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자음과모음 2024년 여름호(제61호)
형식을 개척하는 형식 : 이지아,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
1.
『아기 늑대와 걸어가기』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운명과 자두와 힘」)이 있다. 형식을 가져오되 그 형식의 기존 관념을 깨려고 한다는 시인의 한 인터뷰 기사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기존의 (서정)시 형식과는 많이 다른, 아주 오래된, 잠들어 있는 어떤 시의 형식, 그러니까 과거라는 시간에 잠재되어 있는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을 깨우려고 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깨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우리다. 시인은 잠들어 있는 우리를 깨우기 위해, 그것으로서 '시'를 가호하기 위해 시의 본질에 천착한다.
"레고 놀이를 만들 때보다, 만들고 나서, 해체할 때가 제일 좋았다"는(「투영하는 물질들」) 시인은 단단하게, 혹은 답답하게 굳어져 온 시의 형식을 해체하고 분해하며 그 본질 찾기에 매진한다. 본질을 잊은 건축은 언젠가 반드시 내려앉는다. '시'라는 장르의 소멸을 잠자코 지켜볼 수 없는 시인은 그러므로 시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쓴다. 「운명과 자두와 힘」은 서사시의 형식으로 그 본질 찾기 여정에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어떤 집안을 케어하고 그들이 원하는 심부름이나 애완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는 하녀로서 크로스베너 집안의 제일 막내인 '폴'을 돌본다. 폴은 "언제 기분이 나빠져서 폭발할지, 언제 울지, 언제 소리를 지를지 정말 예상하기 힘"든 네 살배기 떼쟁이 아이다. 하지만 '나'는 폴이 울면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화자를 '시인'이라고 해보자. 시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선사하는 것은 세상에 '시'밖에 없다. 남자와 여자의 육체적 결합으로 여자의 몸에 아이가 배고, 출산하는 것처럼 시인이 세계를 만날 때 세계의 것이 그 몸에 육화되고, 시가 탄생한다. 곧 시인과 시의 관계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 다름없다. 그러므로 시가 아프면 시인도 아프다. 시가, 시가 되기 위해서 기표는 기의를 필요로 하고, 기의는 기표를 필요로 한다. 시가 아프다는 것, 그러니까 '아픈 시'는 그 둘이 동등하지 못한, 한쪽으로의 편위를 가진 시다. 인간의 정서나 세계의 이미지는 가늠할 수 없이 쏟아질 "윤곽의 폭포들"이지만 그것을 감당할 오늘날의 시의 형식은 가늠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어떤 것들은 "쏟아지지 못"할 때가 많다(「생강이 된다는 것」). 그것들은 "자주 어딘가로 떠나자고 울어 재"끼는 폴처럼 대개 원초적이고, 예측 불허한 정서 혹은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단단하게 굳어진 (서정)시의 형식이 담아내지 못할 그 '나머지' 정서들, 어쩌면 소외되었을 이 정서들은 "아직 기저귀도 떼지 않아, 뭘 쌌는지" 모를 "뭉툭한 엉덩이" 같은 미지의 감각이다. 시인은 이 방대한 감각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무리하게 그 형식에 욱여넣을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러면 "폴이 잠을 못 잔다. 폴이 울면 모두가 깨어나고 모두가 피곤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나의 책임으로 돌린다. 모두가 나를 공격한다". 그렇다면 '나'는 폴이 원하는 열매를 가져다주면 된다. 곧 시인은 쏟아지고 싶지만 쏟아지지 못하는, '윤곽의 폭포들'이 원하는 시의 형식을 가져오면 된다. 화자는 결국 폴을 위한 "마법의 열매"를 획득하고, 이 시는 다 쓰여진 것만으로 그 과제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열매를 찾는, 곧 내용에 걸맞는 운명적인 형식을 찾는 이 여정은 바로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인과 함께 서사시의 형식을 찾아가는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미 서사시의 형식과 당면하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서사시를 발견한 것이다.
2.
중요한 점은 잠재된 형식의 기침이 다만 부활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생경한 형식을 깨우지만 그것의 기존 관념을 답습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서사시는 신이나 영웅을 중심으로 하여 쓰이지만, 그의 시는 비주류의 세계를 넘나든다. 앞서 살펴본 시의 화자는 물론 영웅이 아니라 '하녀'였다.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인 또 다른 시편 「조약돌 소극장」의 화자도 물론 주류에서 버려진, 한 소극장의 무대 바닥을 닦는 서른 살의 청소부이다. 그러나 "우리 극장은 딱히 어떤 소재나 주제를 따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소재가 아니다. 비주류의 세계가 서사시라는 거대한 형식과 부딪고 갈등하면서 탄생한, 고유한 혹은 고귀한 서사가 귀중한 것이다. 서사시의 형식으로만 추출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그러니까 형식의 지평이 넓어지면 '시'라는 장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진다. 시인의 다른 세계를 견인하는 힘은 다른 형식을 차용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극시의 형식으로 쓰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는 서사시의 형식과는 또 다른, 낯설고 기이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시의 지평을 넓혀간다.
1. 목화 인간 1 (독백형식)
텍스트,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내 식탁 위의 바게트, 바게트 연구, 왜 오늘의 아침 식사는 나무보다 바게트에 더 관심이 가는지
행여, 텍스트의 구조와 뼈대, 얼마든지 비극이 될 수 있다는 생각
(…)
나는 감정이 변할 때마다, 몸에서 목화꽃이 피어나 내가 목화꽃을 얼마 안 가지고 있는 건
감정이 몇 개 안 된다는 것뿐.
감정의 피부병이라고 하지. 의학에선
여기저기에서 나는 추방되었어.
계속 쫓겨 다녔지. 전염병처럼.
하지만 여기선 나를
목화인간이라고 불러……
이곳은 내가 사는 육지의 남쪽 끝. 버려진 항구 도시야. 정부에서는 우리 도시를 관리하지 않아. 유령의 도시라나. 들어오면 모두 죽는다는 곳. 하지만 말이지.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정상이고 누구보다 평화주의자이며 배려심이 깊어.
-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과 극시」 부분
이 시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독백형식으로 등장하는 '목화인간'은 "감정의 피부병"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추방되었다. 하지만 "여기", 말하자면 '극시'라는 형식 안에서 그는 "목화인간"으로서 세계에 머무르고, 자기의 이야기를 발화한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시인은 '동생은소금구이, 동생은생선구이, 블루문, 얼룩소, 컵, 북극곰 스너글러'와 같이 현실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시인의 고유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그들은 각자 나름의 고유한 이야기를 가지고 발화한다. 극시의 형식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유일한 무대이다.
응당 그러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는 물론 시인으로부터 파생되었다. 따라서 그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기실 인간의 내면을 성심껏 살피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극시는 어렴풋한 시인의 내면의 목소리를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들어주는 형식이다. 그런 점에서 그 형식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인간의 내면을 일부 반영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피어나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의 목소리는 극시로 말미암아 미미하게나마 번역된다. 시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극시의 형식은 무엇보다 시의 본질에 가닿는다. 내가 이 시의 내용보다 형식에 집중한 이유는 번역 불가능한 혼합인격들의 이야기를 명백히 번역할 수 없거니와, 그들의 성질은 아무렴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곧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염려하고, 인간을 기다린다. 그것은 물론 시인의 가장 원초적인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극시는 상당히 희극이다.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든든하다. 그래도 내가 죽는 날까지는 시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서사시와 극시의 형식은 여전히 낯설지만, 그것은 '시'의 존속을 위해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시를 결박하고 있는 형식에 대한 편견을 허물어뜨리자. 당신이 정녕 시를 사랑한다면 그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기꺼이 고독한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비극이 희극이 되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추천 콘텐츠
깨진 조각이 비추는 것1) 박지일, 『물보라』 최하연, 『보헤미아 유리』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 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은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다.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것은 움직임을 포착한다. 밥을 먹기 위해 손을 움직이거나, 입을 오물거려 씹거나 삼키는 행위 없이, 그러니까 동작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존재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예컨대 「물보라」(15p)에서 시인에게 중요한 것은 "중단전은 하단전과 상단전 사이에 있다"는 것과 "접시는 벽과 문, 어둠과 빛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시인은 이 사실을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중요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모종의 대상에 대한 믿음은 믿지 않음에 다름 아니다. 그것이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믿음을 발명해내기 때문이다. 기실 불안하지 않으면 구태여 믿지 않아도 상관 없다. 쓴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듯 믿음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 없이 간다" 당신의 마음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이 믿음은 그러니까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곧 '나를 믿는다'는 말은 '나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너를 믿는다'는 말은 '너를 믿고 싶다'는 말이다. 하물며 '하고 싶다'는 소망은 "너는 네게 주도권이 없"(「물보라」,p.137)을 때 발생한다. 주도권 있는 자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소망하지 않는다. 영화 트로이에서 아킬레스가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신이 인간을 질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을 살기 때문이다. 삶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당신이 그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라면, 당신은 굳이 살고 싶지 않아도 된다. 굳이 죽고 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당신은 태어나고 싶을 때 태어나지 않았다. 즉 당신에게는 삶에 주도권이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음은 그 자체로 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물보라』의 깨진 조각으로부터 나는 살아 있음만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말은 "지긋지긋하게도 세상이 좋다"(「물보라」,p.17)는 말이었다. 느리다고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 나는 믿을 수 없다. 방향은 나를 바꾼다. 나의 쓰기와 저 배는 상관없이 간다. - 「물보라」(p.15) 부분 "느리게 쓰면 느리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게 나아가는 듯하고", "느리지 않다고 쓰면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느리지 않게 나아가는 듯한 시간"은 바로 우리가 그 삶의 주도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감각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과 믿지 않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의 '부딪침'. 그것이 물보라다. 물보라의 사전적 정의가 '물결이 바위 따위에 부딪쳐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이라면, 여기서 방점은 그러므로 자잘한 물방울이 아닌 '부딪쳐' '흩어지는' 데에 찍혀 있다. 