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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 2024년 봄호(제190호)

작고 여린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 ― 박화목 동화론

박상재 문학평론

* 전주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전공(문학박사) * 1981년 <아동문예> 동화 신인상, 1984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동화 당선 * 제2차 세계아동문학대회 집행위원장(서울임페리얼호텔), 2023 세계방정환학술대회 조직위원장(서울 프레지던트호텔), 2024 세계방정환학술대회 조직위원장(수원 컨벤션센터) * 한국아동문학학회 회장(역임), 한국아동문학인협회 이사장(역임) 한국교원대 겸임교수, 단국대 대학원 외래교수 역임 * 현재 한국아동문학학회 자문위원, (사)한국아동문학인협회 고문,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아동문학사조> 발행인 * 새벗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아동문학상, 한정동아동문학상, 박경종아동문학상, 김영일아동문학상, PEN문학상, 이재철 아동문학평론상, 생명과문학 작가상 등 수상 * 저서: 이론서 <한국창작동화의 환상성 연구>, <한국동화문학의 탐색과 조명>, <한국동화문학의 어제와 오늘>, <한국 대표아동문학가 작가작품론>, <동화시의 매력>, <동화 창작의 이론과 실제>, 동화: <도깨비와 메밀묵>, <영웅레클리스>, <꽃이 된 아이>, <하지아저씨와 삽살개> 등 140 여권

 Ⅰ. 들어가는 말

 

  은종(銀鍾) 박화목(朴和穆)1924215일 황해도 황주군 장천리(긴내 마을)에서 부친 박승환과 모친 이덕환 슬하의 43녀 중 여섯째(3)로 태어났다. 기독교1)를 믿는 그의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는데, 백부는 장천리에서 큰 과수원을 경영했다. 그의 부친은 그가 어렸을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양복점을 경영했다. 평양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치고, 1942년 평양 신학교 예과 및 본과 2년을 졸업했다. 1943년 중국 하얼빈 영어 전문학원에서 공부하고, 1945년 만주 선양시(봉천) 동북신학교 본과를 졸업했다. 그후 월남하여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문단 이력을 보면 1939년 어린이 잡지 <아이 생활>에 동시 겨울 밤, 1941년에 피라미드가 추천2)되었다. 박화목은 광복 직전 중국에서 귀국해서 평양 근처의 누나 집에서 기거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이 기독신앙을 가진 그가 살기에 적절치 않음을 깨닫고 19462월 선배 아동문학가인 함처식3)과 함께 월남을 결심한다. 한밤중에 걸어서 삼팔선을 넘은 그는 여관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동시 「38도선」4)을 썼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이 작품을 윤석중이 펴내던 월간잡지 <소학생> 현상공모에 응모하여 당선되면서 공식적으로 등단하게 된다. 당시 백 원이라는 상금도 받아 수중에 돈이 없던 그가 서울에 정착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과 문예담당 프로듀서로 일하며 동인지 <죽순(竹筍)>5)과 시지 <등불>의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0년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역임했고, 1952년 도서출판 민교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1954년부터 기독교방송에 입사하여 교양부장 및 편성국장을 지내다 1971년에 퇴사했다. 1980년부터 10년동안은 서울신학대학 강사를 역임했다.


    박화목의 연보를 바탕으로 출간한 작품집을 동화집과 동시집으로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화·아동소설집은 밤을 걸어가는 아이』(소년 소설집, 1954), 『부엉이와 할아버지』(1955), 『꽃팔이 소녀의 그림』(1963), 『저녁놀처럼』(1970), 『눈 소녀』(1974), 『램프 속의 소녀』, 『비바람 속의 아이들』(소년소설집, 1979), 『마징가의 꿈』(1981), 『현주의 봄 여름 가을 겨울』(1981), 『얼룩 염소의 모험』(장편 동화, 1982), 『개똥벌레 삼형제』(1983), 『인형의 눈물』(1987), 『아파트 소녀와 나비』(1988), 『아기별과 개똥벌레』(1988) 『욕심많은 개구리』(1990), 『잃어버린 나비』(1990), 『무지개를 타고 온 아이』(1991), 『내가 잃어버린 무지개』(1993), 『꽃별이 된 떡갈나무』(1994), 『꿈을 먹는 나비』(1994), 『다리부러진 인형』(1994) 20권이다.

  동시집은 초롱불』(1957), 『꽃이파리가 된 나비』(1973), 『아이들의 행진』(1978), 『봄을 파는 꽃가게』(1981), 『봄 그림자』(1985), 『아파트와 나비』(1989) 6권이다. 출간한 작품집의 권수로 단순비교해도 알 수 있듯이, 박화목은 동시보다 동화를 훨씬 많이 창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많지 않은 아동문학 작품론이 동시에 국한되어 있음은 추후 연구자들이 참고해야할 사항이다.  

  그가 받은 문학상으로는 제4회 한정동아동문학상(1972), 기독교문학상(1975), 대한민국문학상(1978), 한국전쟁문학상(1990), 서울시문화상(1989),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1994), 황희 문화예술대상(1999), 국제문화예술 협회 공로상(2000) 등이 있다.

  문단활동으로는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아동문학위원을 비롯하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중앙위원, 한국아동문학회 회장,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위원, 한국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숙희와 결혼하여 슬하에 11(혜은, 성혁)을 두었다. 200579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영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홍성교회 묘지에 잠들어 있다.

 

 

 Ⅱ. 박화목 동화의 세계

 

박화목 문학의 연구는 동시에 편중되어 있고 동화에 대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동시 연구에 대해서도 본격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진 것은 없다. 이는 박화목 관련 학위 논문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동시는 상상과 동경과 애수의 세계6)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의 동화는 허무적 이상주의, 기독교적 이상주의7)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동문학의 사적 체계를 위해서도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꼼꼼히 읽고 그 특징을 파악하는 연구 및 논의가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박화목이 동시로 문단에 등단하여 60여 년간 이룬 작품 활동 가운데 특히 그의 동화 세계를 중심으로 주요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박화목의 동화 및 동화관을 탐색하여 우리 아동문학계의 작가작품 연구 및 아동문학사적 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박화목 문학을 조명한 연구물로는 박덕은의 박화목 동시의 세계」(『한국아동문학작가작품론』, 서문당, 1991), 진선희의 박화목 동시 연구 1」(『한국아동문학연구』 192010), 「본향에 대한 그리움의 감각적 구체화-박화목 동시 연구 2」 (『한국초등교육』, 대구교육대학교, 2011), 지기원의 은종 박화목의 시에 나타난 기독교 세계관』(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9) 등이 있다. 본고는  『다리부러진 인형』(1994)

박화목 동화선집 부엉이와 할아버지』(1994)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자 한다.

 

  「개똥벌레 삼형제는 풀숲에 사는 개똥벌레 3형제가 밤길을 가는 소년을 도와주는 내용이다. 박화목 동화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의인화 동화로 초가집이 있는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개똥벌레 3형제는 마을로 날아가서 사람들이 사는 방 안을 살핀다.

 

 초가집 지붕에 열린 박이랑, 뜰에 감나무랑, 창문에 비친 빨간 호롱불 빛이 모두 같았습니다.-중략- 어머니께서는 더욱 더 아파하십니다. 배를 움켜 쥐고 아파하십니다. 소년은 더 보고만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어머니, 제가 얼른 읍내에 가서 약을 사올게요?”하고 말합니다./“아니다, 괜찮다. 5리가 넘는 밤길을 네가 어떻게 갔다 오겠니.”/“무섭지 않아요.”

 

  소년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을 사기 위해 2Km가 넘는 밤길을 간다. 이런 류의 효행담은 진부하지만, 어두운 밤길을 반딧불이들이 길을 밝혀준다는 점이 동화적이다. 개똥벌레 삼형제는 소년이 약을 지어 돌아오는 동안 어두운 길을 밝혀준다. 개똥벌레가 등장하는 의인화 동화인데 옛 이야기에 나오는 도덕적 미담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아마 소년은 개똥벌레 3형제 이야기를 어머니께 했을 거예요.”와 같은 에필로그는 사족일 수밖에 없다.  

