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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 2024년 겨울호(제90호)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문학평론, 시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평론집 『침묵의 음』, 산문집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다. 소월시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유심작품상, 풀꽃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나’를 넘어 ‘우리’가 된 풍경과 마음

―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시인의 일요일, 2024.

―박경희 시집, 『미나리아재비』, 창비, 2024.


박형준



    로베르트 발저는 셋방을 전전하면서도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다락방에서 살기 원했다. 나에게 그의 책 『산책자』(한겨레출판, 2017)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것은 「빌케 부인」의 한 단락이다. 셋방살이를 하던 집주인 할머니가 죽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에 주인공이 그녀의 텅 빈 방에 들어가 주인을 잃고 용도가 사라진 옷가지와 소지품을 바라보는 장면이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난,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은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집 주인 할머니가 텅 빈 방에 남기고 간 옷가지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생의 이면에 어른거리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깊은 애수가 느껴졌다. 발저는 이 작품에서 한 번이라도 가난과 고독을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타인의 가난과 고독을 더 잘 이해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 그리고 타인의 무력함과 죽음을 조금도 덜어 주지 못하지만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는 법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시집인 길상호의 『왔다갔다 두 개의』(시인의 일요일, 2024)와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창비, 2024)에서 자신과 타자가 체험을 통해 서로 응시하고 격려하는 장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록 그 만남이 상처나 누추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만남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세계는 규율과 계획에 의해 설계된 대도시와는 멀리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그것들에 의해 부서지고 상처 입은 시간들을 끌어모아 과거를 향해 아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삶의 절규가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각인시킨다. 길상호의 시집이 은둔자의 삶과 그 안의 고독의 심연을 빼어난 서정으로 보여 주고 있다면, 박경희의 시집은 ‘나’를 지운 자리에 ‘우리’를 들어앉히며 버려지고 상처 입은 과거가 사라진 것도 그 자체의 형상을 잃은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의 감응으로 전해 준다. 우리는 이들의 시로부터 대도시에서 외면당하고 추방된 사물들이 간직한 최초의 움직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며, 그 사물들과 어우러진 장면과 추억들이 경이로운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풍경과 마음의 혼융―길상호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길상호 시의 특징 중 하나는 시에 나타난 풍경 묘사가 곧 시적 화자의 마음의 상태라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처럼 풍경이 자기 존재가 되고 그 풍경 속에서 다시 자신의 존재가 무한하게 흩어지거나 확대되는 지점을 지극히 섬세한 감각으로 보여 준다. 난해하거나 복잡하지 않은 나직나직한 이미지의 단순성과 리듬으로 자신의 심정을 풍경화하는 그의 시는 주체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는 말의 오묘한 상태에 닿아 있다.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진흙이 입을 벌릴 때」 전문


    이 시의 화자는 언 강물이 풀린 초봄에 강변에 나와 있다. 화자는 얼었던 강이 녹으며 진흙으로 변해 버린 강변을 거닐며 주변의 풍경을 바라본다. 시에 물안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완연한 봄이 온 것 같지 않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그래서 두 계절이 함께 있는 환절기가 이 시의 배경일 듯싶다. 이런 때일수록 남아 있는 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면서도 또 한편으로 봄을 고대하는 심리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다. 화자는 그 양가감정 속에서 강변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이 풀리며 강변은 녹기 시작한 진흙 덩이로 어수선한데 화자는 물안개가 걷히자 진흙 속에 고라니 사체가 빠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진흙에 점점이 찍힌 고라니 발자국도 눈에 띈다. 아직 겨울의 냉기가 남아 있는데도 진흙은 볕에 풀리며 아주 천천히 고라니 사체와 발자국을 삼킨다.

    이 시는 아마 위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시 어디에도 ‘나’는 보이지 않는다. 황량한 강변의 초봄 아침에 진흙이 고라니의 사체를 삼키는 풍경 묘사를 감정의 동요 없이 객관적 시 쓰기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안타깝고 슬픈 장면인데 이상하게 평안하고,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내적으로 힘찬 생명력이 느껴진다. 시인은 겨울에 다른 짐승들에게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고라니가 본능적으로 물가까지 도망치다가 강물 위에 얼어붙은 채로 죽어 있던 사건과 봄이 되어 진흙이 풀리면서 고라니가 그 속으로 빠져드는 장면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이 시를 끌고 가는 주체가 진흙만은 아니다.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겨울을 견딘 진흙이 녹아 가는 과정을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다가 “아가리”를 벌리는 것으로 시작하여 육식성이 부여된 진흙이 “검고 부드러운 입술”로 “어떤 밤”에 사냥당하여 갈가리 찢긴 채 죽은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를 삼키는 장면까지이다. 여기까지는 진흙이 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의 뒤에 다른 연으로 분리된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에서 주체가 고라니로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냥을 당해 갈가리 찢긴 고라니는 앞다리 두 개를 진흙 앞에 걸치고 있지만, 마치 강 저편으로 던져진 듯이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강물 위에 “피의 걸음”을 흩뿌려 놓고 있다. 진흙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끝난 생명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소화한다. 그런데도 강물에 얼어붙은 채로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으로 형해화된 고라니는 자신이 언 강가에 피와 함께 남긴 발자국을 유서처럼 간직한 채 왕성하게 입을 벌리는 봄기운이 맹렬하게 싹트는 진흙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주세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함께 행진하는 날엔요? 그런 날은 좀체 없다니까요, 아, 저에겐 그런 날뿐인걸요

―「로션과 스킨」 부분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 미끄러운 날은 금방 지나갈 거예요.