흩어지는 것들은 참혹하게 아름답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은 흩어진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연애는 물보라를 즐긴다. 물보라 물보라. 키스는 섞이는 혀를 잊었다. 머릿속에서 키스는 절단한다 섞이는 혀를 잊은 본인을. 키스와 키스는 멀어지면서 비로소 키스가 된다. 너는 나와 혀를 섞는구나. 나와 멀어지기 위해서. - 「물보라」(25p) 전문 한편 물보라는 물보라를 일으키기도 한다. "연애"는 당신이라는 물보라와 나라는 물보라가 부딪히면서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을 당신의 삶과 나의 삶이 부딪히면서 또 다른 삶을 일으킨다. 키스를 하면 혀가 부딪치고, 나란히 걸으면 손이 부딪친다. 키스는 혀들이 굴곡되어 부딪치고 섞이면서 타액이 서로의 몸으로 흩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이 '부딪침'은 기억을 생성한다. 기억은 발생하는 동시에 '왜곡'된 것이고, 다른 기억들과 '섞이는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도, 키스도, 기억도 이 모든 게 다 물보라다. 따라서 연애란 물보라와 물보라가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일이다. 물보라 없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다. 물이 순환되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물을 썩게 만든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물보라는 산소를 공급하고 물을 순환시키며 정화한다. 물이 고여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살아 있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물보라를 일으켜야 한다. 박살나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질 하고 달음박질 해야 한다. 시인에게 발버둥질은 시 쓰기이다. 시인은 그가 쓴 시에 주도권이 없다. 이미지는 정해진 그곳이 아니라 사방으로 튀어야만 한다. 시란 깨지고 박살난 그 기록들이 얽히면서, 그것과 독자 각자의 기억이 설키면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미지의 사건이니까. 그러므로 시인은 자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 날의 기억들을 부수고 날짜를 쪼개는 이 시집의 부록은 특히 그것을 여실히 드러낸다. 너는 그를 사랑하고 그는 네게 미안하다. 사랑해서 미안할 수는 있지만 미안해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네가 그를 찾아 헤매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것이 이치다. 한데 왜 그는 계속하여 네 앞에 설까? 네가 그의 앞에 가서 설 때, 그는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그는 매번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한다. 네게 미안하기는 한 걸까? 너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엇이든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너는 그 말을 그 무엇에게도 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읽는다. 모처럼 네가 마음속에서 그를 지워 냈을 때 너는 네게 미안해한다. - 「11月4日」 전문 하지만 거기 너는 없다.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초원에 선 울타리만을 보여 주는 거울. 거울은 엄마를 닮았다. 너는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써 본다. 너는 거울로 도망한다. 거울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춘다. 양의 걸음으로 울타리를 향해 너는 걷는다. 양처럼 밥을 먹고 양처럼 뿔을 간다. 그리고 양은 울보다. 울음소리를 들은 거울이 양을 비춘다. 너는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염소가 울타리 안에서 바깥을 찾아 맴돈다. 염소는 울보다. 너는 염소에게 미안하고 양에게도 미안하다. 미안해서 눈물이 나고 마침 눈물이 나온 김에 울어 본다. 거울은 바깥과 안을 번갈아 비춘다.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 망할 놈의 거울 - 「11月4.3日」 전문 첫 번째 인용시는 아마도 아직 사랑하는 '너'를 매번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했던" '그'를 이제는 지워 낸 사람의 기록일 테다. 그리고 그 다음 인용시는 그 날의 풍경에 대한 감각의 재구성이다. "그를 지워 냈을 때" '너'가 "네게 미안"한 것은 '너'가 지워 낸 것이 '그'가 아니라 '그를 사랑한 너'이기 때문이다. '너'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 자신이었고, '너'는 그런 너의 모습을 지워서 "네게 미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너'와 "네게 미안"하고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너'를 상대하지 않는 '그'가 '너'와 다르지 않다면 '너'는 "너만 상대해 주지 않는 거울"이다. 그것은 "너를 찾아 사방을 비추"지만 "너를 거절하고 내치고 지우려고" 하는 '그'. '너'는 그렇기 때문에 "거울 바깥으로 도망한다". '너'와 '그', 그리고 '너'를 지워 낸 '너'는 각자 그 자리에서 양처럼 염소처럼 울지만, 이미 '너'를 지워 냈기 때문에 "안과 밖 모두를 비추는 거울"은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이 된다. 이처럼 기억은 흩어지면서 파편화 되지만 동시에 흩어진 다른 기억의 파편들과 섞이면서 감각적으로 재구성된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들이 부피와 빛깔이 다른 또 하나의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 이제 세상에 물보라 아닌 것 없고 물보라 일으키지 않는 물보라 없다. 우리는 『물보라』라는 물보라가 일으킨 물보라다. 그의 시는 우리를 살게 하고, 우리는 그를 살게 한다. 당신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던 발버둥질과 달음박질, 그 숨 막히는 고투가 결국 나를 숨쉬게 한다. ('모르겠다'는 말은 사실 모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이 아니던가요?) * 『물보라』의 깨진 조각이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금속의 표면이라면,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존재 그 너머의 풍경을 모으거나 분산시키는 렌즈에 가깝다. 폭우가 내리던 언젠가 고인을 떠올린 적이 있다. 그와 함께했던 풍경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벅차오르는 동시에 곧 씻겨져 내려 갈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폭우 이후에 뒤섞인 풍경은 곳곳에 그를 심어두었고, 어디에도 그는 없지만 어디에나 그가 있었다. 그 풍경의 파편들을 모으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시인은 존재의 기억을 무작위로 뒤섞고, 그것을 곳곳의 풍경에 심어두는 것으로 존재의 흔적을 보존한다.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린다 하얗게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 앞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듯 톡 들판과 들판이 이어지는 꽃대의 어디쯤에서 먼저 온 버스에 올라 내릴 곳을 가늠하듯 톡톡 더러는 졸고 툭 누군가는 젤리 한 봉지를 쥐고 있다 처마의 맛 들판 끝에 기차역이 있고 창밖 풍경은 잎맥의 반대쪽으로 달린다 뿌리에서 멀어지면 꽃과 가까워지는 중이니 빗소리를 들으며 종점까지 가기로 한다 젤리를 깨문다 툭 마른 풀잎의 맛, 검은 리본의 맛 들춰보면 남은 물기가 조금은 있으리라 들춰야 보이는 곳들은 발 없는 것들의 무덤- 눅눅하고 달고 창백했다 고인의 얼굴은 잊었다 상주의 이름도 잊었다 양철 지붕 아래 하얀 장례식장을 짓고 긴 객차를 대절해 문상 와서는 홀로 남겨진 사람 꽃대 위로 거짓말처럼 비가 내렸고 들판을 가로질러 바람이 일자 양철 지붕 한 짝이 날아갔다 양초가 젖는 동안 나머지 지붕을 걷어내고 지붕을 걷는 동안 무릎을 접어 절을 올린다 오금이 축축하게 저려온다 툭툭 혓바늘이 솟아올랐지만 톡톡 양철 지붕이 빗방울을 때리듯이 나도옥잠화 하얀 꽃 안에 길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앉았다가 일어선다 - 「흰꽃」 "양철 지붕 위로 비가 내리"는 이곳은 누군가의 장례식장이다. 빗소리가 유독 크고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 쓸쓸한 풍경은 비가 그치고 소리가 멎으면, 아니 그보다 먼저 빈소를 벗어나면서 이내 잊힐 풍경이다. 존재'였던' 것들의 풍경은 이제 굳이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들춰야 보이는 곳들"이 된다. 하지만 시인은 흔적을 곳곳에 심어두는 것으로 들추지 않아도 보이는 풍경으로 그것을 재구성한다. 예컨대 양철 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시인에 의해 누군가 고개를 '툭' 떨구고 졸고 있는 모습으로, 젤리를 '툭' 깨무는 모습으로, 혓바늘이 '톡톡' 솟아오르는 모습으로 치환된다. 말하자면 청각적 심상의 그것이 다양한 시각적 심상의 그것으로 곳곳에 분산 되면서 풍경은 파편화 되는 동시에 보존된다. 한편 어느날 문득 밟히는 "신발 속 모래 한 알"을 두고 "걸을 때마다 소식이 생긴 것 같아" "그냥 두었다"(「보헤미아 유리」)는 시구로 미루어보았을 때 시인은 풍경을 부수어서 재구성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풍경이란 감각하는 자에 의한 기억의 소산이라서, 그 자체로 이미 파편화 된 것이라면, 시인은 그것을 최대한 비슷하게 그 자국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존재가 남긴 자국은 그 존재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으나, 흐릿하게나마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자국을 남기는 가장 쉬운 방법은 깨무는 것이다. 깨물면 대개는 물린 자국이 생긴다. 예컨대 한 계절의 풍경을 기록하고 싶으면 그 계절을 이루는 것들을 깨물면 된다. 코너에는 재봉틀이 있다. 꿰맬 수 있는 명암과 꿰맬 수 없는 독경이 바람에 실려 밀려온다. 라일락을 깨물었다. 남천을 깨물었다. 나비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먹으며 딱정벌레가 지나간다. 돌에게 돌을 던진 돌을 향해 개가 짖는다. - 「쉿」부분 여기서 깨무는 것은 무엇을 터뜨리는 것도 아프게 하는 것도 지워지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내가 그 존재에 잠시 닿아 있었음을 그저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모과나무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모과나무의 그림자를 갉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서 깨무는 것은 시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깨물리는 것과 깨무는 것이 서로의 존재에 닿아야 하는 것이 깨물이라면 시인이 풍경을 깨물 때 그도 그것에 깨물린다. 그러므로 흔적을 남기는 일은 쌍방의 사건이다. 풍경을 곳곳에 분산하고 자국으로 남겨서 그 흔적을 보존하는 시인의 렌즈로 우리는 기억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게 된다. 누구나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기억하고 싶은 어느 날이 있지만 흩어지는 기억을 어찌 할 줄을 몰라 망각하기를 택한다. 그러나 "식의 좌변이 망각이면 우변은 반드시 슬픔이 뒤따른다"(「쉬」). 비록 그 풍경이 슬플지라도 '기억되는 슬픔'은 다만 슬프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한 풍경의 파편들을 조금 더 모은 것 같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 * 존재의 움직임을 비추는 『물보라』의 깨진 조각과, 풍경을 분산하거나 깨물어서 기억하려는 『보헤미아 유리』의 깨진 조각은 다른 듯 다르지 않다. 물보라가 일면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자잘한 물방울과 폭우 이후에 사방으로 떠내려가는 풍경은 모두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전자는 존재의 움직임이고, 후자는 존재의 자국 흔적이다. 존재 자체로 불안한 우리는 평생토록 무엇인가에 부딪치고 깨지고 발버둥질 하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일어나는 물보라의 자잘한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또 다른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보라가 일면서 물은 순환하고 정화되며 생명력을 얻는다. 한편 삶에 폭우가 내린 이후 휩쓸린 풍경들은 곳곳에서 기억의 파편으로 발견된다. 또한 존재와 존재가 맞물리면서 생긴 자국은 너와 내가 살아 있다는 혹은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흔적이다. 깨무는 것과 깨물린 것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결국 움직임도, 자국도 모두 삶에 대한 증명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방증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이다. 존재가 없으면 움직임도 자국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 내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면 시인은 나를 던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한평생 던져지면서 파편화된 존재의 조각들을 주워 담는다. 시가 그 존재의 조각들이라면 시인은 먼저 깨져본 사람이다. 어떤 시가 당신에게 온다면 그것은 당신이 찾던 존재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은 조각이 당신이 모은 조각과 다르지 않다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 없다. 1) 「물보라」(2024) 에서 인용 시편이 「물보라」 연작시인 경우 쪽수만 표기한다.
