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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딩아돌하 | 2024년 겨울호(제73호)

없음이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 : 박소란, 『수옥』, 창비, 2024. / 이승희,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2024.

이근희 문학평론

202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음.

    아무도 없이 혼자인데도 ‘누군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다고. 그렇다면 ‘누군가’는 누구인가? 아마 그 사람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혹은 만날 수 없는 이이기에 없는데도 있는 존재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없음에서 있음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가? 물 한 컵을 보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 제 눈물을 훔쳐 한줌 한줌 모아둔 건지도”1) 모른다고, “없는 것들로 풍요로워집니다”2)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까. 많은 이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감각하는 곳에서 무언가 있다고, 오히려 풍요롭다고 여기는 사람. 그렇게 텅 빈 부재의 공간에 무언가 존재함을 증명하는, 아니, 어쩌면 그 부재 자체를 보여줌으로써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사람. 혹은 그 ‘있음’을 발명해내는 사람. 박소란의 네 번째 시집 『소란』과 이승희의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다.


1. 『수옥』, 박소란, 2024, 창비


    박소란 시의 화자가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맞은편에 한쌍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아두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묵은 쌀을 씻어

천천히 오래

어둑한 귀퉁이 비어져 나온 버튼 하나를 누르자

놀랍도록 보얀 김은 오르고


그 광경을 마냥 바라보는 나를

마냥 바라보는 누군가

있다 빈 쓰레기통 뒤에 도사린 충혈된 눈이


있다


    「자취」라는 제목에서 보듯, 화자는 혼자 사는 집에서 밥을 안쳐 먹는다. 밥통에서 “보얀 김”이 솟아나오는 모습을 놀라워하며 “마냥 바라보는 나”만 존재할 것 같은 이 공간에, 그런 나를 “마냥 바라보는 누군가/있다”. 그렇다고 화자와 “누군가”가 하루 온종일 같은 시공간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한데, 아침이면 창가에 흩뿌려져 있는 “말라비틀어진 조각들”로 미루어보아, 이 ‘누군가’가 어딘가를 오고가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누군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건너갈 때마다 어떤 “투명한 벽”을 통과하는 것일까. 그럴 때마다 “말라비틀어진 조각들”이 떨어져 나온 것일까. 화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 밥을 먹는다 / 투명한 벽 너머 투명한 벽을 떠올리며”.


    여기서 주목해볼 것은, 저 “투명한 벽”이 무엇인지,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도 화자는 밥을 먹을 때면 저 투명한 벽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박소란 시의 화자는 무언가가 지나가거나 사라져갈 때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본다(「갑자기 내린 비」의 화자가 비 내리는 거리를 바삐 지나는 사람들의 등에 “제법 그럴듯한 지도가 하나 생겨날 때까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멀거니-‘정신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는’ 사람. 그런데 저 ‘누군가’가 ‘나’에게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바로 이 ‘멀거니’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는 ‘나’의 행위로 인해, 무심히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을 ‘누군가’의 흔적이나 얼룩이 비로소 발견된 것은 아닐까. 없었을 수도 있던 것이 발견되었으니 발생이라 해야 할까. 이제 발생한 ‘누군가’는 그저 지나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서 ‘나’를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앞의 시 「자취」에서 자취自炊하는 ‘나’가 “투명한 벽”과 그 “너머”를 멀거니 떠올리는 행위는 사라진 누군가의 자취-‘어떤 것이 남긴 표시나 자리’를 필사적으로 보존하고 기억하려는 행위는 아니었을까. 그로 인해 ‘누군가’의 돌아봄이 가능하다면, 그래서 ‘그’가 존재할 수 있다면, 이런 시도 쓰일 수 있지 않을까. 「후경」의 첫 대목을 옮긴다.


나는 구름이 아니고 새가 아니지만

자꾸 떠간다

멀어져간다 당신에게서


당신이 지나는 길목 헤매는 걸음걸음에서


사무실을 나와 무작정 걷다 몸을 숨기듯 찾은 허름한 식당

당신이 혼자 늦은 점심을 먹을 때

짠 국물을 홀짝이며 공연히 휴대폰만 들여다볼 때

나는 어디일까

흐린 창밖 간신히 매달린


나는 누구일까


    시의 화자인 ‘나’는 “구름이 아니고 새가 아니지만” 하늘을 떠도는 존재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당신”이 “허름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때 당신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존재다. 자신이 “어디”인지 “누구”인지 묻고 있는 ‘나’는, 도통 누구도 자신을 부르고 찾지 않아 정처없이 떠돌고 있는, 마치 어느 공간에서 사라졌으나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그렇게 어떤 작은 얼룩이나 흔적은 남은, 없음과 있음 사이를 헤매고 있는 이처럼 보인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고, 스스로도 자신을 “아무도 아니”라고 여기는 이. 그러나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데도 “언제 어디서나” “초인종이 운다”(「공터」)면, 그를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누군가’는 실제로는 있으나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버리거나 눈앞(前景)의 “휴대폰만 들여다”보면서 보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후경後景’ 속에서 떠돌고 있을 존재가 아닐까. 있으나 ‘없다’고 여겨지는 존재. 그만큼 희미하게 존재하기에 집중하고 오래 바라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존재.




    「숨」의 화자는 그런 ‘부재의 존재’를 하나쯤 알고 있는 듯하다. “겨울의 한 모퉁이에”서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화자. “시도 쓰고 일도 하며/어쨌든/주기적으로 병원도 다니”면서 실은 버스뿐 아니라 “오지 않는 것들”을 “어쨌든 기다리는” 화자. 좀처럼 오지 않는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알바가 주춤대며 건넨 헬스 요가 전단” 마저 마냥 쉽게 “버릴 수 없다”고 여기는 화자. 그런 화자가 “한숨을 쉬면” 존재하는, 그러다 곧 사라지는, 그러나 다시 발생하는 “입김”. 시의 중간 대목을 옮긴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희고 따뜻한 것 어느 고요한 밤 찾아든 귓속말처럼

몹시 부풀었다 이내 수그러지는 것

텅 빈,


다시 부푸는 것


다시 속살거리는 것

어째서 이런 게 생겨났을까 알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곁을 맴도는 것이다


    이 순간 화자에게 “오지 않는 것들” 중 하나는 온 것 아닐까. 그것이 외부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의 한숨에서 나온 ‘입김’이라는 것. 그러니까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다고 여겨진 ‘누군가’가 실은 자신의 내면에, 마치 존재할지 몰랐으나 한숨을 내쉬면 기적처럼 존재하는 “입김”처럼,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화자가 무심코 내뱉은 한 번의 ‘숨’ 속에 아직 “오지 않는 것”이었던 누군가가 찾아올 수 있다면, 그 ‘누군가’는 이미 자신 안에 있었던, 다만, 자신 안을 미쳐 바라보지 않고 후경으로 여겼기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아닐까. 그러므로 “가만히 바라보는 것”과 “기다리는 것”, 이 두 가지가 바로 아직 “오지 않은” 이가 올 수 있는 하나의 길 아닐까. “몹시 부풀었다 이내 수그러지”더라도, “다시 부푸는” 입김처럼, 부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어째서 이런 게 생겨났을까” 자신도 그 연유를 “알 수 없는/하나의 이야기”가 화자를 찾아와 그 “곁을 맴”돌게 된다. 이야기는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바, 화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는 “혼자 걷는 누군가”는 “보지 못”하고 “알지 못”(「그냥 걸었다는 말」)했을 무엇, 더 이상 이 시대의 사람들이 믿지 않을 듯한 “그 흔한 사랑과 믿음”(「메모」)을 화자에게 들려줄 수도 있겠다. “흙이 반쯤 담긴 컵”에 심어둔 “씨앗 하나”가 어느 날 “무심코 싹” 하나를 틔워내듯, 오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던 화자에게도 어떤 “씨앗 하나”가 심겨져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제 화자는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이야기를 전해 받았다. “좋네요, 라고 해도 좋은지”(「내일의 기다란 꼬리」) 아직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며 아직 보이지 않고 들리지는 않는 이야기에 ‘멀거니’ 귀 기울일 것이다.


