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2024년 가을호(제89호)
때에 따라 산다는 것, 그리고 ‘동시대 시’에 대한 단상 ― 허향숙 『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천년의 시작, 2024), 한명희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여우난골,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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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미래에서 너를 만나고』(이하 『오랜 미래』)에는 “여인에서 아내로,/엄마로,/망자의 어미로,/시인으로/설렘과 기쁨과 한탄과 설움과/그리움의 시간들”(「비의 비상」)을 통과해온 시인의 자전적 삶의 여정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은 이를 줄곧 “엎어”져온 일이라 말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고통은 땅으로 하강하는 빗물과 같이 “떨어져/꽃을 피우는 일”로 인식된다. 아래로 “떨어져 깨지”는 과정이 “꽃”을 피워내는 상승의 운동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비의 비상은 떨어짐”이라는 역설적 인식에 가닿는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암시되지만, 무엇보다 이 시집에는 상실의 아픔이 가득하다. ‘너’는 급성백혈병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푸른 별’로 먼저 떠난 자녀를 주로 가리키면서, 사별로 떠나보낸 많은 이들을 함께 호명한다.(「압화」, 「발인」) 그렇기에 조문과 관련된 시들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화이트 앤 블랙」, 「문상」) 특히 2부를 중심으로 시집 곳곳에서 죽은 아이에 대한 애절한 슬픔이 묻어난다. 아이가 떠난 시기인 봄밤은 깊은 슬픔과 괴로움이 집약된 시간으로 그려지는데, 그리하여 밤과 봄에 대한 언급도 적지 않다.(「푸른 별」, 「입춘」)
뒤늦게 어려운 사망 신고를 하고 온 날을 다루는 「9분」에는 이러한 애달픈 마음이 잘 드러난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딸이 떠나고 나서도 13년간 사망 신고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생전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했을 정도로 어렸던 딸, 함께 산 날이 극히 적었던 딸을 조금이라도 더 지상에 발붙여두게 하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늘에 적을 두어야 할/너를 이제껏 땅에 적을 두게 한/어미를 용서해 다오” 말하는 서글픔은 13년의 세월에도 조금도 상쇄되지 않는 것에 비해, 사망 신고 접수부터 “다 되었습니다”에 이르는 시간은 고작 9분에 불과해 그 현격한 상실의 격차를 실감하게 한다.
이처럼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을 『오랜 미래』의 중심에 둘 수 있다면, 여기서부터 크게 두 방향의 애도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딸로서의 삶을 상기하며 자신의 유년기와 현재를 자연스레 포개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라기보다는 숱한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쌓아 올린 삶 자체에 대한 반추일 수 있겠지만, 그 모든 상실과 아픔을 생이 가져다준 기쁨과 눈부심의 연장선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시선의 창안으로 인해 자연히 애도의 공간이 마련된다. 구체적으로 이는 어머니-나-딸로 이어지는 생애의 누적과 거기서 발견되는 사랑의 대물림 및 순환을 이해함으로써 긍정된다.(「사랑」, 「추석」)
이때 젊은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사랑」 바로 다음에 제시되는 「몸을 갚다」는 팔순이 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돌연 마주치게 한다. 「사랑」에서 어린 딸과 함께 소원 내기를 걸고 달리던 어머니, “우리 숙이 대견도 하지 (…) 엄마 소원은 우리 이쁜 딸 소원 들어주는 거란다”라고 말하며 “비탈밭의 목화꽃처럼 웃”던 눈부신 어머니는 다음 장인 「몸을 갚다」에서 어느덧 “양회 바른 벽처럼 푸석하고/나목처럼 앙상”한 “팔순”이 되어 있다. 세월이란 어찌 이리 속절없고 무심한 것인가.
