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가을호(제62호)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 : 임승유, 『생명력 전개』
일상적인 산문과 달리 시는 숨김과 드러냄의 긴장을 통해 성립되는 미적 구조물로 정의되곤 한다. 시는 그 뜻하는 바를 지나치게 드러내면 시적인 묘미를 잃고, 반대로 지나치게 드러내면 시적인 묘미를 잃고, 반대로 지나치게 숨기면 그저 무의미한 기호 덩어리에 불과해진다. 어떤 시는 특정 대상이나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도 묘사의 이면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시에서 관념어나 주제 의식의 직접적 표현을 경계해온 이유도 오로지 드러냄을 목적으로 하는 시는 납작해지고 금세 지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적인 느낌을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가 드러난 중에도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다는 느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느낌, 혹은 다르게 말해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 임승유는 이러한 시의 미묘함을 탁월하게 살리는 시인이다.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장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언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놓은 것 그전에는 베란다 한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져 있었고 그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그녀가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전문
예컨대 "어디에 있었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에는 누군가가 찾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드러나지 않는데다가("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의 '그게'에 해당하는 대상), 시의 제목 '그녀는 거의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았다'는 "어디에 있었어"라는 시의 첫 문장에 대한 대답으로도 읽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찾고 있는 대상이 바구니에 들어 있는 사물인지 혹은 사람인지('그녀')조차도 혼동을 불러일으킨다. '그게'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는 대신 이 시에서 주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 대상이 들어가 있는 바구니에 대한 묘사다. 바구니는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 올려놓은 것"이자 "그전에는 베란다 한구석에서 겨울을 났"던 것으로, 화자는 이 바구니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으며 이 바구니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연마저도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라는 구절로 끝나며, 화자가 바구니를 집안에 들이기 전부터 바구니가 지나왔을 내력이 있을 것임이 암시된다.이는 시에서 알려지지 않은 영역으로 남겨진다. 이처럼 이 시는 누군가가 찾고 있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들어 있는 바구니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드러냄과 동시에 숨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해 임승유의 시는 평소에는 그 존재마저 의식되지 않던 사물들이 돌출하게 되는 순간, 즉 일상에서 은폐되었던 사물의 사물성에 주목하게 되는 순간을 형상화한다. 우리가 보는 게 전부가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은 곧 그 대상에 대한 '나'의 무지와 무능이 들킬 때의 당혹스러움을 동반한다. 시 「레몬」은 레몬을 세 가지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서술한다. 하나는 레몬을 사용해 "레모네이드나 하이볼을 마시려는 사람", 두 번째는 레몬을 침대에 쏟아 놓고 레몬처럼 눕거나 몸을 마는 등 "당분간 레몬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은 레몬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는 사람이다. 레몬을 음용하기 위해 쓰는 것이 레몬의 도구적 쓰임에 해당한다면, 레몬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입장에서 벗어나 보려는 레몬 되기의 수행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떠한가? 시인인 "레몬에게서 레몬을 떼어내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잘 안돼서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사람이다. 임승유에게 레몬에 관한 시를 쓰는 일은 레몬을 도구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레몬이 되는 일도 아니라 레몬의 온갖 쓰임이나 레몬에 들러붙은 온갖 표상, 레몬을 레몬이게 하는 익숙한 이미지들로부터 레몬을 떼어내려고 하다가 결국 실패하는 일, 그렇게 결국 레몬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무지와 무능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렇게 "그냥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이다. 시인의 무능을 통해 사물은 미지의 대상으로 암흑 속에 남겨지기보다는 권력을 되찾는다.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오늘은 바람이 좀 부네요. 그러게요. 비가 오려나봐요. 손을 내밀어보는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
아 이런 전개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내리는 비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손이나 안 내밀었다면 또 모를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게 생각났고
저는 이제 그만하려고요.
맞아요. 이런 날은 아무래도 좀 그렇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해요.
