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보이는 여성 — 위수정론
보이는 여성 — 위수정론1)
1. 예술하는 여성들
위수정의 소설에는 예술을 전공한 인물들이 거의 매번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 여성들이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의 ‘원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며 연주에서 손을 놓았고 자신의 전공 지식은 연주자들의 연주 실력이나 곡 해석 능력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나 쓴다. 「풍경과 사랑」의 ‘나’ 역시 대학 시절 개인전을 열기도 한 미술 전공생이었으나 지금은 한옥 건축가가 된 남편을 내조하며 ‘미술을 전공한 감각’으로 센스 있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사모님이 되어 있다. 남편에게는 “브리오니의 블루 셔츠”를 입히고 자신은 “미우미우 화이트 블라우스에 노란색 에르메스 트윌리를 두르”(p. 82)는 세련된 감각을 뽐내며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차림이 자연스러워진 걸까”(p. 99)라며 허영에 가득 차 보이는 자신의 차림새를 가끔씩 점검해보는 자의식도 잊지 않는다.
「안개는 두 명」은 해외에서 레지던시 참여 작가로 만나 친해진 ‘선주’와 ‘화영’의 이야기이다.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선주’는 설치 작가로서 미술계에서 인지도를 쌓고 있고 회화 전공이었던 ‘화영’은 시아버지가 몰던 ‘하얀색 포르쉐’를 모는 임산부가 되어 있다. 「제인의 허밍」에서는 어떤가. 선천적 난청이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부잣집 딸 ‘규희’는 서양화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 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몬스테라 키우기」의 ‘민희’는 발레를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서 방탕한 생활 끝에 약물에 중독됐던 그녀는 현재 해안 도시의 방 네 개짜리 쾌적한 아파트에서 엄마의 카드를 아낌없이 쓰며 요양 중이다. 그 외 사진작가, 음향 기사, 구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특히 원희·규희·민희 등의 경우를 볼 때 그녀들에게 예술이란 전적으로 그들이 누리는 부유함이라는 계급적 특권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들은 부유하다는 이유로 예술을 전공할 수 있었고, 또 같은 이유로 전공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아도 되었던 인물들이다. 부모에게 선물 받거나 물려받아 소유하게 된 에르메스, 까르띠에, 포르쉐 혹은 몇백만 원짜리의 식물처럼 그녀들이 전공한 예술도 어쩌면 이들이 속한 계급적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수정의 소설은 이 시대 ‘순수예술’이 처한 상황을 은연중 말해주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예술이 배고픈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배고픈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도 어쩌면 무관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더 이상 어떤 고급의 취향을 드러내주지 못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계급적 인장처럼 모두 똑같이 몸에 두르고 있으며 표 나는 로고 없이도 그들끼리만 서로 알아챌 수 있는 최고급 명품처럼, 오늘날의 예술도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유행처럼 ‘소유’하면서 몸값을 키워가게 된 사치품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지적’ 혹은 ‘미적’ 허영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예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의 재력을 증명할 뿐인 사물 그 자체이다. 세상 돈 많은 사람들은 다 모여 있는 듯한 인스타그램의 명품 행렬들 속에서 역시나 유행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볼거리들, 가령 청량한 빛의 빨갛고 푸른 사과들, 하얗고 둥그런 달 모양의 항아리, 여러 색으로 겹쳐진 색깔 띠들의 조합,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는 색색의 동그라미들, 아무렇게나 찢긴 노트에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낙서, 이러한 작품들의 유행은 개개인의 미적 취향과는 어쩌면 전혀 무관하다. 예술 작품 역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의 재력만을 증명하는 유행 템에 불과하다. 수천만 원의 구매 이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에르메스의 버킨 백도 모두에게 똑같이 아름답고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버킨 백은 그것을 살 수 있는 특권만을 의미할 뿐이다. 돈의 권력 말이다.
위수정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의 해설에서 김형중이 적확하게 지적하듯 위수정의 몇몇 소설은 “‘취향을 매개로 한 계급 탐구’ 정도로 요약”2)이 가능하다. 『은의 세계』에 실린 「풍경과 사랑」이나 「화양」 같은 소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밤』에 실린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제인의 허밍」 「몬스테라 키우기」 같은 소설에서는 태어난 이후 생계의 걱정 같은 것은 한 번도 안 해봤을 법한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르고 백화점 식품관에서 장을 보는 중년 여성, 잠깐 스치듯 인사한 사람의 손목에서 오데마피게 시계를 알아보는 건축가, 결혼도 출산도 녹록지 않은 이즈음의 한국 사회에서 외동으로 자란 쓸쓸함을 해소하겠다며 셋째까지 임신한 젊은 여성, “15년에 보증금 8억, 월 5백, 1인 추가 시 3백”(「오후만 있던 일요일」, p. 81)의 비용이 드는 실버타운을 알아보는 노년의 부부 등이 그들이다. 유행했던 ‘수저론’을 참조하여 김형중은 이러한 인물들을 “금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라고 설명해보는데 ‘수저론’의 핵심이 그러하듯 이들의 안온한 세계가 세대를 넘어 견고하게 계승된다는 점도 위수정 소설에서 확인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위수정의 소설이 철저히 자본을 중심으로 위계화되는 중인 한국 사회의 특정 계층 사람들의 습속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부유한 사람들의 습속과 취향에 관해서라면 그것이 과장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이미지 중심의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더 상세히 그들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일상과 소유물들을 보란 듯이 노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뚜렷한 목적과 의도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박탈감 혹은 위화감이라는 것에도 둔감해질 만큼 이미 질리도록 보아온 사정을 문자 텍스트로 다시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위수정은 이 ‘금의 세계’를 배경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당연하게도 돈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즉 “살면서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해본 적이 없”(「몬스테라 키우기」, p. 170)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인생이 마냥 즐거울 리는 없다.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아 힘들기도 하고, 유학 생활의 외로움도 견디기 쉽지 않고, 늙어가며 추해지는 일도 서럽고, 예기치 못한 상대에 대한 갑작스러운 성적 갈망은 고통스럽다. 물론 위수정의 소설에서 재차 확인되는 것은 이러한 곤경들이 가족 간의 갈등이나 삶 전체의 위기로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위기들 속에서도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금의 세계’ 혹은 ‘은의 세계’에 속한 자들이 누리는 특권일지 모른다. 결정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안온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은의 세계」의 ‘지환’과 ‘하나’ 부부처럼 말이다. 이들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윤리적·지적 판단력, 선한 마음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삶의 균열을 언제든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돈이라는 권력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쉽게 무너질 수가 없다. 반면, 유튜브 방송으로 갑작스럽게 돈을 벌어 ‘금의 세계’로 진입 중인 「제인의 허밍」의 ‘한나’나, 「몬스테라 키우기」에서 민희의 집에 도우미 격으로 얹혀살며 SNS에서는 럭셔리한 삶을 즐기는 대학생으로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 ‘재순’은 금과 은과 흙의 세계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김형중의 분석처럼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선명히 확인되는 것은 “노예는 어떻게 해도 노예로 주인은 어떻게든 주인으로 남는 이 세계”(『밤』 해설, p. 378)의 변치 않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에 좀더 주목할 경우 우리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의 세계’와 ‘흙의 세계’ 사이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밤』 해설, p. 372)은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일까.
2.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여성들
그럴지도 모른다. 두번째 소설집에 실린 「아무도」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게 돼 별거를 감행한 ‘희진’의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희진을 비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을 클렌징 티슈로 닦아주는 다정함과 세심함을 지녔던 희진의 남편 ‘수형’은 묵묵히 희진의 결정을 따르고, 희진의 부모도 평소대로 무심한 듯, 자상한 듯 딸의 상황을 관망한다. 희진의 엄마는 “너 연애하려고 나온 거 아니었어?”(p. 36)라고 말하며 백화점에서 산 화려한 속옷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 부부의 별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시부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희진에게 따뜻하기만 하다. 희진의 이기적인 선택을 “개 같은 욕망”이나 “지나가는 바람”(p. 42)일 뿐이라고 힐난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9」의 ‘혜신’은 남편 친구 가족들과 함께 여행차 방문했던 고급 리조트의 내국인 카지노에서 난생처음 접해본 카드 게임에 완전히 매료되어 결국 어린 딸과 남편을 잊은 채 모텔과 찜질방을 전전하며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혜신에게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지금이라도 같이 가면 내가 다 처리하고, 용서”하겠다, 전부 “없었던 일로”(p. 273) 하겠다고 인내를 갖고 설득하는 남편이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그녀들이 그 안온한 일상을 버리고 “정말 딴 세상”(p. 248) 같은 그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희진은 “이러려고 집을 나온 거니까”(p. 14)라는 말을 반복하고, 혜신은 “돈 때문만은 아니”(p. 252)라고 말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언젠가, 노숙인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중2병이라거나 배부른 허무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겠지. 여전히 나는 노숙인의 삶을 간혹 상상한다.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나와 자고 소중한 것을 서서히 잊어가는 상태를.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친구와 가족과 이름을 버리고. 집착도 사랑도 모르는. 그렇게 죽음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을. 결코 자살은 하지 않고. (「아무도」, pp. 38~39)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소망하는 희진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나와 자고 소중한 것을 서서히 잊어가”고 싶은, “죽음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을” 꿈꾸는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세련된 취향을 지닌 위수정 소설의 우아한 여성들이 침대에서 “일부러 더 저급하게 굴”(「풍경과 사랑」, p. 100)며 흥분을 느끼거나 “아무나랑 잔다”(「마르케스를 잊어서」, p. 195)는 거짓말인 듯 아닌 듯한 말을 전남편에게 서슴없이 말하거나, 호텔에서 잠자리 상대로 젊은 남성이나 젊은 여성(「화양」 「우리에게 없는 밤」)을 만날 때, 그녀들은 어떤 갈망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고등학생 아들의 친구에게 혹은 아들뻘 되는 싱그러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그 마음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그 분명한 욕망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평범한 시선에서는 “멍청한 건지 미친 건지”(「은의 세계」, p. 32) 알 수 없는, 허공을 향해 내뱉은 “엉뚱한 소리”(「풍경과 사랑」, p. 105) 같은 저 마음들을 말이다.
