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격월간 릿터 2024년 12월-2025년 1월호 (제47호)
구멍 난 해골 ― 김숨의 역사 쓰기
소설가 김숨의 굵고 기다란 궤적을 따라 걷는 일은 쉽지 않다. 폭력의 역사. 그 “깊은 정적에 잠긴” 그러나 “온갖 소리로 넘쳐”나는 폐허의 한 가운데를 뚫고 그것을 무겁게 응시하는 그의 작업은 짓눌리고 바스라진 갖은 소리를 불러모아 그들의 ‘떨어뜨린 넋’을 찾아 넣어준다는 ‘유타(ユタ)’1)의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충실한 길어올리기는 역사적 빈 틈새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구멍을 낸다. 언어라는 미처 매장되지 못한 해골이 저마다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김숨에게 구멍이 여러 개인 해골은 의도되고 기입된 소리를 넘어 스스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이다.
소목장의 불탄 오두막 마당에는 여전히 찾아가지 않은 해골들과 뼈, 손과 발목을 묶었던 철사가 널려 있다. 바람이 해골들을 악기처럼 가지고 논다. 해골은 구멍이 여러 개여서 갖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다. (293)
『오키나와 스파이』(모요사, 2024)는 그간 김숨이 집요하게 머물렀던 ‘역사의 존재론’을 또 하나의 형식으로 펼쳐 보여준다. 우리는 이번 소설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삶과 기억 문제를 다룬 『한 명』, 『흐르는 편지』,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는 물론, 1947년 9월 16일 부산이라는 ‘사라진 귀환의 시기와 장소’로 향한 『잃어버린 사람』이, 87년 6월에 짓이겨진 ‘운동화’를 재생하는 『L의 운동화』가 제 그림자를 찬찬히, 그러나 묵직하게 드리우는 것을 본다. 이들 소설의 겹침을 통해 우리가 새삼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문학이 분명 역사적 ‘진실’의 문제를 다루어왔다는 것, 그러나 철저히 소설의 방식으로 그렇게 해왔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집중하는 소설의 진실은 그것의 하나가 아닌 속성에 힘입어 무섭게 되살아난다. 이는 역사에 관해 말할 때, 객관적 진실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토대를 질문하는 일이 소설의 역사적 가능성임을 증언하며, 무엇보다 그것이 역사 그 자체의 가능성일 수 있음을 진지하게 증명한다.
김숨의 열 두 번째 장편소설인 『오키나와 스파이』는 1945년 오키나와 본섬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 ‘구메지마(久米島)’에서 벌어졌던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2) 소설은 ‘기무라 총대장’이 살포한 ‘미군 스파이’라는 공포의 안개 속을 헤집고, ‘스파이 장부’에 적힌 20 명의 무고한 이름이 훼손되는 숱한 밤을 뒤쫓는다. 언제나처럼 김숨의 소설은 그렇게 우리를 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데려다 놓는다.
섬의 북쪽, 소목장 오두막 마당.
섬 주민들이 닭이나 토끼를 토막 낼 때 쓰는 손도끼 모양의 달이 하늘에 떠 있다. 섬은 깊은 정적에 잠긴 것 같지만 온갖 소리로 넘쳐난다. 메마른 사탕수수 잎들이 서로 비비대는 소리, 짝짓기 철을 맞은 반딧불들이 금빛 은빛 선을 허공에 그으며 초조히 날아다니는 소리, 딱정벌레들이 손톱처럼 딱딱한 푸른 야광의 날개를 파닥거리는 소리, 동굴을 나온 박쥐들이 먹이를 찾아 숲을 휘저으며 날아다니는 소리, 묵직하고 둥그스름한 돌들이 한꺼번에 구르는 것 같은 파도 소리, 풀 한 포기 없는 빈 땅에 대고 낫을 그저 휘두르는 것 같은 바람소리….
[...]
