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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여름호(제119호)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 영매가 된 주체들

하혁진 문학평론

문학평론가. 제2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을 수상했고, 계간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감각의 질서와 그녀들의 환상통」,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등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잃어버렸지만 영혼을 얻었다.

—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


멸망이라는 디폴트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지독한 저주도, 도저한 비관과 냉소도 아니다. 몇 년 전 박쥐와 천산갑을 비롯한 동물들이 선언했듯 인류가 갈 길이 비로소 정해졌을 뿐이다. 푸른 별의 주인이라 자만했던 인류가 “절멸의 재료”라는 사실이 이제야 수면 위로 드러났을 뿐이다. “지금처럼만 해라.” 머지않아 “절멸의 레시피”로 만든 “절멸의 성찬”1)이 차려질 것이다. 또한 이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과 사건을 예언하는 묵시록이 아니다. 멸망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약한 곳에서부터 부지런히 진행되고 있다. 평등한 종말이라는 헛된 기대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로 멸망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멸망은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디폴트다. 적이 없는 멸망전을 계속해온 인류는 결국 ‘끝의 끝’에 도달했다.

 요컨대 “발아래 아무것도 없는 상황”, 당연하다 생각했던 “지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의 공유”2)는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이 가장 확실하게 체감하고 있는 세계감이자 “새로운 보편성”3)이다. 크로노스적 시간관과 진보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미래’는 태평한 시절의 유물이 되었다. 인류의 탐욕으로 인해 엉망진창이 된 자연과 생태의 거대한 연결망은 미래 그 자체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 영영 오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느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전 세계 7억 명의 확진자와 700만 명의 사망자를 남긴 팬데믹4) 이후 인류가 도달한 새로운 보편, ‘뉴 노멀’이 아닐까. 다시 시작된 일상과 마스크를 벗은 얼굴에는 전례없는 공포가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던 세계가 증발해버렸다는, 이렇게 쉽게 사라져버릴 것을 유일무이 절대불변의 세계라고 믿었다는 후회와 두려움이다.

시대의 감각과 길항하는 문학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최근 시에서 두드러지는 경향 중 하나는 주체와 타자가 만나는 장으로서의 세계가 불안정하다는 인식이다. 세계는 폐허이거나 환상이다. 수렁이거나 허공이다. 걷잡을 수 없는 재난의 현장이거나 깔끔하게 멸균된 실험실이다. 이렇듯 세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주체는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왠지 모르게 자폐적이고 어딘가 무력한 주체의 모습5)은 그러한 혼란의 증상이다. 이에 대해 박동억은 “2020년대의 시 전반에서 반복하는 정조는 세계 상실”6)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무엇이 소중한 자연이고, 무엇이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자연”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생태적 아노미’”라고 명명하며, “생태적 아노미란 ‘나’를 지지하는 타자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존재론적 빈곤의 상태를 뜻한다”7)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세계의 상실과 타자의 부재와 주체의 빈곤은 일련의 연쇄 속에 있다.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문장이 겨냥하는 마지막 심급은 주체 자신이다.

 한편 인아영은 “인간이라는 종의 재발견”에 주목한다. 그는 “심오하고 알 수 없는 내면을 지닌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생태학적인 관계망 속에 꼼짝없이 연루되어 있는 만연하고 상대적인 존재”가 동시대 문학이 그리는 인간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세계를 인간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게 된 사정은 2020년대 문학이 공유하고 있는 시대적 공통 감각”8)이라고 덧붙인다. 흥미로운 부분은 최근 시의 “생태학적 사유”를 “문학의 오랜 테마인 ‘타자’라는 개념”9)과 연결하는 대목인데, 기후생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시들을 둘러싼 근래의 비평적 흐름은 확실히 ‘인간-주체’가 ‘비인간-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중심으로 논의되어왔다. 그러나 인아영은 “타자에 대한 사유가 결국 ‘나’라는 주체의 문제로 회귀될 수밖에 없는 현시점의 비평적인 장력”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주체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면, 타자와의 화해 불가능성을 윤리의 결정적인 준거가 아니라 하나의 불가피한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10)라고 묻는다.


더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문장이 겨냥하는

마지막 심급은 주체 자신이다.


 그의 말처럼 언젠가부터 ‘주체와 타자’는 시 비평의 주요한 분석틀로 자리잡았다. 수많은 담론들이 생겼다가 사라졌지만 그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켰던 건 다름 아닌 주체와 타자라는 방법론 자체였다. 그러나 최근의 시들은 그러한 이분법적 도식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시적 주체와 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결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를 상실한 주체는 타자 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고, 언어를 갖지 못한 타자는 주체 없이 자신의 존재를 발화할 수 없다. 시라는 형식 속에서 주체와 타자는 ‘공생존’한다. 2000년대의 시적 주체가 ‘타자 되기’의 미학을 실험했고, 2010년대의 시적 주체가 ‘타자 되지 않기’의 윤리를 지켰다면, 2020년대의 시적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는(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근원적 조건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그러므로 주체에게 타자를 발견하기 위한 노력과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은 구분되지 않는다. 주체는 유령, 귀신, 요괴, 요정, 동물, 식물, 행성, 로봇 등,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줄 타자를 향해 자기의 존재를 열어둔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변화를 주체의 권력을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열린 주체’는 애초에 자신의 존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한한 관계 속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주체에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시적 주체가 타자와의 연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과정은, 인류가 세계의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속에서 종種의 위상을 재형성하는 과정과 오버랩된다.11) 그렇다면 멸망한 세계에 남겨진 주체가 어떻게 (자신을 포함한) 무언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는지 구체적인 시를 통해 살펴보자. 미리 말하자면 주체는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존재가 그곳에 있음을 알리는 “기이한 낯선 것”12)들과 조우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앎과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그것들은 종종 인식을 초월해 주체를 “공존의 언캐니한 낯설음”13)에 빠지게 하지만, “항상-이미 출몰”14)해 있는 그것들이야말로 발 딛고 서 있을 세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주체가 감각할 수 있는 유일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예측할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만남, 그것은 주체를 통제되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다.