첫번째 소설집의 해설에서 백지은은 위수정 소설을 “주어진 체제에 대한 감응이 아니라 그것을 이탈한 감각을 따라가는 경험, 자기 삶이 놓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세계를 견디기 위해 터져나오는 충동, 자기 동일시의 앎을 추구하기보다 앎이 되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정리했다. 인물들이 느끼는 사실적인 충동과 감각들을 수시로 묘사하는 위수정의 소설은 백지은이 말한 대로 “가시적 현실의 안정성을 흔”3)드는 충동과 정념을 더 명백한 사실로서 말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발설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빗겨선 충동과 마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것일 수 있다. 계급도 위계도 성별도 세대도 저 충동들과는 사실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수정의 소설에서 우리는 주로 여성들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주어진 질서의 의미를 무시하고 흩뜨리는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이 “미친년”(pp. 34, 71, 143) 또는 “썅년”(p. 257)의 이름으로 체제에 기입되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욕된 기표의 자리를 스스로 맡”으며 “그 질서의 독단과 무능을 뒤집”는 “미친년–되기 또는 썅년–되기를 수행하”(『은』 해설, p. 319)고 있다는 점은 특히 첫번째 소설집 『은의 세계』에서 흥미롭게 주목된 지점이기도 하다.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정념이 반드시 여성들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특정 계급의 한가로운 권태와 연결시키는 것도 그다지 생산적인 분석은 아닐 수 있는데, 『우리에게 없는 밤』에서는 이러한 ‘미친년–되기’ 혹은 ‘썅년–되기’가 보다 전략적인 방식으로 견고한 자본의 세계에 침투하며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을 교란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 노동하는 자족적인 여성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 읽을 작품은 「제인의 허밍」일 것이다. 구독자 수가 약 2천만 명에 이르며 연간 수익이 몇백억이라는 ‘Jane ASMR’ 먹방 채널을 연상시키는 “제인의 허밍”은 구독자 20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나’의 개인 유튜브 채널이다. 두 명의 제인은 모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로 방송을 한다. 제인이 된 한나는 가끔씩 미소 짓거나 허밍하는 입만 노출되도록, 그리고 속옷 색깔이 은근히 비치는 하얀 셔츠의 단추를 한두 개 풀어 가슴 쪽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도를 맞추고, 세 시간 동안 공부를 하는 모습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실시간 방송으로 송출한다. “단정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으로 가끔씩 허밍을 하며. 무심하고 지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애쓰며. 구독자는 최근에 20만을 넘겼다”(pp. 92~93).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 탓”(p. 95)에 어린 시절 앓았던 세균성 수막염을 적절히 치료하지 못해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온 한나는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 방송을 하게 되었고, 적절한 전략으로 채널을 성공시켜 구독자 수의 증가와 더불어 ‘흙의 세계’를 탈피하는 중이다.
구독자들은 짙은 오크색의 책상과 감각적으로 깔끔하게 배치한 학용품들이 주는 고급스러운 안정감을 좋아했다. 그리고 은근히 드러나는 가슴 굴곡과 하얗고 긴 손가락의 움직임. 필기를 하고 펜을 입에 무는 제인의 습관들. 간혹 제인은 연필을 깎기도 했다. 연필을 깎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당히 허스키하면서 공중을 떠다니는 듯 어딘가 비어 있는 제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채팅창은 폭주했다.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었는데, 한나는 이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모호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p. 94)
대체로 중고로 마련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가난했던 한나가 이제는 외제 차를 타고 명품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옷과 백을 걸치고 백화점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며 186만 원짜리 에르메스 신발을 구매하는 일상을 누리면서 “강남이나 한남”의 “밝고 넓은 집으로 이사”라는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p. 97)할 수 있게 된 것은 “구독자들의 취향을 간파한”(p. 93) 제인의 영리함 덕분이다. 불편한 귀 때문에 갖게 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을 것이며, 어쩌면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적당한 선에서 어필하는 전략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의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다. 대중의 관심으로, 즉 그들의 머릿수로 돈을 번다는 것은 애초에 예측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견고한 계급의 장벽을 허무는 중이다. 그리고 그 무기가 대체로 제인의 감각적인 취향이라는 점도, 더불어 한나의 신체적 약점이 도움이 된다는 점도 예사롭지는 않다.
‘취향’은 이제 더 이상 자본의 결과만이 아니다. 취향이 대체로는 돈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취향이 돈을 만들어내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저들의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밤』 해설, p. 372)은 넘어서지 못할 것도 아니게 된다. 돈 많은 사람들의 따라 하고 싶은 취향이 누구나 볼 수 있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세상에서 혹은 그러한 정보로 돈을 벌기도 하고 정보의 공유를 강요받기도 하는 세상에서, 취향을 연출하는 일도 쉽게 가능하다. 특히나 “적응이 빠른, 똑똑한” 한나에게 “부촌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마치 “근처에 사는 주민인 척, 여유롭게”(p. 102) 연기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의식하며 여유를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청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병원에서 만나 친구가 된 규희는 한나랑 달랐다. 일곱 살에 처음 가본 규희의 집은 넓고 고요했다. 규희는 한나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규희를 위해 규희의 엄마는 한나를 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을 건네주고 마치 그 대가처럼 새 인형도 사 주었다. 어떤 상황에도 빠르게 적응하는 “아주 똑똑”(p. 96)한 아이였던 한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스스로 터득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구독자 20만 명을 떠올리며 “문득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누구의 조력도 별다른 초기 자본도 공부도 없이 한나가 인기 유튜버가 되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운을 놓치지 않아야겠다”(p. 104)는 절박함의 힘이 더 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절박하고 불안한 마음은 한나만의 것일까. 전시회를 이유로 한국에 잠시 들어온 규희와 한나가 3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이 둘 사이 극복될 수 없는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규희의 마음 역시 편치 않다는 것이 은연중 드러난다. 셀린느라고 커다랗게 적힌 중고로 산 풀오버를 입고 로고가 선명한 구찌 백을 들고 나온 한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까르띠에 시계를 제외하고는 어느 브랜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아이템들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규희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긴 생머리에 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매끈하고 깨끗”(p. 108)한 규희의 모습에서 한나는 극복할 수 없는 계급과 취향의 차이를 느꼈던 것일까. 제인 버킨을 좋아해서 버킨 백을 모은다는 규희와 매장에서는 구매할 자격이 되지 않아 중고 사이트에서 버킨 백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과의 태생의 차이를 말이다. 자신의 손목에 잠시 채워졌다 규희의 손목에 익숙하게 채워지는 “꺄흐띠에” 시계를 보며 한나는 “마음에 또다시 무언가 찰칵 채워지는 소리”(p. 111)가 들리는 듯하다. 규희에게는 자연스럽게 손쉬운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절박하고 심지어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그 감정들과 어김없이 마주하는 한나는 그러한 감정을 미소로 감출 수밖에 없다.
이 만남에서 규희가 한나에게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대학 입학 선물로 아버지에게 받은 ‘튼튼하고 안 질리는’ “까흐띠에” 시계도, 장애인에게 관대한 프랑스에서의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도, 전시회 소식도, 상표를 내세우지 않는 베레모 선물도, 그 무엇도 아니었을 수 있다. 규희는 한나에게 방송에서 제인이 하는 허밍이 혹시 자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너, 나 흉내 내는 거, 아니지?”(p. 112)라고 묻는 규희는 자신의 선천적 장애를 의식하고 있지만 한나에게 그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수치스럽다. 노출을 좀더 하는 식으로 의상에 변화를 주어 구독자 수를 늘리더라도, 그래서 곧 버킨 백을 갖게 되더라도 한나는 규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규희 흉내”(p. 113)에 머물지도 모른다. 규희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이러한 사정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인의 허밍」을 “취향의 경계는 너무도 견고해서 그렇게 넘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밤』 해설, p. 368)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로만 읽기에는 어쩐지 아쉽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자본과 혹은 상품과 결부된 취향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유명인이 공유한 독특한 취향이 결국 특정 상품에 대한 더없이 훌륭한 광고가 되어버리는 세상에서 고유한 취향은 불가능하며 흉내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제인을 연기하는 한나가 “규희 흉내”를 내는 것일지언정 규희도 한나도 결국 버킨 백을 소유하며 제인 버킨처럼 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취향에 관해서라면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누구나 평등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접 소유한 것과 거짓으로 연출한 것 사이의 경계가 한없이 흐려진 세상에서라면 우리는 누구나 원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자신의 취향을 남들과 비슷하게 뽐낼 수 있다. 모든 취향은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세상이니 「제인의 허밍」에서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규희와 한나의 건널 수 없는 취향의 차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전략으로 취향을 연출하고 그것을 결국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한나의 자발적 고군분투여야 하지 않을까. 구독자 수가 30만, 50만을 넘어서고 백만에 이르면 한나의 수치심도 점점 흐려질 것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진짜 공부가 아닌 공부하는 시늉만으로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얼마든지 보란 듯이 취향을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에 말이다. “너, 나 흉내 내는 거, 아니지?”라는 규희의 물음은 한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한나와 자기 사이의 격차가 흐려지고 있다는 규희의 불안과 불쾌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위수정의 소설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계급의 격차를 흐리는 자본화한 취향의 몰개성이기도 하고 그러한 취향의 평등을 만들어내는, 자족적으로 노동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없는 밤」의 ‘지수’와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우리에게 없는 밤」의 지수는 고1때부터 ‘안나’라는 이름으로 SNS에서 만난 사람들과 한 학기에 서너 번 정도 “재미로. 때로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p. 120) 섹스를 하고 돈을 벌어왔다. 학생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언제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으며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p. 121)하며 만남을 이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길에서 데려온 베스라는 고양이를 함께 키워온 ‘은선’은 지수의 “조건 만남을” “노동의 하나라고 생각”(p. 144)한다며 존중해주는 편이다. 고양이의 양육비를 위해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지수는 노동의 조건들을 스스로 정한다. 지수 곁에는 그러한 형태의 “아르바이트”를 만류하는 사람도 지수를 착취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수치심도 없다. 심지어 조건 만남을 통해 만난 중년의 여성에게 알 수 없는 낯선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을 “같은 업계 사람”(p. 123)이라고 소개했던 ‘민재’라는 남성이 “소위 말하는 스폰서를 물”어 “거의 엄마뻘 되는”(p. 153) 여자에게 집과 차와 돈을 제공받아 생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은선의 말대로 지수는 “아직 한국에서는 불법인”(p. 145)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스스로 선택한 일이며 그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자신이 취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지수는 언제라도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안나 계정”을 삭제한 뒤 “우리는 이미 몸을 너무 많이 쓴 걸까. 그래서 이런 걸까. 폐허인가”(p. 158)라며 공허한 혼잣말을 내뱉어보지만, 이 모든 과정들 속에서 다소 무심한 태도로 선택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비슷한 일을 하지만 지수와는 꽤 달라 보이는 민재는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과도 닮았다. 혼자 사는 민희의 집에 흡사 입주 도우미처럼 함께 살고 있는 보육원 출신의 재순은 민희가 산 재료들로 음식을 하고 민희의 엄마가 보내준 비싼 식물을 키우며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심스럽게 지내며 고맙다는 말도 늘 잊지 않던 재순은 점차 민희의 집을 제집처럼 편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한 재순은 SNS에서 “박재희”라는 세련된 이름의 부유한 대학생으로 살고 있다. 민희의 아파트를 소유한, 쇼핑과 요리를 즐기는 미식가이기도 하다. 거짓말로 가득 찬 박재희의 삶을 재미로 지켜보던 민희는 어느 날 자신의 맨발이 찍힌 사진과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p. 194)라는 글귀를 확인하고 소름이 끼친다. 잘못 본 것인지 수정된 것인지 몇 시간 뒤 다시 찾아본 그 계정에서 “자본주의의 개념, 왜 사는 걸까”로 문구가 바뀐 것을 확인하지만 민희는 결국 얼마 뒤 재순을 집에서 내보낸다. ‘제인이 된 한나’나 ‘박재희가 된 재순’은 자신의 삶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스스로의 전략으로 돈을 벌고 있는 한나가 “속옷 방송 한번 하자고, 신비한 게 좋다고, 얼굴 보면 깰 거 같다고, 가슴 수술은 어디서 했느냐고”(p. 116) 등의 희롱을 감내할 때, 민희의 삶에 완벽히 기생하는 재순이 “자본주의의 개년”이라는 혐오 발언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수정은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에게는 ‘기생하는 남성’이라는 정확한 자리를 부여한다. 때문에 위수정의 소설에는 착취하는 남성과 착취당하는 여성의 구도가 드러날 수가 없다. 그녀의 소설에서 남성들은 주로 주변화되어 있거나 여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거나 여성의 삶에 기생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하는 여성’들은 그 대상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위수정 소설에 등장하는 다분히 자족적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주체적인 행위로 계급의 위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평등한 취향의 세계를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돈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게 말처럼 쉽겠는가마는, “김치찌개도 상한 우유도” “곰팡이도 부모도” “냄새도 날씨도 없”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은 이름 모를 호수 아래의 “꿈이 없는 잠 속” 같은, “어두워도 충만하여 빛을 원할 필요도 없”(「집」, p. 326)는 죽음 같은 공간에서나 가능한 듯하지만, 위수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여성들은 욕망도 취향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해보는 듯도 하다.
