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2024년 겨울호(제148호)
여성의 말 — 한강 소설의 몇 장면들
여성의 말
— 한강 소설의 몇 장면들
인간은 언어 없이 생각할 수 있는가. 말을 배우기 이전의 시절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니 언어 없는 상태로 무엇을 생각하고 느꼈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의 기억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은 “몸속에는 말이 없”(『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2011, p. 67)었다는 그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의 만남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말을 잃은 여자의 상태가 바로 우리 몸속에 말이 없었던,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에게는 도무지 상상되지 않는 말을 배우기 이전의 시간에 대한 사후적 기억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어떤 상태일까. 말문이 막힌 그녀가 타인과 쉽게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다면 ‘몸속에 말이 없’는 상태인 그녀는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숱한 생각들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은 언어화되지 않은 채로 어떻게 스스로에게 말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남자의 일인칭시점과 여자의 삼인칭시점이 교차하면서 진행되는데, 그래서인지 여자가 초점이 되는 장에서는 시점도 문장도 다소 불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강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여자에게 말이 없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말이 없는 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 없는 여자의 행동들만이 제삼자의 관찰자적 시선에서 건조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여자의 내면은 충분히 상세하게 설명될 수 없다. 언어가 사라진 여자의 내면은 애초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읽는 일은 꽤 혼란스럽다.
말을 잃은 뒤 처음으로, 그날 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잘못 보고 있는 것이라고 언어 없이 생각했다. 두 눈이 저렇게 고요할 수는 없다. 피나 고름, 더러운 얼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다면 오히려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눈 속에 침묵하는 그녀가 비쳐 있고, 비쳐 있는 그녀의 눈 속에 다시 침묵하는 그녀가…… 그렇게 끝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p. 62)
이상하다.
언젠가 꼭 이런 밤을 겪은 것 같다.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그때에는 그녀에게 말(言)이 있었으므로, 감정들은 더 분명하고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p. 67)
두 사람이 잠자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가 있다. 수업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수업이 시작된 뒤에.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사무실 앞에서. 차츰 그의 얼굴이 그녀에게 낯익은 것이 되었다.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고유한 이목구비와 표정과 체구와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 변화에 대해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p. 92, 강조는 인용자
여자의 행동들이 묘사되다가 머릿속 상념으로 서술이 이어지지만 이내 “언어 없이 생각했다” “몸속에는 말이 없다”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상념에 대한 서술이 의식적으로 중지된다. 말을 잃은 뒤 처음으로 거울 속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녀는 “피나 고름, 더러운 얼음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이, 침묵하는 자신이 거울과 눈동자 사이로 끝없이 반사되어 보이는 그 고요한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밤길을 걸으며 언젠가 그 길을 “비슷한 수치와 당혹감을 느끼며” 걸었던 적이 있다고, “몸속에는 말이 없”는 지금은 그때처럼 분명하고 강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말없이 잠자코 여러 번 마주 보았던 남자의 얼굴이 점차 낯선 얼굴에서 “낯익은” 얼굴로, “평범한” 모습에서 “고유한” 모습으로 달리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어떤 의미 부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말을 잃은 고통도, 강렬한 당혹감과 수치의 감정도 그리고 남자에게 느끼게 된 어떤 낯선 익숙함도 그녀는 언어로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 그녀는 말없이 말하고 있다.
언어 없이 인간의 내면이 정확히 말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지 모른다. 『희랍어 시간』에서 여자의 내면은 일인칭으로는 말해질 수 없고, 대신 말해진 그녀의 내면은 온전히 그녀의 것일 수 없다. 위와 같은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몸속에 말이 없는 그녀의 상태를 언어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언어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언어화된 머릿속 상념들을 일부러 중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아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언어장애는 말에 대한, 말로 하는 사유에 대한 자발적 거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을 잃기 전, “팔 년 전에 그녀가 낳은, 이제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된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무렵, 그녀는 인간의 모든 언어가 압축된 하나의 단어를 꿈꾼 적이 있었다”(p. 20). 여자는 “다른 어떤 단어와도 결합되어 구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 극도로 자족적인 언어”(p. 21)를 원했다고 말한다.
그녀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p. 12)이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반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으며 수년 전 이혼한 후 소송 끝에 최근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마저 빼앗겨버린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지만, 그러한 사건들이 언어장애의 분명한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치료사에게 그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p. 13)라고 반복해 말한다. 문학을 강의하고 시와 칼럼을 쓰며 언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해온 그녀는 어려서부터 언어로 인해 “설명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p. 15). 언어에 관한 그녀의 강박적 거부감은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심인성 증상이 그러하듯 언어로 자행된 세계의 폭력적 사태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포식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철저한 부인으로서 섭식장애를 앓다 급기야 스스로의 목숨마저 내던지고자 했던 「채식주의자」 속 영혜의 정신이상 증세를 떠올린다면 『희랍어 시간』의 여자가 겪는 이러한 언어장애도 사실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언어를 업으로 삼는 그녀에게 언어장애는 영혜의 정신이상처럼 전면적인 데가 있다. 학창 시절 겪은 최초의 언어장애를 낯선 외국어 소리로 극복한 경험을 기억하며 그녀는 지금, 사용가치를 잃고 존재 가치만 남은 희랍어를 배우면서 완전한 말을 기다린다.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의 비대해진 내면을 일인칭시점으로, 말을 잃은 여자의 말해질 수 없는 내면을 삼인칭시점으로 교차 서술하던 이 소설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손가락 글쓰기를 활용해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여자의 내면이 생성되고 말문이 터지는 순간을 그리며 끝이 난다. 여자의 일인칭시점으로 서술이 전환되어 있는 “심해의 숲”은 거의 한 편의 시와 같다. 마침내 여자가 언어를 되찾으며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말하는 순간들이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는 심해이기도 깊은 숲이기도 한 어둠과 침묵의 공간에서, 즉 “빛도 목소리도 없는”(p. 187) 곳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누워 있다. 각자 몸의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p. 123)을 서로 감싼 채 어루만져주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그대로 떠오르고 싶지 않아서// 당신의 목에 팔을 감았어요”(p. 188)라고 말한다. 그 어둠과 침묵의 공간은 벗어나야 할 곳이 아니라 오히려 둘이서 함께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그려진다.
나는 숨을 멈췄어요.
당신은 계속 숨을 쉬고 있었어요.
계속 당신의 숨소리가 들렸어요.
그때부터 우리는 서서히 떠올랐지요.
먼저 수면의 빛에 어렴풋이 닿고,
그 다음부터는 뭍으로 거세게 쓸려갔어요.
두려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내 몸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가기 전에,
당신은 나에게 천천히 입맞추었지요. (pp. 188~89)
수면 위의 세계는 빛이 있고 언어가 있는 세계이다. 이제 곧 영원한 어둠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게 될 남자와 말을 잃어 캄캄한 침묵 속에 있는 여자는 지금 수면 밖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희랍철학의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를 탐독하며 언젠가 완전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갈 자신의 불안을 다스리고자 했던 남자에게 독일인 친구 요하임 그룬델은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라고 가슴 아픈 직언을 하곤 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삶을 살던 요하임에게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pp. 118~19)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하임을 잃은 남자는 슬픔과 후회 속에서 그 안온한 침묵과 어둠의 공간을 벗어나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숨을 쉬어본다. 숨을 멈추었던 여자도 남자와의 접촉을 통해 두려움 없이 울음 없이 수면 밖 빛과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연약한 부분을 어루만지며 자신이 거절당하고 있는 혹은 스스로 거절했던 세계로, 빛과 언어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곳이 “플러스의 빛이 있”는 진짜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목소리가 일인칭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더불어 몸속에 언어가 없는 여자의 상태가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독자들에게 온전히 감각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남자의 목소리를 좇으며 읽게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남자와 여자는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어둠 속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주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거기서, 듣고 있나요?”(p. 148)라고 수시로 확인을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작은 기척으로 대답을 하는 식이다. 손바닥에 글씨를 쓰며 대화하기도 한다. 이때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작중인물인 여자만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독자는 작은 기척을 내며 남자의 이야기를 듣는 여자의 입장으로 초점을 이동하고, 이어지는 “심해의 숲”과 “0”에서 마침내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여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게 된다. 심해에서 숨을 어렵게 내쉬듯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p. 191)을 두려움과 함께 혹은 두려움 없이 마주하는 경험을 독자 역시 온몸으로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p. 59)이라고 느끼던 여자는 남자와의 껴안음을 통해 숨을 쉬며 삶을 되찾고자 한다. 『희랍어 시간』은 존재를 포기하고자 했던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어떻게 삶을 선택하기로 했는지를 상상해보는 소설과도 같다. 그것은 연약한 곳을 어루만지는 포옹과 입맞춤으로, “말라버린 입술을 연다”(p. 191)는 힘겨운 다짐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어둠의 공간 속에서 죽음처럼 침묵하는 것 말고도 이 세계의 폭력을 거절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한강은 끝끝내 말해보고자 한다. 말라버린 입술을 열어야 한다고 말한다.
