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제119호)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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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하거나 상이한 시적 흐름들과의 관계 속에서 동시대 시의 지형도를 그리고자 하는 이 기획은, 언뜻 십여 년 전 제출되었던 어떤 요청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파’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무렵 일련의 무리 짓기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었고, 그로 인해 시인들의 개별 작업에 대한 정밀한 조명과 각 각의 시적 의의를 해명하는 일이 중요하게 부상했던 것이다.2) 그렇다면 옹호에서든 비판에서든 최근 비평장에서 텍스트 분석의 ‘과도한 천착’이 종종 거론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의 요청이 지난 십여 년 이상 성실히 이행되어온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때와 지금의 요청 모두 개별 시세계에 대한 적절한 가치 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시적 경향을 인접시키거나 떼어놓고 보는 유형화 작업과, 각 시인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독해가 결코 대립하는 접근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제는 동시대 여러 시적 흐름과의 관계성을 고려한 깊이 있는 독해의 필요성 또한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거시적인 연결의 좌표 위에서 개별적인 시세계에 대한 보다 마땅한 해명과 자리매김이 가능할 것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최근까지 축적된 주요 논의들을 다시 살핌으로써 그간 동시대 시를 읽는 독법이 어떠했는지를 점검하고, 함께 주목해야 할 시적 경향이 무엇인지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관련하여 2020년대 초를 전후하여 ‘나’의 중층성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고 있음은 주목을 요한다. 주로 기성 시를 다루는 평문에서는 ‘나’의 중층성이 실제 시인과 내부 발화자의 거리를 좁혀 가상의 허위를 폭로하는 현실 대면 의지로서 긍정되는 한편,3) 신인 시 심사평에서는 지나친 메타적 중층화가 복수의 ‘나’들 간의 거리를 넓히며 현실 대면 의지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으로 우려되어온 것이다.4)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건, 전자의 경우 ‘메타시’의 일반적인 정의와 특별한 변별점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고,5) 후자의 경우 90년대에는 메타시가 현실 인식의 한 중요한 관점이자 방편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6)
그런데 후자의 평가는 박상수가 황인찬과 송승언 등 기성 시인을 분석하면서도 동일하게 언급했던 내용이다. 따라서 기성 시와 신인 시 모두에서 유사한 작법 양식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으며, 투고자들이 기성의 문법을 체화하여 학습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 산문화를 적극 활용하는 시적 경향은 이미 작법 차원을 넘어 동시대 시단의 주류로서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어느 정도 보수화된 규범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들만의 내적 형식과 조직화 원리에 기인하여 각자 자신의 시를 추동하는 방법론을 개발해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시적 경향이 구체적으로 다뤄지거나 적절히 자리매김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는 그간 우리 시를 읽는 독법이 주로 시 장르 일반의 보편 가치와 의의, 효용, 그리고 주체의 태도와 관점에 다소 집중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이러한 관점들이 그간 거두어온 성취는 별개로 두더라도, 작법의 차원을 중점에 두었을 때 끌어올릴 만한 긍정적 가치는 분명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화하는 복수적 일인칭에 관한 논의들은 분명 유효적절한 것이었으나, 그보다 더 활발한 현상으로 대두했던 (현실과 가상이 아니라) 가상의 중층적 겹침, 자기동일성의 자가 복제 양상은 상대적으로 조명받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입체적이지도 않고 문학적 진정성도 없는 시들, 각자의 유희에 집중하며 긍정성을 부여하여 길어올릴 만한 근거가 한정적인 시들, 그러나 분명히 활발하게 존재하는 시들을 어떻게 포착하고 호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유사한 작법 의도와 형식적 특성을 공유하는 시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 독자적인 특질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지만, 그렇기에 그간 가시화되기 쉽지 않았거나 다른 측면만이 주로 논해졌던 건 아닐까. 그들만의 독특함을 잘 해명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과 연결에 대한 고민 없이는, 기성 시인들에 의해 시의 모범 혹은 당위로 말해지는 덕목들과 투고자들의 시작 경향의 괴리가 나날이 커지는 현상 또한 적절히 읽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현상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고 그들의 작법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시가 조직화되는 방식과 원리에 주목할 것인데, 한 편의 텍스트가 어떠한 언어적 가공과 배치를 거쳐 시라는 장르적 호명을 위해 제출되는지, 즉 해당 시인들이 각자 어떠한 경향성과 패턴 속에서 시를 생산해내는지를 세부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편의상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것인데, 가속류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몇몇 시적 흐름을 살펴보며 비교한 뒤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다른 연결점, 가능성과 징후들을 포착하고, 많은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가속류와 어긋나는 상이한 사례들 또한 숙고하고자 한다. 일러두자면 가속류라는 명명 자체는 상찬도 멸칭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도저한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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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류라는 명명은 “극도의 추상으로 응집되며 단선적 논리를 변주하면서 증식하는”8) 일군의 시적 경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는 물론 가속주의와 관련된 여러 논의들, 특히 사이버네틱스9)의 속성에서 차용한 개념이지만,10) 가속주의와는 엄연히 변별된다. 여기서 가속이란 시구를 대량 증식하는 데 적합한 창작 방법론을 효율적으로 구축한 뒤 반복적인 연쇄에 적합하도록 자 동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자면 각자의 지배적인 작법을 기계적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자가 복제 장치로 특화하는 이들을 가속류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11) 이는 창작 주체의 사고 및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이 기계나 인공지능의 데이터 집계, 처리, 산출 방식에 동기화되어 기계적 규율화로 추상화되고 단일화되는 무의식적 경향을 반영한다.
이러한 가속류는 일반적으로 기교와 수사, 비유와 가공보다는 객관적·사실적인 단문의 진술 활용이 두드러진다. 특정 패턴을 자동적으로 반복하기에 최적화된 이러한 미니멀리즘 양식은 동어반복과 변주, 메타적 중층화를 무한정 이어나갈 수 있다. “자신의 작동을 그 연쇄의 요건에 적응시켜야”12) 하는 기계공업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문장은 연쇄의 규범을 따르며 서로의 존속을 상호 보완한다. 여기서 시는 치열한 지적 사유의 집약이 아니라 기계적 강박과 우연의 연쇄적·분산적 배치이다. “문장 하나를 쓴 뒤/그 문장을 변주해 나가면서/그저 나열”(배시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집요하고도 주된 방법이다. 사전적 정의와 인용도 빈번하게 동원되며 그러한 객관적 문장들의 배치와 나열로 시적 효과가 의도된다.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하듯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 또한 자주 활용되며, 이때 시적 공간은 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데,13)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안에서 주체는 고유한 개체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사고하고 행위한다.14) 또 한정적인 언어의 가용 범위 내에서 ‘있다/없다’의 진술 구조가 자주 활용되는 가운데 돌연 끼어드는 판단 혹은 선언과 단발적 감정 표출에 의해 복합적 사고로의 이행은 빈번히 차단된다.
과거에 메타시가 내면 탐구를 위한 현대적 장치로 일컬어지던 것과 달리, 주로 익명을 지향하는 이들에게서는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나 욕망, 개성이나 감정 표현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가속류는 언뜻 통찰의 깊이가 담기지 않은 기계의 발화와 유사해 보인다. 또한 이들이 자주 익명을 표방하거나 욕망, 주체성의 의지가 없으며 일원화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시인의 본래 의도가 어떠했는지와 무관하게—이러한 작법이 기계적 효율성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의인화된 사유 습관을 추방”15)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통합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무수히 분할된 데이터이자 가분체16)로서 존재하는 동시대인들의 실존 감각과 빈번히 분절·재배치되는 사고 구조를 대변하는 시작 경향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체의 정체성을 내세우지 않는 그들에게 주체라는 자리는 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이 된다.
