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여성의 말 — 한강 소설의 몇 장면들
여성의 말
— 한강 소설의 몇 장면들
인간은 언어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말을 배우기 이전의 시절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언어 없는 상태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의 기억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은 “몸속에는 말이 없”(『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p. 67)었다는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만남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말을 잃은 여자의 상태가 바로 우리 몸속에 말이 없었던,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에게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말을 배우기 이전의 시간에 대한 사후적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말문이 막힌 그녀가 타인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다면 ‘몸속에 말이 없’는 상태인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숱한 생각들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은 언어화되지 않은 채로 어떻게 스스로에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남자의 일인칭시점과 여자의 삼인칭시점이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 그래서인지 여자가 초점이 되는 장에서는 시점도 문장도 다소 불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강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여자에게 말이 없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말이 없는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 없는 여자의 행동들만이 제삼자의 관찰자적 시선에서 건조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여자의 내면은 충분히 상세하게 설명될 수 없다. 언어가 사라진 여자의 내면은 애초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읽는 일은 꽤 혼란스럽다.
말을 잃은 뒤 처음으로, 그날 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고 언어 없이 생각했다. 두 눈이 저렇게 고요할 수는 없다. 피나 고름, 더러운 얼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면 오히려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속에 침묵하는 그녀가 비쳐 있고,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침묵하는 그녀가…… 그렇게 끝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p. 62)
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言)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p. 67)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p. 92, 강조는 인용자
여자의 행동들이 묘사되다가 머릿속 상념으로 서술이 이어지지만 이내 “언어 없이 생각했다” “몸속에는 말이 없다”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상념에 대한 서술이 의식적으로 중지된다. 말을 잃은 뒤 처음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피나 고름, 더러운 얼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침묵하는 자신이 거울과 눈동자 사이로 끝없이 반사되어 보이는 그 고요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밤길을 걸으며 언젠가 그 길을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걸었던 적이 있다고, “몸속에는 말이 없”는 지금은 그때처럼 분명하고 강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말없이 잠자코 여러 번 마주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점차 낯선 얼굴에서 “낯익은” 얼굴로, “평범한” 모습에서 “고유한” 모습으로 달리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의미 부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말을 잃은 고통도, 강렬한 당혹감과 수치의 감정도 그리고 남자에게 느끼게 된 어떤 낯선 익숙함도 그녀는 언어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그녀는 말없이 말하고 있다.
언어 없이 인간의 내면이 정확히 말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희랍어 시간』에서 여자의 내면은 일인칭으로는 말해질 수 없고, 대신 말해진 그녀의 내면은 온전히 그녀의 것일 수 없다. 위와 같은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몸속에 말이 없는 그녀의 상태를 언어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언어화된 머릿속 상념들을 일부러 중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언어장애는 말에 대한, 말로 하는 사유에 대한 자발적 거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을 잃기 전, “팔 년 전에 그녀가 낳은, 이제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무렵, 그녀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를 꿈꾼 적이 있었다”(p. 20). 여자는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p. 21)를 원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p. 12)이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반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으며 수년 전 이혼한 후 소송 끝에 최근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겨버린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러한 사건들이 언어장애의 분명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사에게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p. 13)라고 반복해 말한다. 문학을 강의하고 시와 칼럼을 쓰며 언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해온 그녀는 어려서부터 언어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p. 15). 언어에 관한 그녀의 강박적 거부감은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심인성 증상이 그러하듯 언어로 자행된 세계의 폭력적 사태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포식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인으로서 섭식장애를 앓다 급기야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던지고자 했던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정신이상 증세를 떠올린다면 『희랍어 시간』의 여자가 겪는 이러한 언어장애도 사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언어를 업으로 삼는 그녀에게 언어장애는 영혜의 정신이상처럼 전면적인 데가 있다. 학창 시절 겪은 최초의 언어장애를 낯선 외국어 소리로 극복한 경험을 기억하며 그녀는 지금, 사용가치를 잃고 존재 가치만 남은 희랍어를 배우면서 완전한 말을 기다린다.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의 비대해진 내면을 일인칭시점으로, 말을 잃은 여자의 말해질 수 없는 내면을 삼인칭시점으로 교차 서술하던 이 소설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손가락 글쓰기를 활용해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여자의 내면이 생성되고 말문이 터지는 순간을 그리며 끝이 난다. 여자의 일인칭시점으로 서술이 전환되어 있는 “심해의 숲”은 거의 한 편의 시와 같다. 마침내 여자가 언어를 되찾으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말하는 순간들이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심해이기도 깊은 숲이기도 한 어둠과 침묵의 공간에서, 즉 “빛도 목소리도 없는”(p. 187) 곳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 있다. 각자 몸의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p. 123)을 서로 감싼 채 어루만져주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그대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목에 팔을 감았어요”(p. 188)라고 말한다. 그 어둠과 침묵의 공간은 벗어나야 할 곳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서 함께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나는 숨을 멈췄어요.
당신은 계속 숨을 쉬고 있었어요.
계속 당신의 숨소리가 들렸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떠올랐지요.
먼저 수면의 빛에 어렴풋이 닿고,
그 다음부터는 뭍으로 거세게 쓸려갔어요.
두려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맞추었지요. (pp. 188~89)
수면 위의 세계는 빛이 있고 언어가 있는 세계이다. 이제 곧 영원한 어둠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남자와 말을 잃어 캄캄한 침묵 속에 있는 여자는 지금 수면 밖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희랍철학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탐독하며 언젠가 완전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갈 자신의 불안을 다스리고자 했던 남자에게 독일인 친구 요하임 그룬델은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라고 가슴 아픈 직언을 하곤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삶을 살던 요하임에게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pp. 118~19)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하임을 잃은 남자는 슬픔과 후회 속에서 그 안온한 침묵과 어둠의 공간을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숨을 쉬어본다. 숨을 멈추었던 여자도 남자와의 접촉을 통해 두려움 없이 울음 없이 수면 밖 빛과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어루만지며 자신이 거절당하고 있는 혹은 스스로 거절했던 세계로, 빛과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이 “플러스의 빛이 있”는 진짜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일인칭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불어 몸속에 언어가 없는 여자의 상태가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에게 온전히 감각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남자의 목소리를 좇으며 읽게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는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주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듣고 있나요?”(p. 148)라고 수시로 확인을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작은 기척으로 대답을 하는 식이다.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대화하기도 한다. 이때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작중인물인 여자만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은 기척을 내며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여자의 입장으로 초점을 이동하고, 이어지는 “심해의 숲”과 “0”에서 마침내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여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심해에서 숨을 어렵게 내쉬듯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p. 191)을 두려움과 함께 혹은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경험을 독자 역시 온몸으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p. 59)이라고 느끼던 여자는 남자와의 껴안음을 통해 숨을 쉬며 삶을 되찾고자 한다. 『희랍어 시간』은 존재를 포기하고자 했던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어떻게 삶을 선택하기로 했는지를 상상해보는 소설과도 같다. 그것은 연약한 곳을 어루만지는 포옹과 입맞춤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p. 191)는 힘겨운 다짐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둠의 공간 속에서 죽음처럼 침묵하는 것 말고도 이 세계의 폭력을 거절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한강은 끝끝내 말해보고자 한다. 말라버린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
한강 소설에는 외부로 향하는 말보다 내부로 침잠하는 말이 더 풍성하다. 그런 점에서 『희랍어 시간』에 등장하는 ‘몸속에 말이 없는’ 여성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언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특별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어떤 언어가 완벽히 ‘자족적인 언어’이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소망에 가깝다. 단단한 말로 응집되는 순간 우리가 느낀 것은, 생각한 것은, 말하고자 한 것은, 모두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리거나 의외의 것들이 길어 올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랍어 시간』 속 여자는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p. 87)고 생각한다. ‘자족적인 언어’는 어쩌면 침묵 속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에도 침묵에 육박한 말들이 꾹꾹 눌러져 담겨 있다.