―「이거 좋은 거예요」 부분


    이정현의 시집 해설에 따르면 길상호의 이번 시집은 심한 병증 가운데 씌어졌다고 한다. “피 한 방울로 다 알 수 있어요”(「혈당검사 수첩」)라는 시행이 말해 주듯, 길상호 시인은 면역 체계가 흐트러지는 원인 불명의 병에 걸리면서 매일 약을 먹어야 하고,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하루에도 세 번 혈당 수치를 재야 한다고 한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임상 기록을 담은 시편들, 함께 살던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떠나보낸 사연과 “남은 고양이 꽁트”(「시인의 말」) 등 자신의 병적 기록과 함께 주변 사람들과 반려동물에 대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용한 「로션과 스킨」은 로션과 스킨이라는 메타포를 이용해 삶과 죽음이라는 특징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드러내면서 죽음과 삶이 함께 행진한다는, 그 양자를 넘나들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한다. 또 「이거 좋은 거예요」에서는 아픈 삼촌을 위해 비누를 사 온 조카의 말을 통해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이지만 나직하게 전해 준다. 아마도 시인은 조카가 선물한 비누로 아침마다 얼굴을 씻으며 대야의 물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자신의 모습과 조우할 수 있으리라. 시집의 마지막 시편에 나타나듯 절망이 우리를 ‘빗에 사이사이 끼는 때’처럼, “저 수심 깊은 대야”에 던져 버리려고 하더라도 삶의 책은 “페이지가 차르륵 젖어 더는 읽을 수 없더라도,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 두었으니”(「독서는 금지」) 언제든 다시 이어 갈 수가 있다. 하여, 나는 시인이 「진흙이 입을 벌릴 때」에서 진흙 속으로 사라진 고라니의 “긴 발자국 유서”를 절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로 읽으며, 당신은 멀리 있지만 “우리라는 말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이도 저도 아닌 것들」)라는 따뜻한 말과 시로 다시 뜨겁게 이어져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시로 쓴 마을사―박경희의 시집 『미나리아재비』


    박경희의 『미나리아재비』를 즐겁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아니, 반대로 안타까웠지만 즐겁게 읽었다고 해야 되리라. 박경희의 시집에는 토속어나 순우리말이 시 중간중간에 별처럼 박혀 있어 시를 읽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예를 들어 한 행으로 된 시 “사그랑이 된 바구니는 굴러다니고 기스락물이 깍짓동에 떨어진다”(「그렇게라도 짖어보는 것이다」)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삭아 버린 바구니가 굴러다니고 낙숫물이 참깨나 콩대를 묶은 깍짓동에 떨어진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시를 표준화하고 의미화시키면 원래의 시행이 가지고 있던 살아 움직이는 말맛이 사라져 버린다. 이 시집을 읽으며 모르는 토속어가 나오더라도 굳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 있는 말들과 이야기이며, 그리고 그 말과 이야기가 어우러져 이뤄 낸 한 마을의 아득하고 신화적인 풍경이 살냄새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다.

    박경희 시인은 우리가 모르는 말들, 사라져 가는 풍경들을 붙잡고 수집해 그것을 사유하고 이야기로 만들며 절대 잊히지 않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마을사로 창조한다. 책 속에 박제되어 시를 위한 시에 그치고 마는 이미지가 아닌, 책 속에서 걸어 나와 이미지가 삶이 되고 이야기로 번져 가는 진경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때로는 그렇게 태어난 시가 너무나 능청스러워 다음 시에 나오는 할머니처럼 읽는 동안 얼굴이 살짝 붉어지기도 한다.


저승 물길 헤치며 이승으로 돌아오다가

육지 문턱에서 쓰러졌다

부여잡은 가슴에 갈고리달이 박혔는지

뽑히지 않았다

파도가 일 때마다

세상 온갖 별이 눈물로 흥건했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바닷물을 토하며

새삼

물질하던 당신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옴마, 살았네 살았어


저승 돈 벌어 온다더니

저승 갈 뻔했다고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는 말에

얼굴 벌게지던 할머니가 웃으며

병원 차 타고 갔다


바다가 잠시 숨 멈춘 순간이었다

―「바다, 잠시 숨을 멈추다―구룡포 해녀들의 숨비」 전문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위의 시가 보여 주듯 죽음과 또는 죽음 근처까지 간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해학스럽지만 감칠맛 있게 전해 준다. 슬픈데 웃음이 나오는, 웃음이 나오는데 슬픈 이야기들이 서로 어우러져 어떤 순간에는 손에 땀이 배기도, 농사꾼을 홀대하는 사회에 화가 치밀기도, 그러다가 서로의 마음을 가만가만 짚어 주는 따스함에 슬픔이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게 한다. 위 시만 해도 그렇다. 아마, 이 시를 영화로 옮긴다면 할머니 해녀가 저승 돈 벌어 온다고 물질하다가 그만 심장에 이상이 생겨 젊은 구조대원으로부터 인공호흡을 받는 장면에선 그것을 지켜보는 동네 사람처럼 우리들도 숨도 못 쉬고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깨어나자마자 환호성이라도 지를 듯 “옴마, 살았네 살았어” 하면서 “영감 죽은 지 십 년 만에/ 남정네와 입 박치기 했다”고 동네 사람들이 놀리는 장면에선 우리들도 신나서 박수를 쳤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인 바닷속에서 죽었다 살아 나온 할머니가 그만 그 소리에 얼굴이 빨개졌다가 웃으며 병원 차를 타고 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극일 수 있는 사건이 해학으로 바뀌는 살아 있는 입말의 마술적인 힘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귀족의 화려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강풍이 몰아쳐서 집이 순식간에 무너져 사람들이 죽게 되자, 대리석이나 돌 더미에 깔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이름을 그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하나하나 호명하며 시를 짓고 시체의 주인을 찾아 주었다고 한다. 그는 파티 풍경을 한 장의 그림으로 기억 속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는 이후 기억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시모니데스에게 시란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박경희의 이번 시집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이 ‘이야기하는 그림’이다. 그의 시는 위의 시에서처럼 매우 쉬운 말과 친근한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한 장의 사진처럼 이미지에 압축해서 빼어난 서정의 구조로 들어앉힌다. 그래서 시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된다. 특히 제2부의 시편들은 “동네 막내 강 씨 아저씨”(「동네 막네」)가 환갑을 넘을 정도로 도회지와 단절된 마을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오디에도 역병이 보이지 않는”데 마스크를 써야 하고 매달릴 사람이 전부 다 이승에 없어, “그저 무탈하게 지나가길 바랄 뿐 뭐가 있간 에휴, 참말로 지랄맞은 세상이여”(「워쩌겄어」)라는 마을 노인의 체념과 한탄에서 우리 농촌 현실의 적나라한 실상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마을은 할아버지가 글을 몰라도 서울로 병 고치러 간 아내 소식이 궁금하여 ‘소 다섯 마리 그림’(「오소」)을 그려 편지로 보내면 그걸 받고 할머니가 소 걱정으로 애가 달아 금세 내려오는 곳이다. 서로 간에 이심전심이 통하는 곳이며,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할아버지의 능청이 글이나 인터넷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다.


