이다. 임승유의 시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나’가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일상에 대해서조차 불안하고 불완전한 기억을 가진 ‘나’다.
집에서 나왔는데 갈 데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엄마가 뭘 갖다주라고 심부름을 시켜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
그 집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니? 묻지 않고 그애 엄마가 나를 야외용 식탁으로 데려가 앉히고는
막 정원에서 따온 게 분명한 딸기 한 접시를 내놓았다. 같이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그애가 여기에 살았다. 양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 후에 딸기를 집어 먹었다. 딸기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나니 이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밖에 남은 게 없어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고 돌아나올 때
그애 엄마가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줬던 장면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미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그애를 만나러 다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이야기」 전문
그래서일까. 무언가 했다는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는 주체가 “문득 정신 차려보니”(「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낯선 풍경 속에 놓여 있는 장면들은 임승유의 시에서 반복해서 등장한다. 인용한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그 집 앞에 서 있었다”라고 말하는 ‘나’의 회상에는 중요한 정보가 빠져있다. 그러나 “무슨 일이니?”라고 묻지 않는 것은 “그애 엄마” 뿐만 아니라 시인 역시 마찬가지다. 요컨대 어떤 마음이 ‘나’를 “그애”가 사는 집 앞으로 데려갔는지는 시를 끝까지 읽어도 알 수 없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기 때문에 단조로운 기억들이 시가 됐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딸기를 먹고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적인 장면들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나를 미치게 만든다”라는 문장이 덧붙여짐으로써 시가 된다. 텍스트 안의 주체도, 텍스트 바깥의 시인도 알 수 없는 마음(“어떻게 하면 그애를 만나러 다시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이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 기억들에 새로운 긴장감과 가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시의 제목이 ‘이야기’인 이유다. 임승유가 그리는 일상의 핵심은 보이는 장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있다.
한편 이번 시집에 수록된 “이야기에는 한 사람 이상이 등장”(‘시인의 말’)하는 시가 많다2). 불안하고 불완전한 ‘나’의 기억은 ‘나’가 아닌 존재에 의해, 그 존재와 맺는 관계에 의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다. “한 사람은 모든 작업 과정을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망설였다. 한 사람을 움직인 건 두 사람이다”(「한 사람이 두 사람을 끌어들여 이틀에 걸쳐 해낸 작업에 대한 보고서」),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게 생각났고”(「두 사람이」), “혼자 했으면 했다 하기도 뭐했을 겁니다”(「소설 읽고 나서 하는 청소」), “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종묘」)와 같은 구절들이 방증이다. 이번 시집에서 ‘복수의 존재’는 ‘생명력 전개’의 조건이다. ‘나’의 고정된 일상은 복잡다단한 ‘관계’에 의해 새롭고 다양하게 전개된다. 특히 그러한 전개는 일인칭 화자인 ‘나’가 시 속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기를 반복”(‘시인의 말’)하는 구조를 갖는다3). ‘나’로부터 시작된 시는 내내 ‘나’를 의심하며 끝내 ‘나’로부터 벗어나는데, 그러한 뒷걸음질의 보폭 사이사이로 비일상의 낯선 감각이 틈입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번 시집은 “저녁으로 뭘 해먹으면 좋을지 의견을 나누”(「어둠을 밝히는 불빛」)는 게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는 시집이기도 하다. 만두, 미나리, 감자, 카레, 과자, 딸기, 두부, 찌개, 은행, 레몬, 오이, 설탕 같은 음식과 재료들이 빈번하게 등장할 뿐만 아니라 “이제 그만 와서 카레를 먹어”(「카레」) 같은 구절들, 즉 주체를 일상에 붙드는 묘사, 진술, 대사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임승유의 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의 조합과 비약을 통해서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하는 한편 “생활의 지긋지긋함”(「나오는 사람들」)에 강하게 밀착해 있다. 예컨대 낯선 여행지로부터 “뒷걸음질치며 풍경에서 빠져나온” ‘나’가 “남은 생애 내내 양치질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 「직접적인 경험」이나, “백조라는 잡지”에 “시 발표하기로” 한 ‘나’와 “엄마 집에 가서 커튼을 달”기로 한 ‘너’가 “재미있을 것 같아”라는 말을 두고 대치하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같은 작품에서 ‘시’와 ‘생활’은 멀어질 듯 멀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다시 말해 임승유의 ‘(비)일상’이 특별한 이유는 생활의 중력과 무중력, 그 사이 공간에 시의 터전을 마련하기 때문이다. 일상은 충분히 낯설고, 주체는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청소와 설거지를 한다.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베이킹소다 푼 물에 씻은 후 말리는 동안 유리병을 삶는 사람이라면 여름에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려는 사람일 테고
레몬 한 망 사갖고 와서 침대에 쏟아놓고 양손에 하나씩 쥐어본다거나 레몬 옆에 레몬처럼 누워본다거나 레몬이 레몬 향에 휩싸이듯 몸을 둥글게 말다가 생각난 듯 레몬 하나를 들고 나와 창틀에 올려놓는 사람이라면
당분간 레몬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테고
너무 덥다며 창문을 다 열어놓고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잘 안 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이다.