2022년 하반기에 출간된 배시은의 『소공포』는 이러한 가속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들을 대표한다. 이 시집은 주로 현상적 진술로 이루어진 단문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가속의 원리를 명확히 보여주며, 사전의 한 구절을 옮긴 듯한 인용도 빈번히 동원된다(「참가시은계목」 「해상 물류」). 무엇보다 지배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현상에 대한 단순 서술과 그 변주인데, “짐을 풀자/짐은 풀린다//(……)//중요한 것은 일어난 일이다 어디까지가 일어난 일인가 아는 것이다/일어날 일은 일어난 일이자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다”(「칫솔」)와 같은, 반복과 증식을 위한 무의미한 문장 생성은 가속류의 자가 복제 양상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도마는 하나면 된다.//웬만한 건 다 하나면 되듯이.//무언가가 내 몸을 통과해 나가고. 그것을 바람과 비슷한 것이라고 느끼지만 바람은 아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먹는다.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 먹고//먹는다.//미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뿐이다. 많은 미래를 상상하면 미래는 그저 그것들 중 하나에 그친다.//잠시 생각했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쳐서/생각했다.//먹다 뱉고.//먹다 뱉은 것을 익월에 다시는/먹지 않는다. 나에게 그런 식의 자유는 주어진 적 없다.//나는 기후가 나의 전부라고 여긴다.//긴 기간에 걸친/생각은 어색한 구석이 있는데//그만큼 흠 잡을 데 없다.//이것을 이것으로 바꿔 주세요.//결정하면서.//도마는 하나면 된다./촛불이 하나면 충분함과 같다.
― 「익익월」 전문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어떤 인간이 썼다. 나는 이제/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라고 쓰지 않는다, 그냥 인간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네. 그냥 인간/인간 대신에 은점토 생각을 한다. 반질반질한. 역동성 있는. 아무것도 닮지 않은/한 인간과. 그 인간과 닮게 닮아 가는 인간.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인간. 그냥 인간. 은점토에 대해 평생 아무런 생각도 갖지 않는 인간. 그게 뭐였더라
— 「은점토」 중에서
위 시 또한 주제 문장의 반복과 변주, 천착한 단어의 동어반복을 중핵으로 가동되고 있으며, 지시 대상이 생략된 채 빈번히 동원되는 지시사가 지시의 모호성을 의도하는 한편으로 「소공포」(72쪽)에서 개별자들의 고유성이 융해되어 얼굴이 하나로 합쳐지듯 단일하고 유일한 것에 대한 중앙 집중화적 지향도 눈에 띈다.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얼핏 “기술자본이 꿈꾸는 세계”인 “오토피아”17)를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그 생각의 내용은 계속 부재 상태에 머무른다(「역소원」 「해상 물류」). 그런가 하면 「평균자유행정」에서 그려지는 독특한 NPC 주체는 게임 내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관찰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실이 곧 게임과 다름없는 지금 사회에서 “미리 정해진 특정한 경로를 따라가는 것밖에는 못하는 존재”18)인 가분체에 대한 통렬한 비유를 보여준다.
한편 김뉘연은 이러한 경향성을 더욱 극단으로 밀고 나가며 컴퓨터 프로그래밍 명령어의 발화를 전시한다. 이때 ‘시’는 놀이나 어떤 수행의 흔적, 우연적 배치의 잔해로 인식되며, 따라서 ‘시쓰기’ 자체가 ‘시’보다 우위에 선다. 독특한 배치와 조합에 의해 ‘시적’ 효과가 의도되는 가운데, 그러한 언어를 전유해보는 경험 자체가 중점에 놓이는 것이다.
계정에 접속해 드라이브를 연다. 왼쪽 상단의 ‘새로 만들기’를 누르고, ‘문서’ 오른쪽 끝에 위치한 기호에 마우스 커서를 올린다. ‘빈 문서’와 ‘템플릿’이 펼쳐진다. ‘빈 문서’를 누른다./‘제목 없는 문서’ 생성./생성된 페이지 왼쪽 상단에 위치 한 기호에 커서를 올린다. ‘문서 개요 표시’. 눌러 본다. ‘요약’과 ‘개요’가 펼쳐진다./(……)/적혀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은 문장을 첫 행으로 삼는다./적혀 있으면 서 드러나 있기도 한 문장은 괄호로 묶어 뒤이은 행에 둔다.//여기에 문서 요약 입력./(문서에 추가한 제목이 여기 표시됩니다.)
— 「범례 설명」(15쪽) 중에서
네 줄 띄고/계정에 띄고 접속해 띄고 드라이브를 띄고 연다 마침표 띄고 왼쪽 띄고 상단의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새로 띄고 만들기 작은따옴표 닫고를 띄고 누르고 쉼표 띄고 작은따옴표 열고 문서 작은따옴표 닫고 띄고 오른쪽 띄고 끝에 띄고 위치한 띄고 기호에 띄고 마우스 띄고 커서를 띄고 올린다
— 「범례 설명」(16~17쪽) 중에서
이러한 김뉘연의 시는 워드프로세서에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 자체를 지면에 그대로 옮겨 언어라는 사물 자체를 전시하고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물질적 감각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상이한 층위들의 언어가 위계 없이 수평적으로 전면화된다. 강보원에 따르면 이러한 김뉘연의 작업은 ‘나’를 제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적 주체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 되며,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는 대체 가능한 장소이지만 그 무엇도 독점적 지위를 점유할 수는 없는 장소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획득한다.19)
3
배시은이 가속류 일반의 기본 원리와 전형성을 대표한다면, 성다영은 그 심화된 양상으로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그가 구축한 자동 장치는 시를 무한히 늘려나가기에 최적화된 특정한 유형을 시사한다. 성다영은 빈번한 행갈이를 통해 주제적 측면에서 짧은 단위의 교체를 의도하고 일관된 주제로의 응집을 차단하려 한다.