마루에 앉아 머윗대 껍질을 벗기면서

저승 갔으면 그쪽 세상에서 잘 살 일이지 이승은 왜 들락거리느냐고

보이지도 않는 분 타박이다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데

옆에 있던 내가 슬금슬금 비키니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렸다.

―「꿈자리」 부분


    어머니의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인데도 남편을 타박한다. 살았을 적에도 그렇게 마음고생을 시키더니 무슨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이승의 문턱을 넘느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슬금슬금 마루에서 비켜나자 마루 밑에선 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집만 들락거리며 안절부절이다. 죽은 사람조차도 잘못하면 타박을 받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걱정하는, 자연의 생명과 사람이 한데 이어진 이곳은 현대인들에겐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전설 같기도 하고 신화 속 같기도 한 그 세계가 무너져 가더라도 그 큰 몸집을 지탱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간힘으로 받쳐 든 벽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손자국」) 같은 결기 어린 모습으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선명한 그림처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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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계간 문학과사회 정원 기억풍경소망불안 2025
기혁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3D 렌티큘러』(천년의시작, 2024) 임경숙,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천년의시작, 2024)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시집, 『3D 렌티큘러』, 천년의시작, 2024. - 임경숙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 천년의시작, 2024. 기혁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읽고 ‘서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의 본령’ 혹은 학술적으로 합의된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난해한 실험성, 자폐적 세계 인식에 따른 파편화와 산문화 경향의 반대편에 선 작품을 언급하기 위해선 진정성과 소통 가능성, 최소한의 리듬감 등을 동시에 충족하는 ‘가정된 일관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그 형식에서 첨단의 사회성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반면, ‘서정시’ 혹은 ‘정통 서정시’ 등으로 분류된 작품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시함으로써 인간(자연)의 본성이나 보편성 등 원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는 형식과 내용, 형식과 사회의 불화를 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서정시의 독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 머무른다거나,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시풍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만 서정성이 강조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가정된 일관성’의 이탈과 유지가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긴장감 있는 표현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비루한 삶의 슬픔이나 고통의 진정성만을 읽어 낸다면 서정성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시도마저 평면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형식을 갖춘 서정화의 『3D 렌티큘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시로 배치된 「천수암 인생네컷」은 시집의 서문 격으로 ‘자연’이 상실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지 전반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태어나는 행리단길 간판들 영원 같은 전경으로 변하고 있을 전생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 움직이는 손, 전망은 어딘지 신점 같은 면이 있지 문턱 낮은 입구로 통과하는 호기심들 이음매 빠진 시간 앞 네 개의 컷 네게로의 컷,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 환생한 천수관음보살 수행같이 넓어지는 행렬과 행간 사이 세상과 말을 걸며 압축된 암호를 풀고 나를 올려놓는다 - 「천수암 인생네컷」 전문  인용한 시편의 1수 초장의 “행리단길”에는 ‘수원 행궁동은 점집 타운이었으나 점집이 나간 자리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되었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신과 소통하던 무당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적 논리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는 ‘맛집’ 등이 들어섰을 저녁 풍경은 시의 창작 동기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설 조로 늘인 1수 중장에서 시인은 “행리단길”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점집 타운’의 풍경을 겹쳐 봄으로써 “형형색색”인 “간판”의 불빛과 사이사이의 어둠 너머로 “천수관음보살”의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과 “움직이는 손”을 떠올린다. 과거세(過去世) 중생을 구원하던 “천수관음보살”은 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거 ‘점집 타운’의 무당을 매개로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인생네컷”을 찍는 방문객들의 “호기심” 앞에선 한낮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 매개체(“이음매”)인 무당이 사라진 시공간 속에서 본성의 박탈과 은폐를 인지하지 못한 계몽된 주체는 통제된 사회가 요구하는 “네 개의 컷”에 맞춰 동일한 셀카를 찍는다. 동시에 구속의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네게로의 컷”) 순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을 비판하거나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추억하는 대신 모호한 전언을 남긴다. 1수 중장의 마지막 문장인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에서 시인은 구속의 산물인 ‘셀카’(“이미지”)가 사실상 어둠과 빛의 예술인 사진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 “행리단길”의 야경 “이미지”에서 과거의 ‘점집 타운’과 “천수관음보살”을 겹쳐 보는 시적 화자(예술가)의 응시는 “이미지” 자체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계몽 사회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자연미’는 예술 작품 속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모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진정한 ‘자연미’를 담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셀카’라 할지라도 어떻게 향유되느냐에 따라 부여할 만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리면서 시작된 시적 화자의 자각은 ‘숭고’로 이어진다. “천수관음보살”의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 스스로 “운명도 바꿔 놓을” 수 있도록 지배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과거세 중생을 구원하는 “천수관음보살”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면, 구원이란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자연)을 구속할 운명에 놓인 계몽된 주체가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일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1수 종장의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는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서, 가닿을 수 없는 ‘자연’과 계몽적 주체의 화해가 인공물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가상의 영역이다.  이어지는 2수에서 시인은 별다른 부연 없이 3장 전체를 할애해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내고 있는데 1수에서 전개한 자각의 과정과 호응 관계를 이루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예술가의 작업이란 결국 “행렬과 행간 사이” 침묵뿐인 “세상”(자연)과의 대화이며 자연의 “압축된 암호”(‘자연미’)는 작두를 탄 무당이 그러하듯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나를 올려놓”고 대상과 동화됨으로써만 해독의 여지를 갖는다. 말도 되지 않는 말과 함께 언어의 들판을 횡단하면서 시 속에 한참 빠져 말무리 가까이에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서툰 말만큼 아직도 미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언어의 광야, 그 속에서 말과 시를 구분할 때까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었다. 