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아동문학평론 2024년 겨울호(제193호)
한국 공상과학소설의 독보적 개척자 ― 한낙원 과학동화론
Ⅰ. 들어가는 말
한낙원(韓樂源, 1924~2007)은 1924년 1월 14일 평안남도 용강군 서화면 자복리에서 부친 한희룡(韓羲龍)1)과 모친 정희화(鄭羲嬅) 슬하 2남 중 차남2)으로 태어났다. 1943년 3월 평양의 사립 명문인 숭인상업학교를 졸업했다.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영문과에서 2년동안 수학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1946년 5월까지 평양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1946년 8월부터 1950년 8월까지 평양공업전문학교(야간) 전임강사로 근무하며 월간지 <공업지식>을 편집했다.
1948년 11월 평양제2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다섯 살 연하의 이춘계(李春桂)와 혼인하였다. 1949년 9월 장남 권일(權一)3)이 태어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이 수복되자 10월 평양방송국 방송부장으로 재건 사업에 참여했다. 12월에 월남하여 1952년 3월까지 공군 제1전투비행단 작전처 번역문관으로 근무했다.
1952년 4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주한 유엔군 심리작전처 공보교육국(CIE) 방송부장, 한국민사원조처(KCAC) 방송 고문으로 근무했다. 1953년부터 KBS, CBS 등을 통해 과학방송극 「100년 후의 월세계」, 「화성에서 온 사나이」, 「별의 고향」 등을 발표하는 등 1960년대까지 방속극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였다. 1953년 2월 차남 권식(權植)4)이 출생하였다.
1954년 5월부터 1957년 12월까지 월간 <농민생활> 주간으로 근무했다. 1957년부터 <새벗>에 <이상한나라의 엘리스>를 번역 연재하고, <우리들의 과학> 시리즈를 59년 2월호까지 연재했다. 1957년 8월 딸 애경(愛卿)5)이 출생했다.
1959년부터 <새벗>에 장편 『화성에 사는 사람들』을 1년간과 연재하고, 연합신문에 장편 『잃어버린 소년』을 88회 연재했다. 그 후 1990년대까지 <학원>, <학생과학>, <소년>, <새벗>, <소년동아일보> 등 가종 잡지와 신문에 『우주항로』, 『우주벌레 오메가호』, 『스그마X』, 『해저도시 탐험대』, 『타이탄 구조대』, 『세글자의 비밀』, 『등재 밑의 비밀』 등 과학소설을 비롯해, 모험 추리소설을 연재했다. 분야에서 선구적인 개척자로 활동했다. 그뿐 아니라 쥘 베른의 『바다 밑 2만 리』(1974), H.G. 웰스의 『우주 전쟁』(1982) 등을 번역 출간해 국내에 소개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금성 탐험대』는 1962년 12월부터 1964년 9월까지 <학원>에 연재된 ‘과학모험소설’로 한낙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1960년 6월부터 3년동안 기독교복리회 한국연합회(CCF) 상무이사겸 <동광>지 주간으로 일했다. 1964년 4월부터 사회복지법인 <계명원> 이사를 맡아 2000년대 까지 일했다. 1968년 8월부터 1975년 2월까지 국제라이온스클럽 한국본부의 <라이온>지 한국어판 편집을 맡았다. 1975년 3월부터 1983년 12월까지는 인제의과대학 백병원 원장비서실장겸 홍보실장으로 일했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89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주는 제10회 한국어린이도서상(『돌아온 지구 소년』), 1992년 제2회 방정환문학상(『페기별의 타임머신』)을 받았다.
한낙원은 서울에 거주할 때 중구 신당동에서 살다, 서대문구 창천동, 강서구 신월동 등으로 이주해 살았다. 수영과 등산을 좋아했던 그는 2007년 3월 12일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어 83세로 타계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있는 동화경모공원에서 영면6)하고 있다. 2014년 유족들에 의해 <한낙원과학소설상>이 제정되어 시행7)되고 있다.
Ⅱ. 한국 공상과학소설의 개척자
한낙원은 한국공상과학소설의 개척자이자 대부이다. 그가 쓴 공상과학소설의 특징을 집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은 보통 2인 이상의 청소년이 등장하며 여성은 주체가 아닌 보조자로 포함시켰다. 이는 흥미를 더하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남성중심의 시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등장인물을 복수로 설벙한 것은 우주여행을 하기 때문에 기계를 작동할 때 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낙원 과학소설에는 미래세계에 펼쳐지는 사건을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는 미개척분야인 우주과학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제시하여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 미래에 펼쳐질 우주시대를 상정하여 문명간의 대화와 타협없는 충돌은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한 집필 의도이다.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외계인과의 관계를 대립이 아닌 우호적인 관계로 설정하여 평화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l. 한국 청년이 펼치는 우주 대모험, 『금성 탐험대』
『금성 탐험대』8)는 한낙원의 대표작이자 한국 공상과학소설9)의 서막을 연 작품이다. 끊임없이 전개되는 서사가 흥미진진하고 우주로 향한 꿈과 도전이 풍부하다. 외국 과학소설과 달리 한국인 청소년들이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데서 동질감과 친화력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함께 우주선을 타고 여행을 떠난 듯한 상상을 맛보게 된다. 과학적 상상력으로 펼치는 세계는 여전히 청소년 독자들에게 지적 호기심과 정서적 자극을 안겨 준다.
『금성 탐험대』는 미국 소련 간 우주 개발 경쟁이 치열했던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우수한 파일럿들이 연쇄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미국은 금성 탐험호를 비밀리에 쏘아 올릴 계획을 세운다. 하와이 우주 항공 학교의 한국인 학생인 고진과 최미옥도 우주로 향할 꿈에 부풀지만, 고진은 출발 직전 괴한에게 납치되고 만다. 고진이 도착한 곳은 바닷속 어느 원자력 잠수함 안이다.
다채로운 여정 가운데 열혈남아 고진이 보여 주는 가식 없는 열정과 패기는 복고적 멋과 설렘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며, 마치 TV 만화 연속극에서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들은 지금 읽어도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 긴장과 재미를 선사한다.
이 시대는 달에 인류의 발자국이 찍히기도 전이었으나 한낙원은 작가다운 관심과 상상력으로 ‘금성 탐험’이라는 새로운 우주 개척담을 빚어냈다. 한낙원은 과학소설 창작의 이유를 “학생들에게 모험심을 기르고 어려운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이겨 낼 수 있는 지혜와 담력을 길러 주기 위해”10)라고 밝혔을 만큼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도전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다.
한낙원은 작품을 통해 낯선 세계의 토양을 조사해 지질학적 분석을 내놓는다. 또한 나비의 움직임을 관찰해 방향을 찾는 장면 등에서도 과학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선보인다. 이는 대체로 과학 기술의 한계를 제기하는 요즘 SF와는 거리가 있는 부분으로, 초창기 과학소설이 지닌 고전적 재미와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금성 탐험대』가 미·소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착작된 이야기임에도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전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소련 우주선에 한국인이 탑승한다는 설정으로 냉전 시대이던 당시대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다. 이 작품은 당시 청소년 사이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연재를 시작하기 1년 전인 1961년 5월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미의회 연설에서 "향후 10년 안에 사람을 달에 보낼 것"이라고 '아폴로계획'11)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터무니없는 허언"이라고 비웃었으나, 이 예언은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며 닐 암스토롱이 달에 첫발을 딛게 됐다. 우주가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던 시절 한낙원 또한 우주 개척을 예언한 선지자인 셈이다.
『금성 탐험대』는 미국과 옛 소련 간의 우주 개발 경쟁이 뜨겁던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정부가 금성을 탐험할 우주선을 쏘아올릴 예정인 가운데 하와이 우주항공학교의 제10기 한국인 학생 고진과 최미옥도 우주로 향할 꿈에 부푼다. 하지만 발사 직전 고진은 괴한에 납치돼 어디론가 끌려간다. 최고의 우주조종사인 고진을 잃은 채 출발하게 함으로서 독자들의 불안감과 궁금증을 사로잡게 한다.
