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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청색종이 | 2024년 여름호(제12호)

청소년이라는 서발턴과 새로운 영어덜트 시 : 청소년 문학의 현재와 미래

김지윤 문학평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시)과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2년 시와시학상을 수상했고, 쓴 책이 2013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와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된 바 있다.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피로의 필요』를 출간했고, 학술·비평서 (공저) 『한국 현대문학의 쟁점과 전망』, 『요즘비평들』외 다수의 저작이 있다. 현재 상명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소년은 말할 수 있는가?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는 중요하지만, 없어야 할 존재다. 니콜라예바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 혹은 교사를 포함한 ‘부모 대리인’은 인물을 부정하거나 방해하는 무능한 존재로 등장한다면서 이것이 아동청소년 인물을 성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고 보았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서서히 스며드는 고통”이자 “불가피한 불행(inevitable evil)”의 무대라고 표현되었던 ‘학교’는 대체로 부조리하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학교는 서구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대개 주변적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1)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부모와 학교의 존재감은 매우 크며 근대 가족, 제도, 학교 시스템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음이 두드러진다. 물론 이는 유교 사회부터 내려온 사회적 이데올로기, 오랫동안 한국에서 강력하게 작동해 온 국가주의, ‘입시’라는 목표 하에 청소년의 삶이 교육제도에 포섭되는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로 인해 한국 아동청소년 문학은 오랜 시간 보수성을 견지해 왔고, 교양 담론적 성격도 강했다. 

    한국에서 1930년대 이후 중산층 핵가족이 이상적 가족 모델로 제시되며 아동은 ‘보호’의 존재로 위치2) 지어졌다. 아동이 가족 내 위계에 맞게 ‘피보호자’의 위치로 배치되는 과정에서 소위 “어린이다움”이 고착되는 과정을 거쳤고,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다. 

    학교는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아동과 청소년을 보호하고 규제하며 사회와 국가의 규범을 전수시켰다. 공교육은 국가의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와 공조해왔는데, 청소년 문학 역시 이 과정에서 “청소년다움”을 형성했다.3) 이로 인해 한국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가족, 학교가 문학의 전면에 드러나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른’들이 개인의 성장을 돕거나 가치관이 형성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거나 작품 속 주체, 화자가 되곤 하였다. 어린이 청소년이 화자인 경우에도 사실상 “어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말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2024년인 지금, 시대의 변화와 함께 청소년 독자의 정체성, 출판의 지형도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오세란은 불구하고 최근 몇 년간 청소년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청소년다움”을 인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위 ‘청소년다움’의 보수성과 대립하여 “언뜻 진보 담론을 펼치는 듯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조차 일종의 ‘청소년소설다움’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4) 

    이융희는 청소년 소설이 2000년대 초, 그림책과 판타지 동화를 읽은 어린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 갑작스러운 입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비판적 인식 하에 등장했으므로 사실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소위 ‘어른’이라고 불리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화자 집단”이 기성세대가 만든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결국 문제에 부역할 수밖에 없다는 자의식을 강화한다고 비판5) 했다. 

    오세란은 근대 사회가 형성될 때 요구되었던 단일한 정체성이나 성장, 사회화 같은 가치가 이제는 자신의 다양한 내면을 깨닫는 것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근대 사회에서 청소년은 미성년이자 주변인으로서 어른들이 원하는 서사를 수용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패턴화된 성장, “온건한 경청자로의 유도”가 공식처럼 되어 버리는 문학을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6) 

    그렇다면 청소년이라는 ‘서발턴’은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스피박 식으로,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인지적 구도를 통해 청소년을 재현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찾아 말하는 것을 듣자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청소년은 기존과 매우 다른 존재들이며, 2010년대 이후의 시대의 급속한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자랐다. 그들을 이해하려면 ‘지금 여기’의 새로운 세대의 경험과 인식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2010년대는 어떤 시대였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침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를 겪으며 세계 질서가 전진의 행보를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거대한 후퇴’7) 라고 요약할 수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코로나 사태는 이를 악화시켰다. 고립과 정체(停滯), 우울과 불안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 곳곳에 위기가 심화되었다. 

    2010년대부터 2023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사람들을 무력감과 공포로 밀어 넣었고, 사회는 양극화되고 사회통합은 약화되었다. 많은 분야에서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지며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퇴보가 이루어지고 사회의 부조리함은 깊어지지만 개인의 무력함은 더 크게 느껴지는 상황이 되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감시자본주의8) 가 일상을 장악해 간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인구감소, 환경파괴와 이상기후, 연금위기, 그리고 실체를 알 수 없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위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다중위기 앞에 놓인 현실 속에 있다. 칼부림 사건과 같은 이상동기 범죄가 불안을 격화시키는 등 사회의 병적 현상들을 지켜보고,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의 청소년들이 꿈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통계결과로도 드러난다. 2020년 학생 희망 직업 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중등 대상 조사임에도 1위부터 10위까지의 희망 직업 중에는 교사나 군인, 공무원 등의 안정적인 직업, 의사와 같은 고소득직을 선호하는 현상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9) 자신의 내적 동기나 희망에 기반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불확실한 시대에 안정성 높은 직업을 선택하라는 사회의 기대가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있다. 휴대폰 소지로 상시 연락이 되고 보호자가 자녀의 위치 추적, 동선 파악까지 할 수 있게 된 기술 발전이 그들을 옭아맨다. 또한 저성장과 계층 사다리 붕괴, 대졸자 증가 등으로 인한 기회의 감소, 높은 청년 실업률 때문에 경쟁이 심화된 현실 속에 놓여 과도한 선행학습 요구와 그에 따른 스케줄링에 소진되며 성취 압박에 시달린다. 스틱스러드와 존슨은 지금의 부모들이 자

녀들에게 사소한 일들의 취사선택부터 하루 일과의 계획, 심지어 장래희망까지 간섭하는 ‘과잉육아’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지나친 통제와 과열되는 경쟁, 게임과 SNS 중독, 불안과 스트레스로 인해 아동청소년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다양한 임상 사례, 연구를 통해 보여 주며 최근 문제시되는 청소년 번아웃과 우울증 등의 문제를 ‘삶의 통제력 부재’에서 찾는다.10) 가혹한 입시현실 속에 놓인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그러나 현실과 불화하며 대응해온 문학의 방식으로, 지금의 아동청소년아동청소년 문학은 다른 측면에서 찾을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 그것을 넘어서 보려 한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재의 아동청소년들은 기존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다. 디지털원주민이자 포노사피엔스로 불리는 세대이며 소위 ‘디지털이민자’이거나 아날로그 세대인 ‘어른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연장자들이 경험과 경륜을 통해 줄 수 있는 지식과 정보, 지혜보다 더 많고 더 구체적인 것들을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부터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연장자의 지혜에 의존 하기보다는, 오히려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뒤처진 기성세대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잘 살아갈 방법을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만약 기성세대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낡은 구태의 방식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강요한다면 강한 저항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소위 ‘세월호 세대’이며, 미투와 세월호 사건 등을 겪으며 ‘어른’들이 신뢰할만한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였고,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며 사회의 구태와 민낯들이 드러나는 것을 목도했다. 가족과 사회가 충분한 보호망이 되어 주지 못하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을 여실히 경험했다. 그리고 학교가 그리 견고한 제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팬데믹 시기의 유연한 학사제도, 디지털 전환의 가속화는 교실의 풍경을 많이 바꾸었고 곧 실시될 고교학점제는 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어른’을 지워 버린 빈자리에 홀로 서서, 청소년들은 이제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청소년 문학의 변화


    니콜라예바는 ‘성장기’란 아동문학의 근본적인 내용11) 이라고 말하며 아동문학을 거울-문학으로 이해할 때 사회를 비추고, 인간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은 어떤 거울이 되고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니라.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는 다면체 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제도권 국어/문학 교육 하에서의 읽기가 ‘주제 찾기’의 강박에 시달리게 만든 까닭에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주제’는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 여러 가지 다면적 해석이 가능하여 단일한 주제를 갖는 대신 독자의 해석에 따라 다른 주제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확고한 주제의식 아래 의도된 교훈의 프레임을 제시하는 대신, 다양한 관점과 틀을 벗어나는 사고를 권한다. 

    또한 ‘사회를 비추는’ 기능에 있어, 거울의 선명도가 확연히 높아졌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최근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지금까지 금기시되어 온 청소년의 성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기도 하고, 다문화, 디아스포라, 페미니즘, 성 소수자, 빈부격차 등을 심도 깊게 다루는 작품이 출간되고 있다. 

    최배은은 ‘페미니즘 리부트’가 아동청소년 문학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하며 2016년 10월 미투운동이 시작된 이후 2017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아동청소년 문학장에 있었던 페미니즘에 입각한 작품비평과 토론에 주목12) 한다. 평론가들은 “동화를 쓰는 여성작가, 페미니스트 작가”13) 라고 선언한 이현의 작품이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고찰하고 『그날 밤 우리는 비밀을』(우리학교, 2018)에서 다섯 명의 여성작가가 ‘몸’이라는 키워드 하에 십 대 여성 청소년을 탐구하는 것에 주목했다. 청소년소설은 ‘스쿨미투’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교사의 성추행을 폭로하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두 소녀의 용기』처럼 근래 일어난 실제 사건들을 환기시키게 되는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스쿨미투의 현장을 보여 주기도 한다. 국립극단 어린이. 청소년글연구소가 개발한 창작 희곡집 『여학생』(배소현 외, 도서출판 제철소, 2017)에서처럼 “여성청소년의 욕망과 불편을 폭로하고 들려” 주기도 한다. 

