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파란 2024년 여름호(제33호)
그럼에도, 다시 한번, 야생으로
1.
'너'가 존재하는 한 '나'는 단속된다. 너는 나의 복장을 단속하고, 도덕성을 단속한다. 그리고 표정과 감정을 단속한다. 아니, 사실 너는 나를 단속하지 않는다. 다만 '너'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불안과 내면의 유약함이 '나'를 단속한다. '너'의 시선 속에 사로잡혀 출현한 '나'는 그 시선에 대상화된다. 곧 자기 고유의 절대적인 자유는 균열을 일으킨다. 한편 '너'는 끊임없이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끊임없이 단속될 것이다. 타자에 의해 대상화되지 않기 위해 '나'는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고 자기효능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각자 진정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와 그 시선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것에 억압된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해야 한다. 응시는 똑바로 본다는 말이다. 똑바로 봐야지 똑바로 안다. 반성의 지평에서 출현한 시는 따라서 인간의 삶을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타자를 직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직시함으로서 삶의 오류를 발견하려는, 그런 시가 있다.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노이즈 캔슬링」과 함께 출현한 윤혜지는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삶에 기꺼이 구식(舊式)의 삶을 틈입시킨다. 이윽고 그것은 타자의 시선 아래 구식, 혹은 비극으로 취급될 우리 각자의 진실한 꿈과 그 미래를 구출한다. 그런 점에서 윤혜지의 시작(詩作)은 그 시선과의 투쟁의 시작(始作)일 것이다. 그 시선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그리하여 구식의 삶, 야생의 삶을 견인하기 위해, 시인은 먼저 그것을 응시한다. 그가 그려나간 궤적은 자기의 존재가 타자의 시선 아래 짓눌리고 밀려났던 경험을 면면히 보여준다. '나'의 침대가 아니라 "남의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너무」)음을 고백하면서, "고개를 쳐들"고 다양성이 말살된 "하늘을 뒤덮은/보급형 드론들"(「언캐니」)을 똑바로 바라본다. 바야흐로 "내가 발을 갖고 있었구나 내 발로 나를/옮길 수 있"(「근사」)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인은 "해변에 가득한 돌을 골라"(「희고 흰 빛」)내듯,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의 시선'으로 고유한 자기의 꿈과 그 정체성을 확보해 나간다. 지금 살펴볼 「사로잡힌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힌, 그 세계를 기꺼이 응시하면서 자신의 유약함을 진단한다.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
연인을 만들었어요
굴착기를 좋아하는 사람
병원 침대에 누워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자신이 부순 어떤 마을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
그것 참 쓸쓸하군요, 하며 웃다가 병이 깊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엔 저수지에 가라앉은 목각 인형을 건져 올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굴착기 끝에 닿은 인형의 마디마디가 부러져 나무 조각에 불과해져 버렸다고요
나도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어요 그냥 조그맣고 쪼글쪼글한 조약돌일 뿐이에요, 라고 하자 그는 달걀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습니다
뜨겁고 달고 부드러운 것을 먹이다 포기한 사이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데도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아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 「사로잡힌 세계」 중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는 병실의 적막이 두려운지, 병태의 실감이 두려운지, "아무 때나 전화하고 싶어서/연인을 만들"었지만 연인의 이야기로 무성한 통화 내용은 그의 "병이 깊어지"게 만들 뿐, 적막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하물며 연인의 이야기는 "그것 참 쓸쓸하"다. 전화하고 싶다는 말은 일방의 청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쌍방의 '대화'를 하고 싶다는 말이다. '너'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키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탄생하는 것. 한편 일방적인 청취를 당하고 있던 '나'는 결국 "인간의 형체가 바닥났"다. 타자에 의탁해 상황을 모면하고 모종의 감정을 유예하려던 계략은 종국에 타자로 하여금 '나'를 "달걀도 깨뜨리지 않을 만큼 얌전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약한 존재로 치부한다. 아직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몸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유약해진 '나'는 강력해진(타자에 자기를 의탁하면서 타자는 '나'보다 강력한 존재로 부상한다) 타자 앞에서 그저 "모든 병을 긁어낸 듯 말끔하게 나은 것만 같"다고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그야말로 타자에 의해 "사로잡힌 세계"가 된다. '나'가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계의 편위는 더욱 명백해진다.
이렇듯 윤혜지는 자기의 세계가 타자의 세계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그 유약함을 직시한다. 이제 그는 그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데 기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시작한다.
2.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었다 몸집이 작고 짧은 데님 바지를 입은 언니 요를 펴고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에게 물어보았다 얘는 언제쯤 깨어날까
냉장고에서 내 몫의 아이스크림을 꺼내 놓고 싶어서, 녹을 게 분명한데, 그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느껴져 꿈속에서도 좋았다
마음은 생생하고 그윽하고
선한 사람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문장이 적힌 책을 읽었다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렇다면 언니도 하염없이 그림자구나 우리가 나무이고 지금 서성이는 저들이 드리워진 잎사귀인 것처럼
(…)언니가 흐느꼈고 우리들은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다 많은 것들이, 퍽 많은 것들이 나왔다 간혹 용서에 관한 이야기도 했지만 그 생각은 연약해서 곧 다른 걱정, 그러니까 관습적인 생각들로 덮어졌다 언니는 어른이었다 한 종류의 울음밖에 없는 인간
누군가 지친 문을 열고 음식을 내왔다 이것 좀 먹어봐 여름 야채를 가득 넣고 키슈를 구웠어 랩을 씌워둔 키슈는 오래되었고 길이 잘 들어 온순하다 이것을 만든 엄마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텐데, 저렇게 곯아떨어졌는데 키슈는 영문도 모르게 포실하구나 싶어
울었다
사실
선한 사람과 온전한 사람이 같지 않다는 이야기는 엄마의 맑은 탕이다
모두가 조금씩 떠먹고 떠난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을 헤아려보는
사실
이 부분은 망친 시에서 오려온 것이다
상해버린 삶에서 시를 도려내듯
- 「그림자 언니」 중에서
"꿈속에 등장한 사람들은 당신의 그림자"라는 점에서 "오갈 데 없는 나를 받아주"고, 재워주고 내가 "수고조차 들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진 "어제 꿈에 나온 언니"는 시인의 그림자, 곧 자신의 일부분이다. 꿈속의 나의 수고를 기꺼이 대신해 주려는 꿈속의 언니, 그러니까 시인의 그림자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특히 삼시세끼를 꼬박 잘 챙겨 먹고, 7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며, 1시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하는데, 그렇다고 누가 나를 선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무거운 짐을 들고 있을 '너'를 위해 그 짐의 일부를 대신 들어주고, 사무실 바닥에 커피 쏟은 '너'의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헤아려 그것을 대신 닦아주고 있을,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선하다고 할 것이다. 기실 선한 사람은 타자로의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온전한 사람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자일, 선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 "꿈을 지우다 부러뜨리다 뭉개다 꾹꾹 누르고 반죽하"는 시인의 모습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도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었나 보다.
여태 선한 사람으로 살았을 시인의 삶은 "랩을 씌워둔 키슈"처럼 "길이 잘 들어 온순하"고 누르면 푹하고 꺼질 것처럼 "포실하"다. 시인은 그 삶이 "상해버린 삶"이라고 말한다. 온전하지 못한 '그 삶'을 말하며 "울었다"는 그를 두고 혹자는 삶에 대한 후회라고 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울음이 이제라도 타자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서 오는 벅차오름이라고 확신한다. 회피해버릴 수도 있을 '그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한 끝에 시인은 자기 삶의 방향성을,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확립한 것이다.
3.
타자에 의한, 타자를 위한, 타자로 인한 삶에서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시인의 노력은 다만 '자기 삶' 하나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으로 확장된다. 그는 타자로부터의 모든 인간의 자유를 꿈꾼다. 내가 아무리 '너'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한들, '너'가 '나'의 시선을 의식해서 '너' 자신을 단속한다면 '나'는 또한 그 사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나'는 전연 자유로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맥락의 생활」은 그 사실을 기저에 두고 이 시대 아이들의 삶을 응시하면서 그것의 오류를 들추고 있다.