태평양 한복판의 거센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하와이 해안의 고운 모래를 깨물고 있었다./ 야자와 종려 잎들이 해풍에 설레었다./ 바나나와 사탕수수 잎들이 뙤약볕을 가려주었다. 열대의 짙은 빛깔의 꽃들이 활짝 피어 지나는 손을 반겼다./ 소풍을 나온 젊은 남녀들은 손에 손을 잡고 야자수 우거진 해변 길을 거닐었다./여기 낭만이 가득한 하와이에 세계적인 로켓 우주공항이 생기고, 또한 우주항공학교가 선것은 동남아의 젊은이들에게는 요행이 아닐 수 없었다./누구나 치열한 경쟁에 이기기만 하면, 중학을 나오자 이곳 우주항공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고진이란 부산중학 출신과 최미옥이란 서울 출신의 두 젊은 한국의 남녀가 호놀룰루 우주항공학교에 와서 공부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한낙원 과학소설 선집』 261~262쪽(이하 선집)
이 작품에서 작가는 미국우주항공학교가 있는 배경을 하와이주 호놀룰루로 설정했다. 하와이 제도(Hawaiian Islands)를 구성하는 섬 중에 가장 큰 섬의 이름이 하와이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체 섬들을 흔히 하와이로 통칭한다. 하와이 제도의 주도인 호놀룰루는 세번째로 큰 오하우섬에 있다. 한낙원이 미 항공우주국과는 전혀 무관한 하와이를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이주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는 비교적 친숙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하와이 정부는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중국인이 그다음으로 일본인 노동자의 이민이 시작되었으며, 초반엔 가장 큰 노동집단이었으나 파업을 일으키고, 농장에서의 이탈도 많아지자 대체 이민 노동자로 1903년부터 한국인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4.19혁명으로 실각한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국인에게 익숙한 지명인 것도 이유가 될것이다. 그런데 정작 미국 최대 항공 우주기지는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다.
“그래서 실은 고 군을 부른 거야. 고 군은 전자공학에 뛰어난 성적을 나타냈고, 또 우수한 파일럿이기도 하니, 군의 힘을 좀 빌리려고 하는데 어떤가?”/“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고마워. 그럼 내일 모레 아침 금성탐험호를 탈 준비를 해주게.” -중략-
“그렇지만 저는 달에는 가봤지만 금성엔 못 가본걸요.”/“누군 가봤나. 모두 처음이지.”/홉킨스 소장은 지금까지 진행해온 금성 탐험을 위한 유인 우주선 발사 계획을 대충 설명하였다.
선집 265쪽
월리엄은 고진과 최미옥이 재학하는 우주항공학교의 교관이다. 우주항공학교 유니폼은 하늘색이고 스쿨버스의 색깔도 하늘색이다. 월리암 교관은 두 후보생을 우주공항 사령관이 호출하였다고 전한다. 홉킨스 소장은 고진 후보생을 반갑게 맞이한다. 홉킨스 소장은 공항에서 달로 떠난 우주선 3척의 조종사가 모조리 죽었다고 말한다.
홉킨스의 말에 의하면 금성탐험을 위한 유인 우주선 발사 계획은 1962년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그 동안에 5,60회에 걸쳐 무인 우주선을 발사하여 금성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드디어는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게 된 것이다. 홉킨스는 고진에게 금성탐험호를 타고 금성을 탐험하라는 제의를 한다. 고진은 달 착륙의 경험이 있는 우주인으로 통신원으로 최미옥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스미스 중령은 기장이 되고, 고진은 부기장이 되어 금성탐험을 하기로 결정된다. 하지만 발사 시각이 다 되어가는데도 스미스와 고진이 탑승하지 못한다. 결국 월리암 교관이 기장이 되고, 박철 후보생은 부기장이 되어 금성 탐험호가 발사된다.
고진 후보생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비로소 자기가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진후보생은 자기 앞에서, 우주선을 조종하고 있는 니꼴라이 중령을 보았다. 그리고 중령의 옆에 앉은 여자 통신원을 보자,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저 여자가 니꼴라이 중령이 말하던 한국계 소련 처녀로구나.’/고진 후보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우주공항에서, 니꼴라이 중령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처녀가 방긋이 웃으며 고진 후보생을 돌아보았다. 그 때서야 니꼴라이 중령도 고진 후보생을 돌아다보았다. 선집 297~298쪽
스미스 중령은 잠수함으로 고진을 납치하여 소련의 브라디보스톡에 간다. 스미스 중령은 소련의 스파이였던 것이다. 이 작품은 첩보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자주 접하는 작법인 스릴과 서스펜스(suspense)를 활용하고 있다. 고진은 스미스를 따라 소련 우주공항 사령관실로 간다. 사령관은 스미스를 니꼴라이 중령으로 부른다. 결국 고진은 스미스 중령과 함께 였던 것이다.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니콜라이 중령의 모습에는 당시 소련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동시에 윌리엄 중령의 모습에서는 소련과의 우주전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미국의 모습도 엿보인다.
니꼴라이 중령은 우주모를 쓰고 우주선 밖으로 나갔다. 고진 후보생도 그 뒤를 쫓아 나갔다. 캄캄한 우주의 하늘은 먹칠을 한 것처럼 펼쳐져 있다. 그러나 우주선의 한쪽을 쪼이는강력한 햇빛은 뜨거운 열을 사정없이 우주선 한쪽에 퍼붓고 있다./ 니꼴라이 중령은 그 뜨거운 우주선을 더듬으며 열쇠를 찾아다녔다.“열쇠가 어디 갔어? 우주선의 인력으로 열쇠가 우주선에 붙은 것은 틀림없을 텐데.”/ 중략- 니꼴라이 중령은 고진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자네가 그 열쇠를 찾아내야 해…. 만일 못 찾으면 우주선 안에는 들여놓지 않을 테니까, 알았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해.”/ 니꼴라이 중령은 분풀이를 하듯이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리고 말았다. 선집 310~311쪽
『금성 탐험대』는 이렇게 시대 현실을 반영한 상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미소 냉전체제에서 우주산업 경쟁이 한창인 시기에 출간되었기에 우주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미소 시대, 냉전체제와 우주전쟁 현실을 잘 묘사한 부분이 인상 깊다. 눈앞의 새로운 별을 떠나 금성으로 향하는 모습에서는 우주 탐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이 작품은 미·소 두 진영의 대립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한국인 인물들이 활약은 더욱 도드라진다. 이는 “지구는 하나야…….”, “모든 민족은…… 적이 될 수 없어……. 형제야……. 싸워선 안 돼…….”(383쪽)라는 니콜라이 중령의 마지막 전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냉전시대의 논리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할 수 없지만, 미래 세대에게 전할 가치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 의식이 각인된 작품이다.
또한 우주선, 괴조, 용, 알파인, 공룡 등 여러 소재들이 단순히 주인공의 모험의 방해물로 나열되고 있을 뿐 역할이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뜨리고 있는 단초가 된다.
2. 국격을 높인 SF 『잃어버린 소년』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은 과학적 사실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우주 공간이나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과학소설을 말한다.
『잃어버린 소년』은 세계연방정부가 수립된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 작품은 연합신문12) 어린이연합판에 실렸으며, 삽화는 신동헌 화백13)이 함께 했다. 우주기지는 한국의 제주도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세계는 유엔이 발전하여 세계연방이 된다. 각 나라 대표가 모여 세계연방 정부를 만들고 연장전부 원수를 뽑는다. 한국은 우수한 과학선도국가가 되어 원일박사와 같은 노벨물리학자도 탄생한다.
제주도에 자리잡은 한라산 우주과학연구소의 소장은 원일 박사로 세계적인 전자물리학자이다. 이곳에서는 우주여행에 필요한 새로운 에너지를 연구한다. 특별 훈련생 용이와 철이, 현옥 세 젊은이14)가 특별 임무를 띠고서 우주선에 올라 우주정거장을 향해 이륙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우주선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어딘가로 끌려가고 주인공들은 유리 바가지를 쓴 우주 괴물들과 싸움을 벌인 끝에 폭발하는 우주선을 탈출해 지구로 귀환한다.
현옥이가 뇌까리며 먼저 우주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온통 옆으로 주름이 잡히 ㄴ아래 위가 잇달린 옷이다. 그 위에 장갑과 장화를 신고 안테나가 달린 헬멧 모자를 썼다. 등 뒤에는 물론 비상용 산소 탱크가 메어져 있었다.-중략-/발사대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X·50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어처럼 날씬한 몸집을 하고 있었다. X·50호는 X·15가 발달한 자그마한 로켓 비행기였다. 그래서 큰 우주선 몸집 안에 들어갈 수도 있게 마련이었다./ 세 훈련생은 이 애기에 올라탔다. 사다리가 떼어지고 문이 다쳤다./용이가 제일 앞머리 조종사석에 앉고 철이는 그 옆의 부조종사석에 앉았다. 현옥이는 그 뒷자리 레이더 조종석에 앉았다.
선집 100-102쪽
용이는 월세계에서 낳고 월세계에서 자란 소년이다. 아버지가 월세계 우주선 기지의 기사로 일하기 때문에 1972년15)에 가족도 따라 그곳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용이가 열세살 때 로켓 폭발 사고로 순직을 했다. 철이는 열 한살 때 고등수학을 푼 천재이다. 철이와 그의 누나, 용이는 한라산 우주과학연구소에서 특별 훈련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 원박사는 세 훈련생에게 큰 비밀편지를 가지고 우주정거장 코레아호에 가 있는 허교수에게 전하라는 긴급 명령을 내린다.
