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가을호
보이는 여성 — 위수정론
보이는 여성 — 위수정론1)
1. 예술하는 여성들
위수정의 소설에는 예술을 전공한 인물들이 거의 매번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 여성들이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의 ‘원희’는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으나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하며 연주에서 손을 놓았고 자신의 전공 지식은 연주자들의 연주 실력이나 곡 해석 능력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나 쓴다. 「풍경과 사랑」의 ‘나’ 역시 대학 시절 개인전을 열기도 한 미술 전공생이었으나 지금은 한옥 건축가가 된 남편을 내조하며 ‘미술을 전공한 감각’으로 센스 있게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사모님이 되어 있다. 남편에게는 “브리오니의 블루 셔츠”를 입히고 자신은 “미우미우 화이트 블라우스에 노란색 에르메스 트윌리를 두르”(p. 82)는 세련된 감각을 뽐내며 말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런 차림이 자연스러워진 걸까”(p. 99)라며 허영에 가득 차 보이는 자신의 차림새를 가끔씩 점검해보는 자의식도 잊지 않는다.
「안개는 두 명」은 해외에서 레지던시 참여 작가로 만나 친해진 ‘선주’와 ‘화영’의 이야기이다.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선주’는 설치 작가로서 미술계에서 인지도를 쌓고 있고 회화 전공이었던 ‘화영’은 시아버지가 몰던 ‘하얀색 포르쉐’를 모는 임산부가 되어 있다. 「제인의 허밍」에서는 어떤가. 선천적 난청이라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부잣집 딸 ‘규희’는 서양화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 후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 정착해 살고 있다. 「몬스테라 키우기」의 ‘민희’는 발레를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 유학을 가서 방탕한 생활 끝에 약물에 중독됐던 그녀는 현재 해안 도시의 방 네 개짜리 쾌적한 아파트에서 엄마의 카드를 아낌없이 쓰며 요양 중이다. 그 외 사진작가, 음향 기사, 구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예술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특히 원희·규희·민희 등의 경우를 볼 때 그녀들에게 예술이란 전적으로 그들이 누리는 부유함이라는 계급적 특권과 관련이 깊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녀들은 부유하다는 이유로 예술을 전공할 수 있었고, 또 같은 이유로 전공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아도 되었던 인물들이다. 부모에게 선물 받거나 물려받아 소유하게 된 에르메스, 까르띠에, 포르쉐 혹은 몇백만 원짜리의 식물처럼 그녀들이 전공한 예술도 어쩌면 이들이 속한 계급적 취향을 드러내는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위수정의 소설은 이 시대 ‘순수예술’이 처한 상황을 은연중 말해주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다. 예술이 배고픈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배고픈 사람은 예술을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재능과도 어쩌면 무관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더 이상 어떤 고급의 취향을 드러내주지 못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계급적 인장처럼 모두 똑같이 몸에 두르고 있으며 표 나는 로고 없이도 그들끼리만 서로 알아챌 수 있는 최고급 명품처럼, 오늘날의 예술도 특정 계급의 사람들이 유행처럼 ‘소유’하면서 몸값을 키워가게 된 사치품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지적’ 혹은 ‘미적’ 허영을 드러내는 것이 될 수도 없다. 오늘날의 예술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의 재력을 증명할 뿐인 사물 그 자체이다. 세상 돈 많은 사람들은 다 모여 있는 듯한 인스타그램의 명품 행렬들 속에서 역시나 유행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볼거리들, 가령 청량한 빛의 빨갛고 푸른 사과들, 하얗고 둥그런 달 모양의 항아리, 여러 색으로 겹쳐진 색깔 띠들의 조합, 일정한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는 색색의 동그라미들, 아무렇게나 찢긴 노트에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낙서, 이러한 작품들의 유행은 개개인의 미적 취향과는 어쩌면 전혀 무관하다. 예술 작품 역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자의 재력만을 증명하는 유행 템에 불과하다. 수천만 원의 구매 이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에르메스의 버킨 백도 모두에게 똑같이 아름답고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버킨 백은 그것을 살 수 있는 특권만을 의미할 뿐이다. 돈의 권력 말이다.
