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2024년 9월호(제417호)
하는 시, 하지 않는 시
하는 시, 하지 않는 시
-안태운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 임정민 『펜 소스』(민음사, 2024) 서평
‘하기’라면 저 흰 개처럼-안태운 『기억 몸짓』
이를테면 봄을 떠올릴 때 우리는 종종 그날의 벚나무를 기억한다. 벚나무는 발그레한 꽃잎을 피워올리기 무섭게 떨어뜨리는 중이다. 벚나무는 ‘흩날림’을 그림자처럼 매달고 기억을 현재라는 수면 위로 떠민다. 만일 봄날을 떠올리는 일에 벚나무가 호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억은 다른 사물을 끌고 올 테다. 그러니까 기억은 고도화된 뇌 활동의 결과물, 인간이 보유한 힘의 증명으로의 기억‘력’이기는커녕 물질성에 기대어서야 겨우 성립될 수 있는 온갖 사물의 교차로, 그 길 위에서 불완전성으로 흘러내리는 중인 ‘흔적’에 가깝다. 망각에 대한 불안을 숙명으로 하는 그러한 기억은 염려가 무색하게 자주 사라진다. 기억을 물성이라는 숙주에 기대어 성립하는 종속성으로 정의할 때 기억 주체의 자리를 당연한 듯 꿰차는 인간의 위상은 뜻밖의 생동으로 출렁대는 기억이 빚지고 있는 사물에 대비해 결코 우위로 올라설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그 기억의 숙주인 인간은 기억이 잠시나마 머물다가는 장소성, 뇌와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에 매여 있는 물질성과 같이 그간 비인간으로 정의했던 것들로 일시적으로 구축돼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된다.
벚나무를 의인화했다. 기억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그 여름 흰발농게를 떠올려보았다.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너는 군집을 이루었다. 토착어를 연습했고 이끼를 먹었다. 먹혔다. 돋보기를 썼다. 낳았다. 나를 의인화해보았다. 피가 나고 있었다. 오목눈이를 보았다. 누치를 보았다. 그림자의 빛. 나를 의인화하고자 했다. 계속 시도했다. 잔물결. 망설임. 거두어 가지 않음.
-「여울」 전문
세계의 모든 것을 인간화해 해석하려는 욕망의 수사법인 의인화가 실패한다. 먼저 벚나무를 의인화하여 벚나무가 매달린 기억을 떼어낼 수 있게, 그 시간의 흐름을 놓아둘 수 있게 한다. 나무를 망각의 능동체이게 하는 것. 벚나무는 그렇게 시간을, 기억을 놔둘 수 있게 된다. 익숙한 봄날의 의인화를 지나 다시 여름의 기억은 흰발농게에 옮겨 매달린다. 여기서 뒤꿈치를 드는 것은 흰발농게인가 ‘나’인가? 계속해서 이끼를 먹는 것이 나인지 돋보기를 쓰는 것이 ‘너’인지 낳는 것은 누구인지 모호해진다. 그건 흰발농게와 내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분을 위해서는 의인화를 통해 내가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는 방법뿐인데, “계속 시도”하는 의인화는 곧 그 실패를 지목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일을 통해 의인화에 깃든 해석의 폭력과 ‘인간의 자리’가 내포하는 우위 같은 수사법의 위험으로부터 멀어진다. 의인화하지 않는 회피와 우회의 성공이 아니라, 의인화의 실패를 통해 휴머니즘을 폐기하는 수행이다. 물질의 몸짓이자 물질을 기억하는 몸짓을 ‘여울’로 이름 붙일 때 ‘나’는 망설임의 자세로만 성립하며 이 시집의 골자인 ‘기억’과 ‘몸짓’은 이분법적으로 나뉘기는커녕 얼마든지 교차함으로써 되레 비물질성 인양 여겨졌던 기억에 대한 재래적 사유를 물질성으로 새롭게 쓰고 있는 거다. 흰발농게가 남긴 발자국, 그 몸짓에 더해 기억이 그려내는 것은 그런 얽힘, 횡단이다.
『기억 몸짓』에 묶인 시들은 ‘되기’보다 ‘하기’에 가까워 보인다. ‘되기’조차 범할지도 모르는 함정, 인간을 우위에 두는 일말의 오만이 침투할 수 있을 그 오류의 확률을 한 뼘 더 축소하는 ‘하기’는 시인이 택한 보다 적극적 수행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란히 걷기’가 비인간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음을, 다만 그것은 나를 잠시 낮추어 보겠다는 인간의 거만한 겸손일 수 있음을 전작에서 말해왔던 안태운은 이번 시집에서도 너의 입장이 되어보겠다고 간단히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이 없다면”“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도 없을”(「경주」)테지만 아직은 인간의 절멸이 도래하지 않았으니, 인간의 사고 행위를 추켜세우는 것이 아닌 사물을 경유하는 방식으로의 기억에 더해 인간과 비인간동물, 비인간사물까지 아우르는 행위라는 몸짓을 연쇄하고 가로지르기를 택한다. 그럴 때 인간이 규정해온 자리들이 왜소하고 허구적인 것이었음은 너무도 쉽게 들통나버리고 1인칭 나의 앎이라는 주체적 행위는 파기된다. 마치 “의탁해서 내가 모르는 장소로 내 눈을 풍경에 맡기는”(「경주」) 것과 같은 경험은 미화된 인간성의 허위를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경험이다.
이 시집은 몸짓이 아름다운 것은 “표정과 주름과 홈”(「기억 몸짓」)과 같은 비-몸짓을 남기기 때문이듯 비인간 존재가 기립할 때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이 기억이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기억과 몸짓의 숱한 교차는 ‘공놀이’에 유비된다(「공에 대해서라면」). 공이라는 사물은 ‘구르다’라는 예측의 동작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예측 불능의 동작을 함의한다. 그러면서 공은 둥근 표면에 달라붙었다 헤어진 손길들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과 행위, 사유까지 사물은 이제 인간이 개발한 도구적 개념을 떨치고 인간에게 작용을 일으키는 물질로서 존재한다. 이때 ‘공’은 무엇인가? 손아귀에 쥐는 안정감을 허락하지 않는 텅 빈 공(空), 그것은 누구의 손이든 닿을 수 있는 공(共)을 양면의 존재론으로 품고 있다. ‘공’에 달라붙은 기억을 따라가 보자면 우리는 공터에서 사라진 흰 개를 떠올릴 수도 있다. 채워짐으로써 공터(空)가 아니게 되고, 함께하는 것이 어느 한쪽에 여전히 차별로 존재할 때 그리하여 그곳이 공터(共)가 아니게 될 때 우리가 잃어버린 흰 개(「공터를 통해」, 안태운, 『산책하는 사람에게』, 문학과지성사, 2020), 우리를 떠나버린 그 개 말이다((「흰 개를 통해」, 같은 책). 그런 연쇄와 교차의 방식은 고향집에서 잠이 깬 새벽 제(堤)를 걸으며 거기에 깃든 이야기를 떠올리는 「오송」과 같은 시에 잘 드러난다. 이야기는 인간이 괜스레 제의 우묵한 곳에 물을 빼고 채우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그 안에서 존재하고 사라져간 여러 개체들을 일깨운다. 그 제의 근방에는 ‘우리 개’가 묻혀 있고. 그럴 때 제는 그 자체 삶과 죽음의 ‘둘레’가 된다. 그런 밤 우리 개는 이제 내 꿈에서 여러 마리의 개로 옮겨가 귀납적으로 태어난다. 나는 우리 개를 생생한 촉감으로 느끼기도 하는데, 우리 개의 감촉은 내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촉감-기억으로 온다.