그 때 용이는 급해서 꼭꼭 잠근 문 안으로 날아들어온 노란 봉투의 과상한 편지를 주머니에 넣은 채 꼬마 우주선에 탄다. 또 현옥이는 우주선 레이더에 빨간불이 켜진 것을 본다. 위험하다는 신호다. 그러나 웬일인지 곧 제대로 되어 우주선 X·50호는 그대로 떠나고 만다.
그 종소리는 로켓배가 제일 위험할 때 울리는 마지막 경종이었다./ “째르르릉---”
철이는 다시 눈을 치뜨고 속도계를 보았다. “앗! 7만마일! 마지막이다! 용이! 얘, 현옥아!”/ 철이는 소리를 질렀다. -중략- 속도는 차차 7만 마일에서 6만 마일 ... 그리고 드디어는 3만 마일까지 내려가고야 말았다. 이제야 비로소 제 속도를 얻은 것이었다. 이 배는 한 시간에 3만 마일의 속도로 공기가 있는 대기권을 뚫고 나가게 되어 있다./세 훈련생은 인제야 조금씩 간신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중략- ‘그 파란 불빛이 괴물이다! 보이지 않는 괴물....’
용이는 뿌예져가는 자기 정신 한구석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꼬마 우주선 X·50호는 정신을 잃은 세 훈련생을 싣고 자꾸만 더 속력을 내서 어디론지 솟아오르고 있었다.
선집 111~119쪽
서기 1995년 크리스마스 전날 한라산 우주과학연구소에서는 큰 사고가 일어난다. 소장인 원일 박사의 긴급명령으로 우주선 코레아호로 떠난 X·50호는 웬일인지 미칠 듯한 속력으로 길을 헛가고 있었다. 이 꼬마우주선에는 용이와 철이, 그리고 철이의 누나 현옥이가 타고 있다.
대원들과 눈싸움을 즐기다 지하실의 비밀실로 들어간 나기사는 보이지 않는 괴물들이 비밀 설계도를 훔쳐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비행판을 타고 바다로 쫓아갔다. 나기사와 괴물은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다. 나기사는 비행접시 광파무기의 단추를 누르려 한다. 그러나 그는 과물의 공격으로 바다에 떨어져 죽고만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원박사는 한없이 슬퍼했다. 그러나 세 훈련생은 아직도 괴물에게 끌려 헛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괴물은 차차 얼굴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결국 세 훈련대원은 이 문어를 닮은 괴물의 우주선으로 잡혀가게 된다.
두 남매가 총대를 쥐고 옥신각신 다투고 있는데 또다시 무슨 힘이 그들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보자 짙은 파란빛이 그들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 빛줄기 안에서 두 남매와 용이의 몸은 괴물의 큰 배 있는 쪽으로 끌려가는 것이었다./ 두 남매는 그 빛 속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려보았다. 그러나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그 파란 빛은 짙어지고 그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더 세지는 것을 느꼈다. 인제는 세 소년의 몸이 무슨 노끈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꾸만 괴물의 배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선집 160쪽
우주 개척자자가 되려는 꿈을 가졌던 철이는 무기력하게 죽게 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하다. 그는 총의 방아쇠를 마구 당긴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는다. 세 훈련생은 어떻게 끌려갔는지 어느새 그 둥근 괴물의 배 안에 들어가 있었다. 철이와 현옥이가 그것을 안 것은 얼마쯤 뒤였다. 그들은 모두 우주복이 벗겨진 채 스키복 같은 자기 속옷을 입고 있었다. 철이가 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옆 조종판 같은 곳의 단추를 누르자 문어 모양의 괴물은 네 다리로 덥석덥석 방안에 들어왔다. 그 괴물이 유리 바가지 같은 핼맷을 벗자 울퉁불퉁하고 맨숭맨숭한 머리에 세 눈방울이 디굴디굴 굴었다.
‘그렇지, 먼저 용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것, 그 다음에는 내 우주복을 다시 찾을 것, 그 다음에 이 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사하고 도면을 그려둘 것, 할 수만 있다면 이 배를 빼앗아가지고 지구로 돌아갈 것.’/이까지 생각하자 철이는 마치 자기가 읽던 과학모험 소설의주인공이 된 것같이 신바람이 나기 시작하였다.-중략- 현옥이는 그 빨강 딸기 같은 것을 다 먹고 침대에 뒹굴고 있었다.-중략-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괴물이 노랑 포도알 같은 것을 담아가지고 들어왔다.-중략- 그것을 보고 철이도 두어 알 입에 넣었다. 정말 그 맛은 별난 것이었다.
선집 166~167쪽
외계인들이 먹는 그 포도알 같은 음식은 입에 들어가자마자 혓바닥에서 녹는다. 인단16)처럼 시원하면서도 꿀처럼 달고 향긋한 음식이다. 이 우주선에는 우주복을 입지 않고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철이는 초록빛으로 빛나는 지구를 바라보자 문득 우주과학연구소가 생각나고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철이는 괴물이 나 기사로부터 탈취한 설계도 봉투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빼앗으려 한다. 괴물은 설계도 봉투를 감싸안고 함장실로 간다. 그곳에는 죽은 줄 알았던 용이가 있어 반갑게 재회한다. 괴물은 설계도의 비밀을 알려고 두 대원을 심문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우주정거장 코레아호에 있던 허진 교수는 X·50호 같은 꼬마우주선이 우주정거장을 밑으로 지나 딴길로 달리다가 지구의 인력에 끌려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이 되려는 것을 쫓고 있었다. 허교수는 원박사의 호출을 받고 부랴부랴 한라산 기지로 돌아온다. 세계의 신문은 우주의 괴물이 내습한 사실을 알리고, “잃어버린 세 특별 훈련생”, “가까워오는 지구 최후의 날!” 등의 제목으로 앞다투어 보도한다. 뉴욕에 잇는 세계정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원일 박사를 ‘지구방위위원회’ 위원장으로 뽑는다. 원박사는 지구를 지키기 위하여 세계정부가 가지고 잇는 모든 우주선을 동원하여 적을 격퇴시킬 준비를 한다. 원박사는 허교수에게 설계도를 복사해 둔 필름을 건넨다. 원박사는 세계정부 재판소에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 지구를 쳐들어왔다는 유언비어를 퍼ㄷ뜨렷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허교수는 새로운 우주선을 완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원박사는 증거자료를 통해 무죄 선고를 받고 한라산으로 돌아오고 세계는 더욱 공포에 싸이게 된다. 세 대원은 괴물들이 밥먹는 시간을 이용해 배에서 도망치려는 계획을 꾸민다. 마침내 나 기사가 빼앗겼던 비밀 설계도와 괴물 우주선의 설계도까지 빼앗아 괴물들이 타던 유리 바가지를 타고 달나라로 탈출한다.
용이는 벌써 저만치 앞서서 달을 향하고 있었다. 현옥이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괴물 우주선에서 괴물들이 탄 유리 바가지가 연거푸 날아나왔다. 잠시 동안에 하늘에는 벌 떼처럼 유리 바가지의 꽃이 피었다. 괴물의 유리 바가지는 두 소년을 뒤쫓았다. -중략- 철이는 다이얼을 돌리고 그 벽장에서 설계도를 꺼냈다. 그것을 움켜서 가슴 속에다 집어넣었다. -중략- 철이가 유리 바가지 있는 데까지 와서 바가지에 탔을 때는 온몸이 비에 젖은 것처럼 땀이 배어 있었다.
선집 193-195쪽
트럭터가 필코 산 밑으로 가자 현옥이는 벌써 죽은 듯이 팔다리가 축 늘어져서 허우적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터릭터 안에서 우주복을 입은 구호반 두 사람이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와서 현옥이의 몸을 트럭터 안으로 안아 들였다. -중략- “아니, 저런 알몸뚱이로....”하며 구호반은 재빨리 달려가서 두 소년도 트럭터 안으로 끌어들였다./세 훈련생은 트럭터 안에서 응급 치료를 받으며 한 시간에 3백 마일씩 달리는 속도로 땅 밑에 지은 기지로 달려왔다.
선집 201쪽
기지의 병원에서 정신을 차림 철이는 옷속에 숨겨온 비밀 설계도를 텔레비를 통해 한라산 우주과학 연구소에 보낸다. 이윽고 세계정부에서는 달나라 상공에서 원자탄을 터뜨린다고 했다. 달나라 지상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지하사무실로 대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허진 교수가 지휘하는 우주선 30척이 달나라 상공에 도착하여 원자탄을 떨어뜨리려 하지만 괴물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고 만다. 용이와 철이는 무게 없는 우주 공간에서 허교수와 극적으로 합류한다. 그런데 우주선이 모스코바와 아프리카에 떨어지고, 뉴욕에서는 로켓비행기가 석 대나 행방불명된다. 괴물들은 지구 곳곳의 도시를 공격하여 지구 멸망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다. 용이와 철이 현옥은 허교수와 함께 괴물의 배 안으로 끌려 간다.
