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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봄호(제60호)

우연과 애도, 그리고 글쓰기 : 김나현, 『래빗 인 더 홀』

진기환 문학평론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래빗 인 더 홀』1)에는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선일과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인해 하루의 작은 계획이었던 바닐라라테조차 마시지 못하는 나(「오늘 할 일」), "물의 실수"로 인해 이모를 잃은 보해(「래빗 인 더 홀」),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의 몸에 생긴 구멍이 애인을 삼키고 소멸시켰으며 그 이후 애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게 된 나(「로쿰」)처럼 삶의 노정과 진로 그리고 죽음까지 우연의 지배를 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래빗 인 더 홀』은 김나현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는 '삶은 통제되지 않는 것' 혹은 '삶은 우연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믿음2)이 발현된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삶이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은 자칫하면 허무주의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3) 그 어떤 노력도 우연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력이 결과를 보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어지는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다. 물론 주어진 결과를 잘 받아들이는데도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주어진 현재를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할수록 미래에 대한 전망은 사라진다. 허무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싹튼다.

    다행스럽게도 김나현은 우연이 불러올 수 있는 허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우연의 지배를 받는 삶을 그리면서도 허무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전망들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연과 더불어 김나현의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축인 글쓰기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글 쓰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의 글쓰기의 근원에는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주로 죽음으로 표현되는 상실은, 우연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나현의 인물들은 이러한 필연을 기록함으로써 우연을 극복해보고자 한다.

    「로쿰」을 보자. 「로쿰」은 '소멸'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의 '소멸'을 불러오는 건 구멍이다. 안의 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간다. 이상함을 느낀 안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소멸증상지원재단' 협회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협회의 직원에게 자신이 그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국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가 소멸된다는 사실을 듣는다. 왜 소멸하는가? 그 이유는 안도 모르고, 안의 애인인 '나'도 모르고, 협회 직원도 모른다. 그들이 아는 건 소멸은 그저 어느 날 우연처럼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멸'했다는 기억조차 소멸되어버리니, 남은 이들은 제대로 된 애도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안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으며 남겨진 존재들이 그를 잊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숨을 한번 내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언니가 구멍에 먹히는 것 같다고 제 노트에 쓰여 있더군요. 그때 수첩에 모든 것을 적어두었거든요. 저는 비교적 재단의 도움을 빨리 받았고,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를 써요. 우리에게 남는 것은 노트뿐이니까요.

"정말 기억이 사라져요? 그럼 뉴스에서도 못 본 게 아니라 봤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어요?

"소멸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다만 기록을 돕는 거죠. 당신이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기록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나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역시 그래요. 언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요. 노트에만 남아 있죠."

— 「로쿰」, 190쪽


    노트의 기록 유무와는 상관없이 안은 세상에서 '소멸'한다. 안의 흔적은 오직 노트에만 남아 있으며, '나'는 자신이 노트를 작성했다는 사실마저 잊는다. 그렇게 본다면 노트를 작성하는 일, 다시 말해 글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설가가 된 '나'가 안에 대한 노트를 읽고, 그가 선물해준 디저트인 '로쿰'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멸 대상과의 기억은 모두 잊는다는 '소멸의 법칙'을 극복한 일로서, 안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단초가 된다. 물론 소설에 그 과정이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는다. 다만 로쿰을 먹는 순간, "기억은, 무게를 잃은 돌처럼 비어버린 유리병처럼, 원래의 자리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참고한다면, '나'가 안에 대한 기억으로 나아간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소멸의 법칙' 극복은 상실된 대상을 기억하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한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할 테니, "제발 이 어둠의 끝을 막아두지만 말아달라"(「래빗 인 더 홀」, 127쪽)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도이다.

    애도는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제대로 기억해야 상실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물론 슬픔을 이겨내는 것만이 진정한 애도인 것은 아니다. 슬픔을 가진 채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애도의 한 방식이다. 그것 또한 기억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기억은 대상의 실제 모습과 같지 않다. 그 근처에 가닿을 뿐, 실제 대상에는 닿지 못한다. 기억과 실제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글쓰기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언어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애도는 글쓰기와 유사하다. 욕망과 대상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과 실제 그리고 대상과 언어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김나현의 인물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우연)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 다시 말해 불일치의 삶을 담담히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김나현에게 글쓰기는 불일치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행위이다. 민선혜가 『래빗 인 더 홀』의 해설에서 지적한 김나현의 소설에 있는 수수께끼들은4) 이러한 불일치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는 작가적 의식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김나현은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채 백지"(「오늘 할 일」, 100쪽)로 남길 수도 있었던 삶을, 다양하게 채색한다. 새로운 눈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안의 세계」), '나'가 원하는 대로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를 성찰하기도 한다(「앙배의 이야기」). 때론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그것이 정말 있던 일인지, 소설의 일부인지 이제는 잘 구분"(「꿈의 책의 꿈」, 285쪽)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괜찮다. 그것 자체가 우연과 애도, 그리고 글쓰기라는 불일치와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쓰기가 지속될 때, 언젠가는 불일치를 극복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1) 김나현, 『래빗 인 더 홀』, 자음과모음, 2023. (앞으로 본문 인용 시 작품 제목과 쪽수만을 표기)
  • 2) 강보라 외 인터뷰, 「김나현X소유정」, 『소설 보다: 봄2023』, 문학과지성사, 2023, 138쪽.
  • 3) 민선혜는 『래빗 인 더 홀』의 해설에서 김나현 소설의 이러한 면모가 자칫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방식인 '수수께끼의 미학'을 통해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민선혜, 「불가해한 삶 속 성실한 수수께끼의 미학」, 『래빗 인 더 홀』, 299쪽.