그런데 오늘 밤 섬 어디에도 인간은 없다. (8-9)
정적에 휩싸인 섬은 메마른 사탕수수 잎들이 서로 비비대는 소리, 반딧불들이 초조히 날아다니는 소리, 묵직한 파도소리 등으로 소란하다. “어디에도 인간은 없”는 것 같은 이 땅의 고통을, 신음을, 분간할 수 없는 죄악의 형체를 “닭이나 토끼를 토막 낼 때 쓰는 손도끼 모양의 달”이 무심한 표정으로 반영할 때, 우리는 복원되는 ‘사건’의 줄기를 따라가기보다 그것으로부터 수없이 이탈하고 뒤쳐지며 섬 자체를 둘러보게 된다. 사건의 중심이 아니라, 섬의 한복판에 우리의 두 발을 붙들어 놓는 것. 그것이 김숨의 서늘한 문장이 증명하는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스파이! 스파이!” 소설 전반을 억누르는 기괴한 코러스는 “찢긴 시체”와 “피거품”(53)으로 이루어진 ‘죗값’에 관한 무성한 소문과 만나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진 섬의 공포이다. ‘기무라 총대장’의 스파이 장부는 미군과 접촉한 이들, 미군의 말을 옮기는 이들의 이름을 무차별적으로 호명하는 동시에, “1세 스파이”(80)라는 불가능한 죄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조세나 지라(조선인 얼굴)’를 죄의 얼굴로 선포하는 일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다. 아무도 실체를 손에 넣지 못한 이 장부는 말하자면 ‘스파이’라는 말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면서도 바로 그 불가능성을 발판 삼아 가능해지는 폭력의 연쇄, 고통의 역설을 지시하는 기표이다. 섬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죄의 실재를 뚜렷하게 규명하지 못한 채로 습한 구덩이와 돌무덤 안으로, 돼지 우리와 짚더미 속으로 한없이 내몰린다.
사건의 진위를 파헤치기 위해, 악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작가를 따라 총 12부로 구성된 섬의 구덩이에 따라 들어선 우리는 그러나 이 땅에서 명백하게 ‘꿈틀거리는 죄악’ 이외엔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일본의 패망에 달려 있다고 믿었던 폭력의 종결이 그 이후에도 무참하게 지속되는 것은 물론, 짓밟힌 넋의 흔적을 증언해줄 것이라 믿었던 “땅이 미쳐서는 조선인 고물상의 살을 할퀴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일, “돌멩이도 미쳐서는 송곳니가 돼 그의 살을” 찌르고, 바닷 바람마저 “성난 낫이 돼 그의 얼굴 위에서 춤을”(345) 추는 일이 끝을 모르고 이어지기 때문이다. 섬이 제공하는 것은 진실의 정당한 승리를 위한 분명한 사료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긴다.
그는 토란 알줄기 같은 발가락을 우그려 땅을 잡는다. 섬을 통째로 움켜잡듯 젖 먹던 힘까지 발가락에 모아 땅을 움켜잡고 버틴다.
산가키는 땅에서 죄악이 꿈틀거리는 걸 느낀다. 그것은 섬에 없던 죄악이다.
‘이 죄악이 어디서 왔을까?’
(206)
김숨이 붙잡아 반복하는 질문 역시 ‘산가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 죄악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질문을 지독하리만큼 되풀이하는 것이 소설가의 당연한 책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숨에게 섬은 “모르던 오키나와, 모르고 싶었던 오키나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가능한 형식은 역사의 무언가, 어딘가로부터의 돌발을 응시하게 하고 꼭 그것만은 아닌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며, 그 과정에서의 헤맴을 지면 위로 기입하게 한다.3) 소설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어떻게든 끝맺으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해야 했고 쓰고 싶지 않은 것을 써야만 했”4)던 것이다.
떨어진 수많은 넋을 가지런히 주워 들며 그 자신이 ‘하늘과 땅을 잇는’ 영매사이자 기록자임을 자처했던 작가 김숨은 소설의 끝에 언제나 자신의 ‘무지’를 고백한다.5) 그러나 그의 고백은 역사의 온전한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무력한 패배의식의 전시가 아니며, 혹은 그 어떤 ‘진실’도 불가능하다는 무책임한 물러섬 역시 아니다.
