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현대시학 2024년 11-12월호(제622호)
아포리아와 유포리아 사이에서 ― 기원석, 『가장낭독회』 (아침달. 2024)
세계의 틈
시 쓰기는 끝과 대화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시 쓰기란 세상의 모든 끝에게 말을 건네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 마침표를 오래 만져 닳게 하는 일이라고.
말은 입 밖에 나오는 순간 공기 속에 흩어지고 그 울림은 곧 스러진다. 사건은 일어나는 순간에는 현재지만, 바로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과거가 된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해보자면, 인간은 시간 안에 던져져 있으며 매 순간 과거가 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예술은 무수한 사라짐과의 사투이며, 시인들은 희미해지는 기억과 감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언어화하는 일에 투신한다. 기원석 시집 『가장낭독회』(아침달. 2024)는 이처럼 분투하는 예술의 현장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가장낭독회』의 많은 시들은 극시劇詩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극시를 접하며 느끼는 사실은, 시는 많은 면에서 연극과 닮았다는 것이다. 특히 말과 사건의 덧없음, 시간성, 그리고 의미의 유동성 측면에서 유사하다. 연극에서 무대 위 배우의 대사는 일단 입 밖으로 흘러나가면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시간으로 사라진다. 시 또한 독자가 읽는 순간마다 의미가 새롭게 해석되지만, 그 순간을 지나면 더 이상 같은 감정이나 해석을 재현하기 어렵다. 연극과 시 모두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해석에 따라 유동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말은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순간마다 새롭게 의미가 만들어지며 현실과 상징을 결합하여 더 깊은 해석을 이끌어낸다. 연극에서 배우의 대사는 관객이 듣는 순간, 각자의 해석과 감정에 따라 의미가 변형된다. 시 역시 독자가 각자의 배경과 감정으로 맥락화하여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연극과 시 모두 시간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고 할 수 있다. 연극은 특정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대 위에 펼쳐놓고 존재의 변화를 보여준다. 시는 특정 순간의 감정이나 사유를 포착하여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고민하게 한다. 일상적인 순간이나 사건들은 연극과 시에서 더 깊은 철학적 의미로 확장된다.
연극에서 관객은 사건을 눈앞에서 보지만, 결국 한순간에 불과하며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거나 왜곡된다. 시 또한 읽고 난 뒤 독자의 기억 속에서는 원래의 형태로 남지 않는다. 기억과 재현의 불완전성, 불확정성은 공백을 만든다. 그런데 말해진 것/공연된 것의 비어 있는 부분이 바로 새로운 해석과 변화의 가능성을 창출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끝’이 또 다른 ‘시작’이 되고, 다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변환적 힘을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수행성의 미학’1)이라고 불렀다. 기원석의 시에는 바로 이러한 수행성의 미학이 있다. 그의 시에는 마치 무대와 같은 공간이 창조되고, 그 안에서 물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의지와 에너지가 충만하고 역동적인 반응을 촉발시키는 힘2)이 생성된다.
아포리아는 그리스어로 ‘통로 없음’ ‘길이 막힘’이란 뜻으로,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없는 난관, 근원적인 모순을 의미한다. 기원석의 시는 모호하며 우리에게 난해한 문제처럼 다가온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해서든 언어의 땅에 위치시키려는 것이 시 쓰기라 할 때 기원석은 그중에서도 특히 어렵고 험한 지대에 자신의 언어를 올려놓으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매혹적인 사랑처럼 혹은 인생처럼 패러독스와 불일치, 부조리 그 자체를 품고 노래하는 그의 시적 아포리아는 읽는 사람을 서서히 휘말려 들게 한다.
세계 끝에서
독자 한 명이 일어났다.
독자를 괴롭히는 장난은 그쯤 하자고
더는 가담하고 싶지도
시간을 버리고 싶지도 않다며
뒤돌아선 독자를
총알 한 발이 관통했다.
독자의 고통과
독자의 주검과
독자의 분노를
낱낱이 헤아리던 작가
세계의 틈에 책갈피를 끼운다.
― 「현대시독법」 전문
「현대시독법」은 이 과정에서 독자와 작가가 만들어가는 관계성을 탐구하고 있다. 시는 "세계 끝에서 독자 한 명이 일어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독자가 '일어난다'는 표현은 물리적 움직임뿐만 아니라 의식의 깨어남을 함축한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은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갖는 역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현실인 ‘이곳’과 현실 너머의 ‘저곳’ 사이에는 틈이 있다. 시인은 그것을 ‘세계의 틈’이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것, 간과되기 쉬운 부분, 또는 일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숨겨진 측면은 바로 이 ‘틈’에 있다.