  • 4) 민선혜는 "삶의 모든 질문에 답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핵심"이라며, 김나현 소설의 수수께끼는 그러한 인식이 발현된 것이라 분석한다. 민선혜, 앞의 글, 298~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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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정 유령이 하는 일 :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유령이 하는 일 윤성희, 『느리게 가는 마음』(창비, 2025) 정한아, 『3월의 마치』(문학동네, 2025) 1. 그리운 당신, 반가운 유령  어느 날, 죽은 사람의 혼령, 즉 유령을 마주쳤다고 상상해보자. 거울에 비치는 상은 하나인데 내 옆에 무언가 형체가 느껴진다면, 그가 멀뚱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를 느낄 것이다. 유령은 왜 무서울까? 영(spirit, 靈)이나 영혼soul 등 비물질적인 정신을 아우르는 유령ghost은 물리적인 법칙과 자연적 질서로 설명 불가능한 초자연적 실재라는 점에서 두려운 낯섦uncanny을 자아내기 때문이다.1) 이러한 유령 형상은 문학의 계보 안에서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유행했던 호러/고딕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 발견되며, 거슬러 올라가면 셰익스피어 『햄릿』의 유령에 그 기원이 있다.  그런데 만약 내가 마주한 유령이 얼마 전 여읜 나의 연인이라면 어떨까? 으스스하기만 할까? 아마 반가움과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유령에게 친근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uncanny’로 번역된 프로이트 용어, ‘unheimlich’라는 독일어 단어의 다의성은 이러한 유령의 양가적인 면모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unheimlich’는 ‘친숙한’이라는 뜻을 가진 ‘heimlich’의 반의어로 쓰이지만, 사실 ‘heimlich’의 여러 의미 중에는 ‘불가사의한’ ‘숨어 있는’ ‘위험한’ 등 ‘unheimlich’의 뜻과 같은 쓰임이 포함되어 있다.2) 따라서 섬뜩했던 유령이 친근한 존재로 반전되는 상황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윤성희와 정한아의 소설에는 친숙하고 반가운 유령이 있다. 소설의 인물들에게 한때 사랑하는 친구, 연인, 자식, 부모였던 유령은 반가운 존재이며 심지어 애틋하다. 라캉에 의하면, 유령의 출몰은 애도의 불충분함 때문이다.3) 그렇다면 소설에서 유령의 반복되는 출현은 인물들이 대상 상실의 흔적을 자아의 일부로 여전히 끌어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애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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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면서 사람들이 묻어두었으나 잊히고 만 타임캡슐을 발굴하고, 그곳에서 발견한 이야기를 영상으로 재구성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저장 기억–타임캡슐의 이야기는 유튜브를 통해 현재 사람들의 삶에 당도하여 그들을 이어주는 역할까지 한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고고학자처럼 거리에 즐비한 망한 가게를 들여다보고, 다종다양한 것들을 한데 모은 만물 트럭과 1년 후에 발신되는, 그래서 대개 잊히고 마는 느린 우체통의 우편물 더미를 뒤진다. 그렇게 발견된 죽은 기억들은 생생한 이야기로 소설책에 아카이빙된다. 이는 아스만이 말한 기록물 보관소의 역할과도 같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물리적으로 제한된 공적 아카이브가 아니라, 층위가 뒤죽박죽 섞인 신변잡기, 미시사 등 기억 선별의 장에서 탈락한 것들이 모인 무덤과 비슷하다. 단락 나누기 없이 이어지고 분별없이 섞인 문장 스타일은 이를 형식적으로도 뒷받침한다.  그리하여 기억의 무덤, 쓰레기의 거대 아카이브에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기억, 중요한 기억과 중요하지 않은 기억, 기념된 기억과 망각된 기억이 함께 산다. 그 안을 떠도는 사람들의 삶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과 결부될 수밖에 없다. 아스만의 주장처럼, 몸도 기억 매체의 일종이라면 삶과 죽음의 길항에서 기억은 곧 유령이다. 「자장가」에서 죽어 유령이 된 ‘나’는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기억 속에 잠재된 과거와 그것으로부터 재구성한 미래를 함께 겪고자 한다. 유령은 기억 속에서나마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그러모으며 유령의 자취를 찾는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방식을 갱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구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꾸린다. 이것이 윤성희 소설이 애도의 과정에 관여하는 방식이다. 3. 기이에서 경이로, 트라우마를 배격하는 유령  윤성희의 소설집이 공동체가 공유하는 한 권의 기억 아카이브였다면,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는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편린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재구축하는지 보여준다. 주인공 ‘이마치’는 알츠하이머가 꽤 진행된 상태의 70세 노인이다. 그는 뇌의학 전문가의 정신병원에서 가상현실(VR) 프로그램을 통해 기억과 인지능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10년째 받고 있다. 이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세계는 이마치의 기억과 현재 인지능력에 따라 매번 재구성되며, 인공지능으로 설계된 인물들은 이마치가 현실에서 제 기억을 되찾도록 돕는 기능을 한다. 되찾은 기억은 오래가지 않고 다시 사라져서 주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이마치는 지난 삶을 기억하기 위해 치료를 지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명확하게 드러난다. 소설이 이마치의 시점에서 그가 인지하고 감각하는 정보에 한정하여 서술되는 탓에, 상황은 독자에게 정확히 설명되지 않고 꿈(혹은 가상현실)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소설은 이마치가 예순인 시점—자신의 딸 준영이 출산을 하고, 알츠하이머 발병 전 단계 진단을 받고, 배우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라파트멍’이라는 아파트의 60층으로 이사했으며, 3개월 전부터 뇌의학자 ‘제제’를 만나 상담 중이라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가 가지는 의문—전날까지 55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가 하루 만에 59킬로그램까지 늘어날 수 있는 것일까?—은 독자로 하여금 소설 초반부에 드러난 서술을 곧이곧대로 믿기를 망설이게 만든다. 또한 이마치는 정신과 치료를 하게 된 계기로, 자신의 집에서 유령과 마주치던 언캐니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독한 냄새, 부패의 냄새가 방안을 뒤덮었다. 이마치는 극심한 공포로 얼어붙었다. 침대맡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길고 뾰족한 얼굴을 가진 그것, 축 늘어진 몸으로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다니는 그것, 손발이 썩어 흘러내리는 그것. 그것이 웃고 있었다”(pp. 33~34). 이러한 초자연적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마치 스스로도 자신의 인지능력이 떨어져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장 ‘누전’부터는 이마치가 라파트멍 옥상에 올라가 마흔세 살의 자신과 만나는 것을 시작으로 더욱 신비로운 일이 벌어진다. 라파트멍에서 예순 살의 이마치는 60층에, 마흔세 살의 이마치는 43층에, 스물다섯 살의 이마치는 25층에 살고 있다. 이마치는 기억의 집과 같은 이 건물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초자연적인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령 장미가 없다고 말하면 곧장 장미 덩굴이 눈앞에 생기는 등 이마치의 말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라파트멍의 가이드인 청년 ‘노아’는 이를 숨기려는 듯이 수상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현상은 환상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것에 가깝다. 환상적으로 보이는 이 사건들은 사실 이마치의 뇌 지도를 바탕으로 구축한 가상현실 세계 안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적인 것the fantastic과 기이한 것the uncanny은 다르다. 초자연적 현상이 자연적 세계의 법칙으로 설명 가능하다면, 그 현상은 환상적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이다. 환상적인 것의 주요 요건은 초자연적 세계로도 자연적 세계로도 단숨에 확정 지을 수 없는 망설임에 있기 때문이다.6) 그렇다면 소설은 이마치가 겪는 신비한 일(자기 자신의 과거 모습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단지 뇌의학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된 가상현실 세계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일까? 그러할 경우, 이전에 집에서 보고 들었던 유령의 흔적 또한 알츠하이머 증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소설은 어느 장면에서부터 어느 장면까지가 현실이고 프로그램인지, 혹은 환상이거나 망상인지 확정 짓기를 거부한다. 가상현실 치료 프로그램에서 완전히 깨어난 후, 이마치는 라파트멍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VR에 나온 건물의 이름이자 입원실 병동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막상 이마치가 사는 곳은 ‘축복의 테라스’라는 아파트의 19층이다. 이러한 반전은, 앞서 서술된 예순 살의 이마치가 겪은 현실마저도 현재 이마치의 구멍 뚫린 기억과 함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현실과 허구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유령을 보는 등의 초자연적 현상은 이마치의 인지능력 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이마치가 40층의 이마치를 만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대목은 중요하다. 물냄새가 나는 유령, 그것은 알츠하이머의 망상이 아니었던가? 40층 여자는 매일 그것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유령은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삶에 출몰한 셈이었다. 이마치는 유령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려보았다. 집을 떠나라고 했던 말, 이곳이 그녀의 집이 아니라고 했던 말.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면 그녀의 망상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녀는 어떻게 그것과 함께 살아왔단 말인가? (p. 171)  가상현실이나 알츠하이머가 만든 환영이 아니라면 “물냄새가 나는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마치는 서른아홉 살에 일곱 살이 된 둘째 정민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적 경험이 있다. 정민의 실종 이후 이마치는 좌절했지만 여전히 정민을 되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60층의 이마치가 어린 준영을 통해 알게 되는, 정민을 찾던 중의 기억 한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정민의 실종 신고 이후 언젠가 경찰서에서 시신을 찾았다는 연락이 와, 이마치는 준영을 데리고 강릉의 한 병원으로 간 적이 있다. 