*
한강 소설에는 외부로 향하는 말보다 내부로 침잠하는 말이 더 풍성하다. 그런 점에서 『희랍어 시간』에 등장하는 ‘몸속에 말이 없는’ 여성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언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서 특별한 주목을 필요로 한다. 어떤 언어가 완벽히 ‘자족적인 언어’이기를 꿈꾸는 것은 불가능한 소망에 가깝다. 단단한 말로 응집되는 순간 우리가 느낀 것은, 생각한 것은, 말하고자 한 것은, 모두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버리거나 의외의 것들이 길어 올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랍어 시간』 속 여자는 쉽게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p. 87)고 생각한다. ‘자족적인 언어’는 어쩌면 침묵 속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에도 침묵에 육박한 말들이 꾹꾹 눌러져 담겨 있다.
한강에게 말하기란 혹은 쓰기란 ‘아문 상처를 벌리듯’(「새벽에 들은 노래 3」) 힘겹게 “부서진 입술”을 벌려 “어둠 속의 혀”를 녹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비유만이 아니다. 그리고 물론 “고통”(「피 흐르는 눈 3」)스러운 감행이기도 하다. 안온한 심해의 공간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며 수면 위로 올라오고자 하는 행위처럼 말이다.
온전히 ‘자족적인 언어’이기를 꿈꾸며 쓰는 한강의 ‘시적 산문’은 언제나 고통의 언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타인의 고통이나 존재의 상실, 끔찍한 비극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문장으로 적힐 수 있는 것일까. 5월 광주를 다루는 『소년이 온다』나 제주 4·3을 다루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특별해지는 것은 국가적 재난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오랫동안 말해지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이 질문 자체가 한강의 두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소년이 온다』의 모든 문장은 고통스럽게 읽히지만, 그 어떤 문장들보다도 처참하게 기억에 남게 되는 것은 ‘동호’를 비롯한 소년들이 나란히 죽어 있는 사진에 대한 상상이다. 어른들이 시킨 대로 “두 팔을 들고, 줄을 맞춰 걸어오고 있었던”(p. 133) 다섯 명의 아이는 나란히 총에 맞아 직선으로 쓰러져 죽었다. 이 장면을 적당한 말로 쓰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이 두 편의 소설에서 여성들의 말하기에 주목해보고 싶다. 『소년이 온다』에서 도청에서 체포된 ‘선주’는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5·18 연구자로부터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요청받은 선주는 증언을 거부하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p. 166)라고 마음속으로 항변한다.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 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pp. 166~67)
‘당신’으로 지칭되고 있는 선주는 자신이 겪은 일과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고통을 ‘그것을 어떻게 증언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증언할 수밖에 없다. 혼잣말처럼 내뱉어진 선주의 이 불가능한 증언들을 우리는 ‘당신’의 이야기로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선주의 증언이 끔찍한 독백으로만 남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당신’이라는 이인칭의 호칭 때문이기도 하다. 한강의 문장들은 이처럼 증언 불가능 자체를 재현하는 형태로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직접 들려준다. 증언이 아니라 재현이, 기록이 아니라 문학이 된 5·18이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더 선명히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온전히 여성들의 말하기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등장했던 작가는 이 소설에서 ‘경하’라는 이름으로 작품 전면에 등장한다. 5·18에 관한 소설을 쓴 직후 한강은 눈 내리는 벌판에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가 심겨 있는 장면을 꿈속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지평선으로 보였던 벌판의 끝이 바다였음을 그리고 곧 밀물이 밀려와 검은 나무 뒤편의 봉분들에서 뼈를 쓸어 가버릴 것임을 직감한 그녀는, 물에 잠겨가는 검은 통나무와 뼈들 사이를 뛰어다니다가 잠에서 깬 일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경하의 꿈으로 소설 속에 그대로 등장한다. 그즈음의 경하는 지속되는 악몽과 몇 차례의 사적인 작별 경험 그리고 위경련을 동반한 편두통 등을 겪으며 죽음을 결심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살아서 할 일이라고는 유서를 완성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겨우 살아내던 경하는 어느 날 친구 ‘인선’의 호출을 받고 제주의 중산간 외딴집에 홀로 남아 있는 인선의 앵무새 ‘아미’를 살리러 끔찍한 눈보라를 헤치며 인선의 집으로 향한다. 홀로 목공을 하다 손가락 마디 두 개가 절단된 사고를 겪은 뒤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서울로 이송된 인선은 봉합한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상처 부위를 바늘로 찌르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서울의 한 병원에 누워 있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에서 죽은 자, 죽지 않고 살아남아 고통받는 자, 살아남아 죽음을 선택한 자, 죽은 자의 가족 등 여러 희생자의 목소리를 통해 5·18을 극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경하와 인선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인 정심이라는 세 여성을 축으로 하여 제주 4·3 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여성들의 말하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오빠를 찾기 위해 온 생을 바쳤다고도 할 수 있는 정심, 그녀가 남긴 자료들을 읽으며 그 빈 곳을 메워간 정심의 딸 인선, 인선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경하. 이렇게 세 명의 여성이 이 소설을 구성하는 인물들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피해자나 생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기보다는 그들을 목격하거나 추적했던 인물들을 통해 그 비극을 ‘다시’ 쓰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정심의 유족회 활동이나 인선의 다큐멘터리 그리고 경하의 꿈 등은 이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4·3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선이 경하에게 정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로 씌어졌다는 점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결국 작품 전체가 4·3의 재현을 위한 서막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정심을 인터뷰하고자 했던 인선의 다큐멘터리 기획은 질문도 없이 혼잣말을 하는 자신의 인터뷰로 바뀌어 진행되기도 했다. 이제 그 완성되지 못한 다큐멘터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인선은 제주의 집에서 경하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빨갱이” “절멸”(p. 220)을 목표로 1948년 겨울부터 미군정이 무장대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 수만 명을 학살한 사건을 다루며, 한강은 피바다가 되었던 제주의 바닷속에 땅속에 함부로 매장된 그들에 대한 애도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이야기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제주에서 일어난 엄청난 비극을 가장 윤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작가는 생각했을지 모른다. 겹겹이 포개져 구덩이에 버려진 수천 명의 사람은, 언니들을 찾아 총을 맞은 채로 집까지 먼 길을 기어 온 어린 아기는,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이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p. 226)하게 밤사이 시체들을 전부 쓸어 가버린 제주 바다의 썰물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15년간 갇혀 지내야 했던 세월은,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p. 225)던 광경을 바로 자기 집 방문 구멍을 통해 지켜봐야 했던 사람의 남은 생은, 어떻게 단번에 말해질 수 있을까. 결국 국가폭력을 다루는 한강의 말하기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기,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말하기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정확하고 진실된 재현일 수밖에 없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독자가 가장 진심을 다해 읽어내야 하는 것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듯 살고 있던 경하가 작은 새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제주 중산간에 위치한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눈 속 장면이기도 하며, 한 공간에서 함께 있을 수 없는 경하와 인선이 경하의 꿈인 듯 인선의 꿈인 듯 따뜻한 공간에서 서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기도 하고, 죽은 가족의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내던 손길을 기억하며 생사를 알 수 없는 오빠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쳤던 정심의 ‘실톱’을 품은 듯한 마음이기도 하다. 