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인 2024년 겨울호(제20호)
프릭쇼 증언―번역 연습 ― 캐시 박 홍 『몸 번역하기』 (마티, 2024)
프릭쇼 증언―번역 연습―캐시 박 홍 『몸 번역하기』1)
1. 실어증을 앓는 몸, mo’um을 몸에 기입하기
목소리가 눈멀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몸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눈먼 목소리」(Aveugle Voix, 1975)에서 차학경은 ‘Voix(목소리)’가 적힌 흰 천으로 눈을, ‘Aveugle(눈먼)’이 적힌 흰 천으로 입을 동여매고서 등장한다. 천으로 눈과 입을 가린 모습은 목소리가 가시화되지 못하는 것으로도, 외부의 억압적 목소리가 눈을 가리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 놓인 또 다른 흰 두루마리에는 ‘목소리, 실패, 나, 없는, 단어, 눈먼, 행동’ 등의 프랑스어 단어가 쓰여 있다. 글자 위에 앉거나 서툰 손으로 글자들을 더듬어보면서, 차학경은 낯설고 두려운 접촉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지배 언어를 감각할 수밖에 없는 소수자의 곤경을 그린다. 흰옷과 흰 천으로 감싼 몸은 엄연한 언어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백색의 배경으로만 인식되는 유색인종 이민자들의 언어를 물질적으로 형상화한 것만 같다. 그의 퍼포먼스에서 몸-말은 힘겨운 분투의 형식을 통해서만 불완전하게 발화하거나 번역된다.
한국계 미국 이민자 2세대인 캐시 박 홍(이하 캐시)은 그의 첫 시집 『몸 번역하기』에서 이 흰 천, 침묵의 천을 계승한다. 차학경이 속한 세대와 캐시가 속한 세대의 글쓰기는 분명 다르지만,2) 디아스포라의 정신적 연속성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 또한 시집에 분명히 드리워 있는 것이다. 차학경의 작업과 마찬가지로 캐시는 온전한 제 언어를 가질 수 없는 문제를 탐구하면서 이주 한인들의 역사적 기억과 개인의 역사를 촘촘히 엮어나간다.3) 또 인종, 젠더, 강제적 유성애, 장애, 계급 등에 대한 경험적 학습이 축적되는 장소로서 몸을 둘러싼 규범화의 폭력을 치밀하게 파고드는데, 특히 여성 섹슈얼리티를 규율하는 젠더화된 압박들, 아시안-여성에게 가해지는 인종화된 멸시와 대상화를 과거 ‘프릭’으로 호명되던 비규범적인 신체들에 대한 응시의 욕망과 겹쳐놓는다. 그러한 교차와 중첩 위에서 이 시집은 ‘프릭쇼’를 재증언하는 한편, 관음증적 범주화가 어떻게 프릭쇼의 종결되지 않는 역사를 이어가는지 ‘번역’하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번역은 인종 트라우마의 재현에 대한 전복적인 상상을 동반한다. 캐시에게 흰 천은 백인 중심 인종주의에 대한 보복의 도구로도 활용되기 때문이다. 실어증을 앓는 이 몸-말은 성적 가학 행위를 통해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구도에 교란을 의도한다.4)
하얀 천, 취함. 다른 언어가 새어 나온다―/목구멍, 구멍, 줄에 대한 생각―//당신은 내가 한국어를 할 때 흥분한다고 말한다.//태(胎)에서 나오는 노란 반죽, 빨갛지 않다―
집에서 하는 말들 ― 배고파 (I am hungry)
― 치워 (Clean up)
― 개 새끼 (Son of a dog)
그 말들을 당신 귀에 속삭이면, 당신은 절정에 이른다;//그 후 당신은 그를 번역해 달라 하지만 나는 비밀이라고 말한다.//기역 니은 티귿 리을―자모를 소리내어 말하기; 목구멍에서 나는 이중모음, 멋지다.
나를 흥분시키는 대상은 무엇인가. 단어들―
//한글: 처음엔 기생들, 시인들, 창녀들이 사용한 언어.
(…)
하얀 면 기다란 조각들, 백성들, 서민의 색깔, 덕망의 색깔, 더럽혀질 수 있는 색―//내 손이 당신의 횡경막을 누르고, 당신을 절정으로 몰아넣고,//입과 입 사이에는 빗방울 한 줌,//진통제, 차. 밀렵꾼들이 피를 뽑아내고―//당신 손목을 기둥에 묶을 때 쓰는 길고 하얀 천, 꽉/묶어서 정맥이 부풀어 오르게 땀이 나도록―//땀이 당신 헐떡거리는 그 하얀 몸을 더럽히도록,//내 혀가 핥고 있어, 명령하며 핥고 있어, 쉬쉬쉿.
