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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창작과비평 2024년 가을호(제205호)
[문학평론]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수많은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에서 시작되었다
고(故) 신경림 시인을 추모하며
1. 1970년대 민중시와 『농무』의 발견
창비시선 500번을 기념하는 특별시선집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신경림 외 지음, 창비 2024)이 올해 3월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 제목은 신경림의 시 「그 여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사람의 울음이
온 마을에 울음을 불러오고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고을에 노래를 몰고 왔다
구름을 몰고 오고
바람과 비를 몰고 왔다
―「그 여름」(『농무』) 부분
온 거리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한 사람의 울음’과 ‘한 사람의 노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노래는 구름과 바람과 비를 몰고 오면서 사람뿐 아니라 천지만물에 가닿았다. ‘울음’과 ‘노래’가 지닌 이러한 확장력을 떠올려볼 때, 신경림의 『농무』(창작과비평사 1975)가 50년을 이어온 창비시선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1970년대 중반은 『창작과비평』이 시민문학론에서 민족문학론으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민중시의 새로운 모델을 필요로 하던 시기였다. 『농무』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시집 『농무』의 완성을 “민중적 경사”라고 말하며 “그의 많은 작품들은 리얼리스트의 단편소설과도 같은 정확한 묘사와 압축된 사연들을 담고 있는 동시에 민요를 방불케 하는 친숙한 가락을 띠기도”1) 한다고 상찬했다. 1960년대 김수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그가 “민중이 잘 알 수 없는 ‘난해한’ 문학”2)을 경계하며 난해하지도 저속하지도 않은 시의 미덕을 신경림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1974년 『농무』가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이 된 것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염무웅은 신경림 시의 민중성이 ‘체험적 현실’에서 나왔음에 주목하고, “자기 현실과의 정직하고도 치열한 대결을 통해 위장하거나 은폐되지 않은 민중 자신의 목소리가 긴밀한 시적 형상을 획득”3)했다고 보았다. 신경림은 이처럼 농촌의 현실을 구체적이고 핍진한 언어로 그려낸 시뿐 아니라 「농촌현실과 농민문학」 「문학과 민중」 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농민문학론을 개진하기도 했다. 1970, 80년대는 신경림을 비롯해 이성부, 조태일, 김지하, 정희성, 이시영, 김준태, 김남주 등이 민중시의 새로운 방향성을 만들어나간 시기였다. 이러한 흐름의 첫 물꼬를 튼 시집이 바로 신경림의 『농무』였다.
2. 노래와 이야기, 시의 씨줄과 날줄
염무웅의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는 『농무』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이 시집의 역사적 위치를 한층 넓은 원근법 속에서 읽어낸 글이다. 그는 한국시가 지닌 민중성의 사회사적 근거와 맥락을 밝히면서 신경림 시의 독특한 화법과 시언어의 조직원리를 분석한다. 먼저 「그날」에 대해서는 “고도의 정치적 비판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화자가 직접 드러나지 않은 채 “순차적으로 카메라 앵글을 돌리는 장면화(場面化)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미장센 구성에 성공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한행을 하나의 율격 단위로 할 때 3음보의 율격을 지닌 「그날」과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경칩」이 율격이나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만, “엄밀하게 계산되고 통제되는 구심적 조직”4)을 지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은 농촌이라는 소재와 민중성이라는 주제, 인물의 정동을 중심으로 『농무』를 이해해온 기존의 관점을 시의 구성원리나 재현방식 등으로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유종호는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에서 신경림 단시의 특징을 “서정적인 주조에 서경(敍景)이 추가되고 그 속에 서사(敍事)적 충동을 내장하고 있”5)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경림의 시적 성취가 서정성과 서사성의 균형에서 비롯되었다며 선행 시편들의 전통 속에서 『농무』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여했다. 『농무』의 시들이 생활의 실감과 시어의 평면성으로 1950년대 모더니즘 계열 시편의 난해성을 산뜻하게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삶에 대한 결곡한 정감과 간결한 서경을 통해 추상적 구호와 격문에 가까운 현실주의 생활 시편의 전통 역시 넘어섰다는 것이다.
신경림의 시에서는 서정과 서사, 노래와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이며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특히 신경림의 전기시에서 ‘이야기’의 산문성을 견제해내는 ‘노래’의 형식이란 주로 ‘민요’의 계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요적 정서’와 ‘정형(定型)에의 의지’가 긍정적 효과만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염무웅의 지적처럼 “민요는 김소월에게 있어 그러하듯이 신경림의 문학에 있어서도 창조성의 발현을 구속하는 억압이자 모국어가 지닌 가능성의 최대치로 인도하는 통로인 양날의 칼”6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음수율과 음보율, 행의 배치 등이 규칙적으로 분절된 시보다는 규칙성을 일부 허물거나 시행을 어긋나게 배치한 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묵내기 화투를 치고
내일은 장날. 장꾼들은 왁자지껄
주막집 뜰에서 눈을 턴다.
들과 산은 온통 새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헐거나.
술에라도 취해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겨울밤은 길어 묵을 먹고.
술을 마시고 물세 시비를 하고
색시 젓갈 장단에 유행가를 부르고
이발소집 신랑을 다루러
보리밭을 질러가면 세상은 온통
하얗구나. 눈이여 쌓여
지붕을 덮어다오 우리를 파묻어다오.
오종대 뒤에 치마를 둘러쓰고
숨은 저 계집애들한테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우리의
괴로움을 아는 것은 우리뿐.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겨울밤」(『농무』) 전문
『농무』 첫머리에 있는 이 시는 ‘겨울밤’과 ‘새하얀 눈’을 대비하면서 농민들의 체념과 울분을 실감있게 전달하고 있다. ‘어떡헐거나’ ‘취해볼거나’ ‘맡아볼거나’ ‘쳐볼거나’ ‘먹여볼거나’ 등 반복되는 종결어미는 각운의 역할을 대신하며 ‘우리’의 정서를 리드미컬하게 변주해낸다. 시인은 이러한 종결어미의 반복으로 읽기의 유창성을 만들어내는 한편, 중간중간에 시행을 일반적인 호흡과 어긋나게 배치함으로써 의미를 낯설게 하거나 정서적 긴장감을 조성한다. 3행과 4행, 5행과 6행, 9행과 10행, 11행과 12행, 19행과 20행, 20행과 21행, 24행과 25행 사이에 나타난 주어부와 술어부 또는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행갈이가 그런 예들이다.