서울의 병상에 있어야 할 인선이 다치지 않은 매끈한 손으로 경하가 있는 자신의 집에 되돌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경하는 “네 생각을 날마다 했는데 정말 네가 왔어”(p. 320)라고 말한다. 설사 죽은 영혼을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따뜻한 사람에게 데려다주는 것이든, 아프고 피 흘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지 않은 모습으로 꿈처럼 현실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든, 그 간절한 마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무구한 간절함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인선과 경하는 눈부신 눈 속에서 정말로 따뜻하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p. 325) 미약한 불꽃이 솟아나는 그곳에서.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말하기는 이처럼 여전히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끌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준 ‘시적 산문’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 폭력의 세계에서 죽지 않고 살고자 하는 처절함, 죽은 것을 되살리고자 하는 간절함,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무구함에 있다. 결국 여성들의 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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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1) ―배옥주,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 ·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 김효숙(문학평론가) 배옥주의 시에서 가져온, 아니, 엄밀히 말하면 고갱의 그림 제목을 원본으로 하는 위의 문장은, 언제든 발생하는 만큼이나 정답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막막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모두’라는 총체로 규범화한 것에서 예외인 자는 없으며, 더구나 ‘어디’라는 장소마저 미확정이어서 ‘모두’와 ‘어디’를 망라하는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처해 있음을 직감케 한다. 시인은 이미 관습이 된 관념들에 대한 의심을 거친 감각으로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이 세계의 어떤 기류를 범상치 않은 현상으로 감지한다. 세계는 수시로 변하고 있으나 우리의 지각은 이 점을 즉각 알아채는 일에 부실하고, 시인은 앞질러 가는 예지력으로 모든 위험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마주하게 될 세계를 미리 살아보기도 한다. 배옥주 시에서 활기찬 상상력은 동사들의 활동성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언어로 설명이 가능한 세계를 이입하거나, 상식이 된 언어를 반복하거나 하는 비-시적인 발상들을 되도록 배제하면서 상상의 공간을 넓힌다. 실재와 가상의 미묘한 배합으로 신비한 지점으로 나아가면서 서정적 심정주의와도, 서사의 완결성이나 의미의 표면화와도 거리를 둔다. 실재가 시 정신을 압박하거나 질식시키려 할수록 여기서 이탈하려는 감각을 발휘하면서도 주제와의 연결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고유의 파롤로 간추려 온 세계의 어떠함 그 이면에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깔아 둔 실재가 언제나 잠재한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태고의 신비에서 현격히 멀어진 현대의 문화 현상에 주목해 왔다. 문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표류할 수밖에 없는 가치들을 포착하고, 변화하는 시대의 문화 현상을 집합명사 ‘언니들’의 당대적 삶에서 추려낸다. 나른한 오후를 깨우는 중산층 여성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도시의 내면을 들추면서 자본 욕망에 포섭된 주체만이 아니라 저변에 흐르는 인간성도 짚어낸다. 디지털 기기와 인간 간 연결을 감각적으로 묘파하고, 진짜 같은 가짜를 제조하는 자본시장의 기만, 그리고 루키즘에도 감각을 잇댄다. 이후에도 시인은 문화가 보편화한 시대의 갖가지 음원‧그림‧문학 작품들을 오브제로 활용하여 사회로 연결하는 상상력의 끈을 만든다. 이는 문화 보충물이 흔해진 시대의 시적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숨겨진 주제를 발굴하는 건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물론 이 같은 작업을 유독 배옥주 시인만 해온 것도 아니고, 그간 발행한 시집들에서 주된 상상력이 이 같은 경향으로 편중되어 있지도 않다. 더구나 이러한 작업은 이 시인이 등단한 2008년 이전에도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흐름이었고, 지금 동시대 시들에서도 제법 흔히 볼 수 있는 시적인 변주에 속한다. 그럼에도 배옥주의 시와 문화 보충물 간 상호작용에서 후자가 요긴한 이유는, 이로써 시대적 위험성을 추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비판적 기능을 장착한 것으로도 이해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배면에 깔아 둔 문제의식을 문화 보충물로 가시화하는 작품 전략이 형식 실험에 그치지 않고 내용의 확장성을 위하여 계산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불안과 공포를 안기는 세계에 대한 발화에서 그 말이 지닌 힘을 되도록 숨겨두고 문화 이미지를 밀어 올려 의미를 추정케 하는 방식이다. 말을 줄인 자리에 돌올하게 이미지를 두어 텍스트성을 강화하는 일이 결국에 사회 비판적 관점의 확보로 이어지면서 시의 비판적 기능도 달성된다. 요컨대 배옥주 시에서 문화 보충물은 막연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하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대변한다. 일회성의 도구로 소모되지 않고 ‘할 말’의 비유로 기능하는 회화 작품은 이 시인에게 단지 그림에 그치지 않는 ‘다른’ 언어이기도 하다. 이를 문화 텍스트라 불러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태풍’은 자연 현상으로서 위풍당당한 풍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래 지닌 위력이 무력해진 증상으로서 지구 기후의 환유다. 그리고 또 다른 시에는 가상 체험을 하듯이 둥둥 떠 있는 주체가 죽은 자의 심장 소리인지 자신의 그것인지 모를 박동을 의료 진단 기계음에 섞인 소리로 듣는다. 거기는 첨단 과학기술이 조성한 세계이며, 죽음-삶이 같은 시간대에 놓인 것처럼 체험 주체도 생사가 편평해진 세계를 경험한다. 신작시 「타히티의 처녀림」 · 「산산」 · 「미궁」에서는 이렇듯 위협적인 힘을 가진 대상이거나, 그 힘에 포위된 존재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자기도 알 수 없는 방향 상실의 세계에서라면 이 같은 존재론적 질문에 유효 기간은 없을 것이다. 온 세계를 걱정할 만큼의 정신세계를 지니지도 한가롭지도 않은 이 세계의 구성원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 막막할 테다. 그럴수록 시인은 말이 없는 세계에 개입하여 형상을 밀어 올리면서 그로부터 어떤 내용을 짐작게 한다. 아득한 환상을 조성하면서도 가까운 곳을 더 잘 보이게 하는 배옥주의 시들은 과학 기술체나 그림에서 분배받은 상상력으로 그 고유성을 확보한다. 협소한 개인의 범주가 아닌 세계와 연결하는 감각의 비등점에서 실재를 발견케 하는 언어의 힘으로 이것이 가능하다. 근작시 「주사위 사전」 · 「버블버블」(『리을리을』, 2024)에서는 하나의 행위에서 언어적 사건과 수(數)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고, 타자의 것을 전유하는 일로부터 시적인 순간이 도래한다. 1. 위태로운 그 이름 현실의 압제로부터 자신을 구제하려는 내적인 언어는 자폐적일 수 있다. 이것이 타인에게 가닿는 것이 아니라, 부실한 자아가 행여 부서질세라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간수하는 차원에서의 소통 도구이기도 하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그 무엇이 되었건 외부로부터의 틈입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이 은밀한 언어는, 오직 자신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키워 가며 그 문제 안에 갇혀 버리는 사태를 만든다. 이렇게 고립된 상태가 당사자에게 평화의 형태로 주어진다는 데 자폐적인 언어의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 자아 외부의 공간이 겹쳐 있으면서 ‘바깥의 언어’도 살아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울려 나오면서 그것이 실제인지 가상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분화가 불가능한 세계의 끝을 밟으려는 시도 속에서 시 언어가 태어나므로 이는 태생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구체성도 실제 내용도 없이 공허한 말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때는 시인이 탈억압으로써만 말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잠입해 들어가는 순간이다. 어느 한쪽으로의 편입을 꺼리면서도 그곳을 밟아 보겠노라는 시인의 의도는 기계적인 목적이나 결과에 맞닿지 않는다. 아래 시에 중첩된 목소리는 최소한 두 개다. 