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푸른사상 2024년 봄호(제47호)
비인간 동물을 전유한 시계(視界)의 확장
2024년에 쓰는 글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을 또다시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저어되는 감도 있지만, 이 시기를 관통하면서 경험한 우리 삶의 시계(視界)는 이전과는 다른 지점을 향해 있기에 슬쩍 언급하는 정도는 괜찮을 듯도 싶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재난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를 ‘인류세’로 명명하면서 인간이 성취한 것 너머에 은폐되었던 파괴적 속성을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플라스틱’과 ‘닭뼈’로 대표되는,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공장식 축산업에 기반한 비인간 동물 착취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던 팬데믹의 재난을 인류가 초래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이것을 인류의 공통적 문제로 삼는 것은 인류 전체가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의 과도한 일반화가 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자본세’라는 명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들이 야기한 문제로 그 범위를 축소하여 근본 원인을 밝히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후 위기나 돌봄노동의 문제, 금융 위기와 부의 양극화 등은 팬데믹을 지나오면서 인간이 선제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지금 당장의 위기 극복만이 아닌 미래 세대를 위해 반드시 책임지고 지구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하는 일로 각인되었다.
최근 발표되거나 시집으로 묶인 시편들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문학적 지향으로 삼고 응답하려는 시도들이 엿보인다. 물론 각각의 시인이 개별적인 우주로 존재하는 만큼 그 양상은 서로 다르고, 한 권의 시집 안에서도 수많은 갈래의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으나 작품을 통해 당대의 문제에 응답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지닌 채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시대적 문제에 응답하고 이를 현실 세계의 변화 축으로 삼아 실천의 양상으로 표현한 시인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하면서 비롯된 노동문제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참여 시인들이 그러할 것이고 ‘서발턴’의 목소리를 대리하며 소외된 존재를 향한 폭력을 고발하는 시인들이 그러했다. 이는 용산과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젊은 시인들의 활동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팬데믹 이후에는 또 다른 사회적 문제, 삶의 문제를 시적 지향으로 삼아 표현하도록 만들었다.
그중에서 필자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비인간 동물을 향한 시인들의 마음과 그 곁에서 살피는 타자의 존재론, 그리고 그러한 존재가 맺는 부조리한 관계의 층위 및 기후위기와 같은 전지구적 위기를 작품 안에서 풀어내고자 하는 어떤 의지의 양상이다. 짧은 지면에서 각각의 시편들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일련의 작품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비인간 동물의 삶과 그들과 관계 맺는 시인의 삶을 표상하는 시집은 팬데믹을 전후하여 발간된 엔솔로지 시집인 『나 개 있음에 감사하오』(아침달, 2019)와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아침달, 2020)가 대표할 듯하다. 그러나 이 시집은 앤솔로지인 만큼 반려종을 향한 그리움과 감사라는 감정적 층위 너머를 총체적으로 살피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기성의 『동물의 자서전』(문학동네, 2020)과 김선오의 『나이트 사커』(아침달, 2020)에서는 ‘고기’라는 용어로 비인간 동물을 임의로 구획하여 일정한 역할(그중에서도 식용)을 강제하여 착취하는 인간 동물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기성은 「고기를 원하는가」라는 시를 통해 ‘고기’가 된 ‘나’를 바탕으로 비인간 동물의 고통을 재현하며 육식이 지닌 폭력성을 자신에게 투사함으로써 비인간 동물의 고통을 무감하게 여기는 세계를 비판한다. 김선오는 시집에 실린 「부록」에서 “고기에는 동물이 부재한다”는 진술을 통해 ‘고기’라는 기호가 지닌 지시 대상의 부재가 비인간 동물의 죽음을 은폐하며 생명을 살육하고 착취하는 폭력으로부터 인간 동물의 죄책감을 삭제하고 있음을 응시하게 하였다.
비인간 동물을 향한 인간 동물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시인들과는 달리 자신과 관계 맺은 비인간 동물을 향한 사유의 맥락 속에서 유사한 고통에 놓인 존재를 위무하는 시인들이 있다. 신철규와 강지혜가 그러한데 신철규는 『심장보다 높이』(창비, 2022)에 실린 시 「검은 고양이」를 통해 반려종으로 “잠시 내 곁에 머물다가 멀어진” 존재인 고양이를 기억하는 화자를 형상화하며 “닫힌 문을 열어줄 사람”, “내 어깨를 두드려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위안을 건넬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검은 고양이의 부재 이후 “너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점점 다른 것들로 채워”지는데 그것은 닫힌 문 너머에서 “맹렬하고 간절하게” “문을 긁으며”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던 비인간 동물의 수행처럼 닫힌 세계 너머에서 비가시화된 존재의 “빛”을 톺는 것으로 이어진다. 신철규의 시계가 욕조 안에서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어떤 기억”을 “심장에 새”긴 「심장보다 높이」나 제주 4·3 사건으로 폭도가 되어버린 희생자를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으로 응시하며 애도하는 「세화」로 확장되는 것이다. 또한 이는 「흐르는 말」에서 언급한 것처럼 “없기 때문에 생각”하게 되는 존재를 향해 “범람하는 입과 밀봉된 귀 사이”의 거리감에 대한 사유를 거쳐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인간의 조건」)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임이 나뉘는 순간”(「엔딩 크레디트도 없이」)에 대한 성찰에 닿는다. 이러한 성찰은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시적 폭력과 참사 희생자를 시인이 어떻게 형상화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이에 어떠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지를 숙고하게 한다.
강지혜는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지?』(민음사, 2022)에 실린 「네가 고른 말」에서 ‘개’와 ‘나’의 “배꼽은 이어져 있”다고 함으로써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의 분리불가능한 존재론적 교감의 지점을 짚는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우리 사이에 모든 것을 흐르게 하”는 이들의 연결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배제하거나 경계 짓는 권력의 부재와 그 쓸모없음을 형상화한다. 서로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구체적인 몸으로 서로를 포용하는 관계는 반려종의 관계를 넘어 “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는” 모든 순간으로 확장되며 “하얗고 비참한 얼룩”(「흰 개」)으로 은폐된 존재들의 연대로 나아간다. 특히 강지혜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적 폭력의 양태를 비판하며 여성들 간의 연대를 포함하여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시의 지향을 삼는다.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강제된 돌봄 노동의 문제를 응시하며 세계가 여성에게 강제하는 위계를 묘파하고자 한다. 「폭염」에서 ‘어미 개’와 동일시된 여성 화자는 「행주를 삶는다」에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에 내몰린 “내가 보이긴 할까”라고 질문함으로써 남편이 ‘나’에게 강제하는 수동적 위치와 타자화의 자리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낸다. 강지혜가 시집 전반에서 개라는 비인간 동물과 교감하며 ‘우리’를 말하는 것은 이렇게 강제되고 타자화된 여성의 자리를 전복하고자 하는 능동적 수행이며 우리로 하여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여성 담론에 대해 재구하도록 이끈다.