김숨이 건져 올린 넋은 그의 지면 위에서 해골의 형상이 된다. 언어의 다른 이름인 그것은 땅에 다 묻히지 못한 형태로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킨다. 그러나 『오키나와 스파이』가 보여주는 것은 소설 속 해골이 하나의 명백한 증거로 환원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적에 휩싸인 섬을 내내 부산하고 소란하게 만든 온갖 소리들이 증명하듯, 해골이 지닌 빈틈과 간극, 그 무수한 ‘구멍’이 해골을 떠도는 혼의 목소리는 물론 땅의 소리를 무한히 다양하게 연주하는 악기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선인 고물상’을 참혹하게 찔러댔던 바람이, 돌멩이가, 날 선 풀잎이 다른 날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올 때 그것을 기꺼이 다른 소리로 받아내 연주할 수 있는 악기 말이다. 김숨의 ‘무지’는 바로 그 해골의 구멍을 보존하려는 작가로서의 투지이자, 언어의 빈틈에 대한 충실한 믿음이다. 모르던, 모르고 싶었던 해골의 존재와 더불어 그것의 구멍을 성실하게 지켜낼 때, 역사는 단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생성 중인 것이 된다. 김숨의 역사적 존재론이 과거 뿐만 아니라 미래를 향해 온전히 개방되어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산가키는 딸을 섬의 북쪽 절벽까지 데리고 가 떨어뜨려 죽인 아버지의 망령이 되살아나 섬에 돌아다니는 걸 느낀다. 그 아버지는 일본 군인도 인간 사냥꾼도 아니다. 그 아버지는 마을의 경방단장들이고, 산가키 자신이며, 도축업자이고, 사토다. 다정하고 순박한 웃음을 잃고 돌덩이가 돼가고 있는 섬사람들이다. (207)
섬에 또다시 밤이 찾아온다. (293)
밤은 언제든 다시 찾아온다. 기원을 모르는 죄와 출처 없는 망령은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이 압도적으로 광활한 시간의 흐름이 모든 것이 이미 역사라고, 혹은 정반대로 그 무엇도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구멍 난 해골 앞에 선 자들은 다르게 말한다. 시간이 축적된 “땅을 움켜잡고” 버티며 서 있되, 구멍의 열림, 그 ‘무지’를 향해서도 온전히 열려 있는 것. 그처럼 시간을 다르게 헤아리는 것이 소설이 지닌 역사적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 1) 오키나와의 영매사. 『오키나와 스파이』에는 ‘넋을 떨어뜨린’ 사람들에게 무당이 넋을 찾아 넣어주는 오키나와 풍습이 언급된다. 흥미롭게도 소설은 무자비하게 살해된 희생자들이나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의 넋을 되찾는 일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스파이’를 처벌하는 데 혈안이 된 어린 소년 ‘겐’의 넋을 되찾아 주려 한다.
- 2) ‘구메지마 수비대 주민 학살 사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소설에 실린 발문을 참조할 수 있다. 오세종, 「숫자와 공백」, 『오키나와 스파이』
- 3) 작가의 말에서 김숨은 이 소설이 본래의 목적과 다소 무관한 자리에서 탄생했음을 알리고 있다. 2023년 3월, ‘조선인 위안부’ 장소 답사를 목적으로 방문했던 오키나와에서 사키마 미술관 특별 전시 <오키나와 전도>를 관람하게 된 작가는 이때 마주한 조선인 구중회의 이미지가 『오키나와와 조선의 틈새에서』(오세종, 손지연 옮김, 소명출판, 2019)에 기록된 그의 일가족 학살 사건과 우연히 겹치며 소설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 4) 김숨, 「작가의 말」, 『오키나와 스파이』.
- 5) “한 번 더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무엇에 대해, 누구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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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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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이다. 실로 역사는 분서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진행을 입증해 주었다. 임헌영은 저작물을 처형시키는 것이 작가를 간접 살인하는 일과 같다고 일갈한다. 필화란 글만 억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쓴 작가와 그 책을 읽거나 소지한 사람들 모두를 감시하고 처형함으로써 결국엔 그 안에 깃든 사상까지도 말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베카 크누스가 창안한 “도서 대학살Libricide이란 술어”(9쪽)는 과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 기반하여 필화 또한 국가폭력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임헌영의 주장이다. 그는 국가로 인한 인명 사상 사건을 지칭하는 국가폭력에 필화를 포함할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음을 이해하며, 그에 대해서도 충분하게 논증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헬렌 페인이 정의한 제노사이드의 범주 중 하나는 “국가에 의해 절대적 악의 화신으로 분류되거나 국가의 신화에 의해 적으로 분류된 집단을 집단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학살ideological genocide”(21쪽)이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폭력뿐 아니라 “정신 활동에 가하는 일체의 금지, 제약, 학대, 억압 등”(21쪽)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필화도 여기에 해당한다. 더불어 필화사건에 휘말릴 때 작가들은 구금되거나 감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를 폭력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임헌영을 따라 필화를 국가폭력의 일환으로 해석하게 되면 필화사건을 더욱 다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현대 필화사』를 읽으며 우리 삶에 필화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지 체감하게 된다. 2. 탄압받는 사람과 삶, 말살되는 글과 영혼 임헌영은 1945년 8·15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필화사건을 배치하고 탄압의 주체에 따라 부를 나누어 그 양상을 살핀다. 제1권의 경우 해방에서 이승만 집권기까지의 필화를 다루고 있으며, 아직 발간되지 않은 제2권은 사월혁명부터 박정희 정권의 몰락까지의 필화를, 제3권은 전두환 쿠데타 이후부터 윤석열 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사랑을 사랑하라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1) 1 '사랑'이 무엇일까? 