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월간 현대시 2024년 9월호(제417호)
하는 시, 하지 않는 시
하는 시, 하지 않는 시
-안태운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 임정민 『펜 소스』(민음사, 2024) 서평
‘하기’라면 저 흰 개처럼-안태운 『기억 몸짓』
이를테면 봄을 떠올릴 때 우리는 종종 그날의 벚나무를 기억한다. 벚나무는 발그레한 꽃잎을 피워올리기 무섭게 떨어뜨리는 중이다. 벚나무는 ‘흩날림’을 그림자처럼 매달고 기억을 현재라는 수면 위로 떠민다. 만일 봄날을 떠올리는 일에 벚나무가 호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억은 다른 사물을 끌고 올 테다. 그러니까 기억은 고도화된 뇌 활동의 결과물, 인간이 보유한 힘의 증명으로의 기억‘력’이기는커녕 물질성에 기대어서야 겨우 성립될 수 있는 온갖 사물의 교차로, 그 길 위에서 불완전성으로 흘러내리는 중인 ‘흔적’에 가깝다. 망각에 대한 불안을 숙명으로 하는 그러한 기억은 염려가 무색하게 자주 사라진다. 기억을 물성이라는 숙주에 기대어 성립하는 종속성으로 정의할 때 기억 주체의 자리를 당연한 듯 꿰차는 인간의 위상은 뜻밖의 생동으로 출렁대는 기억이 빚지고 있는 사물에 대비해 결코 우위로 올라설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그 기억의 숙주인 인간은 기억이 잠시나마 머물다가는 장소성, 뇌와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에 매여 있는 물질성과 같이 그간 비인간으로 정의했던 것들로 일시적으로 구축돼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된다.
벚나무를 의인화했다. 기억이 흘러가도록 놔두었다. 그 여름 흰발농게를 떠올려보았다. 뒤꿈치를 들고 걸었다. 너는 군집을 이루었다. 토착어를 연습했고 이끼를 먹었다. 먹혔다. 돋보기를 썼다. 낳았다. 나를 의인화해보았다. 피가 나고 있었다. 오목눈이를 보았다. 누치를 보았다. 그림자의 빛. 나를 의인화하고자 했다. 계속 시도했다. 잔물결. 망설임. 거두어 가지 않음.
-「여울」 전문
세계의 모든 것을 인간화해 해석하려는 욕망의 수사법인 의인화가 실패한다. 먼저 벚나무를 의인화하여 벚나무가 매달린 기억을 떼어낼 수 있게, 그 시간의 흐름을 놓아둘 수 있게 한다. 나무를 망각의 능동체이게 하는 것. 벚나무는 그렇게 시간을, 기억을 놔둘 수 있게 된다. 익숙한 봄날의 의인화를 지나 다시 여름의 기억은 흰발농게에 옮겨 매달린다. 여기서 뒤꿈치를 드는 것은 흰발농게인가 ‘나’인가? 계속해서 이끼를 먹는 것이 나인지 돋보기를 쓰는 것이 ‘너’인지 낳는 것은 누구인지 모호해진다. 그건 흰발농게와 내가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분을 위해서는 의인화를 통해 내가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는 방법뿐인데, “계속 시도”하는 의인화는 곧 그 실패를 지목한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일을 통해 의인화에 깃든 해석의 폭력과 ‘인간의 자리’가 내포하는 우위 같은 수사법의 위험으로부터 멀어진다. 의인화하지 않는 회피와 우회의 성공이 아니라, 의인화의 실패를 통해 휴머니즘을 폐기하는 수행이다. 물질의 몸짓이자 물질을 기억하는 몸짓을 ‘여울’로 이름 붙일 때 ‘나’는 망설임의 자세로만 성립하며 이 시집의 골자인 ‘기억’과 ‘몸짓’은 이분법적으로 나뉘기는커녕 얼마든지 교차함으로써 되레 비물질성 인양 여겨졌던 기억에 대한 재래적 사유를 물질성으로 새롭게 쓰고 있는 거다. 흰발농게가 남긴 발자국, 그 몸짓에 더해 기억이 그려내는 것은 그런 얽힘, 횡단이다.
『기억 몸짓』에 묶인 시들은 ‘되기’보다 ‘하기’에 가까워 보인다. ‘되기’조차 범할지도 모르는 함정, 인간을 우위에 두는 일말의 오만이 침투할 수 있을 그 오류의 확률을 한 뼘 더 축소하는 ‘하기’는 시인이 택한 보다 적극적 수행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란히 걷기’가 비인간에게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음을, 다만 그것은 나를 잠시 낮추어 보겠다는 인간의 거만한 겸손일 수 있음을 전작에서 말해왔던 안태운은 이번 시집에서도 너의 입장이 되어보겠다고 간단히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인간이 없다면”“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도 없을”(「경주」)테지만 아직은 인간의 절멸이 도래하지 않았으니, 인간의 사고 행위를 추켜세우는 것이 아닌 사물을 경유하는 방식으로의 기억에 더해 인간과 비인간동물, 비인간사물까지 아우르는 행위라는 몸짓을 연쇄하고 가로지르기를 택한다. 그럴 때 인간이 규정해온 자리들이 왜소하고 허구적인 것이었음은 너무도 쉽게 들통나버리고 1인칭 나의 앎이라는 주체적 행위는 파기된다. 마치 “의탁해서 내가 모르는 장소로 내 눈을 풍경에 맡기는”(「경주」) 것과 같은 경험은 미화된 인간성의 허위를 내려놓을 때 찾아오는 경험이다.
이 시집은 몸짓이 아름다운 것은 “표정과 주름과 홈”(「기억 몸짓」)과 같은 비-몸짓을 남기기 때문이듯 비인간 존재가 기립할 때 증상으로 발현되는 것이 기억이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기억과 몸짓의 숱한 교차는 ‘공놀이’에 유비된다(「공에 대해서라면」). 공이라는 사물은 ‘구르다’라는 예측의 동작과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예측 불능의 동작을 함의한다. 그러면서 공은 둥근 표면에 달라붙었다 헤어진 손길들을 떠올리게 한다. 기억과 행위, 사유까지 사물은 이제 인간이 개발한 도구적 개념을 떨치고 인간에게 작용을 일으키는 물질로서 존재한다. 이때 ‘공’은 무엇인가? 손아귀에 쥐는 안정감을 허락하지 않는 텅 빈 공(空), 그것은 누구의 손이든 닿을 수 있는 공(共)을 양면의 존재론으로 품고 있다. ‘공’에 달라붙은 기억을 따라가 보자면 우리는 공터에서 사라진 흰 개를 떠올릴 수도 있다. 채워짐으로써 공터(空)가 아니게 되고, 함께하는 것이 어느 한쪽에 여전히 차별로 존재할 때 그리하여 그곳이 공터(共)가 아니게 될 때 우리가 잃어버린 흰 개(「공터를 통해」, 안태운, 『산책하는 사람에게』, 문학과지성사, 2020), 우리를 떠나버린 그 개 말이다((「흰 개를 통해」, 같은 책). 그런 연쇄와 교차의 방식은 고향집에서 잠이 깬 새벽 제(堤)를 걸으며 거기에 깃든 이야기를 떠올리는 「오송」과 같은 시에 잘 드러난다. 이야기는 인간이 괜스레 제의 우묵한 곳에 물을 빼고 채우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그 안에서 존재하고 사라져간 여러 개체들을 일깨운다. 그 제의 근방에는 ‘우리 개’가 묻혀 있고. 그럴 때 제는 그 자체 삶과 죽음의 ‘둘레’가 된다. 그런 밤 우리 개는 이제 내 꿈에서 여러 마리의 개로 옮겨가 귀납적으로 태어난다. 나는 우리 개를 생생한 촉감으로 느끼기도 하는데, 우리 개의 감촉은 내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촉감-기억으로 온다.
그날 나는 어땠나. 나는 비 오는 제를 몇 번이고 걸을 수 있었나. 이곳을 자주 오는 이유를 물론 내내 알아채고 있었나. 왜냐하면 제의 근방에 우리 개가 묻혀 있으니까. 나는 여름이 되어 무성해진 이곳을 돌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제의 둘레와 잠시 멀어져 우리 개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서도 모든 게 자라나 있었으니까 마음이 놓였어. 이것들이 우리 개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부러 풀을 헤치며 무덤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다만 다시 제를 돌았고 우리 개를 떠올렸고 나는 우리 개의 꿈을 자주 꾸며 살아갔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러 마리의 꿈 중 하나가 기억났는데. 꿈속에서 나는 우리 개를 잃어버렸고 순간 똑같이 생긴 우리 개가 여러 마리 나타났어. 우리 잘 지내자고? 뒤돌아가보자, 하며 함께 걸었는데 그때 나는 이제 안 잃어버릴게, 하고 다시 뒤돌아봤는데. 우리 개의 꿈들은 반드시 잠 깨게 하는 꿈 같다. 새벽을 맞이하게 하는 꿈 같다. 동트지 않았는데도 일어나게 하는 꿈 같다. 그때마다 나는 꿈에서 깨기 직전 우리 개가 내 왼쪽 겨드랑이에서 자가가 움직여 내 오른쪽 겨드랑이로 옮겨 오는 감촉을 느끼는 듯했는데 나는 깨어나며 머금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눈물이 흘렀는데.