하얀 천을 걷어내고 마주한 시체의 얼굴과 냄새는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으며, 이마치는 이 끔찍한 것은 자기 아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병원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러니까 물냄새와 부패의 악취를 풍기며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그 유령은 아들 정민이었던 것이다. 이마치는 이 기억을 까맣게 잊고서, 정민의 장례식도 제대로 치러주지 못한 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렇다면 정민의 유령은 아들의 죽음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마치가 만들어낸 심리적 환영일까? 하지만 소설은 결말부 0장 ‘나의 마치’에서 유령–정민 입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를 반박한다. ‘나’(정민)가 유령이 되어 이마치를 따라다니는 이유는 그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마치가 트라우마적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바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이마치는 증오를 한 겹씩 덧입는다. 그것은 삶에 대한 증오다. 그 누가 인생을 반복해서 복기하고 싶겠는가. 그것은 형벌이다. 아주 오랜 죗값이다. 하지만 무엇에 대한 죗값인가?”(pp. 277~78). 정민은 때로는 “바다를 사랑한 서퍼”가 되어 ‘괜찮다’는 말로 이마치에게 간접적인 용서를 건네고, 때로는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 AI 가이드 “노아의 그림자”(p. 278)가 되어 기억을 복구하는 치료를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심지어는 일부러 프로그램에 오류를 일으키는데, 제제는 이를 두고 프로그램 기술이나 뇌과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유령의 소행 같다고 한다.  이처럼 유령의 존재는 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의 실재다. 즉 유령은 정신작용이나 알레고리가 아니라, 유령 그 자체다. 소설은 마침내 초자연적 현상, 유령이 실제로 나타나는 세계를 인정한다. 이는 토도로프식으로 설명하면, 환상 장르의 두 인접 장르 중 기이 장르the genre of uncanny에서 경이 장르the genre of marvelous로의 이동이다. 이 실재하는 유령은 기억 주체가 트라우마적 사건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을 흐트러뜨린다. 트라우마를 기억하려는 힘과 기억하지 않으려는 힘의 긴장은 기억의 위계를 바꿔놓는다. 이마치에게 있어 엄마의 폭력과 언니의 죽음, 아들의 실종과 딸에게 행한 폭력, 남편 그리고 매니저 ‘K’와의 어그러진 관계 등 죄스럽고 아픈 기억은 이제 K, 즉 기석과 애틋하게 사랑을 나눈 기억, 딸 준영과 손녀 ‘아인’을 돌보았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중심 없는 삶의 곡절이 된다. 이렇듯 정한아의 소설은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주체가 유령을 상상하는 이유를 답습하지 않고, 유령을 상상하는 픽션이 구상하는 애도의 방식을 찾기 위해 이야기를 잇는다. 1) 프로이트에 따르면, uncanny(언캐니, 두려운 낯섦)는 무의식에 억압된 것이 변형되어 현재로 회귀하는 정신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근대가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인 현상을 억눌렀다면 그것은 유령 같은 형상으로 귀환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두려운 낯설음」,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 정장진 옮김, 열린책들, 1996, pp. 400~52). 2) 같은 책, pp. 401~11. 3) Lacan, Jacques, “Desire and the Interpretation of Desire in Hamlet”, Yale French Studies No. 55/56, trans. James Hulbert, 1977, pp. 11~52(이미선, 「애도와 유령: 유령으로서의 문학」, 『비평과이론』 제24권 제1호, 2019, pp. 31~52에서 재인용). 4) 이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우울증melancholia에 가깝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를 비롯하여 사라 아메드 등 많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는 멜랑콜리아를 병리적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초기 관점을 거부한다. 프로이트 또한 애도에 있어 대상과 자아의 우울증적 합체는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논의를 정정한 바 있다(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pp. 344~45 참조). 5) 변학수·채연숙 옮김, 그린비, 2011. 6) 츠베탕 토도로프, 『환상문학 서설』, 최애영 옮김, 필로소픽, 2022.

계간 문학과사회 정의정 유령언캐니애도기억아카이브츠베탕 토도로프환상 문학윤성희느리게 가는 마음정한아3월의 마치 2025
전기화 미래를 짓는 애도의 서사

미래를 짓는 애도의 서사 작년 세월호참사 희생자 10주기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월: 라이프 고즈 온」(장민경 연출)은 참사 유가족 유경근씨를 좇아가는 가운데,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출연한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품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중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와의 대화에서 인상적인 문답이 등장한다. “진짜 세월이 약인가요?”라고 묻는 유경근씨의 질문에, 약은 없다면서 “안고 사는 게 약이여”라고 답하는 배은심씨의 대답이 그것이다. 흔히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무뎌지고 잊히기 마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배은심씨는 세월이 아니라 안고 사는 게 약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시간의 풍화에 내맡겨 점점 무뎌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이루는 일부로서 비통하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껴안고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자신을 살게끔 했다는 의미로 들린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형식이 필요해진다. 그 형식에는 상실과 끊임없이 새롭게 관계 맺는 역동적인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며, “집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물은 건 묻고 요구할 건 요구하는”1) 움직임,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안기고 그들을 안아주는 움직임이 요구될 것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안고 정치로 나아가는 삶의 형식이라 이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세월호참사, 대구 지하철화재참사 등 재난 피해자와 유가족들로 구성된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발족선언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나는 것도 낯설지 않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여러분들이 겪지 않기를 바라고 불가피하게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곁으로 찾아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자 한다.” 그리고 4·16재단 부설로 문을 연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피해자를 조력하는 한편 재난을 만드는 사회구조적 원인을 점검하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 이렇듯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하고 사건에 관한 사회적 기억의 구성과정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또다른 재난참사의 피해자·유가족과 연대하며, 상실의 비통함을 우리 모두가 보다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희망의 몸짓으로 전환해내고 있다.2) 그러므로 미래란 애도를 완수한 이가 비로소 맞이하는 삶의 다음 단계 같은 것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을 삶으로부터 격리시키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 열어젖히게 될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것이다.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채 누적되어온 재난참사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듯, 최근 소설에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를 거듭 마주할 수 있었다. 애도의 서사화가 거듭하여 창안되는 것은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한 문학의 필연적 몸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례식장으로 곧장 향하는 대신 어쩐지 딴청을 피우며 한참을 에둘러 걸어가는 이들의 발걸음에서(김채원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우산을 보며 세상에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고 여기는 사람의 뒷모습에서(최예솔 「토니」, 『문학동네』 2024년 가을호), 제대로 읽지 못할 책을 들고나와 길가에 놓인 소파에 앉는 마치 의례와도 같은 행위 속에서(윤단 「남은 여름」, 『현대문학』 2024년 12월호) 상실이란 과거완료의 사건이 아닌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현재적인 것이 된다. 다만 짧은 소설의 형식에서 애도란 다소간 미학적인 것으로 완결되는 듯 보이기도 하기에, 좀더 긴 시간을 통해 애도를 수행하는 서사, 모순과 간극을 섣불리 메우지 않고 상실을 끌어안고 사는 삶의 버성김과 지난함까지 다루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궁금해진다. 그러한 서사는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삶으로서 보여주었듯, 부정적 감정으로 치부되곤 하는 슬픔과 우울, 고통의 정동이 지닌 운동성을 새롭게 사유할 매개가 되어 어쩌면 인물들에게 미래를 지어 먹이려는 소설적 움직임을 보여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소설 속 인물을 살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허기진 공동체에 애도의 감정과 연대의 상상력을 전하며 보살피려는 문학적 돌봄의 실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늦은 노력들의 형식 문진영의 소설 『미래의 자리』(창비 2024)는 ‘미래’라는 인물의 죽음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전체 8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장마다 초점화자가 전환되며, ‘지해’와 ‘자람’ 그리고 ‘나래’ 세 사람의 내면 풍경과 그들이 통과하는 삶의 국면들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소설은 미래의 꿈에 관하여 미래와 지해가 대화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모호하고도 아름다운 꿈과도 같은 장 ‘0 미래’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1 지해’의 장에서는 해져 닳아버린 듯한 지해의 마음결이 도드라지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어떤 사건의 여파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2 자람’의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미래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미래는 지해와 자람과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친구이자, 나래의 쌍둥이 동생이다. 