역사가 오랜 시간 직면하기 어려워했던 이 질문은 요즘과 같은 시기에 특히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적대와 혐오, 분열과 갈등. 우리 시대와 가장 어울리는 단어의 나열이란 오히려 이런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특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소수자와 약자, 타인 및 '나'와 다른 모든 종류의 것들을 향한 오늘날의 적의와 냉소를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유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쉬운 일처럼 여겨진다. 인류 보편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과 희생이 요구되는 동시에, 폭력은 오직 또 다른 폭력을 낳기만 하는 지옥과 같은 풍경. 이런 때 사랑은 어딘가 순진하고 순정한 무엇, 때로는 음험하고 지배적인 권력의 하수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 사랑의 문제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누락된 사랑, 무언가가 함부로 전제된 사랑의 문제일까? '사랑'을 '윤리'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우리 지성사의 논쟁 테이블에서 '사랑'이 꾸준히 배제된 현상이 그것에 내재한 모호함을 충실히 사유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한다. 사랑의 본래적 위험성이 철저히 멸균된 '안전한' 사랑에의 열망. 세계의 복잡성을 하나의 당위로 봉합하는 무책임한 약속으로서의 사랑을 향한 집착. 이처럼 사랑에서 중요함-위험함을 박탈하는 온갖 종류의 사고는 '사랑' 자체는 물론,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타자와 윤리의 문제, 또한 우리의 유한성과 필멸성의 문제를 사물들의 즉각적인 법칙에 적용하는 일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그는 사랑을 제대로 예찬할 방법을 고안하는데, 그의 사랑론은 우리가 마주치는 숱한 이질적인 만남을 우리 모두의 '사건'으로 지속시킬 힘을 알려준다. 본질과 구별되는 사랑의 논리, 사랑의 특수한 원리 같은 것이 존재한다면 사랑에 내재한 그런 힘에 있다. "사랑에는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 존재"2)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환원된, 거의 아무것도 아닌, 기껏해야 단순한 만남 그 이상이 아닌, 이 출발점과도 같다고 할 어떤 것과 더불어서 우리는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시련을 받아들일 수조차 있으며, 이를 위해 고통을 감내해낼 수도 있게 됩니다. [..]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3) "단지 동일성만은 아닌, 차이에서 비롯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여전히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까? 그러니까 동일성의 무자비한 폭력과 차이의 무차별적인 관용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세계를 함께 경험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이 '사랑'을 사유하게 하는, "단지 하나의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그러한 "하나의 만남"(33쪽)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랑은 통념과는 달리 정태적이고 순수한 개념이거나 행위자의 부차적 행위를 요청하지 않는 자연적 상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사랑의 불확실하고 위태로운 지대. 이와 같은 속성이 부각되는 사랑은 잘 알려진 대로 문학의 오랜 친구이다. 대다수 서사의 원형에 비극적인 사랑의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문학과 사랑의 친밀한 관계는 단순히 내용에 국한된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태도이자 믿음으로서, 우리가 다룰 문제와 관련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하나의 '각오'로서 문학과 동행한다. 최근 출간된 한 권의 평론집은 우리에게 그 오랜 사실을 새삼 환기하려는 것 같다. 2 황도경의 일곱 번째 비평집 『사랑의 각오』(소명출판, 2024)는 우리 시대가 좀처럼 쉽게 발음하려 하지 않는 두 단어들, 그러니까 사랑과 비평을 나란히 내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다. 비평가는 서사와 서사 속 인물들의 행위, 말, 심지어 함께 먹고 함께 입는 모든 종류의 함께-있음을 '사랑의 선언'으로 읽고자 하는데, 그것은 그들 이야기와 장면의 세부가 바디우적 의미에서의 선언으로 비평가에게 당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선언은 우연이 고정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그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 내가 상대에게 선언하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결부시키는 무언가가 여기서 일어났다고 나는 그(그녀)에게 선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너를 사랑해"입니다. (...중략..) 그것은 하나의 우연이었던 것에서 내가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걸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낼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충실성은 이 단어의 보편적인 맥락에서 떼어내, 저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다시 사용해본 낱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연한 하나의 만남에서 그것이 필연적이었던 것만큼 견고한 구축으로 이행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가 어떤 특별한 공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의 약속, 즉 만남이 제 우연성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지속성을 구축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충실성이 정확히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4) 우연하고 우연적인 만남, 절대적으로 낯선 타자들과의 무분별한 마주침은 적의와 혐오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때로 어떤 종류의 우연한 만남은 "여기서 일어난 일, 이 만남, 이 만남에서 비롯된 에피소드들"로부터 “다른 것을 끄집어내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타자'의 분열과 분리의 감각을 하나의 통합된 도덕적 세계의 형상을 향해 떠미는 것은 아니다. 