신철규와 강지혜가 형상화한 것과 같이 비인간 동물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교감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강제하는 폭력적 양태에 대한 책임과 그에 따른 어떤 응답을 요청한다. 이를 외면하는 것은 인류세 혹은 자본세를 살아가며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회피하는 무책임일 따름이다. 정다연은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창비, 2021)에서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촉구한다. 이는 반려종인 “아롱이 밤이와 함께 걸으며 발자국”(「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을 만들어냈던 해변에서의 순간으로부터 비롯된 걷기의 윤리와 맞닿는다. 이때의 걷기란 “모르는 길 밖으로 나서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땅에 그어진 선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제각각인 우리의 빛깔을 그림자와 그림자로” 잇는 것이자 파편적인 개체를 넘어 ‘우리’의 연대로 확장케 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다연의 시적 수행은 「에코백」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만든 전 세계적 폭력의 연결고리를 성찰하는 데로 이어진다. 공정무역을 통해 원두를 수입하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일은 불공정한 무역 구조가 야기하는 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불공정에 대한 총체적 사유를 은폐하는 또 다른 기제로 작동한다. “최저가의 최저가”를 요청하며 “에코백”을 덤으로 받는 일은 스스로 올바른 소비를 하는 존재로 정체화하는 일이지만 거기에 내재한 선한 착취의 시스템을 간과하는 일이기도 하다. “착한 소비는 가난한 지역사회를 살리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지만 그 너머에 존재하는 기만, 이를테면 멕시코와 같은 개발도상국을 착취하는 글로벌 기업의 실체로부터 눈을 돌려 부의 양극화를 심화하는 환경 파괴와 노동착취 등을 은폐하는 기만이 될 위험이 농후한 것도 사실이다.
“친환경 소재 에코백은 잘 썩어 어쩌면 좋은 비료가 될 수 있고// 질 좋은 비료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는 상상은 그것이 양산하는 과잉 소비와 그로부터 비롯된 “불합리한 구조조정”이라는 또 다른 폭력의 양태를 사유하지 않는다. “살인율이 가장 높다는 멕시코”에 비해 “사거리를 지나다 총 맞을 일도 없”고 “늦은 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존재가 자본주의 사회의 도구로 사용되며 사건, 사고의 책임을 개인의 문제로 여기게 하여 “스스로를 죽”게 만드는 사회를 곱씹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빛깔을 그림자 속에 묻어두고 “갓 닦인 포장도로의 보드라움”을 “살냄새로 착각하며”(「어항」) 스스로를 기만하는 삶에 매몰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세계의 부정을 직시하고 문제제기를 하며 그에 대한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야말로 “땅에 그어진 선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는 ‘걷기’일 것이라고 정다연은 자신의 시적 수행을 통해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때 우리집 고양이였던 르미”의 시선을 통해 “대체 왜 여기 있는지 모를, 왜, 도대체, 무언가 사람”(「한때 우리집 고양이와」)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변윤제의 지향을 언급하고자 한다. 변윤제는 시집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에서 ‘평범한 일’ 연작을 통해 화자가 경험한 어떤 일들을 그저 평범한 일이라 자위하며 가볍게 여기려는 태도의 양상을 재현한다. 이는 ‘알파카’를 통해 그 ‘공동체’를 상상하며 강제된 단일한 정체성으로부터 다양성에 기초한 존재의 연대를 소망하는 것(「알파카 공동체」)처럼 평범함에 내재된 균열의 양상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삶의 양태를 사유할 계기를 마련한다.
변윤제는 「평범한 일 2」에서 “내 가장 오래된 일기 가운데 죽은 강아지가 누워 있는 건 평범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진술은 죽은 강아지에 자신을 투사하여 말하는 방식으로 “꼬리와 꼬리가 엉키는 건 어깨동무한다는 뜻”이라고 하지만, “일기 속 상처”라는 구절을 통해 그것은 과거의 어느 시기 화자가 겪어야만 했던 폭력적 상황을 암시하며 평범할 수 없는 고통을 상기시킨다. “위력이 넘치는 세상에선/무력이 오히려 다행”(「평범한 일 3」)이라고 스스로를 위무하지만 “절망 이후에 기어코 다정할 수 있는 사실”은 평범한 일이라기보다는 폭력을 평범으로 위장한 채 “무게 없는 타격을 당하고 있”(「평범한 일 1」)다는 식의 기만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발화하는 양상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폭력을 평범으로 여겨야만 겨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존재가 “대체 왜 여기 있는지 모를, 왜, 도대체, 무언가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에 응답하고자 하는 수행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는 “을지로 길바닥을 헤매고 다니던, 작고 헝클어진 보풀에 불과”한 타자화된 자신을 “잿빛과 주황색과 심방 박동의 얽힘, 바람과 먼지의 결연”(「한때 우리집 고양이와」)이라는 주체로 전환하기 위한 시적 수행이자 ‘평범’이라는 기표를 전유하여 부조리한 세계가 지닌 균열의 지점을 응시하고자 하는 변윤제의 책임 의식인지도 모를 일이다.