-「오송」 부분
그런 우리 개, 흰 개는 안타깝게도 짧은 생애주기와 어쩌면 절멸을 향해 나아가고 이런 상실은 시인이 예감했던 미래이기도 한 바 우리는 다만 우리 개의 무덤 곁, 그 둘레를 걸으며 우리의 ‘여기 있음’이 “흐르는 일부로서 성긴 그물을 던지자며 그것 속에서 포획되자”(「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는 각오로 서는 과정에 놓여 있을 따름임을 시는 서사화한다. 이제 인간에게는 그간의 누적된 과오로 인해 잃을 일만 남은 건지도 모른다는 서늘함, “몸과 마음의 상실”을 상기시키는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는 몸짓과 기억으로만 남은, “인간 때문에”“빠르게 절멸되고 있”는 “생물들의 이름” 부르기라는 ‘하기’의 사례로써 내밀어진다. “얼굴 범벅인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다만 “둘레를 돌고/ 나누”(「몸짓 기억」)는 것뿐이라는 서술 속에는 존재의 얽힘, 그 가로지름에 대한 자각과 왜소한 인간의 수행이라는 걸음이 새겨지며, 이때 ‘둘레’는 안태운의 시가 ‘하는’ 장소, 자리가 된다.
시집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인 몇 점의 사진에는 ‘몸짓’이 있다. 그리고 그건 기억과 교차할 테다. 그래서 이 사진들은 모두 어떤 둘레를 포함한다.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일 수도 있는. 지붕 위에 올라선 흰 개를 보라. 우리를 떠나버린, 미련도 없이 공터 ‘바깥’으로 영 나가버린 흰 개는 인간이 한정해준 개집 따위 애초에 성에 차지 않았다는 듯 지붕 위에 올라서 있다.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냐는 듯이 이쪽을 응시하는 흰 개는 조금이라도 더 먼 곳을 보려는 걸까? 저 개의 자세는 무언가를 소망 ‘하기’의 자세를 말하는 중이다, 쓰는 중이다. 온몸으로 저 사선의 미끄러짐을 버티어내는 중인 공터의 우리 개가, 있다. 없다.

<사진1>
오픈 소스와 ‘하지 않는’ 시-임정민 『펜 소스』
링크를 데리고 산책하는 길은 위험물 천지다. 누구나 걸어갈 수 있지만 누구도 그 길의 주인은 아니다. 길 위에 있는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 그저 길 위를 스칠 뿐이다. 떠돌 뿐이다. 임정민의 『펜 소스』는 open source와 pen source를 오가며 시 쓰기, 소스로서 드넓게 펼쳐진 언어의 더미 그 질식감을 그려낸다. 모호함, 막연함, 자주 비거나 생략되는 품사들, 엉클어짐은 이 시집을 시종일관 숨 막히는 고뇌로 몰고 간다. 시는 내내 새로운 정의에 대한 욕망과 오픈 소스라는 펜 소스에 대한 출구 없는 질문을 반복하며 언어의 숙명, “빈 곳을 향해 달려가는 쓰기와 딛는 곳 전체를 발설하고 마는 걷기”라는 아포리아에 한 시인을 깊이 고립시킨다. “편지나 일기를 교환하며 서로를 남겨보는 일에서부터/ 또 어제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반성을 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거짓을 말했다고 스스로 믿을 때만 언어가 옷을 입고 산책을 시작하는 일”로부터 멀어지고 싶다는 고백처럼. 사실 문자는 교환을 그리워하며 태어나는 존재, 누군가에게 나를 고해하고 고백하고 너를 읽고 싶은 욕망의 기호화이다. 그런 문자의 욕망이 그러나 누군가에게 읽히지 못하고 ‘링크’ 안에서만 머무를 때 그것은 산책을 기다리다 무추름해진 강아지 꼴이 된다. 어떤 날에는 무단 조퇴까지 하고 링크를, 그 속의 숱한 말들을 훨훨 자유롭게 하리라 다짐하지만 무시무시한 두려움은 결국 “비가 온다”라는 문장을 핑계 삼을 수 있을 뿐이다.(「링크 산책시키기」)
미처 쓰다가 만 것을 쓰는 거야
한 번 더 질문을 던지고 모른 척 기억 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을수록 숙고할 만한 사명이 커진다고 믿으며
운문을 쓰는 것이지만 운문이 남아 있지 않는
(...)
영원히 쓰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항구의 유령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평일
누군가의 침잠하는 춤이 빛을 조금씩 뿌리는 오후
고요한 슬픔이 날마다 자신을 잃게 만드는 것
구호의 더러움으로만 회복되는 재해
백 번의 말로 백 번의 용서가 이뤄지는 기도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지듯 뛰어가는 아이들
시시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열매들
신의 실수에 의해 도시까지 밀려온 보트
가만히 설탕을 녹여 주는 과거에서 온 사람
-「재해」 부분
그런 시인의 시 쓰기에 대한 고뇌는 ‘재해’를 표방한다. 이미 숱한 일들이 벌어졌고 누군가 선취한 말들 사이를 헤매며 뭔가 더 남아있는 게 없을지 “쓰다가 만 것을 쓰는” 영속의 작업일 재난의 글쓰기. 구호로 복구 중인 재해의 상황을 회복하는 일은 오염을 경유하여서만, 그 “구호의 더러움으로만 회복”에 이른다. 이미 오염되었다는 결벽의 감각은 언어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말의 회복 가능성은 다시 오염된 말로 기도하게끔 한다.
이런 「펜 소스」는 막연하고 막막하다. 그것은, “하나의 각자의 말하기”“한계를 의미한 채 한계 앞에 서 있기만 함으로써 이해의 곁을 맴돌고 맴도는 말하기”이다. “펜 소스는 완전한 소스가 아니”라서 그저 “휘갈기는 한 번의 문장”일 따름이다. 펜 소스에 담긴 착란의 고통은 글쓰기, 시 쓰기의 곤혹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open source로부터 가져옴으로써 변화한(하는 중인) 지면, 웹 서비스를 골자로 하는 정보의 교환 및 노출, 검색을 전제하는 드넓은 오픈 소스로 제공되는 언어의 세계에 대한 변화 인지와 그 막연함을 동시에 함의한다. 더 이상 지면(紙面)이 아닌 지면(誌面)에서는 언어 운용의 권위가 디지털 시스템에 있고 이미 Chat GPT와 같은 시스템은 인간을 도저하게 만들어주었던 예술, 그 창작의 권위를 새롭게 정의하게끔 하고 있지 않나? “무한한 펜 소스”는 “미완성의 연결”이고 “오픈 소스”라서 “공평한 적막”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 공평함은 “언제나 제 자리에서의/ 각자의 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펜 소스는 스스로 오류”이기도 한 셈인데, 그럼에도 우리는 쓰고자 하는 순간에 “귀향할 수 없는 자유이면서 자신이 곧 원천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경한 감각과/ 아무것이나 되어 버리려는 현자로서” 존립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그게 고통의 원인일까? 시인의 앞에는 “파괴와 절제”만이 사명처럼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다고 “펜 소스가 이미지이던 시절”“성스러운 가능성이”고 “저항의 손재주이”며 “큐피트의 하나의 관점이던 시절”로의 회기가 답일 수도 없겠지만, “메타픽션이 진지하게 열외를 고려하는 자의식의 새로운 장치”로써의 펜 소스는 “자신이 자신을 호출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복할 수 있는 선택일지 반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도출하게도 한다. “장르의 함의와/ 낱말들의 수정 구슬 속에서 지연되”며 “어디에나 있고, 자기 자신을 재분배”하는 “가로챔”이라는 펜 소스에 대한 사유가 바로 63~104쪽에 걸친 장시 「펜 소스」이다. 결국 그러한 펜 소스를 활용하는 「펜 소스 레시피」라 봐야 “겨우 태어나고자 하는 결정일 뿐인 불편한 이야기와/ 미세 조정 문제를 가진 식탁 위의 조명이/ 그리고 회심의 귀감이 감수성을 제어”하는 일에 불과할지 모르나 기어이 그는 “희생을 도피하는 유령이 되고자 한다”. 무엇에 대한 희생일까? 그건 아마도 익숙한 언어, 수사학의 법칙에 희생되지 않겠다는 그런 시 쓰기, 언어를 응당 답습‘하지 않는’ 시인의 자의식에보다 근접해 있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이런 시가 탄생한다.
helpⁱ [lʌv] Ⅰ.(명) 1.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가 사람을 친다면 잠시 숨을 멈춤. (한숨 따위.) 2. a. 어떤 다친 인간의 얼굴이 몰고 오는 저녁의 바람을 쐴 때 넘어져 있는 다른 한 사람을 마주침. b.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말하듯 전하는 괜찮냐는 물음에는 실은 어떤 의도도 없음. c. 네온 로고. d. 나는 많은 거미줄에 묶여 있음. ex. “나는 당신의 모든 도움이 필요합니다.”
(...)