    청소년에게 허용되는 이야기와 그들이 실제 즐기는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청소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원하는 바를 ‘허용된 청소년 문학’이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공적으로 발화되지 못한 욕망이 이중적이고 폐쇄적인 그들만의 장에서 표출되는 현상이 가져오는 문제14) 도 존재한다. 최배은은 웹 플랫폼 등에서 청소년에게 제공하는 이야기들과 학부모, 교사들이 허용하는 이야기 간의 차이가 커질수록 유해한 콘텐츠로부터 청소년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자신들이 향유하는 이야기의 작품성을 온당하게 인정받지 못한다면서 2019년 8월 포항의 한 중학생이 라이트노벨을 읽다가 교사가 ‘야한 책’을 읽는다며 급우들 앞에서 체벌하자 투신자살한 사건을 언급하고, 이러한 문제를 최소화하고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제대로 비평하는 일이 긴요15) 하다고 강조했다. 김지은도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소비자인 아동청소년이 독자로서 느끼는 책에 대한 고민이나 소감 등이 생산자인 어른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고, 생산자 역시 자기 작품이 아동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확인할 수 없기에 아동청소년 문학평론이 필요하다면서, 아동청소년이 느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른들이 없는 사이에 어른들로부터 해방됐던 순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동청소년 문학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16)

    일반적으로 청소년 문학은 상대적으로 가볍다고 여겨져 왔으나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무거운 주제의식, 핍진성 강화,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며 동시대를 호흡하고 진화해 나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문학과 청소년 문학 간의 경계도 희미해졌다. 이는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며, 실제의 청소년들이 변화한 까닭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작금의 청소년들이 기존과 매우 다른 세대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멀티미디어와 폭발하는 데이터, 과잉 소통, AI가 일상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2010년대 이후의 현실을 경험하며 자랐다. 기존의 청소년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것들을 향유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해졌다. 성경험 평균연령도 해마다 낮아지고 있고 디지털성범죄가 확산되며 n번방 사건처럼 청소년이 피해자에 포함되는 사건들도 증가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일어나는 사이버폭력에도 노출되어 있다. 자연히 그들이 느끼는 욕망, 문제의식, 불안의 양상도 변화하게 된다.

    청소년 인권행동모임 ‘아수라노’,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위티’, “누구나 스스로 위기를 말하고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후 운동단체를 표방하는 ‘청소년 기후행동’과 같이 사회변화를 위해 직접 참여하는 모임이 생기고, 청소년 활동가들이 증가하는 것도 직접적으로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은 청소년들의 욕구가 증대되었음을 드러낸다.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도 폭넓게 다루어지게 되었다. 성소수자의 사랑을 무겁게 그려낸 『오, 사랑』(조우리, 사계절, 2020), 퀴어-되기의 서사를 담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이필원, 사계절, 2021), 청소년 임신과 십대 미혼모를 다룬 『두 번째 달, 블루문』(김고연주, 창비, 2017)과 같은 작품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 청소년 문학에서 금기시되었던 주제를 진지하게 정면 돌파하며 다루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세란의 지적17) 처럼, 미성년인 아동청소년들에게 비극적 세상의 전망을 가감 없이 보여줄 수 없어 청소년 문학이 인간과 세상을 성찰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순간 문학 정신이 부재한 자리를 당위적 교훈으로 메꾸게 될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의 청소년 문학은 이를 과감히 벗어나 사회의 부정성을 그대로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이미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고 있고, 실제로 많은 문제가 청소년들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발생되며 경험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년 문학에서 당사자성이 높아지고 있음도 다수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청소년 문학은 “독서생태계, 사회문화 지형도, 청소년독자의 위상과 밀접히 소통하며 변화를 거듭”18) 한다. 따라서 이 모든 변화들을 폭넓게 살펴보아야 변모양상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작가군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문학의 작가군은 전보다 넓고 다채로워졌으며 신인 작가들도 대거 등장했고, 일반문학과의 구분도 희미해져 더 다양한 작품이 창작될 수 있게 되었다. 청소년도 여러 경로를 통해 쉽게 자신의 글을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동청소년들이 자신이 소비하는 콘텐츠에 대한 비평과 감상을 공유하기도 쉬워졌다.

    실제 청소년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곳도 많아졌다. 국내 최초로 ‘어린이 심사위원제’를 도입한 스토리킹,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청소년 문학상 프로젝트’(청문상 프로젝트)와 같이 아동청소년들이 직접 후보도서를 읽고 선정해 심사하는 문학상들도 늘어나고 있다. 스스로 읽고 싶은 콘텐츠를 결정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아지면서 아동청소년은 능동적인 소비주체로 등극하게 되었고 청소년독자의 위상은 확연히 변모되었다. 

    청소년들에게 청소년의 언어로, 청소년들의 니즈에 맞는 책을 추천하는 플랫폼인 북틴넷 (bookteen.net)과 같은 곳들도 늘어나고 있다.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읽고 싶은 주제나 내용을 담은 책을 찾아보고, 원하는 책을 요청하기도 하며 관심 있는 도서를 SNS에 담거나 공유할 수 있다. 북틴넷에 공개된 소개글에 따르면, 청소년은 도서 큐레이션의 모든 이미지(포스트와 썸네일)를 만들고, 게스트 큐레이터로 책을 소개할 수 있다. 

    그간 한국 청소년 문학에서 “‘온건한 경청자’가 목적화되었”19) 던 이유는 오세란의 지적처럼 청소년 문학이 교과서에 거의 실리지 않는 제도권 국어교육과 청소년 문학의 괴리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김은하의 의견처럼 외국과 비교해서 우리 교육과정에서 자기 서사 쓰기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20) 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서사화하고, 자기 생각을 직접 발화하는 글쓰기를 시도하는 예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 문학장에서 청소년은 어떻게 새로운 읽기와 쓰기의 주체가 되어 가고 있을까?


영어덜트 시와 새로운 주체들


    청소년 문학에서 그간 시는 사실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동시작가’는 친숙해도 ‘청소년시작가’는 낯설게 느껴진다. 청소년 문학=소설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창비청소년 문학상’은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쓴 미발표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창비와 카카오페이지가 함께하는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역시 소설만을 대상으로 한다. 

    청소년 문학은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청소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관점과 이해 가능한 미학적 형식으로 풀어놓은21)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 시도 이러한 개념 설명 속에 충분히 포함되나, 청소년 소설은 2000년대 이후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데 비해 청소년 시라는 장르는 여전히 낯설고 청소년 시집은 드물게 만나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금씩 청소년 시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조짐이 보인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높아지면서 감정과 내면 심리를 드러내고 자기만의 표현과 언어로 발화할 수 있는 시 장르에 대한 선호가 생기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주로 10대까지를 의미한다면 영어덜트는 성인기 전반의 사람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제 청소년 문학과 성인문학의 경계가 전보다 흐려진 현실 속에서 ‘영어덜트 시’라는 표현이 ‘청소년 시’보다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기존의 청소년 시집들이 기성시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쓴 것들인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 청소년 시인들이 낸 시집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한 예인 김소희의 『열여섯 팔레트』(지식과감성#, 2023)는 실제 열여섯 살인 시인이 쓴 청소년 시집이다. 열여섯 소녀의 불안, 우울, 기쁨이 진솔하게 표현된 시집에는 청소년기를 실제로 관통하고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본 세상이 색깔 이미지와 함께 펼쳐져 있다. 

    한국의 공교육과 입시 제도는 교실을 매우 억압적으로 만들고, 학생들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거나 성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정신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성인초기의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곤 한다. 이는 계속 누적된 문제가 되며,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고통받는 20대가 5년 새 각각 127%, 86% 폭증했다는 심평원의 통계22) 에서도 드러나듯 우리 청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열여섯 팔레트』는 청소년 자신이 시적 주체가 되어 자신의 심리와 상태를 스스로 돌아보는 시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인 자신도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급하게 움직이는 시간에 끌려다니면서 허겁지겁 살다 보니”(4쪽) 일어나게 된 일들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시에서 자신의 감정에 색깔을 붙인다. 행복은 초록색, 불안은 보라색, 우울은 파란색, 희망은 노란색이라는 식이다. “바닷속 물고기들이 행복해 보여도/결국 모두 상어에게 잡아먹히고 말걸//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 나는 여기가 편해/ 가만히 있어도 밥을 주고/ 가만히 있어도 깨끗한 물로 바뀌거든// 나는 바다로 가지 않을 거야”(「어

항 안 물고기」)라고 좁은 시야 안에 머무르며 자발적으로 미래의 가능성들을 수거해 버리는 삶의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내 그림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가 그렇기를”(「열여섯 팔레트」)하고 기도하며 경쟁을 넘어 “나 말고도 세상의 모두”를 생각하며 자신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되 연대를 모색하려는 자세를 보여 주기도 한다. 

    영어덜트 독자들의 시에 대한 관심도 전보다 높아졌다. “신체적이고 감각적인 성질을 지닌 정서의 잠재태이자 정서적 이미지”23) 인 ‘정동’을 담아내거나 찾아보기에 적합한 장르가 바로 ‘시’이며, 독자들은 시를 통해 스스로를 더 이해할 수 있고, 내면의 감정을 발산할 수 있다. 시인이 남김없이 말하지 않고 남겨둔 빈자리에 자기 경험과 감정, 상상력을 채워 넣고자 하는 영어덜트 독자들이 확연히 늘어나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20대 독자층이 증가하고 있다는 각종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최근 시집 구매 통계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20대 독자의 약진이며, 예스24 집계 결과를 보면 최근 6년간 시 종합 분야 및 한국 시 분야에서 전체 구매자 중 20대 구매자 비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 시 종합과 한국 시 분야의 20대 구매자 비율이 2018년 7%대와 비교했을 때 2023년 14%대로 2배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24) 이는 청소년들이 20대에 진입하며 시집 구매 독자층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어가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위 집계 결과상 2023년 한국 시 20대 베스트셀러에서는 2010년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대거 상위권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현대시 분야의 중요한 독자층으로 부상하고 있는 20대가 세대적 공통분모를 가진 젊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경험과 감정, 신선함에 공감하고 몰입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세기의 변화와 사건들은 그 이전 세대와 잘 겹쳐지지 않는 지금의 영어덜트들의 특성을 형성했고, 그들은 기존과 다른 경험과 감각,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시대에 대한 동세대적인 공감대를 원한다.

    이에 따라 영어덜트들의 고민과 처해 있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지영 시집 『최고는 짝사랑』(쉬는시간, 2023)은 쉬는시간 청소년시선의 두 번째 시집이다. 이미 청소년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 『해피 버스데이 우리동네』 등을 펴낸 바 있는 신지영 시인은 이 시집의 42편의 시를 통해 다양한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담아낸다. 