앞에서 살펴본 이기성, 김선오, 신철규, 강지혜, 정다연, 변윤제의 시적 수행은 비인간 동물을 전유하여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처한 문제를 어떻게 사유하고 이에 책임감을 지닌 채 응답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당장의 위기에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의 방식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응시하고 응답하고자 하는 태도 속에 문학이 놓여야 함은 분명하다. 이들을 포함한 여타의 시인들의 시가 사적 층위의 서정에 머물러 위안을 갈구하기보다 그 시계를 확장하여 사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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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규범적 양식 아래서 읽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다. 유기적인 서사와 플롯과 같은 사건의 인과론적 배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작품은 소설어로서는 이례적으로 함축의 밀도가 높다. 자유연상과 직관에 가까운 느낌과 정동이 빈번하게 돌출되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고도로 응축적인 시어를 해독하는 일처럼 독자들은 어떤 모호한 감각적 혼란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2011)은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의 발표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이 두 작품에 대한 뜨거운 평가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집중적 관심으로부터는 일견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의 외형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설을 비평적으로 연결하는 열쇠어는 연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가까운 세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가 사회적 동물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가부장적 폭력을 조명하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구체적 범주로 확대한다. 한강의 작가적 사유구조 속에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선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의 구족 혹은 체제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나는 『희랍어 시간』 역시 ‘폭력’에 대한 한강의 작가적 사유가 ‘언어’라는 소재를 매개로 전개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에게 세계의 폭력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사건성’을 계기로 이해되거나 설명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부조리한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된다. a)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43쪽). b)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너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101쪽). 위의 인용문 a)의 경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이 독일에 있는 헤어진 사랑의 대상에게 쓰고 있는 편지의 한 부분이고, b)의 경우는 실어증에 빠진 수강생인 여성이 과거에 있었던 부조리한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a)의 남성은 조부 때로부터 비롯된 유전질환으로 마흔이 되기 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독일인 여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반면, 남성은 어디에선가 읽은 바가 있다는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이라며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다.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일 신이 무능한 존재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성의 논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들이 처해 있는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반발감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의지나 선악과 같은 도덕률의 준수나 위반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인 남성에게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선험적 폭력성으로 체감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설 속의 남성에게 신이란 바로 그 가혹한 폭력과 악의 부조리한 실행 상황에서도 침묵을 본질로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파스칼적 명상을 보충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불가지론을 피력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성의 내적 절망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한편 b)에서 회고되는 상황의 폭력성은 두 겹의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리는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에서 백구가 승합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이것은 백구나 그의 곁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의 의지의 ‘저편’ 혹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 폭력이다. 그 끔찍한 폭력은 백구나 여자아이의 외부에서, 다시 말하면 의지의 저편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공황에 가까운 충격을 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조리는 충격과 연민의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껴안았던 백구가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로 여자아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경험에서 온다. 당시의 여자아이와 그것을 회고하고 있는 실어증에 빠져 있는 여성에게, 선의에 대항하는, 아니 선의와는 무관한 폭력적 체험이라는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외상적 공포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세계를 근원적인 부조리와 폭력으로 인식하거나 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 속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과 문학적 성격을 밝히는 일은 별도의 작가론에서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소설적 질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 이 소설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비평적·논리적 추론과정의 구조와는 달리, 이 소설은 쓰여짐의 당시에 어떤 완결된 플롯을 전제하거나 사건의 골격을 완성한 단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작가는 아마도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하게 혹은 남성 인물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력을 상상하면서 현실을 비원근법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단일한 시점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간다는 식으로, 서사의 불투명성을 의식하거나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장이 전개됨에 따라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잦은 교체를 보인다. 이에 따른 서술자 역시 남성과 여성으로 자주 교차된다. 편지의 형태가 등장할 때는 2인칭으로 전환되며, 3인칭의 경우에도 제한적 전지시점과 작가 전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사건의 서술이기 보다는 기억과 인상의 다층적 묘사로 느껴질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두 인물 그러니까 서서히 시각을 읽어가는 남성 인물과 언어, 더 정확히는 한국어의 발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여성인물은 일단 그들을 주체화해 표상할 고유명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없이 ‘나’ ‘그’ ‘그녀’로 지칭되면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감각적 현실과 얼마간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과 빈틈이 많은데, 그 사이로 ‘유령적인 것’이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와 화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이제는 타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상실된 자기가 현재의 자기와 공존하면서, 간섭하기 때문이다. 상실된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부유하는 듯한 일상 속의 자기를 찾아와 기억을 뒤섞는다. 