-「두 사람이」 중에서
한편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서사적 장면이 형상화된 시에서 화자의 무지와 무능은 장면을 묘사하고 서사를 진행하는 주체로서의 권위가 와해되는 데서 드러난다. 「두 사람이」의 전반부에는 두 사람이 함께 담배를 피우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며, "아 이런 전개는 // 문제가 있다."는 문장이 돌연 시상을 전환한다. 이 문장은 우선 형상화된 장면 속의 인물, 즉 담배를 피우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목소리로 읽힌다. 이렇게 읽을 경우, 이 시는 두 인물이 갑자가 내리는 비에 당황해 담배를 피우던 공간에서 벗어나 술을 마시러 가는 이야기로 읽힌다. 한편 앞서의 문장은 장면 밖의 화자가 하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 두 사람이 만난 장면을 그리던 화자는 이 장면에 우연적으로 개입하게 된 '비'라는 요소로 인해 자신이 전개하려던 이야기의 진행이 달라짐을 느껴 당혹스러워하며 비 내리는 이 징면에서 벗어나 어떻게 이야기를 진행해야 할지 고민한다. 자신이 예상하거나 이끌어가던 이야가의 방향이 돌연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며 손쓸 수 없어 곤란해하는 화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위 두 해석은 양립 가능하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을 참조해 ("이야기에는 한 사람 이상이 등장한다. 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가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는 한 사람이 되기를 반복했다.") 볼 때, 이 시는 화자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빠져나오고는 다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두 가지 가능한 해석 중 어느쪽이든 화자는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사건(혹은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 그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화자는 이야기 속에 자신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혹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이야기 바깥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두 사람'이 된 이들은 비를 피해 술을 한잔하러 이동한다. 임승유의 시는 화자의 무능이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우연성을 수용하는 태도로 이어질 때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는지 보여준다.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것, 이는 화자가 자신이 포착하는 장면 속에 자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알아차리게 되는 순간이다. 즉 이 시에서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레몬」에서처럼 사물의 사물성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존재, 즉 '두 사람의 있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두」는 「레몬」과 「두 사람이」의 사이에 놓일 법한 시다. 이 시에서 화자는 "마감도 하면서 만두를 먹을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 만두에 대한 시를 쓰기로" 한다. 만두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가다 오래 전 연인과 헤어지던 날 먹은 만두에 대한 생각까지 이어지게 되고, 화자는 곧 "여기서의 만두란 그런 서정적 만두여서는 안 됩니다."라며 만두에 대한 서정적 표상을 물리친다. 대신 화자는 "하루 종일 만두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만두는 늘어나서 온 겨울을 함께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런 게 중요한 만두입니다."라며 만두에 대한 시 쓰기 대신 만두를 만들고 만들수록 늘어나는 만두와 함께 겨울을 보내기로 한다. 「레몬」이 레몬이 레몬다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레몬한테 레몬을 줘버리는" 것을 택했다면, 「만두」는 만두에 대한 시 쓰기의 실패는 곧 '만두와 함께 있음'으로 이어진다.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은 즉 '나'와 무언가가 함께 있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노란 꽃을 꺾어 들고 두 사람이 소설 밖으로 나오면서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있다. 두 개의 마음으로 인해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의 삶이 멈추지 않는다.
-「두 개의 마음으로」 중에서
또한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은 무언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시「두 개의 마음으로」에는 "사람이 많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 화자가 "소설이 시작될 때부터 있었"던 한 사람이 절벽으로 향하는 장면을 읽으며 "나도 절벽으로 향"하는 장면을 그린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이야기 안과 밖을 오가며 소설 속 인물들과 평등한 위상을 점한다. 다시 소설 바깥으로 나온 화자는 위의 인용 부분과 같이 생각한다.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읽는 '나'가 소설 속 세계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리킨다면, "노란 꽃을 꺾어 들고 두 사람이 소설 밖으로 나오면서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소설 속 두 사람이 소설 바깥으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워지도록 바라는 마음을 가리킨다. 소설 속 인물들이 소설 속 세계에서 벗어나게 될 때 소설 속 세계는 끝이 나기 때문에 이는 "소설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라고도 할 수 있다.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지고 소설 속 인물들이 작가와 독자(화자)가 상상을 통해 구축한 세계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을 때 소설을 끝이 날지 모르겠지만, 인물들은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두 마음은 결국 인물들이 화자의 세계에서 계속 살아가도록 하거나 그 세계 바깥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모두 '삶'을 멈추지 않게 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이 끝날지언정 삶은 끝나지 않는다.