비껴갈 기세가 아니다 쾌도난마는 위급할 때 잘 먹히지 않는다 웅크리고 앉은 나를 횡단하려다 창에 부딪쳐 원을 그리고 있다 바람은 바람의 영향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내려찍는 발끝이 정수리에 꽂힌다 고통은 수세도 호기도 아니다 내려찍기 한 방에 멈춰버린 머릿속, 전륜성왕 바퀴들이 회오리친다 지향과 지양 사이를 방황하는 풍속은 골방에서 맴돈다 나는 용서를 빌 일도 잘못한 일도 생각나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으려는 꽃기둥처럼 흔들리는 백열등, 공세도 바람의 형국이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은 바람이 만든 이름 뱅골만, 아라비아해, 어디서든 행적이 목격된다 우리가 다른 이름을 가진다면 모르는 사이일지도 수마는 숲이 감당 못할 코끼리 떼, 하지정맥을 앓는 다리, 돌아누우면 남남일까 저려오는 종아리를 움켜쥘 때 해가 중천에 떠 있다 오늘의 운세는 오늘 벗어나야 한다 . ‘산산’은 자전거 속도로 큐슈를 지나가고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은 천사가 아니다 ―「산산」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낭만화하는 것 같으나 무력(武力)으로 시작하여 무력화(無力化)하는 비인간 자연의 움직임이 거침없다. 소란스러운 “산산”은 과학을 빌려야만 그 정체를 확언할 수 있으나 시인은 시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감각의 주체다. 인간관계에서 성립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바람의 속성에 대한 이중화 전략을 편다. 하나는 실재로서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타자적 속성이다. 공세와 수세, 지향과 지양의 대립 쌍으로 당신과 나의 관계성을 짚어내면서 끝내 소멸하고 만 당신의 향방을 그리고 있다. 시간으로도, 호흡으로도, 역사의 흐름으로도 상징화가 가능한 바람이지만 시 현실에서는 실재의 재현으로서 그것이다. 표면으로는 발생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호명하는 바람의 위력과 소멸 과정을 읽을 수 있다. 이면에서는 발생과 약화, 본성의 변질을 거쳐 바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방향 상실의 기류가 감지된다. 본성이 극렬한 당신이지만 위세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화자는 당신이 큐슈라는 지형에서 “자전거 속도”로 급속히 힘이 빠져 버린 이유에 의아해 하면서도 과학적 객관 정보에 시 언어를 내주지 않고 사실을 유보한다. “둥근 눈을 치뜨는 당신”을 실재에 비추어 보면 ‘태풍의 눈’이라는 내포가 선연하다. “날개 없는 열대성 저기압”이라는 기표에 이르면 위력을 상실한 태풍의 실체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요청하는 지성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시인은 ‘산산’이 특정 위치에서 급격히 소멸한 이유를 성급히 해명하지 않고 독자의 참여를 요청한다. 천사를 신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오늘의 운세도 부정하는 화자의 자세는 막연한 낙관주의를 회의하는 자의 그것이다. 영향권을 스스로 만드는 에너지로서 당신은 지금 본성을 제압당하는 낯선 기류의 외압으로 자신의 진로임에도 맥을 놓아 버렸다. 이것을 과학 언어를 빌려 기후 변화의 여파라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행위성은 충분히 과학적이다. 바람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 정보를 주지 않더라도 그 자체 움직임이 하나의 서술문으로 기능한다. 에너지의 화신인 당신이지만 지금은 화자와의 상호작용도 심히 교란된다. 당신의 영역에서 영향권을 만들어 공세를 키우면서 화자를 비켜 간 적이 없는 공격성으로 하여 화자는 미움도 사랑도 기다림도 없이 온몸으로 당신을 겪게 된다. 당신은 화자의 의지나 의욕과 무관하게 “지향”하는 주체, 발생했다가 사라질 때에야 공격 “지양”의 자세를 취한다. 시인이 성난 짐승처럼 묘사한 바람을 기후 위기의 환유로 읽었으므로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이 시에서 비활성화한 바람은 당신과 나 사이의 균열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언어이기도, 과학과 시 사이의 균열에서 생기는 불화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비인간 자연의 심상이면서, 비가시적이지만 물질에 닿는 촉감으로 감각할 수 있는 실체이기도 하다. 대사 교환 과정에서는 ‘나’의 숨결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듯 진로를 예측할 수 없는 외력에 의하여 순환 장애와 교란이 생기기도 한다. 화자에게 끝내 도달하지 못한 천사를 운위하는 이유도 위력을 잃은 당신은 천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결구와 연결된다. 당신은 본래 지닌 위력으로 하여 언제나 당신다운 실체였다. 위력을 잃은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시인의 문제의식에는 실재와 가상이 혼합되어 있다. 당신의 영향권 내의 모든 ‘나’들과 관련하는 당신과, 일인칭 ‘나’의 상대적 타자인 당신의 관계는 지금 극도로 불안정하다. 실재는 기후 위기의 여파 쪽으로 기울고, 감각은 실재를 되도록 은폐한 채 당신의 원초성이 나에게 닿지 못하는 이유를 추정케 한다. 시인이 가닿고자 하는 실재와 가상의 만남은 최소한의 단서를 노출하면서 이뤄진다. 이 시에서는 “열대성 저기압”이 그것이다. 이 어휘로부터 확산하는 지식을 내면으로 사려 넣으며 시인은 이 텍스트에서 분리되어 사라진다. 시인이 당신이라 부르는 바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거기에 남는다. 2. 의심하기: 불멸하는 예술의 심층 어느 시대건 불멸하는 예술품을 향한 관심과 애호 감정은 반감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에 반드시 합치하지 않더라도 열린 해석의 지층을 용인하는 태도가 그러하며, 작가의 의도에 역행하는 해석을 엄정하게 판별하는 규범이야말로 예술품의 생명력을 꺾는 숨 막히는 제도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만큼 불멸하는 예술품이란 유한한 인류가 있어 온 이래 무한한 세계를 꿈꾸는 비극미를 작가의 손끝으로 피워 올린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불멸성을 말할 때는 단지 작품의 보존 여부나 미적 양식의 전승만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더 큰 울림은 이면에 흐르는 작가의 정신,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시대가 바뀌어도 불변하고 불멸하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소망이 거기에 있느냐에 있다. 시에 기입한 그림 효과로 시너지가 분명 생겼을 것이기에 배옥주 시인도 이 같은 시 형식을 일찍이 전유하지 않았을까. 시와 그림의 만남으로 하나의 사물에 들붙은 또 다른 사물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그의 작업은 첫 시집의 「푸른 옷의 무희」에서 선행되었다. 그림과 문자 기호가 만날 때 내는 이중의 목소리에는 현상의 잔해들이 있다. 그림 이미지가 끼어들면서 일상사에 반하는 사유의 지점이 생성되는데, 여기에 가상적 결합으로 혼종의 세계를 고안하는 시인의 의도가 담겨 있다. 통합된 세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낯선 언어가 발생하면서 기정사실화된 구분법을 단숨에 벗어난다. 안전과 안정의 계기를 안기는 것이 통합이라면, 불안전과 불안정을 조성하는 언어는 시종 긴장을 유발한다. 문자 기호와 그림과의 만남은 뒤의 경우다. 상이한 방식 간 감각의 충돌과 어긋남의 경사면에서 급격히 새로운 세계가 생성한다. 겔트족 소녀들이 파랗게 질린 제 심장을 들여다보고 있다 소금꽃 바구니를 해변 끝자락에 걸고 해안을 따라 사라져가는 일몰이 발견되었을 때 깊은 늑골을 가진 망고꽃 한 송이 두 송이 긴 목이 해풍에 시들고 있다 산호초바다에 수장된 노르망디의 황색 그리스도 귀먹은 바닷새들은 매독을 앓는 히바오아섬을 떠나가고 고갱이 칠해놓은 처녀림이 찢겨나간다 양손으로 해안선을 발라내면 검붉은 유두가 열리는 숲 열두 살, 열네 살의 먹빛 정수리는 물의 골짜기에서 저물어간다 우물가에서 씻어 말린 네 개의 이빨,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려가도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해 응답 없는 눈빛과 마주한 나는 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타히티의 처녀림」 두 편의 그림이 상호텍스트로 기능한다. 하나는 이방인으로 보이는 세 여인을 내려다보는 “황색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에는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담겨 있다. 익숙한 구상화이지만 시인의 주관이 개입하면서 변형이 가해진다. 8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한 그림을 둘러싸고 두 명의 화가가 등장한다. 고갱과, 이 시의 화자이면서 화가인 듯한 인물이다. 문자 기호와 이미지의 상호 전환 감각을 요구하는 이 시에는 단일 의미를 부수는 파편이 편재한다. 한쪽의 목소리가 다른 한쪽의 목소리를 덮으면서, 유화 물감을 덧칠하듯이 이미지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형상들이 시종 불완전하고, 좁은 각도를 지닌 입체물처럼 제각기 할 말이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화자의 감각은 ‘바라보는 자’의 그것이지만, 매독 환자인 고갱은 “타히티의 처녀림”이 찢겨 나가도록 방종한 장본인으로서 화자의 불편한 감정을 자극한다(“반깁스를 풀어도 여전히 연필을 놓치고”). “처녀의 맨발 아래 하얀 풀이 쓰러지”는 이미지에서 감지되는 외력의 징후, “꽃대 부러진 시간이 쓸”어가 버린 아름다운 현상들을 안타까워하는 화자를 보건대 고갱의 그림은 이중 부정을 촉발하는 매재이기도 하다. 우선 감지되는 바는 예술의 불멸성을 찬양하는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다른 하나는 고갱의 처녀림 침공이 자신의 성 해방을 가능케 한 행위였으므로, 소녀들을 몸의 식민지로 착취한 것에 대한 부정성이다. 그림 제목에 심오한 질문을 담아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죽음까지의 철학적 사유를 한 장의 그림에 표현하고자 한 고갱의 창발성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불멸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게 신기”하다며 날카로운 지성을 장착한다. 불멸하는 예술의 내면을 따져보기도 전에 자동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작품에 대한 부정성, 그리고 이것의 아우라와 제의적 가치에 대한 반발이다. 번번이 “연필을 놓치고” 마는 화자의 행동에 이 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미지를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지우는 배옥주 시에서 추려낼 수 있는 건 그 파편이다. 이 시의 이미지는 그 자체보다 주변부와 바깥으로 우리의 관심을 유도한다. 