  목마의 꿈은 일곱 살 준이가 주인공이다. 준이는 외삼촌이 생일 선물로 사준 목마를 타고 논다. 또래의 아이들이 몰려와서 준이를 부러워 한다. 준이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으쓱해한다. 한번만 타보자는 기수의 간절한 부탁을 준이는 거절한다. 기수가 방송국에 다니는 자기 아빠가 TV에 나왔다고 뻐기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수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빈터로 가서 축구를 하고 논다. 준이는 혼자서 목마를 타니 재미도 없다. 한낮이 되니까 볕도 따갑다.

 

  준이는 목마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그 때였습니다. 준이의 눈길이 목마 얼굴에 쏠렸습니다./글쎄 이상도 하지요. 목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쭈르르 흐르고 있지 않겠어요?/살아 있는 말도 눈물을 홀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나무로 깎아 만든 목마가 눈물을 홀리고 있는 것입니다.-중략-그러자 목마는 꼭 사람처럼,/“그래요, 울고 있어요.”/하고 대답을 합니다./“. 목마가 말을 할 줄 아는구나. 그래, 왜 우는 거니?”/“도련님이 그렇게 욕심쟁인 줄 몰랐어요.”/“내가 욕심쟁이라구?”/ “, 그래요. 혼자만 타겠다구 욕심을 부렸잖아요.”

 

  목마가 눈물을 흘리고 말까지 하는 일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판타지의 세계라면 가능하지만 갑자기 펼쳐지는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라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기우는 다음 이야기에서 해결이 된다. 시장에 다녀오던 준이 엄마가 목마를 탄 채 졸고 있는 준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준이가 잠깐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 우리 준이가 목마를 타고 졸고 있네. 쯧쯧!……” 그런데 이러한 꿈의 처리는 너무 식상하고 진부하다. “아마 준이는 내일 꼭 기수며 미나며 동네 아이들에게 목마를 태워 줄 거예요.”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이런 작법은 작가가 이야기속에 들어가 관여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독자가 스스로 깨닫게 해야지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문학성이 훼손된다.

  「염소와 달밤은 점박이라는 염소가 주관자 시점으로 등장하는 동화이다. 이 동화에 등장하는 아저씨는 염소를 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런데 오른손이 없어 쇠갈구리 의수를 하고 있다. 그는 마른 풀을 먹기 싫어하는 염소에게 가끔 도화지를 먹이기도 한다. 화가 아저씨는 자신의 그림을 공모전에 출품하지만 고배를 마신다. 그 때문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사회를 원망하기까지 한다. 화가 아저씨는 그림을 그려야할 도화지를 염소에게 먹이며 자신의 그림을 비하한다. 점박이는 귀한 도화지를 아깝지 않게 먹여 주는 아저씨가 더없이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아저씨는 읍내로 간 뒤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 때 읍내 학교에 갔다 돌아오는 동네 아이들이 염소들이 울고 있는 곳으로 온다. 염소 아저씨가 없는 것을 안 아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 때, 여태 점잖게 있던 김인동이라는 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목소리를 낮추어,

얘들아, 요즘 말야. 염소 아저씨가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더라.”-중략- “잘 몰라. 하여튼 접때 그린 염소 그림 있잖아? 국전(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했다던 거 말야. 근데 아직 보내지도 않았다는 거야.”/“왜 그랬을까? 그 그림은 특선도 될 수 있는 건데…….”/“접때 아저씨 말이, 자기는 미술학교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입선도 되기 어렵다는 거야. 보내 봐야 말짱 헛것이니까 안 보냈다는 거야…….”/하고 인동이는 사뭇 심각한 얼굴이었습니다./“그럴지도 몰라. 염소 아저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옆의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었습니다./“요즘 세상은 말이야. 문학이구 미술이구 줄이 있어야, 입선도 되고 출세도 한다잖아?”

 

아이들의 입을 통해 사회에 팽배해진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줄이 있어야 출세를 한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대화는 왜곡된 사회 질서와 만연된 불공정과 부정을 풍자하고 있다. 미술학교에 안 다녔기 때문에 자신을 밀어줄 심사위원이 없어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는 화가 아저씨의 말은 동심을 멍들게 한다. 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를 질타하는 내용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문학이고 미술이구 줄이 있어야, 입선도 되고 출세도 한다는 주장은 부분이지 전체는 아니다. 순진무구해야 할 아이들의 입을 통해 일부의 비리를 사회 전체에 만연된 풍조인양 매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달이 떠오르자 점박이는 돌아오지 않는 아저씨가 걱정이 된다. 점박이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쓸쓸함을 느낄 때 달빛 속에서 목청이 째지는 듯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술에 담뿍 취해 있는 듯 발걸음이 적이 비틀거렸습니다. 바른팔을 치켜들 때, 갈고리 손의 쇠붙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중략-/ “하아! 이놈들, 여태 여기 있었구나. 나를 원망하면서 기다렸겠지. 미안 미안!”/아저씨는 우리들 염소의 고삐를 풀어 한 손에 쥐고, 또 다른 갈고리 손으로는 캔버스를 걷어 어깨에 메었습니다.-중략- “야아, 이 점박이야. 너는 내 맘을 알아주겠지? 난 그 속물들에게 내 그림을 보이기 싫단 말야! 특선? 그건 또 뭐 말라 빠진 거야? 차라리 내 소중한 그림을 외양간에다 걸어 놓겠다. 네놈들이 한겨울을 지낼 그 외양간에다 말이다. 암 그래야지, 너희들은 내 소중한 그림을 이해할 거야. 아 아, 내 귀여운 염소들아!”/아저씨는 고삐를 힘껏 당겼습니다. 목덜미가 조금은 아팠으나 그것은 즐거운 아픔이었습니다./나는 아저씨의 눈물이 함빡 고인 두 눈망울에 달빛이 비치어서, 마치 사파이어처럼 빛을 내고있는 것을 쳐다보았습니다.

 

염세주의자가 된 화가 아저씨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세상을 원망한다. 갈고리 손의 쇠붙이가 달빛에 반짝이는 장면은 세상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며 저항이다. 이 동화에서 화가 아저씨가 왜 오른팔이 없어져 의수를 착용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우리의 헌법에는 표현,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공익성을 해치는 내용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들을 속물들로 규정하고, 자신의 소중한 그림을 외양간에 걸어놓겠다는 선언은 제도권에 대한 도전이고 저항이다. 심사위원 중에는 부패한 부류도 있을 수 있지만, 부분을 전체인양 매도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불굴의 의지로 열심히 노력하여 뜻을 이르는 예술가들의 혼도 기억해야 한다. 힘든 고난과 역경을 천신만고 끝에 극복하고 성공에 이르러야 더욱 영광스럽고 값진 것이다. 이 동화는 염세주의에 빠져 세상을 비난하는 화가의 행동을 미화하고 있다. 화가가 고삐를 당겼을 때의 목덜미의 아픔은 즐거운 아픔이고, 화가의 눈물을 사파이어처럼 빛을 낸다고 한 표현이 그것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패한 사회에 대한 고발일 뿐 문학적 감동을 안겨주지는 못하고 있다. 좌절과 불행을 딛고 일어서는 반전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아동문학은 어린이들의 영혼을 물들이는 특수문학인 만큼 예술성에 반하지 않는 교훈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골목길의 눈사람은 눈이 오는 날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만든 눈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이다. 골목길에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눈사람을 만드는 이야기와, 깊은 밤에 그 눈사람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큰축을 이룬다. 눈사람은 동화에 흔한 소재로 등장한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정감이 가고, 인형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영향도 있다. 또한 사람이긴 하지만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 없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눈이 온다, 눈이 온다!”/조무래기들이 좋아라고 골목길로 뛰어나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밖에요./올 겨울 들어 모처럼 내리는 눈이랍니다. 그 동안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다가 오늘 저녁녘 드디어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눈송이가 큼직큼직한 함박눈입니다. 금세 길바닥에 하얗게 깔렸습니다.

