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 2024년 1월호(제409호)

파롤의 빈손이 떨려올 때

황유지 문학평론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다. 공동 산문집 『관내 여행자-되기』를 썼다.

파롤의 빈손이 떨려올 때

-김건영 신작 중심으로

 

 파이(pie)는 조각이다. 그러면서 전체다. 김건영의 첫 시집 파이』1)는 세계라는 조각의 언어이면서 조각들의 쌉싸래하고도 즐거운 맛이며 도무지 끝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길이를 연장하며 세계의 원을 유지하는 원주율Π(pi)이다. 『파이에서 보았듯 그의 창작, -쓰기는 언어가 부조리, 불완전함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상한 말을 하면 안심이 된다”(「E」,『파이』)는 고백처럼, “완벽한 세계에서언어가 필요할까”?(「음펨바 효과」,『파이』)라는 의심처럼, 이 시인에게 말은 그 자체 불완전성과 한계로 신의 왕국에서 쫓겨난 음흉한 것, 마치 뱀 같고 뱀인 것이 된다. 불완전함, 세계의 부조리라는 것은 온전히 언어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나, 어쩌면 말은 자체의 불안정성으로 찌그덕대는 인간에게 또 하나의 권력이자 무기로 부조리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편, ‘사전(蛇傳)’ 목록은 설득력을 가진다. 그럴 때 차라리 이상한 말만이 재건의 가능성으로 성립한다.

 김건영의 언어 실험, 언어에 대한 약속 파기는 동음이의, 띄어쓰기 변형, 교정법을 통한 오자와 수정자 겹쳐 보여주기, 알만한 문장 바꿔쓰기 등 다양한 패러디의 전략을 선보인 바 있다. 어떤 재료를 얹어내도 좋을 이 세계의 파이는, 말에서 노래를 분리함으로써 음악과 로고스 사이의 간격, 그 거리를 벌려놓는 패러디의 오랜 정의를 더듬어보게 한다.2) 이때 김건영의 시들이 움켜쥐는-그러고 스스로 곧장 놓아버리는-효과는 대상과 기호의 자의적 결합의 확인, 결합의 사이라는 그 거리감이다. 거리는 균열이라는 파장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우리는 김건영의 시에서 긴장을 거머쥔다.

 

 신자유주의의 모기가 방안을 떠돌고 있다 겨울에도 모기가 있다 자유란 얼마나 가려운 것인지 집이 부풀고 있다 굴러다니는 것들이 바깥에 있다 밟으면 부서지거나 터지는 것들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으로부터 안으로의 검열이 있다 어린아이가 길에서 은행잎을 줍는 것을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여닫는 사이 들이지 않은 것들이 들어온다 저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검역 속에서 막아야 하는 것들 속에서 내가, 내가 자주 집으로 들어온다 쌀에도 벌레가 있다 이 집은 안전하니 한 마리쯤 더 키웠으면 좋겠군 그 은행잎들은 어디로 들어가게 되었을까 모든 집에는 책()이 있다 그것을 갉아먹고 사는 존재도 있는 법이지 받아야 할 것과 내주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내가 들어온 만큼 집에서 나가는 것의 이름은 아무도 부르지 않는다 바깥에서 본 것들을 잘 털고 들어와야지 주의를 듣고 신발을 벗는다 밀폐된 곳이 자유롭다니 작은 것들이 더 작은 집으로 들어오고 아무리 털어도 먼지 없는 날이 없다 창을 닫고 단속하는데 모기들은 자유롭다  

                                                                           - 「들쥐와 낙엽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시어들의 인상은 사후적이다. 시간을 경유하는 운명을 지니지 않는 언어란 없겠지만, 여기 놓인 시어들은 나는 네가 지난 세기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듯, 과거의 무엇을 데려온다. ‘페스트와 망명 정부의 지폐로 바꾸어 쓴들 이상하지 않을 이 제목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성은 문득 의심스러워진다. ‘후기자본주의의 끝판, ‘포스트코로나와 같은 단어들이 우리의 지금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우리의 지금‘-post’, 어떤 것의 라면 이 시간은 과거나 미래는 될 수 있을지언정 현재는 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 닿는 곳은, 김건영이 조각내고 그럼으로써 가로질러버린 시간의 오랜 정의다.

 그런가 하면 이 시에서 공간은 폐소의 공포를 부추긴다. 그건 자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신자유주의의 각종 채무의 누적과 더불어 음험하게 깔린 반복적 감염병에 대한 예감으로 고립을 추동하는 숨 막히는 밀폐감이다. 자유로운 것은 모기뿐이다. 신자유주의의 모기은행()-()의 연결은 모기지()’을 연상케 하며 화자를 더욱 좁은 방으로 밀어붙인다. 저 아이가 물려받을 은행이 떨구는 빚, 좁아지는 집,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지만 저 집들의 아래, 우리의 발아래를 갉아대는 들쥐의 위협만이 신자유주의의 모기와 함께 시공을 가로질러 넘실댄다.

