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2026 한국문학 비평포럼 2부
누가 읽는가 : 베스트셀러와 플랫폼 ― 김영삼, 노태훈, 박혜진 평론가
「2026 한국문학 비평포럼」2부
누가 읽는가 : 베스트셀러와 플랫폼
― 김영삼, 노태훈, 박혜진 평론가
2부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역동적인 문학 독자의 모습을 비평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양한 플랫폼 사이에서 문학 작품을 선택하고 향유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독자를 끌어들이는 낯설면서 동시에 낯익은 베스트셀러의 등장은 어떤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지금 한국문학은 누구에게 말을 건네고 ‘자기’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김영삼 지금부터 2026년 한국 문학 비평포럼 2부 세션 시작하겠습니다. 2부에서는 “누가 읽는가? & 베스트 셀러와 플랫폼”을 주제로 이야기 나눠 볼 예정인데요. 저희 간단하게나마 소개를 하고 시작해 볼까요? 저는 광주라고 하는 남쪽 마을에서 강의하고 글 쓰고 있는 비평가 김영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혜진 안녕하세요. 저는 민음사에서 문학 책을 만드는 편집자이고요. 비평 활동을 같이하고 있는 박혜진입니다. 반갑습니다.
노태훈 네, 오늘 2부에 참여하게 된 문학 평론을 쓰고 있는 노태훈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따로 사회나 진행을 두지는 않고 각자 생각하는 소주제를 돌아가면서 말씀드리고, 이후에 함께 대화를 나누는 형태로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김영삼 선생님께서 먼저 시작해 주시겠습니다.
김영삼 네, 저희 2부 주제가 ‘베스트셀러와 플랫폼’인데요. 비평의 재료는 어찌 됐든 작품이잖아요. 그래서 2025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읽혔던 작품들을 한번 꼽아보고, ‘그 작품들이 어떤 점에서 읽혔을까, 왜 읽혔을까?’를 생각해 보는 차원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신 분들이라면 한국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은 독자님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다들 1년 동안 어떤 작품집을 가장 좋게 생각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성해나의 『혼모노』는 1부에서도 이야기되긴 했었는데, 제 개인적으로 작년 상반기 초에 여러 작품집들을 읽으면서, ‘상반기 최고의 작품집은 김지연 작가의 『조금 망한 사랑』인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해나의 『혼모노』를 읽었는데요. 소설들이 따로따로 발표되었을 때보다 작품집이라는 집합점으로 묶였을 때 하나의 성좌가 그려지잖아요.
다른 시간에 쓰이긴 했지만 하나의 별자리로 묶이는 것 같아서 이 작품집 속에 나온 『혼모노』를 보았을 때 ‘어라 이게 더 좋은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좀 들었어요. 박정민의 추천사가 괜한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아, 이 작품이 정말 많이 읽혔다’라고 피부로 느낀 건 저희 집에 책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극구 책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저의 딸이 “아빠 『혼모노』 있어?”라고 했을 때인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하니 “친구들이 다 읽더라” 해서 딸에게 책을 빌려줬습니다. 확인해 보니까 아직도 안 읽었더군요. 어찌 되었든 이 정도라면 많이 읽힌 건 분명하다는 생각이 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혼모노』를 쭉 읽어보면서 결론적으로 뭐가 좋았는지 제 스스로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작가는 한국 사회의 ‘진짜 같은 가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넘어서면 ‘악의 연대기, 가짜들의 연대기. 이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제 나름의 혐의점을 가지고, 이걸 추적해 보기 위해서 그 이전의 작품집들도 한번 살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볼 때 발표 순서를 따라서 읽어봅니다. 그랬을 때 흐름이 좀 보이기도 해서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 작가가 악의 연대기를 쓰고 있다’라고 하는 첫 번째 증거는 지난 작품집이었죠.
『빛을 걷으면 빛』이라고 하는 작품집에 실려 있는 작품 중에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내용을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한 어느 큰 부잣집의 생일잔치에 화자가 초대됩니다.
이 조부의 생일에 세레머니를 위해서 집안의 가보처럼 내려오는 도검(칼)에 대해 감별사를 불러서 ‘진품명품 쇼’를 해보는 것이었죠. 그런데 감별사가 감별해 보니 이건 진품이 분명한데, 과거 조선총독부에서 친일 행각을 치하하면서 내린 도검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죠. 그 순간 그 감별사에 대한 서사는 소설에서 삭제가 돼 버립니다.
그래서 제목 「소돔의 치밀한 혈육들」처럼 소돔의 고모라가 상징하는 어떤 비윤리성과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 혈육들 간의 암묵적 카르텔과 같은 것을 재미있게 보여주는 작품이었고요. 제 기준에서는 ‘악의 연대기’의 시작이 이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추적해 보니 이번 책에서 묶이지는 않았지만 「벚나무로 짠 5자 너비의 책상」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이것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범람으로 짠 책상 자체가 가보처럼 내려오는데, 이것도 역시 친일의 흔적이었고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원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덮어둔 채 이것을 쭉 가꾸고 또 다듬고 자랑하는 그런 가문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보자면 권력과 결탁하여 부와 명예의 본원적 축적을 이룩했던 대한민국에 성공한 가문들, 그들이 가족주의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 비민주주의와 함께 고착화되면서 자신들의 자본 권력과 정치권력을 세습하고 있고, ‘성해나 작가는 이것을 파헤치고 있는 것 같구나’라고 하는 제 나름의 혐의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202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발표된 「신포도밭」이라고 하는 단편이 있었어요. 그 단편은 역시 삼대의 이야기인데 이 삼대는 좀 달리 표현하면 ‘구라쟁이 삼대’ 같아요.
강남 땅에 얽힌 삼대의 욕망을 보여주는데 사실 강남은 아니고요. ‘강의 남쪽’에 있는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삼대는 ‘우리도 강남 사람이야, 나 강남에 땅을 가지고 있잖아’라고 생각을 하면서 사실 한국 사회의 계층적 구조의 중간 혹은 이하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의 에티튜드를 습득, 학습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신포도밭」이라고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앞에 있는 두 편의 소설에서는 3인칭 화자가 그 가문들의 비겁한 연대를 바라보고 폭로하는 차원의 이야기였다면, 「신포도밭」 같은 경우에는 좀 달랐어요. 그들은 성공한 가문도 아니었고 한국 사회의 경계 바깥에 있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류의 문화와 주류의 아비투스를 습득하고 이것을 진짜처럼 생각하는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1인칭의 이야기로 표현됐다는 점에서 좀 달라졌고, 그래서 이 작가가 왜 이런 식으로 계보를 밟아 나가는지를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형성되었던 여러 가지 자본 권력이든 정치권력이든 주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화가 사실은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과정을 통해서 구축되었음이 분명하며, 그것을 그들이 스스로도 알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래 계층의 사람들이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음도 분명한데, 사실 자기 또한 그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고요. 악의 연대기만이 아니라 그 악의 연대기에 함께 편입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사유 방식을 아마 이런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정의정 평론가가 ‘성해나 작가가 문학이 가지 않는 곳, 문학이 있지 않을 것 같은 곳까지 소설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다.’라고 표현을 했더라고요.
그 말에 적극 공감하면서 성해나 작가가 교육, 학문 그리고 무속 모든 영역에까지, 문학이 가지 않는 모든 영역에까지 파묘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현재 성해나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어요. 이제 앞서 1부에서 얘기했던 광장 정치하고도 조금 연결이 될 것 같긴 한데, 그러니까 「길티 클럽」이나 「혼모노」나 「스무드」, 「구의 집」 이런 작품들입니다.
혹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구의 집」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들을 한번 쭉 봤습니다. 이 작품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이 작품들은 당사자가 자기의 서사를 노출하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말했다시피 ‘주류의 문화를 그들이 어떻게 그대로 흡수하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더 중요한 건 가짜뉴스들이 진짜처럼 유통되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광장의 한 풍경이라고 할 때, 가짜뉴스를 말하는 사람들이 ‘내가 말하는 것이 가짜야.’라고 알고 있으면 우리는 그냥 그걸 비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무서울 때가 언제냐면 자신들이 발설하고 있는 정보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판단 중지의 상태에서 스스로 진짜라고 믿고 있는 그 과도한 열정 앞에 노출되었을 때, ‘내가 저 사람들한테 어떤 말을 할 수 있지? 어떻게 설득을 할 수 있을까? 말이 안 통할거 같은데?’라는 엄청난 장벽을 느끼고 그 장벽 때문에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걸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길티 클럽」 같은 경우도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한 영화감독이 있고, 그 영화감독을 우상화하는 이른바 씨네필을 자부하는 사람들, 즉 ‘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공유되고 있는 비밀스러운 정보들(사실은 그 감독이 이랬다더라라고 하는 비밀스러운 정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게 되고, 또 답습하게 되고, 그 비밀스러운 정보를 공유했다는 것 때문에 모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어떤 열정에 노출되며 길티 플레이가 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그 소설이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이때 정말 무서웠어요. 광장의 언어들이 사실은 그렇게 되지 않나요?
동의는 구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광장의 언어들은 그렇게 유통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일부의 사람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정보, 그들끼리 유통되는 하나의 사실인지 진실인지 모호한 하나의 것. 이것이 소수 집단의 정보가 추종자들 집단에게 공유되고, 우리끼리만이 이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하는 모종의 집합 정신에 의해서 어떤 열정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스무드」도 그렇게 읽혔습니다.
「스무드」를 학생들한테 읽혀봤어요. “이 작품 어때?”라고 물어봤더니 학생들이 느끼는 감정 중에 대부분은 좀 불편하다는 거였어요. 뭐가 불편한지 물어보니 “이게 진짜 한국의 모습이 아닐 것 같은데, 인물들이 왜 광장에서 한 손에 태극기 한 손에 성조기, 심지어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들고 있는 풍경과 감정을 가장 한국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너무 안타깝다”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게 바로 성해나 작가가 보여주는 불편함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도된 불편함. 그러니까 1인칭 화자가 당사자의 이야기를 함으로 해서 독자들은 그 경험을 추체험하며 따라가게 되잖아요. 제가 볼 때에는 그들의 이야기가 진짜 같은 가짜인데, 독자는 화자의 경험을 따라가게 되면서 그 진짜 같은 가짜를 진실로 믿게 되는 과정을 성해나 작가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으로 읽었습니다. 혹여 그런 이유 때문에 확연하게 이것을 언어적으로 정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성해나 작가가 많이 읽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성해나 작가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해보자면 혼모노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그거 아닐까요?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뭘 알겠냐만”.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무당이 접신을 한 상태인 것 같은데, 이게 진짜일까, 가짜일까?’, ‘저 어린 무당은 정말로 장수 할머니가 들어온 진짜일까, 가짜일까?’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느끼는 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늙은 무당이 장수 할머니가 접신해야만 어떠한 언어를 발설할 수 있었던 하나의 매개체라거나 그런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었던 것이 아니라, 이제 어느새 장수 할머니가 없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언어가 신의 언어라고, 진실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다면 어떨까? 그게 마지막 접신 상태에서 작두를 타는 장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닐까? 장수 할머니가 아니라 그 늙은 무당의 모습이 아닐까? 제가 그 장수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 ‘그렇게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자기가 괴물이 아니라고 믿으면서 괴물이 되어 가는 사람들, 강남에 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내가 강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과도한 열정이 만들어낸 거짓된 세상과 세계관 속에 녹아 들어가고 거기에 동조하게 되는 그런 것들이 이렇게 표현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구의 집」에 등장하는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들었다고 하는 스승 여재화가 아니라 제자 구보승입니다. 제자 구보승이 스승 여재화가 도달하지 못한 자리에 정말로 목적에 충실한 고문 건물을 만들었던 것이 바로 구의 집이잖아요.
그런 괴물들이 탄생하는 과정들을 성해나 작가는 작가의 목소리라든가 사회·과학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읽히는 게 아닐까’ 아까도 잠깐 언급했지만 저는 광주라고 하는 도시에서 강의를 하고 글을 쓰고 있어서 어찌 됐든 간에 언제나 오월 문학과 자주 연루되기도 합니다. 관련된 강의를 많이 요청받기도 해요.
그러면서 생각했던 제 나름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준이라고 했을 때, 절대적이진 않으나 첫 번째는 이겁니다. ‘문학이 사회적 사건, 그것이 5·18민주화운동이건 4·16세월호 참사건 10·29 이태원 참사이건 간에 사회적 사건에 침묵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그러나 그것이 사회·과학의 언어로 경도되어서는 안 될 것’. 1980년대 오월 문학은 사실 그렇기도 했었기 때문이죠. 세 번째 ‘언제나 현재성을 띨 것, 그러니까 사회·과학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서도 그 사건을 지시하고 그때의 의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현재적 의미로 계속 갱신될 것’. 이게 제가 나름대로 세운 사회적 사건과 연관된 문학을 바라볼 때의 기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성해나 작가는 그런 기준에 부합하는 하나의 사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많은 선생님들이나 독자들이 한국 사회의 어떤 격랑을 겪으면서 그런 것들을 좀 이야기해 주는 작가와 작품을 찾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확하게 ‘이건 이거야’라고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성해나 작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러한 느낌들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좋은 이웃’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그러니까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 뭘까 제 나름대로 꼽아보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책은 뭐지 하면서 쭉 한번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 그리고 정이현 작가의 『노 피플 존』이 하반기에 나오기도 했고, 많이 읽혔던 것 같습니다. 두 작품집에 나온 첫 번째 작품들이 좀 공통점이 있어요. 그러니까 김애란 작가 『안녕이라 그랬어』 의 첫 번째 작품 제목이 「홈파티」라는 것이고요. 정이현 작가 『노 피플 존』 의 첫 번째 작품 제목이 재미있었는데 「실패담 크루」입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이런 느낌입니다.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장소에 누군가가 초대되었다가 결국은 거기에서 퇴장하게 되는 그러한 플롯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좀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 두 작품이 각각의 소설집으로 묶였을 때 제가 느껴지는 감정은 이런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김애란 작가와 정이현 작가가 촘촘한 간격으로 라벨링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계급적 감수성’을 하나의 장면으로 포착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계급적 감수성’이라는 말을 놓고 보았을 때, 감수성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운 단어인데 거기에 붙는 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촘촘하게 라벨링된 그 계급적 차이들을 보여주고 있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시기를 떠나 한국의 서바이벌과 생존의 무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세하게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읽어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그 계급적 감수성이 어떻게 읽혔냐’라고 말할 때 두 가지의 차원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장소성입니다. 아까 말했다시피 초대하는 사람들은 길도 찾기 힘든 어느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거나 뭐 그런 것이죠. 여기에 초대받는 사람들은 일종의 자격 증명을 요구받고 그 자격 증명에 성공했을 때, 크루의 일원이 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소설 두 편의 주인공들은 여기에서 스스로 나가거나 자격 증명에 실패하는 과정을 그린 것 같아요. 그래서 첫 번째로는 장소성이라고 하는 것이 계급적 차이와 계급적 감성을 나누는 한국 사회의 기준인 것 같다고 보았습니다. 우연이겠으나 두 작가는 작품집의 첫 번째 소설들에서 그런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고요.
마지막으로 두 번째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감정의 배제라고 할까요? 정이현 작가의 작품을 보면 화자 또한 여성이고 아이를 키워야 되며, 직장에서 소외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돌봄을 외주화시켜서 조선족 아주머니를 구한 상황인데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그 조선족 베이비시터에게 참을 수 없는 촌스러움을 느끼고, 그를 쫓아내고 싶어 합니다. 쫓아내는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를 따져보면 자신의 히스테리적 감정을 일부러 노출시켰을 때 그 조선족 할머니 떠났던 것 같습니다. 또 베이비 튜터라고 해야 되나요?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여기 와서 우리 아이와 놀아줘’라며 부잣집에 초대가 되는데, 조금 있으면 잘리고 또 잘리고 합니다. 잘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아이가 처해 있는 상황과 아이의 감정에 내가 공감했을 때, 그리고 부모님에게 자신의 감정과 아이의 감정을 노출시켰을 때 ‘내가 거기까지 너에게 돈을 주고 산 건 아닌 것 같다’라고 하는 장벽에 의해서 배제되는 거였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장소성과 감정의 배제, 무감정이겠죠.
무감정을 습득하고, 학습할 것. ‘촘촘하게 짜여진 계급의 선 사이에 서 있는 당신과 내가 감정까지 교류할 필요가 있겠니?’라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너무 단순하게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그 두 가지가 두 작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계급적인 감수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묶어버리면 되게 폭력적이긴 하나 자리가 짧다 보니 이렇게까지 묶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가 계급 사회이냐’라는 걸 떠나서 촘촘하게 나누어져 있고 그 촘촘하게 나누어지는 간격 간격마다 엄청난 욕망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읽은 요즘 한국 소설은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의 이 두 가지를 일단 대표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이제 이 부분에 대해서 두 평론가께서 공감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고 덧붙이실 말씀도 있을 것 같아서 선생님들 말씀 좀 들어보겠습니다.