    박소란 시의 화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상황일지라도, 내일이 어떠할지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날들 속에서도, 그 “모르는 것”을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믿는”(「노래」)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런 내가 쓰는 이런 시가 싫다고 고백하지 않는다”(「소란」)고 고백하기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내가 싫다’고 여겨온 어떤 이는 박소란의 시를 읽고 다시 오늘을 살아갈 마음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과 ‘기다리는 것’, 이 두 가지를 ‘멀거니’ 행하는 박소란의 시를 발음해서 읽다보면, “아 신기해라”(「숨」) 여기게 되는 무언가가 발생하고, “다행이다, 다행이다, / 공들여 발음하면 정말 다행이 되듯이”(「물음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다행多幸한 오늘이라는 것을, 지금 하나의 숨이 내쉬고 들이쉬어진다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다른 순간과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병중에」의 마지막 대목처럼, 오늘을 살아보자, 다시, 다짐해보게 된다.


오늘, 그리고 오늘,

오늘의 고지서를 챙기고 오늘의 달력을 넘기고 집 앞 농협에서 얻어 온

오늘의 시를 떠올리며


조금 더 살아요


2.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이승희, 문학동네, 2024.


    이승희의 네 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은 총 5부로 이루어져있고 각 부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특히 시집을 다 읽고 다시 목차로 돌아와 1부에 실린 시들의 제목을 바라보고 있다보면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이를테면 ‘물’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물속과 물 밖을 오가는 ‘나’와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와 ‘헤어진 후’로 ‘나는 물에 잠겨 있다’. 나는 ‘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서 ‘물속을 걸으면 물속을 걷는 사람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슬픔은 다할 수 없어’라고 중얼거리는, 나와 닮은 듯도 다른 듯도 한 ‘그’는 누구일까. 어느 날엔 ‘나비가 왔다’가 가고, 버드나무에서는 ‘초록 물고기’가 태어나 자라고,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물속의 삶을 살아낸다. 때때로 물 밖이 그리워지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라는 사실과 ‘슬픔은 다할 수 없어’라는 진실을 곱씹으며 이리저리 서성인다. 그러나 계속해서 물속을 걸어도 슬픔의 끝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밤이 되면 ‘버드나무는 잠을 자고’, 그럴 때 버드나무는 물 밖과 물속을 이어주는 어떤 배처럼, 이곳과 저곳을 연결하는데, 이제 나는 다시 물 밖으로, 그러니까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살던 곳-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돌아간 후에 ‘내 마음의 수몰 지구’를 들여다보아야만 하는가.


    그런데, 들여다보다니. 이 시집의 화자라면 어쩌면 이 표현에 단호히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보는 이와 보여지는 이가 구분되어 있다는 것, 그 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터, 시집의 화자는 물속과 물밖을 언어로 구분짓고는 있으나, 다할 수 없는 슬픔을 살아내며 자신은 “이 세계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거나 “마치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라고 스스로를 감각하며 물속과 물 밖의 삶을 동시에, 혹은 수시로 두 세계를 오가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속을 걷는 사람’과 ‘물 밖에서 그런 물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나’에게 물속과 물 밖은 굳이 구분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겠다. 물속의 ‘나’가 “멀리서 흔들리고 있을 촛불을 향해”(「버드나무는 잠을 자고」) 나아갈 때, 그보다 먼저 “물속을 바라”보는 물 밖의 ‘나’는 “불을 켜두어야” 한다. 그러니 “물속에서 기차가 우체국을 지나”(「내 마음의 수몰 지구」)갈 때, 이는 물 밖의 일이기도 할 것이다.


    우체국을 지나가는 기차가 ‘나’와 ‘그’의 소식을 편지로 전하거나 받을 수 있게 한다면, 시집에서 ‘나’와 ‘그’가 “강의 이쪽과 강의 저쪽”을 오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배舟다. 흔히 삶과 죽음, 이쪽과 저쪽, 너와 나는 명확히 구분되며 그 둘 사이의 경계선도 확고하다. 그러나 ‘나’와 ‘그’가 배를 타고 그 경계선 위를 수시로 오가고 있는 것이라면, “여기는 저기처럼 멀”다거나 “가는 것이 꼭 돌아오는 것 같았다”(「밤배」)라는 말은 어인 일일까. 어쩌면 그들에게 ‘여기’와 ‘저기’는 구별되지 않는 거의 같은 장소이고, 그러니 그곳으로 가는 길이 곧 돌아가는 길과도 같게 여겨졌으리라. 시집을 여는 첫 시 「물속을 걸으면 물속을 걷는 사람이 생겨난다」의 후반부를 옮긴다.


풍경은

조용히 있다

조용히 흐르고 있다


나는 지나가는 중이고

지나가는 풍경이 된다

사라지고 나면

사라진 풍경이 된다


여기에 살기로 작정하면

저기가 생겨난다


여기 없는 저기와

저기 없는 여기가 없다고 해도


집에 가자는 말을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


    이 시의 첫 문장 “여기에서 계속 살 거야?”라는 말이 물속 물고기가 한 말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지금 ‘나’가 있는 이곳은 물속일 것이다. 그러니까 물고기는 물 밖에 살던 ‘나’에게 “왜” 여기로 왔는지 묻는다. 그러나 화자 역시 “똑같은 대답” “왜”를 되풀이할 수 있을 뿐, 거기에 어떤 정답 같은 것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아니, 않는다. “모르니까 가능한 질문들”(「나비가 왔다」)이 있을 뿐. 흥미로운 것은 “조용히 있”는 풍경을 ‘나’가 “지나가는 중”일 때 ‘나’는 “지나가는 풍경”이 되는데, 이 역시 마치 ‘나’와 ‘풍경’의 경계가 무화되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사라지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은 “사라진 풍경”이고, 이때 “사라진 풍경”에서 ‘나’와 ‘풍경’은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이 한 몸처럼 엮여있다. 구별되지 않게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고 흐르고 사라진다. 그러니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며 “여기에 살기로 작정하면 / 저기가 생겨난다”거나 “여기 없는 저기와 / 저기 없는 여기가 없다”라는 말들은, 적어도 이 시집에서는 틀린 말이 된다. 화자는 “하나의 풍경”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아니, 이 말 역시 틀린 말인데, 화자 역시 “왜”라는 물음에 “왜”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는 듯, 이 상태를 겪어내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시의 마지막 문장 “집에 가자라는 말을 들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는 두 가지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첫째, 이 문장의 발화자가 물밖의 존재일 경우. 물밖에서 물속으로 들어온 화자에게 ‘집’은 아직 물밖에 있는 것이라면, 물속에서 살기로 작정하는(아마도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서이리라) ‘나’에게 이 말은 다시 물밖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여기”에 ‘죽은 이’를 두고 자신은 “저기”에 돌아가야 하기에 흘리는 슬픔과 미안함, 혹은 어떤 죄책감의 눈물. 둘째, 그러나 화자가 여기와 저기를 수없이 오가며, 혹은 그 두 곳을 거의 동시에 살아내왔다면, 이제 그 경계선은 닳아서 거의 없어졌을 것인바, 이제 저 마지막 문장은 물속의 존재가 하는 말, 그래서 헤어진 ‘그’와 화자가 물속에서 함께 지내는 집을 가리키는 바, 이때의 눈물은 다시 만나는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 아닐까. 전자가 ‘그’의 없음이 확정되는 집이라면, 후자는 없었던 ‘그’의 ‘있음’을 발견하는 집 아닐까.


    이제 겨우 5개의 방 중 하나의 방을 슬쩍 열고 들어가보았는데(시의 말을 빌리자면, 시인에게는 아마도 “방마다 들어가 운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방이 많”(「즐거운 우리집」)을 것이다), 무턱대고 다른 방문들을 열어보았다가는 한동안 이 방들에서 헤매게 될 것만 같다. 다만, 이승희식 사랑이 흔히 생각하듯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하여 하나로 일치하는 여정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는 “잘못하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뻔했다”고 거듭 조심하면서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날씨를”(「여수고등학교 가는 길」) 향해 가는 여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물 밖의 존재와 물속의 존재는 “끝내 닿지 않으려”함으로써 “서로를 독립시”킬 수 있고 “서로의 망명지”가 되어 비로소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망자들」)고 시인이 말할 때, 나는 이 사랑을 알 듯 모를 듯한데, 한편으로는 조금 두렵기도 하다. 내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혹은 내가 그런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용기 없는 나의 걱정을 알기라도 한듯, 시인은 “늙은 할머니”와 “늙은 개”의 산책을 통해 이렇게 말해주기도 했었다.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의 앞부분을 옮긴다.