거대 쇼핑몰의 한 쪽에서 우리는
아이스링크의 인공 얼음을 지치는 우리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빙질이 훌륭하다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가 아니니까
금이 가도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 잊어버리고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시고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은 사랑이 넘치고 훈훈해서
금방이라도 아무나 커버릴 것 같다
(…)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로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이야기의 도입부를 잊어버렸다
(…)
너는 내 에피소드를 들어도 웃지 않는다
울어준다
- 「고맥락의 생활」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아이들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고 말한다. 즉 거대 쇼핑몰 한 쪽의 "아이스링크"와 "숲의 끄트머리에 있던 그 호수"이다. 물론 위 시에 등장하는 "우리의 아이"가 살아가는 세계는 전자의 것이다. "빙질이 훌륭한" "인공 얼음"으로 만들어진 그곳에서 아이는 "여기저기 있는 불운 따위"는 고민하지 않는다. 거대 쇼핑몰의 아이스링크는 이미 어른들에 의해 단단하게 건조(建造)된 안전한 얼음판일 테니, 아이는 어떤 중대한 고민 없이 그 위에 오를 것이다. 더구나 "아이스링크의 유리벽 너머"에는 언제든 아이의 불운을 쫓아줄 "부모라고 주장하는 한 떼"가 있다. 곧 나보다 강력한, 어른이라는 타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 위에서, 부모라는 타자의 시선 아래, 아이는 자기 주체성을 잃어간다. 한편, 후자의 "그 호수" 앞에서 아이는 생각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얼음판이 깨지면 죽을 것이고, 깨지지 않으면 살 것이다. 아이는 또 생각한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 얼음판 위에 오를 것이냐, 오직 살기 위해 다시 숲으로 돌아갈 것이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아이의 독자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스링크"에서의 생활은 어떤 배경지식이 필요 없고 단순하게 관계에 의존하는 '고맥락의 생활'이다. 반면 "그 호수"에서의 생활은 가치 독립적이고, 자기 확신에 의한, 주체적인 '저맥락의 생활'이다.
시인은 이미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맥락 문화의 오류를 응시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진 보급형 로봇(「사랑과 공」)처럼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주체성과 그 태도로 하여금 그들의 자유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통제되고 단속될 것을 염려한다. 이처럼 시인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속박되고 통제되고 있을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면서 끊임없이 그 시선과 투쟁한다.
4.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각자의 진정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 타자의 시선에 억압되었던 자기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 "야생"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무덤 위는 미끄럼 타기 좋아
(…)
한 번도
온전하게 겹치지 않는
눈송이
눈송이
손가락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간다(…)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린다 여긴 잊어버려 이제 넌 오지 않을 거야 다른 것이 될 거야
(…)
가방을 부려 놓으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사랑하던 것들이 있고
이제 그것들은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이렇게 시간이 가는 건가 봐
대답 대신
눈송이
- 「야생의 눈사람」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무덤 위에서 미끄럼 타던 자신의 유년 시절을 회상한다. 펄펄 내리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로 하나씩 받아 혀로 가져"가기도 하고, "무덤가에서 눈을 뭉치고 굴"리기도 한다. 시간이 가면서 유년의 기억들이 이제는 "죄다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지금, 그는 다시 한번 "대답 대신 눈송이"를 말한다. 온전한 사람으로 살고 싶을 그는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눈송이를 감각하던 그때, 그 야생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시에서 아홉 번이나 "눈송이"를 언급한 것은 야생의 꿈, 그러니까 자신이 진정으로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다시 한번 꿈꾸고 싶은 그 열망에의 외침일 테다.
그리고 타자의 시선과 현실에 굴복하지 않은 끝에, 우리 곁에 시인 윤혜지가 있다.
윤혜지의 시는 분명 우리를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제 그것을 동일화하고 내면화하는 능력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과연 무엇일지 마음을 솔직하게 진단하고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하는 진실한 꿈을 구출하자. 기실 그것은 '나'와 '너', 우리 모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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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문구는 자기 인식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든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탐문하려 할 때마다 타자의 시선이 끼어들고 타자의 언어가 개입하기에 온전한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할 때마다, 나는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의 눈길에 갇히고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말 속에 규정되는 존재로 머물게 된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온전한 자신의 시선과 언어로 자기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를 시인의 방식으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허연이라면 “나는 지옥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 창문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 인생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불행의 냄새가 나는 것들 하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 치욕의 내 입맛들 합성 인간의 그것처럼 내 사랑은 내 입맛은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고 오늘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 살기 같은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없이 지겹도록 솟구치는 것 불온한 검은 피,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 - 「내 사랑은」 부분 (『불온한 검은 피』, 1995) 요동치는 시선마다 깨닫는 것은 나를 나로 존립하지 못하게 하는 적대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기에게 속한 “반기”의 흔적들로서, 나 이전부터 존재해 온 나에 대한 적대의 잔여들이다. 그렇기에 내게는 언제까지나 “불행의 냄새”가 지워지지 않고, “치욕의 내 입맛들”도 씻기지 않는다. “어젯밤에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아침엔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는 것”은 모두 나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왜 그런가? 피가 “검은” 까닭에, 그 피가 “불온한” 탓에. 타자의 지옥을 물을 것도 없이 자신이 벌써 지옥이기에, “내 사랑은 천국이 아닐 것”이다. 이것이 허연 시작(詩作)의 시작, 자기 인식의 기원일 터. 그러나 자기라는 생(生)이 여전히 지속하는 한 지옥은 아직 예감일 뿐이다. 사랑을 곧장 지옥이라 부르기보다 “천국이 아닐 것”이라 유보하는 시구는, 시인이 선 지금-여기가 지옥과 천국 사이의 어딘가, 어쩌면 연옥과도 같은 장소임을 암시한다. 현재로도 미래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시간의 정체 속에 영원히 유동하기만 하는 기이한 장소에 ‘나’가 있다. 아무것도 참조하거나 의지하지 못한 채,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야 하는 여정이 그의 운명이다. 성장도 없고 퇴행도 없는 이런 상황은 소년을 소년으로 멈춰 세운다. 언젠가 존재했으리라 믿을 뿐인 “푸른색의 기억”은 저 검은 피의 불온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2008) 2. 벌어질 일은 반드시 사랑은 하필 지긋지긋한 날들 중에 찾아온다. 사랑을 믿는 자들. 합성섬유가 그 어떤 가죽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모르는 자들. 방을 바꾸면 고뇌도 바뀔 줄 알지만 택도 없는 소리다. 천국은 없다. - 「천국은 없다」 부분 (『내가 원하는 천사』, 2012) 순전한 사랑에 대한 꿈과 열망, 그것은 천국이 실재한다는 믿음과 다름없을 것이다. 궁지에 몰릴수록, 곤경이 가파를수록 우리는 사랑에 대한 꿈에, 천국에 대한 믿음에 매달린다. 