미래의 죽음 이후 시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은, 미래의 죽음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소급하여 재현하지 않거니와 남겨진 인물들 역시 죽음의 순간 미래가 얼마나 쓸쓸하고 고통스러웠을지를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다. 남겨진 세 사람의 시선을 빌려 전개되는 이 소설은 세 사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미래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낼 뿐이다. 서로 다른 삶의 조건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씨름하고 나름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세 사람이 미래의 자리를 되짚는 방식과 밀도 역시 상이하다. 다만 미래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감정만큼은 모두가 공유하는 듯 보인다. 미래는 지해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자람에게 난생처음 오롯이 이해받았다는 기분을 선물해준 사람이고, 쌍둥이 언니 나래에게는 섬세하게 이해받는다는 느낌과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질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의 기억 속의 미래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98면)고 누구보다 섬세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벌어진다. 지해와 자람, 나래가 고교 시절 함께했던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말을 나눌 동안,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던 미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시간들을 자신의 방식대로 기록해나간다. 스무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한 희열에 젖은 나래가 그 사건을 조금씩 자신에게서 밀어낼 즈음, 미래는 사건의 여진 속에 들어가 무언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미래의 죽음 이후 지해와 나래는 조그만 징후라도 발견하고 싶어서, 미래의 모든 것을 재구성하고 싶어서 그의 블로그에 남겨진 일기를 샅샅이 읽어나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래가 치열하게 통과했던 외로움과 슬픔, 기쁨을 각자의 방식으로 되짚는다. 자신의 살아 있음을 미안해하며 누군가를 위해 울어주고 싶어하는, 자신이 누려온 삶의 여유로움에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도 하는, 그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론적 혼란마저 있는 그대로 껴안고 기꺼이 자신을 더 큰 혼란과 열망 속으로 밀어넣는, 그리하여 “충분히 살아 있다”(175면)는 감각과 함께 삶의 아름다움 또한 생생하게 느끼던 미래의 시간은 장의 전환 지점마다 삽입된 미래의 일기를 통해 기록되어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 소설에서 지해와 나래를 절망에서 건져올리는 분명한 서사적 계기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극적인 회복의 서사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을 남길 수 있지만, “삶 쪽을 향해 반짝이고 있는”(125면) 미래의 문장들을 한줄 한줄 읽어나가던 지해와 나래가 천천히 삶 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은 충분히 개연적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보건대 ‘미래의 자리’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을 후회와 죄책감으로만 잡아끄는 수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 이유 없이, 아무 때나 내가 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걸”(79면) 전하고 싶어 지해에게 건네는 자람의 자그마한 선물들과, “살아주면 안 될까. 내 소원이야”(204면)라며 나래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지해의 마음에, 이렇듯 서로를 살피며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연결고리들마다 무한히 창안되는 장소에 가깝다. 소설은 그 연결고리를 미래와 남겨진 세 친구의 관계로만 한정하지 않고, 조금씩 보태어지고 때로는 끊어지며 유동하는 관계의 여러 모습을 통해 그려낸다. 지해와 엄마, 그리고 지해와 용이씨, 나래와 재원, 자람과 가족, 그리고 자람과 민서까지, 소설은 세 사람이 갖가지 연결과 만남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므로 『미래의 자리』는 남겨진 자들이 미래의 자리를 서서히 지워버림으로써 그 시절을 ‘극복’해가는 모습이 아니라, 이들이 미래의 흔적을 묻힌 채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는 쪽에 가깝다. 세 인물의 이야기 모두 확실한 종결 없이 마무리되며 그 어디에도 미래의 자리에 대한 확고한 고정값이 부재하다는 점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미진한 느낌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미래의 자리를 섣부른 의미화로 고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숨탄것3)으로서 숨탄것을 끌어당기는 한 그 의미화는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의지를 내포하는 듯 읽힌다. 예소연의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현대문학 2025)는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 ‘석이’를 찾기 위해, ‘나(동이)’와 ‘혜란’이 캄보디아로 향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석이를 찾는 여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10년 전 대학시절 세 사람이 캄보디아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함께 보낸 시간과 이후 점점 멀어지게 된 세 사람의 관계에 관한 회고가 교차하며 삽입된다. 이러한 전개 가운데 세 사람의 우정의 역사뿐 아니라 ‘나’의 비틀린 마음, 이를테면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고 부족함이 없어 보여 “보편적인 행운을 단단히 쥐고 있는”(10면) 듯 보이는 석이를 향한 날선 마음과 질투, 적의 같은 것들이 함께 끌려 올라온다. 회고조의 서술을 통해 간간이 드러나듯 석이를 찾는 여정이란 기실 ‘나’ 자신의 못난 마음을 마주보는 시간이자, 판단하기에만 급급했을 뿐 애써 이해하려고 해본 적 없는 석이의 마음을 뒤늦게나마 되짚어보려는 노력의 여정이 된다. 그러한 점에서 석이의 실종이라는 사건은 ‘나’와 혜란의 삶의 관성을 잠시라도 멈추기 위해 요청되었던 서사적 계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실종과 같은 충격적 사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타자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굼뜬 노력이 시작된다는 점을 드러낸다고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석이를 찾기 위해 떠난 이들의 여정이 결국 석이를 만나지도 못한 채 결말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패를 의미하기 어렵다. 오히려 석이와의 만남이 지연되는 것이야말로 석이에 대한 이해를 거듭 수정해나갈 기회를 허락하는 듯 보인다. 이를테면 엄마를 간병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고된 삶에 시달리던 ‘나’가 이태원참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석이에게 공감하는 대신 “너 너무 격양되어 있어”(65면)라며 그녀를 제어하려 했던 기억은 서사가 한참 진행된 뒤에야 소환된다. 캄보디아행에서 ‘나’가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교육봉사로 캄보디아에 머물던 시기 한국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일과, 캄보디아인인 ‘삐썻’이 그 사건에 대해 위로하며 꺼삑섬에서 벌어진 압사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석이가 그것과 이것은 다르다고 앞질러 단정한 일, 그리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꾸벅꾸벅 졸며 이태원역을 지나치던 석이의 머리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일과, 이후 석이가 뒤늦게 삐썻을 찾아가 사과한 일들 사이의 희미한 연결성이다. 세월호참사와 꺼삑섬의 압사사고, 그리고 이태원참사 등의 사건들은 시공간적으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고유한 역사정치적 맥락 위에 놓인 개별적인 사건들이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 의해 차이를 초월하여 특히 정동적 층위에서 연결될 수 있다. 이때의 연결이란 구체적 사건의 맥락을 지워 책임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연루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작동하는 쪽에 가깝다. 세 개의 서로 다른 사건은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64면) 된다는 느낌으로, 고통과 무력감, 수치심과 우울의 정동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석이는 그 느낌으로써 주변의 사람들과도 연결되려 하지만, 정치색이 너무 짙다며 석이를 피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나’ 역시 “크나큰 불행을 혼자만 짊어지고 있는 사람”(122면)처럼 느껴지는 석이를 부담스럽게 여겨 부재중전화를 외면하면서 석이가 자신에게 미칠 정동적 전염을 피하려 한다. 결국 캄보디아로의 여정을 통과하면서야 석이의 마음을 상상해보게 된 ‘나’가 “석이가 하고자 했던 일을 할 것이다.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다”(125면)라고 다짐하게 되는 극적인 전회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렇듯 석이의 자리에 대신 서보려는 듯한 ‘나’의 포즈에 주목해본다면, 『영원에 빚을 져서』는 『미래의 자리』와는 사뭇 다른 지점에서 이야기를 끝맺게 되는 셈이다. 이는 『미래의 자리』가 장마다 초점화자를 전환하며 이야기를 독점적인 인물의 담론으로 귀속시키는 것을 피하는 한편 미래의 일기를 삽입함으로써 미래의 내면을 고유한 영역으로 보존하려 한 것과는 달라 보인다. 이는 두 소설의 결정적 차이, 즉 미래와 달리 석이는 잠시간 자취를 감추었을 뿐 분명 생존해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혜란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인 게임의 주최자와도 같다는 점, 즉 두 사람이 삐썻의 도움을 받아 되짚게 될 여정을 한발자국 앞서 지나감으로써 그들이 지나올 길을 미리 마련해둔 것과도 같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석이가 하고자 했던 것을 하며 석이가 알고자 했던 것을 알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나’의 다짐은, 추후 ‘나’가 다시금 석이와 대면하는 가운데 부대끼게 될 시간을 괄호 안에 묶어둔 위에서만 가능한 일시적 봉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지만 불가결한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발견되는 얼마간의 비약을 동반한 실선의 연결감은 『미래의 자리』에서 그려내는 점선의 연결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남긴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두 소설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두 이야기에는 첫째, 죽음 혹은 실종으로 ‘우리’의 곁에서 사라진 ‘그녀’가 있다. 