거대한 나무와 요괴의 발자국


 멸망한 세계의 주체가 가장 먼저 상실하는 것은 미래라는 가능성이다. 내일이 없다는 감각은 주체를 무력하게 만드는데, 이는 박은지의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구경”하던 주체는 나지막이 속삭인다. “저게 우리의 미래야”(「눈을 뜰 수 있다면」). 불타는 미래를 앞둔 현재 역시 안온할 리 없다. “마른장마”가 계속되는 바깥에는 “사이렌 소리”(「비를 쏟아 낸 얼굴」)가 여전하고 “검은 우박”과 “폭발음”(「텐트 앞에서」)은 익숙할 지경이다. 일상과 재난을 구분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는 언제에도, 어디에도 안전하게 발붙이고 서 있을 수 없다.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마을이 시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매일 허물어지고” “매일 무언가 사라지는”(「정말 먼 곳」) 세계에서 주체는 그야말로 온몸으로 멸망을 느끼는 중이다. 바로 그때 꿈은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준다. 주체는 시시각각 무너져내리는 현실로부터 도망쳐 꿈이라는 무의식의 시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주체는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듯이 “속수무책으로 꿈을”(「짝꿍의 자랑」) 꾼다.

 하지만 꿈은 일시적인 도피처에 불과하다. 꿈은 현실의 대안이 될 수 없다. 꿈과 현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몰락한 세계의 주체는 꿈을 꾸는 동안에도 계속되는 현실의 상실을 보고 듣고 느낀다. 요컨대 현실에 개입하는 꿈이 아니라, 꿈에 개입하는 현실 때문에 박은지의 시적 주체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특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소리’를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은 박은지의 시가 지닌 특징인데, 사라진 존재가 남긴 낯선 소리는 “한 계절 내내 꿈의 기록을 뒤져도”(「녹지 않는 눈」) 그 의미와 행방을 해석하고 추측할 수 없기에 주체는 다시금 현실로 소환된다. 이때 꿈이 남긴 잔해는 ‘돌’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꿈속에서 주운 사라진 것들의 이름은 현실의 돌이 되고, 주체는 그 돌을 “마을 사람들의 집 앞에 쌓”(「짝꿍의 이름」)는다. 주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실의 흔적을 부지런히 운반하며 꿈과 현실의 이음매가 된다.

 따라서 박은지의 시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미지들은 단지 환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꿈과 현실의 연결 속에서 현현하는, 둘 중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이미지다. ‘거대한 나무’ 역시 마찬가지다. 환상과 실재를 겹쳐 보는 주체는 나무를 볼 때도 눈앞의 나무만이 아니라 나무의 너머를 함께 본다. 「죽은 나무들」에서 멸망의 징조인 나무는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르는 “러시안룰렛”처럼 인간의 능력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존재다. “축축하고 딱딱한” 나무는 마을의 이곳저곳에서 마치 계시처럼 발견될 뿐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주체가 나무를 개별의 나무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나무로 본다는 점이다. 존재를 수많은 존재 간의 연결로 바라보는 총체적 시선으로 인해, 나무는 현상만으로는 전부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존재로 그려진다. 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두를 삼킬 만큼 거대한” 불길과 연기 역시 나무라는 객체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줌아웃시키는 장치다. 다시 말해 거대한 나무는 주체의 인식과 현실을 초월하는 거대한 타자다.


창밖엔 꽃눈

내다보지 않아도

왼쪽엔 단풍, 오른쪽은 앙상한 가지

그 아래 젖어드는 낙엽, 그 옆으론 바람꽃

더 멀리는 초록이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나무


모든 계절을 살아 내는 거대한 나무가 좋아

거대한 나무도 예전엔 평범한 나무였을걸

나무줄기를 두 팔로 안을 수 있는 평범한 나무

바람의 곡선을 따라 하나의 계절만 살아 내고 말이지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며 창을 닫았다