한강에게 말하기란 혹은 쓰기란 ‘아문 상처를 벌리듯’(「새벽에 들은 노래 3」) 힘겹게 “부서진 입술”을 벌려 “어둠 속의 혀”를 녹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만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고통”(「피 흐르는 눈 3」)스러운 감행이기도 하다. 안온한 심해의 공간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며 수면 위로 올라오고자 하는 행위처럼 말이다.
온전히 ‘자족적인 언어’이기를 꿈꾸며 쓰는 한강의 ‘시적 산문’은 언제나 고통의 언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이나 존재의 상실, 끔찍한 비극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문장으로 적힐 수 있는 것일까. 5월 광주를 다루는 『소년이 온다』나 제주 4·3을 다루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특별해지는 것은 국가적 재난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오랫동안 말해지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한강의 두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소년이 온다』의 모든 문장은 고통스럽게 읽히지만, 그 어떤 문장들보다도 처참하게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은 ‘동호’를 비롯한 소년들이 나란히 죽어 있는 사진에 대한 상상이다. 어른들이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p. 133) 다섯 명의 아이는 나란히 총에 맞아 직선으로 쓰러져 죽었다. 이 장면을 적당한 말로 쓰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이 두 편의 소설에서 여성들의 말하기에 주목해보고 싶다. 『소년이 온다』에서 도청에서 체포된 ‘선주’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5·18 연구자로부터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요청받은 선주는 증언을 거부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p. 166)라고 마음속으로 항변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 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p. 166~67)
‘당신’으로 지칭되고 있는 선주는 자신이 겪은 일과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고통을 ‘그것을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증언할 수밖에 없다. 혼잣말처럼 내뱉어진 선주의 이 불가능한 증언들을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로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선주의 증언이 끔찍한 독백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라는 이인칭의 호칭 때문이기도 하다. 한강의 문장들은 이처럼 증언 불가능 자체를 재현하는 형태로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직접 들려준다. 증언이 아니라 재현이, 기록이 아니라 문학이 된 5·18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더 선명히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온전히 여성들의 말하기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등장했던 작가는 이 소설에서 ‘경하’라는 이름으로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 5·18에 관한 소설을 쓴 직후 한강은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심겨 있는 장면을 꿈속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지평선으로 보였던 벌판의 끝이 바다였음을 그리고 곧 밀물이 밀려와 검은 나무 뒤편의 봉분들에서 뼈를 쓸어 가버릴 것임을 직감한 그녀는, 물에 잠겨가는 검은 통나무와 뼈들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잠에서 깬 일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경하의 꿈으로 소설 속에 그대로 등장한다. 그즈음의 경하는 지속되는 악몽과 몇 차례의 사적인 작별 경험 그리고 위경련을 동반한 편두통 등을 겪으며 죽음을 결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살아서 할 일이라고는 유서를 완성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겨우 살아내던 경하는 어느 날 친구 ‘인선’의 호출을 받고 제주의 중산간 외딴집에 홀로 남아 있는 인선의 앵무새 ‘아미’를 살리러 끔찍한 눈보라를 헤치며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홀로 목공을 하다 손가락 마디 두 개가 절단된 사고를 겪은 뒤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서울로 이송된 인선은 봉합한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상처 부위를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울의 한 병원에 누워 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에서 죽은 자,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자, 살아남아 죽음을 선택한 자, 죽은 자의 가족 등 여러 희생자의 목소리를 통해 5·18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와 인선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라는 세 여성을 축으로 하여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여성들의 말하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오빠를 찾기 위해 온 생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는 정심, 그녀가 남긴 자료들을 읽으며 그 빈 곳을 메워간 정심의 딸 인선, 인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경하.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이 이 소설을 구성하는 인물들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피해자나 생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기보다는 그들을 목격하거나 추적했던 인물들을 통해 그 비극을 ‘다시’ 쓰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정심의 유족회 활동이나 인선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경하의 꿈 등은 이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4·3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선이 경하에게 정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결국 작품 전체가 4·3의 재현을 위한 서막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심을 인터뷰하고자 했던 인선의 다큐멘터리 기획은 질문도 없이 혼잣말을 하는 자신의 인터뷰로 바뀌어 진행되기도 했다. 이제 그 완성되지 못한 다큐멘터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인선은 제주의 집에서 경하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빨갱이” “절멸”(p. 220)을 목표로 1948년 겨울부터 미군정이 무장대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 수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며, 한강은 피바다가 되었던 제주의 바닷속에 땅속에 함부로 매장된 그들에 대한 애도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야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제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비극을 가장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작가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겹겹이 포개져 구덩이에 버려진 수천 명의 사람은, 언니들을 찾아 총을 맞은 채로 집까지 먼 길을 기어 온 어린 아기는,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이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p. 226)하게 밤사이 시체들을 전부 쓸어 가버린 제주 바다의 썰물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5년간 갇혀 지내야 했던 세월은,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p. 225)던 광경을 바로 자기 집 방문 구멍을 통해 지켜봐야 했던 사람의 남은 생은, 어떻게 단번에 말해질 수 있을까. 