1. 상처받을 가능성 있음 Vulnerability 한 자리에 묶인 채로 일생을 살아가는 개는 어떻게 견딜 수 있는 걸까,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갈지 않은 전구의 필라멘트는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냉해를 입은 고목 나무는 좀 더 견뎌줄까, 추운 날의 전동휠체어 배터리는 그가 집에 다다를 때까지 견딜 수 있을까, 길고양이는 어디서 이 겨울을 견디는 중일까. 그리고 사람은 불행을 얼마나 견딜 수 있나. 겨울을 통과하며 우리는 모두 상처 입었다. 일상이 이토록 간단히 바스라질 수 있다는 사실, 그 취약성을 확인하며 새삼 ‘우리’라는 동그마한 단어를 떠올린 것은 한밤의 포고령과 아침의 참사 사이로 불쑥 머리를 내민 것이 이상스럽게도 타자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좀 더 쪼그라들고 부서진 세계의 항변인 듯 ‘나’의 이야기들이 쏟아지는 와중에 다시금 불거지는 타인의 얼굴이 어째서 또 이렇게 불의로 와야만 했을까. 애도란 지속된다는 면에서 성공적인 애도나 애도의 완성 같은 것은 없고 그래서 애도는 이루어지는 것, 그러는 중인 것, 그러기 위해 진입하는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종결의 어감을 조금이라도 지우는 편이 애도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조심성이라 여겨지지만, 그런 것을 논하기도 이전에 애도를 방해하는 께름칙한 인재들이 누적되는 가운데 밭게 맞닥뜨린 또 한 번의 사태와 사고는 생명과 존엄이라는 실존의 요구에 대해 얼마든지 상처받을(vulner=wound) 수 있음(ability)이라는 상처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건 곧 취약성이라 번역된다. 취약한 존재의 불안은 보편적 감각이지만 지나치면 우울이나 강박 같은 증상으로 확장된다. 불안이나 공포는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본능 발현의 기제이기도 하지만 초과한 불안감은 그 해소를 위해 자신만의 루틴을 만들어 안정을 되찾으려는 확인 이른바 강박행동에 몰두하도록 생명체를 몰아세운다. 강박행동이 강화되면 그 루틴을 지키느라 일상은 부서진다. 강박행동이라는 증상은 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희석하고자 하는 나름의 호르몬과 심리의 싸움이지만 그 행위를 들여다보면 ‘복기’라는 내용적 측면이 있다. 불과 찰나 전에 했던 행동에 대한 불신, 그 미덥지 못함은 수차례의 반복을 통해 불확신을 믿음 쪽으로 인지시키고 불안을 소거하려는 내용인 것이다. 불안의 강도를 조절하는 일은 꽤 중요하다. 그럼 뭘 해, 아무리 스스로 주의를 기울인다 한들 막을 수 없는 참혹함 앞에서 불안은 불길처럼 일어난다. 거기에 타인에 대한 죄책감과 사태에 대한 무력감은 불안을 한몫 더 부추긴다.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돌아간다더라도 전과는 다르다. 그런 면에서 돌아갈 곳이 없다. 우리에게 믿을만한 것은 무엇인가? 느닷없이 중단되어 버린 삶들에 대한 애도가 나의 삶을 전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희열을 뜻하는 Ectasy는 ec-static, 즉 바깥에 놓인 상태로 어떤 정념으로 인해 자아가 제 바깥으로 이동한 상태를 가리킨다. 이를 추동하는 정념에는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성적인 정열의 순간 외에도 슬픔이나 분노 또한 자아를 벗어나 ‘자신의 옆에’ 있게 하는 beside oneself의 기제가 된다. 자아가 자아를 벗어나 곁에 놓인다는 말은 그래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풀이되지만 더불어 이탈한 자아가 놓이는 곳이 혹시 상실한 타인 혹은 상실을 겪은 타인의 곁은 아닐까 싶어 손바닥으로 더듬거려보게 된다. 그가 없고 나는 남아 보내지 못할 때 자아는 나를 벗어나 그의 곁으로나마 가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 이후, 상실 이후는 내가 그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침통한 방식으로 부조한다. 그의 이름이야말로 나의 타자, 타인이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아닐 때 타인은 더욱 요구된다. 내가 내 안에 있을 수 없을 때 타인은 부쩍 확인된다. 내가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타자 앞에서, 타자로 인해서 허물어진다. 2. 어차피 망했어, 그렇지만 (민병훈, 『금속성』, 문학실험실, 2024, 12) 생의 기반이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불확실성의 조우 와중에 『금속성』은 그나마 쥐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무너진 쪽으로 밀어붙인다. 이 소설은 어쩌면 ‘후(後)’에 시작되는 듯하다. 폐품을 해체, 조립, 교환한다는 작업장과 폐선을 개조한 집은 철조망을 배경으로 놓여있다. ‘조수야’하고 불리는 조수, 그가 데려온 개 팔콘과 함께 생활하는 ‘나’는 한때 박물관에서 일했다. 박물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옛날 컴퓨터나 기상시스템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고물상을 연상케 하는 작업장에서는 녹슨 쇠냄새가 진동하고 바퀴마저 탈락한 의족을 달고 두 발로만 기는 개에게서는 학대와 유기의 흔적이 짙다. ‘조수야’로만 부를 따름이니 ‘너’는 성립하지 않을 거고, 20세기의 핵심 부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란 무언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의 풍경, 그러니까 때는 이미 망한 뒤이지 싶다. 이 살풍경은 작위감은커녕 온통 기시감으로 넘실댄다. ‘나’는 어쩐지 자꾸 어딘가 아픈데, 곁에는 죽음이 허다하다. 어린 시절 기르던 개도,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친구들도, 기차광 마르코도 죽었다. 닭이나 개는 더 쉽게 더 많이 죽는다. 마을의 축사는 텅 비기 일쑤고, 방호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무리는 피, 기름, 뼈의 이미지로 정체 모를 무언가의 흔적을 쫓는다. 개를 귀엽게 만들기 위해, 크고 맛 좋은 돼지나 닭의 고기를 얻기 위해 혹은 더 큰 수익을 위해 적당히 병들게 동물을 개량하는 일1), 그 후로 어떤 품종의 개들은 선천적 질병을 안고 태어나고 닭과 돼지는 바이러스에 취약한 채로 살다 먹히거나 생매장 되는 게 현실이다. 점프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어 왔다. 의뢰인을 만나기 위해 찾아갔던 마을의 허름한 식당에서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을 번들번들 묻혀가며 뜯고 있던 뼈에 붙은 고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고기는 어떻게 죽은 동물의 살이었을까? ‘나’는 그마저도 동이 나 먹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고기가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의뢰인들이 뭔가를 의뢰하면 출장을 가 처리하는데, 그 일이 무엇인지 독자는 알 수 없다. 모르기는 의뢰인도, 의뢰받은 ‘나’도 마찬가지다. 그저 짐작할 뿐. 모호함은 이 소설의 주요 상태이면서 ‘나’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을 부추기는 정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례로 잇몸 동상이라는 진단은 그런 ‘나’의 모호성과 포개져 전날 방문했던 치과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하고, 곤란한 상황은 의사가 ‘나’를 기억해내면서 근근이 모면 되는 식이다. 병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의사, 누런 가래를 소맷부리며 손님용 의자에 묻히고 약을 조제하는 약사를 비롯해 이 소설은 미심쩍은 낌새들로 가득 차 있다. 의뢰인은 ‘나’와 번번이 엇갈리고, 팔콘의 의족을 만들어준 기술자는 자신이 의뢰인이라고 하며, 꿈은 자주 꿈의 바깥으로 나와 텍스트를 흩트려 놓는다. 수치(數値)를 기록하는 조수가 읽어내는 게 왠지 수치(羞恥)로 읽히는 것이 그런 모호함의 체화가 수치(數値)로만 표면화되는 공무 앞에 존재를 옹색하게 만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반복, 맹목적으로 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일 터이나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가 주는어쩔 수 없음이라는 수치심 말이다. 이 불투명한 서사에 제법 선명한 실체 하나는 송전탑이다. 송전탑의 위용은 마치 소설의 중앙부에 높다랗게 드리워진 거대한 금속성의 신처럼 읽힌다. 그 저류의 공통 기억 때문일성싶은데, 어떤 의뢰는 분명 송전탑 꼭대기에 아직 사람이 올라서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번개가 스친 뒤 “물에 잠긴 채로, 영원히 녹슬지 않는 송전탑”(24쪽) 아래 뒤집힌 채 허연 배를 내밀고 둥둥 떠 오르는 개구리의 사체만이 의뢰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길은 자주 텅 비어 있지만 병원과 약국은 붐비는 곳,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쳐 가고 난 뒤에는 피와 약품의 냄새가 진동하는 곳, 그런 즈음 사람들은 기름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는 곳, 그곳은 우리의 삶과 얼마나 먼가? 어떤 의미에서는 망한 게 틀림없는, 이미 멀리 와버린 인류세가 제 흔적으로 닭뼈와 플라스틱 말고도 남길 것이 있다면 금속성일 수도 있겠다. 화석연료가 일종의 희생 구역을 필연적으로 요한다는 것을 대척점에 놓을 때 금속성은 조금 달리 이야기될 수 있으려나? ‘어떻게’의 문제가 전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렸음을 박물관의 의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을 신통치 않은 안마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한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그 의자가 내게는 왠지 고문용 전기의자로 읽힌다. ‘금속성’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이 남은 시간에 대하여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한다면 그것은 의사도 목수도 아닌 ‘기술자’가 팔콘에게 연결하는 의족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송전탑과 함께 명징한 또 하나의 피사체가 바로 팔콘인데, 모든 이가 이름도 없이 그 고유성을 탈각한 채 살아가지만 팔콘에게는 이름이 있다(마르코는 이방인의 대명사쯤일 따름이고). 종국에 팔콘은 주기적으로 윤활유만 칠해주면 너끈한 새로운 의족과 금빛의 꼬리를 달게 된다. 