마침표의 잦은 사용이나 단어의 도치 등도 행과 행 사이에 단속적 흐름을 만들어낸다. 단어나 시행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앙장브망(enjambement) 기법은 「겨울밤」 외에도 「시골 큰집」 「원격지」 「씨름」 「산1번지」 「이 두 개의 눈은」 「1950년의 총살」 「장마 뒤」 「산읍일지」 「산읍기행」 「갈대」 「묘비」 「심야」 「유아」 「사화산·그 산정에서」 「추방」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누군가」 등 상당히 많은 시들에 나타난다. 이것은 김수영의 후기시에서 연의 길이를 균질하게 하는 대신 앙장브망을 통해 시행 사이의 불규칙성을 강화하던 것7)과 유사한 방식이다. 신경림 역시 행과 연을 단위로 리듬의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탄력적으로 조율하고 변주함으로써 정서나 의미를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이러한 모더니스트적 면모는 신경림을 단순한 민중시인, 민요시인으로 이해하는 것을 재고하게 한다. 1973년에 이루어진 한 좌담에서 백낙청은 신경림의 시가 서사성과 지적 콘트롤이 강하고 현대적 언어감각을 지녔다는 점에서 신동엽보다는 김수영과 친연성이 강하다고 말한다.8)
시인 자신도 나중에에는 “민요와의 접목은 내 시를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고 “내가 민요에 집착한 80년대 전 기간이 내게는 시 쓰기가 가장 어렵고 지루한 시절”9)이었다고 회고했다. 신경림 시에서 민요 가락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은 『새재』(창작과비평사 1979)와 『달 넘세』(창작과비평사 1985), 그리고 장시집 『남한강』(창작과비평사 1987)에서다. 『민요 기행』 1, 2권(한길사 1985, 1989)이 나온 것도 이 세 시집이 출간된 시기와 거의 겹친다. 이 무렵 신경림은 민요를 찾아 채록하면서 전통적 민예 양식의 시적 가능성을 탐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집대성된 『남한강』에서 시인은 서정적 단시의 서사성을 한편의 장편서사시로 확장하면서 민요의 리듬을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신경림이 민요적 정서나 형식에 대한 중압감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기행시집 『길』(창작과비평사 1990)을 펴낸 이후였다. 『길』까지는 여전히 「정선아리랑」 「산유화가」 등 민요를 제목으로 삼은 시가 보이고, 민요 기행에서 만난 노래꾼을 포함해 다양한 인물과 장소를 담고 있다. 그러나 민요적 후렴구의 기계적 반복이나 정형화된 리듬의 강박으로부터는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인물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길』의 거의 모든 시에 붙어 있는 부제들은 다양한 장소성을 보여준다. 『신경림 시전집』 1권은 『길』로 끝나고 2권은 『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 1993)으로 시작된다. 이 두 시집의 제목처럼 신경림의 후기시는 ‘길’ 위에서, ‘쓰러진 자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3. 길 위에서 부르는 노래와 시의 장소성
2000년대 이후 신경림에 관한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장소성’이다.10) 『농무』의 장소성이 농촌, 장터, 공사장, 폐광 등을 중심으로 한다면, 시인이 서울로 이주한 뒤 펴낸 시집들에서는 산동네, 수몰지역, 휴전선 등의 장소성이 두드러진다. 『쓰러진 자의 꿈』 이후로는 특정 장소를 부제로 밝혀둔 기행 시편이 많고, 부제가 없더라도 여행 중에 만난 풍경이나 사람의 비중이 커진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신경림의 전기시가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향(離鄕)’과 공동체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면, 후기시는 지방 또는 해외로의 ‘기행(紀행)’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서 힘을 얻으면서,
진흙길 가시밭길 마구 밟으면서.
―「나의 신발이」(『낙타』) 부분
신경림의 기행시는 단순한 유랑이나 관광의 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그에게 떠남이란 익숙한 것을 잊고 낯선 것을 찾아나서는 ‘탐구의 행위’다. 이와 동시에 상류를 향해 가는 연어처럼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나의 신발이」) 본원적인 시간과 장소를 되찾아 나서는 ‘회귀의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신경림의 기행시는 미셸 푸꼬(Michel Foucault)가 말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지향한다. 푸꼬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를 ‘헤테로토피아’라고 불렀다. 없는(u) 장소(topia)라는 뜻의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헤테로토피아를 제시한 것이다. 유토피아가 실재하지는 않지만 균질한 언어와 질서를 지닌 상상적 공간이라면, 반대의(hetero) 장소(topia)라는 뜻의 헤테로토피아는 모호하고 혼란스럽고 비균질적이지만 실재하는 공간이다. 그런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는 일상의 배치와는 다른 ‘바깥의 공간’이자 현실을 전복하는 ‘반(反)공간’이다.11) 엄경희는 “산업화로 인한 농촌붕괴를 ‘경관훼손’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고향의 장소성에 내재된 헤테로토피아적 전망을 아이들의 장소점유방식을 통해”12) 분석했다.
『농무』부터 『쓰러진 자의 꿈』까지는 기행의 장소가 주로 국내에 한정되었다면,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1998)에서는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의 기행 시편들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반추한다. 『뿔』(창작과비평사 2002)『낙타』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에서는 그의 발길이 아시아뿐 아니라 몽골, 네팔, 튀르키예를 넘어 프랑스, 미국, 콜롬비아 등 세계 곳곳으로 향한다. 연보를 살펴보니, 신경림은 1993년(58세)에야 출국금지가 풀려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시집이 프랑스어판, 영어판, 독일어판 등으로 번역 출간되면서 현지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세계화의 현장을 폭넓게 목도하면서도 그는 줄곧 한국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올린다.
첫날은 날뛰는 미국 사람들이 무서워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연 지 얼마 안된다는
중동인이 경영하는 레스토랑에서 양고기로 점심을 먹고,
둘째날은 자동차 산업의 몰락으로 유령도시가 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
키가 큰 젊은 흑인을 만나
하이델베르크 프로젝트를 듣고,
(…)
넷째날은 한국 절을 찾아가
부처님 앞에 예불을 드리고, 선거에서 대승한
부시의 오만한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서,
침방울을 튀기며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
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와 한나절을 동행하면서,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
우리나라 여중생 얘기를 하고.
―「미국기행」(『낙타』) 부분
미국 미시건을 여행 중인 화자는 첫째날부터 넷째날까지의 여정을 언급하면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들려준다. 특히 둘째날 만난 “디트로이트 살리기 운동을 펼치는/키가 큰 젊은 흑인”과 넷째날 만난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는/한국서 군복무를 마쳤다는 젊은이”는 화자와 경계인으로서의 위치를 공유하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는 “장갑차에 깔려죽은 어린/우리나라 여중생”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부시의 압도적 승리와 이라크전쟁 등 세계사의 착잡한 위기상황 또한 시인의 여정에 기입되어 있다. 이때 화자는 세계사의 중심도 주변도 아닌 ‘반(半)주변인’13)의 위치에 서 있다.
신경림의 기행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주로 머무는 곳은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만들어낸 균질화된 공간이나 화려한 장관이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천수만켤레 신발들이 쌓여 웅성웅성 떠들고 있”(「신발들」, 『사진관집 이층』)는 소리를 듣거나, 캄보디아에서 “함지박 배를 저어 관광선을 따라오며 원 달러 하고 내미는 소년의 손”(「위대한 꿈」, 『사진관집 이층』)이 시인의 눈과 마음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힌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제국주의자들이 버리고 도망간/흉측한 장갑차”를 보며 “호주머니 속에서/일달러짜리 지폐를 거머쥔/내 손”(「전쟁박물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코카 비치에서 휴양객들을 실어 나르고 “달러를 받아쥐는/씨클로꾼들의/땀에 절은 야윈 손”(「코카 비치」,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나 무력하게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런가 하면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진에서 산비탈에 달라붙은 움막집들과 케이블카로 그곳을 오르내리는 초췌한 사람들을 보며 화자가 떠올리는 것은 “물지게를 지고 비탈을 올라오던” “아내의 맨발”(「누군가 보고 있었을까, 아내의 맨발을」, 『낙타』)이다. 이처럼 반주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과 주변부의 삶이야말로 신경림이 『농무』 이후로 일관되게 함께해온 가난하고 소외된 존재들의 것이다. 시에 포착된 주변부와 주변인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공감을 주는 것은 시인이 자신을 그 존재들의 일부로 또는 혈육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먼 나라의 이국적 풍물 앞에서도 한국의 아픈 현실을 떠올리는 시인은 떠남으로써 돌아오고, 잊으려 함으로써 더 생생한 기억에 도달하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
4. 역사공동체에서 생태공동체로
후기시의 출발점인 『쓰러진 자의 꿈』은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 이후 변화된 세계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두연으로 된 단시가 많고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사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의 확장이 이 시집부터 시작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신경림 시에 나타난 생태주의적 인식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평등적 관계성’ ‘자발적 생성과 상호부조’ ‘자유 자연의 지향’ 등을 키워드로 신경림의 생태주의적 사유를 해명한 김동명의 논문은 주목할 만하다.14) 다만, 미국의 사회이론가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적 관점이나 아나키즘 등을 이론적 논거로 삼아 인간의 윤리적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인간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쓰러진 자의 꿈』) 부분
『쓰러진 자의 꿈』의 첫머리에 실린 「길」에서 시인은 사회 변혁의 과정 속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의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이라는 대목에서 그의 시선이 사회나 역사 못지않게 인간 내면을 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내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것은 주로 자연물이다. 이 시집의 시 제목들만 일별해 보아도 냇물, 장미, 비, 파도, 싹, 겨울숲, 홍수, 아카시아, 임진강, 진달래, 진드기, 소백산의 양떼, 초승달, 난장이패랭이꽃, 오랑캐꽃, 별, 가을비, 새벽눈, 홰나무 등 다양한 자연물들로 되어 있다. 이제 자연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인간의 도움 없이도 생태적 질서와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생명의 주체로 등장한다.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를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묵뫼」(『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전문
「묵뫼」에서도 인간의 죽음은 역사적 비극을 환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묵뫼가 피워낸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 그리고 꽃과 열매를 찾아 날아든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티 이 모두가 ‘생태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유기적 관계성 속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농무』에 나타난 역사공동체가 생태공동체의 발견으로 이어진 결과다. 이러한 변화는 신경림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한국시 전체에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1980년대가 노동시·농민시·교육시 등 계층과 이념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집단적 발화가 활발하게 제기된 시대였다면, 1990년대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이념에서 감각으로 중심이 옮겨오면서 사회적 이상이나 공동체적 기반은 약화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런 변화는 단순히 공동체의 축소나 단절이라기보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모색의 계기”15)였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사진관집 이층』 등 후기로 갈수록 환경오염의 폐해를 언급하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들이나 생태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시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
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
햇살에 빛나던 바위는 누런 때로 덮이고
우리들 어린 꿈으로 아롱졌던 길은
힘겹게 고개에 걸려 처져 있다.
