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2026 한국문학 비평포럼 1부
광장의 문화정치 ― 강지희, 한영인, 홍성희 평론가
「2026 한국문학 비평포럼」1부
광장의 문화정치
― 강지희, 한영인, 홍성희 평론가
1부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극단적 갈등,
세대와 젠더로 대표되는 각종 문화적 정동 등을 문학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케이팝 응원봉을 매개로 한 연대의 미학과 문학 속 남성성 재현을 통해
세대별 위기와 청년 담론의 정동을 짚고,
포스트 퀴어-페미니즘 혹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한국 사회의 공동체가
그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최근 각광받은 여러 작품의 양상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영인 지금부터 1부 '광장의 문화정치'를 주제로 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비평포럼은 6명의 평론가가 내부 회의를 거쳐서 두 가지 세션을 마련하였고, 그중 한 세션으로서 ‘광장의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저는 1부 세션 ‘광장의 문화정치’의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한영인 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 포럼의 기획은 2025년 한 해에 비평적인 경향과 문학 경향을 정리하고, 올해의 문학 트렌드나 전망 같은 것을 나눠보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키워드와 주제 같은 것들이 나왔고, 논의한 끝에 여기 있는 세 명의 평론가는 ‘광장’이라는 키워드를 채택했습니다.
이제 두 평론가께서 간단한 소개와 ‘광장’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지희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가 강지희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2024년 12월 이후부터 작년 초까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한국문학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중요한 흐름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액체성의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게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말이 어떤 경향성이나 트렌드를 따라가야 된다는 의미가 아닌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고, 그 여파 속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게 문학이기에 일련의 사건이 앞으로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2015년과 2016년에 거쳐 광장에서 많은 집회가 있었고, 그 후에 한국문학 안에서도 퀴어 페미니즘의 거대한 물결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그렇다면 10년만에 열린 광장을 고찰해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느꼈던 이 충격의 여파가 어떤 방식으로 문학 속에서 흡수될 수 있을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홍성희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성희라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가 관통해 오고 있는 시간들을 지금 길을 걸으면서도 플랜카드를 통해 계속해서 확인이 가능하잖아요.
어떤 언어적인 현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몸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현장들에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공통적으로 감각하고 있고, 동시에 얼마나 다양하게 쪼개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나눠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응원봉, 광장, 극우 청년, 태극기. 이렇게 묶어 부르는 말들이 유통되고 있는 가운데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쪼개서 펼쳐보고 싶습니다.
한영인 네, 말씀 주신 것처럼 이 광장과 한국문학이라고 하는 키워드 내에서 거느릴 수 있는 주제가 상당히 많은데 저희가 그중에서 몇 가지를 좀 추려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주제에서 우선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문학은 이 계엄과 광장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고, 어떻게 응답했는가’입니다.
아시다시피 재작년 12월에 비상계엄이 있었고, 바로 그다음 해가 2025년이었기 때문에 문학이 재빨리 어떤 사태를 담아내기에는 상대화하고 의미화하며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에세이나 일지 같은 형식을 통해서 굉장히 재빨리 대응했다고 생각합니다.
계간 『문학동네』는 2025년 봄호에 특집을 마련했고, 계간『문학과사회 하이픈』 봄호에서도 곧바로 여러 작가의 목소리를 담아냈습니다. ‘씀’ 같은 잡지는 하반기에 특집을, 계간 『창작과비평』에서도 2025년 봄호에 ‘K-민주주의 약진’이라는 특집으로 이 사태를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특집들을 일별하다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이 잡힙니다. 제가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작가와 평론가들이 계엄과 광장에 대해서 쓴 글을 보고 ‘한국문학과 문학인들이 계엄과 광장을 개인적으로 이렇게 통과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기보다 거기서 나타나는 ‘어떤 혼란과 막막함, 두려움, 모순 이런 것들이 어쩌면 2026년 혹은 그 이후의 문학 창작까지도 연결이 될 수 있겠다. ’라는 그런 징후들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앞으로의 한국 문학계 전망을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특집들을 읽으면서 새삼 이 지면들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발언이나 다른 지면보다도 이 문학 계간지를 통해서 문학인의 목소리로 재반추한 계엄과 광장의 시간들이 저는 어떤 다른 글보다도 생생하고 또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여기 계신 두 분께서도 각자 『문학과사회』,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서 기획을 구성하고 특집에 관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기획으로 임하셨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강지희 저는 지금 계간 『문학동네』 기획을 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 기획 자체가 굉장히 특이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금 한영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문학으로 승화해서 발화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잖아요.
그렇다 보니 예전에도 에세이 형식으로 밀착된 글을 받았어요.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에 『눈먼 자들의 국가』라고 나중에 단권으로 발간된 작품이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 특집에 실렸던 글이에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2025년 봄호 기획을 했는데 실려 있던 글 중에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주 작가의 글이었어요. 이희주 작가는 최근에 K-POP 응원봉과 관련한 인터뷰집을 기획해서 내기도 했는데요.
작가가 던진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팬질과 정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자신에게 팬질이라는 것은 죽음도 불사할 사랑, 빠순이의 사랑이었고 사실은 조금 폄하되는 사랑, 개인적인 사랑 이런 것이였는데 그런데 그걸 넘어서 이 응원봉의 빛을 다 같이 들고 있었을 때, 그리고 내가 시민으로서 감각을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에로티시즘 같은 것과 맞물려 팬질 했을 때의 경험과 동일한 몸의 감각 같은 게 느껴졌다는 거예요.
이게 너무나 생생한 현장의 언어들이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동안 문학장에서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이 ‘미학과 정치가 함께 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었거든요. 그간 1960년대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 같은 것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어쩌면 ‘광장에서 나왔던 응원봉의 빛과 그것을 함께 할 수 있는 몸의 감각들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홍성희 저는 계간『문학과사회』 편집 작업에 참여하며 그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동인들과 함께 많이 이야기 나눴고, 그 과정을 바탕으로 기획을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기획 자체가 아주 독특한 것은 아니었고, 황정은 작가가 예전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줬던 형식을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다시 되불러오면서 시간을 연결하는 동시에, 지금에 집중하는 가장 중요하고 좋은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기획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획을 만들 때에는 너무 근거리이기 때문에 이 근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에 집중하게 됐다면, 작가님들의 글을 다 모아놓고 보았을 때 저희가 가장 좀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얼마나 다양한 위치에서 그 순간을 맞닥뜨렸고,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생활인으로서 그 시간을 관통해 오고 있는가’에 대한 어떤 차이의 지점들이었어요.
계간『문학과사회』 기획만이 아니라 계간『문학동네』, 반연간지『쓺』, 계간『문학들』처럼 다른 문예지들에서 유사한 형태의 기획이 계속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재미있게 보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그 순간에 대한 기록을 시작할 때 엄마로서 내가 어떤 공포심을 느꼈는지로 시작하시고, 어떤 분들은 작가로서 내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며 시작하시고 또 다른 분들은 강단에 서는 사람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사회자로서의 기능을 해야 되는 사람으로서 ‘내가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이렇듯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가 이 순간을 맞닥뜨리는 장면들이 다채롭게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들이 광장에서 모이거나, 모이지 않을 때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를 지켜볼 수 있는 게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저는 12월 3일 다음 날 다른 지역에서 강의가 있었어요. 대학에서 하는 교양 글쓰기 강의인데 아침 9시 수업에 딱 아이들이 들어왔고,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제가 첫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전날 밤의 기억과 그때의 마음 때문에.
그래서 그때 깨닫게 됐어요. ‘나한테는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이 되게 되게 중요하구나.’ 제가 비평가로서나 생활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이랑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비평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정돈해서 꺼내는가보다 ‘교육 현장에서 연령대가 다르고 또 아마도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을 친구들이 모여 있는 아주 작은 광장이라는 교실 안에서 내가 어떤 언어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저에게 아주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일지라는 형식이 그때 잠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굉장한 폭력을 경험한 이후에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었던 방식 그대로 반응하게 된다기보다는, 그 폭력을 소화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를 이 폭력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세울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자기 정체화 과정이 계속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그런 자기 정체화에 있어서 가장 엄밀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해온 사람들이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작가들이 남긴 일지들이 혹은 남겨가고 있는 일지들이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영인 네, 말씀하신 다양한 기획들이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곳곳에서 다시 한 번 호출이 될 텐데 역시 키워드와 포커스는 광장에 다시 맞춰지게 될 것 같습니다.