결국 국가폭력을 다루는 한강의 말하기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기,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말하기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진실된 재현일 수밖에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독자가 가장 진심을 다해 읽어내야 하는 것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살고 있던 경하가 작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눈 속 장면이기도 하며, 한 공간에서 함께 있을 수 없는 경하와 인선이 경하의 꿈인 듯 인선의 꿈인 듯 따뜻한 공간에서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기도 하고, 죽은 가족의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내던 손길을 기억하며 생사를 알 수 없는 오빠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정심의 ‘실톱’을 품은 듯한 마음이기도 하다. 서울의 병상에 있어야 할 인선이 다치지 않은 매끈한 손으로 경하가 있는 자신의 집에 되돌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경하는 “네 생각을 날마다 했는데 정말 네가 왔어”(p. 320)라고 말한다. 설사 죽은 영혼을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따뜻한 사람에게 데려다주는 것이든, 아프고 피 흘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꿈처럼 현실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든, 그 간절한 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구한 간절함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인선과 경하는 눈부신 눈 속에서 정말로 따뜻하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p. 325) 미약한 불꽃이 솟아나는 그곳에서.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말하기는 이처럼 여전히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시적 산문’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 폭력의 세계에서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처절함, 죽은 것을 되살리고자 하는 간절함,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무구함에 있다. 결국 여성들의 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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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할 수 없는 균열 예측 불가능한 일들의 연속.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을 이렇게 표명한다면 분명 많은 이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공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문제들을 자주 다루는 작가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해보건대 두 사람의 소설에는 독특한 사건들이 꽤나 자주 등장한다.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어딘가 금이 가고 삐걱대는 삶 앞에 속수무책으로 던져진 사람들로부터 시작한다. 특히 김지연의 인물들이 해괴한 일을 직접 나서서 ‘벌이는’ 사람들이라면, 안윤에게는 그러한 일을 마주한 뒤 이전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행위들은 어쩐지 무모하고 무용해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효용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아무거나 믿거나 믿어야 할 것을 믿는 일을 거부하고, 확신할 수 없지만 옳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이들의 동작은 곧 일상의 균열을 마주하는 자세와도 같다. 사람들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확인하는 작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온해 보이는 세계를 지적하려면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계의 균열은 쉽게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다. 그렇다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까.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그러니 이상하고 유별난 인물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면, 잘 봉합된 듯 보였으나 결코 다 가릴 수 없었던 세계의 미세한 틈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2.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보기에 『조금 망한 사랑』은 체념과 포기를 반복하는 망한 인생의 집합소 같다. 전세 사기, 금전 관계에 있던 친구와 애인의 배신, 실직과 구직난처럼 신자유주의와 투기 자본주의의 광풍에 베여 너절해진 인물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런데 『마음에 없는 소리』(문학동네, 2022)를 읽었던 이들이라면 세태를 첨예하게 부감하고 표현하는 적실함뿐만 아니라, 농담과 같은 특유의 가뿐함이 김지연 소설의 또 다른 활력이라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테다. 이번에도 다소 무겁고 무기력해 보이는 사정들 틈에 유별난 광경들이 돋보인다. 이른바 김지연식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68)다. 몇 가지 사연만 잠시 나열해보자. 양육권을 포기했던 아이를 말 그대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다시 키워볼 생각을 하면서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여자(「좋아하는 마음 없이」). 빚만 잔뜩 남기고 떠난 전 여자친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우는 아이러니를 겪는 레즈비언(「반려빚」). 달밤에 무덤 사이를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고(「포기」) 출입이 금지된 저수지의 한가운데까지 기어코 노를 저어 도달했다는 일화(「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까지. 소설의 인물들은 왜 자꾸만 이상한 일을 벌일까. 김지연의 소설은 삶이 이미 망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망해 나가리라는 잔인한 현실 공식을 동력 삼는다. 그곳엔 “반려빚처럼, 있어서는 안 되는 것도 태연하게 있”(「반려빚」, p. 104)고 누군가는 “있는 놈들을 위해 아주 싼값의 육체노동에 부려지”(「경기 지역 밖에서 사망」, p. 42)지만 이토록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제도도 없”(「반려빚」, p. 96)다. 자본의 바깥을 떠올리는 일조차 돈의 힘에 기대야만 가능한 오늘날, 소설 안팎의 현실을 살피며 저항의 포기를 물었던 우리에게 김지연은 두 가지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 설명 혹은 주장하기. “소리 지르고 때려 부수는 것만이 화내는 방식인 건 아니잖아요.”(「좋아하는 마음 없이」, p. 151) 둘, 괴상망측한 행동들을 늘어놓기. 그런데 짐작과 달리 이때의 망측(罔測)은 망할 망(亡) 자를 쓰지 않는다. 그물[网]과 망함[亡]이라는 뜻이 더해진 한자[罔]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그러진 상태를 가리키면서도, 완전한 끝을 잠시 유예하는 힘을 발휘한다. 망측한 일은 낯부끄러울지언정 완전히 망하지는 않은 무언가다. 그런 일을 벌이는 사람 역시 조금 망그러졌을지라도 여전히 어딘가에, 누군가와 분명히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폐기된 존재를 망가진 상태로라도 끌어올리려는 작가의 수고로움이 와닿는다면,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다. 그들은 차가운 현실이야말로 ‘진짜 해괴한 것’이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지연이 말하는 포기는 더 이상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에 가깝다. 그런데 인물들은 먹고살기에 급급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망한 삶이 평범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괴이한 공식을 꼼짝없이 따라야만 해서 포기한다. 그래서 「포기」에서 거듭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p. 19)은 자본에만 기를 쓰고 달려드는 평범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문제 삼는 계기가 된다. ‘미선’과 그녀의 사촌 ‘호두’는 주변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사라진 미선의 전 남자친구 ‘민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런데 미선과 호두는 물론이고 민재를 찾는 이들은 대부분 돈을 돌려받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그저 민재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의 행방을 살피고, 신고를 권하면 “그렇게까지?”(p. 16)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막상 민재에게 정말로 닿을 것만 같은 순간엔 발을 뺀다. 