위수정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의 해설에서 김형중이 적확하게 지적하듯 위수정의 몇몇 소설은 “‘취향을 매개로 한 계급 탐구’ 정도로 요약”2)이 가능하다. 『은의 세계』에 실린 「풍경과 사랑」이나 「화양」 같은 소설 그리고 『우리에게 없는 밤』에 실린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제인의 허밍」 「몬스테라 키우기」 같은 소설에서는 태어난 이후 생계의 걱정 같은 것은 한 번도 안 해봤을 법한 부류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르고 백화점 식품관에서 장을 보는 중년 여성, 잠깐 스치듯 인사한 사람의 손목에서 오데마피게 시계를 알아보는 건축가, 결혼도 출산도 녹록지 않은 이즈음의 한국 사회에서 외동으로 자란 쓸쓸함을 해소하겠다며 셋째까지 임신한 젊은 여성, “15년에 보증금 8억, 월 5백, 1인 추가 시 3백”(「오후만 있던 일요일」, p. 81)의 비용이 드는 실버타운을 알아보는 노년의 부부 등이 그들이다. 유행했던 ‘수저론’을 참조하여 김형중은 이러한 인물들을 “금의 세계”에 속한 이들이라고 설명해보는데 ‘수저론’의 핵심이 그러하듯 이들의 안온한 세계가 세대를 넘어 견고하게 계승된다는 점도 위수정 소설에서 확인되고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위수정의 소설이 철저히 자본을 중심으로 위계화되는 중인 한국 사회의 특정 계층 사람들의 습속을 극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부유한 사람들의 습속과 취향에 관해서라면 그것이 과장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이미지 중심의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더 상세히 그들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일상과 소유물들을 보란 듯이 노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뚜렷한 목적과 의도가 있기 마련인데, 그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박탈감 혹은 위화감이라는 것에도 둔감해질 만큼 이미 질리도록 보아온 사정을 문자 텍스트로 다시 확인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위수정은 이 ‘금의 세계’를 배경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당연하게도 돈 많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즉 “살면서 한 번도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해본 적이 없”(「몬스테라 키우기」, p. 170)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인생이 마냥 즐거울 리는 없다. 선천적으로 몸이 좋지 않아 힘들기도 하고, 유학 생활의 외로움도 견디기 쉽지 않고, 늙어가며 추해지는 일도 서럽고, 예기치 못한 상대에 대한 갑작스러운 성적 갈망은 고통스럽다. 물론 위수정의 소설에서 재차 확인되는 것은 이러한 곤경들이 가족 간의 갈등이나 삶 전체의 위기로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위기들 속에서도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금의 세계’ 혹은 ‘은의 세계’에 속한 자들이 누리는 특권일지 모른다. 결정적으로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안온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은의 세계」의 ‘지환’과 ‘하나’ 부부처럼 말이다. 이들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윤리적·지적 판단력, 선한 마음 같은 것들 때문이 아니다. 삶의 균열을 언제든 봉합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돈이라는 권력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쉽게 무너질 수가 없다. 반면, 유튜브 방송으로 갑작스럽게 돈을 벌어 ‘금의 세계’로 진입 중인 「제인의 허밍」의 ‘한나’나, 「몬스테라 키우기」에서 민희의 집에 도우미 격으로 얹혀살며 SNS에서는 럭셔리한 삶을 즐기는 대학생으로 자신을 연출하고 있는 ‘재순’은 금과 은과 흙의 세계의 경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김형중의 분석처럼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선명히 확인되는 것은 “노예는 어떻게 해도 노예로 주인은 어떻게든 주인으로 남는 이 세계”(『밤』 해설, p. 378)의 변치 않는 진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에 좀더 주목할 경우 우리는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금의 세계’와 ‘흙의 세계’ 사이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밤』 해설, p. 372)은 결코 허물어질 수 없는 것일까.