성다영의 빈번한 동어반복 활용은 배시은과 마찬가지로 “사로잡혀서 반복”(「다중 슬픔」)하는 작법상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다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단문의 절합 원리에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내적 논리의 구축에 대한 반감에 근간을 둔다. 타의에 의해 존재론적 승인이 좌우되거나 주관적으로 변용되는 것, 인위성을 적극 거부하고 불멸이 아닌 유한성이 인간존재의 조건임을 강조하는 성다영의 시는 시쓰기와 관련된 메타적 발화, 인간 예외주의와 인간 범주 내 위계의 문제를 포함한 사회문제 비판, 시간의 비가역성이라는 서로 다른 대주제, 관찰이나 건조한 감정 진술 등이 차례로 발언권을 넘겨받듯 한 편의 시 내에서 위계 없이 빈번히 교체되면서 전면화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20) 그렇기에 낯선 문장들이 인과 없이 수시로 틈입하면서 가속적 몽타주의 우연적인 배치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박제/동물의 가죽을 벗긴 다음 솜 따위를 넣어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새롭지 않은 상상/인터넷 용어로 쓰일 때에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스크린샷 등으로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카타 콜록의 수화에는 가정법이 없다/볼 수 없어도 추억할 수 있다/발이 없어도 춤을 출 수 있다/나는 자연과 상관없이 움직인다/여기에 뭔가 있어/누군가가 누군가의 상상 속에 갇힌다/오해하고 싶지 않아/그가 둘러본다/얼굴은 소유를 거부한다/나는 유기되었다/쓸모 있을지도 모르니 아직 버리지 말자//원근법/이미지가 갇혔다/나는 나에 갇혔다//예수는 겸손해서 남자로 태어났다//길에서 오줌을 싸듯 남자가 화를 낸다/나는 분노를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나는 창문을 찾아내 열고야 만다//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창문이 없다/창문을 연다
― 「행운은 여기까지」 중에서
태초에 은유가 있었다/평생에 나는 개연성이 없다/내 생각은 개연성이 없다/새롭게 떠오르는 생각이 없다/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은…/무언가를 말하려고 할 때…/과거형은 왠지 슬프게 들린다/여기,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바깥을 상상하지 않는 태도는 성실하다/감정은 단순하다/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동물이 고기로 태어나지 않듯이/나는 누구로 태어나지 않았다/나는 거의 틀리다/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당신은 누구십니까?/느슨한 언어/느슨한 상상/느슨한 시나리오/나는 나다/나는 사이에 있다/어딘가에 가입할 수 없다/이렇게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것은 시다/나는 내가 쓰는 시보다 가치 있다/아직 편지가 도착하지 않았다
— 「두 번째 피부」 전문
이러한 파편적인 사유의 잘라 붙이기를 통해 형성되는 무작위적이고 불연속적인 조합은 당초에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련의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의미화의 통일을 차단하기 위해 유사성의 극단적인 배제가 시행되는 아래 역설적으로 사고 구획의 코드화된 패턴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완전히 다른 주제를 병치하는 성다영의 작업은 서로 다른 연상이 어떠한 직관의 회로를 거쳐 그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코드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마찬가지로 동어반복과 수사를 제거한 객관적 진술, 메타적 중층화를 주로 활용하는 시적 경향들은 언뜻 가속류와 상당히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속류와 변별되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단선적 논리의 증식이 아니라 중첩적 논리를 구축하여 시선의 다층화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방향이 획일화되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들도 물론 데이터 백업 과 복구의 일상화 같은 기계 미디어 장치의 속성을 반영하지만, 무의식에 접목된 것과 작법의 방식으로 가공 방식을 차용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차라리 가속의 원리를 여러 겹으로 조작하여 모호성의 패턴을 늘리는 것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가령 한재범은 ‘나’가 아닌 다른 ‘나’의 중첩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한재범은 시간이나 공간의 격차를 두고 다층적인 차원들을 도입함으로써 시공간의 여러 층위를 혼재시키는데, 이는 시인의 시적 논리 확충과 그에 따른 시적 확장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이상의 「절벽」을 패러디한 「커피는 검다」에서 활용되는 다층의 모호성은 해석의 다양성을 이끌어내며 지시 대상과 언어의 가능한 다의적 관계를 폭넓게 확장한다.
커피는 검다 안이 보이지 않는다 개미가 날아다닌다 보이지 않는다 개미는 검다 커피를 마신다 잠이 오지 않아서 창밖은 검다 잠긴 핸드폰 화면 속 ‘잘 자’라는 문자에 답하지 않는다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자고 있으므로
— 「커피는 검다」 중에서
위 시에서 자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관찰자 화자의 시선이 드리우는 가운데, 첫 두 문장은 검어서 커피의 안이 안 보이는 것으로도, 화자 A와 화자 B의 발화가 교차로 제시되고 있어서 방안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검은색의 속성에 의해 커피와 밤과 잠이 연결되고 있으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커피 안인지 방안인지 알 수 없다. 보거나 보지 못하는 화자로 볼 수 있는 또다른 근거는 이어지는 연들에서 “깨진 유리잔처럼 엎질러진 밤 커피가 마르지 않는다”와 “밤새 놓인 커피가 그대로였다”가,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와 “나는 종일 배가 부르다”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자’라는 문자가 첫 연과 마지막 연에 제시되는 모습은 문자를 보낸 화자와 받은 화자의 모호성을 유도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분절된 시간의 비순차적 이어붙임으로 읽을 수도, 꿈속의 중첩적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커피, 밤, 잠이 공유하는 검은색의 가시성과 어미의 혼란을 통해 논리적 중첩 양상을 구축한 것이다. 「기호와 기후」에서도 마찬가지로 빗소리의 불규칙한 리듬과 편안함이 연결되어 불규칙한 심박동의 불편함이 파생되고 불성실과 아픔이 연결된다. 그리고 ‘그’가 ‘그’이거나 ‘방’으로 중의적으로 해석됨에 따라 “스위치가 달렸으면 좋겠다고/생각했다”를 받는 게 ‘심장’이거나 ‘방’이 된다. 이처럼 한재범의 시에서 동어반복의 유희처럼 보이는 것들을 대개 환유의 의도된 논리를 따르며 누적된 언술들의 논리적 적층으로 인해 모호함과 중층성을 획득한다. 그리하여 의도적으로 입체감이 없는 평평한 사유를 통해 수평의 단선적 논리를 지향하는 가속류와는 변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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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류는 인터넷 플랫폼과 기계장치의 작동 방식에 익숙해져서 매 순간 가상 환경에 동기화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동시대 디지털화된 주체 경험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이들이 처음에 어떠한 의도로 자기만의 자동적 작법을 개발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극도의 추상성과 단선적 논리로의 산발적 귀결, 현상을 관찰하는 단문의 서술과 사유의 생략 혹은 압축, 시공간의 비약은 가속의 원리에 적합하도록 동시대인들을 훈육하는 미디어 장치의 작동 원리와 결과적으로 흡사하다. 즉 가속류는 각 시인의 창작 매크로 장치라는 현상을 통해 읽은 텍스트의 무의식이므로, 창작자의 원래 의도나 수용자의 감상 지연 효과 등과는 엄연히 다른 차원에서 논해져야 한다.
