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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 2024년 봄호(제60호)

우연과 애도, 그리고 글쓰기 : 김나현, 『래빗 인 더 홀』

진기환 문학평론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래빗 인 더 홀』1)에는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로 인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선일과 직장 상사의 부탁으로 인해 하루의 작은 계획이었던 바닐라라테조차 마시지 못하는 나(「오늘 할 일」), "물의 실수"로 인해 이모를 잃은 보해(「래빗 인 더 홀」),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의 몸에 생긴 구멍이 애인을 삼키고 소멸시켰으며 그 이후 애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게 된 나(「로쿰」)처럼 삶의 노정과 진로 그리고 죽음까지 우연의 지배를 받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래빗 인 더 홀』은 김나현이 한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는 '삶은 통제되지 않는 것' 혹은 '삶은 우연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는 개인적인 믿음2)이 발현된 것으로 읽힌다.

    그런데 삶이 우연의 지배를 받는다는 믿음은 자칫하면 허무주의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3) 그 어떤 노력도 우연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력이 결과를 보증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주어지는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없다. 물론 주어진 결과를 잘 받아들이는데도 노력이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주어진 현재를 살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력할수록 미래에 대한 전망은 사라진다. 허무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싹튼다.

    다행스럽게도 김나현은 우연이 불러올 수 있는 허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는 우연의 지배를 받는 삶을 그리면서도 허무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전망들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우연과 더불어 김나현의 소설을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축인 글쓰기다. 그의 소설에는 유독 글 쓰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들의 글쓰기의 근원에는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 주로 죽음으로 표현되는 상실은, 우연의 지배를 받는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김나현의 인물들은 이러한 필연을 기록함으로써 우연을 극복해보고자 한다.

    「로쿰」을 보자. 「로쿰」은 '소멸'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의 '소멸'을 불러오는 건 구멍이다. 안의 몸에는 어느 날 갑자기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은 점점 커져간다. 이상함을 느낀 안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여기저기 수소문하다가 '소멸증상지원재단' 협회의 존재를 알게 되는데, 협회의 직원에게 자신이 그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종국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가 소멸된다는 사실을 듣는다. 왜 소멸하는가? 그 이유는 안도 모르고, 안의 애인인 '나'도 모르고, 협회 직원도 모른다. 그들이 아는 건 소멸은 그저 어느 날 우연처럼 갑자기 찾아온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소멸'했다는 기억조차 소멸되어버리니, 남은 이들은 제대로 된 애도조차 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안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으며 남겨진 존재들이 그를 잊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에 대한 기억을 기록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숨을 한번 내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언니가 구멍에 먹히는 것 같다고 제 노트에 쓰여 있더군요. 그때 수첩에 모든 것을 적어두었거든요. 저는 비교적 재단의 도움을 빨리 받았고, 많은 것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노트를 써요. 우리에게 남는 것은 노트뿐이니까요.

"정말 기억이 사라져요? 그럼 뉴스에서도 못 본 게 아니라 봤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어요?

"소멸을 막을 방법은 없어요. 다만 기록을 돕는 거죠. 당신이 무언가를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기록하지 않으면 다 잊어버리나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역시 그래요. 언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요. 노트에만 남아 있죠."

— 「로쿰」, 190쪽


    노트의 기록 유무와는 상관없이 안은 세상에서 '소멸'한다. 안의 흔적은 오직 노트에만 남아 있으며, '나'는 자신이 노트를 작성했다는 사실마저 잊는다. 그렇게 본다면 노트를 작성하는 일, 다시 말해 글쓰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소설가가 된 '나'가 안에 대한 노트를 읽고, 그가 선물해준 디저트인 '로쿰'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는 소멸 대상과의 기억은 모두 잊는다는 '소멸의 법칙'을 극복한 일로서, 안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단초가 된다. 물론 소설에 그 과정이 자세히 그려지지는 않는다. 다만 로쿰을 먹는 순간, "기억은, 무게를 잃은 돌처럼 비어버린 유리병처럼, 원래의 자리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참고한다면, '나'가 안에 대한 기억으로 나아간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면, '소멸의 법칙' 극복은 상실된 대상을 기억하는 괴로움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그러한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할 테니, "제발 이 어둠의 끝을 막아두지만 말아달라"(「래빗 인 더 홀」, 127쪽)고 외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도이다.