썩은 실개천에서 그래도 아이들은
등 굽은 고기를 건져올리고
늙은이들은 소줏집에 모여 기침과 함께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에 병든 돼지고기를 싸고 있다.
(…)
우리는 안다, 썩어가고 있는 곳이
내 나라만이 아니라는 것을.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에도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산이 섞여 있고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에서도
눈이 하나뿐인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에서는
목뼈가 없는 아기가 줄이어 태어나고
외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옛날엔 천국이 따로 없다던 남태평양의 섬에서도
에이즈와 암으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부분
“봄이 되어도 꽃이 붉지를 않고/비를 맞고도 풀이 싱싱하지를 않다”라는 도입부는 자연의 생기나 아름다움이 예전 같지 않고 순환적 질서 또한 깨졌음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시행에서도 “썩은 실개천” “등 굽은 고기” “기침” “농약으로 얼룩진 상추” “병든 돼지고기” “화약냄새” “가스냄새” 등 생활 깊숙이 배어든 환경오염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로 시작하는 4연에 이르면, 썩어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땅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얼음벌판에 내리는 눈” “아프리카 깊은 원시림 외진 강” “미시시피 강가의 한 마을” “남태평양의 섬” 등 세계의 극지까지 미치고 있음을 화자는 환기한다. 뒤이어서 지구를 언제 “잿더미로 만들지 모를 핵”의 위험을 “어리석은 불장난”에 비유하며 비판하기도 한다. 환경오염이나 기후위기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파국을 예감하면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지구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땅 내 나라, 아니 온 세계가 이제
단숨에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릴
마침내 그 벼랑에까지 와 서 있다.
―「이제 이 땅은 썩어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
5. 다시, 떠도는 자의 노래가 되어
들머리에서 인용한 「그 여름」은 “한 사람의 죽음이/온 나라에 죽음을 불러왔지만”이라는 구절로 끝난다. 이 역접의 마지막 문장은 완료되지 않았기에 다시 첫머리의 “한 사람의 울음”으로 연결되며 삶과 죽음의 순환 앞에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지난여름 우리는 ‘신경림’이라는 “한 사람의 죽음”을 겪었다. 2024년 5월 22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시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문학적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의 아버지’를 잃은 듯 애도했다. 추모사를 읽는 이들은 그가 한국시단의 거목이었지만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겸손함과 솔직함으로 누구나 평등하게 대해주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평생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편에서 소박한 생활감정을 노래하면서도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와 미학적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시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쓰러지고 깨지는 것들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차피 시는 괴롭고 슬픈 자들, 쓰러지고 짓밟히는 것들의 동무일진대 이것이 크게 억울할 것은 없다. 최근 나는 시는 궁극적으로 자기탐구요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지만, 쓰러지는 자들, 짓밟히는 것들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고 흩어지는 것들, 깨어지는 것들을 다독거리는 일, 이 또한 내 시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16)
『쓰러진 자의 꿈』 후기를 읽어보면, 신경림의 시에 짓밟히고 고통받는 존재들의 울음소리가 왜 그토록 끊이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신경림 시인은 평생을 ‘우는 자’ ‘떠도는 자’로서 살았다. 그의 울음과 발길은 수많은 노래를 낳았고, 온 마을과 온 거리에 다른 노래들을 불러왔다. 신경림은 70년에 가까운 시력(詩歷)으로 한국 현대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 곡진한 노래의 굽이와 갈피를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다룰 수는 없지만, 길 위에 남아 있는 무수한 시의 발자국들을 떠올려본다. 그것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선 자가 발견한 기록이자, 세상 저편에 놓고 온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노래였다.
시인은 자신의 예언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떠도는 자의 노래」, 『뿔』) 모르겠다. 애통하게도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신경림의 시와 정신을 기억하는 한 우리는 그가 사랑한 장소들, 좁은 골목이나 저잣거리, 쓸쓸한 나룻가에서 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시인은 ‘떠도는 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기에.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떠도는 자의 노래」 전문
- 1) 백낙청 「발문」, 신경림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114~15면.
- 2) 백낙청 「문학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창작과비평』 1973년 여름호, 456면.
- 3) 염무웅 「민중의 삶, 민족의 노래」, 구중서·백낙청·염무웅 엮음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비평사 1995, 72면.
- 4) 염무웅 해설 「무엇이 민중성의 시적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가」, 『신경림 시전집』 1권, 창비 2004, 423~24, 426면.
- 5) 유종호 「서사 충동의 서정적 탐구」, 『신경림 문학의 세계』, 57면.
- 6) 염무웅, 앞의 글 428면.
- 7) 김수영의 전기시와 후기시에 나타난 리듬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는 졸고 「김수영 시의 리듬구조에 나타난 행과 연의 문제」, 『현대문학의 연구』 제37호, 2009 참조.
- 8) 김우창·김종길·백낙청 좌담 「시집 『농무』의 세계와 한국시의 방향」, 『백낙청 회화록』 1권, 창비 2007, 74~75면.
- 9) 신경림 산문 「나는 왜 시를 쓰는가」, 『낙타』, 창비 2008, 125면.
- 10) 신경림 시의 장소성에 대한 연구로는 송지선 「신경림의 『농무』에 나타난 장소 연구」, 『국어문학』 제51집, 2011; 강정구·김종회 「문학지리학으로 읽어본 1980년대 신경림 시의 장소」, 『어문학』 제117집, 2012; 박순희·민병욱 「신경림 시의 장소 연구」, 『배달말』 제54호, 2014;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장소 재현의 로컬리티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64집, 2014; 고재봉 「신경림의 「농무」 계열 시에 나타난 장소성과 축제의 의미」, 『문학치료연구』 제49집, 2018; 조효주 「신경림 시의 장소 상실과 현실인식 연구」, 『한민족어문학』 제87호, 2020; 조효주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에 나타나는 장소와 장소상실 연구」, 『현대문학이론연구』 제76집, 2019; 김미라 「산업화 시대의 이주와 새로운 거주 장소로서의 도시」, 『한국근대문학연구』 제25권 제1호, 2024 등이 있다.
- 11)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참조.
- 12) 엄경희 「장소 점유와 헤테로토피아: 신경림 시의 경우」, 『현대시와 헤테로토피아』, 보고사 2022, 166면.
- 13) 송지선 「신경림 시에 나타난 로컬의 혼종성과 탈중심성 연구」,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2집, 2016, 251면 참조.
- 14) 김동명 「신경림 시에 나타난 사회생태주의의 특성 연구」, 『동북아 문화연구』 제50집, 2017.
- 15) 졸저 「현대시와 공동체」, 『문명의 바깥으로』, 창비 2023, 275면.