팔콘은 매처럼 날 수 없지만 그는 애초 매가 아니었으니 척추의 연장일 유연하고 기다란 금빛 꼬리는 그에게 새로운 코어를 갖게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분명 상실된 팔콘의 육제성 앞에서 조수와 ‘나’에게 돌올하게 떠오르던 그에 대한 사랑과 책임 그리고 금속성-팔콘 사이의 ‘횡단’이었다. ‘나’도 이전에 감전 사고로 잠시 몸을 잃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몸에 대해 고심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97쪽)는 고백처럼 우리가 몸을 의식하는 순간은 몸이 손상되어 제 모습이나 기능을 상실한 때 아니면 타인을 마주할 때이다. 몸을 단장하는 것은 몸이 타인에게 노출됨을 전제하는 익숙한 매만짐이다. 그러니까 몸은 실추됨으로써 타자성을 일깨우는 자리이면서 타인과 연결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공적 차원에서의 몸은 우리의 취약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면서 연결의 감각을 일깨우는 셈이다. 더이상의 증식과 확장을 멈춘 도시, 병든 사람과 동물 들, 목적이 불분명한 검문과 감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 잃어가는 것, 잃을 것이 분명한 것의 후경이다. 어떤 면에서는 어차피 망한 게 분명한 이 마당에, 그럼에도 우리의 취약성은 ‘연결’에 대한 명분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팔콘과 같은 존재가 오래 감수했던 타자성은 공생이라는 그런 가로지름을 통해 우리에게 가장 다정한 타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3. 불행을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서 (김채원, 『서울 오아시스』, 문학과지성사, 2025, 1)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에 대해, 특히 ‘너’에 대한 애착이 ‘나’의 일부를 구성하는 관계에서라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 상실 이후 비로소 융기하는 그 대상과의 연결성을 통해 애도에 더해 나는 자신에 대해서마저 이해 불능의 존재가 됨을 말하는 이 질문에 김채원의 『서울 오아시스』를 놓아본다.2) 그건 질문의 답으로 이 소설집이 놓인다기보다 차라리 소설에 대한 답이 저 질문인 듯 보인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은 죽음 뒤에 남겨진 사람들, 어머니, 친구, 딸이 죽거나 자신의 (실패한) 죽음 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소묘한다. 등단작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는 그 자체 애도와 애도 불가능 사이를 맴맴 도는 서사이지만 작품들은 대체로 그 불가능성 쪽에 무게중심을 놓는다. 이들의 애도는 어째서 불가능한가? 애도가 일정부분 공적 차원의 형식을 전제한다고 할 때, 가능한 애도는 공적 삶의 내부에 ‘존재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연고자의 애도는 절차에서부터 가로막힌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애도가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서 끌고 갈 것은 그러한 삶의 경계와 그 경계의 밖에 놓이는 결락의 삶들이다. 이 소설집에 그 결락들이 있다. 자살하려 한 적도 있지만 학점을 따고 졸업도 하려고 마음먹던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채로 공원의 햇살 속을 걸어가던 「쓸 수 있는 대답」의 인물 유림의 부고에 교정시설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의 짐을 정리하러 가는 여정인 「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에는 이 소설집이 ‘김채원스러운’ 것이게끔 하는 요소들이 촘촘히 엎드려 있다. 소설은 내내 길 위에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 예약해 놓은 우버 택시를 가로채 타고 길에 놓인 공유 자전거도 타고 땀을 흘리며 걷기도 하면서 그렇게 빙빙 돈다. 한편 저 현관 앞의 수국은 현관을 막아서고 있는데, 현관으로의 진입은 이들에게 요원하기만 해 보인다. 흰국화가 아닌 수국은 약속된 제의와는 조금은 동떨어져 놓여있는 듯하다. 수국이 불두화를 닮았음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돎’이 어떤 생으로 거듭날 것인가 기대해봄직도 하지만 언제까지고 바깥에 놓인 이들의 궤도 진입은 가능한 걸까? 소설의 결말부에 다다라 피 터지게 맞는 사람의 모습을 멀거니 구경하는 것이나 시의 다음 구절을 태워버리는 아이의 모습은 각각 약화된 형태의 죽음과 제의라는 표상처럼 보인다. 유림의 동생에게서 걸려 온 언제 올 거냐는 전화는 애도의 시간마저도 지극히 빠듯하기만 하다는 듯한 재촉이니, 채 받아들이지도 못한 죽음이란 실재 앞에서 이들의 애도는 가능하기나 한 걸까? 김채원의 인물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건 유기의 감각이다. 이들은 모두 ‘남겨진’ 존재로, 어쩐지 죔쇠가 필요해 보인다. 세계로부터 영 헐거워진 듯 상실 뒤에 남은 이들은, 퇴행하거나(「영원 없이」 「다섯 개의 오렌지 씨앗」), 갑자기 늙어버리고(「외출」), 소멸해 버림으로써(「현관은 수국 뒤에 있다」) 되레 유기감을 강화한다. 그런 면에서 이걸 ‘적극적인 유기’라고 말해도 된다면, 이들은 유기되기를 원치는 않았으나 이른바 ‘정상적’ 애도에 애초 실패함으로써 자신을 적극적으로 유기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인물들의 이런 유기감은 작가의 서술 기법에 의해 더욱 핍진해진다. 약속된 문법의 파기라기보다는 마땅히 예견된 인식의 수순을 폐기하는 것에 가까운 서술은 울퉁불퉁한 의식과 순서를 뭉개고 빗겨나가는 대화(의 단절)를 수고스러우리만치 옮겨적는다. 그것은 의식의 내부와 외부 사이를 무람없이 넘나들고 때로는 의지적으로 중단하는 식인데, 상징계의 약속과 예단을 스스로 비켜가는 이런 방식은 모성의 부재, 혈육의 상실 즉 타인의 소멸이 자신의 육체 어디쯤을 소실한 것과 동일한 효과로써 증명되는 유기의 증상이랄 수 있겠다. 해서 대체로 말은 늦되고 정신은 종종 엉킨다. 번번이 코드화되지 않는 이들의 말, 얼키설키한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최소한의 일상조차 움켜쥐지 못하고 멀겋게 앓는 심로를 짐작게 된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도덕적 구속력으로 연결된다고 할 때 이러한 정상적 언어(이자 인식)의 순서 폐기란 어쩌면 외부와의 연결을 끊고 가장 근본적인 ‘나’, 지금은 상실한 타인이 알던 그때의 ‘나’로 남겠다는 올올한 선택은 아닐는지. 언어가 욕망의 잔여물이라면 이들은 스스로 생존이라는 최소한의 욕망조차 방기해 버린 것은 아닐는지. 해야 할 말조차 묵음 처리함으로써 통상의 질서가 포섭할 수 없는 쪽에서 애도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건, 인물들이 애초에 ‘바깥’에 놓여있었다는 점과 함께 어떤 ‘정상성’으로는 이 인물들의 곁에 결코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서울 오아시스」의 가족들, 그러니까 정신병을 오래 앓은 엄마와 내게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않고도 오래 살 수 있다”(71쪽)고 알려준 실종된 외삼촌, 그런 가계의 불행을 견뎌내며 나쁜 일이 생기면 이사를 가버리는 이웃들과 달리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까”(78쪽) 이사를 갈 필요는 없다며 독주를 들이켜는 할아버지의 사정 같은 것은 소위 정상성의 문법으로는 읽어내기 요원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인물들에게 그렇게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어도 된다고, 정해진 애도의 기간이란 누구도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생각을 흘려보내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뛰고 괄호치고 흩어놓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적인 삶에 대한 요구도(한 번도 그래본 적 없으므로), 애도의 기간을 설정해두는 것도(애도를 끝내고 정상적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므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로 성립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작가는 감히 예단하거나 넘겨짚기 불가한 그 ‘흐름’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어쩌면 불행을 견디는 것이 삶의 전부인 이들을 그대로 놓아두기, 이들의 곁에 있어주기를 택한 것은 아닐지, 그들의 (기한을 가늠할 수 없는) 복기를 함께 반복하는 것, 그것이 김채원이 타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아닐지, 짐작해 본다. 4. 최악과 차악 (안보윤,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2024, 10) 정상성이 통치의 수단이고 규범의 준거라고 할 때 삶의 많은 부분들이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적 차원에 회부된다는 사실은 문득 새삼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모종의 감각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불안에 대한 서두의 언급도 그런 차원이지만 감각은 생의 균형을 위해 끊임없이 작동한다. 그런데 이 감각의 균형이란 애초에 어떤 조건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건 반드시 선한 쪽으로 움직이는가? 수미는 수영과 한 살 터울의 자매다. 언니라는 말 대신 ‘수미년’이 입에 붙을 만큼 수영에게 수미란 존재는 절대 악이다. 말간 얼굴로 어른을 제 손바닥 위에 놓고 조물락댈 수 있는 맹랑한 아이였던 수미는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여느 아이들처럼 떼를 쓰는 대신 폭력으로 표한다. 물건을 부수고 극단적으로 험한 말을 하는 어린 수미의 문제 행동 앞에 부모는 절절매며 더욱 그를 사랑으로만 품으려 한다. 그럴 때마다 자연스레 수영의 자리는 물려 진다. 순한 양처럼 굴지 않으면 안 된다. 집에 아픈 아이가 있거나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으면 미연에 그런 말을 듣는다. 너까지 이러면 엄마 못산다고. 수영의 삶은 늘 견디는 것이었다. 수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터에서도 그랬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나를,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나를 기를 쓰고 찍어 눌러야 했”(115쪽)던 것이다. 수미에게 제 삶을 도난당했다고 여기기에 죽음은 선수 치리라, 죽는 일만큼은 수미년을 앞지르리라는 수영의 결심으로 소설은 열리지만, 이번에도 수미가 한 발 날래다. 그 시각 전화 통화를 했고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았다는 알리바이를 위해 수영을 호출한 수미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노인들의 죽음에 협조하거나 죽음을 방치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수영이 일하게 된 노견 돌봄센터는 동물병원과 더불어 운영되며 24시간 의사가 상주하는 고급 호스피스 시설이다. ‘절박한 사람’만 고용하는 우 원장은 인간 기저의 이중적인 심리를 기민하게 자본화하여 자신의 부로 환원할 줄 아는 인물이다. 