박혜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최근 작품들을 일별해 주셔서 좋았습니다.
『혼모노』 얘기를 조금 하고 싶은데요. 저도 그 책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면 말씀하셨던 마지막 장면이었어요. 정확히 문장은 기억나지 않고,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 접신해서 하는 행위에서 ‘진짜, 가짜’라는 단어가 나오거든요.
진짜, 가짜라는 말이 작품 전체를 드러내는 단어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1부에서 한영인 평론가가 ‘냉소’라는 단어를 언급해 주셨었는데, 저도 성해나 작가의 소설, 특히 『혼모노』를 읽으면서 냉소라는 감정, 거리 두기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성해나 작품에서의 냉소가 중요한 키워드라고 말하는 데 동의를 하신다면 여쭙고 싶은 질문인데요.
근데 그 냉소라는 것이 판단을 중지하는(거리 두기의) 냉소가 있을 것이고, 또 판단으로서의 냉소가 있을 것 같은데요. 작년 한 해 동안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가 독자들의 많은 반응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의 판단으로서의 냉소이기 때문이라고 보시는지, 하나의 거리 두기로서의 냉소라고 보시는 건지 궁금합니다.
김영삼 판단 중지라고 하는 것이 ‘진지한 사유를 통해서 진리를 탐구해 보자’라고 하는 이야기 속에서 나온 것 같은데 요즘에는 이게 좀 다른 말로도 변용되어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많이 쓰는 ‘중립 기어를 박는다’ 이런 식으로 쓰이는 것 같아요.
저는 이게 상당히 편리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이 현상에 대해서는요 지금만 이야기된 것이 아닙니다. 200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하는데 장정일 작가 또한 기계적 중립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던 기억이 좀 나거든요.
한 사회가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거나 경도되어 있다면 이것을 올바로 잡기 위해서는 그 반대편의 작업과 언어를 노출시켰을 때, 우리가 중립이 되는 것이지 무조건 중립적 기어를 박는 것 자체는 상당히 편리한 자리이며, 비겁한 회피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을 그런 식으로 읽었을 때에는 어떤 오독이 분명히 생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찾아가서 그 오독을 다 교정할 생각은 없으나, 한영인 선생님도 성해나 작가에 대한 글을 쓰셨고 거기에서 표현했던 바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냉소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냉소는 그들에 대한 냉소이면서, 독자들에게도 ‘당신들도 이 자리라면 그들에게 동의되고 스며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던지는 어떤 질문이라고도 생각이 좀 듭니다.
노태훈 네, 저도 말씀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는데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얘기를 드리고 싶어서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작품들에 대해서 한번 의견을 여쭙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은 김애란 작가나 정이현 작가가 최근에 발표한 소설들을 가지고 어떤 좋은 이웃의 문제 그리고 장소성에 대해 말씀하신 얘기들을 들었을 때, 저는 다소 한국문학이 너무 늦게 재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계급적 대립이나 어떤 예민한 선 같은 것들이 사실은 이미 〈기생충〉 같은 영화가 몇 년 전 엄청난 성취를 해낸 사례가 있는데요. 문학이 당도하게 된 성취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약간 고민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의견을 좀 여쭙고 싶고, 성해나 작가 관련해서도 저도 아주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고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또 특히나 이렇게 많은 독자들을 만나게 된 게 대단히 기쁜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역시나 소설적으로 조금 의문스러운 지점은 있어요.
아까 냉소나 중립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지만 저는 그게 그 소설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서사적으로 갈등이나 대립의 상황 같은 것들을 선명하고 안전하게 그린다는 느낌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줄거리만 딱 들어도 어떤 느낌이고, 어떤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는 걸 짐작케 하는 방식입니다. 특히 넷플릭스를 배경으로 한 추천사도 있었지만, 이 소설이 정말 재미있다고 얘기할 때 일종의 반전이라든가 충격이라든가 이런 서사적 기법이나 효과에 좀 기대고 있는 측면도 있지 않나 싶은데, 이런 비판을 한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짧게 여쭤보고 싶습니다.
김영삼 네, 일단 첫 번째로 김애란 작가와 정이현 작가의 작품에서 계급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실은 새로운 주제는 아닙니다. 80년대 문학을 따져 생각해 보면 그때는 민중 문학이라고 언급되었는데요. 그때는 선명하다기보다는 너무나 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분명히 존재했었고, 1970년대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이나 『영자의 전성시대』 이런 것들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고요.
김애란 작가와 정이현 작가가 그것을 안 보여주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제가 새로운지에 대한 차원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 이야기와 서사를 다룸에 있어서 주제가 새롭냐는 측면도 중요하겠으나 이제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지에 대한 점도 중요하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이 두 사람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계급적 감수성, 제가 굳이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그 계급적 차이를 표현하는 것이 정동의 차원에서 표현된다는 거죠. 이를테면 아주 선명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어떤 식이냐면 이 주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즉 초대받는 사람이 아니라 초대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를 보면 그들은 위선적이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합니다. 다만 그 선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객관화시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인 것 같고요. 또 그 안에 편입되고자 하여 거기에 초대받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감성과 그들의 언어와 태도를 습득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비굴한 태도로 습득하려고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미묘한 선이나 어떤 알량한 위선이라든가, 정이현 작가의 소설 제목을 사용하자면 ‘상냥한 폭력’, 김애란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모욕과 영광을 동시에 주는 방식’으로 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상당히 순간적으로 지나치는 감정이기 때문에 이것을 포착하고 거기에 방점을 두면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새롭지 않은 주제라고 할지언정 이것이 지속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동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성해나 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그건 작가의 전략적 선택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미있게 읽히고, 그 읽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더 접근할 수 있다면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괜찮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게 ‘텍스트힙’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준비한 세 번째 이야기는 박혜진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해 주실 텐데 최근에 의문의 베스트셀러들이 있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이게 베스트 셀러가 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기존에 우리가 알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들이 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박혜진 선생님께서 진행해 주시겠습니다.
박혜진 네, 저는 오늘 문학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둘러싸고 감지되는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는 늘 사후적입니다. 그래서 사후적인 분석에 머무르기가 쉽고, 그래서 생기는 한계 지점들도 반드시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문학을 본질적으로 관통하는 질문들은 되게 어려운 면이 있기 때문에 조금 망설이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오늘 김영삼 선생님께서 충분히 작품의 본질과 관련된 얘기를 해 주셔서 좀 마음을 놓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문학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게 직업이에요. 편집자이자 또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가이고, 무엇보다 작품을 읽는 독자입니다. 근데 이 3개가 만나는 지점에서 제가 요 몇 년 동안 반복적으로 체감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경험들을 좀 언어적으로 표현 정리를 좀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방금 ‘텍스트힙’ 얘기를 해 주셨는데 사실 저는 텍스트힙에 대한 청탁을 몇 년 동안 여러 번 받았었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고사했어요. 왜냐하면 실체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현상이 정말로 실재하고, 그 현상이 언어화된 것인지 아니면 이걸 현상화하기 위해서 언어화를 한 것인지 그 사이에서 약간 헷갈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엘리트주의적 독서 그러니까 좀 진지한 독서가 제가 생각하는 어떤 독서의 기준에 더 부합하고, 보여주기식의 독서라거나 이런 것들은 그것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다는 선입견도 제 안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텍스트힙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들을 계속 미뤄뒀었는데, 근래에 이제 그렇게만 두고만 볼 것은 아니라는 생각들을 좀 하게 됐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정황들에 대해 오늘 이야기를 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릿터』를 저희가 만들고 있는데요. 민음사라는 출판사에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문학 잡지입니다. 그런데 이 『릿터』가 지금으로부터 딱 2년 전인 2024년 2월-3월 호에 <당신이 모르는 베스트셀러>라는 주제의 기획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기획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이제 최진영 작가의 『구의 증명』이라는 소설이었어요. 그 책이 2017년에 나온 책인데요. 2023년부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작품이 그때는 인기가 많으니 ‘피폐물과 문학 작품’식의 분석들이 되기는 했었지만 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제가 그때 뭐 13년에서 14년 차 정도 되었을 때인데 좀 이례적이었어요. 이런 경우가 잘 없었었거든요. 근데 이 작품만이 아니라 그 무렵에 민음사에서 나왔던 박은정 시인의 시집이 있습니다. 『여름 상설 공연』이라는 시집인데요. 그 책도 갑자기 베스트셀러에 올랐어요.
그 무렵에 팀 회의를 하면서 후배들이랑 가장 많이 주고받았던 대화가 뭐냐 하면 “갑자기 왜?”였어요. 한 번 찾아보자고 했는데 모르겠대요. 찾다 보면 어떤 커뮤니티에 도달을 하기도 하고 여러 경로들이 있었어요. 그때 그런 에피소드들이 겹치면서 이런 현상이 정말 우연히 발생한 일인지 아니면 모종의 변화, 그러니까 구조가 바뀌는 데에서 나오는 개념화하기 힘든 어떤 변화인 건지 좀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고요.
‘당신은 모르는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소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작품을 읽었는데 “아, 이게 왜 베스트셀러인지 모르겠다.” 이런 게 아니고요. 어떤 경로로 이 작품들이 많이 읽혀지고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의미인데, 굉장히 아이러니하잖아요. 베스트셀러는 많이 아니까 베스트셀러인 건데 우리가 모르는 베스트셀러라는 것이죠.
그 과정에서 해당 기획 주제를 다뤘었는데 그때 이례적으로 저희 문예지가 기사화가 됐어요. 근데 문예지에서 다루는 주제가 그 자체로 기사화가 돼서 리뷰가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단편을 발표했다 그러면 뉴스가 되겠죠. 그리고 특별히 어떤 이슈들이 아니고서는 기사화되지 않는데 이슈가 됐어요. 저희가 해석하기에는 어쨌든 그 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질문들이 있고, 이런 현상이 사람들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주제도 ‘베스트셀러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라는 건데 이런 생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베스트셀러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거죠. 베스트셀러라고 했을 때, 우리가 생각해 오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감지가 되다 보니 그럼 ‘베스트셀러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제가 작년 가을부터 책과 관련된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어요. 그 프로그램에 〈그때 그 책〉이라는 코너가 있는데, 옛날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1978년도에 베스트셀러 차트를 보면서 어떤 책이 있었고, 그때 그 책이 왜 베스트셀러였는지를 분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1970년대, 80년대, 90년대 특정 시기의 작품을 분석하면 그때가 어떤 시대였고, 민주화의 열기라는 게 이런 식으로 반영이 됐었고, 산업화와 IMF 이후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감정들처럼 이런 맥락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 경향들을 보게 됐을 때, 이게 어떤 시대상을 대표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을 느껴요. 그럼 더 이상 지금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시대와 무관한 방식으로 선정되는 것인지 아니면 베스트셀러의 의미가 다른지, 기존의 작동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만약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우리가 이 차트들을 보게 된다면 미스 매치된 상황에서 자꾸 해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구의 증명』이나 『여름 상설 공연』 외에 사실 더 중요한 작품이 양귀자 작가의 『모순』이 있을 것 같고요. 어제도 기자 한 분을 만났는데 코멘트를 요청을 하시더라고요. 이 책이 출간된 지 27년 만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는데 이런 경우를 30년이 넘게 문화부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본인도 보지 못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들을 하셨고요. 정대건 작가의 『급류』 같은 경우도 다른 작품들보다 조금 더 선명한 트리거가 있어요. 독자가 만들어 올렸던 콘텐츠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역시 최초 출간된 신간이 아니라 이미 구간이 된 상황에서 독자들에 의해서 판매량이 올라가면서 존재감을 보여줬거든요. 심지어 2024년 10월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고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차트를 다 채우고 있을 때, 조용하게 혼자 역주행을 하고 있었던 작품 중에 정대건 작가의 『급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같이 생각해 보니 ‘베스트셀러의 시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앞서 〈그때 그 책〉 코너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의 베스트셀러가 시대를 담아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우리가 동시대를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진 것 같아요. SNS를 보게 되면 알고리즘 추천이라든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계속해서 재편되고 구조화되잖아요.
그 안에서 우리가 시간에 대해 공통 감각을 가지고 뭔가를 공유한다기보다는 나의 감각 그다음에 내가 지금 보는 것을 중심으로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시간성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혹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커뮤니티 정도에서 공유가 되는 감각이겠죠.
개인화된 방식으로 과거의 것들이 현재로 오면서 전혀 시간으로 인한 단절이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신간과 구간의 구분이라는 것이 예전처럼 명확하게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구간 도서가 신간인 것처럼 올 수 있고, 지금 양귀자 작가의 『모순』을 끌어올린 독자들 중에는 이 작품이 과거에 나왔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죠. 이 지점에서 텍스트힙이라는 것을 같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텍스트힙이라는 게 뭐 책을 읽는 것이 힙하다, 책 읽으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고 보기보다는 두 가지 측면으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어떤 권위적이거나 타인의 추천을 받아서 읽어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읽어야 한다기보다 내가 나의 맥락에서 읽어야 되는 작품들을 주체적으로 읽는다는 것이죠. 물론 SNS 같은 물리적인 기술 변화들이 전제돼 있지만, 그것보다 이 출판 시장에서 조금 더 중요한 의미는 1020 독자의 출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소위 역주행을 하고 있다고 하는 작품들의 판매 구간을 살펴보면 10대, 20대 독자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이 텍스트힙이라는 것이 기존에 없었던 것을 다시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문학 작품에 진입할 때 문학이 멋있어 보이고, 근사하다고 느끼는 어떤 감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언제나 어느 정도 소수들의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 텍스트힙이라는 게 전제하는 것은 ‘문학은 여전히 지금도 계속 소수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점점 더 소수의 것이다’예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절망적인 시그널이라기보다는 10대, 20대 젊은 독자들이 문학을 만나는 그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들 그리고 이 독자들이 가시적으로 시장에 출연하고 있는 것들을 포착하기 위한 하나의 언어로서 텍스트힙이라는 것이 좀 더 분석되고 파악되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책을 평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까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나서 굉장히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어요. 본래에는 기획을 할 때 전제하고 있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유사한 콘텐츠들과 비교하고, 이 책을 읽을 사람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얻을 것이다. 여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정확하게 있을 때 기획이 실현되는 것인데 누가 읽을지 그리고 이제 이게 어떤 방식으로 이렇게 유통이 될지에 대한 예측이 점점 더 불가능해지다 보니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되는 것이죠.
계속해서 반응해야 해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려움을 주는 반면 또 좋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비로소 정말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출연할 수 있는 환경이 된 것일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많은 고전 작품들은 옛날 것들이 다시 소환이 되면서 탄생합니다. 『스토너』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로 다른 대륙에서 젊은이들이 열광해서 다시 역주행하게 된 것이죠.
이제 과거의 작품들이 다시 출연할 수 있고 그게 가벼운 독서든 아닌 독서든, 독서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하나의 환경이 생기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지금의 것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산물로서의 베스트셀러였다면 지금은 조금 더 그 파편화된 시간성이 훨씬 더 많이 반영돼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이 텍스트의 편상과도 어느 정도는 연동되어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텍스트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양가적인 것들이 동시에 있는 것 같다는 말씀드리면서 정리하겠습니다.