 특히 팽창되는 빚과 감염의 메커니즘 내부에서 점점 더 좁혀지는 자리의 모양새는 그가 전작들에서 사용했던 라는 한자를 소환한다. ‘지금의 세계가 무언가 빠져나간 뒤 남은 죽음과도 같이 텅 빈 입 속의 검은 잎, 점점 축소되는 공간이라면 마치 알파벳 E에서 검은 선이 그어진 것을 글씨의 양각이라 할 때 나머지 부분일, 쓰여지지 않은 음각을 읽어내었던 것처럼-‘의 빈 공간, 언젠가는 존재했을지도 모를 저 하얀 면에 들어차 있었던 것, 어쩌면 잃어버린 생기와 충만일지도 모를 그것이 그리워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간절히 도착을 바랐으나 어둠 속에 있다

 한밤중에 사람의 눈이 빛날 때 그곳에는 어둠뿐인가

 빛을 나눠 가지는 것은 오직 사람들

 빈대의 반대이거나

(중략)

 귀신을 좋아해, 눈에 보이지 않잖아 돈 없어도 잘 살테고 사람을 먹는 사람도 귀신은 무섭지 사람이 더 무서워 라고 말하는 게 더 무섭지 그래도 형현이 좀 좋아지면 사람이 되자

(중략)

 아니야 나의 장래 희망은 귀신입니다 투명하고 가끔 사람을 놀래킨다 요금을 내지는 않고, 너희는 요실금이나 걸리라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의 밥을 먹어 치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귀신은 복잡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귀신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 「빚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빌리지부분

 

 ‘너에게 갈게라는 의지의 표명은 가능성의 일부지만, 단서는 그마저 제한한다. 빚이 사라지지 않으면 네게 갈 수 없고, 빚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 수 있으나 실행은 미지수다. 그건, 도착하면 닫혀버리는 하나의 가능 세계로, 이 가능 세계는 화자의 도착과 함께 저절로 문이 닫히는 불가능의 세계로 변형될 것이다. 프루스트가 썼듯 알베르틴의 아름다움은 질투를 불러일으켜 주인공을 고통에 빠뜨리지만, 그녀를 가두어 곁에 둠으로써 질투와 함께 절단되는 것은 알베르틴의 가능 세계, 매력을 잔뜩 뽐냄으로써 다른 이와 밀회를 나눌지도 모르는 그녀를 상상하는 미지’3)인 것처럼, 가지 않았을 때만이 성립하는 약속의 문장은 당도하면 파괴될 운명을 떠안는다.

 그럼에도 이들은 만난다. 만났으나 어둠이다. 너의 아우라는 없고 그건 화자에게도 없다. 이 시를 움직이는 것이 애초에 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자를 추동하는 것은 얄궂게도 이다. 빚은 자신을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을 자기 동력으로 삼는다. 근속의 이유가 대출금 때문이라는 것은 이 사회의 공공연한 농담이자 진담이 아닌가. 발벡에 도착하자 발벡이란 음절로부터 연상되던 것이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던 고백처럼4) 빚이 사라지고 난 뒤 당도한 곳에 상상하던 빛은 있을 리 없다.

   

 가장 긴 암전을 준비한다

 (用을) 잡아야 한다

 밤의 길이를 재단해야 한다

 눈을 감으면 모두 밤이 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자문한다

 알 수 없는 것들은 알 수 없다

 무지를 넘어서면 또 다른 무지가

 온다 어둠 속에서 눈감는 것과

 빛나는 것들 앞에서 눈감는 것과는 다른

 세상이 눈앞에 있다

 이 별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

 밤의 윤곽을 각 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준다

 별을 오래 본 자들은

 오직 과거만이 눈앞에 돌아온다는 것을 안다

 이 별의 자전(自傳)

 언어로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서 자전(自轉)한다

 신은 면허가 없을 거라고

 지금 막 잠든 동거인들에게 속삭인다

 우리들이 밝은 곳에서 본 것들은

 너무 아름답고 선량한 것들뿐이라서

 믿을 수 없다고도 했다

 선한 사람이 이리도 많은데 세상은 자전(自全)하지 않는지

 우리의 선량함은 얼마나 사적(私的)인지 알아챈

 타인이 우리를 조금씩 부술 때

 다른 타인은 아직 우리 곁에 우리보다 작고

 연약하며 망가지기 쉬운 것이

 있다고 속삭여 준다

-「우리의 별빛은 너무도 낡아서부분

 

 말이 과거로부터 획득한 약속, 의미와 말 사이, 그러니까 인지와 말 사이의 거리를 한껏 벌리려는 시인의 작업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언어란 혼자만의 해체로는 이룩할 수 없는 기약된 별의 부스러기이기도 해서 욕망과 뒤엉킨 기억은 타인과의 약속, 언어의 역사를 상기하는 별빛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제련은 고단하긴 하나, 이 찰나의 초월성은 시인에게만은 각인된다. 이때 시인이 발견하는 것은 전체화되지 않고 조각으로 존재하는 세계의 시간성이며, 그는 이것을 한없이 조각내어 쓴다. ‘은 그런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행위인데, 이 시에는 그 유비, 즉 눈꺼풀을 닫고 잠의 주변을 어른거리는 혼몽의 상태가 잠을 대신한다. 잠은 기억에 비해 순수의 이미지를 이끌어 내며 시인이 조각내어 놓은 시간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횡단선으로 기능하는 것이다.5) 그렇게 경험이라는 시간의 기억을 개인으로부터 떼어놓음으로써 시간은 제 시간성으로부터 초월하고, 달아난다.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껍질 벗겨진 새우를 보았습니다 알레고리인가요 아니요 실제로 본 겁니다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비둘기도 보았습니다 그 둘이 가까이 있었나요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습니다만 사람들도 그와 같았겠지요 피자에서 떨어져 나온 새우처럼 영문 모를 표정으로  먹이를 찾는 비둘기처럼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 이제 비유가 되었군요 우리는 왜 흘린 것들을 줍지 않는 걸까요 흘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거겠지요 버려진 것들을 모아 놓으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요