Ⅲ.(꿈) 1.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필요에 따라선 나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도 올 것이다. 우리는 한 팀으로 저 공터를 물들일 수도 있다. 2. 내게 다가와,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하러 갔고 멈추지 않는 것은 여전히 피가 묻은 단화들뿐이니까. 3. a. 담배 연기를 그대로 정지하게 만들고 문제에 대해 생각해봐. b. 오른팔을 다친 너의 사진이 찍힐 때. c. 의미를 위해 타투를 새기러 가면서도 의심이 멈추지 않는 것. 또는 의심의 종말. 4. 가장 평범한 범주.
- 「기념일」 부분
임정민은 기어이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어학 사전 전개의 모든 법칙을 빗겨남으로써 언어의 자의성을 폭로하는 한편으로 자의성에 달라붙은 합의를 파손한다. 이 시는 기념일을 정의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발음 기호는 파닉스를 무화시킨다. 품사를 정의하는 자리에는 ‘꿈’이나 ‘곁’과 같은 다정한 지표들이 서 있고, 활용의 예시는 얼마든지 통용 가능하다는 자신감으로 넘실대고 있다.
시인은 스스로 묵은 말의 더미, 그 무게를 해체한다. 부수고 재조립한다. 물론, 그것은 다시 기성의 언어를 경유하고 차용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에 시인의 고민은 더욱 침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수지 않고서는 다시 쌓아 올릴 수도 없기에 자꾸만 꿈처럼 언어의 심해를 헤매이는 한 시인이 여기 있다. 거미줄 쳐진 언어의 집에서 안온한 시를 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 시의 살해를 통해서 이 시인이 몰고 오는 것은 관념, 선 안에 있던 모든 규정에 대한 임의성 그 허구에 대한 폭로다. 미궁을 헤매이며 도착한 곳은 시가 없는 곳, 시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 그리하여 시가 새롭게 쓰여질 곳이다. 임정민이 하지 않는 시 쓰기는 우리를 조금 더 깜깜한 곳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말의 찌꺼기 대신 더욱 막연한 심연, 그 날것의 말들이 우리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 않는’ 시 쓰기는 이 시인만이 ‘하는’ 시를 쓰디쓰게 축출해 내린다. 저 막연한 어둠을 기꺼이 더듬으면 거기서 우리를 기다리는 한 시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추천 콘텐츠
안태운은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민음사, 2016)에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적 프레임을 설정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다각적 시선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균열과 어긋남과 소멸의 미학을 형상화했다. 그는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문학과지성사, 2020)를 통해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고, 세 번째 시집 『기억 몸짓』(문학동네, 2024)에서는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산책하고 생각하는 화자를 통해 시적 리듬감을 동반하면서 계절적 일상을 담담한 회상의 어조로 표현한다. 우리는 안태운 시의 전체적 구조를 지배하는 핵심적인 분석소를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인 '그(너)'의 관계, 시적 공간 및 심리의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물(비)', '소리'와 '침묵', '공터',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걸어감', '산책', '사라짐' 등을 설정하고 상호 연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미학적 특이성(singularity)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기본적으로 시적 주체가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환영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첫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의 대표적 작품인 「얼굴의 물」은 이 기본 프레임 속에서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고 서사적 사건으로 '안에 있음'-'밖으로 나감'-'비가 내림'-'되뇌고 걸어감'-'얼굴의 물 안팎으로 드나듦'-'물이 차오르고 얼굴이 씻겨나감'이 진행된다. 안태운 시의 중요한 미학적 특이성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관찰하는 대상인 "그"의 모습은 시 전체에 반복적으로 나열되는 "~고"라는 연결어미에 의해 통일된 전체적 시점이 분기됨으로써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장면으로 파편화된다. 안태운의 시는 언술 구조의 층위에서 "~고"라는 연결어미의 나열과 접속부사의 파행적 구사를 통해 상식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을 구조화시킨다. "안"과 "밖"은 '방'의 공간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물리적 개념인 동시에 '심리'의 영역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정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안"-"안개"/"밖"-"빛"-"비"라는 대비적 구도가 설정되는데, 중요한 부분은 일견 대립적 이미지로 간주될 수 있는 "빛"과 "비"가 모두 "밖"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이다. 안태운 첫 시집의 중심 이미지를 이루는 '물'은 주체의 공간적·심리적 밖의 영역에서 안의 영역으로 침입함으로써 동요와 균열과 상처를 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안태운의 시는 화자의 시선이 거리를 두고 자신의 꿈을 관찰하면서 묘사하는 시점을 채택하므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언술 구조를 형성한다. 이로부터 주관적 감정이나 과잉된 감응을 배제하고 객관적이고 무미건조하며 심리적 거리를 가지는 문체적·구문적 특이성이 생겨난다. 기본적으로 무의식적 꿈을 조망하는 안태운의 시는 대상인 '그(너)'의 공간적 위상과 심리적 양상 및 행동적 상황이 '안'과 '밖'의 위상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로 일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계속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킨다면, 「감은 눈으로」는 시종일관 화자가 자신인 "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러한 차이를 '꿈'과 '현실'의 관계라는 관점으로 재서술하면, 「얼굴의 물」이 화자가 대상인 "그"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의 구도를 유지하고, 「원경」이 화자가 대상인 “너”를 관찰하는 장면 묘사를 중심으로 '무의식적 꿈'을 전개하다가 자신인 '나'를 개입시켜 '현실'을 삽입한다면, 이 시는 화자 자신이 '무의식적 꿈'에서 내쳐지는 과정을 묘사하여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형상화한다. "감은 눈"은 '잠'과 연결되고 '무의식적 꿈'의 영역과 결속하므로 "꿈으로부터 내쳐진다". "감은 눈으로"라는 구절은 화자가 '잠'이나 '무의식적 꿈'의 영역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비자발적으로 현실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눈 뜨지 않고 걸으면"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쫓겨난 현실에서 의지적으로 눈을 감는 모습을 제시하는데, 이를 통해 "나와 함께 내쳐진 논이 있고 논 위로 걷는 내가 만져지는" 상황이 가능해진다. 화자는 현실로 쫓겨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에 꿈의 동력을 개입시키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태운 시의 꿈/현실, 안/밖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특이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는 꿈에서 현실로 이동할 때 꿈의 실재가 현실의 리얼리티로 전이되어 나타난다는 점이고, 둘째는 현실의 화자가 꿈속의 자신을 관찰하는 객관적 거리뿐만 아니라 꿈에서 현실로 추방된 자신을 관찰하거나 감각하는 객관적 거리를 가짐으로써 이중의 거리 감각을 형성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중의 거리 감각은 안태운 시 특유의 미분적 시선이 생성시키는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몽타주 기법과 결부되면서 미학적 특이성을 강화시킨다. 안태운은 "걷고 난 후의 일들"이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두 번째 시집 『산책하는 사람에게』에서 모색한다. 안태운이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은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 인간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서 수행되는데, 우리는 이러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것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도 안태운 시의 중요한 요소라고 간주하고 새로운 시적 가능성의 양상을 '소리의 침묵'과 '공터의 공백'에서 찾을 수 있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빈방의 빛」에서 시적 화자는 초반부에서 "빈방의 빛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다가 "강박"이 드는 상황에 이르러 그것에 대해 진술하기 시작한다. "빈방의 빛"에 대한 진술은 중반부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제시된 이후 일련의 "소리"에 대한 진술로 이동한다. “소리"가 "배경음"으로 작용하여 무위의 삶에서 벗어나 '행위(몸의 이동)'를 유발하는 동인(動因)이 되고, "지도"는 "소리"라는 "배경음"에 의해 촉발되는 '행위(몸의 이동)'가 현실화되기 위해 경유하는 매개로 작용한다. 그리고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이 "멀리 빈방의 빛"에 이르러 미지의 시공간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빈방의 빛"을 연상하는 장면에 도달한다. 이러한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비질하는 소리"-"여행자들의 목소리"-"모의하는 소리"-"지도"-"다시 소리"-"멀리 빈방의 빛"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시상 전개를 거쳐서 등장하는 대상들이 바로 "개와 고양이"라는 동물이다. 무의식의 연상 기법으로 진행되는 이 시의 시상 전개는 "빈방의 빛"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소리들'과 "지도" 간의 상호 침투적 왕복을 거치고 "멀리 빈방의 빛"을 경유하여 다시 "빈방의 빛"에 도달하는 재귀적 순환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재귀적 순환 속에서 시적 주체가 추구하는 큰 틀의 지향성은 "빈방의 빛"에서 벗어나서 "개와 고양이를 따라서 가"며 "전철을 타고" "터널을 지나"가는 '행위(몸의 이동)'라고 할 수 있다. 이 행위의 연장선에서 안태운이 두 번째 시집에서 모색하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편지 쓰기'와 '산책하기', '동물로 대표되는 비인간과의 관계 재구성' 등을 통해 수행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두 번째 시집의 표면적 흐름에 대한 비평적 조명뿐만 아니라 이것을 가능케 한 동인으로서 "빈방"이라는 공백, "소리"라는 "배경음”, “소리"와 "지도"의 상호 침투적 왕복, "멀리 빈방의 빛"이라는 미지의 시공간 등에 대한 비평적 해명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태운의 두 번째 시집에서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발생시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은 주로 '소리의 침묵' 및 '공터의 공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소리」에서 화자는 "사람들"이 "동물에 흡사하다고 느끼는 소리를 내"지만 "인간의 소리"에 주안점을 두고 그 근원적 의미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침묵"과 "웃음"이 내포하는 의미를 "밤"-"끝없는 들판"-음악-"춤"-'멀리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서 찾는다. 