    애도는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제대로 기억해야 상실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 물론 슬픔을 이겨내는 것만이 진정한 애도인 것은 아니다. 슬픔을 가진 채 묵묵히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애도의 한 방식이다. 그것 또한 기억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기억은 대상의 실제 모습과 같지 않다. 그 근처에 가닿을 뿐, 실제 대상에는 닿지 못한다. 기억과 실제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다. 글쓰기가 재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언어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애도는 글쓰기와 유사하다. 욕망과 대상이 항상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과 실제 그리고 대상과 언어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김나현의 인물들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우연)이라는 무대에서,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황, 다시 말해 불일치의 삶을 담담히 살아간다. 

    그런 점에서 김나현에게 글쓰기는 불일치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행위이다. 민선혜가 『래빗 인 더 홀』의 해설에서 지적한 김나현의 소설에 있는 수수께끼들은4) 이러한 불일치의 간극을 좁힐 수 없다는 작가적 의식이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김나현은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채 백지"(「오늘 할 일」, 100쪽)로 남길 수도 있었던 삶을, 다양하게 채색한다. 새로운 눈을 통해 또 하나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안의 세계」), '나'가 원하는 대로 완성되지 않는 이야기를 성찰하기도 한다(「앙배의 이야기」). 때론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그것이 정말 있던 일인지, 소설의 일부인지 이제는 잘 구분"(「꿈의 책의 꿈」, 285쪽)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괜찮다. 그것 자체가 우연과 애도, 그리고 글쓰기라는 불일치와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글쓰기가 지속될 때, 언젠가는 불일치를 극복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1) 김나현, 『래빗 인 더 홀』, 자음과모음, 2023. (앞으로 본문 인용 시 작품 제목과 쪽수만을 표기)
  • 2) 강보라 외 인터뷰, 「김나현X소유정」, 『소설 보다: 봄2023』, 문학과지성사, 2023, 138쪽.
  • 3) 민선혜는 『래빗 인 더 홀』의 해설에서 김나현 소설의 이러한 면모가 자칫 허무주의로 기울 수 있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방식인 '수수께끼의 미학'을 통해 허무주의로부터 벗어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민선혜, 「불가해한 삶 속 성실한 수수께끼의 미학」, 『래빗 인 더 홀』, 299쪽.
  • 4) 민선혜는 "삶의 모든 질문에 답을 내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핵심"이라며, 김나현 소설의 수수께끼는 그러한 인식이 발현된 것이라 분석한다. 민선혜, 앞의 글, 298~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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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아 필화(筆禍)와 필화(筆花)의 역사 ― 『한국 현대 필화사』(소명출판, 2024)