 

  눈이 내리면 특히 아이들이 좋아한다. 골목길의 아이들은 어서어서 눈이 많이 쌓이기를 기다린다.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서이다. 박화목 동화에는 조무래기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어린아이를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6, 7, 준이와 같은 나이 또래의 조무래기들입니다.(목마의 꿈) ‘동네 조무래기들 몇 명이 이리로 오고 있었습니다.’(염소와 달밤) 이렇게 조무래기란 군더더기 말이 등장한다. 어린이를 위하는 글에 어린이를 하대하는 말을 쓰는 것은 잘못된 언어 습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골목길이 있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다. 그런데 낯선 아이 한 명이 눈덩이를 굴리자 아이들은 왜 남의 동네에 와서 눈덩이를 굴리냐고 캐묻는다. 낯선 아이는 이웃 아파트에 산다. 그는 아파트 단지에는 차가 많이 다녀 눈이 쌓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내 골목에 사는 아이들이 눈사람 만드는 것을 허락하자 아파트 아이도 한쪽에 눈사람을 세워 놓는다.

  이 동화가 창작된 1990년 대에만 해도 아파트 단지에 제설제인 염화칼슘을 많이 살포하지 않았다. 요즘은 염화칼슘을 많이 뿌려 눈이 녹으며 쌓이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수긍이 가는 삽화이다. 골목길 아이들은 아파트 아이에게 눈덩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들도록 한다. 저녁이 되어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자 눈사람들만 남아 골목을 지킨다.

 

  한밤중이 되어 초록별들이 깜박이기 시작하자, 눈사람들은 말을 나눕니다. 눈사람들의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눈사람을 만든 아이들은 알아들을지도 모릅니다.

 “, 추위!”/하고 눈사람 하나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 때 마침 한줄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왔기 때문입니다./“눈사람이 춥다니, 무슨 말이야?”/ 다른 눈사람이 말대꾸를 합니다./“그래 그래. 우리는 말야, 눈사람이잖아? 눈사람이 춥다는 건 겁을 먹어서 그러는 거야.”/하고 또 다른 눈사람이 말했습니다./“우리가 이렇게 여럿이 있는데 말야, 겁을 먹어선 안 되는 거야.”/“겁을 먹어서 춥다는 게 아냐. 추우니까 추운 거지. 안 그래?”/“그래, 네 말이 맞아. 눈사람도 깊은 겨울 밤에는 추운 거라구.”/저 쪽에서 꼬마 눈사람이 말참견을 합니다.

 

  이렇게 눈사람들이 말을 하고, 핀잔을 주고,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없는 밤에 눈사람끼리 대화하는 장면은 굳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않더라도 억지스럽지는 않다. 이는 동화적 분위기 때문이다. 분위기(atmosphere)란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상황이 주는 느낌을 말한다. 그것은 작품이 서정적이라든지 서구적이라든지 하는 톤(tone)과 달리 작품 전체의 흐름과 배경이 주는 인상을 말한다.8) 눈이 쌓여 있고 별이 반짝이는 밤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어서 판타지 세계로 접근하기가 용이하다.



    골목에 있는 눈사람은 다양하다. 몸집이 작은 꼬마 눈사람도 있고, 커다란 눈사람도 있다. 골목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아파트 아이가 한쪽에서 만들어 외따로 떨어져 있는 눈사람도 있다. 아파트 아이가 만든 눈사람은 외톨이가 되어 외롭다. 다른 눈사람이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자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기동이가 만든 눈사람이 똑같이 눈사람이니 함께 어울려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른 눈사람들도 동의를 한다.

 

우리 눈사람은 얼굴과 손, . 몸뚱이만 있고 다리는 없는데, 어떻게 움직인다지?”/“합치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거 아니야?”/서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그 때였습니다./ 저만치서 또렷또렷한 말소리가 들려 왔습니다./“난 갈 수 있어. 난 너희들과 똑같은 눈사람이니까 말야. 너희들과 함께 있고 싶어. 그리로 갈 거야.”/이튿날 아침./아침 해가 밝게 떠올랐을 때, 밖으로 나온 골목길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만든 눈사람도 골목길에 사는 아이들의 눈사람과 함께 있으니까요.

 

  기동이가 만든 눈사람이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함께 이야기하며 놀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다리가 없는 눈사람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냐며 난감해 한다. 그러자 아파트 아이가 만든 눈사람이 난 갈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이튿날 골목에 나온 아이들은 떨어져 있어야할 눈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밤사이에 눈사람이 스스로 움직였다는 것은 억지스러워서 핍진성이 떨어진다. 아무도 몰래 누가 눈사람을 옮겨 놓은 것으로 설정했어야 한다. 그 주체자가 아파트 아이이거나 기동이일 수도 있고, 밤늦게 귀가하던 술취한 아저씨가 되어도 좋다. 개연성이 없는 사건은 핍진성을 떨어드려 이야기의 동력을 떨어뜨린다.  

 

  「수나와 까치는 나래이터인 수나 엄마가 이끌어가는 1인칭 주관자 시점의 동화이다. 수나네는 몇 년전 변두리 동네로 이사오며 감나무 한그루를 사다 심었다. 그 감나무가 자라 감이 열리고 홍시가 된다. 수나는 엄마에게 까치밥으로 홍시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날 밖에 나가 놀던 수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온다. 엄마가 이유를 물으니 둔덕 포플러나무(마루나무)에 있는 까치 둥지에 까치가 안 돌아와 빈 둥지라서 그런다는 것이다. 수나 엄마는 까치가 제 둥지를 잊지 않고 찾아올거라고 위로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 까치 둥지에 까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수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까치가 왔나 보려고 둔덕에 달려가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순수한 동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어느날 수나네 식구 귀에 집에 땅을 파헤치는 기계 소리가 들린다. 엄청나게 큰 땅차가 움직이며 흙을 퍼내는 소리이다. 까치가 오지 않는 이유가 밝혀진 것이다. 고층 아파트를 세우려고 땅을 파기 때문이다. 수나 아빠는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를 가자고 하지만 수나가 적극 반대를 한다. 감나무에 열리는 감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수나 엄마도 어린 아이를 기르는 데는 뜰이 있어야 한다며 수나 의견에 동조한다. 요즈음 세태와는 동떨어진 견해지만,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를 수 있으므로 억지스럽지는 않다.

 

  아파트 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큰 차들이 나타나서는 땅을 파고 흙을 퍼내는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 요란한 기계 소리가 우리 동네에까지 들려 왔습니다./우리 사람들 귀에도 시끄럽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까치 같은 날짐승은 그 소리에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였습니다./“엄마 엄마, 까치가요. 저 소리가 싫어서 안 돌아오나 봐요.”/하고 수나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정말 그럴지도 모르겠구나.”/“까치가 안 돌아오면 어떡해, 엄마.”/“까치가 돌아와야 하는데…….”/나는 담장 너머로 저만치 멀리 흙먼지 피어 오르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온 나라가 아파트 공사로 몸살을 앓는다. 고령화 사회로 독거노인층이 많아지고, 비혼주의자가 늘어나 1인 가구가 증가하다 보니 주거 공간이 부족해지고 있다. 주택이 부족하니 건설은 해야하겠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 동화는 기계문명과 생태환경의 대립구조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 동화가 쓰여졌던 1990년대에는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는 민간신앙으로 까치가 길조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시끄럽게 우짖는다는 이유로 공해로 전락되기도 한다. 또한 농작물을 해친다는 이유로 해조로 배척받게 된 것도 현실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진리도 변하는 것이다. 시대 상황은 바뀌어도 동심은 변하지 않는다. 까치밥을 보며 까치를 기다리는 동심이 있기에 세상은 정화되는 것이다.

  「부엉이와 할아버지는 아기부엉이와 빈 집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는 병든 할아버지와의 애틋한 정을 담은 동화이다. 어느날 밤 엄마부엉이가 배고파하는 아기부엉이에게 줄 먹이를 구하러 간다. 혼자 남아 있는 아기부엉이는 심심하다. 아기부엉이는 조금만 놀다 올 생각으로 숲 속을 벗어나서, 산고개로 날아간다. 산고개를 넘어서자 저만치 멀리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의 깜박이는 호롱불이 보인다. 아기부엉이는 동네 가까이 까지 날아가고 싶지만, 힘이 부쳐 둥지가 있는 숲으로 돌아온다.