이와 유사하게 「목소리」에서 화자는 "너"가 우연성에 근거하는 "풍경 소리"를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이 상황에 맞서 "너는 네 목소리를 내보지만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고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 "풍경 소리"의 근원적 차원인 '침묵'과 '공백'에 대해 제시한다. 그리고 「공터를 통해」와 「흰 개를 통해」는 화자인 "나"와 "공터"와 "흰 개"를 중심으로 "산책"이라는 행위가 제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공터를 통해」에서 "공터"는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고, 「흰 개를 통해」의 "공터"도 "나"와 "흰 개"의 시선이 어긋나는 공간적 개념인 동시에 '과거'와 '현재'가 어긋나는 시간적 개념을 융합시킨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다. 따라서 이 두 시의 중심 주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산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화자 "나"와 "흰 개" 간의 긍정적인 결속이나 '여전히 지금-이곳에서 비인간동물이 배제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견고한 분할선이 존재한다' 등의 주제를 도출하는 표면적 수행성의 차원뿐만 아니라 "공터"가 시선의 어긋남과 시간의 어긋남이라는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을 내장하면서 표면적 수행성을 근저에서 지탱하며 좀 더 복잡미묘하고 깊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이중의 시적 장치로 작용한다는 심층적 미학성의 차원까지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염두에 두면서 최근작 중에서 한 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 「하오」 전문 이 시는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안태운 시의 미학적 특이성뿐만 아니라 세 번째 시집 이후의 변모까지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화자인 '나'와 대상인 "당신"의 관계, 중요 모티프로 "빛"과 '소리'("노래"), 시적 서사의 사건으로 '바라봄', "산책", 비인간으로서 "양", "도요새", "민달팽이" 등이 첫 시집에서부터 두 번째 시집까지 진행해 온 특이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대상을 바라보는 화자의 미분적 시선이 시시각각 다각도의 장면을 파편적으로 포착하여 시간 및 공간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체와 대상의 정체성 및 관계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첫 시집의 시적 방법론이 견지된다는 점이다. 이 방법론이 은연중에 노출된 부분은 "당신은 부딪치오 / 시간의 끝에서 울다 / 공간과 사물로 있다"라는 문장이다. 안태운은 두 번째 시집 이후에 전체적인 시적 구도를 환영적 프레임에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으로 전이하고 산책을 통해 시간 및 공간의 안팎을 이동하면서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시적 실천을 보여주었고, 이와 연동하여 시의 공간적·심리적 위상으로 '안'과 '밖', 중요 모티프로 "빛"과 "비"가 설정되면서 "안"-"안개"/"밖"-"빛"-"비"로 구조화되었던 첫 시집의 대비적 구도가 평면적 구도로 병합되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이나 서사적 진술을 시도하는 동시에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이러한 일상적 현실의 프레임에서도 미분적 시선을 통해 공간과 시간의 안팎을 분할하는 동시에 연결하면서 이동하는 안태운 특유의 시적 방법론을 견지하고 있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 우표를 붙였다오 /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구절은 화자가 "그사이"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건물에" "들어오고 있"던 "빛"과 "광장처럼 떨었"던 "구름"이라는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고 "뒤돌아 망설"이면서 "우표를 붙였"던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면서 "당신을 사랑하오"라는 현재의 감정을 표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과거의 장면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현재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그리고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 잔등과 환초 / 하오 /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라는 구절은 화자가 "하오"라는 찰나적 시간을 경계로 "수레와 함께 움직인"고 "민달팽이가 퍼져나"가는 "잔등과 환초"라는 현재의 자연적 풍경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의 지속을 통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미분적 시선으로 포착하면서 제시한다. 이 시선에는 현재의 화자가 현재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당신"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현재완료적으로 회상하는 시간적·공간적 격차가 충돌 몽타주의 방법으로 농축되어 있다. 안태운의 독자적인 시적 방법론에 해당하는 미분적 시선과 시차(視差/時差)적 공백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진화해 나가는지 주목하기로 하자.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다.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그 속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 축 속에 존재한다. 당신이 앉은 의자와 책상, 눈앞에 놓인 책과 연필, 당신이 먹고 있는 사과 같은 것들. 당신의 바깥에 놓인 사물들만이 아니라 당신의 입 속 어두운 구멍 끝에 있는 기관과 장기들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을 통해 폭과 높이를 가진다. 당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것도 따져 말하자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신이 죽어 소멸하게 되는 순간도 모두 세 개의 방향 축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해프닝에 불과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세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건 딱히 슬픈 이야기도 기쁜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단지 현상적이고, 물리적인 이야기일 뿐이기에, 실재가 아닌 실제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바람직한 사실적인 공간 속에서 늘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사물과 현상이 세 개의 방향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세 개의 방향만으로는 그것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히곤 한다. 앎이 현상에 항상 미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또 하나의 방향을 탐색하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세 개의 방향 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방향 축을 하나 더 도입하는 것이다. 한때 물리학은 이 방향을 Q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X, Y, Z에 속하지 않는 가상의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인간은 이 방향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의 공간성에 완전히 포획되어 있기에 그러한 방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더라도 그것을 실체적인 것으로 감각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Q축은 일종의 가능성이면서 잠재성으로서 함의를 갖는다. 우리가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가정할 수 있기에 늘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미지의 가능성 말이다. 어쩌면 이 Q를 우리는 질문(question)이라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만약에 그것을 물리학적인 축의 문제가 아닌 질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기실 시인들이야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네 번째 방향을 헤매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물론 이 Q의 문제는 시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문제이겠으나, 실질적인 방향성은 당연히도 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의 관찰자이자 참여자인 인간의 내면의 문제로 이해하며 나아가기도 하고, 혹 어떤 이는 그것을 세계에 대한 관찰과 참여의 부족으로 생각에 외부를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어떤 이는 언어와 언어의 충돌과 연쇄를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된 사고 실험을 통해 또 다른 행방을 추적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언어 그 자체의 속성에 골몰해 자기 앞의 단어들과 긴 밤을 지새우기도 할 것이다. 송은숙이라는 시인이 『열 두 개의 심장이 있다』는 말로 되풀이하고 있는 문제 또한 그러하다. 그의 시집에서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관찰하는 한 사람의 화자가 등장한다. 높은 산과 굽은 강, 날개를 활짝 펼친 새와 어두운 숲, 그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이름 모를 들꽃 같은 것들까지도, 그는 세계의 모든 사물들을 향해 자신의 감각을 활짝 펼치고 그것들의 기척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다. 저녁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다 산책길 양옆을 따라 망초꽃이 줄지어 피어 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꽃은 밝음에서 어둠으로 팽나무 그늘처럼 옮겨 가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저녁과 함께 산책한 것인데 저녁은 서걱서걱 옷 스치는 소리와 쌀랑쌀랑 바람이 이는 소리로 한 발짝쯤 앞서 걸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얘기를 했던가 징검다리 한가운데서 눈을 감고 섰을 때 물살이 나를 떠메고 가던 일 바람이 등을 밀어 줄 때 슬쩍슬쩍 허공을 밟던 일 분홍낮달맞이꽃에 고개를 박고 있던 나비의 그림자에 대해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 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 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망초 길이 끝나고 검은 아스팔트 길이 강처럼 가로지르고 그 너머 어둠 숲이 펼쳐지고 길을 건너다 징검다리에서 듣던 물소리를 아득히 다시 들으며 저녁이 저 녘으로 나를 이끄는 것을 힘겹게 깨닫고 몸을 돌리는 것인데 바짓단에 흠뻑 이슬을 적시는 까만 밤의 반딧불처럼 저녁의 주술은 매혹이어서 - 송은숙, 「저녁의 발자국」,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위의 시에서와 같이, 송은숙의 화자는 세계를 산보하며 두 눈으로 세계의 한 부분을 저마다 차지하고 있는 사물들의 현존을 목격한다. 그의 오감은 자신이 목격한 사물의 현존을 감각하는 동시에 사물들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관계성 속에서 피어나는 제각각의 의미들의 사슬이 존재함을 느끼고 있다. 그의 시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제각기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연관 속에 위치 지어져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관계성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배치는 객관적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물이 객체로서 그 자체 존재함의 결과가 아닌, 화자의 시선의 이동이 만들어낸 배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결코 시 속에서 펼쳐지는 관계성의 이야기가 허구이거나 그릇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가 한 사람의 시선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빚어지는 방식을 설명해준다. 