민재는 돈을 가지고 도망쳤기에 평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특별한 사람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민재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들의 차이를 세세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설명은 “왠지 말이 안 되는 이유들도 납득하게 되는 순간”(p. 23)들을 만드는 힘이 있었고, 각자도생과 효율성을 제일로 섬기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받았던 도움은 민재의 이런 성격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니 민재는 자금난이라는 평범한 사정 때문에 결국 평범해져버린, “완전히 나쁜 사람”(p. 16)일 수만은 없는 사람이다. 이렇듯 아무리 애써도 포기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만둠은 포기 자체를 미루고, 돈만을 좇게 만드는 기존의 “미친 짓”(p. 12)을 중단하고 새로운 “미친 짓”(p. 28)을 가능케 한다. 술에 취한 호두와 미선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의릉에 들어가 “이상한 괴성”(p. 30)을 내지른다. 한 번쯤 누군가 불가능한 시간에 난립하는 걸 보고 싶었다던 남자 덕분에 “예상 밖의 방향”(p. 28)을 향해 내달릴 가능성이 반짝이며 움튼 순간이다. 망해버린 인간관계와 삶 속에서 건져 올려진 이 희한한 야행은 두 사람이 잃어버린 진짜 호두가 의릉에서 나무로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끝을 지연시킨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려면 불운을 껴안아야만 하는 현실에 낭만이 끼어들 자리는 협소하다. 결국 각서를 주고받은 뒤에도 또 한번 배신당한 호두는 민재와의 관계에서 “정말 원하지 않던 포기”(p. 37)를 하고, “나중으로 미루는 버릇”(p. 25) 때문에 민재와 만날 가능성마저 미룬 미선 역시 연결될 방법을 끝내 포기한다. 기존의 삶이 반복되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희미하게 만드는 자본의 견고함을 김지연은 결코 만만히 생각하지 않는다. 「반려빚」에서 전세자금대출과 전 연인 ‘서일’이 남기고 간 빚을 갚는 ‘정현’의 삶은 숨 쉬듯이 “매 순간 돈에 대해 생각”(p. 76)해야만 하는 하루들로 빼곡하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관계 중 하나인 연인 사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돈이 “제법 중요한 요소”(p. 84)로 호출되고, 유일한 반려의 자리에는 빚이 올라앉은 정현의 세계를 보면, 「포기」에서 미세한 틈을 열어젖혔던 망측함이 결국 잇속 빠른 자본주의의 환상에 불과한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할 수 없는 것만 가득한 날들 속” 유일하게 “할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일이 전 연인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일 때,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을 만큼 망한 듯한 인생의 내력을 모조리 아는 이가 자신을 망하게 한 장본인뿐일 때, 서일과 다시금 함께 있고 싶은 “정신 나간 마음”(p. 89)이 고립과 단절로 내몰려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된 불모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탓이다. 그래서 김지연은 평균치의 삶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나선다.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가 탄생한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이혼한 전 남편의 부고를 내연녀였던 ‘그녀’로부터 전해 듣는다. 이외에도 그녀는 전남편의 보험금 수혜자가 안지로 되어 있고, 이혼할 때 두고 온 아들 ‘성준’이 안지와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안지에게 전달한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묘한 구석이 있다.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안지의 말에 “누가 벌을 주는데요?”(p. 142)라고 되묻고, 미안해할 겨를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술술 털어놓으며, 이제껏 키워온 성준은 누가 뭐래도 자기 아들이지만 양육비는 보태달라는 염치없음까지. 하지만 안지는 바로 이 뻔뻔함이야말로 전남편과 똑같은 “여자의 장점”(p. 154)이라고 생각한다. 안지가 보기에 전남편은 “집을 해올 형편”(p. 149)을 갖춘 “좋은 사람이”(p. 159)었지만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p. 161)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형적인 사람”(p. 137)으로 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어온 안지는 스스로가 “아주 평균적인 삶”(p. 139)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남편과 이른 결혼을 했었다. 호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선택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안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남편과 여자는 정확히 안지의 정반대편에 선 사람들이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이혼을 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솔직한 사람. 숨기느니 차라리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사람. 그래서 뻔뻔할 수 있는 사람”(p. 158)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지는 이들의 뻔뻔함을 겪고서 “조금 더 자기 자신에게 가까운 삶을 살게 되었”(p. 137)다고 믿는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를 탐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지의 가족들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고, 때문에 안지의 삶에는 “그 사람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내렸던 선택들”(p. 163)이 수두룩하다. 반면에 현재의 안지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재혼하고,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이상한 대회들을 연다. 분명한 미래가 아니라, 잘 그려지지 않는 미래를 골똘히 떠올린다. 그래서 안지는 전남편과 그녀, 아이가 있는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p. 165)을 훔쳐 지갑에 넣고 다님으로써 “해괴한 에피소드 대회”의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여자를 다시금 우연히 만난다면 되돌려주겠지만, 그때까지는 그들에 관해 거듭 생각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삶인지 단정하지 않기 위해 끝을 한없이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전남편과 관련한 모든 일로부터 그저 멀어지고 싶었던 안지는, 그렇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연루되지 않음으로써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두고 보기를 택한다. 계산하고 판단한 “확신”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그들의 방식처럼 “선명하고 분명한 감정”(p. 161)이 있는 삶의 방식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해괴하고 이상한 것의 가능성은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 이르러 더욱 커진다. 재개발이 예정되어 누구든지 마음껏 열매를 가져가라고 전달받은 ‘나’와 ‘삼촌’은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던 도중 땅에 묻힌 상자를 발견한다. 기대감을 안고 열어본 결과, 그곳에는 “알 수 없는 썩어 문드러진 쓰레기”(p. 271)만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상자를 내동댕이쳤던 ‘나’는 서사의 마지막에 이르러 “어쩌면 영영 썩지 않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p. 289)에 도달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1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숙모’와 그의 아들 ‘민재 오빠’를 애도하는 ‘나’와 삼촌의 시간과 연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촌보다 열 살 많은 나이에 아이까지 있는 이혼녀였던 숙모의 세세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매번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 짝사랑 상대의 엄마인 그녀를 싫어해왔다. 