이처럼 임승유 시에서 '아직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느낌'은 단지 작품을 일고 난 후의 여운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무지와 무능을, 다른 이의 '있음'을, 끝난 줄 알았던 삶도 사실 끝난 것이 아니며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 무지와 무능은 '함께 있음'이라는 삶의 형식을 발견하는 힘이 된다는 점에서 무력함과는 다르다. 어쩌면 무지와 무능을 통해서만 이러한 삶의 형식이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임승유의 시는 세계에 대한 종말론적 태도가 세계를 대하고 상상하는 기본 값이 되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현재에 '종말'을 운운하는 그 모든 말들이 섣부른 진단이 아닐지, '나'의 시야에 갇힌 판단은 아닐지 돌아보도록 만든다. 끝난 것은 없고 여전히 아직 무언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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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1 시인 허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작은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이후 1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에 담긴 시. 이 시를 허연의 대표작이라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허연의 오랜 독자인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첫손에 꼽기도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허연의 시를 음미할 때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하는 문장과 함께 이 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삶에 대한 몹시도 내밀한 사색이 서린 때문일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시인의 시론 같다. 처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혼자란 어째서 “시원한” 것인지, 고독이란 어째서 “다행인” 것인지. 스무 살 무렵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명징해지지 않는 문제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시에 그 낯선 매혹에 속수무책 빠져들었을 수도. 혼자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얼마큼 오롯한 것일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곱씹다 보면 지독한 고독이 자아내는 맹렬함, 아득함, 서늘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곤 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인생에 대한 직시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나’는 세상의 무엇도, 누구도 아닌 ‘나’이므로. 이 하나만이 살아 있는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므로. 아울러 이는 자신의 방향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시인 스스로 아로새긴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세 권의 특기할 만한 시집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매서운 선언과 다짐은 유효한 듯하다. “세상엔 늘 나만 있”는 자에게 ‘나’는 곧 세계다. 존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 ‘나’로써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물론, 이는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홀로 동떨어진 상태.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비뚤어진 세계관”조차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 ‘그대’는 어째서 감감무소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간다(「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밖으로, 더 밖으로. 이로써 허연의 화자들은 일반의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괴리된 상태에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한다는 것. 얼핏 안에 있는 듯 보여도 실상 밖을 산다는 것. 언제든 밖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스스로가 채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에서 고백하듯, 끊임없이 “중력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연의 고독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 고독은 지금껏 허연의 시적 자양이 되었으리라. 묵은 고독은 때때로 섬세한 내면을 짓누르는 병인(病因)이기도 했겠으나, 그럼에도 다름 아닌 고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2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연히 분리시키고자 하는 태도. 안에 있지만 밖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허연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소년(성)’과도 유관하다. 허연의 소년은 흔히 말하는 비성년의 아슬아슬 들끓는 에너지, 그 이상의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역시 앞선 시에서 언급한 문장과 함께 시인의 선언으로 읽어도 좋겠다.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세속에 몸을 담글지라도 종내 슬그머니 한 발을 빼는 태도. 섞이지 않는 푸른빛. 그러나 그 빛, 즉 허연의 소년은 주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으로 현현한다.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기억을 지금까지 투철히 간직하는 것으로 “무슨 넥타이 부대”와 같은 일상의 그렇고 그런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이다. 근작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발문에 인용된 시인의 발화를 끌어오자면 이렇다. “어느 날부터 나이 먹고 뻔해지는 게 싫더라고…… 사회가 원하는 딱 들어맞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정리된 착함’ 이런 게 싫었고…… 하지만 사실 나는 착하고 싶었어…… 기름기 없는 착한 소년으로, 권력에 어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점잖은 어른이 아닌……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같은…… 누군가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살을 찌르는……”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즉 허연이 간직한 소년이란 일종의 반골 기질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쉽겠지만, 이는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단련한 삶의 자세로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은 착하고 싶었던, 여리고 외로운 한 존재가 자신을 지키고자 발악하듯 꺼내 든 유리 조각.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나쁜 소년”이 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공화국’을 스스로 설계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듯이. 시인에게 이는 그저 “사과를 베어 무는 것” 만큼이나 예사로웠을지도. 소년은 어째서 나쁜 소년이 되었을까. 