그날 나는 어땠나. 나는 비 오는 제를 몇 번이고 걸을 수 있었나. 이곳을 자주 오는 이유를 물론 내내 알아채고 있었나. 왜냐하면 제의 근방에 우리 개가 묻혀 있으니까. 나는 여름이 되어 무성해진 이곳을 돌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제의 둘레와 잠시 멀어져 우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도 모든 게 자라나 있었으니까 마음이 놓였어.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부러 풀을 헤치며 무덤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제를 돌았고 우리 개를 떠올렸고 나는 우리 개의 꿈을 자주 꾸며 살아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마리의 꿈 중 하나가 기억났는데. 꿈속에서 나는 우리 개를 잃어버렸고 순간 똑같이 생긴 우리 개가 여러 마리 나타났어. 우리 잘 지내자고? 뒤돌아가보자, 하며 함께 걸었는데 그때 나는 이제 안 잃어버릴게, 하고 다시 뒤돌아봤는데. 우리 개의 꿈들은 반드시 잠 깨게 하는 꿈 같다. 새벽을 맞이하게 하는 꿈 같다. 동트지 않았는데도 일어나게 하는 꿈 같다. 그때마다 나는 꿈에서 깨기 직전 우리 개가 내 왼쪽 겨드랑이에서 자가가 움직여 내 오른쪽 겨드랑이로 옮겨 오는 감촉을 느끼는 듯했는데 나는 깨어나며 머금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눈물이 흘렀는데.
-「오송」 부분
그런 우리 개, 흰 개는 안타깝게도 짧은 생애주기와 어쩌면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이런 상실은 시인이 예감했던 미래이기도 한 바 우리는 다만 우리 개의 무덤 곁, 그 둘레를 걸으며 우리의 ‘여기 있음’이 “흐르는 일부로서 성긴 그물을 던지자며 그것 속에서 포획되자”(「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는 각오로 서는 과정에 놓여 있을 따름임을 시는 서사화한다. 이제 인간에게는 그간의 누적된 과오로 인해 잃을 일만 남은 건지도 모른다는 서늘함, “몸과 마음의 상실”을 상기시키는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는 몸짓과 기억으로만 남은, “인간 때문에”“빠르게 절멸되고 있”는 “생물들의 이름” 부르기라는 ‘하기’의 사례로써 내밀어진다. “얼굴 범벅인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다만 “둘레를 돌고/ 나누”(「몸짓 기억」)는 것뿐이라는 서술 속에는 존재의 얽힘, 그 가로지름에 대한 자각과 왜소한 인간의 수행이라는 걸음이 새겨지며, 이때 ‘둘레’는 안태운의 시가 ‘하는’ 장소, 자리가 된다.
시집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 몇 점의 사진에는 ‘몸짓’이 있다. 그리고 그건 기억과 교차할 테다. 그래서 이 사진들은 모두 어떤 둘레를 포함한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일 수도 있는. 지붕 위에 올라선 흰 개를 보라. 우리를 떠나버린, 미련도 없이 공터 ‘바깥’으로 영 나가버린 흰 개는 인간이 한정해준 개집 따위 애초에 성에 차지 않았다는 듯 지붕 위에 올라서 있다.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냐는 듯이 이쪽을 응시하는 흰 개는 조금이라도 더 먼 곳을 보려는 걸까? 저 개의 자세는 무언가를 소망 ‘하기’의 자세를 말하는 중이다, 쓰는 중이다. 온몸으로 저 사선의 미끄러짐을 버티어내는 중인 공터의 우리 개가, 있다. 없다.

<사진1>
오픈 소스와 ‘하지 않는’ 시-임정민 『펜 소스』
링크를 데리고 산책하는 길은 위험물 천지다. 누구나 걸어갈 수 있지만 누구도 그 길의 주인은 아니다. 길 위에 있는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 그저 길 위를 스칠 뿐이다. 떠돌 뿐이다. 임정민의 『펜 소스』는 open source와 pen source를 오가며 시 쓰기, 소스로서 드넓게 펼쳐진 언어의 더미 그 질식감을 그려낸다. 모호함, 막연함, 자주 비거나 생략되는 품사들, 엉클어짐은 이 시집을 시종일관 숨 막히는 고뇌로 몰고 간다. 시는 내내 새로운 정의에 대한 욕망과 오픈 소스라는 펜 소스에 대한 출구 없는 질문을 반복하며 언어의 숙명, “빈 곳을 향해 달려가는 쓰기와 딛는 곳 전체를 발설하고 마는 걷기”라는 아포리아에 한 시인을 깊이 고립시킨다. “편지나 일기를 교환하며 서로를 남겨보는 일에서부터/ 또 어제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반성을 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말했다고 스스로 믿을 때만 언어가 옷을 입고 산책을 시작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고백처럼. 사실 문자는 교환을 그리워하며 태어나는 존재, 누군가에게 나를 고해하고 고백하고 너를 읽고 싶은 욕망의 기호화이다. 그런 문자의 욕망이 그러나 누군가에게 읽히지 못하고 ‘링크’ 안에서만 머무를 때 그것은 산책을 기다리다 무추름해진 강아지 꼴이 된다. 어떤 날에는 무단 조퇴까지 하고 링크를, 그 속의 숱한 말들을 훨훨 자유롭게 하리라 다짐하지만 무시무시한 두려움은 결국 “비가 온다”라는 문장을 핑계 삼을 수 있을 뿐이다.(「링크 산책시키기」)
미처 쓰다가 만 것을 쓰는 거야
한 번 더 질문을 던지고 모른 척 기억 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을수록 숙고할 만한 사명이 커진다고 믿으며
운문을 쓰는 것이지만 운문이 남아 있지 않는
(...)