볕 좋은 날 마당귀 평상에서/팔순 엄니 등이 가렵다며/불쑥 돌아앉는다/양회 바른 벽처럼 푸석하고/나목처럼 앙상하다//손바닥으로 어루만져 드린 후/우리 이쁜 순남이, 어부바!/등을 들이밀었다/오이 꼭지처럼 말라비틀어진/엄니의 젖꼭지/등거죽 뚫고/갈비뼈 지나/심장에 박힌다//내 목 끌어안고/좋아라 하는 노모/엄미 등에 업힌 어린 나처럼/금세 새근거린다
― 「몸을 갚다」 전문
한때 어머니에게 업히던 ‘어린 나’는 이제 과거 그때의 어머니 나이도 훌쩍 넘은 채 이제 어머니를 업어드리게 된다. 그리하여 화자에게 어머니는 마치 자신의 딸과 같은 모습으로, 동시에 유년 시절의 어린 자신의 모습으로 겹쳐진다. 이렇게 어머니를 어린 자녀처럼 돌보며 사랑하는 일은 어릴 적 물려받았던 사랑과 헌신에 대해 ‘몸을 갚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결코 딸이 될 수는 없는 이유는, 늙어가는 어머니의 시간은 생장이 아니라 소멸을 향해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이 주로 아프고 병든 몸에 대한 기억과 그려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찔레꽃」에서 회상되는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다. “창백한 얼굴로 엄마는//에구, 나 죽으면 우리 향이 불쌍해서 우짤꼬” 말하며 남겨질 딸에 대한 안쓰러움을 드러낸다. “엄마의 한숨이/찔레 가시처럼 아파/엄마 손에 매달려 폭폭 울었”던 기억으로 인해, 화자는 찔레꽃을 볼 때마다 찔레꽃이 내다보이던 병실 풍경에 속절없이 붙들린다. 어머니가 입원 치료를 받던 시기도 공교롭게 아이가 떠나던 때와 같은 봄인데, 그러한 기억으로 인해 봄마다 돌아오는 찔레꽃 향기는 “소독 냄새 왈칵, 쏟아”지는 자리가 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방향의 애도는, 떠난 아이 입장에서 어머니를 향한 위로를 만들어 시인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상실의 당사자가 떠난 이의 입을 빌려 스스로 위로를 발명하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상상은 아이의 사후가 평안하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마음의 발로인 동시에, 화자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수용과 납득이 가능한 형태로 고통의 크기를 줄이는 작업이 된다.
성장도 못한 채/생략된 나 때문에/울지 말아요//다시 불러올 수 없는 줄 알면서/다시 써 내려갈 수 없는 줄 알면서/버티지 말아요//꽃 피었다고/꽃 졌다고/이파리 무성해졌다고/이파리 물들었다고/눈 왔다고/금세 녹았다고/발 동동 구르며/내일을 지우려 하지 말아요//나, 여기 있어요//햇살 속에/봄비 속에/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라일락 망초/물꽃 속에/윤슬 속에//천 년을 떠도는/바람의 몸짓으로/나 여기 있어요//당신의 숨 속에
―「나, 여기 있어요」 전문
여기 있다고 거듭 말하는 위 시는 마치 떠난 아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그리움이 넘쳐흘러 매일같이 “너를 울고”(「아무 곳에나 심장을 내려놓고」) “파도를 빌려 울”(「몽돌 해변에서」)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보고 듣고 감각하는 모든 만물에 스며들어 있으며 자연의 순환과 이행에 따라 언제든 함께할 것이라는 다정한 위로를 창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의 응답에 대한 답신처럼, 다시 「거기 네가 있네」가 이어지면서 ‘너’가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내 안”에 있음에 대한 깨달음이 강조된다. 마찬가지로 이제 ‘너’는 오직 화자의 기억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하기에 ‘너’를 그리워하는 일은 “나를 열어 너를 읽”(「나를 읽다」)는 일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나’를 읽는 일은 언제나 ‘내’ 안에 가득한 ‘나’의 구성물인 ‘너’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오랜 기간 사별을 겪어내면서 시인이 깨닫게 된 생과 사의 중요한 섭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본래 시간의 이행이 아이가 죽은 시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며 아이에 대한 기억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두려운 것으로 여겨졌었다면, 「나, 여기 있어요」에서의 깨달음의 도출로 인해 “내일을 지우”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매일매일을 기꺼이 누릴 수 있다는 인식에 가닿는다. 시간의 흐름을 긍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강조되는 세월의 순차적인 흐름과 누적에 대한 수용은 이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1)