― 「그 모든 최음제」 부분
백인과의 섹스 중에 ‘하얀 천’은 성적 가학의 도구로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를 쓸 때마다 상대는 “흥분한다”. 전형적인 인종차별적 페티쉬인 “Asiaphile”(「토노 마리아의 수치스러운 쇼」, 이하 「쇼」), 옐로우 피버(yellow fever)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아시아 여성들에 대한 성적 편견과 그로 인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온 섹슈얼리티 코드가 비루한 남성성을 성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이때 백인을 기만하며 반격의 언어로 발화되는 목소리―“배고파” “치워” “개새끼”―가 아내를 가성비 노동력으로 착취하는 전형적인 가부장의 발화를 차용했음은 주목을 요한다. 그간 여성의 몸에 기입되었던―여성이 들어왔던―억압의 발화들, 가학의 관습들은 중층적으로 겹쳐지면서 ‘나’의 투쟁을 대리하는 도구 역할을 수행한다.5) 상대는 자신을 “절정에 이”르게 한 그 말들의 번역을 요구하지만, 화자는 번역을 거부한다.6)
흥분시키는 한편 흥분되는 것은 화자 자신이기도 하다. ‘나’는 상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욕설과 가학 행위로 만족감을 얻는다. 또 흰 천과 한국어 사용은 피지배자들의 문자로서 한글에 대한 연상으로 연결되며 조선 서민들의 사회문화적 표상으로서 흰색이 백인 우월주의의 표상인 흰색과 나란히 놓인다. 한때 ‘인간 동물원’에서 흰옷을 입고 전시되었던 ‘열등한’ 피식민자 조선인에서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역사의 어떤 대물림을 사유하는 것이다. 흰 것으로서 흰 것을 굴복하게 하는 기묘한 전복 아래 ‘백인’의 마조히즘은 마치 민족적 함의를 지닌 다른 흰색에 의해 반격을 받는 것처럼 연출된다. “더럽혀질 수 있는 색”인 ‘하얀 천’은 그 지배적인 관념과 달리 “하얀 몸을 더럽히”는 도구가 된다.
한편 위 시에서처럼 ‘몸’을 번역하는 방식은 몸을 핥는 것으로 종종 그려진다. 「쇼」에서 암시되듯 몸은 백지이며 상처는 그 위에 새겨진 글자이므로, 몸을 핥는 건 몸에 달라붙은 상흔의 역사, ‘기형’ 단어들을 받아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적 접촉은 단지 읽고 탐색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쓰는 일이 되기도 한다. ‘몸 번역하기’가 ‘몸(을/에) 쓰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지하 묘지 같은 두 몸: 다리, 팔, 도롱뇽의 혀들,/그들의 피부는 하얗다.// (…) 아니면 목욕 중에, 마라의 모습을 하고선./얼어버린 물고기처럼 가장자리 가녘에 걸친 팔,//덜 따뜻한 물, 사이드쇼의 그림자,/더 거무스름한 나 자신의 피부.//혀를 입천장 가운데로. 이 뒤로 감아 올리고,/목 근육을 조여보세요. 낮은 톤으로 말하고, 숨을 내쉬세요./숨을 내쉴 여유가 없다.//부모님은 끙 소리도 않으셨다 애들을 깨울까 봐/숨도 쉬지 않으셨다.//빈맥, 낭종, 폴립: 피부를 핥으며/혀는 걸쭉한 표면을 죽 따라가며 탐색한다.// 왜 나는 단어들만 생각하는가?/그의 얼굴을 만지는 것은 내 손이 아니라, 어떤 손이다.//그이 얼굴의 자국은 단 일 초도 지속되지 않지만/나는 그것이 그을리기를 원한다.//먼저 단어들을 쓰기 위해:/옷을 벗은, 청사진, 리볼버.//욕조로 돌아가라: 부풀어 오른 내 젖가슴, 배꼽,/피가 빠르게 돌고. 빈혈이 아니야. 반복하라//장미, 씹, 찬가: 먼저 단어들을 쓰기 위해.
― 「목욕하는 동안」 부분(강조는 인용자)
혀로 피부를 샅샅이 핥는 탐색은 단어들을 쓰는 행위와 등치된다. 그런데 말하기 연습이 이루어지는 이 현장이 ‘목욕하는 동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목욕은 몸에 쓰여 있는 단어를 지우는 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목욕과 언어 기입이 포개지는 역설은 「목욕재계」에서도 그려진다. “반짝이는 삭제에다/나를 적는 것처럼 (…) 본래의 것을 지우고 다시 쓴 내 얼굴은/수정되어 창백하다”는 진술이 암시하듯, 혀로 쓰는 이 단어는 필연적으로 삭제를 전제하고 있으나, 이는 “본래의 것”으로 주어진 얼굴 대신 자신이 원하는 형태와 방식대로 제 얼굴을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상처에서 자라난 언어(「멜라닌」), ‘기형’의 형태를 한 글자들(「동물원」) 위에서 새로운 기입과 삭제의 반복이 누적된다.
2. 팽창하는 수치심과 규범적 언어의 생산 장치-장소로서 프릭쇼(freak show)
한편 ‘기형’에 대한 천착은 실어증의 육체들이 그려지는 중요한 두 양상을 시사한다. 이 시집에는 거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만큼이나 몸이 부풀고 팽창하는 장면 또한 빈번한데, 여기에는 중요한 내부 법칙이 있다. 몸을 부풀리고 붉어지게 하는 등 신체를 변형시키는 기제가 수치심인 것이다.(「“바가지” 번역하기」, 「보디빌더」)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개인의 속성 자체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부과되어 신체의 즉각적인 변형을 야기한다.(「통과의례」) 이러한 수치심은 주로 소수자의 인종화된 정체성과 성적 대상화가 교차하는 몸의 기억과 관련된다. 가령 “미군들”이 “색시를 섹시(sexy)로 발음”하며 “점잖은 여자,/결혼할 자격이 있는 여자”, 즉 성적으로 ‘순결’하고 ‘정숙’한 여자인 “색시”와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술집종업원들”을 희롱할 때, “한국인”의 민족성 또한 제국주의의 성별화‧군사화된 위계 관계로 환원되며 아시안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모욕이 중첩된다.(「통과의례」)
그런가 하면 「규모」에서 수치심은 사람들을 커지게 할 뿐 아니라 극도로 작아지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여기서 “난쟁이”거나 “거인”이라는 극단의 신체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유색인종 소수자들은 어떤 상태에서도 온전히 가시화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왜곡”된다. 비규범적 신체를 포착하는 “작가의 충혈된 눈”은 대상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어쩌면 이는 수치심을 주조하고 낙인화하는 관음증적 응시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응시를 대표하는 것이 시집 전반에 걸쳐 가장 빈번히 그려지는 소재인 프릭쇼이다.(「창과 잉의 존재론」, 「오리지널 샴쌍둥이」, 「통과의례」, 「나선형」, 「중성형 대명사」, 「결별에 대해」) 시선의 응시 방식이자 장소로서 프릭쇼는 장애 신체를 수익화하고 (비)규범적인 신체를 만드는 한 장치로 기능했는데, 캐시는 이를 구성하는 인종‧민족‧계급적 억압을 살피는 한편, 소수자들이 경험하는 몸의 억압적 경험을 빈번히 삽입하면서 ‘프릭’7)의 범주화가 현재에도 유사한 형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과거의 역사를 증언 및 애도하는 것에 한정하지 않고 유색인종 이민자의 몸, 값싼 노동력으로 거래되는 몸, 장애가 있는 몸, 성적 대상이자 생식 기계로 환원되는 여성의 몸 등 관음증적 응시와 폭력들이 집결하는 “식민지”(「수집가」)로서 몸을 ‘번역’하고자 한다. 과거에 프릭쇼 무대 위에 세워졌던 이들의 말-못함은 숱한 소수자들의 말-못함과 이렇게 겹쳐진다.