2.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여성들
그럴지도 모른다. 두번째 소설집에 실린 「아무도」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게 돼 별거를 감행한 ‘희진’의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희진을 비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화장을 지우지 않고 누워 있는 아내의 얼굴을 클렌징 티슈로 닦아주는 다정함과 세심함을 지녔던 희진의 남편 ‘수형’은 묵묵히 희진의 결정을 따르고, 희진의 부모도 평소대로 무심한 듯, 자상한 듯 딸의 상황을 관망한다. 희진의 엄마는 “너 연애하려고 나온 거 아니었어?”(p. 36)라고 말하며 백화점에서 산 화려한 속옷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 부부의 별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시부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희진에게 따뜻하기만 하다. 희진의 이기적인 선택을 “개 같은 욕망”이나 “지나가는 바람”(p. 42)일 뿐이라고 힐난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9」의 ‘혜신’은 남편 친구 가족들과 함께 여행차 방문했던 고급 리조트의 내국인 카지노에서 난생처음 접해본 카드 게임에 완전히 매료되어 결국 어린 딸과 남편을 잊은 채 모텔과 찜질방을 전전하며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혜신에게도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지금이라도 같이 가면 내가 다 처리하고, 용서”하겠다, 전부 “없었던 일로”(p. 273) 하겠다고 인내를 갖고 설득하는 남편이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그녀들이 그 안온한 일상을 버리고 “정말 딴 세상”(p. 248) 같은 그곳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희진은 “이러려고 집을 나온 거니까”(p. 14)라는 말을 반복하고, 혜신은 “돈 때문만은 아니”(p. 252)라고 말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언젠가, 노숙인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중2병이라거나 배부른 허무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겠지. 여전히 나는 노숙인의 삶을 간혹 상상한다.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나와 자고 소중한 것을 서서히 잊어가는 상태를.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친구와 가족과 이름을 버리고. 집착도 사랑도 모르는. 그렇게 죽음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을. 결코 자살은 하지 않고. (「아무도」, pp. 38~39)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소망하는 희진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나와 자고 소중한 것을 서서히 잊어가”고 싶은, “죽음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을” 꿈꾸는 마음은 과연 무엇일까. 세련된 취향을 지닌 위수정 소설의 우아한 여성들이 침대에서 “일부러 더 저급하게 굴”(「풍경과 사랑」, p. 100)며 흥분을 느끼거나 “아무나랑 잔다”(「마르케스를 잊어서」, p. 195)는 거짓말인 듯 아닌 듯한 말을 전남편에게 서슴없이 말하거나, 호텔에서 잠자리 상대로 젊은 남성이나 젊은 여성(「화양」 「우리에게 없는 밤」)을 만날 때, 그녀들은 어떤 갈망과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고등학생 아들의 친구에게 혹은 아들뻘 되는 싱그러운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는 그 마음들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고 아무에게도 발설할 수 없는 그 분명한 욕망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평범한 시선에서는 “멍청한 건지 미친 건지”(「은의 세계」, p. 32) 알 수 없는, 허공을 향해 내뱉은 “엉뚱한 소리”(「풍경과 사랑」, p. 105) 같은 저 마음들을 말이다.
첫번째 소설집의 해설에서 백지은은 위수정 소설을 “주어진 체제에 대한 감응이 아니라 그것을 이탈한 감각을 따라가는 경험, 자기 삶이 놓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 세계를 견디기 위해 터져나오는 충동, 자기 동일시의 앎을 추구하기보다 앎이 되지 않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정리했다. 인물들이 느끼는 사실적인 충동과 감각들을 수시로 묘사하는 위수정의 소설은 백지은이 말한 대로 “가시적 현실의 안정성을 흔”3)드는 충동과 정념을 더 명백한 사실로서 말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발설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빗겨선 충동과 마음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것일 수 있다. 계급도 위계도 성별도 세대도 저 충동들과는 사실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위수정의 소설에서 우리는 주로 여성들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에서 주어진 질서의 의미를 무시하고 흩뜨리는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이 “미친년”(pp. 34, 71, 143) 또는 “썅년”(p. 257)의 이름으로 체제에 기입되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욕된 기표의 자리를 스스로 맡”으며 “그 질서의 독단과 무능을 뒤집”는 “미친년–되기 또는 썅년–되기를 수행하”(『은』 해설, p. 319)고 있다는 점은 특히 첫번째 소설집 『은의 세계』에서 흥미롭게 주목된 지점이기도 하다.