우리의 몸 위로 흔들리는 거대한 나무의 그림자

—「몽타주」 중에서


 인용한 시의 주체 역시 한 그루의 나무 앞에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무는 여러 겹의 시간이 하나의 개체 안에 ‘몽타주’된 나무다. 주체는 봄–여름–가을–겨울, 과거–현재–미래가 겹쳐진 나무를 바라보며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나무”라고 말한다.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시간보다 훨씬 광범위한 시간을 내재한 나무는, “평범한 나무”라는 인식으로부터 멀어지는 한편 새로운 시간감을 선물한다. 시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오리 배”가 그 증거다. 오리 배는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존재,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에 의해 “일정한 방향으로 밀려나는” 존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갈 수 없는 곳과 돌아갈 곳은 명확”하다고 말하는 주체는 오리 배에 올라 “땀을 흘리며 페달을 밟”는데, 그 순간 주체는 정해진 방향대로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안간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한 계절에” “모든 계절이 뒤섞여 들어오”는 것을 느끼는 주체에게 현재는 단순한 현재가 아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자 미래의 원인이다. 지금 여기는 수많은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주체가 현재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든 계절을 한 번에 살아 내는” 나무가 선물한 상상력 덕분이다. ‘범시간적’ 존재인 거대한 나무는 멸망한 세계의 주체가 다시금 현실에 발붙일 수 있는 말뚝이 되어주고, 그에 따라 주체는 개체를 초월한 시간의 풍요를 깨닫는다.


왼쪽 창문이 마을과 사과밭, 갈대숲과 작은 폭포를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이름 모를 산을 통과하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아름다운 창문을 보았다


얼어붙은 강을 모두 지날 때까지

요괴와 요정 중 누가 더 현실적인지 우기다가

요괴의 종류에 대해 들었다

사람을 돕는 요괴, 사람에게 장난치는 요괴, 사람을 해치는 요괴


(……)

나무를 자세히 봐 봐 요괴의 발자국이 보여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어떻게 그게 보이냐는 코웃음에도 너는 진지한 얼굴을 잃지 않았다

나는 자꾸 나무와 나무 사이만 보게 되었는데

우리를 따라오는 요괴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아 겁이 났다

아직 잊지 못한 잘못이 빠른 속도로 뒤따라와 빈자리에 앉았다


왼쪽 창문이 동백 군락지 위로 쏟아지는 볕을 지나는 동안

오른쪽 창문은 여전히 이름 모를 산이었다

우리 어디서 내리지? 얼마나 남았지?

너는 아무 대답 없이 오른쪽 창문만 바라보았고

요괴 앞에 늘어놓을 잘못의 종류를 헤아리다 나는 괜히 억울해졌다


터널로 들어서자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

그제야 너는 나를 바라보고 악수를 청했다

—「횡단 열차」 중에서


 저 멀리와 지금 여기를 모두 감각할 수 있게 된 주체가 느끼는 기척은 “요괴의 발자국”까지 확장된다. 인용한 시에서 열차 안의 ‘우리’는 한자리에 앉아 두 개의 풍경를 바라본다. 왼쪽으로 보이는 생의 풍경과 오른쪽으로 보이는 “이름 모를 산”은 요괴와 요정의 차이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데, 둘 중 “누가 더 현실적인지 우기”던 대화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아는 요괴는 사람이 만든 이야기에나” 등장한다는 대화로 이어진다. 그런데 선문답처럼 흘러가던 대화는 나무를 자세히 보면 요괴의 발자국이 보인다는 ‘너’의 말과 함께 현실의 풍경과 접속한다. ‘나’는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어떻게 그게 보이냐”며 코웃음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괴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아 겁이” 난다. 결국 이 시의 진실은 열차가 좌우의 풍경을 일순간에 어둠 속에 빠뜨리는 터널 속으로 진입했을 때 드러난다. ‘나’가 “양쪽 창문을 가득 채우는 얼굴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아직 남아 있는 질문이 있다. ‘나’가 본 것은 창에 비친 승객들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발자국의 주인인 요괴들의 얼굴이었을까. 섣부른 인간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서두르고 싶겠지만, 대상의 너머를 보는 주체는 기이하고 낯선 존재들이 이미 우리 곁에 가득하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할 것이다. 무너져내리는 세계를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주체는 비로소 그것을 깨닫는다.


탕의 영혼들과 나눠 쓰는 몸


 시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향한 말 건넴이다. 그런데 만약 말을 걸 대상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 시적 주체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손유미의 주체는 모두가 떠나간 세계에 홀로 남아 있다. 불 꺼진 방안에 홀로 남아 “영원히 혼자일 것 같은”(「저 먼」) 시간, 어제는 이미 끝났지만 내일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을 견디는 중이다. “평화롭지? 평화로워라 우리 평화롭지? 안전하다 대수롭지 않다 의연하다 나란하고 가지런하다”(「모두 모여 태양 모양」) 같은 중얼거림은 주체가 정반대의 감각, 즉 거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도리어 강조한다. 이렇듯 손유미의 시는 재난과 멸망, 디스토피아적인 풍경을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이미 끝나버렸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체에게 ‘타자 없음’과 ‘세계 없음’이 사실상 동의어라는 점이다. 인간이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주체는 타자 없이 자신의 존재를 감각할 수 없다. 따라서 고립된 주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 가구의 마지막 주민으로서 이런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어떤 행인이라도 마주치고 싶다 행인 몇이라도 행인 몇이라도……”(「밤 시절」). 주체는 세계를 복원하기 전에 먼저 타자를 발견해야 한다.