둘째, ‘그녀’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녀 타인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응하고 자신을 성찰하던 사람이었다. 셋째, ‘그녀’의 마음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였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그녀’의 마음을 더듬으며 헤아리려 한다. 그리고 이렇듯 뒤늦은 이해의 시도라는 것이 서사를 끌어나가는 소설의 전체적인 추동력으로서 작동한다. 세월호참사의 고통을 향해 뛰어들어간 미래가, 이태원참사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던 석이가 사라진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이들 소설은 예민하게 타인의 고통을 청취하고 감응하며 세계와 불화하던 이들을 서사에서 가장 먼저 퇴장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 조금쯤 둔감하거나 이기적인 덕분에 생존해 있는 자들의 서사를 상대적으로 많이 조명하는 가운데 이들로 하여금 사라진 자들에 대해 회상하게끔 한다. 이는 이야기에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둔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재난참사의 당사자가 아니라 재난참사에 대해 섬세하게 공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 그러고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대신 그 사람의 상실 이후를 경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이것은 몇 개의 겹을 걸친 ‘관찰자’의 위치에 선 인물을 통해 서사를 전달하는 전략처럼 보인다. 사건을 직접 다루는 방식에 대한 큰 부담을 방증하는 듯한 이와 같은 서사전략에는 비판이 가해질 수도 있다. 이를테면 미래와 석이가 사라진 세계가 어떠한 혐의를 가지는가에 대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해온 미래와 석이가 아니라 남겨진 자들의 내면을 자세하게 펼쳐 보이는 것이 과연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상실 이후에서야 후회와 반성을 여실히 내비치는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는, 사라짐을 택한 인물이 아니라 그 상실에 대해 곱씹는 자의 내면으로 서사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과 독자들 사이의 공감을 강화하고, 끝내는 독자들의 동질적 자기연민으로 이어지는 나르시시스트적 소설 향유를 강화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근래 한국소설과 소설 독자들의 주요한 경향성으로 누차 지적되어온, 예상 가능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텍스트의 읽기란 반드시 그러한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들 소설이 이러한 구도를 통해 겨냥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들 소설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읽는 방식에 대한 미세조정을 통해 같은 텍스트로부터도 서로 다른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며, 읽는 자도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학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서사에서 진동하고 있는 운동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읽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에서 그려내는바, 남겨진 자들의 위치에서 상실을 돌아보는 일이란 매끈하게 자기를 완성하며 현상태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작업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변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4)까지 품고 미래를 고민하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읽기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지지대로서 황정은의 근작 「문제없는, 하루」(『창작과비평』 2025년 봄호)를 세워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도 앞서 살핀 두 소설과 유사한 관계구도가 발견되고 있다. 소설에는 구체적인 일상과 노동의 감각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영인’과, 세계의 커다란 고통에 예민하게 연결되어 있음에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점차 고립되어가는 듯 보이는 ‘인범’이 등장한다. “내게 너무, 너무 중요한 그 일들이, 사람들한텐 중요하지 않아./그걸 보게 돼./그게 어떻게 나를 죽이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라는 인범과 “뭘 그렇게까지 해,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해”(244면)라는 영인 사이에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소설은 두 사람의 버석거리는 관계를 적나라하게 다룬다. 초점화자인 영인을 통해 독자들마저도 피로해지게끔 만들면서, 인범에게 전하지 못한 영인의 마음이 닳아가는 가운데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해져가는 과정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잔존하는 사랑과 끊어질 수 없는 이들의 관계를 다루기 위해, 이 버성김과 부대낌을 재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음에도 태풍이 휩쓸고 간 날 인범에게 전화를 거는 영인과, 그 전화에서의 침묵이 마음에 걸려 영인의 집으로 찾아오는 인범에게는 서로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여전히 존재한다. 오랜만의 만남 이후 해가 뜨는 것을 함께 보기 위해 나선 길에서, 그들은 터널 안에서 위험한 상태에 놓인 차량과 그 안의 노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영인은 터널 속 쓰러진 노인을 구하려는 인범을 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구하기 위해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다가오는 차들을 향해 제발 멈추라고, 그들을 믿는지 믿지 못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그저 경적 울리는 일을 한다. 인범은 아직 영인의 곁에 생생히 살아 있으며, 영인은 불가피한 두려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시, 『미래의 자리』와 『영원에 빚을 져서』와 같은 소설들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문제없는, 하루」 속 영인이 경적을 울려대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를 멈추어 세우는 일이 아닐까. 관찰자의 위치란 독자들을 안전한 곳에 위치시켜 위안을 주기 위해 설정되는 구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당겨 연루시키기 위한 절박한 유인책에 가까워 보인다. 최선을 다해 상실을 쓰다듬어보려 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여러 겹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뒤에서야 그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라도 멈추어 상실을 쓰다듬는 행위의 중요성을 역설하려 한다. 혹자에게는 이것이 지나치게 소박하거나, 기만적이거나, 위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혐의를 안고도 그 태도를 취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타인의 상실을 그만의 사적인 경험이라며 지나치지 않고 곁에 멈춰 서서 그의 고유한 상실과 연루되는 삶의 형식을 감히 상상해내기 위하여, ‘우리’가 함께 상실한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가를 멈추어 되돌아봄으로써 지금-여기의 세계를 당연하지 않게 느끼기 위하여. 이로써 조금 다른 형태의 미래를 “지금-여기에서 밀어 올”5)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 도식화된 이해와는 달리, 관찰자의 위치란 사태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부동하는 점으로 고정되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울과 자기혐오의 감정을 덕지덕지 묻히고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더듬으며 때로는 침잠하여 간신히 기어나오지만 때로는 비약을 감행하는, 요란하고도 사나운 움직임에 가깝다. 지금의 한국소설이 그려내는 그 움직임이 독자들을 정동할 만큼 강력한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이렇게 바뀌어 던져지는 편이 온당할지도 모른다, 그 관찰자들을 관찰하려는 ‘우리’들은 정동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나와 동일한 상실을 경험하였기에 가능한 연결이 아니라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차이와 불가피한 간극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차이와 간극으로 인해 더욱 적극적으로 연결로 이어지는 형태를 상상해낼 수 있는가? 이는 곧 지금 들리는 작고도 또렷한 경적소리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귀 기울이고 멈춰 설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이다. 1) 영화에서는 간결하게 처리되었으나, 장민경 감독의 인터뷰(「“시간이란 약은 없다”···가족 잃은 고통 ‘안고 사는’ 이들이 손잡을 때」, 경향신문 2024.3.24)에서는 배은심 여사의 말을 빌려 그 의미가 좀더 자세히 풀린다. 배은심씨는 아들의 죽음 후 평생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오다 2022년 타계했다. 2) 이태원참사 가족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참사는 골목에 머물지 않는다』(10·29 이태원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창비 2024)에서도 이태원참사의 유가족들이 상실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의 안전을 위해 길을 내는 ‘나침반’이 되고 있다는 서술이 확인된다. 혹 이와 같은 진술이 재난참사의 유가족들에게 사회운동의 책임과 부담까지 지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이미 수행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정확히 기입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이 보다 강조되는 쪽이 온당하지 않은가 한다. 3) ‘작가노트’에 따르면 ‘숨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인 ‘숨탄것’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될 뻔했다고 한다. 이 표현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며 본문에서도 인용하여 사용했다. 4)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393면. 5)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4면.