1. 우리 삶에 침투해 있는 국가폭력으로서의 필화 2024년의 겨울밤, 반국가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불법적인 계엄이 선포되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겠답시고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순적인 행태는 잡은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해 우선 폭력을 행사하고 이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 비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미는 국가폭력의 메커니즘과 완전히 일치한다. ‘반국가세력’이라는 범주는 실체 없고 추상적이기에 누구든 반국가활동에 연루되게 만들 수 있다. 이 만능 단어 앞에서 우리는 국가라기보다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집권 세력에 반하는 이라면 누구나 ‘종북 좌파’, ‘빨갱이’로 낙인찍어 왔던 익숙한 책임 전가 방식을 환기하게 된다. 계엄령 선포 전에 발간된 책 『한국 현대 필화사 1』(소명출판, 2024)에서 일찍이 임헌영 작가가 “반공독재 체제로서의 국가형성의 골조”가 “미군정 시기부터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쳐” 현재의 “윤석열 검찰독재”(177쪽)로 이어졌 왔음을 짚어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민주주의를 빼앗길 뻔한 국민들은 고통받아야 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할 때, 군인이 자국민에게 무기를 휘두르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상기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고, 계엄이 해제된 이후에는 내란을 일으킨 자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 광장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는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를 위반할 시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처단”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1950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가 첫 피난지인 대전에서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만들어 적에게 협력한 사람을 3심이 아닌 “1심 단독 종심終審”(384쪽)으로 처벌하도록 하여 “모든 과오를 부역자들에게 전가해서 오히려 ‘레드 콤플렉스’를 심화시킬 수 있는”(408쪽) 기회를 잡았던 맥락과도 유사하다. 계엄이 선포됨과 동시에 미리 준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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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까지의 필화를 다룬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방대한 양의 필화를 세밀히 다루어내는 엄청난 작업이다.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만큼 필화가 많았던 비극적인 한국의 역사를 상기하면, 한 사람이 한국의 필화사를 정리한다는 일 자체가 경이롭게 느껴진다. 특히 놀라운 점은 사료를 정리하여 현대사를 짚되,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 외에 모종의 조치 및 정책이 시행된 이면적 의미까지 예리하게 짚어낸다는 점과 필화를 당한 작가들의 생애 전반을 제시하여 필화사건에 연루된 작가가 국가권력의 희생양이자 검열의 대상일 뿐 아니라 지키고자 하는 신념과 독창적인 예술관을 지니고서 살아온 한 명의 입체적인 사람임을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임헌영 작가의 성실성을 입증해 줌과 동시에 필화가 한 인간과 그가 속한 집단, 그리고 사회 전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면밀히 들여다보게 해준다. 임헌영 작가가 채택한 서술 방식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깊이 살필 예정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3부 제1장에서 “여류 4인방”(405쪽)이라 불리는 여성 작가 모윤숙, 이선희, 노천명, 최정희를 묘사하는 방식이다. 구태여 낱낱이 밝힐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연애사는 “모윤숙과 이광수의 사랑은 너무나 유명하여 장편소설 소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최정희와 시인 김동환의 러브 스토리 또한 이에 못지 않는 은메달급”(405쪽)과 같이 조롱 섞인 어조로 서술된다. 이는 여성 작가의 사생활이 여전히 가십거리로 소비된다는 인상을 남길뿐더러 필화사건에 엮여 고통받는 작가 역시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임을 피력하는 책의 취지와도 맞지 않아 보인다. 여성 작가의 삶의 일부를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기술하여 동등한 작가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관습적인 묘사 방식을 답습하는 것으로 비칠 위험이 있어 우려된다. 해당 부분은 거의 700장에 육박하는 책에서 1장 정도의 적은 분량이기는 하다. 다시 책의 기술 방식이 지니는 장점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필화사건 안에서만 작가를 조명하면 그는 단순히 검열과 억압의 희생양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만 부각되었을 때 작가는 상징적인 존재로 고정되어 버릴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다소 수동적인 객체로 여겨질 위험이 있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 신념을 지키기 위해 글로써 국가권력에 저항하고 비유를 활용해 우회하여 발화하기도 하며 예술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검열의 위협을 무시하기도 한다는 점 역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염결성만이 강조되어 작가 또한 입체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점이 비가시화되기도 한다. 