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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 2024년 봄호(제145호)

비평 게임 설계하기 :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최다영 문학평론

202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 비평포럼이 있다.

비평 게임 설계하기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1)

 

1. ‘쓰기를 읽는 일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취미를 묻는 질문에 어느 팀 스포츠를 말하면 하는 것보는 것중 무엇을 더 선호하느냐는 질문이 다시 돌아온다. 그때마다 (현장 관중이 아닌) 화면 너머로 경기를 보는 관람자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즐거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리 주어진 정보와 90분 내내 새롭게 축적되는 정보 및 변수 들을 바탕으로 매초마다 변화하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예측과 복기가 즉각적으로 입력된다. 경기가 완결된 이후의 복기 과정은 나만의 의미화에 따라 타임라인을 구성하게 한다. 나는 옵저버 나에 의해 재편된 경기를 읽는다. 물론 이는 경기에 직접 참가한 플레이어가 경기를 복기하면서 행위적 서사를 기입하는 경우와는 (일정 부분 겹친다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간다.

이동휘는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 이론에서 더 나아가 행위적 서사를 미적인 분투형 게임의 독자적인 특질로 제안한다. 그는 노엘 캐럴이 언급한 예술 작품 비평의 구성 요소 중 특별히 기술(description)에 집중하는데, 그에 따르면 장기적 행위자의 게임 감상이 미적으로 형성되고 공유되는 과정의 핵심은 감상 단계에서의 게임 경험 기술에 있으며 플레이를 기술하는 일은 반드시 서사로 이루어진다.2) 행위자가 자신의 게임 경험을 복기하는(review) 과정은 반드시 특정한 환경제약속에서의 목표추구라는 서사의 구조를 띠고,3) 플레이어이자 감상자인 자신을 인물이라는 구성 요소로 더함으로써 서사의 요건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동휘는 게임 플레이의 경험이 서사화의 경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게임 경험은 행위적 서사로 기술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행위적 서사를 통해 예술 경험을 기술하는 장르”4)는 게임이 유일한 걸까. 나는 감상을 통한 행위적 서사의 산출이 시집을 읽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권의 기획으로 묶인 텍스트들의 언어 배치를 게임 디자인에 준하는 미적 인공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시집 읽기의 한 목표를 내적 체계의 구성으로 설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러한 작업은 각 행위자들이 지형지물을 활용해 서로 다른 시나리오를 생성하는 일로 이어지는데, 이때 독자의 수만큼이나 무수한 시나리오의 발생이 가능하다. 시집의 독자는 읽는 동시에 (놀이를) 쓴다.5)

물론 이는 단순히 시적 요소들의 미적 조화를 감상하는 것과는 변별된다. 내적 논리의 결여를 텍스트 외부의 상상력으로 메우거나 독자의 참여로 원 텍스트의 전개에 영향을 가하는 하이퍼 서사와도 전연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시인의 실제의도를 파악하는 것과도 또한 무관하다. 오히려 쓰기 과정에서의 내적 필연성과 논리를 사후적으로 구성해보는 것에 가까운 이러한 작업을 통해 텍스트의 의도는 해석하거나 알아맞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창조하고 생성하는 것이 된다. 더 나아가 각자가 제시하는 텍스트의 개별성과 서로 다른 문학적 지향들이 만나 경합할 수 있다면, 해당 텍스트는 단일한 해석에 구획되지 않고 다층적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텍스트를 재편해보는 즐거움은 내게 비평 쓰기를 촉발하게 한 중요한 심적 계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쓰기를 재편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미적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독해의 제안은 시를 읽는 다양한 즐거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평의 역할을 확장하는 일과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비판은 넓은 의미로 분화되고 확장되면서 여러 생산적인 비평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편의적으로 분절된 이분법적 준거에의 귀속을 경계하고, 같은 논의의 반복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비판적 읽기의 역량과 그 즐거움을 깊이 탐구할 수 있도록 독해의 방식들을 다양화하는 것이 지금 비평이 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일 수 있다.