 분실(紛失)은 유실(遺失)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는 되지 않는다

 조립은 해체의 역순으로

(중략)

 말 따위가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다 의미 없는 겁니다

 대충 합시다

 여러분 너무 슬픔에 잠겨있지 마세요

 슬픔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죽은 문학 불알 만지듯

 언어가 망가질 때를 위한 언어를 준비해야 합니다

 매력(賣力)이 없는데 어쩌겠어요

 라이선스(license)가 라이센스[Lie Sense]를 필요로 합니다

 언어 해체를 위한 단체(單體)를 설립할 것처럼

 안경 찾기용 안경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처럼

 기금 마련을 위한 기금 마련이 필요할 때처럼

 나의 생은 밑진 듯이 사탕을 찾아 헤매었으니

 단 한 번도 수수료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저는 계속 언어의 폐지를 줍겠습니다만부분

 

 기호로서의 사물이 담고 있는 의미는 그 사물 자체로 환원되지 않고 그저 임의의 기호를 빌려 쓰는 행위에 불과한데, 이때 용기(容器)에서 내용물을 꺼내 그 주름을 펼치는dé-pli-er6), 행위는 우리말의 경우 한자어로 인해 이중의 겹, 이중 용기에 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이중 용기는 결과적으로는 패러디의 폭을 넓게 만들지만, 시인은 우선 말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이중 포장을 벗겨내고 기호와 의미 결합 간의 허위를 폭로한다.

 물질계의 예측을 벗어나는 음펨바 효과’7)처럼 마치 단절, 간격, 공백, 간헐성을 통해서 근본적 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시인이 헤집어놓은 의미와 기호의 간격 사이에 들어찬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밀착된 언어의 간격을 벌리는 일은 세계의 무능과 부조리를 해체할 가능성으로 열린다.

 그런 면에서 언어의 폐지(廢紙)는 언어가 쓰고 버린 저 잔뜩 주름진 튜브이면서도 언어에 대한 저항일 폐지(廢止)로 읽힌다. 언어의 폐지를 줍는 일은 그래서, 언어를 폐지해야만 가능한 운동성을 내포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멀었지만 그 거리가 시를,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조립은 해체의 역순으로하겠다는 선언은 우로보로스의 뱀, 돌고 돌아 자신을 가두는 라는 글자의 운명처럼, 말의 해체에 대한 방법론이면서 시-쓰기라는 전체에 대한 밑그림일 것이며 또한 언어의 숙명을 아는 자의 감옥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언어의 해체를 위한 단체(單體)를 설립하겠다는 말은 언어의 단일체에 대한 집요한 해부를 예감하게 한다. 이는 일종의 저항 행위, 멈춤을 유발하는 딴지이다.8)

 

관장실에는 부재한 관장 대신 이렇게 적혀 있다

 

 돌은 오래전에 태어났다

 돌 속에는 시간이 들어있다

 돌은 시간과 함께 작아진다

 

 그 아래 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돌이나 똥이나 뜻은 같다

 

 그러므로 도서관은 가벼워질 수 있다 사실 이 도서관은 치통의 통치를 받는 선량한 자들의 입 속에 있다

 

 입 속의 나선 계단을 돌고 돌아 오르는 첨탑은 선량한 자들만이 오를 수 있다 더 선량하기 위해 악인을 찾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전투에서 승리한 무지무지 선량한 자들이 꼭대기에 올라 볼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석판이다 그 석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세 줄 요약 좀

- 세 줄 요약 도서관부분

 