하지만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던 숙모가 췌장암으로 사망한 전남편을 떠올릴 때마다 사는 게 너무 달아서 미안함을 느끼는 모습을 목격한 뒤, ‘나’는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자신이 싫어하던 사람을 닮아버린 순간부터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없게 되었다던 숙모의 말처럼, ‘나’ 역시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일이 마냥 괴롭게만 느껴지지는 않게 되면서 변하는 것, 썩는 것을 긍정하게 된다. 해괴해지지 않는 것은 없다. 오히려 왜곡과 변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상태 변화를 맞이하는 것이 더욱 유의미한 일일 수 있다. 밀봉하지 않아 썩어버린 자리에서 공벌레가 새롭게 자리를 틀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망측하긴 해도 망하지 않은 인생. 김지연의 소설은 우리에게 그런 인생들의 가치와 가능성을 펼쳐준다. 3. 잃어버려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 『남겨진 이름들』(문학동네, 2022)과 『방어가 제철』(자음과모음, 2022)에서부터 주목받았듯이, 안윤 소설의 중핵에는 ‘상실’이 자리한다. 이에 조금 더 안윤스러운 특징을 부여해보자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상실’이라 고쳐 부를 수 있겠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잃은 인물들이 겪는 상실은 기이하다. 의심 없이 정상이라 믿어왔던 체계가 뒤틀린 채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어짐이 꼭 불행해야만 할까. 균열을 되짚으면서 우리는 모자람에 몸서리칠 뿐만 아니라, 온전함을 “새로이 감각”(「틈」, p. 237)해볼 수도 있다. 사라진 이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일깨워준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안온한 세계는 허상이고, 그것은 위태로운 누군가의 현실을 말끔히 소거해야만 가능하다는 것. 금이 간 세계의 틈새로 유실된 존재들이 있다는 것. 이를 마주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보편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과 괴리를 좁힐 수 없는 인물들의 선택이 어쩐지 생소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의 결단 덕분에 기이한 감각들은 응달에 고여 있지 않고 변주된다. 안윤의 소설에서 기괴하고 낯선 기운이 세계를 다시 쓰는 역량으로 옮아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밀을 알아차린 뒤 다른 삶을 향해 몸을 트는 인물은 우선 「핀홀Pinhole」에서 만나볼 수 있다. 직장 동료로 처음 만나 4년을 사귄 ‘보라’와 ‘승원’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평탄해 보이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비밀’이 드러나면서 전연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제목처럼 소설에서는 바늘구멍처럼 아주 미세할지라도 분명한 틈을 내는 질문들이 등장한다. 첫번째, “비밀 하나씩 얘기할까”(pp. 55, 75, 88). 소설에서 총 세 번 등장하는 이 질문은 모두 보라로부터 나온다. 비밀은 수치스럽거나 비정상적인 치부들을 의미한다. 보라에게 딸들을 버리고 갔던 엄마와 새아버지, 이복 남동생이 있다는 복잡한 가정사 같은 것들. 보라는 비밀을 들추거나 캐묻지 않는 승원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이렇듯 보라가 감추고 싶은 것, 감춰야만 하는 사실들을 응시하고 발화하는 인물이라면 승원은 비밀 앞에서 “짧은 침묵”(p. 56)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될수록 승원의 침묵은 배려가 아니라 자신의 비밀을 덮기 위한 자구책으로 드러난다. 보라는 어느 날 중증장애인 거주 시설의 실태를 고발하는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의 메시지를 통해 외동으로 자처해왔던 승원에게 마흔넷의 중증장애인 형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경진은 부모가 강제로 입원시킨 시설에서 관계자들의 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걸로 보이는 정원의 사인을 밝히고 그의 삶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원의 가족들로부터 무시당했다. 두번째 질문은 경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승원씨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세요?”(p. 61). 모든 것이 그렇게 돌연 생경해진다. “경험해본 적 없는 단란한 가정의 화기”(p. 72)는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연하게 통제된 느낌”(p. 73)을 주고, “앎의 정도를”(p. 66) 고려할 필요 없이 가까웠던 승원은 “엄연한 타인”(p. 53)으로 다가온다. 그중에서도 승원이 동그란 공 모양으로 뭉쳐놓은 양말이 보라에게 “집쥐가 ‘된 것’”(p. 53)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추방하려 아무리 애써도 계속해서 출몰하는 집쥐처럼, 정원의 존재는 여타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승원이 습관처럼 만드는 양말 뭉치가 어린 시절 정원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공에서 비롯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보라는 직감한다. 평범했던 양말 뭉치가 “집쥐로 보이기 시작한 그 늦은 오후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p. 54)다고. 보육원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 약을 먹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집쥐는 어디에서 누구와 살 수 있는 걸까”(p. 87)를 궁금해했던 보라의 의문은 정원의 생애를 접하면서 되살아난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온통 투쟁이었다. 더딜지라도 꾸준히 삶을 기록하고, 장애인 스포츠인 보치아 선수가 되어 진지하게 공을 던져왔다. 죽고 싶을 때마다 “타 자 칠 때 총 쏜 다 생각”(p. 83)하며 쓴 시들, 시설에서 나가기 위해 새벽마다 컴퓨터실까지 기어가 적어 내려간 정원의 이야기는 “스스로 훼손을 인정할 수 없었던”(p. 71) 보라를 변화시킨다. 과거의 결함을 지우고 무결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외면하고, 승원 대신 정원의 기록물을 경진으로부터 건네받는다. 할머니에게 배운 바느질처럼 보라는 정원의 생애를 몇 번이나 곱씹은 후 그의 이야기들을 정성스럽게 잇대어 나간다. 그리하여 세 사람만이 담긴 가족 그림에서 “가는 연필 선으로 밑그림만 그려놓은 테두리뿐인 사람”(p. 61)이었던 정원을 “한 사람의 형상”(p. 88)으로 만들어낸다. 양말 공을 죽어가는 집쥐로 느끼던 낯선 감각은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삶을 향해 공을 굴리는 정원의 의지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첫번째. 보라는 승원에게 다시 한번 비밀 말하기를 제안한다. 경진을 만났다는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히면서. 사실 안윤의 인물들이 내린 선택을 따라가다 보면 경진이 던진 이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p. 85). 어째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친숙함을 등지고 불가해한 누군가를 끌어안게 만드는 힘의 근원을 짐작하기 위해 표제작 「모린」을 살펴본다. 사고로 중도 실명한 시각장애인 ‘영은’은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거나 무감하게 태어나서가 아니라 살면서 많은 것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실명 이후 영은은 다채로운 세상의 이미지들,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왔던 연인 ‘선주’를 비롯해 자신을 이루던 수많은 조각을 놓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은은 여전히 처음부터 가져본 적 없는 삶보다는 여전히 나중에 잃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있음과 없음, 그 둘을 연결하는 잃음”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세계를 빠짐없이 살아보”(p. 25)겠다는 다정한 결단이다. 어떤 것을 잃어본 사람은 그것의 소중함을 비롯해 어떻게 더 잘 잃을 수 있는지, 상실 이후에 무엇이 변화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잃어보는 경험은 세계가 뒤바뀌는 사건이다. 하나의 세계는 곧 한 명의 사람과도 같다. 그리고 세계는 곧잘 무너지고 다시 서길 반복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사람’은 변치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가기에 유일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p. 9). 영은이 잃음을 두려워하기보다, 각각의 자신과 타인을 마음껏 사랑하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이유다. 유일한 것들의 흔적을 덧입고서 모진 시간을 견뎌온 영은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유구하다는 걸 안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자리 잡고 있다. 