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정념이 반드시 여성들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특정 계급의 한가로운 권태와 연결시키는 것도 그다지 생산적인 분석은 아닐 수 있는데, 『우리에게 없는 밤』에서는 이러한 ‘미친년–되기’ 혹은 ‘썅년–되기’가 보다 전략적인 방식으로 견고한 자본의 세계에 침투하며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을 교란시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3. 노동하는 자족적인 여성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해 읽을 작품은 「제인의 허밍」일 것이다. 구독자 수가 약 2천만 명에 이르며 연간 수익이 몇백억이라는 ‘Jane ASMR’ 먹방 채널을 연상시키는 “제인의 허밍”은 구독자 20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나’의 개인 유튜브 채널이다. 두 명의 제인은 모두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채로 방송을 한다. 제인이 된 한나는 가끔씩 미소 짓거나 허밍하는 입만 노출되도록, 그리고 속옷 색깔이 은근히 비치는 하얀 셔츠의 단추를 한두 개 풀어 가슴 쪽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도를 맞추고, 세 시간 동안 공부를 하는 모습을 일주일에 한 번씩 실시간 방송으로 송출한다. “단정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으로 가끔씩 허밍을 하며. 무심하고 지적인 모습을 보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애쓰며. 구독자는 최근에 20만을 넘겼다”(pp. 92~93). 가난하고 “무지한 부모 탓”(p. 95)에 어린 시절 앓았던 세균성 수막염을 적절히 치료하지 못해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온 한나는 우연한 기회에 유튜브 방송을 하게 되었고, 적절한 전략으로 채널을 성공시켜 구독자 수의 증가와 더불어 ‘흙의 세계’를 탈피하는 중이다.
구독자들은 짙은 오크색의 책상과 감각적으로 깔끔하게 배치한 학용품들이 주는 고급스러운 안정감을 좋아했다. 그리고 은근히 드러나는 가슴 굴곡과 하얗고 긴 손가락의 움직임. 필기를 하고 펜을 입에 무는 제인의 습관들. 간혹 제인은 연필을 깎기도 했다. 연필을 깎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적당히 허스키하면서 공중을 떠다니는 듯 어딘가 비어 있는 제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채팅창은 폭주했다.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었는데, 한나는 이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모호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p. 94)
대체로 중고로 마련한 것들이기는 하지만 가난했던 한나가 이제는 외제 차를 타고 명품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옷과 백을 걸치고 백화점에서 한가로이 식사를 하며 186만 원짜리 에르메스 신발을 구매하는 일상을 누리면서 “강남이나 한남”의 “밝고 넓은 집으로 이사”라는 더 많은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p. 97)할 수 있게 된 것은 “구독자들의 취향을 간파한”(p. 93) 제인의 영리함 덕분이다. 불편한 귀 때문에 갖게 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한몫했을 것이며, 어쩌면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적당한 선에서 어필하는 전략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의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다. 대중의 관심으로, 즉 그들의 머릿수로 돈을 번다는 것은 애초에 예측할 수도 설명될 수도 없는 일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한나는 부모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견고한 계급의 장벽을 허무는 중이다. 그리고 그 무기가 대체로 제인의 감각적인 취향이라는 점도, 더불어 한나의 신체적 약점이 도움이 된다는 점도 예사롭지는 않다.
‘취향’은 이제 더 이상 자본의 결과만이 아니다. 취향이 대체로는 돈으로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취향이 돈을 만들어내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저들의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밤』 해설, p. 372)은 넘어서지 못할 것도 아니게 된다. 돈 많은 사람들의 따라 하고 싶은 취향이 누구나 볼 수 있게 널리 공유되고 있는 세상에서 혹은 그러한 정보로 돈을 벌기도 하고 정보의 공유를 강요받기도 하는 세상에서, 취향을 연출하는 일도 쉽게 가능하다. 특히나 “적응이 빠른, 똑똑한” 한나에게 “부촌에 위치한 백화점”에서 마치 “근처에 사는 주민인 척, 여유롭게”(p. 102) 연기를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서로를 의식하며 여유를 연기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난청 치료를 받으러 다녔던 병원에서 만나 친구가 된 규희는 한나랑 달랐다. 일곱 살에 처음 가본 규희의 집은 넓고 고요했다. 규희는 한나가 책을 읽어주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규희를 위해 규희의 엄마는 한나를 집으로 자주 초대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을 건네주고 마치 그 대가처럼 새 인형도 사 주었다. 