그리고 이는 “볕과//바람과//물과 흙에//제 몸 내어 줄//차비를 한다”(「임종」)는 언급에서도 암시되듯 결국 모든 생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인식으로 수렴된다. 인간사를 옹기의 쇠락에 비유하며 사람의 본성이 되는 물질을 흙에 비유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다.(「옹기」) 마찬가지로 「발인」에서도, ‘통영댁’의 삶을 바다라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환원적 인식으로 받아들이며 애도한다. 죽음이란 원래 존재하던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일이기에 고단했던 생으로부터 비로소 해방을 얻고 “시간의 아귀에서//올올이//풀려나”는 일이 된다.(「임종」)
길어야 백 일입니다/마지막 선고를 받고서야/환해진 얼굴//고통의 끝이 환희였다니//풀벌레 울음/피었다 지고/찬송 소리/가늘게 흔들리고//오래된 물음/그녀의 여름에 성호를 긋는다
―「백일홍」 부분
시한부 “선고”를 받고서도 “환해”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처럼 “고통”으로부터의 놓여남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이 시 세계에서는 장례가 때로는 “잔칫날”에 비유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바쁘게 사느라/만나지 못한 사람들/울며 웃으며 떠들썩하니/잔칫날 같다//상주석 말미 어린아이/셋 봄나들이 나온/병아리들처럼 엎치락덮치락/서로 기대 졸고 있다”(「향연」)에 드러나는 장례 풍경에서는, 누군가의 죽음이 그저 슬픔으로만 수렴되지 않고 만남의 장을 형성하기도 함을 일깨운다. 또한 어린 상주들로 대표되는 생과 사의 주기와 이행은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한 풍경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죽음이 드리운 공간에서도 기쁨과 온기를 읽는 시선도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사별을 다루는 여러 시들은 극복되지 않는 상실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하는 한편, 개인적인 고통을 전 인류의 보편적인 숙명으로 승화하여 삶의 희노애락에서 놓여나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 모든 이들의 예정된 귀결임을 숙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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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또한 “다리가 하나 빠진 식탁”(「식구」)과 “2인용 식기 세트”로의 식기 교체가 암시하는 어느 가족 구성원의 부재, “산세베리아”를 “함께 심었던”(「새벽 비」) ‘당신’에 대한 그리움 등 사별한 이들에 대한 상념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밝혀졌다」에서는 사후에야 본명, 가족 여부, 병 유무 등 삶의 많은 부분이 해명되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나는데,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더 깊이 알아갈 수도 있었을 한 사람의 고유한 생애에 더는 가닿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화자는 “우리는 어느 쪽을 향해 울어야 하는 걸까/어떤 기억을 남기고 어떤 기억을 지워야 하는 걸까” 알지 못한 채 무수한 의문만 그대로 남겨두기를 택하는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렇듯 『오래된 미래』와 마찬가지로 이 시집은 생과 사의 불가사의 앞에 우리를 자주 멈춰서게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오래된 미래』에서만큼 죽음의 문제가 무게 있게 여겨지지는 않는 듯하다. 이는 죽음이 이 시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유와 방랑이라는 가치의 실현 양상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령 「스위스행 종이비행기」라는 표제작은 제목에서부터 해방으로서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아니라 주체적 삶의 실천의 연장이자 본인의 선택에 의한 탐험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안락사가 긍정된다.
이러한 자유와 방랑에 대한 지향은 서시인 「대유목 시대」부터 시작해 시집 내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정처 없이 유랑하는 이미지들로 대표된다. “여기저기서 불쑥 솟아올”라서 ‘나’를 붙잡는 “가지각색의 손들”을 떨쳐내고 “멀리까지 아주 멀리까지 가볼 작정”이라 말하는 「이십 대」는 이를 가장 강하게 표방하는 시라 할 수 있다. “서서 죽고 싶었다/가다가 죽고 싶었다//가방이 텅 비었어도/계속 걷고 싶었다” 말하는 대목에서는 어딘가에 안주하거나 정착하지 않고 갈 수 있는 모든 길의 끝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진다. 길 그 자체가 이 시 세계의 화자들에게는 여행지이자 늘 유동하는 거주지인 셈이다.