  여름이 되자 아기부엉이도 부쩍 자라게 된다. 아기부엉이는 불빛이 비치는 마을을 구경하고 싶어한다. 엄마에게 허락을 겨우 받은 아기부엉이는 마을을 찾아가지만 온 동네가 캄캄하다.

 

집집마다 방 안이 깜깜하였습니다./'이상한 일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하고 아기부엉이는 동네 가까이 날아가지 않고, 그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엄마부엉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엄마부엉이는,/"나쁜 사람들이 몰려온 모양이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엄마는 무슨 일이건 죄다 알고 있는 듯 싶었습니다./"엄마 엄마, 사람들 중에는 나쁜 사람이 있어요?"/"그럼 있고말고, 나쁜 사람은 우리 부엉이들을 총으로 쏘아 죽인단다."/"사람들이 우릴 죽여요?"/"아니야. 어떤 사람은 부엉이를 무척 사랑하지. 어느 마을엔 새하구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도 있단다. 그 할아버지는 우리 부엉이를 무척 사랑해 주신단다."/"그처럼 마음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 보았으면……."/아기부엉이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의인화동화에서 동물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도록 설정하는 것은 판타지 세계로 가는 통로 구축이나 만큼 중요하다. 작가는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열쇠로 새 하고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를 꺼내 들었다. 그 할아버지는 부엉이를 무척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이다. 어느 날 밤 아기부엉이는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작은 외딴집 하나를 찾아낸다. 아기부엉이는 호롱불을 밝힌 그 초가집으로 날아간다. 아기부엉이가 그 집 뒤뜰에 있는 나무가지에 앉아 울자 창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할아버지는 부엉이를 부르는 듯 손을 젓는다. 아기부엉이는 할아버지가 손짓하는 대로 창 가까이 날아간다. 몸이 무척 여윈 할아버지는 창 가까이 잠자리를 펴고 누워 있다.

 

아기부엉이는,/"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말을 건넸습니다./"오냐. 왜 그러니?"/할아버지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부엉이의 말소리를 알아듣는 듯싶었습니다./"할아버지, 이 마을엔 왜 집집마다 등불을 안 켜고 있어요?"/", 그건…… 그건 말이다. 동네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어머, 어째서 동네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지요?"/"모두 피난을 갔어. 전쟁이 일어나서 나쁜 사람들이 몰려올 거라며 모두 이 마을을 떠난 거야."/"그럼 할아버지는 왜 안 떠났어요?"/"이렇게 앓고 있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나 혼자 이 마을에 남아 있는 거란다."/"어쩜! 불쌍한 할아버지!"/하고 아기부엉이는 중얼거렸습니다.

 

  아기부엉이가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혼자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삽화이다. 밑줄친 것처럼 대화문의 끝을 ‘~하고 말을 건넸습니다하고 아기부엉이는처럼 자주 설명하고 있다. 이는 주로 시를 창작한 시인이 동화를 쓸 때 나타나는 습관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군말의 사용은 깔끔한 문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부엉이와 할아버지가 대화하는 장면이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사전에 깔아 둔 포석 때문이다. 밑줄친 알아듣는 듯싶었습니다.’처럼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거나 어느 마을엔 새하구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도 있단다.’라고 개연성을 살리기 위한 사전 작업 때문이다. 이는 의인화동화나 판타지 동화를 쓸 때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핍진성의 강화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가 어디 갔을까?'/하지만 병을 앓아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이 밤중에 어디 갔을 리가 없습니다./"아기부엉이는 창문 가에 내려와서 주둥이로 창문을 열었습니다. 마침 떠오른 하얀 달빛이 방 안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 달빛 속에 할아버지의 흰 수염과 흰 얼굴이 어슴푸레 떠올랐습니다./"할아버지?"/하고 아기부엉이가 불렀으나 할아버지의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입가에 고요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석류나무 가지에서 마지막 잎이 하느작거리며 떨어졌습니다. 달은 더 솟아올라 환하게 비치고 그 달빛 속에 할아버지의 얼굴도 달같이 떠올랐습니다.

 

  이 동화는 부엉이가 등장하는 부분적 의인화동화이다. 아기부엉이가 창문가로 내려와서 주둥이로 창문을 여는 삽화는 자연스러워 핍진성을 확보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에서 할아버지는 스스로 창문을 열었지만, 위 인용문에서는 할아버지는 병석에 누워있기 때문에 창문을 열 수가 없다. 할아버지의 병이 더 깊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하얀 달빛이 방안을 비추고, 그 달빛 속에 흰수염의 할아버지가 혼자 누워있는 장면은 쓸쓸하기도 하지만 몽환스럽다. 그런데 병을 앓아 누워있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고요한 웃음만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은 부자연스럽다. 병들어 혼자 남아 있는 아픈 할아버지가 고요한 웃음을 띌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개연성은 가독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

 

'가엾은 할아버지!'/아기부엉이의 큰 두 눈에 눈물이 함빡 괴었습니다./그리고 이제는 정말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데 혼자서, 부엉 부엉 부엉…… 자꾸 울었습니다./그 밤이 지새도록 울었습니다./날이 환하게 밝아 와도 아기부엉이는 할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산너머 숲 속의 보금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엄마도 또 다른 부엉이들도 모두 잊고 있었습니다. 또 부엉이를 물어간다는 큰 들짐승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아기부엉이는 언제까지든 할아버지 옆에 있고 싶었습니다./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불어와서 들에 쌓인 가랑잎들을 날렸습니다./그리고 아기부엉이도 할아버지 옆에서 죽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아기 부엉이는 외롭고 불쌍한 할아버지 곁을 밤새 지킨다. 산너머 숲속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도 가지 않고, 큰 짐승들도 무서워하지 않고 병든 할아버지를 지키며 사랑을 듬뿍 쏟는다, 그런데 마지막은 할아버지도 아기부엉이도 함께 죽는 것으로 끝난다. 이 동화는 6.25 전쟁을 시공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 피난을 떠나고 텅빈 마을, 거동을 못하여 혼자 남아 마을을 지키는 병든 할아버지는 전쟁이 빚어낸 비극적 상황을 그리고 있다. 이 동화는 애상적이어서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동화의 일반적 경향인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적 결말을 표방하고 있다.

꽃별이 된 떡갈나무는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난쟁이 떡갈나무가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척박한 바위 틈에서 살아가는 떡갈나무는 성장이 느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먼발치에서 이상한 소리가 자주 들려온다. 그 소리는 여태 들어 본 적이 없는 언짢은 소리지만 누구에게 물어볼 친구도 없다. 어느날 떡갈나무에게 다람쥐 부부가 찾아온다. 외롭게 지내던 떡갈나무는 다람쥐 부부와 친구가 되니 즐겁고 행복하다. 떡갈나무는 도토리를 많이 열어 양식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다람쥐 부부는 근처에 보금자리를 틀기로 하고 자신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이사온 사연을 이야기한다.

 

그럼 너희들도 그 괴상한 소리를 듣고 겁이 나서 도망을 친 것이구나. 대체 어떤 짐승이 그런 소리를 내는 거냐?”/“떡갈나무 아저씨, 그건 짐승이 아니에요. 사람이 부리는 기계라구요. 들짐승보다 더 엄청나게 큰 쇠뭉치예요.”/“그래, 그 기계라는 것이 너희들을 잡아먹으려 들더냐?”/“떡갈나무 아저씬 뭘 모르네. 사람들이 그 기계를 부려서 산을 온통 허물어뜨리고 있는 거예요. 떡갈나무 숲도 다 없어지구요. 그러니까 저희 보금자리도 다 파헤쳐져 없어졌단 말예요.”/다람쥐들은 그때 일이 떠올려지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떡갈나무도 끔찍스런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중략- 산을 흔들어 대는 굉장한 소리가 들렸을 때는 그 고약한 냄새가 온 산에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떡갈나무는 그것이 화약 냄새인 것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영리한 다람쥐들도 몰랐습니다.

