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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여름호(제119호)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최다영 문학평론

202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 비평포럼이 있다.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1)

 

1

 

유사하거나 상이한 시적 흐름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시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 기획은, 언뜻 십여 년 전 제출되었던 어떤 요청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파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일련의 무리 짓기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인들의 개별 작업에 대한 정밀한 조명과 각 각의 시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2) 그렇다면 옹호에서든 비판에서든 최근 비평장에서 텍스트 분석의 과도한 천착이 종종 거론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지난 십여 년 이상 성실히 이행되어온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때와 지금의 요청 모두 개별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가치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적 경향을 인접시키거나 떼어놓고 보는 유형화 작업과, 각 시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독해가 결코 대립하는 접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동시대 여러 시적 흐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깊이 있는 독해의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거시적인 연결의 좌표 위에서 개별적인 시세계에 대한 보다 마땅한 해명과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축적된 주요 논의들을 다시 살핌으로써 그간 동시대 시를 읽는 독법이 어떠했는지를 점검하고, 함께 주목해야 할 시적 경향이 무엇인지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2020년대 초를 전후하여 의 중층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음은 주목을 요한다. 주로 기성 시를 다루는 평문에서는 의 중층성이 실제 시인과 내부 발화자의 거리를 좁혀 가상의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 대면 의지로서 긍정되는 한편,3) 신인 시 심사평에서는 지나친 메타적 중층화가 복수의 들 간의 거리를 넓히며 현실 대면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려되어온 것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전자의 경우 메타시의 일반적인 정의와 특별한 변별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5) 후자의 경우 90년대에는 메타시가 현실 인식의 한 중요한 관점이자 방편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6)

그런데 후자의 평가는 박상수가 황인찬과 송승언 등 기성 시인을 분석하면서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기성 시와 신인 시 모두에서 유사한 작법 양식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으며, 투고자들이 기성의 문법을 체화하여 학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 산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시적 경향은 이미 작법 차원을 넘어 동시대 시단의 주류로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어느 정도 보수화된 규범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내적 형식과 조직화 원리에 기인하여 각자 자신의 시를 추동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거나 적절히 자리매김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는 그간 우리 시를 읽는 독법이 주로 시 장르 일반의 보편 가치와 의의, 효용, 그리고 주체의 태도와 관점에 다소 집중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이러한 관점들이 그간 거두어온 성취는 별개로 두더라도, 작법의 차원을 중점에 두었을 때 끌어올릴 만한 긍정적 가치는 분명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화하는 복수적 일인칭에 관한 논의들은 분명 유효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활발한 현상으로 대두했던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가상의 중층적 겹침, 자기동일성의 자가 복제 양상은 상대적으로 조명받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입체적이지도 않고 문학적 진정성도 없는 시들, 각자의 유희에 집중하며 긍정성을 부여하여 길어올릴 만한 근거가 한정적인 시들, 그러나 분명히 활발하게 존재하는 시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호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유사한 작법 의도와 형식적 특성을 공유하는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자적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간 가시화되기 쉽지 않았거나 다른 측면만이 주로 논해졌던 건 아닐까. 그들만의 독특함을 잘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연결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성 시인들에 의해 시의 모범 혹은 당위로 말해지는 덕목들과 투고자들의 시작 경향의 괴리가 나날이 커지는 현상 또한 적절히 읽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상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고 그들의 작법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가 조직화되는 방식과 원리에 주목할 것인데,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가공과 배치를 거쳐 시라는 장르적 호명을 위해 제출되는지, 즉 해당 시인들이 각자 어떠한 경향성과 패턴 속에서 시를 생산해내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편의상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것인데, 가속류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몇몇 시적 흐름을 살펴보며 비교한 뒤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다른 연결점, 가능성과 징후들을 포착하고, 많은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가속류와 어긋나는 상이한 사례들 또한 숙고하고자 한다. 일러두자면 가속류라는 명명 자체는 상찬도 멸칭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도저한 현상이다.