    시를 읽는 방법들이 더 많이 제시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미 어떠한 경향의 시집들은 독자적인 규칙과 세계관을 갖추고자 스스로를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게임을 비롯해 타 장르의 속성을 차용하던 것이 이전의 경향성이었다면, 요즘의 풍경은 시집 자체가 하나의 출입 가능한 가상 세계관이 되기를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창작 및 기획에서 목적이 되는 것은 보다 시 쓰기자체라 할 수 있으므로, ‘를 목적에 두고 읽는 것보다 유효한 독해의 방법이 제시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기능적 장치로서의 사랑과 익명의 시 쓰기

 

이러한 생각은 멸망법을 읽으며 더욱 강화되었다. 멸망법의 시적 전략은 추상성과 비현실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별 구체성을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것에 집중된 것처럼 보인다. “온통 새하얀 벌판”(「팩맨」)이라는 장소가 대표하듯 이 표백된 세계에서 묘사와 디테일은 극도로 제한되고, 비의적 진술은 빈번히 등장한다. 또한 가장 큰”(「플라스틱 아일랜드」), ‘모든’, “아주//”(「여름에 꾼 꿈」), ‘마지막’, ‘영원히등 최상급 수사와 의미화 개념이 큰 추상어가 거의 모든 시에 동원된다. ‘사람들에 대한 묘사 또한 아무도’, ‘누구나’, ‘누군가등의 익명의 집단 군중으로 처리되는데, 이들은 얼굴 또한 부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현실감 주조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아마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이다. 이 아름다움의 실체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은 반면, 비현실성의 의도가 개입되는 대목에서 어김없이 아름다운이라는 관형어가 등장한다. ‘사랑이 사용되는 용례도 마찬가지다. 시집 내 행위자들의 명분은 사랑이라는 추상으로 집약된다. 사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자 절대로 끝나지 않”(「세계법」)는 절대적인 가치로 제시되지만, 그러한 언명을 통해 사랑을 수식할 최상급 수사들을 불러내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해 보인다. ‘사랑이 마치 기능적 어휘처럼 쓰이는 것이다. 이처럼 멸망법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추상어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그 단어 자체가 내포하리라 여겨지는 비의적 속성에 맡겨져 있다. 이 세계관에 익명의 누구든 새로 기입할 수 있도록 어휘 사용을 제한한 것인지, “굼뜬”(「테라포밍」) 창조주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비유하기 위함인지, 「스카이다이빙에서 화자의 고백처럼 상상력의 곤혹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경향성은 이미 동시대 시의 한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 경향이 강한 이러한 시들을 잠정적으로 가속류라고 칭하자. 그런데 이들에게 앞서 마련된 어떤 기준을 성급하게 적용하여 구획과 할당의 영역으로 곧장 넘어간다면 지금 시의 중요한 한 징후를 통해 유의미한 논의를 이끌어낼 여지는 축소되고 말 것이다. 고선경의 시가 암시하듯 이미 동시대인들은 채널을 바꾸면”(「무대륙」) 리셋이 가능한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면서 이전의 인간들과는 다른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 위치에서 보다 많은 대화를 가능케 할 생산적인 질문을 먼저 모색해보는 게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판단을 유보하고 질문을 전환해보자. 이러한 시 쓰기는 왜 필요했으며 시인에게 어떤 유용을 주는가? 이를 통해 시인은 어떤 효과를 도모하고 있는가? 이러한 시 쓰기를 통해 발생했을 즐거움을 독자는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전유할 수 있을까? 앞서 살펴봤듯, 한 권의 시집을 미적 인공물로 가정하고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중층적 행위적 서사를 축조해보는 것이 시를 읽는 유의미한 즐거움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은 발생 가능한 무수한 시나리오 중 나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 ‘희재의 세계를 보존하는 파수꾼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그 내부의 또 다른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하 멸살법」)이 현실화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이를 시집 제목으로 차용한 것에서부터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듯, 변혜지의 멸망법 또한 세계를 완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 창작 노동자 의 시점과 그 신이 쓴 소설 내부 화자의 시점으로 구분된다. 구체적으로 을 경계로 그 안과 밖이 구획되는데,6) 이때 창밖의 게임 아바타 는 미리 입력된 행위를 매크로처럼 연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는 언급이 빈번히 등장한다. 그리고 아바타 화자는 다시 의 안과 밖으로 구분되는데, 문안에는 소분”(「테라포밍」)되어 비상용으로 보관된 복수의 들이 존재하고, 문밖에서 실패하면 다시 문안으로 회귀한다.(「예쁜꼬마선충」)