어떤 상황에도 빠르게 적응하는 “아주 똑똑”(p. 96)한 아이였던 한나는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스스로 터득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구독자 20만 명을 떠올리며 “문득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누구의 조력도 별다른 초기 자본도 공부도 없이 한나가 인기 유튜버가 되어 원하는 것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운을 놓치지 않아야겠다”(p. 104)는 절박함의 힘이 더 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절박하고 불안한 마음은 한나만의 것일까. 전시회를 이유로 한국에 잠시 들어온 규희와 한나가 3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이 둘 사이 극복될 수 없는 계급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규희의 마음 역시 편치 않다는 것이 은연중 드러난다. 셀린느라고 커다랗게 적힌 중고로 산 풀오버를 입고 로고가 선명한 구찌 백을 들고 나온 한나는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까르띠에 시계를 제외하고는 어느 브랜드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아이템들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온 규희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긴 생머리에 귀에는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매끈하고 깨끗”(p. 108)한 규희의 모습에서 한나는 극복할 수 없는 계급과 취향의 차이를 느꼈던 것일까. 제인 버킨을 좋아해서 버킨 백을 모은다는 규희와 매장에서는 구매할 자격이 되지 않아 중고 사이트에서 버킨 백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과의 태생의 차이를 말이다. 자신의 손목에 잠시 채워졌다 규희의 손목에 익숙하게 채워지는 “꺄흐띠에” 시계를 보며 한나는 “마음에 또다시 무언가 찰칵 채워지는 소리”(p. 111)가 들리는 듯하다. 규희에게는 자연스럽게 손쉬운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절박하고 심지어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게끔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그 감정들과 어김없이 마주하는 한나는 그러한 감정을 미소로 감출 수밖에 없다.
이 만남에서 규희가 한나에게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대학 입학 선물로 아버지에게 받은 ‘튼튼하고 안 질리는’ “까흐띠에” 시계도, 장애인에게 관대한 프랑스에서의 만족스러운 삶에 대한 이야기도, 전시회 소식도, 상표를 내세우지 않는 베레모 선물도, 그 무엇도 아니었을 수 있다. 규희는 한나에게 방송에서 제인이 하는 허밍이 혹시 자신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너, 나 흉내 내는 거, 아니지?”(p. 112)라고 묻는 규희는 자신의 선천적 장애를 의식하고 있지만 한나에게 그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수치스럽다. 노출을 좀더 하는 식으로 의상에 변화를 주어 구독자 수를 늘리더라도, 그래서 곧 버킨 백을 갖게 되더라도 한나는 규희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원히 “규희 흉내”(p. 113)에 머물지도 모른다. 규희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이러한 사정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인의 허밍」을 “취향의 경계는 너무도 견고해서 그렇게 넘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밤』 해설, p. 368)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로만 읽기에는 어쩐지 아쉽다.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자본과 혹은 상품과 결부된 취향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이다. 유명인이 공유한 독특한 취향이 결국 특정 상품에 대한 더없이 훌륭한 광고가 되어버리는 세상에서 고유한 취향은 불가능하며 흉내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제인을 연기하는 한나가 “규희 흉내”를 내는 것일지언정 규희도 한나도 결국 버킨 백을 소유하며 제인 버킨처럼 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취향에 관해서라면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누구나 평등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직접 소유한 것과 거짓으로 연출한 것 사이의 경계가 한없이 흐려진 세상에서라면 우리는 누구나 원하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는 자신의 취향을 남들과 비슷하게 뽐낼 수 있다. 모든 취향은 서로가 서로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세상이니 「제인의 허밍」에서 우리가 특별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규희와 한나의 건널 수 없는 취향의 차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전략으로 취향을 연출하고 그것을 결국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한나의 자발적 고군분투여야 하지 않을까. 구독자 수가 30만, 50만을 넘어서고 백만에 이르면 한나의 수치심도 점점 흐려질 것이다. 그러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 진짜 공부가 아닌 공부하는 시늉만으로도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얼마든지 보란 듯이 취향을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에 말이다. “너, 나 흉내 내는 거, 아니지?”