 

2

 

가속류라는 명명은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8) 일군의 시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물론 가속주의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 특히 사이버네틱스9)의 속성에서 차용한 개념이지만,10) 가속주의와는 엄연히 변별된다. 여기서 가속이란 시구를 대량 증식하는 데 적합한 창작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구축한 뒤 반복적인 연쇄에 적합하도록 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지배적인 작법을 기계적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자가 복제 장치로 특화하는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속류는 일반적으로 기교와 수사, 비유와 가공보다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진다.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기에 최적화된 이러한 미니멀리즘 양식은 동어반복과 변주, 메타적 중층화를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작동을 그 연쇄의 요건에 적응시켜야”12) 하는 기계공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문장은 연쇄의 규범을 따르며 서로의 존속을 상호 보완한다. 여기서 시는 치열한 지적 사유의 집약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과 우연의 연쇄적·분산적 배치이다. “문장 하나를 쓴 뒤/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그저 나열”(배시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집요하고도 주된 방법이다. 사전적 정의와 인용도 빈번하게 동원되며 그러한 객관적 문장들의 배치와 나열로 시적 효과가 의도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듯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 또한 자주 활용되며, 이때 시적 공간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13)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주체는 고유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사고하고 행위한다.14) 또 한정적인 언어의 가용 범위 내에서 있다/없다의 진술 구조가 자주 활용되는 가운데 돌연 끼어드는 판단 혹은 선언과 단발적 감정 표출에 의해 복합적 사고로의 이행은 빈번히 차단된다.

과거에 메타시가 내면 탐구를 위한 현대적 장치로 일컬어지던 것과 달리, 주로 익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서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가속류는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들이 자주 익명을 표방하거나 욕망, 주체성의 의지가 없으며 일원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시인의 본래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무관하게이러한 작법이 기계적 효율성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사유 습관을 추방”15)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통합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분할된 데이터이자 가분체16)로서 존재하는 동시대인들의 실존 감각과 빈번히 분절·재배치되는 사고 구조를 대변하는 시작 경향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체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그들에게 주체라는 자리는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이 된다.

2022년 하반기에 출간된 배시은의 소공포는 이러한 가속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 시집은 주로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가속의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전의 한 구절을 옮긴 듯한 인용도 빈번히 동원된다(「참가시은계목」 「해상 물류」). 무엇보다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과 그 변주인데, “짐을 풀자/짐은 풀린다//(……)//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칫솔」)와 같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은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마는 하나면 된다.//웬만한 건 다 하나면 되듯이.//무언가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가고. 그것을 바람과 비슷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바람은 아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먹는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먹는다.//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많은   미래를   상상하면   미래는   그저   그것들     하나에   그친다.//잠시 생각했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쳐서/생각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익월에 다시는/먹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식의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친/생각은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그만큼 흠 잡을 데 없다.//이것을  이것으로  바꿔 주세요.//결정하면서.//도마는 하나면 된다./촛불이 하나면 충분함과 같다.

― 「익익월전문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어떤 인간이 썼다. 나는 이제/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쓰지 않는다, 그냥 인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네. 그냥 인간/인간 대신에 은점토 생각을 한다. 반질반질한. 역동성 있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한 인간과. 그 인간과 닮게 닮아 가는 인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인간. 그냥 인간. 은점토에 대해 평생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인간. 그게 뭐였더라

— 「은점토중에서

 

위 시 또한 주제 문장의 반복과 변주, 천착한 단어의 동어반복을 중핵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지시 대상이 생략된 채 빈번히 동원되는 지시사가 지시의 모호성을 의도하는 한편으로 소공포」(72)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이 융해되어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듯 단일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중앙 집중화적 지향도 눈에 띈다.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얼핏 기술자본이 꿈꾸는 세계오토피아”17)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그 생각의 내용은 계속 부재 상태에 머무른다(「역소원」 「해상 물류」). 그런가 하면 평균자유행정에서 그려지는 독특한 NPC 주체는 게임 내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실이 곧 게임과 다름없는 지금 사회에서 미리 정해진 특정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못하는 존재”18)인 가분체에 대한 통렬한 비유를 보여준다.