남성에게 그것은 환(幻)으로 충만했던 지등의 선명한 불빛이고, 여성에게는 음소와 음운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활력으로 충일하게 느꼈던 최초의 기억이다. a)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낯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이고 있었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25쪽). b)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 속에서 만들어 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13-14쪽). a)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의 회고이며, b)는 그 강의를 수강하고 있으며 실어증에 직면해 있는 여성의 기억이다. 각각 시각-풍경(a)과 청각-인식(b)에서 오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a)가 시각적 감각자극으로부터 오는 희열이라면, b)는 기호로서의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절하면서, 그것을 발화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로부터 오는 감각적 희열로 설명할 수 있다. a)에서는 그 시각적 희열의 경험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b)에서는 그 청각적 희열을 “생생한 흥분과 충격”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적·청작적 희열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현전성(現前性)에 대한 감각적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체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성의 충일한 ‘빛’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의 마술적인 한국어 청각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전율 혹은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렁이는 지등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론적 자기확인과 한국어 음운을 발화/발음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청각적 언어의 현전의 충격 때문이다. 대상과 나의 틈 혹은 간격이 일소되고, 거기에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실성이 마술적으로 감각/지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충일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의 경험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남성에게는 빛이 희미해져 가면서 어둠이 짙어지고, 여성에게는 언어의 청각적 발화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전하는 사건이 거듭 벌어진다. 우선 남성의 경우. 10여 년을 살던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청년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도계 독일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청력을 상실한 것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대신 소통을 위해 말하는 상대의 입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해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읽히게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말하기-듣기 기능의 장애를 ‘시각’을 통해서 보충하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자신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결혼하고 싶다라고 여성에게 말한다.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남성이 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세계의 의미체계나 상징체계로부터의 추방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니, 이제 당신은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에 격분한 여성이 남성을 폭행하고 그들은 돌연한 결별을 맞게 된다. 시력=빛의 잠재적 상실이 부조리와 폭력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존재상실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였던 요아힘 그룬델과의 추억 역시 남성에게 또다른 명백한 상처로 남게 된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운명에 처한 친구는 소설을 읽어보면 철학적 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파트너로서의 욕망도 품고 있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남성에게 너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이라고 말하면서, 남성의 잠재적 미래의 불모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날카롭게 충격한다. 동성과 이성을 막론하고, 그가 사랑한다고 느꼈던 두 대상으로부터의 추방과 이별은 이렇게 ‘빛의 상실’이라는 진행형의 감각적 쇠퇴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에게 ‘말’로 상징되는 언어의 청각적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거기에는 두 개의 언어적 트라우마 체험이 개입된다. 최초의 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을 임신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티프스에 결렸고, 그래서 낙태를 결심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출산했다. 이 체험을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넌 못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이때 고모들, 외사촌들, 이웃집 여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이 말들은 언어가 ‘세계’로 들어가는 친밀한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죽음의 위협 혹은 상징적 거세의 위협으로 화자에게는 인식된다. 두 번째 계기는 이혼과 함께 여성에게 난사되었던 전 남편의 거친 폭력의 언어들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또 한 번의 존재론적 상실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62쪽).”라는 절규 이후의 여성의 실어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빛의 상실’과 ‘말=소리의 상실’이라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두 남녀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의 희랍어 강의를 진행하는 남성은 상실된 시력 탓에 희랍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어렵게 문자를 쓴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실어증의 여자는 그 낯선 문자를 노트에 적으면서, 기꺼이 한국어라는 언어공동체의 외부로, 어쩌면 존재론적 외부로 자기를 부유하는 상태로 위치시키는 데서 비로소 안심한다. 이 두 남녀 주인공들에게 희랍어는 다만 묵독(默讀)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매개로 한 밀도높은 대화=소통=교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와도 같아서 미끄러지고 빗나가는 상황만 연출할 뿐, 존재론적 의미로 정착되거나 그들의 관계를 결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두 존재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게 되고, 여자가 말 대신 안경이 깨어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상실되었던 흔적 없이 지워질 한국어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일상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나 문화적 유물과도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희랍어의 언어 체계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존재론적 자기회복과 기적 같은 마주침을 묘사하고 있다. 침묵과 결여와 상실이 거꾸로 회복과 구원과 만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어적 질문을 이 소설은 사금파리처럼 일순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그 빛을 숨기는 시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서 읽기보다는 혀와 성대를 간신히 열어 느리게 낭독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된다. 어둠이나 침묵 속에는 과연 이데아가 없는가.