철이와 허 교수가 먼저 괴물의 배 안에 들어왔다./용이가 현옥이를 이끌고 뒤따라 들어왔다. 입구에 여러 놈의 괴물이 지키고 있다가 네 사람을 둘러쌌다. 그리고 한 사람에 두 놈씩 붙어서 네 사람을 선장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중략- 선장은 그제야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옆의 담벽으로 갔다. 그 벽에는 수많은 단추며 스크린이며 구멍들이 보였다. 선장이 스크린 옆의 단추를 누르자 스크린 위에 괴물 한 놈이 나타났다. -중략- 괴물 선장은 골이 잔뜩나서 외치며 문어발로 철의 목을 감았다. 숨이 답답했다. 철이는 침대 있는 방으로 끌려가고 있었다.-중략- 허교수가 선장의 눈통을 내리쳤다. 다시 엎치락 뒤치락 서로들 맞붙어서 뒹굴었다. 그러는 동안에 현옥이가 흰 단추를 눌렀다.
선집 236~240쪽
괴물의 배는 단추로 명령이 하달된다. 흰 단추를 누르면 유리 바가지를 타고 우주선 밖으로 날아간다. 노란 단추는 옆방과 트인 벽이 닫히는 스위치이다. 파란 단추를 누르면 유리바가지들이 돌아오라는 신호이다. 금빛 단추는 우주선의 바깥을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단추로 통행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단추를 통해 명령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추를 잘 못 누르면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허교수와 싸우다 발 다리가 떨어져나간 괴물 선장은 입으로 기관실을 폭파시키는 도화선을 물고 있었다. 용이는 괴물의 입에서 꼭지를 뺀 후 유리 바가지를 타고 탈출을 시도한다.
잠시후 세 대의 유리 바가지가 불꽃처럼 괴물의 우주선을 튀어나왔다. 세 유리 바가지는 한라산으로 방향을 잡고 전속력으로 달렸다./그들이 괴물 우주선에서 한참 멀어지자 연거푸 일어나던 폭발하는 빛이 한층 더 빛났다. 선장실이 폭발하는 빛이었다. -중략- “철이! 바다는 왼쪽이다! 몸을 외로! 몸을 외로 기울엿!”/용이가 자꾸만 뒤에서 소리쳤다. 그제야 철이는 억지로 몸을 외로 털었다. -중략-철이와 현옥이는 비행기 편으로 한라산 병원에 돌아왔다. 용이와 허 교수도 타가온 유리 바가지를 찾지 못했다.
선집 245-251쪽
유리 바가지를 타고 괴물 우주선을 탈출한 세 대원과 허 교수는 바다로 떨어진다. 철이와 현옥이는 독도 근방으로, 용이와 허 교수는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발견된다. 철이와 현옥이는 고기잡이 하던 그물에 걸려 살아나고, 용이와 허 교수도 헬리콥터가 구조하여 한라산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령의 원 박사는 건강이 악화되지만, 괴물의 습격이 사라진 세계는 평온을 되찾고, 세 대원은 세계적인 영웅이 된다. 세계 우주과학자들은 원 박사의 우주선을 완성하도록 연구 자료를 보내온다.
세 훈련생은 허 교수와 함께 원 박사의 우주선을 완성하는 총 책임자가 된다. 신문에서는 ‘세계정부가 4월 10일을 지구의 평화와 자유를 되찾은 기쁨을 축하하는 날로 정하고 공로 표창과 상금을 1억달러를 준다’고 보도한다. 용이는 장거리 텔레비 전화로 심사위원장에게 호의는 고맙지만 상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위원장은 용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세 대원 외에 원 박사와 허 교수, 나 기사, 비밀 연구 결과를 보내온 일본 후지산 연구소의 야마다도 공동수상자로 결정한다.
대통령이 단 앞으로 나왔다./“독재하던 괴물의 과학문명은 우리 지구의 젊은 세 소년을 당하지 못하고 망해버렸습니다. -중략-우리는 이들 세 소년과 우주 개척에 이바지한 분들에게 공로상을 드리게 되 넋을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듣자 청중들은 위뢰 같은 박수를 보내왔다./식은 원박사의 시상식을 위하여 한라산 병원으로 옮겨졌다. 텔레비를 보는 사람들은 장면이 바뀌지만, 국제연합 강당에서는 벽의 스크린을 지켜야 했다. 이 스크린에 한라산의 시상식 광경이 비치는 것이다. 중략-/원 박사는 갑에서 금빛 열쇠를 한 개 꺼내 들었다./“이 열쇠로 우주의 비밀을 열어주십시오!…. 이것은 내 서류 금고의 열쇠입니다….”/하고 원박사는 열쇠를 쳐들었다. 천지를 진동하는 박수와 만세 소리가 세계를 뒤흔들었다./“우리 소년 영웅 만세! 우리 희밍 만세!”/이 소리는 특별 훈련생의 노래와 함께 전파를 타고 우주의 한끝으로 퍼져나갔다.
선집 259-260쪽
이 장편 소설의 에필로그이다. 시상식장은 국제연합 빌딩의 대강당으로 정해지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각국 언어로 세계와 달나라와 화성에 중계한다. 세계 방방곡곡에는 꽃글씨와 네온이 반짝이는 아치문들이 장식되고 불꽃놀이를 벌인다. 달나라와 화성에 간 개척단에서도 축하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세계 시민들의 눈과 귀는 텔레비로 국제연합 빌딩 대강당으로 쏠린다. 단상 오른쪽에는 세 대원과 허 교수, 야마다와 나 기사의 유가족이 앉고, 그 왼쪽에는 세계정부대통령과 사회를 맡은 심사위원장이 앉아 있다. 이 작품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1950년대 말 청소년들에게 과학강국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불어넣었던 작품이다.
Ⅲ. 나오는 말
한낙원은 한국 과학소설 분야에서 선구적으로 활동한 개척자이다. 일찍이 1950년대 말부터 과학소설 창작에 매진하여 잡지 <학원>, <학생과학>, <새벗>, <소년> 등과 어린이신문 ‘소년동아일보’ ‘소년한국일보’ 등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첨단 과학 및 우주 개발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작품들은 당시 아동ㆍ청소년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잃어버린 소년』(연합신문)은 1959년 『화성에 사는 사람들』(새벗)과 함께 한낙원이 연재한 공상과학소설이다. 이 작품은 해방 이후 최초의 창작과학소설로 새연방정부가 수립된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한낙원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금성 탐험대』는 미국과 소련이 벌이는 우주 개발 경쟁과 함께 로봇을 부리는 외계인과의 싸움을 그린 우주 활극이다. 『별들 최후의 날』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은하계의 두 별 사이의 우주 전쟁을 그렸다.
이밖에도 『우주 항로』, 『해저 왕국』, 『별들 최후의 날』, 『미래소년 삼총사』, 『UFO 기지를 찾아라』, 『특명! 지구 대폭발 구출작전』 등과 과학방송극 『달에서 들리는 소리』, 『화성에서 온 사나이』, 『우주 소년 이카러스』를 비롯해 중단편소설 25편, 장편 38편, 방송극 35편 등이 있다.
2014년 한낙원의 유족에 의해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한낙원 과학소설상>이 제정되어 2024년 현재 제11회를 시상하고 있다.
한낙원 연보
- 1924년 평남 용강 출생
- 1953년 외국 방송극 『자유인』 각색
- 1959.12.20 -1960.4.7 과학모험소설 『잃어버린 소년』 연합신문에 연재
- 1964년 『잃어버린 소년』(배영사) 출간
- 1962.12 -1964.9 『금성탐험대』 학원지에 연재(22회)/학원사 출간(1967)/삼지사 출간(1969, 10판)/소년세계사 출간(1971)
- 1968년 『길 잃은 애톰』(삼성당)
- 1972년 『우주도시』(아리랑사)
- 1977년 『우주항로』(계몽사)
- 1980년 『할아버지 소년』(예림당)
- 1982년 『해저 왕국』(삼성당), 『세 글자의 비밀』(아동문학사), 『비밀에 쌓인 섬』(교학사), 『별 총총 나 총총』(아동문학사)
- 1983년 『마라 3호』(예림당)
- 1984년 『별들 최후의 날』(금성출판사)
- 1988년 『돌아온 지구소년』(카톨릭출판사)
- 1989년 『인조인간 피에로』(예림당)
- 1990년 『사라진 행글라이더』(삼익출판)
- 1992년 『특명, 지구 대폭발 구출작전』(정원)
- 1994년 『우주소년 프로그』(꿈나무)
- 1996년 『미래소년 삼총사』(정원)
- 2007년 3월 12일 서울에서 별세








- 1) 국가 독립유공자로 1990년 광복절에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함. 1993년 6월 1일에는 국가에서 ‘국가유공자증’을 수여함.