이처럼 길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기에 길을 잃기도, 길을 다시 찾기도, 어느 길도 선택하지 않는 장면도 곧잘 등장한다. 간혹 이 길 잃음은 마음의 갈피를 확정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슬픔을 반영하기도 한다. “오래 아프던 친구”의 부재 앞에서 남편 장례식 때 진 마음의 빚을 생각하며 “요양원 근처에서 자꾸만 길을 잃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요양원에 면회 가기」) 그런가 하면 「투명」에서는 길을 잃은 사람인 ‘그’의 여정이 그려진다. ‘은둔자’를 따라가기도 하지만 곧 그건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님을 깨닫는다. 너무나도 많은 선택지들이 “그의 길을 어지럽”혀 올바른 길의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리하여 차라리 그는 무수한 선택의 갈래 중 그 어느 것도 보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러한 ‘무(無) 선택’은 곧 투명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투명해지는 일은 미리 확정되어 있던 경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낯선 선택이 그 선택을 길로 호명하는 일이 된다.(“투명해져야겠다는 생각이/온몸 가득 차올랐을 때/그는 거기서 뛰어내렸다//아무에게 묻지 않고도/스스로 길을 찾아내었다”(「투명」))
그런데 이때 주목되는 건, 이러한 끝없는 유랑의 여정이 목적지를 분명히 상정하고 있으며 그 종착지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이 간간이 암시된다는 것이다. 가령 「메모리얼 파크」에서는 여러 시기의 서로 다른 죽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서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 깨닫는 모습이 중요하게 그려진다. “작년의 죽음과 내년의 죽음이/나란나란 나란하구나//어린 죽음과 늙은 죽음이/도란도란 도란하구나 (…) 무엇을 말해도/여기서는 모두 흙 위에다 쓰는 것”이라 말할 때, 그 사유의 종착은 모든 생명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죽음’으로 수렴됨을 볼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생의 무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모든 만물을 얼마나 평등하게 포용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맞닿는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집’이라는, 근원이자 마땅히 돌아가야 할 장소로 상징되곤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집을 향해」에서 화자는 “나는 늘 말하지/집으로 가는 중이야/집에 가고 있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모르고 모를 뿐/그래도 열심히 열심히 가고 있어/집을 향해 가고 있어/어쨌든 집을 향해”에서 드러나듯 어디로 가야 하며 얼마나 남았는지는 화자 자신에게도 미지의 영역에 있다. 그저 삶의 모든 순간을 집으로 가는 여정이라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맹목적인 목적지로 설정된 ‘집’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읽어볼 수 있다. 즉 살아 있는 내내 지상을 헤매다가 죽음에 도착하는 것이 삶의 여정이라는 알레고리의 반영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 시 세계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원초적 기억이 죽음의 공간으로서 중첩되어 그려지는 것에서도 암시된다.
담은 시멘트 담이었고
대문은 푸른색 철대문이었다
담벼락 위로는 깨진 유리병이 꽂혀 있었고
대문은 두 뼘쯤 열려 있었다
그것은 마당을 거쳐
대문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비명이었다
칼보다 가위가 먼저 연상되는 비명이었다
현관문 앞에 신발이 가지런했다
처음 보는 신발은 분명
의사의 것이었다
노을이 핏빛으로 번지는 시간이었다
개들이 늑대처럼 울부짖는 시간이었다
대문을 밀까 망설일 때
미역국 끓이는 냄새가 났다
뻑뻑하고 끈적한 것이
마당 가득 번지고 있었다
분간할 수 없는 마음이
대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푸른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철대문이었다
― 「빠른 일곱 살」 전문
“비명”, “가위”, “의사”, “미역국” 등에서 암시되듯, 저녁 무렵 집 안에서는 출산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뻑뻑하고 끈적”하여 “마당 가득 번지”는 것은 해 질 녘 노을에 대한 묘사이면서 핏물이자 미역국에 대한 연상과 이어진다. 아이는 왠지 모르게 낯설고 두려워 집 안에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훈기 가득한 미역국 냄새를 맡는다. 집에 들어가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가 느낀 이 “분간할 수 없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서늘한 철대문과 비명의 반복되는 이미지를 통해 아이가 느꼈을 공포와 혼란, 슬픔과 안도감 등이 짐작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가장 죽음과 가깝던, 탄생과 죽음이 중첩되는 그 문 안의 공간이 정착지로서의 집에 대한 양가적인 심리를 촉발하게 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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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기로 한다. 앞서 『오래된 미래』에서 ‘제때’에 대한 인식이 이 시집의 기저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했는데, 그렇기에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에 기반한 다소 시대착오적인 관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모습 또한 발견된다. 예컨대 「괄호의 시간」이나 「길」에는 가부장제하 결혼 제도에 속박된 이후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아내-엄마, 남편의 부속물로 한정된 채 희생만이 강요되어온 삶의 부당함과 한탄이 나타난다.2) 구체적으로 이는 주체성이라는 방향을 잃은 모습에 비유되어 “내 여생의 길”이 본래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단 한 사람 때문에 오른쪽으로 굽”게 된 것이라 술회된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을 토로하는 한편으로, 이 시집의 한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 고통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가부장제의 순환이다. 즉 이 ‘진공의 시간’에 대한 슬픔은, 가부장제가 유지되는 한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연민에 그치는 것이다. 「유예하다」에서는 계절의 순환과 인간사를 병치하면서, 때에 따라 자연의 업무를 이행하는 각 절기와 달리, “세월의 자식들만 유예를 일삼는다”고 힐난한다. “취직난으로 졸업을 유예하고//결혼이 두려워 연애를 유예하고//생활에 치여 꿈을 유예하고//인습에 매여 자유를 유예하고//자신을 유예하다//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인 ‘결혼’에 대한 당위론이 내포되어 있으며, ‘연애’의 목적 혹은 종착지가 결혼이라는 사고를 자연화하고 있다. 이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성애주의 외의 다양한 성적 지향 및 실제 현실의 복잡다기한 삶을 손쉽게 범주에서 배제하며, 욕구 차원의 끌림과 제도‧행정적 차원의 문제가 등가에 놓일 수 없음을 간과한다. 이와 유사하게 감자꽃을 보고서 “불임의 꽃들//슬프고도 찬란한 욕망들”(「슬픈 욕망」)이라 말하는 것에서도 잉태-출산-재생산만이 모든 자연 만물이 긍정하고 희망하는 목표라는 학습된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시인이야말로 “인습에 매여”(「유예하다」) 있는 게 아닌가?