이 글은 조경란의 단편소설 「검은 개 흰 말」(『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24), 「그들」(『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4) 및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 2013),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문학과지성사, 2018), 『가정 사정』(문학동네, 2022), 장편소설 『복어』(문학동네, 2010),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문학동네, 2024) 등을 다룬다. 이하 소설을 인용할 시 본문에 쪽수만 밝힌다. 1. 나의 등을 향해 걸어가기 조경란 작가는 "좋은 제목은 독자에게 문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1)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궁금하게 만드는 그의 소설 제목 하나를 들여다보는 일로 글을 시작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의 소설집 『가정 사정』에 수록된 단편의 제목 「한방향 걷기」를 보자. 이 제목은 낯설지 않다. 터미널 표지판 또는 길가의 현수막에서 익히 보아왔던 문구이기 때문이다. 보행자들의 발길이 서로 겹치지 않도록 돕는 안내문은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도 "문화재청에서 나무에 달아놓은"(255쪽) 푯말에 쓰인 말로 등장한다. "한방향 걷기"는 해당 소설의 본문에서 유일하게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어 있어 형식 측면에서도 표지판 역할을 한다. 걸어온 방향 그대로 걸어가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다른 방향은 기웃대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 같기도 한 이 구절을 읽으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한방향'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걷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단 이래 이십구 년 동안 꾸준히 소설을 써온 조경란의 작품세계는 다채롭고 방대하여 이를 한 가지 특징으로 일괄하는 것은 오히려 그 세계를 축소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하나의 공통점을 꼽아본다면,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웅크리고 쪼그라들어 아주 납작해진 공처럼 보일 때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걷는다. 그리고 걷기는 조경란이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공들여 묘사하는 행위다. 조경란의 소설 속에서 인물이 걷는 장면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이 나는 소설들만 몇 가지 꼽아보아도 다음과 같이 많다. 조경란의 첫 장편소설 『식빵 굽는 시간』의 결미에서 여진은 사람들은 모두 "지도라곤 없는 자신만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160쪽)는 것을 깨닫고는 창가에서 등을 돌려 식빵을 만들기 위해 주방으로 걸어간다. 두 번째 장편 『가족의 기원』 또한 정원이 "지도도, 아무도 없는 길 저쪽으로" "트렁크"를 쥐고 "서툴게 걸음을 옮"(333쪽)기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이는 정원을 가두어왔던 "세계로부터의 탈주"2)로 비친다. 「양파 던지기」(『가정 사정』)의 초점 화자인 원진은 생각이 많아질 때면 산에 올라 양파를 던지던 세입자 기중구가 떠난 후 그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집을 나선다. "그는 양파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걸었다. 꽃도 아닌 것을, 어쩌면 마음만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115쪽) 이 소설 역시 인물의 걷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네 번째 장편소설 『복어』 또한 "그녀는 머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를 향해 걸었다"(346쪽)라는 문장으로 끝이 난다. 아버지의 삶을 추모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성냥의 시대」(『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53쪽) 이 단편이 소설집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경란이 소설집 전체를 인물이 걷는 장면으로 끝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처럼 조경란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가지각색의 걷기는 물리적인 행위이자 실질적인 운동이면서 동시에 주저앉은 곳에서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띤다. "매일 10분씩이라도 글을 쓴다면 삶이 적어도 1킬로미터쯤은 나아간 거라고"3)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조경란의 에세이를 참조하면, 걷기는 쓰기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욱 궁금해진다. 단일한 방향으로 걸으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소설가 이승우는 과학이 발달하기 전, 옛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4) 생각했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한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 되는 이 세계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등 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자가 된다고 한다. 이승우는 한 번 더 생각이 도약하게끔 이끈다. 등 뒤에 있는 사람보다 그 등을 가진 사람이 출발점에서 더욱 먼 사람이 아닐까, 하고 묻는다. 그러니까 한방향으로 쉬지 않고 지구를 다 걸어서야 만날 수 있는 가장 먼 사람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쩐지 마주보기 두려워서 사는 내내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이 둥근 지구상에서 종내에는 퉁, 부딪히게 될 굽은 등.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낯설기만 한 캄캄한 뒷면,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게 느껴지는 '나'에게로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일 테다. 조경란의 소설에는 "세상과 잘 사귀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유기되어 있는"5)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지나치게 내향적"(「양파 던지기」, 85쪽)이고 소심하여 타인에게 환영받기는커녕 번번이 소외되는 이들은 가족에게마저 거부당하거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통에도 실패한 채 고독하게 남겨져 있을 때가 많다. 이들은 외로운 자신을 돌보는 방법조차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자기와도 불화한다. 하지만 조경란은 그런 인물들이 마음의 장벽을 걸어 잠그고 자기 안으로 침잠해 질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작가 자신과도 닮아 있는 인물들이 자기 안을 헤집고 허물어 내면을 넓히고서 '나'의 실존을 찾기 위해 걸음을 떼는 이야기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자기를 알아가는 일에 실패할 때도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때도 계속해서 이들이 '나'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어떻게든 그들 안의 자력을 발견해주려 노력해왔다. 조경란의 최근 소설들은 주관에 대한 집요한 탐구가 여러 주관이 병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일과 맞닿아 있음을 밝히려 한다. 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이 보편의 세계에서 등 돌리는 일이 아님을 헤아리고, 안으로 파고드는 응시가 평균으로 동일시될 것을 강요하는 외압에서 벗어나 특수한 삶들이 공존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임을 이해할 때, 조경란의 소설은 더욱 와닿게 된다. '나'라는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해보기 위해서 지구 한 바퀴를 다 걸어 '나'에게 다다르는 일은 언뜻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선 저마다의 '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걸음마다 여러 '나'를 마주치면서 처음에 품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들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둔하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행로는 복수의 '나'가 병존하는 세계의 이치를 일찍이 이해한 자가 설정한 지름길일지도 모른다. 2. 원한의 역학 단순한 움직임으로 보이는 걷기는 의외로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일부터가 고역이다. 그러므로 걷기 시작했다는 것,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회복의 단초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아지기 위한 첫걸음이 부정적인 감정으로 비치는 '원한'에서 시작되었다면 어떤가? 독특한 발단을 꾀하고 있는 2024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중심인물인 종소와 영주가 만나게 된 계기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음침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종소가 품은 복수심으로 인해 서로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겸임교수였던 종소는 자기 제자를 뽑으려는 최교수에 의해 임용 과정에서 부당하게 제외되어 팔 년간 담당해온 과목을 더는 가르치지 못하게 된다. 종소는 "자신은 수업을 더 할 권리가 있다"(41쪽)고 자기 몫을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한 번 항의해보지도 못하고 자신이 알아온 "유일한 삶"(24쪽)을 송두리째 빼앗긴다. 이후 그는 후배의 출판사 일을 돕지만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지자 해고당한다. 군산, 부산, 광주와 같이 먼 지역을 전전하며 자기 전공과 무관한 강의도 가리지 않고 떠맡아 생계를 이어나가지만, 당장 다음 학기를 보장할 수 없는 불안정한 강사 생활에 불안해한다. 고용의 불안정성 외에도 그를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노인 우울증을 진단받은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들이 늘 공기처럼"(12쪽)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종소는 양파를 물에 담그다가도 불안해져 어머니가 닫은 방문을 열어두고서 그 문이 다시 닫힐까 마음 졸인다. 