전독시의 세계관이 그러하듯 멸망법에서도 게임의 회차가 반복되는데, 매 게임의 시연 장면이라 할 수 있는 꿈속을 감상하는 옵저버(observer)로서의 또한 이 시집에 중층적 시선을 드리운다. 그 각각의 층위는 구분되지 않도록 의도되어 있지만, 엄밀히 각각 다른 층위에서 의 시점들이 교차되며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목표는 이번에는’ “완벽한 엔딩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생(게임)’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이번에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손가락」)(「모자의 일」) 그리하여 사랑을 다시 쟁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스템을 초기화하고, 아바타인 는 이미 곤죽이된 상태이지만 다시 태어”(「손가락」)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 게임을 리셋하여 다시 시작할 기능적 구실을 사랑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완성하였다는 서술어로부터 시작되는 다음 인용 시는 이 세계관의 목적이 달성되어 이상적인 결말로서 사랑이 성사된 모습을 보여준다.



무릎을 굽혀 희재의 운동화를 벗기고 씻지 않은 몸을 침대에 눕힐 것이다. 축축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 희재의 배를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

 

나는 밖으로 나갈 것이다.

 

잠시 후 누군가 깨어날 것이다. 깨어난 사람의 눈이 깜빡일 때마다 카메라 속의 풍경이 함께 명멸할 것이다. 어둑한 천장이 서서히 밝아질 것이다.

 

그러니까 어서 눈을 감아.

 

침 흘리기를 멈추지 못하는 파수꾼이 문 앞에 엎드려 있다. 나는 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려다 말고, 34평방미터의 세계를 잠근다.

 

그 속에서 희재는 내내 안전할 것이다.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부분


여기서 는 희재가 잠들자 희재가 속해 있는 공간 자체를 닫고 그 앞을 파수꾼 개가 지키게 한다.7) 단언에 가까운 진술인 마지막 문장은 마냥 기능적 목적만 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어느 정도 해명해준다. 멸망법에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시선 안에 가두어서 보존하는 것이다. “놀이이지메”(「플라스틱 아일랜드」)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다소 섬뜩하더라도 오직 한 명에게만 집중된 관심 말이다.(「희박하게 끓어오르는 물」, 「브릭하우스」) 이러한 파수(把守)”(「세계법」)가 이 세계관에서는 사랑이자 놀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멸살법차용의 연장에서, 멸망법은 이 시집의 독자일 무수한 김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김독자중 하나로서 멸망법을 읽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어느 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시집이 현실화될 일을 대비하기?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보며 이 시집을 가지고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독자디지털 사이보그이면서 크리에이터이자 스트리머”8)가 되었던 것처럼, 스스로 플레이를 연출하면서 독자가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 일이다.

 

4. 버블 기분

 

    『소다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엉뚱한 상상이 자주 끼어든다는 것이다. 고선경은 주로 어느 공간에서 바라보이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곳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단상이나 공상을 동시에 쓴다. 그리하여 단문의 묘사와 연상이 짧은 행 단위로 빈번히 교차 전환된다. 가령 절반만 빛바랜 이파리/물웅덩이에 둥둥/컨버스는 역시 로우보다 하이//밟으면/이파리가 구겨지고 구름이 조각난다”(「진짜로 끝나버렸어 여름!」)는 짧은 단락에서 화자는 자신이 클로즈업한 장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단상을 빠르게 옮겨간다. 그리고 수시로 틈입하는 상상은 주로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뭐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바람에서 비롯된다.