임헌영은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작가의 생애 전반을 자세히 묘사하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사실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단, 친일파라고 해도 창작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필화로 다스리는 건 실패”에 가깝다며,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방법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라는 논평을 덧붙인다.(142쪽) 악행을 저지른 작가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법적 절차를 거쳐 처벌하는 편이 옳으며, 악인을 단죄하는 의미로 주어지는 “바람직한 필화”(142쪽)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1949년, 문교부가 월북작가 작품을 교과서에서 전체 삭제하고 좌경 문학인의 실질적인 활동을 금지했던 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승만 정부는 월북한 문학인을 1급, 남한에 생존했던 문학인 중 좌익으로 판단된 문학인을 2, 3급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더불어 자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할 것을 강권했다. 가장 많은 작품이 교과서에서 삭제된 정지용 시인의 경우 사상 검열과 모략에 몹시 시달렸음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지용은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월북했다는 풍문에 휩싸이는 등 고초를 겪다 국민보도연맹에 자진 가맹하게 되는데, 당시 가입 심사를 밝히며 자신이 “이십삼(二十三) 년이란 세월을 교육에 바쳐 왔”던 “한 개의 시민인 동시에 양민”임에도 월북하였다는 소문에 휘말려 “동리 사람에게 빨갱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집을 옮기고 동시에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2)하기도 했다고 토로한다. 이와 같은 정지용의 슬픈 고백마저도 신문에 보도되어 국민보도연맹의 홍보 수단으로 쓰이고 만다는 점은 해방기의 사상 탄압이 극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1951년 10월 1일, 한창 전쟁 중이던 시기에 공보당국은 “월북 문학예술인 작품을 발매금지 처분”(307쪽)하고 월북작가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를 임헌영은 “반공의식을 고조시켜 아예 독재와 부정부패 등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전면 차단”(308쪽)하려는 의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판단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작가가 월북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까지 향유할 수도 없게 만드는 국가의 조치는 그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지를 보여준다. 임헌영은 문인이 북으로 갔다고 해도 “작품은 얼마든지 읽을 수 있는 사회를 유지하는 게 정상”(308쪽)이라고 역설하며, 작가의 행보에 근거하여 작품 자체를 금지 및 폐기하는 방식의 부당성을 다시금 지적한다. 임헌영에 의해 쓰인 필화사를 살피면서, 우리는 필화가 단순히 글과 그에 대한 검열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된다. 필화사란 결국 권력 다툼과 정치 싸움 속에서 사람, 그리고 그에 깃든 영혼과 사상을 죽여 온 대학살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안에서 한국이라는 특수한 민족사를 보되,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악(惡)과 진리를 향한 양극단의 갈망을 확인하게 된다. 3. 검열 기준의 모순 임헌영의 저서 속에서 우리는 검열의 기준이 모호하다 못해 서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황당한 상황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미군정은 해방 이후 1948년까지 한국에서 책이 번역된 작가 중 공산주의 사상 전파 저자로 플라톤, 아인슈타인,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모파상, 조지 오웰 등을 꼽는데, 반소 소설로 소개하며 미공보원에서 나서서 번역하여 출판했던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을 반공 작가가 아닌 공산주의 작가로 규정하는 허술함을 보인다.(53쪽, 282쪽 참조) 1959년에 필화를 당한 임수생의 시 「지붕」의 “인간이여, 우린 / 우리의 생활을 찾아 /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 / 고향으로 돌아가자”(567쪽에서 재인용)라는 구절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장으로 오독된다. 임수생을 취조했던 형사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라는 시구는 평양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며 “빠알갛게 돋아오는 아침의 햇빛”은 공산주의를 예찬하는 표현이라고 일방적으로 정의한 후, 그의 시를 “빨갱이 시”라고 단정 짓는다. 이는 부모의 사상 전과를 근거로 한 비논리적이고 비약적인 추측이지만, 이후에도 임수생은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국가 정보기관으로부터 번번이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임헌영은 부산 시인 임수생의 일화를 제시하여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필화사건이 있어왔다는 점을 유념하게 한다. 더불어 “서울 중심 문화형성 풍토 속에서 전국 각 지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570쪽) 필화사가 훨씬 많을 것이라며,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당부한다. 