새로운 시각이나 이해가 시작되는 지점이며 이것이 시의 출발이다. 일상적인 경험을 초월하여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의 다양한 층위를 탐색할 수 있는 첫걸음이며, 이 틈을 넘어가면 ‘변화’가 기다린다.
왜 “세계의 틈에 책갈피를 끼”우는 것일까? 책갈피를 끼우는 것은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는 행위이므로 ‘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책을 읽다 일시적으로 중단할 때도 책갈피를 끼워놓는다. ‘세계의 틈’은 사실 “세계의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일단 ‘멈춤’과 ‘일시정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읽을 때는 바로 그 책갈피에서부터 재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책갈피는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며 새로운 장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의미 깊은 상징이다.
시인은 우리를 이끌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갈지 도무지 모르겠다 싶은 기분으로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아이처럼 무작정 걷다 보면, 시인은 뒤돌아보며 무언가를 건넨다. 거기에는 ‘튜토리얼’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튜토리얼 no.1
이 시집에는 「튜토리얼」이라는 제목의 시가 6편이 있다. 튜토리얼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술이나 개념을 처음 접할 때 도움을 주는 안내서나 지침 역할을 의미한다. 이 시집 속에 여러 편 등장하는 이 「튜토리얼」은 넘버링을 하지 않아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시가 이어지는 듯 느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튜토리얼의 사전적 의미처럼 이 시들은 일종의 학습 과정, 독자나 관객이 시와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을 상징한다. 불확실하고 불명확한 시의 의미를 어떻게든 이해하려 거듭 시도하는 것이 ‘시 읽기’이며 이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요구한다.
첫 번째 「튜토리얼」(13~14쪽)은 시詩의 실연實演 혹은 시의 공연을 상상하고 있다.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가 무대에 오른다는 설정은 각기 다른 시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관객들에게 제시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시들이 동시에 읽히며 서로 섞이고 충돌하는 상황은, 각 시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지만 그 목소리가 동시에 다른 시들과 뒤섞이고 혼재하여 혼돈을 야기함을 암시한다. 「튜토리얼」은 이와 같은 시 공연의 상황을 통해 언어의 불협화음과 소통의 한계를 묘사하고 있다. 여러 시들이 동시에 낭독되는 무대는 하나의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각기 다른 목소리가 충돌하는 혼란을 독자와 관객에게 야기한다. 이 작품 속에서 각 시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목청을 돋운다.
시는 독자에게 다가가려 하고 독자도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둘의 조우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단어들이 뒤섞이고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자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시 속에서 철제 의자가 쓰러지고 관객이 사라지는 모습은 소통의 부재가 극대화된 상태를 상징하며 결국 시 공연은 중단되는데 이는 언어의 한계, 예술과 수용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난해함,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무력감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 속에서 다섯 편 혹은 열한 편의 시가 무대에 올라 각기 다른 목소리로 뒤섞이고 충돌하는 상황처럼 시는 단순히 문장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어려운 해석 과정을 요구한다. 독자가 일종의 '튜토리얼'을 거치며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 언어의 불협화음 속에서도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혼란스러운 시의 세계에 입문하려면 스스로 그 혼돈의 일부
가 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튜토리얼 no.2
두 번째 「튜토리얼」(16~20쪽)에서 시인은 한 편의 글이 시작되는 순간, 이미 끝나는 순간을 생각하고 있다. 문학적 규범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규범 자체를 의심하는 데서 비롯된 혼란과 자유를 그대로 풀어놓고 있는 시다. 이 시의 서두에 있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용문(If the rule you followed brought you to this, of what use was the rule?”)이 인상적인데, 이는 규칙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규칙이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거나 예상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질문은 시와 글쓰기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낸다. 시나 글에 있어서 '시'라는 형식 자체가 반드시 의미를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형식과 규범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시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시적 의도를 전달하는 배역시配役詩의 성격을 띠고 있다.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을', '정', '병'은 시와 글, 나아가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시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논의하지만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모호해진다. '고양이에 대한 고양이'나 '수도꼭지에 대한 수도꼭지' 등은 자아나 사물의 본질과 정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문장들이다.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주체의 불가능성을 암시하며, 시 역시 그것 자체로는 불완전한 무언가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이 시는 언어와 글쓰기가 본질적으로 규칙을 따르지 않는 과정이자 끊임없는 실험임을 암시한다.