또한 ‘자유’, ‘꿈’ 등의 가치를 추구하여 ‘진정한 나 자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극히 근대 휴머니즘적인 가치는 다소 만능처럼 남발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심지어 「알지 못하면 꿈꿀 수 없다」에서는 축사 송아지에게까지를 이를 적용하고 있어 우려를 남긴다.
축사 시멘트 바닥에서 태어난/송아지는 풀을 모른다 (…) 주어진 대로 먹고 잠들 것이/아니라 독초로/죽을 고비 겪을지라도/스스로 먹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초록의 세계를 갈망하며/잠긴 문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아는 자만이//꿈꿀 수 있다”
― 「알지 못하면 꿈꿀 수 없다」 부분
이 시는 축사 송아지의 모습을 관성적 삶과 무기력한 타성에 젖어 탈출에 대한 희망을 꿈꾸지조차 못하는 사람에 빗대고 있는데, 송아지를 단순히 ‘매인 존재’, 스스로 주권적인 삶을 도모하지 않는 존재로 일축하여 송아지의 고통을 인간의 교훈용으로 대상화한다. 가부장 자본주의하 축산 산업과 육식주의에서 여성 착취와 동물 착취의 구조 및 메커니즘이 얼마나 유사한지를 상기해보면, 이러한 시들은 한편으로 도리 없는 자기분열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젊은 세대와 동물들에 대한 이러한 훈계조의 인식은 가부장의 발화를 내면화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일까. 시집에서 강조하는 것이 ‘때에 따라 살기’라 할 때, 이 ‘때’의 시기적절에 대한 기준이 누구를 위한 기준인지, 어느 시대를 위한 기준인지 검토되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가 하면 『스위스행 종이비행기』에서 발견되는 환원론적이고 목적론적 태도에도 다소 의문이 든다. 대표적으로 「이유의 이유」에서 “디에고가 있어 프리다는 프리다가 되고 (…) 피가 있어 혁명은 혁명이 되고”와 같은 연쇄가 이어지는데, 이는 고흐나 프리다, 혁명 등에 그 자체의 원형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하여 각 대상들에 타의적으로 부여된 상징성을 정당화하고 그 개별 주체들이 겪은 고통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파란』 봄호의 신인문학상 심사평에 따르면, 지금 작성되고 제출되는 시들에 대한 비판 장치가 부재하여 제도가 견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이는 물론 신인 응모작에서 발견되는 패턴화된 모방 양상과 현실 정치를 도외시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지만,3) 이들이 비단 신인 투고작에서만 발견되는 특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도전받지 않은 권위가 지속된 문학계”4)를 유지하는 데 이런 시집들이 일조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는 제한이 없다. 무엇을 쓰든 시 장르라는 라벨을 붙인 채 발표되면 곧장 시가 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는 반영물인 동시에 읽는 이로 하여금 그 형식과 사유를 공유하고 내면화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 만큼, 어떤 시대 감각을 대변할 것인지 시인은 늘 선택하고 선별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자면, 무엇이든 시가 될 수는 있겠지만 ‘동시대 시’라는 호명은 인습을 재생산하는 관념을 혁파하는 한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향후를 기약하기로 한다.- 1) 이를 통해 이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제때’ 간다는 이행에 대한 보편성 획득과 ‘성장’이다. 즉 ‘제때’라는 감각이 이 시집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나, 여기 있어요」에서도 “성장도 못한 채/생략된 나”라는 언급은 성장이라는 과업이 보편타당하게 이행되어야 할 것으로 전제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2) “결혼해서 아내가 되었고/아기를 낳아 엄마가 되었고/그가 쌓아 올린성에 들어가 그만의/여인이 되었다//그가 쳐 놓은 괄호 속 세상//본문의 각주 같은/편편의 시간들//그는 나의 문장이었고/나는 그의 주석이었다”(「괄호의 시간」)
- 3) “동시대의 젊은 시인들을 반성이나 육화를 거치지 않고 무조건 따른 원고들이 많다는 사실은, 사실 응모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도전받지 않는 권위가 지속된 문학계가 받은 성적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건영, 「시 부문 심사 소감」, 『계간 파란』 2024년 봄호, 98-99쪽
- 4) 같은 글,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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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최다영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말미잘 하는 몸 김혜순의 신작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난다, 2025)를 손에 쥔 독자라면, 모종의 물리적 비약을 감행해 책의 마지막에 실린 ‘김혜순의 편지’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 그 편지는 시인 김혜순이 우리 독자들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동안 고통 속에서 시를 써왔는데,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이전과는 달리 웃으며 썼다고 고백한다. 