4. 멈추지 않는 여성들
위수정의 소설에는 여성들이 보인다. 자본을 누리며 취향을 전시하는 이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 자본으로 스스로 돈을 벌고 있는 것도 여성들이다. 중년과 노년 여성의 욕망과 불안도 위수정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현실을 초과하는 알 수 없는 정념도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이 증명한다. 그녀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당하거나 남성적 방식으로만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물론, 현실에는 여전히, 자신의 전공을 업으로 삼지 못한 여성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여성들, 교묘한 남성 동성 사회성이 작동하는 곳에서 이용당하고 배제되는 여성들, 맞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 그러니까 여러 형태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여기 다양한 매체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그것을 주도하는 쪽은 많은 경우 여성들이기도 하다. 여성 아이돌도 유튜버도 그리고 심지어 인스타그램의 많은 인플루언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과 능력과 취향을 뽐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전시하고 관심을 끌며 자본을 창출한다. 어떤 경우 그녀들이 판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여러 판의 공론장에서 쉬지 않고 담론을 이끌어가고 재창출하고 있는 것도 이제는 여성들이다. 폭력과 협박으로 여성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여성의 호소에 침묵하며 모른 척하거나, 오로지 음지에서 온갖 조롱과 욕설의 말들로 혐오의 감정을 배설하고 있는 자들은, 보이는 곳에서 꾸준히 자신을 단련하고 가꾸고 그런 자신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여성들을 언제까지나 착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쉽게 “미친년” 취급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위수정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 1) 이 글은 위수정의 두 권의 소설집 수록작 「은의 세계」 「안개는 두 명」 「풍경과 사랑」 「화양」(『은의 세계』, 문학동네, 2021)과 「아무도」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제인의 허밍」 「우리에게 없는 밤」 「몬스테라 키우기」 「9」 「집」 (『우리에게 없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4)을 두루 읽으며 썼다.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김형중, 해설 「눈만 내리면 평등한 밤이」, 『우리에게 없는 밤』, p. 362. 이후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밤』 해설’과 쪽수만 밝힘.
- 3) 백지은, 해설 「부정도 탐색도 없이」, 『은의 세계』. 문학동네, p. 320. 이후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은』 해설’과 쪽수만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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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서 만난 괴물과 춤출 때 * 이 글은 성해나의 소설집 『혼모노』(창비, 2025)와 단편 「인비인(人非人)」(『TOYBOX』 5호, 2020),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The 짧은 소설3: 괴담』, 민음사, 2020)을 주로 논하며,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문학동네, 2022), 장편 『두고 온 여름』(창비, 2023)을 함께 다룬다. 이하 인용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갈라진 세계의 접촉면 너머로 미국의 인류학자 실라 미요시 야거는 『애국의 계보학』에서 한국이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민족주의적 서사를 동원했는지 밝힌 바 있다. 그는 이 연구에서 특히 정치 담화, 문학, 역사 기념관 등이 활용하는 수사법에 주목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의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상반된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위해 동일한 수사법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1) 대통령 탄핵 정국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편에는 대통령 파면 소식에 기뻐하는 범시민 ‘촛불집회’ 대열 속 사람들이, 다른 한편에는 윤석열의 대통령직 복귀를 위해 여전히 ‘태극기 집회’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때 두 종류의 집회는 ‘나라 망하는 꼴 두고 볼 수 없다’는 애국의 수사를 (각기 다른 정도로) 공유하고 있기도 했다.2) ‘태극기 집회’로 대표되는 보수 집회 역시 그 규모와 역사, 그리고 형식과 수사의 측면에서 민중의 형상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 선출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본래 끊임없이 지속하는 갈등을 필수 조건으로 삼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하나의 공동체로 묶여 같은 대지를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느 한쪽을 무작정 배제하거나 축출할 수는 없다. 무조건적 반목을 넘어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이 사태를 볼 필요가 있으며, 문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또다시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때 성해나의 소설은 이분법의 세계를 뒤섞고 흐트러뜨리는 어떤 인물, 몸짓, 덩어리, 정동, 장면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보수적인 할아버지와 글로벌 우파 엄마의 갈등 사이에서 주관을 잃은 임신부(「잉태기」), 신기가 사라져 번아웃이 온 삼십 년 차 박수무당의 처절한 굿판(「혼모노」), 소서리 마을의 갈등과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를 감정적으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의 부장(「우호적 감정」),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낳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생명 덩어리(「인비인(人非人)」), 한국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재미 교포 3세 예술가가 광화문광장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우연히 합류하는 순간(「스무드」) 등 성해나의 문학적 상상력은 분명 서로를 타자화하는 양분화된 세계를 기반으로 하지만, 무엇이 이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는지, 어째서 둘로 갈라졌는지, 그러한 대립 구도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것인지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한국문학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근대성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근대화가 지식과 계몽, 이성과 합리, 과학과 자본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이라면, 성해나의 소설은 그 과정에서 억압되고 누락된 광기와 부정성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드러낸다. 이는 비체의 현전을 통해 근대의 암(暗)을 보여주는 식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성해나의 소설은 애초에 근대를 진보의 시간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더 실재적으로 근대성 자체의 파기에 닿고자 하는 순전한 열망을 보여준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을 향하는 진보의 축과 로컬을 향하는 보수의 축이 형성하는 근대적 세계관의 좌표는 동일한 수사법과 논의 구조를 공유하기 때문에 기존의 좌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3의 항을 향해야 하는데,3) 성해나의 소설은 미약한 진동일지라도 그러한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는 성해나의 두번째 소설집 『혼모노』에서 두드러진다. 첫번째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 수록된 소설들과 장편소설 『두고 온 여름』 등이 세대 간, 가족 간, 계급 간의 소통 불가능성과 단절을 중심으로 읽혀왔다면, 근작으로 올수록 소설에서 툭 튀어나오는 몸짓, 덩어리, 정동 들은 갈라진 세계 사이의 거친 접촉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경계를 무화하는 강렬함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보면 이는 봉건적 사고관으로의 복고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그 또한 새롭다. 성해나의 소설은 그렇게 문학이 가지 못할 곳, 문학이 없을 것만 같은 곳을 향한다. 이 글은 그 행로에 추진력을 보태고자 한다. 2. 무(巫): 주술 아닌 춤 ‘무속(巫俗)’은 죽은 혼(魂)과 귀(鬼)를 산 사람과 이어주고 하늘과 신의 뜻으로 땅의 대소사를 해소하는 제의(ritual), 그리고 그것의 토대가 되는 주술적 세계관을 아울러 이른다. 「혼모노」는 이런 무속의 세계, 그중에서도 직업 무속인의 세계를 그린다. 이때, ‘직업 무속인’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소설의 서술자-주인공인 삼십 년 차 박수 ‘문수’가 처한 상황 때문이다. 원래 그가 모시던 신령은 ‘애기동자’부터 ‘할멈’까지 여럿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할멈의 신묘한 능력은 그가 무당으로서 한창 ‘잘나갈’ 때 큰 역할을 했다. 그가 신통하다고 입소문이 나 돈을 제법 벌 수 있었던 것도, ‘황보’라는 국회의원의 전속 무속인이 된 것도, 무형문화재가 될 뻔한 것도 다 할멈 덕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모시던 신령은 다 떠나버렸으며, 심지어 할멈마저 그의 바로 앞집에 신당을 차린 ‘신애기’에게 가버렸다. ‘신발’이 다 떨어지고 ‘번아웃’이 온 그는 먹고살기가 어려워져 신문에 ‘오늘의 운세’ 따위의 칼럼을 기고하는, “니세모노(にせもの, 가짜, 선무당을 의미함)”나 할 법한 일을 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이러한 세속화된 무속의 세계는 그다지 낯설거나 충격적이지 않다. 사람들은 진로 상담 창구로 신당을 찾아가거나, 하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직업 무속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정치 세력이 무속신앙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도모하는 모습 또한 흔히 접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인들이 신앙과 미신이 아닌 과학적 원칙들에 의존하며 탈주술화된 근대 이후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비추어볼 때 어딘가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광경은 근대라고 불리는 세계가 사실은 자연-문화 사이 수많은 하이브리드의 끝없는 증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라투르적 설명에 부합한다.4) 현재 한국에서 무속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와 완전히 결합하여 작동하는 비과학적인 혼합체인 것이다. 그런데 무속은 사실 본래부터 혼성적이었다. ‘무속’이 민속으로서 발견된 것은 일제 치하의 조선 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무’가 조선인의 ‘얼’을 담고 있는 전근대적인 미신이라고 여겨 탄압했으며, 국학자들은 그에 대한 저항으로서 무속의 민족성을 발굴하게 되었다. 문학에서도 무속을 일종의 미학으로 삼아 일본의 것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근대 예술 기치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가 적지 않았다.5) 그러니까 무속은, 그것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동시에 가진 혼합체였으며, 현재에 이르러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더 끈끈하게 결속되었다. 성해나의 초기 작품 중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은 이러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서술자 ‘나’는 친일 조선인의 후손으로, 일본의 천황이 하사한 벚나무 책상이 어떻게 자신에게까지 상속되었는지 그 역사를 들려준다. 처음 그 책상을 받아 사용한 사람은 ‘나’의 조부 김아홍(일본식 이름은 히로타 마사히로)이다. 그는 열두 살 때 참가한 “‘야스쿠니신사 영령께 바치는 글’ 대회”(28쪽)에서 우등상을 수상하며 상품으로 이 책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상은 악취를 풀풀 풍기며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고, 그는 악취의 원인을 찾다가 키우던 고양이가 “책상과 벽 틈 사이”(29쪽)에 숨겨놓은 쥐의 대가리들을 발견하고 까무러친다. 그날 그가 본 것은 쥐의 대가리들만이 아니다. 책상 아랫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귀 “미카라데타사비(みからでたさび)”6)(30쪽)는 마치 이 가족의 친일 행적을 단죄하듯이 일종의 주술, 저주로 작용한다. 이 저주는 특히 김아홍의 아들 김황보를 괴롭힌다. 황보가 낙마 사고를 당해 대학 입학이 어려워지자 김아홍은 몹시 불안해한다. 결국 1980년 사교육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가정교사를 붙이지만, 책상의 저주 때문인지 황보는 극심한 기면증에 시달리다 언젠가부터는 배운 적도 없는 일본말을 방언처럼 중얼대는 등 마치 신병을 앓는 듯한 증세를 보인다. 