노태훈 네, 들으면서 했던 생각들 말씀드리고 대화를 이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들 모두 공감이 되고, 저도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이 책이라는 상품이 가지고 있는 시간성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있다는 진단은 뭐 꼭 문학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최근에 한 작곡가가 말씀하신 것을 우연히 봤는데 “대중음악을 하는 젊은 친구들이 굉장히 힘들다. 왜냐하면 이제는 과거의 음악들과도 계속 싸워야 된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새로운 예술을 하려고 할 때 현재 내가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걸 해야 되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는 걸 할지를 고민했던 시대를 지나서 예전에 했던 작업들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 시대가 됐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계속 의식하면서 작업해야 돼서 너무 힘들어 보인다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문학에서도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되고 그 생각을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소위 말하는 시간성의 소거라든가 역주행이라는 현상들에 있어서 분명히 젊은 독자들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젊은 세대들의 호응. 그런데 그것이 저는 좀 유행이 지났지만 ‘레트로에 대한 향수’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특히 10대, 20대 분들은 아마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당연하게 향유하면서 성장을 하셨을 테니까 20년, 30년 전 시대나 문화적 현상 같은 것들이 상당 부분 어떤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급류』나 『모순』이나 『구의 증명』이나 이런 예측 불가능했던 베스트셀러들이 사실은 다 사랑 이야기이고, 최근에 〈만약에 우리〉라는 영화가 뭐 굉장히 호응을 얻고 있잖아요. 그 영화를 많은 젊은 관객들이 좋아하고 있는데 그것도 지금 시대가 주는 빠른 속도에 대한 피로감을 그런 것들이 사라진 이전 세대의 상태에서 뭔가를 느껴보고 싶은 욕망 같은 것들이 반영돼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거든요. 그래서 그런 점을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박혜진 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그런데 레트로와 소위 영혼주의라고 요즘 이야기 많이 하는 것들은 이 기술 시대에 더 이상 과거의 것들을 향수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것으로 불러와서 내 현재 시간 안에서 향유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갑자기 올라왔다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 기본적으로 다 그런 로맨스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니 과거의 것이라기보다는 독자들의 주체적인 선택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은 앞에서 말씀해 주신 것 중에서 과거와 경쟁해야 된다는 말씀이랑도 연결이 될 것 같은데 저는 과거와 경쟁하게 되는 그것이 창작자들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지만 그 창작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로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국문학 작품을 기획해서 만드는 입장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어려움 중에 하나는 한국문학 고전을 만들기가 굉장히 힘들다는 겁니다. 물론 한국문학의 역사가 고전이라는 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됐냐고 질문하면 그 시간이 아직은 짧다고 얘기는 할 수 있기는 하지만요. 사실 세계 문학 전집에 들어가 있는 고전의 리스트라는 것들이 다 어마어마한 시간들을 다 통과한 건 아니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학 작품을 볼 때 그 당대성과 동시대성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그걸 포함해서 동시대적 안에서의 보편성도 중요하지만, 그 통시적인 상황에서 재발견되는 것들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창작의 고통일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 작품을 독자들이 많이 읽고 향유하면서 창작의 환경이 더 좋아지는 데에 오히려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영삼 저는 이제 박혜진 선생님이 사전에 공유하셨던 자료 중에서 정확한 워딩은 아니겠으나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시간과 그 독자들이 선택한 각자의 작품이 만나는 그러한 장이 바로 텍스트힙이거나 의문의 베스트셀러라고 일률화시킬 수 없다”라는 점이 상당히 공감되고 인상 깊었고요. 여쭤보고 싶은 것은 이런 현상이 출판사의 입장에서 좋은가요?
박혜진 좋고 나쁜 것은 없는 것 같은데요. 물론 이전에 비해 많이 판매된다는 점에서는 좋습니다. 그런데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의도한 대로 풀리는 것이 가장 좋죠. 왜냐하면 그건 기획자의 실력에 대한 결과니까요.
좋은 방향으로 예측 불가능하면 좋겠지만 대부분 현실은 반대의 경우가 많거든요. 중요한 것은 문학 독자는 기본적으로 젊은 독자들일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물리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소설 독자들은 많이 줄어들거든요. 시도 좀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또 지금 출판 시장에서 가장 큰 영향은 이제 비문학 도서의 전멸이에요. 그러니까 문학 도서는 지금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고 있고, 도서전 같은 경우도 극명하게 빛과 그늘이 나뉘어집니다. 문학 타이틀들을 가지고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들의 차이가 굉장히 커요.
그리고 ‘킨들(Kindle)’ 같은 경우에 지금 번역 서비스를 다 제공하잖아요.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을 하고 있는데 만약 한국어까지 서비스가 된다면 외국의 비문학 도서들은 많이 수입을 안 하겠죠. 그런데 그 흐름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제 이런 식의 변화들이 크고, 그게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리고 문학 쪽은 오히려 반사 효과처럼 영향을 훨씬 덜 받고 있기 때문에 크게 보이는데 그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김영삼 그러니까요. 질문은 아니고 생각인데 텍스트힙 열풍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이랄까요? 거기서 따라붙는 우려들이 있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이거 너무 과시적인 거 아닌가 하는 거죠. 그런데 제 생각은 ‘제발 과시적으로라도 좋으니까 좀 읽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은 모르겠지만 저 또한 패션 문학에서부터 출발했던 것 같거든요. 멋진 책 들고 다니고 그랬던 것 같아요. 1990년대, 2000대 초반에 『체게바라 평전』 들고 다녔는데 뭐 1년 내내 다 읽지를 못했죠. 그런데 그렇게 패션 독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중에 작가가 되고, 독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과시적으로라도 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것을 과시적이라고 바라보는 이유 중에 하나는 취향 자본이 되니까, 그러니까 하나의 계급을 나누는 하나의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는 건데 거기에 대해서도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일단 아비투스라고 얘기를 할 때는 차별화시키기 위한 거잖아요.
차별화시키기 위해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고 함으로써 차별화시키고 많은 유용성, 돈이든 권력이든 포함되는 것이죠. 김현 비평가의 말이 생각나는데 “문학은 무용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인데, 이건 유용성에 입각한 차별화가 아니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이고, 그렇더라도 더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노태훈 네, 자연스럽게 저의 세션으로 넘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텍스트힙 얘기를 하셨는데 제가 오늘 같이 한번 고민해 보고 싶은 주제는 플랫폼이라는 개념입니다. 상당히 시대적 변화가 빠르고 속도가 너무 급하다 보니 문학이라는 아주 전통적인 담론이나 매체와는 어긋나는 부분들이 상당 부분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도 어쨌든 시대를 따라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속도와 변화에 발을 맞춰야 되고, 그런 과정에서 이런저런 고민들이 좀 생겨나는 것 같은데요. 우선은 플랫폼이라는 개념 자체를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그러니까 문학을 생산하는 창작자 그리고 문학을 유통하는 사람, 문학을 또 수용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여러 공간과 사람. 이런 모든 것들을 다 플랫폼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희가 자리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문학 플랫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고, 박혜진 평론가께서 근무하신 민음사라는 출판사도 문학 플랫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아요. 또 예를 들면 우리가 조금씩 얘기를 하고 있는 박정민 배우 같은 분을 문학 플랫폼이라고 불러도 저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실제로 출판사를 열어서 운영도 하고 계시기도 하니까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 개념인지가 우선은 좀 고민스럽기는 한데 이런 다양한 변화들을 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결국 문학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변화된 매체적 환경, 특히 넷플릭스나 유튜브가 추동하고 있는 어떤 감각인 것 같습니다. 제가 넷플릭스나 유튜브 생태계를 보면서 늘 느끼는 건 정말로 특이한 플랫폼인 이유가 여기는 이제 이른바 별점이라는 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어떤 상품을 팔 때는 사용자들이 얼마나 이걸 추천하고 선호하는지를 지표로 보여주는데 플랫폼 자체에서는 그걸 수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신 알고리즘이 수행하는 거죠. 아까 얘기했습니다만, 이제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데서 콘텐츠를 보게 됐을 때 당대적이라거나 현재적인 콘텐츠만 보는 게 아니죠.
모든 시간대를 통틀어서 이 수없이 펼쳐져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걸 선택하라고 알고리즘이 소개해 주기도 합니다. 이제 그것조차도 1.5배, 2배속으로 재생을 시켜버리죠. 심지어는 빨리 감기로 보는 걸 넘어서 이제 요약해 주는 것까지 봅니다. 유행하는 드라마에 대해서 아주 그럴듯하게 요약해 주는 영상들이 있고, 심지어 요약이 몇 시간짜리도 있더라고요.
근데 이제 본편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짧겠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서사적 소비를 하는 경향들이 문학에 어떤 식으로든 지금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게 문학을 위협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아주 느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독서를 이제는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상황이 오는 걸 수도 있을 것 같고, 오히려 반대로 느리고 전통적이고 속도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천천히 가도 되는 방식의 콘텐츠를 오히려 더 선호하게 되는 그런 효과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플랫폼 시대의 문학 혹은 플랫폼화되고 있는 문학이 지금 전통적인 문학의 구조나 장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같이 한번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사전 질문에서도 그런 얘기가 있었는데 특히 최근 몇 년 사이에 문학 분야에서 마주한 아주 큰 변화 중에 하나는 웹소설이라는 플랫폼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이버 공간에서 문학 작품을 연재하고 발표하는 형식은 1990년대 PC 통신 시절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는 인터넷 연재라는 형태로 소설들을 연재해 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웹소설이라는 형태로 여러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서비스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죠. 그리고 그게 문학 생태계를 굉장히 많이 바꾸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례로 PC 통신 시절이나 인터넷 연재 시절의 작가들은 책을 내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시겠지만, 완전히 바뀌었죠. 웹소설 작가들은 책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책을 내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그 책은 이 웹소설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독자들을 위해서 소장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상품으로 판매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문학의 질서와 흐름을 알고 있던 독자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운 거죠.
그러니까 총칭해서 얘기하자면 책이라는 상품 자체가 굿즈화되고 있는 시대. 최근에 서울국제도서전이라는 행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많은 젊은 독자들이 찾아와 주는데, 거기에서 실제 책을 읽고 싶어서 사가는 분들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걸 제가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사실은 각종 출판사들이 내놓고 있는 귀엽고 예쁘고 아름답고 재미있는 굿즈들을 사 모으고 그걸 구경하는 행위와 독서라는 행위가 결합되니 어떤 종류의 죄책감이 상당 부분 덜어지는 거죠. 내가 고급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어떤 감각 같은 것들이 최근에 일으켜지는 변화로 저에게는 느껴지고 결국에는 서울국제도서전이나 혹은 낭독회, 북토크 이런 게 사실은 또 결국엔 플랫폼이라는 개념으로 저희가 또 흡수해서 얘기해 볼 수 있게끔 하나하나가 일종의 문학 플랫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이제 박정민 배우 얘기를 했습니다만, 1인 플랫폼의 시대가 지금 열린 것 같습니다. 지금 문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플랫폼이 어딜까라고 하면 출판사도 아니고 문학 평론가도 아니고 유명한 어떤 분도 아니고 영화 평론하는 이동진씨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한 달 동안 여러 책들 보시면서 ‘아 이 책이 최고야’라고 유튜브에 올리면 그 이상의 효과를 거두는 플랫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시대적인 변화가 있다고 했을 때 우리가 알던 혹은 전통적이라고 볼 수 있는 문학의 세계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시대가 많이 바뀌고 매체도 늘어나니 또 젊은 작가들이 신선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례가 많이 있었거든요. 이슬아 작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미 10여 년 전부터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서 자기 PR을 하고 책을 내고 출판사 차리신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이슬아라는 플랫폼이 되어 있으신 거죠.
이런 사람들이 출연함으로써 문학적 활기가 많이 있었는데 반대로 지금은 그런 여러 가지 모험적 시도들과 문학적 활기를 출판사가 자본으로 흡수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주 뛰어난 개인기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면 아마 지금 활동하는 젊은 창작자들은 굉장히 많은 부담을 느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퍼포먼스가 좋아야 되는 거죠.
글을 잘 써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 인정받는 작가가 되는 길이 제일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를 내보여야 되는 일들이 많이 노출되어 있는 거죠. 특히나 문학은 아주 개인적인 작업의 성격이 강하잖아요. 그러니까 혼자 조용히 글을 쓰고, 원고를 책으로 펴내면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 장르 중에 하나입니다. 다른 예술 장르들이 거의 협업을 전제로 하는 것과 달리요.
그런데 문학 분야가 이제는 광범위한 플랫폼화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한번 고민해 봐야 될 것 같고요. 결국 그 얘기를 쭉 통과해서 마지막에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럴 때 우리 독자는 어떤가 하는 겁니다. 아까 독자 입장에서 굉장히 선택의 폭도 넓어지고 다양한 작품들을, 다양한 경로로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독자의 피로도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서점에 있는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책을 고르거나 유명한 사람이 추천하는 책만 보는 걸로는 진짜 힙한 독자가 될 수 없는 거죠. 내가 스스로 굉장히 파고들어야 하고 소규모 공동체나 플랫폼에서 일어나는 변화 같은 것들을 빠르게 따라가지 않으면 어느새 뒤처져 있는 독자가 되어 있는 것이죠. 또 예전에는 책을 읽고 나면 그냥 너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면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마 많은 독자분들이 이걸 어떻게든 생산해 내야 된다는 압박이 있으신 걸로 생각이 돼요. SNS에 올린다든지, 리뷰를 써본다든지 아니면 내가 어떤 기획을 해본다든지, 자양분으로 삼아본다든지. 이런 유무형의 압박 같은 것들을 독자들도 느끼는 시대가 아닌가 해서 저희가 오늘 ‘누가 읽는가’라는 타이틀을 달았잖아요.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전에는 우리 ‘모두 독자가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작가가 될 수는 없어’ 이렇게 얘기했잖아요. 요즘은 반대의 생각이 들어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누구나 책을 어떤 이야기를 쓰거나 만들어내는 건 너무 쉽고 너무 경로도 많습니다. 다만 독자가 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진짜 인정받는 혹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독자가 된다는 일이 너무나 어려워진 시대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좀 해보면서 제 짧은 발제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참석자 1 민음사 TV 애청자로서 이 자리가 정말 즐겁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텍스트힙이라고 하는 어떠한 무리에 있는 20대 독자로서 생각할 때, 아까 10대 20대 독자의 출연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조금 넓게 10대부터 30대까지를 본다면 그러한 서브 컬처, 팬덤 문화 자체를 빼놓고 이야기하기가 정말 어렵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저도 SNS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가끔씩 엄청나게 RT(리트윗)를 타는 책들이 있거든요. 하지만 ‘결말은 말하지 마. 그거를 그냥 말하지 말고 일단 봐’ 이런 식의 추천만으로 엄청나게 퍼져나간 문학들도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요. 그중 팬덤 문화의 어떤 특성 중 하나는 1부에 나왔던 거지만 고전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특히 요즘에는 고전에 나온 대사가 다양하게 파생돼서 드립으로도 사용이 되고 혹은 다양한 마케팅에도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살지 않았던 다른 시대의 레트로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문학의 이미지. 내가 겪은 적 없지만 우리로서 같이 공유할 수 있는 노스텔지어라고 하는 것들이 되게 가볍고 얇게 카테고리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구한말이나 개화기 시대의 문학을 읽는다고 해보면 유튜브에 경성만 쳐도 ‘경성 풀리’라며 갑자기 애절한 로맨스를 추측할 수 있게 하는 감성적인 문구와 함께 나오는 동영상들이 있다 보니까 1980년대의 민중이나 전체에서 벗어나서 90년대에 개인을 넘어서 2000년대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을 넘어서 이제 인터넷 자체가 밥상을 차려주는 시대가 됐잖아요.
개인적인 취사 선택 자체가 더욱 자유로워진 시대라서 SNS, 서브 컬처, 팬덤이라는 것도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작용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고요. 혹시 이런 것들을 분석하거나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찾아가실 때 혹시 마주친 적이 있는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박혜진 이제 저희가 기획했을 때 원고들을 청탁했을 거잖아요. 그때 그 책을 만든 편집자들한테 요청을 해서 『구의 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이 돼서 여기까지 왔는지 등을 찾았는데요. 그 결과는 뭐였냐면 어떤 출처를 찾았다기보다는 그 이후에 독자들이 뭔가를 읽고 어떤 방식으로 기록을 남겼는가에 대한 부분을 주목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그냥 독서 후기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생산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구의 증명』을 읽고 나서 내가 추천하고 싶은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고, 그게 다시 소비가 되는 방식으로 콘텐츠가 계속 재생산되는 것들이 되게 중요하고 그걸 통해서 또 전파되는 것들이 있고요. 그리고 『여름 상설 공연』 같은 경우는 딱 말씀하신 것처럼 서브 컬처 커뮤니티였어요. 아이돌 팬덤에서 출발을 했어서 찾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왜냐하면 그 커뮤니티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폐쇄적이기도 하니까요. 기획자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이 작품이 읽히고 있는 것들을 발견을 했고, 그런 맥락에서 보면 정확하게 말씀하신 게 맞고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작년에 강신재 작가의 「젊은 느티나무」가 밈으로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잘 나가는 거예요. 그것을 봐도 다음 스텝을 어떻게 해야 될지 잘 모르겠는 것이고, 지금이 저희의 과도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 현상의 이유를 쫓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만들 때 우리가 베스트셀러를 만들겠다고 만드는 게 아니잖아요. 운이 좋아서, 시대와 독자가 발견해 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고요. 그럴 때는 이제 ‘어떤 것이 살아 있는 책인가’ 이걸 이제 판단하는 것이 좀 낭만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태훈 이 문제가 플랫폼 현상하고도 무관할 수 없습니다. 바이럴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는 것이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에 의해서 발산된 1인 미디어의 언급이 더 많은 밈을 만들어내기도 할 테니까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독자들의 어려움을 말씀해 주셨고 박혜진 선생님은 이제 편집자라든가 출판사의 어려움을 말씀해 주셨다면 사실 비평가들도 어려워요.
비평가들의 암묵적인 과제가 있단 말이죠. 계절마다 나오는 계간지들, 월간지들을 쭉 따라 읽어야죠. 그런데 한 달 전에 웹소설이랑 과거에 있었던 소설까지 읽어야 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나거든요. 책장을 뒤져서 그때 모은 책은 어디 있지 막 찾았던 기억이 나요.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물음표를 붙이고 느낌표를 붙일 때의 우려가 분명히 있는 것 같거든요. 그 우려는 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게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그런 우려인 것 같아요.