금빛 점점이 박힌 검은 몸.//전시 c: 내 입은 구피처럼 열렸다가/닫혔다. 동사들은 잃어버렸고, 생략부호들이/찌꺼기처럼 흘러내렸다. (…) 전시 e:여전히 말을 못해서, 나는 특수 교육 받는 곳에/보내졌다, 자폐증 환자들, 마비 환자들, 그리고/흙만 먹는 소년과 함께. (…) 전시 h: (…) 욕을 흘리고 다녔다. 나와 잤던 남자가/아시아 여자만 좋아하는 남자가 아닌가 의심했다.//전시 i: 바람잡이는 그녀의 흉터가 몇 개인지를 강조하며/그녀를 미개인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렀다.//전시 j: 어젯밤의 행동을 기억하려고 나는 목구멍 살갗을/꼬집었다. 목구멍 같은, 몸통 같은 죄책감.//전시 k: 그녀는 가운을 벗고 134개의 흉터가/새겨진 몸을 드러냈다. 간통으로 자기 부족에게/처벌받을 때마다 한 번에 하나씩 흉터가 생겼다. (…) 전시 o: 만족을 모르는 그녀의 욕망이 만든 134개의 흉터를/그들이 얼빠진 듯 구경할 때, 그녀는 눈을 감고/그 숫자들이 그녀의 고향으로 녹아내리길 기다렸다:/검은 산호초가 있는 바다, 그녀가 더 좋아했던 연인,/절대로 무뎌지지 않는 덴 자국들.//전시 p: 그녀는 눈을 떴고 미소를 지었다./각각의 벌어진 입에서 그녀는 호의를 하나씩 따냈다.
― 「토노 마리아의 수치스러운 쇼」 부분
위 시는 ‘한 소녀’로 지칭되는 ‘나’의 이야기와, 프릭쇼에 전시되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전시’라는 공통의 항목 아래 차례로 교차시킨다. “간통”이라는 부당한 죄명은 ‘그녀’가 같은 부족에게 “처벌받”도록 하는데, ‘그녀’의 화상 흉터가 “절대로 무뎌지지 않는” 이유는 매일 새로운 처벌이 몸에 기입되기 때문이다. 흉터가 새겨진 몸은 다시 ‘성녀’이자 ‘창녀’라는 전시 가치를 획득하면서 악순환의 굴레를 형성한다. 한편 화자가 겪은 특수 교육 기관에서의 기억, 성적 대상화의 기억과 수치심, 죄책감 등은 ‘전시 i’에서 ‘그녀’의 “비밀”과 겹쳐진다. “그 소녀 그리고/또는 한 소녀”인 이들은 속한 시대도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전시 n’에서의 “회개하는 흉내”를 통해 만나며 각자의 ‘개인사’가 단지 개인의 역사에 한정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 외에도 캐시는 ‘프릭’으로 호명되고 전시되었던 이들의 실제 삶을 조명하면서 착취와 전복이 복잡하게 뒤섞이는 프릭쇼 역사의 양면성을 깊이 파고든다. 단순히 비판에서만 그친다면 이는 ‘장애’에 대한 규범적 인식을 해체하는 것까지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비규범적인 신체는 그 외양적 특이성으로 인해 예외적 억압을 받게 하는 것인 동시에 수입을 창출하는 생존수단이기도 했다. 또 그중 일부는 자신이 겪었던 비장애중심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똑같이 답습해 큰 부를 얻었지만, 평생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호소해야 했다.(「창과 잉의 존재론」) 결코 단일하거나 매끄럽게 봉합되지 않는 개개인의 특수한 삶과 그로 인해 끊임없이 뒤엉키는 착취 구도의 복합성은 프릭쇼를 수치심으로도 자긍심으로도 규정할 수 없게 한다.