    청소년 문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재기발랄함, 명랑함, 귀여움 대신 이 시집 속에 불안과 두려움, 무기력이 가득하고 쉽게 위안이나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 시집의 청소년들은 무기력해 보인다. 그들은 억압되어 있거나 붙들려 있고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연약해서 “손으로/ 꾸욱/ 누르고// 발로 살짝/ 짓이겨도/ 뭉개진다// 참 쉬워/ 너 같은 아이”(「잎」)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냉혹해서, “여름은 남의 탓/ 차가운 비명이 도로 위에 익어” 가고. “미처 건너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 무늬처럼/ 눌려 있다// 썩기 전에 말라붙어 버린 눈알 위로/ 길 잃은 파리들이 내려앉는다”(「한심한 여름」)고 묘사되는 끔찍한 장면이 그저 ‘한심’하게 치부된다. 그러나 죽은 고양이를 보며 청소년 시적 화자는 “자라지 못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준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멈춰 있는 중”(「모범수」)이기 때문이다. 

    “무엇도 망치지 않고/ 누구도 아프지 않지//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사랑/ 최고는 짝사랑!”(「최고는 짝사랑」)이라는 말은 사실 ‘상처 입히고 망가뜨리는 사랑’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드러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한국 사회의 아동청소년들은 많은 것들에 속박되고 입시 제도 안에 갇힌 채 시스템 안에 규율된 존재들이다. 이 시집 속 아동청소년 인물들은 부조리, 방임,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아래 놓여 있고 무의미하거나 억압적인, 때로 폭력적인 일상 속에 멍들고 상처 입은 모습이다. 이 시집의 2부 “파벨라의 고양이”에서는 아이들은 안전장치 없이 “파벨라(브라질의 빈민촌)”와 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나는 깨진 아이//누구도 붙여 주지 않았다.”(「깨진 아이」)라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삶은 “뭉개진다는 거 참 쉽더라 (…) 이리저리 치이다/ 속이 다 터져버려/ 뭉개진 내가// 쓰레기통에서 누군가 버린 하루가 썩어가는지/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벌레들이 몰려든다”(「내 자리는 어디에」)는 식으로 그려진다. “세상이// 뺑글/뺑글// 돌아/ 돌아// 작은 방에 한데 엉켜서// 마구/ 마구를 맞은 것처럼”(「빨래」) 어지러움을 느끼며 “어느 날은 나보다 부쩍 커져서/ 언제나처럼 표정은 숨기고” 있는 그림자를 향해 “나보다 더 나같은 어둠”(「그림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문제 없다고// 거친 말처럼/ 나 세상에게 달려갈 뿐인걸”(「말 있는 말」)이라고 말하며 삐뚤어져도, 어긋나서도, 망가져서도 자라난다. 신지영 시인은 시집 끝의 산문에서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벌어진 채로 흉터가 되지 못해도 아이들은 자신을 키워낸다.”라고 쓴다. 미화되지 않은 사실적 고통, 날것의 불안과 어두운 현실, 두려운 미래가 그들이 ‘성장’ 과정에서 마주치는 현실이며 ‘아이들’은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지금의 영어덜트 독자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소극적 독자가 아니라 시가 창작되는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는 이들이다. 최근 독자들이 시를 향유하는 경향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는데, 이 역시 20대 독자들의 증가와 관련된다. 

    시를 자기 방식으로 읽고 편집 및 공유, 큐레이션까지 하려하는 적극적인 젊은 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점이 주목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소셜미디어의 활성화가 큰 역할을 했다. 이 독자들은 시를 SNS에 올리며 자신의 독서 취향을 공유하고 소통하려 한다. 

강윤정 문학동네 편집부장은 2024년 상반기 문학동네 시인선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고선경의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의 성공을 두고 “SNS에서 10대, 20대로 추정되는 독자들 사이의 입소문만으로 꾸준히 판매된 인상적인 사례”25) 라고 말했다. 김민정 시인은 “흩뿌려진 시구와 단어에서 일부만 취할 수 있는 시는 특히 인스타그램 시대에 독자를 주체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 장르”26) 라고 보고 있다. 

    ‘청소년 문학’은 새롭게 점검되고 고찰되며 그 외연이 확장될 필요가 있고, 그에 대한 비평 역시 더 진화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영어덜트들은 새로운 읽기 주체와 창작 주체로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영어덜트들의 일상과 문화, 감각은 이미 한국 현대시에 스며들고 있다. 따라서 청소년 문학에 대한 검토와 논의는 더욱 활성화되어야 하며 새로운 미래 주체가 될 영어덜트들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며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 창작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들의 감각을 표현하는 방식은 앞으로의 문학에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2010년대 중후반 시집들이 “세월호 이후 처음 등장한 세대의 첫 발화를 목격”27) 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던 것처럼, 이들은 문단의 새로운 창작 주체가 되어가고 있고, 될 것이다. ‘새로운 세대’는 이미 문학장 안에 들어와 있다.