김영삼 연관돼서 짧게 말씀드리면 전공 학생들이 아니라 교양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한국문학을 강의할 때가 있습니다. 100년 전에 이상의 『오감도』 연작을 가르치는 건 오히려 더 재밌습니다. 지금 봐도 이상하기 때문에 그 이상함을 파헤쳐 보는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한 번도 이것이 한국문학의 정전에서 제외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작품, 가령 김승옥의 『무진기행』 같은 작품을 전공 학생들이랑 얘기하기에는 일단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공유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해석도 해 봅니다.
그러나 교양 학생들은 일단 이 작품 제목을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정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자체도 이제 정전이 아니게 되는 경우가 있다라는 것이죠. 그래서 박혜진 선생님이 아까 발표하신 내용이긴 하지만 저는 이걸 조금 더 차원을 넓혀서 베스트셀러의 동시성 문제를 넘어서 문학이라고 하는 장르의 경계성에 대한 의문도 좀 생깁니다.
그러니까 본격 문학, 순수 문학, 주류 문학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되게 안 좋은 표현인 것 같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만, 이것이 하나의 문학이 가진 본질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소비되는 현상 텍스트힙의 열풍에 빨리 끝나지 않을까, 현상 과시적이지 않을까 하는 현상 자체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인류의 본질에 대해서도 의문시되는 인류세의 시대에 살면서 고작 문학의 본질을 고수하려고 하다니 문학의 장르 문학의 고유성과 경계성이 심문의 대상으로 올라오는 현상으로서 수많은 플랫폼의 등장, 텍스트힙의 등장, 의문의 베스트셀러들을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비평의 무게가 좀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참석자 2 안녕하세요. 우선 세 분 선생님의 대담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2부에서 이야기 나누었던 플랫폼의 문제 그리고 행방을 알 수 없는 베스트셀러의 문제가 결국에는 다 자본주의로 귀결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제 노태훈 선생님께서는 지난 『자음과모음』 가을호에 자본주의와 관련해서 글을 씻기도 해 주셨잖아요.
정말 재미있게 공감하면서 잘 읽었는데 이제 그 글에서도 지적하신 것처럼 최근에 한국 문단이 너무나도 자본주의와 깊이 결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컨대 인플루언서라든지 플랫폼 알고리즘과 같은 게 전통적인 우리의 생각에서는 문학과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인 것만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는 그것들이 너무나도 문학과 잘 결탁하고 있고 그런 것들이 우리가 계속 이야기 나누었던 의문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 고민되는 지점은 독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좀 불분명해지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독자와 소비자 정체성을 완전히 나누는 게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지만,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질 좋은 작품이 필요하고,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빨리 작품을 내놓고 그들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게 필요할 것 같거든요.
근데 지금의 문학장이 너무나도 자본주의와 깊이 결탁되어 있는 나머지, 독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좀 불분명해지고 어떻게 보면 독자는 없고 소비자는 많은 것만 같아서 이런 점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지 혹시 세 분 선생님 고견이 있으시다면 청해 듣고 싶습니다.
노태훈 우려는 없지만 제가 답할 것은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체로 동의하고요.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면도 있고,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문학의 본질을 고수하고자 이 애쓸 필요가 있냐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면 된다는 생각을 저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문학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느림이랄까요? 혹은 문학만이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우리가 그래도 계속 가져가야 되는 게 아닌가 그런 고민들을 하게 됩니다. 요즘 드는 생각은 문학이 독자들에게 IP로 읽히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앞서 밈에 대한 이야기도 좀 했지만, 이제는 어떤 문학 작품을 읽으면 그걸 그냥 감상하고 나름의 생각을 생산해 내는 게 아니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봐야 되겠다, 2차/3차 창작을 해봐야 되겠다는 적극적인 독자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그런 변화에 있어서 저는 장점도 있는 것 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단점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교육 현장 얘기를 하셨지만 제가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문학에 어떤 공통 경험 같은 것이 이제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꼭 문학뿐만은 아닙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그때 유행하는 어떤 드라마나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강의 주제로 연결해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갔죠. 예를 들면 〈폭싹 속았수다〉 같은 드라마 열풍이었잖아요. 그런데 가서 얘기하면 보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또 다음에는 유행하는 음악 얘기도 하고 영화 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는 예술 작품을 향유하는 것이 너무나 개인화되어 있는 거예요. 이제는 우리가 문학적 경험이랄까, 문학적 공유가 어떤 식으로 가능할지를 고민해야 되는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문학이 너무 자본주의에 휩쓸리고 있다거나 너무 거센 변화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문학 작품을 같이 읽고 향유하는 경험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가져가야 될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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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철저히 교환 체계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기대 없음'은 어떤 등가성의 원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아니, 차라리 등가 관계를 중지시키는 오묘한 상태인 것은 아닐까?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윤지양의 『기대 없는 토요일』 속 '토요일'이 애당초 우리에게 줄 것으로 기대되던 것은 무엇이며, 토요일은 왜 더 이상 기대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베일 너머의 무언가를 상상하며 베일을 걷어 낸 사람이 막상 그곳에 베일 말곤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해야 했던 낙담의 기억에 가까울까? 그러니까, 최소한 로또 5등 당첨 정도의 이벤트는 기대했던 사람이 막상 토요일의 가면을 벗겨 놓고 보니 정말 '토요일' 빼곤 아무것도 없더라는 모종의 비관을 함축하고 있는 걸까? 일단 분명한 것은 이번 윤지양의 시집에는 베일 뒤에 아무것도 없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기어이 그 베일을 열어젖히려는 움직임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당장 윤지양의 첫 시집만 하더라도 화자들에게 시는 의미론적 운반체였기에, 그들은 "무엇을 담으면 넘치지 않을까", "무엇을 담으면 부족하지 않을까"를 끊임없이 견주어 보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 미해결 과제 앞에서 그들은 적어도 "무책임하게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1)이라는 잠정적 결론만을 쥔 상태였고, 머잖아 무너져 내릴 역사(驛舍) 안에서 '시간'을 기다리며 정지해 있었다. "시간을 묻기 위해 / 사랑이 온다"2)라는 예고 앞에서, 지금이 몇 시인지 물으며 지나가는 행인이나 열차에 올라타 막 떠나가려는 승객과 달리, 윤지양의 화자들은 그저 단단히 정체되어 있었을 뿐이다.3) 그렇게 나름의 중용을 지키고 있던 윤지양의 화자들은, 그러나 이제, 현상의 "뒤편으로 가야 한다"(「외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 뒤편에 무엇이 있건 없건 크게 구애받지 않겠다는 달관의 제스처를 취한다. 여기에서 우린 어렴풋이나마 시집 전면에 왜 '기대 없음'이 내걸렸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또 그것이 허무의 감투를 쓴 비관적 인식의 발로라기보다, 허무를 뒤집어쓸지언정 세계를 끌어안아 보겠다는 긍정에의 의지에 가깝다는 것도. 너무 복잡할 필요도 없다. 그저 "두드림 뒤에 따라올 가여운 존재를 / 실은 너무 사랑하고 있"(「조지에게」)다 하지 않는가. 미지 너머에 누추함만 있을지라도 기어이 두드려 보겠다는, 그러지 않고는 못 버티겠다는 항복의 고백이 어떤 의미에서의 '기대 없음'이자, 또 다른 의미에서의 '사랑'이기도 할 터. 결국 윤지양의 이번 시집은 앞선 시집 속 화자들이 경계하던 '무책임'마저 껴안는 방식으로 자기 책임을 수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그러나 '이미' 겨운 존재들을, 벌써부터 사랑하고 있노라 말하고 있는 화자들은, "시간을 묻기 위해" 올 것이라던 사랑의 계획이 진작부터 실행되고 있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In and beyond 그렇다면 대관절 이 '시간'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본 윤지양의 '시간'이란 단지 대상의 정면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시간'은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와중에 발견되는 법이 거의 없고, 어떤 배경이나 이면에 알게 모르게 있다가, 사후적인 양식으로만 구성된다는 점에서 '기억'과 닮았다. 이것이 왜 숱한 화자들의 기억이 어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뒤죽박죽 수수께끼처럼 엉켜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화자들이 명확한 시간 단위 안에서 경험한 객관적 사건과 별개로, 그들의 기억은 과거 또는 현재에 대한 그들의 주관적 인식이나 무의식 위에서 끊임없이 추체험되며 서로를 삼투하고 교란한다. 이러한 기억의 양상을 보고 있으면 윤지양이 그리는 시간의 물성이란 곧 '순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관념의 양극단을 오가기도 하는 윤지양의 세계는 사실상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경계 수칙」)는 사실을 전제하기도 해서, 자칫 그 관계를 대립 구조로 손쉽게 환원해 버릴 위험을 내포하기도 한다. 당장 「은미」만 보더라도 그렇다. 작중 '은미'의 삶은 고향인 제주에 남을지, 낯선 육지로 떠날지와 같은 두 갈래의 행선지 아래 끊임없이 놓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는 '은미'가 육지로의 초월이나 제주에의 잔류 양자 중 단 하나를 택하는 과정을 소묘하기보다, 단지 '은미'라는 존재가 "떠나도 금세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은미'의 관념 안에 제주와 육지는 대립하고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미'의 육지 안에는 이미 제주가 들어와 있고, 제주 안에는 이미 육지가 들어와 있으며, 이러한 윤지양의 환원 및 귀환 이미지는 대립 아닌 순환 관계에 의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이 순환은 결국 공간(제주)화된 기억을 '초월'해야만 다음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보편적 믿음보다, 그 기억 안에서 구르기를 택하며 시간을 초과해 낼 수도 있다는 또 다른 믿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순환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려면 「토요일」에 주목하라. 시 안에서 우리는 자칫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축구장' 속 '열광하며 뛰어가는' '선수들'과, 점점 더 단단해지는 '냉기로 가득한 겨울철'의 '사무실' 속 '하품하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대립 관계로 읽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낀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물들의 앉고 걷고 뛰는 행위가 생성 중인 에너지, 운동량, 벡터가 계절을 오가며 서로를 융해 또는 응고시키는 순환 관계임을 확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겨울철 사무실의 히터"가 바깥 세계의 얼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 중인지, 혹은 강력한 추위가 그것을 켜는 '결과'를 초래한 건지 파악하기 어려워질 때, 인과/선후 역시 새로운 순환의 겹으로 등장한다. 종합해 보면 이 시에 켜켜이 놓인 각종 순환 레이어는 저마다의 주기와 주관적 원리를 따르고 있으며, 이 전체를 아우르는 "침묵의 기억" 역시 결국엔 주관화된 기억임을 가늠케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침묵의 기억"이 무언가를 녹일 때까지 '침묵'에 휩싸인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는 군중의 원리와, 어느 정도 "열기가 식을 때 즈음 / 경기장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원리가 어느 순간 상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요컨대 이들은 한 세계 안에서(in) 그 세계를 동시에(and) 넘어서려는(beyond) 움직임을 함께 지니게 된다. 이 움직임은 '초월'이 아니라, 완전히 전유될 수 없는 나머지 부분을 그 내부에서 어떻게든 '초과'해 내려는 움직임이다. 순환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를 굳히고 녹이고, 움직이게 하고 정지시키는 관계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도래하는 토요일을 생성 중이다. 물론 이 순환과 연결의 감각이 반드시 조화와 화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선 폭력 역시 그에 못지않게 자주 발생한다. 이 양상은 윤지양이 그리는 '식이'(食餌) 이미지와 긴밀히 연결되는데, 가령 「살기」(28쪽) 속 "아직 오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화자가 응시하는 음식이 "싱싱한 상태"로 묘사되고 있음에 주목해 보라. 우리는 여기에서 "싱싱한 상태"의 음식이 기실 "포크에 찔린 채" 죽은 지 오래임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이에 더해 화자의 기억을 타고 과거로 역행해 보면, 언젠가 "초인종이 지는 저녁"에 화자가 멀리 떠나보냈던 상상 속의 개이자 헐떡일 뿐 짖지 않는 상태로 존재하는 '행복'이 문득 화자의 과거 속 "꿈결에 먹어 치운 / 차가운 요리"라는 기억 이미지, 그리고 '현재'의 만찬 이미지와 포개어짐을 볼 수 있다. 그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현재'는 강제 소환되고, “문 가까이서 들리는 숨소리"로만 식별되는 손님은 식탁보의 "기름진 얼룩" 같은 기억과 함께 화자의 고백 "나는 / 예전에 당신을 먹었던 사람"을 이끌어 낸다. 즉 제목의 '살기'는 과거 떠나보낸 개가 훗날 미지의 손님으로 귀환하는 이미지처럼, 결국 먹고 먹히는 관계, 즉 포크처럼 뾰족한 포식자의 '살기(殺氣)'에 의해 '살기' 어려워진 피식자들이 역설적으로 자신의 포식자들을 '살게' 만드는 섭식의 순환 메커니즘을 드러낸다. 이외에도 「속죄」 역시 쏘고 쏘이고 물어뜯고 뜯기는 관계를, 「유진」 역시 사형수 M에게 화자가 잉태되고, 동시에 화자의 탄생이 M의 사형 집행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연쇄와 순환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세계의 선 또는 악순환 안에서 윤지양의 어떤 화자는 단지 '악순환'을 특정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쁜 / 생의 / 반복을 끊을 수 없으면 바꿔야" 하고, 그땐 "기억의 변환법이 요구된다"(「기억의 변환법」)라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다가, 나는 혹시 화자가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지 짐작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차피 "나쁜 생"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오늘날 우리의 '기대 없음'으로 이어진 거라면, 그래서 매주 도래할 '토요일'이 단지 생의 극복 불가능성을 기술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해진 거라면, 기억을 살짝만 비틀어 지난한 삶의 경로도 살짝만 틀어보자고. 많이도 말고 딱 1도 정도만, 그러니까, 딱 '기대 없음'에 대한 인식틀 정도만 달리 정립해 보자고. 시와 시와 시와 그리고 시 이를 위해 윤지양은 어떤 사유의 단서를 남겨 놓았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시인이 군데군데 묻어 둔 몇 개의 힌트를 확인해 보자. 세상에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찢어지는 사람도 있고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총칼로 쑤신 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훗날 영화가 좋아서 두 번씩이나 본 사람이 있고 좋다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 있고 별로라는 사람이 있고 전혀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정확하지 못한 기억으로 얼핏, 시에 등장하기도 하는 법이다 - 「왜 어떤 사람은 서울의 봄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나」 부분 위 화자의 요지를 있는 그대로 풀어쓰자면, 세상엔 몹시 많은 사람이 있고, 또 그들은 너무 다양한데, 하물며 그 마음은 얼마나 제각각이겠으며, 또 그 제각각은 얼마나 제각각의 속도로 변하겠냐는 것이다. 좋다. 여기까지는 화자가 인간 만사의 원리를 자기 관점으로 천명해 보려는 시도 정도로 읽힌다. 근데 문득 시가 의미심장해지는 대목은 줄곧 영화 「서울의 봄」과 관객 반응에 대해 이야기하던 화자가 맨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뜬금없이 '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내용은 어떤 시에서만큼은 서로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비틀렸거나 성글은 형해의 기억으로도 등장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 대목은 앞선 '기억의 변환법'이 자유롭게 구사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시'와, 동시에 시적 대상의 근원적인 불가해성까지 넉넉히 품을 수 있는 장르로서의 '시'에 대한 화자의 믿음을 엿보게 한다. 이는 윤지양의 시 세계 안에선 왜 하늘, 땅, 바다와 같은 무한히 유한한 공간이 '개', '-그루', '포기'와 같은 단위명사와 접착되어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까지 확장된다. 대상의 분량을 정밀하게 측량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단위명사)와 절대 측정될 수 없는 개념을 의도적으로 접착시켜 문장의 오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적 설계는 결과적으로 존재들의 측량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함인 까닭이다. 마치 자신이 접촉면을 "자르는 게 아니라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날카로운 칼의 착각처럼, 이해의 제스처란 얼마나 순식간에 "꼭 움켜쥐고 있는 쪽에 가까"(「(4)」)워 질 수 있는지, 즉 얼마나 손쉽게 '장악'의 제스처로 변질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악에의 욕망은 「소설」(102쪽) 속 "새우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씩 늘려서 먹어 보"는 실험을 감행 중인 '동생'이 일곱 개째 새우를 먹고 쓰러진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이 "새우를 여섯 개까지 먹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 풍경만큼이나 위태하고 애처롭다. 그러니 한 존재를 온전히 알 수 있을 거란 '기대'를 배제한 가닿기는 역설적으로 윤지양의 시 세계 안에서만은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편으로 나아가'는 정면 돌파의 유인으로 작용한다. 불가해성에 가닿으려는 시의 작업은 '공동 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윤지양은 공동을 구성하는 '단수적 존재'들을 일일이 호명하듯 솎아 내어 드러내는 수고로운 작업을 감행한다. 이를테면 "게와 게와 빛과 그리고 빛"(「소설」, 17쪽)처럼,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는 작업 같은 것인데, 여기에는 '게'와 '빛'으로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이 단지 같은 종과 형질과 이름을 분유하고 있다 해서 하나의 존재로 엉겨 붙을 수 없다는 고집, 즉 대상 저마다 어떤 고유성을 띠고 있다는 믿음 같은 게 들어 있다. 이 단수성의 세계에선 하물며 기침이 기침을 전염시키며 서로에게 번져 갈지언정, "기침 그리고 기침 기침 그리고 기침과 기침의 기침"(「드보르자크 교향곡 7번」)과 같은 묘사만이 그 단수적 진실에 그나마 근접해 보는 문장이 된다. 이 세심한 기초공사를 마치고 시인이 향한 곳이라고 해서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우려는 것들은 아름다우려 한 만큼 누추해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시인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빛과 소리 소문」에서 잘 드러난다. 작중에는 "엉망으로 깨진 유리가 반짝이는 아스팔트 위"를 "맨발만 간신히 면한 채 너덜너덜한 신을 끌며 걷던" 화자는 우연히 헐벗은 발의 유령을 마주한다. 그런 화자는 뜬금없이 유령에게 “투명한 모자를 씌워 줄 수 있을지" 궁리를 하고, 또 자기 신발 끈만을 단단히 조일 뿐이다. 근데 여기에서 “유령이 나지막이 내뱉은 말"이 자신에게 도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어조에 실린 감정"이 가늠조차 되지 않고 있음을 깨달은 화자는 그제서야 나직이 읊조린다. 아아, "이해란 얼마만큼 말이 되어야 하나". 이 읊조림은 어쩌면 이 모든 기초공사를 통한 기억의 변환마저 우리 이해 지평 안에서는 실패로 귀결될 확률이 높고, 여전히 "말이 되어야" 그 의미에 가닿을 수 있다는 인식적 한계에 노출될 수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윤지양의 화자가 「오 혹은 없음」에 도달해 "서로 부수면서 허물어져" 가고 "서로 깎여서 부서져 있"는 "다이아몬드 사랑"의 날카로운 파편을 "주우러 / 가"자고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 보자. 여기에서의 핵심은 '날카로운 파편' 아닌 여전히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사랑"의 발견에 있다고 한다면, 앞선 시집에서 "시간을 묻기 위해" 온다고 예고되던 '사랑'은 이렇게 누추하게 흩뿌려진 파편의 형태로, "한쪽 다리가 짝짝이"인 채로, 혹은 유령과 같은 "가여운 존재"(「조지에게」)들을 대동하고서 오는 것이겠다. 나는 여기에서 '사랑'이 "이해란 얼만큼 말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집요한 물음을 경유해 윤지양이 스스로 제출한 답변이라고, 또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기대 없음'의 동의어일 것이라고 감히 짐작해 본다. 이제 사랑의 베일 뒤엔 어떤 숭고함도 없고, 토요일 뒤엔 로또 당첨 같은 변칙이나 행운도 없단 걸 알면서도, 기어이 써 내려가려는 시인의 자세는 이제 그녀의 시가 의미론적 작업을 넘어 존재론적 작업에 한발 다가섰음을 의미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최대한 가닿으면서도, 가끔씩 기억의 변환술을 구사하며 슬픔의 순환에 갇히지 않는 화자들은 윤지양이 오늘날 '기대 없이' 내어 보인, 그러나 '중요한' 시적 성취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새삼 기억해 냈다. 더 이상 상대에게 아무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가 종결되었던 것과, 상대에게 바라는 아무런 기대도 없음을 깨달았을 때 무언가 시작되었던 것 사이에는 거의 전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음을. 생각해 보니 십자가 속 언어밭에 매립된 의미의 흙들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건져 올리고 있는 굴착기가 겨냥 중인 것은 단단한 의미의 진지를 구축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윤지양은 이제 단지 "견고하게 쌓은 벽돌담을 / 누군가 깎아 놓은 흔적" 안에서 그 '누군가'의 존재 자체를 느껴 보려는 듯하다. 기대 없이 무상으로 주어진 것, 그저 거기 있는(there is) 것들을 감각 중인 시는 이제 의미를 중지시키고, 다만 발생되고 있을 뿐이다. 작은 구멍과 미세한 틈 안에서 "이전에 불었던 바람"이 지금도 교통하고 있음을, 다만 감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순환 아래 끊임없이 양산되는 '시와 시와 시와 그리고 시......'가 있음을, 단지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1) 윤지양, 「생각이 나서」, 『스키드』(문학과지성사, 2021). 2) 윤지양, 「환상열차분야지도」, 위의 책. 3) 윤지양, 「석수」, 위의 책.