- 2) 형은 25세 때 사망함
- 3) 도미하여 풍력발전회사 지사장으로 근무함
- 4) 현재 인력 채용 회사인 헤드헌터에서 일함
- 5) 서울대에서 영문학박사를 받고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다. 사위 송진호는 서울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했다.
- 6) 그의 묘비에는 “한국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라고 새겨져 있다.
- 7) 어린이와 문학이 공모와 시상을 주관하고 사계절출판사에서 작품집을 펴내고 있다.
- 8) 이 작품이 잡지 <학원>에 연재된 것은 1962년 12월부터 1964년 9월까지이다.
- 9) 과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하여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을 주제로 한 소설
- 10) 「본지 학생 기자의 5분간 인터뷰」, <학원> 1968년 5월호
- 11) 미국이 우주 개척 분야에서 소련에 연이은 굴욕을 당하자 1961년에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70년까지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를 위해 우주발사체 전용 발사장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미국 공군기지 인근에 별도의 우주기지를 지었는데 이것이 케네디 우주센터이다.
- 12) 1949년 1월 22일 양우정이 창간했다. 1953년 국제간첩단사건으로 주필 정국은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한다. 발행인이었던 양우정도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신문발행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1954년 3월에 부사장이었던 김성곤에게 인수되어 계속 발행되었다. 기사 위주로 된 편집체제와 적극적인 가두판매 방식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4·19혁명 이후인 1960년 7월 11일자부터 〈서울일일신문〉으로 제호가 바뀌어 발행되다가 1962년 1월 1일 자진 폐간했다. <어린이연합>판 12. 20일자부터 연재되었다.
- 13) 신동헌은 김용환, 김성환 등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만화를 개척한 대표적인 ‘1세대 만화가’이다. 192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했다. 1947년 <스티브의 모험>을 통해 데뷔한 이후 여러 신문과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한국 만화 초기 역사를 개척했다. 특히, 그의 이름은 만화가로 거론되면서 동시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초기역사를 개척한 애니메이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67년에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호피와 차돌바위>도 선보이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 꼽힌다. 1994년에 타계한 신동우와 함께 형제만화가로도 유명하다.
- 14) 현옥의 나이는 열셋, 철이는 열다섯, 용이는 열여섯으로 설정되어 있다.
- 15) 59년 12. 20~ 60.4.7 되었다. 불과 12년 후인 72년을 시공적 배경으로한 것은 시기 상조이다. 70여년 후 쯤으로 설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16) 일본 삼하남양당(森下南陽堂)에서 개발한 약으로 창업자 모리시타 히로시가 1895년 대만에 군인으로 출병했다가 현지인들이 복용하는 것에서 착안해 감초, 계피, 생강 등 13가지 약재로 제조한 생약이다. 원래 붉은색이었는데 은으로 감싼 은립(銀粒) 형태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07년 무렵이며 주로 은단으로 불렸다.
추천 콘텐츠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1 이번 봄에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에 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의식을 탐험하고 매체를 다시 읽어내는 글들이었다. 2020년대 들어 인류세 관련 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비인간’ 담론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ChatGPT의 등장 이후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던 독보적인 단상 위에서 내려와 비인간과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허물며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겸허한 기획은 급작스럽게 복잡한 불안에 갇힌 것 같다. 적어도 기계에 대해서라면 이미 우리는 동등하거나 어쩌면 한참 전에 초월당한 것은 아닌가? 경계 허물기로 인한 희열보다 불안이 확연히 압도하는 자리에서 『쓺』 2024년 상권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과 ‘작은 기획—채굴 문화와 미적 감각’을 유독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작은 기획’에 실린 심효원과 윤원화의 짧은 글이 각각 인간이 향하려는 방향과 의지의 아름다움, 그 노력이 무산되는 수동태의 자리에서 감지하는 공포와 불쾌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먼저 심효원의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는 비인간 행위자인 ‘지렁이-되기’를 통해 근대의 한계를 돌파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글이다. 지렁이가 땅과 맺는 일원적인 관계성과 분변토라는 건축물은 근대 이후 인간이 이룬 도시의 뚜렷한 경계와 고정성의 반대편에 있다. 지렁이의 건축물 만들기란 사실상 움직이고 먹고 배출하는 신체적 행위의 반복일 뿐이지만, “비인간들의 극도로 효율적인 메커니즘”이자 자신의 몸이 다른 존재와 물리적으로 닿는 매순간마다 “무차별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동력”1)이기도 하다. 촉각이 주도적인 지하세계에서는 시각이 미미해질 뿐만 아니라 시간성 역시 달라진다. 미래의 미결정성을 남겨두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촉하는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최근 신유물론을 비롯한 담론들과 풍요롭게 공명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공상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지하세계로 향하는 방향성은 최근 SF 소설의 주요한 상상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정세랑의 「리셋」(『목소리를 드릴게요』, 아작, 2020)에서 행성의 모든 자원을 고갈시키던 자본주의의 질주를 멈추게 한 것은 인류 문명을 끝장내려고 내려온 지렁이들이다. 강제 리셋 이후 인간들의 자리는 자연히 땅속 깊은 곳이 되고, 지상은 다른 종들이 누리는 공간이 된다.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에서도 지상은 균류인 ‘범람체’의 공간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감염을 피해 지하세계로 내려와 산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문명 말살에 가까운 아포칼립스를 맞닥뜨리지 않는 이상, 영화의 촉각성을 즐겁게 감각해온 인간이 미래의 지구를 위해 지렁이를 신속하게 체화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물론 직접적인 실천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지구의 거대 환경 시스템의 핵심 행위자 자리를 재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겠다. 하지만 미래적인 지하세계로 들어가기에 인간은 아직 시각적 쾌락 속에 즐겁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지적 유희를 야기하는 활자의 쾌감까지 포함해서. 윤원화의 「땅을 파는 손」은 채굴적 상상력의 매혹과 절망을 말한다. 데이터로 전환된 우리의 생태 에너지를 부의 원천으로 삼으며 굴러가는 미디어 산업 앞에서, 인간의 생산물·복제물·부산물·폐기물을 구별하기는 어려워진다. 디지털 기술로 구축되는 ‘아카이브 데이터’는 역사는 넘쳐흐르지만 이를 의미화하는 전통은 불가능한 곳이다. 윤원화는 과잉생산으로 범람하는 사물들 앞에서 맞닥뜨리는 불길한 실패에의 예감을 시앤 응아이Sianne Ngai의 ‘기믹gimmick’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한다. ‘매직magic’의 애너그램에서 유래했다고도 하는 이 단어는 1920년대 미국에서 편법적 장치, 싸구려 트릭, 계산된 마법 등을 뜻하는 신조어로 출현했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자본주의의 황홀감과 환멸을 모두 각인한 기믹의 불완전한 형식은 오늘날 삶과 예술, 또는 넓은 의미의 ‘사업’에서 흔히 발견된다.2) 단기적 이익 추구에 최적화되어 있는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가치 절하된 노동에 시달리는 대개의 사람들이 이 기믹의 유희에 이끌린다. 운에 따라 누군가는 축적된 자원을 폭발적으로 소모할 수 있으리라는 채굴적 상상력이 번성하는 가운데, 보상도 성취도 불확실한 예술 노동 역시 가치 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윤원화는 이런 진단과 고민 속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생산성 중독의 시대에 예술은 어떤 시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3) 심효원이 지하라는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촉각성에 의지해 의미 있게 압축되는 순간의 시간성을 말한다면, 윤원화는 ‘농사’와 ‘채굴’을 대비하며 채굴의 무책임한 풍요의 약속이 얼마나 파국적일 수 있는지 말한다. 최단기간의 이익에 매몰된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생산물은 넘쳐흐르지만 어떤 가치 창출도 담보할 수 없는 동시대 예술은 불투명한 시간을 표류하는 중이다. 이런 진단 속에서 디지털 자본주의에 의해 갱신되는 매체의 기술적 발전은 인간과 나란히 놓여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환멸을 불러오는 맹목적인 대상으로 남는다. 인간의 ‘지렁이-되기’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은 너무나 느리게 진행중인데, 가장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정받고 있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예술을 몰아치듯 양산해낸다. 인간의 몸은 자발적으로 물질과 동등하게 놓이기 전에 물질이 만들어낸 다른 가치들에 의해 가치 절하되며 밀려나게 될까? 생동하는 물질들 안에서 인간을 재의미화하려는 시도와 인공지능을 의심하며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지키려는 안간힘 사이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아래의 비평들은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2 『쓺』의 특집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그 개체성과 집단성’을 여는 글은 근대 패러다임이 ‘개인’을 해방하고 자율적 주체로서 정립해왔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이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이념이 유효한지 묻는다. 개체성과 집단성이 직면할 변화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서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응답하는 글을 꼽는다면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과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인공지능은 창작하지 못한다, 다만 제시할 뿐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김태환의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기계 성능의 고도화가 필연적으로 인간의 중요성이나 가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에게 산업화 이후의 근대는 ‘저자의 시대’이며, 이는 기술 발전의 작용에 대한 인간의 반작용이 만들어낸 변화이고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방향타가 된 것은 저자라는 이념의 바탕에 놓인 ‘개인주의적 사상’이다. 