  • 1) 마리아 니콜라예바, 조희숙 외 역, 『아동문학의 미학적 접근』, 교문사, 2014, 104~105쪽.
  • 2) 이재경, 『가족의 이름으로: 한국근대가족과 페미니즘』, 또하나의문화, 2003, 111쪽 참조.
  • 3) 오세란, 「청소년소설 속 아이들은, 자기 서사의 주인공이고 싶다」, 『어린이와 문학』 2016년 7월호 참조.
  • 4) 오세란, 『기묘하고 아름다운 청소년 문학의 세계』, 사계절, 2021, 59쪽.
  • 5) 이융희, 「순문학이란 없다 2」, 웹진 《텍스트릿 TEXTREET》, 2019. 9. 7.
  • 6) 오세란, 앞의 책, 2021, 133쪽.
  • 7) 사회학자 김호기의 표현이다.(김호기, 「굿바이, 2010년대!」, <경향신문>, 2019.12.1.)
  • 8) 하버드 대학 교수 쇼샤나 주보프의 용어로,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는 인간 행동이 만드는 데이터를 기업이 직접 수집해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 9) 『초·중등 진로 교육 현황 조사』, 교육부, 한국직업능력개발원, 2020.
  • 10) 윌리엄 스틱스러드, 네드 존슨, 『놓아주는 엄마 주도하는 아이(‘자기주도성’은 ‘성공 경험’으로 만들어진다)』
  • 11) 위의 책, 124쪽.
  • 12) 최배은, 『오래된 백지』, 소명출판, 2024, 137쪽.
  • 13) 이현,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창비어린이』 여름호, 창비, 2017, 70쪽.
  • 14) 최배은, 앞의 책, 225쪽.
  • 15) 위의 책, 같은 쪽.
  • 16) 송석주 기자, “[인터뷰]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어린이는 어른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자랍니다”, <독서신문>, 2020. 3. 3.
  • 17) 오세란, 앞의 책, 2021, 169~170쪽.
  • 18) 위의 책, 81쪽.
  • 19) 김영희·김은하·오세란·김건형 대담, 「독서들로부터- 페미니즘과 청소년 독서 교육 현장」, 『문학동네』 봄호, 2021 중 김건형의 말.
  • 20) 위의 글.
  • 21) 오세란, 「청소년소설의 장르 용어 고찰」, 『아동청소년 문학연구』 통권 6호, 2010, 149쪽.
  • 22) 박양명 기자, “우울한 20대, 우울증·불안장애 5년새 127%·86% 폭증”, <메디컬타임즈>, 2022. 6. 24.
  • 23) 김금내, 「시 텍스트 감상에서 독자 정동의 교육적 접근 방향 탐색」, 『한국문학교육학회』 75, 2022, 47쪽.
  • 24) 김태완 기자, “오늘은 “세계 시의 날”… 최근 6년간 20대 시집 구매 비율 늘어”, 『월간조선』, 2024. 3.21.
  • 25) 오경진 기자, “인스타그램 시대, 詩가 변했다… 한없이 가볍고 감각적으로”, <서울신문> 2024. 7. 16.
  • 26) 위의 기사.
  • 27) 김소연. 김영찬. 백지연 대담,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 비평』 2016 여름호, 442쪽 중 김소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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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때에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 시’에 대한 단상 ― 허향숙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한명희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여우난골, 2024)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1) 1 유사하거나 상이한 시적 흐름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시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 기획은, 언뜻 십여 년 전 제출되었던 어떤 요청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파’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일련의 무리 짓기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인들의 개별 작업에 대한 정밀한 조명과 각 각의 시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2) 그렇다면 옹호에서든 비판에서든 최근 비평장에서 텍스트 분석의 ‘과도한 천착’이 종종 거론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지난 십여 년 이상 성실히 이행되어온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때와 지금의 요청 모두 개별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가치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적 경향을 인접시키거나 떼어놓고 보는 유형화 작업과, 각 시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독해가 결코 대립하는 접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동시대 여러 시적 흐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깊이 있는 독해의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거시적인 연결의 좌표 위에서 개별적인 시세계에 대한 보다 마땅한 해명과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축적된 주요 논의들을 다시 살핌으로써 그간 동시대 시를 읽는 독법이 어떠했는지를 점검하고, 함께 주목해야 할 시적 경향이 무엇인지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2020년대 초를 전후하여 ‘나’의 중층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음은 주목을 요한다. 주로 기성 시를 다루는 평문에서는 ‘나’의 중층성이 실제 시인과 내부 발화자의 거리를 좁혀 가상의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 대면 의지로서 긍정되는 한편,3) 신인 시 심사평에서는 지나친 메타적 중층화가 복수의 ‘나’들 간의 거리를 넓히며 현실 대면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려되어온 것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전자의 경우 ‘메타시’의 일반적인 정의와 특별한 변별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5) 후자의 경우 90년대에는 메타시가 현실 인식의 한 중요한 관점이자 방편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6) 그런데 후자의 평가는 박상수가 황인찬과 송승언 등 기성 시인을 분석하면서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기성 시와 신인 시 모두에서 유사한 작법 양식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으며, 투고자들이 기성의 문법을 체화하여 학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 산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시적 경향은 이미 작법 차원을 넘어 동시대 시단의 주류로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어느 정도 보수화된 규범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내적 형식과 조직화 원리에 기인하여 각자 자신의 시를 추동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거나 적절히 자리매김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는 그간 우리 시를 읽는 독법이 주로 시 장르 일반의 보편 가치와 의의, 효용, 그리고 주체의 태도와 관점에 다소 집중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이러한 관점들이 그간 거두어온 성취는 별개로 두더라도, 작법의 차원을 중점에 두었을 때 끌어올릴 만한 긍정적 가치는 분명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화하는 복수적 일인칭에 관한 논의들은 분명 유효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활발한 현상으로 대두했던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가상의 중층적 겹침, 자기동일성의 자가 복제 양상은 상대적으로 조명받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입체적이지도 않고 문학적 진정성도 없는 시들, 각자의 유희에 집중하며 긍정성을 부여하여 길어올릴 만한 근거가 한정적인 시들, 그러나 분명히 활발하게 존재하는 시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호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유사한 작법 의도와 형식적 특성을 공유하는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자적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간 가시화되기 쉽지 않았거나 다른 측면만이 주로 논해졌던 건 아닐까. 그들만의 독특함을 잘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연결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성 시인들에 의해 시의 모범 혹은 당위로 말해지는 덕목들과 투고자들의 시작 경향의 괴리가 나날이 커지는 현상 또한 적절히 읽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상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고 그들의 작법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가 조직화되는 방식과 원리에 주목할 것인데,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가공과 배치를 거쳐 시라는 장르적 호명을 위해 제출되는지, 즉 해당 시인들이 각자 어떠한 경향성과 패턴 속에서 시를 생산해내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편의상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것인데, 가속류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몇몇 시적 흐름을 살펴보며 비교한 뒤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다른 연결점, 가능성과 징후들을 포착하고, 많은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가속류와 어긋나는 상이한 사례들 또한 숙고하고자 한다. 일러두자면 가속류라는 명명 자체는 상찬도 멸칭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도저한 현상이다. 2 가속류라는 명명은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8) 일군의 시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물론 가속주의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 특히 사이버네틱스9)의 속성에서 차용한 개념이지만,10) 가속주의와는 엄연히 변별된다. 여기서 가속이란 시구를 대량 증식하는 데 적합한 창작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구축한 뒤 반복적인 연쇄에 적합하도록 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지배적인 작법을 기계적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자가 복제 장치로 특화하는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속류는 일반적으로 기교와 수사, 비유와 가공보다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진다.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기에 최적화된 이러한 미니멀리즘 양식은 동어반복과 변주, 메타적 중층화를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작동을 그 연쇄의 요건에 적응시켜야”12) 하는 기계공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문장은 연쇄의 규범을 따르며 서로의 존속을 상호 보완한다. 여기서 시는 치열한 지적 사유의 집약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과 우연의 연쇄적·분산적 배치이다. “문장 하나를 쓴 뒤/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그저 나열”(배시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집요하고도 주된 방법이다. 사전적 정의와 인용도 빈번하게 동원되며 그러한 객관적 문장들의 배치와 나열로 시적 효과가 의도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듯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 또한 자주 활용되며, 이때 시적 공간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13)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주체는 고유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사고하고 행위한다.14) 또 한정적인 언어의 가용 범위 내에서 ‘있다/없다’의 진술 구조가 자주 활용되는 가운데 돌연 끼어드는 판단 혹은 선언과 단발적 감정 표출에 의해 복합적 사고로의 이행은 빈번히 차단된다. 과거에 메타시가 내면 탐구를 위한 현대적 장치로 일컬어지던 것과 달리, 주로 익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서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가속류는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들이 자주 익명을 표방하거나 욕망, 주체성의 의지가 없으며 일원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시인의 본래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무관하게—이러한 작법이 기계적 효율성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사유 습관을 추방”15)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통합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분할된 데이터이자 가분체16)로서 존재하는 동시대인들의 실존 감각과 빈번히 분절·재배치되는 사고 구조를 대변하는 시작 경향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체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그들에게 주체라는 자리는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이 된다. 2022년 하반기에 출간된 배시은의 『소공포』는 이러한 가속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 시집은 주로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가속의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전의 한 구절을 옮긴 듯한 인용도 빈번히 동원된다(「참가시은계목」 「해상 물류」). 무엇보다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과 그 변주인데, “짐을 풀자/짐은 풀린다//(……)//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칫솔」)와 같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은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마는 하나면 된다.