일상생활에서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려야 하는 그는 불안 없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이 있"(13쪽)는 것일까 궁금해하기도 한다. 종소가 하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어떤 결함이 있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거라고 추측하며 자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소는 문득 "내가 이선생을 선택하지 않은 것뿐"(같은 쪽)이라고 통보함으로써 선택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종소의 삶에 매우 중요한 사건을 단순히 선택의 문제로 축소해버렸던 최교수를 떠올린다. 매사 두려움을 느끼며 위축되고 경직되었던 종소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사람"(같은 쪽)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상의 가장 유명한 시 「오감도-시 제1호」에 등장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가 분간되지 않았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동일 인물인 것처럼, 두려움에 떠는 이는 위협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공포감에 제압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위하는 자가 되려는 기획, 그것으로 종소는 미래에 대한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자신에게 다가올 최악의 일에만 골몰하던 종소가 부도덕한 일이나마 계획하고 실행하려 하는 것이다. 최교수를 두렵게 만들기 위해 "그를 찾아가야겠다고"(14쪽) 다짐할 때, 미래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볼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따라서 이때 원한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이를 살려두는 동력이 된다. 무엇이라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해보자면, 「그들」은 자기를 살려두는 일에 기여하는 감정적 자원인 '원한'으로 우연한 만남을 발생시킨 후, 그 만남을 통해 인물들이 원망하는 마음에 응축되었던 에너지를 차츰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때 원한으로 일어선 인물들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살 만한 삶을 꾸려나가는 사람으로 바뀌어나간다. 어찌됐든 그 만남 자체는 종소의 복수심에서 시작한다. 그는 최교수의 부인인 영주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악의를 품고 일부러 카페에 찾아왔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종소가 카페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교수가 영주에게 위험해 보이는 그를 내보낼 것을 권유할 때, 종소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된다. 그러나 원한으로 시작된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의도하지 않은 굴절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과는 다른, 직관적인 알아차림에서 발생한다. 종소는 멀리서 보면 "우는 사람처럼"(20쪽) 보이는 영주의 슬픔을 알아챈다. 영주 역시 종소가 누군가를 나름의 방식으로 괴롭히겠다는 일념으로 카페에 오지만, 막상 자신의 두 손이 "무기라도 되는 듯 주머니 깊이 찔러넣"(30쪽)고서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삼간다는 것을 포착한다. 영주는 그가 자신이 당한 부적절한 해고에 소극적이나마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면서 짧게나마 고요와 평온을 누리다가 가는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영주는 최교수의 작은 손이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아버지의 "크고 두꺼운 손"(21쪽)에 비해 무섭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이다. 영주가 안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는 점은 그녀가 언제나 안전을 위협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교수의 손과 종소의 손은 영주의 불안을 낮추어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안정감을 선사하는 방식에서는 대조된다. 최교수의 작은 손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공격력이 약하리라고 추측되기에 영주를 덜 두렵게 한다. 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신체적 외양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기를 비롯한 누군가를 해치게 될까 두려워 손을 주머니 속에 가둬두는 종소의 습관은 그가 선택한 행동이며, 그의 성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종소라는 인물에 대한 신뢰감으로 이어진다. 종소의 습관은 영주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종소가 영주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생각이 기울어 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영주는 실제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구름과 전선줄이 겹친 듯 보이는 풍경을 "깃털 구름이 전선줄에 걸려 있"(23쪽)는 모양으로 읽어내는 사람이다. 전선줄을 "잘못 그어놓은"(같은 쪽) 금으로 인식하는 영주는 그것을 통해 남편과 아들의 편에 좀처럼 설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 밖에 놓인 자기 처지를 환기하기도 하지만, "지켜온 생활이 모두 무너져버릴"(16쪽) 것만 같은 불안을 단번에 종식할 방법으로서의 죽음 또한 은연중에 떠올린다. 종소도 강의실 창문 커튼을 묶어둔 "케이블 줄"을 보면서 그것이 자기 죽음을 돕는 "다른 용도"(25쪽)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최악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생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리라는 생각에 마음 졸이며 살아온 종소와 영주는 죽음에 갈증을 느낀다. 자기 상처는 외면한 채 삶을 견뎌온 두 사람이 서로의 아픔만큼은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나' 아닌 대상이 망쳐지는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잠귀가 밝은 어머니가 도어 록 소리에 깰까 싶어 열쇠를 지니고 다닌다. 영주는 카페 문을 닫을 때마다 야외 테이블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쇠줄로 동여매는 일, 즉 불특정 다수를 의심하며 자기 것을 지켜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 카페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상추와 고추 모종을 심는다. 이러한 사정을 살피면, 영주 또한 종소처럼 원한을 지닌 인물이다. 엄마로서 자격 미달이라고 자기를 몰아세워 천천히 죽여가고 있었던 영주는 종소의 찢어진 재킷 주머니를 꿰매어주면서 응어리진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때 영주는 미움의 칼날이 시종 자기를 겨누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고, 오랫동안 벼려온 날이 자기를 찌르는 대신 바늘이 되어 다른 사람의 찢긴 상처를 꿰매어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지금 안 꿰매면 더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될 거예요"(29쪽)라는 영주의 충고는 외투 주머니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슬픔이 줄줄 새는 다친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들린다. 안에 든 내용물 전부를 들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며 들고 다니던 에코백에서 영주가 '반짇고리'를 꺼내고 이를 종소가 지켜보는 것 또한 의미가 있다. 들키고 싶었지만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불안을 알아채주는 상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를 살려놓기 위해 동아줄처럼 붙들어야 했던 원한은 점차 희미해진다. 살려만 놓자는 생각이 살 만한 삶을 꾸려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한 단계 발전된 형태의 욕구로 나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종소는 팔 년간 재직했던 학교를 떠나며 건물의 수도꼭지를 모두 틀어놓았던 것처럼, 자신의 슬픔보다 더 많은 양의 무엇을 대신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불행에 대처해왔던 인물이다. 자기감정을 마주하기 두려워 다른 큰 소리를 냄으로써 내면의 소리를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감추고, 시간이 흘러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종소는 어머니가 자주 소리 내서 운다는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자신이 슬픈 상황에 처해 있음을, 그래서 자신도 울고 싶은 심정임을 영주에게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처음 고백한다. 종소는 더는 최교수를 기다리지 않게 된다. 대신 다른 것을 기다리게 된다. 누군가를 두렵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깊이 연결되면서 사그라든 것이다. 결국 종소는 최교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기다렸으면서도 그것이 더 미뤄졌으면 하고 바란다. 원망의 마음, 최교수를 두렵게 하려는 마음은 비슷한 불안을 지닌 영주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자리를 잡자 자연스레 내쫓겨버린다. 