병든 동물을 끝까지 돌보고 싶지만 사정이 부치면 빠른 이별을 바랄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심리 같은 것 말이다. 우 원장의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발길이 뜸해지거나 보호자가 비용을 염려하는 때에 딱딱 맞춰 개들이 죽는다. 개의 가족, 보호자들은 내 품에서 아이를 보냈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는 감동을 받지만 실은 적당한 때에 안락사를 감행함으로써 보호자의 부담을 덜고 자신의 수익 기반을 안정적으로 다지는 우 원장의 치밀한 계산이 만들어내는 마법의 순간이다. 빠른 유속의 이 소설은 그러나 곳곳에 감속 구간을 배치한다. 수미의 숱한 악행 가운데는 수영을 구제한 일도 있는데, 캠핑장 숲길에서 낯선 남자에게 니쁜 일을 당할 뻔한 수영을 구하고 수영이 남자에게 위해를 가한 것을 비밀에 부치고 덮어준 일, 수영이 급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영의 뺨을 연달아 갈겨서 어쭙잖게 수영을 해코지하던 아이들을 질려버리게 만들어버린 일 같은 것들이다. 그러니까 ‘악’으로 보이는 수미의 기행들은 모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소통이자 장치로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는 셈이고, 그 정당성은 전능감을 내면화한다. 그런 수미가 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죽음에 동조한 것이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답을 내릴 때쯤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위치시켰던 수영에게 질문은 날아든다. 종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곧 태풍의 죽음을 당기는 일임을 모르지 않기에 손끝에 느껴지는 악성 종양을 외면한 수영의 마음은 피를 쏟으며 죽은 태풍의 병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업무상 과실 혐의에 대치된다. 살 권리와 죽을 권리는 누가 어떻게 결정하는가? 오로지 자신만이 제 삶과 죽음의 주체라면 비루하고 고통받는 삶에 대한 결정이나 행위가 불가한 이에게 삶은, 죽음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이럴 때 어느 어떤 것이 더 폭력에 가까이 있는가? 수영은 끝내 제 삶을 구제하는 쪽으로 선회하지만 갇히고 묶여 연명하는 노인, 병들고 지친 채 온몸에 분변을 바르고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생을 유지하는 동물에게 ‘보호자’는 생명의 결정권자와 동의어인가? 그들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조력해야 옳은가. 이를테면 이런 경우. 수영의 할머니에게 비녀는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물이자 사회적 자아의 표상이기도 했고 정정한 날의 추억이 깃든 정서적이고 감각적 차원의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의 쪽머리는 본인의 의사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요양원 입소와 함께 싹둑 잘려 나간다. 관리의 편리와 비녀의 위험성 때문인데, 이럴 때 할머니의 권리가 공공의 안전 앞에 삭제되는 것이 마냥 옳기만 한 것이라면 인간은 병든 이후의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한단 말인가. 세상 모든 곳에는 전수미가 있다. 전수미는 전수미로만 있는 게 아니라 전수영의 일부, 전수영과의 모의, 전수영이 품고는 있던 것들의 투사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악의를 없애거나 다스리며 산다. 악은 특별하지도 않고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가 때로 불툭거리며 크기를 키워나가거나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하는 것이다, 수영이 그런 것처럼. 악은 선이 아니므로 악에 대한 입장은 단호하게 정리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뒤집어 물을 때 선에 대해서라면 그 답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것이 선인가? 어떤 돌봄과 보호는 악의 얼굴 쪽으로 좀 더 기운 것도 같다. 어떤 선은 최악은 아니지만 차악을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5. 들킬지도 몰라 불온함 (전지영, 『타운하우스』, 창비, 2024, 12) 안보윤의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물리적인 폭력에 겹쳐 배제와 그 권리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전지영의 소설은 관계와 구조 속에서 은폐되는 폭력 위에 설립한 삶 혹은 폭력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한다. 공간을 중요시 여긴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소설들은 독자가 위계의 구조라는 밑그림을 먼저 그려두도록 공간을 직조한다. 구조에 대한 이런 감각은 타자성을 더욱 벼리게 제시할만한 장소로 제공된다. 은폐한 진실이 언제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잇자국으로 드러나는 쥐(「쥐」), 태풍을 몰고 오는 섬의 돌풍과 낙뢰(「말의 눈」), 저수지의 음험함과 사격장의 총소리(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어시장의 비린내와 척척한 물기(「맹점」), 물질적 풍요 뒤에 숨겨진 히스테리(「소리 소문 없이」)와 같은 오감을 건드리는 장치와 함께 안온한 생활이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긴박감을 몰아온다. 작가가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공간에 더해 불안을 부추기는 효과들이 쥐락펴락하는 것은 불온한 진실의 맨얼굴이다. 자녀가 학교폭력의 피해자일 때 학교 측의 미온적 태도와 가해 학생들의 뻔뻔함에 상처 입고 딸과 함께 제주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수연 앞에 학교폭력은 또 한 번 전혀 다른 얼굴로 찾아온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구도로 삽시간에 전환되며 수연은 자신의 딸을 위해 증언을 요청하는 지희를 외면한다. 섬의 생리와 무관하게 지은 타운하우스의 지붕으로는 빗물이 흘러들어 집안에 차오르고 돌풍과 낙뢰에 전문기사도 손을 쓸 수가 없는 마당에 지희는 치마를 동여매고 지붕을 오르고, 이내 추락하고 만다. 지붕에서 내려오면 지희는 수연에게 증언을 강요할 거였다. 순간 수연이 바란 것은 이대로 지희가 깨어나지 않는 것. 전지영은 바로 이 순간을 잡아챈다. 인간이라는 수면 아래 잔잔하게 깔린 숱한 얼굴들 중 우리가 차마 밖으로 내놓지 못하는 표정과 감정, 그 부박함을 작가는 낚아올린다. 그런가 하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에는 사격장과 저수지라는 공간이 세워진다. 혜경과 윤석 부부는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오랜데, 서로를 눈치껏 빗겨가려 애쓰는 중이다. 혜경은 남편의 무심함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투사해왔던 것이다. 사격장은 윤석이 공무원 재직 당시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치한 것이었는데 실종된 아들이 저수지가 범람하고 주검으로 발견될 때도 그는 사격장 건립 문제로 회의 중이었다. 윤석은 그 나름대로 사격장 건립을 추진한 시장을 원망해 그의 불행을 기도해가며 간신히 견뎌내는 중이다. 사격장의 총소리와 탄약 냄새는 집의 안팎을 둘러싸며 여전히 거기 있는 컴컴한 정주못과 함께 이 부부의 잠잠한 일상을 언제든 깨트릴 수 있을 것처럼 에워싼다. 그러다 시장이 실종되고 그가 저수지에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수사의 가닥이 잡히자 윤석은 갑작스레 무엇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용서할 수 없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일 테니까. 대타자의 소멸로 부부는 비로소 졸은 청국장에 밥을 비벼 먹고 커피를 채워주고 마시는 일상으로 조금씩 되돌아올 기미를 보인다. 사람은 때로 불행을 그런 식으로 견디기도 하는 모양이다. 부자 동네 청한동을 배경으로 높은 성벽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청한동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을 대비시키는 「언캐니 밸리」에서 왜소증을 가진 크로키작가이자 택시 기사는 ‘당신’이 염산 테러를 당하자 의심을 사 경찰의 조사를 받는다. 그녀는 왜소증의 사내가 ‘기괴하다’고 표현했지만, 사내가 생각할 적에 여자를 의자에 앉혀놓고 몇 시간 동안 관찰한다는 노부부가 더 수상쩍고 기괴하다. 넘치도록 가진 노인들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은 끝내 어떤 얼굴로 드러났을까? 140cm의 키로 높은 담벼락을 기어오르는 왜소증 사내를 줌아웃하는 결말은 그가 작아서가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담벼락만큼 쌓였을 집 내부에 들어찬 비밀의 크기 때문에 잔뜩 기괴해진다. 누가 누구에게 ‘언캐니’한가? 전지영의 소설들은 인간의 치졸을, 비열을, 낯 뜨거운 찌질함을 솥에서 푹 삶은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부려놓듯 불쑥 꺼내놓는다. 썰어주면 잘만 먹을 거면서 징그럽다며 찌푸리지 말란 듯이 태연하게. 예술을 한다면서 돈과 재능 그 둘을 다 가지고 있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가진 이는 어떻게든 성공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가지지 않았다면? 음해라도 해서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싶은 마음은 「뼈와 살」, 「소리 소문 없이」에서 한 존재를 삭제해버리거나 없는 ‘진실’을 만들어내 ‘사실’로 만들고 만다 기어이. 그런 날조의 ‘사실’들은 인간의 작은 열등감에서 기인하고, 그건 자기 보호라는 엉성하고 얄팍한 난막에 감싸여 있다. 전지영은 그 막을 대차게 찢어서 눈앞에 들이대며 마주 보게 한다. 말의 검은 눈에 비친 것이 누구의 얼굴인지,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진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불을 활활 질러서라도 거기에 쥐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쥐의 잇자국과 소리와 낌새는 우리를 쫓아올 테니까. 6. 바늘은 구멍을 가로지른다 (안윤, 『모린』, 문학동네, 2024, 11) 관계나 사랑이 ‘나’를 읽는 터이듯, 타자의 감정 역시 나 없이는 성립 불가하다는 점에서 타인은 나의 필요충분이다. 안윤의 소설집은 나란히 양립하는 관계,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느리고 꼼꼼한 이야기들로 바느질되어 있다. 