 그런 주체에게 다가오는 것은 인간이 아닌 존재, 즉 비인간의 기척이다. 귀신 쫓는 음식으로 알려진 팥죽을 끓이던 주체는 “누군가, 왔다 인기척이 들렸다”고 말하며, “한눈을 팔지 않았다면 맞이할 수도 있었을 중요한 순간을 놓쳐버렸다”(「팥알만큼이나 팥알만큼이나」)고 덧붙인다. 요컨대 손유미의 시적 주체는 철저한 고립을 견디는 동시에, 언제 어디에서 불현듯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둔다. “폐쇄 폐쇄 폐쇄 폐쇄……”를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열몇개는 된”(「령 영 넋」)다고 고백하는 주체는 마침내 ‘손(손님/귀신)’을 맞는다. 무엇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로 무작정 달리던 주체가 “마침내/멈추고 시간을/죽이며 서/있을 때” 느닷없이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너를 알아 내가”(「쓰르라미 울 무렵」). 이때 낯선 목소리는 자신의 존재가 거기에 있음을 알리는 목소리일 뿐만 아니라, 주체 역시 그곳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목소리다. 주체는 정체 모를 타자의 호명에 의해 역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자신을 알아보는 존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인식할 수 있는 것과 인식할 수 없는 것, “그 사이에 숨어 있을 목소리”(같은 시)를 찾아 달린다.

 이제 주체는 신 대신 “귀신의 손을 잡는다”(「수의壽衣 같은 안개는 내리고」). “신은 하나였지만/내 것은 아닌 것 같았다”고 말하는 주체는 기약 없는 구원에 대한 부질없는 기대와 기다림 대신에 늘 존재했으나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인 세계의 이면, “거울의 뒷면”(같은 시)과 손을 잡는다. 귀신과 자연을 겹쳐놓은 듯한 “수의 같은 안개” 속으로 손을 뻗으며, “저 안엔 친구들이 많”(같은 시)다고 되뇐다. 그렇게 혼자 남은 밀실인 줄 알았던 세계는 수많은 귀신들을 응접하는 거실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마주침은 더 많은 존재와의 만남을 촉진한다. 예컨대 「애관극장 앞에서」의 주체는 별안간 한 통의 문자를 받는다. “‘애관극장 앞에서 만나’”. 발신인을 알 수 없는 연락에 주체는 “뭐라 답장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잠시 후 한 통의 문자가 더 도착한다. “‘꼭’”. 결국 주체는 “안내자”라고 불리는 존재를 따라 길을 나서고, “나를 따라와요/갈 데가 있잖아요”라고 말하는 안내자는 마치 모든 전말을 알고 있다는 듯이 주체를 이끈다. 심지어 “삼각 깃발”까지 흔드는 안내자에계 주체는 “우리 둘뿐인데 그러지 말아요”라고 말하지만, 안내자는 “누가 둘이래요?” 하고 반문한다. 그리고 안내자를 따라 길을 걷던 주체는 갑자기 안내자가 “둘, 셋, 넷, 여섯……”이 되는 것을,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길을 가득 채우는 것을 목격한다. 이렇듯 귀신과의 이웃 됨은 만남이 만남을 부르고 존재가 존재를 낳는 기이한 행렬에 함께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분포해 있는 존재‘들’의 틈바구니에서 주체는 “고장난 영사기”처럼 “별안간 보이지 않아야 할 게 보이기 시작”(「상영」)한다.


나는 불은 때를 밀고

영혼들은 제 뼈에 내 근육을 다진다


나는 없애고

영혼들은 불린다


아 아 아


나의 근육과 영혼들은 비누를 묻힌 채 탕 사이를 오가고

서로가 마시는 음료를 나누다 자기들끼리


자, 이제 탕을 나갈 시간이야 모두 모여 오늘은

누가 집엘 갈 거야? 허벅지가 닿을 정도로


모여 앉아 의논을 하다가 먼저

나가버린 건


젖은 머리의 내가 아니고

나를 다진


큰 몸이


텀벙

텀벙


집으로 돌아간다


아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니? 나는 묻는데


아 아 아 모두들 어디론가 사라지고

목욕탕의 울림만 남아서


저렇게 돌아가면 집이 다 젖겠는데……


나 혼자 걱정을 하고

—「탕의 영혼들」 중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기 시작한 주체는 자기 안에서도 수많은 영혼을 발견한다. 그리고 때때로 ‘보는-인간’과 ‘보이는-영혼’의 지위가 역전되는 것도 경험한다. 인용한 시의 공간적 배경은 목욕탕인데, 그곳은 “나는 없애고/영혼들은 불”리는 공간, 즉 주체가 자신의 일부를 타자에게 양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이다. 그런데 “자, 이제 탕을 나갈 시간”이라며 영혼들이 모여 앉아 의견을 나누는 장면에서 이 시의 숨겨진 내막이 밝혀진다. “오늘은/누가 집엘 갈 거야?”라는 물음에 “먼저/나가버린 건//젖은 머리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큰 몸”을 가진 영혼이 “텀벙/텀벙”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며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니?”라고 묻지만, 영혼들은 대답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로써 몸의 주인이라 믿었던 주체는 과거에 먼저 목욕탕을 나갔을 영혼 중 하나의 지위로 강등된다. ‘나’라는 주체는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나눠 쓰는 무수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상대적 존재인 것이다. 요컨대 손유미의 시적 주체는 “기어코 자신이//없어질 때까지 서 있”고 나서야 “수많은 얼굴들”(「접속」)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주체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와의 접속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을 야기하지만, 그로 인해 주체의 인식이 더 큰 세계로 확장되기도 한다.


