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가을호(제147호)

‘언캐니’한 것과 함께 머물기 : 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 / 임정민, 『펜 소스』(민음사, 2024)

김지윤 문학평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2년 시와시학상을 수상했고, 쓴 책이 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와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피로의 필요』를 출간했고, 학술·비평서 (공저) 『한국 현대문학의 쟁점과 전망』, 『요즘비평들』외 다수의 저작이 있다.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언캐니’한 것과 함께 머물기

이다희,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 2024)

임정민, 『펜 소스』(민음사, 2024)



1. 디카페인화된 시대의 꿈


꿈은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라 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이 사랑은 “사랑하겠다는 꾸준한 마음가짐”1)이라 했듯, 꿈 역시 그렇다. 현실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가능할 것이라는 부단한 믿음, 실망을 견뎌낼 인내와 예상치 못한 결말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그런데 현실과 꿈의 경계는 지금 이 시대에 매우 흐려져 있다. 이 말은,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많아져서 현실의 안팎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꿈이 현실과 비슷해져버려 어디가 문인지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리 대단한 인내나 용기 없이도 값싸게 얻어지는 꿈과 환상이 가득하다. 현실과의 괴리는 불편하지 않은 정도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도처에 널린 꿈과 환상 들엔 어딘지 진부한 데가 있고, 많은 꿈이 흔해빠진 것들이 되어버렸다. 무언가를 힘겹게 무릅쓰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꿈들은 쉽게 부서지며,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힘도 부족해졌다.

    평범한 일상에 균열을 내며 흘러드는 미래의 빛은 현재와 다른 파장으로 빛날 때에만 포착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욕망이 획일화되고 정해진 틀 안에서의 특별함만을 원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른 빛’을 볼 수 있는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아직 현재의 시야 안에 없는 것이 도래하길 기다리는 능력, 무언가 고유한 것을 믿고 바라는 능력은 이런 시대에 별 쓸모가 없다.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카페인화된 믿음 시대의 열정’2)이란 그리 뜨겁지 않은 것이다.

    꿈은 ‘저 너머’에 있을 때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어떤 미래를 만들어내고, 그 사이의 거리가 미래를 향해 움직이게 하는 열정이 된다. 마크 피셔의 예리한 지적처럼, 지금의 문화에서 제거되어가고 있는 것은 ‘언캐니’, 즉 “친숙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에 내재한 환원 불가능한 이례성”이다. 피셔는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환상이 “모든 간극이 말끔하게 메워진 매끄러운 세계”3)를 추구하며 순응적 태도로 뒤쫓게 하는 일종의 ‘행동 모델’로 기능하고 있다고 보았다. 친근하지만 소원하고, 익숙하고도 낯선 것들이 만드는 불협화음과 경외심을 우리는 상실해간다.

    이것이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문화적 위기다. 전 세계 사람들이 불임이 되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보여준 영화 「칠드런 오브 맨」(2006)의 리뷰에서 피셔는 이 영화를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이 전치된 것으로 읽었다. 그는 이 영화가 “새로운 것이 없다면 하나의 문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청년들이 더 이상 놀라움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와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단절도 없고 도래할 새로움의 충격도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 “아마도 미래에는 반복과 재조합만이 남게 될 것”4)이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해답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두 권의 시집을 읽으며 출구를 찾는다.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과 『펜 소스』에 만연해 있는 것은 ‘언캐니’이다. 갑자기 일상 속에서 돋아나는 생경함과 기이함,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언제나 그 안에 잠재되어 존재해왔을지 모른다는 짐작은 이 시집들 속의 시가 평범한 일상의 장면을 비추어주고 있을 때조차 뭔가 의심스러워 이렇게 중얼거리게 만든다.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지금 없는 무언가가 찾아올지 모르지.’ 이러한 생각은 불안을 초래한다. 편안하고 친숙하지 않은 것들은 난해하고 불편하다. 모든 새롭고 다른 것들이 대개 그렇듯이.


2. 시적 크로노토프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의 해설에서 김영임 평론가는 “이다희는 마치 무비 슬레이트처럼 일상을 시적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이미지를 시의 곳곳에 마련한다. 삶은 갑자기 시가 되고 시는 돌연 일상과 연결된다”(p. 129)고 말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시의 순간’이 지극히 언캐니하기 때문이다. 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가도 갑자기 일상성이 뒤틀리게 되는 까닭은 현실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이 변화하며 행위와 의미의 맥락, 규범적 틀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이 변곡점에는 ‘사건’이 있다.