표제작 「모린」은 영은과 미란의 사랑을 그려낸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미란은 감정적으로 늘 부대끼면서 낭독 봉사에서 만난 시각 장애인 영은과 찬찬한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낭독용 텍스트인 요제프 코발스키의 산문 『보이지 않는 것들』가 나란히 놓인다.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고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산 그는 피아노 줄과 밧줄을 엮은 끈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모린은 요제프가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활은 하숙집 아들 조지가 도왔는데 산문집을 출간한 것도 조지였다. 이 텍스트는 세상 어딘가에 있는 실화를 초과하여 존재한다. 그래서 더욱 귀한 텍스트 『보이지 않는 것들』은 「모린」과 조밀히 넘나든다. 돌봄을 사랑으로 여겼다는 선주의 고백은 장애에 대한 배려가 어쩌면 영은의 정체성을 장애에 두는 선민이었음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랑이 꼭 옳지 않기만 할까? 요제프와 조지의 우정 역시 지극히 순수한 사랑의 형태일 수 있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조지를 위해 콘플레이크 상자를 찢어 “사랑하는 조지, 절대 들어오지 말고 경찰을 부르거라”(27쪽)고 힘겹게 쓴 요제프의 마음은 배려와 우정의 모양새를 한 따듯한 사랑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이전의 세계와 뚝 끊어짐을, 그리하여 넘어감을 통해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의 세계로 진입함을. 자신의 팔꿈치를 내어주고 미란을 믿겠다는, 영은의 팔꿈치를 가만히 쥐는 두 사람의 사랑은 비로소 시작되지만 어쩐지 오래 뜨듯할 것 같은 뭉근한 이 마음은 두 개의 선을 연결하여 제 삶을 끊어냄으로써 세 번째의 세계로 건너간 요제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유일했던 태도와 겹치며 묵직하게 내려 앉는다. 「담담」은 내밀한 타인과의 단절을 겪은 이들이 한 번의 보챔도 없이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서로의 타인으로 구성되는 미덕을 보여준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의 양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혜재에게 “그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가요?”(100쪽)라고 묻는 은석은 한동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유가족이었노라 고백한다. 그러고 보면 정체성을 지나치게 성적 취향을 기준으로 두기도 하는 듯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그렇지만도 않아서 은석의 경우와 같은 유가족, 장애를 가진 이들은 그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데, 이런 정체화의 실체는 공통적으로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남 그 특이성을 지목한다는 점에서 퍽 사려 깊지 못하다. 정체성은 내가 나를 규정하기보다 외부가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이름표를 붙여주는 몹시 성급하고 거친 방식인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은석과 혜재의 담담한 사랑의 맛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어려운 형태일지도. 스스로 자신의 한때와 이별하는 「하지」나 고모의 딸과 친구의 남편이 불륜이 되어버리자 가족과 친구 양쪽애서 떨어져나와 버린 「틈」은 깨어짐과 봉합이 따로 있지 않음을, 어리고 가난한 사랑의 미장센 「작은 눈덩이 하나」와 전세 사기로 죽음을 택한 남자친구의 기억에 겹치는 후배의 전세 사기에 마음을 쓰는 「또,」는 타인의 불행에 냉담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다. 안윤의 소설은 하나같이 맞은편을 바라본다. 편편이 까물까물 아득하게 마음을 쓰다듬지만 「핀홀」은 단연 타인의 이름을 내 곁으로 당겨 부르고 함께 앓게 한다. 보라는 안정감을 주는 승원의 성격과 그 부모의 다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여기는데 자신이 재혼가정에서 자랐음을 차마 고백하지 못해 괴롭다. 이들의 일상은 승원이 피하기만 하던 경진의 전화를 보라가 받으면서 조금씩 구멍을 보인다. 기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경진은 중증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던 정원의 사망을 알려오는데, 정원은 승원의 형이고 삼십일 년간 시설을 전전하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는 시설에서 나가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절차상 필수인 부모의 동의가 여의치 않자 장애인인권운동가와의 접촉을 통해 탈시설을 계획하던 중 낙상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승원과 부모의 안정감이 숨긴 비밀, 정원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거길 나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네가 살 곳은 거기라고”(81쪽) 탈시설을 반대한 부모님. 그들의 안정감의 비밀은 그것이었다. 구멍을 막고 처음부터 없었던 듯 태연하게 살아내는 것. 정원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에도 부모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며 끝내 부검을 반대하고 승원은 거기에 순하게 동조한다. 결국 정원의 인터뷰 영상과 그가 쓴 시는 보라가 인수하게 된다. 정원의 ‘말’을 인수한다는 것은, 가족에 의해 삭제되고 사회에서도 영영 지워질 뻔한 한 존재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 없다. 보라의 할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이쪽에 하나, 다른 쪽에 하나. 각각 구멍이 있어야 무엇이든 이을 수 있다고”(88쪽) 찢어진 것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느질을 해야 하고 바늘이 통과하려면 구멍이 필요하다. 안윤은 그런 사랑을 천천히 기워낸다. 안윤의 소설에서 사랑을 배운다. 그 가로지름의 다양한 단서와 모양들이 느리고 단단한 물결의 질감을 하고 이쪽으로 건너온다. 7. 봉합할 가능성 있음 마거릿 애트우드의 「흰 말」3)에는 흰 말이 등장한다. 술에 절어 사는 농장주로부터 방치되었던 흰 말은 다정한 부부의 지극한 돌봄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다. 부부와 함께 삶을 지속하던 흰 말 글레이디스는 하룻 저녁 소동에 자극을 받고 농장을 뛰쳐나간다. 글레이디스는 제 힘껏 달리다 차에 치이고 만다. 글레이디스는 그렇게 죽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을까? 사람의 손길에 살을 찌우고 빗질을 받으며 때로 손님을 태우고 살던 때일까 아니면 힘껏 달리던 질주의 마지막 순간일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견디기 위해서 하는 것인가, 그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인가? 또 보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치하여 발아래 묶어두는 것인가, 위험으로부터 차단하여 생명을 유지하게끔 하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은 타자의 존재를 재빨리 알아챈다. 마당에서 기르는 개에게는 되도록 줄을 길게 묶어주고 자주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한겨울에는 수돗물을 미리 받아두었다 찬 기를 식혀 햇살이 대지를 데울만한 때에 고목 나무에 뿌려주는 게 좋다. 전동휠체어가 길 위에서 느닷없이 멈춰서지 않으려면 배터리를 미리 충전해두어야 한다. 산책로 곳곳에 집을 만들어 비닐을 씌우고 헌옷가지를 깐 잠자리와 보온 주머니를 둘러싸 얼지 않을 물그릇을 마련해 주는 손길이 길고양이를 살리듯, 슬픔을 통과하는 중에는 등을 쓸어주는 염려가 필요하다. 아침에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며칠 전 메시지를 나눈 친구가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할 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장면이 반복돼 트라우마를 건드릴 때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겪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기대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슬픔은 타자에 대한 감각 수용 반응의 일종이기도 하다. 들떠서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과 사고의 순간을 내용으로 하는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사람들은 아주 가만히 눈을 감았지”였다. 그는 시를 쓰는 동안 사람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죽음의 순간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 순간이 그가 타인에게 몰입한 때, 타인이란 존재를 체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상실했지만 끝내 끊어내지 못한 것들로 나를 채워가기도 한다. 그것이 이른바 ‘우울증적 정체성’이겠지만, 나의 일부가 거기에 건너가 있다는 면에서 우울은 필요하기도 하다. 내가 나를 위해, 타인을 위해 애쓰는 순간 나의 타인들도 서로의 곁으로 건너와 주리라는 범박하고 느슨한 믿음이 어쩌면 우리의 취약성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하고 변치 않는 명제가 아닐까. 이 글을 함께 읽는 봄이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냐만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 구멍 사이를 가로질러 서서히 당겨지는 중이라면 어떨까. 내가 더딘 바느질의 한 땀을 뜨려 애쓸 때 나의 타인이 되어주길, 그렇게 봉합할 가능성을 우리는 서로 알아보길. 그렇게 우리 서로에게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무심한 타인이 되길. 1) 산업이 발견한 진짜 혁명은 병든 동물이 더 돈이 된다는 것이다. 천연의 동물들과 달리 인간이 개량한 동물은 항생제니 유기농이나 방목이니 해봤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산업 동물’이다. 사람들은 그런 동물을 먹고 사는 셈이다. 조너선 사프란 모어,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송은주 옮김, 민음사, 2011, 146-150. 2)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애도의 힘과 폭력』, 필로소피, 2018. 3) 마거릿 애트우드, 『도덕적 혼란』, 차은정 옮김, 민음사, 2020.