 어느 날 물속 같은 낮잠 속에서 그이는 근미래 얼굴을 만났다 무너진 미래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을 만났어 미래의 그이가 말했다


 여실히 보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허망과 무상을 이길 만한 힘이 필요해 내게도 네게도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포기할 수 없으므로 네가 그곳에서 그런 것들을 준비해달라 근미래에서 기다릴 테니


그러므로 그이는


산으로

묘목을

심으러

다녔다


(……)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나날도 생기네 꿈속 같은 어지러움과 혼동 이게 다 무엇인가 내팽개치고 싶은 나날이 그렇지 않은 나날보다…… 많아지네 그러므로 그이는 무력해졌지 그이가 할 수 있는 힘이란 심긴 걸 죄 뽑을 수 있을 정도 시작하지 않았으므로 실패하지 않은 이가 될 수 있을 정도 그리하여 그이는


두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미래의 나를 만나도

되는 것인가 두려웠다 만나야 하는 것인가

두려워…… 어느새,


산그늘 속에서도

두렵고 괴로워

그이는


그이의 몸을 나무 몸통에 묶어버렸다 어디에도

가지 못하도록 그러므로 미래에도 갈 수 없네

도저히 그이는 미래의 그이를

만날 수 없었으므로 이런

모습으론 그 누구도

기꺼울 수 없어

그러나 이젠

모두


지난 이야기로 우리가 신경 쓸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다만


가네 산에 오래전 그이가 심어둔

시간 아래 뜻하지 않게 자란

버섯 그래서 수확하기 위해


누구도 침범하지 않은

우리 수확 미래가

있는 곳으로


 우리에겐 작지만 여실한 미래가 필요해 그러므로 유심히 바라본다 습한 땅을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수확 미래 하기 위하여 개나리광대버섯 독우산광대버섯 흰알광대버섯 댕구알버섯 붉은사슴뿔버섯을 피해 두루 평이한 시간을 찾네 이 그늘과 습기의 어지러움을 찔러

—「우리 수확 미래」 중에서


 인식의 확장은 미래의 ‘나’와 조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인용한 시에서 현재의 ‘나’는 마치 유령을 만나듯 미래의 ‘나’를 만난다. “무너진 미래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근미래 얼굴”은 현재의 ‘나’에게 “허망과 무상을 이길 만한 힘”으로서 “여실히 보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그의 요청에 따라 나무를 심던 현재의 ‘나’는, 그러나 눈앞에 맞닥뜨린 절망이 너무 크고 깊다는 사실에 “어지러움과 혼동” 그리고 “무력”을 느낀다. 어쩌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절망 앞에서 현재의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뿌려둔 희망을 다시 거두는 일,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실패조차 하지 않는 일 정도다. 결국 그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를 다시 만나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나무 몸통에 묶어버”린다. 하지만 이 시의 희망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오래전 그이가 심어둔/시간 아래 뜻하지 않게 자란/버섯”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는데, 기대하지 않았던 버섯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로서 ‘우리’가 함께 수확해야 할 미래가 된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우연의 중첩인 버섯은 주체의 인식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주체의 시야는 넓어진다. 거대한 산을 훼손하는 사람들과 그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도 자연은 계속될 것이라는 잊고 있던 깨달음이 되살아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너무 얼마간의 잠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주체의 반성과 각성은, 그리고 “버섯의 마음씨”로 세계를 재건하기 위해 늦게나마 모여드는 군중의 모습은, 시간과 자연이라는 거대한 타자와의 연결 속에서 시가 수확한 인간의 현재이자 미래인 것이다.


내 안의 도깨비와 미치광이버섯


 “우주는 절대 비어 있지 않다”(「기계 속 유령」).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기이한 존재들의 목소리가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낯선 존재로 가득한 우주에 비해 인간의 주파수는 좁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구천을 떠도는 억울함과 원통함을 듣기 위해, “내다버린 마음”(「광기 아니면 도루묵」)을 먹고 자란 귀신들의 응어리를 듣기 위해, 스스로 귀가 세 개인 요괴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다(“귀 둘로는 모자라/커다란 귀 하나를 들여왔습니다”, ‘시인의 말’).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세상이 외면하는 존재들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한연희의 시에서 일상은 나날이 “썩어가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주체는 썩을 대로 썩어버린 딸기를 바라보며 “딸기 안에는 구더기가 있고, 구더기 아래엔 이야기가 있을 것”(「딸기해방전선」)이라고 말한다. 주체는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는 부패한 존재들 사이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말 못한 사연”(같은 시)들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부패는 타락인 한편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체는 짓무르고 터져버린 이야기와 함께 지금껏 마주한 적 없는 “새로운 딸기에 진입”(같은 시)한다.