//웬만한 건 다 하나면 되듯이.//무언가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가고. 그것을 바람과 비슷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바람은 아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먹는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먹는다.//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많은 미래를 상상하면 미래는 그저 그것들 중 하나에 그친다.//잠시 생각했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쳐서/생각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익월에 다시는/먹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식의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친/생각은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그만큼 흠 잡을 데 없다.//이것을 이것으로 바꿔 주세요.//결정하면서.//도마는 하나면 된다./촛불이 하나면 충분함과 같다. ― 「익익월」 전문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어떤 인간이 썼다. 나는 이제/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쓰지 않는다, 그냥 인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네. 그냥 인간/인간 대신에 은점토 생각을 한다. 반질반질한. 역동성 있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한 인간과. 그 인간과 닮게 닮아 가는 인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인간. 그냥 인간. 은점토에 대해 평생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인간. 그게 뭐였더라 — 「은점토」 중에서 위 시 또한 주제 문장의 반복과 변주, 천착한 단어의 동어반복을 중핵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지시 대상이 생략된 채 빈번히 동원되는 지시사가 지시의 모호성을 의도하는 한편으로 「소공포」(72쪽)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이 융해되어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듯 단일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중앙 집중화적 지향도 눈에 띈다.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얼핏 “기술자본이 꿈꾸는 세계”인 “오토피아”17)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그 생각의 내용은 계속 부재 상태에 머무른다(「역소원」 「해상 물류」). 그런가 하면 「평균자유행정」에서 그려지는 독특한 NPC 주체는 게임 내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실이 곧 게임과 다름없는 지금 사회에서 “미리 정해진 특정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못하는 존재”18)인 가분체에 대한 통렬한 비유를 보여준다. 한편 김뉘연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한다. 이때 ‘시’는 놀이나 어떤 수행의 흔적, 우연적 배치의 잔해로 인식되며, 따라서 ‘시쓰기’ 자체가 ‘시’보다 우위에 선다. 독특한 배치와 조합에 의해 ‘시적’ 효과가 의도되는 가운데, 그러한 언어를 전유해보는 경험 자체가 중점에 놓이는 것이다. 계정에 접속해 드라이브를 연다. 왼쪽 상단의 ‘새로 만들기’를 누르고, ‘문서’ 오른쪽 끝에 위치한 기호에 마우스 커서를 올린다. ‘빈 문서’와 ‘템플릿’이 펼쳐진다. ‘빈 문서’를 누른다./‘제목 없는 문서’ 생성./생성된 페이지 왼쪽 상단에 위치 한 기호에 커서를 올린다. ‘문서 개요 표시’. 눌러 본다. ‘요약’과 ‘개요’가 펼쳐진다./(……)/적혀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첫 행으로 삼는다./적혀 있으면 서 드러나 있기도 한 문장은 괄호로 묶어 뒤이은 행에 둔다.//여기에 문서 요약 입력./(문서에 추가한 제목이 여기 표시됩니다.) — 「범례 설명」(15쪽) 중에서 네 줄 띄고/계정에 띄고 접속해 띄고 드라이브를 띄고 연다 마침표 띄고 왼쪽 띄고 상단의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새로 띄고 만들기 작은따옴표 닫고를 띄고 누르고 쉼표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문서 작은따옴표 닫고 띄고 오른쪽 띄고 끝에 띄고 위치한 띄고 기호에 띄고 마우스 띄고 커서를 띄고 올린다 — 「범례 설명」(16~17쪽) 중에서 이러한 김뉘연의 시는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 자체를 지면에 그대로 옮겨 언어라는 사물 자체를 전시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물질적 감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이한 층위들의 언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전면화된다. 강보원에 따르면 이러한 김뉘연의 작업은 ‘나’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되며,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장소이지만 그 무엇도 독점적 지위를 점유할 수는 없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획득한다.19) 3 배시은이 가속류 일반의 기본 원리와 전형성을 대표한다면, 성다영은 그 심화된 양상으로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구축한 자동 장치는 시를 무한히 늘려나가기에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을 시사한다. 성다영은 빈번한 행갈이를 통해 주제적 측면에서 짧은 단위의 교체를 의도하고 일관된 주제로의 응집을 차단하려 한다. 성다영의 빈번한 동어반복 활용은 배시은과 마찬가지로 “사로잡혀서 반복”(「다중 슬픔」)하는 작법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다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문의 절합 원리에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내적 논리의 구축에 대한 반감에 근간을 둔다. 타의에 의해 존재론적 승인이 좌우되거나 주관적으로 변용되는 것, 인위성을 적극 거부하고 불멸이 아닌 유한성이 인간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성다영의 시는 시쓰기와 관련된 메타적 발화, 인간 예외주의와 인간 범주 내 위계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 비판,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서로 다른 대주제, 관찰이나 건조한 감정 진술 등이 차례로 발언권을 넘겨받듯 한 편의 시 내에서 위계 없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전면화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20) 그렇기에 낯선 문장들이 인과 없이 수시로 틈입하면서 가속적 몽타주의 우연적인 배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박제/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새롭지 않은 상상/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등으로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발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여기에 뭔가 있어/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오해하고 싶지 않아/그가 둘러본다/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나는 유기되었다/쓸모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원근법/이미지가 갇혔다/나는 나에 갇혔다//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창문이 없다/창문을 연다 ― 「행운은 여기까지」 중에서 태초에 은유가 있었다/평생에 나는 개연성이 없다/내 생각은 개연성이 없다/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과거형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여기,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태도는 성실하다/감정은 단순하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거의 틀리다/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당신은 누구십니까?/느슨한 언어/느슨한 상상/느슨한 시나리오/나는 나다/나는 사이에 있다/어딘가에 가입할 수 없다/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시다/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피부」 전문 이러한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를 통해 형성되는 무작위적이고 불연속적인 조합은 당초에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련의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의미화의 통일을 차단하기 위해 유사성의 극단적인 배제가 시행되는 아래 역설적으로 사고 구획의 코드화된 패턴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주제를 병치하는 성다영의 작업은 서로 다른 연상이 어떠한 직관의 회로를 거쳐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코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수사를 제거한 객관적 진술, 메타적 중층화를 주로 활용하는 시적 경향들은 언뜻 가속류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속류와 변별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단선적 논리의 증식이 아니라 중첩적 논리를 구축하여 시선의 다층화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방향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들도 물론 데이터 백업 과 복구의 일상화 같은 기계 미디어 장치의 속성을 반영하지만, 무의식에 접목된 것과 작법의 방식으로 가공 방식을 차용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차라리 가속의 원리를 여러 겹으로 조작하여 모호성의 패턴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가령 한재범은 ‘나’가 아닌 다른 ‘나’의 중첩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재범은 시간이나 공간의 격차를 두고 다층적인 차원들을 도입함으로써 시공간의 여러 층위를 혼재시키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 논리 확충과 그에 따른 시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상의 「절벽」을 패러디한 「커피는 검다」에서 활용되는 다층의 모호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지시 대상과 언어의 가능한 다의적 관계를 폭넓게 확장한다.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커피는 검다」 중에서 위 시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자 화자의 시선이 드리우는 가운데, 첫 두 문장은 검어서 커피의 안이 안 보이는 것으로도, 화자 A와 화자 B의 발화가 교차로 제시되고 있어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검은색의 속성에 의해 커피와 밤과 잠이 연결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커피 안인지 방안인지 알 수 없다. 보거나 보지 못하는 화자로 볼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이어지는 연들에서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와 “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와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자’라는 문자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제시되는 모습은 문자를 보낸 화자와 받은 화자의 모호성을 유도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분절된 시간의 비순차적 이어붙임으로 읽을 수도, 꿈속의 중첩적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커피, 밤, 잠이 공유하는 검은색의 가시성과 어미의 혼란을 통해 논리적 중첩 양상을 구축한 것이다. 「기호와 기후」에서도 마찬가지로 빗소리의 불규칙한 리듬과 편안함이 연결되어 불규칙한 심박동의 불편함이 파생되고 불성실과 아픔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가 ‘그’이거나 ‘방’으로 중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스위치가 달렸으면 좋겠다고/생각했다”를 받는 게 ‘심장’이거나 ‘방’이 된다. 이처럼 한재범의 시에서 동어반복의 유희처럼 보이는 것들을 대개 환유의 의도된 논리를 따르며 누적된 언술들의 논리적 적층으로 인해 모호함과 중층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평평한 사유를 통해 수평의 단선적 논리를 지향하는 가속류와는 변별된다. 4 가속류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이들이 처음에 어떠한 의도로 자기만의 자동적 작법을 개발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극도의 추상성과 단선적 논리로의 산발적 귀결, 현상을 관찰하는 단문의 서술과 사유의 생략 혹은 압축, 시공간의 비약은 가속의 원리에 적합하도록 동시대인들을 훈육하는 미디어 장치의 작동 원리와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즉 가속류는 각 시인의 창작 매크로 장치라는 현상을 통해 읽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므로, 창작자의 원래 의도나 수용자의 감상 지연 효과 등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논해져야 한다. 이러한 가속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 어쩌면 가속류는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은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이 가속류 일반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가라는 점은 다소 비판점을 남긴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장피에르 뒤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물화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거나 인간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데 모두 공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속류의 ‘의의’는 해석 차원에서 부여되는 의의이지 시 자체가 내장한 속성으로 인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같은 논리에 대한 정반대 해석에도 동일하게 무력할 수 있다. 