이 시는 문학적 규범과 형식을 따르면서도 그것이 무너질 때, 시가 어떻게 무의미해지는지 또한 반대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지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무의미로 가게 될지, 새로운 의미로 가게 될지 알 수 없더라도 시인은 ‘끝’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고 끝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튜토리얼 no.3-no.4
세 번째(43~44쪽)와 네 번째(73~74쪽)의 「튜토리얼」은 창작의 과정과 자아에 대한 성찰, 자의식과 무기력함, 창작자와 작품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세 번째 시는 표절과 이에 따른 좌절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시의 화자는 다른 사람의 창작물에서 기시감을 느끼고, 그것이 표절된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뒤섞으면 들키지 않을 줄 알았겠지. 이런 걸 쓰고도 순진한 척 작가 행세를 하다니. 넌 표절자야. 배신자야. 기만자야. 남의 문장에 빌어먹고 살 새끼야. 너 따위에게 속을 줄 아냐?”라며 분노하고 그 작품이 지면에 실린 것을 보며 좌절한다. “몇 명의 시인과 몇 편의 소설과 몇몇 독자와 기타 등등을 기워 붙인 조잡한 누더기가 나보다 먼저 지면에 오르다니 나도 이렇게만 썼으면 몇십 편이고 몇백 편이고 쓸 수 있는데”라고 자조하며 더 나은 글을 쓰려고 더 어려운 길을 택했다가 좌절하게 된 자신의 상황을 묘사한다. 시적화자는 글을 더 진
실하게 쓰기 위해 자신이 썼던 글과 구도를 파괴하고 감정마저 억누르려 하지만, 결국 영화를 보며 잠들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사랑스러운 좀비가 등장하고, 주인공은 좀비를 사랑하며 그에게 로얄 버블밀크티를 먹이려는 헛된 노력을 한다. 이 장면은 창작의 허무함, 무의미한 반복, 그리고 결과적으로 찾아오는 패배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의 마지막 부분은 창작의 고통과 무기력을 상징하는 장면들이 쌓이다가 “다음 장면에는 기막힌 반전이나 절망적인 클리셰 대신 아침이 오고” 그냥 평범한 다음 날이 시작되는 것으로 끝난다.
네 번째 시는 게임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상징적인 서사를 통해, NPC(비플레이어 캐릭터)를 내세워 창작의 무력감을 표현한다. 화자는 게임 속 NPC들과 상호작용하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끝내 바다슬라임에게 맞고 수영도 못 하며 레벨도 오르지 않는 무력한 상태에 놓인다. 이 시에서는 주인공인 듯 보이지만 결국 화자 자신도 NPC처럼 기능적으로 소모될 뿐이라는 절망적인 시각이 드러난다. 화자는 자신이 NPC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며 초라한 존재로 마감될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이 두 편의 시는 공통적으로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고뇌와 좌절을 다룬다. 앞의 시에서는 표절에 대한 자의식이 창작의 무력감으로 이어지며, 뒤의 시에서는 게임 속 캐릭터(NPC)처럼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화자의 상황이 주는 깊은 무력감을 표현한다. 앞의 시에서 그는 더 나은 글을 쓰려고 애쓰지만 무력하게 잠들고 뒤의 시에서는 게임에서 레벨이 오르지 않는 채로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한다. 앞의 시의 화자는 스스로가 표절을 피하려고 애쓰는 진정한 창작자임에도 불구하고 좌절감을 느끼는데 이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창작물을 판단하고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기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가 느끼는 좌절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 발생하는 실존적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창작자는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자유는 필연적인 고통과 함께 온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이
기도 하다. 따라서 불안을 인정하고 그것을 품어야만 한다. 결국 그는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시의 결말에서 화자는 그저 아침이 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시인이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모든 고뇌와 무력함이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일상의 일부임을 암시한다.
뒤의 시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존재의 무력함이 두드러진다. 정해진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게임 세계 안에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인 NPC를 창작자에 대한 비유라고 생각해 보면 시인은 조연 혹은 관찰자로서의 자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창작자의 자아, 창작 과정을 성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창작자는 자신이 이야기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외부의 규율(비평가, 출판 시스템, 독자의 기대 등)에 의해 통제됨을 깨닫게 된다. 창작자의 의도대로 작품이 평가되지 않거나, 주목받지 못하거나, 외부적 요인에 의해 창작 방향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앙장브망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시 「CONFIDENTIAL」에서 두 번 반복되는 문장 “간격 없이 반복하기”는 이러한 고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이것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부유하는/ 몽롱한 정신 유지하기”가 문제일 뿐이다,
튜토리얼 no.5-no.6
다섯 번째 시(108~ 112쪽)에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시인 자신이 언급된다. 시적화자는 ‘기원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튜토리얼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로 본편에 진입하지 못한 채 그저 반복과 실패 속에서 삶과 글쓰기를 경험하는 인물의 상황을 묘사한다.