 

다람쥐들이 말한 괴상한 소리의 정체는 포크레인이다.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기계로 떡갈나무 숲을 파헤치는 것이다. 다람쥐 부부가 새로 꾸민 보금자리에서 아기다람쥐들이 태어난다. 떡갈나무는 다람쥐 식구들을 위해 더 많은 도토리를 키운다. 그 동안에도 쿵쿵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는데, 어떤 때는 뽀얀 먼지 바람까지 불어온다. 그 먼지 바람 속에 고약한 냄새가 풍겨 오기도 했는데 바위를 발파할 때 나는 화약냄새인 것이다. 돌산을 파헤치느라 화약을 이용하여 폭파 작업을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취미와 여가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반생태적인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비가 오고 나면 고약한 냄새는 말끔히 가신다. 그래서 떡갈나무는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어느날 몹시 세찬 비가 내린다. 하지만 다람쥐네 식구들도 보금자리 깊숙이 들어앉아 있으니까 안심이 된다. 하지만 장대비가 계속 내리자 떡갈나무가 서 있는 땅속이 진동하는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산마루 쪽에서 흙물과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한다. 떡갈나무는 다람쥐네 보금자리가 땅속 깊이 묻혀 버릴까봐 걱정이다. 사람들이 골프장을 만든다고 산을 파헤쳐 놓아 산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마침내 떡갈나무는 뿌리째 뽑혀 쓰러지고 만다. 날이 밝고 몇 시간이 지나자 비가 그치고 먹구름도 걷힌다.

 

그제야 다람쥐네 식구는 땅 밖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보았습니다. 다행히 땅구멍이 막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떡갈나무가 쓰러져 떠내려오는 흙더미를 막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떡갈나무 아저씨가 우릴 보호해 줬어.”/간밤에 일어난 일을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떡갈나무 아저씨, 정말 고마워요.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아저씬 쓰러져서 어떡해요?”/어미다람쥐가 말했습니다./하지만 떡갈나무는 아무 대꾸가 없었습니다./어디선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습니다.

 

이 작품 역시 떡갈나무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키작은 떡갈나무는 친구도 없이 외롭게 지냈기 때문에 이웃이 되어준 다람쥐를 고마워한다. 큰비로 산사태가 났을 때에도 다람쥐 가족이 사는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떡갈나무이다. 그런 떡갈나무는 산사태로 쓰러져 희생양이 된다.

 작가는 인간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세태를 고발하기 위해 떡갈나무를 희생시키는 극약처방을 쓴 것이다. 오늘날에도 장마철이나 태풍이 불 때마다 산이 무너지고 마을이 매몰되는 뉴스를 목도하게 된다. 우이독경 식으로 무분별하게 펼치는 난개발로 인해 산사태를 초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화의 결말은 꽃별이 된 떡갈나무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날이 개이고 떡갈나무는 쓰러져 죽는 것으로 막을 내릴 뿐 꽃별과는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심술쟁이 다람쥐는 떡갈나무 우거진 가을숲을 배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떡갈나무 숲에 다람쥐마을이 있다. 다람이와 토실이는 부부 사이로 이 마을에서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아간다. 다람쥐마을에 걱정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음씨 나쁜 다람쥐 한 마리가 심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심술쟁이 다람쥐는 혼자 살며 남의 먹이를 빼앗기도 하고 훔치기도 한다.

  다람쥐들은 덩치도 크고 종류도 다른 그 심술다람쥐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어느날 두더지로부터 심술쟁이 다람쥐가 버섯을 뜯어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람이 부부는 독버섯을 먹으면 목숨이 잃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그 버섯을 많이 먹으면 목숨을 잃는 수도 있대요.”/토실이가 말을 이었습니다.

두더지는 그 말을 듣고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었습니다./“잘 됐잖아? 그 녀석이 독버섯을 실컷 먹고 죽으면 말야. 골칫거리가 없어지는 거 아냐?”/“그래도 그렇지가 않아, 심술쟁이 다람쥐라도 독버섯을 먹고 죽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독버섯을 못 먹게 해야지, 목숨을 빼앗기는 걸 보고도 못 본 체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야.”/“그 나쁜 짓만 골라 하는 녀석을 살려 주자는 거니?”/“살려야 하고말고! 어서 우리 버섯밭으로 가보자. 그 동안 벌써 많이 먹었으면 큰일인데…….”

 

  심술쟁이 다람쥐는 반동인물이다. 반동인물인 심술쟁이 다람쥐가 독버섯을 먹고 죽게 된다면 잘된 일이라고 손뼉을 치는 것이 대다수 성인들의 정상적인 사고이다. 반동인물이 얄미운 짓을 많이 하면 할수록 그 강도는 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심술쟁이다람쥐를 걱정하며 살리기 위해 버섯밭으로 가려는 다람이 부부의 행동은 동심지향적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도 오류가 보인다. 두더지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껌벅이는 대목이다. ‘껌벅이다는 자꾸 느리게 감았다 떴다가 하다는 뜻이다. 햇빛이 없는 땅속 생활을 하는 두더지는 눈이 아주 작거나 퇴화되어 없다. 그러므로 눈을 껌벅이다는 표현은 오류일 수밖에 없다. 특히 생태동화를 쓸 때 작고 사소한 표현에도 사실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 다람쥐는 버섯밭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독버섯을 욕심을 부려 많이 따 먹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다람이네 둘은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그러자 그 다람쥐는 누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알았는지, 달려들 듯이 발을 휘저었습니다. 하지만 그 발의 움직임은 힘이 없어 보였습니다. 허공을 향해 휘적거릴 뿐이었습니다.-중략-/그토록 못살게 굴던 심술쟁이 다람쥐였지만 죽어 있는 모양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다람쥐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욕심을 부리는 건 안 좋은 일이야. 더구나 심술을 부리며 남을 해치는 건 결국 자신을 해치는 거와 마찬가지라구……."/다람이가 중얼거렸습니다./그러자 토실이도 그 말을 받아./"그럼요, 제 분수껏 먹이를 모아 살아가야 한다구요."/하고 말했습니다.

이런 슬픈 일이 생긴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가을 하늘은 마냥 푸르기만 했습니다.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욕심을 부리고 심술을 부리며 남을 괴롭히던 다람쥐는 결국 독버섯을 먹고 죽는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낳은 동화이기에 다람쥐가 버섯을 먹을 수 있게 설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생태적으로 다람쥐가 좋아하는 먹이는 도토리와 밤 같은 견과류이고, 작은 새알이나 곤충도 먹는다. 그런데 다람쥐가 독버섯을 먹고 죽었다는 설정은 비약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사는 동물 중에서 식중독에 걸려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존재는 탐욕의 대명사인 인간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못살게 굴던 심술쟁이 다람쥐가 죽어있는 모습을 본 다람이네는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그를 보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안 좋은 일, ‘제 분수껏 먹이를 모아 살아가야 한다고 한 다람이와 토실이의 말은 교훈성이 노정되어 문학성을 폄하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주제는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어야지 겉으로 드러나서는 도덕 교과서가 될 수밖에 없다.

  「빨간 창문은 전설에나 나오는 인어가 등장하는 동화이다. 사철 바닷물결이 철썩이고, 흰 모래톱이 펼쳐지고 해당화가 핀 바닷가가 배경이다. 바다가 보이고 소나무가 서있는 언덕 위에 빨간 창문의 집이 있다. 이 집에는 열두살 쯤 되는 순이와 어머니가 단둘이 살고 있다. 순이가 이 집에 살게 된 까닭은 병약해서이다. 순이 어머니는 순이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는데,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도 들려준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열두살이라는 순이의 눈높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화이다.