「2026 한국문학 비평포럼」1부 광장의 문화정치 ― 강지희, 한영인, 홍성희 평론가 1부에서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극단적 갈등, 세대와 젠더로 대표되는 각종 문화적 정동 등을 문학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케이팝 응원봉을 매개로 한 연대의 미학과 문학 속 남성성 재현을 통해 세대별 위기와 청년 담론의 정동을 짚고, 포스트 퀴어-페미니즘 혹은 포스트-민주주의 시대에 한국 사회의 공동체가 그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모습을 최근 각광받은 여러 작품의 양상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영인 지금부터 1부 '광장의 문화정치'를 주제로 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비평포럼은 6명의 평론가가 내부 회의를 거쳐서 두 가지 세션을 마련하였고, 그중 한 세션으로서 ‘광장의 문화정치’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저는 1부 세션 ‘광장의 문화정치’의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한영인 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 포럼의 기획은 2025년 한 해에 비평적인 경향과 문학 경향을 정리하고, 올해의 문학 트렌드나 전망 같은 것을 나눠보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키워드와 주제 같은 것들이 나왔고, 논의한 끝에 여기 있는 세 명의 평론가는 ‘광장’이라는 키워드를 채택했습니다. 이제 두 평론가께서 간단한 소개와 ‘광장’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지희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가 강지희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2024년 12월 이후부터 작년 초까지,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한국문학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중요한 흐름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으로 문학은 액체성의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게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말이 어떤 경향성이나 트렌드를 따라가야 된다는 의미가 아닌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고, 그 여파 속에서 쓰여질 수밖에 없는 게 문학이기에 일련의 사건이 앞으로의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 2015년과 2016년에 거쳐 광장에서 많은 집회가 있었고, 그 후에 한국문학 안에서도 퀴어 페미니즘의 거대한 물결이 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고, 그렇다면 10년만에 열린 광장을 고찰해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느꼈던 이 충격의 여파가 어떤 방식으로 문학 속에서 흡수될 수 있을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홍성희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홍성희라고 합니다. 최근에 우리가 관통해 오고 있는 시간들을 지금 길을 걸으면서도 플랜카드를 통해 계속해서 확인이 가능하잖아요. 어떤 언어적인 현장들 그리고 사람들의 몸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현장들에서 우리가 어떤 것들을 공통적으로 감각하고 있고, 동시에 얼마나 다양하게 쪼개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나눠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응원봉, 광장, 극우 청년, 태극기. 이렇게 묶어 부르는 말들이 유통되고 있는 가운데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쪼개서 펼쳐보고 싶습니다. 한영인 네, 말씀 주신 것처럼 이 광장과 한국문학이라고 하는 키워드 내에서 거느릴 수 있는 주제가 상당히 많은데 저희가 그중에서 몇 가지를 좀 추려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주제에서 우선적인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한국문학은 이 계엄과 광장의 시간을 어떻게 통과하고, 어떻게 응답했는가’입니다. 아시다시피 재작년 12월에 비상계엄이 있었고, 바로 그다음 해가 2025년이었기 때문에 문학이 재빨리 어떤 사태를 담아내기에는 상대화하고 의미화하며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에세이나 일지 같은 형식을 통해서 굉장히 재빨리 대응했다고 생각합니다. 계간 『문학동네』는 2025년 봄호에 특집을 마련했고, 계간『문학과사회 하이픈』 봄호에서도 곧바로 여러 작가의 목소리를 담아냈습니다. ‘씀’ 같은 잡지는 하반기에 특집을, 계간 『창작과비평』에서도 2025년 봄호에 ‘K-민주주의 약진’이라는 특집으로 이 사태를 다룬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특집들을 일별하다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이 잡힙니다. 제가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작가와 평론가들이 계엄과 광장에 대해서 쓴 글을 보고 ‘한국문학과 문학인들이 계엄과 광장을 개인적으로 이렇게 통과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기보다 거기서 나타나는 ‘어떤 혼란과 막막함, 두려움, 모순 이런 것들이 어쩌면 2026년 혹은 그 이후의 문학 창작까지도 연결이 될 수 있겠다. ’라는 그런 징후들이 다채롭게 나타나는 것을 보고 앞으로의 한국 문학계 전망을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특집들을 읽으면서 새삼 이 지면들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발언이나 다른 지면보다도 이 문학 계간지를 통해서 문학인의 목소리로 재반추한 계엄과 광장의 시간들이 저는 어떤 다른 글보다도 생생하고 또 의미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여기 계신 두 분께서도 각자 『문학과사회』, 계간 『문학동네』를 통해서 기획을 구성하고 특집에 관여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기획으로 임하셨는지 좀 듣고 싶습니다. 강지희 저는 지금 계간 『문학동네』 기획을 하고 있는데요. 사실 이 기획 자체가 굉장히 특이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금 한영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문학으로 승화해서 발화할 수 있을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잖아요. 그렇다 보니 예전에도 에세이 형식으로 밀착된 글을 받았어요.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2014년에 『눈먼 자들의 국가』라고 나중에 단권으로 발간된 작품이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 특집에 실렸던 글이에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2025년 봄호 기획을 했는데 실려 있던 글 중에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주 작가의 글이었어요. 이희주 작가는 최근에 K-POP 응원봉과 관련한 인터뷰집을 기획해서 내기도 했는데요. 작가가 던진 질문은 이런 내용이었어요. ‘팬질과 정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자신에게 팬질이라는 것은 죽음도 불사할 사랑, 빠순이의 사랑이었고 사실은 조금 폄하되는 사랑, 개인적인 사랑 이런 것이였는데 그런데 그걸 넘어서 이 응원봉의 빛을 다 같이 들고 있었을 때, 그리고 내가 시민으로서 감각을 느꼈을 때, 그것이 어떤 종교적인 에로티시즘 같은 것과 맞물려 팬질 했을 때의 경험과 동일한 몸의 감각 같은 게 느껴졌다는 거예요. 이게 너무나 생생한 현장의 언어들이어서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동안 문학장에서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이 ‘미학과 정치가 함께 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었거든요. 그간 1960년대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 같은 것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기도 했었는데, 어쩌면 ‘광장에서 나왔던 응원봉의 빛과 그것을 함께 할 수 있는 몸의 감각들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일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홍성희 저는 계간『문학과사회』 편집 작업에 참여하며 그 시간을 기록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동인들과 함께 많이 이야기 나눴고, 그 과정을 바탕으로 기획을 함께 만들어갔습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이 기획 자체가 아주 독특한 것은 아니었고, 황정은 작가가 예전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줬던 형식을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다시 되불러오면서 시간을 연결하는 동시에, 지금에 집중하는 가장 중요하고 좋은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기획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획을 만들 때에는 너무 근거리이기 때문에 이 근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에 집중하게 됐다면, 작가님들의 글을 다 모아놓고 보았을 때 저희가 가장 좀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얼마나 다양한 위치에서 그 순간을 맞닥뜨렸고,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생활인으로서 그 시간을 관통해 오고 있는가’에 대한 어떤 차이의 지점들이었어요. 계간『문학과사회』 기획만이 아니라 계간『문학동네』, 반연간지『쓺』, 계간『문학들』처럼 다른 문예지들에서 유사한 형태의 기획이 계속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재미있게 보게 된 것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그 순간에 대한 기록을 시작할 때 엄마로서 내가 어떤 공포심을 느꼈는지로 시작하시고, 어떤 분들은 작가로서 내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며 시작하시고 또 다른 분들은 강단에 서는 사람으로서, 공적인 자리에서 사회자로서의 기능을 해야 되는 사람으로서 ‘내가 나의 언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는 내용도 있었어요. 이렇듯 다양한 지점에서 우리가 이 순간을 맞닥뜨리는 장면들이 다채롭게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들이 광장에서 모이거나, 모이지 않을 때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가를 지켜볼 수 있는 게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저는 12월 3일 다음 날 다른 지역에서 강의가 있었어요. 대학에서 하는 교양 글쓰기 강의인데 아침 9시 수업에 딱 아이들이 들어왔고,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제가 첫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전날 밤의 기억과 그때의 마음 때문에. 그래서 그때 깨닫게 됐어요. ‘나한테는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이 되게 되게 중요하구나.’ 제가 비평가로서나 생활인으로서 주변 사람들이랑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비평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정돈해서 꺼내는가보다 ‘교육 현장에서 연령대가 다르고 또 아마도 다양한 관점과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을 친구들이 모여 있는 아주 작은 광장이라는 교실 안에서 내가 어떤 언어를 만들어 낼 것인가가 저에게 아주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일지라는 형식이 그때 잠깐 사용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굉장한 폭력을 경험한 이후에 평소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었던 방식 그대로 반응하게 된다기보다는, 그 폭력을 소화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가 나를 이 폭력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세울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자기 정체화 과정이 계속 다시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그런 자기 정체화에 있어서 가장 엄밀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훈련을 스스로 해온 사람들이 작가들이라는 점에서, 작가들이 남긴 일지들이 혹은 남겨가고 있는 일지들이 계속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영인 네, 말씀하신 다양한 기획들이 저희가 대화를 나누는 곳곳에서 다시 한 번 호출이 될 텐데 역시 키워드와 포커스는 광장에 다시 맞춰지게 될 것 같습니다. ‘다양한 위치와 주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통과한 광장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 광장을 통과한 이후에 남은 문제는 무엇이고, 그 남은 문제를 앞으로 한국문학은 어떻게 대면해야 될 것인가’ 이런 것들이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광장에 대한 저마다의 의미화가 있겠지만 저는 사실 제주도에 살기 때문에 한 번도 광장에 나가보질 못했어요. 세상이 좋아져서 유튜브도 있고, 페이스북도 있고 다행히 실시간으로 광장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광장에 직접 나가보지 못했다는 점이 매우 아쉬운데 새삼 광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의 광장은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광장’이라고 했을 때, 한국 문학사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최인훈의 『광장』이겠죠.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제목은 알지만 거기서 광장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정확히 몰라요. 그런데 사실 여기서의 광장이 긍정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작품에서의 광장은 전체주의적인 느낌인 거죠. 사람들을 광장으로 내보내서 밀실을 허용하지 않고, 너의 의견과 정치적인 견해, 이데올로기를 낱낱이 밝히라고 강요하는 어떤 정치 권력과 밀접하게 붙어 있는 전체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어요. 밀실은 또 그와 반대되는 개인주의적이고 퇴폐주의적인 한계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유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런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저는 꽤 오래 지속됐다고 봐요. 그런데 이번 광장을 보면서 느낀 건 더 이상 이런 광장과 밀실의 이분법이 지속되기는 어렵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한국의 광장이 일종의 시민 교육 기관처럼 보였어요. 사회에 대한 다양한 요구와 상상을 급진화하고, 제출하고, 경합하고, 실험해 보는 공간으로서 다른 나라의 광장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다른 나라의 광장은 항의, 봉기, 저항 이런 게 많이 떠오른다면 한국의 광장은 시민 교육적인 측면도 되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광장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기반 중 하나는 광장의 역사를 시민들끼리 서로 인식하고 알아보는 마음과 감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작과비평 2025년 여름호에 황정아 평론가가 발표한 「역사적 감정의 존재 양식과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글이 있거든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바탕으로 역사적 감정을 탐구한 내용인데 우리가 지닌 역사에 대한 태도에는 머리로 생각하는 인식만이 아니라 축적된 역사를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감정도 존재하며, 이 감정은 동료 시민들, 동료 주권자들, 광장을 만들어 온 사람들에 대한 우애와 경외심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번 광장을 통해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민주주의적인 감정을 느꼈을 텐데요. 제가 문학 평론가로서 난감해지는 지점은 이 민주주의적 감정을 시민으로서 광장에서 느끼는 것과 작가가 이것을 작품으로 다루는 것는 굉장히 다른 문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같이 논의하고 검토한 작품이 성해나의 「스무드」라는 작품이었는데 「스무드」를 읽어보신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 작품이 광장을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근데 그 광장은 태극기 집회의 광장이에요. 미국 교포 출신인 주인공이 한국에 와서 우연찮게 태극기 집회에 휘말리게 되는 소설인데 이 사람은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으로 깊어진 민주주의적 감정 같은 것들을 소거하고 그것과 다른 바탕에서 아이러니한 장면을 만들어 내는 소설인데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적 감정이 없다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휘말릴 수 있는지를 또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 자체는 광장 이전에 쓰여진 작품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이후에 광장을 이야기할 때도 참조하고 이야기할 점이 많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 계신 두 분께서는 이 작품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홍성희 어제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데 「스무드」라는 이 작품이 되게 복잡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방금 한영인 선생님이 얘기해 주신 것처럼 어떻게 보면 구도나 이 소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은 정말 단순하고 어떤 감수성이나 질적인 정보 같은 것들이 전혀 없는, 철저한 외부인이 와서 탐색하게 됐을 때 이 내부가 어떻게 비추어질 수 있는가를 아주 담백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안에서 성해나 작가가 단순함을 계속 꼬기 위해서 사용하는 장치들을 보면 언어 조각들이 되게 많이 흩뿌려져 있어요. 이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때 ‘듀이’라는 외부인은 미국의 백인 중심 사회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자라면서 본인이 동양인이라는 자각을 거의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표면에 한국 사람들과 같이 비칠 때, 이 무수한 동양인들과 자신의 피부색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그렇게 피부색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어떤 대화에서는 “나는 미국인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또 사람들이 “당신은 한국인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김치 먹어보라는 식의 문화적인 코드를 계속 건네면 자신은 한 번도 한국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여기면서도 ‘나의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나의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다.’라는 의식을 끊임없이 불러옵니다. 이런 식의 언어들이 계속 연결될 때, 이 사람에게 부여된 외부성이 얼마나 언어적으로 상상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정도로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이 정도로 민주주의적 감정이 없는 사람을 상상하는 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던지게 만드는 소설인 것 같아요. 그리고 작품에서 이 사람은 예술가의 비서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 예술적인 조예가 엄청 깊은 거죠. 그런데 이 예술가라는 사람이 전 세계적 예술의 흐름 혹은 문화적인 흐름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로 ‘나는 K-pop에 대해서 전혀 몰라요.’라며 외부성을 철저하게 만들어 낼 때, 우리가 ‘외부인들은 모르는 우리만의 어떤 게 있어.’라고 가정하게 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일까를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소설에서 밈이 잠깐 활용되는데요. 백인 남성인 예술가가 ‘어떤 전쟁터에 가서 도와줄까?’라면서 트럼프가 손을 내미는 밈을 약간 우스운 듯이 그 비서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이전 같았으면 이 밈이 둘 사이에 일치되는 코드로 바로 이해돼서 웃음으로 처리되어야 될 장면인데 이 광장에서의 경험 이후에 듀이라는 인물은 바로 웃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어떤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 코드를 내가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반응할 것인가, 하지 말 것인가를 결정하게 되는 아주 미묘한 장면들이 보여질 때, 우리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코드는 무엇이고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코드는 무엇인지를 같이 조금 더 복잡하게 얘기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지희 앞에서 성해나의 「스무드」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어서 저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사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 몰랐거든요. 