 이렇듯 한연희의 시에서 끝은 또다른 차원의 시작이기도 하다. “끝이 난 시점/거기엔/경계선이 있고/넘어서기에 딱 좋”다고 말하는 주체는 생과 사,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분방하게 넘나들며 “와글와글한 이야기”(「손고사리의 손」)를 수집한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구분해놓은 경계와 구획을 우스운 것으로 만들며 “종횡무진 누비는”(같은 시)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존재, 즉 괴물이다. 한연희의 시는 그러한 ‘괴물-이야기’ 앞에서는 주체 역시 이야기를 받아 적는 손님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발화의 주체가 이야기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말할 때 ‘괴물-이야기’는 불가피한 오역의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아닐까. 한연희의 시는 그러한 오역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상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고, “호기심 같은 건 꾹 눌러놔야 한다”(「공포조립」)고 말한다. 이른바 ‘인간적인 시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복을 불러온다고 알려진 두꺼비가 주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시(「타오르는 손잡이」)나 인간의 감정과는 무관한 울음소리를 내는 까마귀가 주체를 조롱하는 시(「아주 가까이 봄」)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망각한 채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풍자다.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여태껏 인간은 대상의 “겉면만 뚫어지게 쳐다”봤을 뿐이라고, “안쪽엔 도통 관심 없었”다고, “막상 아주 가까이 다가가면 불확실했던 마음이 이렇게나 선명”(「인절미 콩빵」)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실내’는 세계의 괴물성으로부터 인간을 과보호하는, 그리하여 대상을 왜곡하고 변형하는 인간의 오만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인간이 “환상을 버리”고 “목적을 잊”기 위해서는 먼저 “실내를 벗”(「실내 비판」)어야 한다. “폭력을 보호할 실내”(같은 시)가 없을 때, 인간은 비로소 혹독한 세계의 진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지와 소음과 간섭이 없”는 안온한 “유리 돔” 안에서 인간은 기껏해야 “방부제에 절어버린 꽃”(「미드웨이 섬」)에 불과하다. 그러한 사실을 깨달은 주체는 유리창과 벽을 깨고 “야생의 경계선”(「야생식물」) 앞에 선다. 물론 날것의 자연이 가진 위력을 제대로 마주하는 일은 공포와 불안을 동반한다. 특히 한연희의 시에서 계곡은 인간의 계획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낯선 것이 출몰하는 예측 불허한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상징하는 장소다. 예컨대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뜻을 가진 “무수골”은 인간이 지은 이름과는 무관하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계곡 속 원혼」)린다. 이때 발화자를 특정할 수 없는 중얼거림은 주체를 불쾌하게 만드는데, 이 불쾌함은 자신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감각이다. 자연은 “희귀종 눈물귀신버섯”(같은 시)처럼 언제나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존재를 남긴다. 명명할 수 없는 혼과 원한으로 가득한 ‘계곡’은 결코 ‘캠핑장’이 될 수 없다. 풍경의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더 멀어지고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는 계곡은 말 그대로 ‘불쾌한 골짜기’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미간을 잔뜩 찌푸리게 된다고


거기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기가 서 있다고

시옷이 말한다

곧 도깨비로 변해버릴 것처럼

붉으락푸르락 화가 나서는

외모의 결함에 대해 지껄인다

그러나 나는 안다

(……)

사실 너를 낳은 것이

도깨비라는 것을 말이다

거울 속의 네가 너를 본다

엉킨 너의 머리를 연신 빗질하지만

그것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도깨비가 어떻게 해서 너를 주고 갔는지를 떠올린다


멍청한 도깨비라고 놀려대는 인간들이 살았더랬죠, 인간과 도깨비들은 원래 한마을에서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그만 욕심이 그득그득한 몸을 불리기 위해 인간이 인간성을 버리기로 했고요, 그래서 도깨비의 것을 빼앗기 시작했더랬죠, 마지막엔 도깨비를 불에 태워 구워먹은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대요, 죽으면서 사립문이 되거나 빗자루가 되거나 요강으로 변해버렸어요, 생명이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죠, 유일하게 여자애만 도깨비 살을 먹지 않았고 그 마을을 벗어날 수 있었대요, 사실은 도깨비가 살기 위해 변한 여자애였다는 것은 전설처럼 남아 떠도는 이야기, 뭐, 그런 거예요, 그러니 도깨비 살을 먹고 죽은 멍청이들에게 분노하며 여자애는 살았어요, 영영 문손잡이 같은 곳에 영생을 가두고 자신을 잊어버리게 된 엄마를 찾으며, 자신이 인간인지 도깨비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이야기, 깨어나서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


한입 먹은 그 비릿한 맛은 사라지지 않는다

뱃속에 있던 무언가가 기어나왔다

그게 혼자 섰고 말을 했다


그러다 훌쩍 커버린 네가

오늘처럼 온종일 거울을 들여다본다

—「시옷과 도깨비」 중에서


 자연의 불가해함과 불가항력을 경험한 주체는 거울 앞에 서서 “거기에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기가 서 있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마주한 자연의 민낯이 인간성이라는 개념 역시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 인용한 시는 도깨비 전설을 시 속의 이야기로 포함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인간성을 버렸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성은 본래 도깨비와의 친연성을 내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간성이 인간 중심성과 동의어가 되기 이전부터 인간은 기이하고 낯선 존재들에 대한 친밀함을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성의 새로운 측면을 부조하는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보자.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도깨비의 것을 빼앗고, 심지어 그들을 불태워 살점을 나눠 먹은 인간들은 모두 죽거나 사물로 변한다. 구약의 대홍수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살기 위해 여자애로 변장한 도깨비뿐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이 도깨비라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도깨비의 후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주체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던 것도 “너를 낳은 것이/도깨비”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이렇듯 한연희의 시에서 주체는 세계의 괴물성을 긍정하고 괴물인 타자와 친밀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괴물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거울 밖으로 일제히 튀어나오는” 도깨비를 바라보며 “시시한 옷꾸러미를 벗”듯 인간(人)이라는 탈을 벗는다. 그렇게 시시한 인간이(ㅅ) 된 주체는 자신의 팔뚝 살을, “여리고 연약”하지만 “절대 끊어지지 않는 힘이 있”는 “도깨비 살”을 만지작거린다.