    「종과 횡과 사선으로」는 “갑자기 멈춰 세우지 마//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지기 쉬워”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사실 이 시집의 사람들은 넘어지거나 눕는 일을 반기는 것 같다. 갑자기 닥치는 일들이 다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까닭이다. 방 안에서 시적 화자는 창문을 바라보는데, “크고 불투명한 유리는 떠오르는 섬광을 추상적으로 감상하게 만”드는 존재라서 그의 마음에 든다. 바깥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유리로 스며드는 이상한 섬광에서 그는 눈을 떼지 못한다. “종과 횡과 사선으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막막한 질문들이” 필요한데, 그것들이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옮겨주기 때문이다. 때로 걸음은 예기치 않게 멈춰지고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며 “작은 첫눈이 눈에 들어가 순식간에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렇게 흘리는 눈물은 다른 단어로 바뀌다 결국 “사랑”에서 멈춘다. 사랑은 돌연히 찾아오고 자신을 잃게 하며, “식욕”과 “운명”처럼 불가항력적이며, 벅찬 눈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라 기묘하고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사랑은 매달리고 싶은 동시에 뿌리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는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작고 하찮은 일일 수 있다. 최신 트렌드를 쉽게 소비하게 하는 SPA 패션의 상징 H&M 매장 탈의실에서 옷을 입던 시적 화자가 문득 구석에서 거미줄을 발견하는(「방 안의 집」) 식의 소소한 사건이다. 그것은 미미하게 시작되어 파동을 일으킨다. 「샌드위치 시스템」의 경우를 보자. “포크를 혀끝에 가져다 대보다가 나는 참을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여기를 여기가 아니게 만들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불현듯 사로잡힌다. 사소한 사건들이 결정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다희의 시 속 공간들은 생경하다. 장르적 관습을 벗어나 극시(劇詩)에 가까운 방식을 택하고 있는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는 ‘시’라는 현실까지 낯설게 만든다. 최근의 연극에서 시도하는, 기존의 감각을 벗어나 다른 감각으로 넘어가기 전의 불안정성을 표현하기 위한 퍼포먼스 미학을 시로 구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시는 대화와 독백, 괄호 안의 지문이 교차되며 현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집중하고 있다. 시 속에서 독자들은 현장성과 수행성에 역점을 두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무대를 경험하는 관객들처럼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 존재하는 체험을 한다. 선형적인 내러티브보다는 파편적이고 감각적인 장면들이 강조된다.

    이다희 시의 많은 장면에서는 공연성 혹은 사건성이 강조된다. 매우 서술적인 시의 문장들은 아주 자세히 적어놓은 희곡의 지시문처럼 읽히기도 한다. 시적 주체들에게서도 수행성이 두드러진다. “야외극장 무대에서 가장 먼 자리에 앉은 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왼손을 높게 들어 큰 반원을 그린 후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현대 시」), “그런 시간을 다오.//촘촘한 격자무늬 그물을 바닥 가까이에 깔았다./홍시가 언제 떨어지는지 지켜보는 관람객들 한가운데//홍시가 떨어진다”(「홍시와 홍시」)와 같이 이 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크로노토프, 즉 예술적으로 상상되고 설계된 시공간5)을 시인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행위와 변화는 무대(텍스트 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시를 읽는 사람)들에게도 발생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인생과 겹치지 않는 이 극을 보며 운다. 지금 당신이 흘리는 눈물은 원해서 흘리는 눈물. 당신의 눈물 한 방울 들어갔으니 이 극은 알게 모르게 새로워진다”(「현대 시」)라든지 “박수를 치던 관람객 하나가 명예의 전당에 들어선 홍시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인다”(「홍시와 홍시」)와 같은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듯 많은 시가 시적 주체의 자리를 제작자(시인)와 관람자(독자)에게 모두 나누어 준다.