그 우연한 만남을 “견고한 구축”으로, 말하자면 마치 진리의 절차(procédure de vérité)처럼 우연을 지속적으로 추구해나가는 행위가 사랑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황도경에게 지금 우리 시대는 사랑을 "언감생심”으로 만드는 "절망과 분노"(3쪽)의 시대인 한편, 그럼에도 한켠에선 "사소하지 않은" 사랑의 선언들로 충만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비평가는 총 세 가지 단계 혹은 과정으로서 사랑의 테마를 재구축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평론집의 구성과 배치는 각각 사랑에 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1부 '사랑의 각오'에서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안보윤 『밤은 내가 가질게』, 정보라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김멜라 『제 꿈 꾸세요』, 김애란 『바깥은 여름』의 소설집과,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의 단편 소설을 거쳐, 2부 '사랑의 방식'에서는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승우 『목소리들』,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오수완 『도서관을 떠나는 책들을 위하여』의 한국 소설과 더불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및 영화 『남아있는 나날』과 『나를 보내지마』, 영화 , 18세기 조선의 문인인 '이옥'에 대한 비평으로 이를 증명한다. 3부 '사랑의 질문'에 이르면 우리는 장진영 『취미는 사생활』, 김영하 『작별인사』, 이승우 『사랑이 한 일』,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와 같은 비교적 최근 문학 작품들은 물론이고 영화 ,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로부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까지 그야말로 시간과 공간을 거침없이 이동하며 사랑을 마주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각오', '방식', 그리고 '질문'을 '사랑'과 나란히 놓는 이 평론집의 배치 방식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속격 조사 '의'의 두드러진 역할을 상기한다. '의'라는 조사의 존재는 사랑을 다양한 속성을 소유하는 사물처럼 인식하게 하는 동시에 '사랑' 뒤에 놓인 단어들을 능동적으로 행하는 주체의 자리로 이동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 사랑의 방식, 사랑의 질문.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각오'라는 최종 형식 또는 태도로 종합하려는 비평가의 욕망에 닿을 때, 우리는 사랑이 제 본위를 언제나 초과하는 형식을 내재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사랑이 사랑을 사랑하는 법, 달리 말해 우연성을 함께 있음으로 지속시키려는 예의 그 힘과 관련될 것이다. 그것은 비평집이 구체화한 순환의 논리처럼 각오-방식-질문 그리고 다시 각오로 돌아오는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는 소설 속 '나'처럼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의 삶보다 나 자신을, 내 삶을 끌어안고 사느라 전전긍긍이었다고, 아버지가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도 내뱉고 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두고 돌아올 적이면 놓지 않던 아버지의 손에 담겼을 절절한 마음과 아버지의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와 아버지가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렸을 만다라를 나는 알지 못한다고, 고백해야만 한다. 아버지는 삶을 끝냈건만 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과 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게 출렁거려서, 나는 억울하다고, 상처받았다고, 그때 왜 그랬느냐고, 소설 속 '나'를 따라 구시렁거렸다. 아버지에게 따뜻한 손도, 말도, 한번 제대로 건넨 적 없는 나는 그리움인지 허망함인지 모를 마음을 소설 속 말로 대신한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 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라고. (217쪽)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스스로의 삶과 나란히 두며 읽는 글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가 평론집의 '중간'을 표시한다는 것이 특별히 흥미롭다.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전직 빨치산이었던 소설 속 아버지와 전직 경찰관이었던 나의 아버지"(214쪽) 사이를 소설의 문장과 비평의 문장으로 부단히 겹쳐 놓는 비평가의 자기 글쓰기는 말 그대로 아버지라는 타자를 향한 사랑의 '방식'이자, 타자 그 자체를 향한 '질문'이며, 또 그것을 지속하겠다는 삶의 '각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정지아의 소설 속에서 마주친, 나의 아버지와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현실의 존재이거나 그렇지 않은 무언가/누군가와의 만남이 어떻게 방식과 질문 그리고 각오를 아우르며 차이로서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단계로 우리를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걸까. 무엇보다 그것은 이 모든 '선언'이 언어와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앞서 바디우는 “우연으로부터 내가 지속성·끈덕짐·약속·충실성을 이끌어"내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철저한 우연성을 시간 속으로 고정시키는 일. 그것은 언어의 형식으로 출현하는 '선언'에서 촉발되고, 이 출현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말하자면 충실하게 지속하도록 만드는 가장 기초적인 토대가 된다. 