영주 역시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 아들 상현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 부족한 엄마 밑에서 자란 아들 주변의 또래 아이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하리라는 공포에서 걸어나와 자기와 닮은 불안을 지닌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주면서, 자신이 작은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임을 배우게 된다. 3. 필연적인 불안 각자의 불안은 본디 특수성이 있지만, '여성적 불안'이라고 불러봄직한 영주의 불안은 종소의 것과는 구별된다. 영주는 눌러왔던 마음이 솟구칠 때, 어디에도 말할 수 없었던 자기 이야기를 적어 '선생님'에게 문자로 전송한다. 선생님의 번호로 "알았어"(16쪽)라는 세 글자의 답장이 왔을 때, 영주는 그것이 선생님의 말투가 아님을 알아차리고 번호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이후 선생님인 체하며 답장을 보내온 상대가 자신의 카페를 찾아와 자기를 위협하리라고 예상하며 영주는 두려움에 떤다. 영주의 불길한 상상 속에서 그는 해치기 쉬운 "여자"(17쪽)로 대상화되어 있다. 이러한 비약적 사고가 과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사소한 계기로 스토킹 당하거나 죽임당하는 여성이 실제로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다친 이웃을 대신해 가게 일을 돕다가 손님에게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22쪽)라는 욕설을 듣는 「일러두기」의 미용, 「양파 던지기」에서 "소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기"에 상대적으로 "안전한"(95쪽)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원진의 아내, 이웃에게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집에 남자도 없으면서"(245쪽)와 같이 사건과 무관한 비하의 말을 듣는 「한방향 걷기」의 은제 이모, 「봉천동의 유령」(『일요일의 철학』)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시끄럽다며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하는 남자 세입자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떠는 엄마로 대변되는 여성 인물6)은 모두 불안을 느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은제 이모가 베란다에 흙물이 드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어딜 가도 완전히 안전한 데가 없"(「한방향 걷기」, 233쪽)다고 토로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십일층 남자가 화분에 물을 주느라 은제 이모의 베란다를 더럽히는 일은 언뜻 안전과 무관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사는 여성의 입장에서 남자 이웃에게 항의하는 일은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일로 여겨진다.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은 매우 비논리적인 망상처럼 보이지만 현실의 삶을 참조하면 적절한 추론에 가깝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조차 범죄의 위협과 연결되어 있는 여성들의 처지는 불안 또한 젠더화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최교수를 두렵게 하기 위해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가는 종소, 그 소극적인 방식의 앙갚음조차 종소의 성별이 바뀌면 불가능하리라고 씁쓸히 예측하게 된다. 쉽게 일터에서 내쳐지는, 그러나 누군가를 짧은 시간이나마 두렵게 할 수는 있는 종소의 그 불안정한 위치조차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친다는 점은 성차별의 심각성을 환기한다. 조경란이 지속해온 여성 폭력에 대한 섬세한 고찰은 젠더화된 불안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집이나 직장, 일터의 화장실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조차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 성폭력의 위험이 상존하는 공포스러운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음을 밝혀주었던 조경란은 범죄에 노출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어 빈번히 경험해야만 하는 여성적 불안과, 그로 인해 여성들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어려움까지 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강제로 날 선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불안이 유별난 기질에 기반한 왜곡된 감정이 아님을 소설은 확인하게 한다.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가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는 점은 불안이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한다"7)는 사실을 환기한다. 불안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를 고립시키고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게 한다. 불안 요소들을 생각하느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만든다.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삶을 도모하기보다 모든 불행을 잘 모면하여 생존해가는 일에 연연하게 한다. 「그들」의 인물들은 불안이 추동하던 도망침을 멈추고 그렇게 도망치기만 했던 자기를 마주하고 돌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게 된다. 서로에게 들키고 서로를 알아채주면서 종소와 영주는 도저히 삶을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불행한 미래에의 예감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48쪽)다는 다행한 현재의 확인으로 바꾸어낸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안정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과도하게 예민한 성정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 해고되고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경란의 소설은 불안함을 느끼는 개개인을 탓하지 않고 그 불안을 창출하고 체득하게 만드는 불의한 사회를 조명하게 한다. 조경란은 안전조치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누구도 해칠 의도가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눌리어 죽어가야 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한 흔적을 소설 곳곳에 녹여내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하는 기이한 사회구조를 지적한다. 권희철은 소설 「그들」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한다는 점, 상현이 가한 학교폭력이 참사를 흉내내는 '압사 놀이'의 형태를 띤다는 점, 영주가 압박당하는 공포에 대해서 자주 거론한다는 점 등을 분석하여 '그들'이라는 지칭이 트라우마 이후를 치열하게 살아내는 이태원 참사 생존자들을 아우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8) 이러한 해석을 참조할 때, 소설 「그들」은 종소와 영주가 지닌 개별적인 아픔뿐 아니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정부와 그로 인한 치안의 부재가 사람들을 강제로 불안에 취약해지도록 한다는 점까지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재해에 인재가 더해져서 일어나는 참사는 그의 다른 소설 「검은 개 흰 말」에서도 묘사된다.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도림천이 범람하고 "인근 반지하 빌라가 침수돼 세 이웃이 사망"했다는 뉴스(106쪽)가 보도되는 장면은 2022년 집중호우로 사망한 신림동의 세 모녀를 떠올리게 한다. "졸업여행을 가던 길에 생을 마치게 될 수도 있다"(108쪽)고 '나'(서양지)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가정하는 대목은 세월호 참사를 상기시킨다. "수해 피해의 경험들"로 인해서 '나'에게 여름은 "일년 중 가장 긴장하는 시기"(96쪽)로 감각되며, '나'는 "평범한 순간에도"(108쪽) 자신 혹은 타자들의 죽음을 걱정하며 초조해한다. 구조적 재난이 빈번하게 일어남에도 안전관리에는 소홀한 한국사회가 개개인의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조경란의 소설은 끊임없이 드러낸다. 이러한 대목들은 조경란의 소설이 '나'에 천착하고 있음에도 결코 개인의 단위로 이야기를 축소하거나 '나'라는 한 사람의 서사로만 유폐되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다. 4. 그저 살아내는 삶에서 살리는 삶으로 조경란의 최근 소설에는 이처럼 복수심에서 걷기 시작했더라도 자기를 살리는 일로 반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어, 방치해왔던 자기의 굽은 등을 안아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의 이야기가 자주 발견된다. 「일러두기」의 중심 인물인 미용은 마흔아홉 살로 공교롭게도 「그들」의 종소와 같은 나이이다. 복사집 '대학사'를 운영하는 재서는 인쇄를 하러 온 손님인 미용의 글을 읽게 되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자식을 바란 적 없었다는 이유로 자식을 정신적, 물리적으로 학대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미용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살길이라는 판단하에 자기감정과 자기 존재를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19쪽) 소진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지금은 반찬가게 주인인 미용은 특성화고등학교로 배달을 나갔다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기절한다. 