언어의 뿌리를 내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말의 나무. 그렇다. 나무의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 「시인의 말」 부분  하지만 시가 문자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의 소산이라면 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셀카’가 예술 사진으로 향유될 수 있는 가상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용한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명 이전과 같은 완전한 동화는 “꿈”에서만 가능하다. 도구화된 일상어를 사용하는 한 “말과 시”를 구분해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실패를 향한 수많은 시도 속에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말의 나무” 역시 가상이 현실로 육박할 때의 ‘마법’처럼 휘발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마법의 무대 뒤편에는 무수한 실패로 쌓아 올린 “나무의 무덤”이 버티고 있다. 무력감에 빠질 법도 하지만 시인은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은폐하는 대신 창작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시집을 살펴보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긴 자의 허무는 보이지 않는다. AI, 생체공학 등 문명의 발달에 따른 상실된 인간 본성을 다루거나, 자연이 부재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남겨진 존재에 대한 여러 감정을 노출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표제작인 「3D 렌티큘러」를 비롯해 「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호모 라보란스 칸탄스」 「날아가는 침대처럼」 「Butter Book」 「영화 경로당」 「봄날」 등 시조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와 낯선 소재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의 자리에 특정 기호를 콜라주(collage) 하거나(「휴지통」), 여백의 구분을 회화적으로 활용하는(「평화 인쇄사」) 실험적인 형식도 눈에 띈다. 소재가 혼재된 만큼 다양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과도한 비판이나 냉소, 관조나 회상에 스며드는 ‘잠언투’ 등은 절제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선 대체로 시조의 3장 중 중장을 변형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념상의 시조 장르와 달리 당사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의 괴리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무엇일까? 열거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면면은 ‘서정성’의 범위 내에 있다. 정형시의 제약과 종장의 묘미를 살리는 시상 전개의 관습 등도 유지된다. 실험적인 작품에서조차 시조의 3장 형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장르적 이탈이나 의도적인 실험이 ‘자연미’를 환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려는 예술적 행위가 인과적 논리를 언급할 만큼 경직될 때 계몽의 산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앞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예술적 형식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올랐어요 눈부신 디테일의 볼륨은 투명해져요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더군요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사이 루프탑이 솟아나고 시간은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편의점 간판처럼 변해 가도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네요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 성 사이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416 생명안전공원은 노란 리본을 수놓았어요 사라진 그 아이들이 굳어 가는 걸 보았어요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켜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 바다를 증명하려던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회멸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뒷면과 앞면을 이제 당신이 이어 주세요 - 「3D 렌티큘러」 전문  주로 장난감이나 각종 카드, 케이스의 장식으로 사용되는 “3D 렌티큘러”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정면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포효하는 모습으로 변함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런데 “렌티큘러”의 작동 원리1)는 동굴벽화에서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벽화를 그리고 신을 호출하던 주술사(예술가)에게 “렌티큘러”의 원리는 눈속임이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물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신성한 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그러한 작업은 이상적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대 예술가의 “3D 렌티큘러”는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더 뛰어난 눈속임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앞서 열거한 “렌티큘러”의 쓰임새가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작은 유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주술사의 작업 방식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술 형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오르고 “3D 렌티큘러”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고대 주술사가 그러했듯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는 ‘마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종이에 적힌 시조가 입체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순간과 겹친다. 천(天)·지(地)·인(人) 3장의 기본 형식은 ‘자연미’를 재현해 본 기억이 잠재된 형식이다. 비록 근대 이후 재발견된 ‘전통’으로서 ‘자연’과의 화해를 가정할 뿐이라고 해도, 고대 주술사가 그러하듯 진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속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움직임이다.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동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렌티큘러”라 해도 입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다는 기대와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가며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는 현실의 이면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성 사이”에서 시선의 각도를 달리할 때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물으며 비로소 ‘자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겹쳐 봄으로써 계몽된 세계의 명령(‘조난 시 안내 방송에 따라 행동하라!’)이 ‘자연’을 정복하지도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했던 사건을 상기한다. 수로의 특성을 분석하고, 침몰의 원인을 찾고,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문(계몽)의 시간”은 모든 사고의 책임을 ‘자연’에 전가한다. 하지만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키게 할 뿐 “바다”도 희생된 아이들의 ‘자연’도 “증명”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연’과 계몽의 불화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이므로, ‘자연미’ 역시 “불투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앞선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시인의 기대와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장 형식의 훌륭한 “3D 렌티큘러” 장치를 지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역할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기는 것도,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위장된 화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바다”가 불타 버리듯 이내 성질을 뒤바꾸고 “회멸” 되어 버린다. 엄밀히 말해 시인은 현실과 “3D 렌티큘러”의 가상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동화를 꿈꾼다. n개로 분절된 세계의 모습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볼록렌즈처럼 “오늘의 뒷면(과거)과 앞면(미래)을” 조율하고 매개함으로써 계몽된 주체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아르고스처럼 백 개의 눈을”(「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뜨고 “늦은 봄, 개의 목줄은(이) 아직도 팽팽”(「봄날」)해지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괴물이 되어 버린 계몽의 능력을 온전한 인간의 시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걸러 낸 생의 이유를 벼르고 별러 다시금 이유로 남겨 두려는 응시. 