늙은 할머니 앞에서 느리게 걷고 있는 늙은 개


할머니가 멈추고

줄의 곡선이 펴지기도 전에


늙은 개는 멈춰 선다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것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처럼


할머니가 걸음을 떼자


늙은 개는 동시에 걷기 시작한다


둘은 그렇게 끝까지 곡선이다


    한 쪽이 멈추면 다른 한쪽은 그 멈춤을 서로를 잇는 줄로 감각하여 기다려준다. 성급히 물어보거나 다가가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둔다. 상대가 스스로 어떤 선택을 할 때 까지. 두 존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서로 상대를 온전히 ‘나’와 일치할 수 없고 일치해서도 안 될 ‘타자’로 그 존재를 존중했던 것처럼.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이 없어지지 않도록 매번, 오늘, 다시 되새기며 걸어가야 한다는 듯이. 그렇게 “왼발은 왼발 // 오른발은 오른발” 각자의 타자성을 지키며 “끝까지 곡선”으로 살아가자는 것. 별이 될 그 순간까지.

  • 1) 박소란, 『소란』, 「공작」, 창비, 2024.
  • 2) 이승희,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더피, 나의 고사리들」, 문학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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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행복의 지표로 회자 되며 최근까지도 세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던 소확행은 소비사회의 알리바이로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변질된 모양새다. #소확행은 행복을 소비의 정도에 대비시켜 되레 과도한 물질적 욕망에 명분을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해시태그를 단 이 단어는 비교와 경쟁을 추동하고 스몰럭셔리, 행복 강박의 다른 이름이 되어 소셜미디어에서 행복의 경쟁이라는 또 다른 피로를 누적한다. 이에 그 자리에 새롭게 떠오른 행복 담론을 한 매체는 아주 보통의 하루, ‘#아보하’로 제시한다.1) 아보하의 핵심은 무탈, 평온, 보통과 같은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 있다. 초고도 발전의 사회란 안전한 삶과 등가가 아니어서 길을 가다가 넘어지거나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길을 가다가 여행을 다녀오다가, 죽는다. 너무도 쉽게 반복되는 우연과 거듭되는 참사, 믿을 수 없는 역사의 회귀는 일상의 유지라는 문제를 기도하고 소망해야 하는 난제로 만든다. 행복까지는 이르지 않더라도 무탈하게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도 장하고 고맙다는 ‘아주 보통의 하루’는 논쟁적인 말일 수 있지만 순차적 인생 모형이라는 것이 죄 뒤틀어진 지금, 행복을 좇을 때는 행복하지 않다는 역설이 낳은 이 ‘추구미’에 우리는 해시태그를 달 수 있을까? 지금, 우리의 겨울을 함께 지나온 시집을 읽어본다. 1. 골디락스2) 생존법 (남현지,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창비, 2024, 12.) 성격유형 지표에 따를 때 사고형(Thinking)을 일컫는 T형 타입은 감정형에 비해 사실에 관심을 두고 객관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특징 지어진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로 갈음되는 이 타입은 공감에 높은 가치를 두는 이상주의적 인간형 F(Feeling)로부터 ‘너 T야?’라는 말을 듣곤 한다. 남현지의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은 모종의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 시집을 읽고 있자면 화자를 향해서도 이 질문은 가능할 것 같다. 혹시, 너 T야? 그런데 저 물음은 수상쩍다. 그간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정동이 꽤나 들러붙어 있는 듯해서인데, 재난과 참사라는 상처에 쓰라림을 끼얹은 것은 정치적 입장과 재난을 둘러싼 부조리였고 애도를 불가능하게 몰아세운 이들에게 누군가 바란 것은 최소한의 공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않는) 일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는 농담에 힐난의 어조를 들씌워 저 물음을 썩 개운치 못한 것으로 투사한다. 공감을 강요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올바르지도 않음에도 혹자는 공감 부재와 불능에 대해 일종의 반작용을 작동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는 T형 타입이구나! 라는 말에는 공감에 대한 사회적 강박이 내재하고 개인의 윤리의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정서에 반하는 커밍아웃은 제법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매일 아침 기도는 드리지만 신을 사랑하라는 이들의 발화가 낯선 것은 (가족에게도)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인사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고백 같은 것 말이다(“제가 사랑이 없습니다”, 「오늘 서울 날씨」). 사랑이 없다는 고백 뒤로는 생활의 후경이 일상과 함께 두루 그려진다. 산책로와 그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 뒷산, 빵집, 마트, 지하철역과 같은 동네 지형지물을 배경으로 이 시집의 화자는 ‘산다’. 시인의 주변을 살짝 옮겨보면, “산속 개구리의 주인이 있고/ 소비자가 있고” 들개는 “자주 훼손된 채로 발견”되며(「뒷산에서」), “호수는 잘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것은 호수뿐만이 아니라서 큰 개도 묶여 있는데, 화자는 그 점이 마음에 든다(“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호수공원」).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풍광은 이렇듯 이미 묶여 있는 것, 인간의 손을 탄 것, 다시 말해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자연이 되레 인공에 의해 그 의미의 자리가 탈각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쐐기를 박는다. “전기 좋아해요?” 그리고 따라붙는 문장은 자답에 가깝다. “이제 그만/ 그걸 자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빛의 생산」). 기존의 의미 체계가 이미 소실된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거대한 인공호수와 나를 해칠 염려가 없도록 묶인 개가 있는 풍경이며, 종달새는 없을 수 있겠지만 전기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취향은 얼마든지 삭제 가능하고 ‘나’라는 존재는 필멸이며 그 시기는 언제든 가능한 이 세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은, 고통과 전기만을 재편된 세계의 질서에 의심 없이 남을 대상물로 지목한다. 그 모든 시간이 나의 선택이었다고 쓸쓸한 얼굴로 일기를 쓰고 있을 때도 휠체어에 앉아 피켓을 들고 있는 우주에서도 매일 아침 기도문을 외우는 내게도 마트와 감자칩이 있었고 어떤 세계에서는 문자가 비위생적인 것이 되어서 물건의 표기가 금지되었다 문자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는 신도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감자칩을 뜯었고 수백 번에 한 번은 투자에 성공했다 자신의 힘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균형 잡힌 생활을 좋아했다 내가 바란다고 감자칩도 몇개만 먹을 수 있다면 괜찮은 간식이라고 이 무수한 우주에 계속해서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며 마트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쓰여 있다 -「온 우주가 바라는 나의 건강한 삶」 부분 자연은 인공적인 것을 거쳐 물질화된 것으로 그 정의를 다시 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면 그 출발은 마트에 있을 것이라는 화자에게는 차라리 글로벌 유통과 거기에 매달린 지구 반대편의 노동과 부채, 불안정한 나의 노후에 관계되는 GMO 감자칩 한 봉지가 더 세계관에 밀착된 것이 아닐까? 그러니 건강과 질병은 마트에서 나의 선택으로 판가름 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에게 모든 선택의 자유를 내맡기지 않나. 친환경 무라벨이든 해석 불가의 외국어 상표든 문자의 제 기능이 소외되기는 매한가지인 상품 진열대 앞에서 문자가 물건에 부착되기에는 비위생적인 것이 된 것이라 해석하는 화자는 이 유니버스의 ‘적당히’ 건강한 소비자(식용 동물도 그렇지만 소비자 역시 적당히 병들고 적당히 건강해야 한다. 소비자는 식품뿐만이 아니라 약품도 소비해야 하기 때문이다)로서만 요구될 따름이다. 세계의 질서, 그 정의가 변하면 거기서 생존 내지는 의탁하는 존재들의 양태 또한 변해야 할 것인데, 변형된 질서와 정의의 불일치는 화자를 곤란하게 한다. 그래서 그는 학습을 통해 세계를 배우고 연습하려 하지만, 자연에는 없는 곡선을 연습하는 일이나(「곡선을 쓰지 않는 디자이너」) 원데이 클래스에 등록해 휴일을 배우려는 일은(「도시의 명소」) 늘 실패로 귀결된다. 