    이다희 시 속의 시적 크로노토프는 체험을 위한 것이다. 특수한 유형의 몽상적인 비일관성, 피셔의 정의에 따르면 “앞뒤가 맞지 않고 최종 해결에 이르지 못하지만 무의미로 해체되지도 않는”6) 어떤 성질이 ‘꿈’에 대한 미학적 경험을 선사한다. “빨래를 잊고 회오리에 눈길을 뺏긴다/소원을 빌러 왔다가 홀린 듯 달을 보던 인간을 이해해”(「청소부 천사」)라는 구절에서처럼 이것은 탈현실적이며,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체험이다. 에리카-피셔는 공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미학적 경험을 두고 “통과하는 이들에게 변환을 야기하는 문지방 경험”이라고 설명하며, 이처럼 “특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경계”7)이자 ‘사이 공간’이 가장 선호되는 범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계선 넘기’의 불안정한 상태가 이 시집 속에는 시적으로 표현된다. 이다희의 시들은 자신만의 크로노토프 안에서 기존의 규칙과 질서를 상실하는 경험8)이 독자들을 흔들고 가길 원하는 듯 보인다. 세계와 그 안의 타자들, 자기 스스로를 다르게 지각하는 새로운 감각이 열리는 문지방 앞에서 시인은 기다린다.


3. 오픈 소스와 오픈-시


『펜 소스』에서 임정민은 ‘펜 소스’라는 조어를 제시한다. 시집 자서에 “open source → pen source”라고 쓴 것처럼, 이 용어는 ‘오픈 소스’라는 용어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오픈 소스란 공개된 소스 코드나 소프트웨어를 의미하며, 사용자들이 자유로운 접근을 통해 수정 및 배포를 할 수 있도록 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그렇다면 펜 소스란 시인이 ‘펜’으로 쓴 오픈 소스인 것일까? 펜 소스는 사용자(독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에 맞게 수정 및 배포가 가능하도록 한 프로그램이며 이것이 ‘시’라고 한다면, ‘시’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언어라는 재료로 독자들이 재구성하고 자기식으로 새롭게 완성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된다.

    펜 소스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펜 소스」를 읽는다. 읽어갈수록 답을 얻기 더 곤란해진다. 일단 “펜 소스는 오픈 소스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배태한다. “펜 소스는 한계를 의미한 채 한계 앞에 서 있기만 함으로써/이해의 곁을 맴돌고 맴도는 말하기다//펜 소스는 완전한 소스가 아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자유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오픈 소스의 특징은 지나친 가변성으로 인한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안정적 의미를 갖지 않으니 이해하기도 어렵다. 계속 새롭게 다시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완벽하거나 확고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사용할 뿐 아니라 변경하고 개선하기 위한 코드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처럼, 누구나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으며 “형태를 짓무르는 내성의 무수한 변화”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펜 소스는 “기의를 회피하는 가시광선이다”.

    펜 소스는 자리를 옮겨 다니며, 도처에 편재하는 “한 번의 몽상” 같은 것이다. “펜 소스는 어디에나 있고, 자기 자신을 재분배한다/펜 소스는 맥락에서의 개작이며 서술에서의 여가다”. 단순히 다시 쓰고 재조합하는 것이 아니며, 새롭게 창조하고 부단한 변화와 부조화를 끊임없이 갱신해내는 일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진흙투성이들 앞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얼음장 같은 구토로/요란한 고함으로/어느새 우리 손발의 여백을 채우고 있”는 펜 소스는 “다시 그 시간을 천 번 이상 마련하는 일에 몰두한다”.

    펜 소스의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특성은 사실 자연에 가깝다. “결국 자연 같은 흔들림”인 것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계속 변형되어가며 “끊임없이 부딪치는 강”을 부유하는 존재다.

    결핍이 그 움직임의 추동을 촉발한다. “결핍이 펜 소스를 채울 것이다”라고 시인은 쓴다. 펜 소스는 정해진 결말 대신 알 수 없는 미래와 막막한 기다림을 우리에게 내민다. “펜 소스는 눈을 감은 채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변해가는 것을 겁내지 않을 한 줌의 용기가 있었”지만, “유한한 배움, 돌이키기 싫은 정신머리로/저급 창작을 하며 존엄을 비웃는 실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펜 소스에게는 그 실체를 넘어설 용기와 “귀향할 수 없는 자유이면서 자신이 곧 원천인/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경한 감각과/아무것이나 되어 버리려는 현자로서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수많은 공백을 만들어줄 “결핍 같은 줄임말”이 생겨나야 하는데, 이것은 단어와 문장과 문장부호 사이에 머무는 무수한 빈칸이 품은 꿈이다. “펜 소스의 꿈은 사라지는 법이 없기 때문에/증식을 시작한 소망의 논쟁으로서/검은색 잉크를 뱉어내는 계보학으로 남아 있다”.