3. 듣기로서의 번역, 시 쓰기8)
그리고 이는 장애 당사자로서 ‘프릭’이라는 용어를 전복의 언어로 가져올 수 없는 곤경을 고백한 일라이 클레어를 떠오르게 한다.9) 어떤 이들은 자긍심의 징표로서 프릭을 내세우고, 어떤 이들은 모욕의 역사로서 프릭을 거부한다. 그러나 일라이는 그러한 양분보다는 프릭을 주조해낸 장치로서 프릭쇼의 역사를 심문하고,10) 프릭쇼에 전시되었던 개개인의 역사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프릭쇼라는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착취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를 구축”11)해야 함을 강조한다. 섣부른 환원에 앞서 증언과 애도 그리고 자긍심의 영역을 세심하게 구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결국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범주화된 프릭의 역사에 개인의 역사를 연결하는 일이다. 즉 집단적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과, 그 연장선으로서 규범적 기대에 둘러싸인 개인의 몸의 시간성에 대한 이해를 거치지 않고서는 프릭을 자긍심의 언어로서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시집에서 두드러지는 작업 역시 한인 디아스포라의 거대 역사에 몽타주로 이어붙인 미시사를 시적으로 증언하면서(「동물원」 「통과의례」 「샅샅이 뒤지기」 「바지런한 헛소리」 「헨리 밀러가 아니라 어머니」 「시작을 콜라주하기」),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 그 역사를 어렴풋이 더듬는 방식으로나마 ‘번역’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프릭쇼의 역사를 번역하는 것이 캐시에게 중요한 이유는, 여전히 인종주의에 기반한 차별적 시선이 소수자들의 신체를 규율하고 있으며 관음증적 응시가 작동하는 어디나 프릭쇼의 현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캐시의 작업은 시집을 읽는 누구든 프릭쇼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몸과 얽힌 개인사를 이어 서술할 수 있도록 권유한다. 그리고 이는 “너는 왜 나를 부활시켰어?” 묻는 사라 바트만의 질문에 대한 가장 충실한 대답으로서 각자의 몸-번역을 수행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화자의 우연한 ‘들음’이 사라 바트만을 “부활”시켰듯, 무엇보다 번역은 ‘듣기’임이 강조된다. 생물학적 특징을 “노트에 휘갈겨 쓰는” ‘생물학자’와도, “연출된 대답”으로 호객 행위에 열을 올리는 ‘쇼맨’과도 다른 방식으로서 “역사의 늙은 고막”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음’으로써, 즉 과거의 ‘들음’과 현재의 ‘들음’을 연결함으로써 말이다.(「호텐토트 비너스」) 그렇다면 몸 번역에 앞서 행해져야 할 일은 몸의 목소리를 듣고 몸에 질문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내밀한 개인적 경험을 응축한 ‘나’로서의 몸이 그 출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몸은:/털/음식/심장/욕망//혹은 마음을 바꾸는 일, 이 중 무엇도 아니다://엄마는 항상 내게 물으셨다: 모미 아-파?//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몸을 정의한 건 바로 열병이었다,/오한, 뜨거운 기운―//어마 어지러(엄마, 나 어지러워요)
(…)
둔하고 뚱뚱한 혀, 근육을 감싸는 뼈가 욱신거린다./나는 그저 자고 싶었다, 이 몸을 떠나고 싶었다,//할머니의 목 주위에 자리 잡은 한방 침의/기억처럼 아프고 싶었다.//
(…)
우리가 몸과 먼저 연관 짓는 것은 늘 고통이다,/가슴에 대고 누르는 주먹의 무게.
― 「몸 번역하기」 부분
몸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공동체적, 사적 기억들이 넘나드는 위 시에서, 가장 개인적인 몸의 경험 또한 제 목소리를 주장한다. “열병”이라는 실제적인 “고통”은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몸을 정의”하고 몸 바깥을 상상하게 한다. 아플 때 그 존재를 가장 선명히 감각하게 되는 이 몸은 몸으로 이어진 관계인 ‘엄마’와의 기억에 자연스레 포개지며 개인사, 가족사를 넘어 다른 고통들과 연결될 수 있는 확장의 가능성을 마련한다. 그렇기에 몸이 아파? 묻는 목소리는 단순히 열병의 고통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그간 몸에 새겨진 상흔으로서의 기억들, 더 나아가 무수한 이들의 몸의 역사를 묻는 것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몸의 더듬거림과 짓누름으로 발화하던 차학경의 침묵-소리가 다시금 겹쳐진다. “mo’umi a-p’a?” 묻던 ‘엄마’의 말을 이렇게 돌려줄 수 있으리라. 혹은 “Mo’umi appa oma” 대답하던 ‘나’의 말을 이런 질문으로. mommy, 아파?
- 1) 캐시 박 홍, 정은귀 역, 『몸 번역하기』, 마티, 2024. 원제는 Translating M'oum으로, 캐시는 ‘몸’을 표준 로마자 표기인 ‘Mom’ 대신 ‘Mo’um’이라 표기함으로써 몸을 번역한다는 것의 의미가 ‘몸―모음(말)―마음’ 번역하기 등으로 함께 열릴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
- 2) 차학경이나 김명미와는 달리 캐시의 글쓰기에는 지배적인 문화로 동화되는 고통보다도, 정형화된 인종적‧문화적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탈식민적 문제의식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김미연, 「캐시 박 홍(Cathy Park Hong)의 자전적 글쓰기에 나타난 차이의 정체성 모색―『마이너 필링스』(Minor Feelings)를 중심으로」, 『한국문예비평연구』, 2022, 175쪽. 그런가 하면 캐시는 차학경의 언어를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언어”이자 “자신과 동떨어진 대상물로 간주”한다고 평가하는 한편, 자신은 줄곧 영어를 권력 투쟁의 무기로 사용해왔다고 서술한다. 캐시 박 홍, 노시내 역, 『마이너 필링스―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마티, 2021, 140쪽, 220쪽.