변화는 한 인간이라는 개체의 리듬에도 적용되는데, “누가 아줌마하고 소리쳐 부르면/ 갑자기 아줌마로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그래서 내력과 외력의 충돌이라는 소란 양상의 능동태가 된다. 그럴 때 화자는 발화와 협의된 적 없는 행동반응의 요구라는 부조리를 체현하는 중이다. 부조리는 도처에 있는데, “이웃집에서 애들을 조용히 시키라고 했지만/ 아이가 없다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있다는 그 아이들을 찾아 나서야”(「복도식으로」)하는 식이다. 사태란 우물쭈물하는 화자보다 먼저 근미래에 도달하고 그럴 때 이웃의 요구에 대한 화자의 다소 순진한 답은 오답 처리되고 만다. 먼저 도착한 발화가 정해놓은 답에 화자는 다다를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일을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때 미처 자라지 못한 마음은, 아직 수긍에 이르지 못한 심정은 삐걱댄다. 「꿈의 번영」에서 말하듯 세계란 때로 해결을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연결해서, “초월”이라는 식당에는 도무지 가능한 메뉴보다는 불가능한 메뉴가 많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비만과의 전쟁을 보도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행위는 곧 어떤 전쟁의 적이 되는 일로 전환된다. “왜 나는/ 혼자서 뚱뚱한가”(「자영업자들」)라는 질문을 읽기라도 한 듯, 식당 주인이 (다이어트에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고대의 붉은 곡물을 판매하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 일상이다. 이웃의 정원을 보면서도 내 눈길이 집요하게 향하는 곳은 ‘조화’일 뿐인데(「이웃의 정원」), 생화와 조화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가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조화가 더 눈길을 끌 수도 있지 않은가? 인공의 자연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엉키는 일보다 차라리 마트에서 감자칩을 적당히 사 먹는 편이 이치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 멀찍한 시선은 실은 조심스러움을 포함한다. 어쩌면 다소 미온적으로 보이는 이 태도야말로 그가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전략은 아닐까, 적극적 수행도 폐기도 하지 않는 상태만이 ‘지금’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환생을 거듭하며 우리는 우주의 먹이를 공급하고 있다고 깨달은 수행자가 있었다 오직 우주에서 삭제되는 것을 목표로 하세요 -「우리가 작고 어두운 것이었을 때」 부분 2. 무해함의 사정 (고선경,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 열림원, 2025, 01.) 반면 고선경의 화자는 지극히 F형 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시집은 무해함으로 가득하다. 귀여운 것이 무해하다는 이 트렌디함은 그러나 단지 귀여움으로만 소급되지 않는다. “대기만성보다는 만사형통/ 만사형통보다는 만사대길”을 바라고 “나에게는 아직 끝낼(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며 “내가 태어난 게 대길”(「신년운세」)이라고 믿는 문장의 저류는 전혀 자신감이 아니다. 그건 차라리 ‘지금’을 버티는 자신을 응원하는 안간힘에 가깝다. 남을 돕는 팔자라는 시인의 운세는 도움이 필요한 자는 자신의 시집을 사라는 기지로 변형되는데, 시에 일말의 구원이 있다는 믿음을 초과하여 흘러넘치는 것은 어쩌면 시를 사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생존 신고와도 같아서 시집을 사는 이와 시인이 서로의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는 소통의 감각이다. 풍선껌만 한 세계, 그마저도 단물이 다 빠진 이 세계에서 자주 벗겨지는 양말을 닮은 미래란 매일 걷는 골목에서도 여행자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럭키슈퍼」). 이런 기분은 서울에 거주하지만 자신이 “외지인”(「남영」)인 까닭은 설령 빌런이 출현한다 해도 익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정함에 닿지 못하는 사실과 함께 화자가 소속감 부재, 이탈자의 감각을 느끼게끔 만든다. 어딘가에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는 기분은 화자(또는 시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구하게 한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면서 시집을 뒤적인다. 해설에 적힌 말을 내 식대로 풀어 말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그건 마케팅의 언어와 다르다. 백화점 판매직에 종사한 적 있는 나는 어떤 말이 효과적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지 알고 있다. 내 앞의 시인이 “한 권쯤 책장에 비치해 두면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사람으로 보일 것이므로 여자를 꼬시기에 좋다.”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그러다가 내 차례가 다가오면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말한다. “여기······ 딸기와 판다곰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요. 딸기랑 판다곰······ 참 귀엽죠? 귀여우니까······ 좋아하실 거예요. 어디에나 두루······ 잘 어울릴 거고요.” -「도전! 판매왕」 부분 살아남기 위해 화자는 시인들이 홈쇼핑에 나와 자신의 시집을 팔 수 있기를 소망한다. 팔린다는 소비시장의 논리라면 문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소위 ‘잘 팔리는’ 일은 모든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예술과 예술가의 생존이라는 문제는 급기야 어차피 팔려야 한다면 잘 팔아보자는데 가닿는다. 여자를 꼬시는데 유용하다거나 문장의 밀도가 높다거나 하는 선배들의 시와는 다른 자신의 시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고심 끝에 귀엽고 두루 잘 어울리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대책 없는 무해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제목으로 묶인 시집의 2부는 어쩌면 무해함과 귀여움, 그리고 보통의 하루에 대한 소망에 닿는데 중요한 축으로 보인다. 이 시집의 코어에 들어앉은 것은 그러니까 친구의 죽음, 그가 “안 죽는다고 했는데 죽었다”(「팬레터-12월 31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생의 통과의례를 가족보다,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긴밀하고 친밀하게 나누었을 다정한 또래의 죽음은 멈춘 채인 친구의 나이와 달리 꼬박꼬박 셈해지는 나의 생을 그와 다른 것으로 가르는 결정적 사건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유망주가 되고 싶다는 말은 무엇을 욕망하는 문장이 아니라 욕망의 유예를 소망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이 화자의 욕망을 성취의 이전으로 되돌리고 싶게 하는가? 너의 죽음이다. 차라리 유망주일 때 우리는 함께였다. 나의 삶이 타인의 죽음을 인수함으로써 이룩된다고 할 때, 화자의 삶은 더 이상 자신만의 것이지 않다. 죽은 너를 응원하는 나의 삶은 동시에 나를 조로하게 하고, 나의 삶과 너의 죽음은 이어져 너의 것이게끔 하며, 너의 삶은 나의 늙음을 재촉한다. 이런 뒤엉킴과 연결의 감각은 ‘뜨개질’을 빌려 표현되기도 하며(「털실로 뜬 시계」) 이 시집을 삶 쪽으로도 죽음 쪽으로도 당겨 놓는데 성공하게끔 한다. 너는 마당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다가 내게 물 한 줌을 뿌렸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 물이 더 많았다 내일은 비가 내린대 예보를 무를 수는 없고 그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 -「미래에 내리던 비에는 아무도 잠기지 않고」 부분 무해하고 귀여운 그렇지만 당돌한 어조들은 실은 그 아래 실패의 감각을 공유하고 이를 전유함으로써 가능한 전복적 의미로 가득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 있다”라는 말은 심상하지 않다.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은 살아있는 일이겠지만 이 문장을 조금 변형해 ‘미래가 태어나려면 필요한 일들이었다’로 읽는다면 그건 누군가는 죽는 필멸의 운명에 대한 수긍이 된다. 오늘 나의 일상이 죽은 친구의 미래라는 이런 인식은 ‘열심’이나 ‘최고’를 강조했던 때 유행하던 격언을 닮아있지만 작금에 곁의 친구들이 느닷없이 죽거나 돌아오지 않는 일을 ‘흔히’ 겪은 세대의 죽음과 삶에 대한 다소 직관적인 감각이라 읽는다면 과도한 것일까? 생사에 대한 달라진 감각은 “나는 그저 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행복한 파괴자들」)인 이들이 아주 보통의 하루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게 하는데 결정적인 것이 아닐까. 그저 죽거나 죽을 많은 친구들의 이름을 주문처럼 가까이 당겨 부르며 “씨발······을 견딜 뿐”(「검은 고양이와 자객」)일지라도, 미래를 먼저 보고 온 듯한 저 과거형의 전언에는 누구도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순한 마음이 돌올하게 남는다. 3. 