이때 짤막하게 소개되는, 빨치산을 비판하는 영화 『피아골』이 상영 허가 취소를 당한 이유도 자못 황당하다. 빨치산이 키스하는 장면이 이들을 인간적인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괴물됨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진다. 검열의 기준이 이처럼 모호할뿐더러 쉽게 뒤집히는 것은 검열의 필요성과 실효성이 집권 세력의 이익에 따라 헛되이 조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필화는 작품을 자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자체를 난도질하여 바꾸어 놓기도 한다. 월간 『신천지』 1949년 4월호에 발표된 한하운의 시 「데모」는 그의 첫 시집 『한하운시초』(정음사, 1945)에 실리는데, 이때 추천사를 쓴 이병철과 표지를 그린 정현웅이 이듬해 월북한다. 이에 1953년에 재판이 간행될 때는 이병철의 해제가 빠지고 표지 디자인은 바뀌며, 수록 시 「데모」의 제목은 「행렬」로 변경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절인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라는 시구는 삭제된다.(420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하운은 빨치산으로 낙인찍혀 곤욕을 치르게 되자 『한하운 시전집』을 발간할 때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라는 시행을 추가하고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아 미군정을 비판하는 시 「데모」를 반공 작품으로 변모시킨다.(423~424쪽) 검열과 모략이 어떻게 작품을 훼손하는지, 어떻게 문학을 왜곡하고 그에 담긴 정치성마저 뭉개버리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이 되는 작품뿐 아니라 작가의 아직 쓰이지 않은 작품들에까지 관여하게 되며 작가를 자기 검열의 굴레에 가둔다. 혼란스럽기는 독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해석한 작품이 기이한 방향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4. 필화(筆禍)의 역사이자 필화(筆花)의 역사 필화가 빈번하다는 것은 “질곡과 비극의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지만, 임헌영이 적절히 지적해 주었듯 “필화가 있어야 할 시대에 직필은 없고 곡필과 망언과 허위와 날조만 난무하는 현상은 더 비참하다”.(4쪽) 필화사를 마주할 때, 우리는 터무니없이 악랄한 폭압에 경악하게 되지만, 무기력해질 필요는 없다. 역사 속에서 거듭되는 필화사건은 불의에 맞서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보려던 국민들의 갈망과 노력이 절멸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희망이 없던 시대는 없었던 것이 된다. 책의 말미인 제11장에서 다루고 있는 『경향신문』 폐간 사건에 주목해 보자. 1959년 4월 30일, “신문 발행을 허가제”로 바꾸고 “언제든지 폐간조치할 수 있도록 규정”(656쪽)한 미군정법령 제88호(1946.5.29)에 의해 『경향신문』은 페간된다. 1946년 10월 창간 당시부터 친일파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했으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는 점과 칼럼 「여적(餘滴)」란의 논조 등이 문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경향신문』의 발행 허가를 취소한 것에 더해 사옥에 꽂힌 기를 내리게 하고 마크를 떼어내게 하여 상징물까지 모두 금지하는데, 임헌영은 이러한 조처는 여타의 필화사건에서도 보기 드문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부연하며 “현대 한국언론사상 가장 가혹한 필화사건”(655쪽)이라고 진단한다. 주목할 점은 발행허가를 취소당한 이후의 대처다. 노기남 주교는 “경향신문의 정치비판 논조가 가톨릭 교지 위배”(669쪽)라는 지적에 맞서, 불의에 항거하는 것 역시 종교의 일임을 역설하였다.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이었던 염상섭을 비롯한 33인의 문학인들은 폐간 조치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고 한국신문 편집인협회 또한 『경향신문』 폐간 취소를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신문사 측은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 행정처분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데, 사복형사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재판부는 경향신문 발행허가를 취소한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에도 또다시 무기정간 명령이 내려져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사월혁명 직후 『경향신문』은 복간된다. 부당한 억압에 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의를 지키고 양심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분투는 붓을 꺾지 않는 염결한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필화’는 쓴 글이 문제가 되어 화를 입는다는 뜻이지만, 한자를 바꾸면 좋은 글을 지칭하는, ‘붓 끝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필화(筆花)’가 된다. 붓을 쥔 손을 짓부수는 발길질 아래에서도 어둠을 먹으로 삼지 않고서 옳다고 믿는 것을 기록하려는 아름다운 손이 있다. 그 손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꽃을 틔우고 있다. 1) 이에 관해서는 책의 목차에서 살필 수 있듯 발간 예정인 『한국 현대 필화사 3 : 전두환 쿠데타 이후의 필화사』의 제11부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필화’에서 ‘블랙리스트 문제’로 다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2) 「詩人鄭芝溶氏도加盟」, 『東亞日報』, 1949.11.5, 2쪽.