영원히 쓰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항구의 유령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평일
누군가의 침잠하는 춤이 빛을 조금씩 뿌리는 오후
고요한 슬픔이 날마다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
구호의 더러움으로만 회복되는 재해
백 번의 말로 백 번의 용서가 이뤄지는 기도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지듯 뛰어가는 아이들
시시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열매들
신의 실수에 의해 도시까지 밀려온 보트
가만히 설탕을 녹여 주는 과거에서 온 사람
-「재해」 부분
그런 시인의 시 쓰기에 대한 고뇌는 ‘재해’를 표방한다. 이미 숱한 일들이 벌어졌고 누군가 선취한 말들 사이를 헤매며 뭔가 더 남아있는 게 없을지 “쓰다가 만 것을 쓰는” 영속의 작업일 재난의 글쓰기. 구호로 복구 중인 재해의 상황을 회복하는 일은 오염을 경유하여서만, 그 “구호의 더러움으로만 회복”에 이른다. 이미 오염되었다는 결벽의 감각은 언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회복 가능성은 다시 오염된 말로 기도하게끔 한다.
이런 「펜 소스」는 막연하고 막막하다. 그것은, “하나의 각자의 말하기”“한계를 의미한 채 한계 앞에 서 있기만 함으로써 이해의 곁을 맴돌고 맴도는 말하기”이다. “펜 소스는 완전한 소스가 아니”라서 그저 “휘갈기는 한 번의 문장”일 따름이다. 펜 소스에 담긴 착란의 고통은 글쓰기, 시 쓰기의 곤혹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open source로부터 가져옴으로써 변화한(하는 중인) 지면, 웹 서비스를 골자로 하는 정보의 교환 및 노출, 검색을 전제하는 드넓은 오픈 소스로 제공되는 언어의 세계에 대한 변화 인지와 그 막연함을 동시에 함의한다. 더 이상 지면(紙面)이 아닌 지면(誌面)에서는 언어 운용의 권위가 디지털 시스템에 있고 이미 Chat GPT와 같은 시스템은 인간을 도저하게 만들어주었던 예술, 그 창작의 권위를 새롭게 정의하게끔 하고 있지 않나? “무한한 펜 소스”는 “미완성의 연결”이고 “오픈 소스”라서 “공평한 적막”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공평함은 “언제나 제 자리에서의/ 각자의 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펜 소스는 스스로 오류”이기도 한 셈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쓰고자 하는 순간에 “귀향할 수 없는 자유이면서 자신이 곧 원천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경한 감각과/ 아무것이나 되어 버리려는 현자로서” 존립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그게 고통의 원인일까? 시인의 앞에는 “파괴와 절제”만이 사명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다고 “펜 소스가 이미지이던 시절”“성스러운 가능성이”고 “저항의 손재주이”며 “큐피트의 하나의 관점이던 시절”로의 회기가 답일 수도 없겠지만, “메타픽션이 진지하게 열외를 고려하는 자의식의 새로운 장치”로써의 펜 소스는 “자신이 자신을 호출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복할 수 있는 선택일지 반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도출하게도 한다. “장르의 함의와/ 낱말들의 수정 구슬 속에서 지연되”며 “어디에나 있고, 자기 자신을 재분배”하는 “가로챔”이라는 펜 소스에 대한 사유가 바로 63~104쪽에 걸친 장시 「펜 소스」이다. 결국 그러한 펜 소스를 활용하는 「펜 소스 레시피」라 봐야 “겨우 태어나고자 하는 결정일 뿐인 불편한 이야기와/ 미세 조정 문제를 가진 식탁 위의 조명이/ 그리고 회심의 귀감이 감수성을 제어”하는 일에 불과할지 모르나 기어이 그는 “희생을 도피하는 유령이 되고자 한다”. 무엇에 대한 희생일까? 그건 아마도 익숙한 언어, 수사학의 법칙에 희생되지 않겠다는 그런 시 쓰기, 언어를 응당 답습‘하지 않는’ 시인의 자의식에보다 근접해 있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이런 시가 탄생한다.
helpⁱ [lʌv] Ⅰ.(명) 1.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사람을 친다면 잠시 숨을 멈춤. (한숨 따위.) 2. a. 어떤 다친 인간의 얼굴이 몰고 오는 저녁의 바람을 쐴 때 넘어져 있는 다른 한 사람을 마주침. b.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말하듯 전하는 괜찮냐는 물음에는 실은 어떤 의도도 없음. c. 네온 로고. d. 나는 많은 거미줄에 묶여 있음. ex. “나는 당신의 모든 도움이 필요합니다.”
(...)
Ⅲ.(꿈) 1.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필요에 따라선 나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우리는 한 팀으로 저 공터를 물들일 수도 있다. 2. 내게 다가와,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갔고 멈추지 않는 것은 여전히 피가 묻은 단화들뿐이니까. 3. a. 담배 연기를 그대로 정지하게 만들고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 b. 오른팔을 다친 너의 사진이 찍힐 때. c. 의미를 위해 타투를 새기러 가면서도 의심이 멈추지 않는 것. 또는 의심의 종말. 4. 가장 평범한 범주.