시는 '튜토리얼'과 '본편'이라는 두 개의 구분을 통해 삶과 창작의 과정을 메타포로 나타낸다. 튜토리얼은 준비 단계, 즉 무엇을 배우고 준비하는 과정이지만 시인 자신의 본명인 ‘기원석’은 이 튜토리얼을 끝마치지 못한 채, 본편에 들어서지 못하고 끊임없이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기원석은 삶을 진정성 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마치 괄호 안에 억지로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넣는 행위와 같다. 이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억압과 갈등을 나타낸다. “기원석은 자신에게도 진정성이라는 게 있다고 믿었고 ( ) 안에 삶을 일괄적으로 대입했다. 삶은 기원석에게 진정한 것이었으며”라는 구절처럼 그는 진정성을 믿었지만 결국 어떤 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독자들이 기원석의 집에 찾아와 그의 유고작이 될 만한 것들을 뒤졌”고, “기원석은 자신의 원고를 뒤질 독자들에게 튜토리얼을 남겨”둔다. “기원석의 삶은 튜토리얼에 그쳤”으므로 남긴 것은 튜토리얼뿐이다. 기원석의 삶은 반복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튜토리얼을 끝내지 못하고, 로그아웃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된다. 이 무한한 반복과 실패 속에서도 기원석은 원고지 앞에 앉아 결국 완성되지 않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또 쓴다. '진정성 있게 쓸 것'이라는 명령이 주어지지만 그 진정성 자체가 오히려 억압적으로 작용하여 기원석은 그 진정성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한다. 시를 쓰는 행위는 마치 튜토리얼처럼 시작과 끝을 가지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반복하는 과정을 상징한다. 이 시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고군분투, 그 자체를 고찰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끝나지 않은 배움과 실험의 일부이며 ‘튜토리얼’이고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로 계속되는 여정 자체가 삶이고 창작이라는 것이다.
여섯 번째 시(113~115쪽)에서 화자는 목적지나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어딘가로 향하는 인물과 밑도 끝도 없는 대화를 나눈다. 시 속의 대화는 일종의 안내 역할을 하는 인물이 삶의 여정을 제시하는 과정으로 보이지만 안내자는 인물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는 "강요하는 건 아니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 부분에서 "언제든 여기서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탈출할 수는 없으니까요"라는 구절처럼 완전한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 여정 자체가 ‘시’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를 붙잡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삶에서 혹은 창작과정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일종의 학습 단계, 즉 '튜토리얼'의 일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튜토리얼은 방향이나 목적이 명확하지 않으며 하나의 사건, 하나의 경험이 결국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고 우리가 겪는 고통이나 의문은 명확히 풀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흘러갈 뿐이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이제 깨닫게 된다. 이 "튜토리얼"은 삶, 글쓰기, 그리고 진정성에 대한 광대한 성찰을 담고 있으나 결국 쓸모없는 안내서라는 걸. ‘쓸모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읽으면 읽을수록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딱히 없음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튜토리얼은 끝나가고 우리는 여전히 헤매고 무방비한 채인데 앞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불안과 좌절, 고통 사이로 “멀리 날아가고만 싶은 기분”(「막」)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리피트Repeat
그리스어 'Euphoria'에서 유래된 '유포리아'는 강한 기쁨이나 행복의 상태를 의미하며 철학적 맥락에서 에피쿠로스학파와 연결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선으로 보았는데 여기서 쾌락은 육체적인 만족이나 순간적인 즐거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정신적인 평온함과 고통의 부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보다는 괴로움을 수용하며 과정 자체에서 평안과 만족을 찾는 일에 집중하는 시도다.