계간 창작과비평 전기화 애도서사<세월: 라이프 고즈 온><미래의 자리><영원에 빚을 져서><문제없는 하루> 2025
인아영 기억하기, 잊기, 다시 기억하기 ― 안태운 소설집

기억하기, 잊기, 다시 기억하기* 인아영 * 이 글은 안태운의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하 인용시 시의 제목만 밝힌다. 움직임이라는 사건  안태운의 시에서 사건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 대단히 슬픈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기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거센 감정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며, 구체적인 사유가 쌓아올려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는 장면들이 있다. 화자가 어딘가를 돌아다니거나, 누군가와 놀거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정도의.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장면들에서 유일하게 많은 것이 있다면, 바로 움직임이다. 움직이는 것은 화자 자신, 어린이, 친구와 같은 사람일 때도 있고, 물고기, 풀잎, 개와 같은 생물일 때도 있으며, 시간, 계절, 기억과 같은 추상적 양태일 때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안태운의 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임이라는 단위에서 세상만사가 동등하게 그려지는 세계. 움직이고 있다는 한에서 삼라만상이 평평한 세계. 움직임은 안태운의 시에서 벌어지는 최소치이자 최대치의 사건이다.  움직임은 시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와」에서 화자는 춤을 춘다. 칭얼대는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데 울음을 멈추게 하는 방법을 모르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주위의 움직이는 것들에 관심을 쏟게 하”는 것뿐이고, 화자도 “주위의 것이 되어 움직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채는 아이를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 아이의 기분을 바꿔보기 위해서, 못마땅한 마음으로부터 아이의 주의를 분산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움직여보는 것이다.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쁑과 꼉과 쨩과 뚕과……”처럼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 이루어진 노래를 지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창피해서 어디서도 못 추는 춤을 추는 데 이른다. 그러자 아이는 손뼉을 치고 웃다가 다시 칭얼대며 운다. 어쩐지 아이를 달래려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지만, 화자는 문득 아이가 큰 다음 이 순간을 회상하며 삼촌을 놀리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으니 “미래”의 시간을 열어내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1)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낯선 움직임으로 이동하고, 그것이 기존의 무언가를 흔들고 깨뜨리면서 새로운 움직임을 파생하는 흐름. 이 움직임들의 연쇄와 파장이 안태운의 시에서 일어나는 전부다. 안태운의 시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 움직임은 안태운의 시에서 벌어지는 최소치이자 최대치의 사건이다.  물리학적으로 움직임은 시간에 따른 물체의 위치 변화를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생겨나는 모든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시간이 흐른다’거나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명제는 물리적으로, 아니 일상적으로도 특별할 것 없는 자명한 현상이다. 그런데 안태운 시의 화자들은 이 자명한 현상에 번번이 놀라워한다. 그렇게 칭얼대던 어린아이가 언젠가 어른이 되어 내가 이상한 춤을 추었던 걸 기억한다고? “신기하다, 신기해”. 「공에 대해서라면」의 화자도 공의 움직임에 신기함을 느낀다. 공처럼 생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굴려보기도 하고, 굴러다니는 공에 닿은 수많은 존재를 상상해보다가, 자신의 생활도 공처럼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공을 떨어뜨린다. 마치 이 떨어진 공을 이어받듯 「통일 시」의 화자는 주차장으로 굴러가는 농구공을 상상하면서 “세노테”나 “산정호수” 같은 “또다른 곳으로 가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이 공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든 것은 움직인다’는 명제는 범상하지만 ‘어떻게 움직이느냐’라는 질문은 그보다 복잡하다. 물체는 외력이 없으면 정지 상태에 있고 외력이 주어지면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구(球) 형태의 공은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이론적으로 무한히 열려 있다. 아마도 화자가 공의 움직임에 놀라는 까닭은, 그것이 단지 운동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고정되지 않은 방향으로 열려 있는 공의 성질, 그리고 그 성질이 어쩌면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문득 그 계절이 되는.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곳의 담벼락을 거닐고 있었는데 문득 그 계절을 걷게 되면 내게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고 나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고…… 놀라서 걷는 걸음이 다음 걸음이 되는. 거기서 하염없이 멀어진 채로 떠돈다면 나는 파도의 걸음이 되는 듯하다고 파도의 걸음으로 걷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아지고 문득 그 계절이 흘러드는. 그러면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어느 날엔가 불현듯 떠오를 만한 꿈. 이 꿈속에서는 누군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 용서를 하고 나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하고 그래 미안해 그리고 괜찮아, 헤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이 꿈을 마저 꾼 다음에는 어디로든 들어가버리자고 숨어버릴 수 있다고. 문득 잊어버린 꿈을 꾸고 난 후가 되어 있었지. 그러니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좋을 텐데. 바람 속인지 물속인지 모르는 채로 파도라는 것 속으로 들어가면 모든 게 서툴러지는 듯하고 문득 그 계절이 되는. 계절은 흔들릴 수 있을까. 흔들렸어, 잠깐 흔들렸던 것 같다고 방금 전 그 계절을 되돌아보며 멈칫했는데, 할머니?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까.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는 다시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은 다른 것들이 생겨나나. 그 계절이 된다면. 문득 그 계절이 감은 눈 속으로 흐르는 노래라면 고추밭 너머에 있는 방파제라면 가을 평상으로 흘러드는 구름의 숨결이라면 내 앞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해서 할머니? 내 앞에서 가만히 있는 것들, 테킬라와 감귤과 소라와 창문 너머 점멸하는 불빛에 대해서 할머니? 하고 불러보았는데. 문득 그것들한테는 너라고 할 수도 있어서 그 계절이 되는. 할머니한테도 순간 너라고 불렀으므로 기이한 느낌이 드는. 할머니한테 너라고 하다니, 나는 놀란 걸음으로 다시 걸어가고 다음 걸음을 놀란 채 딛다가도 문득 너는 누구입니까. ―「문득 그 계절이 되는」 중에서  이 시에는 화자가 할머니가 살았던 공간을 산책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담벼락을 거닐며 계절을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가 사과와 용서를 하는 꿈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곳에는 없는 할머니를 불러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산책의 리듬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산책의 속도를 늦추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멈춤이나 쉼이 아니라 놀람이다. 화자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는 방식으로 산책을 한다. 마치 놀라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다는 듯. 걷기 위한 최소의 조건이 놀람이라는 듯. 걸음과 놀람이 사이좋게 번갈아 반복되면서, 산책은 밀려옴과 물러남을 반복하는 “파도의 걸음”이 된다. 일반적인 걷기는 목적지를 향해 발을 번갈아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이지만, 이 시의 ‘놀람-걸음’은 특정한 방향 없이 파도처럼 일렁이다가 이내는 계절 자체를 흔든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로 전진하는 선형적 흐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이 겹쳐지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화자가 꾸는 꿈속에서 누군가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는 용서를 하는데, 화자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동시에 한다.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에서는 A가 먼저 잘못을 하면, B에게 사과를 하고, 그후 B가 A를 용서하는 순서를 따른다. A의 잘못이 선행하는 원인이고 B의 수용이 뒤따르는 결과로 고정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꿈에서는 잘못한 사람과 잘못하지 않은 사람, 사과하는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사의 모든 갈등이 그렇듯이 선후와 인과가 뒤얽혀 있고, 그것을 넘어 하나로 합쳐진다. 이 리듬 안에서는 눈앞에 있는 대상과 여기에 없는 대상도 하나가 된다. 어딘가 멀리 있는 할머니를 부르는 순간, “테킬라와 감귤과 소라와 창문 너머 점멸하는 불빛”을 부르는 호출로 이어지고, 급기야 할머니에게도 ‘너’라고 부르는 “기이한 느낌”까지 발생한다. 걸음과 놀람이 갈마드는 움직임으로부터 촉발된 리듬 안에서 사과와 용서는 하나로 포개지고, 할머니와 다른 사물들은 ‘너’라는 이름으로 겹쳐진다.  이것은 모든 차이를 소거하는 동일화일까? 아니, 그보다는 여러 대상을 중첩하면서 생성되는 또다른 움직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움직임 안에서 잘못한 사람은 그저 잘못한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고, 할머니는 단지 할머니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도 하나의 이름, 하나의 역할, 하나의 기억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어떤 존재도 하나의 본질로 고정되지 않고 변형되어 인식된다. 