라는 규희의 물음은 한나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한나와 자기 사이의 격차가 흐려지고 있다는 규희의 불안과 불쾌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위수정의 소설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계급의 격차를 흐리는 자본화한 취향의 몰개성이기도 하고 그러한 취향의 평등을 만들어내는, 자족적으로 노동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에게 없는 밤」의 ‘지수’와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우리에게 없는 밤」의 지수는 고1때부터 ‘안나’라는 이름으로 SNS에서 만난 사람들과 한 학기에 서너 번 정도 “재미로. 때로는 스트레스 해소용으로”(p. 120) 섹스를 하고 돈을 벌어왔다. 학생의 본분을 잊지 않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 언제나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으며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아르바이트라고 생각”(p. 121)하며 만남을 이어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길에서 데려온 베스라는 고양이를 함께 키워온 ‘은선’은 지수의 “조건 만남을” “노동의 하나라고 생각”(p. 144)한다며 존중해주는 편이다. 고양이의 양육비를 위해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지수는 노동의 조건들을 스스로 정한다. 지수 곁에는 그러한 형태의 “아르바이트”를 만류하는 사람도 지수를 착취하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수는 자신의 일에 대한 수치심도 없다. 심지어 조건 만남을 통해 만난 중년의 여성에게 알 수 없는 낯선 매혹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을 “같은 업계 사람”(p. 123)이라고 소개했던 ‘민재’라는 남성이 “소위 말하는 스폰서를 물”어 “거의 엄마뻘 되는”(p. 153) 여자에게 집과 차와 돈을 제공받아 생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은선의 말대로 지수는 “아직 한국에서는 불법인”(p. 145)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히 스스로 선택한 일이며 그 노동의 대가를 온전히 자신이 취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지수는 언제라도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안나 계정”을 삭제한 뒤 “우리는 이미 몸을 너무 많이 쓴 걸까. 그래서 이런 걸까. 폐허인가”(p. 158)라며 공허한 혼잣말을 내뱉어보지만, 이 모든 과정들 속에서 다소 무심한 태도로 선택의 주체가 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해 보인다.
비슷한 일을 하지만 지수와는 꽤 달라 보이는 민재는 「몬스테라 키우기」의 재순과도 닮았다. 혼자 사는 민희의 집에 흡사 입주 도우미처럼 함께 살고 있는 보육원 출신의 재순은 민희가 산 재료들로 음식을 하고 민희의 엄마가 보내준 비싼 식물을 키우며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심스럽게 지내며 고맙다는 말도 늘 잊지 않던 재순은 점차 민희의 집을 제집처럼 편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한 재순은 SNS에서 “박재희”라는 세련된 이름의 부유한 대학생으로 살고 있다. 민희의 아파트를 소유한, 쇼핑과 요리를 즐기는 미식가이기도 하다. 거짓말로 가득 찬 박재희의 삶을 재미로 지켜보던 민희는 어느 날 자신의 맨발이 찍힌 사진과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p. 194)라는 글귀를 확인하고 소름이 끼친다. 잘못 본 것인지 수정된 것인지 몇 시간 뒤 다시 찾아본 그 계정에서 “자본주의의 개념, 왜 사는 걸까”로 문구가 바뀐 것을 확인하지만 민희는 결국 얼마 뒤 재순을 집에서 내보낸다. ‘제인이 된 한나’나 ‘박재희가 된 재순’은 자신의 삶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인물들이다. 그런데 스스로의 전략으로 돈을 벌고 있는 한나가 “속옷 방송 한번 하자고, 신비한 게 좋다고, 얼굴 보면 깰 거 같다고, 가슴 수술은 어디서 했느냐고”(p. 116) 등의 희롱을 감내할 때, 민희의 삶에 완벽히 기생하는 재순이 “자본주의의 개년”이라는 혐오 발언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수정은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에게는 ‘기생하는 남성’이라는 정확한 자리를 부여한다. 때문에 위수정의 소설에는 착취하는 남성과 착취당하는 여성의 구도가 드러날 수가 없다. 그녀의 소설에서 남성들은 주로 주변화되어 있거나 여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있거나 여성의 삶에 기생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욕망하는 여성’들은 그 대상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위수정 소설에 등장하는 다분히 자족적인 여성들은 스스로의 주체적인 행위로 계급의 위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평등한 취향의 세계를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돈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게 말처럼 쉽겠는가마는, “김치찌개도 상한 우유도” “곰팡이도 부모도” “냄새도 날씨도 없”는 누구나 평등한 세상은 이름 모를 호수 아래의 “꿈이 없는 잠 속” 같은, “어두워도 충만하여 빛을 원할 필요도 없”(「집」, p. 326)는 죽음 같은 공간에서나 가능한 듯하지만, 위수정의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여성들은 욕망도 취향도, 남성도 여성도,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가능할지 모른다고 말해보는 듯도 하다.