예컨대 “망초꽃”과 “팽나무”와 “징분홍낮달맞이꽃”과 “노란 달맞이 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세계에 속하면서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나의 감각 속에서 주관적인 서사적 세계로 다시 셈해지며 분화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다분한 주관적 서사들의 세계로 분화시키며, 그 분화 속에서 사물들은 또 다른 배치를 경험하며 잠재되어 있던 의미를 꽃피운다. 예컨대 “저녁은 손짓 하나로 저 멀리 검은 창에 노란 달맞이 꽃을 피우고/하늘에 쌀알 같은 별 뿌려 놓고/그 마술에 현혹되어 저녁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와 같은 진술은 단지 감상어린 화자의 사물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객관적 배치 속에서 새로운 가능 세계를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시적 화자의 권능이다. 그가 그렇게 말할 때, 세계는 진정으로 그러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적어도 언어로 이루어진 시적 세계 그 속에서만은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송은숙의 시에서 거듭 돌출되는 또 하나의 영역, ‘너머’의 문제와 관계된다. 창 너머, 담 너머 너머는 너무 멀다 고개 너머, 산 너머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너머는 넘어가 아니라서 더 아득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보아야 보일 듯 말 듯한 아지랑이 같아서 고양이가 담 위에서 너머의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으로 뛰어내릴까 갸우뚱 궁리하고 있다 너머의 바깥쪽으로 바람이 분다 너머의 너머쪽으로 불었던 바람이 다시 너머의 안쪽에 막혀 되돌아온다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계절이라든지 지금, 이 순간이라든지 너머의 결계는 거미줄같이 가벼워서 너머의 너머는 너무 투명해서 돌아오지 못한다 - 송은숙, 「너머의 너머」,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분명 송은숙의 시적 화자는 세계에 존재하는, 오감을 통해 인식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는 시에서 표현되는 “무지개”와 “구름”에 둘러싸인, 그리하여 계절의 변화가 오감을 통해 전해져오는 물리적 세계 속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그의 오감, 특히 시선 또한 이 물리적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인식은 거듭 시각적 형상 ‘너머’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러한 오감과 인식의 서로 다른 방향성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치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외관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말이다. 이것에 상응하듯, 그의 시적 화자는 거듭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려고 했는데, 가자고 했는데, 갈 수 있었는데”,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와 자신이 산보할 수 있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듯이. 하지만 그의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어투가 의미하듯, 그는 여전히 우리와 같은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다. 「너머의 너머」에는 그렇게 머무르는 시적 화자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 감상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 세계는 분명 무수한 색채와 기척이 가득한 생기 넘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창”과 “담”으로 둘러싸인, 비유적 의미에서의 “고개”와 “산”에 둘러싸여 화자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한계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한계의 영역 속에서 화자는 물리적인 이동이 오직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영역의 안으로 제한되어 있기에, 역설적이게도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감이 감각하는 세계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더욱 강하게 감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한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부리처럼 솟은 산이 하나 있고 산 옆으로 굽은 강이 흐르는 어느 마을을 사랑한다는 것 강에는 다리가 하나 있어 두 다리가, 네 다리가, 여섯 다리가 지껄지껄 건너다니는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 저 거룩한 글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새의 눈이 바라보는 지구의 한 모퉁이를 상형한 것 다리 이쪽 끝에는 한 사내가 있어 소맷부리에서 새를 꺼내 자꾸자구 날리고 있다 새들은 새, 새, 새, 새, 새, 휘파람 소리를 내며 둥근 산의 정수리에 부리를 닦고 날아간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등성이로 비스듬히 해가 솟는 어느 마을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 - 송은숙, 「조감도」,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 걷는 사람, 2024. 한계가 부추기는 초월에 대한 명상, 그것은 송은숙의 『열두 개의 심장이 있다』에서 거듭 반복되는 문제이다. 그의 시적 화자가 가진 ‘너머’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계를 더욱 강하게 인지하도록 만들며, 동시에 그토록 강하게 인지되는 한계의 문제가 물리적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자꾸만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을 그의 시적 구조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한계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 세계 내에 또 다른 가능한 세계에 대한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 한계가 감지되는 자리이자 가능한 세계가 피어나는 지점인 셈이다.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새를 사랑하는 것은” 결코 새 한 마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될 수 있는 모든 영역으로서의 “은성한 풍경을 사랑한다는 것”이라고. 예컨대, 세계는 결코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우리의 사랑 또한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을 시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니까 우리는 새와 함께”, “맑은 사기그릇 같은 아침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송은숙의 시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로부터 그 너머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가 던지는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박지일의 시 또한 이 세계가 결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님을 전제하고는 있으나, 그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령, 송은숙의 시적 화자가 명확한 시각과 대상에 대한 선명한 진술을 통해 진술될 수 없는 나머지에 대해 대략적인 실루엣을 그려내고 있다면, 박지일의 시는 명확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반복적이며 때로는 환각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두서없는 정보들의 배치 속에서 일별되는 미지의 대상의 실루엣을 그리고자 시도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열기 위해 씨름하는 과정에서 네가 느낀 탈력과 굴복의 강도에 비례하여 문은 희열을 얻는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너를 작동할 수 있던가? 열거나, 열지 않거나, 선택을 어지하긴 해야 하는데… 너는 선택하지 못할 것 같고(선택하지 않는 선택까지 포함하여) 네게 너는 주도권이 없는 것 같아.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13쪽, 부분. 위의 시에서 나타나듯 박지일이 집중하는 문제는 “문”으로 상징되는 경계성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시의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위치한 대상인 ‘문’은 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적 화자는 또 다른 문제에 동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문’이라는 사물이 그 외관으로 인해 갖게 되는 일종의 기만과 관계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문’은 공간을 나누고, 그 사이를 시각적으로 차폐시킨다. 그리고 이때의 시각적 차폐는 기묘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어떤 공간이 존재하리라는 환영이다. 비록 주체가 그 ‘문’을 실제로 열어보지 않더라도, ‘문’이라는 외관은 주체로 하여금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인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도록 만든다. 실질적으로 그 너머에 실체적 공간이 존재하기에 ‘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너머에 어떤 실체적 공간이 있으리라는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물론 「물보라」 속 화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화자는 다음과 같이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문이 등장한 까닭은 대개 가리고 선 그 너머를 네게 보여 주기 위함이고 (아무것도 없음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주체는 그것이 기만이고 환영임을 알고 있음에도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위태롭고 나약한 존재로 느껴진다. ‘문’은 그러한 기만을 통해 주체에게 감각적 착취를 행하며 희열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진술들을 종합하자면 ‘문’이란 실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비유적인 것, 예컨대 기만을 통해 인간 주체의 경향성을 추동하는 모든 대상을 가리킨다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문’은 열리지 않는다. 사물의 기만은 시적 공간의 끝까지 이어지며, 화자는 ‘문’ 앞에서 끝나지 않는 질문을 반복하고 때로는 자신의 답변을 번복하며 존재한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자면,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문 너머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인간은 그곳에 다다를 수 있는지와 같은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시적 정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실재적이냐 실제적이냐의 여부가 아닌, 그 앞에서 번민하길 반복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1. 누구는 없는 너. 누구만 없는 너. 네가 너를 계속하여 믿기 위해선, 너로부터 끝없이 도망쳐1. 야만 한단다. 멧닭은 듣는다; 네가 반복하여 내쉬는 한숨을. 평화를 내쉬는 것도, 불안을 내쉬1. 는 것도 아닌. 그것은 마치… 가장 작은 소리로 도망하기 위하여 1천년 동안 자기 뼈를 조금1. 씩 조금씩 긁어내는 바람의 들숨. - 박지일, 「물보라」, 『물보라』, 민음사, 2024, 32쪽, 부분. 