1. 응시의 실례들 지금까지 '최초의 인간'이 출현한 내력을 보았다. 최초 인간의 최초의 행동은 '응시'라는 것도 알았다. 응시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응시, 즉 생존의 확인이었다. 그 확인이 있을 때 생존의 역사(役事), 즉 실존이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응시'는 똑바로 보는 것이다. 자세히 보는 것이다. 생존의 근거를 정확하게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의 화자는 "꽃처럼 곱게 눈을 뜨"는 것이다. 응시에 대한 요구는 김수영과 신동엽에게서도 공히 발견된다. 김수영 자신은 "히야까시 같은 작품1)"이라고 일축했지만 후대의 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거론된 「공자의 생활난」 역시 응시의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한 시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작란(作亂)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2) 이 시가 1945년에 씌어졌다는 것은 김수영의 예민함을 가리킨다. 그는 그 직전에 쓴 「묘정의 노래」에서 "열사흘 달빛은 / 이미 과부의 청상(靑裳)"이라는 구절로 해방을 '낡은 세계의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죽음과 신생 사이에 놓여 있음을 "청상(靑裳)"이라는 어휘를 통해 교묘하게 암시했었다3). 그리고 그 이행의 수행적 조건으로서 '바로 보다'를 제출한 것이다. 이 시는 좀 더 심장(深長)한 의미를 비친다. 응시에 대한 깨달음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나왔으며, '생활난'은 '작난'이 아닌 '작전'의 어려움을 통과해야 극복할 수 있다는 것. 이때 '생활'과 '작전'의 상통성은 '공자'에 근거하며, 이 '공자'는 그가 썼던 산문에 다시 근거한다. 벌써 오랜 옛날에, 나의 머릿속의 담배에 오랫동안 적어 놓은 일이 있던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또 생각이 난다. 이런 뜻의 유명한 처세훈이다.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 욕심을 제거하려는 연습은 긍정의 연습이다4). '담뱃갑'에 대한 명상을 기술한 이 산문이 또한 교묘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긍정의 연습"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여유는 육신의 여유다"라는 구절에 내장된 '마음'='육신'의 상통성이다. 이 상통성이 있을 때만,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슬픈 육신을 마음이 움직여 상처 너머의 경지로 이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산문의 제목이 가리키는 '생활의 극복'이다. 마음과 육신의 상통성은 「공자의 생활난」에서 '생활난'과 '작난'의 차이와 생활난과 '작전'의 상통성으로 현상되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달나라의 장난」(1953)에 와서, '도는 팽이'와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울지 않음' 간의 상통성으로 나타난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 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달나라의 장난」) 이 구절에서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된다"에서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다음에는 쉼표가 들어가는 게 문법적으로 맞다. 즉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는 동의어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울어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팽이'는 "수천 년 전의 성인"의 비유로서 제시된다. 금세 짐작할 수 있듯이, "수천 년 전의 성인"은 「공자의 생활난」의 '공자'와 동격이다. 아마도 시인은 그를 한국인의 정신적 뿌리로서 가정했던 듯하다. 그러나 '공자'가 생활난에 봉착했듯이, '성인'도 [정신을 못 차리게] 돌면서 "나를 울린다". 그리고 '나'는 이제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울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울지 않기 위해서 시의 화자는 '방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라는 행동수칙을 내세웠다. '응시'와 거의 동의어로 볼 수가 있다. 돌고 있는 팽이 앞에서 방심조차 하지 않는 것은 "팽이와 팽이의 생리와 / 팽이 [돔]의 수량과 한도와 / 팽이의 우매와 팽이의 명석성"을 분별해내는 것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신동엽의 첫 시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5)」(1958)이다. 이 시는 온갖 감각들의 혼잡스런 향연으로 우선 닥친다. "우리가 포옹턴 하늘에 솟은 바위"의 '촉각',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꽃맛"의 '미각', "백학의 나래 휘파람 하세요"의 '청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나고, 자넨 저만큼 이낸 이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흐터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寄生)을 몰을[=모를, 인용자] 사람들. 에서 보듯 총체적 생활 감각이 사방에서 꿈틀댄다6). 그러나 이 감각들은 생의 활력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잡다한 반발력들로 소모되고 만다. “매미는 언제까지 뜻 모를 소리만 울어예는가"에서 보이듯 그것들은 의미의 뒤죽박죽 속에서 곤죽이 되고 만다. 시인의 결론은 이렇다: 한그루 피어난 성서의 지층에는 구십구억 창세 인민의 몸부림 든 사상이 썩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 무삼꽃이 내일 날 피어날 것인가. 이 감각들 중에 유일하게 생의 기미를 지피는 감각이 있다면 그건 시각이다. 우주 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神明)은 태양 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 태양 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의 강은 우주 밖 창을 열고 흘러갈 것인가. 사상이 썩은 대지는 강으로 흐르고 강은 "우주 밖 창을 여는" '신명'을 일으켜, 그 신명은 강을 창공으로 용약(踊躍)시켜 은하수를 흐르게 한다. 그것이 시인의 소망이다. 그 소망은 눈길을 타고 흐른다. '응시'가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싹은 "빛나는 눈동자"를 창조한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빛나는 눈동자」) 이 시의 '눈동자' 역시 '눈물겨운 역사'를 견인할 필수 장치가 된다. 그 장치의 기본 수행 지침은 "세속된 표정을 / 개운히 떨어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좌고우면하지 않고 현실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 응시는 훗날, 4·19를 기려 쓴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서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보는 눈,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아 "경외"를 간직한 눈으로 주물된다. 2. '왔다'에서 '간다'로 '응시'가 '정확한 직시'라면 그건 생존을 실존으로 만드는 핵심 장비라고 할 수도 있다. 실존이란 무엇인가? 전쟁 이후의 한국인의 삶을 다시 복기한다면, '죽음' '생존' '실존'이라는 단계적 회로에서 최종 단계에 속한다. 이 '실존'이 있기 위해서는, '생존'을 참된 삶의 가능성으로서 이해하는 전 단계가 있어야 한다. 지금, 이곳의 시공에서 '참된 삶'은 없으나 언젠가 그것은 이루어질 수 있고, 오늘의 '삶'은 그런 '참된 삶'의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 그 삶을 향한 운동이 시작된다. 주제론적 차원에서 본다면 김수영·김춘수·신동엽의 출현은 박인환·전봉건·김종삼의 다음 단계에 속한다. 그리고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이는 한국인의 생의 발견 이후 생의 방법론을 찾아낸 최초의 특이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특이점은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로부터의 결정적 도약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 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7) 이 시에 대해서 필자는 '시니피앙들의 광휘와 시니피에의 부재'라는 시각에서 분석한 바 있다. 님의 탈환이 주체에게 제공할 삶의 형상을 상상적으로 선취하되 그 위에 시니피앙만 보이게 하는 반투명 보자기를 씌워 독자로 하여금 시니피에를 찾아보는 상상을 직접 발동케 하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의 상상적 기능이 극대화됨으로써 님과의 만남의 가능성이 무한한 모험의 대양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질 수 없는 자의 신비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8). 저 '신비주의'가 리얼리즘으로 전화할 계기가 이제야 생긴 것이다. 이제 지난 호에서 인용했던 김춘수의 시구들로 되돌아간다. 김춘수도 「알 수 없어요」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신비로부터 출발한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장미되어 오는 것(「구름과 장미」)9) 그러나 곧이어 시인은 "지금 익어 가는 것은 / 물기 많은 저들 과실이 아니라 / 감미가 아니라 / 사월에 뚫린 / 총알구멍의 침묵이다. / 캄캄한 그 침묵이다."(「가을에」)라고 적는다. 시니피앙의 광휘가 이제 시니피에의 부재로 넘어온 것이고, 그 부재라는 침묵 안에 언어를 집어넣을 통로로서 '꽃처럼 곱게 뜬 눈'이 조형된 것이다. 그 눈이 만들어졌을 때 마침내 시인은 "가자!"라고 외칠 수가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지난 호들에서 연속해서 범했던 오류를 고백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기다림의 시학'에서의 서정주의 혁명을 두고, 김영랑의 '기다리다'를 '왔다'로 바꾼 것이라고 보았다10).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어리며 나는 왔다.(「자화상」) 이 전화를 통해 피식민과 불모의 땅이 '상명당'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필자는 모종의 착각을 통해서 지난 몇 호에서 서정주의 '왔다'를 '갔다'로 착각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왔다'를 다시 '간다'로 바꿔야 할 필요를 서둘러 적용하려다 범한 오류였다. 왜냐하면 오로지 '왔다'에 머무르면, 상명당에 신비화가 적용될 여지가 크고, 실제로 서정주 시의 훗날의 전개가 그리되었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김종삼·정현종에게서, '왔다'가 '와야 한다'와 '와야겠다'로 변형될 필요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줄곧 유념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필자는 '왔다'를 '갔다'로 쓰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일어난 것은 '갔다'가 아니라 '간다'이고, '간다'는 김춘수 등이 창출한 '최초의 인간'의 행동 수칙으로 등장한다. 