- 16) 신경림 ‘시집 뒤에’, 『쓰러진 자의 꿈』, 10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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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1) : ‘소유’와 ‘주권적 자기’를 질문하며 1. 다시 ‘자기’를 질문하며 일인칭 글쓰기, 에세이, 자문화기술지, 당사자 서사 등 ‘자기’를 중심에 놓는 글쓰기가 주목받아 온지 여러해를 지나고 있고, 최근 또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이어질 듯하다.2) 이 글은 그러한 글쓰기의 핵심에 놓일 자기를 다시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커먼즈’(commons)로서의 문학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 한다. 이때 얼핏 자기와 커먼즈라는 말 사이의 아득한 이격(처럼 여겨지는 것)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자기라는 말은 ‘나’ ‘1인칭’ 같은 단수적 계열어나 차이를 통해 이해되곤 하고, 커먼즈란 ‘공통장’ ‘공유지’ 같은 번역어가 암시하듯 복수적이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루쏘의 『고백록』(1770)이 상기시키듯 자신을 신과 독대하는 개인으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에서 출발한 근대적 존재 인식의 표현양식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젠더 및 공/사 역학에 따른 위계가 작동해왔음이 이제 대중적으로도 널리 환기되었고, 전통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거나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의 글쓰기와 그 수행적 힘이 각별히 조명3)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 에세이물의 당사자 서사가 규범 바깥의 여성 정체성을 실험하며 여성주의적 급진성을 갖는다는 논의4)에서와 같이, 글쓰기의 수행적 힘은 다양한 여성 및 소수자의 가시화와 연동되었다. 한편, 에세이적 글쓰기 일반을 “자아를 일종의 자산으로 생산해내는 장치” 측면에서 조망하고, 이러한 글쓰기의 스펙트럼과 읽기-쓰기의 복잡한 역학 및 형식 문제를 분석하는 논의도 제기된다. 오늘날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자기진술”이 “주체에 대한 진실을 생산해내는 권력을 스스로(재)생산”하는 측면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한영인의 글은 특히 신자유주의 통치술과 개인의 관계를 비롯하여 개인과 자아 등을 둘러싼 복잡함의 근간을 짐작케 한다. 한영인의 논의에서 파생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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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자기’는 여전히 개인, 차이, 구획, 정체성, 소유 같은 관념 사이를 공회전하는 측면이 있어왔다. 물론 이것이 현행 세계 속 ‘나’의 지배적 조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떤 정체성들의 소유자(개인)로 식별되며 인구로 셈해진다. 그러니 정체성을 둘러싼 시민권 투쟁의 즉각적 장소 역시 바로 여기일 수밖에 없다. 정체성에서 출발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를 향해야 한다는 이야기가9)종종 지난하게 여겨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요컨대 지금 ‘자기’를 둘러싼 이야기와 곤경이 동시에 부상하는 상황 앞에서 ‘나-1인칭-개인-소유’ 등의 계열어 속 자기표상은 불충분하거나 종종 모순적이다. 2. 나는 나를 소유할 수 있는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그 정체를 가늠하는 감각은 오늘날 존재 인식의 근간을 이룬다. 이때 ‘무엇’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글에서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소유’ 개념이다. 오늘날 개인 및 개인주의의 근간에 소유의 원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소유적 개인주의’라는 말이 잘 드러내준다. 우선 짚어둘 것은, 여기에서의 소유란 유무형의 재화가 아니라 본래 인간 ‘신체’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체, 재능의 고유한 소유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존재로 간주되었고, 이때의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념형으로서의 능동적·자율적 개인에 다름 아니다. 자유는 곧 “소유권을 의미”했고, 그렇기에 소유권의 반대 개념은 탈소유·무소유가 아니라 “타인의 의미지에 대한 종속”으로 간주되었다.10) 의존을 죄악시하고 기피하며 자립한 개인의 능력을 상찬하는 오늘날 지배적 심상의 기원도 여기에서 잠시 짐작해볼 수 있다. 요컨대 소유적 개인주의에서 ‘소유적’이라는 말은 상품과의 관계 이전에 우선은 우리 신체, 그리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대한 소유를 의미했다. 우리의 신체란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재산”이었고 “완전한 자유의 기준은 자기 노동에 대한 소유권의 보유이며, 그 보유의 조건은 곧 물질적 재산의 소유”11)였다. 이는 강조건대 소유가 곧 내가 나 자신과 맺는 관계를 기초지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서 ‘자아’ 역시 신체에 준거한 획정이 필요해진다. 즉 소유적 개인주의는 자아를 둘러싼 모순이나 모호함을 봉합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체에 근거한 자아 역시 소유의 대상으로 간주되려면 먼저 일종의 객체가 되어야 한다. 신체를 누가 –다시 말해서 내가 – 소유하느냐의 문제 앞에서 자아는 하나의 구획된 것으로, 그리고 관리 가능한 일종의 통합된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적절한 자아’를 가진 ‘주체’가 재산의 소유자로서 행동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 즉, 통상 남성·이성애자·백인·비장애인 등으로 간주되어왔음은 강조할 것도 없다. 소유에 기반한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특히 2010년대 이후 세계의 여러 변화 앞에서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 같다.12) 이 세계의 인종·성·장애 여부 등을 둘러싼 정상성 각본에 대해서는 이제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소유’ 개념을 매개로 한 각본이라는 점에 대해 지금 다시 각별히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셈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곧 오늘날 지배적인 ‘주권적인 자아’(sovereign self)13)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소수자의 정치적 수행성 논의에서야말로 강한 전제로 놓여 있었음을 기억해두고 싶다. 예컨대 퀴어 이론가이자 정치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2010년대 이후 논의에서 특히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자아 개념을 비판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는 관점을 두드러지게 드러내온 점이 의미심장하다. 물론 “주권적, 유아독존적 자아 개념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자아란 이미 관계적인 개념”이라는 그녀의 전제는 오늘날 상호의존적 관계나 타자윤리가 요청되는 자리에서 자주 참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지닌 정치성을 좀더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녀의 주장이 “소유적 개인주의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서 “소유의 논리 바깥”14)을 고민하며 제출되어 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그 맥락이 드러나지 않으면서 논해지는 관계성이나 타자 윤리는, 자유주의 휴머니즘과 그리 충돌하지 않는다. 오늘날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전제하는 당사자 논의의 곤경에도 근본적으로는 다른방식의 소유 혹은 (개인적) 소유 바깥이 상상되지 못하는 감각이 놓여 있는지 모른다. 동일성(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차이의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에 대한 오늘날의 많은 논의가 있다. 그런데 그 현장마다 좀더 원리적으로 환기해야 할 대목은 “서로가 서로에게 현전하기 위해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자기 박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상대에게 넘겨주는 행위”15) 쪽이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내어주는 일 없이 타인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본성을 제어하도록 하는 도덕이나 의무가 아니며, 우리는 본래 소유 이전의 존재라는 것. 요컨대 ‘자기’에 대한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오늘날 제2의 자연이 된 소유의 관념보다 더 오래된 관계적 존재 양태를 발견하고 긍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유를 근본적으로 질문하지 않는 관계성이나 커먼즈 논의는 다소 공허한 이상 혹은 도덕적 당위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하지만 소유보다 더 근본적이고 오래된 존재의 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할 때, 관계성의 사유는 설득 문제가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필연임이 밝혀진다. 이에 대해 한 편의 소설을 경유하여 좀더 생각해본다. 3. 나를 쓰는 일은 어떻게 너를 쓰는 일이 되는가 : 이주혜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속 ‘일기’에 대해 이주혜의 장편소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창비 2023. 이하 이 책에서 인용시 면수만 표기) 속 주인공은 불안, 공황 등으로 치료받는 50대 여성이다. 그는 현재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받은 남편과 가족의 위기로 고통받고 있다. 의사는 치료의 한 방편으로 일기 쓰기를 권하고, 주인공은 어느 글쓰기 교습소의 수업에 참여해 일기를 써나가며 그것을 타인들과 공유한다. 소설의 중요한 장치인 일기는, 일차적으로 의사의 권유를 통해 자기치유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런 설정은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을 회복하며 스스로를 자기 삶의 주인(소유자)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최근 많은 자기 서사가 품고 있는 글쓰기의 수행성과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서사화된 듯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에 대한 절반의 독해다. 주인공의 일기 안으로 좀더 들어가보자. 소설 속 일기는 주인공의 유년을 회고하는 장치다. 회고되는 시간은 1979년 겨울부터 1980년 초여름이다. 이 시간이 암시하는 바를 한국의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의미를 전하는 것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다. 일기 속 사건이나 존재는 명료하게 요약하기 어렵다. 어린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이른바 시대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썩 구별되지 않게 그려진다. 예컨대 한국 현대사의 격변을 암시하는 것들은 아이들을 재우고 어른들끼리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함과 불안으로 묘사된다. 