복수의 시간의 층위들이 겹쳐진 채로 나타나는 잠재적인 가능성. 이는 우리가 얼마든지 다른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간의 시간화  걷기라는 공간상의 움직임이 감각을 건드리고, 기억을 환기하고, 계절을 흔들면서 시간상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면, 이것을 ‘공간의 시간화’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까. 화자가 “시공간이란 무엇인지 어리둥절해하면서 / 공간에 놓여 있는 나를 시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 / 시간에 놓여 있는 나를 공간이라고 음미해보기도 하면서”(「통일 시」) 자신 앞에 놓인 시공간을 깊이 느껴보려는 장면은 안태운의 시에서 종종 등장하고, “빗소리가 들리므로 열리는, 저 공간이 살아나는”(「빗소리」)처럼 순간적인 감응으로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장면도 그려지지만, 이 감응 속에서 정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다. 흔히 우리는 공간상으로는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지만, 시간상으로는 제한적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다. 공간이 눈앞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붙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형태가 갖춰져 있지도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비가시성과 비정형성으로 인해,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더 근본적으로 구성하고, 우리의 경험을 더 다층적으로 연다. 안태운의 시에서 시간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눈을 떴고 어두웠고 지금은 새벽이군, 어렴풋이 인식했고 당연한 일이라며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여전히 어두웠고 순간 나는 새벽이라는 시간을 무수히 지나쳐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새벽, 그렇게 있으면서 새벽에 깨어나면 눈뜬 채 가만히 누워 있기도 간혹 앉아보기도 했고 하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새벽은 매번 지나가고 있었고 또다른 새벽에는 물론 꿈속이었을 테고 어느 날 깨어날 때도 눈감은 채 잠을 청하거나 날 밝길 기다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마다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면. 깨어난 새벽마다 어디든 나가보았다면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러므로 나는 새벽, 지금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고 느꼈네. 몽롱한 상태로 마침 이곳은 고향집이었으므로 더 가볼 수 있는 곳은 시내가 아니라 제(堤)일 것 같아서. 물과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가보자 하면 더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서 향했고 (……) 문득 이 제에 대해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제의 물을 다 빼낸 적이 있었어. 정비 사업을 한다고 관청에서 사람들이 왔었지. 마침내 제의 물을 다 빼냈고 물이 다 사라지니 남은 것은 물속에 있던 선연한 물풀과 물고기. 어떤 주민들은 거기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 몇몇은 물고기를 품은 채 데려갔나. 그 물고기를 어떻게 했을까.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까. 몰라. 그 물고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하지만 관청에서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몰라. 이윽고 제는 다시 물로 채워졌어. 물이 다시 생겼다. 생겨났다. 빼냈지만. 그러하여서 내가 지금 둘레를 걷고 있는 이 제의 생태계에는 온갖 생물이 살아가고 있는데, 실잠자리와 미나리, 갈대, 쇠물닭, 왜가리, 부들, 물꼬리풀, 거미, 송사리, 소금쟁이가 있었고 그 모습들을 바라보다가도 나는 시간이 지나 뜨거워질 한낮을 떠올려보기도 했고 한낮의 조그마한 그늘을 지나가고 있을 개미가 연상되기도 했는데. (……) 그날 나는 어땠나. 나는 비 오는 제를 몇 번이고 걸을 수 있었나. 이곳을 자주 오는 이유를 물론 내내 알아채고 있었나. 왜냐하면 제의 근방에 우리 개가 묻혀 있으니까. 나는 여름이 되어 무성해진 이곳을 돌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제의 둘레와 잠시 멀어져 우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도 모든 게 자라나 있었으니까 마음이 놓였어.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부러 풀을 헤치며 무덤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오송」 중에서  이 시에는 새벽이라는 특정한 시간대가 반복된다.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깬 화자는 자신이 지나쳐온 무수한 새벽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언젠가는 눈을 뜨고 있기도 했고, 언젠가는 가만히 누워 있기도 했으며, 언젠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시간들. 여기에서 새벽은 분절된 하나의 시간대이자, 그 시간대를 중심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모이는 응축점이기도 하다. 새벽이라는 시간 안에서는 제각기 다른 순간과 행동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겹쳐진다. 또한 새벽은 모든 것이 매일 새롭게 갱신되는 시간이다. 어제 새벽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오늘 새벽에는 불현듯 출현하고, 오늘 새벽에 하지 못한 일이 내일 새벽에는 이루어질 수도 있다. 새벽은 밤과 아침 사이를 흘러가는 시간이면서, 과거의 시간을 불러오고 미래의 시간을 당겨오는 잠재적인 지점이다.  시간의 열린 가능성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화자는 밖으로 나가 걷기 시작한다. 과거의 새벽에는 겪지 못했던 일도 현재의 새벽에는 겪을 수 있으므로 “지금에라도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을 느낀 것이다. 화자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제(堤)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지고 날파리가 날아드는 어두운 둑을 걸어다니면서, 화자의 기대대로 여러 시간대가 서서히 하나씩 포개진다. 관청의 정비 사업 때문에 둑의 물을 빼냈을 때 마른 땅에 죽어 있었을 물고기들과, 한 달 전 둘레의 산책로를 걸었을 때 행여 밟을까봐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던 “풀쩍풀쩍 뛰는 여러 마리의 개구리”와, 둑의 생태계에 살고 있는 “실잠자리와 미나리, 갈대, 쇠물닭, 왜가리, 부들, 물꼬리풀, 거미, 송사리, 소금쟁이”와 같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온갖 생물들은, 행갈이도 선후도 없이 물결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비가 “나무 이파리들”에 닿은 다음 화자의 몸으로 흘러내렸듯, 각기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온갖 존재들을 동시에 부드럽게 연결하는 연쇄적인 동선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느슨하고 응집된 연결 속에서 화자는 지금 새벽의 순간이 과거의 잔존이자 미래의 예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안태운의 시에서 시간은 아무것도 못하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여러 생물들을 떠올린 끝에 화자의 생각이 향하는 곳은 과거의 자신이다. 화자가 새벽에 굳이 둑을 걷고 있는 정황은 시의 후반부에서 밝혀지는데, 바로 키우던 개가 근방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화자가 새벽이라는 통로를 거쳐 오늘이 아닌 다른 날로 진입하고 싶었던 까닭은, 꿈에 자주 나올 만큼 그리워했던 개가 지금 이곳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지금 이곳에 없는 개와 함께했던 시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개의 무덤에 가까이 가지는 않는다. 그 주변의 “모든 게 자라나 있었”고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무덤가를 산책하면서 발견한 것은 죽은 개의 물리적인 흔적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생물들의 성장, 즉 시간의 흐름인 셈이다.  이것이 왜 화자에게 안도감을 주는 것일까?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는 자명한 이치대로 세상이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면 죽은 개도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일까? 아니, 그보다는 이런 직감이 아닐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이 세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인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개도 죽었다는 이유로 존재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무덤 가까이에서 자라나고 있는 수풀, 물풀, 나무, 날파리, 개구리와 같은 온갖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고 있을 테니, 그렇다면 여전히 화자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시간이 그런 것이라면, 그러니까 생명을 사라지게 하는 무참한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신비로운 것이기도 하다면, 또한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거나 서로 포개지기도 하는 것이라면, 개와 함께 보낸 시간도 과거에 그대로 박제된 것이 아니라 새벽에 둑을 걸을 때마다 새롭게 떠오를 수 있고, 꿈을 꿀 때마다 여러 마리의 형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중첩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마주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마다 기억을 새롭게 쓸 수 있다. 수동태의 기억들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기억은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여 뇌에 저장하는 인지적인 과정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기억이 의도적으로 지식을 암기하거나 주의깊게 감각을 각인하는 행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인 통제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자동적으로 부호화되는 방식으로 형성되기도 한다. 