- 3) 관련해 “정열을 찾으려면, 나는 서정시를 썼어야 했다”고 말하는 「결별에 대해」는 캐시의 시론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인종 트라우마를 재현하는 관습적인 형식을 따르지 않기 위해 고백적 서정시가 아닌 스탠드업 코미디의 농담 방식을 익혔는데, 이는 도덕적이고 유순한 타자로 자신을 길들여 인종적 자기혐오와 열등감, 수치심을 내면화하게 하는 “존경성 정치에 구멍을 내는 장치”를 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캐시 박 홍, 위의 책, 72-73쪽. 또 이는 그가 주목하고자 하는 주된 대상이 정열 대신 ‘자제’와 그로 인한 ‘수치’임을 암시한다.
- 4) 캐시는 시쓰기에 있어 베트남계 미국 이민자인 오션 브엉의 영향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오션 브엉의 『총상 입은 밤하늘』을 가리켜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 나라에서 벌어졌던 폭력에 대해 에로틱한 동질감을 형성하고, 낯선 사람들과의 잔혹한 성적 접촉을 통해서 반복적으로 그것을 복원하려고 한다”고 말하는데, 가학적인 성적 접촉을 통해 폭력을 복원하고자 하는 모습은 바로 이 시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캐시 박 홍, 위의 책, 78쪽.
- 5) 이와 유사하게, 이 시집에서는 직접 말할 수 없는 실어증 몸 대신 사물이 말하게 하는 방식도 두드러진다. “괴짜(freak)는 오직 물건들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샅샅이 뒤지기」)
- 6) 마찬가지로 「움직임」에서 그려지는 입맞춤의 장면은, 입에서 입을 거치며 번역이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어증이 옮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입에서 입으로”는 차학경의 비디오 <입에서 입으로>의 영향을 시사한다.
- 7) 이 시집에서 ‘괴짜’, ‘기형’으로 번역되는 freak은 복합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용어이므로 이 글에서는 ‘프릭’이라 표기하기로 한다.
- 8) “시인은 귀로 시를 쓴다. 시인은 말이 그친 곳에서 쓴다. 시인은 말할 줄 모르는 두 귀로 말 아닌 말을 쓴다. 귀가 하는 말, 그것이 시다.” 김혜순, 『여성, 시하다』, 문학과지성사, 2017, 49쪽.
- 9) 일라이 클레어, 전혜은‧제이 역,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현실문화, 2020, 186쪽.
- 10) 이는 장애에 대한 의료적 모델이 정치적인 산물임을 심문하고 장애를 집합적 재상상을 위한 잠재적 현장으로 파악하도록 권유하는 ‘장애의 정치적/관계적 모델’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애의 ‘결과’라 여겨지는 사회문화적 의미들, 몸에 대한 강제적 향수와 문화적 기대의 반영으로서 일방향의 시간성은 역사적‧정치적으로 재맥락화된다. 앨리슨 캐이퍼, 이명훈 역,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불구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학과 상상력』, 오월의봄, 2023.
- 11) 일라이 클레어, 앞의 책,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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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물질의 기억과 추상의 기억 최다영 1 새로운 사회학·생물학적 지식을 접하며 인식의 전환을 겪게 된 순간들을 빈번히 다루는 만큼, 『시와 물질』에는 그러한 정보를 알려준 이들의 발언이나 저서가 빈번히 인용된다. 또한 기후생태위기가 심화되는 전지구적 위기 속에서 우세종으로서 인간의 책임과 인간종 내부에서의 연대에 대해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가령 「물의 국경선」에서는 "매일 새로운 물의 국경선이 그어"지는 "지도"와 "얼음처럼 단단"한 "국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데, 이를 통해 나날이 물 부족 지역이 넓어지며 물을 찾아 이동하는 난민들이 속수무책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경계선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인간 내부에서도 은연중에 계급과 우열을 나누었던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 또한 중요하게 다뤄진다. 가령 「강물이 요구하는 것」에서 화자는 자신을 시혜적 위치에 두고서 현지인을 대상화하고 연민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부끄러운 마음 한 조각"을 자각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베트남 여행 중 화자는 배 젓는 "베트남 노인의 비참을 / 좀더 리얼하게 / 좀더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서 핸드폰을 그에게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 과정에서 핸드폰이 강물에 빠진다. 이에 화자는 핸드폰이 스스로 강에 뛰어든 것이며 "강물"이 "배를 흔들어 손에 든 핸드폰을 삼켜버"린 것이라 의인화에 입각한 심적 봉합을 시도한다. "감상적인 동일시를 인정할 수 없"으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음증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행위 동기를 강물에게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경솔하고 오만한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다. 섣부른 대상화에 대한 경계는 「슴새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나타난다. 화자는 언젠가 슴새를 만났던 일을 메모해 놓고 시로 쓰지 않은 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 기록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시집에 넣지 않았을 이유를 자문한다. 이때 "슴새를 시집에 가두지 않고 / 구굴도나 사수도나 칠발도 같은 섬으로 / 날려 보내고 싶어서였"을 거라 스스로 답을 내려보는 모습은 어떤 대상을 손쉽게 가공하거나 판단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슴새를 맞닥뜨린 경이로운 만남의 순간을 쉬이 떠벌리지 않고 오롯이 둘만의 사건으로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러나 나희덕에게 시는 존재자를 편의에 따라 구획하고 가두는 부정적 속성에 머물지 않으며 서로 다른 존재자 간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시집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뻗어 나감의 이미지를 통해 암시된다. 