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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동네 | 2024년 가을호(제120호)

망각지 : 채굴 불가 — 가속류 시 현상에 반영된 인지 자본주의의 (비)상상력

최다영 문학평론

202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 비평포럼이 있다.

“Planning your epic journey from platform A to B?”1)

 

1. 인지 자동화를 추동하는 알고리즘의 내면화로서의 가속류

 

이 글은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2)의 보론으로서 가속류 현상을 인지 자본주의의 무의식적 동기 속에서 살피고자 하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가속류의 가장 중요한 동기인 디지털 플랫폼 장치의 예속(적 주체)화3) 메커니즘을 추적할 것인데4), 동시에 이는 디지털 중세’5)로의 역행이 가속화되고 생성형 인공지능6)이 보편화되는 시대에 시의 창작 주체란 무엇이며 시는 어떤 예술적 실천일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가속류의 결말부에서 후속 논의로 남겨두었던 두 가지 과제, 즉 왜 상당수의 시인들에게 자동 창작 기계와도 같은 매크로 장치의 구축이 지지를 얻는가, 그리고 가속류에 의해 동시대 한국 시의 풍경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도 함께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비관론에 경도되었던 시기를 지나, 최근의 인공지능과 시 논의들은 인공지능을 협업의 도구나 인식론적 성찰의 매개로 인식하는 듯하다. 이들 논의는 인간이란 것이 어떻게 조건화되어왔는지를 되물으며 권력과 위계, 예외주의의 문제를 반성하고 비인간 객체들과의 연결 속에서 형성되는 주체의 위치를 재고한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근대적 주체 모델을 유지하거나 트랜스휴머니즘의 옹호에 가깝게 전개되고 있어7) 이미 가분체인 인간 주체가 창작 과정의 일부 구성 요소로 기능하거나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을 모방하여 사고의 자동화를 구축하는 현상, 인공지능의 독자적인 행위 가능성 등에 대해 적절한 전망을 제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인공지능에 의해 생산된 시가 결과물만 놓고 보면 기존의 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배적인 진단에도 불구하고, 창작 주체의 통일성과 시적인 것에 대한 규범적인 이념을 오히려 굳힘으로써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자동화된 사유 체계를 얼마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몸과 테크놀로지는 이원론적이지 않으며, ‘순간의 빈번한 채널 전환이 디폴트인 가분체 주체에게 그 자신의 지속적인 증강이라는 믿음은 적용되기 어렵다.8) 인지 개념에 대한 전제를 달리한 후에야 창작자와 수용자, 매체로 분할된 기존의 구분이 어떻게 갱신될 수 있는지, 인공지능의 산출물이 각 객체들에게 예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더욱 유효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9)

오늘날 주체의 예속은 신자유주의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으로 더욱 효율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디지털화된 자본주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 장치를 매개로 개별 주체들의 신체와 인지에 대한 포섭력을 나날이 확장하면서 인지 자동화10)와 물질적 추상화를 유도한다. 주지하다시피 주체가 장치를 통제한다기보다 장치가 주체의 행동 양태를 주조하고 회로화된 정동을 생산토록 하는데,11) 이때 채굴주의라는 관점은 인지적 수고의 최소화자동화 생산성의 극대화 수익화라는 자본 기계의 원리를 잘 설명해준다. 인공지능 산업은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뽑아내는 광업과 마찬가지로 추출 산업으로 규정될 수 있으며,12) 디지털 플랫폼은 자동화된 알고리즘의 추출 공정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디지털 토지’13)로서 포획된 정보와 데이터를 무한히 수익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14) 이 유사 광산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데이터로 전환되는 한편, 여타 비인간 객체들과 함께 생산구조 속 부품이자 수탈원이자 정보 생산 자영업자로 복무한다.15) 또 인지 과정이 인지 장치에 외주화되는 영역이 기술 발전과 함께 나날이 확대됨에 따라16) 사고 회로는 이러한 감각을 자연히 체화하고 동기화한다.17) 이처럼 오늘날 인지 자본주의의 데이터 채굴은 알고리즘에 기반한 각 객체들의 데이터 창출 활동을 유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살아 있는 체계들에 관한 지식의 자본화”18)를 강화한다.

그리고 이는 가속류에서 제기한 문제의식과도 긴밀히 맞닿는다. 사이버네틱스와 그 독립된 분과로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시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꾸준히 우려되어왔으나, 실상 작법의 차원에서는 인간 창작자가 기술 매체의 합리성을 모방하는 현상을 보이며, 그렇기에 거대한 단일 세계로의 일원 지향성 또한 빈번히 나타난다.19) 그렇다면 어떤 조건들이 이러한 시쓰기를 추동하는가, 라는 의문을특정 시기에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서 상정된 미적 기준과 현실이 아니라동시대 현실주체의 재정의하에서 탐구하고자 한 기획이 가속류. 가속류는 우리의 인지와 정동, 감각이 알고리즘적 사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기술 장치들에 의해 매 순간 재배치되는 현상을 반영한다. 가속류의 핵심은 인공지능과 시 논의의 벡터를 전환하고 규범적인 주체 모델을 기계-예속적-()주체화에 기반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으로, 가속류를 통해 역으로 발견되는 창작 주체의 형상은 기계적 사고에 예속되며 파편화되거나 확장되는 가분체, 이미 분절된 개인이다.

특별히 이번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건 누적된 정보를 데이터로 전환시키고, 다시 그 데이터들의 데이터(메타데이터)를 다양한 알고리즘으로 모델화하는 정보화의 급진적 연속”20)이 가속류의 또다른 중요한 특징인 재귀적 무한 역행 루프와 순환적 인과관계”(84~85), 즉 망각-리셋 기제로 형상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알고리즘적 사고의 내면화 외에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고 있겠지만, ①자신의 시를 학습하고 망각이라는 특수한 장치를 통해 프롬프트를 리셋하고 이전과 유사한 생산물을 겹이나 누적 형태로 배치하고 한 편의 시 안에서 망각과 리셋을 빈번히 발생시키면서 특정한 플롯 단계나 패턴의 고착에 따라 발생하는 정동 연속체가 일종의 회로를 그리며 반복되는 양상이 2010년대 초중반 이후부터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우세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것이 단순히 각 시인의 개별 시세계 차원에서 분석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암시한다. 인지 개념의 재구성을 강조하는 가속류는 이러한 현상을 해명하는 하나의 유효한 관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21)

 

2. 가속류는 시의 자동 창작을 꿈꾸는가?

 

2016년 김언 시인은 문장 생성기라는 독특한 상상을 내놓는다. 그는 현대시란 시 전체의 주제나 통일성과는 무관하게 바로 앞 문장과 이어지는 다음 문장의 관계에 따라 쓰일 뿐이고, 그렇기에 시구들은 문장들의 누적에서 발생하는 방향성문장들 간의 거리감이라는 두 축에 의해 생성되며, 첫 문장에 내재된 에너지의 성질과 총량이 시의 향방을 규정한다고 보았다.22) 즉 김언에게 현대시는 배신하거나 헌신하는 랜덤한 문장을 생성하여 차례로 배치한 다음 사후적으로 논리를 입히는 것에 가까우며,23) 따라서 최대한 많은 표본 문장과 연상 경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김언에 따르면 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시적 에너지는 데이터베이스에 의해 대체될 수 있고, 에너지혹은 동력이란 질적 수준이라기보다는 패턴화된 데이터 자원(자본)이므로, 문장 생성기는 전통적인 사유’, ‘정서’, ‘체험’, ‘주체를 축적된 데이터로 대리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추출기가 된다.24) 이렇듯 문장 생성기라는 상상에 담긴 욕망은 인지적 차원의 수고를 대리해줄 자동 창작에 대한 욕망이며, 미리 분류패턴화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의 양적 총화가 인지 능력을 질적으로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김언식의 시적 원리에 기반하여 시를 생성하는 기계가 보급된다면, 그리고 단지 를 획득하는 것이 목표라면, 만인이 클릭 몇 번으로 랜덤하게 구성된 시를 획득하여 시인이 될 수 있는 그때 인간 시인의 존재 양상은 어떻게 변화할까. 시인의 역할이 시를 창작하는 게 아니라 추출하는 것이 된다면 창작 주체의 정의도 범위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목적이 더이상 인지적 고투를 즐기는 데 있지 않다는 암시는 시쓰기가 무엇으로 이행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처럼 결과물 획득을 위한 시간을 압축하며 이미 생성된 문장 배치를 점검하는 것으로 시인의 역할을 옮겨놓는 문장 생성기에 대한 상상은 오늘날 성행하는 방치형 게임의 문법과도 맞닿는다.