여성 작가들이 꺼리는 표현인 ‘처녀림’을 번연히 노출한 데서 역설적인 풍자를 읽게 된다. 이 기표를 사용하여 마침내 남성-언어가 “찢겨나”가게 만든다. 그렇다면 “겔트족 소녀들”이라는 진술 대상과 “노르망디”의 관련성도 징후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간 모종의 연관성은 시의 외부에 객관적 지식으로 존재한다. 고갱의 타히티 상륙과, 제2차 세계대전 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간 연관성으로부터 시적인 사건을 구성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을 뿐. 시인이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 텍스트를 뚫고 나갈 우리의 지식이 얄팍하다는 데 난점이 있다. 진실 앞에서 앎을 소외시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오는 길을 찾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되는 앎의 필요는 배옥주의 시를 읽는 내내 반감되지 않는다. 3. 상처입은 자는 어디로 가는가 상처투성이 인간은 도리어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말을 아낀다. 켜켜이 쌓인 상처에 말을 사려 넣어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세계를 만들어 간다. 타자에게서 받은 상처이기에 타자를 멀리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격리되는 방어기제가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외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렇기만 하다면 그가 자처한 어떤 고독의 형태, 말 없음, 사회와의 격리 등은 단독자로서 자리를 굳히는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가 바라는바 사회화를 위한 에너지를 소진한 뒤라면 그에게 고독의 원천은 이제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안에서 길을 만들어 가는 이가 겪는 고통을 심미적으로 엮어내는 「미궁」에서 경험 주체는 지금 죽은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취-잠-꿈-소망이 한데 얼크러진 반수면 상태다. 잠-꿈-소망의 관계성은 흔히 봐 온 것이지만 이 시에는 마취 상태가 추가된다. 화자는 마취된 후 기이한 힘에 속수무책 빠져들면서 실재로부터의 방출과 미지로의 끌림을 동시에 경험한다. “척추와 꼬리뼈 사이”에 위치한 어떤 “뼈를 뽑아내는” 과정에서의 마취제 투입, 이어지는 혼돈의 세계, 불안과 공포, 몸소 추락과 상승의 곡선이 되어 지금까지 상식이었던 모든 현상들이 전복되는, 기이한 세계에 도달한다. 쇠파이프가 미궁의 뼈를 뽑아내는 깊은 곳. 나직한 물소리, 물살 가르는 저 소리. 입속을 흐르는 깜깜한 물길은 내 혀에 지느러미를 돋게 하고 어두운 비늘마저 젖게 한다. 물결의 값은 위아래로 수백수천 길. 눈을 감고 거슬러 오르는 검고 깊은 강이 문을 두드리고 창밖에는 들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 녹슨 날 끝을 움켜쥔 물소리에 찔리며 어느 해안 주상절리로 굳어가는 나의 발은 젖은 육면체. 바닥이 미끄럽다. 화상 입은 살구 한 알과 시트 밖으로 내놓은 새하얀 발목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 베어지지 않는 배나무 아래 새들이 벗겨놓은 종이가발들. 배의 살을 발라 먹고 남겨두는 눈알은 영혼을 위한 배려라는데, 아침이 오면 언니를 위해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 네모난 방마다 네모난 무관심이 있고 문이 열린 횟수를 세지 않는다. ―「미궁」 부분 앞선 시에서 고갱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은 이 시에서 상처 입은 언니의 행방을 질문하는 것으로 변주된다. 화자는 쇄도하는 빛과 연속되는 미궁의 광막함 속에 떠 있다. ‘셋’을 세면서 접어든 “빛의 방”이 “발바닥이 떠다니는” 곳이라는 단서만으로도 무중력의 혼돈이 엿보인다. 물속에 누운 오필리어의 형상을 연상시키는 시적 구성에서 유한자로서의 면모가 나타나며, 물속에서 온갖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 같은 감각은 최종 시간과 접촉한 자의 그것이다. 종내 만날 수 없는 언니와의 거리감은, 첫 시집의 「고스트, 고스트」에서 열아홉 살에 자살한 언니와의 연관으로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배옥주 시에서 발생한 질문은 또 다른 시를 읽어 그 답을 마련할 수 있다. 화자의 인격, 언니와 관련한 내용이 시인의 전기 중 하나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시는 시일 뿐이다. 추정도 사실로 다가가는 한 방법일 수 있으나 배옥주는 사실의 발설이라는 명료성을 따르기보다 그 이면의 진실을 놓칠 수 없다는 자기 내면의 요청에 깨어 있는 시인이다. 「미궁」의 화자는 지금 미지의 세계를 명료히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환히 보아 내는 눈 또는 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리된 자아가 자신을 보는 상황인 것 같다. 물속에 잠긴 듯 먹먹한 감각으로 미궁과 심연을 부유하는 화자에게 언니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심원함이자 심연이자 궁극적인 실패다. 가지 못할 세계로 가 보고서야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화자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올 곳으로 돌아왔다는 감각은 명료해질 것이다. 죽음의 형식으로 만난 언니에게 사과를 깎아 주리라는 기대를 품어 보는 것은 언니가 거쳐 간 장소와 시간을 자신도 경험 중이라는 감각 때문이지 않을까. 언니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을 투사한 이 시 이전의 시 「버블버블」에서 화자는 이 세계를 온통 둥그런 형상들로 인지한다. 풍선껌을 몰래 훔쳐 숨을 불어넣으면 덩달아 부풀어 올랐던 몸의 기억, 아픈 언니의 머리핀을 훔쳐 친구의 생일 선물로 주어 “삼총사”에 낄 수 있었다는 ‘나쁜’ 기억을 소환하는 일들이 모두 타자의 것을 자기화한 일에 대한 반추다. 타자로부터 전유한 것이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의식이 충만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타자의 무게와 달리 기분은 불시에 생겼다 꺼지는 기포와 같다. 역설적이게도 삶이란 훔치는 형식으로 자기화한 것을 누리는 일. 화자에게 오늘은, 앞서 살다 간 사람의 것이었던 시간을 “언니의 마지막 일기 뒷장”을 이어서 쓰는 기분으로 지속하는 일이다. 다시 「미궁」으로 돌아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라는 일인칭의 협소한 질문을 지나 “상처 입은 것들은 어디로 갔나”에 이르면, 무관심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상처의 주역들이 어딘가로 무수히 떠나 버린 사정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발을 “젖은 육면체”라고 감각하는 화자 앞에 놓인 길은 주사위를 던지는 자의 확률놀이처럼 번번이 미정이며 불확정적이다. 무수한 가능성이 도리어 길을 지워내는 중에 “여럿이 된 내가 엎질러”지기도 하는 이 무중력과 혼돈의 상태는 근작시 「주사위 사전」에서처럼 다중 감각의 분기로서만 이곳이 어디인지를 말할 수 있다. 지상과의 불화로 감각의 분기가 가능했던 화자이건만 이곳에서도 “상처입은 것들”과는 만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자들의 길은 어디이며, 그들의 거처는 또 어디인가? 갈 곳이 없는 자들에게 새겨진 상처만이 그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는 세계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곳, “깨어 있지만 깨어나지 않는 수로 속 미로들”에서 그 미로가 반복 “복제”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상처의 주체는 그 누구도 온전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홀로 걸어가는 자이지 않을까. 새로운 감각이 분기하는 순간을 마주하지만, 동반자에게 희망을 약속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오로지 혼자 그 길을 간다. 죽음이 자신의 마지막 경험이라는 감각도 오직 자기의 것임을 믿으면서 말이다. 「주사위 사전」에서 육면체 주사위에는 문자적 사건과 수적 사건이 공존한다. 언어와 수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사회화 과정에 필수인 가장 순수하고 보편적인 앎의 형식이다. 양 극단에 위치한 ‘다름’이지만 여기서는 ‘시’라는 장소에서 만나고 있다. “갑골문”의 기원에서는 숫자 표지도 읽을 수 있고, 주사위가 지닌 “말의 문양들”은 원초적 공간에서부터 무한한 우주 공간까지 품는다. “여섯 개 표정”이 함유하는 스물한 개 점의 수는 단지 수적인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수와 언어의 연립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한 차례의 제의 행위로 수 하나가 나타나는 이치를 읽을 수 있다. 그 숫자는 누군가의 염원을 담은 말이기도 하므로 이것이 수적인 사건으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렇듯 수에 깃들인 인간의 염원을 기반으로 언어로부터 수가 발생하는 순간을 상상하는 이 시는, 시와 수학의 친연성을 말한 보들레르에 근거한 발상으로도, 지적인 은유가 가능했기에 얻은 시 언어로도 보인다. 무모순성을 진리로 아는 수와 모순을 견디는 언어의 힘이 충돌할 때, 한편의 정확성과 다른 한편의 모호성이 만나면서 독특한 상상의 장력이 생긴다. 이 시인에게 시 쓰기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여는 일이며, 다양한 기호와 상징들을 서로 교환하고 상상하고 전달하는 언어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주사위의 여섯 개 표정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분기하는 감각으로 표정을 만들어 가는 시 건축술을 보건대 그러하다. 4. 그림 텍스트의 비판적 기능 시에다 사회 비판 기능을 부과하여 이 점만을 강조한다면 미학적 기대는 흐려진다. 도구적 가치를 앞세울수록 본질적 가치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얇고 좁은 자리를 배당받을 수밖에 없다. 목적 수행의 기능이 우세한 시 언어는 다의성을 폐기한 채 단일한 전언의 통로로 전락할 것이다. 배옥주의 시 미학에 담긴 비판 기능과 그 전언은 명료한 진술보다는 그림 텍스트나 과학 정보에 기반한 상상력의 도움에서 비롯한다. 미학과 비판을 아우르는 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그의 시는 단지 아름다운 말이나 온유한 정서를 유발하는 차원에서의 발화는 아니다. 