이러한 가속류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장르의 속성을 되묻는 ‘시적’인 것의 정의와 경계 확장, 총체성의 거부와 파편의 긍정, 시각성과 청각성을 지면에 들여오려는 시도, 기표 자체에 대한 매혹과 끌림, 낯선 감각의 들여다봄, 발화 기계의 실험을 경유한 다른 타자 되어보기 등. 어쩌면 가속류는 디지털 처리 과정에 의해 욕망이 매개되거나 변형되는 동시대 삶의 양식, 알고리즘 기반 메커니즘에 가장 걸맞은 시 스타일은 아닐까? 그런데 한편으로 앞서 언급한 내용이 가속류 일반에 일률적으로 적용 가능한 평가라는 점은 다소 비판점을 남긴다.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장피에르 뒤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인간에 대한 철저한 물화는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거나 인간중심주의를 극대화하는 데 모두 공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가속류의 ‘의의’는 해석 차원에서 부여되는 의의이지 시 자체가 내장한 속성으로 인해 도출되는 것은 아니므로, 같은 논리에 대한 정반대 해석에도 동일하게 무력할 수 있다. 의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은 근거가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가속류 자체는 시대의 산물이자 징후로서 그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그보다도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건, 무한한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가속류 자체의 어떠함보다는 특정한 경향성이 동시대 작법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현상 자체이다. 서두에서 살펴봤듯 몇 년째 심사평에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개입의 의지가 축소되는 현상에 대한 유사한 고민과 유사한 평들이 제출되고 있다. 고민이 해를 거듭하며 심화되는 와중에도 그러한 시의 창작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음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간과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비단 가속류가 아니라도 특정한 경향이 우세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형식과 스타일이 경합·견제되기보다는 다양성과 활발함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면, 진단의 전제들을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보편이라 가정되는) 다른 시대의 외래 담론보다도, 문학이란 본래 무엇인가 묻고 해명하는 제각각의 정의보다도, 제도나 관행 등을 포함한 우리 문학사의 특수성 위에서 해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는 이것이다. 현실 대면에의 복권을 강조하기 전에, 현실 대면은 왜 요구되어야 하는지, ‘현실’이라 상정된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하지는 않을까. 이미 가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지금 시대에서 ‘현실’이라 정의되는 것이 각자에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또 이러한 가속류는 어떠한 조건과 배경에서 동시대 시단의 주류적인 목소리가 되고 많은 시 독자와 투고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을까. 가속류는 왜 많은 시 창작자들에게 즐거움과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일까.21) 또 가속류가 대변하는 새로운 시대감각은 앞으로 한국시의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켜나갈까. 아주 많은 길을 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과, 아무 길도 없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믿는 건 언뜻 유사해 보이나 실상 아주 다른지도 모른다.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1) 이 글에서 다루는 시집은 다음과 같으며 이후 인용시 시집 제목은 생략한다. 김뉘연, 『문서 없는 제목』(봄날의책, 2023), 배시은, 『소공포』(민음사, 2022), 성다영, 『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창비, 2024)
- 2) 가령 조연정은 당시 비평가의 임무를 개별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후광 또는 굴레를 떼어내고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따로 불러 대화를 시도해보는 일”이라 말한다. 조연정, 「가까스로 가능한, 진실의 세계—‘미래파’의 두번째 시집에 대하여」(2009), 『만짐의 시간』, 문학동네, 2013, 215쪽. 이러한 필요성은 이듬해 작성된 글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그는 ‘미래파’의 출현 이후 새로운 감수성이 발견되고 독법이 확장된 것을 긍정하면서도 “미세하게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시인들의 차별적 특징들이 하나의 이름 안에서 무화되거나, 같은 무리로 호명되지 못한 어떤 시인들은 제대로 읽히지 못하거나, 성숙한 실험의 난해함과 미숙한 실험의 난감함이 섬세히 구분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많이 도출”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당시 ‘미래파’라는 거대한 시대적 자장으로부터 개별 시세계를 구출해야 할 필요성이 여러 논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연정, 「‘나’라는 정념, ‘너’라는 추상—박희수와 주하림의 시를 읽으며」(2010), 같은 책, 305쪽.
- 3) 는 주로 조대한에 의해 전개되었는데, 그는 실제 작가의 목소리가 시 내부에 개입하여 중층적 레이어를 이루는 현상을 가리켜 2000년대에 극단으로 멀어졌던 두 일인칭이 2010년대에 다시 좁혀진 것이라 진단한다. 이처럼 그는 2000년대의 성취이자 이후 한계로 제기되었던 내용의 구도를 뒤집은 방식으로 동시대 시적 경향의 의의를 도출해내는데, 그렇기에 이를 자기동일성에 구획되는 양상이 아닌 일인칭의 무수한 수행으로 읽기를 강조한다. 조대한, 「1인칭의 역습, 그리고 시」,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가을호; 「겹쳐진 세계에서 분투하는 시인들」, 『창작과비평』 2020년 여름호;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 또 안지영에 따르면 이러한 ‘2010년대적 나’는 2000년대의 ‘혼종적 주체’들과는 달리 실제 시인과 완전히 단절되지도, 그렇다고 동일시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의의를 얻는다. 안지영, 「‘포스트-’로 말해질 수 없는 것들—2010 년대 시에 대한 문학사적 읽기연습」, 『현대비평』 2022년 가을호, 59~60쪽.
- 4) 최근 심사평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내용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용과 상호텍스트성의 두드러진 활용(황인찬,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1년 여름호, 367쪽), 세계로의 확장보다는 자기 인식의 되풀이(황인찬, 『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 361쪽), 현실과의 대면 부재(내 향화), 메타적 인식의 중층화에 기반한 장형화 및 관념성 과잉, 언어의 미니멀리즘(박상수, 「심사평」, 『문학동네』 2022년 가을호, 440쪽), “해체를 위한 해체”로 보이는 장르 해체의 가속화 경향(신해욱, 「심사평」, 『문학과사회』 2023년 여름호, 321쪽), 산문화, 무의미하고 비유기적인 이미지 더미의 나열(이병률, 「심사평」,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463쪽).
- 5) 이수명은 메타시를 “작품에 시인이라는 외부적 차원”이자 “현장성”을 도입하여 언어의 또다른 층위와 레이어를 상정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수명, 「메타시는 없다」, 『시와세계』 2015년 겨울호, 20~21쪽. 90년대에는 이러한 ‘삼인칭’의 활용이 “자아 탐구의 구조적 장치”로서 주목되었음을 떠올려본다면, 문제는 더욱 간단하지 않다. 김준오는 90년대를 전후하여 삼인칭의 활용이 중요한 징후로 두드러짐을 지적하면서 그 대표 주자로 이승훈을 거론한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관찰이나 반성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분열된 두 자아 간의 비판적 거리가 유지되는 것을 현대시의 일반적인 양상이라 정의한다. 김준오, 「인칭의 의미론」(1995), 『현대시의 환유성과 메타성』, 살림, 1997, 173~174쪽, 182쪽.
- 6) 물론 전자는 현실과 가상의 접합, 후자는 가상의 중층화 경향을 가리킨다는 차이가 존재하지만, 시인의 전기적 정보를 알지 못하면 분간이 모호한 그러한 차이보다 두드러지는 건 두 경향 모두 동시대 가장 빈번한 메타 장치인 ‘행위하는 나를 관찰하는 나’ 구도 혹은 그 중첩 구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중 레이어 장치에서의 메타적 발화는 어떠한 기준에 의해 현실과 맞붙어 있거나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가름되는지 의문이 생기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레이어의 활용보다도 주제나 소재 혹은 발화자의 태도에 귀속되는 건 아닌지 하는 추가적인 의문도 든다.
- 7) 창작자의 사회적 여건, 그가 속한 세대 일반의 특징을 분석하거나 담론적 수사를 동원하여 시의 사회적 의의와 효용을 열거하는 독법이 과도 해질수록 시와 시인의 역량은 은연중에 무력화된다. 전자의 경우는 시의 당위적 모델에 견주어 작품의 ‘결여’와 ‘증상’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 무감으로 치우치기 쉬우며(따라서 당위적 모델에 대한 내부적 틀은 견고해진다) 후자의 경우는 시가 비평적 해석에 의탁할 수밖에 없게 되어 시보다 시를 치하하는 장식적 언어의 역할이 중요해진다(따라서 상업주의와의 공모도 긴밀해진다). 시가 해석과 별개로 존재하면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시인의 의도된 배치와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개별 작품들의 고유한 역량, 시를 읽을 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관점들이 충분히 탐색되지 못한 채 빠르게 지배 담론의 분류 체계가 적용되는 것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 8)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 9) 노버트 위너에 의해 창시된 사이버네틱스는 인지과학의 초석으로서 모든 행위자들에 기계의 지위를 부여하고 ‘마음’ 혹은 ‘생각’을 알고리즘에 의해 수행되는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다. 당초 위너는 인간 정신의 통제와 기계의 인간화를 강조하여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극대화를 지향했지만 이후 1차, 2차를 거치며 사이버네틱스의 흐름은 반인본주의적 근거 또한 제공했다.