방치형 게임(idle game)이란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단순 반복적인 플레이를 대리해25) 플레이어가 부재하는 동안에도 전투 등이 자동으로 진척되고 재화가 축적되는 유형의 게임을 지칭한다. 플레이어는 가끔 게임에 접속하여 클릭 몇 번의 적은 수고만으로 게임 진행을 가속하는데, 그리하여 방치형 게임의 플레이어는 직접 플레이에 몰입하는 대신 알고리즘의 관리자이자 관망자로서의 위치를 체화하며, 자동 증식된 자산을 관리하고 획득물을 재분배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26) 여기서 이러한 방치형 게임의 플레이 양식이 플레이어 정체성을 어떻게 규율하는지, 방치형 게임이라는 알고리즘 장치가 어떤 주체를 생산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정한 노동과 시간을 투입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보상이 주어지는 방치형 게임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알고리즘 모성’27)의 환각 아래 역설적으로 상시적 유휴시간(idle time)28)에 머물도록 한다. 또한 대리된 반복 노동으로 획득된 경험치와 재화를 스탯이나 아이템에 재투자하는 것으로 플레이어의 역할이 한정되는 현상은 관리자를 넘어 투자자 정체성이 학습되는 한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29) 그러나 자동 증식에 요구되는 시간의 간격으로 인해 알고리즘 모성이라는 치유적 환각은 지속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강압적으로 연속성을 중단하는 모성의 폭력이 작동한다.30)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보상의 지연을 견디지 못하고 현질을 통해 시간을 압축하도록 유도한다. 이처럼 방치형 게임은 적절한 강도로 플레이어를 훈육하면서 인지적 비용 감축31)과 반복 노동 절감을 효과적으로 실현하여 게임을 무한히 지속하도록 유인한다. 플레이어는 오로지 알고리즘이 불린 재산을 관리하고 증식하며, 한정된 선택지는 나날이 좁혀지기 마련이므로 이번에는’ ‘완벽한 결말을 보기 위해 리셋으로 유도되기도 한다. 리셋은 무한한 자원 채굴과 자동 축적이라는 시나리오와 결합되면서 채굴-분배-리셋(망각)-복구라는 완결 불가의 가상적 감각을 내장하게 한다. 무한한 채굴지라 여겨지는 이 세계는 사실 불모의 땅이며 플레이어들이 고갈시키는 것은 그 자신이지만 이 실상은 손쉽게 가려진다.

, 방치형 게임은 허구적 이상향을 내세워 개인을 투자자 모델로 훈육하는 채굴 자본주의의 비전을 반영한다. 이러한 방치형 게임의 원리는 이미 일상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절연성에 대한 공포, 지속성에 대한 강박, 결말 유보를 위한 망각 루프 등이 지극히 동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 가장 분명한 형상화가 가속류의 한 유형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32) 그들 시의 공간은 게임 인터페이스를 차용하거나33) 의식적으로 인공지능을 모방하는34) 차원을 넘어 그 내부 메커니즘 자체가 방치형 게임처럼 알고리즘화되어 있다.35)


3. 재귀적 망각 루프와 무한히 지연되는 결말

 

2010년대부터 보편화된 시 창작 전략인 리셋-망각의 기제는 이야기의 무한한 지속을 위해 종결을 유보하는 것처럼 보인다.36) 반복하기 위해서 망각하고 시구를 생산하기 위해 반복을 통해 완결을 거부하는 것이다. 혹은 역으로, 망각하기 위해 반복을 누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망각-리셋의 유형으로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일종의 가상 세계관을 구축하고 시공간을 압축하는 장치를 도입한 후 이를 반복 활용하는 경우이다.37) 이때 리셋과 반복의 동기는 주로 이번에는’ ‘실패 없는 완벽한 엔딩을 맞겠다는 목표에 있다.38) 그렇기에 일부러 실패함으로써 다시 반복하는 양상 또한 자주 발견된다.39) 그런가 하면 이런 리셋-망각 가제는시를 떠받치는 존재 조건을 넘어 리셋과 망각 그 자체를 위해 시가 쓰인 것처럼종종 자기 자신의 재귀성을 극도로 밀어붙이는 수행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결과를 정보로 수용해서 다시 내보내는 피드백을 통해 자기 조직화를 이어나가는 메커니즘의 무한 반복은 마치 자신의 시세계 속에 시구를 증식하는 알고리즘을 삽입해 자동 반복하는 것과도 같은데, 이러한 되먹임 장치를 가장 활발하게 사용하는 시인으로 문보영을 들 수 있다.

책기둥(민음사, 2016)에서 나타나는 문보영 시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시에 서사를 구축하고 그 내부에 다층적 플롯을 삽입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무언가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그들이 쓰는 글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다시 파생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시가 중층 메타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앙뚜안’ ‘지말’ ‘스트라인스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 시인으로 구체화되기도 하는 이들은 여러 시에 출연하여 시를 쓰고 시에 대한 그들만의 서사를 축조해나간다(「공원의 싸움」 「그녀들」). 40)「파리의 가능한 여름또한 이 전체 멀티 플롯이 하나의 전능자의 눈에 의해 관찰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인은 이전까지의 내용이 단지 한 마리의 파리가 등장하는/어떤 시일 뿐이며 그것이 결국 시작 노트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세 시인이 시작 노트를 두고 다퉈도 결국 그들은 어느 시인의 시작 노트 속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노트를 덮는다. “그리고/생각한다”. “시 쓰기는 참으로 쓸모 있는 인간의 놀이라고. 나아가 문보영은 이 구조를 변용하여 리셋의 활용이 시를 전개하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증거한다. 시를 이어가기 위해 빈번히 동원되는 기억상실은 여러 시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며 문보영 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한편으로 무한 연장의 장치로 기능한다.

 

나는 그녀에게 뭔가를 물었고, 그 질문은 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녀는 알아들었으며, 그녀는 왼쪽 코너를 돌면 복도 끝에 청소 도구함이 나오니 거기서 쉬면 된다고 말했다. 내 질문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내가 공항에 온 이유는 아픈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 묻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영 다른 것이었다. 학교 가는 길을 알려주세요. 그 질문을 던지자 나의 내면은 모든 임무를 마친 것처럼 평온해졌다. (…) 나는 다시 하얀 숲 앞에 섰다. 눈이 내렸다. 세상을 재우듯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커다란 이불이 내려와 세상을 덮는 것처럼. 엄마는 어디에선가 아파하고 있다. 나의 내면은 고요하다. 나의 불안은 조금씩 자라 나의 선생님이 된다.

―「모르는 게 있을 땐 공항에 가라」41) 중에서

 

공항에서만 질문을 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선생님은 공항 가는 길을 알려주는 사람일 뿐이다. ‘는 아픈 어머니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공항까지 왔으나, 그곳에서 결국 내뱉게 되는 말은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알려달라는 질문이다. ‘는 마치 잊어버리기 위해 공항에 도달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안전하게 잊어버리기 위해 저장한다. 저장했다는 안심이 망각을 위한 자유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의 동선은 학교공항’ ‘하얀 숲이라는 최소한의 맵으로 한정된다. ‘의 뒤를 따라오는 빈 공간은 망각의 현시로서 하얀 숲과의 분리 불가능성을 암시하며, 눈 내리는 하얀 숲 앞에 다시 선 의 모습은 망각지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다시 자라난 불안은 지금까지 다른 선생들이 그랬듯 그 또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공항에 가라는 동일한 명령어를 반복할 것임을 암시하며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린다. 마찬가지로 옆구리 극장」(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에서 극장을 나오자마자 급작스럽게 채널을 이동하듯 망각의 영역에 진입하고, 바로 그 때문에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도록 유도된다. 그리고 이 일을 복도를 살아내면서 반복한다”.