안윤이 굳게 믿는, 상실을 지나온 자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은의 질서”(p. 30)는 기존의 질서에서 멀어지거나 누군가를 잃는 일을 유독 겁내던 ‘미란’을 조금씩 변화시킨다. 자신을 제쳐둔 채 사회의 규율만을 엄격히 따르느라 영은을 사랑하는 마음마저 밀어내길 반복해온 미란은 영은의 곁에서 “한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는 어떤 감정을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p. 44)을 경험한다. “죄다 망해버려서 다행”스럽게 찾아온 “그동안의 내가 다 망해버린 기분”(p. 41)은 여성과 여성의 사랑, 장애인의 삶처럼 분명히 있는 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세계의 문법을 무너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무수한 면면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세계에는 정상성이 비틀리는 감각이 일상처럼 스며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게 저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사정이구나 하는”(p. 12). 세계는 곧 한 사람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바 있으니, 영은의 말처럼 기이한 낯섦은 이제 한층 더 애처롭게 감각된다. 기꺼이 열리고, 연결되고 싶을 만큼. 때로는 나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닿을 수 있는 누군가가, 무너져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상실과 결여를 메우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방법을 안윤의 소설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4. 실패 연습 김지연과 안윤의 소설은 현실이 감추려 해온 불합리성이라는 비밀을 고발하고, 이때 드러난 균열에 힘을 가해 기존의 제도와 체계에 일격을 가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지점은 두 사람의 소설이 자신의 균열을 뼈아프게 직시해야만 들여다볼 수 있는 세계의 결함과 마주한 뒤, 그러한 생채기를 어떻게 매만질 수 있을지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지연은 잿더미 속에서도 아직 전소하지 않은 기대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건져 올린다. 그의 인물들은 자본 외부의 의지와 노력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한없이 작아져 있다가도 뜬금없이 괴상한 사안들 편에 서거나 망측한 일을 감행한다. 이때 강렬히 분출되는 어긋난 감각은 살 만한 삶을 간단없이 소거하는 자본의 법칙이야말로 진정으로 이상한 무언가임을 강렬히 느끼게 해준다. 안윤은 이유 없는 상실을 강제하는 현실에 짓눌리는 와중에도 잊힌 이들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잃어버려서는 안 될 자신의 고유한 속성을 부지하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세계의 결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목도할 때 생기는 기이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단하기 위해 분연히 사건을 찾아 나서거나 세계가 무너지는 감각 아래에 자신을 놓아둔다. 그런데 이들 소설이 나아가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인물들의 일격이 너무 쉽게 저지당하거나, 세계의 비밀을 목격한 이후에 결과적으로는 다시 자신의 결함으로 회귀하는 수축성을 보이는 측면이 두드러짐을 간과할 수 없다. 김지연의 소설에서처럼 잠깐 보인 희망이 오히려 지난한 현실을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하는 마취제로 작용하고, 안윤의 인물들이 억눌리고 배척당한 존재들의 고통을 자기 이해와 친밀한 사람과의 좁은 세계에 가둬두는 건 아닌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의도와 달리 두 사람의 소설이 보여주는 건 균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현실 아닌가. 이런 우려는 결함마저도 소비적 욕망과 충동에 포섭시켜 자기 발전의 재료로 삼는 자본주의의 영악한 힘이 가진 위험을 알기에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런 의심을 향해 김지연과 안윤은 한층 더 이상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선택하는 인물들을 다시금 내보일 것이다. 한 번의 실패는 억압의 기제에 영영 봉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망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믿는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더 자주 서로에게 보여져야 한다고” “잘 살든 못 살든 그냥 살아 있는 게 목격이 되어야”(「긴 끝」, p. 122) 한다는 김지연에게 소설은 끝을 길게 늘어뜨려 무한히 연장하는 목격의 수단이다. “만약이라는 말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또,」, p. 174)는 걸 아는 안윤이 보기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로 허물어지는 일이야말로 세계가 연결되는 가장 첫걸음이기에 둘의 세계는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두 사람에게 실패란 기존의 견고한 세계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고정되어 있던 자신이 허물어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들은 이제 막 실패했다. 어쩐지 걱정되는 마음이 앞선다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숙련이 뒤따르듯이, 이들은 지금의 연습을 거쳐 실패에 능숙해질 것이다.그러니 자주, 계속해서 더 잘 실패해보려는 두 사람의 힘을 믿는 마음으로 애정을 담아 덧붙여본다. 앞으로의 소설에서는 무너지고 재건된 세계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를지, 기이한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해 걸어 나갈지 궁금하다고 말이다.
표면-상태-읽기 문학은 인간의 내면 또는 물질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하나 내면은 '내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앞의 문장은 의미를 다르게 가진다. 내면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리고 비뚤어진 형태로 또는 속에 있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비죽이 튀어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내면'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또한 그것을 '본다'. 그것이 '어디'에 있든 누구에게 있든 그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표면적인(보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표면을 읽는 일과 같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표면을 읽는 것이 내면을 읽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표면적인 방식으로 내면을 추측하게 만드는 시에서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최재원 시인의 『백합의 지옥』 중 "별늪"이라 이름 붙은 장에 수록된 시편들은 연결성을 가진다. 제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상어 세계의 법칙에 적응하지 못하고 친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는 "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는 "제멋대로 올챙이 오페라"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 둘은 “배고픈 물뱀 나르샤"를 만나 함께 모험에 오른다. 자기 위로 쌓이는 모래를 떨어낼 생각도 없이 침잠했던 "심심한 넙치 누가바"가 이 무리에 합류하고, 이들은 “마그마라는 이름의 마그마"를 만나며, 이들과 함께 걸음 하는 마그마는 은하수라는 이름의 은하수를 만나 "별늪"이 된다. 그리고 이 시들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마그마와 은하수는 별들을 주고받으며 / 하나가 되었다 / 별늪엔 별꿀이 가득히 흘러서 누구도 / 배고프거나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았다 - 「별늪」 부분 요약건대 이 시는 위스퍼, 오페라, 나르샤, 누가바, 마그마, 은하수가 별늪이 되어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내면은 어디에 있는가? 요약이 말해주지 않은 부연 설명과 수식의 말들을 들여다볼 때 그것을 찾을 수 있다. 상어 위스퍼는 동료 상어들이 "자신들과 함께 다니려면 사람의 다리 하나를 / 가져오라고 부추"(「부끄럼쟁이 상어 위스퍼」)긴 끝에 길을 나섰으나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오페라를 만났다. 