  순이는 어머니에게 인어가 바닷속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순이가 어느날 밤에 인어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순이 어머니는 꿈을 꾼 모양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인어는 상반신은 사람의 몸을 가졌으나 하반신은 물고기의 꼬리가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대부분이 여성인데 준수한 외모로 묘사되지만, 이 동화에 나오는 인어는 못생긴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인어는 순이의 꿈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인어는 별들의 그림자가 수없이 비치는 바다 한 가운데 조용히 떠 있었습니다./ 먼 바다 깊은 곳에 인어는 살고 있었습니다./그리고 밤이 깊어지면 인어는 바다 위로 떠올랐습니다.-중략-

엄마, 이런 달 밝은 밤에는 인어도 달 구경을 나올까요?/소녀가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 말소리가 인어의 귀에 똑똑히 들렸습니다./”그럼요, 아가씨. 인어도 달을 많이 좋아한답니다.”/인어는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창문이 열려, 달빛 아래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이 동화에서 인어는 먼바다 깊은 곳에 살고 있다. 밤이 깊어지면 바다 위로 떠올라 육지로 향한다. 그런데 이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는 비늘을 가진 몸뚱어리에다, 허리 위로부터 사람의 모습을 닮긴 했어도 사람은 아니고, 두 눈이며 코가 사람의 그것과 조금은 비슷하긴 했어도 무척 미운 얼굴로 묘사되고 있다. 이 못생긴 인어는 비늘이 덮인 꼬리를 철썩이며 말을 한다. 인어는 사람을 보고 싶어서 불빛이 흘러나오는 소녀의 집 창문을 바라보며 창문이 열리기를 고대한다. 마침내 창문이 열리고 달빛 아래서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자 무척 기뻐한다. 그런데 보편적인 인어와 달리 못생긴 인어로 묘사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러한 추한 인어의 등장은 동화의 환상성을 떨어뜨린다. 꿈과 희망을 주는 문학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못생긴 인어를 등장시킬 당위성은 없다.

 

엄마 엄마, 어젯밤 꿈에 인어를 봤어요. 인어가 바다기슭 이 쪽으로 헤엄쳐 와서 꼼짝 않고 있었어요. 먼 바다 깊은 속에요. 정말 인어가 살고 있나 봐요.”/혼자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순이 어머니가 창문을 여니까, 잔잔한 바다가 순이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철썩 철썩 철썩.../바위에 부딪치는 물결 소리도 들려 왔습니다./하지만 지난 밤에 생겼던 일을 순이도 순이 어머니도, 또 아무도 몰랐습니다.

 

빨간 창문 너머로 소녀의 얼굴을 본 인어는 창문이 닫히자 다시 열리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소녀를 절실히 보고싶어하는 간절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검은 구름이 몰려와 달빛을 가리고 날씨가 거칠어져도 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꼼짝 않고 있는 인어이다. 인어가 소녀를 보고 싶어하는 당위성이 확보되지 않아 감동이 다가오지 않는다. 인용문은 이 동화의 에필로그이다. 병약한 소녀는 꿈속에서 인어를 만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꿈 이야기는 판타지의 동력을 떨어뜨린다. 소녀가 인어를 만나 대화를 하고, 그 대화를 통해 꿈과 희망을 갖도록 설정했다면 이야기의 감동은 달라졌을 것이다.

  「얼굴바위의 슬픈 이야기는 훼손되고 오염되는 해양 생태 문제를 고발하는 동화이다. 사람의 얼굴을 닮은 바위가 주인공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의 동화이다. 얼굴바위가 있는 곳은 남쪽, 아름다운 어느 섬의 바닷가이다. 그 곳은 호젓한 곳이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고, 이따끔 낚시꾼들이 찾을 뿐이다. 어느날 새벽녘 꽃게가 얼굴바위 밑에서 소란을 피운다. 꽃게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찾아오면 좋은 일이지 뭐니.”

바위 아저씨, 아저씨에겐 별일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 꽃게 식구들은 싫어요.”/ “싫다니 왜 그러지?”/“싫다니? 왜 그러지?”/“사람들이 말예요. 바닷물을 온통 흐려 놓는다구요.”/“바닷물을 흐려 놓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알 수가 없구나.”/얼굴바위는 꽃게의 말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꽃게는 갈수록 더러운 것들이 떠내려와 바닷물이 오염될 것이므로 더 외딴 곳으로 이사를 가려는 것이라고 한다. 바위는 초록별에게 바다가 온통 더러워진다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어보려 한다. 어느날 밤 검은 물건들이 바다 위를 떠다니면서 별빛을 삼킨다. 그 기분 나쁜 물건들 사이에 초록별 하나가 깝박이고 있다. 그 초록별은 빛이 흐려지고, 눈물이 고여 있다. 초록별을 의인화한 대목이다.

 

초록별아, 왜 눈물이 고였니? 누가 너를 슬프게 하는 거니?”/“바위 아저씨, 저 쓰레기들 때문이에요.”/“무어? 저 괴물 같은 것들 말이냐?”/“, 저건 사람들이 마구 버린 쓰레기라는 것이예요. 저것들 때문에 저도 이 곳에 올 수 없었다구요. 아저씨, 저것들을 이 바다에서 쫓아내 주세요!”/초록별은 하소연하듯 슬프게 말했습니다.

 

  초록별과 얼굴바위의 대화는 환경오염의 폐해와 그 심각성을 명징하게 고발한 말이다. 유원지는 물론이지만 특히 바닷가는 밀려든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비닐, 프라스틱류, 나무조각, 1회용품, 음식찌꺼기, 각종 폐기물 등이 바닷물을 오염시키고, 해양 생물들까지 병들게 한다. 울고 있는 초록별은 바다의 오염에 희생되는 여러 생물들을 대변한다. 사람들이 함부로 버린 비닐봉지를 먹은 바다거북이 폐사하고, 각종 기형물고기들의 모습이 언론에 등장하기도 한다. 바다 환경이 오염되면 사람도 피해를 입게 된다는 만고의 진리를 꽃게와 초록별의 목소리를 통해 호소하고 있다.

 

 Ⅲ. 나오는 말

  박화목은 시인과 동시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출간한 작품집을 보면 오히려 창작동화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화를 다룬 논문이나 평론은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보리밭과수원길로 알려진 박화목의 표상이 시인이나 동시인이라는 고정 관념에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첫동시집 호롱불』(1957)을 내기 전에 소년소설집 밤을 걸어가는 아이』(1954)와 동화집 부엉이와 할아버지』(1955)를 먼저 출간했다. 이후 1962년에  『박화목 아동문학 독본』(을유문화사)을 발간한다. 이 책에는 소년소설 첫눈 내리는 밤을 포함한 5, 동화 키다리 사나이와 아이들을 비롯한 10, 동시 꽃이파리가 된 나비를 비롯한 40, 동극 포도원」 1, 평론, 수필 아동문학의 문학적 위치5편이 실려 있다.

  박화목 문학의 키워드는 소녀, , 아이, 인형, 눈물, , 무지개 등 작고 여리고 여성 편향적인 낱말들이다. 표제어에 소녀가 들어간 동화책만 보아도 꽃팔이 소녀의 그림』, 『눈 소녀』, 『램프 속의 소녀』, 『아파트 소녀와 나비4권이다. 6권의 동시집 중에서도 나비, , 꽃 등이 키워드로 등장한다.