비평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설 속 아버지를 겹쳐놓으며 반복하는 '알지 못한다'는 문장은 이 모든 마주침의 철저한 우연성과 여전한 타자성은 물론이고, 그것의 지속성, 끈덕짐, 약속과 충실성을 수행적으로 실현한다. '알지 못한다'는 말로 끈덕지게 마주하는 우리의(타자의) 세계. 이 사랑의 방식은 곧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할아버지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필멸의 삶을 살고 있으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지만, 우리는 정신의 삶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라면, 그 시간들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세계를 인식하거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리고 신이란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라고. 나는 이 사랑의 신을 믿고 싶다. (192쪽) 미래를 낙관하기. 다소 무책임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이 '낙관'의 태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필멸의 삶에 가능한, 그리고 가능해야만 하는 유일한 태도일 수도 있다. 이백사십 년에 걸쳐, 혹은 이천사백 년에 걸쳐 이어지는 삶이 우리의 유한한 생에서도 가능한 방식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기억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확장 덕분일 것이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래의 기억'인 이유는 타인의 기억이란 결코 온전한 내 것일 수 없는, 제대로 도착한 적 없고 경험을 말할 수 없는 '미래'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토록 평범한 미래』(김연수, 문학동네, 2022)의 할아버지는 그런 것이 '사랑'의 정의라고 말한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미래의 기억'이 다름 아닌 나와 너의 무한한 다시 쓰기로 이어지는 것이라면, 여기에는 사랑의 선언이 남기는 찜찜하고 불가해한 질문들이 있어야 한다. 질문을 남기지 않는 사랑은 타인의 기억을, 그리하여 미래를 소유했다는 거대한 착각에 불과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의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아내, 아들, 동생이 된 자리에서 그들은 신, 아버지, 남편, 형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 하느님은 왜 그랬을까? 아버지 아브라함은 왜 그랬을까? 어떻게 자식을 죽이라고 명령하며,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며 자식을 죽이고자 했을까? 남편 아브라함은 어떻게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삭은 왜 에서를 편애했을까?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이 '왜'라는 질문을 통해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변모한다. (337쪽) “온통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부조리극과도 같아 보이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우리 세계의 맨얼굴이기도 하다. 충만한 기쁨보다는 부당한 부조리만을 더 많이, 더 자주 남기는 세상을 향해 섣부른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것. 그것이 동시에, 우리가 앞서 살핀 사랑의 방식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방법”이 “문장의 반복을 통한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339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각오』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우리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이 문장의 반복을 통해 단계적이고 점층적인 추론을, 무엇보다도 그것을 촉발할 '질문들'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각오-방식-질문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각오'라는 최종의 형식을 향해 운동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사랑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내재한 위험성과 그 위험성을 통과하는 데서 발생하는 고통을 인지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을 기꺼이 감내할 의지가 매순간 새롭게 선언되어야 한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7쪽)이다. 그러나 사랑의 징표인 고통과 고통의 표식인 사랑은 인과의 논리를 거스르고 선후관계를 마구 뒤집으며 우리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고통의 원인을 추적하는 이들에게 사랑은 그 존재를 쉽사리 증명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은 그것을 감내하며 다른 생성을 추동하려는 투지, 말하자면 사랑의 방식을 이행하고 질문을 이어가려는 “시간 속으로의 참여"5)를 마주하는 이에게만 긍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비평가가 작품이라는 우연성과의 마주침을 “시간 속으로의 참여"로 내던질 수 있는 계기는 단어와 문장, 그로 인한 삶들의 겹침에 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비평가가 발견한 '눈'의 겹침은 사랑의 '각오'를 촉발한 한 사례로 보인다. 이때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중략..) 그때 눈은 흉포한 폭력의 현장을 마주하는 몸이자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할 최후의 보루로서의 몸이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내'가 눈의 통증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끔찍한 고통의 현장과 폭력의 역사를 주시하기 위해서는 눈의 통증을 피할 길이 없다. 