이는 책기둥에서 책을 다 읽어버리면 더는 읽을 책이 없을까봐 책을 읽지 않던 사람 a’, 모든 1권을 숨겨서 시작을 막고 읽히는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호신」). 시집에 빈번히 등장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망각을 통해 기록물이 영원히 보존되리라는 환상을 지속한다는 점에서 데이터 센터의 논리와 유사하다. 기술 장치는 망각으로부터의 안전을 담보하는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우리가 빠르게 망각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망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매체에 기억 보관을 일임하여망각이 추동되는 양상은 문보영 시의 독특한무의식인 동시에 오늘날의 보편적인무의식이기도 하다.

이렇듯 산출 결과물을 다시 학습하여 순환적 인과관계를 조직하고 무한 겹메타의 되먹임을 만드는 문보영의 되먹임 장치는 일종의 사이버네틱스 루프를 형성하며 정동의 순환을 형성하고 그 회로화가 무한히 축적되도록 한다. 마치 자리를 비운 플레이어가 다시 귀환(회귀)할 때까지 반복 실행되도록 설정된 타임 루프처럼, 과부하로 인해 혼자서는 다 감당할 수 없(지만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 반복되어야만 하)는 정동을 종이 뇌에 일부 이양한 듯이.42)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게임 속 포털 장치 혹은 매체 간 즉각적인 채널 전환과 같은 시간과 공간의 압축, 리셋이 빈번히 동원됨에 따라, 물질적 차원의 상상력은 쉽게 소거되고43) 사유의 역사적 축적 또한 어려워진다. 완결 지연이 내포한 지속성, 연속성에의 강박은 인식의 깊이가 축적되지 않으면서 늘 최신 업데이트에 열려 있는 동시대 의식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44)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차단된 채 오로지 영원한 현재에 머무는 것은 어느 정도 보편화된 동시대의 감각이기도 한데, 이는 약속된 채굴의 보상으로서의 현재가 무한하리라 착각하게 하는 장치들과 그로 인한 예속화 과정에서 연유한다.45) 때문에 시 내부 알고리즘이 보편화될수록 유의미한 사회적 상상력의 여지는 부지불식간에 축소되는 한편, 의도와 무관하게 영원화라는 자본주의의 이상이 얼마간 대리되고 재생산된다.46) 풍요의 환상을 걷어낸 망각지는 실상 채굴 불가의 땅이다.

 

4. 탈역사적 압축과 미래의 시적 실천

 

그렇다면 가속류는 어디로 나아가게 될까. 앞서 김언식의 문장 생성기에 제기되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문장 생성기가 보편화된다면 창작 주체라 일컬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또 창작자와 물질 매체, 수용자의 경계와 상호작용은 어떻게 달라질까. 축적된 데이터가 커먼스47)로서 공유된다는 가정하에, 특권적 창작 주체가 소거되고 익명의 시쓰기가 보편화되는 미래를 상정해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라는 호명은 데이터 구축 노동, 알고리즘의 추출 활동과 산출물의 검열 및 재배치, 물질적비물질적 장치들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들의 연합적 창작 모델을 일컫게 된다. 산출물의 다양성은 최대한 많은 객체들의 개입과 참여에 의해 확보된다.48)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장 생성기와 같은 원리로 산출된 텍스트에 대한 권리가 저자에게 귀속되지 않으므로 시인의 신성화 혹은 물신화가 불가능해진다는 전제이다. 이는 익명을 표방하의인화된 사유 관습의 추방”(85)하는 가속류의 방법론이 그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가령 배시은과 변혜지의 시에서 이나 얼굴로 상정된 주체성고유성은 곧 비워져 있는 매체의 자리나 다름없는데,49) 때문에 주체라는 경험(이자 자리)어떠한 인격체도 커스터마이즈하여 활성화를 거듭 반복할 수 있는 다회용 공용 장”(같은 쪽)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누구나 익명의 자리에 자신을 기입하여 발화를 이어붙일 수 있다. 즉 가상 인터페이스처럼 기능하는 가속류는 광장시를 넘어 광장으로서의시를 향한 공동 프로젝트에 가장 최적화된 모델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가속적 몽타주”(88)를 통해 가속류의 독특한 유형을 제시했던 성다영의 시를 떠올려보자. 성다영이 주로 활용하는 단문의 절합 원리짧은 행 단위로 특정한 주제들이 빈번히 전환되는 모습은 마치 알고리즘적 피드를 연상케 한다. 알고리즘적 피드가 유저를 무한 스크롤에 놓이게 하여 인지의 탈숙련화를 유도하는 것이라면, 한편으로는 더 잘게 분열된 개개인이 아주 다른 목소리들과 무작위적즉각적으로 접속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즉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형식상) 동일한 층위에서 무한히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데 성다영의 가속류가 유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누락된 목소리를 찾아서 연결하고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내포 시인의 역할이 중요하게 요구되지만, 이는 실제 시인이 특권화되지는 않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작업이 될 수 있다.50) 시쓰기의 허들을 낮추고 비선형적 연쇄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입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이 공동 창작의 기획은 발화의 특권성이 광장에 있는 모두의 몫으로 돌려질 때 의의가 있다.

문학은 당대 현실과 시대감각의 가장 첨예한 재현일 뿐만 아니라 수용자로 하여금 시대적 명령을 체화하고 그 형식을 학습모방하도록 하는 재생산 장치이기도 하므로, 가속류가 내면화한 플랫폼 알고리즘의 문법은 가속류의 독자들에게도 각자의 인지 회로를 자동화하여 시 창작에 알고리즘 장치를 도입하도록 권유한다. ‘당위적현실이 아닌 한에서, 이들은 인지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현실의 정언명령에 부합하는 한편, 세계가 같은 증상을 공유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어떤 의미에서 가속류는 이미 인지화된 기술 장치와 공동 창작을 수행하는 시인 것이다. 이때 창작 주체들이 특별히 기계를 선망하거나 탈인간-되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것이 아니라, 작금의 물적 조건과 장치들이 매체의 속성을 내면화한 주체와 시적 양식을 생산한다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에 더 채굴할 것이 없어 보수화되고 고착화된 창작 규범을 갱신할 다른 상상력과 실천들이 요구되며, 이는 더욱 다양한 형식들의 경합을 활성화하면서 동시대 시가 갈 수 있는 아주 많은 길을 내”(93)게 될 것이다. 가속류는 그 진원지의 이름이다.