하지만 어쩌랴. 두 다리가 디딘 발판은 “지긋지긋한” 지상의 한복판. 이 땅의 어디로 가든 지상에서의 열망과 믿음은 결국 제자리뛰기의 지긋지긋한 반복일 뿐이다. 그것이 “인간적”이라는 걸 왜 모를까? 뛰면 뛸수록 지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지고, 뜀은 끝내 멈추고 말리라. 십자가가 많았다. 왜 개별적 인간들은 임연수어가 있고 잘 끓여진 카레가 있고 심지어 맥박이 뛰고 끝도 없는 겹겹의 파도가 있는데 신을 보려고 할까? 망하기 전에 서둘러 망하려고 할까? - 「해변 정류장」 부분 사랑을 위한, 천국을 향한, 신에 대한 자유. 우리를 홀리는 저 말들은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여기 지상에 머물다 끝내 여기서 소진하리라는 역설의 진실을 표현한다.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은 상상이자 허상이요, 환상일 따름이니. 딴 생각을 하다 버스를 놓치고 낮술에 취한 동네 할아버지에게 핀잔을 들었다 “잘 알아 두라고... 자유는 스스로 자에 말미암을 유야” - 「해변 정류장」 부분 이러한 자유는 제자리를 맴도는 뜀뛰기, 수백 번 수천 번을 굴린다 해도 한 걸음 못 나아가는 쳇바퀴 달리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 다른 생활을 각자 영위하며 생을 소모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리멸렬하고 사소한, 지상의 흙 한 줌 부스러기에 연연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모닥불을 보고 찾아온 길고양이가 있었다. 캠핑오는 사람마다 이름을 지어줘서 고양이 이름이 한 백 개끔은 된다고 캠핑장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레오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오는 우리 텐트에 올 때만 레오였다. 레오는 우리 구역에선 한 번도 빠짐없이 레오였다. 이박 삼일동안 그랬다. 하지만 레오는 옆 텐트에 가면 줄리앙이었다. […] 캠핑은 지리멸렬했다. 사소했다. 끝까지 사소했다. 데크 바닥을 핥는 소리가 들렸다. 레오였다. - 「지리멸렬하다는 것」 부분 “레오”는 사자의 이름이다. 동시에 “줄리앙”이기도 한 그것은, 자신이 무엇이든 타인에 의해 보여지고 명명되는 존재로 삶을 스쳐 지나간다. 무엇이라 불리고 자신하든, 끝내 “데크 바닥을 핥는” “사소”한 존재가 그것. 치욕적이거나 불운한 운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다. 불가피하며, 필연적인 생의 주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 「작약과 공터」 부분 작약이 피었다. 사람들이 먹고 놀며 흥청거리는 장소, 거기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 그리고 작은 새의 사체 옆. 이를 신비롭다 할까, 아름답다 부를까? 살아 있는 “나”에 감사해야 할까? 내 시선에 들어온 작약은 “목 매 자살한 여자” 같기도 하고,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슬픈 태도” 같기도 하다. 우울한 감정을 불러내는 그 시선은 나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작약은 다만 “잔인 속의 고요”를 품을 따름이다. 저 고요를 삶도 죽음도 통과하고 있다. 자살한 여성이든 슬픈 태도든 작약은 그 사이 어딘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책임”져야 할 것은 마음대로 보고 제멋대로 명명한 “나의 재능”일 터. 분명히 해두자.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보며 내가 부르는 모든 것은 ‘이 나’의 주변을 떠나지 못한 자아의 잔상이라는 것을. “작약과 나는/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 놓았다”(「작약과 공터」). 3.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 「오십 미터」 부분 (『오십 미터』, 2016) 소년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 성장을 거부한 채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러므로 타자의 영향을 받고, 타자의 시선 속에 자기를 두며,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꾸미는 일이다. 이는 자기의 길이 아닐 터이기에 소년은 사랑의 바깥에 머물고자 한다. 소년은 소년으로 남기를 원한다. 한 번,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다 주고 약해지면 남는 건 없어 대신 ‘사랑’말고 필요한 것만 하는 거야 신념 같은 거 비웃으면서 그거 알아?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 이게 파도랑 가장 오래 노는 거야 절대 다 적시지 않는 거야 반 정도만 적시고 꼭 반을 남겨 두어야 해 - 「이끼 키우기」 부분 “‘사랑’ 말고”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파도에 발 담그고 파도 그리워하기”란 무엇일까? 행하면서 행하지 않기, 혹은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기. 사랑을 연기(演技)하되 사랑을 연기(延期)함으로써 사랑 곁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 어쩌면 이것은 사랑의 연기(緣起)가 아닐까?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끊지도 끊기지도 않도록 다만 곁을 맴도는 것. 그러니 사랑 대신 사랑하지-않기를 사랑하자. 알았지?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봐 이끼에 물 주자 - 「이끼 키우기」 부분 소년이 성장하지 않듯 사랑도 성장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끼는 성장하겠지. 사랑 아닌 사랑을 누리며,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소년처럼. 그런데 소년은 정말 자라지 않는 걸까?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 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수없이 없이 많은 희안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뼈 속으로” 난 “길”은 내적 성장을 암시한다. 외형은 자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수많은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하고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는 없다. “애인이 아닌” 듯 “사랑이 아닌” 듯 시간은 흐르고, 준 것과 남은 것이 이루는 반비례 속에 뼈 속의 길이 생겨날 것이다. 시는 그에 대한 명명이며, 성장 대신 내어주거나 얻은 것, “늘 그리워하는 병”(「오십 미터」)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희안한 초안들”이란 아마도 제대로 성장했다면 갖추었을 소년의 꿈이자 열망, 믿음이 아닐 것인가? 환상과 허상, 상상을 통해서나마 성장이, 어떤 성숙 같은 것이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애인은 혼자가 되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부분 그런 성숙은 나눌 수 없는 것, 나누어지지 않는 것,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일 터. ‘나라는 나’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간신히 표명되는 모종의 자기 감각일 테니. 그것은 불가능한 욕망이지만, 불가능을 통해서만 바라고 믿을 만한 감각일 것이다. 차마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들과 나누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Y는 하루가 차갑고 현명했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무렵이었고 바다에서는 소녀들이 까르르대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녔고 상인들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확실하게 살고 싶거나 죽고 싶거나 한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그저 해변이었다. […] 십일월의 바다는 Y에게 의미심장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이었고 감각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관리되지 않는 것 해변에서 Y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파묻었다 - 「Y의 해변」 부분 4.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중국집에서 혼자 단무지를 씹으며 생각했다 한파주의보가 내린 날 저녁 기억의 판화로 남은 제행무상의 보살들을 생각했다 […] 그들도 나처럼 어느 헐한 저녁 혼자 단무지를 씹고 있을까 가여운 생을 씹고 있을까 - 「생은 가엾다」 부분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2020) 지옥이든 천국이든 삶을 버티고 이어간다는 사실은 가엾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들은 그 같은 생을 부대끼며 우리가 내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들일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어느 헐한 저녁/혼자 단무지를 씹”는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늘 하던 일을 하고, 그 하던 일들이 되돌아와 우리로 하여금 다시 그에 빠져들게 만든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바로 그 같은 삶의 무상성을 요약하는 말이다. 야근조 몇이 둑방 위를 걸어간다 그들에게는 한 세계가 있고 마을에도 한 세계가 있고 남자들이 밤에 해당하는 몇 가지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은 마을 안으로 모든 것을 감춘 채 하루를 세상 어디쯤 배치한다 […] 남자들은 늘 했던 일들을 하고 마을도 늘 했던 일들을 한다 약속 같은 게 없으니 망칠일도 없고 복잡하지도 않다. […] 잠자리에 든 노인들의 기침소리가 들리고, 하루가 간다. ‘제행무상’ 말없이 이루어지는 밤 - 「어둠과 마을」 부분 기약이 없는 일상, 그것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다. 