올챙이 오페라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바다에서 살고자 하다가 동료를 만났고, 오래 굶은 물뱀 나르샤는 오페라를 잡아먹으려다 위스퍼를 보고 숨었지만 이내 그들과 동료가 되기로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반(反)함에 따라 삶을 성취하고 있다. 이때 '반'은 '부정'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주어진 것의 '바깥'에 찍힌다. 주어진 것에서 탈출하는 것, '하라고 시켜서 되는 것'의 바깥쪽에 위치한 수많은 가능성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저항함으로써, 때때로 죽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이 시의 표면인가, 이면인가? 문장이 지시하는 것을 읽어나갔을 뿐임에도 문장이 발설하지 않고 내포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헤아렸으므로 이면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표면을 읽은 것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정답 없는 이 의문점에서 표면이냐 이면이냐 중 하나로 결론을 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질문을 돌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일이 '존재'가 아니라 '상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이다. 즉 존재의 방식이나 형식(표면), 존재의 의미(이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떠한 상태인가를 헤아림으로써 가능하다. 이처럼 최재원의 시는 표면으로 이면을 말한다. 대도시와 약간의 거리를 둔 업스테이트에 살면서 그야말로 '삶'과 자연의 의미를 갈구하는 듯하지만 지극히 탈자연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 곳곳을 채우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시 「업스테이트」 역시 지극히 표면적인 것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표면을 잘 살피면 삶을 주관하는 자와(퍼치를 낚음) 삶에 종속당하는 자(대도시적인 생활 관습으로부터 멀어지지 못함)의 위치가 거듭 전도되는 '상태'가 발견된다. 표면을 통해 상태를 보여주는 이 시를 지나, 비누 거품을 내어 손을 씻는 모든 과정과,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바라보며 관념적 상태변화를 묘사하는 「기브앤테이크」를 거쳐, 「비엔나소시지」에 도착해 이번에는 이런 물음을 꺼내본다. 분리 불가능한 표면과 이면 어디께를 휘저으며 의미를 찾아내는 일의 가장 흔한 방식은 어쩌면 '개인적으로 좋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과 같지 않은가? 그게 과연 '개인적'일 수 있는지 묻고, '좋음'이란 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순간 시라는 표면은 지극히 개인적인(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게다가 그것이 발설되면 내면은 더는 내면이 아니게 되는 데다 이 시에 대한 변형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으니, 이 역시도 표면으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상태에 관한 것이겠다. 그런 까닭에 이 시에 대한 '개인적으로 좋음'이라는 메모를 이런 식의 해석으로 풀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비엔나소시지를 먹는 상황을 묘사한다. 물론 그사이에 끼어드는 세부적인 의견이나 수식된 말 등이 중요하다. 어떻게 먹어야 최상의 조화로움 속에서 비엔나소시지볶음을 먹을 수 있는가를 궁구하는 일련의 상황 사이에 그리움, 환멸, 어머니와 같은 정념들이 “꾸역꾸역” 끼어든다. 당근의 맛이라든가, 재료 익힘의 정도, 당근과 다른 재료와의 조합을 씹을 때의 맛, 감각, 만족도 같은 것은 꾸역꾸역 끼어드는 생각들의 맛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그건 무슨 맛인가. 그런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 양파와 당근을 썰어 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착실한 / 일입니까 얼마나 / 열심한 일입니까 특히 / [......] / 꾸역꾸역 아침부터 국을 / 데우고 소시지를 볶고 찬 / 반찬 더운 반찬 김치를 / 각각 포일로 그 비좁은 / 도시락통을 지혜롭게도 / 기술적이게도 딱 / 3등분으로 나누어 / 나는 그런데 국물이 흐르면 / 화가 났습니다 당신에게는 / 아니고 국물에게 그리고 신부님의 / 고고하고도 자애로운 모습을 문득 / 떠올립니다 급할 것 하나 없이) - 「비엔나소시지」 부분 비엔나소시지를 반찬으로 싸는 사람이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지, 요컨대 이 재료들이 비엔나소시지 반찬이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화자는 생각한다. 비엔나소시지는 누군가 성실하고 착실하게 열심히 야채를 썰어 넣는 노고이고, 비좁은 도시락통을 현명하게 구획하는 지혜이고, 그 결과물이 의도치 않게 약간의 국물을 새어 나가게 만들 수도 있는 우연적 실수를 동반한다. 수많은 사랑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비의지적 결과에 화가 난다고 화자는 말한다. 이 근사한 노고와 지혜와 사랑과 성실함이 흘린 약간의 국물을 두고 감사·만족·풍족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단지 국물 때문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분노를 느끼는 이 어긋나는 감각은 이것을 먹는 사람에게 죄책감이나 환멸을 느끼게 만들고, 그러다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는 이에게 자애를 구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저에게 / 저에게 자애를 베푸소서 / (내가 갈 곳에는 비엔나 / 소시지와 같은 추잡한 / 것들이 없게 하소서 / 꾸역꾸역 살아 낸 것들 / 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하소서"(「비엔나소시지」)라고. 그러면 비엔나소시지 먹기라는 건 노고·노동·사랑·지혜,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이 모든 걸 배반할 만큼의 분노와 짜증과 혐오감 그리고 그것에 대해 용서받고 싶은 마음이다. 요컨대 최재원 시의 표면 읽기란 의미란 무엇이며 어떻게 발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을 듣는 일이다. 최재원의 시는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차례 그것을 일러주고 있다. 자세한 표면을 보라고. 그리고 존재를 강구하지 말며 상태를 헤아리라고. 상태를 헤아리면 의미가 발생한다고. 죽음-상태-읽기 꼭두를 한 달 사이에 세 번이나 보았다. 한번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되고 있는 사진전에서, 다른 한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른 전시장으로 건너가며 스쳐 지나가듯 놓인 실물을, 마지막 한 번은 신미나의 시에서 “꼭두"라는 기호로 보았다. 꼭두를 세 번 보았지만 '꼭두'를 본 것이지 실제로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서 작동하는 상태를 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꼭두는 전통적인 장사(將事) 문화에서 볼 수 있는 목각 인형이다. 망자를 '저편'으로 인도하고 수호하는 역할을 하며 상여의 곳곳에 놓인다. 말하자면 꼭두는 나무이고, 나무로 만들어진 인형이고, 죽음이고, 수호이고, 죽음의 길잡이다. 최근 세 번이나 보았지만 꼭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나는 사진으로 된 목각 인형을 보았고, 목각 인형 전시물을 보았고, 죽음에 대한 시를 읽었다. 사진전에서는 꼭두를 찍어 186.5×159센티미터 사이즈로 커다랗게 인쇄하여 세로로 세워두었고, 지나치듯 본 꼭두 인형은 '전시물'로서 전시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꼭두의 모양새와 가장 닮지 않았지만 꼭두의 수행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신미나가 쓴 「꼭두전」에 등장하는 “꼭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장사를 지내는 시에서 “꼭두"가 망자를 이끌고 수호하는 존재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꼭두"는 문자의 나열과 문장의 직조로 펼쳐진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된 언어 속에서 등장했으므로 어쨌거나 상징적 기표의 상태로 간주되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꼭두를 세 번 봤지만 세 번 다 꼭두를 봤다고 할 수는 없고, 사진과 전시물과 죽음에 대한 상상의 현물로서 그것을 보았다. 보았다...... 한데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앞서 최재원의 시를 읽으면서 개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태의 지속은 항상성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불안정성과 유동성을 의미한다. 변함없는 상태처럼 보이기 위해서 개체는 변화하는 시간에 맞게 대응해야 하고 달라진 상태에 맞서 새로운 움직임(혹은 멈춤)을 추동해야 한다. 신미나의 시에서 여러 번 발견되는 '죽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은 역시 삶의 중(中)이자 삶이 아닌 중의 중의 이동에서 감지된다. 죽음은 존재의 중지, 상태의 종료처럼 생각되곤 하지만 삶이 곧 존재가 아니듯 죽음 역시 비-존재가 아니라 삶이 아닌 상태다. 