 언어 속에 가득 찬 시간과 공간, 숱한 인식을 비워내고 난 다음에야 말들의 자유는 가능할 터, ‘비워내기’-비워내기 위해 채우는 관장(灌腸)처럼-가 필요한 건 숱한 기록 언어의 집, 도서관도 마찬가지일 테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가지처럼 오직 빈손으로만 얼굴을 만질 수 있다”(「파롤의 크리스마스-사전8」,『파이』)던 시인의 말처럼, 텅 빈 기호, 파롤의 빈손이 되기 위해 저 바벨의 도서관에 들어찬 언어들은 세 줄 요약으로 치워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런 지난한 작업의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의 해체로 인해 다다른 벌거벗은 기호들의 시간, 그 순간을 짐작해보자. 마치 무위에 다다른 것과 같은 그 지경은, 결코 힘의 대척점에 있지 않을 것이다. 결여에 대한 의지로 멈춰 세우는 가만함. 가만히 있기, 시인으로 존재함은 그렇게 자기 무능력의 포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9)는 문장은, 말과 시인의 포로-운명이 결국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김건영은 세계를 될 수 있는 한 다양한 조각으로 쪼개고 그리하여 시공의 파편을 주워들고 그것의 앞면 뒷면 옆면 모서리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려 한다. 그럴 때 이 시인의 손에 들린 조각은 세계의 기록, 언어와 떠돌이 말들이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의 무기이자 적군이기도 한 언어의 습관성일 터. 그래서 그는 말을 갖고 논다. 언어의 깊숙한 주머니에서 말을 끄집어내 훌훌 풀어 헤쳐본다. 이제 시인의 손이 탄성의 임계점까지 벌려놓은 의미와 기호 사이에 잠시 숨 막히는 적요가 들어찬다. 시인이 돌려놓은 저 파롤의 빈손이 이제 제 안의 힘으로 파르르 떨려온다.10)

  • 1) 김건영, 『파이』, 파란, 2019.
  • 2) 패러디는 노래와 말의 분리, 말에서 리듬이 제거됨으로써 그 빈 자리를 마련한다. 그 자리는 사라진 리듬에 대한 애도를 위해 쓴다. 조르조 아감벤, 「패러디」,『세속화 예찬-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김상운 옮김, 난장, 2010, 참고. 본래의 뜻과 벌어지는 격차로 희극의 효과를 발하는 패러디에서 중요한 것은 원본과 새롭게 생성된 이본의 차이 자체보다는 차이를 발생하게끔 한 자리의 내어줌이 아닐까?
  • 3)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183-184. 김건영은 우리의 별빛은 너무도 낡아서에서는 이 미지를 그 채로 놓아둔다. 미지의 가능성을 절단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눈감는 것과/ 빛나는 것들 앞에서 눈감는 것이 다를 것이라며 오히려 그것을 행위 가능의 세계에 귀속시키기를 궁리한다. 그러나 주지하듯 별은 과거라는 시간성의 뒤늦은 도달이고, 화자는 그것조차 언어로 쓰여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김건영에게 가능 세계를 옥죄는 것은 기록된 언어의 운명이다.
  • 4) 질 들뢰즈, 위의 책, 185.
  • 5) 질 들뢰즈, 같은 책. 들뢰즈는 비자발적인 기억이 그것을 자극하는 기호와 기억이 부활시킬 미리 선택된 자아에 결부되어 있는 반면에 잠은 모든 기호들 속에 감싸여 있고 그러면서 모든 능력을 가로질러 전개되는 순수 해석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기억에 비해 심오한 것이라 본다. 이때 오직 횡단선만이 파편들을 주관한다. 197-198 참고.
  • 6) 펼치다라는 동사 déplier는 짜내는 튜브의 접혀있는 주름 하나하나를 펼치고 내용물을 꺼내 전개한다는 의미로, 들뢰즈는 담은 용기와 내용물 사이의 임의적 결합을 꺼내고 해체하는 행위라는 것은 프루스트의 문장을 통해 읽어낸다. 질 들뢰즈, 같은 책, 176-178.
  • 7) 김건영의 시 제목이기도 한 음펨바 효과는 따뜻한 물이 차가운 물보다 먼저 얼음이라는 상태의 변화로 이어지는 것을 뜻한다. 수소와 산소 분자 사이의 거리는 따뜻한 온도에서 더욱 벌어지면서 에너지를 비축할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그 간격에 들어찬 보다 많은 에너지는 더 빨리 제 몸의 변화를 이룩하게 된다. <위키백과, 음펨바 효과>참고
  • 8) 저항하다resistere의 라틴어 어원 ‘sisto’멈추게 하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다. 멈추다라는 뜻을 가진다. 조르조 아감벤, 『불과 글-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윤병언 옮김, 책세상, 2016, 71.
  • 9) 조르조 아감벤, 위의 책, 「창조행위란 무엇인가참고.
  • 10) 조르조 아감벤, 같은 책, 75. 단테는 시적 행위의 양면적 성격을 일러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고 표현했다.