이것이 바로 서정화의 ‘서정’이자 동일자들의 세계에서 비동일자로서의 시인에게 주어진 동화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임경숙의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는 별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삶의 진정성을 개진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과 행의 구분에서도 낭독을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다. 이것은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중요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추전 골목”의 “가교리 언니”와 “태봉 할매”(「봄의 좌판」), “한낮에도 셔터가 내려진 문구점 신발 가게 옷 가게 레코드 가게”(「중동 골목 147」), “베트남 여인, 예쁜이 린이”(「공심채」), ‘공곶이 수목원’을 처음 일군 “아흔두 살 사내”(「공곶이 수선화」), 포로수용소의 “아버지”(「1953년 거제도」) 등등 구체화된 인물과 배경엔 아픈 전사(前事)가 깃들어 있다. 낡고 손때가 탄 사진첩을 꺼내듯 사연을 적어 내는 시인에게 그것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북쪽은 응달이었다 산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하지만 바닥은 늘 보이지 않는 블랙 아이스가 깔려 있다 길은 좁아서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어 모든 그림자는 강물 쪽으로 기운다 위태로운 바퀴는 자주 경계선을 넘었다 어미는 아이 하나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켰지만 바람 잘 날 없는 그 방에선 자주 불을 꺼뜨렸다 길 없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운전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끔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날에는 가늘어진 손목에 과부하가 걸려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밖으로 폭주하던 아이가 이제는 골방으로 들어가 성장통이 끝난 저를 잠가 두고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었다 어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빈다 - 「결빙 구간」 전문  인용한 시편 역시 불우한 환경을 살아온 모자(母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스”가 깔린 아슬아슬한 삶의 현장에서 시적 화자가 기댈 곳은 없다. “아이 하나에 희망”을 걸고 견뎌 보지만 “길 없는 길”처럼 막막한 일상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잡은 만큼 “아이”는 “밖으로 폭주”하다 마침내 자신을 “골방”에 가둬 버린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쓰던 “블랙 아이스”의 냉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미의 언어”를 얼리고 “성장통이 끝난” 다 큰 “아이”의 마음까지 얼려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어미”의 모습은 시린 손이 서러운 “어미”의 모습으로도, 참회의 합장을 대신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서정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시 쓰기’의 여정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닌 시인에게 시 쓰기란 “결빙 구간”을 지니듯 조심스럽고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성질일 테다. 착상 이후엔 시인의 의지대로 전개되는 듯했으나 물러나 보면 “모든 그림자는(가) 강물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강물”의 ‘자연미’와 ‘역사’는 손쉽게 재현되지 않는 것이어서, 형식과 관습의 “경계선을 넘”고 ‘길이 아닌 길’을 찾아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한 그늘진 현실은 그곳이 어디든 “골방”처럼 주체를 고립시키고, 시인은 자식 같은 작품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작은 “등불”을 “햇살” 삼아 고립된 현실을 견뎌 내고자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기교가 능숙해질수록 자판을 치는 “손목”이 상할 뿐 “강물”을 끼고 도는 ‘진실’은 멀어진다. 그렇게 “폭주”와 자폐의 “성장통이 끝난” 작품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작품이 시인의 “언어”를 거부하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한다. “아이”만을 생각하는 “어미의 언어”조차 그것이 ‘시를 위한 시’가 될 때 생기를 잃고서 “냉동고에” 쌓아 놓은 얼음덩어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 시인의 자세에 있다. 시인은 “성장통이 끝난” 청소년을 인격체로서 대하듯이 작품 역시 하나의 ‘자연’으로서 존중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변명이나 체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자들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을 믿고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견딤이 추구하는 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라 삶을 견뎌 낸 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의 재현을 가리킨다.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데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 오실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 절정이라고 - 「꽃의 초대」 부분 도시에서 세상 소식 물고 오는 박 씨의 차 안이 궁금하다 마땅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다 …(중략)… 시속 삼십 킬로 이하, 저속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봉지 봉지 들려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 가물거린다 …(중략)… 바람 소리만 채우는 빈 밥그릇 몰고 다니는 구산댁 멍구도 낡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알아보고 덩달아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날이다 - 「노인 보호 지역」 부분  시집 전반에 걸쳐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는 시골 변두리의 풍경과 각종 자연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용한 시편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재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어딘지 낡은 시어가 동원되어 있고 시상의 전개에서도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한다. 이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풍경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의 절정”처럼 ‘지금, 여기’의 ‘양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공감의 눈높이가 선행되어야만 “손”으로 “꽃”을 만지는 합리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꽃”이 먼저 “손”을 만지는 ‘한순간의 절정’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화되어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 계몽과 자연의 화해는 가상이겠지만, 지난날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인용한 두 번째 시편에 드러나듯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맺기가 가능했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은 감정을 언어 없이 소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한 진심은 “구산댁 멍구”에게까지 전달되는데 ‘자연’의 언어는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말 없는 개의 외침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루한 농촌의 풍경이나 소외된 존재의 사연 등은 그것이 번화한 도시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의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임경숙의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공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고, 말 없는 개의 외침이 그러하듯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말 걸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목줄 풀린 “푸들”(‘자연’)이 수풀로 내달리는 대신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 낯선 풍경처럼(“급하게 누른 경적에도/ 푸들은 소리 나는 방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다”, 「선을 지키다」) “푸들”의 ‘자연’은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자연미’를 드러내곤 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자연’을 전유해 왔다면, ‘자연미’는 대상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억압과 왜곡을 넘어서는 영역을 가정하는 한에서 재현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된 영역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비동일자’로서의 시선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결빙 구간」의 “어미”와 “아이”의 관계처럼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가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립 가능성을 여는 시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작에 해당하는 「가시 많은 생」에서 짐작되듯이 “가시”의 은유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생선의 경우 수압에 저항해 몸의 형체를 유지하고 장기를 보호하는 ‘뼈’를 뜻하기도 하고, 요리되거나 타자의 소유물인 상태에선 이물질인 “가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보호를 위해 진화한 잎사귀를 떠올릴 때 그것은 본체(本體)의 일부지만, 꽃과 열매만을 취하려는 외부적 입장에선 접근을 방해하는 이체(異體)로 간주 된다. 