이 아픈 눈과 함께 '나'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4쪽) 눈은 하늘에서 내려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올라간 많은 먼지와 재가 결합한 것이고, 하얀 눈송이 안에는 수많은 결속을 통해 이루어진 텅 빈 공간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가볍다는 것은, 눈이 근본적으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니 눈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련을 환기시키는 매개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기도 하다. 검은 나무들을 심어주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나무들을 덮어주기를 기대했던 것도, 눈이 갖는 잠재적 비상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33쪽) 한강의 작품에서 '눈'은 "악몽의 근원인 폭력적인 현실과 참혹한 역사를 주시하는 몸"이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만든 '통증'은 같은 소설 속 세계에서 "죽음과 어둠을 이겨내는 비상의 동력을 가진 새"와 같은, “어둠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날아오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눈'이라는 고정된 단어는 역사적 의미에 철저히 종속된 무엇인 동시에, 그 의미를 스스로 초과하고 다른 의미를 파생하는, 단지 유한하지만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를 그저 발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눈'과 '눈'의 겹침으로 발견을 다시 쓰는 비평가의 작업은 그 자체로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하는 일과 같다. 장르와 문법,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제시되는 이 사랑의 선언들은 반드시 "다시 선언"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를 지속하기 위해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再演)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다시 찾아내야만 하"6)기 때문이다. 사랑에 각오가 필요한 이유, 그 방식을 끊임없이 새로이 고안해야 하는 이유, 무엇보다 질문을 생성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거나 신성할 만큼 총체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재발명되는 것으로 지속되는 무엇이다. 랭보와 바디우의 연이은 이 선언에 더해 『사랑의 각오』의 비평가는 메리 올리버의 질문을 되새기며 사랑의 선언을 다시 선언한다. “질문은 오직 하나뿐,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184쪽) 1) 이 글은 황도경의 비평집 『사랑의 각오』를 다룬다. 이하 문장을 인용할 경우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2)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사랑 예찬』, 도서출판 길, 2010년, 27쪽. 3)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같은 쪽. 4)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5~57쪽. 5)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59쪽. 6) 알랭 바디우, 조재룡 역, 위의 책, 62쪽.
『에너미 마인』과의 만남은 뭐랄까…… 운명적이었다. 때는 전 국민을 잠 못 들게 한 12월 3일로부터 열흘가량이 지난 어느 평일 저녁. 나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구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니 늘 눈이 피로했고, 집중력도 떨어져 독서는커녕 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매일매일 현실의 뉴스에 압도되어 실핏줄이 바짝 선 눈으로 휴대폰만 들여다봤더랬다. 가장 나를 괴롭혔던 건 ‘지금 소설 같은 걸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프리랜서인 나에게는 정해진 마감 날짜가 있었다. 도저히 가상 세계에 몰입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음에도 시시각각 디데이는 다가왔다. 나는 점차 초조함과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글을 써야 한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일단 잃어버린 텍스트의 감각부터 되찾을 목적으로 독서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우리 집 소파 옆에는 사거나 선물 받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한참을 살펴봤는데도 딱히 끌리는 게 없었다. 내 신경은 계속 휴대폰과 그날 이후 ASMR처럼 틀어 놓는 뉴스 채널으로만 쏠렸다. 이러다가는 또 한 줄도 못 읽겠다 싶어서, 일단 눈을 감고 책탑을 더듬다가 아무 책이나 붙잡았다. 그게 바로 이 샛노란 표지의 『에너미 마인』. 무려 1979년에 쓰인 SF이다. 처음엔 내 손으로 골랐지만 우려스러웠다. 하필 지금, 급한 작업에조차 집중을 못 하는데 가상의 시대, 미지의 행성을 배경으로 한 외계인 소설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중에 좀 더 심적 여유가 있을 때 읽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보드라운 표지의 감촉에 이끌려 책을 펼쳤고, 단숨에 몰입해 그날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겼다. 지금은 세상의 어떤 신묘한 흐름이 나에게 이 책을 만나게 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 시험 날에 예수님이 상장을 하사하는 꿈을 꿨던 것처럼……. 난 아직 종교가 없지만. 소설이 공개된 1979년은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냉전 시기다. 그런 국제 정세를 비유하듯 소설 안의 두 종족, 드랙과 인간 사이에도 긴 전쟁이 진행 중이다. 드랙은 손가락이 세 개에 노란 피부를 가진 외계 종족이다. 우리의 주인공 군인 윌리스 데이비지는 전투 중 적군인 제리바 쉬간과 함께 무인 행성 ‘파이린 4호’에 조난 당한다. 시대적 배경을 직접적으로 대입해 보자면, 데스 매치 중이던 미군과 소련군이 함께 무인도에 불시착한 셈이다. 행성에서 눈을 뜬 두 존재는 서로를 인식하자마자 다시 몸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곧 괜한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적을 죽이는 것보다 살아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구조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제 두 종족 간의 원한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인간과 드랙은 생존을 위해 협력한다. 