한편 김뉘연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한다. 이때 는 놀이나 어떤 수행의 흔적, 우연적 배치의 잔해로 인식되며, 따라서 시쓰기자체가 보다 우위에 선다. 독특한 배치와 조합에 의해 시적효과가 의도되는 가운데, 그러한 언어를 전유해보는 경험 자체가 중점에 놓이는 것이다.

 

계정에 접속해 드라이브를 연다. 왼쪽 상단의 새로 만들기를 누르고, ‘문서오른쪽 끝에 위치한 기호에 마우스 커서를 올린다. ‘빈 문서템플릿이 펼쳐진다. ‘빈 문서를 누른다./‘제목 없는 문서생성./생성된 페이지 왼쪽 상단에 위치 한 기호에 커서를 올린다. ‘문서 개요 표시’. 눌러 본다. ‘요약개요가 펼쳐진다./(……)/적혀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첫 행으로 삼는다./적혀 있으면 서 드러나 있기도 한 문장은 괄호로 묶어 뒤이은 행에 둔다.//여기에 문서 요약 입력./(문서에 추가한 제목이 여기 표시됩니다.)

— 「범례 설명」(15) 중에서

네 줄 띄고/계정에 띄고 접속해 띄고 드라이브를 띄고 연다 마침표 띄고 왼쪽 띄고 상단의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새로 띄고 만들기 작은따옴표 닫고를 띄고 누르고 쉼표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문서 작은따옴표 닫고 띄고 오른쪽 띄고 끝에 띄고 위치한 띄고 기호에 띄고 마우스 띄고 커서를 띄고 올린다

— 「범례 설명」(16~17) 중에서

 

이러한 김뉘연의 시는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 자체를 지면에 그대로 옮겨 언어라는 사물 자체를 전시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물질적 감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이한 층위들의 언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전면화된다. 강보원에 따르면 이러한 김뉘연의 작업은 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되며,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장소이지만 그 무엇도 독점적 지위를 점유할 수는 없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획득한다.19) 

 

3

 

배시은이 가속류 일반의 기본 원리와 전형성을 대표한다면, 성다영은 그 심화된 양상으로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구축한 자동 장치는 시를 무한히 늘려나가기에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을 시사한다. 성다영은 빈번한 행갈이를 통해 주제적 측면에서 짧은 단위의 교체를 의도하고 일관된 주제로의 응집을 차단하려 한다.

성다영의 빈번한 동어반복 활용은 배시은과 마찬가지로 사로잡혀서 반복”(「다중 슬픔」)하는 작법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다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문의 절합 원리에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내적 논리의 구축에 대한 반감에 근간을 둔다. 타의에 의해 존재론적 승인이 좌우되거나 주관적으로 변용되는 것, 인위성을 적극 거부하고 불멸이 아닌 유한성이 인간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성다영의 시는 시쓰기와 관련된 메타적 발화, 인간 예외주의와 인간 범주 내 위계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 비판,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서로 다른 대주제, 관찰이나 건조한 감정 진술 등이 차례로 발언권을 넘겨받듯 한 편의 시 내에서 위계 없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전면화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20) 그렇기에 낯선 문장들이 인과 없이 수시로 틈입하면서 가속적 몽타주의 우연적인 배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박제/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새롭지 않은 상상/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등으로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발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여기에 뭔가 있어/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오해하고 싶지 않아/그가 둘러본다/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나는 유기되었다/쓸모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원근법/이미지가 갇혔다/나는 나에 갇혔다//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창문이 없다/창문을 연다

― 「행운은 여기까지중에서

 

태초에 은유가 있었다/평생에 나는 개연성이 없다/내 생각은 개연성이 없다/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과거형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여기,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태도는 성실하다/감정은 단순하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거의 틀리다/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당신은 누구십니까?/느슨한 언어/느슨한 상상/느슨한 시나리오/나는 나다/나는 사이에 있다/어딘가에 가입할 수 없다/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시다/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피부전문

 