- 「기념일」 부분
임정민은 기어이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어학 사전 전개의 모든 법칙을 빗겨남으로써 언어의 자의성을 폭로하는 한편으로 자의성에 달라붙은 합의를 파손한다. 이 시는 기념일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발음 기호는 파닉스를 무화시킨다. 품사를 정의하는 자리에는 ‘꿈’이나 ‘곁’과 같은 다정한 지표들이 서 있고, 활용의 예시는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는 자신감으로 넘실대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 묵은 말의 더미, 그 무게를 해체한다. 부수고 재조립한다. 물론, 그것은 다시 기성의 언어를 경유하고 차용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에 시인의 고민은 더욱 침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수지 않고서는 다시 쌓아 올릴 수도 없기에 자꾸만 꿈처럼 언어의 심해를 헤매이는 한 시인이 여기 있다. 거미줄 쳐진 언어의 집에서 안온한 시를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 시의 살해를 통해서 이 시인이 몰고 오는 것은 관념, 선 안에 있던 모든 규정에 대한 임의성 그 허구에 대한 폭로다. 미궁을 헤매이며 도착한 곳은 시가 없는 곳, 시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 그리하여 시가 새롭게 쓰여질 곳이다. 임정민이 하지 않는 시 쓰기는 우리를 조금 더 깜깜한 곳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말의 찌꺼기 대신 더욱 막연한 심연, 그 날것의 말들이 우리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는’ 시 쓰기는 이 시인만이 ‘하는’ 시를 쓰디쓰게 축출해 내린다. 저 막연한 어둠을 기꺼이 더듬으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한 시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추천 콘텐츠
1.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문구는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탐문하려 할 때마다 타자의 시선이 끼어들고 타자의 언어가 개입하기에 온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갇히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말 속에 규정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온전한 자신의 시선과 언어로 자기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의 방식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허연이라면 “나는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내 사랑은」 부분 (『불온한 검은 피』, 1995) 요동치는 시선마다 깨닫는 것은 나를 나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적대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반기”의 흔적들로서, 나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에 대한 적대의 잔여들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행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치욕의 내 입맛들”도 씻기지 않는다.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모두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왜 그런가? 피가 “검은” 까닭에, 그 피가 “불온한” 탓에. 타자의 지옥을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이 벌써 지옥이기에,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허연 시작(詩作)의 시작, 자기 인식의 기원일 터. 그러나 자기라는 생(生)이 여전히 지속하는 한 지옥은 아직 예감일 뿐이다. 사랑을 곧장 지옥이라 부르기보다 “천국이 아닐 것”이라 유보하는 시구는, 시인이 선 지금-여기가 지옥과 천국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연옥과도 같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현재로도 미래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의 정체 속에 영원히 유동하기만 하는 기이한 장소에 ‘나’가 있다.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여정이 그의 운명이다. 성장도 없고 퇴행도 없는 이런 상황은 소년을 소년으로 멈춰 세운다. 언젠가 존재했으리라 믿을 뿐인 “푸른색의 기억”은 저 검은 피의 불온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 2. 벌어질 일은 반드시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 「천국은 없다」 부분 (『내가 원하는 천사』, 2012) 순전한 사랑에 대한 꿈과 열망, 그것은 천국이 실재한다는 믿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곤경이 가파를수록 우리는 사랑에 대한 꿈에, 천국에 대한 믿음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쩌랴. 두 다리가 디딘 발판은 “지긋지긋한” 지상의 한복판. 이 땅의 어디로 가든 지상에서의 열망과 믿음은 결국 제자리뛰기의 지긋지긋한 반복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걸 왜 모를까? 뛰면 뛸수록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고, 뜀은 끝내 멈추고 말리라. 십자가가 많았다. 왜 개별적 인간들은 임연수어가 있고 잘 끓여진 카레가 있고 심지어 맥박이 뛰고 끝도 없는 겹겹의 파도가 있는데 신을 보려고 할까? 망하기 전에 서둘러 망하려고 할까? - 「해변 정류장」 부분 사랑을 위한, 천국을 향한, 신에 대한 자유. 우리를 홀리는 저 말들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여기 지상에 머물다 끝내 여기서 소진하리라는 역설의 진실을 표현한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상이자 허상이요, 환상일 따름이니. 딴 생각을 하다 버스를 놓치고 낮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들었다 “잘 알아 두라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야” - 「해변 정류장」 부분 이러한 자유는 제자리를 맴도는 뜀뛰기, 수백 번 수천 번을 굴린다 해도 한 걸음 못 나아가는 쳇바퀴 달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각자 영위하며 생을 소모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리멸렬하고 사소한, 지상의 흙 한 줌 부스러기에 연연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길고양이가 있었다. 캠핑오는 사람마다 이름을 지어줘서 고양이 이름이 한 백 개끔은 된다고 캠핑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는 우리 텐트에 올 때만 레오였다. 레오는 우리 구역에선 한 번도 빠짐없이 레오였다. 이박 삼일동안 그랬다. 하지만 레오는 옆 텐트에 가면 줄리앙이었다. […] 캠핑은 지리멸렬했다. 사소했다. 끝까지 사소했다. 데크 바닥을 핥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였다. - 「지리멸렬하다는 것」 부분 “레오”는 사자의 이름이다. 동시에 “줄리앙”이기도 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타인에 의해 보여지고 명명되는 존재로 삶을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라 불리고 자신하든, 끝내 “데크 바닥을 핥는” “사소”한 존재가 그것. 치욕적이거나 불운한 운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생의 주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 「작약과 공터」 부분 작약이 피었다. 사람들이 먹고 놀며 흥청거리는 장소, 거기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작은 새의 사체 옆. 이를 신비롭다 할까, 아름답다 부를까? 살아 있는 “나”에 감사해야 할까? 내 시선에 들어온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 같기도 하고,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기도 하다. 우울한 감정을 불러내는 그 시선은 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다만 “잔인 속의 고요”를 품을 따름이다. 저 고요를 삶도 죽음도 통과하고 있다. 자살한 여성이든 슬픈 태도든 작약은 그 사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것은 마음대로 보고 제멋대로 명명한 “나의 재능”일 터. 분명히 해두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보며 내가 부르는 모든 것은 ‘이 나’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 자아의 잔상이라는 것을.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과 공터」). 3.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 부분 (『오십 미터』, 2016) 소년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성장을 거부한 채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타자의 영향을 받고, 타자의 시선 속에 자기를 두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꾸미는 일이다. 이는 자기의 길이 아닐 터이기에 소년은 사랑의 바깥에 머물고자 한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기를 원한다.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다 주고 약해지면 남는 건 없어 대신 ‘사랑’말고 필요한 것만 하는 거야 신념 같은 거 비웃으면서 그거 알아?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 이게 파도랑 가장 오래 노는 거야 절대 다 적시지 않는 거야 반 정도만 적시고 꼭 반을 남겨 두어야 해 - 「이끼 키우기」 부분 “‘사랑’ 말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란 무엇일까? 행하면서 행하지 않기, 혹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기. 사랑을 연기(演技)하되 사랑을 연기(延期)함으로써 사랑 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연기(緣起)가 아닐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끊지도 끊기지도 않도록 다만 곁을 맴도는 것. 그러니 사랑 대신 사랑하지-않기를 사랑하자. 알았지?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이끼에 물 주자 - 「이끼 키우기」 부분 소년이 성장하지 않듯 사랑도 성장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끼는 성장하겠지. 사랑 아닌 사랑을 누리며,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소년처럼. 그런데 소년은 정말 자라지 않는 걸까?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 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수없이 없이 많은 희안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뼈 속으로” 난 “길”은 내적 성장을 암시한다. 