- 10) 가속주의는 자본주의의 대항운동으로서 자본주의를 가속화하기 위해 “소외하기, 탈코드화하기, 추상화하기의 경향을 가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물론 자본주의적 원리에 최적화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갱신된 가속주의’는 광신적 자본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산출함을 아는 것 위에서 전개된다.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서론」, 『#가속하라—가속주의자 독본』, 로빈 맥케이, 아르멘 아바네시안 엮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3, 14~15쪽, 37쪽. 탈자본주의를 위한 탈코드화가 전환기 이전의 가속주의라면, 오늘날의 가속주의는 “사이버네틱과 디지털, 인터넷으로의 포섭”을 의도한다. 윤태균, 「가속에 관한 몇 가지 서술과 기호에서의 벡터」, 콜리그, 2022. 7. 8.
- 11) 물론 성다영의 「더 명복」과 「투명한 얼굴」이 다르듯이 한 시인이 매번 유사한 작법만을 반복하지는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 12) 소스타인 베블런, 「기계 과정, 그리고 영리 기업의 자연적 쇠퇴」(1904), 『#가속하라』, 103쪽.
- 13) 이를 적극 활용하는 시인으로 이유야와 변혜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가상화된 자아의 중층적 메타화를 활용하는 가운데 시공간의 압축과 확장 및 즉각적인 이동과 급전환으로 대표되는 가상공간의 원리를 시 내부에 구현한다. 이는 단순히 게임의 설정이나 그래픽을 차용하는 게 아니라 게임 플레이에서의 사고 과정이 창작 주체에게 체화된 양상, 즉 기계 인터페이스 경험이 시적 사유에 동기화된 양상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이유야에게는 스킬을 가동하듯 ‘그런데, 그러자’를 전후로 시공간의 빈번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변혜지는 의미 단어가 큰 추상어들을 리셋과 재플레이를 위한 기능적 어휘로 사용한다. 이유야, 『일인조』, 파란, 2022; 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 14) 가령 김유림은 특정한 맵의 한정된 반경 내에서 이동하는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화자(와 그 화자의 외부 관찰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한정된 거리만을 이동하도록 설정된 배시은의 「평균자유행정」 속 NPC 화자나 성다영의 산책-관찰-생각 연속체 화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유림, 『별세계』, 창비, 2022.
- 15) 소스타인 베블런, 같은 글, 106쪽.
- 16) 들뢰즈에 따르면 가분체란 디지털 환경에 의해 생산된 주체로서 “파열된 혹은 균열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스스로를 재시작하고 재조직하게 하는 자아 경험”을 뜻하며, 이때 “경로들은 매순간 ‘새로고침’된다”. 앨피 본, 『게임, 사랑, 정치—게임화된 애정, 관계, 감정, 일상 그리고 기술 사회 욕망혁명의 미래』, 박종주 옮김, 시대의창, 2023, 177쪽.
- 17) 같은 책, 56쪽.
- 18) 같은 책, 176쪽.
- 19) 강보원, 「타국에서 펼쳐 든 사전」, 『문서 없는 제목』 해설, 136~137쪽
- 20) 투고자, 「은유와 지상명령—『스킨스카이』(봄날의책, 2022)」, 『문학인』 2022년 겨울호, 222쪽.
- 21) 앞서 박상수가 심사평에서 중층적 메타 전략이 시가 저절로 진행되게 하여 편리하다고 언급한 것은 적은 수고로 시를 쓰기에 특화된 어떤 양식적 문법들이 폭넓게 공유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바로 여기서 많은 투고자들이 이를 선호하는 또다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 가정해볼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이들에게는 시를 쓰는 일보다도 (등단 여부를 떠나) ‘시인’으로의 진입과 공인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가? 그럴 때 가속류와 같은 시쓰기는 시를 생산하는 데 무척 용이한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경우 시인이라는 타이틀은 왜 매력적인 상징자본 혹은 안전장치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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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3 1. 지난 호에 덧붙여 : 완전한 미래에 대한 몽상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 마지막 챕터 ‘원의 현상학’에는 ‘새’에 관한 곱씹어볼만한 진술이 제시된다. 바슐라르는 ‘새는 거의 전적으로 구형이다’라고 말한 미슐레의 문장과 ‘그 둥근 새소리’를 노래한 릴케의 시구를 곱씹어본 뒤 이렇게 말한다. “둥근 존재의 둥근 소리는 하늘을 둥글게 하여 둥근 천정으로 만든다. 그리고 둥글게 된 풍경 속에서 모든 것이 쉬고 있는 것 같다.”1) 여기서 시인들이 말한 ‘새의 둥긂’으로부터 바슐라르가 연상한 것은 새의 둥지이다. 하늘에는 그 어떤 것도 새를 위협하는 대상이 없다. 그렇기에 비상하는 새는 가장 완전한 쉼터에 머물다가 그 둥근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새를 ‘둥글다고’ 느끼는 감수성은 한국인에게 낯선 것이기도 하다. 하늘을 곧 새의 둥지로 연상하는 상상력 또한 관습적이지 않다. 따라서 나는 조금 익숙한 맥락에서 ‘새의 둥긂’에 대해 해석해본다. 왜 새는 현대인에게, 더 정확히 말해 도심 속에서 새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는 시인에게 ‘둥글게’ 느껴질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새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전진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고작 샛길을 택하는 게 전부인 사람의 운명과는 달리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로든 비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떠한 방향이든 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이 바로 둥긂의 본질이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글다. 그 둥긂은 인간이 소유해보지 못한 자유의 근본적인 심상이다. 자전거포를 지나며 생각한다 저 탐스러운 바퀴 하나만 나에게 팔면 안 되나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들 중에서 자전거 말고 타이어 말고 그렇게는 안 판다면 훔치는 것도 안 되나 달리는 말의 네 발굽 지면에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을 보려는 경마광의 호기심이 영화 탄생에 기여한 것처럼 내게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 저 바퀴를 떼어내어 스크린에 한 사람의 침묵이 상영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상에서 겨우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일 텐데 겁먹지는 말자 그가 땅에 닿아본 적 없다는 것을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주 조금 다른 것 가지곤 집중하지 않으니 개미 한 마리 밟아죽인 적 없다는 것은 끝까지 모른다 살리거나 죽이는 일 아니곤 관심 없으니 맨홀 뚜껑에 도톰하게 새겨진 장미꽃 음각화 빙상 위로 미끄러지듯 그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나, 그는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 그는 당신으로부터 계속 멀어지고 있다 스크린에 비친 풍경이 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공중에 매달려 진열된 자전거가 기다리는 우연한 사건 맨홀 뚜껑을 훔쳐 달아나던 노인에 관한 보도를 읽다가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 메아리의 발꿈치는 정말로 동그란가 딴생각에 잠겨 그의 편자가 지상에 닿는 잠깐의 순간을 보지 못한다 유계영, 「이미지 서클」 전문(『현대문학』 2025년 3월호) 마찬가지로 ‘왜 이미지는 모두 동그란가’라는 유계영 시인의 물음 속에서는 시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깃들어 있다. 시적인 이미지의 배후에는 근본적으로 둥긂에 대한 지향이 있다. 세상을 둥글게 느끼는 감각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유롭게 세상을 몽상하기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을 투영한다.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왜 시인에게 자전거 가게의 바퀴 하나조차 ‘탐스러워’ 보이는가. 왜 그의 머릿속에는 지상에서 네 발굽이 지상에서 모두 떨어지는 경주마와 ‘5밀리미터’ 떠 있는 사람이 떠오른 것일까. 왜 그는 가게 벽에 걸린 자전거를 ‘공중에 걸린 새 자전거’라고 기록했을까. 「이미지 서클」의 배후에 놓인 몽상은 결국 바슐라르가 원의 현상학이라고 불렀던 것, 혹은 새의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살고 싶다. 