영원회귀처럼 찾아드는 “어둠과 마을”의 풍경은 지금-여기의 이 순간만이 실재하는 것임을 낮게 속삭인다. 허무감의 극치일까? 동시에, 실재하는 순간 속에 꿈과 열망, 믿음을 투여하는 성실한 허무주의자, 초개인주의자의 나날이 그로부터 펼쳐질지 모른다.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 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 「판교」 부분 타자의 눈길과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 ‘나만의 나’ 속에 자신의 거소를 짓는 것. 성스러움일까, 아닐까? 저 지독스러운 고집과 고독, 무한한 자부와 겸손, 기이할 정도로 사소한 것과 존귀한 것이 얽혀들어 만드는 삶. 의미를 알 수 없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의 아이러니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 「판교」 부분 생이 가엾다면 죽음을 멀리할 것이다. 오만하게 생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그렇기 위해서라도 성실한 허무주의자는 죽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이 태어날지,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탓이다. 장마처럼 무겁게 내려앉는 기상(氣象)을 견디고 버티는 시를 길어낼 수밖에. 작고 붉은 열매들을 떨어뜨렸다 죽음이었다. 우리는 노인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받았다 다행히 채 하루가 가기도 전에 열매들은 비가 잠시 그친 사이 재활용 더미 속에서 포자로 피어났다 힘은 없지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이다. 장마덕분이었다. - 「장마의 시」 부분 이 생애에서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천국이었으면,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어떤 종착지라면 우리는 초탈할 수도 있고, 완전한 체념에 도달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작고 붉은 열매”가 떨어져 “포자로 피어났”을 때, “난생 처음 뭔가가 된 것”을 느꼈을 때, 그것이 천국에서도 지옥에서도 맛볼 수 없는 지금-여기의 사건임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자신이 여전히 소년이라 확신할 수 있을까? 삶만큼이나 죽음도, 죽음만큼이나 삶도 알아버린 저 “장마” 속에서. 이곳에서는 다만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받아들이는 것이, 혹은 그 모든 것을 시로 길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소년은 긍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누구인지 답할 수 없음,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성장하지 않는 소년을 멈춰 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문턱이 아닐는지. 이 계절에 나는 다시 한 번 충분하지 않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딜 것이다 포자처럼. - 「장마의 시」 부분 * 성장을 거부한 소년에게 시간마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아마도 내적 성장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났다. 혈관을 흐르는 피가 ‘검고 불온하다’며 천국과 지옥을 뇌까리던 시절을 “오만”하다고 회상조차 하게 되었다. 신화처럼 ‘푸른색의 기억’을 찾기보다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시절의 “동네 이름”에 더 마음이 갔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말할까? 달이 유난히 빠르게 지나갔다던 그 동네 이름을 기억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때 번성했었다는 남녘 어느 도시로 문학 강연 가는 날 문화센터를 찾아 헤맨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달이 빨리 흘러갔다던 그 동네를 찾고 있었다 원로라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시는 비명’이라고 오만한 말을 지껄이고 밤거리로 나왔다 - 「항구」 부분 상투적인 통찰의 몸짓 없이, 타자의 시선과 언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는 성장과는 다른 무엇을 경험 중인 소년일 터. 그가 여전히 ‘나쁜 소년’일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리에 마냥 서 있지만은 않은 여정 속에 있음은 틀림없다. 자신을 위한 어떤 “기념”도 세워두지 않은 채 여전한 걸음을 옮겨가는 누군가가 있다. 너는 좋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권력으로 알지 않았고 사랑이 끝났을 때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시체 공시소에나 있을 무연고 시신처럼 어떤 기념도 되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가슴을 두드렸다 몇 알의 불안장애 약은 시원치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세월을 항구에 놓아두었다 - 「항구」 부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를 펴낸 지 13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가 나왔다. 그리고 4년을 주기처럼 『내가 원하는 천사』(문학과지성사, 2012), 『오십 미터』(문학과지성사, 2016),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문학과지성사, 2020)가 출간되었다. 그 사이사이에 끼어 나온 산문집이나 동시집, 시선집을 제외한다면, 다음 시집이 나올 시간을 놓친 셈이다. 아쉬워해야 할까? 시인 허연은 아직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멈추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를 방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무상했던 거부와 부정의 세월을 송두리째 내버리지 않고 지금-여기의 순간으로 매번 끌어당기는 것은 거기에 머물렀던 자신이 지금의 자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을 온전히 내가 듣는 것. 허연에게 시란 그것을 멈춤 없이 계속하는 글쓰기이며, 생의 허무주의를 성실히 실행하는 행위일 테니까. 천국보다 낯설지만, 지옥보다는 낯익은. 패배한 공화국이었지만 묻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 「개정판 자서」 전문 (『불온한 검은 피』, 민음사, 2014)
1. 지금 우리의 영혼이 몸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이곳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건, 시속 10만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지구의 맹목을 온 힘을 다해 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익숙해지고 말아, 어째서 이리 늘 쉽게 지치고 마는지 곧잘 잊어버리곤 하지만, 지구의 중력에 온전히 뿌리내리기 위하여 온 생을 걸어야 하는 몸과 영혼 사이에 주어진 가혹한 계약은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안식의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찾아와 스스로의 존재를 태연히 드러내고야 만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이 쉼 없이 반복되는 중력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순 없을까. 맹목의 속도와 방향을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할 수 있다면 삶은, 시간은, 감각과 영혼은 얼마쯤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주어진 몸의 시간에 안착하거나 가상의 자유 속으로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과 영혼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내며, 몸과 영혼 사이의 간극과 시차로 매번의 삶을, 한 번도 발설된 적 없는 존재의 목소리를 충실히 증명해낼 순 없을까. 이다희의 이번 시편들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중력을 찾”으려는 “충혈된” 낮의 시간과 “중력이 희미해지”는 밤의 깊이(「햇빛이 오는 쪽」, 『시 창작 스터디』, 문학동네, 2020) 사이에서, 그 아득한 현기증을 끝까지 응시하고 마주하려 한다. 이는 물론 그의 첫 시집에서부터 자주 발견되었던 모티프일 테지만, 유독 이번 시편들에서 더 선연하고 돌올해 보인다. 중력의 바깥도 내부도 아닌 희미하고도 혼란스러운 감각과 사유의 경계를 성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며, 격렬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마음의 움직임을, 작지만 분명한 존재의 울음을, 눈길을, 선득한 혼란을 아득한 허공 위에 담담히 풀어놓는다. 무감해진 생의 감각과 굳어버린 언어의 몸에 작은 숨구멍을 내고(“그녀의 귓불에 점처럼 박힌 구멍을 본다”, 「귀걸이가 있다면」), 파도처럼 서서히 밀려왔다 물러나는 존재의 충동과 생동하는 호흡을 문장의 심연 한가운데에 단단히 심어놓는다. 그렇게 중력과 허공이 뒤엉켜 범벅이 된 혼곤한 꿈들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2. 이다희 시의 울림은 중력과 허공의 경계를 섬세히 살피고 어루만지려는 시선의 견고함과 그 깊이로부터 온다. ‘너머’에 대한 갈망과 충동은 시의 가장 원초적인 본성과 맞닿아 있지만, 그의 시에는 언어의 관성이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적이고 추상적인 구호로서의 절박함이나 성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때로는 산문시의 차분한 호흡으로, 때로는 힘들이지 않고 찍어낸 스냅샷과 같은 이미지의 경쾌함과 리듬의 산뜻함으로, 우리의 삶과 감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유의 허방을 적확히 찌르고 그 폐부를 찬찬히 응시한다. 