비상계엄령, 데모 등과 같은 시대어는 주인공의 사사로운 일상에 비해 배경으로만 놓여 있다. 하지만 직접 의미화하는 것 이상으로 배경의 구속력은 강하게 전달된다. 이런 효과가 주인공의 일기 속 기록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우선 확인해둔다. 일기 속 사건과 사건, 장면과 장면 사이는 환유적으로 연결되며 궁극적 의미는 자꾸 미끄러진다. 회고되는 기억도 불안정하다. 아빠의 실종, 낯선 남자의 등장 및 그의 느닷없는 추방 등은 파편적 이미지로만 제시될 뿐 어떤 구체적 의미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이런 서사적 파편과 공백은 얼핏 소설적 개연성의 결함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우리가 회고에 기반한 성장서사, 기억서사로부터 어떤 익숙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작품들이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임의로 재구성·편집되는 과정을 노련하게 감추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러한 과정을 최대한 지양하고 기억의 파편을 그대로 노출한다. 주인공의 일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오히려 기억이 종종 부정교합을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기억주체로서 자기의 불안정함이다. 통상 일기 속 성찰 대상이 될 ‘자기’는 늘 스스로가 소유하는 객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일기는 그 장르의 핵심인 자기를 문제의 장소로 삼는다. 자기는 애초에 불안정하고 픽션적일 수 있음이 우선 소설에 암시되어 있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윤곽이 불분명하다는 의미다. 어떤 소유의 형상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소설 속 일기는 처음에 분명 자기를 질료 삼는 자기치유의 의미를 부여받았지만, 실제 그 서술과정에서는 연루된 존재와 사건과 세계가 부조된다. 주인공과 친구, 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등은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 얽힘(entanglement)으로 이미지화된다. 불안과 같은 정서도 누군가의 것(소유물)이라기보다 그 모두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것으로 혼연해 있다.16) 예컨대 “시옷에게 비는 살이 부러진 우산과 젖은 신발을 의미했다. 그 축축함과 막막함은 군모를 깊숙이 눌러쓴 어느 군인이 국방색 우비 위로 길쭉한 소총을 끌어안고 집요하게 비를 맞고 있던 장면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끌어들이기도 했다”(26면)는 대목을 보자. 지금 이 대목에서, 어린 시절 주인공이 싫어했던 비의 경험은 ‘젖은 신발’과 ‘소총을 든 어느 군인’을 매개로 겹쳐지며 그녀의 ‘비’에 대한 기억을 이미지화한다. 또한 이것은 지극히 내밀한 몸의 감각에 대한 기억인 동시에 한 시대의 폭력이 단번에 서사적으로 환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사사롭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의 경험이지만, 거기에는 개체적 몸을 관통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이런 서술의 와중에 홀연 인지되는 주인공의 몸의 변용 순간도 흥미롭다. 소설에서 유독 강렬한 정서를 자아내는 대목이다. 주인공은 글쓰기 교실에 서 1980년 “5월의 한복판”(212면)의 일을 낭독하는데, 이는 유년시절 주인공이 품고 있던 비밀이 폭력적으로 억압된 경험에 대한 회고이다. 성인이 된 주인공은 수강생들 앞에서 그 회고의 일기를 읽으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때까지의 서사 속 긴장은 순간 파열한다. 독자는 이 장면을 심리적 문제가 해결되는 단계로 읽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것은 심리적·정서적 문제극복의 과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질적 시공간이 서로 긴장하다가 동시적으로 마주치며 폭발하는 순간에 가깝다. 가령 그녀의 현재 고통은 남편으로 인해 관계가 파괴된 일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어른들에 의해 좌우되는 아이의 일상과 그 배후에 놓인 가부장제 및 친밀한 폭력의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남자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염원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남성 성별을 수행해야 했던 일이다- 이 드러나자 느닷없이 그녀가 내쫓기는 순간은, 한없이 취약했던 존재가 무참히 상처 입는 순간이다. 그것은 정확히 학교에도 거리에도 총을 든 군인들이 있었던 ‘1980년 봄’ 한복판의 일로 기록된다. 지극히 내밀한 자기의 비밀이 시대의 폭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 장면은 정확히 환기시킨다. 그녀의 뒤늦은 울음에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구조를 공유하는 여러 시공간의 폭력이 가로지른다. 이 울음 장면은, 어떤 존재(몸)가 독자적인 개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연루되어 있던 세계와의 교섭 현장이자 그 효과임을 증거하는 것 같다. ‘나’ ‘자기’는 선행되어 있다기보다 사건적으로 출현하고 이내 사라지는 것이다. 이후 주인공의 이야기가 후경화하고 타인들의 이야기가 본격 부상하는 서사 진행도 이를 뒷받침한다. 4부에서는 어린 그녀가 이사한 곳에서 만난 이들, 특히 이웃집 윤수와 그 가족 이야기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전개된다. 윤수와의 우정, 이웃집과의 친교는 1980년대 이른바 기층민의 삶을 엿보게 하는 바가 있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시선은 바깥에 있지 않고 그 삶 안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소설은 점점 현재 그들의 안부를 묻는 이야기로 이행한다. 그녀, 즉 1인칭 주인공 ‘나’의 이야기이자 일기 속 ‘시옷’의 이야기는 그 고유함을 버리지 않으면서 점점 한 시대의 공기를 ‘감각’시키는 이야기가 되어간다. 현재 ‘나’의 상처가 추동했을 글쓰기는 타인과의 관계가 지지해 온 시간을 회고하는 서사로 이행한다. ‘나’의 윤곽은 주인공의 일기뿐 아니라 소설 전체에서도 점점 흐려진다. 이들의 삶은 각자의 것으로 소유,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의미화된다. 즉 기존에 일기라는 1인칭 글쓰기가 담보하던 ‘나’ ‘자기’는 이 소설에서 어떤 기원이나 본질 혹은 증명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삶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메커니즘을 거쳐 의미화되는지 일기 쓰는 주인공이 체현한다. 주인공의 일기에 적히는 것은 할머니의 독경 소리, 늘 복잡한 감정을 품게 했던 옆집 친구 애니, 아버지의 빈자리 등 타인과 얽혀 있는 기억이며, 또한 이 소설에 그려지는 것은 그 일기를 함께 읽어주는 현재의 무심하면서 다정한 동료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소설은,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자를 쓰는 일임을 보여준다. 좀더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한다면 이것은 나/너와 같은 개체적 몸을 초과하는, 혹은 그런 몸으로 분화하기 이전의(metastable)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읽은 일기 안팎의 ‘나’들은 개체들간의 상호적인(inter) 관계라기보다, 식별되지 않는 내적으로(intra) 얽힌 존재의 이미지에 가깝다. 즉 오롯한 자기, 내면 같은 표상이 본래 품고 있었을 모호함과 균열뿐 아니라, 그러한 자기와 내면을 구성시키는 무수한 연루됨 자체가 곧 ‘나’임을 암시하는 것이 이 소설 속 일기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으로 미처 식별되지 않는 무수한 사물도 나를 관통하고 구성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비 내리는 장면의 회고에서처럼 단일하게 통합된 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 존재와 사건들, 시공간의 비인격적 웅성거림 속에서 불현듯 확인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각별히 기억해야 할 ‘자기’의 한 의미일지 모른다. 주인공이 일기 속 자신을 내내 ‘시옷’이라는 기호로 표기하고 지칭하는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일기를 쓰는 주인공은 “‘나는’이라고 시작했더니 한줄도 쓸 수가 없었”(32면)다는 이유에서 시옷이라는 이름을 쓴다. 시옷은 “넘어지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처럼”(33면) 생겼다는 이유에서 선택되었는데, 이것이 서로를 지탱하는 ‘사람 인(人)’의 형상을 염두에 둔 작명임도 분명하다.17) 소설은 이렇게 주인공을 통해 처음부터 ‘나’라는 주어의 함의와 무게를 암시해두었으며, ‘나’의 시선이 독점해온 1인칭의 세계를 내어 주고 3인칭적 재현을 전경화한다. 이 소설을 두고 “‘나’의 쓰기가 스스로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타인의 다면성을 서술하는 일로도 이어진다”18)는 평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적확하다. 소설 속 ‘나’는 명료한 윤곽과 표상을 갖는 존재이기 이전에, 내내 유동하고 있는 어떤 관계 자체이다. 이런 메커니즘을 생각할 때 오늘날 항간에서 말하는 타자 윤리는,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원리이자 필연이다. 소유 너머 자기를 상상하는 일과, 연루됨 자체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분이다. 4. 소유와 주권적 자기 너머, 혹은 소설적 커먼즈의 상상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지금까지 읽은 이주혜의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 속 ‘자기’는 ‘내 삶은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식의 당사자성이나 자기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주권의 문제는 늘 경계 획정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19) 주권은 항상 권력 관계와 지배를 표시한다. 국가뿐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밀한 자아 역시 소유를 위해 구획되고 객체처럼 간주된다. 그런데 이주혜 소설은 ‘나’ ‘자기’가 그런 객체이기 이전에 이미 늘 타자와 연루되어 있는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지금 주권적 자기 너머를 상상한다는 일은 어떤 구획과 소유와 권리 이전의 지대, 일종의 잠재성을 사유하는 일과 관련된다. 나아가 그러한 ‘자기’를 일종의 관계성의 장소로 전유하는 일이 요청된다. 어떤 존재가 배타적으로 점유한 예컨대 정체성을 본질처럼 인종화하는 통치술과 겨룰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독점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미학과 윤리는 불가분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유의할 점은, 이것이 오늘날 세계의 역학과 실제를 없는 것처럼 여기며 소유로부터의 이탈을 낭만적으로 예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탈소유에 대한 논의는 자칫, 누군가의 땅을 무주지나 황무지로 간주하여 점유해온 정착민 식민주의의 역사를 정당화하기도 쉽다. 또한 무엇이든 가능한 자아를 낭만화하는 자유주의적 모토로 전유되기도 쉽다. 앞서 버틀러의 논의에서처럼 탈소유라는 말이 품고 있는 폭력적 ‘박탈’은 지금도 이 세계에서 늘 진행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핀 ‘나’ ‘자기’는 분명 소유 이전의 양태를 환기시킨다. 모든 사물에 소유의 권리가 부여되어온 역사에도 불구하고, 본래 경계를 획정할 수도 독점할 수도 없는 ‘나’가 있다. 