기원석 시의 시적 화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어떤 목표나 목적이라기보다는 순간을 수용하고 경험하는 과정 그 자체의 의미다. 불확실성 속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며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드러낸다는 생각은 인생에 대한 말이자 창작에 관한 말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창작에 관한 비유로 읽히는데 기원석의 많은 시들은 그런 의미에서 ‘시인이 시 자체, 시 쓰기, 또는 시인 자신에 대해서 쓴 시’를 의미하는 메타시 meta poem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적화자의 행위들은 단순한 목표 달성을 넘어서는,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창작의 여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기원석의 시적화자가 경험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일을 유포리아를 향한 추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상태는 흔히 불안과 고통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역설적으로 과정 자체를 수용하고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아무 대책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조차 과정 그 자체가 가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은 인생과 창작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재해석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실 길을 잃으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만나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낯선 곳에서 스스로와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고 무언가를 탐구할 기회가 생긴다.
마지막 문장입니다. R버튼을 눌러 시집을 다시 읽으세요.
(공백)
미안하오.
시가 좋아서 계속 누르고 있었소.
(그가 뒷걸음질 친다)
실은 당신이 R버튼을 누르지 않을 줄 알고 있었소. R버튼
같은 게 없어도 당신은 눈길을 조금만 위로 올리거나 페이
지를 넘기면 금세 첫 문장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말이오. 당
신은 계속해서 다음 문장으로, 또 다음 문장으로, 그렇게 마
지막 문장으로, 그러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넘어온 끝
에 여기까지 다다랐소.
━ 「마지막 시」 중
「마지막 시」에서 R버튼은 ‘재실행, 반복’을 수행하게 하는 리피트repeat 버튼을 의미한다. R버튼은 반복 순환되는 독서와 창작의 메타포로 등장한다. 이 시는 시적화자(창작자)가 독자와 대화-사실상 독백에 가깝지만 대화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를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가 마지막 문장에 도달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계속 시를 읽도록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R버튼의 존재는 독자의 행동이나 선택에 따라 시의 의미가 변화하고, 독자와 창작자의 관계도 계속해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독서는 무한한 과정이다. 시집을 마지막 페이지까지 펼쳤다 하더라도 독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롭게 읽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시의 제목은 「마지막 시」지만, 문학작품은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반복될 수 있기에 사실 마지막이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독자가 “결말에 목말라” 독서의 끝을 찾고자 하나 ‘끝’이 없기 때문에 무한 반복될 뿐이다. 화자는 "당신이 책을 덮지도 않고 내 뒤를 졸졸 쫓아올 줄은 몰랐다"며 “끝이라는 게 정녕 존재할 줄 알았소?”라고 말한다. 그리고 “끝도 없는, 망각에 잠길 독서 속에서 도대체 어디를” 보려는 것이냐고 외친다.
독자도, 창작자도 결코 단념하지 않기에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창작자는 다시 새로운 창작의 여정을 준비한다. 그는 끝없는 반복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창작자의 숙명이며 결국 독자와 다시 만나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저 멀리, 아까보다도 먼 곳에서 나는 돌아오겠소. 이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우연처럼 당신을 만날 때까지.”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돌아서서 “한없이 멀어”진다. “그를 대신해서 밀물처럼 차오르는 어둠”만이 남고 그는 먼 곳으로 사라지지만,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이 시는 독서와 창작의 관계를 재해석하며, 실제 『가장낭독회』 시집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시 자체를 읽는 경험을 메타적으로 투영한다. 하나의 책이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해도 독자에겐 ‘리피트’가 있다. “만에 하나/ 끝나더라도 우리는 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를/ 쓰고 기다리고/ 쓰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복합건물에서 기다”(「멀티엔딩」)리게 될 것이다.
“암전은 하나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제목을 입력해 주세요」)한다. 어떤 독자는 막이 내린 어둠 속에 앉아 커튼이 올라가기를 기다린다. 그는 아포리아와 유포리아 사이에 놓여 있는 이상한 길로 다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 길이 어떻게 무수한 갈림길들로 갈라지고 모이며 그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지 못하지만, 결국 끝없는 여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다음 순간에 무슨 문장이 도래할지 알지 못하는 운명처럼, 침묵 속에서 다시 읽어주시오. 무슨 뜻인지 알겠소?”(「마지막 시」)라고 말하고 떠나는 이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에 그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빛이 꺼지면/ 누군가 사라지고. 누군가 손을 맞잡고/ 무언가 남는다.”(「벽 앞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려도 우리는 남은 것들을 위해 산다. 대부분의 언어가 미끄러져 사라져도 시인은 남은 것들을 모아 글을 쓴다. 그렇게 삶도, 시도 계속된다.
- 1) 에리카 피셔-리히테, 김정숙 역, 『수행성의 미학-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과 새로운 퍼포먼스 미학』, 문학과지성사, 2017.
- 2) 위의 책,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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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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