음식이 나오기 전

연분홍색 다이얼 전화기를 빤히 쳐다봤어

나는 가끔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상상을 해

조용하고 신비한

 

(…)

 

케첩 묻은 앞치마를 두른

네 정체가 실은 스파이였으면 좋겠어

메론소다에 이상한 가루약을 넣었으면

 

(…)

 

음악이 배경이 될 수 있다면

생각도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속에서

생각을 스파게티처럼 포크로 돌돌 감는다

 

그리고 우리는 스파이답게 몰래 눈빛을 주고받지

짜이찌엔…… 워시환니

 

우리가 지금은 살아 있어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죽은 사람 노래를

다 듣네

 

생각은 불어서

포크 끝에서 툭툭 끊어진다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을까

신주쿠 시먼딩 킷사텐……

 

아이스크림이 천천히 가라앉는

메론소다의 기분

―「메론소다와 나폴리탄부분


이때 생각이 파스타처럼 감아 먹을 수 있는 물성으로 제시되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생각은 마실 수 있는 것으로 제시되기도 하고, 생각이 너무도 시끄러”(「츠키에게는」)워서 현실의 청각을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화자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화자를 쓰다듬”(「샤워젤과 소다수」)는 것 또한 생각이다. 그런가 하면 메론소다의 기분”(「메론소다와 나폴리탄」)과 같이 기분이 감각적 이미지로 대신 제시되는 것 또한 소다수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체육대회가 끝난 다음날의 기분”(「여름 오후의 슬러시」)도 마찬가지인데, 이처럼 고선경은 경험한 감각 자체를 기분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감정을 이미지로 느낀다기보다, 기분이라는 것 자체가 그날의 이미지에 각인된 감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지 바람만으로도 감각을 환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9)

    한편 멸망법에서 기능적 역할을 겸하던 것이 사랑이라는 시어였다면, 소다수에서는 빗물이 끓는 이미지가 강박적으로 돌출하면서 이미지의 각운을 형성하는 양상을 눈여겨볼 만하다. 끓는 빗물이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리며 몰아치거나, 빗속에 피워둔 향이 꺼지지 않거나, 불타는 나무 위로 비가 내리는 이미지 등은 모두 그 변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가능의 이미지들은 시부야 취향과 일상 추구미’,10) ‘킹받는 밈과 시시껄렁한 농담, 색색의 디저트, 향기와 맛으로 대표되는 감각 묘사 사이로 돌연 나타나 이 세계의 혈당을 적절히 낮추는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고선경의 개인적 이미지는 밝은 산책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듯 자기 자신을 파괴해버리고 싶은 충동과 긴밀히 이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인지 소다수에 수록된 여러 시에서 죽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고선경의 개복치화자들은 툭하면 죽고, 또 그 죽음을 희화화한다. “어디서든/간절하게 살고 싶진 않”(「파르코백화점이 보이는 시부야 카페에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수정과 세리」) 만들고자 하는 심적 동기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러한 모습은 세계를 구할 영웅의 운명”(「무대륙」)이라는 일시적 행위성으로부터 일부러 이탈하여 사냥대신 다른 모험가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플레이어의 형상에서도 발견된다.11)