기대하지마, 배반할 거니까 (윤지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2024, 12.) 윤지양의 시집은, 기대하지 않는다. 이 시집은 어떤 기대를 파기한 것일까? 그리고 왜 기대하지 않을까? 김수영이라는 이름에 기대어볼 때 이 시집은 윤지양의 시가 기성의 것에 기대지 않고 어딘가를 찌르고 없는 것을 만들고 있어야 할 것을 지운다는 증거이기도 할 테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은 시종일관 무척 냉랭하다. 그러나 그것이 사태에 대한 냉담을 뜻하지는 않아서 시집의 많은 것들은 실증이기보다 실증할 수 없음, “부정형으로 실현되는 소설”(「소설」)과 같은 문장과 사유를 표방한다. 어쩌면 나는 문장의 가능성만으로 쓰인 소설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부정형 어미만으로 실현되는 소설을.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을. 그것은 소설이기에 가능하다. 소설 속 진실은, 사실상 모두 허구가 아닌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부럽고 질투가 난다. 뛰어난 것을 보면 으레 그러하듯. 나는 단지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러나 시를 쓰지 않는다. 언제부터 쓰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말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대요. 소설 또한 쓰지 않는다. 연필을 들어, 가장자리에 금박을 입힌 메모지에 글자를 채워 넣지 않는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를 들으며 내 앞에 있는 전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지 않는다. 전등은 가끔씩 깜박이지 않는다. 위층에서 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설」 부분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건 허구일테니까. 그러나 부정형으로 실현이 되는 소설은 「소설」이라는 시로 쓰인다. 시의 내용은 그러하지 않음을 단정하는 부정(否定)으로 연결되지만 이를 정해지지 않음의 부정(不定)으로 놓을 때 성립하는 듯도 하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것이야말로 지어놓은 심상을, 알고 있는 형식을, 그 안에 담긴 모든 의미를 배반하는 부정(否定)과 부정(不定)이기 때문이다. “최대한의 심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대체로 잃어버린 것들을 호명하기에 알맞다. 그러니까 시간, 책(내용), 기억, 관계와 같은 비물질들, 쉽사리 의미화에 도달하지 않는 것을 호출하기에 적당하다. 이를테면 기억은 왜곡과 밀착되어 있다. 성글게 말해서 정확한 기억이란 불가능하다. 왜곡 가능성 자체를 포함하는 기억은 기억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작용인데, 이는 저장 과정에 이미 불순물을 포함한 채로 유입되고, 주체를 통과함으로써 변형되며, 시간을 경유하면서 유실된다. 그렇기에 기억을 불신 쪽으로 밀어붙이고 왜곡의 모양새를 살피는 일은 역으로 개인을 가장 그‘답게’ 알아낼 지표를 얻는 일일 수 있다. 「7월 9일 비는 미스트처럼」이란 제목을 기억에 기대 읽으면, 날짜는 틀릴 수 있고 비가 내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으며, 미스트처럼 흩뿌렸는지 옷이 젖을 만큼 제법 내렸는지도 불확실하다. 미스트의 자리에는 얼마든지 다른 비유물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날 바라본 것은 별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지하철 안의 사람들과 역사를 수리하는 인부들이다. 화자의 의문은 이런 것이다. “왜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싶은 걸까?” “바라본 것은 일이초의 순간이며 그보다 몇 백 배의 시간 동안 기억하는 데 열중해”야만 하는 이런 일을 말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기억하고자 하는 일은 혹시 정보의 값어치라는 기준을 배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하는 기억회로에 대한 배반 말이다. 어쩌면 7월 9일 미스트처럼 비가 뿌리던 날 내게 맺힌 기억들이 나와의 특별한 관계성을 획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만이 기억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억한다는 것. 그래서일까? 역사를 나오며 바라본 인부들이 치우고, 세우고, 고치는 구조물은 마치 기억의 해체와 조립, 왜곡과 직조 가능성의 모형화로 가시화된다. 그런 기억에 대해 천착하면서도 시인일 이 시집의 화자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의미이다(“의미가 제일 무서워 그게 나를 평생 피했으면 좋겠어”, 「외면」). 의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어쩐지 한 곳에 맺히는 것, 부정(不定)을 부정(否定)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누군가 치우고, 세우고, 고치길 거부하는 것 말이다. 한 곳에 부착되어 떨어지지 않을 때 어쩌면 그 의미는 죽어버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제목은 지워지고(「 」), 주석은 또 하나의 시가 되며(「경계 수칙」), 본문의 문장도 없이 홀홀한 주석이 탄생한다(「소원」). 이런 형식의 파괴는 때로 주석에 비해 내용을 하등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형식은 내용과 자리를 바꾼다. 거기서 무엇을 달성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 형식과 의미는 다만 고민되는 중이다. 시를 쓰는 일이 시인의 내면 쪽에 방점을 찍어왔다는 점을 상기할 때, 시 쓰기가 몰래 바깥을 토해내는 일이라는 화자(「폭우」)는 시인의 사유를 대변한다. 비켜 가고 또 빗겨 가며 바깥을 제 내부에서 조립의 이전으로 분해하고 흩트리는 과정에 윤지양의 시가 쓰여지는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Nguyễn Thế Hoàng」과 같은 시에서는 언어를 통해 형식과 의미에 대해 묻는다. 이 시는 번역을 통해 읽는 시, 편집된 시는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모국어로 쓰인 시는 또 완전한 독해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을 파생하면서도 시의 내용에 대해서도 묻게끔 한다. 이 시는 ‘윤지양’과 ‘Nguyễn Thế Hoàng’의 업무 메신저를 편집해 부분만 들여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해진다. 시는 무엇을 의미 삼는가? 또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애초에 시는 완전한 독해를 목표로 하는가? 그럴 때 윤지양의 시도들은 차라리 시가 만들어낼 수 있는 숱한 가능성을 찢어버림으로써, 놓치지 않고 모조리 해석하겠다는 욕구 대신 불가능의 인식과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만지는 중인’ 시의 본성을 일깨운다. 그럴 때 저 인부들의 직조 행위는 차라리 시적 태도일까? 그런 태도에 근간할 때 이 시집의 감정은 물성화되며(「유실물」, 「토요일」), 감정은 ‘안다’는 인지적 사실로만 성립하는(“너를 뺀 모든 걸 사랑한다는 걸 알아”, 「조지에게」)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냉랭하며 파괴적인 윤지양의 시가 배반하는 것은 차라리 신화가 아닌 일상, 시의 살아냄이라는 형식 자체는 아닐까? 기대라는 게 누군가 정해놓은 일정 높이의 허들을 넘는 일이라면, 이 시인에게 기대란 의미라는 약속의 틀에 처박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의미로 가득 찬 일상과 시라는 세계에서 윤지양의 시는 기대하지 않는다. 얼음이 단단해지고 사무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하품을 한다 모든 것이 침묵의 기억이라면 기억은 얼마나 녹을 수 있을까 걸어가는 사람들은 분홍색 자전거는 언제쯤 녹을 수 있을까 -「토요일」 어째서 아주 보통의 하루가 추구해야 할 미덕이 되었을까? 추구해야만 도달 가능한 보통의 일상은 시인에게도 퀘스트가 된다. 한 시인은 이제 “이 풍경 속에서 달리기 시작했다”(남현지, 시인의 말). 또 다른 시인의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으니 기다리라”(고선경, 「카푸치노 감정」)는 다짐은 자신을 향한 주문일 테다. 헤어지고 연인이 되었다 다시 덩어리가 되고 해봤자 창틀 안에서 돌뿐인(윤지양, 「비연인」) 이 관계 속에서 여러모로 뒤틀고 바꾸고 엮고 지우며 세계를 읽고 쓰는 일, 시 쓰기와 일상을 따로 놓지 않는 일은 자신을 고백하고 다독이며 배반하는 식으로 시작되었다. 아주 보통의 하루가 가능하다면, 설령 #아보하를 달 수 없는 날에도 시를 읽으며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리라. 우리, 그러하기를 약속하기로. 그렇게 살아내기로. 1) 김난도 외, 『트렌드 코리아 2025-2025 대한민국 소비트렌드 전망』, 미래의 창, 2024. 2) 영국 전래동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골디락스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상태를 일컫는 관용어이다. 골디락스가 곰이 끓인 뜨거운 스프와 차가운 스프, 적당한 온도의 스프 중 적당한 온도의 스프를 고른 데서 유래했다.