추천 콘텐츠

이은란 열린 기호로서의 ‘얼굴’ ― 정은기 시집

정은기 시인의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걷는사람, 2024)에는 유독 ‘얼굴’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본래 얼굴은 ‘나’의 감정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개인성의 표지이자 소통의 매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시인의 ‘얼굴’은 주체의 온전한 존립과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를 지시한다. “눈코입이 수시로 자리를 바꾸며 옮겨 다녔다/바람에 지워지는 모래 언덕처럼”(「숲은 간지러운 걸 어떻게 참지」),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에서 정체불명의 것은 추상적인 내 얼굴뿐이다”(「구체적인 의자」), “있다가 없고, 없다가도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현기증」)와 같은 대목들로부터 포착되는 ‘얼굴’의 가변성과 추상성은 완결되지 못한 ‘나’의 취약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철이 벗겨진 대문처럼 내 얼굴에는 푸른 녹이 슬었다 열렸다 닫히며 아무나 드나들었다”(「러시아 소설 같은 밤」)라는 구절로 암시되는 것처럼, 단단히 걸어 잠그지 못한 시인의 ‘얼굴’은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며 외부의 침범을 수시로 허용한다. 통제할 수 없는 타자의 틈입과 함께 균열되는 시인의 ‘얼굴’은 “복수의 나”(「기분 탓」)가 탄생하는 장소가 된다. 건조한 우울을 머금은 정은기의 문장들은 ‘복수의 얼굴들’이 무질서하게 펼쳐진 세계를 배회하는 자의 궤적과도 같다. 그렇다면 정은기의 화자가 지닌 ‘얼굴’이 결핍되거나 분열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유년 시절의 고독은 ‘나’가 근원적으로 체험해야 했던 관계의 불가능성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가정과 학교,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나’의 내면은 불신과 상처로 가득 채워진다. “분장한 배우들의 얼굴은 쉽게 금이 간다 얼굴이 깨지면 진짜가 나올까”(「그런 사이」)라는 화자의 물음에는 위장된 얼굴들이 연출하는 관계의 공허함, 그리고 이로부터 촉발되는 고독과 허무가 배어있다. 이러한 시인의 물음은 더욱 내밀한 형태의 관계맺음인 사랑에도 지속된다. 예컨대 「낫」이라는 작품에는 떠나간 ‘너’와 남겨진 ‘나’가 등장한다. “나는 너의 뒷모습이고/너는 여전히 나의 얼굴”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부재하는 ‘너’는 ‘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마침내 ‘나의 얼굴’이 된다. ‘나’의 존재성을 대별하는 기호인 ‘얼굴’은 이별이라는 사건과 더불어 ‘너’의 부재를 지시하는 기호로 변주되면서 ‘나=부재’라는 공식을 성립시킨다. 만일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나’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관계의 불투명성 안에서 ‘나’는 온전한 주체로 존립할 수 있는가. 타자와의 조우와 섞임이 ‘나’를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라면, 왜 우리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면서도 관계를 부단히 지속하려고 하는가. 장시 「사유지」에서 통증을 수반한 타자와의 섞임은 ‘얼굴’의 균열을 넘어 온몸에 ‘두드러기’를 돋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살갗을 피가 맺힐 때까지 긁”어대는 ‘나’는 “이제 시는 그만 쓰자”라고 다짐하듯이 말하면서도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에겐 점점 팽창하는 그림자와 갈피없이 흩어지는 고백들만이 남는다. 시인은 ‘얼굴’을 통해 관계를 쌓고, 그 허물어짐에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연약함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듯하다. ‘얼굴’을 통해 구체화되는 ‘나’의 존립 불가능성은 시인의 발화를 통해 솔직하게 드러나는 생활의 어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얼룩, 얼굴」이라는 시에서, “십자드라이버를 들고 집 안을 구석구석 조”이는 ‘나’의 행위는 어떻게든 생활을 유지하고 지탱해보려는 노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번듯하게 꾸며진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바라보는 화자는 이내 “어디에도 숨을 곳이 보이지 않았”음을 덤덤하면서도 서글픈 어조로 고백한다. “전염병처럼 얼굴이 따끔거린다”라는 화자의 언술을 통해 전달되듯이, 가족이자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부끄러움은 ‘얼굴’에 조금씩 전해져오는 통각으로 뚜렷이 각인된다. 이러한 자조는 “지금까지 내가 쓴 계약서는 모두 무효가 되었고”(「누구나 다 하는 생각」)라는 다른 시의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집을 얻거나 직장에 다닐 때, 심지어는 단 한 편의 시를 잡지에 실을 때조차 우리는 계약서를 쓴다. 