  그가 펴낸 동시집은 6권인데 비하여 동화·아동소설집은 20권으로 세 배 이상 많다. 따라서 박화목 문학을 논할 때 동시만으로 국한한다면 편린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동화와 소년소설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 1) 그가 필명을 은종이라고 한 것도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실버벨(Silver Bells)”이란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삶을 살고 싶어서라고 했다
  • 2) 주일학교 교사였던 이헌구에게 동시 2편을 보여주자, <아이생활>에 투고하여 겨울밤이 게재되었고, 그 다음 해에 피라미드가 추천되었다.
  • 3) 함처식(咸處植, 1910 ~1980) 평양 출생. 호는 영천(靈泉). 평양 광성고보 수료. 1932아이생활〉 〈기독신보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등단. 대표작에 벼개애기」, 「혼자만 아는 그림」, 「성난 손자국」, 「말하는 벙어리등이 있고, 「탄일종의 작사가이다
  • 4) 솔밭 길 산비탈 길/사십 리 길은/초생달 기울어진/으스름 밤길.//내 나라 내 땅 안에 /내 길 걷는데/무엇이 무서워서/밤을 새워 걷나요.//서러운 국경./들에 참새들도/하늘의 아기별도/잠들었는데 //산 고갤 살금살금/기어 넘고요./풀숲 새 몰래몰래 /걸었습니다. -「38도선전문
  • 5) 죽순1946년 창간되어 해방 공간 4년 동안 12집이 발간되었으며, 1979년 봄 복간호를 낸 이후에도 현재까지 계속 발행하고 있는 대구 지역의 시 동인지이다. 『죽순은 중앙과 대타적인 지점에서 지역 문학의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해방기 대구지역의 시문학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수용해 나간 매체였다. 『죽순은 이윤수, 이호우, 박목월 등 대구지역 시인들 외에 유치환, 김춘수, 조지훈, 박두진, 설창수, 조향 등 타지역의 유명 시인들도 참가시켜 필진의 위상을 높였다.
  • 6) 이재철(1978),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일지사, p. 415-417.
  • 7) 이재철(1989), 『세계아동문학사전』, 계몽사, p. 131.
  • 8) 박상재 동화창작의 이론과 실제』 (2002, 집문당)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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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견고한 삶의 조건 ― 박참새, 배시은, 신이인의 시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위의 인용문은 육조 혜능의 '풍번문답(風幡問答)'을 변형한 것으로서 영화 '달콤한 인생'(2005)의 도입부 내레이션이다. 질문을 간파하고 있는 스승의 답변은 제자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 테고, 그것은 물론 관객의 심금을 휘저었을 것이다. 파편화된 불안을 쓸어 담는 이 명쾌하고 즉각적인 해답의 카타르시스는 그러나 찰나에 불과하다. 제자의 마음이 '왜' 흔들리고 있는지, 동요하는 그 마음의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는 궁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궁리하고 싶지 있다. 바쁜 현대인은 보이지 않는, 보여지지 않는 그렇기 때문에 무용한 그 '느낌'이라는 것을 숙려할 만큼 한가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무감각하려는 노력 끝에 불안은 우리 현대인의 매우 증상적인 형태로 떠올랐다. 그것은 우리의 고질병이다. 불안, 외로움, 확신 없음이라는 결핍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기로에 선다. 고독을 선택하거나, 의존을 선택하거나. 전자는 불안에 대한 직면이고, 후자는 불안에 대한 외면이다. 그러나 바쁜 우리는 언제나 후자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 없다. 세상에 고독한 것은 이제 고독, 그 하나다. 사용되지 않은 고독은 밀린 과제처럼 하릴없이 쌓여간다.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을 외면한 후폭풍은 그에 비례하는 불안의 성장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고독하지 않으려는 것은 고독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혹은 고독을 다른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울감, 외로움, 불안감, 소외감 등의 통각이라고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감각은 직면하는 대상으로서의 그것이지 결코 정념의 주인이 아니다. 고독은 머무름의 상태가 아니라 나아감의 과정이다. 키에르케고어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고독이란 '자기-이해'의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실존적 과정"1)이다. 직면과 견인의 과정으로서 '나'의 발본적 반성을 꾀는 고독은 많은 시간과 심리적 통증을 수반하는 힘겨운 비포장도로이지만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 길은 당신에 의해 아주 단단히 포장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길은 이제 너무 쉬운 길이다. 허나 우리는 당장의 고통을 상쇄하기 위해 의존을 택한다. '불안-의존-불안-의존-……'의 악무한은 거기에서 발생한다. 이 악무한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이다.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이 혼자만 하는 싸움은 아니다. 우리가 고독하고자 할 때, 시는 우리보다 먼저 그곳에서 싸우고 있다. '불확실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시와 고독은 함께 간다. 유일무이한 개별자로서 '그'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시를 보면서 우리는 '나'의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한다. 비록 그 세계가 하잘것없을지라도 시는 당신과 함께 고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 투쟁의 이미지가 너무 닮아서 단번에 요체로 휘몰아 넣는 시가 있다. 2024년 계간지 가을호에 실린 시편들이 대개 그러했다. 그것들은 고독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증상에 직핍하는 표정을 하고선 우리의 불안을 응시하고 있다. '응시하는 시'를 응시하는 우리는 홀연 고독의 과정으로 진입한다. 시는 그 자체로 기꺼이 고독의 과정이 된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불안을 응시-진단하는 시편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고독의 여정을 걸어보자. 미리엄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고 어찌되었건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해 미리엄은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엄은 자신을 설명하는 식으로 늘어져가고 있었다 미리엄은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쌍한 미리엄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불쌍한 미리엄은 바빴다 설명하느라 바빴고 대체되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느라 바빴다 그러면 자연스레 낡아지고 늙어가고 쪼그라들고 그리고 무엇보다 절박해진다 불쌍한 미리엄 온종일 나를 기다리는 미리엄은 버럭버럭 화를냈다 화를 내는 미리엄이 순간 유효해 보였다 미리엄이 악다구니를 쓸 때에야 미리엄의 전체가 설명되고 빛난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고 어차피 미리엄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늦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하루종일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고 나는 일갈할 수밖에 없었다 넌 네 삶이 없어? 하고 말콤은 미리엄이 키우는 개다 말콤은 미리엄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좋아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말콤은 미리엄을 좋아하고 불쌍해한다는 것이다 말콤은 수동적인 주인 미리엄이 충동적으로 산책을 나가지 않거나 밥때를 놓쳐도 재촉하지 않는다 말콤 역시 미리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 하루종일 너만 기다렸어 이 망할 기집애야 하지만 말콤의 생각에서 미리엄은 한없이 불쌍한 인간이므로 개 말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말콤은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 같았다 (……) 미움받지만 않게 해주세요 누구로부터를 말하는 것이냐 뭘 물어요 당연히 미리엄이죠 열두 마리의 개를 키운 경험이 있는 신이 말콤의 턱을 간지럽히며 말한다 아이고 불쌍한 새끼 계속해도 무언가가 빠져나간다 빠져나가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 시는 나로 시작했지만 나로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또 무언가를 빠뜨리는 바람에 또 내가 나와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내가 나오면 미리엄은 또 하루종일 나를 기다릴 테고 그랬다는 이유로 나에게 화를 낼 것이고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말콤은 삶이란 게 정말 불쌍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신경쓰이지 않고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한 것도 없다 나는 빨리 이 이야기를 끝내고 싶다 때마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리고 제때 미리엄을 만나러 가고 싶다 그러면 말콤과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것이고 산책하는 말콤은 정말 행복해 보일 것이다 나는이런 게 좋다 이런게 더 좋다 - 박참새, 「시작된 것」 부분,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넌 네 삶이 없어?" 당신이 이 문장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장이 애틋한 이유는,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스로 목줄을 달아매고 누군가의 손에 그 줄을 쥐여주었던 경험,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가슴 아픈 그 불안의 경험이 위의 문장으로 하여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리엄은 현대인들의 불안 형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정확히는 '해명'하기 위해 상대방을 기다린다. "버렸던 것들, 쓰지 못한 것들, 아직 못한 것들"에 대한 '자기-수치심'을 해명하고 "미리엄 같은 사람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라는 '자기-효능'을 타인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받고 수용받기 위해. 따라서 '나'(타인)가 오지 않으면 그는 그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겠거니와, 그 효능을 되찾을 수 없다. 고독이라는 일련의 자기-이해 과정을 거치지 아니하고 타인에게 자기규정을 의탁하는 것이다. 삶의 주체성을 스스로 박탈시킨 그의 가치는 그러므로 '나'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그런 점에서 '미리엄-나'의 관계에서 미리엄의 위치는 '말콤-미리엄'에서의 말콤의 위치와 상응한다. 미리엄은 말콤의 주인으로, 말콤은 온종일 미리엄을 기다리고 미리엄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개로서 누려야 할 삶의 일부를 포기"한다. 말콤의 삶의 주인이 미리엄인 것처럼 미리엄의 삶의 주인은 '나'이다. 말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미리엄의 삶은 따라서 개 같은 삶이다. 그 삶은 (자기 의지에 의해) 시작'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어느 때보다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 sns를 통해 자기 삶을 전시하고 그 삶에 대한 타인의 긍정적인 반응('좋아요'와 팔로워 숫자 등)을 기대하면서 오직 그것을 위해 '의식적'이고 '선택적'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실제적 자신의 모습, 즉 '실존적' 자기 모습을 방치한다. 타인의 반응이 내 삶의 양식을 결정하게 내버려둔다. 