계간 딩아돌하 황유지 아보하일상생존법무해함배반고선경남현지윤지양 2025
전철희 아름다운 이별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자주 언급했던 사례 하나. 어느 날 야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은 반가워서 시간이 있으면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상대방도 동의했다. 그 순간 갑자기 집의 지붕이 떨어져서 상대방은 죽었다. 그는 자기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저녁약속에 응한 셈이었다. 그는 이렇게 답해야했다. “나는 자네와 저녁식사를 하고 싶네. 하지만 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군. 만약 내가 저녁까지 살아있다면 자네와 함께 식사를 하겠네.” 물론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망각해야만 평안한 삶을 유지 가능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확률이 너무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복권 1등에 당첨될 확률은 돌연사의 확률보다 높지 않다고 하는데, 인생역전을 꿈꾸며 복권을 구매하는 사람은 꽤 있지만 자신의 삶이 지금 당장이라도 끝날 수 있다는 인식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죽음을 망각하는 까닭은, 어쩌면 그런 망각을 통해서만 의미 있는 인생을 영위할 수 있으리라는 직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각각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가령 회사원들이 힘든 노동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월급을 받으면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구매하고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할 수도 있으리라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갑자기 교통사고라든가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건이 생겨서 죽을 수 있다면 굳이 계획을 세워서 미래를 설계하고 사회생활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허나 인간이 누구나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미래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남을 경우 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간이 죽음의 가능성을 망각하게 된 것은 어쩌면 사회생활을위한 자위이자 자연스러운 ‘진화’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 대면하기 싫은 끔찍한 사건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종종 불연 듯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살다보면 타인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죽음은 삶의 반대말이기도 하니 삶을 생각하다 보면 죽음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오래하면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으니 보통의 사람들은 다시금 죽음을 망각하려는 무의식을 갖는다. 문학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봤고 생각해볼 만한 문제를 구체화시키는 창구이다. 죽음 또한 문학이 다루는 주제로 자주 차용된다. 이번에 김지녀 시인이 발표한 작품 「죽음의 방문」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물 속에 잠긴 사람의 입에서 올라오는 공기방울처럼 퐁퐁, 퐁 만들어졌다 터지는 모양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손짓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갔다 동공이 커지고 모든 계절이 한 장면에 사로잡혔다 타이어의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듯 결국 한쪽으로 기울어 멈추었을 때 고요는 막 살점이 떨어져 나간 직후 피조차 나오지 않는 푹 패인 자리 다 없어지고 치아만 남아 돌아 온 사람이 지킨 것을 아내와 딸의 제삿날이 같은 남편의 밤을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개처럼 컹컹 컹, 한참을 짖다 돌아선다는 것을 혼자 걸어가다 발을 헛딛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죽을 뻔했네 갑자기 튀어 나온 말에 내 손을 잡아주지 않고 조용히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죽음에 대해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고 참혹은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들키지 않고 죽음처럼 나는 잘 웅크려 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헷갈려 하며 일어난 날,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물에 젖은 것처럼 다시 잠들고 싶은 날에, 「죽음의 방문」 전문 작품의 전반부가 누군가의 죽음을 묘사한다면 후반부는 화자의 상념을 담아낸 작품이다. 전반부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마도 물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 같은데, 말을 뱉어낼 순 없는 상태로 여러 몸짓을 해보다가 결국 조금씩 힘을 잃어가게 된다. 과연 죽음이란 살아있던 사람이 말을 잃고 신체를 건사할 수 없게 되면서 정적만을 남기는 사건이기도 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활달하게 몸을 움직이며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기도 했을 사람이 죽음을 맞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나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의 여부라든가 죽음 이후 영혼이 가는 곳이 있는지의 문제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죽음은 하나의 존재가 무(無)로 형질 전환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앞서 인용한 작품은 그런 죽음의 광경을 그려내다가 중반부에 이면 화자는 갑자기 “나”의 경험을 고백하게 된다. 혼자 걷다가 넘어지고 “죽을 뻔했네”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그와 같이 “죽을 뻔”한 경험을 한다. 정말 죽음의 위험성을 실감하는 상황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갑작스러운 신변의 위기는 생기기 마련이고, 그런 때면 한국인들은 “죽을 뻔했네”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이런 표현이 사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사망가능성을 불안하게 인식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통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죽은 자들은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더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런데 이 시편의 화자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도 죽음을 기꺼이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아마 타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참혹해지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움츠린다.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웅크려 있는 모습이 약간은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 같다는 점이다. 죽음을 회피하거나 망각하려는 시도는 무용한 것이고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근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뜻일까? 다만 이 작품이 마냥 죽음의 편재성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언급했듯 죽음은 절대적인 무(無)를 뜻한다. 죽음은 인간이 세상에 부여했던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블랙홀이다. 그래서 “나”와 죽음이 공존한다는 이 작품의 발상은 우울하고 섬뜩한 묵시록적 예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표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김지녀 시인의 작품이 늘상 이런 죽음과 무(無)에 대한 형이상학적 “깨달음”을 풀어낸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인의 작품을 읽어왔다거나 이번 <신작소시집>을 본 독자들이라면, 그녀의 시를 특징짓는 것은 고적한 이미지 속에서 따뜻한 감성을 풀어내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들의 돌올한 감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녁의 바다는 주인 아닌 사람을 밀쳐냅니다 호흡을 알기 때문이죠 우리는 노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바다로 걸어들어가는 동안 무뎌지는 발자국은 시든 상추의 내면과 같아요 씹을 때 소리를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상추에서 온 사람입니다 상추의 영혼은 열 시간이 넘도록 꿈을 꾸고 있습니다 호흡이 불규칙해서 바닥이 자주 들썩입니다 바닥에 입을 맞춥니다 바다와 같은 냄새가 나서 밀쳐냈습니다 나는 바닥에서 온 사람입니다 모래를 한 줌 잡았다 놓아줍니다 주인처럼 집을 나섰는데 집을 잃은 사람들이 조용히 모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내며 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을로 번지느라 우리는 소리를 잃은 사람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생각이 무거워서 당신의 의자에 좀 앉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전문 인용작의 제목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화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작품을 찬찬히 읽어보면 사랑을 희구하는 연가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의 상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게 보인다. 작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나)”가 어떤 존재라는 반복적 언명이다. 화자는 자신이 노을이라고 했다가, “상추에서 온 사람”이라고 했다가, “바닥에서 온 사람”을 자처한다. 노을이 낮과 밤 사이(조금 낭만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개와 늑대의 시간”)에 아름답게 생겨났다가 휘발되는 것이라면, 상추는 아삭거리는 내면을 가지고 계속해서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물상이고, “바닥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은 자신이 이내 흩어져버릴 모래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런 표현들을 얽어놓음으로써 인용한 작품은 세상의 어딘가에서 고독한 꿈을 꾸는 개별적 존재를 형상화해낸다. 화자는 이런 이미지들을 병치한 후 자신이 노을로 번지는 존재이며 또한 “소리를 잃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한다. 소리를 잃었다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을 방법이 없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서글픈 표현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독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노을, 상추, 모래는 애당초 혼자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노을은 바다(지평선)와 하늘 사이의 이음새처럼 보이니까 하늘과 바다의 주변에 있는 것이며 공중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덮을 수 있다. 상추는 아마 언젠가 밭에서 자연의 일부로 자라났을 것이며, 바다의 모래 또한 혼자서 존재하진 않는다. 