회색깔때기버섯을 먹고 싶어요

그 이름을 차근차근 발음하다보면

어둡고 창백한 면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몸 바깥으로 나온 기다란 촉수를 잡아 뺐어요

어쩌면 버섯이 동물도 식물도 아닌 것처럼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


(……)

힙사이지거스 마모레우스

프로클로로코쿠스 마리누스

다른 차원에서 유래한 것 같은 이름을

찾아내고 읽어보았어요


누군가는 미치광이버섯을 먹고 심장이 멎거나

탑 아래로 그저 온몸을 내던져 곤두박질치거나

그렇게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어서

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러 다녀요


(……)

때때로 버섯은 순하고 여린 치유자로서 식탁에 놓이지만

그런데도 생명은 너무 빨리 사그라들어요

그게 자연의 순리이니 뭐니 하면서

내버려두기만 할 순 없어서


버섯을 채취한 자에게 누가 벌을 내리지요?

총을 든 자를 누가 막아내지요?

왜 심연은 여길 들여다보지요?


독이 든 포자를 퍼뜨리려고 주름을 펼쳤어요

꼭꼭 숨겨둔 내면이 훤히 드러나 보여요

죽음을 끄집어내요


그렇게 


나는 버섯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버섯 누아르」 중에서


 “어둡고 창백한” 세계의 이면을 경유한 한연희의 시적 주체가 멈춰 선 대상은 다름 아닌 “버섯”이다. 획일화된 이분법을 벗어난 버섯을 바라보며 주체는 자신 역시 “이도 저도 아닌 귀물이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한다. “다른 차원에서 유래한 것 같은 이름”들은 끝내 번역할 수 없는 타자성을 깨닫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섯과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하며(“새하얗고 투명한 원피스를 골라 입고/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춤을 추”는 주체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는 응달에서 눈에 띄려고 점점 새하얘”지는 버섯의 모습과 겹쳐진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의 “세계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싶다고 말하는 주체는 “버섯의 일원”이 된다. 버섯과 인간 사이에 ‘우리’라고 부르기 어려운 간극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연희는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 산 자와 죽은 자, 주체와 타자를 마치 “주먹밥”처럼 “끈적끈적”하게 뭉쳐서 “예측 불가능한 쪽으로”(「주먹밥이 굴러떨어지는 쪽」) 굴려나간다. 어쩌면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세계의 불안정성과 불확정성을 직시한 ‘미치광이’ 주체들이 벌이는 “작은 소동”(같은 시)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가 수많은 타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렇게 “인간이었다가 이내 영혼이었다가 깜빡깜빡하는/혼란 속에서”(「12월」) 한연희의 시적 주체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세계의 불가사의함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인간이라는 디폴트


 지금까지 살펴본 세 권의 시집을 연결해 하나의 별자리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별자리의 이름은 ‘영매’가 아닐까. 비단 이 시집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최근 시의 주체들은 영혼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매처럼,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두고 있다. 그들은 멸망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예측할 수 없는 타자와 만난다. 폐허 속에 현현하는 번역할 수 없는 목소리는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만남의 한쪽 끝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2020년대의 시적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근원적 조건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주체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시공간에 분포하는 객체들은 더이상 ‘인간=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손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무한한 힘의 인식과 무한한 사물들의 존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의 감각”15)은 인간을 “생물권이라 불리는 거대한 개체 내부”에 새롭게 “발붙이고 서 있게”16)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인간은 인간의 두 발로 서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러한 한계를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황정아는 “지금은 ‘영광의 시대’를 뒤로하며 ‘우점종’ 자리에서 우아하게 물러날 때가 아니라 ‘영광의 시대’에 만든 온갖 폐해를 바로잡는 우점종으로서의 마지막 책무를 이행할 때”17)라는 적확한 문장을 통해서 지금 여기의 인간이 이행해야 할 역할과 의무를 지적한 바 있다. ‘신유물론적 전회’ ‘물질적 전회’ ‘비인간 전회’ 등 인간의 위치와 위상을 재고하는 담론들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요즘, 그러한 고해성사가 너무 쉽고 빠른 반성문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인간으로의 재전회’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반만 옳다. 우리는 한 번도 ‘인간’이 아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주체로의 회귀’는 비단 시의 문제, 인간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영원회귀에 대해 선언했듯 “존재의 둥근 고리는 영원히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18) 다만 존재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 자연과 생태의 거대한 연결망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사유하는 인간, 해석할 수 없고 번역할 수 없는 타자와의 무한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감각하는 인간이다. 인간에 대해 증언할 단 한 명의 인간도 남지 않을 때까지, 인간은 인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계를 잃은 대신 영혼을 얻은 시적 주체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듯이 말이다.