─「레몬」 전문
인용한 시를 범박하게 삼등분하자면 ‘살기-되기-쓰기’ 쯤이 될까. 먼저 1연은 익숙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기 위해 “유리병을 삶는 사람”은 생활하는 사람이다. 다음 2연과 3연은 낯선 존재가 ‘되어보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레몬을 먹는 대신 그것을 쥐고, 그것 옆에 눕고, 그것처럼 몸을 둥글게 마는 사람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마지막 4연은 그 두 개의 합이다. “너무 덥다며 창문을 다 열어놓”은 모습은 1연의 “여름”과 호응하고,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모습은 2연의 행위들과 호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살기’와 ‘되기’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쓰는 사람”은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린다. 일종의 시론처럼 읽히는 시를 다시 한번 범박하게 표현하자면 ‘일상의 정반합正反合’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요컨대 임승유의 시에는 ‘살기-일상’의 충실함과 ‘되기-비일상’의 예민함이 두루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무엇이 무엇을 지나 무엇이 되는”,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을 지나 아름다움이 되는”(「애니시다의 죽음」) 자리에 놓인다. 일상’正이 ‘비일상’反을 지나 ‘낯선 일상’合이 된다는 이야기다. 그의 시는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두 개의 마음으로」)는 시이기 때문에, 생활과 시, 현실과 작품, 일상과 비일상 두 개의 마음이 길항하는 시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매력적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듯 무한에 가까운 관계로 채워진 일상은 결코 지루할 수 없다. 다만 하루하루를 지루하게 살아가는 ‘나’가 있을 뿐이다. 4년 만에 나온 임승유의 신간을 읽고서야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보이는’ 일상에 감춰진 ‘보이지 않는’ 비일상을 발견함으로써 감각과 세계를 확장하는 작업은 지난 세 권의 시집에 걸쳐서 확인한 임승유의 특장이었는데, 그러한 저력은 이번 시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여름은 여름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여름에서 벗어나며”라는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임승유의 일상은 일상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일상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이가 이야기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채, 남겨지고 버려진 것들을 “한번 만져볼까”(「상진 녹색 진실 바지」)라고 말하는 사람. 그 손에 닿은 (비)일상의 촉감으로부터 또 다른 생명력이 전개된다.
추천시 : 「두 사람이」 「레몬」 「애니시다의 죽음」
- 1)예컨대 정육면체 전개도의 경우의 수는 총 11가지다.
- 2) ‘시인의 말’ 뒤에 적힌 ‘이야기’라는 단어가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임승유의 시가 가진 독특한 ‘서사성’을 떠올리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임승유는 장면을 이야기처럼 다루는데, 그에게 장면은 곧 관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승유는 보이지 않는 관계들을 발견함으로써, 고정된 장면에 새로운 긴장감과 가능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복잡다단한 맥락을 살피는 작업이기에, 그 과정에서 임승유의 시는 또렷한 서사성을 띠게 된다.