이러한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를 통해 형성되는 무작위적이고 불연속적인 조합은 당초에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련의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의미화의 통일을 차단하기 위해 유사성의 극단적인 배제가 시행되는 아래 역설적으로 사고 구획의 코드화된 패턴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주제를 병치하는 성다영의 작업은 서로 다른 연상이 어떠한 직관의 회로를 거쳐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코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수사를 제거한 객관적 진술, 메타적 중층화를 주로 활용하는 시적 경향들은 언뜻 가속류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속류와 변별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단선적 논리의 증식이 아니라 중첩적 논리를 구축하여 시선의 다층화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방향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들도 물론 데이터 백업 과 복구의 일상화 같은 기계 미디어 장치의 속성을 반영하지만, 무의식에 접목된 것과 작법의 방식으로 가공 방식을 차용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차라리 가속의 원리를 여러 겹으로 조작하여 모호성의 패턴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가령 한재범은 가 아닌 다른 의 중첩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재범은 시간이나 공간의 격차를 두고 다층적인 차원들을 도입함으로써 시공간의 여러 층위를 혼재시키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 논리 확충과 그에 따른 시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상의 절벽을 패러디한 커피는 검다에서 활용되는 다층의 모호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지시 대상과 언어의 가능한 다의적 관계를 폭넓게 확장한다.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커피는 검다중에서

 

위 시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자 화자의 시선이 드리우는 가운데, 첫 두 문장은 검어서 커피의 안이 안 보이는 것으로도, 화자 A와 화자 B의 발화가 교차로 제시되고 있어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검은색의 속성에 의해 커피와 밤과 잠이 연결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커피 안인지 방안인지 알 수 없다. 보거나 보지 못하는 화자로 볼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이어지는 연들에서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자라는 문자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제시되는 모습은 문자를 보낸 화자와 받은 화자의 모호성을 유도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분절된 시간의 비순차적 이어붙임으로 읽을 수도, 꿈속의 중첩적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커피, , 잠이 공유하는 검은색의 가시성과 어미의 혼란을 통해 논리적 중첩 양상을 구축한 것이다. 「기호와 기후에서도 마찬가지로 빗소리의 불규칙한 리듬과 편안함이 연결되어 불규칙한 심박동의 불편함이 파생되고 불성실과 아픔이 연결된다. 그리고 이거나 으로 중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스위치가 달렸으면 좋겠다고/생각했다를 받는 게 심장이거나 이 된다. 이처럼 한재범의 시에서 동어반복의 유희처럼 보이는 것들을 대개 환유의 의도된 논리를 따르며 누적된 언술들의 논리적 적층으로 인해 모호함과 중층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평평한 사유를 통해 수평의 단선적 논리를 지향하는 가속류와는 변별된다.

 

4

 

가속류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이들이 처음에 어떠한 의도로 자기만의 자동적 작법을 개발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극도의 추상성과 단선적 논리로의 산발적 귀결, 현상을 관찰하는 단문의 서술과 사유의 생략 혹은 압축, 시공간의 비약은 가속의 원리에 적합하도록 동시대인들을 훈육하는 미디어 장치의 작동 원리와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즉 가속류는 각 시인의 창작 매크로 장치라는 현상을 통해 읽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므로, 창작자의 원래 의도나 수용자의 감상 지연 효과 등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논해져야 한다.