시인은 시를 통해 ‘더 높은 곳’에 도달하는 한 걸음을 몽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완벽한 미래란 완벽하게 둥근 이미지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는 자유, 더 나아가 인간 그 이상일 수 있는 높은 장소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도달하는 높이가 잠깐의 도약이거나 ‘5밀리미터’ 정도의 비상에 지나지 않듯, 유계영 시인의 비상은 창공까지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몽상에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불안을 드러낸다. ‘완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해답을 가진 사람은 없듯 어떤 시인도 자신의 몽상을 완전한 해답처럼 여기지 않는다. 시인은 ‘둥글다’라는 미적 심상 속에서 자유의 완전성을 어렴풋이 감각하고 그 방향으로 손을 뻗을 뿐이다. 꿈속에서조차 완전한 비행을 상상하기란 아주 어렵다. 미래에 대한 시적 상상력은 대개 직선로와 완전한 둥긂 사이의 어중간한 에움길의 이미지로 귀결한다. 예컨대 이상이 사로잡혔던 직선로의 이미지가 있다(「오감도 시제일호」). 한편 정현종이 사랑했던 둥근 이미지가 있다(「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유계영 시인이 그려낸 ‘둥근’ 이미지는 그 사이에 놓인다. 달리는 말처럼 잠깐의 탄력으로 현실을 벗어나기. 눈앞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조금은 뒤틀어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비스듬하게 걸어가는 에움길이 곧 시인이 그려내는 미래의 이미지이다. 2. 문학적 시간론에 입각한 부조리의 정의 앞서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 규정을 설명하였다. 문학적 시간은 물리적 운동보다 내면의 운동이며, 내면의 운동은 곧 성숙이고, 성숙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는 바꿀 수 있지만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하나의 역설은 우리의 내면에서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내적 자아, 타인과의 관계, 세상의 고난 중에서 무엇인가는 ‘불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고속도로에서 같은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듯, 모든 것이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자아는 성숙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역설은 다음과 같다.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아득한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실감 또한 없다. 그리고 숭고한 절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시간을 지속하게 만드는 뿌리이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따라서 성숙은 자연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이었다.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유년시절 부모와의 관계였고, 따라서 성숙은 부모를 대신할 애틋한 만남과 승화의 방식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반대로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라면, 즉 자아도 타인도 세계도 영문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근본적으로 거기에 ‘내면의 흐름’은 없다. 하루는 나무와 나무가 만난다. 그리고 서로의 어금니에 씨앗을 심는다.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고 써도 나쁘지 않았겠네. 그래서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만난다. 씨앗은 달아오르고, 달아오르는 씨앗이 중얼거린다;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항상 그게 문제야- 늘 그렇듯이.) 하루는 구름 사냥을 하며 중얼거린다; 휘영청 달무리 깊은 골 어딘가 드러누워 부운浮雲을 핑계 삼아 술잔만 치며 살고 싶다고. 치고, 치고, 또 침으로써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네가 너를 떠나고 싶다는 말은 난센스 같군.) 발 없는 새가 그만 떠나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 디딜 수 없는 (위태한)나무를. - 나무의 자리에 삶이 들어가면 뭐, 나쁘지 않았을지도. 참, 집결지는 무악산이야. 잊지 말길. (그리고 잊어도 나쁠 것은 없다는 너- 늘 그렇듯이) 또 하루는 네가 중얼거리면서 중얼거린다- 늘 그렇듯이 동시에; 휘영청 달무리 적막한 산하 이런 거 필요 없다고. 나는 뜬구름이란 뜬구름은 다 끌어내려 앉히기 위해 사냥을 벌인 것이라고.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 (구름은 오븐보다 팬에 구워야 더 맛있다.) 하루는 CU무악산점 앞에 널린 생선 박스 중 하나를 주워 네가 너를 수납하고, 포승을 칭칭칭칭칭칭칭칭 감는다. (항우와 우희의 절절한 러브?) 진부하군. 그러나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을 때마다 숨을 들이쉼과 동시에 내쉬어 보시길 권유! 왜 이렇게 비좁지?-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당신으로 곧잘 살아왔듯이. 그럼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이제 매일을 하루처럼 사는 당신에게 귀 기울여 보자; 이 생선 박스는 내가 나의 생활을 독려하는 공간이자,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이다. * 내가 생물이라는 조건하에서만. (내가 상상한 나는 발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식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뇌관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갈비를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배꼽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항문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없음을 가질 수 없다) 구름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 박지일, 「쓰면서 쓰고, 읽으면서 읽은 것들」 전문 (『시와사상』 2025년 봄호) 여기서 내용보다 먼저 감상되어야 할 것은 어조이다. 이 시에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도 반대로 결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도 없다는 투로 모든 것이 증언된다. 최초에 위태한 나무와 위태한 나무가 접붙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나무와 나무가 만나 씨앗을 잉태했을 때 “언제 폭발해도 상관없다고. 그리고, 폭발과 상관없이 그저 살아가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며 생명의 탄생이 대수롭지 않게 다뤄진다. 또한 ‘나’는 뜬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독백하면서 “나는 나를 잠시라도 떠나야만 하겠다고” 말하지만, 그 목소리는 절박하게 ‘내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소망이라기보다 그저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발상에 가깝다. ‘나’는 약속 장소에 대해서도 잊어도 좋다고 말하고, 또한 “당신과 당신 사이에 낀 당신”에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권유해보다가도 당신이 “별것 아니라고 느낄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덧붙인다. 조금 더 세심히 내용을 분석해보자. 여기서 희구되는 것은, 앞서 논의한 유계영의 시와 마찬가지로 자유다. 시인은 저 위태한 나무가 씨앗으로 ‘폭발하는’ 순간과 저 구름이 흘러가고 흩어지듯 ‘내 자신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순간을 상상한다. 당신에게도 당신이라는 그 비좁은 존재를 벗어나보라고 권유한다. ‘나’에게 삶은 “생선 박스” 같은 것인데, “아래로 아래로 구름을 끌어내리길 반복하는 내가 있어야 할 비바리움”처럼 세상은 날 사육하는 것만 같고, ‘나’는 그 안에서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다시 묻자. 도대체 박지일 시인을 가두고 있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겠고-늘 그렇듯이; 포승을 엮어서 뜬구름들 다삼킬 것이라고”라고 시인이 독백할 때, 그를 ‘포승하는’ 자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의 절망은 그의 시에서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단지 모든 타자의 이미지가 구름이 흘러가듯 스쳐갈 뿐이라는 사실이다. 분명히 유계영의 시에서는 ‘멀어지는’ 아득한 자전거의 이미지가 존재했다. 유계영에게는 닿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한 간절함이 내재했다. 반면 박지일의 시는 씨앗이 폭발하여 싹을 틔우든, 구름이 흘러가든, 그저 반복되는 ‘하루’만이 진술될 뿐이다. 이 시에는 뚜렷한 원근감이 없다. 그의 시에는 내적 시간의 닻이 될 절망이 없다. 