문제적인 것은 여기서 타인은 '내가 얼마나 멋진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증명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너무 쉽게 그들을 미워해 버리고, 반응이 긍정적이면 또 너무 쉽게 사랑해 버린다. 빠르고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감정 속에서 지쳐버린 자아는 당장의 휴식을 위해 타자에의 의존을 택한다. 불안을 즉각적으로 해소해 주기 때문에 의존하지만, 의존하기 때문에 불안하다. "뺨을 후려 맞아도 자꾸만 돌아오게 되는 이곳"은 그러므로 불안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디스토피아의 풍경이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란 듯이 참혹해진다. 배시은의 시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강박증적인 내면 상태와 그 징후를 정확히 짚어내면서 그에 대해 시인이, 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을 내리고 있다.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쓴 시를 사람들이 읽어주면 좋겠다고. 아직 쓰지 않은 시를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싶다. 재빠르게 적으면 감쪽같을 거라고. 시간의 장난 같은 거라고.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 제목을 옮겨 적었다. 이상하다. 나라면 이런 제목을 짓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찍이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을 읽고 있다. 이미 벌어진 일은 항상 그런 모양이라는 듯이. 나는 여행을 가지 않는 대신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으로 여행을 대신한다. 나를 포함하여 여행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여행 가는 대신에 다른 것을 한다.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냥 있는다. 그냥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대신한다. 아무것도 깨닫지 않는 것이 깨달음을 대신한다. 이상하다. 나라면 여기서 연갈이를 하지 않았을 거야. 여기서 시를 끝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만 시는 이미 끝났다. 시를 옮겨 적는 일은 끝났다. 시를 쓰면서 생각한다. 할 수 있다면 무언갈 만들어야만 한다고. 무언가 만들 수 있는 때는 너무 짧다. 생각을 하고. 단어와 문장 등을 떠올리거나 받아 적고. 고개를 움직이고. 책상에 앉고. 신체 부위의 기능을 사용해 창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순간은 매우 희소하며 예상만큼 충분히 남아 있지 않다.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이 시는 알고 있다.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 배시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한 사람들」 부분, 『창비』 2024년 가을호 "사람들이 미리 읽고 있는 나의 시를 훔쳐보고선 옮겨 적고 싶다"는 바람은 다시 말해 독자 마음에 쏙 드는 시를 쓰고 싶은 시인의 소망이다. 그러나 옮겨 적은 시는 어쩐지 제목부터 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 나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기로에 선다. 네 마음이냐, 내 마음이냐. 당신이 시작'된' 삶을 살고 있다면 선택은 물론 전자일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잃어가고 이윽고 모호한 정체성과 동시에 끊임없는 불안을 경험한다. 위의 시는 그것을 여행에 비유하고 있다. 여행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무엇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여행조차 갈 수 없고, "어느 곳으로도 이동할 수 없"다. 여행을 가는 대신에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는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서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뿐이다.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잘 쉬는 사람과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본인의 취향과 호오를 잘 아는 사람과 그것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다. 타인에게 삶의 목줄을 내어준 사람에게 휴식이란 그저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간이다. 잘 쉬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불친절하다. 자신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건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남들에게 친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때때로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방어 기제로 드러난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실존적인 '나'의 상태이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회적인 '나'의 모습이다. 건강한 사람은 친절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건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사회적인 모습이 중요한 우리는 건강하지 않아도 건강한 '척' 친절하다. 이때 친절은 건강하지 않은 마음을 숨기고 싶은 일종의 방어 전략으로 쓰인다. 어쩌면 건강하다고 자신을 속이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실존적인 상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사회적인 모습으로 치장하는 것이다. 당신의 상태는 이제 아무도 진단할 수 없다. 허나 시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아도 친절하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스스로의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 심급의 기회일지 모른다. 시가 응시하고 있는 사실을 응시해 보자. 때로는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큰 힘이 된다. 그 '누군가'는 나 자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시는 진단하거나 처방하지 않는다. 기꺼이 고독의 기회를 내어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시의 효용이다." 삶을 응시하고 다시 한번 되돌아보면서 견고한 삶을 살고 싶을 우리에게 고독이라는 자기-이해 과정은 이제 건너뛸 수 없는 삶의 발달과업이다. 견고하다는 말은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빈틈 있음'마저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자세이다. 당신의 약점도 당신이다. 고독은 그러므로 집요하게 약점을 파고들어 기꺼이 '나' 자신을 승인하게끔 한다. 신이인 「새」는 그것을 딱따구리에 비유하면서 약점이 받아 온 그간의 오해를 풀어낸다. 2017년 2월 3일 딱따구리를 데리고 있다. 이것은 내 약점이다. 딱따구리는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통에도. 딱따구리는 내 머리 옆쪽에 구멍을 뚫어주었다. 그건 정말이지 환상적인 사고였다. 귀가 생겼다. 딱따구리가 어찌나 청명하게 나무문을 쪼고 다니는지가 다 들렸다. 난 비로소 듣는 사람이 됐다. 나의 방문은 말할 줄 몰랐다. 내가 듣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문은 딱따구리를 통해 내게 말을 전할 수 있다. 나는 그걸 즐겁게 들을 수 있다. 딱따구리가 부리를 사용하는 이유,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내가 가진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었으며, 딱따구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 어쩌면 딱따구리는 도망간 게 아닐지도 몰라. 아예 내 안쪽으로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딱따구리가 느껴질 수는 없어. 이 느낌에 대해 나 여전히 말을 멈출 수 없어. 가장 깊숙한 곳에 너 잘 살아 있어. 집인 줄도 모르고 흔들렸던 집이 너를 선명하게 품고 있어. 구멍으로 볕과 공기가 들이닥쳐. 너 거기 있구나. 덕분에 나는 구석구석 파여가며 안쪽이 하는 말을 받아쓸 수 있게 됐다. 비로소 쓰는 사람이 됐다. - 신이인, 「새」 부분,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호 딱따구리는 약점에 대한 절묘한 표상이다. 그것은 "어디든 구멍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약점이 될 수 있고, 또 그러한 이유로 약점이 될 수 없다. 인식의 층위에서 그가 뚫어낸 구멍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그 구멍이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라면, 그것은 당신의 약점이 될 수 없다. 눈, 코, 입, 그리고 귀라는 구멍이 당신의 약점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어디든' 존재하는 그 구멍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딱따구리(약점)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where'이 아니라, 'why'일 것이다. 딱따구리는 '왜' 구멍을 만드는가? 그것은 "날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이나 벽 또는 모자걸이의 말을 발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멍을 뚫기 위해서, 자기 몸이 통과하기에 충분한 길을 내기 위해서"이다. 즉 딱따구리가 구멍을 내는 이유는 '너'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어쨌든 약점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너'가 존재하는 순간에 탄생한다. '너'를 즐겁게 하기 위해 뚫은 구멍은 '너'가 즐겁지 않으면 메워야 하는 어떤 것으로 전락하고 바로 약점이 된다. 그 순간에 그것은 숨기고 싶은 치부, 떼어내고 싶은 악성 종양으로 우리의 삶을 옥죄인다. 약점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너'의 시선에 얽매여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why'를 던지는 순간, 시선은 '너'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지고 약점에 대한 오해는 곧 이해로 변모한다. 우리가 가진 약점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것은 고독으로 진입하는 하나의 창구일 수 있다. 구멍 없이 어떻게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어떻게 밖을 내다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말한다. 약점은 '나'를 이해하는 고독의 진입로가 되고, 이윽고 뚫린 길은 '너'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견고해진다. "견고한 것에는 모두 구멍이 나 있"다. 고독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황홀감이다. 고독이 거듭될수록 성장하는 고독'력'은 당신이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독이 아니라 고독하지 않는 것이다. 구원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계절의 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1) 류호인, 「정신분석학: 존재에 대한 물음 : 실존적 불안과 자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소고」, 『현대정신분석』, 2024, 제26권 제1호.

계간 청색종이 정원 고독불안자기이해실존키르케고르 2024
정원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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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형식을 개척하는 형식 : 이지아,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계간 자음과모음 정원 이지아서사시극시독백형식본질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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