사회적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를 상징하는 계약서는 ‘문서화된 얼굴’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가 평생 써온 ‘계약서’가 모두 무효가 되었다는 사실은, 돈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시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드러낸다. “요즘은 출신이라는 말도 잘 안 쓰는데 저에게는 죄책감이 큰 말이거든요 시인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빠 말입니다”(「오전의 아이는 한밤중에 문장이 되고」)라는 진솔한 고백을 읽으며, 이 시대에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씁쓸한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시인이라는 직함은 돈이 최우선의 가치로 변질된 세상에서 문학의 순정을 지키려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숭고한 ‘관사(冠詞)’일까, 혹은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이방인을 지칭하는 단어일까. 아들이 시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과 맞닥뜨린 ‘나’는 무력하기만 하다. 화자는 ‘이력서’를 품에 안고 하루 종일 집 밖에서 방황하며(「변명」), “아직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었군요”라는 ‘미국 유학파 출신’ 면접관의 차가운 물음에 위축되고 만다(「인터뷰」).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기분 탓」)지만,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앞에서조차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시집 전반에 감도는 소외의 윤곽은 “숨을 쉴 때마다 말라 가는 얼굴”과 “나를 뱉어내는 재채기”(「나의 폐」)의 건조함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얼굴’의 균열은 현실의 냉혹함 속에서 좌절을 겪어야 하는 시인의 자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시인의 좌절은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나)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노동자가 되어 세속적 원리에 충실히 복무하는 것이다. 이 세속적 원리를 거스르는 아이러니한 노동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교환가치로 도저히 환원될 수 없는 노역, 즉 현실이 무용(無用)하기 짝이 없는 노동으로 규정한 ‘시 쓰기’를 통해 시인은 유용성만을 뒤쫓는 시대의 흐름에 저항한다. 예컨대 정은기의 시에서 목적지향적인 삶의 형식은 ‘나’의 존재성을 뒤흔드는 폭력으로 간주된다. “나는 목적지와 같은 말을 믿지 않는다/삶을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시간이라 설명하는 것은 운전수들의 말이다/누군가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자의 변명이거나/이를 꽉 물고 그 누군가의 속을 휘저어 놓는 자들의 습관이다”(「비슷한 말」)라는 대목에서처럼, 정은기의 화자는 맹목적인 성취만을 강조하는 세계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이 세계를 장악한 ‘운전수들’은 목적지를 설정하고 “각자의 방향에 몰두하”는 이기적인 삶이 마치 자명한 원리이자 인간의 본성인 양 설파한다. ‘운전수들’이 삶의 방향으로 제시한 이기심은 서로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휘젓는 일마저 합리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정은기의 시에 나타나는 ‘얼굴’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은 단순히 ‘나’의 왜소한 자아를 표상하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그의 균열된 ‘얼굴’은 인간의 본성을 악(惡)과 이기심으로 규정하는 세계와 불화하면서, 기꺼이 그 속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한 자의 초상이다. ‘얼굴’은 현실의 감관(感官)이기에, 정은기의 시는 훼손된 ‘나’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시인은 현실의 고통과 상처를 묵묵히 감내하며 어두운 상흔으로 응결되어 있던 문장들을 조심스레 꺼낸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문장들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기를, 타자의 상처를 섬세하게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것이 비록 “유리보다 쉽게 부서지는 주먹과 머리로,”(「인터뷰」) 견고한 현실의 벽에 몸을 부딪는 ‘불가능한 투쟁’일지라도. “들켜버리기를 기대하며 꼭꼭 숨었다 발각되기만을 바라면서 가슴을 두드렸다”(「꼭꼭, 숨어라」)라는 표현에는 열림과 닫힘이 아이러니하게 교차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깃들어있다. 그의 문장에 고인 따뜻함과 섬세함이, 건조하게 닫힌 우리의 ‘얼굴’을 열어내는 원동력일 것이다. 추천 작품: 「누구나 다 하는 생각」, 「사물의 방향」, 「건너편」