  • 1) 김아영의 영상 작품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2017) 속 문지기의 말이다, ‘다공성 계곡연작에서 거주지가 파괴되어 포터블 홀을 따라 끊임없이 표류하는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형상은 광물과 석유 자원의 무분별한 적출로 인해 텅 비어버린 지하의 구멍, 비트 로트(bit rot), 강제 이주되는 난민, 행정 서류에 기입되지 못해 비가시화되는 예외자들, 물질적 기반을 따라 전 세계로 운송되는 데이터의 흐름과 겹쳐진다. 이처럼 다면적 이주의 양상들이 포개지고 중층화되는 모습은 오늘날 정착 식민주의의 물리적 운송에 관한 가장 적확한 비유처럼 보인다. 김아영, 「서문다공성과 당혹감에 관하여」, 김아영 외,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일민미술관, 2018, 43.
  • 2) 투고자, 「동시대 가속류 시의 생산 조건과 가능성」(이하 가속류」,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은 우세화되고 있는 가속류 창작 기법을 중심으로 동시대 시의 경향을 살펴보고자 한 시도이다. 물론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시인마다 상이하며, 그들도 모든 시를 가속류라는 장치에 의거하여 쓰지는 않는다. 가속류라는 틀은 동시대의 특정한 현상을 들여다보기 위해 도입한 무수한 관점 중 하나일 뿐이므로, 다른 기준에 의한다면 각 시는 다르게 분류되고 분석될 것이다. 이하에서 이 글을 인용할 경우에는 본문에 쪽수만 표시하며, 관점으로서의 가속류와 방법으로서의 가속류는 표기상 구분하지 않기로 한다.
  • 3) 기계적 예속이란 권력의 개별 주체화와 함께 사회적 복종 기제를 형성하는 것으로, 플랫폼 자본주의의 권력이 주체에게 작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마우리치오 라차라토, 기호와 기계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신병현심성보 옮김, 갈무리, 2017.
  • 4) 형식적 자기 복제를 통해 단기간에 시구를 대량생산하는 인지 자동 장치로서 가속류는 압축적추상적인 가상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체화한 것처럼 보인다. 질적 다양성보다 양적 패턴 확보를 목표로 하는 가속류 장치는 생산 알고리즘의 원리를 적극 옹호하는 좌파 최대주의의 비전과 닮아 있으면서도, 때문에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강화하고 탈물질적 환상 주조에 공모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을 남긴다.
  • 5)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외주의 외주화가 상시화됨에 따라 이윤과 지대가 결합한 형태로 부가 축적되며, 자영업자로 정체화된 개인들의 인지적 분업으로 헤테로메이션이 형성된다. 이는 중세 경제모델로의 회귀와 유사하다는 면에서 디지털화된 중세로 일컬어진다. 신현우,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에서의 헤테로메이션 연구―‘인지자동화는 잉여노동을 어떻게 포획하는가?」, 한국언론정보학보 118, 2023, 143.
  • 6) 인공지능 논의에서 폭넓게 공유되는 비판적 시각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인공지능은 소수 특권층의 자본 증식을 위해 다수 사용자의 데이터를 착취하는 식민적 장치다. 디지털 플랫폼은 데이터 추출주의(extractivism)에 최적화되어 있다. 둘째, 물리적 조건의 비가시화 문제이다. 흔히 서버-클라우드는 무한하고 친환경적인 데이터 저장고로 상상되지만, 여기에는 데이터 센터의 화석연료 의존으로 인한 자원 고갈과 환경 문제, 블랙박스화 혹은 고스트 워크로 대표되는 노동력 착취의 문제가 긴밀히 얽혀 있다. 셋째, 인공지능은 지능이 아니라 알고리즘 패턴의 통계학적 집적에 불과하다는 비판이다. 더불어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인간의 인지능력과 창조 능력은 저해되는데, 이는 인지를 외주받은 인공지능이 단축된 미디어 경로를 굳힘에 따라 더욱 심화된다. 넷째, 슬롭(slop)과 스크래핑(scraping)의 문제가 있다. 슬롭이란 투입되는 데이터 원료의 품질 하락에 따라 합성물의 질적 저하가 발생하고 인공지능이 그 합성물을 다시 학습하면서 연쇄적인 데이터 부실로 이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광범위한 표본 데이터의 확보 없이는 질적 저하를 피할 수 없으므로 데이터를 무작위로 포획하고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스크래핑 등 윤리적 차원의 문제 또한 발생한다.
  • 7)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적 이성과 테크놀로지의 개입을 통한 살아 있는 물질의 자본화를 인간을 강화하는 한 방법으로서 긍정한다. 그리하여 규범적으로는 신휴머니즘의 윤리적 가치의 담지자로서 개인을 복권시키고, 정치적으로는 경제적 신자유주의와 연동되어 있다”. 또한 캐서린 헤일스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적 분리를 답습하고 정보의 패턴으로서 정신을 물질의 구현보다 특권적 지위에 놓는다고 비판한다.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페미니즘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혁의 힘, 윤조원이현재박미선 옮김, 아카넷, 2024, 30, 110~115.
  • 8) 초선형적 채널 전환의 감각에 대해서는 실비오 로루소, 「사용자 조건컴퓨터 주체성과 행위」, 새로운 질서 그 후 엮음, 박재용 옮김, 투명한 장벽, 플랫폼을 배반하기, 새로운질서그후, 2022, 74.
  • 9) 이와 관련해 강지희의 언급은 자율적인 개인상의 회복이라는 전제 자체를 비판하면서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상상력이 바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어 주목된다. 강지희는 이를 바탕으로 “‘저자의 시대이후의 저항을 완전히 다른 범주에서 상상해볼 수도 있음을 강조하는데, 그 제안대로 감상자나 결과물에 기반해 범주를 재구성한다면 개인의 창작물로 귀속되지 않는 예술형식과 그 역할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강지희, 「AI 시대, ‘인간 없는 예술의 도래 앞에서」, 문학동네 2024년 여름호, 418.
  • 10) 이광석은 오늘날 우리가 의식 자동화라는 자동화의 3차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강조하면서, 생성형 인공지능이 지식 생산과 창작활동을 급격히 자동화하는 현상을 두고 정신노동 측면에서의 인간의 기능 저하에 대한 우려를 드러낸다. 이광석, 「아마추어 리믹스 문화의 레퀴엠―AI 합성 미디어 자판기를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차라!」, 퍼블릭 아트 20247월호, 98.
  • 11) 이데올로기는 사변적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장치의 수행이 생산하는 믿음이자 더 나아가 주체를 대리하는 장치들의 믿음이라는 알튀세르의 언급을 상기해볼 때, (‘국가 장치에 대한 개념 수정이 필요한 것과 별개로) 오늘날 인공지능 플랫폼은 동시대 가장 유용한 이데올로기 생산 장치일 것이다. 물론 그 이데올로기란 삶의 수익화로의 전환이라는 단 하나의 명령이다.
  • 12) 케이트 크로퍼드, AI 지도책세계의 부와 권력을 재편하는 인공지능의 실체, 노승영 옮김, 소소의책, 2022, 37. 그에 따르면 AI 시스템의 생성과 유지를 위한 광물자원과 에너지, 노동 자원, 데이터의 무작위적인 대량 수집은 모두 추출로 규정할 수 있다. 크로퍼드는 이를 바탕으로 무형의 청정 기술로 상상되(도록 정치화되)는 인공지능이 지극히 물질 기반적이며 착취 구조를 공고히 하고 있음을 논증한다.
  • 13) 플랫폼 수수류가 이윤이라기보다는 지대이므로 자본이 지대(rent) 의존적인 체제로 전화하는 현상은 주목을 요하는데, 이는 지대 중심의 봉건 체제가 이윤 중심의 자본주의로 발전해온 근대화 역사를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토지로서 디지털 플랫폼은 메타데이터라는 지대를 수탈함으로써 착취 구조를 공고히 한다. 지대로 수취되는 잉여가치는 인간-비인간의 데이터 노동의 산물이지만, 비고용 형태이므로 임금은 지불되지 않는다. 조정환,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인공지능과 인지노동」, 문화과학 2021년 봄호, 67~69. 이와 같은 이윤에서 지대로의 이()행은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결합, 수탈자의 생산과정 밖으로의 전위를 시사한다. 같은 글, 70.
  • 14)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을 가리켜 윤원화는 생산유통판매소비가 동시에 일어나고 그 잔재들이 퇴적되는 아카이브 겸 폐기물 처리장, 또한 그렇기에 잠재적 수익화를 내장한 광산이라 일컫는다. 윤원화, 「땅을 파는 손」,  2024년 상권, 377~378.
  • 15) /오프라인의 영역이 무화되는 오늘날 현실은 가상으로의 포섭이 가속화되는 데이터 사회라 할 수 있다. 데이터 사회란 인간 신체의 모든 발화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자원들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중심 추동력이 되고 데이터 알고리즘(프로그램된 명령어)을 통해 자본 가치와 신체 통치를 구성하는 신흥 테크노자본주의 사회를 의미한다. 이광석, 데이터 사회 미학테크노자본주의 시대 아티비즘, 미디어버스, 2017, 8.
  • 16) 반데카르트적 인지과학은 인지 과정이 뇌에 한정되지 않으며 신체 및 환경 구조가 그 일부를 구성함을 전제한다. 외부 구조에 담긴 정보를 이용 가능하게 변환지각하는 것이 인지의 일부를 구성하기 때문에, 외부 형식을 구축하여 정보를 저장하는 일은 기억 과제를 환경에 떠맡겨 생물학적 기억의 부담을 분산한다. 그리고 이는 내부에 알고리즘을 설치하여 인지적 수고를 이양하는 가속류의 기본 원리가 인지적 비용을 절감하려는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암시한다. 마크 롤랜즈, 새로운 마음 과학확장된 마음으로부터 체화된 현상학까지, 정혜윤 옮김, 그린비, 2024. 더 나아가 인공지능은 몸이 부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각자를 몸으로 취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인공지능이 물질적 기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시각이다. 인공지능은 우리 신체와 인지를 나눠 가짐으로써 숙주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실행실현한다.