‘다양한 위치와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통과한 광장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광장을 통과한 이후에 남은 문제는 무엇이고, 그 남은 문제를 앞으로 한국문학은 어떻게 대면해야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광장에 대한 저마다의 의미화가 있겠지만 저는 사실 제주도에 살기 때문에 한 번도 광장에 나가보질 못했어요.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도 있고, 페이스북도 있고 다행히 실시간으로 광장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광장에 직접 나가보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아쉬운데 새삼 광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의 광장은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광장’이라고 했을 때, 한국 문학사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최인훈의 『광장』이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제목은 알지만 거기서 광장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사실 여기서의 광장이 긍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작품에서의 광장은 전체주의적인 느낌인 거죠. 사람들을 광장으로 내보내서 밀실을 허용하지 않고, 너의 의견과 정치적인 견해,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밝히라고 강요하는 어떤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붙어 있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요. 밀실은 또 그와 반대되는 개인주의적이고 퇴폐주의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런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저는 꽤 오래 지속됐다고 봐요. 그런데 이번 광장을 보면서 느낀 건 더 이상 이런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지속되기는 어렵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광장이 일종의 시민 교육 기관처럼 보였어요. 사회에 대한 다양한 요구와 상상을 급진화하고, 제출하고, 경합하고, 실험해 보는 공간으로서 다른 나라의 광장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다른 나라의 광장은 항의, 봉기, 저항 이런 게 많이 떠오른다면 한국의 광장은 시민 교육적인 측면도 되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광장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기반 중 하나는 광장의 역사를 시민들끼리 서로 인식하고 알아보는 마음과 감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에 황정아 평론가가 발표한 「역사적 감정의 존재 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글이 있거든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감정을 탐구한 내용인데 우리가 지닌 역사에 대한 태도에는 머리로 생각하는 인식만이 아니라 축적된 역사를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감정도 존재하며, 이 감정은 동료 시민들, 동료 주권자들, 광장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 대한 우애와 경외심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번 광장을 통해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민주주의적인 감정을 느꼈을 텐데요. 제가 문학 평론가로서 난감해지는 지점은 이 민주주의적 감정을 시민으로서 광장에서 느끼는 것과 작가가 이것을 작품으로 다루는 것는 굉장히 다른 문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같이 논의하고 검토한 작품이 성해나의 「스무드」라는 작품이었는데 「스무드」를 읽어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 작품이 광장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근데 그 광장은 태극기 집회의 광장이에요. 미국 교포 출신인 주인공이 한국에 와서 우연찮게 태극기 집회에 휘말리게 되는 소설인데 이 사람은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적 감정 같은 것들을 소거하고 그것과 다른 바탕에서 아이러니한 장면을 만들어 내는 소설인데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적 감정이 없다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휘말릴 수 있는지를 또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 자체는 광장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이후에 광장을 이야기할 때도 참조하고 이야기할 점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계신 두 분께서는 이 작품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홍성희 어제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데 「스무드」라는 이 작품이 되게 복잡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방금 한영인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것처럼 어떻게 보면 구도나 이 소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정말 단순하고 어떤 감수성이나 질적인 정보 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철저한 외부인이 와서 탐색하게 됐을 때 이 내부가 어떻게 비추어질 수 있는가를 아주 담백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안에서 성해나 작가가 단순함을 계속 꼬기 위해서 사용하는 장치들을 보면 언어 조각들이 되게 많이 흩뿌려져 있어요.
이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때 ‘듀이’라는 외부인은 미국의 백인 중심 사회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자라면서 본인이 동양인이라는 자각을 거의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표면에 한국 사람들과 같이 비칠 때, 이 무수한 동양인들과 자신의 피부색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렇게 피부색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어떤 대화에서는 “나는 미국인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또 사람들이 “당신은 한국인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김치 먹어보라는 식의 문화적인 코드를 계속 건네면 자신은 한 번도 한국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나의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다.’라는 의식을 끊임없이 불러옵니다.
이런 식의 언어들이 계속 연결될 때, 이 사람에게 부여된 외부성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상상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 정도로 민주주의적 감정이 없는 사람을 상상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던지게 만드는 소설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작품에서 이 사람은 예술가의 비서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예술적인 조예가 엄청 깊은 거죠. 그런데 이 예술가라는 사람이 전 세계적 예술의 흐름 혹은 문화적인 흐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로 ‘나는 K-pop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라며 외부성을 철저하게 만들어 낼 때, 우리가 ‘외부인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어떤 게 있어.’라고 가정하게 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소설에서 밈이 잠깐 활용되는데요. 백인 남성인 예술가가 ‘어떤 전쟁터에 가서 도와줄까?’라면서 트럼프가 손을 내미는 밈을 약간 우스운 듯이 그 비서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이전 같았으면 이 밈이 둘 사이에 일치되는 코드로 바로 이해돼서 웃음으로 처리되어야 될 장면인데 이 광장에서의 경험 이후에 듀이라는 인물은 바로 웃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어떤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코드를 내가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응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아주 미묘한 장면들이 보여질 때, 우리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코드는 무엇이고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코드는 무엇인지를 같이 조금 더 복잡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지희 앞에서 성해나의 「스무드」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어서 저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몰랐거든요. 어떤 일을 하시는 분들이, 어떤 관심사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오셨는지 사실은 너무 궁금하네요.
제가 광장과 여의도 집회를 나갔을 때는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안에 있어서 좀 못 느꼈던 것 같은데 3월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을 때는 충돌의 장면들을 몇 번 봤었어요.
전면적인 충돌은 아니었지만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지나갈 때 서로 외치는 거죠. 강한 비난의 말을 하고 드잡이질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말리고. 이런 장면들이 되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고, 대립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 진영에 대한 탐색이 몇몇 소설들에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김세희의 「엄종길 영감」이라는 단편이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준 한 남자의 말에 따라서 극우화되어 가고, 결국에 부정선거 관련해서 집회에 나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쭉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우리는 보통 극우화된 대상을 정치적 이념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어떤 극단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너무나 평범한 어르신이고 어떻게 보면 노화로 인해 돌봄이 필요해진 존재인 거죠.
자신의 판단력에 취약점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그는 가족들과 멀어집니다. 그 돌봄의 공백 사이로 끼어드는 것이 작품 안에서는 교회인데, 그 교회가 반공산주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그게 이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거죠.
그에게는 딸의 가족으로부터 은연중에 비위생적이고 교양 없는 대상으로 혐오되거나 배제 당해왔다는 강력한 울분의 정동이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부족함과 수치심 같은 것들을 대리적으로 보충해 주고 나의 소속감을 만들어주는 공간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이 작품 외에도 위픽이라고 시리즈로 나오는 단편 중에 이미상의 소설이 있습니다. 『셀붕이의 도』라는 단편인데 너무 재밌거든요. ‘인셀’이라는 말을 혹시 아시나요? 비자발적인 독신이라는 말의 약자인데 스스로에 대한 멸칭까지 품을 정도로 되게 대범하고 ‘나는 테스토스테론으로 가득한 남자야.’라는 과장된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한 20대 젊은이의 이야기예요.
그는 ‘선언문 갤러리’라는 가상의 게시판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다가 모종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그 갤러리에서 우정을 공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다가 클래식 면도 동아리 같은 데에 들어가게 돼요.
작품에서 이 인물의 뒤틀린 남상성에 대한 환상을 묘사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인물이 돈이 많은 외할머니를 돌보러 가서 만나게 되는 두 명의 인물이에요. 그 집에는 많은 돈을 받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한 명과 미국 유학에 실패하고 돌아온 사촌 누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은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성보다 훨씬 섬세하고 말도 너무 잘하고 이제 말벗으로서 끝내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가 있어요. 그 기술을 통해서 일반 요양보호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거죠.
그리고 사촌 누나는 미국에서 호르몬 요법이라는 걸 배워와요. 그래서 이 남자 주인공한테도 “테스토스테론 필요하면 좀 바를래?”라면서 좀 나눠주거든요. 사촌누나의 거뭇한 콧수염은 이제 남성적 외양과 의례가 의학적 선택을 통해 얼마든지 생산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남성성의 중핵에는 정치적 선언문과 미국이라는 공간이 놓여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돌봄 노동의 경제이고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학이며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자원화할 수 있는 자기 연출의 기술이에요.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남성성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붕괴 직전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2030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에 단순한 이분법적 변별이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걸 넘어서 ‘우리가 문학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고, 지금 말씀드렸던 이 두 편의 소설이 참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영인 네, 저도 이미상 소설 『셀붕이의 도』를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소설의 경향까지 포함해서 얘기하자면 표적, 과녁을 굉장히 종잡을 수가 없다. 이번 소설에서 미희라는 누나가 논 바이너리와 같은 얘기를 하잖아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광장의 요구이기도 했는데 그 소설에서는 좀 희화화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원화해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인물이고 그래서 어떤 인물도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없고요. 그 안에서 각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발가벗은 인물들이 계속 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상의 소설에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읽다 보면 ‘이 과녁이 이렇게까지 종횡무진이어도 되나?’ 사실 그런 생각은 좀 들었던 것 같아요.
이 말씀을 왜 드렸냐면 계간『문학과 사회 하이픈』에 실린 여러 작가들의 그 일기 중에 이미상 작가가 쓴 일기도 있거든요. 저는 그 일기도 굉장히 같은 면에서 재미있었고 징후적으로 봤습니다. 성해나의 「스무드」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셀붕이의 도』라는 작품하고도 통할 것 같기도 해요.
이미상 작가가 일기에 이런 얘기를 해요. 본인이 광장을 배회하면서 소설가니까 어쩔 수 없이 소설을 떠올리게 되겠죠. 그래서 이런 인물도 떠올려보고 저런 인물도 떠올려보면서 소설의 싹을 잡아가는데, 그중에 떠올린 사람이 처음 집회에 나가 본 ‘자의식 과잉자’라는 인물을 떠올린다고 얘기를 해요.
이 사람은 광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광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 되게 전전긍긍하며 신경 쓰는 사람인 거죠. 그러다가 단순히 부끄러워하고 긴장만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는 분노하게 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나를 챙겨주지 않지?, 왜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나눠 먹지?, 왜 나는 환영해 주지 않지?, 방석도 자기들끼리만 나눠 갖지?’
그래서 자신을 환영해 주는 곳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런 면이 「스무드」와 구도가 비슷하죠. 정치적인 것 없이 광장에 왔다가 다른 광장으로 건너가게 되는 이 인물에 대한 내면을 그리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요.
물론 이 인물은 작품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작품과 똑같이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 작품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고, 이미상 소설가도 현실적인 맥락을 부여해야 한다는 약간의 유보적인 얘기를 하고 있긴 해요.