도마 위에 준치 몇 마리 어머니 칼질 소리가 칼칼하다 검푸른 살 속에 무수히 박힌 가시가 납작하게 혼절해 가는 동안 살이 많은 물고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랐을까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들 썩어도 준치는 찬란한 맛이었다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진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완자 몇 알 삼키다가 맛있는 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박혀야 할까 내가 삼킨 가시는 몇 줌이나 될까 - 「가시 많은 생」 전문  살에 “가시”가 많은 생선인 “준치”는 대체로 “가시”를 발라 요리한다. 그러한 경우 발라낸 “가시”는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머니 칼질”로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지게 되면 버릴 것 없이 “준치”의 “가시”까지 온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인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요인이나 음식에 대한 추억 등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성 너머에 위치한다. “어머니”와 “준치” 사이의 비합리성을 공감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시인은 3연에서 “준치”의 본래 모습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처럼 “가시”가 ‘뼈’로 인식될 때 “준치”는 크기와 맛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벗어난다. 그러한 가상의 영역에서 시인은 생의 잔뼈가 지금처럼 굵지 않았던 “어머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처럼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웠을 소녀의 ‘자연’과 “준치”의 ‘자연’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난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이는 “어머니”의 사연은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 칼질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된다. “찬란한 맛”이란 억압과 고통을 견뎌 낸 자가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내미는 소통의 시도이고, “맛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자연’을 경험한 자들과의 소통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갈린 “몇 줌”의 “가시”처럼 소멸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관성적으로 “삼킨” 무수한 “가시”가 실은 뭉개 버린 ‘자연’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빚진 시의 부채이며,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와 “준치”가 공존하는 가상을 깨트리는 대신 현실 속 “뜨거운 완자 몇 알”만을 ‘자연’에 대한 시 쓰기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동일자로서 포섭되지 않은 “어머니”의 ‘자연’은 또 다른 시편(「외면」)에서 다시금 말을 걸 수 있다. “준치완자탕”을 끓여 주던 다정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도, 병 수발에 지친 딸이 “어머니”처럼 생의 잔뼈가 굵어지는 것도, 그런 딸의 “하소연을 단칼에 베어 내듯/ 누가 그렇게 살랬니?”(「외면」) 매몰차게 대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말 걸기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전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처 입은 여성과 노인, 삐뚤게 커 버린 청년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가해자이자 역사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아버지까지 이분법적 구도와 진부한 서술 방식, 후반부의 단정적인 감상 등 얼마간의 흠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산까치도 먹고/ 고라니도 먹고/ 밭 임자도 먹는”(「공평」)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견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러한 시작(詩作) 자체가 ‘가시’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미학에 기대어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경유하게 된 것은 ‘전통’과 ‘자연’에 대한 조지훈의 문장에서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2) 시에 대한 사랑이 생성해 내는 자연이야말로 ‘서정’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에 어울리지 않게 해석에 치중한 것은 ‘서정’에 대한 선입견을 걸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소망임을 고백한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연에 대한 공포가 고대 주술사로 하여금 미메시스를 통한 극복을 모색하도록 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불안이 추상 충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주장3)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인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탄핵 정국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 역시 예술이 어떤 형식적 미학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위해 어떻게 추상과 미메시스를 오가며 ‘운동’했는가가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운동성이 서정의 전통에 잠재되어 있다면 ‘자연미’의 재현이란 존재론적 닮기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유를 얻을 때, 우리는 “공기의 방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물리적 그물코」)는 시조를 읽을 수 있고, “가끔은// 제 가시(시)에 찔려// 흠칫 놀라”(「양심」)는 서정 시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왜 시문학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무수한 시편들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지 ‘서정’의 본령을 둘러싼 질문을 좀 더 우리의 삶 쪽으로 밀어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1) 계단처럼 수직과 수평에서 보이는 면이 각각 다를 때, 두 장의 그림을 계단의 수만큼 n등분한 후 수직면과 수평면에 잘라 붙이고 계단의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달라짐으로써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계단이 아닌 평면에서 구현하기 위해 상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 표시하는 지점의 위치가 변하는 작은 볼록렌즈를 붙인 것이 오늘날의 렌티큘러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도 벽면의 굴곡과 횃불이 비추는 방향을 활용한 원시 렌티큘러가 발견된다. 2) “참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詩生命)의 비의(祕義)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內在)하여 생성(生成)하는 자연(自然)’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지훈, 「시의 생명」, 『조지훈 전집 2: 시의 원리』(홍일식 외 편), 나남, 1998, 20쪽. 3) “감정이입의 자극은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무결한 신뢰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추상의 자극은 외부 현상들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내부가 매우 불안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 영역에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색조와도 관련된다.” 도라 바이에, 『추상예술』, 문고판, 1980, 21쪽(알랭 봉팡(김은정 옮김), 『추상미술』, 한길사, 2000, 15쪽. 재수록)