중력의 맹점이 음화로 인화되어 나타나는 위태로운 매혹의 순간을 담담히 매개하고,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당장이라도 무너지며 뒤섞일 것 같은 팽팽한 임계점의 순간을 생생히 증언해낸다. 다음의 시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조카는 숫자 8이상을 세지 못한다. 조카는 숫자 8까지 세고 다시 1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8다음으로 17을 외쳤는데 누구도 조카에게 17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마 tv에서 보거나 책에서 봤겠지. 다들 나름의 추측을 보태었다. 나는 지니가 갇힌 램프를 문지르는 것처럼 조카의 작은 뒤통수를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8다음에 왜 1이 아니고 17인지 알려줄래? 조카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잠에 빠져든다. 조카는 훨씬 무거워진다. 잠의 중력이 나에게 전염되는 것 같다. 바지에 침이 묻는다. 무릎을 내어주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잠에 빠진 인간은 잠으로 돌진하지만 무릎을 내어준 인간은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상에 남아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완전히 혼자였다.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덩그러니. 문득 살아야 할 시간들을 헤아려보았다. 나는 나의 수명을 알 것 같았다. 가면 갈수록 조롱은 많아지고. 내 마음은 진실을 불태웠어. 먼지가 된 진실이.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채로. 아, 바람에 흩날리네. 자동차는 가만히 있고 긴 고속도로가 타이어 아래를 미끄러져 빨려 들어가고 있다.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 눈물이 흐른다. 이 눈물은 마치 남의 눈에 매달려 있다가 내 볼에 툭 떨어진 것 같다. 만족은 이렇게 찾아온다. 이제 집에 가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 - 「크로마키」 부분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지구의 중력과 “딸깍 소리를 내며 맞물리”는 작은 거짓과 착각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안전하게 보증된 대리만족에 기대어 하루치의 허기와 갈증을 근근이 견디며 버텨내 보지만, 아주 가끔 아무리 정교히 꾸미려 해도 위장된 속임수들이 온통 속절없이 드러나고야 마는 아찔한 순간들을 맞닥뜨리게 되기도 한다. 마치 그린 스크린을 배경으로 배우들이 상상의 연기를 펼치는 “크로마키” 촬영 현장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처럼,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조카”의 깊은 잠과 그 잠의 중력은, 화자를 둘러싼 모든 감각과 상념을 적나라한 허공뿐인 어둠 속으로 단번에 밀어내 버린다.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오롯이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허공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화자는 그간 지상의 몸에 달라붙어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어온 스스로 “불태워” “먼지가 된 진실”의 자리를 아프게 직시한다. 그러나 온전히 허공뿐인 것은 아니다. 화자는 스스로가 지워버린 진실의 텅 빈 자리만이 아니라, “조카”의 작은 비밀, 8 다음이 9도 아니고 1도 아닌 정확히 “17이라는 수수께끼와 함께” 남는다. 중력에 거세당한 텅 빈 허무의 시간이 아니라, 어떠한 추궁과 협박에도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수수께끼-허공의 비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그러니 “깊은 밤하늘을 날아간다는 노래 가사는 이런 밤이 되어서야 구체성을 얻는”다는 고백은 이처럼 기나긴 우회 끝에 도달한 해방의 순간에 대한 가장 선명하고도 뜨거운 헌사가 된다. 물론 이는 ‘중력’을 제거하거나 추방해버린 관념과 추상으로서의 자유는 아닐 것이다. 비록 그것이 “만족”이라는 이름으로 묘사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깊은 잠”을 촉구하기 위한 매개로서 자리하고 있을 뿐 도피나 회피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깊은 잠”은 훼손된 수수께끼와 진실, 허공의 자리가 다시 중력과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고요한 안식과 평화를 약속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력과 허공이 뒤엉키며 어지러이 뿌리를 내리는 매혹의 순간은 다음의 시에서 좀더 명료히 집약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참새가 지붕의 가장 끝에 앉아 있다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에 참새의 발이 저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겠지 곧 참새는 분주하게 날아가 버린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이 다시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대리석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은 사과를 베어 물었다 나는 물감이 터지지 않을까 - 「코가 붙듯이」 부분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는 끝”이 품고 있는 지상의 중력은 그 “날카로운 끝을 감싸고 있”는 “참새의 발”과 아스라이 균형을 이룬 채 흔들리고 있다. 참새는 언제라도 스스로가 품은 허공 속으로 솟구치듯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만, 화자의 시선은 허공에의 투신이 만들어내는 자유와 해방의 상상력보다는 중력과 허공이 만나 이루어내는 위태로운 균형과 혼란에, 잠재태들이 극에 달하는 임계점의 순간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코가 떨어진 대리석 조각상에 다시 코가 붙듯” 허공이 중력 위에 다시 내려앉는 형상적 필연은 “영원히 재채기를 참고 있”는 “대리석”이 품고 있는 내면의 무한한 잠재태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물감이 터지”듯 서로의 경계를 범람해 뒤섞이기 직전, 모든 혼란과 소란이 폭발하듯 촉발되기 직전, 영원한 시작의 순간들에 바쳐진 위와 같은 시들은 이다희의 문장이 오래도록 정박해 있고 싶어하는 풍경이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게 한다. 3. 중력과 허공의 경계가 위태로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팽팽한 긴장과 대립에 깊이 천착해 있는 이다희의 시는, 화자에 의해 얼마간 의도적으로 도입된 ‘허공’이 촉발하는 리듬과 호흡의 운동성에도 긴밀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는 때로, 더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감각과 사유의 극한을 돌파하려는 그의 시창작 방법론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다희 시 속 허공은 주체와 세계를 모두 지워버린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그 허공마저도 감싸안으려는 타자의 구체적 체온으로부터, 서로가 품은 울음의 깊이를 공평히 나누어 가지려는 응시의 뒤엉킴으로부터 촉발된 가장 따뜻한 부재이자 간극으로서 매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채울 수 없는 결여와 부재를 부산스러운 의미의 소란과 몸부림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로서 부재를, 침묵을, 설명될 수 없음을, 그 적나라한 맹점을 끌어안은 채, 그 허공이 품은 열기와 온기로 서로의 맹목과 허기를, 갈증과 결핍을 함께 앓고 견디며 기꺼이 나누어 가지려는 것이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시들이 가능해진다. 파란 잉크가 종이에 닿는 순간에 공기에도 노출된다. 종이와 공기가 파란 잉크를 나누어 가지는 순간에도 다음 문장이 필요해.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중략) 두 개의 스페이스 바, 두 개의 공백. 왼손 엄지에 하나 오른손 엄지에 하나. 두 개의 우주는 바깥을 원한다. 겨울을 원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외로웠다. 남편을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가 잊은 겨울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겨울은 돌아오지 않는다. 겨울밤이 울적하다면 계절이 지구의 오래된 망상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우주로 다시 쓴다. 모든 꽃이 자해의 흔적이라면 우리는 꽃의 종류를 골라서 꽃집을 나온다. 머리보다 큰 수국을 높이 들고 달리는 저 여자는 대낮을 파란 불꽃으로 불 지른다. 기쁘다고 하기엔 바쁘고, 슬프다고 하기엔 꽃이 아름다워 눈물이 마른다. 지금 여자가 당신에게 윙크를 한다. 당신에게. 눈물이 아니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윙크. 윙크. - 「볼펜, 남편, 키보드」 부분 “잉크 먹은 노트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잉크와 종이가 만나는 단순한 사건에조차 함부로 제거하거나 축출할 수 없는 허공이,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설명될 수 없는 신비와 그 신비를 품은 우주가 오롯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휴대용 키보드 속 두 개의 스페이스바처럼 서로 꼭 닮았지만 그럼에도 결코 하나가 되지는 못하는 두 개의 공백과 허공으로, 간극과 평행선으로 남편과 자신을, “여자”와 “당신”을 나란히 놓아둔 채 차례로 호명한다. 