저는 만약에 이 아이디어가 소설화된다면 이 맥락을 오히려 부여하지 않아야만 살아날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광장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광장과 문학’이라고 할 때에 한국문학이 통과한 광장은 여의도의 광장인 거죠. 그곳에서 일어났던 빛의 혁명과 연대 이런 것들이 분명히 민주주의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작가들의 무의식적인 발상이나 착상 같은 것을 보면 작가들은 이미 피부로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광장은 단일하지 않고, 분열되어 있고, 우리는 적대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어서 이번 세션 주제를 ‘광장의 문화정치’라고 했을 때 저희가 주요하게 다룰 것은 광장 내외부의 이질성과 차이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강지희 한영인 선생님이 에세이에 덧붙여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단편이 떠올랐었어요. 이 작품은 1991년 5월 투쟁을 다루고 있는 단편인데요. 김소진은 당시에 신문 기자였고 이듬해인 1992년도에 바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성균관대 김귀정 열사의 시신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한 무리가 있었고 거기에 함께하는 또 다른 노동조합 무리들이 또 있었어요. 그런데 그 노동조합 무리들을 김소진은 애정을 담아서 ‘밥풀때기’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상당히 폭력적이에요.
그러니까 민주화운동 세력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계몽의 대상으로서의 민중들이 전혀 아니라 거칠고 멋대로 행동하는 무리인 거죠.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태극기 부대의 기원 같은 어떤 존재들이 그 작품 안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응원봉 이야기로 잠깐 돌아오면 응원봉이 중요한 ‘빛의 혁명’의 상징이 되면서 여기저기에서 응원봉을 상징물로 포스터에 쓰는 일들이 꽤 있었어요. 근데 ‘무지개 행동’이라는 성소수자 차별 반대 집단에서 집회 홍보물에 엔시티라는 아이돌의 응원봉 이미지를 썼고 그것에 대한 거센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홍보물이 삭제된 적이 있었어요.
다른 곳에서도 당연히 응원봉 이미지를 많이 썼었는데 유독 이 직접적인 항의가 많이 쏟아진 곳이 어디였는가를 보면 결국엔 ‘퀴어’라는 존재들이 여전히 2030 여성들의 대표성 안에서 위협이 되고, 의미를 훼손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터프 논쟁이나 온라인상에서의 트랜스 혐오는 계속해서 있었던 일인데 긴장과 배제의 논리가 이번 광장에서도, 특히나 찬양받는 이 응원봉과 관련해서도 나왔다는 점은 짚어봐야 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홍성희 연결해서 순수성이라는 게 많이 가정되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면 윤리적으로도 올바라야 한다.’라는 엄격한 잣대가 부여된 순수성 담론에 저항하기 위해서 광장 안에서도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담론이 계속 나오게 되는 것 같은데요.
방금 강지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역사가 계속되어 왔고 문학 작품들이 그런 현장성을 많이 밝혀오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들을 바라보다 보면 잠깐 말씀드렸던 밈이라는 게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단마다 가지고 있는 밈과 그것에 대항하는 특정 밈이 있는데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완전히 다르게 전유해서 쓰기도 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 밈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굉장히 크고 또 동시에 속도가 빠르고 그 코드를 공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도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화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문화를 폐기해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밈의 문화가 있고, 문학이 천천히 하고 있는 어떤 일들이 있다면 그 사이에 또 다른 방법론들을 계속 마련해 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잠깐 언급된 이희주 작가의 글에 ‘시위 현장에 나갈 때마다 무수한 스탠딩 코미디들을 봤다.’는 아주 짧은 문장이 있는데요. 스탠딩 코미디라는 어떤 농담의 방식, 그런데 동시에 비판의 방식이기도 한 여러 방법론들을 상상해 가는 일이 지금 한국문학 장에서도 그렇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고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이어서 한번 말씀드려 봅니다.
한영인 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현장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날씨도 추운데 와주셨는데요. 관련된 토픽에서 궁금하거나 질문하실 내용이 있으면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석자 1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문학의 간격을 좁히면서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참여하였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오늘 주제에서 ‘광장’이라는 얘기를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생각할 때 아주 오래전 학생 운동이랑 시위가 많았을 당시의 세계를 문학이 다루는 방식은 폭력성에 초점을 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이후에는 또 집단적인 우울감 또는 아픔, 상처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제 최근에 있었던 사태와 관련해서는 어떤 식으로 지금 문학이 이거를 표현하고 있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아직 그 사이에 나온 작품이 많이 없기도 한데 경향이나 바라보는 예상치 정도를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강지희 어떻게 보면 아직 작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얘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2025년부터 문단에서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탐구인 것 같아요.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안에서도 이 남성성에 대한 탐구가 계속 이루어져 왔는데,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의 특수한 경제적 현실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것이 우리 삶에 긴밀하게 침투해 들어왔고, 다들 어느 정도 투자자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이 돈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적금만 해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감각, ‘벼락 부자’, ‘벼락 거지’ 같은 말들이 드러내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수탈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자산화시키는 것과 연결해서 지금의 청년 남성들이 왜 다른지 사회학자들의 여러 진단과 함께 문학 안에서도 이 남성성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고 있는 게 보이고요.
대표적으로는 서장원 같은 작가의 소설들이 이 남성성에 대한 다채로운 방식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해나가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이런 방향의 소설이나 담론들이 계속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영인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작년에 나온, 특히 봄에 나온 여러 작가들의 에세이를 기본 자료로 채택한 이유는 거기서 나오는 어떤 정조들과 감정들이 이후에 나올 작품과도 연결이 좀 되는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해서 주목했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에는 폭력이었고 그다음이 우울이었다면 저는 그다음은 냉소일 것 같아요. 언뜻 잘 안 맞을 수도 있죠. 왜냐하면 작가들은 이 사태에 뜨겁게 분노하고 광장에 참여하고 굉장히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왠지 그 내용을 다 읽고 나니까 ‘다음에는 냉소겠다.’ 하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왜 ‘냉소’라는 단어가 떠올랐는가 하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커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글을 읽다 보면 물질적인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 균열된 사회에 대한 즉물적인 두려움이 왔던 것 같아요. 특히 서부지법 폭동사태를 보고 여전히 30%가 넘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되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2가지 공생의 감각이 이 지경까지 왔구나, 어떻게든 함께 살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이 싹 트는 반면에 ‘근데 어떡하지, 그게 가능할까’라는 게 있죠.
그런데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누구나 다 인식적이고 감정적인 한계가 있으니, 사람마다 이 사태와 세계를 수용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저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것이 더 강할 것인지에 따라 경합할 거라고 봐요. 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아마 공존을 고민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냉소가 당분간은 좀 더 크지 않을까 막연하게 그런 예측을 한번 해봅니다.
홍성희 이 냉소와 남성성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 있는 작업이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냉소적인 태도라는 것을 조금 더 쪼개어서도 이야기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단적인 감정과 분노를 경험하고 나서 약간의 소강 상태에 닿게 되며 아주 급격하게 차가워진 이후에 이 감정을 어떻게 연결해서 갈 것인가를 얘기하다 보면 어떤 장에서는 모든 걸 통제해야 된다는 극강의 제어 방향을 제안하고, 어떤 방향에서는 완전히 무관심해져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는 감정들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냉소는 두 방향 다 작동할 수 있는 어떤 단어인 것 같아요. 많은 문제를 다 통제해 버리고 완전히 싹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종류의 냉소가 있고 냉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그런 방향이 있습니다. 이 두 방향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계속 보려고 하고 끊임없이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우리가 같이 나아갈 것인가, 이 사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려고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보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는 폭력 자체만 문제가 된다거나 폭력 이후의 감정 자체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해 온 우리의 역사를 관통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금 확인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조금 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참석자 2 저도 도서관에서 잠깐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독자인데요. 우리나라의 광장이 지금은 일종의 시민 교육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최근에 봤던 다양한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란인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이제 한국에 머무는 친구라서 여러 뉴스를 공유하고 저도 돕고 있긴 한데, 이란의 광장은 아무래도 한국의 광주와도 같은 어떤 폭력의 시간을 겪고 있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그 친구만큼은 아니겠지만 고통을 겪고 같은 죄책감과 슬픔을 겪었지만, 우리는 광장의 시간을 지났고 어찌 보면 이제 소화가 됐잖아요.
‘소화가 된 상황이라서 내가 여건이 되니 할 수 있는 위선’인가. 만약 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면 내가 그때도 이만큼 그 친구에게 공감하고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 사건에 대해서 정보라 작가님께서 쓰셨던 글은 짧게 봤었는데 한국문학 안에서도 어떤 흐름 같은 것들이 작품으로 나오고 있는지 아니면 비평에 영향을 끼치는 그런 흐름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영인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에는 이란의 문제가 심각해졌고 그 전에는 시리아도 그랬죠. 보통은 유혈 진압과 많은 사상자와 폭력 같은 것들을 거느리기 마련인데 한국도 물론 유혈의 역사가 있지만 현대에 들어 꽤 평화적으로 민주화로 나간 경우 같습니다.
‘왜 중동에 있는 국가의 광장은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게끔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서 문학이 오랫동안 다뤄왔던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표명희 소설가의 『버샤』라는 작품이 난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고요. 저는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중동이라고 하는 여러 국가들이 갖고 있는 정치 체제의 불안정성과 그 불안정성이 파생한 일종의 내전적 상황. 그 내전적 상황 속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난민들이 대량 발생하는 상황.
물론 문학이 그 모든 층위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아직 한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난민을 매개로 한 휴머니즘적인 작업이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광장과 봉기라고 하는 관점, 또 국가 폭력과 학살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여러 비평가들이 시야를 넓혀서 연결해 볼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참석자 3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공부하고, 시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우선 세 분 선생님의 대담 굉장히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 분 모두 오늘 소설 평론을 주로 하셔서, 오늘 동시대 한국 소설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는 시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생각했을 때 소설 같은 경우는 이제 확실한 플롯을 가지고 전개되는 문학 장르이다 보니 최근의 정치적인 맥락 아니면 현장성을 담아내기에 조금 더 용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만큼 시도 적극적으로 이 현장성을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그런 회의가 들 때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만약 시가 적극적으로 지금의 담론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자의식이나 역사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되지 않는가 하는 반성도 많이 해보고요.