의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근거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속류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자 징후로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가속류 자체의 어떠함보다는 특정한 경향성이 동시대 작법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상 자체이다. 서두에서 살펴봤듯 몇 년째 심사평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개입의 의지가 축소되는 현상에 대한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평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민이 해를 거듭하며 심화되는 와중에도 그러한 시의 창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비단 가속류가 아니라도 특정한 경향이 우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경합·견제되기보다는 다양성과 활발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진단의 전제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보편이라 가정되는) 다른 시대의 외래 담론보다도, 문학이란 본래 무엇인가 묻고 해명하는 제각각의 정의보다도, 제도나 관행 등을 포함한 우리 문학사의 특수성 위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현실 대면에의 복권을 강조하기 전에, 현실 대면은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현실’이라 상정된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는 않을까. 이미 가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지금 시대에서 ‘현실’이라 정의되는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속류는 어떠한 조건과 배경에서 동시대 시단의 주류적인 목소리가 되고 많은 시 독자와 투고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가속류는 왜 많은 시 창작자들에게 즐거움과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21) 또 가속류가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앞으로 한국시의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까. 아주 많은 길을 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과, 아무 길도 없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언뜻 유사해 보이나 실상 아주 다른지도 모른다.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 인용시 시집 제목은 생략한다.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성다영, 『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2) 가령 조연정은 당시 비평가의 임무를 개별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후광 또는 굴레를 떼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이라 말한다. 조연정, 「가까스로 가능한, 진실의 세계—‘미래파’의 두번째 시집에 대하여」(2009), 『만짐의 시간』, 문학동네, 2013, 215쪽. 이러한 필요성은 이듬해 작성된 글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미래파’의 출현 이후 새로운 감수성이 발견되고 독법이 확장된 것을 긍정하면서도 “미세하게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차별적 특징들이 하나의 이름 안에서 무화되거나, 같은 무리로 호명되지 못한 어떤 시인들은 제대로 읽히지 못하거나, 성숙한 실험의 난해함과 미숙한 실험의 난감함이 섬세히 구분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이 도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당시 ‘미래파’라는 거대한 시대적 자장으로부터 개별 시세계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연정, 「‘나’라는 정념, ‘너’라는 추상—박희수와 주하림의 시를 읽으며」(2010), 같은 책, 305쪽. 3) 는 주로 조대한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 실제 작가의 목소리가 시 내부에 개입하여 중층적 레이어를 이루는 현상을 가리켜 2000년대에 극단으로 멀어졌던 두 일인칭이 2010년대에 다시 좁혀진 것이라 진단한다. 이처럼 그는 2000년대의 성취이자 이후 한계로 제기되었던 내용의 구도를 뒤집은 방식으로 동시대 시적 경향의 의의를 도출해내는데, 그렇기에 이를 자기동일성에 구획되는 양상이 아닌 일인칭의 무수한 수행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또 안지영에 따르면 이러한 ‘2010년대적 나’는 2000년대의 ‘혼종적 주체’들과는 달리 실제 시인과 완전히 단절되지도, 그렇다고 동일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는다. 안지영, 「‘포스트-’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2010 년대 시에 대한 문학사적 읽기연습」, 『현대비평』 2022년 가을호, 59~60쪽. 4) 최근 심사평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두드러진 활용(황인찬,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67쪽), 세계로의 확장보다는 자기 인식의 되풀이(황인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61쪽), 현실과의 대면 부재(내 향화),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에 기반한 장형화 및 관념성 과잉, 언어의 미니멀리즘(박상수, 「심사평」,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440쪽), “해체를 위한 해체”로 보이는 장르 해체의 가속화 경향(신해욱,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321쪽), 산문화, 무의미하고 비유기적인 이미지 더미의 나열(이병률, 「심사평」,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463쪽). 5) 이수명은 메타시를 “작품에 시인이라는 외부적 차원”이자 “현장성”을 도입하여 언어의 또다른 층위와 레이어를 상정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수명, 「메타시는 없다」, 『시와세계』 2015년 겨울호, 20~21쪽. 90년대에는 이러한 ‘삼인칭’의 활용이 “자아 탐구의 구조적 장치”로서 주목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김준오는 90년대를 전후하여 삼인칭의 활용이 중요한 징후로 두드러짐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 주자로 이승훈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이나 반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분열된 두 자아 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것을 현대시의 일반적인 양상이라 정의한다. 김준오, 「인칭의 의미론」(1995),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173~174쪽, 182쪽. 6) 물론 전자는 현실과 가상의 접합, 후자는 가상의 중층화 경향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분간이 모호한 그러한 차이보다 두드러지는 건 두 경향 모두 동시대 가장 빈번한 메타 장치인 ‘행위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 구도 혹은 그 중첩 구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중 레이어 장치에서의 메타적 발화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현실과 맞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가름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레이어의 활용보다도 주제나 소재 혹은 발화자의 태도에 귀속되는 건 아닌지 하는 추가적인 의문도 든다. 7) 창작자의 사회적 여건, 그가 속한 세대 일반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담론적 수사를 동원하여 시의 사회적 의의와 효용을 열거하는 독법이 과도 해질수록 시와 시인의 역량은 은연중에 무력화된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당위적 모델에 견주어 작품의 ‘결여’와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 무감으로 치우치기 쉬우며(따라서 당위적 모델에 대한 내부적 틀은 견고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시가 비평적 해석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시보다 시를 치하하는 장식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따라서 상업주의와의 공모도 긴밀해진다). 시가 해석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역량, 시를 읽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채 빠르게 지배 담론의 분류 체계가 적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8)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9) 노버트 위너에 의해 창시된 사이버네틱스는 인지과학의 초석으로서 모든 행위자들에 기계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음’ 혹은 ‘생각’을 알고리즘에 의해 수행되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당초 위너는 인간 정신의 통제와 기계의 인간화를 강조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극대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1차, 2차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흐름은 반인본주의적 근거 또한 제공했다. 10)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대항운동으로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외하기, 탈코드화하기, 추상화하기의 경향을 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에 최적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갱신된 가속주의’는 광신적 자본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산출함을 아는 것 위에서 전개된다.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서론」, 『#가속하라—가속주의자 독본』,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14~15쪽, 37쪽. 탈자본주의를 위한 탈코드화가 전환기 이전의 가속주의라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과 디지털, 인터넷으로의 포섭”을 의도한다. 윤태균, 「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콜리그, 2022. 7. 8. 11) 물론 성다영의 「더 명복」과 「투명한 얼굴」이 다르듯이 한 시인이 매번 유사한 작법만을 반복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12) 소스타인 베블런, 「기계 과정, 그리고 영리 기업의 자연적 쇠퇴」(1904), 『#가속하라』, 103쪽. 13) 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이유야와 변혜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상화된 자아의 중층적 메타화를 활용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압축과 확장 및 즉각적인 이동과 급전환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원리를 시 내부에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그래픽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의 사고 과정이 창작 주체에게 체화된 양상, 즉 기계 인터페이스 경험이 시적 사유에 동기화된 양상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이유야에게는 스킬을 가동하듯 ‘그런데, 그러자’를 전후로 시공간의 빈번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혜지는 의미 단어가 큰 추상어들을 리셋과 재플레이를 위한 기능적 어휘로 사용한다. 이유야, 『일인조』, 파란, 2022;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14) 가령 김유림은 특정한 맵의 한정된 반경 내에서 이동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화자(와 그 화자의 외부 관찰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한정된 거리만을 이동하도록 설정된 배시은의 「평균자유행정」 속 NPC 화자나 성다영의 산책-관찰-생각 연속체 화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림, 『별세계』, 창비, 2022. 15)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글, 106쪽. 16) 들뢰즈에 따르면 가분체란 디지털 환경에 의해 생산된 주체로서 “파열된 혹은 균열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시작하고 재조직하게 하는 자아 경험”을 뜻하며, 이때 “경로들은 매순간 ‘새로고침’된다”. 앨피 본,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 사회 욕망혁명의 미래』,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 177쪽. 17) 같은 책, 56쪽. 18) 같은 책, 176쪽. 19) 강보원, 「타국에서 펼쳐 든 사전」, 『문서 없는 제목』 해설, 136~137쪽 20) 투고자, 「은유와 지상명령—『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문학인』 2022년 겨울호, 222쪽. 21) 앞서 박상수가 심사평에서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고 언급한 것은 적은 수고로 시를 쓰기에 특화된 어떤 양식적 문법들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바로 여기서 많은 투고자들이 이를 선호하는 또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가정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가속류와 같은 시쓰기는 시를 생산하는 데 무척 용이한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우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왜 매력적인 상징자본 혹은 안전장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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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시집 『흰 것』(파란, 2023)