계간 시작 기혁 서정시시조현대시조자연자연미 2025
민가경 아이( )마음 ― 김복희, 『장타령』 외 9편

김복희가 내놓은 열 편의 신작 시와 에세이에는 이런 표현이 되풀이된다. "아 이 마음." 대관절 그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관데 그렇게 '마음' 앞에 가로놓인 괄호 안을 자꾸만 헤집고 기웃거려보다가 문득 멈춰 서게 되는 것일까. 마음 앞에서 여전히 체계적일 수 있다고 단단히 오해 중인 나. 그렇게 점점 더 체계적으로 오인되는 마음의 세계. 그 괄호를 특정한 하나의 마음으로 기입하기가 도리어 난망해진다. 마치 「춘향이 집 가리키기」의 화자가 "'나는'으로 시작"하여 '나'를 찾아가는 고된 여정 속, 술어의 배합에 의해 숱한 가능성들로 열리고 닫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나에게 나를 내"밀고 "되돌려받"고 있는 것처럼, 이 '마음'들도 자기 자신을 여러 줄 쓰고 또 거듭 지우며, "나는 / 나는 있다 / 나는 여기 있다"를 반복 중인지도 모른다. 말 없는 새 인간과 말하는 기계 인간을 지나, 죽어서도 말하는 귀신까지 지나쳐 온 시인이라면, 어쩐지 호랑이와 도깨비가 등장하는 전래 동화나 불가사리 설화 같은 초인과론적 테마를 경유해 시를 건네는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방점은 고전적이고 토속적인 요소를 유연히 패러디하여 펼쳐낸 타령의 재해석에 찍혀야 할 것 같다. 이 젊은 시인이 고전을 해체해 새로운 고전을 고안하며 겨냥했던 것은 과거와 현재의 대립각을 세워 세련되고 깔끔한 여과물을 건져내는 일보다, 역으로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켜 그녀만의 독특하고 혼종적인 오늘의 오드라덱을 건져내는 일이었을 테니.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잠시 시를 잊어보아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김복희 시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가끔 그 시의 견고한 짜임을 벗어나 일상의 비근한 곳에 한번 가보아도 좋다는 말이다. 어쩌면 바로 그곳이 사물과 제재의 맹아와 뿌리를 해체 중인 시인이 생의 풍부함을 제시할 자리일지 모르니까. * 「불가사리가」에는 오로지 침묵으로 말해지는 존재인 '불가사리'가 그 제재로 등장하고, "나에게 성 없다면 무엇 이어지랴" 물음을 던지고 있는 화자 '나' 역시 출현한다. 그런 '나'의 진술로 범박하게나마 유추하건대, '나'는 성(性)이자 성(姓)이라는 중의적 '성'의 연쇄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존재를 상상해보며, "다른 꾀 낸다"는 차원에서 기왕의 민간 설화 속 불가사리를 그 상상에 결합해내려는 듯하다. 불가사리가 환경조건에 따라 자기 생식법을 조정하고 자연적 성전환에 의해 유·무성 생식의 경계를 무화하는 존재라는 점을 떠올려볼 때, 타령과 함께 입안에서 불가사리를 퉤 뱉어내는 '나'는 기실 '성'을 없애려는 기획을 불완전하게 수행 중인 주체인 셈이다. 기존 설화 속 승려의 밥알로 빚어진 불가사리가 쇠를 먹고 거대한 몸집의 '불가살'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은 각종 문명의 수단들을 삼킨 혼종적 존재로서의 불가사리가 탄생하는 과정과 동궤를 그리며 김복희 시 안에서 전유된다. "꾀바른 불가사리"에 대한 타령이 시작된 후 불가사리는 자연·문화의 어렴풋한 경계뿐 아니라 성분화 이전의 태곳적까지 넘나드는 시간 축 위에서 숱한 문명의 지표들을 삼키는데, 화자는 이러한 불가사리를 깡깡 부수려는 사람들을 보며 잘못의 근원이 단지 '불가사리'인지 아니면 거대한 혼종적 존재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한 '나'인지를 묻는다. 그러다 문득 "성 없어도 사는데 / 아무 지장 없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생존 양식을 긍정하고, 동시에 "죽을 수 있어서 신통하다"는 말로 불가사리의 영생에 대한 연민을 보탠다. 요컨대 성분화 이전과 이후로 분기되는 모든 존재 양식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양자를 향한 긍정과 다독임을 하나의 '가' 형태로 번갈아 펼쳐내는 것이다. 또한 제목부터 동명의 속담을 내건 「밤비에 자란 사람」은 연한 밤비를 맞고 자란 연약한 존재에 대한 재해석을 예고한다. 이때 차용되는 제재는 다름 아닌 '도깨비'인데, 그 도깨비는 으레 우리 관념 속 위용 넘치는 모습은커녕 어째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고 있는 초라한 행색이다. 그 가방 안에는 "당신을 걸고 씨름을 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는 하루치의 시간이 담겨 있고, 그 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 원하는 것"이라는 점은 기실 작중의 도깨비가 계절을 관장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아프고 연한 이들도 도깨비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샅바를 잡고 씨름하"노라면 어느 순간 "씨름이 다 뭔지" 싶어질 것이고, 도깨비의 조화 안에서 비로소 "아픈 계절 사라지고 도깨비불 무성한 날"이 올 거라 한다. 즉 도깨비와 화자를 관통하는 하나의 타령은 기존 도깨비의 용맹함과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계절 바뀔 때 / 더 아픈 사람들", 그리고 "밤새 기침하"는 마른 존재들의 "기침 따라 후렴하는" 양태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령'이라는 양식의 반복적 등장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하나의 긴 구전 서사를 너스레나 타령 형태로 엮고 민담적 삽화를 구수한 언어로 우려내는데, 그 안에는 남북한 상공을 지나가는 산타랄지, 밤비에 자란 말라깽이 도깨비랄지,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호랑이와 같이 '환상적인 제재의 현실적인 것으로의 패러디'나 호의를 베풀다가 살의에 노출된 곰의 이야기나 불가사리 노래와 같이 '환상적이지 않은 제재의 환상적인 것으로의 패러디'가 가득하다. 물론 그 제재들의 속성이나 의미의 파악이 선결되지 못할 경우 이 영리한 설계가 무용해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과거와 미래가 뒤죽박죽 비틀린 와중에도 안 짚고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곡진한 시적 대상들의 '마음'이 비춰질 때, 독자들은 기계적인 호기심이나 궁극의 결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아닌, 그 유쾌하고 정감 있는 활동 그 자체에 이끌려 가게 된다. 특히 그 개별적 마음의 주관성이 집요하게 관조될 때 어렵지 않게 읽히는 것은 시인이 제재를 취급함에 있어 그 마음의 근원을 비추어 알려는 '조심(照心)'의 태도이다. 