가령 "시라는 이름의 산호 또는 버섯"(「산호와 버섯 - 호주의 시인 사만다 포크너에게」)이라는 표현은, 유성생식을 통하지 않고도 아주 멀리까지 퍼져 나갈 수 있는 버섯만큼이나 시 또한 물리적·심리적으로 멀거나 상이한 곳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매개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먼 나라의 다른 시인을 호명하며 “유성생식으로 아이들을 낳은 우리도 / 이제는 조금 산호와 버섯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다정한 말 건넴은 비록 가까이 있거나 자주 볼 수 없어도 시를 통해 경험하는 깊은 우정과 유대감에 대한 환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뻗어감의 속성은 「세포들」에서 암시되듯 무질서함과 더불어 나희덕에게 생명의 속성 그 자체로 인식되는 듯하다. 「밤과 풀」에서는 인간이 설치한 "경고판"을 넘어 척박한 환경에서도 끈질기게 뻗어가는 풀의 집요한 생명력을 주시하면서 머잖아 풀로 무성하게 뒤덮일 황무지의 미래를 예견한다. 이는 앞서 본 시의 확장성과 겹쳐지며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시가 변화시켜 갈 다채로운 풍경을 그려보도록 이끈다. 나아가 나희덕에게 뻗어감에 대한 사유는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을 긍정하며 성립하는 것이기도 한데, 그렇기에 이미 죽은 자들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상상이 그의 시 안에 마련된다.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는 눈의 무진장, 흰 글씨로 쓴 겨울 이야기는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눈 위에 가만히 누웠다 춥지 않았다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누나, 눈 속에서 잠들지 마, 가만히 나를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눈의 실뿌리는 얼마나 멀리 뻗어가고 있는 것일까 하얀 피를 나르는 실핏줄처럼 눈의 대지가 들려주는 심장소리를 들었다 - 「눈의 대지」 부분 여기서 "멀리 뻗어가"는 "눈의 실뿌리"는 물이 얼고 녹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다른 물질로 순환해 온 물의 내력을 내포하는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통해 "계속 발아하고 증식하"며 영원히 이어질 물질의 생애를 암시한다. 또 물방울 하나하나가 보고 듣고 간직했을 기억들도 물방울 안에 담겨 물질의 무한한 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 예정되어 있다. 이렇듯 물질의 기억에 새겨진 각 존재자들의 삶 또한 물질의 순환 속에서 소멸되지 않고 순환을 거듭하기에, 혹은 여러 물질들로 분해되어 단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이 세계에 함께 머물고 있는 것이기에 "십 년 전 길에서 죽은 동생이 옆에 있는 것 같"은 기적적인 순간의 성립이 가능한 것이다. 언젠가 동생과 함께 쌓았을 추억, 동생이 들려줬을 걱정 어린 목소리는 동생이 떠난 이후에도 화자의 곁을 지키며 나란히 누워 있다. 즉 이 시에는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며 순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모든 존재자들이 이 땅에서 누적한 기억 역시 물질의 순환 속에서 몇 겹의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포개질 수 있다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자연으로 되돌려지는 인간사의 필연과 그럼에도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 연결의 기억을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아쉬움을 몇 자 덧붙이고자 한다.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구체적인 삶이기도 한데, 가령 「샌드위치」는 공장에서 교반기 사고로 희생된 노동자를 기리고 있다. 그런데 그 "노동자의 죽음"을 가리켜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렸다고 표현하고 있어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고인이 괴로워하며 흘렸을 피와 소스의 물질적 유사성에 기반해 고인을 사고 당시 그가 만들고 있었던 '소스'로 치환하는 것은 정당한가. 수식을 위한 '자본주의의'라는 관형어 또한 누군가의 생을 '희생된 노동자'로만 납작하게 환원하는 것처럼 보여 고민이 남는다. 또한 「존엄한 퇴거」는 고독사로 죽은 어떤 이가 "개의치 마시"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을 남겨놓은 것에 대해, 그의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 …(중략)…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을 두고 '존엄한 죽음'이라 표현한다. 그의 이러한 "퇴거"에 '존엄'이라는 수식은 과연 마땅한 것일까. 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벼랑 끝까지 몰렸을 누군가가―결코 '자발적'이라 할 수 없는―죽음을 맞게 된 것을 두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신을 수습할 타인을 먼저 헤아린 것에 '존엄'을 부여하는 모습이 왜 이토록 시혜적인 태도로 읽히며 고독사의 모범군을 구획하는 것처럼 읽히는 걸까. 보편의 영역인 '존엄'보다는 '품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이는 시집 속 대부분의 화자들이 여전히 타자를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례로 「얼음 시계」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으로 가져온 빙하 조각들이 되려 '인증샷'을 위한 '핫플'이 되고 만 것에 대한 화자의 안타까움이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걸음걸이」에서는 "평화의 걸음걸이란 …(중략)…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이라 말하는데, 두려움에 휩싸여 빠르게 뛰다 적군에 발각되어 희생된 청년의 일화를 교훈 삼아 이끌어 낸 아포리즘이라는 점에서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두려움 속에서도 뛰지 않고 걷기를 택한 소년을 죽은 청년과 대조되는 교훈적 위치로 격상시킴과 동시에, 무고한 청년의 죽음의 '귀책사유'가 청년에게 있다는 식으로 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 동일화에 입각한 인간적인 의미화가 다소 과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가령 「옥시토신」에서는 젖을 가리켜 "모성애의 다른 이름 …(중략)… 희뿌연 액체로 이루어진 선물, /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호르몬"이라 칭하는데, 이는 포유류의 생리적 반응인 '젖'을 '선물'과 '사랑', '모성애'와 곧장 연결함으로써 감성 구조의 상투적인 재현 체제를 반복하고 어미에게 사랑의 의무를 고착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멸치들」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사람들은 / 바닥에 파닥이던 멸치들처럼 시들어갔"다며 물밖에 타의로 끄집어내진 멸치들의 격렬한 꿈틀거림을 병자들의 고통 어린 몸부림에 직접 대응하는데, 이러한 비유 축조는 멸치에게도 인간에게도 상당히 부당한 것으로 느껴진다. 