  • 1)동물 임시 연대, 「절멸 선언문」, 이동시 엮음, 『절멸』, 워크룸프레스, 2021, 10쪽. 이 선언문은 2020년 8월 20일 창작 그룹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벌인 ‘절멸—질병×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이라는 제목의 릴레이 퍼포먼스에서 낭독되었다.
  • 2)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38쪽.
  • 3)같은 책, 28쪽.
  • 4)코로나19 실시간 상황판(https://coronaboard.kr/). 인용한 수치는 2023년 9월 기준으로, 통계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인간이라는 점에서 ‘최솟값’에 불과하다.
  • 5)뒤에서 살펴볼 세 권의 시집에서 예시를 찾자면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그러니까 약간 죽은 체하고 있으면/괜찮아/숨 쉴 구멍이 생기고/월급도 나오고//조금 죽은 체하고 있어야 하지만”(박은지, 「( )에게」), “어른이여, 나는 하는 일이 없고 할 일이 없고 계획한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른이여, 나는 살아 있는 사람 역할입니다”(손유미, 「아는 어른을 지날 때 드는 생각」), “어리둥절한 상태/나를 지워버린 상태/기쁨과 슬픔을 개나 줘버린 상태//나는 도저히 지금 뭘 해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아무것도……”(한연희, 「나의 찬란한 상태」).
  • 6)박동억, 「생태적 아노미와 기후시」, 『침묵과 쟁론』, 푸른사상, 2024, 54쪽.
  • 7)같은 글, 45쪽.
  • 8)인아영,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2020년대 시에 나타난 ‘타자’와 비인간 물질의 정치생태학」, 『문학동네』 2022년 봄호, 93~94쪽.
  • 9)같은 글, 94쪽.
  • 10)같은 글, 95쪽, 97쪽.
  • 11)“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공동체의 안정적인 구조에 의존할 수 없는 우리는 가변적인 배치로 내던져지고, 이로써 우리와 관계된 타자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재형성된다.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 의존할 수 없다.”(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52쪽)
  • 12)티머시 모턴, 『하이퍼객체—세계의 끝 이후의 철학과 생태학』, 김지연 옮김, 현실문화, 2024, 19쪽.
  • 13)같은 책, 51쪽.
  • 14)같은 책, 61쪽.
  • 15)같은 책, 50쪽.
  • 16)같은 책, 42쪽.
  • 17)황정아, 「물질과 문학, 그리고 인간-되기」, 『문학동네』 2022년 봄호, 167쪽.
  • 18)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희창 옮김, 민음사, 2004, 303쪽. ““아, 차라투스트라여.” 짐승들이 이어서 대답했다. “우리처럼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사물 자체가 춤춘다. 만물이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웃다가는 달아난다. 그리고 되돌아온다. /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세월은 영원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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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상속가족여성주의성차별애도 2025
성현아 기억과 고통의 맹점 ― 편혜영, 「남은 사람」(주간문학동네 2024년 9월)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수치화할 수 없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통증은 느끼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의 초점 화자인 '그녀'는 정강이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가시 돋친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에 비해 의사가 해주는 처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게다가 딸은 병원에서 불평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더는 붕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통증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은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떠안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편혜영의 다른 단편소설 「리코더」(『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속 '무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건물 붕괴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후,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이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게 된 목격자임에도 운 좋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영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드러내려 한다.  당사자만이 아는 내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입증하는 일은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남은 사람」의 그녀는 몇 해 전에도 허리를 다쳐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번번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소견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안심한다. 자기가 감각한 통증의 실체를 더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타자에게는 추체험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이해받기 어렵다. 이 같은 고통의 맹점은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다. 내내 앓던 손녀가 일곱 살에 죽자 그녀의 딸은 자식을 잃은 아픔에 오랫동안 자학하고 애통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위로하는 그녀에게 딸은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딸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딸 역시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엄마의 비통함을 가늠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묻자 딸은 피식 웃는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받기는커녕 고정적인 성역할에 기반한 비난만 듣게 된 딸의 상처는 웃음 뒤에 가려진다.  편혜영은 고통에 울부짖고 몸서리치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게 된 인물을 많이 그려왔다. 고요하게 싸늘해지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침묵에 덮인 그들의 참혹을 서서히 누설하는 편혜영은 「남은 사람」에서도 여지없이 읽는 이들이 섬뜩한 슬픔에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하여 그녀의 감각을 체화하도록 유도하던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딸이 하던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라는 무심한 말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화상을 입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녀에게 딸은 그녀가 다리를 다친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임을 일러준다. 그녀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 대신 그 환부가 아물어가던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엉킨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도리어 생생하게 만들기도, 완전히 잊은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기억을 상실해가는 이들이 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을 알려주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한다. 절친했던 지숙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언젠가 남편과 손녀의 죽음을 잊게 될 때, 그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삶에 맞서서, 경험한 일들을 부단히 잊어가기를 바라는 결말은 섬찟하게 새롭고 선득하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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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살아 있음으로 앙갚음하는 사람들의 걷기 연합

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작가론조경란원한연대소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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