    어쩌면 이는 고선경에게 사랑인 것과도 긴밀히 연동되는 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혜지에게 사랑이 멸균 지대를 만들어 대상을 보존하고 지켜보는 것이었다면 고선경에게 사랑은 뒤엉켜 정체가 불분명한 여러 기분의 갈래들을 섬세하게 더 잘 구별해”(「사랑의 달인)」내는 능력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서로의 취향에 감염되어 뒤섞이고 싶은 마음이다.(「사이버 시옷시옷」) 이러한 양가성과 소통에의 지향을 필연적인 사랑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가 감상 활동을 통해 생성하게 될 서사화 과정 또한 그 사랑의 구체성을 직접 기술해보는 경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우리가 궁금한 건 더 재미있게 놀 방법”(「우주 달팽이 정거장」)일 뿐이다.
  • 1) 이하 본문에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멸망법으로, 수록작인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마침내 희재를 위한 세계를」, 「하늘과 땅 사이에 뭐가 있더라?」는 각각 손가락」, 「멸망법」, 「세계법」, 「희재계」, 「하늘과 땅으로, 샤워젤과 소다수의 경우 소다수로 표기한다.
  • 2) 이동휘, 「게임, 서사, 감상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이전과 이후」,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p.106.
  • 3) 같은 쪽.
  • 4) 같은 글, p.107.
  • 5) 이때 게임의 목표는 서사 창안이기 때문에 행위적 서사는 중층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표면적인 서사에서 인물의 위치에 놓이는 것은 시집의 독자이지만, 내부 서사에서는 화자()’인물로 놓인다.
  • 6) 한편 희재가 창조물이면서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모습은 이 내부 세계가 또다시 창작자와 창조물들로 중층화되어 있음을 암시한다.(「Enter the World」) 이는 전독시김독자의 독자이면서 후원자인 성좌의 존재를 가정한 대표적인 성좌물임을 떠올리게 한다. 독자이자 크리에이터의 관찰 구도가 무한 소급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 7) 이 시에서는 황인찬의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 오마주가 두드러진다. 「오수의 변주처럼 보일 수 있는 요인들을 적극 활용하는 희재계외에도, 「하늘과 땅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하기 위해 생각을 개로 만들어버리는 모습은 그 아이를 개로 만들고 싶어서 나는 쓰기 시작했다오수의 시구를 떠올리게 한다. 또 다른 시에서는 에반게리온의 세카이계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는데, “여러 장르 요소들이 결합한 키메라전독시와 마찬가지로, 변혜지의 시 또한 동시대 시의 주요 모티프와 웹소설 상품미학의 우세종을 적극 차용하여 키메라-가 되기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전독시에 대한 분석은 다음을 참고. 유인혁, 「사랑의 사이보그: 한국 웹소설에 나타난 디지털 사이보그와 친밀성 자본의 상상력」, 『현대비평』 2021년 가을호, pp. 65~66. 키메라의 목적은 유기체 형성으로 응집된다는 점에서 패스티시나 접붙이기와는 다르다. 『멸망법은 가속류이면서 차용해온 조직들로 자체적인 세계관을 축조하는 가속류-키메라인 셈인데, 이는 뒤이어 살펴볼 고선경과는 변별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 8) 유인혁, 같은 글, pp.70, 72.
  • 9) 온천에 가고 싶다/한여름에 그렇게 말하니까 쪄 죽을 것 같은/더위가 입속까지 밀려들어오는구나 열대야/열대야니까/노상에서 과자 한 봉지 펼쳐놓고 캔맥주를 마신다”(「연장전」)
  • 10) 내 파란 담뱃갑, 투명한 뿔테안경, 외국어가 적힌 티셔츠, 절간 냄새, 팥빙수 모양 핸드폰 고리, 처피 뱅, 빌어먹을”(「일요일 오전의 짜파게티」)
  • 11) 시의 배경은 RPG 메이플스토리의 수중맵 아쿠아리움이다. 이 게임에서 사냥을 하지 않으면 경험치를 쌓지 못해 다음 레벨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같은 몬스터를 수천 마리씩 사냥하는 노가다 퀘스트를 완수해야 하지만, 이 플레이어 화자는 몬스터가 귀여워서 죽이지 못하고 고민에 빠진다. “이봐, 몬스터/너에게도 엄마가 있나?”(「몬스터의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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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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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영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 김종연 시집 『검은 양 세기』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최다영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월간 현대시 최다영 나희덕김종연리뷰 2025
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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