이때 김아홍의 아버지 김정식은 어느 무당에게 들은 말이라며 “암고양이 호네(ほね)”(32쪽), 즉 고양이의 뼈를 갈아 마시면 기면증이 낫는다고 일러준다. 평소 샤머니즘을 불신하던 김아홍은 고양이 뼛가루를 만들긴 하지만 황보에게 먹이지 않고, 1981년 여권법이 시행되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한다. 책상의 저주를 풀기 위해 무속이 아니라 미국 유학으로 대응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도약을 보여준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김정식-김아홍-김황보, 그리고 ‘나’의 시대로 올수록 집안의 부가 축적되고 막강해졌음을 보면, 결국 책상에 들린 민족주의적 저주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나’는 『친일인명사전』 출간 십 주년을 맞아 친일 인물의 후손을 인터뷰하고 싶다는 민족문제연구소 직원의 메일을 받지만, 어떤 답장이나 대응도 하지 않고 메일을 스팸 처리한다. ‘나’는 이 문제에 무심하다. 벚나무 책상의 향은 ‘나’를 잠들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오히려 조상의 은덕과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책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교수-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써야 할 글을 쓴다. 언젠가 이 책상을 다시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줄 날을 고대하며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또 그 아들에게 책상을 물려줄 그날까지도 “내게는,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도”(36쪽)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미카라데타사비’보다 더 강력한 현시대의 주술적 염원일 것이다. 이렇듯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주술의 혼합체가 수행하는 역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보여주었다면, 「혼모노」는 의심 없이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와 무속의 결속을 끊어내는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다. 근대의 반대 항에 전근대를 위치시키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을 뛰어넘는 몸짓 그 자체를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혼모노」의 결말부에서 박수무당 문수가 굿에 완전히 몰두하며 춤을 추는 장면은 중요하다. 이 서사의 주인공을 가르는 건 그것이다. 과장되게 눈을 까뒤집고 억지로 몸을 떨며 신접 흉내를 내는 것은 지금 내겐 무용한 짓이다. 자연스럽게 몸이 떨리고 눈이 뒤집힌다. 오금이 무지근하게 당겨온다.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황보가 경악하며 내 쪽을 보고 있다. (……) 구름도 다 사라진 땡볕 아래, 판수도 악사들도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이는 오직 나뿐이다. 피범벅에 몰골도 흉하겠으나 시야가 환하고 입가엔 미소까지 드리워진다. 신령 근처에라도 가닿은 것처럼 몸이 가뿐하고 신명이 난다. 장단이 빨라질수록 나는 고조된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삼십 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152~153쪽) 문수의 기세에 눌린 것은 오히려 신애기다. 문수의 무목적적이고 실재적인 행위에 비하면 국회의원 황보의 세속적 성공을 기원하는 신애기의 굿은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렇게 이 장면은 미신과 합리성이 뒤섞인 상징계적 질서에 균열을 내고, 그 세계의 인위적 구분까지도 모두 하찮게 만들어버린다. ‘巫(무)’라는 한자가 사람 두 명이 만나 춤을 추는 모습의 상형이라는 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보여주는 것은 무속―무당과 관련된 풍속―이 아니라 ‘무’ 그 자체다. 문수의 춤과 몸짓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세계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소설 언어의 움직임이 된다. 3. 근대 괴물이 수태한 것 성해나의 소설은 상징계적 질서의 외연을 순간적으로 무화하는 춤과 몸짓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역사의 서사화를 통해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비체화된 잡다한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회귀하는지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특히 과학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은폐한 야만성이 괴물의 형상으로 산출되면서, 인간, 혹은 인간성이라고 믿었던 것에 균열이 생기는 지점을 주목해볼 만하다. 「인비인(人非人)」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라고도 사람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카타마리(かたまり, 덩어리)”(153쪽)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의 합리와 효율을 극대화한 고문 기계-건축물이 그 예시다. 이것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물’처럼 자신을 만든 창조주-아버지를 끝없이 추격한다. 「인비인(人非人)」은 실제 하얼빈에서 자행되었던 일제 731부대의 생체 실험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은 이 생체 실험에 조선인이 가담했었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그 조선인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그린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단지 생화학자가 되겠다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고 교토대학에 유학을 온 청년이었을 뿐이다. 야망과 의욕이 과다했던 그는 요시무라 교수에게 충성을 다했고, 그렇게 그의 하얼빈 출장에 동행해 생화학 실습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백이십 일간 중국인, 조선인 등의 ‘마루타’를 대상으로 한 온갖 생화학 바이러스 생체 실험을 돕는다. 최소한의 “모럴(moral)”(155쪽)은 겸비한 요시무라 교수 덕에 그는 이 실험에 최대한 소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 여자 피실험자의 비웃음에 분노와 모멸감을 느낀 그는, 직접 여자의 몸에 페스트균을 주사하게 되고, “여자는 그 밤, 카타마리를 수태하고 즉사”(156쪽)한다. 그는 카타마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카타마리는 참으로 곤란한 생명체였습니다. 치댄 밀가루를 둥글게 뭉쳐놓은 형태에, 눈도 귀도 없었습니다.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곳에 코와 입만 겨우 붙어 있었죠. 팔과 다리도 없고, 생식기조차 달려 있지 않아 자웅을 구분할 수도 없었습니다. 굳이 종을 나눠야 한다면, 척추가 있는 환형동물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까요. 온몸이 잿빛 털로 덮인 2.6kg의 굴곡 없는 덩어리. 그것이 탄생하던 밤, 요시무라 교수도 나도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실험실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죄(つみ)를 낳았군. 카타마리의 탯줄을 끊으며 교수는 중얼댔습니다.(같은 쪽) 근대과학이 수태한 죄-덩어리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 고문 기계-건축물로 형상화된다. 소설은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실제 지하철 남영역 바로 앞, 즉 갈월동 98번지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여재화는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수근(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건축가다), 김중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군부 정권의 고문실로 사용된 ‘경동수련원’의 건축 총책임자이다. 하지만 소설 속 가설에 의하면 고문실 건축에 크게 관여한 인물은 따로 있다. 그는 여재화의 제자 구보승으로, 열정도 능력도 부족한 학생이었으나, 바로 그 점, 실험 정신이라고는 없이 합리성만 철저하게 따지는 성격 때문에 여재화에게 발탁되어 고문실 증축 사업에 합류하게 된다. 구보승은 건축물의 기능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특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더욱 잔혹한 고문실을 설계한다. 그는 하루에 단 십 분만 햇빛이 드는 좁은 수직 창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끔 했으며, 경사가 급한 나선형 계단을 설계하여 피조사자들이 눈을 가린 채 이동할 때 극심한 공포를 느끼도록 했다. 이외에도 사람들이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엇갈리게 만든 취조실 출입문, 유공 흡음재를 쓰고 붉게 칠한 벽면과 물고문을 위한 욕조까지, 소설이 묘사하는 경동수련원의 내부 설계 구조는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의 구조와 거의 동일한데, 소설에서 이 건물은 어떠한 악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가 신봉한 합리성의 극대화가 배태한 야만이다. 두 소설에서 독자는 근대의 합리주의가 수반하는 위험과 야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마루타 생체 실험, 남영동 대공분실은 물론, 아우슈비츠 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사태 또한 인간과 과학이 만들어낸 파괴적 재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근대화와 진보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몇몇 학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갖춘 국가라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최근에는 근대성이 전 지구적 식민화와 착취, 전쟁과 무기, 대규모 자연 파괴를 수반한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는 추세이며, 이 연장선에서 성해나의 소설은 그 독특한 형식을 통해 근대성에 대한 의문을 밀어붙인다. 「인비인(人非人)」은 액자식 구성으로, 마루타 생체 실험에 가담한 조선인의 증언이 담긴 편지를 영화감독인 일인칭 서술자 ‘나’가 읽는 것이 외화, 그 편지에 쓰인 내용이 내화이다. 이때 조선인의 편지는 노스럽 프라이가 구분한 산문 픽션의 양식 중 하나인 고백(confession)7)의 일종이다. 조선인은 자신이 페스트균을 주사하여 피실험자가 낳게 된 카타마리를 결국 생매장해버린 죄를 고백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고백의 원형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만한 죄를 스스로 드러내어 자신을 공공연한 심판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에 목적을 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인물의 고백은 불온전하다. 그의 고백은 생체 실험에 가담한 경위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소극적으로 관여했다는 변명까지 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은 카타마리 하나뿐이라며 살인 종범이라는 낙인에 대한 억울함도 토로하고 있다. 그가 하필 ‘나’에게 편지를 써서 죄를 고하는 이유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나’는 편지를 흥미롭게 읽지만 이내 “영화가 될 만한 것은 이것 말고도 차고 넘치니까”(163쪽)라고 생각하며 사무실 서랍에 넣어버린다. 이는 『프랑켄슈타인』8)과 비교해봐도 흥미롭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창조한 징그러운 피조물-괴물과 계속 대치한다. 괴물은 끊임없이 자신을 만든 과학자-아버지를 쫓아가지만 결국 빅터는 죽어버리고, 빅터의 죽음 이후 괴물 또한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최종적으로 북극 탐험 대장 월튼의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 프랑코 모레티의 분석에 따르면, 『프랑켄슈타인』은 서간문의 삽입과 겹겹의 액자식 구성을 통해 괴물이 자아내는 공포로부터 인물들과 독자를 멀어지게 만들며 그들이 안전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도록 한다.9) 반면 「인비인(人非人)」의 조선인은 자신을 ‘오야지(おやじ, 두목, 아버지)’라 부르는 카타마리를 직접 죽였으나, 그 행위에서 오는 공포와 죄의식은 깔끔히 축출되지 않고 카타마리가 삼킨 듀퐁 만년필로 인해 현재로 회귀한다. 그 만년필은 한때 그가 오야지라 불렀던 요시무라 교수가 그의 이름을 각인하여 선물해준 것으로, 생체 실험 피해자의 유골이 대거 발굴된 하얼빈 근린공원에서 출토된다. 그러니까 성해나의 소설에서 이 죄의 덩어리, 괴물의 형상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 떨쳐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땅속에 썩지도 않은 채로 있다가 발굴되는 것이며, 아무리 죽여도 반복해서 재생산되어 우리 삶에 집요하게 들러붙는다. 따라서 고백의 실패는 필연적이다. 고백을 통해 죄를 용서받고 인간으로서 숭고를 되찾는 일은 더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은 괴물을 타자화하여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간과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카타마리가 그러하며, 카타마리의 오야지도, 그의 오야지도 그러하다. 이러한 전승 구도는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카타마리가 삼킨 만년필에 자신의 창조주-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듯이, 경동수련원 건물 또한 정초석에 설계자 ‘구보승’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는 구보승의 스승 여재화의 짓이었는데, 고문 기계-건물을 창조했다는 죄를 면하기 위해 구보승의 이름만 기록에 남긴 것이다. 