고독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고 언젠가 만개할 것이라고 믿는다거나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이 언젠가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면 현재를 견뎌낼 힘이 생길 수 있을지 모른다. 요컨대 「죽음의 방문」이 “나”와 죽음(無)의 근접성을 다룬 시편이었다면,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나”라는 존재가 허무하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삼아 “기다림”의 자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두 발상이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상기했듯 죽음은 모든 것을 허무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은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평했다. 인간은 각자의 욕망과 계획을 가지고 사는데,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굳이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어진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든가 하려던 일들을 구태여 실행으로 옮길 필요가 있겠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단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인이었고 아마 그가 추구한 믿음은 신을 향한 것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분명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가족, 친구, 연인 등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는 활기가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나”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그 사랑은 나의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렇게 충만한 상태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고 의미 있는 삶을 이룩할 수 있다고 했다. 삶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만 허무함을 벗어나기 위한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식은 「아직 오지 않은 사람」에서도 변용되어 드러난다. 이 작품의 화자는 본래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유의 기반에는 삶의 허무성 내지는 고독함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후반부를 보면 “나”와 세계가 겹쳐지고, 마지막 행에서는 급기야 “당신”의 자리로 가고 싶다는 다짐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나”의 독자성을 확인하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 “당신”으로 표상되는 타자에 대한 사유로 넘어가는 감각... 이것은 물론 김지녀 시인 개인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아니라고 생각된다. 너무나 오래 전에 나왔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라든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시집만 봐도, 극한의 고독에 침윤한 화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겸허하게 드러낸다. 이렇듯 고독한 세계에서 사랑이 피어나는 사람의 내면을 현시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이라면, 김지녀의 작품은 그런 장르적 책무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평가 또한 가능할 것이다. 이번에 <기발표작>으로 소개된 작품 「행운목」과 「바라보는 화창」의 경우에도 내밀한 고독의 어투로 타자(세계)와의 관계를 추구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할 수 있겠는데, 이 작품들의 인식과 정서에 대해서도 유사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지금껏 이 글은 김지녀의 시에 대해서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번 <신작소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한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런 독법이 적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이 시인의 절묘한 감수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화를 내고 울어버린 나만 덩그러니 남았던 적이 이별인지 모르고 이별 앞에서 계속 머뭇거렸던 적이 눈이 내리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머리만 내놓고 누구든 무릎에 앉길 바라며 앉았다 일어나 다시 앉았다 떠났던 적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처럼 프레임 바깥으로 걸어나가 돌아오지 않는 주인공처럼 끝나도 일어나지 않고 앉아 있는 나에게 (중략) 눈이 내리고 사람들이 내 옆을 지나간다 먼저 떨어진 눈이거나 내 뒤에서 떨어지거나 나를 슬쩍 쳐다보는 듯한 눈이 평평한 바닥을 걷고 있어도 발 아래에서 끊긴 지층처럼 어긋났던 적이, 눈이 내리고, 나를 잃어버렸던 적이 (중략) 눈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고 이 세계가 눈에 덮혀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를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고 너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시간일지도 나에게 오지 않은 시간일지도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부분 존재론적 고찰을 담은 듯하면서 또한 “너”에 대한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는 작품이다. 작중 세계에서는 눈이 내린다. 아마 구름으로부터 파생되었을 눈은 하늘을 부유하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밝히거나 녹으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어쩌면 사람들이 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연약하게 명멸하는 존재가 잠시 만들어내는 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마찬가지로 꺼져가는 촛불이 타오르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그런데 이 시의 화자가 지적하듯, 눈은 비록 단명할지언정 세상의 분위기를 바꾼다. 세상에 모종의 느낌을 풍기고 이내 사라져버리는 존재라니, 이것은 정확히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에 흔적을 남긴다. 소수의 위대한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남기는 흔적은 매우 미약하다. 특히나 인간의 죽음 이후에는 그나마 그가 남겼던 흔적마저 빠르게 소멸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죽음이라는 사건이 도래한 이후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나름의 방식으로 세계와 조응한다. 마치 눈이 언젠가는 녹아버리고 사라질 것이라고 할지라도, 눈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세계에 자취를 남길 수 있는것과 같은 이치이다. ‘세계’라고 말하니까 조금 거창해 보이는데, 모든 인간은 각각의 세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개별 사람들을 변화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건을 상정하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모든 인간관계는 시한부이다. 언제든 우발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시작되지만 또 언제든 끝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하나의 관계가 시작되면 서로에 대해서 뭔가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변치 않을 우정”을 맹세하는 사람이 있고, 연인이 생길 때마다 “영원할 사랑”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장기적으로 본다면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이 나게 된다. 인간 자체가 유한한 존재인데 인간끼리의 만남이 영속적이라는 기대는 무망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려 하고 여러 가지 추억을 쌓고는 헤어진다. 어쩌면 이것은 언젠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껏 살아보려고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과 유사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더 정확히 말하면 사후에 자신이 죽었던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없지만) 살다 보면 이별은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삶에 적잖은 내상을 남기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이별은 피할 수 있는 사건이다.(우리가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아픈 이별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려 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헤어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그것은 헤어짐의 아픔은 미래의 일이고 일단은 자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남을 지속해보겠다는 무책임한 생각 때문도 않을 수 있다. 죽음은 경험이 될 수 없지만, 이별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경험이 되어 준다. “아름다운 경험”이라는 것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는 예술작품들은 대부분 불행하거나 뭔가가 부족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모든 면에서 행복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소설이나 시로 쓴다면 무미건조할 것이다. 적당한 결여와 불행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은 그러나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다. 왕가위 감독의 로맨스 영화 같은 것을 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환희의 순간만큼이나 이별의 순간도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음을 익히 느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김소월과 한용운을 비롯한 많은 서정시인의 작품이라든가 요즘의 대중가요(발라드)를 경험해본 사람 또한, 이별의 순간이 아름다운 언어들을 직조해낼 수 있음을 알 것이다.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는 그런 문제의식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이 작품은 인연이 끝나는 순간을 암시하면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흐르는 음악”을 병치시켜 놓기도 했다. 이런 맥락을 전체적으로 살핀 이후에야 우리는 “무효와 침묵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다는 제목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데 김지녀 시인은 어쩌면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릴 수 있는 죽음이라든가 하나의 만남을 종결시켜버리는 이별 같은 것을 현시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 아름다움 자체를 통해 하나의 의미가 되고 있다. 무(無)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산출해낸다니, 그야말로 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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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희 읽는다는 것, 있다는 것 ― 2024년 겨울의 시