그래서 앞으로 제가 스스로 더 고민하고 성찰해야 되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한국문학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시에서의 현장성을 우리가 어떻게 사유하면 좋을지 고견을 여쭙고 싶어서 질문드리게 되었습니다.
홍성희 제가 시 평론을 주로 하고 있는데요. 선생님과 같은 고민을 저도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했던 것 같아요. 작품 얘기를 소설 중심으로 하다 보니 시도 같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찾아봤는데요. 오히려 제가 엮으려고 해서 엮이는 것 같은 텍스트들은 많이 있어도, 명징하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저는 빈 공간 혹은 어떤 비어 있는 자리라고 느끼기보다는 작가들이 일지를 썼던 것처럼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경험의 맥락들 혹은 그 감정의 맥락들을 반드시 서사적인 현장의 문제랑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장면을 만들고 맥락을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자가 만들어 낸 맥락들을 갑자기 이 현실 맥락이랑 접속하려고 하면 읽는 사람의 시선이 너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것인데, 그런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오히려 우리 안에서 지금 공유되고 있는 감정이라든가 문제의식 같은 것이 다른 맥락들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연결될 수 있는지를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최근에 많은 시인들이 상품명을 가지고 와서 시 제목으로 쓴다든가 아니면 인기를 얻고 있는 웹툰이나 영화, 웹소설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시 안으로 끌어와서 자기 안의 어떤 서사성을 만들고 그 서사성을 오히려 비틀어서 자기만의 시적인 세계를 구축해 가는 방법들을 많이 쓰고 있어요. 상품이라는 게 사실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시인들이 선택하는 특정한 상품들의 혹은 어떤 서사들, 매체들의 상품성이라든가 독자들이 거기에 접속하는 방식이 어떻게 시인들의 시선에서 새롭게 상상되거나 재배치되고 현실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비트는가 이런 지점들을 같이 얘기 나눠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광장의 문제와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광장을 꾸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화적인 동질성과 공통 감각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영인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김현 시인의 시가 광장과 퀴어를 엮어서 나름의 현장성을 잘 살린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생각해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만 그런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야말로 자칫 얘기하면 이것이 너무 직접적이고 즉물적으로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또한 다양한 연결의 과정에서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자리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인데요. 사실 광장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통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나온 작품들이 많지 않고 또 오히려 그 기미를 통해서 미래를 전망하려고 하는 자리였다 보니까 미진하기도 하고 아쉬운 지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나눈 얘기들 좀 기억해 주시면서 앞으로 나올 작품들 많이 지켜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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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집들이 차현준, 『온몸일으키기』(문학과지성사, 2025) 박술, 『오토파일럿』(아침달, 2025) 송연정 타인의 집은 언제나 무한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벽지와 바닥재의 색깔부터 배치된 가구의 종류와 재질, 그 위에 놓인 소품과 집기의 모양새들은 공간을 채우고 집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집안에 존재하는 아주 큰 것부터 무척이나 작은 것까지, 무엇 하나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누군가의 집에 발을 들이는 일은 그가 정성스레 가꿔 온 자의식으로 진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교하게 구축된 그 공간으로부터 한 자리를 내어 받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때, 어쩐지 스스로의 음습한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 이가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여기저기를 파헤치며 책장에 꽂힌 책과 서랍을 채운 잡동사니들을 실컷 구경해버리고 싶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눈알만 도로록 굴리면서 집안의 곳곳을 탐색하고 또 가늠해보는 소심한 악취미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제발 다들 끄덕여주었으면. 이런 보편적(이기를 바라는) 관음증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차현준과 박술의 첫 시집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집들이를 예고한다. 한 권의 책이 담지하고 있는 사적인 세계를 비유하기 위해 가상의 집 한 채를 세우는 일은 전혀 새롭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이라고 느껴지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두 권의 시집으로부터 감지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감이나 그 안에 조밀하게 들어차있는 생활의 흔적은 못 이기는 척 닳고 닳은 메타포를 꺼내들도록 한다. 마침 두 시인이 개방한 아공간은 방문객들에게 무척이나 관대하고, 우리는 들뜨는 마음으로 그곳을 발발거린다. 집주인의 눈치를 보느라 은근슬쩍 두리번대던 날들이여, 안녕. 너희들에게 보이어리즘의 자유를 허하노라. 그러나, 가만한 감시와 암묵적 규칙으로부터 해방된 채 시의 행간과 시어를 넘나들며 잔뜩 들쑤신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마 묘한 패배감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보고도 아주 적은 것만을 간신히 짐작할 뿐인 불가해의 심정과 아무튼 실패한 것만 같다는 예감. 왠지 모를 기대에 찬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을 집주인에게 뭐라고 선뜻 말을 건네기가 쉽지 않다. 이 서글프고도 기이한 감각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 차현준의 시집 『온몸일으키기』는 아주 촘촘하게 구상된 설계도에 기반해 지면을 구획하고 공간을 채운다. 시인에게 이끌려 당도한 낯선 곳에는 수평선처럼 이어지는 복도와 그 옆으로 딸린 무수한 방들이 있으며, 각각의 방에서는 농작물들이 무럭무럭 자란다(「구조조정」). 어림잡아도 꽤 큰 규모와 텃밭이 아닌 방 안에서 경작되는 각종 작물들의 모습은 기상천외하다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난생 처음 맞닥뜨린 광경이다. 그러나 우리를 이 집으로 데려온, 무척이나 계획적인 듯 보이는 이는 놀란 기색을 보이는 손님들을 내버려둔 채 방과 방을 옮겨다니며 밭일에 열심이다. 손바닥에는 방이 있다 둘렀던 벽 하나를 열면 다음과 같은 광경이 있을 것이다 바닥에는 밭이 있을 것이다. 흙을 촉촉하게 고른다. 이랑과 고랑을 가른다. 손바닥에서 흙내가 난다 흙내와 잘 어울리는 작물들이 차례대로 오고 있다 손바닥과 방 곁에는 먼저 만든 방들이 널려 있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낸다 - 「키트」 부분 예상치 못한 홀대에도 꿋꿋하게 복도를 거닐던 방문객은 복도 어딘가에 떨어져있던 키트 하나를 무심코 줍게 된다. “바닥”과 “네 벽”, “천장”과 “설명서”로 구성된 키트는 방 한 칸을 조립하기 위한 것인데, 설명서를 읽어내려가며 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상상해보다가 우리는 문득 이 아리송한 공간에 대한 하나의 힌트를 얻는다. “밭에서 무언가 기르기 전에 방부터 충분히 길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 “방”과 “밭”을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는 듯 보인다. 확실히 방과 밭은 ‘안’과 ‘밖’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작물들이 자라는 곳이 밭이라면 이 시집에 줄지어 등장하는 여러 방들은 밭과 다름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시인이 창조해낸 기묘한 공간을 헤집어 “집에 도착해 / 이제 밭에 가는 길”(「도움밭」)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밭 이전에 잘 가꾸어진 방이 있어야 한다는 「키트」의 진술을 이제 차현준이 시를 쓰는 방식에 대한 은유로 읽어본다면 어떨까. 손바닥 위에 조심조심 방 하나를 세운다. “니트릴 장갑을 갈아 끼고 셔츠 단추들 사이를 지나 단숨에”(「당귀 방」) 손을 뻗어 고립되어 있던 하나의 생각을 끄집어낸다. 실체 없는 발상에 물성을 부여한다. 어느새 생명력을 지니게 된 심상에 기뻐하며 그것을 살금살금 방에 옮겨심을 때, 한 편의 시가 움을 튼다. 차현준에게 시 쓰는 일은 무언가 촉발된 순간이 한 칸의 방을 꽉 채울 만큼 무성해질 때까지 정성으로 보살피며 길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돌연 / 설명할 수 없”(「아이솔레이션」)이 조우한 감각을 잘 다듬고 벼려낸 끝에 언어의 옷을 입혀 바깥으로 내놓는 일. 부지런한 집주인이 방과 방, 마음의 안과 밖을 오가며 “그간 안팎으로 운반한 것들”(「셀프 캠코더」)이 쑥쑥 자라 온 집에 그득해지고 “1층과 6층에서도 16단지와 16동에서도”(「쑥대밭」)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싱그러워질 때 방은 밭이 된다. 이 집에서는 안도 밖이 된다. 이제야 이 이상한 집에 대해 조금 알 것만 같다고 자만하는 순간, 집주인은 우리를 놀리듯 “여기서부터 당신이 살던 행정구역이 낯설어집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얼마간 흘려보내보기」) 말하고는 손을 끌어 밖으로 향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온몸일으키기』는 3부의 마지막 시인 「얼마간 흘려보내보기」를 기점으로 하여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든다. 당귀와 깻잎, 루콜라 등을 키우느라 집안을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차현준이 4부에서 “쿠바 여정 소속 현준”(「나의 나의 라임 라임」)이 되어 쿠바의 비냘레스와 잉헤니오스, 아바나를 거쳐 “아르헨티나”(「남쪽물결」)로 이어지는 여행길에 오르기 때문이다. 