  • 17) 이는 단순히 신체 기관의 연장으로서 기능하는 테크놀로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처럼 사고한다는 것, 곧 장치적 사유에의 예속과 그 재생산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기계적 연동을 확장하는 트랜스휴먼의 역량인간의 역량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 글에서 전제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은 기존의 현실 질서와 휴머니즘이 공고히 유지되는 중에 새로운 인식을 도입하는 도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가 지각되고 이해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물적 토대이다. 케이트 크로퍼드, 같은 책, 29. 강조는 인용자.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넘어, 근대적 인간상을 전제로 규범화된 지각인지사고 체계, 물적 하부구조 자체를 급진적으로 해체하고 재배치하는 양상을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18)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책, 102.
  • 19) 이러한 일체화된 시스템으로의 통합은 곧 과학기술의 정신을 하나의 중앙집권적 기술 권력으로 조직화하고자 하는 테크노토피아의 비전이기도 하다. 신현우, 「프로메테우스의 유토피아자본주의 소셜 픽션(Social Fiction)’을 지양하는 미래 기술정치의 재구성」, 문화과학 2022년 가을호, 44. 그리고 이는 단 하나의생태계를 통해 지배적 관점을 확립하고자 하는 인공지능 산업의 식민주의적 충동에 포섭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케이트 크로퍼드, 같은 책, 21.
  • 20) 조정환, 같은 글, 62.
  • 21) 마크 롤랜즈는 인지의 내용이 아니라 인지의 매개체에 주목하여 인지 과정을 신경적신체적환경적 구조와 과정의 연합체로 간주하는 연합된 마음 이론(amalgamated mind)’을 주창한다. 이는 마음이라는 근원이 있어 거기에 어떤 속성이 달라붙는다는 식의 흄적 사고나, 동일한 행위가 같은 마음을 구성한다는 구성주의와는 변별된다. 이 글은 심적 과정을 연합으로 상정한 그의 관점을 따른다. 마크 롤랜즈, 같은 책, 147, 329.
  • 22) 김언, 「언제 올지 모르지만, 이미 오고 있는, 문장 생성기에 대한 고달픈 명상」, 현대시학 20164월호, 55.
  • 23) 그가 유하의 눈을 위한 시와 비교하여 이수명의 시 하양 위로를 배반의 논리로 읽는 방식을 보라. 같은 글, 54.
  • 24) 같은 글, 56. 즉 그는 인지적 수고를 들인 시 쓰기와 우연의 산물에 사후적으로 논리를 부여하는 작업의 생산물이 결과적으로는차이가 없다고 본다. 인공지능의 우연적 배치 역시 방향성거리감의 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기에 시 창작은 충분히 자동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 25) 이상우는 방치형 게임이 인기를 얻는 이유가 단순노동으로 변질된 게임의 반복 구조를 자동 기능이 대리해주어 시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상우, 「보는 게임, 그 충족되지 않는 욕망핀볼과 월드플리퍼 사이에서」, 게임제너레이션 3, 2021, 9.
  • 26) 박이선, 「스스로 움직이는 게임방치형 게임에서의 플레이들」, 게임제너레이션 3, 2021, 18
  • 27) 덩 젠은 방치형 RPG의 플레이어가 알고리즘이 계획한 게임 경로에 따라 움직일 뿐 게임 경험의 창조에는 개입할 수 없어 감수성이 수동화되는 양상에 주목하여, 이를 무조건적 보살핌을 자동으로 제공하는 알고리즘 모성에 자아를 양보한 것이라 비판한다. 덩 젠, 「방치형RPG 비판동시대 게임의 사회적 상상력의 문제」, 홍명교 옮김, 게임제너레이션 17, 2024, 99.
  • 28) 이는 알고리즘적 피드 생성 모델의 방식과도 흡사하다. X(트위터)와 같은 SNS의 알고리즘적 피드는 마찰의 요소를 최소화하여 유저를 무한 스크롤 상태에 놓이게 하며, 여기에는 유저를 인지의 무한 휴지 상태로 포섭하고자 하는 플랫폼 알고리즘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실비오 로루소, 같은 글, 67~68.
  • 29) 중요한 것은 이 투자가 신중한 선택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플레이어는 유도된 대로 움직일 뿐 사실상 선택지는 없으므로 그저 진정한 결말을 유보한 채 상시 활성화 상태에 있게 된다는 점이다. “게임 노동자에서 자산 소유자로 정체성이 변모함에 따라 플레이어는 자동 증식하는 캐릭터, 장비, 소품, 화폐 등 개인 자산을 관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산의 포트폴리오와 리스크를 신중하게 최적화하여 게임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동 전투에 참여한다.” 이제 플레이어는 관리자의 상상력을 게임 경험으로 획득하면서 기업주처럼 제스처를 취하고 지시하며 알고리즘 작업자가 자동으로 명령을 수행하도록 감독하고 규제하며, 이는 현대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 덩 젠, 같은 글, 108~109.
  • 30) 같은 글, 110.
  • 31) 박이선에 따르면 방치형 게임의 중요한 유인 동기는 집중, 몰입, 관심이라는 인지적 자원을 절약하는 데 있다. 박이선, 같은 글, 18.
  • 32) 가속류 시의 가장 일반적이고 급진적인 예시들은 가속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 33) 최근 오 년 이내의 주목되는 예로 문보영의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를 비롯해 던전에 대한 상상력이 두드러지는 서호준의 소규모 팬클럽(파란, 2020)엔터 더 드래곤(파란, 2023)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시집에서도 내부 메커니즘의 알고리즘화가 함께 발견되기도 한다.
  • 34) 정끝별에 따르면 김승일은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문학과지성사, 2019)에서 적극적으로 “‘기계-되기’, ‘인공지능-되기를 기획하여 기계(인공지능)를 작동시켜 학습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입력된 키워드(지시체)’대로 써내는 엠에프(머신픽션)라는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를 선언한다. 정끝별, 「인공지능 시대 한국 현대시의 생성시학」, 이화어문논집 60, 2023, 105.
  • 35) 김유림의 별세계(창비, 2022)는 메타 화자 김유림으로 하여금 “‘꽃나무장미주택이 있는 종암동’ ‘골목이라는 한정된 동선을 중심으로 걷고-보고-생각하는 연속적인 행위 다발을 반복적으로 구축하도록 한다. 이는 마치 행위 연속체가 만남 달성이라는 목적을 위해 추동되는 한편 그리움 극복이라는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해 가상의 맵 구간에 고착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종의 순환 회로를 그리며 반복되는 정념과 상념들은 같은 장소에서 중층적으로 포개지며 레이어를 축조하는데, 이후 이 레이어를 관찰하는 시선들의 분할 양상과 내부 행위 주체의 코스 이탈 등은 김유림을 여느 가속류와 차별화하는 점이다. 한편 축적된 기억이 (…) 반복을 발생시키는양상은 이후 살펴볼 방치형 인지-기계의 설치와 그 효과를 암시한다. 투고자, 「S#_회귀하는 꿈과 발산하는 꿈이지아, 이렇게나 뽀송해(문학과지성사, 2022) 김유림, 별세계(창비, 2022)」, 문학과사회 2022년 가을호, 324~326.
  • 36) 리셋-망각의 기제가 전개를 추동하는 양상“2010년대에 보편화된 시 창작의 전략이기도 하며 이후 온라인 게임의 법칙과 적극적으로 연동한 형태로 심화되고 있다. 2000년대의 만능 환상 세계와 달리 최근에는 가상에서조차 패배하고 심지어 스스로 패배를 자초하는 양상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데그 목적은 이야기의 무한 지속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투고자, 「망각을 위한 아르케이온」, 문학동네 2023년 가을호, 35.
  • 37) 가령 김종연의 「A-long take film」(월드, 민음사, 2022)은 이유야의 일인조(파란, 2022)의 세계관과 유사하게, 가상 환경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장면을 그린다.
  • 38) 조시현의 크리피파스타」(아이들 타임, 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캐릭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 다시/시작하시겠습니까?//▶ Yes/No”라는 메시지를 띄우는 인터페이스는 망각이 전개를 추동하는 대표적인 예를 보여준다. 같은 시집의 아이들 타임에서는 게임의 완결을 지연하며 일부러 고착되는 양상, 누군가 관찰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인식 또한 드러난다. 이와 유사하게 변혜지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에서도 완벽한 엔딩을 위한 리셋이 종종 그려지며(“이번에도 완벽한 엔딩에 실패했다고/신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린다 (……) 시스템을 초기화하시겠습니까?”, 「누군가 또다시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내가 태어나는 꿈」, 「예쁜꼬마선충등은 관찰의 무한 소급 장치를 대표한다. 이때 길게 뻗어 가상 세계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손가락은 외부 세계의 플레이어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다(「꿈이 긴 팔을 뻗어」). 이는 앞서 본 월드에서도 빈번히 발견된다.
  • 39) 이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투고자, 「마음이라는 텅 빈 필드김지민 저글링」, 배시은 소공포, 이유야 일인조」, 서정시학 2023년 봄호, 255~259.