- 3)대표적인 예로 「감자 양식」, 「충북대학교」 등의 시가 있다.
추천 콘텐츠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너 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너 T야?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 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나’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 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 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며 “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 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 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월 31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 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 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책(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 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월 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월 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과 ‘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 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1. 이 소설은 어떤 패배를 예정하고 있다 Day 9200 서울 1 이것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하지만 인생에 여행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 2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2024년 9월 6일 금요일이다. 그다음 문장을 쓰고 있는 건 10월 26일 토요일이다. 나는 몇 달째 여기까지만 쓰고 멈춰 있다. 쓰다가 말다가, 썼다가 지웠다가. 나는 이제 어떤 여행에 관해 쓰려는 참이다. - 「나이트 트레인」, 372-373쪽. 문지혁의 소설 「나이트 트레인」(『현대문학』, 2025.1.)은 ‘소설 쓰기의 소설화’라는 익숙한 서사 문법 위에서 시작된다. 소설은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지만, 소설가 자신의 삶이라는 단단한 토양 없이는 온전히 생육할 수 없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전적 삶을 되짚어 그로부터 허구의 세계를 이끌어내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이다. 소설 「나이트 트레인」 역시 자전적 성격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98학번, 남자, 소설가. 고작 이 세 개의 이력만으로도 우리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가 소설가 문지혁 자신일 것이라고 바로 예측하고, 그대로 긍정해버린다. 그 결과 이 글은 한 남자가 오랜 기억으로부터 끄집어낸 ‘사실’과 그로부터 촉발된 ‘진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인지된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독자가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에게 너무나 빠르게 감정이입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쓰기의 소설화’는 대단히 전략적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일종의 줄다리기 같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독자와 그러한 독자를 자기 세계 속에 끌어들이고자 하는 소설가. 그런데 ‘소설 쓰기’라는 과정이 노출되는 순간, 그 팽팽한 긴장은 이완된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이,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독자는 순식간에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고작 두 문장을 쓰는 데 무려 한 달 열흘의 시간을 허비했다고 말하는 이 소설 속의 화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그는 한 단락을 넘기기 전에 이미 승기를 잡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소설을 읽다 말고, 작가 문지혁의 이력부터 다시 확인해 봤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예정된 패배, 그것은 이 소설을 이끄는 첫 번째 전제가 된다. 소설 속의 ‘나’가 소설가 문지혁일 거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소설이 아닌 ‘나’의 솔직한 여행기(억)를 읽는다는 것에 저절로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2. 세 겹의 시간, 그의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다 「나이트 트레인」에 서술된 시간은 세 겹의 층위를 가진다. 첫째는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그것을 완성하기까지 소설가인 ‘나’의 시간, 바로 DAY 9200~9286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여행기를 표방하는 이 소설의 실질적인 서술 시간인 1999년, 21일 간의 유럽 여행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여행 기간 동안 ‘나’가 썼던 소설 속의 시간이다. 이 세 겹의 시간은 이 소설을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액자까지, 세 개의 서사적 층위를 이루며 이어진다. 이 세 개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나’와 관련된 세 명의 ‘그녀’이다. 첫 번째 ‘그녀’는 전 여친 O. 그녀는 ‘나’가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가 ‘나’에게 은반지를 선물하며 이별을 고한 것이 여행의 실질적 출발점이니 말이다. 그녀의 여행을 되짚어가는 과정은, 결국 그녀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한 이유를 찾아내고자 함이다. 두 번째 ‘그녀’는 여행에서 만난 E. 같은 대학에 다니는 미대생 E는 ‘나’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스스로 만든 고립에서 벗어나게 한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나’가 이 여행에서 방향을 잃지 않게 만들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프라하로 넘어가는 나이트 트레인에서 만난 전수진. 그녀는 이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환기하는 동시에, ‘나’가 이 소설을 쓰게 만든 결정적인 동력이다. 