외형은 자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애인이 아닌” 듯 “사랑이 아닌” 듯 시간은 흐르고, 준 것과 남은 것이 이루는 반비례 속에 뼈 속의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명명이며, 성장 대신 내어주거나 얻은 것, “늘 그리워하는 병”(「오십 미터」)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희안한 초안들”이란 아마도 제대로 성장했다면 갖추었을 소년의 꿈이자 열망, 믿음이 아닐 것인가? 환상과 허상, 상상을 통해서나마 성장이, 어떤 성숙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애인은 혼자가 되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그런 성숙은 나눌 수 없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 터. ‘나라는 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간신히 표명되는 모종의 자기 감각일 테니.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불가능을 통해서만 바라고 믿을 만한 감각일 것이다. 차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Y는 하루가 차갑고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바다에서는 소녀들이 까르르대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해변이었다. […] 십일월의 바다는 Y에게 의미심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감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관리되지 않는 것 해변에서 Y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파묻었다 - 「Y의 해변」 부분 4.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 「생은 가엾다」 부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지옥이든 천국이든 삶을 버티고 이어간다는 사실은 가엾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들은 그 같은 생을 부대끼며 우리가 내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일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느 헐한 저녁/혼자 단무지를 씹”는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고, 그 하던 일들이 되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에 빠져들게 만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바로 그 같은 삶의 무상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야근조 몇이 둑방 위를 걸어간다 그들에게는 한 세계가 있고 마을에도 한 세계가 있고 남자들이 밤에 해당하는 몇 가지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은 마을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춘 채 하루를 세상 어디쯤 배치한다 […] 남자들은 늘 했던 일들을 하고 마을도 늘 했던 일들을 한다 약속 같은 게 없으니 망칠일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 잠자리에 든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하루가 간다. ‘제행무상’ 말없이 이루어지는 밤 - 「어둠과 마을」 부분 기약이 없는 일상,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다. 영원회귀처럼 찾아드는 “어둠과 마을”의 풍경은 지금-여기의 이 순간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낮게 속삭인다. 허무감의 극치일까? 동시에, 실재하는 순간 속에 꿈과 열망, 믿음을 투여하는 성실한 허무주의자, 초개인주의자의 나날이 그로부터 펼쳐질지 모른다.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 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 「판교」 부분 타자의 눈길과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나만의 나’ 속에 자신의 거소를 짓는 것. 성스러움일까, 아닐까? 저 지독스러운 고집과 고독, 무한한 자부와 겸손, 기이할 정도로 사소한 것과 존귀한 것이 얽혀들어 만드는 삶.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 「판교」 부분 생이 가엾다면 죽음을 멀리할 것이다. 오만하게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허무주의자는 죽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이 태어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장마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상(氣象)을 견디고 버티는 시를 길어낼 수밖에.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덕분이었다. - 「장마의 시」 부분 이 생애에서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천국이었으면,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어떤 종착지라면 우리는 초탈할 수도 있고, 완전한 체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작고 붉은 열매”가 떨어져 “포자로 피어났”을 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을 느꼈을 때, 그것이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소년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삶만큼이나 죽음도, 죽음만큼이나 삶도 알아버린 저 “장마” 속에서. 이곳에서는 다만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그 모든 것을 시로 길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답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성장하지 않는 소년을 멈춰 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문턱이 아닐는지.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 번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 「장마의 시」 부분 * 성장을 거부한 소년에게 시간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마도 내적 성장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을 흐르는 피가 ‘검고 불온하다’며 천국과 지옥을 뇌까리던 시절을 “오만”하다고 회상조차 하게 되었다. 신화처럼 ‘푸른색의 기억’을 찾기보다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시절의 “동네 이름”에 더 마음이 갔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그 동네 이름을 기억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때 번성했었다는 남녘 어느 도시로 문학 강연 가는 날 문화센터를 찾아 헤맨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달이 빨리 흘러갔다던 그 동네를 찾고 있었다 원로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시는 비명’이라고 오만한 말을 지껄이고 밤거리로 나왔다 - 「항구」 부분 상투적인 통찰의 몸짓 없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는 성장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 중인 소년일 터. 그가 여전히 ‘나쁜 소년’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리에 마냥 서 있지만은 않은 여정 속에 있음은 틀림없다.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도 세워두지 않은 채 여전한 걸음을 옮겨가는 누군가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권력으로 알지 않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무연고 시신처럼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가슴을 두드렸다 몇 알의 불안장애 약은 시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세월을 항구에 놓아두었다 - 「항구」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펴낸 지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가 나왔다. 그리고 4년을 주기처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나온 산문집이나 동시집, 시선집을 제외한다면, 다음 시집이 나올 시간을 놓친 셈이다. 아쉬워해야 할까? 시인 허연은 아직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방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무상했던 거부와 부정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지 않고 지금-여기의 순간으로 매번 끌어당기는 것은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이 지금의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내가 듣는 것. 허연에게 시란 그것을 멈춤 없이 계속하는 글쓰기이며, 생의 허무주의를 성실히 실행하는 행위일 테니까. 천국보다 낯설지만, 지옥보다는 낯익은.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개정판 자서」 전문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1. 지금 우리의 영혼이 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시속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맹목을 온 힘을 다해 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익숙해지고 말아, 어째서 이리 늘 쉽게 지치고 마는지 곧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하여 온 생을 걸어야 하는 몸과 영혼 사이에 주어진 가혹한 계약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의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히 드러내고야 만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쉼 없이 반복되는 중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까. 맹목의 속도와 방향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할 수 있다면 삶은, 시간은, 감각과 영혼은 얼마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몸의 시간에 안착하거나 가상의 자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며, 몸과 영혼 사이의 간극과 시차로 매번의 삶을, 한 번도 발설된 적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충실히 증명해낼 순 없을까. 이다희의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중력을 찾”으려는 “충혈된” 낮의 시간과 “중력이 희미해지”는 밤의 깊이(「햇빛이 오는 쪽」, 『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사이에서, 그 아득한 현기증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하려 한다. 