『죽음의 자서전』(2016), 『날개 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에 미발표 산문 「죽음의 엄마」를 더한 『죽음 트릴로지』(2025) 출간 이후, 시인은 스스로를 씻어줄 물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어느 순간 찬물을 몸에 끼얹듯 다른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쓴 “다른 시”가 바로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의 작품들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다시 시집의 첫 장을 열어 ‘시인의 말’을 읽자. 거기서 우리는 시인의 몸에 끼얹어진 찬물이 바닷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연히 말미잘(sea anemone)이 일렁이는 화면을 보고 감동한 시인은 “깊은 바다 속에서 온갖 색깔을 뽐내며 혼자 표표히 고독하게 싱크로나이즈드하는 긴 촉수들을”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이 심해 존재의 일렁임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이번 시집의 표제작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이 되었다. 이게 나의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물도 없는데 물속에 있는 듯 내 코에서 돋아나온 문어 같은 조갯살 같은 코끼리의 간 같은 널찍한 혀 같은 나는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니야 너를 감은 내 손이 갓 땅을 박차고 올라온 새싹 같고 너에게 기댄 내 머리가 커다란 꽃잎 같고, 아니야 한 대야 커다란 닭벼슬 같고 네게 노래 불러주면 나는 성별이 달라져 여자가 되었다가 남자가 되었다가 다시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자가생식의 성 너와 뒤척이면서 나는 인종이 달라져 레드 인종 블루 인종 핑크 인종 고음을 낼 땐 설치류의 얼굴이었다가 저음을 낼 땐 물에 사는 조류의 얼굴이었다가 내 몸에서 내 몸이 돋아나올 때 내 몸이 세상 전체일 때 이게 어느 순간의 일인지 네가 정말 알아챘으면 좋겠어 나는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내 몸에서 끝없이 돋아나는 천 개의 줄 물속인 듯 물 없는 공중에 일렁이는 기나긴 줄 이 줄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매달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줄을 흔들고 싶어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 ―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전문 과연 이전의 시들과는 한결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는 시다. 죽음의 이미지는 찾기 어려울 뿐더러, 시의 화자는 스스로를 “아름다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 “명랑한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름답고도 명랑한 이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식물도 동물도 어류도 파충류도” 아닌 존재, 즉 분류학적 구분의 바깥에 있는 존재다. 게다가 네게 노래를 불러주면 성별이 달라지고, 너와 뒤척이면서는 인종도 달라진다.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자가생식의 성도 되었다가, 레드·블루·핑크 색색의 인종도 되고, 설치류의 얼굴도 조류의 얼굴도 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이 역동적 존재는 자신의 몸을 재생산할 수도 있으므로, 그의 몸이 “세상 전체”가 되는 것은 놀랍지 않다. 말미잘의 기다란 촉수가 “천 개의 줄”인 양 끝없이 돋아나고, 물이 없이도 마치 물속인 듯 일렁일렁 움직인다. 긴 줄처럼 보이는 말미잘의 촉수는 실제로는 먹이를 사냥하는 기능을 하지만, 시의 화자가 그것을 비목적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은 중요하다. 김혜순의 말미잘은 촉수로 아무것도 묶고 싶지 않다고, 매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촉수는 어디에도 활용되지 않고, 어떤 실용적 목적에도 복무하지 않는다.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은 긴 촉수를 ‘그냥’ 흔들 뿐이다. “나는 그냥 해삼 말미잘 문어 뱀장어 여자”라고 말하는 시의 화자를 통해 우리는 목적론에 예속되지 않는 ‘그냥’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이 ‘그냥 말미잘’은 촉수를 통한 사냥을 포기했으므로 “내게서 솟아나는 수생식물을 내가 먹는 여자”가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필연적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냥’의 존재는 김혜순의 시 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유히 나부끼는 말미잘의 하늘거림은 시인에게 위로가 된다. 시에서 말미잘은 무엇도 목적하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도저한 자유의 형상처럼 보이는 말미잘은 그러나 이 시의 종착지는 아니다. 시 전체에서 가장 마지막에 놓인 단어는 ‘여자’다. 이 시어는 조금 더 유심히 읽혀야만 하는데, 언어의 리듬으로 인종과 젠더 같은 근대적 구분법 너머를 흐르려는 시인이 종내 되돌아 오는 곳이기에 그렇다. ‘여자’는 시적 화자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서의 물성을 표지하는 시어이면서, 이 시의 ‘말미잘 되기’가 결코 몸을 초월하는 어떤 기만을 탐하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사실 김혜순의 시는 차라리 임계로서의 몸에 대한 이야기다. 