    “때로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프로젝트”이므로 ‘시’를 독자들 앞에 열어놓는 것은 하나의 기획이다. 하지만 펜 소스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펜 소스는 지그재그를 꿈꾼 적 있”으며, “포섭되지 않는 갑각류 바다 생물”이다. 두꺼운 껍데기가 있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포착하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펜 소스는 “제자리를 맴”돌다가도 “정지한 채 지그재그로 망명한다”. 잡힐 것 같다가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펜 소스가 열려 있는 그리움”(「펜 소스」)이라는 표현처럼 시가 독자를 향해 열려 있다 한들, 유동하는 시의 좌표를 찾아 문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것은 무지가 되어간다. 어차피 그것들의 성분은 먼지다. “먼지로 만든 구름은 다시 먼지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믿음이 그러하듯”. 시인은 고대 영어로 씌어진 영문학 고전 서사시 「베어울프」를 소환한다. 밤마다 괴물이 나타나는, 친숙한 일상이 항상 괴이함을 배태하는 운하임리히 unheimlich의 세계와 허용치를 넘어선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영웅이 등장하는 긴 노래다. 시인은 “꿈으로 돌아가려 하는 방식으로 무너진 우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베어울프 또는 베어울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더 나은 미완성”을 뒤쫓는 베어울프는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무상한 꿈이지만, 시인은 항상 다시 그 무상함으로 귀환한다. “파편의 이야기지만/파편은 다시 구름이 그러하듯/유한한 심연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한히 재생되는 바람과 구름의 이야기이면서, “유한한 심연”(「베어울프」)이 되는 이야기이다. 어차피 모든 구름과 바람의 입자는 한낱 수증기와 공기 방울이고, 그 안에서 나부끼는 것은 무수한 먼지다.

    시의 언어는 파편이다. “펜 소스는 늘 부수고 망친다”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야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는 이어지고, 연극은 이어지고/책의 겉장이 병자를 찾듯이 언어가 이어지고”(「펜 소스」) 그렇게 종말은 지연된다. 이것이 펜 소스의 투쟁이다.

    시는 “검은 도색뿐인 하늘이어도 그 높은 곳에서 그림자를 찾고/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활강을 시작해”라고 속삭이며 우리를 독려한다. “두려움을 벗어 내는 노력으로 하루를 살아 내야 하지” (「재해」)라고 말하며.

    새로운 시는 계속 창작되고, 다시 읽힌다. 매혹과 불안이, 이끌림과 환멸이 동시에 우리를 휩싸더라도 꿈을 멈출 수 없다는 사람처럼, 가엾게도 떨칠 수 없는 사랑처럼.

    “가능한 사랑은 얼음 위에 붙은 얼음의 모습으로/때로는 전문적인 상징으로/곁에 있음을 멈추지 않는다”(「펜 소스 레시피」). 시는 그렇게 멈추지 않고 곁에 있으려 하는 존재다. 당신이 그것을 바라든 아니든, 원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 1)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장혜경 옮김, 김영사, 2022, p. 112.
  • 2) Slavoj Žižek, "Passion in the Era of Decaffeinated Belief”, The Symptom Issue 5 Winter 2004(http://www.lacan.com/passionf.htm).
  • 3) 마크 피셔, 『k-펑크 1: 마크 피셔 선집 2004-2016』, 박진철·임경수 옮김, 리시올, 2023, p. 188.
  • 4) 같은 책, p. 272.
  • 5) 크로노토프는 바흐친의 개념이며, 이에 대한 설명은 『연극 크로노토프, 시공간의 미학』(김용수, 집문당, 2022)을 참고.
  • 6) 마크 피셔, 같은 책, p. 305.
  • 7) 에리카-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 김정숙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7, p. 386.
  • 8) 같은 책, p. 396.

추천 콘텐츠

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유령이 하는 일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계간 문학과사회 정의정 유령언캐니애도기억아카이브츠베탕 토도로프환상 문학윤성희느리게 가는 마음정한아3월의 마치 2025
인아영 당신을 향한 리듬 :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문학과지성사, 2025) /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

당신을 향한 리듬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문학과지성사, 2025)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 인아영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계간 문학과사회 인아영 리듬문체형식비인간포스트휴먼 2025
이소 어른의 서정 :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문학과지성사, 2025)

어른의 서정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2025)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계간 문학과사회 이소 여성서사노년서사중년서사여성성장서사삶의비극성아름다움서정성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