시의 비판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요구가 사라진 적이 있었던가. 이 점을 망각한 채 시 미학에만 몰두한다면 낭만주의자의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받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편중된 시가 생명력을 지니기 어려운 것만큼이나 양자를 아우르는 방법론을 찾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런 이유로 배옥주 시인이 그림 텍스트로 비벼낸 시 미학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는 심정의 언어로 서정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영성을 믿는 방식으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 언어의 최소화, 이미지의 극대화로 시의 비판적 기능과 동시에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는 가치가 있다. 이는 동시대 시의 대표 격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시의 비판적 기능을 환기하는 시 형식에 대한 논의에서 문화 텍스트를 전유하는 방법론에 대한 예시로 매우 적절하다는 것쯤은 말해 둘 수 있겠다. 다중의 목소리가 담긴 배옥주의 신작 시는 모두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미망의 감각을 첨예화한다. 명명할 수 없는 것 위에서도 발화가 가능한 것이 시 문학임을 승인할 수 있다면 배옥주 시의 가능성은 이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당대인의 문화 감수성이 기원으로부터 현격히 멀어져 버린 증상이라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는 현상적인 것에 매몰되지 않고 그 연원을 따지고 들어가 현재를 투시하는 질료로 삼는다. 한쪽의 자유가 다른 쪽에 감옥을 떠안기는 일이 될수록 시인은 세계-내-존재의 고통을 자기화한 감각으로 시를 쓴다. 문명의 급진전에 따른 기후 위기와, 도처에서 발발하는 전쟁과, 성 착취가 멈출 날이 없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문제의식에 우리도 더불어 불편을 느낀다. 말이 되고 시가 되는 건 바로 이 불편한 감각이다. 1) 《현대시》 2025.11월호에 발표한 글을 일부 보완하여 재수록합니다.
유령이 하는 일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충분히 완수될 때 유령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막상 소설은 유령이 사라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소설은 애도를 완성하려 들지 않고, 애도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사 자체로도 애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4) 반가운 유령에 대한 소설적 상상력은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현실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령을 반갑게 맞이해보고자 한다. 2. 기억–유령의 무덤 혹은 아카이브 윤성희의 소설집 『느리게 가는 마음』에는 생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인물들은 생일을 맞아 소원을 빌고, 미역국을 먹고, 축하를 받는다. 또 어떤 인물들은 생일을 기념해 가출하고, 죽은 엄마가 생전에 갔던 술집에 가보고, 생일이 아님에도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런데 이들 곁에는 생일만큼이나 죽음도 많다. 엄마의 죽음(「마법사들」 「타임캡슐」 「웃는 돌」 「해피 버스데이」 「여름엔 참외」), 아내와 친구의 죽음(「보통의 속도」), 딸의 죽음(「자장가」), 식당 주인 할머니의 죽음(「해피 버스데이」) 그리고 아프거나 다쳐서 죽음에 가까워지는 인물들(「여름엔 참외」)이 있다. 이들은 때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유령이 되거나(「자장가」), 유령과 대화한다(「해피 버스데이」 「마법사들」). 이렇듯 생일과 죽음의 반복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모든 소설이 공유하는 세계의 핵심 원리다. 이 때문인지, 어떤 소설에서는 죽었던 인물이 다른 소설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감각이 만들어진다. 수록작들이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생일과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동명의 인물, 동명의 가게, 비슷한 일화나 특정 직업을 가진 인물이 여러 편의 소설에 걸쳐 반복적으로 그러나 변주되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임캡슐」에서 서술자가 전학 가기 전 학교의 친구였던 ‘지구’는 「자장가」에서 유령이 된 서술자의 유령 친구 ‘지구본’과 겹친다. 사실 지구본은 ‘김지구’와 ‘이본’의 명찰을 둘 다 가지고 있어, ‘지구’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서로 명찰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의미 있다. 그렇게 지구는 죽고 나서도 ‘지구본’이 된다. 또 「타임캡슐」에서 ‘나’의 고모는 ‘인생이 자꾸 꼬여서 꽈배기나 꼬아야겠다’라는 생각에 ‘꽈배기 가게’를 차리는 반면, 「자장가」에 등장하는 ‘꽈배기분식’의 이모는 ‘인생이 꼬여서 그렇게 꼬인 것은 팔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꽈배기는 팔지 않는다. 「느리게 가는 마음」에서 ‘나’가 체육 선생님의 아버지로 추측하는 만물 트럭상이 「웃는 돌」에서 ‘나’의 삼촌이 거쳤던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 묘사되고 있으며, ‘나’와 삼촌이 하는 티셔츠 주문 제작 사업의 고객으로 보이는 인물들은 「보통의 속도」에서 ‘난 다이어트를 할 거야’ ‘대부분의 너는 멋져’라는 문구를 등판에 새긴 티셔츠를 입고 ‘정원’과 마주친다. 정원의 친구인 ‘나’는 외벽 페인트칠 일을 하며 구름 사진을 찍어 모으는 게 취미인데, 「해피 버스데이」에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다른 인물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소설에 다양하게 흩뿌려진 일화들이 상보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란, 인물들이 인물들에게 구술·구연하는 일화부터 각종 디지털 매체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되는 일화까지 포함한다. 이 일화episode는 소설의 선형적인 서사 구성을 따라 삽입된다기보다 인물들의 회상과 대화를 통해 불시에 틈입하는데, 이러한 형식적 특성은 삽화식 구성이라 부름 직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이야기, 또 그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중심 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삽화 속에서는 소설의 주변 인물들까지 역으로 중심인물이 된다. 예컨대 「웃는 돌」의 주인공은 분명 ‘나’지만, 할머니의 팔순 잔치에서 오가는 과거 이야기 속에서는 할머니가 주인공이 되고, 삼촌이 과거 직업 변천사를 들려줄 때는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식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여러 일화가 전승되고 중첩되는 사태는 결국,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 모여 서로 다 아는 사람이 되듯, 인물들이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인물들을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면, 소설은 이들의 집단 기억을 꾸리는 데에 일조한다. 문화적 기억의 다양한 형식을 세분화한 알라이다 아스만의 책 『기억의 공간』5)에 따르면 집단 기억이란 공동체가 공유하는 기억, 심지어는 직접 경험하지 않아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다. 현실에서 이러한 집단 기억의 대부분은 주요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표면화된 기능 기억이지만, 소설이 활성화하고자 하는 기억은 무의식 저편에 맥락 없이 남아 있는 저장 기억에 가깝다. 망각된 기억을 끄집어내 서사로 펼쳐놓는 것이다. 특히 「마법사들」은 잊히고 버려진 공간에서 기억을 다시 구연한다. ‘나’와 성규는 가출한 뒤 나름대로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성규네세탁소’라는 간판이 걸린 망한 가게에 들어간다. ‘나’는 그곳에서 3년 전 달력을 발견하고 제사와 생일 표시를 찾은 뒤, 오늘 날짜에 별표를 하고 ‘성규 생일’이라고 적는다. 이내 이들은 망한 곳에서는 자고 싶지 않다는 성규의 말에 영화관으로 몸을 옮긴다. 마지막 상영이 끝나고 어두워진 영화관에서 ‘나’와 성규는 ‘나’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스크린 앞에서 영화배우가 되어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관은 영화–기능 기억이 소등되고 저장 기억이 점등되는 공간이다. 「타임캡슐」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무수히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꺼내놓는다. 시골집 마당에 있는 창고를 철거하고 옆집의 담을 재구축하는 공사를 하던 중, 관 속에 들어 있는 아기 인형이 땅속에서 발굴되는 사건은 하나의 소동이 된다. 인형이 시체로 오인되어 신고까지 당하자, 사건은 뉴스에 보도된다. 이웃들은 물론 ‘나’, 친구 ‘진형’, 고모와 아빠까지 이 인형에 얽힌 사연–가설을 제시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이후 ‘나’는 ‘어설픈 코난’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친구 진형과 함께 사흘에 한 번씩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당신을 향한 리듬 조시현,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문학과지성사, 2025) 현호정, 『한 방울의 내가』(사계절, 2025) 인아영 문체는 단지 어휘의 선택이나 통사의 조합과 같은 수사적 기술이 아니다. 내용 위에 덧붙여진 표면적인 장식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저자의 사유와 언어의 감각이 협상되는 장소에 가깝다. 