이 경우 기억은 외부 세계에 대한 능동적인 인식의 결과라기보다 수동적인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인상이나 흔적에 가깝다. 그렇다면 기억이란 과거가 차곡하게 쌓이는 저장소가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의도와 우연이 교차하는 접속점이자, 과거, 현재, 미래가 중첩되면서 움직이는 통로이기도 할 것이다.  기억이 서로 다른 시간의 층위를 중첩하는 움직임이라면, 망각은 그 층위를 소거하는 움직임이다. 「불광천, 여름」에서 화자는 이전에 외국에서 만났던 외국인을 서울의 불광천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화자가 놀라워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 다른 공간에서 두 사람이 재회했다거나 오랜만인데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자신이 예전에는 비교적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던 외국어를 이제는 비문으로 더듬거릴 만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화자는 무엇보다 놀라워한다. 그러나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하나 잃었다는 속상함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민망함은 보이지 않는다. 화자가 골똘하게 굴려보는 생각은 차라리 망각이라는 현상, 혹은 무언가를 잊게 만드는 시간의 흐름 자체다. 화자는 외국인 친구가 자신을 보면서 “말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걸 놀라워할까” 짐작해보기도 하고, “자신의 말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걸 나를 통해 깨달을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망각은 단지 특정한 기억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시간의 질서를 재배열하는 일이다. 그것은 일시성, 우연성보다 지속성, 영속성에 특권을 부여하는 규범적인 시간성의 바깥을 사유하고 망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의 가능성을 열어내는 일이기도 하다.2)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 해질녘. 짚이 타고. 냄새가 이리저리 번지고. 기억할 만한 건 무엇일까. 내가 지금 기억이라는 생각으로 이 도시의 공간들을 드나든다면. 이제부터 이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둔다면. 내가 가는 곳마다 실바람 불고. 해질녘. 호반새 날아들 것 같고. 퍼지고. 그렇게 나아가면서는 늦기 전에 박물관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지. 출토된 것들.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 한데 모아놓은 것들. 가면서는 따라가듯 하고 싶었어. 무언가를 그냥 따라간다는 느낌으로 그것의 흔적이 놓여 있는데 수런거리는데 그 흔적이 귀띔하는구나 그걸 나는 눈치채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걸어가는구나 횡단보도를 건너는구나 건너가면서는 실제로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와서 놀랐고. (……) 결국 박물관에 도착해 나는 내내 바라보다 멈추고 사진 찍는 인간으로 시간을 보낸다. 박물관을 떠나면서는 다른 흔적들을 찾아볼 것이라고 다짐했지.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조사단원처럼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갈 것이다. 걸어서 그 걸음이 어떤 순간인지 어떤 기억인지 알아채며 갈 것이다. 해질녘. 어쩌다가 나는 총(冢) 주위에 있었고. 누가 살았는지 모르는 무덤 위로 온갖 동물들을 마주치는 듯하고. 그러니까 말, 소, 꿩, 사슴이 능선을 뛰어다니면서 모양을 이루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묘한 능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따라가고 있었는데 따라가는 나를 누군가 능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누군가를 또다른 말, 소, 꿩, 사슴이 따라가며 능선이라고. 능선과 너머, 그 이어짐은 끝없이 나열될 것도 같았는데. 그럼에도 끝이 있을까. 어떤 끝. 어떤 끝의 맺음. 매듭과 종료. 정말로 정말로. 결말. (……) 지금은 마침 오는 버스를 운좋게 탄다. 종점에 있는 마을로 그냥 향하게 된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는 참 좋았네. 정말로 정말로. 어딘가에 실려서 의탁해서 내가 모르는 장소로 내 눈을 풍경에 맡기는 느낌이라서. 모든 게 놀랍다는 생각이어서. 그러니까 문득 그날들이 훌쩍 지나 지금이라는 게. 퇴사일과 전역일과 만기일과 입학식과…… 그날들을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 있었는데 얼마 안 남았다고 좋아할 때가 있었는데 그날이 훌쩍 지나 이제 그 모든 일이 과거라는 게 놀라워서, 지금이라는 게. (……) 기억될 만한 것은 무엇인지. ―「경주」 중에서  이 시는 화자가 해질녘의 경주에서 돌아다니는 이동 경로를 그리고 있다. 요약하자면 박물관에서 총(冢)으로 갔다가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도착한 후에 다시 총으로 돌아오는 경로다. 제법 먼 거리의 여러 지점을 들러 이동하고 있는 이 길에서 바뀌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화자는 경주에서 “시간을 하나하나 공간으로” 두어보기로 하고 돌아다니는 공간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시간을 인식해본다. 이를테면 박물관에서 유적들을 구경하며 죽은 선조들의 삶을 생각하고, 총에서는 능선을 따라 뛰어다녔을지도 모르는 “말, 소, 꿩, 사슴”을 떠올리며, 버스 안에서는 “퇴사일과 전역일과 만기일과 입학식”을 “손꼽아 기다려온”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러다가 무언가를 팔러 갔다가 돌아오는 할머니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생명이 하나로 포개져 몰려오는 것을 느끼며 화자는 이 아득한 시간의 흐름에 또다시 놀라워한다.  여러 층위의 시간을 체험하는 동안 화자가 스스로에게 되풀이해 묻는 것은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다. 기억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모든 경험을 똑같이 취급함으로써 동일성을 만드는 일과는 반대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험들 가운데 일부를 선별하여 차이를 만드는 일이다. 박물관은 그렇게 보관할 만한 역사적, 미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모아두는 대표적인 기억의 저장소이다. 그런데 화자는 박물관에 방문하면서도 의외로 선별된 유물을 보는 데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화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그 바깥에 있다. 박물관에서 “오랜 세월 드문드문 발굴한 것들”과 “한데 모아놓은 것들”의 흔적을 따라가다가, 그곳을 떠나면서는 걸어다니며 스스로 “다른 흔적들을 찾아”보기로 다짐한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선조가 아니라 그 위 능선을 뛰어다녔을 “말, 소, 꿩, 사슴”과 같은 동물들, 무덤의 안내문에서 보았을 “장육존상과 심초석, 해목, 추복, 녹유벼루”와 같은 옛 물건들은 마음속 상상으로만 떠오르고, 그것이 화자에게는 박물관에 박제된 역사와 다른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그 기억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가치를 선별해 보존하는 능동적인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매순간 새롭게 생성되는 우연한 흔적에 가깝다. 시의 첫 구절인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일지”의 능동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서는 “기억될 만한 것은 무엇인지”의 수동태로 바뀌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애초에 화자가 움직이는 방식은 세계를 바꾸려는 능동적인 의지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에 실려 있다는 수동적인 감각이다. 경주라는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걸음마다 마주하는 이곳의 풍경과 그 흐름에 맞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현재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기억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단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에 가깝다. ‘기억될 만한 것’은 애초에 고정되어 있거나 마땅히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의 새로운 경험과 감응을 통해 매순간 움직이며 형성되는 것이다. 망각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억에 붙들려 있지도 않는 것. 걷다가 멈추다가 머뭇거리다가 다시 걷는 산책의 리듬처럼 흘러가는 것. 그 리듬은 나를 새로운 시간 앞으로 펼쳐놓는다. 안태운의 시구를 빌려 다시 말하자면, “신기하다, 신기해”(「아이와」). 세계가 움직이다니. 시간이 흘러가다니. 기억이 흩어지다니. 계절이 되돌아오다니. 내가 달라지다니.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1)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라는 도상이 재생산 중심의 규범적이고 이성애적인 미래주의(heterofuturism)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리 에델만의 비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재생산의 시간성을 부정하는 태도가 쉽게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으며 퀴어 공동체에게도 ‘아직 도래하지 않은(not-yet-here)’ 미래의 지평이 필요하다고 말한 호세 무뇨즈의 비판을 더 기억하고 싶다(Lee Edelman,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ke University Press, 2004; José Esteban Muñ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New York University Press, 2009, pp. 19~33 참조). 2) 잭 핼버스탬,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허원 옮김, 현실문화, 2024, 151~152쪽 참조. 핼버스탬은 가족이라는 표상에 결부되는 지속성, 영구성이라는 시간성에 과잉 가치가 부여되어온 반면, 우정과 같이 재생산과 무관한 관계와 연관되는 일시성, 우연성이라는 시간성은 폄하되어온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기억과 망각을 동등한 층위에 두고 일시적이고 우연하게 중첩된 시간의 역사를 포착하는 안태운 시의 시간성은 퀴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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