구강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팔을 다친 재서를 대신하여 인쇄소 일을 돕다가 욕설까지 듣게 된 미용은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22~23쪽)라며, 과거 자신에게 부당한 폭력을 행사했던 교련 선생님을 찾겠다는 결심을 한다. 1987년, 미용은 당시 열일곱 살이었고 교련 수업을 맡은 선생은 지금 미용의 나이였다. 그는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42쪽)라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수업시간에 여학생의 뺨을 내리치기도 하는 사람이었고, 겁을 먹은 미용은 붕대 감기를 연습하는 실습 시간에 실수를 한다. 그러자 교련 선생은 여럿이 돌아가면서 맡았던 환자 역할을 미용이 홀로 감당하게 만든다. 수업시간 내내 미용은 업혔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또다시 일으켜 세워졌다가 내동댕이쳐진다. 경찰청장의 딸로 추정되는, 선생님들도 눈치를 보는 여학생이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45쪽) 그만하라고 선생을 만류하고 나서야 이 가혹한 형벌은 끝이 난다. 미용은 아주 오랜 시간 막 대해도 되는 신체로 길들어왔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18쪽)는 내용이 담긴 미용의 글을 보았던 재서는 그녀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독자 또한 재서의 시선으로 미용을 바라보고 미용에 대해 추측하면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선생님을 찾아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들」의 종소가 그랬듯,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따지고 싶은 원망감은 불안에 떨며 자기방어에만 힘써왔던 웅크린 존재를 일으켜세워 어딘가로 걸어나가게 만든다. 부정적일지언정 강력한 원한의 감정은 멈춰 있던 내면의 시계를 움직인다. 하지만 조경란의 소설은 언제나 그 시작점에서 훨씬 더 먼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재서는 미용이 불행했던 자기 삶을 보상받기 위해 선생을 찾았고, 불만족스러운 삶을 선사한 부모는 이미 죽어버렸으니 어찌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으리라고 상상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재서는 미용을 찾아가지만, 미용은 짐작과 달리 밝은 모습으로 지내고 있다. 미용은 자신이 쓴 글을 재서에게 보여주면서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게 교련 시간에 당했던 폭력이 아니라 교련 시간 시작 전에 마주한, 창밖의 복사나무에서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46쪽)던 아름답고도 평화로운 광경이라고 이야기한다. 선생님에 관해 쓰려고 했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는 미용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재서는 미용이 선생님을 찾아서 하려던 일이 그러한 잔혹한 시간을 겪고도 이렇게 또렷이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47쪽) 있음을, 그 단단한 생명력이 미용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일임을 이해한다. 조경란은 "평생을 움츠리고 산 아이"가 "자라서 펼치는 미니멀한 복수 서사"를 쓰려고 했으나 미용이 그것을 거부했다고 전한 바 있다.9) 조경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처음엔 원한 때문에 걷기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 걸음의 끝에 세워두었던 원망의 대상을 지나쳐 더 멀리에 있는, 숱한 폭력과 불의를 견디면서 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은 '나'에게로 꿋꿋하게 나아가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처음 작가로 하여금 그 소설을 쓰도록 이끈 직감, 사고, 지식 등등"10)을 의미하는 소설의 중심부가 바뀐다는 것은 작가와 독자가 각각 쓰기와 읽기를 통해 그 감춰진 중심부이자 진짜 주제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흥미로운 유동성과 창조성을 생각하게 한다. 인물의 걸음이 그려내는 궤적은 작가가 설정해두었던 최단거리가 아니라 인물이 경로를 이탈하여 내달린, 그리하여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으로 만들어낸, 생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방향 걷기」에서, 은제 이모가 어렵게 가꾸어온 세계에 흙물을 끼얹는 십일층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흔아홉의 미석이 고안하는 방식 역시 동갑인 미용의 반격과 유사하다. 그는 민폐를 끼치는 당사자가 있는 십일층이 아니라 십이층으로 올라가서 몬스테라 화분을 문 앞에 두고 올 계획을 세운다. 그것을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고 물을 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하려는 것이다. 십일층 남자가 아랫집의 입장이 되어 은제 이모가 경험하는 불편함과 불쾌를 고스란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이므로 그것은 "악의"(256쪽)에 가깝다. 하지만 이는 원망의 감정을 누군가를 해치거나 죽이는 것이 아닌 무언가를 살려내는 일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다. 미석은 십이층에 선물한 몬스테라가 잘 자라나기를, 강력한 생기를 지니고서 아래층으로 뻗어가기를 바라는 것으로 앙갚음한다. 게다가 그것은 "자신을 안에서 마냥 걸어 잠그고 있"(247쪽)던 미석이 처음으로 위했던 타자, 은제 이모가 자기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한 대리 복수다. 조경란의 소설에서 중심인물이 지닌 원한은 결국에는 살리고 살아내는 일로 나아간다. 이는 더 멀리 내다보면서 더욱 나은 곳으로 걸어가는 일이자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나아지게 하는 아름다운 대안이 된다. 5. 취약한 사람들의 걷기 연합, 아니 살기 연합 서로를 살리고 살고 싶게끔 만드는 길을 내는 조경란의 인물들은 하잘것없다고 여겨져 사회에서 배제되었음에도 그러한 서로를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함을 오래 들여다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을 갖추지 못했거나 어떤 능력을 연마하지 못해서 또는 어떤 덕목이 부족해서 얻게 된 나약함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대의 약함을 나무라지 않고 그 아픔과 외로움을 오롯이 보듬는다. 단, 조경란 소설의 차별점은 그와 같은 돌봄의 공동체가 "개개인의 선함에 호소되는 관계의 합이라기보다 각자의 약함이나 부족함을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운 연합"11)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의 소설은 인물과 독자에게 연민이나 이타적인 마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기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 곧 '나'와 같은 연약한 '나'들을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둔다. "무엇을 하고 어디에 있든 자격 미달"(「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72쪽)이라고 느끼던 인물들이 각자의 자기를 찾으러 떠날 때, 그것은 홀로 감내해야 하는 여정이지만 잠깐씩 서로의 동행이 되어준다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서로 들키고 마주치고 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아가는 '나'들이 서로의 보폭이 다르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다채로운 속도에 안도하면서, 모르는 걸음걸이를 따라 배우기도 하면서 걸어간다. 이제는 이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다는 소설12)을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작가처럼, 그의 소설을 함께 걸어내는 독자가 되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굽은 등, 그 볼품없지만 고유한 이면을 껴안아주기 위해 나선 길에 마주치는 숱한 등을 토닥이며 우리는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1) 조경란, 「제목의 힘」, 『세계일보』, 2024. 12. 13. 2) 염승숙, 「가족의 '양막'을 찢어내고 홀로서기」,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해설, 357쪽. 3) 조경란, 「날마다 10분씩 볼펜」, 『소설가의 사물』, 마음산책, 2018, 80~81쪽. 4)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17쪽. 5) 이광호, 「죽음을 견디는 메타포」, 『불란서 안경원』 해설, 문학동네, 2006 (개정판), 342쪽. 6) 이에 대해서는 류진아의 글 「공간 인식과 여성에 대한 폭력-하성란 조경란의 소설을 중심으로」(『한국문학이론과 비평』 85집, 2019)를 참조할 수 있다. 7) 한병철, 『불안사회』, 최지수 옮김, 다산북스, 2024, 19쪽. 8) 권희철, 「타임아웃, 조경란, 그들 리뷰」,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60~61쪽. 9) 조경란 수상 소감, 「오늘은 여기까지만」, 『2024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52쪽. 10)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2, 149쪽. 11) 김미정, 「리무버블 스티커의 마음」, 『가정 사정』 해설, 304쪽. 12) "예전에는 소설이 어떤 이상(理想)이었다면 이제 소설은 생활(生活)이 되었다." (조경란, 작가의 말, 『가정 사정』,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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