믿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시 ― 박영기 『흰 것』(파란, 2023) 줄리엣 아이비의 「we’re all eating each other」은 모두가 결국엔 죽어서 꽃의 일부가 되고, 후손들이 그 꿀을 모닝티에 넣어 마실 것이므로 결국 우리는 서로를 먹게 된다는, 생과 사의 타당한 순환에 관한 노래이다. 박영기의 시집 『흰 것』 또한 죽음의 장면에 오래 시선을 두고 있지만, 이는 다시 생으로 돌아가는 어떤 원리에 대한 사유로 이어지고 있어 깊고도 고요한 자연의 섭리에 대해 숙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1 박영기의 시에서는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빈번히 들린다.(「수국정원」, 「귀신의 무게」, 「백년골목」, 「배려」) 무엇이 있다는 걸까. 존재를 확언하는 목소리는 왜 이 시집에서 그토록 자주 발화되는 걸까. 어쩌면 이는 믿음일까. 무언가가 있다는 말을 통해 실상 강조되거나 수행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시에서 ‘있다’의 연쇄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없다’가 강박적으로 출몰하며 특이점을 형성하는 「미끄러지는 오리」를 먼저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한 중요한 심증을 마련할 수 있을 듯하다. 오리가 호수에서 “자맥질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이 시에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오리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호수”가 “토하”거나 “수면이 게”우는 것으로 전도되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풍경을 관찰하고 있는 화자의 눈에 ‘오리’는 읽어내야 할 것이지만 결코 읽을 수 없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오리가 자꾸만 수면 위를 미끄러지기 때문인데, 이때 반복되는 ‘없음’의 내용은 “읽을 수 없다”로서 ‘오리’가 통상적인 문맥을 어긋나는 시의 언어에 빗대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오리 대신 ‘언어’를 기입하여 오리와 수면의 관계를 다시 읽어본다면, “오리 밖으로 미끄러지는 오리/오리는 오리를 더 미끄러져야/읽을 수 있다”라는 말은 언어의 지시성을 엇돌거나 자기 자신과의 어긋남을 통해서만 도달이 가능한 시 언어의 독특한 역설에 대한 비유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문학의 언어에 대한 박영기의 사유는 글쓰기에 대한 태도와 결의로도 표출된다. 그에게 “소설”은 “화구에서 막 꺼내/부서지기 직전/뜨거운” 흰 재의 속성을 닮은 “흰 것”으로 일컬어진다. 화자는 “죽어도” 희고 “검어도” 흰 이 잿더미를 보면서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쓸 것”을 다짐한다. 그가 “끝까지” 써야만 하는 당위는 “쓰지 않을 때/시간이 멈”추고 “계절이 사라”지기 때문인데(「흰 것」) 여기에는 무언가를 계속 써야만 슬픔의 시간에 고립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 생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과 의지가 배어 있다. 소진되거나 명을 다하여 ‘흰 것’이 되어버린 어떠한 삶을 두고 그저 슬퍼하기만 하는 데 모든 기력을 쏟기보다는 가능한 한 계속해서 “말하기”를 실천해나갈 것에 대한 강조인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이 시집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죽음을 다루는 시 중에서도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발화는 특별히 주목을 요한다. 「우리가 돼지를 심고 있을 때」에서 깊게 판 “구덩이”에 돼지들이 생매장되는 장면은 고랑을 만들어 씨앗을 ‘심는’ 일처럼 비유된다.1) 이 섬뜩한 풍경은 돼지의 발화로 구체화되면서 인간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도 읽힌다.(“오늘은 우리가 사라지지만 내일은 당신들이 끝장날 거요”) 「역할극」 또한 칼로 손질될 때부터 식탁 위에서 살과 뼈가 발라지는 모든 과정이 생선구이 화자의 입을 빌려 전개됨으로써 다른 존재의 피와 살과 뼈를 취하는 일에 대해 숙고하도록 이끈다. 피와 살과 뼈는 『흰 것』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속성을 상징하며 자주 등장하는 시어이기도 하다. 심지어 감자를 살과 피가 흐르는 것처럼 감각하고(「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 추상적인 생각까지도 물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하는 건 이 시인이 살아 있는 상태에 대해 보다 역동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2) 더 나아가 이는 ‘있다’의 범위를 확장하여 가치 있는 생명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 이미 소멸되어 물질적 존재가 없는 것들에게도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있다’고 자리를 부여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2 한편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고 그 존재를 확언하는 일은 실상 ‘나’의 실존에 대한 확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다른 존재자들은 ‘나’의 ‘있음’에서 말미암은 지각 능력에 의해 발견된 것이기 때문이다. 주문처럼 ‘있다’를 되뇌는 박영기의 화자들은 당연하게 존재하던 풍경들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게 되묻고 낯설게 감각함으로써 그러한 대상들을 발견하는 인식 주체 ‘나’에 대한 인식을 다시 수행한다. 끓는 해변이 있다. 숯불처럼 거꾸로 타는 태양이 있다. 뜨거운 자갈들이 있다. 지글지글 뱃살을 굽고 있다. 자갈 밑에 게거미가 있다. 지그시 누르는 오후 1시의 자갈돌이 있다. 꿈틀거림을 꾸욱 누르는 손바닥이 있다. 버티다 뚝 끊어지는 힘이 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쾌감이 있다. 담뱃불처럼 게거미를 비벼 끄는 손가락이 있다. 태양을 비벼 끄는 검지가 있다. ― 「백년골목」 부분 위 시는 ‘있다’가 확언하는 서술의 대상에 대한 연상이 그 대상의 감각적 속성에 착안하여 시선을 옮겨가면서 시의 공간을 넓혀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끓는’ 것의 뜨거움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로 뜨거움이라는 속성을 공유하는 “숯불”과 “태양”이 위치한 “해변”의 위쪽으로 시선을 이동시키고, 다시 하강과 상승, 줌인을 반복하며 해변에 ‘있는’ 풍경들을 차례로 조망한다. 뜨거운 속성에 기대어 담뱃불로 옮겨 간 태양은 “검지”가 “비벼 끄는” 것이 된다. 화자의 이동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확장되는 이 시의 공간은 1연의 해변 외 다양한 장소들로까지 시선의 침투를 이어받으며 다채롭게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환기한다. 그런데 이렇게 발견한 ‘있음’의 나열은 ‘나’를 서술할 보어의 자리에 들어갈 목록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기준」에서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어 ‘나는 ~입니다’라는 문장의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는 서술어를 ‘있다’로 대치할 경우 한자리에서부터 시선의 이동을 시작하여 풍경의 조감도를 넓혀가던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내’가 발견한 풍경이 곧 ‘내’가 되는 것이다. 이때 “나는 있다와 보이지 않는 모든 있다만큼 많은 있다가 기준입니다”라는 단언은 당장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까지를 ‘있음’의 영역에 포함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란히 연쇄되는 항목들이 지금 보고 있는 풍경과 지금은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 맞붙어 구성되어 있음은 이를 강조하는 면이 있다. 3 그러나 가장 독특한 ‘되기’의 양상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집요한 마음이 죽음을 거쳐 자신을 그 대상의 일부로 변화시키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딱따구리 혀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묘사는 1575년 네덜란드 해부학자 폴 허르 코이터르에 의해 이루어졌다.(월터 아이작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딱따구리의 혀는 부리 길이의 세 배 이상 늘어날 수 있다. 혀는 사용하지 않을 땐 두개골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연골 같은 구조의 혀는 턱을 지나 딱따구리의 머리를 휘감은 뒤 콧구멍으로 휘어져 내려온다. 긴 혀는 나무 안쪽의 유충을 파먹을 때 쓰인다. 더불어 뇌를 보호해 준다. 부리로 나무껍질을 반복적으로 쫄 때, 혀는 쿠션 역할을 하면서 뇌를 충격으로부터 보호한다. 딱따구리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깊어진다. 딱따구리의 혀를 묘사하라: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먼저 딱따구리보다 빨리 날아야 한다. 차라리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난다. 그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 딱따구리를 유인한다. 두통이 시작된다. 골이 띵하다. 1초에 스무 번 쫀다. 부리를 피해 골 깊숙이 들어간다. 묘사할 짬 없이 뇌를 공격당한다.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뇌 주름으로 딱따구리 혀를 꽉 움켜쥔다. 혀끝에 뼈가 있다. 뭔가 더 있을 것 같다. 딱따구리 입속으로 들어간다. ― 「두통의 원인」 전문 화자는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를 읽다가 딱따구리를 궁금해하고 딱따구리를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딱따구리를 잡아야 한다.” 화자가 읽던 딱따구리에 대한 ‘묘사’는 이제 화자가 묘사해야 하는 과업으로 바뀌고, 그러기 위해 화자는 “딱따구리 먹이로 태어”나고자 한다. “그[딱따구리]보다 먼저 죽어야 태어날 수 있다”는 화자의 진술은 딱따구리에게 먹혀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딱따구리 몸의 숙주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벌레로 변신한 화자는 “두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곳으로 가서 딱따구리에게 쪼이고 먹히는데, 이때 “뇌를 공격당”하는 모습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쫄 때 겪는 고통과 언뜻 구별되지 않는다. 이후 딱따구리의 내부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벌레 화자는 딱따구리의 혀를 움켜쥠으로써 혀가 보호하고 있던 뇌를 탐닉하기 시작한다. 무언가에 대한 집요한 궁금증과 집착이 그 대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는 이러한 과정을 통과하여 대상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무것도 아니던 무존재의 정체성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되어가는 양상도 발견할 수 있다.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그 무엇도 아닌데/그 무엇이 되어 가는 중이다//나는//이것, 저것, 그것이/느리게 되어 가고 있다”(「바람행성」). 그런데 어느 한 존재자가 “무엇으로” “이동”할 때의 모습은 껍질이나 옷을 탈피하는 이미지로 그려지곤 한다. “오늘의 수피를 벗는 나무/오늘의 살비듬을 털어 내는 사람/오늘 하루치의 고양이를 가죽 밖으로 밀어내는 고양이”에서 그려지듯이, 언뜻 변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탈피하는 것이 그 존재 자체의 변화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 세계에서 무언가가 되었다가 다시 무존재로 돌아가는 일은 “무엇의 몸을 입었다가 입은 몸을 벗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무엇도 아닌 게 되”는 일은 생명 있는 모든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거듭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시/그 무엇이 되기 위해 악착같이”라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 시의 첫 문장인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일의 순환이 모든 존재자에게 살아 있는 내내 이어지는 것이라는, 삶에 대한 박영기 시인 특유의 섭리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네 껍질은/네 살이고 네 피고 네 뼈다”(「접착테이프와 구운 감자」)라는 창조주의 언명과 같은 말이 가리키듯 이 시집에서 ‘껍질’이 가장 근본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삶이 ‘되기’와 ‘되기로부터의 탈피’의 연속이라면, 껍질 안의 알맹이가 또 다른 껍질을 겹겹이 입고 들어차 있는 양상이 생과 사의 원형임을 암시한다. “알맹이가 알맹이를 밀어 올”리는 상승의 장소이자 “까고 까도 껍데기뿐”인 하강의 장소로서 껍질의 적층 자체가 역방향의 대칭을 이루며 생사의 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기억의 오류」) 그렇기에 껍질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예감하는 것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이렇듯 박영기의 『흰 것』은 분명히 소멸되면서도 소멸되지 않고 다른 생명의 이어짐을 예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임을 일깨운다. 1) 흰 것』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돼지’는 주로 죽은 돼지로 그려진다. 「비너스」에서의 잠자는 돼지 또한 “시취”나 “송장파리” 등이 암시하듯 이미 죽었음을 알 수 있다. 2) 「서식지」에서 추상적인 것이 감각 가능한 물질의 형상을 입고 더 나아가 생물로까지 변화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기도는 생각만으로도 은총이 비처럼 쏟아진다/샤워기에서 뼈가 훤히 보이는 물뱀들/나에게 다섯 번째 면사포를 씌운다”에서 “은총”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과 결합하여 물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다시 여러 줄기로 나뉘어 쏟아지는 속성에 착안하여 “물뱀”에 비유된다. 이후 “물뱀”이자 “물줄기”인 것은 흰색과의 유사성으로 “국수”나 “흰떡”에 대한 연상으로 이어진다.