인간을 상위자의 위치에 자연히 놓고서 그 지위의 추락을 비참한 하위자로 상정된 존재에 이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수사의 활용 자체가 아니라, '인과응보'를 경고하기 위한 목적 아래 멸치를 도구화하고자 그 속성을 앞서 구획하는 태도, 인습적 감각을 갱신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에 있다. 표제작 「시와 물질」에서 시는 아무 변화도 불러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이라며 자조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으며 시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에 따라 더욱 달라지기 마련이다. 나희덕 시인같이 오랜 시간 독자들의 신뢰를 받으며 무수한 교과서에 시를 실어 어린 시 독자들이 처음으로 접한 좋은 시에 대한 준거점이 되어온 시인이라면, 더더욱 자신이 쓰는 한 줄 한 줄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감히 말해본다. 나희덕이라는 이름이 한국시의 신뢰할 수 있는 보증이자 자부심으로 통용되고 있는 만큼, 적어도 이런 식의 타성화에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와 물질」에서 "우리의 발견은 /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었"다는 로알드 호프만의 언급이 또한 인용되듯, "물질들의 새로운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이 동시대 시의 한 중요한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끝내 이뤄낼 풀의 번성을 기대하던 마음으로, 느리고 조용하더라도 분명한 변화와 연결과 확장을 가능케 하는 매개로서 시의 역할을 더욱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한 실천을 축적해 나가도 되지 않을까.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사랑하고 문학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온 시인이므로 물론 가능할 것이다. 2 전체주의에 대한 공포일까, 『검은 양 세기』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모든', '모두'일 것이다. 일제히 같은 풍경 속에 멈춰 있는 장면과, 그러한 장면을 기어이 비집고 아주 작은 균열과 어긋남이 발생하고 마는 순간에 대한 포착이 대부분의 시에서 그려진다. 또한 '영원', '무한' 등 의미 단위가 큰 추상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이나 무한소급 모티프, 메타시에 대한 알레고리 축조와 '사랑'을 기능적 어휘로 활용하는 점은 언뜻 이 시집을 가속류의 극단화된 형태로 읽기에도 무리가 없게 한다. 서시에 해당하는 「검은 회화」는 텅 빈 직사각형만이 지면을 채우고 있는 시다. '회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일종의 액자 틀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의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내부도 검은 풍경이 아닌 투명함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조르주 페렉의 『공간들』이 루이스 캐럴의 『스냐크 사냥』 속 '태평양 지도'―텅 빈 사각형―를 발췌하며 서문을 열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1)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지도 말이다. 이 무한한 가능성이자 단절의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2) 한편 이 텅 빈 사각형은 『검은 양 세기』에서 자주 발견되는 형상의 흘러넘침을 예고하는 구멍이기도 하다. "이미 열려 있어서 영원히 열 수 있는 이미지"(「리부트월드」)의 반복되는 변주는 구멍이 뚫려 있기에 내부의 누수와 외부의 침입을 무한히 허용하는 이 세계의 운명을 상징하는 셈이다. 이처럼 허물어지는 윤곽을 중심으로 흘러넘침과 채워짐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미지는 시집 전반에서 여러 번 형상화된다. 구멍 뚫린 상자에 계속 들어차는 게 있다 / 넘실대다가 사방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있다 // 흘려보내는 동안에는 구멍이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 상자는 언제나 가득 참과 초과되는 순간을 넘나들고 있었으므로 // 그러나 구멍으로 무언가를 계속 흘려보내면서 / 사방으로 넘쳐흐르는 이 상자의 상태를 어느 순간으로 규정해야 할까 …(중략)…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무엇에 전전긍긍하기를 멈추고 / 몸이고 밤인 세상을 견디기를 멈추고 // 이렇게 흘려보내는 구멍이 되어 구멍까지 흘려보내는 것 // 하지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 지금도 계속 들어차는 게 있는데 /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로 남아 허공에 떠 있는데 // 터지고 나면 아주 잠깐 유지되는 형태가 되어 / 영원히 열려 버리고 말 텐데 터져 버리고 말 텐데 // 너희를 세상에 영원히 잠기도록 할 텐데 // 그래도 상자는 다시 떠오르고 / 바닥에 엎어져 영원히 구멍을 쏟아내는 모습으로 …(중략)… 너는 몸이 처음이라 // 구멍을 찾아다닌다 - 「원영영원」 부분 위 시에서는 구멍 뚫린 상자에 무언가가 자꾸만 들어차는 모습과 구멍을 통해 무언가가 자꾸만 빠져나가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윤곽이라 할 수 있을 “피부는 모두 사라지고 찰랑거리는 부피"만이 남아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 '너' 또한 "계속 뚫리고 마는 구멍"으로 제시되는데, 결코 봉합될 수 없으며 무한히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구멍이라는 점에서 이 구멍은 영원한 유동성을 현시한다. 이때 "상자에 뚫린 구멍을 상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문하는 화자의 발화는 이 시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상자에 난 구멍은 상자일 수 없는가? 