  • 40) 공동창작의 시는 이러한 특징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시와 독자에 대한 견고한 분리적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시를 기웃거리는 독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독자로부터 시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이 공동 창작은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혹은 연단의 시인들이 수행하는 공동 창작과는 그 성격이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이 세 시인이 각자 독자와 재밌게 놀았다는 사실이 강조되면서 당초 이들의 공동 창작의도가 독자와 노는 것에 있었음이 밝혀지고 이전까지의 시적 흐름을 배반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내부 침잠 속에서 가능해지는 이 자기 자신과의 놀이는 시인 자신들을 한 쌍씩 더 만들어내면서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 41) 문보영,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문학동네, 2023.
  • 42) 자아의 가상화가 특정 세대의 생존 전략이며 현실의 자아가 살아 있다는 실감을 회복하고자 아바타 자아의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박상수의 주장에 대해 제기한 의문(투고자, 「망각을 위한 아르케이온」, 35」)에 견해를 덧붙이자면, 동시대 시에서의 망각-리셋 루프는 어떠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정동을 축조하거나 무의지적으로 거대 의지에 포섭되어버린 것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보다는 시 내부에 환경의 정보 보유 구조를 설치하는 양상 자체가 지닌 의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방치형 인지-기계는 그들의 인지의 일부로서 이미 구축된 구조를 다시 실행하는 것만으로 시구를 양산할 수 있는 동시에, 해소되어야만 하는 정동을 각 기계에 분배하고서 반복 운동을 시키기에도 유리하다. 지면 위에 공간화된영원히 현재에 갇힌특정한 시간이 창작 주체와 유리된 채 가속되고, 그 부산물이 다시 시구로서 되먹임되는 것이다.
  • 43) 가분체 주체의 순간 이동이라 할 수 있는 플랫폼 A에서 플랫폼 B로의 즉각적이고 매끄러운 채널 전환과 그러한 시간성 압축의 감각은 플랫폼을 떠받치고 있는 실제적인 물적 조건들에 대해 상상할 여지를 축소시킨다.
  • 44) 결말이란 불편한 충격이자, 항상 최신 업데이트와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라고 주문하는 기술 제일주의에 방해가 되는 존재이다.” 우리 각자는 완벽한 연속성을 향한 끝없는 노력에 복무하도록 동원된다. 그래프턴 태너, 포에버리즘, 김괜저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4, 37.
  • 45) 역사성의 부재는 리믹스와 변별되는 생성형 인공지능 결과물의 주요한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광석, 같은 글, 99. 윤원화는 인공지능에 의해 무한히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 특정한 관점과 인류의 집단적 기억이 모두 용해되고 해체되어 역사성을 상실한 이미지를 데이터-석유라 비유한다. 어쩌면 이 데이터-석유의 스펙터클은 문장 생성기의 아카이브 추출 방식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윤원화, 같은 글, 378.
  • 46) 일부러 노스탤지어를 생산-제거-재생산-제거하는 것은 자본의 중요한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노스텔지어라는 비생산적인 감정적 동요를 억제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영원화(foreverizing)’ 과정이 소비와 선택이라는 환상을 통해 작동한다. 클라우드 아카이빙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프턴 태너, 같은 책, 21. 노스탤지어 콘텐츠의 폭증으로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착각되지만, 실제로는 노스탤지어의 정복 심리를 포지셔닝한 수익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들이 완결 지연 등으로 노스탤지어를 더욱 생산해내거나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익힐 기회를 앗아감으로써 노스탤지어의 제거 필요성을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압박속에서 수익을 얻는 것은 소수 기업에 불과하다. 같은 책, 36.
  • 47) 커먼스(commons)국가나 자본에 속하지 않는 공통재로서 배타적 소유권이 아닌 공동 관리와 공유, 탈중앙화와 집합 행위를 통해 쌓아올려지는 네트워크의 부를 구조화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비정형 데이터 또한 재산권에 귀속되지 않는 커먼스에 포함될 수 있다. 신현우, 알고리즘 자본주의신경망, 인공지능, 비인간 시대의 자본과 노동, 스리체어스, 2024, 111.
  • 48) 이러한 산출물이 예술작품인지에 답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예술의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는 흔히 예술가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나 제출된 예술작품의 예술작품임에 대한 승인의 문제가 쟁점으로 다뤄지곤 하는데, 전자는 스스로 작품의 완성을 승인할 수 있는 평가 능력과 의도의 문제를, 후자는 설득과 사적 개념화의 문제를 내포한다. 김재인은 인공지능의 산출물이 수용자에게는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자기 평가가 불가능하기에 그 자신이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김재인, AI 빅뱅생성 인공지능과 인문학 르네상스, 동아시아, 2023, 53~57. 이는 이동휘가 언급한 예술 개념임의 설득 차원이 부재한 채 그 판단이 인간에게 맡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동휘, 「예술은 사적이다」, 이여로이동휘,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언어이론, 미디어버스, 2022, 34. 시 생산 과정에서 인지 활동 자체가 소거되다시피 한 인공지능의 시는 독자가 직접 예술작품성을 수립하고 설득하는 일을 더욱 적극적으로 요구함에 따라 수용자 관점에서의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의 가능성을 연다. 여기서 자신이 획득하거나 배합한 시를 스스로 해석하고 비평하는 과정, 즉 김언처럼 사후적으로 내적 논리를 구축하는 다중의 개입 활동이 예술활동으로 승인될 수 있다. 그 유용한 방법 중 하나로 제안되는 것이 행위적 서사의 창작이다. 투고자, 「비평 게임 설계하기변혜지,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고선경, 소다수와 샤워젤(문학동네, 2023)」, 문학과사회 2024년 봄호, 260~261. 한편으로 이는 상시 활성화된 비평 주체의 유입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 49) 주체는 철저한 익명의 개체로서 자신을 숨겨 일체화된 시스템 아래 귀속되고 몸은 그저 공유된 사고가 저장되거나 옮겨가는 매개로 활용”(86)될 뿐이다. “얼굴을 잃어도 마음이 계속됩니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사랑이에요……”(변혜지, 「탑독」,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 50) 이러한 시 창작 과정에서 특권적 인간으로 상정되는 시인의 창조적 능력을 발견하려 하거나 시인이 창조적 원천으로 여겨질 때 기만적인 이율배반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가속류를 활용한 광장으로서의 시에 대한 상상은 시인 개인의 차원에 맡겨진 몫이 아니라 지금의 장치와 제도, 관습의 개편 속에서 가능한 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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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억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시적인 미래에 대하여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 2 1) 박동억 1. 미래 상실 현대시에는 미래를 그려낼 가능성이 남아있을까. 이것이 송현지 평론가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격월평을 읽으며 떠올렸던 질문이었고, 이 글의 저자 또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동시대의 시를 살핀 뒤 조심스럽게 해답을 구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송현지는 어떤 찬사나 비판도 유보한 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이제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멀고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바로 다음 시간. 현재와 ‘1인치 정도’ 다른 자리와 높이에 머무르는 시간.”2) 이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구체적 생활에 기대어 미래가 표현되고 있음을 해설하는 내용이지만 곱씹어볼수록 오히려 현대시가 내포한 문제를 암시하는 듯한 문장이기도 하다. 냉소적으로 읽는다면, 이것은 현대시에서 그려낸 ‘미래’가 자연재해나 사회의 변혁과는 거대한 사건과는 무관한 다락방에서 일어나는 사건, 아니면 고작 생활 반경의 ‘1인치 정도’ 둘레에서 일어나는 몽상에 지나지 않다는 진단처럼 들린다. 다시 묻자. 누군가는 사이보그와의 공존을 꿈꾸고 누군가는 화성 개척을 꿈꾸는 이 시대에 시인은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통찰했듯, 사람은 시간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없고 단지 물질의 움직임으로부터 유추할 뿐이다. 한편 시인은 물질의 운동이 아닌 마음의 운동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길을 택한 자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지난 수백 년간 마음의 변혁을 꿈꾸며 때론 시대의 선구자를, 때론 사회의 혁명가를, 때론 세계의 카나리아를 자처해 왔다. 그러나 동시대의 시가 사람의 마음을 ‘1인치 정도’ 움직이는 데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이 시대의 시인은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즉 주어진 인간성의 파수자를 자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미래에 대해 상상하기를 포기하는 자세가 아닐까. 