계간 문학인 성현아 검열필화국가폭력역사저항적 글쓰기 2025
성현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 강화길,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말을 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을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골라 제외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형언할 수 없어서 침묵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모두가 알고 있어 굳이 말해질 필요가 없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강화길 소설의 여성 인물들이 구태여 토로하지 않는 억울감과 소외감 같은 것. 이 사회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면서 부러 말할 필요도 없는, 각기 다른 여자들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거푸집으로 찍어낸 듯한 유사한 정서들. 그러므로 강화길의 소설 속 말해지지 않는 빈틈은 경험적 현실을 나눌 수 있도록 의도된 여백이 된다. 이는 매끈한 반사면으로 남아 독자의 체험을 되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우리는 그 여백에 성차별적인 세계에서 타의로 경험한 불쾌감을 채워 소설을 완성한다. 강화길이 꾸준히 '안진'이라는 지방의 소도시를 여성이 경험하는 특수한 현실의 집합체로 구현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자매로 오해를 받곤 했던 '나'(진이)와 막내 이모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토대로 유대감을 나누던 사이다. '나'는 이모가 친언니였으면 하고 바랄 만큼 그녀를 각별히 생각해 수시로 책과 엘피판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모가 암으로 죽자 그의 언니인 큰이모는 '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막내 이모가 아끼던 티셔츠를 남자 조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모의 여자 조카가 '나' 하나뿐이라는 점에서 이는 큰이모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만 배제했다는 의미가 된다. '나'의 남동생은 이모의 발인 시간도 제대로 못 맞췄지만 큰이모는 그의 수고를 치하한다. 이렇듯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여성이 가부장제를 대물림하는 광경을 우리는 강화길의 소설에서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경제적 부담을 짊어지고서 그러지 않은 여자들을 "멍청한 년"이라고 구박하는 여자(큰이모)와, 그런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도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엄격한 미의 기준을 악용하여 "못생긴 게"라고 되받아치는 여자('나')가 소설에 남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쉬이 불행해지고 마는 이들의 처지가 애석하게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강화길은 이전 작품에서 다루어온 문제의식을 이어가되 유품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을 구성하여 '혈연과 가부장제'라는 범주로는 다 길어낼 수 없는 남은 마음들에 대해 숙고한다. 남자 조카들에 비해 이모와 훨씬 가까웠던 '나'는 이모가 남긴 유품을 처리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음을 거리낌 없이 주장하지만, 이모를 언니라고 부르면서 '나'와 이모가 소원해졌다는 사실과 '나'가 알지 못하는 이모의 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낯선 여자 앞에서는 혼란스러워진다. '나'는 자신이 이모와 법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혈연관계임을 들먹이면서 여자를 내모는데, 이때 경제적으로 지원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모의 대소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던 큰이모의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부재하는 대상과 맺었던 관계의 깊이를 증명하고 그에 대한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를 사유하게 한다. '나'는 "내가 사귄 남자들"을 이모가 다 알았던 것이 그만큼 서로 가까운 사이여서가 아니라 '나'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연애사를 들려주었기 때문임을 아프게 확인한다. 자기 편의를 위해 이모가 어렵게 모은 돈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모를 빼닮았다는 점이 이모의 횡격막 아래 자리한 "그것의 거푸집마냥 똑같은 형태의 길쭉한 암 덩어리"가 그랬듯, 부정적인 의미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돈과 피로 얽힌 관계라거나, 서로 돌봄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상히 대해주어야 하는 사이였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소한 추억 역시 분명히 실재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실한 마음과 말로도 가려지지 않는 거짓의 마음, '안진'이 모두 안진에 있다.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상속가족여성주의성차별애도 2025
성현아 기억과 고통의 맹점 ― 편혜영, 「남은 사람」(주간문학동네 2024년 9월)