이는 물론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자주 발견되었던 모티프일 테지만, 유독 이번 시편들에서 더 선연하고 돌올해 보인다. 중력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희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성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격렬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작지만 분명한 존재의 울음을, 눈길을, 선득한 혼란을 아득한 허공 위에 담담히 풀어놓는다. 무감해진 생의 감각과 굳어버린 언어의 몸에 작은 숨구멍을 내고(“그녀의 귓불에 점처럼 박힌 구멍을 본다”, 「귀걸이가 있다면」),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왔다 물러나는 존재의 충동과 생동하는 호흡을 문장의 심연 한가운데에 단단히 심어놓는다. 그렇게 중력과 허공이 뒤엉켜 범벅이 된 혼곤한 꿈들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 이다희 시의 울림은 중력과 허공의 경계를 섬세히 살피고 어루만지려는 시선의 견고함과 그 깊이로부터 온다. ‘너머’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시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에는 언어의 관성이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로서의 절박함이나 성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산문시의 차분한 호흡으로, 때로는 힘들이지 않고 찍어낸 스냅샷과 같은 이미지의 경쾌함과 리듬의 산뜻함으로, 우리의 삶과 감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유의 허방을 적확히 찌르고 그 폐부를 찬찬히 응시한다. 중력의 맹점이 음화로 인화되어 나타나는 위태로운 매혹의 순간을 담담히 매개하고,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며 뒤섞일 것 같은 팽팽한 임계점의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낸다. 다음의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카는 숫자 8이상을 세지 못한다. 조카는 숫자 8까지 세고 다시 1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8다음으로 17을 외쳤는데 누구도 조카에게 17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tv에서 보거나 책에서 봤겠지. 다들 나름의 추측을 보태었다. 나는 지니가 갇힌 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조카의 작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8다음에 왜 1이 아니고 17인지 알려줄래? 조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에 빠져든다. 조카는 훨씬 무거워진다. 잠의 중력이 나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바지에 침이 묻는다. 무릎을 내어주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잠에 빠진 인간은 잠으로 돌진하지만 무릎을 내어준 인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전히 혼자였다.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덩그러니. 문득 살아야 할 시간들을 헤아려보았다. 나는 나의 수명을 알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조롱은 많아지고. 내 마음은 진실을 불태웠어. 먼지가 된 진실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아, 바람에 흩날리네. 자동차는 가만히 있고 긴 고속도로가 타이어 아래를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다.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 눈물이 흐른다. 이 눈물은 마치 남의 눈에 매달려 있다가 내 볼에 툭 떨어진 것 같다. 만족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제 집에 가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 「크로마키」 부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중력과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작은 거짓과 착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안전하게 보증된 대리만족에 기대어 하루치의 허기와 갈증을 근근이 견디며 버텨내 보지만, 아주 가끔 아무리 정교히 꾸미려 해도 위장된 속임수들이 온통 속절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아찔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상상의 연기를 펼치는 “크로마키” 촬영 현장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조카”의 깊은 잠과 그 잠의 중력은,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각과 상념을 적나라한 허공뿐인 어둠 속으로 단번에 밀어내 버린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허공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그간 지상의 몸에 달라붙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어온 스스로 “불태워” “먼지가 된 진실”의 자리를 아프게 직시한다. 그러나 온전히 허공뿐인 것은 아니다. 화자는 스스로가 지워버린 진실의 텅 빈 자리만이 아니라, “조카”의 작은 비밀, 8 다음이 9도 아니고 1도 아닌 정확히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남는다. 중력에 거세당한 텅 빈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추궁과 협박에도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허공의 비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러니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는 고백은 이처럼 기나긴 우회 끝에 도달한 해방의 순간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도 뜨거운 헌사가 된다. 물론 이는 ‘중력’을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린 관념과 추상으로서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깊은 잠”을 촉구하기 위한 매개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도피나 회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훼손된 수수께끼와 진실, 허공의 자리가 다시 중력과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요한 안식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력과 허공이 뒤엉키며 어지러이 뿌리를 내리는 매혹의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명료히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참새가 지붕의 가장 끝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에 참새의 발이 저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겠지 곧 참새는 분주하게 날아가 버린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이 다시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대리석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물감이 터지지 않을까 - 「코가 붙듯이」 부분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이 품고 있는 지상의 중력은 그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는 “참새의 발”과 아스라이 균형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다. 참새는 언제라도 스스로가 품은 허공 속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자의 시선은 허공에의 투신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해방의 상상력보다는 중력과 허공이 만나 이루어내는 위태로운 균형과 혼란에, 잠재태들이 극에 달하는 임계점의 순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 허공이 중력 위에 다시 내려앉는 형상적 필연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는 “대리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무한한 잠재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감이 터지”듯 서로의 경계를 범람해 뒤섞이기 직전, 모든 혼란과 소란이 폭발하듯 촉발되기 직전, 영원한 시작의 순간들에 바쳐진 위와 같은 시들은 이다희의 문장이 오래도록 정박해 있고 싶어하는 풍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3.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위태로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에 깊이 천착해 있는 이다희의 시는, 화자에 의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도입된 ‘허공’이 촉발하는 리듬과 호흡의 운동성에도 긴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때로,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감각과 사유의 극한을 돌파하려는 그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다희 시 속 허공은 주체와 세계를 모두 지워버린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공마저도 감싸안으려는 타자의 구체적 체온으로부터, 서로가 품은 울음의 깊이를 공평히 나누어 가지려는 응시의 뒤엉킴으로부터 촉발된 가장 따뜻한 부재이자 간극으로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와 부재를 부산스러운 의미의 소란과 몸부림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 부재를, 침묵을, 설명될 수 없음을, 그 적나라한 맹점을 끌어안은 채, 그 허공이 품은 열기와 온기로 서로의 맹목과 허기를, 갈증과 결핍을 함께 앓고 견디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들이 가능해진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에 공기에도 노출된다. 종이와 공기가 파란 잉크를 나누어 가지는 순간에도 다음 문장이 필요해.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중략) 두 개의 스페이스 바, 두 개의 공백. 왼손 엄지에 하나 오른손 엄지에 하나. 두 개의 우주는 바깥을 원한다. 겨울을 원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외로웠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겨울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밤이 울적하다면 계절이 지구의 오래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우주로 다시 쓴다. 모든 꽃이 자해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꽃의 종류를 골라서 꽃집을 나온다. 