읽는다는 것, 있다는 것 ―2024년 겨울의 시 “깨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잃어야 하죠.” (김경인, 「도토리 줍기」,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황선희 가을,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고 모처럼 ‘문학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풍성해지는가 싶었다. 그러다 마주친 12월 3일 계엄의 밤을 생각한다. 어제를 동여맨 막막한 공포 속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되묻게 되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2024년 겨울은 공동체에 대한 감각이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발달하는 계절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돕고, 앞서간 이가 우리를 구한 시절.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또 얼마나 속속들이 연루되어 있었는지 알고, 놀라고, 배우게 되었던 시절. 먼 훗날의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시민들은 저마다 가장 소중한 빛을 들고 광장에 모여 따로 또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더 오래, 더 멀리 함께 가기 위해서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여의도와 광화문을 수놓았던 빛은 남태령, 한강진을 밝히며 함께한다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게 했다. 동짓날 밤 험한 고개는 단지 함께라는 이유만으로 광장이 되었다. 우리는 “오늘 밤 이 도시에서/집이 없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강성은, 「네 집으로 가」, 『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물으면서, 누구에게든 집이 있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았다. 빛의 물결 속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하는 동안 앞사람의 웅크린 어깨를 바라본다. 그 어깨는 얼마나 작은가. 그리고 얼마나 넓고 크고 단단한가. 별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겨울은 소중하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별을 관측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코끝 시린 계절의 필요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겨울은 포용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시는 겨울을 끌어안는 동안 더욱 밝게 빛난다. 가장 길고 어두운 밤을 밝게 빛냈던 이 계절의 시를 다시 읽는다.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우리는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친구는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혼자 걷는 광화문은 낯선 나라 같다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사람들 그사이 선두에서 걸어가는 친구가 보인다 서둘러도 따라잡히지 않는 친구는 골목으로 들어가고 붉은 벽돌집이 늘어서 있는 뻔한 장면이 펼쳐진다 성실하게 친구를 찾았다 똑같이 생긴 문을 여러번 열고 닫고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긴장은 공포로 바뀐 지 오래지만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친구는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고 있고 무언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너 도대체 어디냐고 같이 걷고 있긴 한 거냐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멘 친구가 계단을 내려가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데 그러면 난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어 있다 아무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광화문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행진하는 사람들 어색하게 포함된 채로 걸으면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친다 따라 하듯 중얼거리다 걸음을 멈춰도 아무것도 정지되지 않는다 나는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데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고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된다 ―김상희, 「잡을 수 없는 것」(『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 김상희는 잡히지 않는 것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혼돈과 균열을 시화(詩化)한다. 시적 주체는 ‘주말 시위’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하는 친구의 연락을 받는다. 친구는 ‘나’와 광화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혼자 걷는 광화문’의 풍경은 낯설게만 느껴진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고, 친구는 저 멀리 선두에서 걸어간다. 시적 주체가 아무리 서둘러보아도 친구는 잡히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친구를 따라 헤매며 ‘성실하게’ 친구를 찾던 ‘나’에게, 비슷비슷하게 생긴 붉은 벽돌집이 반복되는 뻔한 장면은 긴장을 넘어 공포마저 느끼게 한다. “나에게 정말 친구가 있었던가” 하는 생각은 마지막 다세대주택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다른 국면으로 전환된다. 가까스로 찾아낸 친구는 조바심 가득했던 ‘나’와 달리 태평한 얼굴로 짐을 싸서는 무언가 가득 든, ‘몸집만큼 커다란 가방’을 메고 ‘나’를 스쳐 지나간다. 광화문에서 골목으로, 붉은 벽돌집에서 다른 벽돌집으로 이동하며 친구를 찾았던 ‘나’의 성실함은 금세 무용해진다. 다시 저 멀리 걸어가고 아무리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 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흔하디흔한 붉은 벽돌의 다세대주택”이 되고 만다. 친구는 항상 조금씩 앞서 있고 ‘나’는 매번 조금씩 뒤처져 있는 상태이다. 뒤따르는 자의 미묘한 긴장과 함께 광화문에서 을지로로 향하는 행진은 시작된다.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포함된 ‘나’는 알 수 없는 구호를 중얼거리기도 하고 걸음을 멈춰 보기도 하지만 ‘나’를 둘러싼 그 무엇도 정지되지 않는다. ‘무얼 위한 시위인지도 모르는’ 나, 그렇지만 친구가 부르면 ‘언제든’ 광화문으로 나오는 나, 받지 않을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나, 친구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영원히’ 정지되는 나. 위의 시에서 시적 주체는 광장에 서 있지만, 혼란스럽고 낯설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억이 된다. 설령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창한 사명감 없이도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조금 느리게 혹은 당신과 함께라면/아침에서 밤까지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지”(심재휘, 「연필과 지우개와 노래와 당신」, 『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라는 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혼돈 속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잊지 않는 이가 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부터 4시간 남짓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진 도심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습니다 나는 퉁퉁 부은 젖은 눈으로 거리와 병원을 찾아다닌 끝에 마주한 슬픔과 허무와 절망을 추스르지 못하는데 무표정한 얼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참사가 아니라 손쓸 수 없는 사고라고 희생자가 아닌 예상할 수 없는 사고 사망자라고 그날 그 시간에 더 크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미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아니 대비했다 하더라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권한이 없었으므로 책임 또한 없다고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아니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건넵니다 그만 잊으라고 이제 가슴에 묻으라고 그정도 했으면 됐다고 사고로 간 그들을 위해 사회의 안녕과 나라의 안위를 위해 지금은 혼돈을 거두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온기 없는 위로를 건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점점 깊어지고 더 짙어지는 어둠 속에 떨리고 갈라지는 울음 섞인 목소리 치미는 슬픔과 고통은 갈 곳을 잃었습니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 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 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 얼굴 없는 사람들 담으려 해도 담아지지 않는 추스르려 해도 추스러지지 않는 여전히 떠도는 그날, 그 밤의 말들 너무 소름이 끼쳐요 사고 날 것 같아요 위험해요 아수라장이에요 대형사고 일보직전이에요 사람들이 압사당하고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누군가 와주세요 제발 여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이태원 뒷길이에요 그날 그 밤의 말들을 가슴에 묻은 사람들이 몸을 던집니다 깊은 절망 속에서 온몸을 던집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던지고 또 던집니다 뙤약볕 아래 폭우 속에 혹한의 빙판길 위에 이어지는 오.체.투.지. 점점 멀어져가는 기억과 무관심을 향해 마지막 남은 몸까지 다 던지고 나면 무엇을 더 던질 수 있을까요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습니다 ―곽효환, 「나는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있습니다」(『딩아돌하』 2024년 겨울호) 곽효환의 시는 ‘이태원역 1번 출구’라는 구체적인 장소에 시적 주체 ‘나’를 세워 놓는다. “들뜬 청춘과 다정한 연인들의 환한 얼굴”이 “깊고 시린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져버린 도심. 묻고 사유하고 걷기를 멈추지 않겠다던 말(「시인의 말」,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문학과지성사, 2023)은 참사가 덮친 그곳을 향한다. ‘조금 늦게’ 이곳에 서 있다는 시적 주체의 전언은 고통보다 늦게 당도할 수밖에 없는 애도의 숙명을 보여 준다. 세월호 참사 때처럼 참사는 사고로 바뀌고, 희생자는 사망자로 축소된다. 그리고 그날,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말해진다. 섣부른 말들을 앞세운 뒤 아무 말이 없는 세계 속에서 ‘나’는 “다시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함께 울어주지 않기를 택한 사람들은 “웃음을 머금고 온기 어린 표정으로” 혹은 “한층 무덤덤하고 단호해진 음성으로” 위로가 될 수 없는 위로를 건넨다. 그들이 건네는 회피와 강요의 언어는 이태원에서 있었던 일을 개인의 불운으로 돌리려는 시도다. 시인은 어둠, 울음, 슬픔, 고통 등의 감정어를 활용하여 구체적인 애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누군가의 희망이고 사랑이고/전부이고 모든 것이었을 그러나/이제는 절망이고 이별이고 아무것도 아닌” 사진 없는 영정과 ‘얼굴’ 없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곳에서 스러져간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돌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상실은 우리 모두를 어설프게나마 ‘우리’로 만들었다.1) 참사의 기억이 점점 흐려져 가는 현실 속에서, 유가족과 시민들은 자신의 몸을 던지는 행위로 저항한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몸’을 던지며 가장 깊은 참회와 애도를 한다. 깊은 절망 속에서 기억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 곁에서 시적 주체는 그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 서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있음으로써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기억하는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있을 것인가?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았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했는데 아이는 자꾸 자라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하며 그래 오늘이 가면 네가 올 거야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 그 방에서 지치지 않고 노닥거리고 있으면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이 널찍한 등줄기에 새겨진 용 문신처럼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릴 거야 알록달록한 장난감이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 너는 올 거야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이마 위에 도사린, 캄캄한 흑판을 향해 나는 쓸 거야 아직 발설하지 못한 언어들이 나의 잠보다 먼저 도착하게 할 거야 도처에서 쇄도하는 너의 입김을 놓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나를, 필사할 거야 ―한세정, 「시는 어디에 있는가」(『문학인』 2024년 겨울호) 한세정은 일상과 가까운 언어로 삶의 지속을 노래해 왔다. 시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위 시의 주체는 시집 출간을 기다린다는 문자를 받고 곤혹스러워한다. 원고를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나’를 지연시키는 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생활인의 삶. 이 시에서 ‘시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곧 ‘나’는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기도 하다. ‘나’가 제자리에 고여 있는 것 같은 삶을 지속하는 동안 아이는 자꾸 자라고 아이를 돌보는 나의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래 오늘이 가면/네가 올 거야”라고 곱씹으며 시적 주체는 “오로지 나의 언어들만이 존재하는 작은 방”에서 휘발된 언어들과 사라진 이름들을 어루만져 본다. 아이의 장난감이 때로는 사납게 ‘나의 방’을 침범하고 아끼던 시집 표지가 아이 손에 뜯겨 나가도, 시적 주체는 “내가 나를 붙들고 있으면/너는 올 거야”라는 믿음으로 시를 기다린다. 시는 사실 언어를 통해 존재를 붙잡는 ‘나’의 곁에 늘 있다. 거리가 아니라 작은 방 안에서도 삶은 지속되고, 시는 ‘있다’. 위의 시에서 ‘너는 올 거야’라는 말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들이 언어를 통해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며,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2024년 겨울의 시에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끝까지 붙잡고 기억하려는 태도가 있다. 이 시들은 가장 어두운 밤, 망각을 거부하며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온다. 이런 태도와 함께라면 “둘은 셋이 되고 셋은 다섯이 열이 될 수도”(박소란, 「침향무」,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 있다. 기억이 사라지고 존재가 희미해질 때, 시는 가장 어두운 곳에서 다시 깨어난다. 우리는 읽음으로써 존재를 확인하고, 기억함으로써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존재할 것인가. 1)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역, 필로소픽, 2018,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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