이러한 가속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 어쩌면 가속류는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은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이 가속류 일반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가라는 점은 다소 비판점을 남긴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장피에르 뒤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물화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거나 인간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데 모두 공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속류의 의의는 해석 차원에서 부여되는 의의이지 시 자체가 내장한 속성으로 인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같은 논리에 대한 정반대 해석에도 동일하게 무력할 수 있다. 의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근거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속류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자 징후로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가속류 자체의 어떠함보다는 특정한 경향성이 동시대 작법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상 자체이다. 서두에서 살펴봤듯 몇 년째 심사평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개입의 의지가 축소되는 현상에 대한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평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민이 해를 거듭하며 심화되는 와중에도 그러한 시의 창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비단 가속류가 아니라도 특정한 경향이 우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경합·견제되기보다는 다양성과 활발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진단의 전제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보편이라 가정되는) 다른 시대의 외래 담론보다도, 문학이란 본래 무엇인가 묻고 해명하는 제각각의 정의보다도, 제도나 관행 등을 포함한 우리 문학사의 특수성 위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현실 대면에의 복권을 강조하기 전에, 현실 대면은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현실이라 상정된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는 않을까. 이미 가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지금 시대에서 현실이라 정의되는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속류는 어떠한 조건과 배경에서 동시대 시단의 주류적인 목소리가 되고 많은 시 독자와 투고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가속류는 왜 많은 시 창작자들에게 즐거움과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21) 또 가속류가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앞으로 한국시의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까. 아주 많은 길을 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과, 아무 길도 없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언뜻 유사해 보이나 실상 아주 다른지도 모른다.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 인용시 시집 제목은 생략한다.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성다영, 『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 2) 가령 조연정은 당시 비평가의 임무를 개별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후광 또는 굴레를 떼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그들을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이라 말한다. 조연정, 「가까스로 가능한, 진실의 세계—‘미래파의 두번째 시집에 대하여」(2009), 『만짐의 시간』, 문학동네, 2013, 215. 이러한 필요성은 이듬해 작성된 글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미래파의 출현 이후 새로운 감수성이 발견되고 독법이 확장된 것을 긍정하면서도 미세하게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차별적 특징들이 하나의 이름 안에서 무화되거나, 같은 무리로 호명되지 못한 어떤 시인들은 제대로 읽히지 못하거나, 성숙한 실험의 난해함과 미숙한 실험의 난감함이 섬세히 구분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이 도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당시 미래파라는 거대한 시대적 자장으로부터 개별 시세계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연정, 「‘라는 정념, ‘라는 추상박희수와 주하림의 시를 읽으며」(2010), 같은 책, 305.
  • 3) 는 주로 조대한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 실제 작가의 목소리가 시 내부에 개입하여 중층적 레이어를 이루는 현상을 가리켜 2000년대에 극단으로 멀어졌던 두 일인칭이 2010년대에 다시 좁혀진 것이라 진단한다. 이처럼 그는 2000년대의 성취이자 이후 한계로 제기되었던 내용의 구도를 뒤집은 방식으로 동시대 시적 경향의 의의를 도출해내는데, 그렇기에 이를 자기동일성에 구획되는 양상이 아닌 일인칭의 무수한 수행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또 안지영에 따르면 이러한 ‘2010년대적 나2000년대의 혼종적 주체들과는 달리 실제 시인과 완전히 단절되지도, 그렇다고 동일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는다. 안지영, 「‘포스트-’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2010 년대 시에 대한 문학사적 읽기연습」, 『현대비평』 2022년 가을호, 59~60.
  • 4) 최근 심사평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두드러진 활용(황인찬,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67), 세계로의 확장보다는 자기 인식의 되풀이(황인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61), 현실과의 대면 부재(내 향화),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에 기반한 장형화 및 관념성 과잉, 언어의 미니멀리즘(박상수, 「심사평」,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440), “해체를 위한 해체로 보이는 장르 해체의 가속화 경향(신해욱,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321), 산문화, 무의미하고 비유기적인 이미지 더미의 나열(이병률, 「심사평」,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463).
  • 5) 이수명은 메타시를 작품에 시인이라는 외부적 차원이자 현장성을 도입하여 언어의 또다른 층위와 레이어를 상정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수명, 「메타시는 없다」, 『시와세계』 2015년 겨울호, 20~21. 90년대에는 이러한 삼인칭의 활용이 자아 탐구의 구조적 장치로서 주목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김준오는 90년대를 전후하여 삼인칭의 활용이 중요한 징후로 두드러짐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 주자로 이승훈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이나 반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분열된 두 자아 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것을 현대시의 일반적인 양상이라 정의한다. 김준오, 「인칭의 의미론」(1995),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173~174, 182.