함께 식량을 구하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동굴을 아늑하게 꾸민다. 낮의 노동 후에는 긴 밤이 기다리고 있다. 그곳에는 즐길 거리가 아무것도 없다. 무료함을 달래 줄 만한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무인도와 달라 파도에 떠밀려 오는 새로운 아이템조차 없다. 날씨 변화 이외의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의 이야기에, 목소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공간에서 오로지 두 존재의 회상만이 지루함을 달래 준다. 우리의 인간 주인공 데이비지는 외로움에 취약하다. 적군이었던 쉬간마저 없었으면 분명 미치거나 자살했을 거라고 그는 말한다. 쉬간 역시 마찬가지다. 두 종족은 완전히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지고 있고, 살아온 세월도 다르지만 절대적인 고립은 양극단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제리바는 데이비지의 언어(영어)와 그의 농담을 이해하게 되고, 데이비지는 제리바의 족보와 드랙의 역사를 매일 밤 경청한다. 핏줄의 기록을 달달 외는 게 이 드랙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므로, 다행히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극 초반부 전개이다. 아직 분량이 많이 남아 있다. 고난은 계속된다. 드랙의 또 다른 특성은 스스로 번식이 가능한 양성체라는 점이다. 제리바는 삭막한 행성에서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 중 사망한다. 데이비지는 쉬간의 부탁으로 적이자 친구인 그의 배를 찢는다. 그렇게 샛노란 드랙 아기 자미스가 태어난다. 데이비지는 친구에게 섣불리 약속한 대가로 이 외계인 아기를 키워야 한다. 생존기에 육아가 더해진 것도 고달픈데, 자미스는 어마어마하게 발육이 빠르고 호기심도 왕성하다. 자미스는 데이비지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제 예정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난 인간이고 손가락이 다섯 개지.” 나는 그때 어린애의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보았다. “삼촌, 어른이 되면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생기나요?” 나는 앉아서 자미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자신의 다른 두 손가락이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데이비지는 너와 내가 어떻게, 왜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왜 이 행성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는지도 알려 주어야 한다. 쉬간과의 전투와 전쟁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유리된 행성에서 태어난 자미스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다만 이 행성 밖에서도 ‘삼촌’인 데이비지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서로 대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쟁을 멈출 수 있겠어요?” 자미스는 언젠가 행성을 떠나면 통역사가 되어 전쟁을 끝내게 돕고 싶다고 말한다. 두 존재의 애절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성인 인간과 드랙 아이, 대척점의 존재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소설은 중요한 건 혼자가 아닌 함께 살아남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안에서 개인과 개인이 공유한 시간은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동영상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은 결말이 도달하도록 두 종족의 평화를 확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 종족 안에서도 깊어 가는 혐오와 차별의 현상을 짚어 낸다.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혼란한 시대를 배경으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노력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홍보 문구에 적혀 있듯이, 『에너미 마인』은 무려 ‘전 세계 최초로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을 동시에 석권한 소프트sf의 걸작’이다. 이렇게 요란하게 상을 휩쓸면 기대감보다는 ‘어디 한번 보자.’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집중력 부족에 더불어 조금 삐뚤어진 마음으로 첫장을 넘겼는데, 결국 단번에 납득하고 말았다. SF라는 장르와 외계 종족과의 전쟁이라는 오락적인 배경으로 작가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의 가치, 공존에 대해 말한다. 호불호 없이 흥미로운 전개는 다른 종족의 캐릭터에도 쉽게 이입하게 하고, 매력적인 대화와 문체는 독서에 속도감을 더한다. 나에게 SF는 정말 호불호도 많이 갈리고 어려운 장르다. 스스로도 정확히 취향을 가늠할 수 없다. 어렸을 땐 스페이스 오페라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마블 시리즈에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가장 좋은 걸 보니 아닌 것 같다. 절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은 작품에 심장이 직격타를 맞을 때도 있고, 분명 내 취향일 거라 생각하고 접했는데 그저 한편의 과학 강의를 듣는 것 같은 작품도 있었다. 복불복이 크다보니 주변의 추천을 받은 게 아니면 선뜻 시작하기 꺼려진다. 그런 와중에 만난 『에너미 마인』은 쓰는 욕망을 되찾아 주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세계에서 소설이 가지는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sf 장르에 장벽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추천한다. 그렇게 한밤의 독서가 끝나고……. 나는 다음 날 이제 다시 힘내서 쓰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과연 마감을 지킬 수 있을까? tmi. 이 리뷰 원고도 지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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