또한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는 그녀에게 더 주목하게 되는 효과를 야기한다. 사실 전수진은 ‘나’의 불안을 환기하는 존재였다. 그녀와 마주친 순간들은, 언제나 ‘나’가 가장 절망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수진을 처음 마주쳤던 야간 열차 안에서 ‘나’는 술 취한 독일인 프란츠에게 소매치기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유쾌하지 않았다. O에게 받은 은반지를 버리고자 탔던 빈의 대관람차에서, ‘나’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스스로를 위한 최종적 애도마저 실패하고 내렸을 때, 운명처럼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일종의 ‘흔들다리 효과’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만의 이별 여행에서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그래서 자신의 내면에 있던 불안에 분출되는 바로 그 순간. 수진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가 조금만 시선을 돌렸다면, 이 여행은 이별이 아닌 전수진과의 만남을 위한 것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연은 운명이 되지 못했다. 그들의 여정은 잠시 교차되었지만, 일치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패키지 여행객인 '나'와 자유여행객인 전수진 사이의 우연은 거기서 끝났다. 떠난 기회를 되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O와의 이별도, 수진과의 새로운 만남도 완성하지 못한 채 남은 여행을 채운다.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소설쓰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전수진을 찾으며 자신의 습작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액자 안의 또 다른 액자로서, 세 겹의 시간적 층위를 이루며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이별을 고하는 O에게 이유를 묻지 못했던 것도, 여정을 미뤄 자신과 하루를 더 여행하자는 수진의 권유를 거부했던 것도,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었음을. 그러므로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충격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미 예감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던 필연적 결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행기 안에서 그는 ‘소설 쓰기’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혀둔 이별 여행을 시작한다. 수와 진이 햄버거 가게에서 일어날 즈음, 한강 잠수교에서는 빗길에 미끄러진 승용차 한 대가 중앙선을 넘어 마주 오는 차를 들이받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네 명이 숨졌고 여섯 대의 차가 부서졌으며 부근의 교통을 세 시간이나 마비시킨 대형 사고였다. 그러나 수와 진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그것은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는 그들의 옛 애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가 사랑했던 그는 학교 도서관에서 잘 읽히지 않는 책을 앞에 놓아둔 채 비 오는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고, 진이 사랑했던 그녀는 별러왔던 사랑니를 뽑고는 병원 정류장에서 우산을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나이트 트레인」, 443쪽. 3. 고잉 홈, 여행의 시작과 끝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로 번호 매겨진 서술이 시작되기 전, 서사에 집중하는 독자가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그 날짜. 바로 ‘DAY 9200 서울’ 말이다. 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 여행 아닌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의 서사 전체가 하나의 여행기임을 보여주는 한편, 그의 여행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종료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25년 전 3주간의 여행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그의 서사가 ‘DAY 9200’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사실 이 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현재진행형으로 업로드 하는 과정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무려 9200일 동안 지속된 여행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뒤집어 보자. 그는 자신의 소설이 “여행에 관한 기록”이라고 쓰면서 “인생에 여행이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덧붙였다. 그 답은 명확하다. 그의 소설은 여행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여행 아닌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여행기를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것이 여행인 동시에 그저 여행이라는 특별한 순간이나 장소에 국한할 수 없는 인생의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지점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소설의 끝, ‘DAY 9286 서울’이다. “그때 정말로 유럽 여행 왜 왔던 거야?” 아내는 씩 웃더니 내 팔에서 손을 뺀다. 그리고 아파트 입구를 향해 먼저 걷는다. 나는 동그란 가로등 불빛을 벗어나 그림자 속으로 멀어지는 E, 아니 은혜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뒤돌아 한 번 더 수거장으로 향한다. 반지를 버리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 - 「나이트 트레인」, 451쪽. 25년 전에 시작되어 9286일 만에 마침표를 찍은 그의 여행, 그 종착점은 어디인가? 분리수거를 하며 아내와 함께 하는 일상,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서 ‘나’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현재를 마주한다. 그것을 환기하는 것은 더 이상 E라는 이니셜로 호명되지 않는 그의 아내 은혜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깨닫는다. 오래전 시작된 그 여행의 진짜 목적, 그것은 바로 ‘고잉 홈’이었음을.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