이로써 신미나의 시는 삶과 죽음을 상태, 즉 유동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죽음이 존재라는 것에 불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그런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삶을 소거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이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삶이란 무엇인가? 즉, 죽음을 소거한 채로 죽음을 어떻게 말하는가? 언니들은 비밀이 많고 / 금요일엔 주름이 많은 치마를 입었지 / 블라우스 리본을 매고 / 흔들리는 구두를 신고 뾰족하게 웃었네 // 나도 따라가고 싶어 [......] // 넌 아직 어려 [......] //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 여름휴가는 짧고 /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언니들은 풀었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으며 / 머릿수건을 두른다 / 식판을 들고 밥과 국을 배급받는다 / 에나멜 구두는 금요일에만 꺼내 신을 것 // [......] // 뭔가 시작되려는데 / 그게 무엇인지 /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 아무도 - 「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에 시의 핵심적 태도가 함축되어 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 '뭔가'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그것'이 소거된 형태로 말해진 결론이다. “그게"로 표현되어 있는 '그것'의 정체를 어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일러줄 수 없다. 그래서 아무도 '나'에게 일러주지 않은 것이다. 이미 그 상태에 속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일러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인지라, '나'는 알고 싶었으나 아무도 일러주지 않아서 속수무책 빨려 들어가 있는 바로 이 '상태'에 그냥 놓인 채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중이다(삶-인 중이다). 삶은 '무엇'이 아니기 때문에 '무어'라고 알려줄 수 없다. 삶은 존재하는 상태와 같이 유동하는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시를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 이들이 어떤 흐름과 상태에 놓여 '그것'을 겪고 있는지를 따라가보자. 이 시에서 "언니들은 비밀이 많”은 존재다. '나'는 언니들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만 어리기 때문에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할 수 없다. 비밀이 많은 언니란 언젠가 될(또는 궁구하는, 희망하는) '나'의 미래이고, 그런 점에서 삶의 한 단면이다. 이 문장을 좀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삶이란 비밀을 지닌 미래'다. '나'는 언니들의 비밀에 합류하지 못한 대신 시를 쓰면서 비밀을 만든다. 시를 쓴다는 것은 비밀을 만드는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몰래 나쁜 일을 하는 것 같은 비밀스러운 상태로 만든다. 비밀스러운 '나'의 미래인 언니들을 시로 쓴다는 건, 미래를 비밀스럽게 만들어 맞이하겠다는 것. '나'는 언니들의 비밀을 공유하지 않았지만 '비밀'이라는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을 소거한 채 미래를 비밀스럽게 스스로 만들어 쫓는 것이 삶임을 보여준다. 이 시에 들어섰던 최초의 까닭은 삶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가 '그것'을 소거하면서 동시에 말하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상태에 대해 말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소거는 실제로 뭔가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빠진 상태 그 자체로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찾았냐고 물었다 // 클로버는 잎이 세 장 / 드물게 네 장 / 초록의 이랑이 팬다 / 반복의 물결, 물결, 물결 // [......] 하나만 길게 잡아당기는 / 신의 놀이 / 토끼는 귀가 크고 /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 말하려다 / 코끼!라고 했는데 // 지구 바깥에 / 귀도 크고 / 코도 긴 /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몰라 // [ ] 토끼는 위험하면 / 뒷발을 구른다는데 // 코끼, 코끼, 코끼래! / 우리 중 누구도 /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 「풀」 부분 이 시의 현재에 있는 것은 풀이고, 어쩌면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위험을 감지하고 발을 구르는 토끼이며, 보다 희미한 가능성으로 있을 수도 있는 것은 '코끼'인데 이것은 사실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없는가? 이 시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코끼다. 코끼는 토끼로부터 연상된 코끼리를 말하려다 튀어나온 것이고, 토끼는 클로버를 찾으려 풀밭을 샅샅이 뒤지다가 떠오른 모자 속에서 폴짝 뛰어나온 것이므로 그것은 풀밭에서 비롯된 어떤 상태로서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벌어지는 소거는 “코끼”라는 표현 속에 압축되어 있다. 그것은 없음('리'의 소거)으로 하여금 있는 것이고(코끼), 상상 속의 토끼이자 코끼리를 온통 아우르는 관념의 상태다. '리'가 빠졌지만 '리'만 빠진 것이 아니고, '리'가 빠진 '코끼'로 하여금 없는 모든 것을 있게끔 만드는 것이 되었다. 뭔가를 빼고 말한다는 것은, 빼려고 했던 것을 포함한 모든 가능성을 지금의 상태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뺀다는 것은 상태를 바꾼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이전의 상태에서 놓여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때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조선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게 된 한 사람의 삶(이라는 상태)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쓴 바 있다. 스토브 안에서 무연탄 더미가 / 조용히 스러질 때 / 그는 부드러운 재를 / 얼굴 위에 뿌리고 / 더러워진 몸을 머리끝까지 욕조에 담근다 / 숨을 참고 열을 세다가 / 마침내 뱉을 때 /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다 // 그는 눈을 뭉쳐 / 눈사람을 만들어 물에 넣는다 / 순식간에 / 눈사람이 사라지는 모양을 본다 / 기분이 아니라 / 감정이 아니라 /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 「북에서 온 사람」 부분 그는 그가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고 때때로 "섬망과 미혹 사이에서 / 그는 하마터면 / 자기 자신을 넘어갈 뻔"하기도 하지만, 그는 미혹되지 않고 그가 바랐던 것이 아닌 조선소 노동자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가 욕조에 몸을 담글 때, 그가 바랐던 것은 아니나 그에게 주어진 조선소 노동자라는 "현실은 간신히 그를 따라왔"(「북에서 온 사람」)는데 어쩐지 그는 지금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계속 바뀌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눈사람을 물에 넣고 그것이 흩어지는 것을 본다. 이는 "어떤 /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는 것이 곧 삶(죽음)이고, 그 전환의 순간에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며(무언가가 지나갔다, 무언가가 도래한다), 그러한 전환의 틈에 자각되는 것이 죽음(삶이 지나가고 있음)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것을 소거의 형식으로 발화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성찰일진대,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백장미의 창백"이다. 언뜻 백장미는 본래 창백한데, 백(白)이라는 색이 빨강으로 대표되는 '장미색'의 빠져나감이라 보는 한 그렇다. 그렇다면 백장미가 창백해지기 위해서는, 장미색이라는 일관된 상태에서 벗어난 장미의 색이 존재하며(또는 색의 장미가 존재하며) 그것이 색이 옅어지는 상태로 바뀌어가는 것이라는 상태의 전환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이때 동원되는 것은 장미의 색, 바래지는 색, 외부의 자극(풍화·비 등), 시간의 흐름...... 그런 무수한 상태의 변화 속에서 백장미는 창백해지고, 백장미의 창백이라는 소거된 말에 이르렀을 때 소거된 모든 시간은 모두 소환된다. 백장미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백장미 삶의 이력을 함축하는 방식으로.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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