계간 포지션 이은란 정은기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얼굴기호주체 2025
오형엽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월간 현대시 오형엽 미분적 시선시차(視差/時差)적 공백모티프미학적 특이성구조화 원리안태운 2025
임지훈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므로 ― 송은숙 시집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박지일 시집 『물보라』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속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 축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앉은 의자와 책상, 눈앞에 놓인 책과 연필, 당신이 먹고 있는 사과 같은 것들. 당신의 바깥에 놓인 사물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 속 어두운 구멍 끝에 있는 기관과 장기들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을 통해 폭과 높이를 가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따져 말하자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신이 죽어 소멸하게 되는 순간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건 딱히 슬픈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실재가 아닌 실제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람직한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늘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 개의 방향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앎이 현상에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방향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세 개의 방향 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방향 축을 하나 더 도입하는 것이다. 한때 물리학은 이 방향을 Q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X, Y, Z에 속하지 않는 가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이 방향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성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기에 그러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감각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Q축은 일종의 가능성이면서 잠재성으로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가정할 수 있기에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어쩌면 이 Q를 우리는 질문(question)이라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것을 물리학적인 축의 문제가 아닌 질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실 시인들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 방향을 헤매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물론 이 Q의 문제는 시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이겠으나, 실질적인 방향성은 당연히도 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인간의 내면의 문제로 이해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관찰과 참여의 부족으로 생각에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어떤 이는 언어와 언어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된 사고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행방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에 골몰해 자기 앞의 단어들과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할 것이다. 송은숙이라는 시인이 『열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는 한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높은 산과 굽은 강, 날개를 활짝 펼친 새와 어두운 숲, 그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것들까지도,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감각을 활짝 펼치고 그것들의 기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산책길 양옆을 따라 망초꽃이 줄지어 피어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꽃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팽나무 그늘처럼 옮겨 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저녁과 함께 산책한 것인데 저녁은 서걱서걱 옷 스치는 소리와 쌀랑쌀랑 바람이 이는 소리로 한 발짝쯤 앞서 걸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섰을 때 물살이 나를 떠메고 가던 일 바람이 등을 밀어 줄 때 슬쩍슬쩍 허공을 밟던 일 분홍낮달맞이꽃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비의 그림자에 대해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 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 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망초 길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강처럼 가로지르고 그 너머 어둠 숲이 펼쳐지고 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듣던 물소리를 아득히 다시 들으며 저녁이 저 녘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힘겹게 깨닫고 몸을 돌리는 것인데 바짓단에 흠뻑 이슬을 적시는 까만 밤의 반딧불처럼 저녁의 주술은 매혹이어서 - 송은숙, 「저녁의 발자국」,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위의 시에서와 같이, 송은숙의 화자는 세계를 산보하며 두 눈으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현존을 목격한다. 그의 오감은 자신이 목격한 사물의 현존을 감각하는 동시에 사물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성 속에서 피어나는 제각각의 의미들의 사슬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제각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치는 객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물이 객체로서 그 자체 존재함의 결과가 아닌, 화자의 시선의 이동이 만들어낸 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시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성의 이야기가 허구이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가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빚어지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망초꽃”과 “팽나무”와 “징분홍낮달맞이꽃”과 “노란 달맞이 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나의 감각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셈해지며 분화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분한 주관적 서사들의 세계로 분화시키며, 그 분화 속에서 사물들은 또 다른 배치를 경험하며 잠재되어 있던 의미를 꽃피운다. 예컨대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와 같은 진술은 단지 감상어린 화자의 사물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객관적 배치 속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시적 화자의 권능이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세계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어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세계 그 속에서만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송은숙의 시에서 거듭 돌출되는 또 하나의 영역, ‘너머’의 문제와 관계된다.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막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 송은숙, 「너머의 너머」,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분명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표현되는 “무지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그리하여 계절의 변화가 오감을 통해 전해져오는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의 오감, 특히 시선 또한 이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인식은 거듭 시각적 형상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오감과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성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이것에 상응하듯, 그의 시적 화자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신이 산보할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어투가 의미하듯,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너머의 너머」에는 그렇게 머무르는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 세계는 분명 무수한 색채와 기척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창”과 “담”으로 둘러싸인, 비유적 의미에서의 “고개”와 “산”에 둘러싸여 화자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한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한계의 영역 속에서 화자는 물리적인 이동이 오직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영역의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감이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부리처럼 솟은 산이 하나 있고 산 옆으로 굽은 강이 흐르는 어느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강에는 다리가 하나 있어 두 다리가, 네 다리가, 여섯 다리가 지껄지껄 건너다니는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저 거룩한 글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의 눈이 바라보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상형한 것 다리 이쪽 끝에는 한 사내가 있어 소맷부리에서 새를 꺼내 자꾸자구 날리고 있다 새들은 새, 새, 새, 새, 새, 휘파람 소리를 내며 둥근 산의 정수리에 부리를 닦고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등성이로 비스듬히 해가 솟는 어느 마을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 - 송은숙, 「조감도」,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한계가 부추기는 초월에 대한 명상, 그것은 송은숙의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적 화자가 가진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를 더욱 강하게 인지하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토록 강하게 인지되는 한계의 문제가 물리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자꾸만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시적 구조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한계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세계 내에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감지되는 자리이자 가능한 세계가 피어나는 지점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새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서의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예컨대,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을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은숙의 시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로부터 그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박지일의 시 또한 이 세계가 결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전제하고는 있으나,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령, 송은숙의 시적 화자가 명확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진술을 통해 진술될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며 때로는 환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두서없는 정보들의 배치 속에서 일별되는 미지의 대상의 실루엣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열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에서 네가 느낀 탈력과 굴복의 강도에 비례하여 문은 희열을 얻는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너를 작동할 수 있던가?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지하긴 해야 하는데… 너는 선택하지 못할 것 같고(선택하지 않는 선택까지 포함하여)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아.