새소리 들으며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 위든 탑이든 산꼭대기든 내가 병상에서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내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온다 시멘트가 발라지고 나사를 조인다 조율사처럼 갈비뼈를 더듬는다 페달 위 발바닥에 기름칠을 한다 나를 공중에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나는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 철새들은 가는 길만 가고 돌아오는 길만 돌아온다 하늘에 같은 선만 그린다 무지무지 바쁘게 손뼉치며 우리는 다같이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인데 이 그물이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휩쓸리는데 팀워크라는 스크럼 안에서 나 혼자 무엇을 목청껏 외치나 아직도 나 혼자 무엇을 기다리나 머리를 짧게 치고 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보다 더 깊이 고음보다 투명한 저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 병상에서 내가 중얼거리자 용접공이 다가온다 내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 「용접공과 조율사」 전문 『날개 환상통』을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시집에서 시인이 ‘새-하기’를 통해 자유의 가능성을 탐구해 보았었다는 점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새-하기’의 관점에서 시집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읽을 때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에 수록된 「용접공과 조율사」는 우선 그간 수행해 온 ‘새-하기’에 대한 반성처럼 보인다. 화자는 처음에 “새소리 들으며/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얼거리며 새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를 꿈꾼다. 그러자 용접공이 와서 어깨에 날개를 붙여주고 발바닥에 기름칠을 해 공중에 떠오를 수 있게 해준다. 이로써 화자는 새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자신이 “날아오른 수천 마리 새 중 한 명”에 불과함을 자각한다. 새는 무리 지어 움직이고 정해진 길을 왕복하므로 뜻밖에도 그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 새들은 마치 “공중에 뜬 한 개의 그물”과도 같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것처럼” 한데 휩쓸릴 뿐이다. 홀로 자유롭길 갈망하는 시적 주체는 다시 다른 꿈을 꾼다. “머리를 짧게 치고/어디든 혼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해의 모래밭 아래로 바위보다 더 깊이 도망할 수 있다면”하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용접공이 화자의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러 오는데, 여기서 시는 끝난다. 그래도 그가 무사히 지느러미를 장착하고 바다에 갔음을 우리는 안다. 앞서 읽은 「싱크로나이즈드 말미잘」에서 시의 화자는 물 속에서도 숨 쉴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긴 촉수를 나부끼며 마음껏 자유로워졌었으니 말이다. 고로 「용접공과 조율사」는 김혜순의 ‘하기’가 하늘을 나는 ‘새-하기’에서 심해를 유영하는 ‘말미잘-하기’로 새로워지겠다는 선언처럼 읽힌다. 앞으로의 시적 탐구를 예고하는 듯 보이는 이 시편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용접공’이다. 화자의 어깨에 날개를 박으러 와 시멘트를 바르고 나사를 조이는, 그리고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아주는 용접공의 존재는 시의 화자가 날개를 갖고 태어난 새가 아님을, 지느러미를 갖고 태어난 수생 생물이 아님을 각인시킨다. 게다가 일견 이 시의 화자는 용접공의 도움으로 새가 되었다가 지느러미를 달게 된 것처럼, 그러니까 자유롭게 변이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내 병상에서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시(詩)라는 용접공의 도움을 받았을 뿐, 인간의 몸이라는 병상에서 중얼거리는 중이다. 그러므로 새-되기가 아니라 새-하기다. 새가 되어보는 것이 아니고, 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새가 되어보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언어로 새 ‘하는’ 것이다. 김혜순의 시가 비참하게 경이로운 것은 그래서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몸-안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벗어나보려고 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새가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고 부풀려 자족하거나, 또는 시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다며 함부로 감격에 겨워 울지 않기 때문에. 시를 쓰는 학생이 나에게 와서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영감이란 단어인데 하고 생각했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 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그 여자를, 슬픔의 마비에 빠진 그 여자를 깃대 위에 올려놓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를 국회의사당 돔 위에 올려놓고 나는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 교문 밖으로 달려나가는 그 학생을 보았다 그 학생은 어렴풋이 그 여자가 가진 슬픔의 칼을 느끼는가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압정 같은 귀걸이를 자신의 귀에 매달아보고 그 여자를 빗줄기에 묶어 매달아놓고 슬픔을 장엄하게라고 메모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눈물 젖은 눈썹 위에 올라서보고 그 여자의 눈썹을 빗질해보고 나를 힐난했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세요? 