두 개의 허공은 막힌 문장에 뚫린 이중의 숨구멍이 되어 시적 주체가 견디고 감내해야 할 중력의 시간을 “파란 불꽃”의 선연한 열기로 한껏 뜨겁고 풍요롭게 타오르게 만든다. 온전한 이해나 공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서로의 심연이 거꾸로 서로를 더 깊고 뜨겁게, “바쁘”게, “아름답”게 만드는 까닭은, “눈물”로 애타게 호소하거나 원망하지 않아도 서로의 허공을 “윙크” 하나로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품어줄 수 있다는 오래되고 단단한 신뢰가 서로에게 깊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려 깊은 눈치와 배려는 꼭 오래된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명쾌히 밝혀주고 있듯, 이것은 결코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가 오면 악기들이 퉁퉁 불어서 한참을 달래야한다. 이 차이를 알아낼 수 없다면 연주자가 되기 어렵다. 연주자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비가 쏟아지는 하늘에서 시선을 쉽게 떼지 못한다. 이것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나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고 요즘 생활이 어떤지 물었다. 그녀는 조용히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찻잔 테두리에 둘러진 황금을 보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울음이 그녀의 말을 방해했지만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황금처럼 보이겠지만 황금이 아니라고.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손에 찻잔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찻잔을 꼭 쥐고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나는 찻물이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그녀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마치 자기 자신을 조심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사람처럼. 한결 맑아진 얼굴로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렸다. 찻잔은 이제 텅 비어 있고, 자신의 영원한 불만족에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 「바로크 일기」 부분 손님을 맞는 데에 꼭 연주자로서의 자질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손님을 맞는 행위와 연주자가 악기를 대하는 태도 사이에 모종의 유사성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겉으론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소리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하고 이에 적절히 응답해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주인인 ‘나’는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만, 그녀의 ‘울음’에 어떻게든 응답하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라는 ‘허공’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방해”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화자는 “나는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함으로써 그 절대성을 확인하고 선언한다. 그는 그녀의 “손에 찻잔을 쥐여” 준 채 떨리는 손이 잦아들어 “찻물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저 “기다”릴 따름이다. 타자의 심연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 이 시의 깊이를 만들어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위 시가 특별해 보이는 건, ‘그녀’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윤리적 당위로 간단히 환원되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는 그녀가 떠난 뒤 “방에서 찻잔과 함께 어둠을 기다”린다. 마치 원래부터 진짜 손님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허공이 끌고 들어온 어둠이었다는 것처럼. 이 어둠에 각인된 결코 지울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이 “영원한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이다희 시의 시적 주체들은 이미 이 어둠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에 충분히 익숙해진 듯하다. 부정하고 밀어내야 할, 길들이고 제거해야 할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우리를 우리로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생의 조건이자 우리를 고유하게 만드는 존재의 근거이자 토대로서 어둠을, 허공을 정확히 응시하고 끌어안는다. 이다희의 시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둠의, 허공의 순례자들이다. 허공과 중력이 만나 이루어내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일순간 부풀어 오르고 불현듯 멈추어 서는 호흡의 중심에, 임계점의 날카로운 간극에 아득히 사로잡힌다. 4. 이다희의 문장은 언제나 하나의 쌍으로, 두 개의 호흡으로, 엇갈리며 뒤엉키는 두 벡터로서 존재한다. 중력으로부터 허공이 솟아오르고 허공으로부터 다시 중력이 자라나는 이 종결될 수 없는 존재의 충동과 반복은, 그의 시가 펼쳐 보이는 풍경을 이 상보적 운동성 속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시는 관성과 중력에 굴복하지도 어둠과 허공을 향해 손쉽게 탈주하지도 않는다. 경계를 함부로 넘겨짚지 않으며, 너머에 진실이 있으리라는 순진한 희망도, 이를 향한 과장된 몸짓도 믿지 않는다. 그의 시가 길어 올리는 빛나는 순간들은 중력과 허공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견고한 침묵과 텅 빈 부재의 물성으로부터 세상 모든 빅뱅의 혼돈과 폭발의 열기를 읽어낼 줄 아는 극도로 차분하면서도 뜨거운 이중의 시선으로부터 획득된다. 이다희 시의 독특한 인장은 이처럼 존재와 무가, 중력과 허공이 끊임없이 서로의 자리를 뒤바꾸며 영원히 그 임계점의 자리에 머무르려는 존재론적 사유의 역동성과 그 충만함 속에 자리한다. 이를 임계점의 시학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버려진 밤들이 품은 내밀한 임계점의 순간들을 그의 문장이 초대한 또 하나의 깊은 맹목 속에서 캄캄히 발음해 본다. <끝>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할 때 반가움보다 피로가 앞서는 것은 지난 계절이 지나치게 소란했기 때문일까. 이별 뒤에는 긴 피곤함이 있다는 돌아간 철학자의 말1)을 곱씹는다. 시절의 시곗바늘에 정확히 때맞추어 걸음을 옮길 수 없을 때 환절기는 더욱 길어진다. 이것도 하나의 사태라면 사태다. 사건이 아니다. 한계는 아직 임박하지 않았다. 그런 탓에 피로는 늘상 현재형으로 찾아온다. 이불 위에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깜빡이는 개는 피로를 모른다. 개를 바라보는 사람의 늘어진 의식만이 지난하다. 시가 스며드는 곳은 이런 장면들이다. 시란 본디 가장 느리게 도착하는 말들이고 우리의 감각과 인지가 이별 후의 인내를 감내하느라 버둥거릴 때 그것은 날카로운 하품처럼 정확하게 착지한다. 서사의 시간 속으로 전진하는 소설은 피로할 틈을 누리지 못하지만 시는 피로의 한가운데에서 한없이 늘어질 수 있다. 시는 제가 원하는 대로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 가깝게 지연되는 시의 시간은 피로의 무시간적 현재와 꼭 닮아 있다. 어쩌면 시는 피로를 껴안을 수 있는 언어의 유일한 방식이다.2)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모든 부분을 피로로 적셔 버릴 때 우리는 세상과 대결하는 자가 아니라 다만 흘러가는 자로 사라진다. 세상의 예리하고 모난 각들은 녹아서 더 이상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일렁임에 구역질을 할지언정 우리는 더는 상처 입거나 피 흘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군가가 내게 피로란 본디 우리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서 흐르는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일러 주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실존적 증상인 피로에 소진되지 않는 한 가지 역설적인 방법은 그것을 극복하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고 냅다 사랑해 버리는 일이라고, 피로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온몸에 힘을 빼고 나를 관철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로를 체현해 버리는 일이라고 말한 누군가가 있다. 그러자 그에 찬동하며 자신을 상처 낸 자의 빛으로 몸을 더욱 가까이 밀착하는 또 다른 누군가도 다가온다. 1. 사랑하는 방관자의 기록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시는 무엇 때문에 우리가 지쳤다고 알려 주지 않는다. 시라는 것이 세계에 응전하는 '나'의 목소리일 때 자신이 이미 패자라는 것을 납득한 이에게 이유의 구체들은 불필요하다. 시는 대신 이미 닫힌 문 너머로도 여전히 농구공이 튀겨지는 소리를 들려주거나(「폐회」) 어느 곳을 가더라도 이곳에 이미 와 본 적 있다는 기시감으로 새로움을 무마하고(「답사」) 종국에는 복도만큼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기지개처럼(「월량대표아적심」) 헛헛하게 개켜 볼 따름이다. 