그러나 삼인칭 서술자가 들려주는 가설에 의하면, 구보승이 오직 합리성에 기반한 잔인한 설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 여재화의 덕이다. 그는 구보승이 젊은 청년으로서 야망을 가지고 합리성을 발휘하도록 부추겼으며, 무엇보다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건축을 그에게 가르쳤다. 즉, 건물을 만든 것은 구보승이지만, 구보승을 만든 것은 여재화이다. 구보승은 여재화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고문실이 정녕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냐는 스승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201쪽) 성해나 소설이 내놓은 인간의 의미는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4. 주워섬긴 언어, 그리고 정동 재생산의 모티프가 눈에 띄는 또 한 편의 소설은 「잉태기」다. 표면적으로 생명을 잉태한 사람은 임신부 ‘서진’이지만, 소설은 서진의 엄마인 서술자-주인공 ‘나’와 그의 시부가 서진을 양육하는 방식을 두고 갈등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며 특권 상류층 집안 내의 재생산이라는 ‘잉태기’를 조명한다. ‘나’가 시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사이는 지금처럼 나쁘지 않았다. 또, ‘나’는 “클래식 애호가인 점,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 보수당을 지지한다는 점, 입이 짧고 미식을 즐긴다는 점”(270쪽), 그리고 서진을 과보호하며 집착적인 애정을 표한다는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강한 주관과 고집, 인정 욕구는 ‘나’의 자식인 서진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의 문제를 두고 점점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때 ‘나’의 시선에서 그려지는 시부의 양육 방식은 봉건적 질서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248쪽)을 전제로 한다. ‘나’가 서진을 임신했을 때, 시부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없는 “께름칙한 금기”(254쪽)를 늘어놓으며 ‘나’의 식생활 하나하나에 간섭했고, 서진을 미국에서 낳으려고 했을 때에는 “충주 지씨 대손을 양키 만들 셈이냐며 매섭게 반대”(245쪽)하는 바람에 원정출산을 포기해야 했다. 서진의 이름 또한 성명학자에게 받아오는데, ‘나’는 “성명학은 일본에서 온 폐단이에요.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믿어요?”(256쪽)라며 단칼에 거절한다. 한편, ‘나’의 양육 방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서진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미래지향적인 것들이다. “서진을 품은 열 달간 나는 아이의 장래를 차곡차곡 설계했다”(255쪽)고 말할 정도로, 서진의 삶에 주도면밀하게 관여한다. 실제로 ‘나’는 서진이 무용과 입시를 준비할 때 서진의 몸(체중과 체형 등)을 엄격하게 규율했다. 심지어 서진이 결혼할 상대를 알아본 뒤 일방적으로 혼약을 성사시켰으며 이제는 시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진의 미국 원정출산을 계획중이다. 이렇듯 시부와 ‘나’의 양육 방식은 표면적으로는 과거를 지향하느냐, 미래를 지향하느냐로 나뉘는 듯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육친적 증여를 통해 자신들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크지 않다. 이때 계급이나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언어만큼 막강한 것이 없다는 점을 소설은 잘 알고 있다. 서진이 어렸을 때 ‘나’와 시부가 제일 처음 가르쳤던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는 이제 막 육 개월이 넘은 서진에게 ‘길’ ‘승’ ‘차’ ‘집’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 구개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하필 ‘길’ ‘승’ ‘차’ ‘집’이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 즉 욕망과 부를 세습하는 것의 암시임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서진이 가장 먼저 발음하는 단어는 ‘엄마’도 ‘길’ ‘승’ ‘차’ ‘집’도 아닌 ‘지지’다. 지지는 “할아버지를 뜻하는 일본어” “‘지씨 할아버지’의 준말”(251쪽)로, 시부가 서진에게 몰래 가르친 단어였다. 서진은 이렇듯 극단적으로 반목하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닮아 있는 두 사람의 언어가 만든 뒤죽박죽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언어는 서진의 내면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서진이 사는 상징계는 그의 언어적 ‘독립’, 혹은 주체화 이후의 세계처럼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서진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할아버지를 ‘지지’라고 부르거나 엄마 앞에서 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거나 성적인 말도 가감 없이 하는 등 유아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서술자인 ‘나’의 시점에서 타자화된 서진의 모습이다. ‘나’는 딸이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임신까지 겪었음에도, 정서적 독립을 하지 않은 ‘아이’로 보인다. 그러니까 주인공과 시부가 공유하는 언어의 세계에서는 서진의 속마음, 내면의 목소리 같은 게 포착될 리 없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결국 ‘나’는 서진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해 공항에 간다. 그러나 공항에 서진을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시부가 서진의 미국행을 말리자 둘은 또다시 충돌한다.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큰 소리로 싸우던 도중 서진은 양수가 터져 바닥에 쓰러진다. 복아, 서진아, 어서 가자, 정신 차려, 여기서 나가자, 참을 수 있어, 네가 미쳤구나, 미친 건 당신이지, 네가 부모냐, 그럼 당신은, 여기서, 여긴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돼, 안 돼…… 괴성이 오간다. 오가고 오가다 끝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게 섞여버린다. 나의 목소리인지 시부의 목소리인지도 모르게. 우리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괌행 비행기 출국 알림 방송이 들려온다. 시부와 나 사이에서 서진은 무슨 말인가 한다. 연갈색 눈을 굴리며, 아주 작게,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힘겹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도.(297~298쪽, 강조는 인용자) 이 대목에서 서진의 목소리는 소거되어 있다. 아무도 서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심지어는 “당신도”. 이때 ‘당신’은 ‘나’가 자신의 시부를 지칭하는 단어지만, 왠지 독자를 호명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는 「혼모노」의 마지막 대목(“어떤가. 이제 당신도 알겠는가”, 154쪽)과 연결해 읽으면 더욱 그렇다. 목소리의 사라짐은 성해나의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되어온 모티프다. 특히 장편 『두고 온 여름』에서 기하와 재하가 오랜만에 재회하여 대화하는 장면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10) 이 장면이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혼모노」와 「잉태기」에서는 목소리의 사라짐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중첩(‘나’와 시부, 문수와 신애기, 할멈의 목소리 등)을 통해 말로 환원할 수 없는 정동적 충돌 속으로 독자들을 연루시킨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언어로 지은 세계와 그 세계에서 증식하는 하이브리드, 그 틈에서 은폐되는 목소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의 작품과 그의 도덕적 결함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 라는 오랜 논제를 벗어난 독해가 가능해진다. 서술자-주인공 ‘나’는 영화감독 김곤의 열성적인 ‘덕후’다. 심지어는 김곤이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의 팔을 꼬집었다는 논란이 생긴 이후에도, 사람들 몰래 ‘길티 클럽’(김곤의 비밀 팬클럽) 활동을 하며 김곤을 사랑하는 데에 여념이 없다. 논란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곤은 인간 윤리에 대한 철학적 주제로 예술영화를 만들고, 현장에서는 드물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감독이었으며, 친환경적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윤리적 예술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러한 김곤의 특징은 스스로 취향과 ‘모럴’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대중의 전형성을 띠는 ‘나’와 반대된다. ‘나’는 김곤을 좋아하고부터 그와 고급한 예술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김곤을 향한 끌림은 그의 예술론과 관계없이 다분히 정동적이다. 길티 클럽의 오프라인 만남에서도 김곤의 영화 구도를 논하며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저 김곤이 왜 좋은지, 얼마나 좋은지에 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나’가 사람들의 언어를 주워섬긴다는 것이다. GV에 간 주인공은 김곤에게 길티 클럽 멤버들이 했던 말을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질문한다(“는 각 장마다 다른 화면비가 사용되었잖아요? 저는 그걸 통해 감독님이 말하고자 하는 게 인간의 가변성인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55쪽). 이는 ‘나’가 처음 김곤의 을 보면서 떠올렸다고 서술하는 생각들이 온전히 ‘나’의 언어와 생각이라고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나’는 “정의할 수 없는 울림과 충격”(21쪽)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 컷들과 대사에 대해 제법 분석적으로 서술한다. 이는 ‘나’가 영화를 서른두 번 관람했다는 언급과 커뮤니티와 인터뷰 기사를 통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섭렵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과거 회상을 하며 사후적으로 덧붙여진 언어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감상이나 지론이 아닌 주워들은 말들뿐이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김곤, 그뿐이었다”(55쪽)라고 토로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애정은 김곤이 GV에서 아역 배우의 이름을 언급하며 관객들에게 사과를 하는 순간, 허무해지고 만다. 그렇게 소설은 언어로 정돈된 정동과 그럼에도 고정되지 못하는 정동의 향방을 좇는다. 이쯤에서 ‘호랑이 만지기’에 주목해보자.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남편과 함께 치앙마이로 여행을 가서 ‘타이거 킹덤’을 관람하게 된다. 비좁은 사육장과 호랑이에게서 풍기는 누린내는 불쾌하고, 이빨을 다 뽑은 호랑이를 만진다는 것이 ‘길티’하게 느껴지지만, 이 불쾌함은 호랑이의 등을 직접 만지는 순간 묘한 흥분과 쾌감으로 바뀌어 일렁인다. 언어적 세계의 공허한 ‘모럴’ 아래에는 이와 같은 ‘길티 플레저’가 있음을, 소설은 촉각적으로 일깨운다. 언어-상징의 세계가 만들어낸 법칙보다 우세한 것은 이제 정동 그 자체인 것이다. 5. 나선형 계단에서 구를 보며 정동은 어디로든 가며 어디에든 들러붙을 수 있다. 「스무드」는 이러한 정동적 마주침의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주인공 ‘듀이’는 재미 교포 3세이며 스스로를 철저히 미국인으로 정체화한다.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제프’의 방한에 매니저로서 동행한 그는 시종일관 한국 문화에 낯섦을 느낀다. 그러나 듀이는 우연한 계기로 광화문 한복판의 태극기 집회 대열에 합류하여 어쩌다보니 그 안의 사람들과의 연결되는 감각을 느낀다. 이는 양경언이 지적했듯, 극우 집회의 일원들의 삶을 조명하는 “나른한 온정주의”11)가 아니다. 몸짓, 덩어리, 정동, 그리고 그것들의 접촉이 가져오는 결과를 기존의 언어적 세계의 문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성해나 소설이 꾸준히 짚어왔기 때문이다. 「스무드」에서 개연성을 무시하는 전개나 인물의 변덕 등은 분명 불편감을 주는 요철로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에서 이해할 수 없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을 다 깎아낸다면, 그것은 제프의 작품처럼 인위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은 ‘스무드’, 즉 커다란 구 모양의 덩어리가 될 뿐이다. 이 구 모형은 보는 이들, 즉 관객 혹은 독자에 의해 다시 의미를 덧입고 언어로써 설명될 테지만, 제프에 따르면 이 ‘스무드’라는 작품은 어떤 속뜻이나 의미, 언어적 부연이 필요 없는 그저 단순한 구의 형체다. 그러므로 매끄러운 의미 작용이란, 허구다. 이때 「스무드」라는 텍스트가 ‘스무드’의 상징을 어떤 식으로 서사화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혼모노’와 ‘벚나무 책상’, ‘카타마리’나 ‘구의 집’, 혹은 ‘지지’와 ‘호랑이 만지기’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의미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안내하지 않는 성해나의 소설을 읽는 행위는, 마치 나선형 계단 위에 눈을 가리고 선 죄수가 된 것처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모르게 되는 경험이다. 