4. 멈추지 않는 여성들
위수정의 소설에는 여성들이 보인다. 자본을 누리며 취향을 전시하는 이들도,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 자본으로 스스로 돈을 벌고 있는 것도 여성들이다. 중년과 노년 여성의 욕망과 불안도 위수정의 소설에서 볼 수 있다. 현실을 초과하는 알 수 없는 정념도 위수정 소설의 여성들이 증명한다. 그녀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착취당하거나 남성적 방식으로만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물론, 현실에는 여전히, 자신의 전공을 업으로 삼지 못한 여성들, 일한 만큼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여성들, 교묘한 남성 동성 사회성이 작동하는 곳에서 이용당하고 배제되는 여성들, 맞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 그러니까 여러 형태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이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여기 다양한 매체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그것을 주도하는 쪽은 많은 경우 여성들이기도 하다. 여성 아이돌도 유튜버도 그리고 심지어 인스타그램의 많은 인플루언서도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과 능력과 취향을 뽐내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전시하고 관심을 끌며 자본을 창출한다. 어떤 경우 그녀들이 판을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여러 판의 공론장에서 쉬지 않고 담론을 이끌어가고 재창출하고 있는 것도 이제는 여성들이다. 폭력과 협박으로 여성을 굴복시키려 하거나, 여성의 호소에 침묵하며 모른 척하거나, 오로지 음지에서 온갖 조롱과 욕설의 말들로 혐오의 감정을 배설하고 있는 자들은, 보이는 곳에서 꾸준히 자신을 단련하고 가꾸고 그런 자신을 내보이며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여성들을 언제까지나 착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쉽게 “미친년” 취급할 수만도 없을 것이다. 위수정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도 하게 된다.
- 1) 이 글은 위수정의 두 권의 소설집 수록작 「은의 세계」 「안개는 두 명」 「풍경과 사랑」 「화양」(『은의 세계』, 문학동네, 2021)과 「아무도」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제인의 허밍」 「우리에게 없는 밤」 「몬스테라 키우기」 「9」 「집」 (『우리에게 없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4)을 두루 읽으며 썼다.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밝힘
- 2) 김형중, 해설 「눈만 내리면 평등한 밤이」, 『우리에게 없는 밤』, p. 362. 이후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밤』 해설’과 쪽수만 밝힘.
- 3) 백지은, 해설 「부정도 탐색도 없이」, 『은의 세계』. 문학동네, p. 320. 이후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은』 해설’과 쪽수만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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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표지를 본다. 정면을 보는 이의 옆얼굴이 먼저 보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있다(무엇이 들어있을까?). 그가 걷는 중인지, 잠시 멈춰 있는지, 혹은 아주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가방과 모자와 같은 색으로 칠해진 검은 눈이 어디/누구/무엇을 보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다섯 편의 희곡을 연달아 읽고 나면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이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갈림길일지도 모르겠다고, 움직임의 여부가 분명치 않은 발 역시 흑백의 세계에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경계를 건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은용 작가의 희곡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를 이루는 다섯 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총 여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 희곡이다) 「세상의 첫 생일」 「우리는 그것을 찾아서」 「엄마, 엄마」 「가을 손님」. 각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문성”과 “아성”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기도 하고, “사람1(A)”처럼 숫자 혹은 알파벳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여자”와 “남자”로 적힐 때도 있으며, (「우리는 첫 생일」의 ‘사람 2’처럼) “아마도 여성”으로 소개될 때도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에 수록된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Metamorlphosis)’의 주인공 설명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스물여덟 살의 에프티엠 트랜스젠더Female to male transgender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열여섯 살 시스젠더 소년으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런 사람.(65쪽) 이은용의 세계에서 인물들이 소개되는 방식은 이처럼 다양하며 세부적이다. 