시는 무엇 때문에 피로하다는 분석이나 무엇에 관해 피로하다고 부연하지 않는다. 시는 그저 지쳐 있는 얼굴의 주름을 천천히 짚어 간다. 여기에는 그 어떤 극복의 의지나 미래를 향한 열망이 들어서지 않는다. 피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와 정반대의 작업이다. 사랑의 황홀함도 성장의 희열도 찰나의 현재에 머물다가 이내 과거의 영원 속으로 사라진다. 살아 있음이라는 단어를 차지하는 유일한 현재 시제는 피로의 것인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로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 것은 피로함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현재를 비집고 들어서는 이 무한의 감각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상황은 그때부터 조금 달라진다. 피로는 생의 관성을 폭력적으로 찢어 버릴 것이다. 미래에 저당 잡힌 역사가 된 과거도, 과거로의 수갑에 손이 묶인 미래도 모두 풀려날 것이다. 당신은 항구적인 현재로 지어진 피로의 담요 위에 비로소 몸을 누이고 그제야 은둔할 장소를 발견할 것이다("이제야 이별이다", 「배교의 에피파니」). 모더니스트들이 거리를 산책하며 금속성의 시간들이 녹아내리는 장면들3)을 시로 쓸 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었으나 인간 종이 사라져도 이 세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이십일 세기의 시인에게 끝이란 그저 관념의 수사일 뿐이다. 오히려 세계는 끝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 몸을 영원히 유지한다. 끝마저도 완전히 끝장나 버린 시대의 개인은 자기 자신을 끝장내는 방법 외에는 진정 끝을 맞이할 방법이 없다. 다리 위에서 몸을 떨구고 싶은 욕망이 들어도(이것은 죽음 '충동'이 아니다. 신중한 화자가 긴 시간 동안 지체와 망설임을 번복하며 지켜 온 욕망일 것이다.) 그것은 택시 기사의 물음표에 의해 내쳐지고, 또 한 번 끝장내는 데에 실패한 '나'의 몫으로 남겨지는 건 치미는 구토감이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 걸까, 내일도 같은 날이겠지. 반복되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마음을 주다니. 생활의 주기는 한 달에 맞춰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많은 주기들이 있다.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 다시 전철, 혹은 택시. 동호대교를 건널 때 내가 느꼈던 것. 내비게이션에 찍힌 택시의 위치. 파란 것은 한강. 직선은 다리. 그 위로 지나가는 것은 나. 혹은 택시. 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고, 음악은 트로트, 혹은 찬송가. 주여 제발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주시옵소서. (중략) 오늘이 지나면 내일은 무사할까. 가끔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를 만나면 자랑스럽게 웃으며 이 몸을 건네줄 수 있을까. 너는 참 쓰기 좋은 몸을 갖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다. 동호대교에서 한남대교 쳐다보기. 하지만 너와 걸어서 건넜던 건 한남대교. 다리 위에 서면 항상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싶어진다. 뭐였어? 뭐겠어. 우리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다리를 건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리의 중간은 기억에 없었지. 택시 기사는 말이 많았고 나는 이곳이 처음이라고 대답했다. 사거리에서 어디로 갈까요? 그러자 나는 갑자기 구토가 일었다. - 「친구의 장례식과 애인의 결혼식」 부분 일상의 세속적인 반복과 사물들은 '내' 몸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이질감이 엄습해 와도 요지부동이다. 그 몸을 다리 아래로 떨구고 싶어도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생각만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생의 중력 앞에서 그는 또 어딘가로 방향을 정해서 기사에게 알려 주어야 하고 폐쇄 회로에 갇힌 그는 급기야 구토의 기미를 느끼고 입을 틀어막는다. 그의 하루를 짐작할 때 제목이 본문에 생략된 낮의 시간을 나지막이 일러 준다. 친구는 저곳으로 돌아가고 사랑하던 이도 다른 삶 속으로 들어간 하루. 장례식과 결혼식은 모두 떠남을 공표하는 의례들이다. 떠남의 연속을 마주하며 그는 삶의 과대한 대전제에 반문한다. 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중간 지점이라는 기억이 아니라 출발점과 도착점뿐이지 않느냐고, 그래서 '나'는 다리의 중간에 '내' 몸을 떨굴 수가 없다고 항의해 보고 싶기도 하지만 무력하다. 그조차도 빌린 몸에서 비롯한 생각들이라면 그는 이 세계의 "자명종과 전철, 점심, 회의, 저녁, 퇴근. 혹은 야근"에 대하여 완전한 패배자다. 신에게 이 다리를 무사히 건너게 해 달라는 기도는 그러므로 진실한 읍소라기보다 이미 무사할 것을 알고 있는 자의 지쳐 버린 탄식이다. 근대의 산책자는 이 세계에서 바깥의 관찰자로 전락한다. 그의 발설은 작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사이렌이 울어도 시간은 사전의 종이들이 빠르게 넘어가듯 휘몰아치거나 냄비 속 기포처럼 부글대지 않는다. 흠집 하나 없는 세계의 매끄러움은 완전하게 유지된다. 「신도시」의 빛나는 빌딩과 그 사이를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도시의 관성을 알맞게 완성하는 부품들이다("빌딩과 빌딩/많은 전선이 이동했다"). 빌딩과 빌딩 전선으로 연결된 콘크리트의 감정은 서로를 일관적으로 바라보겠지 연인들은 뜨거웠다 차츰 모른 척하겠지 소방차가 교차로를 통과하는 동안 오늘도 우리는 다만 무사하고 그게 네 가족이라 생각해 봐 너를 키운 게 가족이라고 단정 짓지 마 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 같은 것 전철역에서 절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정치인과 그 앞을 지나는 직장인에게 출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까 간과 쓸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로 생긴 진입로를 따라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당신의 가족은 오늘도 무사합니까 - 「신도시」 부분 시인의 감각은 격동하지 않고 그조차도 무사할 따름이다("그것은 사이렌 소리를 따라 날아가는 비둘기 같은 것"). 이곳의 유일한 변화 가능성이 인간 의식과 감각의 번뜩이는 칼날이라면 도시의 문명은 무엇이든 막아 내고 마는 거대한 방패다. 변혁의 단초는 그저 "마지막 남은 희망대출"일 뿐일 때, 신에게 탄식했던 그는 (신은 이미 우리를 완벽한 무사함 속으로 집어넣은 이후이므로) 또 한 번 작게 한탄할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무사한 것이냐고, 연인과 가족, 정치인과 직장인의 무사함은 그저 "차례로 들어서는 차들"일 뿐인데 이것이 정말 다일 뿐이냐고 말이다. 마지막 연의 비문은("보고 있으면" / "오늘도 무사합니까") 신의 도덕과 규범에 맞서 보려는 '나'의 사소한 어긋남이다. 이 시집은 세계와의 대결에서 이미 패한 자의 입지에서 쓰이고 있지만 저항이 전연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 쓰기란 결국 "타인의 필체 속에서 / 잠시 나를 죽은 혓바닥처럼 놓아 보는 것"이라 하더라도(「필적감정」) 그 빌린 손끝에서 흐르는 잉크로 '너'에 대한 사랑만큼은 한사코 주장하려고 한다. '나'라는 대상에 대한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나'는 '너'라는 사랑에 관해 유치권을 주장할 수는 있지 않느냐고 항변한다("왜 / 이제 나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저 금목서를 당신의 미망인으로 부르면 안 되나」). '네'가 '나'를 떠나 사라졌다는 이별의 사실마저도 앗아 가려는 세계의 난폭함에 맞서 '네' 그림자 뒤에 이어진 것이 바로 다름 아닌 '나'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이 세계의 중력이 "모든 거리가 한 호흡 안에 있게 한"다면(「영원의 스코프」) '너'와 '나' 또한 하나의 원 안에서 거주할 테다. 사랑은 그의 손목을 잡거나 입술을 맞대는 촉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같은 시야 안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감하게 성취된다. 그런 당신은 언제나 너무 오래 한곳에 머무는 습관이 있다 정해진 결말은 얼마나 안락한가 누군가 꽃다발을 건네며 인사한다면 그것은 배수구의 소용돌이치는 중심처럼 무언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는다 - 「영원의 스코프」 부분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는 길은 '네'가 지나간 길이다("애인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수선」). '나'의 체취로 젖은 셔츠를 누군가에게 맡기러 가는 길에 '네'가 지나간 자취를 떠올리며 둘을 겹쳐 두면, 봄밤의 하얀 목련은 두 눈을 덮어 버린다. 사랑은 부재 속에서 충만하게 향기롭다. 이처럼 시종일관 타자들의 그림자와 사물 사이를 거니는 그는 완전히 고립된 자는 아니지만 세계의 가장 나중의 자리에서 모든 것의 뒷모습을 담아내므로 과연 은둔하는 자4)다. 그러나 은둔자는 그를 잠식한 피로를 떨쳐 낼 재간이 없으므로 그가 시편들을 통해 보고하는 생의 단편들은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현재화된 영원을 배회하는 자의 소진되지 못한 에너지가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방관의 산물에 가깝다. 그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사나이가 피리에서 손을 뗀 후에야 찾아드는 파동의 나머지를 훔치는 관객이다("연주가 끝나자 단원들이 악기에서 손을 뗀다 // 그제야 나는 음악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식적(息笛)」). 