  • 6) 물론 전자는 현실과 가상의 접합, 후자는 가상의 중층화 경향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분간이 모호한 그러한 차이보다 두드러지는 건 두 경향 모두 동시대 가장 빈번한 메타 장치인 행위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구도 혹은 그 중첩 구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중 레이어 장치에서의 메타적 발화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현실과 맞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가름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레이어의 활용보다도 주제나 소재 혹은 발화자의 태도에 귀속되는 건 아닌지 하는 추가적인 의문도 든다.
  • 7) 창작자의 사회적 여건, 그가 속한 세대 일반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담론적 수사를 동원하여 시의 사회적 의의와 효용을 열거하는 독법이 과도 해질수록 시와 시인의 역량은 은연중에 무력화된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당위적 모델에 견주어 작품의 결여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 무감으로 치우치기 쉬우며(따라서 당위적 모델에 대한 내부적 틀은 견고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시가 비평적 해석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시보다 시를 치하하는 장식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따라서 상업주의와의 공모도 긴밀해진다). 시가 해석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역량, 시를 읽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채 빠르게 지배 담론의 분류 체계가 적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 8)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 9) 노버트 위너에 의해 창시된 사이버네틱스는 인지과학의 초석으로서 모든 행위자들에 기계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음혹은 생각을 알고리즘에 의해 수행되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당초 위너는 인간 정신의 통제와 기계의 인간화를 강조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극대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1, 2차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흐름은 반인본주의적 근거 또한 제공했다.
  • 10)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대항운동으로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외하기, 탈코드화하기, 추상화하기의 경향을 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에 최적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갱신된 가속주의는 광신적 자본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산출함을 아는 것 위에서 전개된다.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서론」, 『#가속하라가속주의자 독본』,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14~15, 37. 탈자본주의를 위한 탈코드화가 전환기 이전의 가속주의라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과 디지털, 인터넷으로의 포섭을 의도한다. 윤태균, 「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콜리그, 2022. 7. 8.
  • 11) 물론 성다영의 더 명복투명한 얼굴이 다르듯이 한 시인이 매번 유사한 작법만을 반복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 12) 소스타인 베블런, 「기계 과정, 그리고 영리 기업의 자연적 쇠퇴」(1904), 『#가속하라』, 103.
  • 13) 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이유야와 변혜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상화된 자아의 중층적 메타화를 활용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압축과 확장 및 즉각적인 이동과 급전환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원리를 시 내부에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그래픽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의 사고 과정이 창작 주체에게 체화된 양상, 즉 기계 인터페이스 경험이 시적 사유에 동기화된 양상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이유야에게는 스킬을 가동하듯 그런데, 그러자를 전후로 시공간의 빈번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혜지는 의미 단어가 큰 추상어들을 리셋과 재플레이를 위한 기능적 어휘로 사용한다. 이유야, 『일인조』, 파란, 2022;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 14) 가령 김유림은 특정한 맵의 한정된 반경 내에서 이동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화자(와 그 화자의 외부 관찰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한정된 거리만을 이동하도록 설정된 배시은의 평균자유행정NPC 화자나 성다영의 산책-관찰-생각 연속체 화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림, 『별세계』, 창비, 2022.
  • 15)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글, 106.
  • 16) 들뢰즈에 따르면 가분체란 디지털 환경에 의해 생산된 주체로서 파열된 혹은 균열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시작하고 재조직하게 하는 자아 경험을 뜻하며, 이때 경로들은 매순간 새로고침된다”. 앨피 본,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 사회 욕망혁명의 미래』,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 177.
  • 17) 같은 책, 56.
  • 18) 같은 책, 176.
  • 19) 강보원, 「타국에서 펼쳐 든 사전」, 『문서 없는 제목해설, 136~137
  • 20) 투고자, 「은유와 지상명령—『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문학인』 2022년 겨울호, 222.
  • 21) 앞서 박상수가 심사평에서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고 언급한 것은 적은 수고로 시를 쓰기에 특화된 어떤 양식적 문법들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바로 여기서 많은 투고자들이 이를 선호하는 또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가정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가속류와 같은 시쓰기는 시를 생산하는 데 무척 용이한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우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왜 매력적인 상징자본 혹은 안전장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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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월간 현대시 류수연 서윤후나쁘게눈부시기어둠양안다이것은천재의사랑불안 2025
최다영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 나희덕 시집 『시와 물질』, 김종연 시집 『검은 양 세기』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최다영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월간 현대시 최다영 나희덕김종연리뷰 2025
박다솜 말미잘 하는 몸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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