우수아이아 택시에 타고 Corea만 말해도 Vivero los coreanos? (중략)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은 여전한 한국에 있었는데 그곳으로부터 이곳까지 늘어난 발목이 이어진 동안 망친 기분은 너무 많이 겹쳐서 나는 결국 망망해졌다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 떼자 첫발을 내딛는다 남극 - 「도착하기」 부분 그로 하여금 살던 곳을 훌쩍 떠날 마음을 먹게 한 것이 무엇인지,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한국행 항공권을 취소”(「남쪽 물결」)하며 그가 느꼈을 감정이 후련함일지 서러움일지는 영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한국이 / 좀 빨라”서 “거기에 가면 / 제가 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아바나 일화」) 말하는 차현준의 모습으로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운반하느라 어느새 “오래된 건초”(「잉헤니오스」)처럼 메말라버렸을 시인의 마음 한 자락을 짐작만 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아주 멀리로 떠나왔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에 딱 붙어 있는, “아주 질긴 아킬레스건”처럼 운명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얄궂어서 차현준은 그 먼 아르헨티나에서도 기어이 드넓은 농장을 마주한다. 비베로 로스 꼬레아노(Vivero los Coreanos). ‘한국인의 농장’이라는 뜻으로, 아르헨티나의 가장 남쪽 도시인 우수아이아에 실제 위치하고 있는 농장이다. 이 농장을 처음 세운 이민 1세대 한국인은 비닐하우스 농법으로 채소들을 무럭무럭 길러내다가, 더 이상 채소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망했던 자리를 꾹꾹 밟”고 일어선 끝에 농장을 꽃천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망망한 마음으로 세상의 끝자락에서 피워냈을 꽃들과 마주한 차현준은 “드디어 이제껏 한국에 있었던 발바닥”을 떼어 자신만의 “남극”으로 향할 결심을 한다. “여길 돌아다녔던 발바닥”을 데려가 “오래 써먹”어(「아바나 일화」) 보겠다는 다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분주하게 “다대포”(「DDP」)와 “우이동 계곡”(「채소 콜키지」)을 걷는 집주인의 발걸음으로부터 왠지 모를 홀가분함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안도 밖이 되는 이상한 집에서는 바깥의 것들을 안으로 들여와 울창해질 때까지 가꿔내는 일도 물론 가능함을 우리의 집주인은 비로소 알았으므로, 홀가분하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방에서 시작해 쿠바, 아르헨티나, 다시 한국을 경유하며 완성된 『온몸일으키기』의 지형도는 「아이솔레이션」이 「다-체-rium」으로 향하는 여정의 기록이기도 하다. 고립되었던 마음과 다종한 바깥의 언어를 얽어내어 한 접시의 “다중생활체”로 만들어내는 조리법은 사실 정해진 것이 없다. 다만 손이 기억하는 “떠드는 감각”을 믿으며 계속해서 부지런히 떠들다보면 이 생활체는 끈끈하고도 근근하게 자라 “점점 확장된다. 사방팔방으로”(「다중생활체」). 초록의 빛깔로 무성한 집을 뒤로 하고 집들이를 끝내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슬쩍 “어느 모종” 하나를 건넨다.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소홀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표시인가 생각하며 우리는 그 모종을 받아들기로 한다. 그 모종에서 무엇이 자라날지를 기대하며, 또한 자신이 부여받을 방을 기다리면서 숨죽이고 있을 “반백여 모종 샘플러”를 끝내주게 성실한 우리의 집주인이 “끝내주게 잘 길러내”(「다-체-rium」)어 언젠가 또 우리에게 선보여주기를 바라며. * 이상하고도 싱싱했던 초록의 집을 나와 우리는 또 다른 집의 문지방을 밟는다. 이 집은, ‘진공 같은 곳’. 시인이 살아온 날들로부터 그의 시를 가늠해보는 일은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20여 년 전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해 독일어로 말을 하고 사유해왔다는 박술의 내력은 『오토파일럿』을 잘 읽어내기 위한 단초가 된다. 시와 번역과 철학, 그리고 한국어와 독일어, 가끔은 영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를 재료로 축조된 시인의 집은 굉장한 밀도를 자랑하지만 왠지 선뜻 다가서기에는 어렵다. “푄 Föhn 바람”과 “뵈엔 Böen 바람”(「란스 Lans」)으로부터 불어오는 풋내와 짠내의 차이를 사전에 의존해서만 더듬더듬 감각할 뿐인 이 방문객은 잘 읽어내고 싶은 마음과 근사하게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을 오가며 찬찬히 집의 곳곳을 살핀다. 혼자서 집을 짓고 방울뱀처럼 네 가슴을 두드려보니 한국말로 울기에 좋았다 사랑이란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으로 거울 앞에서 발화를 연습한다 안녕, 내 이름은, 안녕. 이것은 우리말이 아니야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야 네 마음도 둘이니 - 「쟤네말」 부분 방울뱀은 허물을 벗을 때마다 더 크게 울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의 언어도 저곳의 언어도, 그렇다고 “우리말”도 아닌 시어가 부유하는 벽간에서 어쩐지 슬픈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까닭은 이 집이 진공 상태가 되기 전 고여있었던 “한국말”이 도처에 스몄기 때문일까. 박술은 시집의 끝에 실린 산문에서 「쟤네말」이 “우리말이 낯설어지고 외국어가 모국어를 밀어내던 시절, 그러나 자리를 빼앗긴 말들이 아직 경련하던 시절”에 쓰인 시라고 고백한다. 이 말로부터 거울 앞에 선, “삭발을 앞둔 메두사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지를 감히 짐작해본다. 자신을 지키던 가장 큰 무기를 제 손으로 버리기 위해 돌처럼 굳어가는 마음. 방울뱀처럼 울고 싶지만 울어버릴 언어조차 굳어 그저 황망하기만 했던 기억이 박술의 시를 지탱한다. 중력이 없는 이 집에서 사물의 제자리를 찾아주기란 어려운 일이다. 집주인이 어딘가에 내려놓은 시어들은 그 자리에 가만 있지 못하고 공중을 둥둥 부유하다가 우연히 우리의 손 끝에 걸리게 된다. “향수를 뿌려서 집을 지”은 것마냥(「Åhus」) 쉬이 부서지려는 말들은 아마 “나라는 나라”(「밤」)에서 온, 오직 한 사람만이 능통한 모국어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쟤네나라사람”이다. 스스로만 알고 있는,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역사 위에 재건된 각자의 모국어를 발화하는 한, 우리 모두는 서로의 “쟤네나라사람”이 될 운명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 나라말을 몸에서 벗겨내는 일”이라면, 생경한 언어를 입고 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읽기는 무엇이라 칭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또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라면, 타인의 언어를 더듬거리며 나의 한계를 감각하고 그의 가장 내밀한 공간으로 들어가려는 몸부림에는 어떠한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 것일까. 그 집의 구조는 미궁과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이지만 그 안은 짐승의 내장처럼 복잡했다. (중략) 집의 크기는 무한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는 무한하다. 어린 우리는 집 안에서 길을 잃으면서 마음에서 피를 흘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하고 따뜻한 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걸으면서 그것을 되찾으려고 해보았지만 그럴수록 중심에서 멀어졌다. 멈추어 있으면 집 그 자체가 움직이면서 우리 주위를 맴돌았고, 우리는 우리가 되었다.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멀리 떼어놓고 있었다. - 「망치의 방」 부분 박술의 『오토파일럿』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일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 사유한다. 모든 이들은 이방인의 신분으로 산다. 고국을 떠나 독일 땅을 밟았을 어느 날의 박술만이 이방인이 아니며,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으로 남은 채 서로의 집을 헤매는 이방인의 처지를 우리 모두가 타고났다. 이런 우리가 “길을 잃을 수 있는 가능성의 수”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누군가의 집을 거닐 때, 사람들 사이로 어떠한 원심력이 작용하게 된다. 세계의 중력과 구심력을 무화시키고 “누군가에게 절을 올리고 싶”(「윤회」)게끔 하는 이상하고도 숭고한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눈먼 언어의 집”(「바실리카타 여행기」)을 배회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누가 집주인이고 방문객이랄 것도 없이 집안을 마냥 감돌던 우리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선다. 「망치의 방」은 “미궁”과도 같게 느껴지는 이 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뜻모를 곳이다. 이 방의 막대한 부피는 마치 소설 같기도 하고, 오래된 괴담 같기도 하다. “기억이 다가오면 기억을 쓰고 생각이 다가오면 생각에게 지면을 내어주고자”(「산문」) 했다는 글. 혼란한 공간에 놓인 언어들은 시집의 제목인 “오토파일럿”에 의해 기술되기라도 한 것처럼 산만하며 방대하지만, 그곳에서 박술이 세상을 감각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얻어볼 수도 있다. “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너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어 가지는 일이라는 것”. “망치”가 은유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내기란 어렵겠으나, 분명한 것은 망치의 본질은 부수는 일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방인을 나의 안으로 초대할 때, 우리는 그만을 위한 망치를 만들게 된다. 그 망치로 내려치게 될 대상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즐거운 나의 집 한 귀퉁이를 허물고 그가 들어올 구석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즐겁다. 한계의 지평선을 넓히며 “백만 개의 어둠”(「휘어진 빛」), 그 미지의 가능성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로부터 존재와 불가해와 사랑이 태어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두워질수록 너에게 가까워진다는 감각”(「횔덜린 변주곡 6」)에 몸을 맡긴 채 이 희미하고 까다로운 무중력에서 기꺼이 휘청거리는, 우리. “은어로 지은 집”(「페를라흐 Perlach」)을 누빌 때의 우리는 이제 절대적인 이방인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방황하는, 오토파일럿 모드의 비행사가 된다.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건너편의 세계에서, 진공 상태를 뚫고 반가운 소리가 전해진다. “있지, 잠결에 한국말이 들려왔다. 언제 거기에 한번 데려다줘”(「망치의 방」). * 초록이 무성해지는 집과, 뜻모를 언어가 부유하는 집. 차현준과 박술이 내보인 첫 시집으로부터 우리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세계의 안과 밖을 허무는 작업임을 다시금 감각한다. 바깥에 서 있는 당신을 나의 안으로 초대하고 당신을 위해 나의 안을 바깥으로 꺼내어놓을 때, 경계는 희미해진다. 흐려질지언정 아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대신 우리의 사이에 탄생한 새로운 만유인력을 나와 당신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 “한 번도 안 적도 온 적도 없었던 곳”(차현준, 「대저택」)을 궁금해하며 자꾸만 그 이상한 집으로 향하게 되는 발걸음은 기이하다. 그러니, “지금, 여기말에, 자기말을, 내어주기”(박술, 「도움닫기 없이 날기」). 자리를 내어준다는 것은 고립되어 꽉 닫혀있던 나를 조금 허물어 나와 당신이 먹고, 자고, 사랑하며 무성해질 곳을 마련하고 싶다는 뜻에 다름 없을 것이다. 안과 밖, 나와 당신의 가운데에 놓인 ‘우리’의 집은 침범과 침입을 반복하며 기이하게도, 무한해진다.