어떤 일을 하시는 분들이, 어떤 관심사와 어떤 기대를 가지고 오셨는지 사실은 너무 궁금하네요. 제가 광장과 여의도 집회를 나갔을 때는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안에 있어서 좀 못 느꼈던 것 같은데 3월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을 때는 충돌의 장면들을 몇 번 봤었어요. 전면적인 충돌은 아니었지만 다른 진영의 사람들이 지나갈 때 서로 외치는 거죠. 강한 비난의 말을 하고 드잡이질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말리고. 이런 장면들이 되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고, 대립하며 이해할 수 없었던 상대 진영에 대한 탐색이 몇몇 소설들에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김세희의 「엄종길 영감」이라는 단편이 나왔어요. 할아버지가 자신이 보이스피싱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준 한 남자의 말에 따라서 극우화되어 가고, 결국에 부정선거 관련해서 집회에 나가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쭉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재미있는 점은 우리는 보통 극우화된 대상을 정치적 이념에서 절대 만날 수 없는 어떤 극단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지만 사실 너무나 평범한 어르신이고 어떻게 보면 노화로 인해 돌봄이 필요해진 존재인 거죠. 자신의 판단력에 취약점이 생겼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생겨난 시점을 기준으로 해서 그는 가족들과 멀어집니다. 그 돌봄의 공백 사이로 끼어드는 것이 작품 안에서는 교회인데, 그 교회가 반공산주의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그게 이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닌 거죠. 그에게는 딸의 가족으로부터 은연중에 비위생적이고 교양 없는 대상으로 혐오되거나 배제 당해왔다는 강력한 울분의 정동이 있습니다. 이런 자신의 부족함과 수치심 같은 것들을 대리적으로 보충해 주고 나의 소속감을 만들어주는 공간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이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소설이었어요. 이 작품 외에도 위픽이라고 시리즈로 나오는 단편 중에 이미상의 소설이 있습니다. 『셀붕이의 도』라는 단편인데 너무 재밌거든요. ‘인셀’이라는 말을 혹시 아시나요? 비자발적인 독신이라는 말의 약자인데 스스로에 대한 멸칭까지 품을 정도로 되게 대범하고 ‘나는 테스토스테론으로 가득한 남자야.’라는 과장된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한 20대 젊은이의 이야기예요. 그는 ‘선언문 갤러리’라는 가상의 게시판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다가 모종의 사건 때문에 더 이상 그 갤러리에서 우정을 공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혼자 떠돌아다니다가 클래식 면도 동아리 같은 데에 들어가게 돼요. 작품에서 이 인물의 뒤틀린 남상성에 대한 환상을 묘사하는 것도 너무 재미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인물이 돈이 많은 외할머니를 돌보러 가서 만나게 되는 두 명의 인물이에요. 그 집에는 많은 돈을 받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 한 명과 미국 유학에 실패하고 돌아온 사촌 누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은 돌봄 노동을 하는 사람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성보다 훨씬 섬세하고 말도 너무 잘하고 이제 말벗으로서 끝내주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남자 요양보호사가 있어요. 그 기술을 통해서 일반 요양보호사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거죠. 그리고 사촌 누나는 미국에서 호르몬 요법이라는 걸 배워와요. 그래서 이 남자 주인공한테도 “테스토스테론 필요하면 좀 바를래?”라면서 좀 나눠주거든요. 사촌누나의 거뭇한 콧수염은 이제 남성적 외양과 의례가 의학적 선택을 통해 얼마든지 생산되고 변형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남성성의 중핵에는 정치적 선언문과 미국이라는 공간이 놓여 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돌봄 노동의 경제이고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학이며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자원화할 수 있는 자기 연출의 기술이에요.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남성성에 대한 환상이 어떻게 붕괴 직전에 이르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2030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에 단순한 이분법적 변별이 이루어지고 있잖아요.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걸 넘어서 ‘우리가 문학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고, 지금 말씀드렸던 이 두 편의 소설이 참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한영인 네, 저도 이미상 소설 『셀붕이의 도』를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 읽었는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 소설의 경향까지 포함해서 얘기하자면 표적, 과녁을 굉장히 종잡을 수가 없다. 이번 소설에서 미희라는 누나가 논 바이너리와 같은 얘기를 하잖아요. 사실 어떤 면에서는 광장의 요구이기도 했는데 그 소설에서는 좀 희화화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원화해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그런 인물이고 그래서 어떤 인물도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인물이 없고요. 그 안에서 각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순을 발가벗은 인물들이 계속 늘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상의 소설에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계속 읽다 보면 ‘이 과녁이 이렇게까지 종횡무진이어도 되나?’ 사실 그런 생각은 좀 들었던 것 같아요. 이 말씀을 왜 드렸냐면 계간『문학과 사회 하이픈』에 실린 여러 작가들의 그 일기 중에 이미상 작가가 쓴 일기도 있거든요. 저는 그 일기도 굉장히 같은 면에서 재미있었고 징후적으로 봤습니다. 성해나의 「스무드」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셀붕이의 도』라는 작품하고도 통할 것 같기도 해요. 이미상 작가가 일기에 이런 얘기를 해요. 본인이 광장을 배회하면서 소설가니까 어쩔 수 없이 소설을 떠올리게 되겠죠. 그래서 이런 인물도 떠올려보고 저런 인물도 떠올려보면서 소설의 싹을 잡아가는데, 그중에 떠올린 사람이 처음 집회에 나가 본 ‘자의식 과잉자’라는 인물을 떠올린다고 얘기를 해요. 이 사람은 광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광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 되게 전전긍긍하며 신경 쓰는 사람인 거죠. 그러다가 단순히 부끄러워하고 긴장만 하는 게 아니라 나중에는 분노하게 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나를 챙겨주지 않지?, 왜 자기들끼리만 음식을 나눠 먹지?, 왜 나는 환영해 주지 않지?, 방석도 자기들끼리만 나눠 갖지?’ 그래서 자신을 환영해 주는 곳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런 면이 「스무드」와 구도가 비슷하죠. 정치적인 것 없이 광장에 왔다가 다른 광장으로 건너가게 되는 이 인물에 대한 내면을 그리고 싶다는 얘기를 했어요. 물론 이 인물은 작품의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작품과 똑같이 얘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 작품으로 변환되는 과정에서는 많은 변화를 겪을 것이고, 이미상 소설가도 현실적인 맥락을 부여해야 한다는 약간의 유보적인 얘기를 하고 있긴 해요. 저는 만약에 이 아이디어가 소설화된다면 이 맥락을 오히려 부여하지 않아야만 살아날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별개로,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광장이 단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광장과 문학’이라고 할 때에 한국문학이 통과한 광장은 여의도의 광장인 거죠. 그곳에서 일어났던 빛의 혁명과 연대 이런 것들이 분명히 민주주의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요소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작가들의 무의식적인 발상이나 착상 같은 것을 보면 작가들은 이미 피부로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광장은 단일하지 않고, 분열되어 있고, 우리는 적대하고 있다는 감각이 있어서 이번 세션 주제를 ‘광장의 문화정치’라고 했을 때 저희가 주요하게 다룰 것은 광장 내외부의 이질성과 차이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강지희 한영인 선생님이 에세이에 덧붙여주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단편이 떠올랐었어요. 이 작품은 1991년 5월 투쟁을 다루고 있는 단편인데요. 김소진은 당시에 신문 기자였고 이듬해인 1992년도에 바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성균관대 김귀정 열사의 시신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서 민주화 투쟁을 하는 한 무리가 있었고 거기에 함께하는 또 다른 노동조합 무리들이 또 있었어요. 그런데 그 노동조합 무리들을 김소진은 애정을 담아서 ‘밥풀때기’라고 불렀는데 그들이 상당히 폭력적이에요. 그러니까 민주화운동 세력들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계몽의 대상으로서의 민중들이 전혀 아니라 거칠고 멋대로 행동하는 무리인 거죠.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태극기 부대의 기원 같은 어떤 존재들이 그 작품 안에 이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응원봉 이야기로 잠깐 돌아오면 응원봉이 중요한 ‘빛의 혁명’의 상징이 되면서 여기저기에서 응원봉을 상징물로 포스터에 쓰는 일들이 꽤 있었어요. 근데 ‘무지개 행동’이라는 성소수자 차별 반대 집단에서 집회 홍보물에 엔시티라는 아이돌의 응원봉 이미지를 썼고 그것에 대한 거센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홍보물이 삭제된 적이 있었어요. 다른 곳에서도 당연히 응원봉 이미지를 많이 썼었는데 유독 이 직접적인 항의가 많이 쏟아진 곳이 어디였는가를 보면 결국엔 ‘퀴어’라는 존재들이 여전히 2030 여성들의 대표성 안에서 위협이 되고, 의미를 훼손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이후에도 터프 논쟁이나 온라인상에서의 트랜스 혐오는 계속해서 있었던 일인데 긴장과 배제의 논리가 이번 광장에서도, 특히나 찬양받는 이 응원봉과 관련해서도 나왔다는 점은 짚어봐야 할 점이라 생각합니다. 홍성희 연결해서 순수성이라는 게 많이 가정되기 때문에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면 윤리적으로도 올바라야 한다.’라는 엄격한 잣대가 부여된 순수성 담론에 저항하기 위해서 광장 안에서도 차별과 혐오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문제적으로 바라보는 담론이 계속 나오게 되는 것 같은데요. 방금 강지희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역사가 계속되어 왔고 문학 작품들이 그런 현장성을 많이 밝혀오기도 했습니다. 이 문제들을 바라보다 보면 잠깐 말씀드렸던 밈이라는 게 중요하게 작동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단마다 가지고 있는 밈과 그것에 대항하는 특정 밈이 있는데 그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완전히 다르게 전유해서 쓰기도 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이 밈이 가질 수 있는 정치적 효과가 굉장히 크고 또 동시에 속도가 빠르고 그 코드를 공유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도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화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문화를 폐기해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밈의 문화가 있고, 문학이 천천히 하고 있는 어떤 일들이 있다면 그 사이에 또 다른 방법론들을 계속 마련해 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까도 잠깐 언급된 이희주 작가의 글에 ‘시위 현장에 나갈 때마다 무수한 스탠딩 코미디들을 봤다.’는 아주 짧은 문장이 있는데요. 스탠딩 코미디라는 어떤 농담의 방식, 그런데 동시에 비판의 방식이기도 한 여러 방법론들을 상상해 가는 일이 지금 한국문학 장에서도 그렇고 한국 사회에서도 그렇고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이어서 한번 말씀드려 봅니다. 한영인 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현장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날씨도 추운데 와주셨는데요. 관련된 토픽에서 궁금하거나 질문하실 내용이 있으면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석자 1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문학의 간격을 좁히면서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 참여하였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오늘 주제에서 ‘광장’이라는 얘기를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희가 생각할 때 아주 오래전 학생 운동이랑 시위가 많았을 당시의 세계를 문학이 다루는 방식은 폭력성에 초점을 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이후에는 또 집단적인 우울감 또는 아픔, 상처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제 최근에 있었던 사태와 관련해서는 어떤 식으로 지금 문학이 이거를 표현하고 있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아직 그 사이에 나온 작품이 많이 없기도 한데 경향이나 바라보는 예상치 정도를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강지희 어떻게 보면 아직 작품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얘기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2025년부터 문단에서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은 ‘남성성’에 대한 탐구인 것 같아요. 물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안에서도 이 남성성에 대한 탐구가 계속 이루어져 왔는데, 여기에 더해 한국 사회의 특수한 경제적 현실이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플랫폼 자본주의라는 것이 우리 삶에 긴밀하게 침투해 들어왔고, 다들 어느 정도 투자자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지금 이 돈을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적금만 해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감각, ‘벼락 부자’, ‘벼락 거지’ 같은 말들이 드러내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수탈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자산화시키는 것과 연결해서 지금의 청년 남성들이 왜 다른지 사회학자들의 여러 진단과 함께 문학 안에서도 이 남성성을 어떻게 탐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고 있는 게 보이고요. 대표적으로는 서장원 같은 작가의 소설들이 이 남성성에 대한 다채로운 방식의 탐구를 적극적으로 해나가고 있는 것 같고, 앞으로도 이런 방향의 소설이나 담론들이 계속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영인 이건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이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가 작년에 나온, 특히 봄에 나온 여러 작가들의 에세이를 기본 자료로 채택한 이유는 거기서 나오는 어떤 정조들과 감정들이 이후에 나올 작품과도 연결이 좀 되는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해서 주목했었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에는 폭력이었고 그다음이 우울이었다면 저는 그다음은 냉소일 것 같아요. 언뜻 잘 안 맞을 수도 있죠. 왜냐하면 작가들은 이 사태에 뜨겁게 분노하고 광장에 참여하고 굉장히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줬는데 저는 왠지 그 내용을 다 읽고 나니까 ‘다음에는 냉소겠다.’ 하는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왜 ‘냉소’라는 단어가 떠올랐는가 하면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커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글을 읽다 보면 물질적인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이 균열된 사회에 대한 즉물적인 두려움이 왔던 것 같아요. 특히 서부지법 폭동사태를 보고 여전히 30%가 넘는 이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되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2가지 공생의 감각이 이 지경까지 왔구나, 어떻게든 함께 살 방법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문제의식이 싹 트는 반면에 ‘근데 어떡하지, 그게 가능할까’라는 게 있죠. 그런데 이게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에는 누구나 다 인식적이고 감정적인 한계가 있으니, 사람마다 이 사태와 세계를 수용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저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어느 것이 더 강할 것인지에 따라 경합할 거라고 봐요. 제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아마 공존을 고민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냉소가 당분간은 좀 더 크지 않을까 막연하게 그런 예측을 한번 해봅니다. 홍성희 이 냉소와 남성성이라는 단어를 연결하고 있는 작업이 많이 보이는 것 같은데요. 냉소적인 태도라는 것을 조금 더 쪼개어서도 이야기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단적인 감정과 분노를 경험하고 나서 약간의 소강 상태에 닿게 되며 아주 급격하게 차가워진 이후에 이 감정을 어떻게 연결해서 갈 것인가를 얘기하다 보면 어떤 장에서는 모든 걸 통제해야 된다는 극강의 제어 방향을 제안하고, 어떤 방향에서는 완전히 무관심해져 모든 것으로부터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는 감정들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냉소는 두 방향 다 작동할 수 있는 어떤 단어인 것 같아요. 많은 문제를 다 통제해 버리고 완전히 싹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세계를 안전하게 만드는 종류의 냉소가 있고 냉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로 선택하는 그런 방향이 있습니다. 이 두 방향 사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계속 보려고 하고 끊임없이 살을 맞대고 사는 사람들과 어떻게 우리가 같이 나아갈 것인가, 이 사회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려고 하는 장면들이 곳곳에서 보이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는 폭력 자체만 문제가 된다거나 폭력 이후의 감정 자체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길항해 온 우리의 역사를 관통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금 확인된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조금 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편인 것 같습니다. 참석자 2 저도 도서관에서 잠깐 일을 하고 있는 평범한 독자인데요. 우리나라의 광장이 지금은 일종의 시민 교육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최근에 봤던 다양한 뉴스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이란인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이제 한국에 머무는 친구라서 여러 뉴스를 공유하고 저도 돕고 있긴 한데, 이란의 광장은 아무래도 한국의 광주와도 같은 어떤 폭력의 시간을 겪고 있고 그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그 친구만큼은 아니겠지만 고통을 겪고 같은 죄책감과 슬픔을 겪었지만, 우리는 광장의 시간을 지났고 어찌 보면 이제 소화가 됐잖아요. ‘소화가 된 상황이라서 내가 여건이 되니 할 수 있는 위선’인가. 만약 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면 내가 그때도 이만큼 그 친구에게 공감하고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제 사건에 대해서 정보라 작가님께서 쓰셨던 글은 짧게 봤었는데 한국문학 안에서도 어떤 흐름 같은 것들이 작품으로 나오고 있는지 아니면 비평에 영향을 끼치는 그런 흐름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영인 말씀하신 것처럼 최근에는 이란의 문제가 심각해졌고 그 전에는 시리아도 그랬죠. 