학생의 영감은 이제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 올려놓고 가로수처럼 줄지어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껴보고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고 생각한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의 소름 돋은 목덜미의 감촉을 느껴보고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 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 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하다가 그 여자를 잊어버리고 밤이 깊어도 그 여자를 가로수 위에서 내려놓지 않고 그 여자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슬픔 속에 있도록 내버려 두고 그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영감이 떠오른 학생이 그 여자가 내 아이는 어디 갔어요 물어도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고 나는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았다 그 학생은 점점점 멜로디 새를 만드느라 실내에 들어온 새 한 마리처럼 정신이 없고 내가 영감이란 말 싫어해 외쳐봤자 소용없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이제 정신없는 새의 발자국을 종이 위에 떨어뜨리고 싶고 아이를 잃은 여자가 밤하늘에 유폐되게 내버려두고 그리고 모든 종류의 슬픔이 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 「모든 종류의 슬픔」 전문 「모든 종류의 슬픔」은 케테 콜비츠의 판화 <죽은 아이를 품은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쓰는 학생”과 시의 화자인 선생님이 대치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영감이 떠오른 학생은 “먼 나라의 여자가 손이 잘려 붕대 감은 팔로/죽은 아이를 껴안고 있는 장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처음에 학생은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와 아이를 어쩌지 못해” “밤의 교정에 맨발로 서 있”기도 하고, “비가 오는데 그 여자를 만나러/교문 밖으로 달려나가”기도 한다. “선생님은 그 전쟁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느냐고 제법 준엄하게 선생을 힐난하기도 한다. 허나 여자와 아이는 “먼 나라”에 있을 따름이고, 어느덧 학생은 창작의 희열을 만끽하는 듯 보인다. “슬픔을 장엄하게”라는 메모나 “이 리듬은 아파한다”라는 생각, “나의 작업은 서사가 아닌 음악이어야 해/어떤 조성으로 표현해야 해/소리의 근원을 찾아야 해” 등 여자의 슬픔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학생은 그 여자의 존재를 잊기까지 한다. 끝내 “여자를 버림받게 하고 바람에 얻어맞게 하고” 아이를 찾는 여자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는 “맨발로 거리를 서성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예술의 환희는 쉽사리 잠재워지지 않는 것, 선생은 “그 학생이 바람이 전해주는 슬픔에 히죽 웃는 것을” 보기까지 한다. 결국 시를 쓰는 학생은 “모든 종류의 슬픔이/종이 밖에서 대기하게 내버려두고” 창작의 기쁨 속에서 시를 쓴다. 문학은 늘 낮은 곳에, 가장 아픈 곳에 기거한다는 낭만화된 통념을 직접 훼손하는 이 시는 타인의 슬픔을 ‘쓰는 자’가 어떻게 그 일을 즐기기도 하는지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대리 발화에는 나름의 충족감이나 효능감 같은 것들이 내재해 있게 마련이나, 그동안에는 그저 숭고한 일로만 의미화되어 온 측면이 있다. 대리 발화의 (비)윤리는 최근 우리 문학장이 활발하게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고등 교육의 보편화 및 유튜브·SNS 등 개인화된 디지털 매체의 발달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 하는 발본적 질문들이 담론장을 활보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슬픔」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타자의 고통을 향유하는 메커니즘을 남김없이 시화함으로써 그 질문들에 답하고 있다.김혜순의 이번 시집에는 말미잘의 자유로운 부유감부터 창작 주체가 지면 바깥에 남겨두는 ‘모든 종류의 슬픔’까지 다양한 결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노래한 『죽음 트릴로지』가 속절없이 아름답고 말았던 것처럼, 편한 마음으로 웃으며 쓴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는 종종 섬뜩하거나 슬퍼진다.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역설에 너무 놀라서는 안 되겠다. 지금껏 우리가 살펴보았듯 김혜순이란, 그녀의 시란 인간이 거북스럽게 정해둔 선·악·미·추를 마구 엉클고 흩뜨리는 언어적 흐름이니까. 억세고 날랜 리듬이니까. 그녀가 시-하는 존재인 한, 언제까지고 그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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