그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좌표계가 필요하며, 문학은 그 영점을 조정하고 지향 가능한 방향성을 재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성해나 소설에 나타나는 흥분, 그 혼란한 정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 최근의 정치 국면에서 애국의 수사 못지않게 무속과 관련된 수사도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첫 국민 담화에서 윤석열은 야당이 "광란의 칼춤"을 추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탄핵 촉구 집회 참여자에 의해 패러디되어 '광란의 칼춤 댄스 동호회'라는 이름의 깃발로 재탄생하는데, 이는 윤석열 정부의 무속신앙과의 결탁을 풍자하면서도 다시금 무속의 수사를 전유하는 방식이다. 이는 '살을 날린다' 같은 말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남발되는 현상으로도 이어진다. 「'새벽형 불안성 새로 고침 단체'부터 '봄이여 오라'까지... 아카이브로 돌아본 탄핵 정국」, 『경향신문』, 2025. 4. 4. 2) 실제로 이태원 한남동에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을 때, 바로 옆에서 비슷하게 큰 규모로 탄핵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두 집단 사이에서 대열이 섞이거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이에 당시 의경들은 이태원역 앞에서 사람들의 정치 견해에 따라 각각의 집회 대열로 합류하는 길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집단이 광장을 공유하고 대열이 섞이는 상황은 성해나 소설 「스무드」에서 주인공 듀이가 광화문의 태극기 집회에 우연히 합류하는 장면과 겹쳐진다. 3) 진보-보수의 기존 좌표계와 그로부터 벗어난 제3의 항으로의 지향에 관해서는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참조. 4) 브뤼노 라투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홍철기 옮김, 갈무리, 2009. 5) 김은석, 「백석 시의 '무속성'과 식민지 무속론—백석 시의 '무속적 상상력' 재고」, 『국어문학』 48집, 2010, 115~137쪽; 소래섭, 「1920년대 국민문학론과 무속(巫俗)적 전통」, 『한국현대문학연구』 22집, 2007, 75~100쪽. 6) 일본 추리소설 『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마스다 타다노리, 한겨레출판, 2019)의 역자 김은모의 후기에 따르면, '미카라데타사비(身から出た錆)'는 칼 자체에 녹이 생겨 도신(刀身)을 삭게 하는 현상에서 유래한 일본 속담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는 뜻, 즉 '자업자득'을 의미한다. 7) 노스럽 프라이, 「네번째 에세이: 수사 비평—장르의 이론」,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429~447쪽. 8)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1886년 초판본』, 구자언 옮김, 더스토리, 2018. 9) 프랑코 모레티, 『공포의 변증법』,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4, 19~32쪽. 10) "기계를 분해하고 짐을 나르는 소리 때문에 재하와 나는 고성에 가까울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알았으면 …… 텐데 ……해요./뭐라고?/……하다고요./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니?/네?/여기 정리되면 어디로 갈 거냐고?/네? ……인지 못 ……겠어요./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없이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111~112쪽) 11) 양경언, 「진짜?—성해나 소설의 '나아감'에 대하여」, 『혼모노』 해설, 345쪽.
어른의 서정 백수린, 『봄밤의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2025) 1. 구본창의 비누 사진을 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의 갈라진 틈에 흘려보냈어야 할 때가 박혀 까맣게 굳어 있다. 더는 손 씻는 데 사용할 수 없을 작은 비누를 차마 버리지 못한 연한 마음. 한낱 비누 조각에 담긴 손때에서 세월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섬세한 시선.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아름답지만 그뿐. 스스로 빛나지 않는 것에 과할 만큼 환한 조명을 비춰 부유하는 듯 피사체를 연출한 사진술에 불과하다고. 삶은 어찌할 바 없이 낡아가기 마련이고 그 사실 자체는 대단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을 동원하지 않으면 포착할 수도 간직할 수도 없는 평범하지만 놀라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조명을 비추고 주인공의 자리를 내주어도 메마른 비누가 다시 수분을 머금고 유선형으로 부풀어 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저 모양과 저 색으로 머무르는 비누의 한순간이 존재하고, 때때로 예술은 부드럽고 환한 조명을 비춰 그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영원의 빛을 부여하는 일을 해내고야 만다. 잘 짜인 베일 위에 손때 묻은 비누 조각을 올려 섬세한 조명을 비춰보는 일. 말라붙은 비누는 놀랍게도 영롱한 빛을 뿜고,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그 모습을 아름답게 지켜볼 수 있다. 2. 백수린의 소설집 『봄밤의 모든 것』에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p.36) 자주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삶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과 함께 등장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기에 놀랍고, 이미 지나가버린 것이라고 잊었기에 새삼스럽다. 현란한 타임라인에 무한한 현재가 피드되는 오늘날에도 소설은 삶이 연속적임을, 젊었던 내 모습은 절대 돌아오지 않고 그 비가역성이야말로 삶이 지닌 잔인하고도 엄연한 속성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은 삶이 단속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뒤돌아보면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내 앞에 돌아와 놀라운 기시감을 선사해주라는 것 또한 알려준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까맣게 잊었을까”(「아주 환한 날들」, p.33) 하고 작은 경악을 느끼는 것처럼, 마흔이 넘은 여자가 “일렁이던 특별한 빛”을 가졌던 한때를, 그 시절 품었던 “이제 와 돌이켜보면 부끄럽지만 무척 황홀한 감정”(「빛이 다가올 때」, p.65, 71)을 언제든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기억에 남은 몇 장면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인생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그럼에도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장면들로 엮어낸 사슬이 어떤 이야기를 빚어내는지에 달려있다. 당신은 어떤 서사를 만들어낼 수 있나. ‘그 순간 이후 나는 달라졌다’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할 것이다. 차라리 진실은 ‘그 순간을 떠올린 이후 나는 달라졌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과거의 순간을 반복해 살고, 그때 비로소 그 순간의 적확한 좌표를, 그 순간이 인생에서 차지한 위치와 의미를 뒤늦게나마 알아채게 된다. 이야기의 형태로 순간은 영원을 획득하고, 그때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진실이 선물처럼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사할 것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내 삶을 관통해왔음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환희가 그때의 내게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 ‘그때 그곳’은 ‘지금 이곳’에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1) 모습으로 펼쳐진다. 오래되고 낡은 기억을 새롭게 재생하는 이 뒤늦은 행복의 수확은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마주쳤을 때, 예컨대 다시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 믿었던 노인이 앵무새를 사랑하게 되었거나(「아주 환한 날들」), 뉴욕에서 만난 마흔이 넘은 사촌 언니의 때늦은 첫사랑을 목격하게 되었을 때(「빛이 다가올 때」), 당혹과 감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시에 이 모든 일은 이미 충분히 고독하기에 발생한다. 아무리 후회해도 노인이 젊은 엄마였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고, 첫사랑의 추억에 무감해질 만큼 나이를 먹어버린 여자에게 뉴욕은 광채를 잃은 도시가 된 지 오래다. 그러므로 연속과 단속의 교차, 고독한 사람이 길을 걷고 서길 반복하는 모습이야말로 삶에 관한 정확한 비유로 보인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길은 끊기지 않고 다만 종종 정지되고 자주 되감길 것이다. 그렇게 백수린 소설의 행로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잃어버린 제 자리를 찾아서. 과거의 한 장면이 제자리를 찾아 잃어버린 조각처럼 박힌다. 원래 있던 자리는 아닌, 방금 만들어진 자리. 박히는 순간 이 자리가 바로 제자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리. 그렇다고 사랑이 이별로 마무리되고 삶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지당한 진리가 훼손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점점 녹아 사라지거나 말라비틀어져 버려지는 것이 비누의 운명인 것처럼. 인생이 비극이라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고, 비극에서 실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소설가의 고군분투가 존재할 따름이다. 미약한 우리가 삶의 비극성에 맞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아름다움이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임을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될 수밖에 없지만, 다행히도 예술가의 눈에 발견되어 그의 손에 의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소설의 아름다움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2)에서 유래하며, 소설의 독자이자 제 삶의 독자인 우리가 책임질 수 있고 책임져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3. 아름다움에 대한 책임은 지적인 책임 역시 저버리지 않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지나간 시절의 좌표를 해독하는 일인 동시에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이곳의 존재 양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다. 물론 아름다움과 진실은 함께 지켜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기억은 재구성의 작업을 멈추는 법이 없고, 보정된 과거는 진실성을 잃는 대신 아름다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사건을 보도하는 일과 같지 않고, 어쩌면 기사를 작성하는 일조차 현장에서 써 내려간 기사가 모든 일이 끝난 후 숙고하며 작성된 기사보다 진실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숲에서 벗어나 숲을 풍경으로 바라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그곳에 속했던 나로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 시간이 빚어낸 거리를 통과하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니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편집과 윤색의 의혹에 자유로울 수 없을지라도 차마 거짓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은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한다. 복기되지 않는 사실은 순결하지만 무의미하고, 삶은 끊임없이 복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도약을 감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지나간 것을 알아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매개물”에 가깝다. 만약 기억을 탐사하는 자가 “발굴된 물건들의 목록에만 신경을 쓰고 옛것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를 오늘날의 대지에 표시하”는 걸 잊는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3)고 있는 셈이다. 되찾은 기억은 단지 사실을 보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솟아오르는 현재의 이 장소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이십대 시절의 보라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는 유타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15년의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더 이상 “유타의 대책 없음이 한심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건 어쩌면 그녀가 이제는 나이 들고 병든 개를 간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봄밤의 우리」, p.92) 이 순간 그녀의 눈앞에 과거 유타와 함께했던 나날이 다시 한번 펼쳐진다. 