요새 내가 붙잡고 있는 질문은 '자기 자신을 시에 얼마나/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 혼자 생각해낸 질문은 아니다. 시 창작 클래스에 온 수강생 중 한 분의 질문이 먼저 있었다. 그 질문은 "시에 자기를 얼마나 드러내는 게 좋은가요?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야 할까요?"였다. 정량적으로 총 행의 십 퍼센트만 드러내세요라든지 어느 곳에도 절대 드러내지 마세요라는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고정된 외형이나 내용이 정해진 것은 문학이 아니지. 시도 아닐 것이다. 질문하신 분도 그런 정형화된 답을 원하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일단 시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묻는 수밖에. 나는 나의 시에 나를 얼마나 드러내고 싶어하나. 어느 정도까지 나를 보이려고 하나. 친한 친구에게 하듯 시시콜콜한 것들 다 나누려고 하나. 한집에 살지 않은 지 오래된 가족에게 그러듯 좋은 것만 보이려 하나. 매일 보는 직장 동료처럼 사회화된 나의 일면만 보이려고 하나 등등. 그러나 곰곰 생각해볼수록 시는 친구도 가족도 직장 동료도 아니다. 은유법을 활용하여 시를 친구처럼 연인처럼 대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엄밀한 차원에서 시는 실체 없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람에 따라 특정한 관계를 맺듯 시와 관계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가 말없는 친구 같다거나 전 애인 같다거나 등등의 비유들이 뜻하는 바는 결국, 비유의 성질이 그러하듯 둘의 유사성만큼이나 둘의 차이점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위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시가 요구하는 만큼 나를 시에 주고 싶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드러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완전히 감췄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나는 늘 나를 내놓겠단 마음을 먹는데 시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다 못 쓰는 것에 가깝달까. 시인으로서 나는 시의 자체적 흐름에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어서, 거의 수동적으로 보일 만큼, 철저히 무의지적으로 보일 만큼, 나를 주고 싶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나를 도구이자 수단으로 쓰고 싶다. 버려져도 아까워하지 않게 일단 줘버리는 것이 포인트다. 그러나 나의 이 답은 다소 장황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가 요구하는 만큼'은 좋게 말하면 시의 자율성을 은유하는 표현이고 나쁘게 말하면 시인의 무책임을 은유하는 표현이므로, 시 창작을 신비화하는 표현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주장하자면 시 창작에는 모종의 신비가 있다. 시인의 의지를 배반하면서 시인의 바닥까지 요구하는 시의 무시무시함에 반응하는 것에서 나는 이 신비를 본다. 이 무시무시함에 저항하는 길도 있고, 순응하는 길도 있는 듯하다. 어쩌면 나는 늘 전부를 내놓고 싶다고 생각하고 대개는 내놨다고 착각하며 매번 실패하는지도. 결론적으로 나는 나를 보이지도 나를 감추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시를 쓰고 있는 거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구구절절 수강생분께 답하는 것이 좀 면구스러웠다. 그래서 위의 생각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더듬더듬 대답했다. 개인적인 것은 모두 사회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일단 쓰세요. 그러나 퇴고하면서 내가 쓴 '나'의 말이 시의 흐름을 답답하게 한다면 빼세요. 혹은 내가 숨기고 싶은 말일수록 시에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수수께끼를 만들지 마시고 그냥 단순한 말로 써보세요. 숨길수록 시가 답답해져요. 숨기지 마세요 등등. 굉장히 모순되는 두 요구(빼세요/드러내세요)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내밀어 수강생분을 더 혼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시는 원래 혼란 속에서 혼란 그 자체이기도 한 법이므로, 내 말이 아주 틀렸다 말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문제는 김복희의 '나'로부터 시작하려는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단 길은 하나다. 다른 시인들이 한 것을 보자! 남들은 어떻게 썼나 짚어보는 좋은 길을 안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시대 시인들이시여, 자기 자신이라는 문제, 어떻게 쓰고 계시나요. 이새해, 『나도 기다리고 있어』 시인의 첫 시집인 『나도 기다리고 있어』(아침달, 2025)는 두둑한 시집이다. 어째서인지 그런 인상이 들었다. 3부 구성에 51편이라 낯설지 않은 구성임에도 그랬다. 시 편편의 길이가 긴가 하면 아주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두둑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 느낌에 대해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시집에서 실제 시인으로 짐작 가는 '나'에 대한 혹은 '나'의 느낌에 대한 감각적 소회가 많은 경우 시집을 두둑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시인의 진짜 일화가 튀어나온다 싶을 때, 그러니까 소위 이건 진짜 시인의 이야기인 것 같다고 느낄 때(시인을 붙잡고 이거 당신 이야기 맞냐 아니냐 이런 식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것이 시집 전반을 아우르고 있을 때. 오랫동안 나는 시에 등장하는 '나'와 시인을 분리시키는 읽기 방식에 능숙한 편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나도 기다리고 있어』를 읽는 동안, 시집에 등장하는 '나'와 시인 이새해를 구별하지 않았고 억지로 분리시키려고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새해 시인과 일면식도 없으면서 그랬다. 시의 많은 부분에 돌이켜 생각해보는 느낌, 그때 봤었던 것을 지금 다시 보고 그때 그건 뭐였을까 궁리하는 느낌이 있어서? 이것이 '나'라는 자의 기억을 샅샅이 함께 보는 느낌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구축할 수도 있었을 특정한 캐릭터성을 부각시키려는 느낌이 아니어서? 시인과 '나'의 성별이 다르다는 느낌이 없어서? 시집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조부모에 대한 묘사, 죽은 친구에 대한 묘사,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묘사 또한 시인의 실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나는 시를 읽으며 시인이 시에 쓴 일화들이 시인의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시 모두 시인이 정말로 겪은 이야기는 아니고, 겪은 일에 대한 창조적 변용일 것이다(왕인박사라고 이름 붙인 누군가가 업히는 시 「업고 업혀라」든지). 하지만 시에 등장하는 사건이 모두 시인의 실화가 아니라면, 시의 가치가 훼손되는가?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시집 속 이야기를 모두 시인의 이야기라 겹쳐 읽는 게 가능해지자, 독자인 나로서는 시 읽기가 훨씬 수월했다. 내가 거부감 없이 화자의 자리에 가 함께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화자가 마냥 자기 자신의 넋두리를 하는 방식으로 시를 끌고 가지 않아서였다. 이새해 시인은 어떤 일을 화자의 입장에서 '다시 보는' 시인이다. 그 자신의 입장에서 외치는 시인이 아니라. 그렇기에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슬펐는지 괴로웠는지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보았던 얼굴을 다시 본다. 독자에게도 보여준다. "이새해의 시에는 얼굴이 있다. 몸이 없는 얼굴, 몸을 구하는 얼굴, 말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얼굴, 잊히는 얼굴"(홍성희 해설, 「지키는 약속」, 161쪽) 등등의 얼굴을, 이새해 시인의 화자가 보고 있는 것은 평론가 홍성희가 언급한 것처럼 누군가의 얼굴(들)이다. 얼굴은 실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실체다. 실생활에서 얼굴은 많은 말을 해주는 듯싶지만,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 얼굴에는 표정이 있기 때문이고, 그 얼굴을 우리는 하염없이 한정 없이 고정시켜둔 채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얼굴은 표정과 함께 시시각각 달라지고, 그 얼굴처럼 나의 얼굴 역시 함께 시시각각 달라진다. 때문에 서로의 추측과 상황이 구성하는 맥락 속에서 순간순간만이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새해 시인이 시에서 보여준 얼굴을 따라 독자인 나 역시 화자 '나'가 하듯 타인의 얼굴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시시각각 변했던 얼굴 중 '나'가 인상 깊게 느꼈던 한 순간을 오래 그려보아야 했던 점 때문에, 그 순간이 너무나도 묵직해서, 내겐 이 시집이 그토록 두둑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는 다시 아이의 이름을 짓기로 한다. 좋은 이름이 나오면 칭찬을 하고 우스운 이름이 나오면 웃음이 터진다. 이름마다 다른 얼굴이 떠오른다. 볼이 통통한 애. 눈이 사나운 애. 날 닮아 이목구비가 납작한 애. 이상하지. 새로운 이름이 바닥나도 아이들의 얼굴은 계속된다. 광장을 채울 것 같다. 다리가 흔들리고. 힘없이 흔들리고. 나는 발끝을 보다가 침을 삼키다가 바닥을 본다. 바닥에 안긴 햇빛은 공평하다. 옥상에서 떨어졌던 찬규에게도 내리쬐고 있었다. 너와 내가 낳을 아이. - 「미관광장」(70쪽) 중에서 인용한 작품은 세 편의 동명의 시 「미관광장」 중 첫 번째로 실린 것이다. 현재 일산문화공원으로 불리는 넓은 공원의 옛 명칭이다. 이 시의 '나'는 기뻐하기만 할 수도 슬퍼하기만 할 수도 없다. 태어날 아이에게 이름을 주는 일과 얼굴을 상상하는 일이 죽은 '찬규'라는 친구를 떠올리는 일과 병치되어 있기에 화자의 상황과 꼭 같은 상황을 내가 겪어본 적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하지만 독자인 나도 화자 '나'가 얼굴들을 떠올리며 겪는 감정의 부침으로 잠시 들어가볼 수 있었다. 뭐라 말하지 않고 다만 얼굴을 상상해본다. 미관광장 한 귀퉁이에서. 진수미,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시인과 시의 화자가 겹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만한 시집으로 또 하나, 진수미 시인의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문학동네, 2024)를 고르고 싶다. 이새해 시인과는 또 상당히 다른 결이다. 이전 시집 『밤의 분명한 사실들』(민음사, 2012) 출간 후 햇수로 십삼 년 만에 출간된, 실로 오래 기다린 시집이다. 지금 나는 진수미 시인의 시를 읽으며 습작을 했던 시기를 떠올리고 있다. 습작 중 내가 읽었던 진수미 시인의 시는 자유로움! 온통 자유로움! 이었다(감탄 및 경이를 느꼈다는 심정을 표현하고픈 의지 때문에 문장 중간에 느낌표를 찍어야만 했다). 이렇게 써도 돼요?(이건 좀 별로 아니에요?)라는 어리숙한 내 자문에, 매번 진수미 시인의 시는 대답해주었다. 왜 안 돼?(이게 별로라는 네 선입견을 깨라. 도끼로 꽝. 부서진 다음에 다시 써라.) 진수미 시인의 시는 시를 쓸 때는 뭐든 써도 된다는,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든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든 그것에 얽매이기 이전에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즐거움을 내게 알려주었다. 