머리보다 큰 수국을 높이 들고 달리는 저 여자는 대낮을 파란 불꽃으로 불 지른다. 기쁘다고 하기엔 바쁘고, 슬프다고 하기엔 꽃이 아름다워 눈물이 마른다. 지금 여자가 당신에게 윙크를 한다. 당신에게. 눈물이 아니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윙크. 윙크. - 「볼펜, 남편, 키보드」 부분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잉크와 종이가 만나는 단순한 사건에조차 함부로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 없는 허공이,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와 그 신비를 품은 우주가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대용 키보드 속 두 개의 스페이스바처럼 서로 꼭 닮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개의 공백과 허공으로, 간극과 평행선으로 남편과 자신을, “여자”와 “당신”을 나란히 놓아둔 채 차례로 호명한다. 두 개의 허공은 막힌 문장에 뚫린 이중의 숨구멍이 되어 시적 주체가 견디고 감내해야 할 중력의 시간을 “파란 불꽃”의 선연한 열기로 한껏 뜨겁고 풍요롭게 타오르게 만든다. 온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이 거꾸로 서로를 더 깊고 뜨겁게, “바쁘”게, “아름답”게 만드는 까닭은, “눈물”로 애타게 호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서로의 허공을 “윙크” 하나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품어줄 수 있다는 오래되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에게 깊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려 깊은 눈치와 배려는 꼭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명쾌히 밝혀주고 있듯, 이것은 결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가 오면 악기들이 퉁퉁 불어서 한참을 달래야한다. 이 차이를 알아낼 수 없다면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 연주자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한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찻잔 테두리에 둘러진 황금을 보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울음이 그녀의 말을 방해했지만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황금처럼 보이겠지만 황금이 아니라고.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나는 찻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마치 자기 자신을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사람처럼. 한결 맑아진 얼굴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렸다. 찻잔은 이제 텅 비어 있고, 자신의 영원한 불만족에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 「바로크 일기」 부분 손님을 맞는 데에 꼭 연주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을 맞는 행위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겉으론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리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주인인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든 응답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라는 ‘허공’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화자는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확인하고 선언한다. 그는 그녀의 “손에 찻잔을 쥐여” 준 채 떨리는 손이 잦아들어 “찻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 타자의 심연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위 시가 특별해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 간단히 환원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녀가 떠난 뒤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린다. 마치 원래부터 진짜 손님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허공이 끌고 들어온 어둠이었다는 것처럼. 이 어둠에 각인된 결코 지울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이 “영원한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이다희 시의 시적 주체들은 이미 이 어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하다. 부정하고 밀어내야 할, 길들이고 제거해야 할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자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어둠을, 허공을 정확히 응시하고 끌어안는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의, 허공의 순례자들이다. 허공과 중력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일순간 부풀어 오르고 불현듯 멈추어 서는 호흡의 중심에, 임계점의 날카로운 간극에 아득히 사로잡힌다. 4. 이다희의 문장은 언제나 하나의 쌍으로, 두 개의 호흡으로, 엇갈리며 뒤엉키는 두 벡터로서 존재한다. 중력으로부터 허공이 솟아오르고 허공으로부터 다시 중력이 자라나는 이 종결될 수 없는 존재의 충동과 반복은, 그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을 이 상보적 운동성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시는 관성과 중력에 굴복하지도 어둠과 허공을 향해 손쉽게 탈주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며, 너머에 진실이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도, 이를 향한 과장된 몸짓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길어 올리는 빛나는 순간들은 중력과 허공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견고한 침묵과 텅 빈 부재의 물성으로부터 세상 모든 빅뱅의 혼돈과 폭발의 열기를 읽어낼 줄 아는 극도로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이중의 시선으로부터 획득된다. 이다희 시의 독특한 인장은 이처럼 존재와 무가, 중력과 허공이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를 뒤바꾸며 영원히 그 임계점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존재론적 사유의 역동성과 그 충만함 속에 자리한다. 이를 임계점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버려진 밤들이 품은 내밀한 임계점의 순간들을 그의 문장이 초대한 또 하나의 깊은 맹목 속에서 캄캄히 발음해 본다. <끝>
1 시인 허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시작은 이 문장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시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의 마지막 문장이다.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성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이후 13년 만에 선보인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에 담긴 시. 이 시를 허연의 대표작이라 이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허연의 오랜 독자인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으로 첫손에 꼽기도 다소 애매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허연의 시를 음미할 때면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하는 문장과 함께 이 시가 자연스레 겹쳐진다. ‘나’ 자신에 대한, 지나온 삶에 대한 몹시도 내밀한 사색이 서린 때문일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는 어떤 면에서 그 자체로 시인의 시론 같다. 처음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을 수도 있다. 혼자란 어째서 “시원한” 것인지, 고독이란 어째서 “다행인” 것인지. 스무 살 무렵 시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탐독하며 그랬던 것처럼, 끝내 명징해지지 않는 문제들 앞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시에 그 낯선 매혹에 속수무책 빠져들었을 수도. 혼자라는 건 어떤 것일까. 그것은 얼마큼 오롯한 것일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곱씹다 보면 지독한 고독이 자아내는 맹렬함, 아득함, 서늘함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곤 했다. 지금에 와서 보자면 이는 인생에 대한 직시에 가까운 것이다. 결국 ‘나’는 세상의 무엇도, 누구도 아닌 ‘나’이므로. 이 하나만이 살아 있는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진실이므로. 아울러 이는 자신의 방향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시인 스스로 아로새긴 다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 세 권의 특기할 만한 시집을 통과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매서운 선언과 다짐은 유효한 듯하다. “세상엔 늘 나만 있”는 자에게 ‘나’는 곧 세계다. 존재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셈. ‘나’로써 세계는 이미 완전하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까. 물론, 이는 철저한 고독을 의미한다. 홀로 동떨어진 상태. 누구 하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없다는 것. “비뚤어진 세계관”조차 “나누어 가질 그대”는 오지 않는다는 것. ‘그대’는 어째서 감감무소식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빛을 피해서 한없이” 걸어간다(「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밖으로, 더 밖으로. 이로써 허연의 화자들은 일반의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괴리된 상태에 있다. ‘안’이 아니라 ‘밖’에 위치한다는 것. 얼핏 안에 있는 듯 보여도 실상 밖을 산다는 것. 언제든 밖으로 달려나갈 채비를 한다는 것.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것이 수동이 아니라 능동의 형태를 띤다는 사실이다. 엄연히 스스로가 채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것.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에서 고백하듯, 끊임없이 “중력과 싸워온”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연의 고독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군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 고독은 지금껏 허연의 시적 자양이 되었으리라. 