이는 산업화 사회 속에서 부속물로 전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회 분석의 준거점을 개인에 두고 진리와 자유를 탐색했던 아도르노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다시 독일 지성사의 문화 비판적 사상의 전통이 소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태환은 “항상적인 문화 공급 과잉의 시대”(37쪽)라는 진단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나 웹사이트, 유튜브 등 정신의 대상화로서의 객관 문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그 반대 방향인 객관 문화에서 주관 정신으로의 내화는 개인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로 인해 그만큼의 양적 증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알고리즘 속에서 타인과의 의미 있는 만남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객관 문화의 총체가 스스로 발언하고 생산하는 주체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런 위기감 속에서 이 글이 다시 강조하는 것은 ‘정신의 개별성’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이 개인으로서 개별적 의지, 개별적 내면, 개별적 정신을 지닌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외부에서는 절대 들여다볼 수 없고, 직접 조작할 수도 없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자주적이라는 사실”(42쪽)을 변함없는 인간 존재의 조건으로 부각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에 휩쓸리기보다 이를 의심 어린 눈으로 찬찬히 사유할 틀이 우리에게 요긴한 것은 사실이다. 데이터에 얽힌 저작권 문제 역시 계속 규제안을 논의해나가야 할 비판적인 쟁점이다. 그렇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위기를 산업화 시대 이후의 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것은 혹시 너무 큰 틀에서의 접근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 작동 방식과 결과물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때, 새로운 매체와 관련해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는 요소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 글에서 알고리즘에 갇힌 디지털 시대 개인의 부자유에 대한 우려는 빠르게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의 재소환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거듭 강조되는 개인의 개별적인 ‘의지’와 ‘내면’과 ‘정신’에서 신체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글에서 인공지능과 대립되는 요소로 논의되는 인간의 ‘의식’이란 단순히 합리적 이성만은 아닌 “수많은 감각적 심상과 기억·감정·소망·의지 등이 혼재하는 심적 상태”(46쪽)다. 알파고와는 다른 인간 바둑 기사의 의식을 예로 들면서 언급되는 긴장, 초조, 후회, 자책, 엉뚱한 연상 등은 “바깥에서 결코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복잡한 내면”(같은 쪽)으로 규정된다. 베일에 살짝 가려진 듯한 이런 인간 내면의 신비함은 물질적인 신체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진화해온 신체야말로 내면 이상으로 복잡성의 차원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는 “신체화의 말소가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와 사이버네틱스 포스트휴먼 양쪽 모두의 공통된 특성”이라는 캐서린 헤일스의 비판을 상기시킨다. 헤일스는 합리적 정신과 등치되는 자유주의적 주체가 “그 악명 높은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자아와 동일시되지 않기 때문”4)이라고 말한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한계는 곧 발전을 통해 ‘영웅적 개인’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유한한 삶을 가진 존재, 모든 능력에서 커다란 한계를 안고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만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여 어떤 감동적인 위대성에 이를 수 있”(53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반드시 육체의 신경과 근육의 단련 과정을 동반하며 그것이 생각과 행동에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잠시 괄호 안에 두어진다. 이 글의 전반적인 주장이 온당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전제가 되는 자율적인 개인상과 관련해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개인이 지향해나가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발전과 성장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가치다. 생산과 창조의 주체로서의 영웅적 개인이 아니라 소비와 소멸의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해 우리는 좀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또 근대 이전에 우리가 ‘저자’가 불투명한 긴 구술 시대를 살아왔음을 떠올린다면, ‘저자의 시대’ 이후의 저항이 활자와 개인을 넘어선 범주에서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3 김재인의 「창의와 집단 지능」은 이 질문에 대해 조금 다른 지점에서 답을 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지능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가지므로 ‘집단 지능’이라고 해야 한다. 개체를 중심에 놓으면 ‘창의’를 중시하게 되지만, 그 새로움은 다른 개체가 ‘모방’하고 ‘확산’하지 않는다면 사멸하고 만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른 생물종과 달리 ‘집단 기억’과 ‘문화 기억’이라는 형태의 외장 기억을 건설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의 확산과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저자는 낭만주의 미학과 예술에서 강조하는 천재적 개인과 창조력에 대한 신화를 뒤로하고 “인간이란 거대한 기억”(62쪽)이라 정의 내린다. 이는 물론 질적 도약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양적 축적을 말한다. 김태환이 인간의 의지, 내면, 정신이라는 추상적인 면을 중시한다면, 김재인은 “나의 생각이란 시한부 소유물”(63쪽)에 가까울 수 있으며 그 휘발성을 지켜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물질’ 혹은 ‘미디어’”(62쪽)라고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외화된 집합적 사물성으로 바라보며 그 반대편에 선다. 그런데 이 글은 ‘컴퓨터가 자연어를 다룬다는 것’이라는 장부터 급작스러운 단절을 드러내며 도약한다. 앞에서 인간의 생각 자체를 미디어이자 집단 기억의 저장고로 본 것과 다르게, 예술과 창작의 영역을 다룰 때는 컴퓨터가 자각 혹은 성찰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는 예술 능력이 없다”(66쪽)고 확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계를 바라보는 김재인의 시점에는 도구적 차원과 존재적 차원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은 창작의 정의를 “스스로 선택하고 평가하는 능력이 발휘되었느냐”(67쪽)에 두는데, 중요한 점은 저자가 그 평가 주체의 자격을 ‘생물’로 단정한다는 것이다. 생물은 “생존과 번식을 스스로 반복”하는 유기체이고, 이 글에 따르면 평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성공하기 위한 지각 처리와 행동의 연쇄”(70쪽)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애초에 기계는 아무리 ‘집단 기억’의 ‘미디어’로서 최적화되어 있다고 해도 무기물이라는 점에서 평가 능력이 없는 것으로 배제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이렇게 유기체의 항상성과 관련된 기준을 평가 능력과 일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저작 『AI 빅뱅』에서 참조할 수 있는 지점을 좀더 찾아보면, 이는 “몸의 고집스러움”5)이라는 말과 함께 구체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심지어 같은 프롬프트를 주더라도 생성물이 크게 바뀌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보여주는데, 이는 휘발성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생각을 고수하는 면을 지니는데, 저자는 이를 몸에서 비롯된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 장에 바로 이어지는 질의응답에서 한 질문자는 “세계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몸을 가지는 것이다”6)라는 전제 위에서 인공지능이 세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인공지능으로 발전할 방법이 있는지 묻는데, 김재인은 이에 대해 ‘몸의 회복력’에 대한 이야기로 답한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몸은 생각을 “바로 휘발되지도 완전히 고착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지점”7)에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김재인은 인공지능과 다른 인간을 논하는 데 있어 복잡성을 가진 신체의 차원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창작을 논하면서부터는 김태환의 논의와 유사한 탈신체화의 방향을 답습한다.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특징”은 “필멸하는 인간이 불멸하는 비결”(70쪽)로 치켜세워지고, 진화를 위해 외부와 교섭하며 몸 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피드백 루프는 유기체만의 고유한 신체적 능력으로 남는다.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케이트 크로퍼드가 인공지능은 추상화된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체화되고 물질적인 지능이며 천연자원, 연료, 인간 노동, 하부구조, 물류, 역사, 분류를 통해 만들어진다”8)고 강조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혹은 그와 마찬가지로 유기체의 일차적인 목표로서의 생존이 진화의 필수 사항이라 말하는 신경과학 연구자 아닐 세스가 우리의 지각은 사실 ‘통제된 환각’이자 ‘최적의 예측’이라 설명했음을 염두에 두면 어떨까. 그에 따르면 ‘당신이 된다는 것being you’, 즉 인간의 ‘동물기계’적 본질과 의식적 자기 사이의 연결고리는 “신체 자체가 가진 현재와 미래의 생리적 조건에 대한, 형태도, 모양도 없고 제어 중심적인 지각적 예측”9)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인공지능 역시 지극히 물질적인 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인간 역시 체화된 자아로 인한 기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때, 예술을 창발시키는 창의성 개념이 다르게 읽힐 가능성이 열린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승부 후에 마련된 『인문예술잡지 F』 21호의 특집 ‘고함: 비-인간’에서 이진경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인공지능이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했다. 괴델의 정리는 수학적 추론의 과정 속에 언제나 결정 불가능한 명제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수준에서도 공리계로 귀속될 수 없는 명제(결정 불가능한 명제)를 생성할 수 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형식적 추론에서조차 새로운 명제의 창안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역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어떤 경로를 밟아왔는지 설명한다. “변이mutation의 누적에 의해 진화는 이루어”지지만 처음 “생명체의 변이는 지배적인 개체군 안에서 일종의 ‘장애자’나 ‘고장’으로 간주된다”10). 하지만 환경이나 생존 조건에 따라 변이가 진화된 변종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기계가 만들어내는 예측되지 않은 결과의 출현 역시 ‘고장’이나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능력의 ‘창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 논의다. ‘인간 없는 예술’이 도래하려는 시기에 우리는 다시 인간적인 무언가를 기계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기술적 특이점이 올 때마다 반복되어온 정동이기도 하다. 이 앞에서 좀더 차분하게 이전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축적할 필요를 느낀다. 2024년 『쓺』의 특집이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서 있는 주체의 자리에서 출발했다면, 2016년 『인문예술잡지 F』의 특집은 그 결과물인 작품의 자리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감상자의 자리에서 본다면 어떤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은 음악이 기술적 혁신을 이루는 순간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넓혔는지를 따라 음악사를 재구성한다. 