근대적 주권 및 소유적 개인주의와 불가분이었던 자기를 이렇게 다르게 사유해볼 때,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첨언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언어, 감정, 사유, 땅, 하늘 등 나열할 수 없는 많은 것이 본래 누군가에게 배타적으로 귀속될 수 없는 커먼즈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하지만 언어, 감정, 사유 등에 일종의 형식을 부여한 문학에 대해서 커먼즈의 사유를 진척시키는 데에는 모종의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서명(署名)’으로 상징되는 오리지널리티와 소유의 감각이 성립시킨 (근대)문학 관념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오늘날 문학을 둘러싸고 조밀해지는 법과 제도는 소유의 감각을 더욱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소유와 주권적 자기의 구조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 부당함을 문제 삼고, 동시에 그 구조 너머를 상상하는 일은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커먼즈로서의 문학 논의에서 계속 질문해야 할 고리가 바로 이 소유의 원리임도 분명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지적해왔듯, 커먼즈는 단지 주어져 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커먼즈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 함께 만들어가야 할(commoning) 것이고,20) 때로는 투쟁의 산물21)이다. 그렇기에 현행 세계의 역학과 다양한 폭력을 문제 삼는 것은 곧 커먼즈의 주제이기도 하다. 소유를 자명하게 여기는 감각은 커먼즈의 사유를 자꾸 멈춰 세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러한 이중구속적 상황에서 쉽게 몸을 빼거나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문학연구자는, 새로운 소유권의 형태로 도래한 근대 일본문학 초창기 풍경을 조망하면서 거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커먼즈의 계기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소유를 질문하는 불안정한 지대를 포함하여 “작가, 허구의 인물, 독자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부터 커먼즈의 가능성을 타진한다.22) 그는 질문한다. 어느 소설 속 ‘이름 없는 고양이’가 발화하는 그 발언권은 (고양이는 인간도 아니고 이름도 없다는 의미에서) 법적으로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인물의 광기는, (통합되고 관리되는 자아를 갖지 않았다는 점에서)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소유의 주체적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지. 또는 한 여성의 소유를 둘러싼 한 지식인의 죄책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폭력적으로 소유하는 당시 제국의 죄책감을 의미한 것 아닐지 등.23) 앞서 이주혜 소설에서 읽은 ‘나’ 역시 심지어 자기에게조차 독점될 수 없고, 늘 무언가와 연루되어 있는 일종의 준안정적인 지대임을 확인했다. 지금 커먼즈의 조건은 바로 이 불안정함, 혹은 경험되지 않은 잠재성 자체로부터 상상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이 지대에서 바로 (방금 인용한 문장에서처럼) ‘독자, 인물, 작가’가 만나는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읽는 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계절은 짧고 기억은 영영』의 뒤표지에는 소설가 하성란의 이런 감상이 적혀 있다. “누구 한명의 것일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국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 들의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서, 소설 속 그들의 이야기가 곧 “이주혜의 이야기이자 책을 읽는 ‘나’들의 이야기가 된다”는 대목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앞서 강조한 ‘자기박탈’ ‘자기를 내어주는 일’을 겹쳐 생각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우리는 허구로서의 이야기에서 나에 가까운 무언가를 만나고 공감한다. 하지만 때로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예컨대 경험, 정체성- 에 대해 응답받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를 내어주는 장소가 곧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서 이주혜 소설 속 주인공이 일기라는 형식 속에서 1인칭(나)을 내어 주면서 자기를 쓰는 일이 곧 타인을 쓰는 일이 되었음을 떠올려보자. 동시에 그때, 일기와 픽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것을 떠올려보자(소설 속 한 인물은 그녀의 일기가 소설 같다고 말하고, 그녀는 자신의 글이 픽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기가 타인들의 세계로 이행하는 서사 속에서 소유에 기반하는 주권적 자기의 형상은 교란된다. 그리고 픽션과 일기라는 형식과 관련해서도 장르적 구획 이전의 불명료한 지대가 부상된다. 자기를 내어주면서 도달한 곳이 타인의 세계와 더불어 소설적 장소라는 사실은 ‘소설적 커먼즈’ 의 또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강조하건대 소유를 질문할 때,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잠재성의 지대가 열린다. 그것은 주권적 자기 너머의 연루됨 자체로 우리를 데려간다. 쓰는 이만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독자, 소비자, 유저 등 특정 정체성의 이름으로 환원되기 이전의 나의 몸들이 거기에서 스스로를 잃고/잊고/헤매도록(dispossession) 초대받는다. 익숙한 회로 속에서 쉽게 공감하는 것만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스스로(라고 여겨지는 것)를 내어주는 일에 초대받고, 그 낯섦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커먼즈로서의 문학에 보태볼 또 하나의 의미일 수 있지 않을까. 1) 계간 『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제207호)에 게재된 동명의 글을 수정 보완했지만, 이에 대한 좀더 최근의 상세한 내용은 「말하는 입에서 듣는 귀까지 : ‘자기서사’ 문제틀의 재구성」(김미지 외, 『젠더』, 문학과지성사, 2025)에서 전개했다. 2) 이른바 ‘자기서사’가 2016~17년 광장,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간을 통과하며 특히 부상했다는 점이 2025년 2월 시점에서 다시 의미심장하게 환기된다. 12·3 사태 이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 강진 광장에서의 ‘자유발언’ 및 이후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다양한 그룹(시민활동가, 소수정당, 연구자 등)의 집담회, 토론회 등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고 있고 그 발언 속 ‘개인’과 ‘연대’의 형식에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다. 광장의 경험은 늘 말을 바꾸어왔고, 말은 늘 광장을 바꾸어왔다. 지금의 분위기는 또 한번 자기를 발화하는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될 것을 예고하는 듯하다. 이 글에서 ‘자기’는 self의 번역어이다. 부분적으로 ‘자아’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울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로 표기했다. 3) 장영은,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 민음사, 2018 참조. 4) 김은하, 「젊고 아픈/미친 여자들과 자기 이론으로서의 글쓰기」, 『여성문학연구』61호, 2024 참조. 5) 한영인, 「자아 생산 장치로서의 에세이」,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215, 217면. 6) 日比嘉高, 『プライヴァシーの誕生』, 新曜社 2020, 254면 참조. 7) 오혜진, 「지금 한국문학장에서 ‘퀴어한 것’은 무엇인가(1)」, 『문학과사회-하이픈』, 2018년 겨울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목격-증인 되기’에 대해서는 8장을 참조할 수 있다. 9) 가야트리 스피박, 『스피박의 대담』(새럼 하라쉼 엮음,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 254쪽),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참조. 10) C. B. 맥퍼슨,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 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 25-26, 206면. 11) 같은 책, 212면. 12) 특히 2010년대 이후 영어권의 각 분과마다 신자유주의 지배구조 분석과 관련해 ‘소유적 개인주의 50년 후’라는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어왔음을 참조해본다. 13) 주디스 버틀러·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참조. 이 책에서 두 대담자는, 오늘날 세계가 어떻게 주체의 구성적 상호의존성을 차단하고 정착민 식민 체계에서 박탈·탈소유(dispossession)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넘어설 원리가 무엇일지 논의한다. 14) 같은 책, 26-27, 338면. 15) 같은 책, 337면. 16) 여기에서 물리적으로 구획된 몸을 넘는 정동적인 경험과 연결신체(assemblage)의 주제를 소환할 수도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 소설은 ‘5월 광주 소설’의 새로운 방법을 가늠케도 한다. 이것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축자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개인적인 것’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과정, 그리고 ‘자기’라는 내적 표상이 시간의 축적 속에서 구축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어떤 사건에 대한 당사자와 비당사자 문제, 이른바 경험 없는 세대의 ‘포스트 기억 장치’ 문제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17) 물론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시옷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사과하고” “말을 걸고 싶었”으며 “이름을 불러주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싶었다”(347면)고 적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사후적 소회와 별개로 분명 ‘나’ 혹은 어떤 고유명을 피하는 설정 속에서 오히려 자기=나를 둘러싼 존재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보여준다. 18) 김다솔, 「붉은 언어로부터 무한히 탄생하는 세계」, 『문학동네』 2024년 봄호 56면. 19) 우카이 사토시, 『주권의 너머에서』, 신지영 옮김, 그린비 2010, 379면 참조. 20) 데이비드 볼리어,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배수현 옮김, 갈무리 2015 참조. 21)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PM Press 2018, 87면 참조. 22) Michael K. Bourdaghs, A Fictional Commons, Duke University Press 2021, 11, 23면. 23) Michael K. Bourdaghs, 같은 책 2~4부 참조.