언어의 전달 기능을 초월하거나 그것에 선행하면서 주체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질문을 생산·배치·조율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문체는 글쓰기에 딸려 오는 부속물이 아니라 글쓰기에 내재된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체는 근대성 혹은 근대적 자아라는 개념과 종종 결부되곤 한다. 근대문학은 개인의 사상·내면·감정을 드러내는 글쓰기 형식으로 발달했고, 문체란 그러한 개인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현 양식의 증거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다만 문체를 문학의 깊이나 개인의 주체성을 증명하는 척도로 곧장 연결하는 틀은, 자칫 문체를 문학의 자율성에 봉사하는 도구로 환원하거나 작가의 의도나 욕망을 재현하는 매개로 한정할 수도 있다.1) 디지털 미디어의 가속화나 알고리즘의 자동화로 인해 달라지고 있는 현재의 언어적인 조건까지 고려하지 않더라도, 문체란 원형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도정이나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운동성이 매순간 “새롭게 발견되고 낯선 것으로 창안되는 ‘과정’”2)으로서의 형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최근 문학에서 어휘·통사·수사·리듬 등 문체에서 창안되고 있는 여러 형식적인 시도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표제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문체와 주제가 유기적이고 긴밀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소설이다. “영혼은 슈크림”(p. 311)이라는 첫 문장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이 소설에서 자아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가 아니라 비정형으로 움직이는 물성에 가깝다. 영혼을 은유하는 슈크림, 콧물, 굴, 생리혈, 호두과자와 같은 사물은 모두 끈적이고 불투명하며 통제되지 않는 점액질의 물성을 가지고 있다. 윤곽이 뚜렷하거나 실체가 확실한 개체가 아니라 언제든 주입되거나 흘러내릴 수 있는 유동적인 상태로서의 자아. 이것이 조시현 소설에서 자아의 기본적인 세팅이다. 이러한 은유는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청각적인 리듬의 반복으로 배열된다. “철걱. 규웃, 철걱. 규웃”(p. 318)과 같은 의성어는 붕어빵에 슈크림이 주입되는 소리이지만, 인간의 대척점에 있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인간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영혼’이 맞물려 돌아가는 리듬이기도 하다. 이러한 리듬은 생명과 비생명,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낯설게 만든다.3) 한편 본문 곳곳에서 단어가 짧게 나열되는 구조는 매끄럽게 통일되기보다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영혼의 형상과 조응한다. “디스켓 위로 덮어 씌워지기. 휴대폰에 새로운 앱 깔기. 가벼운 멀미. 구역질”(p. 337)이나 “빵 결 같은 피부. 사소한 다툼. 매니큐어가 떨어진 손톱이나 어질러진 방. 거꾸로 벗겨진 팬티. 땀. 눈물. 머리카락. 베인 살에서 뚝뚝 떨어지던 핏방울. 거기서 나던 찝찌름한 맛.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 갓 빤 이불의 냄새”(p. 349)와 같은 구절은 접속어 없이 나열되어 자아가 해체되고 기억이 충돌하는 현상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인과적이거나 논리적인 서술보다 신체의 반응과 인지의 충격이 부각되는 이러한 서술들은 분열된 신체 정동을 반영한다. 몸을 잃고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휴먼 슈트’라는 공용 신체에 주입되어 살아가는 가까운 미래. 인류의 데이터를 수집·학습·복제하려는 야심을 가진 AI ‘안젤리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자신을 덮어씌워 기계의 깊숙한 내부에 침투하여 이를 변형하려는 나진의 시도는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저항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질문하며 그 감염에 기꺼이 몸을 열어두려는 감각적인 개입이다. 나진이 사랑하는 마디를 떠올리며 “타인의 흔적은 늘 그런 식으로 몸으로 들어와 함께 빚어지는 것”(pp. 318~19)이라고 말할 때, ‘타인’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자아란 처음부터 고립된 개체 단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상호적으로 침투·조형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가 빚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몸”(p. 319)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시현의 소설에서 몸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 접촉과 흔적이 만들어내는 공동 감각의 매체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휴먼 슈트는 단순히 몸의 대체물이 아니라, 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매개 장치로 작동한다. “시간이 누적되지 않는 몸. 삶이 새겨지지 않는 몸. 역사가 없는 몸”(p. 326)은 기억·감정·경험을 저장하지 않는 저장소로서, 감각의 층위로서의 몸의 개념에 대해 질문한다. 자아란 흘러들고 주입되며 끈적하게 뒤엉키는 점액질의 덩어리이고, 그 표면은 타자의 흔적을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며, 영혼은 영혼과 기계를 오가는 반복적인 리듬 속에서 진동한다. 조시현의 소설은 자아의 존재론이 서사 이전에 문장의 리듬, 어휘의 질감, 감각의 배열에서 형성되는 문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 현호정의 소설이 시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단지 아름답거나 슬퍼서 혹은 아름다움과 슬픔이 응축되어 있어서만이 아니라, 모든 문장이 밀도 높은 긴장을 머금은 채로 저마다의 리듬과 운율로 움직이고 있어서다. 첫번째 소설집 『한 방울의 내가』에 실린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은 문체가 압도하는 소설이다. “가족들 친구들 다 수장된 바다 위에 머리만 동동 뜬 채 살아난 기분 헛되고 어이없고 기가 막혀…… 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그냥 거기까지의 고통. 왜냐하면 또 통곡하고 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다친 데가 굉장히 아프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여기까지 이어진 질긴 목숨이 영 낯설어서. 이상해서. 징그러워서. 이게 내 것 같지 않아서 그걸 가졌단 수치심도 내 것 같지 않아서, 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여전히 여기 있다는 게, 내가 이렇게 외롭게 이렇게 아프게 슬프게 배고프게 내가 계속 여기 있다는 게 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pp. 54~55) 눈에 띄는 것은 미완결이거나 비문법적으로 해체된 문장이다. 물에 잠겨 바다가 되어버린 땅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이 몸부림치면서 울고 괴로워하는 이 장면에는 문법적 빈틈이 보인다. 서로 다른 품사가 병치되어 있거나(“떨떠름 언짢은 뭐 그런 뉘앙스”), 조사가 생략되어 있거나(“절규, 몸부림 돌입하기에 생존자들 일단 배고팠고요”), 쉼표 없이 같은 품사의 어휘가 병렬되거나(“도무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느 것 하나 내 것 같지 않아서 믿어지지 않아서”), 종결어미 없이 끝나는(“그러니까 여기 이렇게 있는 게 다름 아닌 나라는 게……”) 식이다. 이렇게 분열되고 파열된 문장들은 ‘나’가 스스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그러니까 그토록 엄청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많은 것이 죽고 사라지고 파괴된 이후에도 ‘나’는 어떻게 여전히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서술로 끝맺어진다. 이 목소리는 문장의 종결을 지연하면서 이어지고 늘어지다가, 매끈하게 완결되거나 문법적으로 완벽한 문장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어디론가 열려 있는 채로 다음 단락으로 넘어간다. 의도적으로 흔들거리는 문장들은 숨 쉬고 아프고 배고프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틈을 사이사이 벌려놓는다. ‘나’는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 문장들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듯 적혀야 했을까? 적어도 고정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비슷한 음운·음절·어휘·어구가 중첩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자아낸다. 이를테면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이어지던 인류세는 느른히 늘어져 멈출 줄 몰랐고, 마침내는 살아남아 기쁘단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었답니다”(p. 53)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은 가락처럼 움직이는 듯하다. “생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면서 이응, 미음, 리을이 굴러가듯 이어지고(“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라는 음절이 반복되면서 강세를 형성하며(“차례차례 차차 잃고”), 발음이 유사한 어휘가 흘러가듯 연결되면서(“느른히 늘어져”) 문장이 특정한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가 무너졌다가 흘러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미지를 형성한다. 동시에 “-이다”라는 서술격 조사만이 아니라 (특히 스스로가 지구에 빙의되었다고 믿는 부랑자가 전해주는 지구의 목소리에서) ‘-고요’ ‘-답니다’ ‘-봐요’ ‘-습니까’ ‘-니까요’ ‘-게요?’ ‘-데요’와 같은 구어체의 종결어미가 변칙적으로 반복되거나 변주되면서 종결부의 여운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이렇게 중첩·반복·변주되는 문장은 리듬을 만들어내는데, 이 리듬은 구두점이나 쉼표 같은 기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이나 어휘의 단위로부터 생성된다. 자연재해로 온 땅이 바다에 잠기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멸종한 이후,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더러운 바다에서 시체가 분해된 유기물 뭉치로부터 새로 태어난 생명이 자생체와 기생체로 이루어진 기생 쌍둥이로 자라났고, 서로를 갉아 먹고 양분으로 삼는 기생체들의 죽은 몸이 서서히 흩어지자 ‘나’가 자전하기 시작하면서 지구가 생겨났다는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설득력은 바로 이 문체에서 얻어진다. 아주 미세한 사이즈의 미생물과 둘레가 약 4만 킬로미터인 지구가 하나의 존재로 겹쳐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잡아먹어 몸을 불리면서도 서로를 잉태하여 다시 몸을 나누는 관계가 이해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나고 죽으면서 다른 생명과 휘감겨 들러붙은 끝에 지금 여기의 ‘나’가 있다는 역사가 그려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끝없이 유동하며 이어지는 문장의 율동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이 율동성 없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이 아닌 ‘우리가 어떻게 뒤섞여 있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사유4)와 더불어, 생명이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 윤회한다는 불교적인 상상력이 깃들어 있음은 물론이다. ‘나’라는 고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이 파열된 자리에 수많은 죽음을 지나 순환해온 우리와 지금 여기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유. 그것은 이 소설의 운동 방식인 동시에 우리의 존재 방식이다. 죽음, 더 정확히는 한 존재의 소멸이 다른 존재의 생성·지속·변화와 맞물리는 현상은 현호정 소설을 하나로 꿰는 가장 근원적인 주제이지만, 「청룡이 나르샤」는 죽음에 얽힌 정동을 기계라는 비인간 존재로 확장하는 각별히 아름다운 소설이다. ‘죽고 싶어 하는 여자’와 ‘죽으러 가는 열차’의 사랑 이야기라고 이 소설을 요약해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어린 시절부터 열차에 매료된 삼십대 여성 K와, 곧 폐전기동차가 될 4호선 열차 ‘납작이’의 시점은 각각 좌우 다단으로 병치된다. 마치 기차선로처럼 나뉘어 있는 병렬 궤도에서 K와 납작이의 목소리는 열차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향해, 그러나 각기 다른 리듬과 속도로 나아간다. 흔히 기차는 근대적인 시간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철도 시간표가 도입되면서 지방시를 표준시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기차가 정해진 선로를 따라 일정한 속도로 나아간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해, 기차는 미래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적 시간성의 은유로 쓰이곤 한다. 그러나 「청룡이 나르샤」의 열차는 무언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판형과는 다르게 이 소설의 선로는 비선형적으로 순환하는 윤회의 궤도처럼 보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먼저 납작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보면 여러 번 되풀이해 들려오는 문장이 있다. “……당신에게 가려구요.” 이 문장은 시속 백 킬로미터로 질주하는 납작이를 마치 연료처럼 움직이게 하는 리듬이다. 이 모든 질주가 당신에게 가기 위한 꾸준한 운동임을 심박수와 같은 반복적인 리듬으로 상기하면서 납작이는 종착을 향해 움직인다. 왼쪽 선로에서 납작이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달려가는 동안, 오른쪽 선로에서 K의 목소리는 비교적 불규칙한 리듬으로 울린다. 열차에 탄 승객(“옷”)과 좌석(“므”)을 상형문자처럼 표현한 시각적인 이미지가 중간중간 변칙적인 강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우울증적인 시간을 겪고 있는 K에게 애초에 시간이란 운동과 정지의 리듬이 뒤섞인 감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연극을 혼자 기획하면서도 희곡을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K는 시무룩한 독백을 읊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버스나 택시는 무서워했으면서 유독 열차에게서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강렬하게 느껴온 마음을 고백하기도 하며, 혼자만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정신과 상담 선생님에게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털어놓기도 한다. K는 전류가 더는 공급되지 않는 열차를 상상하면서 자살을 꿈꾼다. “전 멈추고 싶어요” “언제든 당신이 원할 때?” “아뇨. 지금요”(p. 149). 생산된 지 30년이 되어 폐차를 앞두고 있는 열차와 죽음 충동에 시달리는 삼십대 여자.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 엉키거나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리듬으로 죽음이라는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어!’ 그들은 납작이를 응원할 수도 있다. ‘더 느리게! 더 천천히!’ 그 응원을 듣고 너무 힘내버린 나머지 납작이는 아예 멈춰버릴 수도 있다. 납작이의 길고 푸른 몸은 객실에 절반쯤, 플랫폼에 절반쯤 늘어져 있을 것이다. 아무도 끌어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납작이에게 푸른 베개를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길고 커다란 베개이고 무지막지하게 푹신한 데다 온열 기능이 있을 것이다. 납작이는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열차는 납작이를 기다릴 것이다. 그 열차도 푸른색일 것이다. 마침내 일어나 몸의 나머지 절반을 객실로 들여놓은 납작이는 곧 자신이 탄 열차의 낮고 고른 덜컹거림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열차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목적지는 이 세상의 끝이지만 여정은 끝내주게 평안할 것이다. 평안한 가운데 납작이는 자기가 열차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쁠 것이다. 므므므 옷 (pp. 167~68) 여전히 선로 위에 있지만 점점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납작이는 폐차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구간에서 멈추지 않고 K를 지나친다. 그러나 서두르는 승객들을 태우면서 일평생 몸이 부서져라 달린 자신에게 이제는 느려져도 된다고, 지금까지 성실하게 약속을 모두 지켜냈으니 마지막 한 번쯤은 느리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K의 응원을 듣기라도 한 듯,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멈춰 선다. 지면상으로 바로 같은 시점, K는 납득이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다가 원하는 만큼 누워서 시간을 보내며 늘어져 있다가 마침내 마지막으로 다른 푸른 열차를 타고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앞서의 불규칙적인 리듬과는 달리, ‘~ 것이다’라는 동일한 구문이 반복되면서, 어쩌면 납작이가 느려졌으면 좋겠다고 상상한 딱 그 속도만큼, 이 소설의 속도도 서서히 늦춰진다. 오른쪽 선로에서 살아가고 있는 K의 죽음 충동을 왼쪽 선로에서 달리고 있는 납작이가 이어받듯이 영원처럼 한없이 늘어진 시간을 만들어낸다. 한평생 정해진 구간의 종착만을 반복하며 어디에도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던 납작이는, 소설의 끝에 이르러 역설적으로 종착이 아닌 도착에 도달한다. ‘파랑 씨Mr. Blue’라는 호칭으로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서로를 마주 보며 흐르는 밥 딜런과 캐서린 피니의 노래처럼, K와 납작이의 삶은 서로의 다른 속도에 기대어 나란히 순환한다. 어쩌면 납작이는 K의 죽음 충동을 대신 가져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대리도 치환도 아니다. 당신에게 가려고, 더 느리고 천천히 가려고 부단히 흘러온 여정. 그것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위해 속도를 늦추면서 죽음에 도착한 끝에 또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가장 영원한 운행 기록이다. 1) 이은지는 “문체란 그것을 추구하는 작가 개인의 주체화와 결부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단발적인 자극과 즉물적인 효능감을 요구받는 문학 창작물에서는 묘사가 희박해진다는 한영인의 논의를 경유하여, 오늘날 문학에서 문체가 점차 고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이은지, 「문체의 역사성과 문학성—새로운 수사학을 위한 소고」, 『쓺』 2025년 상권, pp. 62~63; 한영인, 「컴플라이언스와 ‘선의 범속성’」, 『갈라지는 욕망들』, 창비, 2024, pp. 177~78 참조) 2) 권희철, 「살아남는 법을 배우기」, 『정화된 밤』, 문학동네, 2022, pp. 462~63 참조. 3) 전청림은 이 소설이 “환유적 이미지와 의성어, 리듬의 풍부한 활용으로 경계적 글쓰기를 돋보이게” 했다고 평하면서 조시현 소설에 나타난 문체적인 특징에 주목한 바 있다(「달고 끈적한 체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p. 366 참조). 4) 현호정의 소설을 포스트휴머니즘의 맥락 속에서 분석한 비평으로는 백지은, 「우리 소설의 자리 (2)」, 〈문장웹진〉 2023년 2월호; 강지희, 「세 마리의 새」, 웹진 〈비유〉 2024년 7/8월호, 성현아, 「액화된 몸으로 다시 쓰는 창세기」,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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