비참하군, 설명하자니 비참해. 물보라. 너는 네가 비참하다. 이렇게 한들 저렇게 한들, 비참하다고 씀으로써 너는 너의 작업을 아주 망쳐 놓았어. 어쩔 수 없이 비참하다고 중얼거리며 너는 너를 시작하다; 네가 비참한 마트에 들르다, 네 목적이 아니었던 생물 코너 앞을 비참한 네가 어슬렁대면서, 생물 오징어 한 팩을 비참하게 찍고 마트를 나와서 비참한 건널목 건너서 비참한 랩을 뜯은 다음에, 횟집 수족관에 오징어를 풀어 놓고 악을 쓰다; 내가 비참하다고, 비참해서 비참 이의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 비참, 그게 뭘까? 어리둥절. 어리둥절이 너를 훔친다. - 박지일, 「「물보라」 우수리 편」, 『물보라』, 민음사, 2024, 189쪽, 부분. 그런 까닭에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에서는 주체를 호명하는 대명사인 ‘나’와 ‘너’라는 시어가 가장 많이 반복된다. 그 모든 ‘나’와 ‘너’는 하나의 공통점을 소유하는데, 그것은 번민과 방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을 좀 더 명징하게 말하자면, 두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기에(혹은 할 수 없기에) 발생하는 번민과 방황이라 할 수 있다. 선택의 가능성은 주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민과 방황에 밀어넣는 기제인 것이다. 마치 앞서 인용했던 「물보라」의 한 장면에서 시적 화자가 문을 열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과 같이 시적 화자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 강제되는 상황 속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기에 번민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러한 번민은 시적 화자를 “비참”하게, “어리둥절”하게 만들며 조금씩 지쳐가게 만든다. 예컨대, 문제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 강요되고 있는 상황 그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그러나 이 반복의 양상 속에서 ‘나’와 ‘너’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시적 정황이 만들어내는 다소간의 차이의 연속 속에서, ‘나’와 ‘너’는 언어상 같은 모습으로 출현할지라도 그 양태 또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여전히 화자는 번민하고 방황하며 비참한 상태로 놓여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번민과 방황, 비참의 모습들은 하나의 시그널로 기능한다. 그것은 시적 화자로 대표되는 인간 존재가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예컨대 상황의 강요에 떠밀려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여전히 끈질긴 사유의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하나의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시적 화자는 번민과 방황의 무대인 ‘여기’에 존재하며, 그의 사유의 줄다리기가 지속되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황은 여전히 상황으로 굳건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가항력적인 상황 여부와 관계없이, 진정으로 불가사의한 것은 ‘주체’가 계속해서 사유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러한 번민이 반복될 때에만, ‘나’와 ‘너’는 ‘나’와 ‘너’로서, 이 시적 무대의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덧붙여진다. 그것은 ‘문’ 너머에 정말로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가의 여부나 이러한 가무한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와는 조금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즉,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시’라는 한정된 공간에 질문을 적용하자면 무엇이 저 대상으로서의 존재를 시적 화자로서, ‘나’와 ‘너’라는 주체성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가. 물론 박지일의 시적 화자가 제시하는 답변은 ‘사유’의 지속성이다. 『물보라』의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가 오직 한정적이며 순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 따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토대란 이처럼 위태롭고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살아지듯이 죽으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입장한다. 중부 지방은 맑거나 아침에 차차 맑아지겠다. 남부 지방은 흐리겠다. 경남 해안과 제주도 지방은 곳에 따라 한때 비가 조금 온 후 차차 개겠다. 바람은 약하겠다. 기상청은 “아침과 낮의 일교차가 10도 이상 벌어지는 날씨가 계속되겠다.”라고 밝혔다. 아침 최저기온 섭씨 –1에서 14도, 낮 최고 기온 16에서 20도. - 박지일, 「11月 6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7쪽, 전문. 죽어지듯이 살라. 지긋지긋한 거울 속으로 기상캐스터가 온다. 사투리를 쓰면서 온다. 헤이수이(黑水县) 현은 좀 덥거나 아침은 아니 온다. 나나이 칼란(Nanai Kalan)은 습하거나 땅감이 익겠고 저녁은 아주 아니 온다. 마조르다(Majorda)와 파나두라(Panadura) 해안은 한때 더워 개골창으로 변한다. 바람은 없다. 눈도 없고 비도 없고 햇볕은 아주 없고 내일은 없다. 끝. - 박지일, 「11月 6.4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28쪽, 전문. 어디가 죽음 이전이고 어디가 죽음 이후인지 모르겠다. 네 앞에 선 거울이 너를 슬쩍 납치한다. 너는 그네를 돌려달라고 엄마에게 조르는 중이었다. 엄마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거울아, 거울아, 너는 거울에게 배운 대로 빌어 본다. 거울은 미동이 없고 너는 홀로 미동을 키운다. 엄마가 거울 속에서 등장한다. 너를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너만 없다. 너는 거울을 납치하여 등에 업고 날아오른다. 너는 물구나무 한다. 네 긴 머리카락이 손잡이처럼 흔들린다. 세상이 뒤집히고 열차는 순환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 박지일, 「11月 9.7日」, 『물보라』, 민음사, 2024, 134쪽, 전문. 정리하자면, 박지일의 시적 세계에서 그토록 호명되는 ‘나’와 ‘너’라는 인간 주체는 실로 한 순간의 물보라와 같이 순간적이며 부서지기 쉬운, 영속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위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집의 후반부에 위치한 일기의 형태를 띤 작품들에서는 유독 의지 혹은 지시를 전달하는 단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분명한 대응관계라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어쩌면 이러한 의지와 지시를 담은 단정적인 표현들은 유약한 인간 존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단서들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적 세계에서 ‘인간’ 존재란 그처럼 무수한 순간을 거쳐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시적 세계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란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와는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언제까지 이 『물보라』와 같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가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가 계속되는 한에서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적 공간은 단지 언어를 통한 재치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위태로운 실존이 걸린 무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적 무대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 존재가 오직 거듭되는 방황과 번민 속에서 사유를 이어가는 한에서 인간으로 계속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철저한 데카르트적 주체라고도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주체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데카르트적 주체보다도 훨씬 더 회의론적이며 위태로운 것이라는 한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인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추는 순간 인간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조건이라는 것으로.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박지일의 시집 『물보라』가 지닌 여럿 가운데 하나의 단상에 불과하다. 어쩌면 언어로 짜집어진 사물과 사물의 연쇄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론적 발견이야말로 그의 시가 지닌 최고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또한 이 세계가 X.Y.Z라는 세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되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온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질문은 반복될 것이며, 반복되는 질문 속에서 박지일의 시적 주체는 여전히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3차원의 공간임을 상식을 통해 알고 있다. 입체성을 지닌, 그림자를 지닌 세계의 부피들이란 그 자체로 이 세계가 3개의 방향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시인의 작품을 통해 살펴보았듯, 세계와 그 안의 사물과 일어나는 현상들은 세 개의 축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설명될 수 없는 이 실재의 영역을 향해 시인은 거듭 질문을 던지며 자기만의 답변을 질문의 형태로 거듭 제시한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한 답변에, 정답에, 진리에 이를 수 있을까? 다소 회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빛이 이 세계에서 30만km의 속도를 지닌다는 것이 하나의 규칙인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모든 것의 정답에 다다르는 일 역시 불가능한 것이 세계의 규칙인지도 모르므로.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질문을 이어가며 사물들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혹은 잠재되어 있던 위기를 거듭 질문의 형태로 발견해나갈 것이다. 아마 그때까지 시는 거듭 쓰여질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기를 지속하는 한에서, 그리하여 우리가 언어를 통해 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듬거리며 계속 나아가는 한에서.