어제처럼 직장에 출퇴근하고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들여다보다가 잠이 들기를 반복하는 것이 미래라면, 이제 더 이상 시인과 생활인의 삶을 구분할 수 없다면, 결국 시인은 수많은 현대인처럼 다 계획되어 있어서 이미 진부해져 버린 미래로 향해가는 셈이다. 더 이상 지평선 너머로 향하지 않는 두 눈이 있다. 매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길을 산책한다. 그렇게 현대시는 미래 상실을 앓고 있다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나는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읽는다. 혁명 후에 쓰인 자연의 성난 풍경 또한 읽는다. 그것은 나의 일. 그렇게 읽던 책을 덮으니 하루가 끝났다. 하루가 끝나도 뉴스는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있고, 일렁이고, 나는 늙고, 다시 책 앞에 앉는다. 창을 열자 빛나는 칼을 삼킨 마술사처럼, 겨울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은 알 수 없는 백색 진동과 고요로 뒤섞인다. 창을 닫아도, 난폭하고 날카로운 겨울은 내게 바짝 붙어서 있다. 떤다. 이 책이 얼기 전에 나머지를 읽어야 한다. 손이 떤다. 다 읽어야지만, 이 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떠올린다. 풀이 눕는다. 하지만 어떤 풀은 죽고, 어떤 풀은 흔들리고, 어떤 풀은 죽은지도 모르고 여전히 파랗게 일렁이겠지. 떤다. 수영. 나는 저 풀들을 넘어, 죽은 수영의 나이를 넘어, 자꾸만 죽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나이가 되었구나. 내 마음에 살아남은 이가 없는 나이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올리는 사이, 겨울의 차고 희디흰 장막이 책을 덮는다. 그 위에 손을 올린다. 손이 굽는다. 생활이 나를 세차게 때리고, 모든 약속이 깨져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이 검은 물속에 잠겼을 때도 버리지 않았던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 마음도 굽는다. 수영. 달처럼 차고 날카로운 이것을 나는 읽을 수 있을까. 떤다. 굽은 마음과 손안에는 겨울이 숲을 무너트리는 그 시절의 소리만 가득하다. 그 시절, 몇몇 죽은 자들은 여전히 공장 여기저기를 배회하곤 했다. 김안, 「김수영 전집」 부분,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차라리 김안 시인은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그의 회고에는 불안과 가책에 깃들어 있다.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어를 심장으로 삼았던 시대가 있다. 시인은 김수영 전집을 읽으며 “해방 공간에 쓰인 정신과 생활의 거친 리듬”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인은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확신하고 있다. 김수영의 뜨거운 정신은 이제 차가운 ‘책’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혁명의 시간은 이제 기록일 뿐이고, 자신 또한 저 광장이 아니라 이 방안에서 긴 하루를 견디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이 세상의 계절은 “날카로운 겨울”일 수밖에 없다. 이때 겨울은 이젠 무색해진 과거를 뜻하고, 그 겨울을 칼날처럼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수영의 정신을 온몸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가책을 암시한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김수영 전집에 ‘손’을 올리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에 가깝다. “그 책위에 마음을 올린다”라는 시구는 곧 김수영을 향한 추모, 그 혁명 정신이 돌보아야 했던 공장 노동자를 향한 추모, 마지막으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던 시인의 능력을 향한 추모를 뜻한다. 추모는 현실의 맥락에서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이지만 마음의 맥락에서는 누군가 욕망했던 것을 뒤따라 욕망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향수되는 것은 수영도, 공장 노동자도 아니라 그들의 각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뜻을 품을 수 있었던 인간은 어디로 갔는가. 시인에게 시집을 펼치는 일이 제의와 같다는 말은 곧 추모가 마음을 보듬고 치유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마음은 ‘굽는다’. 죽은 자는 세상을 ‘배회한다’. 근본적으로 이 시에서 찾아헤매는 것은 마음을 빗겨놓는 우회로이다. 현재를 여실히 살아낼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도 없는 시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과거라는 우회로이다. 그것은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에 응답하는 김안 시인의 방식이다. 마음의 운동 혹은 변화가 곧 문학적인 시간의 본질이라면, 시적인 미래는 반드시 물리적인 미래를 전제하지 않는다. 김안 시인에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 당신의 빛 바랜 욕망에 응답하려 할 때 사람은 아직 실현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을 재현한다. 2. 극복할 수 없는 것에 터 잡기 ‘시간은 변화’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제를 조금 더 문학적 어휘로 옮긴다면 문학적 시간의 본질은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문학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방식이다. 성숙의 실마리는 반드시 미지의 탐구로만 획득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잊었던 과거로부터 발굴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시의 미래 상실은 곧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잃은 자의 징후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섬세하게 분별할 것은 현재를 ‘벽’으로 느끼는 목소리와 현재에 자족한 자의 목소리는 근본적으로 상반된다는 사실이다. 김안 시인은 미래를 직설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미래를 소망하게끔 한다. 이제 동시대 문학과 문학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고자 한다. 문학적 시간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성숙(변화)이다.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이 세상에는 결코 바꿀 수 없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두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듯 마음으로 이룰 수 있는 것 또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떠올려 보면, 근대의 위대한 철학자들 또한 그들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보다 그 무엇인가는 절대 바꿀 수 없다는 절망을 깊이 사색했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것은 결코 바꿀 수 없다’라는 인식이 시대마다 달랐다는 점이다. 18세기 중엽 루소는 『에밀』을 집필하면서 자연은 절대 극복할 수 없으니 사람과 도구를 자연에 적응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20세기의 프로이트는 말년 동안 인류가 문명을 통해 자연을 극복했지만,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난제로 여겼다. 루소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자연이었고, 프로이트에게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이웃이었다. 그렇다면 21세기의 우리에게 불변하는 사실은 무엇일까. 심심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해 여름 우리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함께 보고 넷플릭스를 온종일 틀어 놓았다. 창밖에서 사람들은 노잡이의 얼굴을 하고 가히 영웅적으로 걸어다녔다. 심심해서 창밖의 사람들에게 뛰어들 수도 있을 것 같지. 사무라이의 칼을 횡으로 쥐게 한 다음 전속력을 달려들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지만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 그해 여름 우리는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우리는 나란히 누워 죽고사는 이야기를 지속하였다. 이왕 죽을 거라면 뚱뚱해져서죽고 싶어. 피자 한 판을 겹쳐서 먹다가 코로 치즈를 질질 흘리면서. 이왕 태어날 거라면 결코 끝나지 않을 성대한 파티를 시작합니다. 주최자가 강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할 때, 샹들리에가 되어 모두를 다치게 하고 싶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혀에 틀어박혀서……. 검은 양념이 묻은 나무 젓가락을 씹으며 네가 말한다. 삽십 초에 한 번씩 유성이 떨어지고 있다. 어째서 우리가 가진 건 절망조차 가짜일까. 위대한 화가의 삶과 죽음을 다룬 애니메이션이 상영 중이고.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처럼. 그해 여름, 나는 망친 그림 속에 너를 두고 빠져나왔고 그림 속에서 너는 나를 그리는 중이다. 안 넘어진다. 가위바위보. 변혜지, 「럼펠스틸스킨」 전문, <현대시> 2025년 2월호 이 작품의 주조는 무엇인가. 