계간 파란 최다영 박영기시집평론비평리뷰파란 2024
최다영 비평 게임 설계하기 :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비평 게임 설계하기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1) 1. ‘시―쓰기’를 읽는 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취미를 묻는 질문에 어느 팀 스포츠를 말하면 ‘하는 것’과 ‘보는 것’ 중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그때마다 (현장 관중이 아닌) 화면 너머로 경기를 보는 관람자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즐거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주어진 정보와 90분 내내 새롭게 축적되는 정보 및 변수 들을 바탕으로 매초마다 변화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예측과 복기가 즉각적으로 입력된다. 경기가 완결된 이후의 복기 과정은 나만의 의미화에 따라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한다. 나는 옵저버 나에 의해 재편된 경기를 읽는다. 물론 이는 경기에 직접 참가한 플레이어가 경기를 복기하면서 행위적 서사를 기입하는 경우와는 (일정 부분 겹친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동휘는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 이론에서 더 나아가 행위적 서사를 미적인 분투형 게임의 독자적인 특질로 제안한다. 그는 노엘 캐럴이 언급한 예술 작품 비평의 구성 요소 중 특별히 기술(description)에 집중하는데, 그에 따르면 장기적 행위자의 게임 감상이 미적으로 형성되고 공유되는 과정의 핵심은 감상 단계에서의 게임 경험 기술에 있으며 플레이를 기술하는 일은 반드시 서사로 이루어진다.2) 행위자가 자신의 게임 경험을 복기하는(review) 과정은 반드시 특정한 ‘환경’과 ‘제약’ 속에서의 ‘목표’ 추구라는 서사의 구조를 띠고,3) 플레이어이자 감상자인 자신을 ‘인물’이라는 구성 요소로 더함으로써 서사의 요건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서사화의 경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게임 경험은 행위적 서사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적 서사를 통해 예술 경험을 기술하는 장르”4)는 게임이 유일한 걸까. 나는 감상을 통한 행위적 서사의 산출이 시집을 읽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기획으로 묶인 텍스트들의 언어 배치를 게임 디자인에 준하는 미적 인공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시집 읽기의 한 목표를 내적 체계의 구성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작업은 각 행위자들이 지형지물을 활용해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일로 이어지는데, 이때 독자의 수만큼이나 무수한 시나리오의 발생이 가능하다. 시집의 독자는 읽는 동시에 (놀이를) 쓴다.5) 물론 이는 단순히 시적 요소들의 미적 조화를 감상하는 것과는 변별된다. 내적 논리의 결여를 텍스트 외부의 상상력으로 메우거나 독자의 ‘참여’로 원 텍스트의 전개에 영향을 가하는 하이퍼 서사와도 전연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시인의 ‘실제’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도 또한 무관하다. 오히려 쓰기 과정에서의 내적 필연성과 논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해보는 것에 가까운 이러한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는 해석하거나 알아맞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의 개별성과 서로 다른 문학적 지향들이 만나 경합할 수 있다면, 해당 텍스트는 단일한 해석에 구획되지 않고 다층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텍스트를 재편해보는 즐거움은 내게 비평 쓰기를 촉발하게 한 중요한 심적 계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쓰기를 재편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해의 제안은 시를 읽는 다양한 즐거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평의 역할을 확장하는 일과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비판은 넓은 의미로 분화되고 확장되면서 여러 생산적인 비평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편의적으로 분절된 이분법적 준거에의 귀속을 경계하고, 같은 논의의 반복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판적 읽기의 역량과 그 즐거움을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독해의 방식들을 다양화하는 것이 지금 비평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 시를 읽는 방법들이 더 많이 제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어떠한 경향의 시집들은 독자적인 규칙과 세계관을 갖추고자 스스로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비롯해 타 장르의 속성을 차용하던 것이 이전의 경향성이었다면, 요즘의 풍경은 시집 자체가 하나의 출입 가능한 가상 세계관이 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창작 및 기획에서 목적이 되는 것은 ‘시’보다 ‘시 쓰기’ 자체라 할 수 있으므로, ‘시’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보다 유효한 독해의 방법이 제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기능적 장치로서의 ‘사랑’과 익명의 시 쓰기 이러한 생각은 『멸망법』을 읽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멸망법』의 시적 전략은 추상성과 비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별 구체성을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것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온통 새하얀 벌판”(「팩맨」)이라는 장소가 대표하듯 이 표백된 세계에서 묘사와 디테일은 극도로 제한되고, 비의적 진술은 빈번히 등장한다. 또한 “가장 큰”(「플라스틱 아일랜드」), ‘모든’, “아주/먼/곳”(「여름에 꾼 꿈」), ‘마지막’, ‘영원히’ 등 최상급 수사와 의미화 개념이 큰 추상어가 거의 모든 시에 동원된다. ‘사람들’에 대한 묘사 또한 ‘아무도’, ‘누구나’, ‘누군가’ 등의 익명의 집단 군중으로 처리되는데, 이들은 얼굴 또한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현실감 주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아마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이다. 이 아름다움의 실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은 반면, 비현실성의 의도가 개입되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아름다운’이라는 관형어가 등장한다. ‘사랑’이 사용되는 용례도 마찬가지다. 시집 내 행위자들의 명분은 ‘사랑’이라는 추상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자 “절대로 끝나지 않”(「세계법」)는 절대적인 가치로 제시되지만, 그러한 언명을 통해 사랑을 수식할 최상급 수사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사랑’이 마치 기능적 어휘처럼 쓰이는 것이다. 이처럼 『멸망법』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추상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그 단어 자체가 내포하리라 여겨지는 비의적 속성에 맡겨져 있다. 이 세계관에 익명의 누구든 새로 기입할 수 있도록 어휘 사용을 제한한 것인지, “굼뜬”(「테라포밍」) 창조주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함인지, 「스카이다이빙」에서 화자의 고백처럼 상상력의 곤혹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향성은 이미 동시대 시의 한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경향이 강한 이러한 시들을 잠정적으로 ‘가속류’라고 칭하자. 그런데 이들에게 앞서 마련된 어떤 기준을 성급하게 적용하여 구획과 할당의 영역으로 곧장 넘어간다면 지금 시의 중요한 한 징후를 통해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낼 여지는 축소되고 말 것이다. 고선경의 시가 암시하듯 이미 동시대인들은 “채널을 바꾸면”(「무대륙」) 리셋이 가능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이전의 인간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위치에서 보다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할 생산적인 질문을 먼저 모색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을 전환해보자. 이러한 시 쓰기는 왜 필요했으며 시인에게 어떤 유용을 주는가? 이를 통해 시인은 어떤 효과를 도모하고 있는가? 이러한 시 쓰기를 통해 발생했을 즐거움을 독자는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봤듯, 한 권의 시집을 미적 인공물로 가정하고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중층적 행위적 서사를 축조해보는 것이 시를 읽는 유의미한 즐거움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발생 가능한 무수한 시나리오 중 나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희재의 세계’를 보존하는 파수꾼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그 내부의 또 다른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현실화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이를 시집 제목으로 차용한 것에서부터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듯, 변혜지의 『멸망법』 또한 세계를 완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 창작 노동자 ‘신’의 시점과 그 신이 쓴 소설 내부 화자의 시점으로 구분된다. 구체적으로 ‘창’을 경계로 그 안과 밖이 구획되는데,6) 이때 창밖의 게임 아바타 ‘나’는 미리 입력된 행위를 매크로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는 언급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아바타 화자는 다시 ‘문’의 안과 밖으로 구분되는데, 문안에는 “소분”(「테라포밍」)되어 비상용으로 보관된 복수의 ‘나’들이 존재하고, 문밖에서 실패하면 다시 문안으로 회귀한다.(「예쁜꼬마선충」) 또 『전독시』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멸망법』에서도 게임의 회차가 반복되는데, 매 게임의 시연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꿈속’을 감상하는 옵저버(observer)로서의 ‘나’ 또한 이 시집에 중층적 시선을 드리운다. 그 각각의 층위는 구분되지 않도록 의도되어 있지만, 엄밀히 각각 다른 층위에서 ‘나’의 시점들이 교차되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목표는 ‘이번에는’ “완벽한 엔딩”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생(시―게임)’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너’가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손가락」)(「모자의 일」) 그리하여 사랑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아바타인 ‘나’는 이미 “곤죽이” 된 상태이지만 “다시 태어”(「손가락」)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즉, 게임을 리셋하여 다시 시작할 기능적 구실을 ‘사랑’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하였다”는 서술어로부터 시작되는 다음 인용 시는 이 세계관의 목적이 달성되어 이상적인 결말로서 사랑이 성사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을 굽혀 희재의 운동화를 벗기고 씻지 않은 몸을 침대에 눕힐 것이다.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희재의 배를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깨어날 것이다. 깨어난 사람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속의 풍경이 함께 명멸할 것이다. 어둑한 천장이 서서히 밝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감아. 침 흘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파수꾼이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나는 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려다 말고, 34평방미터의 세계를 잠근다. 그 속에서 희재는 내내 안전할 것이다.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부분 여기서 ‘나’는 희재가 잠들자 희재가 속해 있는 공간 자체를 닫고 그 앞을 파수꾼 개가 지키게 한다.7) 단언에 가까운 진술인 마지막 문장은 마냥 기능적 목적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정도 해명해준다. 『멸망법』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시선 안에 가두어서 보존하는 것이다. “놀이”와 “이지메”(「플라스틱 아일랜드」)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다소 섬뜩하더라도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된 관심 말이다.(「희박하게 끓어오르는 물」, 「브릭하우스」) 이러한 “파수(把守)”(「세계법」)가 이 세계관에서는 ‘사랑’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멸살법」 차용의 연장에서, 『멸망법』은 이 시집의 독자일 무수한 ‘김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독자’ 중 하나로서 『멸망법』을 읽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느 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시집이 현실화될 일을 대비하기?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보며 이 시집을 가지고 더 잘 ‘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독자’가 “디지털 사이보그”이면서 “크리에이터이자 스트리머”8)가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 플레이를 연출하면서 독자가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 일이다. 4. 버블 기분 『소다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엉뚱한 상상이 자주 끼어든다는 것이다. 고선경은 주로 어느 공간에서 바라보이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단상이나 공상을 동시에 쓴다. 그리하여 단문의 묘사와 연상이 짧은 행 단위로 빈번히 교차 전환된다. 가령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는 짧은 단락에서 화자는 자신이 클로즈업한 장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단상을 빠르게 옮겨간다. 그리고 수시로 틈입하는 상상은 주로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뭐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에서 비롯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연분홍색 다이얼 전화기를 빤히 쳐다봤어 나는 가끔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상상을 해 조용하고 신비한 (…) 케첩 묻은 앞치마를 두른 네 정체가 실은 스파이였으면 좋겠어 메론소다에 이상한 가루약을 넣었으면 (…) 음악이 배경이 될 수 있다면 생각도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속에서 생각을 스파게티처럼 포크로 돌돌 감는다 그리고 우리는 스파이답게 몰래 눈빛을 주고받지 짜이찌엔…… 워시환니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어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죽은 사람 노래를 다 듣네 생각은 불어서 포크 끝에서 툭툭 끊어진다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신주쿠 시먼딩 킷사텐……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가라앉는 메론소다의 기분 ―「메론소다와 나폴리탄」 부분 이때 ‘생각’이 파스타처럼 감아 먹을 수 있는 물성으로 제시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생각은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도 시끄러”(「츠키에게는」)워서 현실의 청각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화자를 “쓰다듬”(「샤워젤과 소다수」)는 것 또한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메론소다의 기분”(「메론소다와 나폴리탄」)과 같이 ‘기분’이 감각적 이미지로 대신 제시되는 것 또한 『소다수』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날의 기분”(「여름 오후의 슬러시」)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고선경은 경험한 감각 자체를 기분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감정을 이미지로 느낀다기보다, 기분이라는 것 자체가 그날의 이미지에 각인된 감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바람만으로도 감각을 환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9) 한편 『멸망법』에서 기능적 역할을 겸하던 것이 ‘사랑’이라는 시어였다면, 『소다수』에서는 빗물이 끓는 이미지가 강박적으로 돌출하면서 이미지의 각운을 형성하는 양상을 눈여겨볼 만하다. 끓는 빗물이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리며 몰아치거나, 빗속에 피워둔 향이 꺼지지 않거나, 불타는 나무 위로 비가 내리는 이미지 등은 모두 그 변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가능의 이미지들은 시부야 취향과 일상 ‘추구미’,10) ‘킹받는 밈’과 시시껄렁한 농담, 색색의 디저트, 향기와 맛으로 대표되는 감각 묘사 사이로 돌연 나타나 이 세계의 혈당을 적절히 낮추는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선경의 개인적 이미지는 「밝은 산책」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소다수』에 수록된 여러 시에서 죽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고선경의 ‘개복치’ 화자들은 툭하면 죽고, 또 그 죽음을 희화화한다. “어디서든/간절하게 살고 싶진 않”(「파르코백화점이 보이는 시부야 카페에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수정과 세리」) 만들고자 하는 심적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러한 모습은 “세계를 구할 영웅의 운명”(「무대륙」)이라는 일시적 행위성으로부터 일부러 이탈하여 ‘사냥’ 대신 다른 모험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플레이어의 형상에서도 발견된다.11) 어쩌면 이는 고선경에게 ‘사랑’인 것과도 긴밀히 연동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혜지에게 사랑이 멸균 지대를 만들어 대상을 보존하고 지켜보는 것이었다면 고선경에게 사랑은 뒤엉켜 정체가 불분명한 여러 기분의 갈래들을 섬세하게 “더 잘 구별해”(「사랑의 달인)」내는 능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서로의 취향에 감염되어 뒤섞이고 싶은 마음이다.(「사이버 시옷시옷」) 이러한 양가성과 소통에의 지향을 필연적인 사랑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가 감상 활동을 통해 생성하게 될 서사화 과정 또한 그 사랑의 구체성을 직접 기술해보는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우주 달팽이 정거장」)일 뿐이다. 1) 이하 본문에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멸망법』으로, 수록작인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는 각각 「손가락」, 「멸망법」, 「세계법」, 「희재계」, 「하늘과 땅」으로, 『샤워젤과 소다수』의 경우 『소다수』로 표기한다. 2) 이동휘, 「게임, 서사, 감상―『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이전과 이후」,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p.106. 3) 같은 쪽. 4) 같은 글, p.107. 5) 이때 게임의 목표는 서사 창안이기 때문에 행위적 서사는 중층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표면적인 서사에서 ‘인물’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시집의 독자이지만, 내부 서사에서는 ‘화자(들)’이 ‘인물’로 놓인다. 6) 한편 희재가 창조물이면서 ‘신’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모습은 이 내부 세계가 또다시 창작자와 창조물들로 중층화되어 있음을 암시한다.(「Enter the World」) 이는 『전독시』가 ‘김독자’의 독자이면서 후원자인 ‘성좌’의 존재를 가정한 대표적인 ‘성좌물’임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이자 크리에이터의 관찰 구도가 무한 소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7) 이 시에서는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오마주가 두드러진다. 「오수」의 변주처럼 보일 수 있는 요인들을 적극 활용하는 「희재계」 외에도, 「하늘과 땅」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기 위해 ‘생각’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은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는 「오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시에서는 에반게리온의 세카이계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는데, “여러 장르 요소들이 결합한 키메라”인 『전독시』와 마찬가지로, 변혜지의 시 또한 동시대 시의 주요 모티프와 “웹소설 상품미학의 우세종”을 적극 차용하여 ‘키메라-시’가 되기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전독시』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 유인혁, 「사랑의 사이보그: 한국 웹소설에 나타난 디지털 사이보그와 친밀성 자본의 상상력」, 『현대비평』 2021년 가을호, pp. 65~66. 키메라의 목적은 유기체 형성으로 응집된다는 점에서 패스티시나 ‘접붙이기’와는 다르다. 『멸망법』은 가속류이면서 차용해온 조직들로 자체적인 세계관을 축조하는 ‘가속류-키메라’인 셈인데, 이는 뒤이어 살펴볼 고선경과는 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8) 유인혁, 같은 글, pp.70, 72. 9) “온천에 가고 싶다/한여름에 그렇게 말하니까 쪄 죽을 것 같은/더위가 입속까지 밀려들어오는구나 열대야/열대야니까/노상에서 과자 한 봉지 펼쳐놓고 캔맥주를 마신다”(「연장전」) 10) “내 파란 담뱃갑, 투명한 뿔테안경, 외국어가 적힌 티셔츠, 절간 냄새, 팥빙수 모양 핸드폰 고리, 처피 뱅, 빌어먹을”(「일요일 오전의 짜파게티」) 11) 시의 배경은 RPG 메이플스토리의 수중맵 아쿠아리움이다. 이 게임에서 사냥을 하지 않으면 경험치를 쌓지 못해 다음 레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몬스터를 수천 마리씩 사냥하는 ‘노가다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지만, 이 플레이어 화자는 몬스터가 귀여워서 죽이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이봐, 몬스터/너에게도 엄마가 있나?”(「몬스터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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