단지 구멍일 뿐인가? 안팎의 경계가 무화된 구멍 난 상자는 상자인 동시에 구멍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동시에 다시 세워지며 / 점점 투명한 안팎이 되어 가는"(「구유에 담긴 시」)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시사한다. 마찬가지로 「리버스림버스」에서 "빛이 닿는 자리마다 윤곽이 끊어져" 허물어짐에 따라 예정된 "미래가 파쇄"되고 윤곽 안에 가두어 두었던 "형상이 넘쳐" 흐르게 된다. 그런데 "밤"이자 몸인 내부의 범람으로 유리 저편이 검게 물들어갈 때, 이 범람 퇴적물―넘쳐흐른 형상이 "새 공병을 채울 수 있"게 한다는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모두 삭제되어 새로운 데이터를 구축할 수 있는 자원으로 분해 및 회수되고 있는 장면, 한정된 자원으로 세계를 건축하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장면은 이 시집의 내적 구조를 축조하는 의지 자체의 표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저장용량을 압축하듯 "시효가 다한 공간을 위해 평생분의 기억을 요약하는 사람"은 이 가상 세계 혹은 디지털화된 저승의 관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3) 나아가 "새벽에 깨어 한 단어를 고쳤다가 아침에 되돌리고"(「미자나빔」)라는 언급 등에서 암시되듯 이 관리자는 외부의 플레이어인 시인의 창작 수행과 그로 인한 입력값을 반영하는 존재이다. 즉 세계의 축조와 몰락의 동시성을 그리는 상호구성의 아이러니는 시를 입력하고 수정하는 과정에 또한 빗대어지고 있는 것이다. 「미자나빔」에서 마음의 깜빡임이 커서에 비유되듯, 마치 자각몽이나 AI 작업과 같이 외부 시인 혹은 유저의 '생각'이나 '마음'이 컨트롤러처럼 기능하는 모습은 입력값의 유무에 따라 세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양상을 반영한다. 가령 "어느 한순간 생각을 멈추면 상자는 모서리가 젖어 있"(「원영영원」)게 되는데, 이는 '생각'이라는 조작 및 설계를 계속하지 않으면 질료화된 형상의 누수가 멈출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차에 치이지 않으려면 차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추구체」)다는 지침이 성립하는 이유 또한 생각이 차의 현시 유무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채석장」에서는 "마음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 꿈에서 시인이 된 네가 공원 계단에 앉아 낭독을 하고 있"는지 자문하는데, 이를 통해 '너'의 풍경을 형성한 변수가 마음의 작용 혹은 마음의 제어 불가능한 오류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외부자이자 창조자로서 '시인'이 거듭해서 고쳐 쓰는 시―세계의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일까. 실상 이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정지시켜 반복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해 "시간의 영원한 밑빠짐에는 반복만이 적힐 수 있"(「구유에 담긴 시」)다는 언급은 이 시집에서 그려지는 영구적인 누수의 풍경이 시간의 역행에 대한 알레고리임을 암시한다. 시간에 누수가 발생했기에 시간의 선형적인 이행이 불가능하기라도 한 듯, 시집 속 인물들은 특정한 반복 구간에 고착되어 있다. "매일 신발을 잃어버리"(「홀」)는가 하면 "아무리 깨어나도 오늘"(「환영의 안쪽―에게」)을 벗어날 수 없으며, 「추구체」에서는 "누군가 다녀갔다는 사실도 / 이전에 누군가 살아 있다는 사실도 // 비어 있"어 이들이 일상적인 리셋과 초기화를 겪고 있음을 알게 한다. "어느 날 태어나 눈을 뜨기도 전에 / 영원한 내리막길을 굴러 너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는 언급처럼, 이는 이별이나 죽음으로 인해 과거 어느 순간에 고착되어 있는 '너'에게 가닿기 위해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든 돌려세우고 싶은 심적 동기의 발로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반복이 무한을 추동하는 가운데 이들의 의식은 나날이 과거를 반추하는 방향으로, "과거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같다」) 그러나 「사모바르―에게」에서 그려지듯, 같은 장면 속에서 같은 행동을 하도록 유도되어도 "매번 같은 슬픔에 빠질 수 없"는 것이 화자에게 진정한 의미의 "슬픔"이라 일컬어진다. 매번 겪는 슬픔일지라도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는 것, 이미 아는 슬픔일지라도 번번이 새롭게 상처를 새긴다는 건 슬픔의 특수성이자 영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다듬은 개가 가지 않고 쏘아 올린 폭죽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는 "멈춰 버린 세상에서" 끝내 "개의 꼬리가 다시 흔들"(「난지도」)리는 장면은 이러한 슬픔의 속성을 받아들임에 따라 과거로의 반복 루프에 언젠가 금이 가고 말 것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이 자그마한 균열의 암시는 "밑그림" 너머를, 반복되는 슬픔 너머를 상상해보도록 이끈다. 1) '모든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회의주의적인 태도는 이 시집에서 빈번히 포착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관련해 "이 모든 것이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 투명에 투명을 덧대어 불투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리부트월드」는 김종연식 '검은 회화'에 대한 전시 소개 글처럼 읽히기도 한다. 직사각형 안을 가득 채운 '아무것도 아닌' '투명함'의 덧바름은 불투명에 도달하기 위한 불가능한 지향을 드러내며 회화 내부의 '모든 것'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관리자는 세계 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옵저버로 보이는데, 가령 「미자나빔」에서 "누군가가 제발 자기를 구해 달라고 달려와서는 나를 지나쳐 가"며, "밤마다 동산에서 악쓰던 사람 (…) 찾아가도 여전히 악을 쓰던 사람"은 '나'가 비가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죽음에 대한 암시가 짙게 드리운 이 세계를 디지털화된 저승계라 할 수 있다면, 관리자는 살지도 죽지도 않은 중간자적 존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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