타인의 말과 몸짓이 새롭게 발굴되고, 그렇게 되찾은 것들은 발굴이 이루어지는 지금 이곳의 내 삶에 대해 알려준다. 뒤늦은 앎이 전적으로 내 덕이 아닌 것처럼, 당시의 무지도 전적으로 내 탓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덟 살의 다혜가 자신을 얼마나 성숙한 어른으로 여기든 간에, 그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도, 자식들의 만류에도 어깨관절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도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짐짓 어른스러운 포즈로 반문한다. 그러나 마흔에 접어들자 희미한 깨달음과 후회가 밀려온다. “스무 살 때 다혜는 자신이 언젠가는 늙을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믿지 못했다. 겨우 스물여덟 살이었을 때는 이제 늙어버린 노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노인의 마음을 안다고 믿었다니. 주제넘은 오만. 어리석은 소리. 다혜는 아무것도 몰랐다.”(「눈이 내리네」, pp.208~209) 앞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모를 것이고, 운이 좋다면 언젠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만큼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얻은 불완전한 앎에는 놀랍게도 아름다움이 함께할 것이다. 삶은 기억이 빚어내는 반복을 통해 의미를 발굴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고작 1인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손안에 놓일 앎이 그리 대단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미미한 앎에 깃든 아름다움을 기만이나 허위로 폄훼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린 딸을 잃은 엄마가 “한없이 잔혹한 인생이 얼마나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또다시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순간처럼, 차마 바랄 수도 없던 빛, 꿈에서도 허락한 바 없던 빛이 삶에 내려앉는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 그 빛이 언제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 경외감이 어린 눈으로 그 빛이 번져가는 광경을 바라볼 수는 있”(「그것은 무엇이었을까」, pp.245~246)다. 삶의 아름다움은 감히 기다릴 수는 없지만 기꺼이 맞이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어른을 위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찾아온 앎이 가까스로 맺힌 물방울 같다는 걸 알아보는 사람, 우연과 필연이 빚어낸 정교한 결정에 감탄하면서도 그 찬란함이 곧 흩어지리라는 걸 납득하는 사람의 이야기.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지는 자가 되는 것도, 힘을 갖거나 성취를 쌓은 자가 되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포기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에 가깝다. 갓 성년이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섬으로, 다른 이들을 파도로 여겼다. 파도가 나를 치거나 감싸며 가까워지고 멀어지길 반복한다고 믿었던 순진함. 나이를 먹고 알게 된 것은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 나는 바다 위에 고정된 섬 같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라는 말의 허위를 깨닫게 된 순간, 인생의 많은 것을 마음 편히 포기할 수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나이를 먹어야 알 수 있는 것들, 나이를 먹어야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4) 젊은 시절을 “서정적 시기”라고 설명하는 쿤데라의 말에 동의한다.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가 존재한다. 그러니 성숙해진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는 일, 서정적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일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어른의 것이고, 소설가의 탄생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5) 여기서 백수린의 소설을 좀더 염두에 두고 말해보자면, 소설가는 그 폐허 위에 어른의 서정 세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복잡한 서정, 그러니까 무지로 빚어낸 매끈한 서정이 아닌 주름지고 비틀리고 손때 묻은 서정 세계를 발견하는 사람. 세상에는 어른만이 느낄 수 있는 비애와 충만이, 얼마만큼 나이를 먹어야 알아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작가를 가진다는 건 달라진 그의 관측소를 공유하며 새로운 어른의 서정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다정한 공모자들처럼.”(「흰 눈과 개」, p.142) 1) 발터 벤야민,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 「햇빛 속에서」,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도서출판 길, 2007, 212쪽. 2) 밀란 쿤데라, 권오룡 역, 「소설에 관한 내 미학의 열쇠어들」, 『소설의 기술』, 민음사, 2013, p.195. 3) 발터 벤야민, 같은 책, 「발굴과 기억」, pp.182~183.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뒤에 숨겨진 삶의 나이」, 『커튼』, 민음사, 2012, p.204. 5) 같은 책, 「시인과 소설가」, p.124.
시선의 연금술로 열리는 사랑의 미래 -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1) 이원기 1. 시선의 연금술: 사랑의 집요한 쓰기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소설 『풀베개』(송태욱 역, 현암사, 2015)에서 양갱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모든 과자 중에서 양갱을 가장 좋아한다. 별로 먹고 싶지는 않지만 그 표면이 매끈하고 치밀한 데다 반투명하게 빛을 받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하나의 예술품이다. 특히 파란 빛을 띠게 이겨서 훌륭하게 다듬은 것은 옥과 납석의 잡종 같아 아무리 봐도 기분이 상쾌하다.”(66쪽) 소설의 화자가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속에서 일본의 양갱을 서양의 과자들과 대조하며 그 빼어남을 묘사하는 장면인데, 읽다 보면 독자에게까지 푸른 양갱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야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쓰는 작가의 글에는 독자를 그 사랑에 동참시키는 힘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만하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강보원의 산문집 『에세이의 준비』(민음사, 2024)에는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싫음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한 탓에 그 자신의 싫음이 가장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128쪽)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는 소세키의 경우와 달리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쓰기가 갖는 힘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작가의 일이란 결국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쓰기가 절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쓰기를 지속하는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세 번째 시집을 펴낸 김연덕의 작업 역시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집요한 쓰기의 연속이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요컨대 ‘자기만의 작은 공간’과 그 확보에 대한 것으로서 지속되어 왔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작은 공간은 첫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와 두 번째 시집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에서 줄곧 탐색되었다. 그 작은 공간은 대부분 유리나 구슬, 얼음처럼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다르게 반사되”(「재와 사랑의 미래」, 『재와 사랑의 미래』)는 투명한 물체의 모양을 띠고 있거나, 오래된 주택의 거실(「폭포 열기 열기」, 『폭포 열기』)이나 부엌(「유리빛」, 『재와 사랑의 미래』), 혹은 책상과 의자, 소파(「잘못들」, 『폭포 열기』)처럼 집의 공간과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들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김연덕의 화자들이 주목하는 이러한 공간은 모두 작고 투명해 언뜻 연약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 작음으로 인해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는 성질을 공유한다. 이에 더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화자들에 의해 이것이 일상의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디서든 자신이 사랑할 만한 것을 발견해 내는 시선, 곧 무엇이든 귀중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이른바 ‘시선의 연금술’이라 할 만한 안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 이르러 이 시선의 연금술사들은 그 탐색의 영역을 과거의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 이번 시집의 화자들은 집, 특별히 화자가 전에 살았던 옛집과 그에 관한 기억에 본격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해 내기 위해 옛집의 구석구석을 차분히 살피는 이들의 모습은 마치 집을 나설 때 혹 두고 가는 것은 없는지 다시금 살펴보는 누군가의 미지근한 눈길을 떠올리게 한다. 과거의 집이라는 공간은 그런 화자들의 눈길 아래 자본화할 만한 대상을 긁어모으는 착취의 현장이기보다 애정의 온기가 훑어나가는 보살핌의 자리, 사랑의 경작지가 된다. 2. 오래된 이야기들의 집 『재와 사랑의 미래』가 얼마간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에서는 과거라는 시제가 전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든 다 식은 검은 재를 마신 채 그때의 여름 마당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같은 구절은 “재”라는 첫 시집의 시어를 직접적으로 경유하며 이를 통해 과거의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사실 과거에 대한 이 시집의 관심은 첫 시에서부터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시집의 대문이라 해도 좋을 「소품 가정집」은 거기에 김연덕의 화자들이 어째서 과거의 공간으로 나아가는지, 그것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종이를 열어 나의 오래된 집으로 아직 죽지 않은 먼지 나는 이야기들이 방마다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 「소품 가정집」 부분 화자가 “걸어 들어”가는 “오래된 집”은 그곳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 공간, 구석구석에 시가 되지 못한 이야기의 잔여물들이 “파본처럼 흩어져 있는” 공간이다. “종이”나 “파본”과 같은 시어들이 책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견인하며 이 시를 시적 기원에 관한 것으로 읽힐 여지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 배경이 되는 “오래된 집”은 그 자체로 시인의 시적 작업이 태동된 곳으로서의 근원적 공간으로 이해되기에 적절해 보인다. 이때 시인은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이 “오래된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랑의 탐색을 지속해야 할 일종의 정당성 내지 필연성을 역설하는데, 그 방법은 시적 기원과 비교적 무관했던 기존의 작업들에 대해 거리를 두며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단절감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 재채기는 나지 않는 옷이었던 거야. 하자 없는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 언제든 나를 버릴텐데. - 「소품 가정집」 부분 아무래도 화자는, 적어도 이 시집에서만큼은 “하자 없는” 말끔한 이야기보다 책이 되지 못한 채 파본으로 남은 어딘지 미진한 이야기, 오래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 모양이다[“나는 새 코트보다 이것이 좋다.”(같은 시)]. 그것들은 “유통되기에는 컨디션과 완성도가 부족했”지만 “파본 한 권 한 권마다의//야성”(같은 시)이 매혹적으로 꿈틀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야성”은 이야기들이 품고 있는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이름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된 그들마다의 계단을 떠올리며”(「sparkle」)]. 