자동 피아노의 경우에도 그 연주를 더 실제처럼, 더 자연스럽게, 더 인간답게 만들겠다는 목표는 거의 달성되었다. 그러나 자동 피아노가 만들어낸 경험이 정말 특별하게 의미화되는 것은 인간의 연주라는 원본 혹은 목적지를 버렸을 때이다. 인간의 연주라는 목적지를 소거해버리고 이 사물의 독자적인 가능성에 집중해보는 것이다. 연주하는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뭔가를 연주하거나 재생할 수 있는 악기가 등장했고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인간 없이 손쉽게 해냈다면, 그 기계의 핵심적인 가치를 ‘인간의 복제’가 아니라 ‘탈脫인간’으로 재조정할 수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기계장치가 꼭 연주자를 대신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기준점만 제거한다면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 자동 피아노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다. 인간의 연주를 기록하고 인간의 연주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연주의 대리자는 오히려 새로운 예술형식으로서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연주하며 그 누구보다 기계적인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독자적인 예술형식 말이다.11) 우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에 대해서도 그것이 오히려 새롭고 독자적인 예술형식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모방은 때로 인간에 한참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때로 인간을 이미 초월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계는 이미 희미해지고 있던 자율적인 개인 주체로서의 예술가상을 어떻게 바꾸어나갈까. 또 인간의 예술적 집념은 어떻게 예술 형식들을 바꾸어나갈까.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불안만이 정확하게 인간의 자리를 응시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불러오는 균열 속에서 인간에 대한 고정된 사유를 과감하게 벗어날 수 있을 때 인간과 예술 모두에 새로운 시야가 열릴 것이다. 1) 심효원, 「지렁이의 부드러운 건축물 만들기」, 『쓺』 2024년 상권, 368쪽.2) 시앤 응아이는 디지털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던 2010년대 후반의 미술과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기믹의 이론화에 착수하는데, 기믹은 의심스러운 도구성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키치와는 다른 저질 예술로 취급되면서도 자본주의 가치 체계와 그 이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심을 표면화하는 미적 전략으로도 쓰일 수 있다. 윤원화는 이 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공모 프로그램 선정작인 시각예술 콜렉티브 랩삐의 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한다. 이 전시는 관객이 옥수수 농사 시뮬레이션을 완수한 후 ‘콘 코인’이라는 가상 화폐를 받아 실제 뻥튀기 한 봉지와 교환하는 경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복 노동이 이에 비례하는 가치 창출과 기쁨으로 이어지는 대신, 콘 코인이라는 불분명한 요소가 끼어들면서 매끄러운 교환 가능성이 흔들릴 때 이 간극에서도 기믹이 관찰된다고 할 수 있다.3) 윤원화, 「땅을 파는 손」, 같은 책, 383쪽.4) 캐서린 헤일스,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사이버네틱스와 문학, 정보 과학의 신체들』, 허진 옮김, 열린책들, 2013, 27쪽.5)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153쪽.6) 같은 책, 156쪽.7) 같은 책, 157쪽.8)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17쪽.9) 아닐 세스, 『내가 된다는 것—데이터, 사이보그,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 의식을 탐험하다』, 장혜인 옮김, 흐름 출판, 2022, 243쪽.10) 이진경, 「인공지능시대의 예술작품」, 『인문예술잡지 F』 21호, 2016, 25쪽.11) 신예슬, 『음악의 사물들—악보, 자동 악기, 음반』, 작업실유령, 2019, 115쪽.
1. ‘서울의 봄’을 기다리며 유신 독재 시대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을 다시 돌아다보면서 근래에 극장가의 흥행 기록을 다시 쓴 영화 (2023)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지나간 과거의 일이지만, 또한 그렇기에 ‘서울의 봄’이 당시로써는 아직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솟아오르는 아쉬움과 슬픔, 분노의 감정은 덜해지지 않는다. 40여년의 시간차를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 시대를 지나오지 않은 세대의 관객들에게까지도 강력하게 휘몰아친다. 그러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뚫고 나갔던 이들은 눈앞에서 물러나는 봄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소명출판, 2023)이 제목을 따온 「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는 그의 또 다른 시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에서 그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들려준다.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곤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내가 죽고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꾼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후략)…1)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실 수 있다면, 오는 봄에 작은 바람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의 시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죽고 다시 죽어 넋으로 스며든다고 해도 좋다는 시인의 결연한 고백을 듣고 나면 그러나, 또 한 번의 겨울 속으로 선선하게 걸어 들어갔을 그들의 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봄은 물러갔어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에서 주요하게 살펴보고 있는 김지하와 황석영, 조세희, 이문구는 신군부 독재 정권하에서도 계속 문학이라는 싸움과 저항을 지속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그들에게는 “오는 봄”을 기다리며 문학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눈보라를 뚫고 한 시대를 걸어 나왔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영주의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은 바로 그 역사에 관한 연구이다. 2. 시와 정치와 사랑 시작은 김지하다. 저자가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권력 지형 및 상세한 역사적 맥락과 함께 김지하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그러한 냉전 체제의 하위 파트너인 유신 독재 정권과 한바탕 벌여 놓은 그의 싸움판이다. 그의 시 「곡(哭) 민족적 민주주의」(1964)와 「오적(五賊)」(1970)이 어떻게 ‘유신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왜 유신 독재 정권은 그의 ‘세 치 혀’와 붓 끝에서 흘러나오는 시를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그러한 김지하의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오적 필화사건’의 법정 풍경을 복원한다. 잘 알려진 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하에서 필화 사건은 드물지 않게 일어났고, 더군다나 김지하의 「오적」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특별히 ‘오적 필화사건’에 주목하는 이유는 “1970년 김지하의 체포에 이은 100일 간의 재판[이], 법정을 판소리나 탈춤이 주로 공연되는 야외의 마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데 있다.2) 저자는 관련 인물들의 여러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재판이 흡사 검사가 양반의 담화를 담당하고 김지하가 말뚝이를 맡은 판소리 풍자극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유신 독재 정권은 도리어 김지하에게 그가 오래 탐구했던 전통 마당극을 마음껏 펼칠 무대를 깔아주었던 셈이다. 이후 그 무대는 김지하가 “문학, 폭력, 혁명, 구원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있는 대중 강연을 위한 연단”(95)으로 확장된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더글러스 루미스(Charles Douglas Lummis)의 기록을 인용하여 저자는, 재판 방청객들이 김지하의 발언을 받아 적어 재판장 바깥으로 빼돌린 뒤 그들이 속한 조직으로 돌아가 그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게 되는 방식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는 시인의 말이 변론과 강연, 연설을 넘어서, 유신 독재 체제하의 민중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처럼, 마치 ‘예언’처럼 전달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루미스는 실제로 김지하에게 “에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다.(87) 오래 전 종교가 시와 정치로 분리되지 않는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기 김지하의 문학 세계는 세속화 시대에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던 어떤 종교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이후 “시인으로서의 그의 국제적 명성은 분명 그가 겨울 공화국의 순교자가 됨으로써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50) 아이러니하게도 유신 독재 정권은 김지하를 위대한 시인으로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게다가 그 어떤 비평가나 애독자보다도 꼼꼼하게 김지하의 시를 읽고 분석하며, 그 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은 김지하에게 더욱 집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검찰은 “시인의 수첩에 적힌, 아직 쓰이지 않은 시와 희곡에 대한 메모”(95)들을 증거로 제출하며, 마치 시인론을 쓰는 문학 연구자인양 김지하의 문학 세계를 탐구해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학이 하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억압하고 지배하려면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잠겨들어야 한다. 지배와 억압은 대상을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고, 문학에 대한 이해는 오직 문학의 세계 안으로 침잠할 때 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하는 혁명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지배 권력조차 그 안으로 휘말리고 뒤엉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시와 정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유신 독재 시대 문학의 혁명적인 것이었다. 굳이 알랭 바디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사랑과 혁명은 ‘사건’이며,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문학도 ‘사건’이 된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무르익을 때, 그 자체로 1970년대 문학의 ‘사건’이기도 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이 등장한다. 핵심은 이 연작소설집이 이웃 사랑을 미학적으로 실천한 텍스트라는 것인데, 저자는 그 단초를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견한다. 