마음은 형태도, 질감도, 파동도, 이름도, 소문도 없어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데, 조심은 이러한 마음을 '비추는' 또 다른 '마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것은 어쩌면 어떤 윤리의 영역보다 말 그대로 마음의 실상을 비추어 보려는 미적 영역에 가까운 셈이다. * 그런 김복희식 전유의 서막을 여는 「장타령」은 한국판 집시이자 악사(busker)의 전신이었던 '각설이'의 타령을 시인의 관점으로 재해석해본 것이겠다. "각설이 온 마을 온 집 구걸하듯 / 시작하겠다"고 자신의 등장 목적을 알리며 시작되는 타령은 기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에 내포된 일방향적 관계를 비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이인 '나'가 '너'의 곳간을 개방하라 요청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보리알"과 "깨끗한 잠"처럼 초라한 것에 불과할지언정 '나' 역시 네게 개방할 인심이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고기」 또한 속담 '까마귀 고기 먹다'의 유래를 해부 중인데, 그건 염라가 저승사자 강림에게 부친 편지를 전달하러 가던 까마귀가 강림에게 향하던 도중 탐스러운 말고기에 사로잡힌 바람에 존재들의 생사가 선입선출 아닌 무작위의 원리로 바뀌게 된 일화이겠다. 여기서 시인의 해체적 상상력이 뻗어 나가는 곳은 '생'을 향한 맹목적 의지에 추동된 까마귀의 실수로 인해 "아무 비둘기나 거두어 가"는 것을 제 상숫값으로 취급하게 된 '죽음'의 원리를 시정해보려는 자리에 있지 않다. 단지 이 생과 사의 딜레마적 순환 안에서 내일이 담보되지 않은 존재들의 연약한 생이 어떻게 "오늘 본 아름다운 것"과 "오늘 본 귀여운 것"들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지 초점해보려는 데에 있다. 그래서 화자는, 작은 부리로라도 무언가를 먹겠다는 생의 의지를 보며 차라리 그 "강냉이"를 "더 잘게 부숴 주는" 방식으로 세계를 같이 살아가 보려는 것 같다. 강림의 적패지 안에 "이제 없는 비둘기가 / 그려져 있는" 광경을 "오늘 본 / 아름다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보려는 것도. 그뿐만 아니다. 「나는 새에게 여기 앉아라 저기 앉아라 할 수 없음」 속 화자는 "딸기 한 알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자코 본다". "집중해서 조금만. / 조금만 더" 관찰한다. 은근과 끈기의 관조 다음, 화자는 어렵사리 "딸기는 파리하고 여위고 마르며 닫고 막고 막힌 과일"이라 나열한다. 이때 딸기를 설명하는 수과(瘦果, achene)의 어원 '카이네인(χαίνειν, khaínein)'이 입을 크게 벌리는 행위에서 유래하였듯, 화자는 딸기를 '수과'로 취급하기 위해 "한 입을 갖추어 / 내민다". 그리고 "혀에게 지고 이에게 지는 단단한" 그것의 미덕처럼 딸기를 "새가 먹을 수 있게 조금" 남겨두기로 한다. 이때 딸기는 어딘가로부터 여기로 온 것(which is coming)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론 화자의 관찰에 의해 '딸기'를 이루는 낱낱의 속성을 합쳐야만 오는 '온 것(the whole thing)', 즉 '전부'의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섬세함은 장악 또는 파악의 욕망보단 인간의 한계에서 그 제재에 어떻게든 닿아보려고 노력하려는 자세로 읽혀야 한다. 당장 「부처님 가운데 토막」 속 "아무리 쓸어도 만져지지 않"는 "갈피 안의 몇 글자"를 헤아려보려는 화자가 바로 그 모델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갈피'는 "건드릴 수 있"을지언정, 채 다 "만져지지 않는 것"이라는 진술은 엄연히 "손끝에 걸리던 것"들의 '갈피'를 최대한 섬세히 살펴보려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어쩐지 "오늘 만진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빼고" 개 허리를 "살살 더듬"으려던 아이의 자세와 닮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김복희의 많은 시적 대상들은 자기 의도와 실제 행위가 초래한 영향 간의 낙차로 인해 숱한 탄식을 뱉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곰의 친절」 속 곰은 작은 토끼를 돕고 싶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그 단순한 호의가 상대를 죽이는 살의가 됐다나 뭐라나. 에세이 「환절, 호랑이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기록」 속 호랑이 된 남자 역시 엉겁결에 "아내를 죽이고 노모마저 죽인 살인자", 아니, 살인 호랑이가 되어버렸다나 뭐라나. 이렇게 호랑이 담배 연기 뒤로 흩어지는 설화와 함께 흘러 들어온 시인의 질문 "여기서 호랑이 됨은 일종의 은유일까요"의 의미만은 가볍지 않은 것이라, 부유하지 못한 채 다만 무겁게 침전될 뿐이다. 그 낙차는 「하려던 말의 반만 하는 모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중 화자의 진술에 따르면 세계는 온통 말로 이뤄져 있어 몹시 험한 곳인데, "말 흘리고 나면" 그 순간부터 "그림자를 지고 따라오는 존재들"이 툭 튀어나온단다. 그래서 존재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화자의 마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게 최선 같은데, 막상 존재들은 "그림자를 밤에 숨겨서라도 세상에 나가 돌아다니고 싶어" 하고, 빛도 안 드는 비 오는 날 굳이 밖으로 나가 "살아 움직이려고 냄새 풍기려고 / 마음 움직이려고" 한단다. 이렇게 재차 화자의 선의를 좌절시키는 존재 본질의 속성이 괴리로 발현될 때, 화자는 존재를 존재로서 만드는 장소가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지, 그리고 "생각 속에도 세상이 있"긴 한 건지 질문하다가, 결국 "망아지 송아지 강아지는 어디로 올까"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제목처럼 '하려던 말'의 절반만 내뱉는다는 것은, 어떤 존재를 마음이라는 내부에 간직해 은밀히 보호하려는 노력과, 온전히 통제되지 않고 바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려는 존재를 속수무책 물끄러미 바라봐주려는 노력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김복희의 이야기 구석구석에서 존재들이 거니는 "계절과 계절 사이"는 사실 그 미지의 기표 틈으로 연약한 너와 내가 갈피갈피 교통하는 공간이자, 서로를 마음껏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겨진 장소 아닐까. 그 공간과 장소의 또 다른 이름은 '마음'일 테다. 이 마음들은 수많은 괄호에 의해 부연될 수 있는 공백이면서, 동시에 어떤 확률에선 전혀 설명될 수 없는 영원 미결의 공백이기도 하다. 이게 바로 김복희의 글에서 "아 이 마음"이 노래화되어 의미 없는 여음구로서 각각의 타령들을 하나로 집합시키는 hook처럼 기능하고 있는 이유이다. 음성적 효과를 보존한 대신 의미만은 비워놓아 갈 길 잃은 마음들이 잠깐 쉬었다 가는 곳. 어딘가로 직접 향하고 싶긴 한데 결정적으로 그 접근법을 잃어버린 어떤 마음이 "아 이 마음"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본래 묘함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마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또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도 하니까. 조심도, 무심도 아닐 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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