각 이야기에서 인물들이 그려지고 행동하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에프티엠 트랜스젠더이자 아마도 여성이며 하나의 이름 또는 기호를 가진 인물인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이고 여행하는 “아티스트 앤 트랜스젠더”이자 어른이 사라진 세계에서 노동의 주체가 된 십대들이다. 이들은 ‘여성’과 ‘남성’을 이분법으로 가르는 사회에 나뉜 구획들을 끊임없이 월경(越境)한다. 나아가 경계를 나눈 벽에 난 문을 연신 두드린다. 이 소리는 책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고 있다. 넘는 걸음이나 문을 두드리는 손짓 모두 삶에서 잦게 벌어지는 일상적인 ‘동작’이다. 여기에 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계를 넘거나 문을 지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다섯 편의 희곡에서 이러한 ‘동작과 반응’은 장면과 움직임 그리고 수차례의 질문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의 장막 ‘월경’에서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진희는 국경을 지날 때마다 그의 성별에 혼란을 겪는 검색대 직원들을 마주한다. 진희는 독백한다. “그들은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월경하기 위해서는 겨우 이것이 끝이다. 그리고 월경은 농담이 맞으니 웃어도 된다. 웃어라.” 그는 뒤이어 월경의 과정과 그 의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선이 그어져 있고, 그 선은 때로 벽 같아서 그걸 지키는 사람들이 늘 서 있다. 그들은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 국가를 떠나는, 월경하는, 나는 누구인가?”(31쪽) 독백의 마지막 질문은 진희와 만나는 검색대 직원들이 반복하는 질의이자, 이은용의 인물들이자기 자신에게 반복하여 던지는 물음이다. “나는 누구인가?” 현실에서 트랜스젠더에게 반복되는 질문(“너는 누구인가?”)의 주어를 비튼 이 물음을, 인물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거듭 던진다. 이는 그들 앞에 벽으로 우뚝 선 세계를 더듬는 몸짓이기도 하다. 진희의 벗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인 친구2는 “진희야, 자궁이 있는 건 어떤 느낌이니?”(37쪽) 하고 질문함으로써 그가 겪지 못한 신체, 벽으로서의 세상이 “들어올 수 없다”라고 주장하던 공간을 알아가고자 한다. 「세상의 첫 생일」 속 사람1의 “왜 스무 살이 넘는 어른들만 없앤 건데?”(141쪽)라는 물음은 그들의 세상이 겪은 중대한 ‘변신’(스무 살이 넘은 어른들의 증발)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에프티엠 트랜스젠더 작가인 준영이 꿈속에서 스무 살의 엄마 희수와 서로 “몇 살이야?”(161쪽) 하고 묻는 과정은 일시적으로 교차된 ‘이해의 시간대’의 주파수를 조정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의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로써 세계가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들’을제안한다. 한 가지 형태와 성질로 고정된 세계에 던져진 질문은 흑백으로 명확히 구분된 세계의 표피를 관통하여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심층까지 파고든다. 바로 이 과정에서 금과 균열은 생겨난다. 얼핏 ‘균열’은 ‘경계’와 비슷한 선(lin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면의 선으로 이뤄진 경계와 달리, 균열은 다양한 방향의 선과 층층의 면으로 만들어져 있다. 여러 갈래로 나뉜 선과 면은 공간을 형성한다. 이 공간을 ‘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틈의 형태와 성질은 다양하다. 계속 두드린 끝에 열린 문틈, 수많은 발자국이 만든 조그만 골,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구분지(너무도 명확히 나뉘어 있기에 오히려 한 덩어리로 보이는 땅)를 어그러뜨린 궤적 역시 틈으로 볼 수 있다. 실제의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틈은 많은 가능성을 품은 장소다. 환경의 제한으로 미처 움트지 못했던 몸이 틈바구니로 자라나거나, 새로운 장소로 통하는 사잇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이은용의 언어는 종이에 인쇄된 활자이자 무대에서의 상연을 위한 텍스트이면서, 세계의 변신을 불러오는 움직임이 된다. ○ 덧붙이는 말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고(故) 이은용 극작가가 남긴 다섯 편의 작품을 한데 묶은 희곡집이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2020년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초연으로 그해 한국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과 제57회 동아연극상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2022년에는 백상예술대상의 ‘백상연극상’을 수상했다. 2019년 신작희곡페스티벌의 당선 소감에서 이은용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첫 작품은 절대 정체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체성은 내 삶의 한 부분일 뿐, 나를 결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이 늘 그렇듯 존재하는 것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일이지요. 정체성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정체성을 떼어놓고 삶을 이야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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