이를 김춘수의 일련의 시를 통해 확인해 보자. 김춘수에게 있어서도 '왔다'가 시적 출발점이라는 것을 필자는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11). 다만 서정주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미당에게서는 '내가 왔다'인 반면, 김춘수에게서는 '릴케가 왔다'라는 것이다. 단지 릴케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수없이 큰 타자가 그에게로 왔다. '한스 카롯사'가 왔는가 하면(「오전의 산령」), "부다페스트에서 죽어간 그 소녀"도 왔고(「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그 이야기를」), '거북'도(「꽃밭에 든 거북」), '딸기'도(「딸기」) 왔으며, 가장 빈번하게는 '꽃'이 왔다. 꽃은 "웃"으며 와서, 개인 하늘에 그의 미소는 잔잔한 물살을 이(「꽃 1」) 루는가 하면,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花粉)이며(「꽃의 소묘」) 에서처럼, '금빛', '빛깔', '향기', '화분'의 덩어리로 왔다. 즉 '왔다'의 주체가 다른 것이다. 서정주에게서는 '나'가 왔다. 어디로? 이 땅으로, 그러니까 '나'는 이 땅이 상명당임을 증거하기 위해 온 것이고, 거기에서 나는 최대의 삶을 살 거라는 확신을 부여잡는다. 반면 김춘수에게서는 '타자'가 왔다. 그것은 처음 어떤 '이상적 존재'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그 타자는 '나'가 아니다. 따라서 온 존재와 주체 사이의 '밀당'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밀당은 매우 난해해서 결코 그 이상적 존재는 나와 합쳐지지 않는다. 「꽃이여!」라고 내가 부르면, 그것은 내 손바닥에서 어디론지 까마득히 멀어져 간다.(「꽃 2」) 그러니 '나'는 여전히 결핍 상태이며, 목이 마르다. 사랑은 와서 넋을 적시고 넋을 목마르게 한다. (『낭산의 악성』) 타자의 존재가 나에게로 이월되지 않는 상황, 그때의 타자를 우리는 흔히 '큰 타자'라 부르거니와, 어떻게 부르든, 그 상황에 의해서 나는 목마르고 또한 타자는 '이상적 상태'를 떠나 '미지'가 된다. 중앙아세아 아한대지방의 늪 속에 사는 거머리, 거머리가 붕으로 화하는 동안 우리가 지레 보는 우리 영혼의 상공을 덮는 거대한 날개, 날개가 던지는 미지의 그림자다. (「붕(鵬)의 장」) 미지의 범위는 주체와 타자 양쪽에 걸쳐져 있다. 처음에 '나'는 타자를 이상적 존재로 알았으나, 그것이 다가오기는커녕 멀어져가자, 미리 가정된 이상적 존재를 이룰 몫이 '나'에게로 주어진다. 그것은 이중의 각성을 유발한다. 하나는 이상적 존재는 '미리' 그런 존재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존재의 이상성은 사실판단이 아니라 당위적 가정이며12), 따라서 타자는 사실적 상태는 오히려 반-이상성에 가까운 게 마땅하다는 인식이다. 왜냐하면 그 당위를 현실화할 책임이 '나'에게로 떨어질 것이니, 그걸 실행했을 경우 나의 가치는 대상의 애초 상태가 열악했었을수록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을 가리키는 게 위 인용문에서 "거머리가 붕으로 화하는 동안"이라는 시구이다. 이 인식은 김춘수로 하여금 그가 소속해 있는 한반도의 고난 속의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고통받고 죽어가는 존재들을 맞이하는 태도를 갖게끔 한다13).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절대적 책임을 요구한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들의 몸짓과 그들의 음성과 그들의 모든 무구의 거짓이 떠난 다음의 나의 외로움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수정알처럼 투명한 순수해진 나에게의 공포를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어가는 그들을 위하여 무수한 우주 곁에 또 하나의 우주를 세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무구한 그들의 죽음과 나의 고독」) 시인은 이상적 존재인 줄 알았으나 반-이상적 상태로 다가오는 타자를 “무구의 거짓이 떠난" 존재라고 말한다. 그때 참됨을 실현할 몫이 오로지 '나'에게로만 던져지지만, 나는 타자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에 "수정알처럼 투명한 / 순수해진 나"가 된다. 그 '나'는 나에게 근본적인 외로움과 공포를 안긴다. 많은 독자를 얻었던 『꽃을 위한 서시』의 치명적인 시행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인식이다. 타자의 비-이상성이 첫 번째 인식이라면, '나'의 무지, 헐벗음이 두 번째 인식이다. 다만 나는 헐벗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존해 있다. 그것을 김춘수 등은 직전의 시인들(가령 박인환, 전봉건, 김종삼)로부터 받았다. 생존하고 있다는 것은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즉 생존을 느끼고 안다(앞 시구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알 뿐만 아니라 주변의 물상들의 수용체로서 자신을 세울 수 있다. 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원래 '이상적 존재'로서 가정된 그 무엇을 위하여 '나'는 마땅한 장비를 갖추고 마땅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 마땅한 장비의 첫 선택이 바로 '응시'였다. 그 응시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장비인 한, 응시는 그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다. 당연히 모종의 행동을 같은 시간 내에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 행동은 '간다'로 현상된다. 지난 호에 읽었던 「서시」의 구절을 다시 읽으면, '응시'와 '간다'의 동시성을, 그리고 '간다'의 절실성을 단박에 느낄 수 있다. 꽃처럼 곱게 눈을 뜨고, 불모의 이 땅바닥을 걸어가 보자. 또한 이 '간다'는 '나'만이 가는 게 아니다. 주체와 타자가 함께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움직일수록 '불모'에 실질이 배어들기 때문이니, 그 또한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상호성은 일방적으로 주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내가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대상도 함께 제대로 가야만 한다. 다음 시구는 그 사정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린다. 점점점 눈물은 씻기고 피도 멎고 손톱에서 아니, 거문고 다섯 줄에서 꽃샘바람이 인다 벌써 봄이 오고 있었구나! 남산의 아지랭이, 알천의 아지랭이, 감포가 열리고 개운포가 멀리 동해 바다를 열어준다. 꽃이여 꽃들이여, 피어라! 움이 트라! 잎이여, ...(중략)... 나는 널 찾아 저승으로 가고 있네. 저승길은 밝도다. 동해 바다 중천에 해는 떠 해는 땀 흘리고 있었네. 땀 흘리고 있었네. 내 손톱에서 아지랭이 남산의 알천의 아지랭이 보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네. 내 손톱에서 새가 날고 있었네. 금빛 깃의 새가 날고 있었네.(『낭산의 악성』) 이 시구에서 "저승길"을 불길한 내용으로 읽지 말기를 바란다. 그 길은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길이다. 그래서 "저승길은 밝도다." 문제는 그 밝음은 '나'(이 시에서는 '백결' 선생)가 현을 뜯을 뿐만 아니라, "내 손톱에서 아지랑이"가 "보얗게 피어오르고 있었"야 한다는 점이다. 이 상호성이 김춘수만의 특성인지, 아닌지는 다시 검토될 것이다. 그 상호성의 '근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도14). 다만 이 자리에서 독자가 마침내 확인하는 것은 '왔다'가 '간다'로 바뀌게 된 내력이다. '응시는 행동을 동반한다'가 그 내력을 요약한다. 1) "급작스럽게 조제(造製) 남조(濫造)한 히야까시 같은 작품"(「연극하다가 시로 전향 나의 처녀작」 [1965.09], in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2. 산문』(민음사, 2018), p.424. - 김수영은 박인환이 주도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수록된 두 편의 시를 모두 위의 판단에 포함시키고 있다. 「아메리칸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정의를 내린 까닭을 밝힌 것은 「아메리칸 타임지」에 대해서뿐이다. 그리고 이후에 그가 「공자의 생활난」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자료가 부족하지만 이 차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분석을 해야 할 것이다. 2) 김수영의 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이영준 엮음, 『김수영 전집 - 1. 시』 (민음사, 2018)에서 인용한다. 3)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김수영이 파자(破字) 놀이를 즐겼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 졸고, 「한국시사에서의 문자적인 것의 기능적 변천」, 『인문과학』, 제116권, 연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2019.08 참조. 4) 「생활의 극복」(1966.04), 『김수영전집 2. 산문』, 앞의 책, p.159. 5) 신동엽 시 인용은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강형철·김윤태 (엮음), 『신동엽 시전집』, 창비, 2013에서 따온다. 6) 이 시구의 암시를 따르면 신동엽 사유의 기본 바탕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이다. 이에 대해서는 훗날 다시 언급될 것이다. 7) 한용운, 「알 수 없어요」, 권영민 (엮음), 『한용운 문학전집 - 1. 님의 침묵 외』, 태학사, 2011, p.35. 8)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 그러나 때마다 위기는 달랐다」, 『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문학을 위한 안내서』, 문학과지성사, 2016, p.46. 9) 김춘수 시의 인용은, 『김춘수 전집 - 1. 김춘수 시전집』, 현대문학, 2004에서 따온다. 10) 「서정주의 탈출기」, 『한국 근대시의 묘상 연구 - '님'은 '머언 꽃'을 어찌 피우시는가』, 문학과지성사, 2023.02, pp.249~62. 참조. 11) 「릴케는 어떻게 왔던가」, 같은 책, pp. 199~209. 참조. 12) 그것이 "영혼의 상공을 덮는 [즉 가리는, 인용자] 거대한 날개"로 표현되었다. 이 사정은 김춘수가 김종삼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13) 가령,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 여기에 와서 '기다림의 시학'은 '마중의 시학'과 만난다. 김춘수 시학의 특징이 가장 도드라지는 지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될 것이다. 14) 이와 더불어 '응시'의 양태, 배경 사유, 지향에 따라 시인의 태도도 달라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번 글에서 공통의 존재로서 제시한 김수영·김춘수·신동엽의 차이와 그 의미를 살피게끔 할 것이다.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