 고통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수치화할 수 없어서 증명하기 어려운 통증은 느끼는 이가 홀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의 초점 화자인 '그녀'는 정강이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반깁스를 하게 된다. 그녀는 "가시 돋친 불덩이를 다리에 얹고 있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그에 비해 의사가 해주는 처치는 너무나도 간단해 보인다. 게다가 딸은 병원에서 불평하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더는 붕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통증을 증명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생각에 "아픔을 누릴 권리"를 잃은 것 같은 묘한 상실감을 느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떠안게 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는 편혜영의 다른 단편소설 「리코더」(『어쩌면 스무 번』, 문학동네, 2021) 속 '무영'이 많은 사상자를 낸 건물 붕괴 사고에서 상처 하나 없이 살아남은 후, 멀쩡한 다리에 두 달간 깁스를 했던 것과도 궤를 같이한다. 참사를 겪은 당사자이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갖게 된 목격자임에도 운 좋은 생존자라는 이유로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자 무영은 자신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드러내려 한다.  당사자만이 아는 내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입증하는 일은 이토록 복잡다단하다. 「남은 사람」의 그녀는 몇 해 전에도 허리를 다쳐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번번이 뼈에는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학병원에 가서야 척추뼈 중 일부가 손상되었다는 소견을 듣게 되는데, 이때 그녀는 치료를 받은 것이 아님에도 안심한다. 자기가 감각한 통증의 실체를 더는 스스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은 자기에게는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타자에게는 추체험되는 것이기에 온전히 이해받기 어렵다. 이 같은 고통의 맹점은 모녀 사이마저 갈라놓는다. 내내 앓던 손녀가 일곱 살에 죽자 그녀의 딸은 자식을 잃은 아픔에 오랫동안 자학하고 애통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마음을 추스르라고 위로하는 그녀에게 딸은 "자식을 잃어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아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녀는 딸이 느끼는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딸 역시 "어린 자식을 앞세운 딸을 둔" 엄마의 비통함을 가늠할 수 없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사진학과에 진학하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그녀가 "그 나이에 남자들이나 찍는 사진을 배워서 어떻게 먹고살려느냐"고 묻자 딸은 피식 웃는다.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은 전해지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받기는커녕 고정적인 성역할에 기반한 비난만 듣게 된 딸의 상처는 웃음 뒤에 가려진다.  편혜영은 고통에 울부짖고 몸서리치는 인물보다는 오히려 고통의 증언 불가능성을 깨닫고 일찌감치 입을 다물게 된 인물을 많이 그려왔다. 고요하게 싸늘해지는 사람들 가까이에서 침묵에 덮인 그들의 참혹을 서서히 누설하는 편혜영은 「남은 사람」에서도 여지없이 읽는 이들이 섬뜩한 슬픔에 감염되도록 만든다. 그녀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게 하여 그녀의 감각을 체화하도록 유도하던 소설은 말미에 이르러서야 딸이 하던 "엄마, 괜찮아요. 이제는 다 지나갔어요"라는 무심한 말이 복선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화상을 입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아파하는 그녀에게 딸은 그녀가 다리를 다친 것이 십수 년 전의 일임을 일러준다. 그녀는 신체에 각인된 고통 대신 그 환부가 아물어가던 시간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엉킨 시간은 지나간 고통을 도리어 생생하게 만들기도, 완전히 잊은 고통을 다시 마주하게 하기도 한다.  기억을 상실해가는 이들이 망각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자신이 잊어버린 기억을 알려주지 말라고 딸에게 부탁한다. 절친했던 지숙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언젠가 남편과 손녀의 죽음을 잊게 될 때, 그 끔찍한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다. 기억을 잃어가는 한 여자가 무슨 일이든 겪게 하는 삶에 맞서서, 경험한 일들을 부단히 잊어가기를 바라는 결말은 섬찟하게 새롭고 선득하게 슬프다.

계간 문학동네 성현아 편혜영고통기억정보통증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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