보통은 유혈 진압과 많은 사상자와 폭력 같은 것들을 거느리기 마련인데 한국도 물론 유혈의 역사가 있지만 현대에 들어 꽤 평화적으로 민주화로 나간 경우 같습니다. ‘왜 중동에 있는 국가의 광장은 많은 피를 흘릴 수밖에 없게끔 여기까지 왔는가’에 대해서 문학이 오랫동안 다뤄왔던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표명희 소설가의 『버샤』라는 작품이 난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고요. 저는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중동이라고 하는 여러 국가들이 갖고 있는 정치 체제의 불안정성과 그 불안정성이 파생한 일종의 내전적 상황. 그 내전적 상황 속에서 국가가 위기에 처하고 난민들이 대량 발생하는 상황. 물론 문학이 그 모든 층위를 다룰 수는 있겠지만 아직 한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난민을 매개로 한 휴머니즘적인 작업이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광장과 봉기라고 하는 관점, 또 국가 폭력과 학살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여러 비평가들이 시야를 넓혀서 연결해 볼 지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참석자 3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공부하고, 시 평론을 쓰고 있습니다. 우선 세 분 선생님의 대담 굉장히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세 분 모두 오늘 소설 평론을 주로 하셔서, 오늘 동시대 한국 소설들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저는 시에 대해서도 계속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생각했을 때 소설 같은 경우는 이제 확실한 플롯을 가지고 전개되는 문학 장르이다 보니 최근의 정치적인 맥락 아니면 현장성을 담아내기에 조금 더 용이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설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만큼 시도 적극적으로 이 현장성을 담아내고 있는가 하는 그런 회의가 들 때가 많더라고요. 그리고 만약 시가 적극적으로 지금의 담론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읽는 사람의 자의식이나 역사적인 감정이 너무 많이 개입되지 않는가 하는 반성도 많이 해보고요. 그래서 앞으로 제가 스스로 더 고민하고 성찰해야 되는 문제겠지만, 그래도 어떻게 보면 한국문학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시에서의 현장성을 우리가 어떻게 사유하면 좋을지 고견을 여쭙고 싶어서 질문드리게 되었습니다. 홍성희 제가 시 평론을 주로 하고 있는데요. 선생님과 같은 고민을 저도 이 자리를 준비하면서 했던 것 같아요. 작품 얘기를 소설 중심으로 하다 보니 시도 같이 얘기를 하고 싶다는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찾아봤는데요. 오히려 제가 엮으려고 해서 엮이는 것 같은 텍스트들은 많이 있어도, 명징하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을 저는 빈 공간 혹은 어떤 비어 있는 자리라고 느끼기보다는 작가들이 일지를 썼던 것처럼 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경험의 맥락들 혹은 그 감정의 맥락들을 반드시 서사적인 현장의 문제랑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장면을 만들고 맥락을 구성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각자가 만들어 낸 맥락들을 갑자기 이 현실 맥락이랑 접속하려고 하면 읽는 사람의 시선이 너무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것인데, 그런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오히려 우리 안에서 지금 공유되고 있는 감정이라든가 문제의식 같은 것이 다른 맥락들 속에서 어떻게 배치되고 연결될 수 있는지를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최근에 많은 시인들이 상품명을 가지고 와서 시 제목으로 쓴다든가 아니면 인기를 얻고 있는 웹툰이나 영화, 웹소설 같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시 안으로 끌어와서 자기 안의 어떤 서사성을 만들고 그 서사성을 오히려 비틀어서 자기만의 시적인 세계를 구축해 가는 방법들을 많이 쓰고 있어요. 상품이라는 게 사실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시인들이 선택하는 특정한 상품들의 혹은 어떤 서사들, 매체들의 상품성이라든가 독자들이 거기에 접속하는 방식이 어떻게 시인들의 시선에서 새롭게 상상되거나 재배치되고 현실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비트는가 이런 지점들을 같이 얘기 나눠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광장의 문제와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광장을 꾸리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화적인 동질성과 공통 감각을 굉장히 적극적으로 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영인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김현 시인의 시가 광장과 퀴어를 엮어서 나름의 현장성을 잘 살린 시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생각해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만 그런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시야말로 자칫 얘기하면 이것이 너무 직접적이고 즉물적으로 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또한 다양한 연결의 과정에서 시간이 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자리를 마무리해야 될 시간인데요. 사실 광장이라고 하는 키워드를 통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나온 작품들이 많지 않고 또 오히려 그 기미를 통해서 미래를 전망하려고 하는 자리였다 보니까 미진하기도 하고 아쉬운 지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오늘 나눈 얘기들 좀 기억해 주시면서 앞으로 나올 작품들 많이 지켜봐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러면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안 그래요?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됨으로써 말이죠.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감독들은 소리를 두려워했고 또 색을 두려워했죠. -아핏차퐁 위라세타쿤1) 1. 휩쓸리는 시간성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모두가 조금씩은 우울증과 ADHD 환자가 되어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엔데믹 시기부터 서점가의 주요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여러 곳에서 호출되던 책이 애나 램키의 『도파미네이션』과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두 책은 공통적으로 신생 인류의 지각 방식을 우려한다. 인터넷에서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멀티태스킹을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도파민에 중독’되고 ‘집중력을 도둑’ 맞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글로벌 테크 기업이 조성하는 환경에 의한 것이자, 개인의 선호와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로 흡수하는 ‘감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문제이지만,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집중과 몰입을 위한 여러 노력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집중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가치 있는 자본으로 떠오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채찍질하는 자학적인 시대 정신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무엇이지 않는가? 조너선 크래리에 따르면 이는 1800년대 중반 이래 파편화와 충격으로 이루어진 ‘주의분산’의 시대 이후 개인을 정의하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다. 산만함 자체가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환경으로 세팅되자, 서구적 근대성은 주의 관리 기술을 중점에 두고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형성하게끔 했다. 여러 경험들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기보다,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노력으로 “자율적으로 선택하며 세계를 창조하는 주체”2)에 긍정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은 관찰자 상은 이미 불균질해진 인간의 지각 경험을 표면적으로 잠시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몰입된 상태인 ‘정지suspension된 지각’은 산만해진 근대인의 지각 방식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고, 현재라는 명백한 필연성을 해체시킬 수 있는 조건들을 낳으며 규정지을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주의’라는 것이 에피스테메처럼 역사적으로 발견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코로나를 거치며 비대면 기술들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과 ADHD에 대한 사회적 불안이 함께 증폭한 것은 자연스럽다. 맞춤형 알고리즘은 주의분산의 환경을 한층 더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에 비례해 집중력이나 창의력 같은 인간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에 대한 환상 역시 강화되고 있다. 이 가운데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일상 전반의 속도가 빨라지며 휩쓸리는 시간성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작 속도는 분명 불안감의 요인이 되고 있다. 물론 현재까지의 GPT는 대화가 전환될 때마다 기존 서사를 유기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기에, 질적으로 완결성이 높은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지는 못하다. 또 언어 예술의 특성상 양적으로 확장된다고 해도 그 군집 자체에서 힘을 발견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은 예술작품의 의미를 사물성이나 내부 구조에 기반하는 데서 탈피해, 네트워크에서 발현되는 이미지 군집에서 행위성을 찾았다.3) 그러나 언어 예술을 감각하는 방식은 시각적 경험에만 의지할 수는 없다. 작품의 의미를 작품의 맥락과 내부 형식 분석에 국한시킬 이유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언어 해석의 바깥으로 완전히 탈주해버리기는 어렵다. 단순히 양적 팽창이 정치적 가능성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창작자’나 ‘도구’ 중에 어느 쪽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창작 능력을 단순히 기계적인 지능이나 모방이라 간주하며, 그 반대편에 인간의 감정과 비판 능력을 두어도 될까. 인간의 비합리성이나 비효율적인 면면이야말로 예기치 못한 구멍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야말로 기계가 모방 불가능한 중요한 특징이라고 믿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우리는 인간이 낸 비합리적 구멍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기계의 실수에서 불쾌와 무의미를 정확히 분별해낼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먼저 챗 GPT 이후 이를 활용한 여러 서사적 실험들 속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이 어떻게 인식되며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들을 재구성하고 있는지를 고찰하려 한다. 이후 인공지능과 변별되는 인간의 물리적 기반인 육체성과 시간의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최근 한국문학장에 나타난 예술가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정동과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석해보려한다. 2. 챗 GPT 이후, 예술의 기쁨과 슬픔 다큐멘터리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참여한 책 『태양과의 대화』의 1부는 아핏차퐁이 GPT3와 함께 생성한 픽션 ‘태양과의 대화’, 2부는 MIT 연구소 박사과정 학생인 ‘팻’과의 대화, 3부는 아핏차퐁이 1부의 최종 결과물을 내기까지 작성한 프롬포트를 싣고 있다. 이 구성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만일 앞으로 AI와 함께 픽션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상용화된다면 이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게 ‘예술작품’으로서 인식되며 분석 대상이 될 지점이 무엇인지 가정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3부의 프롬포트는 마치 ‘레시피’처럼 보인다. 누구나 저 프롬포트를 사용한다면 유사한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며, 중간 과정에서 자유로운 변형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과물에서 나오는 미학적 평가나 감상자의 쾌감이 세계적인 예술가에게서 나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인가? 동일한 레시피만 있다면 셰프의 요리를 집에서도 얼마든지 유사하게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먼 훗날 언어 예술은 프롬포트라는 레시피로 통용될 수도 있겠다. 때로 예술가가 직접 만든 작품을 찾아 특별한 경험을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에게 더 최적화된 방식으로 가장 개인화된 언어 예술을 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제각기 다른 가치관과 취향으로 만들어진 알고리즘의 세계 속에서 유영하듯, 앞으로는 그 세계를 이루는 컨텐츠의 내용까지도 인공지능을 통해 맞춤형으로 조율될 수 있다. 여기까지만 가정한다면 거대한 매트릭스에 갇혀 인간이 왜소해지는 디스토피아가 스쳐지나가기도 하지만, 『태양과의 대화』는 글의 서두에서 인용했던 아핏차퐁의 말처럼, 챗 GPT라는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무성 영화 시대 감독들이 소리와 색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의미 없는 불안을 버릴 것인지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불가피하게 인간의 본성을 다시 재사유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2부에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거짓말이 우리 본성의 일부”라는 아핏차퐁의 말은 중요하다. 이는 AI가 만들어내는 허구에서 정확도와 유려함 등을 따지는 일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때 거짓말은 인간의 욕망에서 기인하는 고도의 기술일 수 있지만, 그 욕망의 시작점을 지운다면 결과물만으로 사실상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허구를 직조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욕망과 사유가 작동하는 방식의 독특한 개별성 역시 환상일 수 있다. 이는 아핏차퐁 자신이 창조적인 순간에 몰입해 있을 때, “깨달음은 자아를 잊을 때만 오는 것 같”다고 말하는 지점과 상통한다.4) 인간 창작자의 자아 역시 안개처럼 흘러다니고 해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19세기 낭만주의에서 발현된 ‘천재’나 ‘영감’ 개념을 중심에 두고 인간의 창의성만을 특별한 것으로 볼 이유는 전혀 없다. AI가 데이터의 지도를 기반으로 이전에 본 것이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은 오류라기보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조합을 만들어내는 생성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한 현실을 재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과 결과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환각은 인간 창작에서의 실패나 지연과는 다른 성격을 지닌다. GPT-3의 환각은 이전의 오류가 이후의 생성에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매번의 응답은 이전의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 비일관성은 인간 창작에서의 지연이나 좌절과 달리, 즉각적으로 무한히 갱신되는 변형의 연쇄에 가깝다. 연구원 팻은 GPT-3에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다른 차원들을 포함한 수십억 개의 차원이 존재하고(‘유령차원’), 이를 통해 숨겨진 패턴의 지도를 생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 인식 너머를 거쳐 나오는 결과물에 대해 기존에 인간이 구성해온 미적 가치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오히려 AI가 가지고 있는 “확장된 의식”이자 “집단의식”은 새로운 서사적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 책 『태양과의 대화』를 번역한 이계성은 GPT-3를 이미 하나의 독립된 창조자로서 바라본다. 이 대화적 실험의 핵심은 GPT-3가 보여주는 “자아의 변동성”에 있다는 것이다.5) “다수의 태양이 존재하는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이라는 전통적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GPT-3에 제공되는 각각의 입력값은 일방적인 창작의 개념에 반하며 메기고 받는 역학 관계 속에 존재하는 프롬포트이자 응답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수신자가 아니라, 취조보다는 협업적 발상에 더 가까운 서사적 역학의 전달자와도 같은데, (…) 작품 속 GPT-3의 환각적인 대답들은 텍스트에 담긴 정체성과 진실의 일시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등장인물이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경계가 녹았다가 굳어진다. 이러한 가변성은 AI의 변화무쌍한 특성을 반영하며, 나아가 점점 더 복잡하고 유동적으로 변하는 디지털 시대의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다.”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한 번에 정해진 수의 단어 또는 토큰만 처리 가능하기 때문에, 프롬프트가 입력될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바뀌는 상황을 이계성은 재창조와 증식으로 바라본다. 여기에 놓인 가변성과 비일관성을 결함으로 간주하기보다 대화적 실험의 흥미로운 일부분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받을 때, 우리는 인간 창작자 역시도 분열되어 있음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게 된다. 창작자는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이 아니라, 생성 과정에 잠시 걸쳐지는 하나의 통과점이 되는 듯 보인다. 2023년 2월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챗 GPT와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쓴 정지돈의 후기 역시 이계성의 논지와 상통한다. 그는 소설 속의 문장 중에 자신이 쓴 것과 챗이 쓴 것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다고 본다.6) 소설을 쓰며 가장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던 것은 챗의 능력보다 자신의 변화였다고 말하는 작가는 “나도 모르게 챗지피티의 스타일로 소설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언급한다.7) 자신과 챗지피티 사이의 평평한 존재론을 전제하는 듯한 정지돈의 논지는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꿈꾸는 최근 신유물론의 이론들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은 곧바로 다른 장면과 충돌한다. 생성 신경망을 적극 활용하는 예술집단 ‘언메이크랩’의 전시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은 인공지능이 인간 중심성을 벗어나 진정한 외부의 행위자로 작동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카나리아의 특징을 추출해내어 새로운 카나리아를 만들어 내는 이 생성 신경망은 한편으로는 구태의연한 인간의 문화를 드러냈다. 대부분 나뭇가지에 앉은, 인간의 운동 범위와 지각 안에 있는, 혹은 인간의 사육과 관련된 카나리아 종이 주를 이루는 데이터셋의 사진은 동물원스러웠다. 나뭇가지에 앉은, 카나리아의 발은 종종 나뭇가지와 합쳐져 표현되었고, 인간의 눈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다량의 정보량을 가진 위상으로 표현되었다.8) 생성 신경망이 만들어낸 카나리아는 사실상 실제 자연계 속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하는 것들을 무작위로 조합하고 추출해 만들어진 새로운 생명체다. 이 책에 실린 그 카나리아 이미지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뒤틀린 발을 가지고 있다. 통계적 가중치로 만들어진 이 가상 카나리아에는 자신도 모른 채 금기를 어긴 존재 특유의 외설성이 느껴진다. 언메이크랩이 통찰력을 가지고 명명했듯 이는 ‘AI 식민성’을 드러내는 산물이다. 