왜 하필 그림자였을까, 그가 상자에 차곡차곡 가두어 둔 것은. 당신에게 함이 하나 생겼다고 하자. 육면체여도 좋고 팔면체여도 상관없지만 어쨌든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는 상자. 종이로 만든 것이어도 좋고 철재나 목재여도 무관한데, 뚜껑째로 열 수 있거나 경첩으로 상하부가 연결된 그 상자는, 비어있다. 당신은 무엇을 담겠는가? 그의 함에 든 그것은 말하자면 그림자였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에서 히라야마는 심상한 일상을 자신만의 취향으로 세공한다. 도쿄 공중화장실 미화원인 그는 청소도 허투루 하는 법 없이 자신만의 방법과 도구, 약품으로 꼼꼼하게도 닦는다. 변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누가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찾아볼 리도 없는 구석진 면까지 오염을 닦아내는 그의 손길에 저어함은 없다. 점심은 신사의 야외 벤치에서 편의점 샌드위치와 우유. 더없이 간결하고 간소하다. 옆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의 눈길은 주로 위를 향한다. 높다란 나무에서 뻗은 가지에 매달린 잎사귀가 해를 받아 검은 무늬를 드리운다. 잎사귀 사이로 설핏 들어오는 햇살은 그 순간 더없이 명료하다. 영화는 내내 그의 ‘지금’을 보여준다. 청소일이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개운하게 몸을 씻은 후 지하상가에서 도수가 약한 술을 저녁 삼아 마신다. 다다미방에 요를 깔고 누워 탁상용 스탠드 불빛에 기대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고판 책을 몇 장이나마 읽다가 잠들고. 다음날 같은 시각에 일어나 단풍나무 묘목에 물을 뿌리고 간단히 씻고 수염을 정돈한 후 자판기 캔 커피를 뽑아 출근길에 오르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된다. 그러니까 그토록 단정하고 과묵하며 그다지 남과 얽히지도 않고 독서와 필름 카메라, 카세트테이프로 듣는 올드팝이라는 그의 태도와 취향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영화는 그의 전사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영화의 백미는 거기 있다고 본다. ‘이런 일 할 사람으로는 안 보이는데…’ 유의 질척한 궁금증으로부터 가뿐히 등 돌리는 것. 그의 전사는 영화 안에 없다. 홍성욱의 「함」(『현대문학』, 2025년 2월호) 속에 든 것은 꿀이다. 꿀단지는 일하는 회사에서 사장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나’에게는 어쩐지 이것이 “납골함”(55쪽)이라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함을 안고 천변을 걸어 집으로 가는 40여 분의 타임라인 동안 두 개의 죽음은 자연스레 환기된다.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란 요컨대 이러하다. “엄마는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했을까?”와 그것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59쪽). 집에 다다르기까지 전화를 걸어 어디냐, 언제쯤 오냐, 아직이냐 묻는 엄마는 집요하다. 열 한 시간을 일한 몸으로 함을 지고 걸어가는 ‘나’는 그걸 또 다 받아낸다, 온몸으로. 잇단 벨소리가 또 엄마의 전화인가 싶은 때, 고교 동창에게서 승화의 2주기를 알리는 전화가 온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죽음이 찾아든다. 승화와는 딱히 가까웠다고 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우연히 같이 과제를 하게 되어 집에 온 날 승화가 의자 뒤에서 내 목을 끌어안고 볼을 쓰다듬은 일, 그리고 그걸 엄마가 본 일. 승화가 돌아가고 난 뒤 엄마는 그와 멀어질 것을 종용했고 ‘나’는 뭘 잘 모르는 채로 그저 엄마의 뜻에 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날 이후 “더 내 안쪽으로 들어왔다”(67쪽). 승화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엄마는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단정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승화의 2주기에 딱히 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전부다. 엄마와 불화하지도 그렇다고 엄마를 극복하지도 않는 이 소설은 다만 두 가지를 돌올하게 밀어 올린다. 애도와 성장. 그런데 이 애도와 성장에 좀 희한한 면이 있다. 애도가 불가능 쪽으로 점쳐질 때 우울증적 자아가 탄생한다는 익숙한 이론으로부터 이 소설은 각도를 튼다. 당장 함의 무게도 무게지만 가계를 건사하기 위해 긴 노동을 감내하는 인물에게 제법 기우뚱 기대어 있는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자신 쪽으로 지나치게 밀고 들어온 엄마를 허용한 대가는 아무래도 반反성장에 가까운 결정권의 이양이어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고 승화라는 관계의 싹을 애초에 절단한 것은 모두 엄마의 결정이었다. 아감벤은 애도의 실패가 불러오는 우울증의 모호함에 대해 일별하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점유’의 시도로 정리한다. 그러니까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치환하는 상상력이란 실제 잃어버린 것이라기보다 잃어버린 것처럼 연기하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내게 진정으로 깃들어본 적이 없는 대상과의 관계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잠시 뭉개버리고라도 함을 들고 걷는 인물에게 찾아온 두 죽음을 이 말에 포개보자. 무언가를 제대로 소유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을 잃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승화와도 제대로 우정이라 부를만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특히 기억조차 전무해 아버지란 오직 나의 존재로서만 짐작되는 불확실성에 기대어 있디. 그런 사람의 죽음은 더더욱 내가 알 수도 없는 식으로 처리되어 부재만을 그 증거로 내밀 따름이다. 소설은 지연된 애도의 수행, 그 정식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저 복기하기, 다만 그것만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주체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에게는 어쩌면 그편이 가장 실천 가능하달 수 있겠다. 그리고 40여 분간(이날은 조금 더 지연된다) 스스로 “납골함”(55쪽)을 지고 무대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 무대의 끝에 다다라 발이 걸려 철푸덕 넘어지며 함은 그만 깨져버린다. 꿀은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진정으로 실패한 애도야말로 애도라는 데리다식의 전유가 가능하려면 대상을 곁으로 당겨 유연관계로 만드는 일이 먼저 필요하겠다. 그럴 때 비로소 나에게 이만치 들어와 있는 엄마와, 열 한 시간 노동의 세계와,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을 인수한 ‘나’는 접맥 가능할 것이다. 그때 ‘나’는 자그마한 딱지에 쓰인 유통기한이 2년 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본다. 이제 꿀도 함도 손쓸 수 없지만 길 위에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유골함보다 왠지 사후적으로 들리는 납골함이라는 단어는 회수할 수 없는 죽음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여겨진다. 그리고 저 꿀은 기어이 쏟아짐으로써 치유의 성분으로 남은 이의 상처를 덮어주기도 할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어떤 함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다(명학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창작과 비평』, 2024년 겨울호). 하루 열네 시간의 노동을 견디는 ‘나’에겐 소설 쓰는 친구들 진호와 미미가 있다. 소설은 전에 그런 일 없던 미미가 예의 저 기계를 갖고 싶어 한다면서 진호가 보여주는 동영상 속 함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18초짜리 동영상에서는 스위치를 누르면 함이 열리고 그 안에서 막대가 나와 스위치를 눌러 원 상태로 돌린다. 막대가 제자리에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굳게 닫힌 함이 거기 놓여 있을 뿐이다. 다소 뻔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기계의 ‘쓸모’와 인물들의 ‘쓸모’를 얽고 쓸모없음의 역설을 말한다는 건. 미미는 자신을 방구석에서 홀로 돌아가고 있는 선풍기와 동일시해 “누군가 작동시켜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존재, 잊힌 줄도 모르고 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존나게 영혼을 갈아대고 있는 똥멍청이”(209쪽)라 하니까. 스스로를 그리 여기는 건 미미뿐만은 아니어서 선풍기를 거울삼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자기 비하에 깊숙이 빠진 여자친구에게 기필코 저 기계를 구해주고자 애쓰는 진호의 마음은 다소 지당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나’는 왜 이리 열심이란 말인가? 카페와 편의점을 오가며 낯선 사람을 상대하는 연중무휴의 삶, 그런 일상에 함 하나가 슬며시 끼어든 것이다. ‘나’는 기계를 구하는 일에 완전 진심이다. 온갖 사이트며 동영상을 뒤지고 전자회로 관련 서적을 소지한 카페 손님에게 자문을 구하는 일은 사뭇 열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기계를 생각하게 되고 정작 업무에 오류가 끼어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카푸치노를 손님에게 내밀자 손님은 자신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고 말한다. ‘나’는 영수증을 확인하고 카푸치노가 맞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손님은 “나는 집에서 나와 여기까지 오면서 오늘은 따뜻한 라떼를 마셔야겠다고 계속 생각하고 다짐까지 했다고요. 그런 제가 주문을 잘못했겠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카푸치노가 찍혔다는 건 그쪽이 실수를 했다는 뜻 아닌가요?”(211쪽)라며 응수한다. 얼핏 너무도 주관적이고 증명되지도 않을 손님의 논리는 억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손님의 저 지적에는 뜻밖에 꽤 명징한 논리가 있다. 바로 입력의 오류 가능성. 입력이 오류이면 출력값도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이 논리는 사실, 이 실재하는 기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중이고 이 기계를 만난 곳 또한 소설이니 효용적 측면이나 개발 동기와 무관하게 이 기계를 해석해도 될 터. 이 기계는 말하자면 끄라는 명령어를 켜고, 켜짐으로써 끔을 실행하는 역설의 명령을 실천한다. 여느 기계들이 인간의 명령으로 켜지고 꺼지는 것과 달리 이 기계는 인간의 행위로 시작해 기계의 실천으로 끝을 맺는다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해 이 기계는 인간과 모종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전유되어 ‘나’는 기계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질문을 하기 위해 용기를 내고, 급기야 전자회로 여학생을 기다린다! 생각만큼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의 장치를 구했다며 진호 미미가 가져온 기계의 실물은 정작 제대로 구현되지도 않는 텅 빈 것이었다. 그 속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채우겠다는 미미의 결심은 다소 뻔한 결말이지만 그 부분을 괄호 치더라도 분명한 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기계’가 내내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마치 원본도 실체도 없는 가속력에 의해 현재를 다만 가열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겹쳐진다. 이 기계의 다른 이름은 ‘궁극의 기계’다. 그러니 정작 “그 녀석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229쪽)는 것은 때때로 텅 빈 기표가 되고마는 아니 어쩌면 내내 텅 빈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삶의 모호성이라는 실재나 다름없다. 다시 <퍼펙트 데이즈>에서, 예정에 없이 여동생의 딸이 가출하여 히라야마와 머물게 되자 여동생은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세단을 타고 딸을 데리러 온다. 잠시 나누는 남매의 대화에서 히라야마와 아버지의 오랜 불화가 엿보인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힌트에 의지해 그의 사연을 추적하는 일은 얼마쯤은 가능하다. 그러나 관객이 그런 시도를 할 때 영화는 클리셰로 범벅되고 만다. 인간의 삶이란 그토록 뻔한 면도 있지 않은가. 그런 이유로 영화가 보이지 않으려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도 있지만, 이상스레 그의 과거를 캐지 않으려는 마음 쪽에 힘을 더 싣게 되는 것은 그것이 예의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가 그편을 원하는 것 같아서. 다만 여동생이 다녀간 뒤 순간의 오열은 그의 단단하고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쌓은 일상이 어쩌면 무언가로부터 기필코 달아나고자 하는 행위로 빚어 올린 벽일지도 모른다는 짐작만은 보태진다. 그런 안간힘에도 간혹 일상을 기습하는 외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충직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돌아가는 것, 부드럽고 고집스러운 회복. 무너져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회복에 대한 탄력성. 그러나 회복이 이전으로 돌아감과 등가가 아님을 아는 사람의 자가면역 행위. 목표는 더 나빠지지 않는 것. 다만 나를 온전히 지켜내는 것. 