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 「마음」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뒤집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힘을 얻어, 지금 물어야 하는 문학적인 질문을 해본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미리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 양경언과 인아영의 비평을 읽었다. 두 평론을 만나면서 미래를 새로이 구축하는 서정과 그에 대한 논의의 갱신이 현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예측이 극복되어야 하는 낡은 장르로 여겨졌던 '서정시'의 가능성을 재탐색하면서 도출될 때, 과거-현재-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론가들이 미래로 뻗어간 시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논의하며 치열해지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양경언 「노래가 들리는 곳」 양경언은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전운이 감돌고 기후위기가 심화된 현사회에서 삶을 '사는 일'이 아닌 '살아남는 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욱 공고해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생존 이외의 선택지를 차단하여 삶을 죽음의 대타항으로만 사유하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맥락을 비판한다.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살 만한 삶을 향한 욕망 자체를 소거해버린다는 분석에 동의하게 된다. 양경언은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79면)을 회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해왔던 분투의 역사를 참조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전환의 노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할 문학형식은 생생한 발화를 통해서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온 서정시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서정시는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80면)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므로 서정시와 그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갈망하는 다음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이행의 역량을 고취한다. 가령 양경언은 신경림 시 「상암동의 쇠가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대행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84면)고 해석한다. 「상암동의 쇠가락」은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와 자력을 존중하면서 그 각각의 삶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살핀다. 그것은 타자의 고유함을 보편으로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함부로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양경언은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에 종속시켜 타자성까지 동일화하고 만다는 기존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같은 면)키고 이로써 다양한 삶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86면)내 생의 전망을 길어올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 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85면) 양경언의 글을 읽으며 폭압적인 동일시의 토대로 간주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주관성'이 비대해진 자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자아를 비워내야만 타자를 들일 자리가 존재하리라고 믿음으로써 주관성을 소거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산출해낸 것이 어쩌면 윤리적인 여백이 아니라,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남은 허무한 공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는 한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을 배격하는 일로 귀결되는 흐름을 저지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및 신유물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휴머니즘적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고 이는 긍정할 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기도 한 '인간다움'을 해체하려 애쓰다 인간이 지닌 타자에의 감응력과, 존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허물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적 경향을 개선하는 일이 꼭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서정시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아(화자)로 수렴시키는 장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1)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 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 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 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3)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오문석, 「서정적 경험으로서 '상호침투'」, 『한국시학연구』 제80호, 2024, 132면. 2) 고봉준, 「서정의 고고학」,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 b, 2020, 239~42면. 3) 성현아, 「시와 복고: 다시 만난 서정」,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참조.
김유진, 『평균율 연습』(문학동네 2024) 이미 단편 「음의 속성」(『보이지 않는 정원』, 문학동네, 2018)에서 등장한 바 있는 피아노 조율사는 김유진 소설이 다루는 가족간의 불화와 갈등에 잘 어울리는 직업이다. 미세하게 틀어진 음을 조절하고 감정의 진폭을 고르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도 필요하다. 김유진 소설은 섬세한 조율사처럼 이들이 어떻게 틀어지고 불확실한 간극을 넓히게 되었는지를 탐사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제 막 결혼 생활을 끝낸 수민과 수찬, 고리대금업을 하다가 실패한 수민의 엄마, 빠리에서 예술가로 활동하는 정우의 이야기는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피아노의 현처럼 연결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 수민이 피아노 조율 수업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 삼인칭 시점으로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율은 산술과 이론이 아니라 경험과 실전만이 중요한 삶의 기술이다. “실제로 피아노를 만져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악기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걸 깨달”(57면)은 수민처럼 상대를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수민과 수찬의 이혼에도 그런 오해가 있었다. 수민이 프랑스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만난 수찬은 원예학을 전공한 유망한 청년이었으나 귀국해서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수민의 피로와 불만은 쌓여만 갔다. 수민에게 배우자의 무능력은 “아주 자주 유대와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20면)이었다. 먼저 이혼을 말한 사람은 수찬이었지만 이미 정서적 이혼 상태와 다름없던 수민은 살려고 이혼한다는 수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틀린 부분을 찾아 고치는 유능한 편집자인 수민은 판사처럼 “단죄하고 처단하”(41면)는 일이 어울리는 “너무 엄격하고 고지식”(122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수민의 불행은 엄마 임정희의 불행과 닮았다. 임정희가 어린 시절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를 당했듯 수민 역시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신의 개인성을 존중받지 못하며 자랐다. 슬픔과 두려움을 위로해 줄 누군가가 없었던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도피처였다. 임정희는 남편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데려가주리라는 확신”(111면)을 가졌고 수민은 “자신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97면) 예감으로 수찬과 결혼했다. 그러나 이들은 남편의 무능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선택하고, 낭만적 사랑이나 구원의 허위성을 벗어나 자기 삶을 재조율하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해야 한다. 인생 초기의 결핍은 임정희와 수민을 무뚝뚝하고 애정에 인색한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가족 공동체에서 독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점에서 『평균율 연습』은 가족보다 개인으로서의 과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의 삶의 궤적을 그린다. 이혼 후 임정희는 생활고를 이겨내며 왕성한 경제활동을 펼친다. 서울의 아파트를 사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불확실한 숫자놀음”(73면)을 즐기며 전남편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할 만큼 대범하고, 투자 사기를 당했을 때는 딸에게 호소하고 가족에 의지하기보다 주도적으로 소송에 임한다. 『평균율 연습』에서 이 둘과 대비를 이루는 것은 정우의 사랑 이야기이다. 정우는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수민의 룸메이트이자 예술가로 자립한 여성으로 도피나 구원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온전한 자신의 사랑을 창조한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자신에게 실수할 때조차 상대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는다. 정우는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 불운한 사고를 겪은 그의 열일곱 살 시절로 가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의 척추를 따라 길게 이어진 흉터를 매만질 때마다 그 결함이 마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149면)이라고 상상하는 정우는 그와 결혼 대신 새로운 가족형태인 시민연대계약을 맺으며 살아간다. 수민은 정우를 자신과 비교하지만, 그런 사랑은 수민에게도 있었다. 수찬의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서로 얼마나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수찬이 얼마나 수민의 외로웠던 과거를 보듬어주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사랑은 결혼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우의 경우처럼 상대의 경험과 감정까지 자신의 것처럼 상상하는 능력이다. 