묵은 고독은 때때로 섬세한 내면을 짓누르는 병인(病因)이기도 했겠으나, 그럼에도 다름 아닌 고독으로 인해 계속해서 쓸 수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2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연히 분리시키고자 하는 태도. 안에 있지만 밖을 살아간다는 인식은 허연의 레테르라 할 수 있는 ‘소년(성)’과도 유관하다. 허연의 소년은 흔히 말하는 비성년의 아슬아슬 들끓는 에너지, 그 이상의 무엇을 담지하고 있다. 나도 믿기지 않지만 한두 편의 시를 적으며 배고픔을 잊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보다 계급이 높은 여자를 훔치듯 시는 부서져 반짝였고, 무슨 넥타이 부대나 도둑들보다는 처지가 낫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역시 앞선 시에서 언급한 문장과 함께 시인의 선언으로 읽어도 좋겠다.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세속에 몸을 담글지라도 종내 슬그머니 한 발을 빼는 태도. 섞이지 않는 푸른빛. 그러나 그 빛, 즉 허연의 소년은 주로 현재가 아닌 과거로, 기억으로 현현한다.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기억을 지금까지 투철히 간직하는 것으로 “무슨 넥타이 부대”와 같은 일상의 그렇고 그런 권태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는 것이다. 근작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 발문에 인용된 시인의 발화를 끌어오자면 이렇다. “어느 날부터 나이 먹고 뻔해지는 게 싫더라고…… 사회가 원하는 딱 들어맞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정리된 착함’ 이런 게 싫었고…… 하지만 사실 나는 착하고 싶었어…… 기름기 없는 착한 소년으로, 권력에 어울리고 그것을 잘 지키는 점잖은 어른이 아닌……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같은…… 누군가가 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 사람의 살을 찌르는……” “철 안 든 푸른 유리 조각”, 즉 허연이 간직한 소년이란 일종의 반골 기질 같은 것으로 읽히기 쉽겠지만, 이는 생래적인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체득한, 단련한 삶의 자세로 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사실은 착하고 싶었던, 여리고 외로운 한 존재가 자신을 지키고자 발악하듯 꺼내 든 유리 조각.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스로 “나쁜 소년”이 되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공화국’을 스스로 설계하고 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나가듯이. 시인에게 이는 그저 “사과를 베어 무는 것” 만큼이나 예사로웠을지도. 소년은 어째서 나쁜 소년이 되었을까. 시인 스스로가 규정한 “나쁜”이라는 말 속에는 모종의 자책, 죄책감이 스며있는 것도 같다. 이에 대해서는 그간 시인이 여러 글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어린 시절 집안의 오랜 기대를 배반하고 신부(神父)가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 (단편적인 사실로써 한 시인의 내력을 모조리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시인의 탄생을 둘러싼 이런 식의 극적인 비화는 언제나 흥미롭다.) 이후 자연히 생겨난 죄의식, 그리고 낙망이나 허무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린 소년의 근간을 뒤흔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흰 말뚝을 찾아냈지만 / 화살표도 숫자도 / 모두 지워져 있었습니다 / 말뚝을 탓하진 않았습니다 / (원래 길은 없었으니까요)”(「희망」)와 같은 부정의식은 자연스레 배양된 것이 아닐까. 세상의 통념으로부터 비켜서고자 한, 고독한, 나쁜, 소년. 결과적으로 일상의 권태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허연의 소년은 ‘시’와 동의어이기도 하다. 「구내식당」과 같은 작품이 이를 선명히 부연한다. “지하 5층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 그렇게 시를 지킨다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 // 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 / 나를 소식에서 떼어놓기 위해 나는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 혼자 밥을 먹는다”. 시를 지키기 위해 굳이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중년의 사내라니. 다른 무엇도 아닌 ‘시’를 위해 말이다. 3 허연의 푸른색은 여전히 그를 소년이게 하고 시인이게 하고, 뒷골목을 헤매게 하는 것. 그렇다면 그 푸른색을 지속하고 추동하는 힘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세상의 셈법과는 어긋난 일. 세상의 셈법으로 보자면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마음의 약자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상의 권태와 대척점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허연에게 사랑은 유의미한 동력임에 분명하다. 때때로 사랑은 그로 하여금 고독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방책으로 기능하기도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독을 불식하기는커녕 고독의 기미를 더욱 북돋는 데 이바지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같은 지점에서 사랑은 본연의 힘을 발휘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를 보자. 이는 사랑에 대한 시인의 가장 정직한 고백 같다. “그리워하는 병”의 중증으로 인해 채 오십 미터도 걸어갈 수 없다고 쓴, 절절한 사랑의 열병이 깃든 시.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말하자면 사랑이 가장 극에 달한 순간, 지금은 이별 후다. 펄펄 끓는 그리움을 온몸으로 앓는 때이며, 이 어찌할 수 없는 병의 증상이 바로 허연 시의 중추를 이룬다. 이는 얼핏 낭만적 정취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실상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언젠가 그 열기가 걷히고 나면 사랑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게 되므로. “때가 되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 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그리워하는 병”의 고통이 사그라지면 사랑은 사랑으로서의 기능과 효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허연이 그토록 경계하는 일상의 권태와 양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 그 시절”이 지나면 “저 강물 속에서 /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는 것(「상수동」)과 같이. 그러므로 허연에게 사랑은 애당초 실패를 전제로 한다. 예정된 실패. 예정된 이별. 빼다 박은 아이 따위 꿈꾸지 않기. 소식에 놀라지 않기. 어쨌든 거룩해지지 않기. 상대의 문장 속에서 죽지 않기.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중독되면 누가 더 오래 살까? 이런 거 걱정해야 하잖아. 뻔해, 우리보다 융자받은 집이 더 오래 남을 텐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부분 사랑의 끝에는 그토록 몸서리치는 권태와 무료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건강을 살피고 주택 융자를 걱정하는 따위의 평범한, 혹은 끔찍한 생활의 일면들. 시간의 조류에 쓸려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생(生)’(『오십 미터』 시인의 말)은 소년의 푸른빛과 얼마나 먼 것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되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이 지나친 나머지 생활과 한데 뒤엉키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화자들은 적정한 정도로 사랑의 감각을 다스리고자 한다. “사랑해. 그렇지만 / 불타는 자동차에서는 내리기.” 하고 다짐하는 이 순간의 강렬한 열기만이 사랑으로 기억된다. 활활한 사랑의 기억은 이따금 반복 재생되며 푸른빛을 한층 선연하게 만든다. 문예지 발표 당시 이 시의 제목은 ‘불타는 드라이브’였다. 하지만 이후 제목은 바뀌었고, 그렇듯 ‘드라이브’는 결코 불타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허연에게 사랑은 철저히 그 자신의 것이다. ‘너’가 아닌 ‘나’의 것. 나만의 것. 때문인지, 사랑의 대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는다. 잔영으로 남거나 아니면 철저히 소거된 채다. 그리움의 얼굴조차 불분명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는 깜박이는 보안등 아래에서 얼굴 반쪽이 있다가 없기를 반복”할 뿐, ‘나’는 끝내 “너를 영원히 알 수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아직 얼마간 사랑의 열기를 머금은 ‘이별’ 자체만이 “선한 의식”으로 기록된다(「이별은 선한 의식이다」). 이별의 의식으로부터 멀어진 후라면 더더욱. 사랑의 대상이었던 ‘너’는 “재잘거리는 소녀들 사이에서 /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기도 하지만 금세 “먼지처럼 가라앉”는 것.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 무연고 시신처럼 /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하고 정리된다(「항구」). 이 같은 시인의 시선은 비정한 것 같기도, 지극히 천진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허연 식의 사랑은 조금 고약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지. 허연의 세계를 곧추세우는 ‘혼자’가 얼마나 완고한지를.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하는 엄숙한 표명을. 다시 말하지만, 허연의 세계는 ‘나’로써 이미 완전하다. 무엇도, 누구도 ‘나’와 “비뚤어진 세계관”을 “나누어 가질”(「나는 빛을 피해 걸어간다」) 수 없다. 스스로 이룩한 완전한, 고독한 세계에서…… 그러나 그는 수시로 다툴 것이다. 모진 쓸쓸함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칠 것이다. 뒷골목을 헤매고 사람을 찾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나눈다,라는 헛된 말에 잠시 기대어 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지금 권태로운 일상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또다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다. 정주와 탈주를 반복하며 빚는 내적 긴장 속에서 그의 세상은, 시는 “아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는 자다」)에서 허연은 한결같이 쓸쓸할 것이다. 끝내 완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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