작품 전반에서 분노와 장난기가 맴돈다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겠으나 더 깊게 자리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체념임을 읽어내야 한다. 분노에만 집중한다면 자칫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에 대한 혐오나 불신으로 오인할 수 있겠다. 분명 화자는 창밖의 사람에게 사무라이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상을 하고, 파티장의 샹들리에가 추락하듯 사람들을 다치게 만드는 상상도 한다. 여기에는 타인에 대한 냉소, 특히 인간을 장난감과 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는 냉소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한편 제목은 유희성을 강화하는데, 독일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인 ‘럼펠스틸스킨’을 제목으로 택했지만, 내용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타당하지 않은 분노와 무의미한 유희성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두 정조의 뿌리에 놓인 것은 삶에 대한 체념으로 보인다. “살자. 우리는 잡놈처럼 계속 살자. 가정용 플라네타리움이 만들어내는 가짜 기호 속에서”라는 시구가 암시하는 바는 명백한데, 그것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의 삶’도 헛것이라는 인식이다. 내 생활은 가짜이고, 내 마음속 절망조차 가짜라는 진술 또한 뒤따른다. 결국 타자에 대한 공격성의 뿌리에는 바로 자기 부정이 놓인 셈이다. 근본적으로 부정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다. 이 시의 내용을 물음으로 바꿀 수 있겠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란, 무엇보다 인간의 삶이란 의미 있는 것일까. 나와 저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든 이 세상은 무사하지 않을까. 내 존재가 행복하든 절망에 빠지든 창밖의 거리는 안녕하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듯, 이 시의 화자는 우리가 ‘잡놈’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 이후 ‘나’와 타인을 아무렇게나 대한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주인공처럼, 변혜지 시인은 충동적으로 살인을 꿈꾸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작품에 묘사되는 폭력성의 크기는 그 반대급부로서 얼마나 이 현실에 자신이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지를 투영한다. 세계가 이상해진 지 오래되었다. 선후관계는 도미노 같다. 쫓다 보면 결국 무너지는, 언젠가는 깔려 죽게 될 그런 일. 책을 팔아 복숭아를 사 왔는데 껍질 새 초파리가 살고 있었다. 똑똑, 나가주면 안 되겠니. 나는 어리니 자신에게 양보하라고 지적받는다. 아직 후숙이 필요한 과정이구나. 이번 여름 복숭아는 노약자석과 비슷한 것 같다고 이해한다. 오늘의 공원은 겨울을 동경한다. 머리카락을 비질하는 미화원과 컷불을 뚫고 들어오는 빛들. 공사 중이죠? 저수지를 만들겠다고 해 흔쾌히 자릴 양보해주었다. 한 그루의 몫. 한 그루의 치아. 피스타치오 밭은 없나? 원하면 있다. 풍경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줌인. 시간은 달밤, 연인들이 나무 밑에 모여 있다. 딱따구리 없이도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숲. 거기 뭐해요? 행운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려고요. 겸사겸사 입도 맞추고요. 아, 예. 그럼 열심히 하십쇼. 열매 하나 으적으적 씹으며 걷는다. 행운은 텁텁한 맛이구나. 물드는 풀빛의 혀. 나는 키스할 상대 없이 필터에 입을 댄다. 여름의 공원은 저수지를 걸고 소송 중이다. 개들은 사람의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고 저수지를 사랑한다.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고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만들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을 뿐이라는 협회의 말에 가능한 천천히 물을 붓겠다고 합의한다. 깨끗하게 청소한다. 저수지가 생긴 어느 미래를 향해 물을 붓고 붓고 또 붓다 보면, 도달하는 가능성에 언젠가 초파리도 죽게 될까?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엄시연, 「가드닝」 전문, <포지션> 2024년 겨울호 엄시연 시인의 시에서도 세계는 부조리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 어조는 지나치게 담담하고 그것은 어쩌면 마음을 쏟아낼 이유조차 상실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게 한다. 첫 행이 암시하듯 세상은 언제든지 사람을 ‘깔려 죽게’ 만들 수 있지만 그 원인이나 결과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불온한 조짐만이 암시될 뿐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움직이고, 무관하게 연인들은 서로 입을 맞추며 사랑을 확인하고 있다. 이 대비보다 의아한 것은 화자의 태도이다. ‘나’는 죽음의 불안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에 전염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적당히 거리를 둔 배경 취급하며 복숭아를 먹고, 저수지를 산책하며, 행운을 찾아 헤매면서 그저 생각에 잠길 뿐이다. 죽음을 필연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탈출구란 존재하는 것일까. 시인은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실상 작품 안에서는 어떠한 희망도 암시되지 않는다. 사람이든 초파리에게든 암시되는 것은 죽음 뿐이다. 저수지와 차오르는 물의 모티프는 언뜻 기후 온난화와 홍수를 떠올리게 하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변혜지의 시와 엄시연의 시는 똑같이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도, 사람들도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드닝」의 마지막은 “이제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라는 시구로 끝맺는다. 이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현대인의 무력함에 대한 여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입 맞춤의 상대가 있어도 좋고 없으면 ‘필터’에 한다. 저수지를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나’와 무관하다. 한 시대의 사색은 그 시대의 불변하는 사실에 터 잡는다. 자연을 극복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부터 루소의 교육론이, 반드시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모색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시에서 극복할 수 없는 대상으로 감각되는 것은 세계 그 자체, 무엇보다 세계의 무의미성으로 판단된다. 「럼펠스틸스킨」에서 현실은 영상이나 그림 같은 것, “가정용 플라테타리움”이나 “검은 물을 엎지른 수채화” 등으로 비유된다. 이러한 비유는 세계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새로운 붓질을 할 의지도 지니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드닝」에서 세상은 언제든지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나’는 그곳에서 야기되는 죽음의 조짐을 방관할 뿐이다.이들의 시에 맴도는 부조리는 다음을 유추하게 한다. 이제 이 세상에서 인간은 무용하다. 내가 무엇을 하든 세상은 어제처럼 작동할 것이다. 우리는 ‘잡놈’으로 연명할 것이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며 죽어갈 것이다. 이 예정된 미래에서 미래의 쓸모란 무엇일까. 이제 현대는 루소주의자의 사색을 지나, 프로이트주의자의 숙고로부터도 멀어지며, 차츰 인간 존재에 대한 냉소와 부정으로 옮아간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은 과거에는 도구나 사물로 취급했던 것, 우리의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체계이다. 인간조차 사물의 지배자가 아니라 이 윤택한 일상을 이루는 사물의 일부인 양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물 없이 사람은 살 수 없다는 것, 현대시는 이 절망에 터 잡아야 할 것이다. 선택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변혜지와 엄시연의 시는 다음의 ‘도달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인간은 사물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 방식, 즉 자아를 사물화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 이 외에 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는 것일까. 단숨에 답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찾아 헤매야 하는 새벽이다. 1) 이 글은 <문학과지성사> 2024년 겨울호의 졸고 「문학적 시간이란 무엇인가」와 연속성을 지닌다. 2) 송현지, 「제자리 뛰며 나아가는 미래」, <현대문학> 2025년 2월호, 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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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란 백색 알레고리의 건축술 ― 『흰』

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계간 푸른사상 이은란 한강알레고리엑스터시수행성『흰』 2025
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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