이번 시집에 유독 옛집에서 화자와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엄마와 아빠, 오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존재는 여러 시편들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며, 시집 전체의 흐름 속에 형상화되는 화자의 유년기 기억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오래된 집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오래된 이야기로 구축된 집[“비현실적인 주택의 언어”(「my mushrooms」)]에서 과거에 함께 살던 존재들과 만남으로써 화자들은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자기만의 작은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나간다. 보다 정확히는, 옛집이 바로 그러한 공간으로 재의미화되는 것이다. 가령 「구슬과 번개」에서는 집이라는 공간이 “거실에 놓인 자라 박제”의 “눈에 박힌 싸구려 구슬”로 축소되어 나타나며 이후 “구슬은 가족들의 피부나 얇은 거실의 창” 같다는 화자의 서술이 이어지고,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는 「앵두 따기」 속 화자의 진술 역시 가족들과의 기억이라는 맥락 위에서 투명한 구슬 모티프를 다시금 변주한다. 이처럼 화자들이 저마다 작은 공간들을 확보해 갈 때, 김연덕의 시는 정확히 그 공간들의 크기만큼 넓이와 깊이를 더할 수 있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끌어안고 그 안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또박또박 수집하며, 김연덕의 화자들은 그렇게 사랑의 경작지를 넓혀간다. 3. 커튼 치기 흥미로운 점은 시 속에 묘사되는 옛집의 공간들이 많은 경우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일찍부터 시선의 연금술을 체화함으로 “오랜 내구성”(「구슬과 번개」)을 갖추어 둔 김연덕의 화자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집의 제목에 명시되어 있는 “오래된 어둠”이야말로 이번 시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이 사랑의 탐색전을 벌이는 주 무대가 된다. 요컨대 어둠까지도 사랑을 경작할 수 있는 영토로 기어이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시집에서 과거나 어둠이라는 단어가 현재나 미래, 빛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커튼이라는 소재는 어둠과 빛이 맺는 독특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화자들이 여러 편의 시 속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는 이 다중 우주적 옛집에서, 커튼은 주로 할머니의 방에 둘러쳐져 있다[“안방의 커튼은 낮에도 늘 어둡게 늘어져 있어”(「브로치」), “할머니는 모직 커튼이 쳐진 낮의 방에 앉아서도”(「낮의 옥상」)]. 그리고 그것은 종종 옛집의 가부장적 분위기를 고발하며 김연덕의 시들이 내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적 면모를 내비치기도 한다[“평소 모직의 두꺼운 커튼이 사방으로 쳐져 있던/대부분 비어 있던 그들의 어두운 거실에서 언니의 바이올린 선율은”(「낮의 성벽」), “누군가의 부모/아내/친구도 상사도 아닌/딸로 이어진 자만 가볼 수 있는 곳이 있다.”(「새가 되어」)]. 하지만 기본적으로 커튼이란 빛의 농도를 조절하는 도구이며, 공간의 따뜻함은 커튼을 통해 미세하게 조정된다. 빛을 차단해 어둠을 만들어 내는 이 도구는 반대로 공간에 빛을 초대함으로 어둠을 차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서 커튼은 기억의 주체인 화자들에게 옛집의 각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의 조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로서 주어진다. 화자들은 옛집의 곳곳에 커튼을 칠 수도 걷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해당 기억을 어둡게도 밝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안방의 커튼이 화자의 기억에 따라 쳐져 있을 때도(「브로치」), 반대로 걷혀 있을 때도[“나는 빛이 나른하게 쏟아지는 할머니의 안방 안에 들어와 소반 위의 호떡을 먹는다.”(「낮의 크레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거의 공간과 그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커튼이라는 소재를 통해 어둠과 빛의 이분화가 만들어 내는 평면성에서 끝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어느 한 가지 성질로만 표현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러한 맥락 위에 “한 평 남짓한 크기 그 안의/어둠”을 보며 그것이 “꼭 고해성사실 같았다”(「철사 천사」)고 말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언니를 떠올릴 때면 그 장면이 “항상/해와 그림자가 기쁨과 후회가 같은 빈도로 길어지던 여름 한가운데서 시작된다”(「sparkle」)는 화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공간에서라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가치 초월적 발화의 구체적인 예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커튼은 어둠을 옹호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할머니가 자신의 존재를 대면하고 그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이 어둠이기 때문이다. 「브로치」의 커튼이 쳐진 안방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라곤 할머니의 거울과 유리 그릇”과 브로치들이었고, “커튼 밖 세계에서 빛나고 있는 빛을/나눌 곳이라곤 안쪽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는 서로밖에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거울이 나누던 길고/따뜻하고 지루한 대화”는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커튼이 만들어 내는 어둡거나 밝은, 혹은 ‘어둡고도 밝은’ 공간에서 이제 화자는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다. “나는 그런 슬픔과 즐거움, 어둠의 시간을 좋아한다”(「천국의 개들」)고. 한편 커튼은 물리적 차원뿐 아니라 개념적 층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기도 하다. 어둠과 빛에 대해 그러했듯 부정적 표현과 긍정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병치시킴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연금술을 시도하는, 이른바 ‘커튼을 치는’ 식의 발화가 화자들의 서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아슬아슬한 즐거움과 슬픔”(「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숨 막히게 행복하고 억눌린 느낌으로”(「비좁은 불」), “마당에서 가장 아끼고 무서워하던 꽃”(「사랑받지 못한 얼룩들」), “현재라는 기쁜 슬픔”, “따뜻하고 슬픈 빛”(「새가 되어」), “얼룩덜룩한 의기양양함으로/눈부신/자신 없음으로”(「낮의 크레페」) 같은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커튼을 쳐서 어둠과 빛을 섞고 그 농도를 흩트리듯, 이 시집의 곳곳에서 화자들이 수행하는 시적 발화들은 언어의 부정성과 긍정성의 구분을 지운다. 이들에게 좋고 싫음의 문제는 밝음과 어두움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이나 그 경계를 명확히 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이다. 4. 현관을 나서기 전에: 과거에서 길어 올리는 사랑의 미래 옛집과 거기 방치돼 있던, 시적 기원이 되는 오래된 기억들을 부지런히 톺으면서 화자들은 이제 더 넓은 사랑의 경작지,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미래의 자리로 나아간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화해 되짚으며 화자들은 과거의 미래, 곧 현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결과론적 반추의 형태로 나타난다[“나는/내 사랑이 한 번에 행복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사랑에서 오는 즐거움을 내가/많이 낭비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앵두 따기」), “진동하는 기쁨과 수치라는 과일나무들 사이를 지나게 될 내가 앞으로 어떤 과일들을 먹게 될지 (…) 미리 알고 있었지만”(「vague frame」)]. 특히 「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에서 이러한 발화들은 유독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주로 여성주의적인 형태를 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어린 내가 본다 어느 쪽을 응원할지 그래서 미래에 어느/유형의 여자로 클지”, “송출된 화면 속 관중은/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수치만큼//다정한 허무만큼 많았어”, “내가 원 안에서 쏠리고 넘어지는 여자 어른으로 클 줄은”(「살과 피로 정성스레 부서진」)]. 이때 해당 시의 중심에 할아버지라는 인물이 놓여 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 시집의 여러 시편들에서 할아버지가 가부장적 위계를 집안에 흘려보내는 이로 그려지고 있음을 떠올린다면 이 시는 그가 옛집에서 화자를 포함한 집안의 여자들에게 줬던 불편함에 대해 화자가 뭔가를 말하길 시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시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이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오래된 어둠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되는바, 그것은 더 많은 사랑이 가능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김연덕의 화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음을, 다시 말해 이들이 옛집이라는 어둠-빛의 공간에서 가족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시편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브로치」를 읽어볼 수 있다. 해외에 다녀오면서 할머니에게 브로치들을 사준 이는 “과묵하고 고집스럽던” 할아버지였다. 그는 따뜻한 사랑의 말들을 “할머니에게 해준 적 없”는 사람이었지만 화자는 그의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심한/사랑”을 발견해 내며 그를 이해하길 시도한다(“할아버지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애석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궁금해지곤 했다”). 시간이 흘러 브로치들은 화자의 엄마와 작은 엄마들에게 나누어지고, “중요한 것들 몇 개는 나의 오래된 거울 속에” 들어와 화자를 구성하며 그를 자신만의 이야기, 시적 기원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게 한다(“잠에서 가끔 깨어나는 이야기는//나를 종종 따뜻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둠 속에서 귀한 것을 찾아내는 김연덕 화자들의 연금술이 또 한번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할아버지로 대표되는,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둠을 대면해 이해를 시도하고 끝내 그것과 화해할 가능성을 찾아내는 화자들은 「낮의 서재」와 「tiny hole」을 비롯한 이후의 몇 시편들에도 반복해서 등장한다. 특히 “5살 무렵 깊은 우물에 빠졌었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덮개 위로 올라가 어린 할아버지의 가장 약한 부분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tiny hole」 속 화자의 모습은 그가 과거의 어둠과 화해하는 장면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우물 속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던 할아버지를 나의 햇볕 아래 누인다”). 시적 기원을 형성하는 과거의 이야기들로 구축된 오래된 집에서, 김연덕의 화자들은 이렇게 사랑할 만한 것들을 끈질기게 길어 올린다. 그 과정에서 파본으로만 굴러다니던 그곳의 이야기들은 커튼을 치는 행위가 가지는 정치적 수행성을 통해 이분화되어 있던 어둠/빛의 영역과 시적 언어의 한계를 이중으로 타파함으로써 이제껏 쓰이지 않았던 시의 여러 가능태로 새롭게 의미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김연덕의 화자들은 사랑의 미래로 뻗어나갈 일단의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마지막 시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은 옛집을 떠나는 화자가 그곳에 남기는 끝인사처럼 읽힌다. 그늘 속에서 편안하게 썩어나가던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쉴 수 있을 때, 마지막 사람이 난방을 끄고 나오며 뒤돌아보지 않을 때 괴로운 행복을 좀 늦게 알아채는 방으로 기어 들어가 자존심 강한 파본들을 주워다 쓴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이제 벗어두었던 코트를 다시 입을 시간. -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부분 마지막 연의 “코트”는 물론 첫 시에 등장했던 코트의 변형일 것이고[(“이 코트는 새것인 이야기들을 써서 번 돈으로 산 것이지”(「소품 가정집」)], 이 수미상관의 구조는 곧바로 이 시집을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한 채의 집, 예컨대 ‘시로 세운 집’으로 인식되게 하며 독자에게 시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갔다가 문을 닫고 나오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시인 김연덕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행하는 집요한, 그리고 구체적인 쓰기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나의 음악은 이 모든 사라짐을 집요하고 구체적인/사랑을 기록하는 것에 있었다”(「산과 바이올린과 피아노」)]. 1)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현대문학, 2025. 이후 인용하는 시들은 제목만 적으며, 모든 중략은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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