천진해도 된다는 것, 능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관능적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등등. 여자라는 종으로서 느끼는 피로감에 대해서든, 사회에서 마주하는 온갖 사건 사고에 대한 즉각적 반응에 대해서든, 그러니까 금기시되는 것이든 금기시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든 뭐든, 머리로 이성으로 진단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감각대로 써도 된다는 허용이었다. 가감 없이, 맨 목소리로 쓰기, 그것이 표출하는 에너지를 감각하는 것이 즐거웠기에 이번 시집도 기대했으며,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판사님, 이 글은 제가 쓴 게 아닙니다. 저희 집 고양이가 쓴 것입니다' 밈이 떠오르는 시집 제목부터가 그랬다. 어쩌면 진수미 시인은 저 밈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말로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들이 대개 주인의 컴퓨터 키보드 위에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고 제목을 지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들 어떠랴? 젊은 시인에게 눈더러 보라고 흰 눈에 기침을 하라며 일갈하던 김수영처럼, 우리들에게, 우리들 젊은 시인들에게 혁명적으로, 혁명이 뭔지 거창하게 말하려 고양이 털 때문에 기침을 하듯이, 일단 기침부터 터뜨려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여기, 털피지의 기적」) 또한 시의 자유 아니었던가? 김수영이 말했던 '자유의 과잉, 혼돈'(「詩여, 침을 뱉어라」) 중에는 진수미의 것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문학에, 시에, 작품에 등장시켜야 할까. 정답은 없다. 하지만 내게 질문을 주었던 수강생 포함 많은 여자들은 생각한다. 이건 너무 사소하지 않은가 하고, 혹은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을 써도 될까 하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시에 쓴다고 할 때 당연하지만 꼭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사건이 주는 충격으로 비롯한 감각이나 생각 또한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시에 등장할 수 있다. 아침이 왔다 물 한 컵 마시고 고양이 밥을 주고 스트레칭하고 더없이 좋은 시작이었는데 뼈가 부러졌다 모든 게 망가졌다 광장에 들렀다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한 약속 동강난 연필심처럼 어디론가 굴러갔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움직일 수가 없다 엉뚱하게 사지가 부푼다 .. 내 것이 아닌 거 같다 아프다...... 아프다...... 의사가 상처를 두드리며 물었다(..) 통증에 계단이 나 있다면 고통의 나선계단을 다 같이 오를 수 있다면 더 높이 서 있는 당신을 향해 고개 젖힐 것이다 당신 얼굴에 무언가 흐른다면 그것이 여름비처럼 살갗을 두드린다면 용암처럼 얼굴을 녹인다면 우리는 다 같이 아프다 아프다 외칠 것이다 고통으로 몸 비틀 것이다 - 「푸른 잎 우주_20140416」 중에서 인용한 시는 평화로운 어느 날 아무런 전조도 이상도 없이 뼈가 부러진 화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내용을 다룬다. 사건성이 없는 부상이랄까. 하지만 제목의 2014년 4월 16일은 세월호가 가라앉은 날, 잊을 수 없는 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날이다. 화자의 "부푼다" "아프다"라는 말은 온전히 뼈가 부러진 자기 자신에게 할당된 말이면서 실은 바다에서 희생된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아픔 때문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아프다...... 사건 당시 무지했던 내가 떠올라 다시 아프다. 어떤가. 자기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은 결국 '나'의 생활에 더해 내 둔감함 역시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앞으로 나는 이렇게 생각한 걸 그대로 써도 돼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진수미 시인의 시를 보여주리라. 왜 안 되겠어요? 우리에게 부족한 건 생각도 생각이겠지만, 생각한 걸 쓸 수 있는 용기다. 김연덕,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 용기 하면 또 빼놓기 어려운 시집으로 『오래된 어둠과 하우스의 빛』(현대문학, 2025)을 꼽아야겠다.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 일부를 이미 월간 『현대문학』의 핀 시리즈 전재로 먼저 읽은 바 있다. 당시 읽었던 시들 중 내 기억에 선명히 남은 것은 두 편으로, 어린 시절 키웠던 강아지의 죽음을 다룬 시 「천국의 개들」과 온 식구들의 옷을 맡겼던 세탁소 이야기가 등장하는 시 「messy old laundry」였다. 시를 읽자 김연덕 시인을 만나며 들었던 가족에 관한 일화들, 꽤 오래 살았다고 들었던 집에 관한 일화들이 떠올랐다. 한 사람의 시인이 자신의 유년을 시집 한 권 분량으로 구성하는 것이 어디까지 가능할지 기대가 됐다. 김연덕 시인은 그가 대가족과 오래 살아온 집 부암동 338-43번지를 중심으로, 어린이였던 자신과 어른이 된 자신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시집 전반을 구성했다. 어린 사람의 시선만으로 전개되거나 어른의 시선만으로 전개되지 않는 점이 그답다고 느껴졌다. 어린 사람에게 지금과 같이 유창한 언어가 있을 리 없으니 해소되지 않는 어둑한 부분이 시 부분 부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어두운 부분은 다시 어른의 시선에서 보면 마냥 어두운 부분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져 촘촘한 언어로 다시 써야 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연덕 시인은 훼손이라기보다 유지 보수한 향수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아름답다. 현재 통용되는 '아름답다'라는 의미 그대로, 누구도 이 시집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김연덕을 한 번 본 적 없이도, 그 개인에 대한 호감이 발생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집일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편편의 아름다움은 물론 떠나온 집을 파본이라는 은유로 이해시키는, 있었던 공간 속으로 들어가고 나감이라는 시집의 전체 기획과 구성에도 감탄했고 참 좋다고 느꼈다. 조부모와 형제자매들에 관한 시가 특히 좋았다. 아마 몇 편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덜 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더 읽고 싶어요. 더 내놔요. 더 있잖아요. 떼를 쓰고 싶을 정도로, 지금 그 언니 오빠 자매는 무얼 하고 있나요. 조카들도 그 집에 들른 적 있나요. 어머니 아버지는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요. 엄청 친한 이웃이라도 된 듯이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인은 이런 효과를 원하지 않았겠지만. 우리 집 마당에서 가장 예민하고 투명한 껍질로 이뤄진 사랑인 앵두를 따러 갈 때마다 어린 나는 가족들과 함께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곤 했다 바구니는 짜임이 너무 흔하고 성기고 가벼워 날아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얇은 영혼마저 담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바구니를 집으로 들고 가는 사이 잠에서 덜 깬 어린 영혼과 앵두 중 무엇이 먼저 떨어질지 즐거워하고 아슬아슬해하며 껍질이 부드럽게 터져 죽는 형태를 상상하면서 수많은 미래의 사람들과 사랑하고 본 적 없는 마당에서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 「앵두 따기」 중에서 마당에 있는 앵두를 온 가족과 따던 일화가 담긴 시다. 시인이 자기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펼쳐놓으면, 유령 가족처럼 거기 끼고 싶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집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상처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졌다. 시인이 자신의 이야기 위에 비춰둔 빛과 그림자 아래 어떤 더께가 더 있는지 읽는 사람은 모른다. 시인이 시집의 내용이 전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내세웠기에 거기까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시인이 보여준 빛과 어둠의 구상을 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 외로운 영혼들은 아름다워 보이는 가족을 바깥에서 지켜보는 고아가 된 것처럼, 이 시집 바깥에서 서성대고 있을 거라는 다소 과한 상상을 했다. 이 상처는 시인이 의도한 바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시집은 아주 조심스럽게 나쁜 것들은 거의 없이,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애씀으로 가득하다. 시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의 가족들에게조차 얼마나 언어를 섬세하게 썼는지 감탄할 정도로. 아마 모종의 독자들이 받을 상처는, 사실 김연덕 시인의 시집 자체에서 기인했다기보다 김연덕 시인의 시집에서 촉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상상으로 빚어진 유년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문학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실제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면 밀려오는 복잡 미묘한 기분이 있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그리워하는 유년, 이런 유년이 내게도 있었다면 싶은 유년, 평행 유년 같은 것...... 등등의 감상 작용이 밀려오면서, 왜 이 시집을 읽고 슬퍼지는가 이해하지 못하여 괜히 김연덕 시인과 시집을 탈탈 털며 고통받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이 시집이 좋은 것이다. 상처를 주는 책은 생각보다 드물다. 상처를 주는 시집은 더더욱. 상처 위에 새살이 돋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쓴다는 것에 대해 나름의 힌트를 얻으시기를 바란다. 김연덕 시인의 용기를 배워서. 시는 일인칭 장르라고 한다. 고백의 장르라고도 부르고, 내면의 독백에 유용한 장르라고도 한다. 특히 주어가 없어도 되는 한국어 문장의 특성상, 주어가 없는 문장은 거의 '나'라고 하는 숨은 화자의 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시에 등장하는 모든 말은 '나'라는 자의 말일 것인데, 시인이 곧 '나'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소 연극적인, 퍼포먼스적인 것이라고 상정하면 조금 이해에 닿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역을 맡은 배우가 곧 그 배역은 아니듯이, 시인 스스로의 일화를 시에 활용하고 있다면 시인이 그 자신을 배역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출간된 시집 대부분을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읽었다. 확실히 독자로서 독해가 아니라 창작자로서 독해였다. 