연작소설의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한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를 마치고 그을음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그을음이 전혀 묻지 않은 깨끗한 얼굴의 아이 중 누가 얼굴을 씻을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문답을 주고받는 교사와 학생들의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 문제가 곧 뫼비우스의 띠이면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세계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함을 암시하며 끝맺는다. 저자는 이 뫼비우스의 띠 수수께끼를 지젝(Slavoj Žižek)의 ‘시차적 관점(parallax view)’, 즉 축소 불가능한 간극을 잇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닌, “간극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189) 안과 밖은 결코 만날 수 없지만, 뫼비우스 띠에서는 그 안과 밖이 그대로 안쪽 면이면서 바깥 쪽 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차원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당연히 그을음이 묻은 아이가 세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교사는 얼굴에 그을음이 묻지 않은 아이가 친구의 새까만 얼굴을 보고 얼굴을 씻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답한다. 이윽고 다른 학생이 그와 같이 대답하자, 다시 교사는 동일하게 굴뚝 청소를 한 아이들 중 한 아이의 얼굴은 깨끗하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더러운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해답 없음이 곧 안과 밖의 구분 없는 뫼비우스의 띠의 관점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굴뚝청소부 수수께끼와 뫼비우스의 띠라는 위상수학적 개념과 개발독재시대의 소설에 대한 해석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마치 뫼비우스의 띠를 만들 듯, 유영주 역시 그의 방법론적 시각을 한 차례 꼬아 지젝에서 케네스 레이너드의 ‘이웃’ 개념으로 비약한다. 사랑(특이성과 차이)과 정치(평등과 동일성)는 마치 뫼비우스 띠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 띠를 한 번 꼬아 연속체로 만드는 “사랑과 정치의 이음매” 지점이 “이웃”이라는 존재라는 것이다.(189) 저자는 이로부터 조세희 소설의 미학인 ‘이웃 사랑’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난쏘공』을 난해한 모더니즘적 텍스트처럼 보이게 하고, 그래서 리얼리즘론자들에게 지식인적인 환상 소설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던 몽타주 기법을 ‘이웃 사랑’의 주된 미적 원리로 파악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1970년대 문학은 “당신은 당신의 이웃을 사랑하십니까”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박태순의 ‘외촌동 사람들 연작’과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소설 작가로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최인호 역시 일찍이 「미개인」(1971)에서 한센병 환자의 아이들과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라면 첫 손가락에 꼽힐 작가는 단연코 이문구일 것이다. 『관촌수필』(1972)에서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이문구의 이채로움이 빛을 발하며, 유영주가 말하는 ‘인접성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미학화한 이상적인 이웃 공동체가 그려진다. 저자는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들이 좌익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던 개인사를 바탕에 둘 때, 이문구의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그저 단순히 전통사회의 풍요로웠던 이웃 공동체에 대한 환상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전쟁 전후의 무수히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들 중 많은 경우는 이웃들 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크게는 계급과 종교를 바탕으로 나뉜 좌와 우의 정치적 이념을 따라 서로 갈등을 빚었고, 심한 경우 학살로 이어졌다. 이러한 한국 현대사의 맥락 속에서 이문구 소설 속 이웃은 “이념적 명명의 대안”으로 제시되며 특별한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142) 저자는 조세희와 이문구의 소설을 ‘이웃 사랑의 미학’과 ‘인접성의 윤리’로 의미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러한 문학의 미학과 윤리가 박정희 독재 체제의 산업화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음을 주장한다. 그 힘이, 플라톤 이래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문학을 정치와 만나게 하고, 동시에 어떤 정치를 극복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자의 의도대로 1970년대 문학은, 시(문학)와 정치와 사랑이 ‘인접성’의 원리를 따라 이어지지만 그 간극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현실을 넘어서는 차원의 위상을 형성하는 상호 연결과 긴장 관계로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3. 마지막 문사(文士)의 시대 그러나 이 책의 부제인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에서와 같이, 한국 문학이 저항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시대는 곧 저문다. 대체로 그것은 1990년대, 그 유명한,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한 때와 겹친다. 고진은 1970년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김종철과 만났을 때 왜 문학을 그만두고 《녹색평론》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알려진 대로 김종철은 1991년 《녹색평론》 창간과 함께 문단을 떠나 생태주의 운동에 몸담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했던 것은 문학이 정치적 문제에서 개인적 문제까지 온갖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모순조차도 떠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언제부터인가 문학이 협소한 범위로 한정되어 버렸다, 그런 것이 문학이라면 내게는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답했다.3) 이것은 유신 독재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던 ‘창비’ 계열 문학비평가의 고백이다.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이 포착하고 있는 문학의 사회 참여(앙가주망)와 정치적 실천, 특별히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시인과 소설가 들이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우는 역사는, 이제 정말로 역사가 되었다. 물론 그러한 역사가 한국에서 1970년대 유신 독재 정권 시대라는 국면에 가능했고 정점에 도달했던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국가였던 후진국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설 때 그에 맞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지식인들뿐이었던 세계사의 보편적인 패턴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장르가 소설(novel)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한국 문학사에서 ‘소설의 시대’라고 불렸던 1970년대의 특수한 문학사적 맥락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의 논의가 작가를 앞세우면서 참조하는 세 가지 문학 개념 중 첫 번째인 ‘리테로크라시(literocracy)’라는 동아시아의 문치주의적인 문학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 문학사로 한정해 본다면 그것의 유구한 역사는 시인과 소설가가 독립운동 투사가 되곤 했던 식민지 시대 ‘문사’ 개념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사의 시대는, 이 책에서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실로 1970년대 문학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강력하고 화려하게 빛을 발한 뒤, 끝났다.4) 이 책의 첫 장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김지하의 시 「진리」에서 시인은 “바람 속이 내 집”이라고 노래하고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장식하는 황석영은 그가 2017년 출간했던 문학적 자서전 『수인』에서 방북사건으로 떠돌던 시절을 회고하며 그때의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문학이라는 집이었다”라고 고백한다.5) 한때 바람 속을 집으로 삼아 온갖 경계를 넘나들며 활보했던 문사들에게 문학의 지경이란 없었다. 김종철이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문학은 “온갖 것을 떠맡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학을 떠났거나, 문학이라는 집 안으로 돌아간다. 이제 문학은, 그리고 작가는 무엇을 하는가. 유영주는 결론에서 박민규 소설의 저항성을 김지하에 견주며, 문학은, 그리고 작가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박민규는 그의 대표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표절 사건 이후로 그럴 수 있는 정당성을 상실했다. 이것은 분명 징후이기도 하다.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예감하게 했던 작가 중 한 명인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문사의 정체성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완벽하게 대체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지위마저 위태롭다. 최근 작가들의 소설 속 자기 재현은 어떠한가. 그들은 비정규직 중에서도 고용안정성과 소득이 가장 낮은 축에 들며, ‘프리랜서’라서 정부가 청년층에 제공하는 대출 상품에도 부적합해 은행 창구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으로 소설가를 재현한다(박서련, 「A Queen Sized Hole」,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지방 변두리의 3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자기 집이 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마오쩌둥의 참새들처럼 어디에도 내려앉을 수 없어 지쳐 떨어져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 오해하지 말라. 이것은 어떤 가치 판단도, 비판도, 자조도 아닌, 현상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이제 유신 독재의 겨울 공화국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눈보라 속에서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1) 양성우, 『겨울공화국』, 화다, 1984, 18면. 2) 유영주, 이형진·정기인 역, 『겨울 공화국의 작가들: 박정희 시대 한국문학과 저항』, 소명출판, 2023, 92면. 이후 이 책 인용 시 본문에 쪽수로 표기. 3)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 『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 2006, 49면. 4) 어떤 이들은 1980년대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정치의 관계라면 그것은 198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1980년대에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했던 반지식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1991년 5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김지하의 충격적인 발언과 그것을 둘러싼 반응 그 이면에는 1980년대를 거치며 그가 더 이상 1970년대와 같은 문사의 지위에 서 있을 수 없었던 상황이 엄연히 자리한다고 볼 수도 있다. 5) 황석영, 『수인』 1, 문학동네, 2017, 365면.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