수민이 수찬을 무능하게만 보는 것은 그런 상상력이 권태와 오해 속에서 무뎌졌음을 의미한다. 피아노 조율 학원 원장의 말처럼 평균율은 순정율이 만든 결함을 모든 건반에 조금씩 떠안겨 어긋남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절충하는 대안이다. 조율은 완벽한 순정율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수용할 때에야 비로소 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194~195면)는 미묘한 작업이다. 수민은 이 조율 훈련의 심화 과정을 마쳤다. 그러나 “수민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너그러운 세계(202면)”는 왜 “고치고 또 고쳐 쓰는”(202면)” 과정이 필요하다. 엄마와 수찬의 결함에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엄마 임정희는 이혼 후 돈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소심하고 마음이 여린 수찬은 회사의 인원 감축에 어쩔 도리 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렇다면 수민에게 필요한 조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율 수업에는 교훈적인 메시지들이 많지만 조율의 핵심은 그것의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있지 않다. 수민에게 고치는 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음의 진동수를 조화롭게 만드는 기술이 단번에 되지 않듯 수민의 삶도 무언가에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과정에 있다. 『평균율 연습』은 상대의 결함을 나눠가지려는 시도가 사랑과 이해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기당한 엄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하는 것은 수민이 선택한 조율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수찬이 이혼 후에도 수민과 수민의 어머니와 이어나가는 우정이다. 그것은 가족에 관한 하나의 대안이자 수찬이 만드는 평균율이다. 지금 가족 서사에 필요한 조율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지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상상력일 것이다. 전지영, 『타운하우스』(창비 2024)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는 어둡고 불편하다. 이 이야기들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과 위계가 삶을 어떻게 지옥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결말을 유보한다. 긴장의 해소가 아니라 곤경의 실상을 지켜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의 눈」은 폭력의 전염성을 파헤친 수작이다. 주인공 수연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딸 서아를 섬에 있는 국제 학교로 전학시킨다. 새출발을 결심한 그곳의 타운하우스는 CCTV와 보안이 완비되었지만 그럴싸한 외관과 달리 미세하게 갈라진 이층 천장 틈으로 물이 새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연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10면)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서아가 지희의 딸이 저지른 학교 폭력을 옆에서 방관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수연은 서아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입하지 않은 채 서아가 가해자가 아니라는 것에 ‘비겁한 안도감’을 느낀다. 같은 타운하우스 이웃인 지희는 수연의 이러한 모순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인물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이 가해자지만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걸 서아가 증언해 주기를 바라며 그동안 쌓은 친분과 의리를 내세워 수연을 압박한다. 지희는 폭풍우를 무릅쓰고 비가 세는 수연의 집 지붕에 올라가 방수포를 덮으려다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어떻게든 자기 아이를 구하겠다는 지희의 얼굴에서 수연이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장면은 예리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아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35면)는 모성은 그들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폭력을 은폐함으로써 폭력에 공모하기 쉽다. 지희처럼 궁지에 몰린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것은 수연에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35면)이다. 여기서 피해자와 가해자, 방관자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며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위협하고 전염시킬 수 있다. 눈여겨 볼 점은 피해자의 내면에 숨겨진 가해 심리다. 친구의 폭력을 관망했던 서아는 맞는 아이의 고통을 외면하고 “차라리 때리는 쪽”(26면)이 낫다고 말한다. 수연의 가해 심리는 한층 교묘하고 잔인하다. 수연은 지희에게서 과거 자신의 선처를 바라던 가해자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희를 떠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지붕에서 떨어진 지희가 깨어나지 않기를 은밀히 바란다. “같은 폭력을 반복”(23)할 것이라며 가해자들을 엄정하게 심판했던 수연의 도덕적 신념은 서아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됨으로써 무너진다. 소설 초반에 타운하우스를 어슬렁거렸던 말은 검은 실루엣으로 수연 앞에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 수연이 낯설게 마주한 것은 바깥의 위협 때문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이다. 수연은 말의 눈에 비친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무고한 피해자였던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은 웅덩이 같은 말의 눈은 수연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의 마음을 보게 만든다. 수연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하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폭력의 악순환은 지금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 소설집에 엮인 작품들에서 삶의 안전지대는 찾아보기 어렵다.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새는 타운하우스는 “갑작스런 기온 변화, 결로, 바람과 비에 약”(8면)하고 인물들의 갈등은 악천후 속에서 고조된다. 이런 식의 묘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전지영의 소설에서 변화무쌍한 기후(climate)는 불가해한 삶에 관한 징표로 때로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쥐」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솟아오른 불기둥은 군 내부의 불미스런 의혹을 감춘 해군 관사를 태울 기세로 커진다. 그러나 관사를 돌아다니는 쥐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부조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기습적인 스콜은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공무원인 주인공은 불합리한 공공 사업에 몰두하느라 아들의 죽음에 무방비 상태였고 성공적으로 끝난 사업은 자신의 일상에 예기치 않은 해를 입히는 중이다. 스콜은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침수시키며 평온한 일상 속에 숨어 있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 「소리 소문 없이」의 ‘나’는 음대 입시생으로 피아노와 악보가 삽시간에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는다. 이 “이해되지 않는 일”(211면)은 입시 경쟁으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는 ‘나’의 뒤틀린 욕망을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연재해와 관련된 소설적 배경은 삶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언캐니 밸리」 속 도시 고지대에 있는 부촌 청한동에서 흐르는 물은, 장마철마다 ‘나’가 세 들어 사는 저지대 상가 건물을 물바다로 만든다. 그러나 청한동 노부부의 저택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약물과 주사가 오가는 일들에 ‘나’는 접근할 수 없다. 기후는 한국 사회의 계급 지형도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침식시키는 중요한 사사적 요소이다. 『타운하우스』에서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나 동료에 대해 악의적인 루머를 퍼뜨리고(「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 부당한 업무와 명령에 복종하는(「쥐」,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인물들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렇게 할 뿐이다. 「맹점」에서 안과 의사 은애도 그런 유형의 인물이다. 은애는 어시장 노인들에게 고액의 백내장 수술을 해주고 보험제도의 틈새에서 이익을 착복한다. 병원에 노인 환자들을 공급하며 “주는 걸 확실히 주고 받을 걸 확실히 받는”(121면) 보험회사 영업사원 재복과 과잉 진료로 수술 건수를 늘리는 은애는 「말의 눈」의 수연과 지희처럼 비슷한 욕망으로 조응한다. 은애가 검게 젖은 어시장을 빠져나올 때 고양이 한마리가 생선 피와 비늘, 내장으로 범벅이 된 입으로 은애의 발을 맹렬하게 핥는 장면의 기이함은 그녀의 맹목적인 탐욕을 암시한다. 사회적 약자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은애의 성공은 그러기에 더 착잡하다. “한 사람이 웃으면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뼈와 살」) 경쟁 사회의 심리는 거의 생존 본능처럼 전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내면화되어 있다. 상처받은 피해자의 이야기는 익숙하다. 그러나 『타운하우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피해자의 상처를 돌보지 않는 사회가 만드는 파괴적인 갈등이 주목한다. 모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되는 사회는 끔찍하다. 「맹점」의 은애처럼 소설의 다른 인물들도 자신의 성공 뒤에 누군가의 불운과 불행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불길한 날씨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인 『타운하우스』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반영한 한국형 고딕 소설로 손색이 없다. 비슷한 갈등 구조와 패턴이 반복되는 면도 있지만 이들 이야기가 일으킨 균열은 오래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그것은 낯설고 두려운 일이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폭력에 가담하는 사람들, 더 나쁘게는 알면서도 그 불길한 운명에 적신 발을 빼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얼굴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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