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13쪽, 부분.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박지일이 집중하는 문제는 “문”으로 상징되는 경계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대상인 ‘문’은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른 문제에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이라는 사물이 그 외관으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기만과 관계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은 공간을 나누고, 그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폐시킨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적 차폐는 기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어떤 공간이 존재하리라는 환영이다. 비록 주체가 그 ‘문’을 실제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문’이라는 외관은 주체로 하여금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인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그 너머에 실체적 공간이 존재하기에 ‘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론 「물보라」 속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주체는 그것이 기만이고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태롭고 나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문’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 주체에게 감각적 착취를 행하며 희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들을 종합하자면 ‘문’이란 실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인 것, 예컨대 기만을 통해 인간 주체의 경향성을 추동하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물의 기만은 시적 공간의 끝까지 이어지며, 화자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답변을 번복하며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와 같은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시적 정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적이냐 실제적이냐의 여부가 아닌, 그 앞에서 번민하길 반복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1. 누구는 없는 너. 누구만 없는 너. 네가 너를 계속하여 믿기 위해선,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쳐1. 야만 한단다. 멧닭은 듣는다; 네가 반복하여 내쉬는 한숨을. 평화를 내쉬는 것도, 불안을 내쉬1. 는 것도 아닌. 그것은 마치… 가장 작은 소리로 도망하기 위하여 1천년 동안 자기 뼈를 조금1. 씩 조금씩 긁어내는 바람의 들숨.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32쪽, 부분. 비참하군, 설명하자니 비참해. 물보라. 너는 네가 비참하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비참하다고 씀으로써 너는 너의 작업을 아주 망쳐 놓았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고 중얼거리며 너는 너를 시작하다; 네가 비참한 마트에 들르다, 네 목적이 아니었던 생물 코너 앞을 비참한 네가 어슬렁대면서, 생물 오징어 한 팩을 비참하게 찍고 마트를 나와서 비참한 건널목 건너서 비참한 랩을 뜯은 다음에, 횟집 수족관에 오징어를 풀어 놓고 악을 쓰다; 내가 비참하다고, 비참해서 비참 이의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비참, 그게 뭘까? 어리둥절. 어리둥절이 너를 훔친다. - 박지일, 「「물보라」 우수리 편」, 『물보라』, 민음사, 2024, 189쪽, 부분. 그런 까닭에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대명사인 ‘나’와 ‘너’라는 시어가 가장 많이 반복된다. 그 모든 ‘나’와 ‘너’는 하나의 공통점을 소유하는데, 그것은 번민과 방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명징하게 말하자면, 두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에(혹은 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번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과 방황에 밀어넣는 기제인 것이다. 마치 앞서 인용했던 「물보라」의 한 장면에서 시적 화자가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과 같이 시적 화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 강제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기에 번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러한 번민은 시적 화자를 “비참”하게,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조금씩 지쳐가게 만든다. 예컨대,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반복의 양상 속에서 ‘나’와 ‘너’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다소간의 차이의 연속 속에서, ‘나’와 ‘너’는 언어상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지라도 그 양태 또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여전히 화자는 번민하고 방황하며 비참한 상태로 놓여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번민과 방황, 비참의 모습들은 하나의 시그널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로 대표되는 인간 존재가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예컨대 상황의 강요에 떠밀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여전히 끈질긴 사유의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하나의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번민과 방황의 무대인 ‘여기’에 존재하며, 그의 사유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황은 여전히 상황으로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가항력적인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주체’가 계속해서 사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러한 번민이 반복될 때에만, ‘나’와 ‘너’는 ‘나’와 ‘너’로서, 이 시적 무대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문’ 너머에 정말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나 이러한 가무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와는 조금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질문을 적용하자면 무엇이 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시적 화자로서, ‘나’와 ‘너’라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 물론 박지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사유’의 지속성이다. 『물보라』의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오직 한정적이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토대란 이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아지듯이 죽으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입장한다. 중부 지방은 맑거나 아침에 차차 맑아지겠다. 남부 지방은 흐리겠다. 경남 해안과 제주도 지방은 곳에 따라 한때 비가 조금 온 후 차차 개겠다. 바람은 약하겠다. 기상청은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씨가 계속되겠다.”라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 섭씨 –1에서 14도, 낮 최고 기온 16에서 20도. - 박지일, 「11月 6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7쪽, 전문. 죽어지듯이 살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온다. 사투리를 쓰면서 온다. 헤이수이(黑水县) 현은 좀 덥거나 아침은 아니 온다. 나나이 칼란(Nanai Kalan)은 습하거나 땅감이 익겠고 저녁은 아주 아니 온다. 마조르다(Majorda)와 파나두라(Panadura) 해안은 한때 더워 개골창으로 변한다. 바람은 없다. 눈도 없고 비도 없고 햇볕은 아주 없고 내일은 없다. 끝. - 박지일, 「11月 6.4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8쪽, 전문. 어디가 죽음 이전이고 어디가 죽음 이후인지 모르겠다. 네 앞에 선 거울이 너를 슬쩍 납치한다. 너는 그네를 돌려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거울에게 배운 대로 빌어 본다. 거울은 미동이 없고 너는 홀로 미동을 키운다. 엄마가 거울 속에서 등장한다. 너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너만 없다.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박지일, 「11月 9.7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34쪽, 전문. 정리하자면, 박지일의 시적 세계에서 그토록 호명되는 ‘나’와 ‘너’라는 인간 주체는 실로 한 순간의 물보라와 같이 순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영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위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기의 형태를 띤 작품들에서는 유독 의지 혹은 지시를 전달하는 단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한 대응관계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어쩌면 이러한 의지와 지시를 담은 단정적인 표현들은 유약한 인간 존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단서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란 그처럼 무수한 순간을 거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시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물보라』와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계속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를 통한 재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태로운 실존이 걸린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적 무대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존재가 오직 거듭되는 방황과 번민 속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한에서 인간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철저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주체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회의론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라는 한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순간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가 지닌 여럿 가운데 하나의 단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언어로 짜집어진 사물과 사물의 연쇄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론적 발견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최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또한 이 세계가 X.Y.Z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반복될 것이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박지일의 시적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3차원의 공간임을 상식을 통해 알고 있다. 입체성을 지닌, 그림자를 지닌 세계의 부피들이란 그 자체로 이 세계가 3개의 방향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 세계와 그 안의 사물과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 개의 축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실재의 영역을 향해 시인은 거듭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답변을 질문의 형태로 거듭 제시한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한 답변에, 정답에,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다소 회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빛이 이 세계에서 30만km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이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정답에 다다르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 세계의 규칙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며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잠재되어 있던 위기를 거듭 질문의 형태로 발견해나갈 것이다. 아마 그때까지 시는 거듭 쓰여질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지속하는 한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듬거리며 계속 나아가는 한에서.

월간 현대시 임지훈 송은숙박지일방향성「너머의 너머」「물보라」 2025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