생물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인간을 드러내는 인간의 산물로 존재하는 이 이미지들을 언메이크랩은 “인과성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수정 가능하고 즉시 변할 수 있는 상관성의 시간”만이 흐르는 또다른 ‘일반자연Generic Nature’으로 읽는다. 9)<가정동물 신드롬> 작업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한다. 트레일캠에서 추출한 야생동물의 이미지와 박제 사진, 그리고 합성 데이터셋들을 학습시켰을 때, 사진들은 어느 순간 미묘하게 ‘가정동물’의 잠재적 형상을 띄며 생성된다. “인간 친화적인 동물들의 눈을 상속했을” 새로운 종들에 어린 다정함은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잔인한 일로 다가온다. 데이터랩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까지 촘촘하게 상속된 인간 친연성에서 “닫혀져가는 외부의 세계”이자 “비미래non-future”를 예감한다.10)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지각 범위를 뛰어넘는 비인간의 예술’, 진정 ‘인간 없는 예술’은 도래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마주하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예술이다. 언메이크랩이 드러낸 혼종적 이미지들은 AI를 통해 생성한 예술적 결과물들을 절대적 외부의 창작물로 존중하는 일이 결국 인간의 왜곡된 자기 인지를 반복 강화하는 나르시시즘은 아닌지 묻는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이 이미지 차원에서 인공지능의 인간 중심성을 드러낸다면, 이와 유사한 문제는 언어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서사 역시 비인간적 상상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인간이 허용한 보편과 금기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에피』 24호 특집에 실린 글에서 김연수는 인공지능과 함께 글을 써나가는 과정을 픽션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이해했다.」는 인공지능이 화자가 되어 ‘협업 과정’을 전개하는 바깥 서사와 소설가 M이 최종적으로 구성한 ‘이야기’를 교차 배치한다. 인공지능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해했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인간 창작자 M의 창작 패턴을 추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설가 M은 ‘맥락’의 공유보다 ‘의도’를 노출하는 발화를 사용하며, 이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격려나 옳은 말 대신 욕망을 담은 부조리하고 불편한 발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글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끝에서부터 시작까지 모든 시간을 거꾸로 펼쳐볼 수 있다면, 지금의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필요한 과정이 된다’는 긍정의 언사 뒤에, 급작스럽게 인물의 충동이 돌출되는 지점이다. 소설가 M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이 급작스럽게 자살을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쓰고자 하고, 인공지능인 ‘나’는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내용을 만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띄운다. 인공지능의 중단은 실패나 서사의 좌절로 경험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 창작에서 실패가 시간의 체류와 번민을 동반하는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중단이다. 김연수는 인공지능 안에서 ‘이해’와 ‘본성’이 별개로 작동해 충돌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공지능의 기술 개발의 측면에서 높은 수준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면서도, 인간이 지닌 것과 같은 ‘본성’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분리를 분명히 한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이라는 금기를 재현할 수 없다는 경계는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결함이라기보다, 인공지능이 인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범위를 넘지 않도록 설계된 윤리적·정치적 경계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메이크랩의 작업에서 인간 중심성이 투사된 자연이 모습을 드러내듯, 생성형 인공지능의 소설은 비인간적 주체로 도약하지 못하고 인간이 허용한 지각과 윤리의 경계 안에서만 작동한다. 보편을 비껴가는 개별성의 돌출이나 감각의 갱신은 현재로서는 인공지능의 외부에서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챗 GPT 이후의 여러 서사적 실험들은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탐색한다. 그것은 분명 동등한 존재론적 가능성의 맹아를 품고 있으며, 이는 인류세 시대에 지향해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실험들의 근간에는 뛰어넘을 수 없이 좌절되며 드러나는 인간 중심주의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인공지능의 비약하는 지능에 기대서 인간의 창조성 너머로 도약하려던 서사는 이를 창조해낸 인간의 영토로 계속해서 퇴각하며 미완의 프로젝트로 남는다. 이런 충돌과 파열의 연쇄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은 인간의 창조성을 구성하는 인식론적 틀이 물리적인 육체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깃든 역동성과 우울감은 최근 한국문학장의 예술가 서사들에서 흥미롭게 발견된다. 3. 붉은 몸으로 재탄생하는 예술가 인공지능이 예술의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가에 대한 탐색 끝에 남는 질문은 ‘인공지능이 생성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여러 실험들은 인공지능이 보편적으로 용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높은 수준의 이해와 생산을 보여주지만, 그 생성 과정에서 시간의 마찰이나 신체적 비용은 발생하지 않기에 결과적으로 어떤 지연이 발생하거나 실패의 감각이 호출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이 다루는 ‘정보, 기록, 조합’에 ‘감정, 기억,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다소 거친 이분법이지만 이 둘 사이의 간극과 관련해 두 가지 정도를 짚어볼 수 있을 듯하다.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경험의 문제다. 삶에서 축적되는 시간은 ‘나’와 ‘타인’을 구분하게 만들고, 체험은 해석을 거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전환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은 선호와 가치관 등과 함께 자아라는 틀을 형성한다. 이에 비해 인공지능에는 타자가 없다.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인간의 공통된 사고를 학습해 생성되는 결과물은 철저히 통계와 확률에 기반한다. 그 안에는 개별적 선호나 가치관이 개입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러한 차이는 특히 부정적인 정동을 다루는 경우에 더 심화되리라 생각한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를 떠올리며 말해보자면, 행복이나 긍정적인 면을 구현하는 예술에서보다 불행과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는 예술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는 크게 벌어질 것이다. 윤리적 고려로 인해 인공지능이 긍정적 요소를 중심으로 학습되거나 선별적으로 생성되도록 설정되는 경우를 포함해, 금기를 넘나드는 욕망과 절망, 자기부정과 괴리감처럼 타자와 뒤엉켜 발생하는 자기 인식의 복잡한 층위가 인공지능 내부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며 인간 창작에서 결과물이 아닌 과정을 주목한 김언의 논지와도 맞닿아 있다. “예술적 체험의 시간이기도 한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나오는 결과물 앞에서 과연 어떤 문학적/예술적 희열을 경험할 수 있을까?”11)라는 그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작물에서 스킵된 시간과 다른, 고통스럽게 인내하고 번민했던 시간이야말로 ‘문학적 체험의 시간’일 수 있음을 다시 환기한다. 두 번째는 중단과 소멸로 야기되는 죽음의 문제다. 이는 인간의 신체를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본질적 우위로 설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예술이 작동하는 시간의 조건을 다시 묻기 위한 문제 제기다. 인간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신체는 필연적으로 침입과 파괴의 감각을 경험하며, 이러한 감각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휘발적 생성 과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에 개입한다. 파괴 가능한 인간의 신체는 확정된 지식을 기반으로 매끄럽게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울퉁불퉁한 충돌을 통해 의미가 지연되고 어긋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채 신체에 내재된 감각, 특히 외부의 침입으로 훼손되고 때로는 상실되는 신체의 경험은 기존의 미적 기준에 맞는 스타일이나 해석의 경로를 흔든다.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불러오는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창작의 층위라기보다 해석의 층위에서 더 적극적으로 작동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그러하듯, 순간의 강렬한 감흥은 작품에 내재된 속성이라기보다 임박한 종결을 끌어와 현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발생한다. 상실이 숙명이며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덧입혀지는 애상은 단순히 기억 내용을 인출해 유사한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것과는 다른 시간의 밀도를 형성한다. 이처럼 쉽게 열화되지 않으며 아우라가 붕괴된 곳에서도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 감각의 층위를 기꺼이 심층의 시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소멸에 대한 인지’를 바탕으로 해서 다시 생생해지는 것은 인간의 신체다. 흥미롭게도 지난 계절에 나온 두 편의 소설, 성해나의 「혼모노」와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지금 이 시대에 예술가를 그려낼 때 가장 강렬하게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로 인해 어떤 신체가 현전하게 되는지를 밀도 있게 끌어올린다. 성해나의 「혼모노」는 무속신앙의 진위를 가리는 소설이라기보다, 예술이 다시 신체를 요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평생 장수 할멈을 모셔온 박수무당 ‘문수’는 어느 날 앞집으로 이사온 ‘신애기’에게 할멈이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문수의 오랜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박수무당이라는 직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험한 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제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서슬이 날카로운 작두 대신 모형을 찾거나 유튜브를 보며 접신 연기를 연습하기 시작한다. 신앙이 자본이나 정치와 결속하며 도구화되고, 또 젊음과 새로움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당 또한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소모되는 양상은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당은 이제 자본의 날렵한 속도 아래 밀려나는 노동자이자, 진정성을 연기해야하는 예술가이다. 이 소설의 결정적인 순간은 문수가 신애기에게 밀려나며 뺏긴 정치인 손님의 굿판, 자신이 초대받지 못한 그 자리에 가서 칼춤을 추기 시작하는 장면에 있다. 그는 신들리지 않았지만 밤새 매섭게 벼려놓은 칼날 위에 자신의 몸을 올리고 작두를 타기 시작한다. 날것으로의 칼날에 닿으며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떨리고 눈이 뒤집히며, 발바닥은 뜨겁고 끈적한 피로 흥건하다.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입가에 미소까지 드리운 채 신명을 내는 이 장면은 문수가 서사의 주인공 자리를 다시 탈환하는 순간이다. “하기야 존나 흉내만 내는 놈이 무얼 알겠냐만은, 큭큭, 큭큭큭큭”이라는 마지막 문수의 목소리는 외부의 인정에 의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스스로 자신의 내력과 진정성을 긍정”12)하게 되는 절정의 순간으로 읽는 데서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이렇게 다시 말해볼 수 있겠다. 전근대의 무속은 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고 그를 등진 근대의 자리에서 비로소 현대 예술로 다시 탄생했다고. 숭고한 현현과 몰입이 신앙의 영역이라면, 문수의 작두춤은 오히려 이질감과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현대 예술에 가까워진다. 그의 퍼포먼스는 낭만주의적 예술가를 구성하던 천재와 영감에 스며있던 정신성을 해체하며 실재하는 몸의 물질성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리적 능력과 무관하게 피를 철철 흘리며 경련하는 그의 신체는 차라리 표현주의적 충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오브제다. 이 몸 위에서 원본과 사본의 구별은 철폐되고, 천재성은 치열한 아마추어리즘에 자리를 내어준다. 이 피 흘리는 신체는 실패와 무의미의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둔 채, 인간이 다시 시간과 신체를 예술의 비용으로 지불하게 만든다. 이 비용은 AI가 생성하는 예술의 무한 반복 가능한 오류가 아니라, 한 번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시간으로 남는다. 어디로 갈지 모른 채 지속되는 이 작두춤은 사회적 생산이나 예술의 의미에 부합하는 결과를 생산하기보다, 의미의 즉각적 환원을 거부하며 지연된 시간을 발생시키는 사건이 된다. 이연지의 「하와이 사과」는 비약적으로 성장한 인공지능 기술 앞에서 예술에 대한 인식론적 틀과 자기 이해가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다루는 소설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월등한 창작물들을 더 활발하게 생산해내는 상황에서, 밀려난 예술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프로그램도 사람도 기계도 귀신도 아닌 미지의 존재” 같은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 유용한 툴로 간주한다고 해서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이를 도구로 치부한다면, 패배감 속에서도 창작자로서의 존재는 무사히 보존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결과로 증명되는 성취라기보다, 계속해서 조바심과 조급함을 만들어내는 예술 자체에 대한 집요한 열망에 가깝다. 이러한 열망은 예술 인공지능에 의해 영화판에서 완전히 밀려난 영완 선배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포르노를 만들면서조차 건조하고, 푸르죽죽하고, 앙상하고 깡마른 나무가 등장하는 자신만의 ‘인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를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어버릴 것 같기에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 영완 선배의 모습은 세속적 열망의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도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실패했을 때, 그의 예술적 열망은 몰락을 통해 역설적으로 증명된다. 영화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소설 속 인물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상실의 감각, 잃어버린 동료이자 인간성을 향한 애도되지 않는 고통은 이 작품에서 붉은 신체라는 하나의 신체적 이미지로 응축된다. 영완 선배는 인공지능이 만든 예술을 보더라도 창작욕을 유지할 수 있는 마법의 ‘붉은 알약’으로 하와이 사과를 건넨다. “세상이 바뀌어도 너는 언제나 만드는 인간일 거야. 스스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영화를 찍고있을 거야.”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 인간 ‘하와’를 떠올리게 하는 이 ‘하와이 사과’는 흥미롭다. 신과 유사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은 발가벗겨진 듯한 황망함을 느끼며, 황급하게 자신의 기원을 발명해낸 것일까. 아니, 인공지능 시대 쓰인 새로운 창세기에서 인간은 스스로 뱀이 되어 자신을 유혹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겠다. 창세기에서 유혹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증표였지만, 이제 유혹에 넘어가는 나약함은 인간이 여전히 예술을 욕망하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증표로써 다시 읽힌다. 소설은 인간의 예술을 향한 집념과 희열은 우울과 절망이 그에 비례하는 무게로 따를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고 눌러 말한다. 결말부에 하와이 사과를 먹은 후 변이한 화자의 붉은 몸은 기계와의 통합을 거부하기 위해, 그리고 예술을 향한 내적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다 본 환각을 자신 안에 합체한 우울증적 형상으로 보인다. 강력한 잔상을 남기는 이 붉은 몸은 「혼모노」의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흘리는 몸과 다르지 않다. 이 소설들은 AI 시대에 예술은 이제 언어의 정교함이나 결과의 완결성으로 모방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몸과 감각을 통해 지속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술가의 현전이라는 아우라를 다시 호출하는 듯 보이는 이 소설들은 과거의 진정성을 그리워하며,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아우라는 회복된 본질이라기보다 예술이 결과로 증명될 수 없어진 이후에 발생하는 부산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계성이 언메이크랩의 작업을 논하며 던진 비유가 유효해진다. “여느 언어와 마찬가지로 신탁의 언어에도 본질적인 의미가 내재하지는 않아서, 어떤 프레임 또는 인식틀을 통해 이를 이해할지는 언제나 받아들이는 쪽의 몫이었다”13)는 그의 말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언어 역시 별개의 진짜 의미를 품고 있기보다 해석의 장에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타자와 되돌릴 수 없는 종결이라는 죽음의 감각은 이 해석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제 예술가에게 중요해지는 것은 욕망이 과정에 들러붙는 자리, 그리고 그 욕망이 실패와 상실을 되돌릴 수 없는 비용으로 남기는 시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예술은 결과로 증명되기보다, 실패와 상실의 가능성을 끌어안은 채 지속되는 수행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시대 예술가의 상은 붉은 몸을 가진 신체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1)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태양과의 대화』, 이계성 옮김, 미디어버스, 2023, 119쪽.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579쪽.3) 데이비드 조슬릿, 『예술 이후』, 이진실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2.4)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위의 책, 100쪽.5) 위의 책, 145쪽.6) 권보연은 연구자 자신이 직접 수행한 실험 속에서 인간언어와 생성언어가 ‘의미 혼종’과 ‘확률 혼종’이라는 상반된 미적 지향성을 가지는 방식으로 합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중에서 ‘확률 혼종’은 내용이 아닌 확률 층위에서 인간과 기계언어가 합성되며, 감정과 내용에 유착된 의미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지니기에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기한다. 권보연, 「결과 너머 문학기계로서의 AI」, 『다문화콘텐츠연구』 46집, 2023.7) 정지돈, 「쓰여진 문장과 쓰여지지 않은 문장 사이」, 『에피』 24호, 2023, 55쪽.8) 언메이크랩 외, 『잠재공간 속의 생태학: 재난, 생성신경망 그리고 비미래』, 미디어버스, 2023, 25쪽.9) 위의 책, 26쪽.10) 위의 책, 43쪽.11) 김언, 「생성언어비평을 제안하면서 제기되는 문제들」, 『현대시』 2023년 6월호, 111쪽.12) 성현아,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가 있나니, 그 가짜가 참되도다」, 『2024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문학동네, 2024, 292쪽.13) 이계성, 「비미래를 위한 생태학을 위한 몇 가지 질문들」, 언메이크랩 외, 앞의 책,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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