가없이 ‘반복하며’ 인간을 끌어내리는 덧없는 시간만이 존재한다. 내면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의 존재 또한 덧없는 것임을 뜻한다. 따라서 “~을 가질 수 없다”라는 진술 구조의 반복은 존재 상실을 가리킨다. 상실의 징후는 “내가 상상한 나는 발아를 가질 수 없다”라는 취소선의 형식으로 극대화된다. 이때 부조리의 개념을 빌려 시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겠다. 부조리란 무엇인가. 알베르 카뮈가 설명했듯 부조리는 세상의 무의미에 대한 깨달음으로터 시작한다.2) 삶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로써 지속할 필연성도 없다. 마찬가지로 박지일의 시에서도 세상은 어떤 식으로 대하든 ‘별 것 아닌’ 무의미한 대상처럼 다뤄진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카뮈가 묘사한 실존적 비극은 삶의 무의미를 깨달은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부조리란 삶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사는’ 것을 택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반항하는 자의 비극이다. 박지일 시인의 시, 그리고 이전 호에서 분석했던 ‘부조리’에 가까웠던 시들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의미로 그들의 시는 부조리의 절반만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삶의 무의미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박지일 시의 부조리는 모든 것이 그저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면으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추방하는 형식이다. 삶의 무의미함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듯, 가장 내밀한 절망을 닻으로 삼지 않는 시 작품에 내면도 시간도 없다. 이러한 반문도 뒤따른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는 단언은 진정 그가 극복할 수 없었던 단 하나의 절망을 감추는 방식은 아닐까. 이에 관한 대답은 미루어두자. 이 시에 내재한 무의미가 진실한 것이든 연출된 것이든 박지일의 시는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사체험인 셈이다. 3. 시적 현재란 무엇인가 내면의 시간이 ‘흐르려면’ 역설적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불변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고향은 언제나 먼 곳인 것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부모는 커다란 것처럼, 닿지 않는 것이 눈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도리어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게 말한다면 시는 언제나 소원 성취를 위한 장르, 즉 미래를 향해 투사된 우리의 욕망을 표현하는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생생한 것이다. 욕망에 뒤따르는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은 지금 나를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시간, 특히 시 장르에서 증언되는 모든 시간성은 근본적으로는 현재이다. 수많은 논자가 강조했듯 시적 시간의 본질은 ‘충만한 현재’이다. 충만한 현재란 기본적으로 시인이 그의 자아가 가장 충만한 순간을 시로 기록한다는 것, 즉 그가 살아낸 고통스러운 순간이나 미래에 다가올 기쁨을 종합하여 가장 아름다운 ‘지금’을 기록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누군가 오롯이 삶을 살아낸 나 혹은 경이로움을 간직한 ‘지금’을 기록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한스 마이어호프는 문학적 시간의 현재를 ‘통합’이라고 명명했다. 사람의 의식 속에서 시간은 무질서하게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삶을 통합하는 ‘나’라고 동일자를 전제하기 때문이다.3) 그런데 여기서 음미해볼 것은 충만한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현재를 ‘기록하는’ 행위가 시간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다시 말해 충만한 현재에는 언제나 이중의 시간이 존재한다. 어떤 삶을 살았던 ‘나’와 그것을 기록하는 ‘나’라는 이중의 시간 말이다.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인 ‘시적 현재’인가. 사람들은 내게 하류를 맡기고 흘러갔다 떠내려오던 것들이 전부 내가 타지 않은 종이배였을 때 아…… 나는 물길로 태어난 것이었구나 이미 말라버린 뒤의 이야기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 속에서도 물은 서로 헤어진 적 없다 안개를 나눠 가진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어 나는 이 길을 지우지 않고 기다림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는다 떠나기 전엔 왜 스스로를 붙잡는 기행이 되는지 젖은 수건이나 물기 맺힌 접시의 반짝임을 보며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둔다 고요가 너무 추워서는 안 되니까 한꺼번에 오지 않는 일로 그들이 나의 슬픔을 아껴주었다면 물 한 잔 허겁지겁 들이키게 된다 마른 식도로 흐르는 것을 느낄 때 내가 나를 살려주는 기분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 물의 직업을 베끼다 흘러가는 얼굴 꼭 붙잡은 채로 꺾인 길에서도 만날 수 없어 웃는 얼굴로 하나씩 지워가는 물녘의 약속들 서윤후, 「물길 빈티지」 전문 강물이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원형적 상징임을 떠올려보면,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에서 물기는 곧 사람과의 관계로도 읽을 수 있겠다. 우선 사람들의 ‘하류’가 나의 ‘물길’로 밀려오듯, “너울성 파도, 해일, 급류, 태풍과 물보라”와 같았던 만남 때문에 괴롭고 아팠던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나간 일이다. “넘어졌었던 비탈길을 그러모아/ 돌아갈 길을 빚”어내듯, 시인은 아픈 과거가 모여서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었다고 담대하게 말해본다. 때론 “수도꼭지를 조금 열어”두며 슬픔을 털어놓고,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품으며 그는 살아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래 타인의 슬픔을 견디고, 앞으로의 슬픔을 견뎌내는 ‘지금’에 대해서 고백할 때, 우리는 이 시가 그려내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확인한다. 저 묵묵한 강처럼 그는 자신을 이루었다. 한편 나는 이 작품에서 한 겹의 ‘현재’를 더 읽어낸다. 그것은 바로 “눈물을 하는 사람/ 얼룩을 일으키는 사람/ 방울로 맺히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서술의 시간, 즉 수동적 표현을 능동태로 바꾸어 기록하는 자의 시간이다. 서윤후는 ‘눈물을 흘린다’라고 쓰는 대신 ‘한다’고 섰고, ‘얼룩이 번진다’라고 쓰는 대신 ‘얼룩을 일으킨다’라고 바꾸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시간을 견뎌내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창조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적인 시간성, 즉 충만한 현재의 본질은 바로 이 기록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있다고 있다고 한다.왜 새벽은 사람은 그의 가장 고통스러운 과거 앞에 세우는 것일까. 그리고 시인은 그 불면의 새벽에서 쓰는 행위를 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바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그 경험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 위치로부터 그 경험을 ‘기록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 누구나 어떤 잔혹한 상처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누군가는 운이 좋게 그것과 직접 대면하고 극복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픔은 대면하기도 전에 과거가 되고 속수무책으로 흘러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어떤 시간이든 그 속의 타자를 현재로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기를 ‘선택한다’. 서윤후 시인의 시는 바로 충만한 현재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나’를 이루는 그 모든 시간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눈물을 행하듯, 마음을 마음이 다하도록 행하는 것이다. 1) 가스통 바슐라르, 곽광수 역, 『공간의 시학』, 동문선, 2003, 392쪽. 2) 알베르 카뮈, 박언주 역, 『시지프 신화』, 열린책들, 2020, 32~35쪽 참조. 3) 한스 마이어호프, 이종철 역, 『문학 속의 시간』, 문예출판사, 2003, 56쪽 참조.