시가 독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나'의 활용을 경유하는지 아닌지, 혹시 '나'를 활용하고 있다면 그 '나'가 시인을 활용하는지 아닌지 등의 창작 방식에 초점을 맞춰 읽은 까닭에 덜 읽은 느낌도 들고 더 읽은 느낌도 든다. 그중 일부를 내 창작에 응용할 수 있을까 가늠해보기도 하고, 시 창작 수강생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하나 더 다루지 못한 질문에 대해 말하며 시 읽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앞서 시에 드러나는 '나'에 대한 언급 모두 언어가 대상을 완전히 포착할 수 있다는, 언어와 대상의 일치성을 전제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는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고, 언어는 대상과 불일치하는 것을 속성으로 가지므로 시란 불일치를 표현하는 예술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속성상 시에서 '나'를 보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획이 아닐까? 아니면 이런 대전제를 뚫어가며 '나'를 표현하는 시가 있을지도? 그것에 도전해야 할지도? 그것을 보여줘야만 할지도? 어렵다.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내게 좋은 수가 있다. 존 버거가 말한 적 있는데, 질문을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이 질문하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1) 나는 존 버거를 흉내내어 시 쓰는 것이 질문하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시인들이 어떻게 썼나 물어보거나 읽어보고 나도 시를 써보는 것이다. 같이하실 분들을 늘 구하고 있다. 1) “나도 〈그랑블루〉라는 영화를 본 기억이 나는구나. 내 기억이 맞다면, 수면으로 돌아가지 말고 거기 깊은 곳에 머물라고 두 프리다이버를 유혹한 것 중에는 침묵도 있었지. 그러니 우리에겐 소음과 침묵이 있구나. 소음은 설명을 덮어버리고, 침묵은 계속해서 현재를 따져 묻는 질문들을 내놓지. 둘 다 온전히 살아 있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아. 무엇이 도움이 될까? 아마도 '질문하기'겠지. 그리고 질문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씩 계속해서 질문을 하는 거야. 질문하기의 역설은 질문하는 사람이 답을 찾거나 답과 마주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에 있어. 일종의 신념이지.”(존 버거, 이브 버거, 『어떤 그림 -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편지』, 신해경 옮김, 열화당, 2021, 41쪽)
1. 글자들을 연달아 읽는다. 또는 연이어 쓴다. 복수의 단어나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연결한다. 이 일을 거듭하다 보면 글자와 마주 접촉하기 어려워지는/괴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여기서 ‘글자’란 문학으로 불리는 텍스트뿐 아니라, SNS 안에서 빠르게 휘발되는/스크롤되는 게시물이나 우연히 들른 장소의 벽에 부착된/전시된 글 역시 포함한다.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매 순간 글자와 공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글자를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글자 역시 나를 읽지 못해 버벅대는 것 같다. 글자와 내 사이 공간이 흐려지는,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제대로 벌어지지 못하는 느낌은 여러모로 불쾌하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체 자체가 글자를 거부하는 듯한 현상이다. 드물지만 종종 읽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다. 몇 문장을 연달아 따라가는 것만으로 눈이 아프고, 머릿속에 지진이 일며, 눈과 뇌 사이에 놓인 통로가 복잡하게 뒤틀린다. 비슷한 순간이면 겁이 난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되면 어쩌지? 어떤 글을 읽어도 감정의 동요는커녕, 책 읽는 지루함과 싸우는 일에도 번번이 패배하게 된다면? 글을 읽는 것이 가장 즐겁고 흥미로운 시기는 내 삶에서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후 오래도록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내게 의무적인(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행위이자 그럼에도 분명히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일, 그러므로 계속해서 뛰어드는 사건이 되었다. 이 같은 점에선 걷거나 헤엄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길 위나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매번 번거롭고 피로하며, 직접 움직이는 순간도 썩 신나진 않지만, 행위를 끝낼 즈음에는 매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을 구성하며 또한 지탱하고 있다고. 따라서 글자를 읽는 것이 내게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더 나아가 도무지 불가능한 행위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슬그머니 두려워졌다. 이것 없이 살아갈 결심을 여러 번 반복했어도, 이 일 없이 살아가는 미래는 여전히 흉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글과 내가 맞부딪히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에 어떤 칼/스파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나 근래 읽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이같은 나의 섣부른 고민이나 두려움, 지루함 등을 금세 허물었다. 더불어 내 안에 놓인 줄도 몰랐던 여러 천장과 기둥 그리고 바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2. 한국어로 책을 읽게 된 이후, 그리고 ‘한국문학’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조금씩 접하기 시작한 이후, 근래처럼 한 작가의 이름이 여러 플랫폼에서 오르내리고 또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토록 큰일이었으며, 다양한 시사점을 갖고 우리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독자·편집자·작가를 비롯한 주변 ‘문학인’들의 SNS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한강 작가와 책의 사진을, 작가의 인터뷰나 낭독 영상이 담긴 뉴스를, 그의 소설이 전하는 역사/참사를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의 수상 소감이 각종 글에 인용되어 퍼져나가는 모습 역시 보았다. 몹시 많은 글자였다. 각 글자가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울림도 분명 있었으나, 그 울림의 형태를 살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글이 밀려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 읽지 못한 그의 책 한 권과 독대하는 방식으로 이 위기를 거쳐나가고자 마음먹었다. 하나 책장을 펼친 후, 나는 몇 번이고 독서를 멈춰야 했다. 문장들이 쌓일수록 숨이 막혔고 종래에는 몸 안쪽 어딘가가 허물어졌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보다 ‘덜 괴로운/어두운’ 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책은 내가 그간 읽은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과 시, 산문만큼이나 괴로웠다. 혹은 그보다 더욱 힘겨웠다. 『희랍어 시간』의 두 화자는 어느 날 말을 잃은 ‘그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기 특수한 삶의 맥락에 놓인 두 개인의 몹시 사적인,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또 세계를 마주한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거시적인 혼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놓이기 이전, 그리하여 세계의 입술과 눈꺼풀을 거침없이 만지던 짧은 유년기가 끝나면 삶은 도리 없이 복잡해진다/부풀어오른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타인의 신체처럼, 작동 방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괴물/기계의 몸처럼. 언어도 그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을 털어놓다가도 문득 미시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언어 하나하나가 지닌 밀도가 문득 실감나고, 그것들이 어긋나며 생기는 폭발이 보인다. 멀미하지 않으려면 언어의 밀도를 아예 모른 척하거 나, 폭발에 무뎌져야 한다. 이는 이미지/형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보는 것, 그리하여 인지하는 행위는 간혹 그 자체로 칼이 된다. 내가 방금 찔린 자국을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범이 시작된다. 세계 속에서 무엇이 넘쳐흐르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넘쳐흐른다. 『희랍어 시간』은 이 홍수에서 침묵하거나 눈 감은 이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침묵하거나 눈 감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 시작점은 고요와 어둠을 그저 부재로만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점차 어두워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사랑과 관계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고, 그녀는 자신의 침묵을 진단하고자 하는 의사에게 거듭 말한다/적는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11쪽) 3. 말을 잃고 빛을 잃어가는 두 인물의 손안에 희랍어가 있다. 낯설고 오래된 언어. 수동태와 능동태 대신 재귀적으로 주어 자신을 향하는 제3의 태를 지닌 말.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26쪽)을 갖춘 채 쓰이던 언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와 소리로 오간다. 희랍어의 중간태/재귀태는 문맥에 따라 주어가 동작에 참여하는지, 혹은 동작이 주어에 가해지는지 등의 여부를 표현한다.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형식처럼, 희랍어를 사이에 둔 그녀/그는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 날로 더해가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거나, 손바닥에 느리게 글자를 적어가는 방법을 터득한다.『희랍어 시간』은 망가진 세계를 복원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제자리로 돌려두지 않는다. 다만 무너진 자리에서/눈 감거나 침묵한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령 끝없이 어긋나는 접촉,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하여 이어지는 언어 같은 것. 다만 이 소설과 독대한 이후 무너진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괴로운/외로운 경험만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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