시인 스스로가 규정한 “나쁜”이라는 말 속에는 모종의 자책, 죄책감이 스며있는 것도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시인이 여러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린 시절 집안의 오랜 기대를 배반하고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단편적인 사실로써 한 시인의 내력을 모조리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탄생을 둘러싼 이런 식의 극적인 비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후 자연히 생겨난 죄의식, 그리고 낙망이나 허무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린 소년의 근간을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흰 말뚝을 찾아냈지만 / 화살표도 숫자도 / 모두 지워져 있었습니다 / 말뚝을 탓하진 않았습니다 / (원래 길은 없었으니까요)”(「희망」)와 같은 부정의식은 자연스레 배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비켜서고자 한, 고독한, 나쁜, 소년. 결과적으로 일상의 권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허연의 소년은 ‘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내식당」과 같은 작품이 이를 선명히 부연한다. “지하 5층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 혼자 밥을 먹는다”. 시를 지키기 위해 굳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년의 사내라니.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위해 말이다. 3 허연의 푸른색은 여전히 그를 소년이게 하고 시인이게 하고, 뒷골목을 헤매게 하는 것. 그렇다면 그 푸른색을 지속하고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세상의 셈법과는 어긋난 일. 세상의 셈법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약자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권태와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허연에게 사랑은 유의미한 동력임에 분명하다. 때때로 사랑은 그로 하여금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방책으로 기능하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독을 불식하기는커녕 고독의 기미를 더욱 북돋는 데 이바지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지점에서 사랑은 본연의 힘을 발휘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를 보자. 이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가장 정직한 고백 같다. “그리워하는 병”의 중증으로 인해 채 오십 미터도 걸어갈 수 없다고 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이 깃든 시.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지금은 이별 후다. 펄펄 끓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앓는 때이며, 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의 증상이 바로 허연 시의 중추를 이룬다. 이는 얼핏 낭만적 정취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그 열기가 걷히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므로. “때가 되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리워하는 병”의 고통이 사그라지면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기능과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허연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상의 권태와 양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 그 시절”이 지나면 “저 강물 속에서 /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는 것(「상수동」)과 같이. 그러므로 허연에게 사랑은 애당초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예정된 실패. 예정된 이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사랑의 끝에는 그토록 몸서리치는 권태와 무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살피고 주택 융자를 걱정하는 따위의 평범한, 혹은 끔찍한 생활의 일면들. 시간의 조류에 쓸려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생(生)’(『오십 미터』 시인의 말)은 소년의 푸른빛과 얼마나 먼 것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되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생활과 한데 뒤엉키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화자들은 적정한 정도로 사랑의 감각을 다스리고자 한다. “사랑해. 그렇지만 /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의 강렬한 열기만이 사랑으로 기억된다. 활활한 사랑의 기억은 이따금 반복 재생되며 푸른빛을 한층 선연하게 만든다. 문예지 발표 당시 이 시의 제목은 ‘불타는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이후 제목은 바뀌었고, 그렇듯 ‘드라이브’는 결코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허연에게 사랑은 철저히 그 자신의 것이다. ‘너’가 아닌 ‘나’의 것. 나만의 것. 때문인지, 사랑의 대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잔영으로 남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거된 채다. 그리움의 얼굴조차 불분명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에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할 뿐, ‘나’는 끝내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직 얼마간 사랑의 열기를 머금은 ‘이별’ 자체만이 “선한 의식”으로 기록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이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후라면 더더욱. 사랑의 대상이었던 ‘너’는 “재잘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금세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 무연고 시신처럼 /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하고 정리된다(「항구」). 이 같은 시인의 시선은 비정한 것 같기도, 지극히 천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허연 식의 사랑은 조금 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지. 허연의 세계를 곧추세우는 ‘혼자’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하는 엄숙한 표명을. 다시 말하지만, 허연의 세계는 ‘나’로써 이미 완전하다. 무엇도, 누구도 ‘나’와 “비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완전한, 고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그는 수시로 다툴 것이다. 모진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나눈다,라는 헛된 말에 잠시 기대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권태로운 일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며 빚는 내적 긴장 속에서 그의 세상은, 시는 “아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다」)에서 허연은 한결같이 쓸쓸할 것이다. 끝내 완전할 것이다.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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