1 시인 허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작은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이후 1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에 담긴 시. 이 시를 허연의 대표작이라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허연의 오랜 독자인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첫손에 꼽기도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허연의 시를 음미할 때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하는 문장과 함께 이 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삶에 대한 몹시도 내밀한 사색이 서린 때문일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시인의 시론 같다. 처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혼자란 어째서 “시원한” 것인지, 고독이란 어째서 “다행인” 것인지. 스무 살 무렵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명징해지지 않는 문제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시에 그 낯선 매혹에 속수무책 빠져들었을 수도. 혼자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얼마큼 오롯한 것일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곱씹다 보면 지독한 고독이 자아내는 맹렬함, 아득함, 서늘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곤 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인생에 대한 직시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나’는 세상의 무엇도, 누구도 아닌 ‘나’이므로. 이 하나만이 살아 있는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므로. 아울러 이는 자신의 방향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시인 스스로 아로새긴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세 권의 특기할 만한 시집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매서운 선언과 다짐은 유효한 듯하다. “세상엔 늘 나만 있”는 자에게 ‘나’는 곧 세계다. 존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 ‘나’로써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물론, 이는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홀로 동떨어진 상태.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비뚤어진 세계관”조차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 ‘그대’는 어째서 감감무소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간다(「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밖으로, 더 밖으로. 이로써 허연의 화자들은 일반의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괴리된 상태에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한다는 것. 얼핏 안에 있는 듯 보여도 실상 밖을 산다는 것. 언제든 밖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스스로가 채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에서 고백하듯, 끊임없이 “중력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연의 고독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 고독은 지금껏 허연의 시적 자양이 되었으리라. 묵은 고독은 때때로 섬세한 내면을 짓누르는 병인(病因)이기도 했겠으나, 그럼에도 다름 아닌 고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2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연히 분리시키고자 하는 태도. 안에 있지만 밖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허연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소년(성)’과도 유관하다. 허연의 소년은 흔히 말하는 비성년의 아슬아슬 들끓는 에너지, 그 이상의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역시 앞선 시에서 언급한 문장과 함께 시인의 선언으로 읽어도 좋겠다.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세속에 몸을 담글지라도 종내 슬그머니 한 발을 빼는 태도. 섞이지 않는 푸른빛. 그러나 그 빛, 즉 허연의 소년은 주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으로 현현한다.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기억을 지금까지 투철히 간직하는 것으로 “무슨 넥타이 부대”와 같은 일상의 그렇고 그런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이다. 근작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발문에 인용된 시인의 발화를 끌어오자면 이렇다. “어느 날부터 나이 먹고 뻔해지는 게 싫더라고…… 사회가 원하는 딱 들어맞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정리된 착함’ 이런 게 싫었고…… 하지만 사실 나는 착하고 싶었어…… 기름기 없는 착한 소년으로, 권력에 어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점잖은 어른이 아닌……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같은…… 누군가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살을 찌르는……”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즉 허연이 간직한 소년이란 일종의 반골 기질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쉽겠지만, 이는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단련한 삶의 자세로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은 착하고 싶었던, 여리고 외로운 한 존재가 자신을 지키고자 발악하듯 꺼내 든 유리 조각.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나쁜 소년”이 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공화국’을 스스로 설계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듯이. 시인에게 이는 그저 “사과를 베어 무는 것” 만큼이나 예사로웠을지도. 소년은 어째서 나쁜 소년이 되었을까. 시인 스스로가 규정한 “나쁜”이라는 말 속에는 모종의 자책, 죄책감이 스며있는 것도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시인이 여러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린 시절 집안의 오랜 기대를 배반하고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단편적인 사실로써 한 시인의 내력을 모조리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탄생을 둘러싼 이런 식의 극적인 비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후 자연히 생겨난 죄의식, 그리고 낙망이나 허무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린 소년의 근간을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흰 말뚝을 찾아냈지만 / 화살표도 숫자도 / 모두 지워져 있었습니다 / 말뚝을 탓하진 않았습니다 / (원래 길은 없었으니까요)”(「희망」)와 같은 부정의식은 자연스레 배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비켜서고자 한, 고독한, 나쁜, 소년. 결과적으로 일상의 권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허연의 소년은 ‘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내식당」과 같은 작품이 이를 선명히 부연한다. “지하 5층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 혼자 밥을 먹는다”. 시를 지키기 위해 굳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년의 사내라니.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위해 말이다. 3 허연의 푸른색은 여전히 그를 소년이게 하고 시인이게 하고, 뒷골목을 헤매게 하는 것. 그렇다면 그 푸른색을 지속하고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세상의 셈법과는 어긋난 일. 세상의 셈법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약자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권태와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허연에게 사랑은 유의미한 동력임에 분명하다. 때때로 사랑은 그로 하여금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방책으로 기능하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독을 불식하기는커녕 고독의 기미를 더욱 북돋는 데 이바지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지점에서 사랑은 본연의 힘을 발휘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를 보자. 이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가장 정직한 고백 같다. “그리워하는 병”의 중증으로 인해 채 오십 미터도 걸어갈 수 없다고 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이 깃든 시.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지금은 이별 후다. 펄펄 끓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앓는 때이며, 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의 증상이 바로 허연 시의 중추를 이룬다. 이는 얼핏 낭만적 정취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그 열기가 걷히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므로. “때가 되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리워하는 병”의 고통이 사그라지면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기능과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허연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상의 권태와 양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 그 시절”이 지나면 “저 강물 속에서 /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는 것(「상수동」)과 같이. 그러므로 허연에게 사랑은 애당초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예정된 실패. 예정된 이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사랑의 끝에는 그토록 몸서리치는 권태와 무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살피고 주택 융자를 걱정하는 따위의 평범한, 혹은 끔찍한 생활의 일면들. 시간의 조류에 쓸려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생(生)’(『오십 미터』 시인의 말)은 소년의 푸른빛과 얼마나 먼 것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되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생활과 한데 뒤엉키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화자들은 적정한 정도로 사랑의 감각을 다스리고자 한다. “사랑해. 그렇지만 /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의 강렬한 열기만이 사랑으로 기억된다. 활활한 사랑의 기억은 이따금 반복 재생되며 푸른빛을 한층 선연하게 만든다. 문예지 발표 당시 이 시의 제목은 ‘불타는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이후 제목은 바뀌었고, 그렇듯 ‘드라이브’는 결코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허연에게 사랑은 철저히 그 자신의 것이다. ‘너’가 아닌 ‘나’의 것. 나만의 것. 때문인지, 사랑의 대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잔영으로 남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거된 채다. 그리움의 얼굴조차 불분명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에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할 뿐, ‘나’는 끝내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직 얼마간 사랑의 열기를 머금은 ‘이별’ 자체만이 “선한 의식”으로 기록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이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후라면 더더욱. 사랑의 대상이었던 ‘너’는 “재잘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금세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 무연고 시신처럼 /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하고 정리된다(「항구」). 이 같은 시인의 시선은 비정한 것 같기도, 지극히 천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허연 식의 사랑은 조금 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지. 허연의 세계를 곧추세우는 ‘혼자’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하는 엄숙한 표명을. 다시 말하지만, 허연의 세계는 ‘나’로써 이미 완전하다. 무엇도, 누구도 ‘나’와 “비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완전한, 고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그는 수시로 다툴 것이다. 모진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나눈다,라는 헛된 말에 잠시 기대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권태로운 일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며 빚는 내적 긴장 속에서 그의 세상은, 시는 “아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다」)에서 허연은 한결같이 쓸쓸할 것이다. 끝내 완전할 것이다.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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