그럴 때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다. 일상은 노력으로 일구어내는 순간의 더께로 켜켜이 쌓이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이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지키기 위해 감행하지만 도대체 온전히 거머쥘 수 없다면, 그렇게 끈질기게 돌아오는 자리가 만족스럽기는커녕 어쩐지 열등감만 부추길 뿐이라면,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라면 우리는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 소설이란 함에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다(서장원, 「피루엣」, 『웹진 림』, 2025년 2월호). 사진에는 초등학교 3학년 규오가 동화 속 왕자님 차림으로 발레 동작을 취하고 있다. 지금의 규오는 트랜스젠더 남성이다. 여성으로의 이차성징을 맞이했을 규오는 지금 자신의 몸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긴다. 규오와 함께 노아의 환송 파티에 간 ‘나’는 노아를 바라보는 규오의 눈빛에서 선망을 본다. 내가 보기에 노아는 “키가 크고 잘생긴 데다 친구가 많고, 어디를 가든 중심이 되는 남자. 자신의 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어떤 관계에서든 어렵지 않게, 스스로도 잘 모르는 사이에 우위를 점거해버리는 남자들” 중 하나다. ‘나’는 노아와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고, 어떤 면에서 규오를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이른바 ‘설레는 키 차이’ 같은 것에는 힘의 구도가 주는 불평등함이 있다고 여기는 내가 규오를 안전한 상대로 여기는 것은 “규오의 몸이 가진 내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규오가 정말”“좋은 남자이기 때문일까”. 반면 규오는 노아에 대한 ‘나’의 저런 평가에 대해 “그냥 그게 좋은 거 아닐까?”라고 답한다. 그런 남자가 좋은 남자의 표본이란 뜻일까, 그런 남자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란 뜻일까. 어떤 식으로 저 모호한 문장을 번역하든 분명한 건 규오가 자신을 ‘그런 남자’들과 따로이 놓는다는 점이다. 규오는 자신의 ‘왕자님’ 사진을 노아에게 타투 도안으로 맡긴 터였다. 어영부영 타투는 새기지 못했고 그 사진은 노아의 타투 숍에 그대로 남아 노아의 전 여자친구로부터 인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오가 그걸 몸에 새기고 싶어 했다면 그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건 아마도 지금의 몸과 대척점에 놓이는 게 아닐까. 정작 ‘나’는 규오가 겪었을 “골반이 넓어지고 가슴이 발달하는 원치 않는 변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서른 살 규오의 몸속에 파묻힌, 아직 그 일을 겪지 않은 소년을 생각하면서”“사진 속의 잘생긴 소년을 바라보곤”하는데, 이는 ‘나’의 ‘안전한 선택’에 도사린 욕망과 충돌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규오의 몸이 좀 더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여기면서도 규오가 넓어진 골반을 아쉬워할 때 내심 동감했다는 점은 더 ‘남자다운’ 몸을 원하기에 이차성징의 전을 새로운 영점으로, 거머쥐기 힘든 높다란 곳에 저 사진을 놓아두고자 하는 규오의 욕망과 정 반대축으로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안전한’에 방점을 찍은 선택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해가 지면 집 앞 편의점을 가는 일에도 느끼는 불안이 여성의 몸에 비롯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차라리 우리는 사랑의 정의와 함께 몸의 정의를 새로이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 버젓이 냉장고 문에 붙은 저 사진에 들러붙는 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피루엣, 자신의 한 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도는 이 동작은 결국 원점에 서게 된다. 트랜스젠더를 택했지만 불만족으로 노아를 선망하는 규오의 모습은 그 자체 피루엣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욕망과 어긋나면서 서로를 욕망의 시발점으로 돌려놓는 또 하나의 피루엣을 그린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을 둘러싼 많은 정체성에 대해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이 정상이고 안전이고 평온이고 행복인지를. 누가 규오의 저 욕망이 넘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함(혹은 그 속의 물건)이 제유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곧 주물(呪物)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 기도 하다. 아감벤에 따르면 무언가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부정을 상징하고, 무(無)의 실체인 동시에 그 부재의 기호가 되는 주물은 본질적으로 분열적이다. 사물에 의미를 매다는 일, 그 문학적 작업에서 제유적인 면이 있다면 애착과 바람,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기호화와 같은 일은 사물로부터 이미 분열한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한 거푸집에서 나왔으나 조금씩은 다른, 어떤 것은 금이 가기도 한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들”(『다정한 유전』, 11쪽)의 모양이 그의 전작 『다양한 유전』(아르떼, 2020)을 겹쳐 읽게 하는, 강화길의 소설 「거푸집의 형태」(『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서도 그러하다. 이모의 죽음 뒤에 남겨진 록 밴드의 기념 티셔츠는 관계의 의미를 완전히 새로 쓰게 한다. 단지 외모가 닮아서여서만은 아니었을 게다, 이모와 취향을 공유하고 다정한 자매처럼 지내온 것은. 장녀로서 가계를 책임져왔던 큰이모와 그의 물질적인 그늘에 있는 엄마를 비롯한 형제들의 권력 구도는 다분히 경멸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고, 음악을 만들고 가수로 살고 싶어했지만 번번이 대학가요제 예선까지만 닿았던 막내를 비정상 처리하는 큰이모의 언사는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모를 건사하고 우리 집과 막내 이모를 갈라놓았던 결정적 사건을 처리한 것도 큰이모였다. 돈 “팔백사십만원”(「거푸집의 형태」, 211쪽)은 외삼촌네와 우리 집에 얹혀살며 우울증과 대인기피를 앓던 이모가 근근이 카페나 편의점에서 일해서 모은, 말하자면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리고 이모가 암을 진단받자 국가 지원을 신청하기 위해 엄마 계좌로 돌려놓은 그 돈은 이모는 모르게 ‘나’의 전세 자금으로 쓰인다. 그 일로 엄마와 이모는 서로를 등지고 ‘나’ 역시 이모와 소원해진다. 그럼에도 이모와 나의 세월은 제법 끈질긴 것이어서 이모의 취향에 맞는 밴드의 기념 티셔츠, 사인 시디며 출판사에 취직한 내가 선물한 책 같은 것들은 이모의 서가 한 칸을 당당하게 메운다. 특히 이모가 모으던 티셔츠들은 의미가 크다. ‘나’는 이모가 왜 그걸 모았는지 오직 나만이 안다고 여기니까, 이모의 죽음 이후 그것들은 응당 내가 인수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큰이모는 ‘나’를 제외한 ‘남자조카들’을 인수자로 지목했다. 큰이모는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모의 집으로 향하지만 거기서 만난 건 뜻밖에 이모의 마지막 친구였던 20대 여자다. 길고양이 밥을 주다 친구가 되었다는데, 이것저것 이모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이모는 여자에게 ‘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보값이 좀 이상하다. 이모는 어떤 사람이었나? 지금에 와 이모는 나와 취향을 나누던 그가 아니다. 의존적인 막내, 자신의 취향을 위해 큰이모와 불화했지만 투병 이후 큰이모에게 복속된 다소 유약하고 무능한 사람일 뿐이다. 생각해볼 것은 질병 이후의 삶에 대해 누구도 감히 짐작으로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질병은 그 자체 자신의 몸을 비정상으로 선언(당)하는 일이기도 해서 앓는 사람의 시간은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이전의 시간 틀로는 일상을 살아낼 수가 없는 거다. 큰이모의 기준에서 막내의 삶은 언제나 미친 것이었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모의 질병 이후 이모의 삶은 큰이모가 규정한 정상성에 복속하게 하는 것이기도 해서, 질병이라는 비정상성으로 인해 정상의 삶이 불가한 자의 막다른 선택이 큰이모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굳이 미화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삶의 궤적을 옮겨 앉고 그간 구축된 아비투스를 폐기하는 일. 모든 취향과 선호를 버리는 일. “병에 걸린다는 건, 타인에게 내 행복을 맡겨둔 것과 같다.”(『다양한 유전』, 146쪽) 이모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몇 장의 티셔츠와 시디 따위가 전부이지만 그런데 그건 또 누구의 것이었나. 이모는 왜 ‘나’와 이모가 절반씩 섞인 혼종의 ‘그녀’, 자신의 꿈까지 들씌운 그녀를 완성했나? 아마도 이모는 그때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이별한 것이리라. 이런 행위를 일종의 ‘창작’으로 본다면, 이모가 만들어낸 혼종의 그녀는 다름 아닌 욕망의 잔여물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건 종국에 “환상을 포기하는 이야기”(『다양한 유전』, 129쪽)이다. ‘거푸집의 형태’는 소설 속에서 이모의 몸속에 끝내 남은 횡경막 아래의 암세포를 일컬으면서, 어떤 기질이 기묘하게 유전되는 한 가계의 이력을 모조리 끌어안는 형상물이기도 하다. 큰이모의 입장에서라면 금 간 항아리 쯤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를 막내를 품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함은 그 자체 사물이면서 사물에 의미론적 가치를 매기는 수납의 기능이 덧붙는 사물, 사물의 겹이면서 의미의 미끄러짐이다. 그것은 열려 있거나 닫혀 있고 비어있거나 채워질 가능성으로 항상 중첩된다. 열지 않으면 알 수 없기도 하지만 어떤 함은 열면 모두 파국에 이를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가족들에게 진실은 모두를 할퀴는 남루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남루함이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외모나 재능의 유사성이기는커녕 고통이라는 사실에 있다. 매일 오염되고 매일 그 오염을 닦아내야만 유지되는 화장실의 청결처럼 일상 또한 반복을 통해 쌓인다. 때때로 어떤 차이가 발생하지만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삶. 그것은 어쩌면 매우 고결한 것이다. 내가 가진 함에 이름을 붙여주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겨울을 건너오며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일상이 아니었나. 그림자는 원 사물 없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본은 아니라서 원 사물과 완전히 같지도 않고 존재론적, 가치론적으로 열등하지도 않다. 그런 면에서 어떤 이야기는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에는 ‘코모레비’라는 단어가 나뭇잎 사이로 가만히 떠오른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을 뜻하는 이 말은,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간절함을 다만 묵묵히 담기에 참 좋은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담은 것은 빛이었다.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빛. 어떤 이야기는 쓰이기보다 쓰이지 않음으로써 더욱 단단한 이력을 확보하기도 한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는 모든 함의 안이자 때로는 밖의 벡터인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우리가 읽고 있는 이야기 안에 없다. 그건 기록되지 않은 채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렁인다. 그러니까 그가 함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어 한 것은 결국 ‘지금’이라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야기는 결코 쓰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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