은둔자는 어둠 속에서 이 도시를 재배치하거나 남몰래 구획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다만 숨어 있는 방관자다. 그가 방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은둔하는 지경이다. 그가 기록하는 현실의 답보 상태는 '나'에게 명백히 승리할지언정 '나'를 지루하게 하지는 않으므로 삶의 피로는 그의 사랑이 '너'의 뒤를 쫓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피로를 체현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먼 거리에서 '너'와 '내'가 하나의 그물에 함께 걸려 있음을, 희미하게 떨리는 그물코를 뒤늦게 감각하는 방식을 사랑이라 여길 수 있다면 사랑은 바로 그 피로함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피로 속에서 영원하다. 2. 탐미주의 도망자의 편린들: 김연덕, 『폭포 열기』(문학과지성사, 2024) 방관자가 도시의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궤적을 따라 느리게 걸어갈 때, 그 한켠에는 빛의 사나움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걸 알아 가는 이가 있다. 원인 모를 수치가 자신을 장악했으나("종이 사이를 뚫고 이 안으로 들어왔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어", 「미지근한 폭포」)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움켜쥐고 무거운 걸음을 떼는 이가 있다. 김연덕의 『폭포 열기』에는 빛과 대적하는 '나'들이 그것의 사나움과 폭력성을("돔에서 투과해 들어온 겨울의 각진 빛이 가만히 볼을 스쳤어 / 상처가 났어", 「구식 부끄러움」) 아름답게 증언하며 남몰래 폭포를 찾아가는 장면들이 산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도망의 궤적임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데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화자가 사물 하나하나에 들이치는 빛을 세심히 관찰하며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며(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장소들은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부터 파생되는 인상을 준다) 그가 코를 박고 마음 속에서 관찰하는 사물들의 빛깔은 부정할 길 없이 아름다워서 당신은 폭포수처럼 흐르는 화려함에 넋을 잃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끝까지 통과하고 나면 밀려드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피로감은 제 모습을 기어코 정직하게 드러낸다. 김연덕이 빛의 다채로운 조각들에 찔리면서도 당신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끄는 건 염두에 둔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동욱의 화자가 피로를 신체 내부에서 체현하는 방관자의 기록으로 시를 쓴다면 김연덕의 화자는 외부 세계의 사물들이 자신을 조각낼 폭력적인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들의 집요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대상을 좇는 행위 속에 자신의 도주선을 남몰래 숨겨 두며 피로한 빛의 사나움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밀착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멀어진다. 김연덕의 시 쓰기는 사물에 비현실적일 만큼 가까이 다가섬으로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몰래 도주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우선, 한 개의 형광등에서 시작해 보자. 도시의 빛은 방 한 칸에 매달린 형광등으로 달라붙고 화자는 독자의 귀 가까이로 다가와 빛이 선사하는 "현대적인 아픔"에 대해 속삭인다("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어둠 속에서 고요히 흐르던 자연의 정동은 스위치 하나를 누르면 일순간 빛 속으로 모두 흡수되고 그의 말대로 이는 아픔에 관한 참으로 편안한 정리법이다. 수치심이 '나'의 민낯이라면 그것은 형광등이 밝아지기 전의 어둠 속에서만 생생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버튼만 누르면 이 방을 조금 전과 다른 감정으로 채우는 전기가 들어온다는 사 실은 얼마나 새삼스럽고 간편하고 현대적인 아픔인가요 그래요 나 그것 덕분에 내 몸에 걸려 넘어지거나 모서리 날카로운 악취에 부딪치지 않을 수 있지만 낮 동안의 수치가 얼마나 정교한 무늬와 기울기 절단면을 얻었는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가까이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만 형광등을 켜는 것은 단지 한밤중에도 이 따뜻하고 복잡한 세공에 많은 시간이 필요해서입니다 (중략) 미세하게 다른 속도와 각도로 형광등 빛을 튕겨 내며 움직이던 수정의 소리 자신들을 견고하게 빛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규칙적이었고 아주 조용했어요 - 「수정은 아름답고, 수정은 정확하고, 수정은 승리한다.」 부분 그는 "낮 동안의 수치"를 더듬어 볼 기회를 앗아 간 빛을 힐난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에 더욱 주의를 기울인다. 유리로 만든 진공관 안의 형광물질이 필라멘트 끝에서 튀겨지는 소리에 고막을 밀착한다. 이동욱의 '내'가 피로에 맞서지 않고 피로를 몸으로 살아 흘렀듯, 김연덕의 '나'는 빛의 손아귀에서 버둥대지 않고 도리어 빛을 향해 피부를 더욱 가까이 당겨 붙인다. 그곳에서 빛은 사물의 적대자다. 빛은 "삽으로 그것의 안을 파내고 / 쪼개"(「찬물처럼」) 관찰자의 지위를 점령하며 세계의 유일한 주체이자 절대자가 된다. 화자를 압도하는 그 시선의 힘에 대하여 화를 낼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의 문장 안에 몸을 숨기고 빛의 사나운 뒤를 계속 좇을 따름이다. 간혹 빛에게 발각되려 할 때 그는 스스로 사물이 됨으로써 최선의 은닉을 감행하기도 한다. 나를 향해 있지는 않지만 이것을 만든 이의. 누군가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병들고 건강한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이고 저 가벼운 선반에 잠시 올려 둔 채 때로는 먼지를 털어 주고 때로는 잊다가 다시 별 뜻 없이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하고 추상적인 느낌이기도 하다. 그리운 채 깨어 있는 이 느낌을 위해 나는 매번 나 자신을 어색하게 부푼 내 표정을 값으로 지불해 왔다. 물건의 선과 마무리가 아름답고 고유할수록 많은 시간과 힘을 요했으므로 가끔은, 트럭에서 품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 곤두박질쳤다. - 「생활 속 폭포」 부분 그는 눈앞의 사물 속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세계를 향한 슬프고 기쁜 / 병들고 / 건강한 / 열망의 반복이 흘러드는 느낌"을 찾아낸다. 사물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진실 앞에서 그는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실은 그 역시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물화시키며 살아 왔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고백을 마치자마자 곧장, 사물로부터 떨어져 나와 폭포 속으로 추락한다. 이는 빛에게 패배하듯 폭포에게 제 실존을 투항하고 마는 일이 아니다. 빛의 파장으로부터 완벽하게 숨어드는 일이다. 가장 완벽한 도망이야말로 완전히 사라지는 위장술로 성취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어두운 폭포를 보게 될 것이다. 원하는 자리에서 원하는 속도로 삭아 가게 될 것이다. 거실과 선반과 빛이 절묘하게 맞물려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울 경우에는 마치 폭포가 물건을 삼켜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고 멍해져 영영 사라져 버린 것으로 착각되겠지만 - 「생활 속 폭포」 부분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연작시 「gleaming/tiny area」는 제목 그대로 빛과 그것이 파생시킨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다5)(빛이 없다면 존재도 없다). 그중 하나의 시편은 "평범한 나무 밑에 / 산 채로 매장된 빛"이 있으며 더불어 그 나무에는 우아하게 숨은 분노도 함께 거주하고 있다고 누설한다("어떤 분노는 우아한 광대뼈 아래 아주 조용하게 살아가기도 한다", 56쪽). "세상에 분노하는 온도"로 첫 행을 시작하는 이 시편은 빛과 연루된 정동이 분노이며, 그것은 이 탐미주의자의 시 쓰기 속에 매장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재봉되었던 빛 안쪽은", 71쪽). 그는 빛의 사나움 앞에서 함께 칼을 들고 결투를 벌이는 일 대신 나무 아래 묻거나 실로 기워 버리고, 이는 최선의 공격이란 무릇 최선의 방어라는 평화적인 신념을 지닌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낮 동안 너무 많은 빛에, 밤 동안 너무 많은 형광등의 소리에 시달렸던 그는 세계와 정면으로 대적하기에는 이미 지쳐 있다. 세계를 영속시키면서 무한한 소진을 생산하는 힘의 근원이 곧 빛이라는 사실을("아침까지 눈을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도 / 피곤한 빛으로 계속되는", 「드라이브 마이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그는 그것과 함부로 맞서지 않는다. 더불어, "통째로 긁히거나 뭉개지기"에 이 세계는 너무 고상하다는 그의 말은 빛이 대상을 쪼개지만 동시에 그러한 파편들의 부서짐이 자아내는 아름다움 역시 존엄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빛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가 불현듯 폭포 속으로 몸을 던진다. 세찬 물줄기 아래의 어둠 안에는 숨어든 '내'가 있고 그런 '나'를 일갈하며 후려치는 다른 '나'들이 있다. 빛의 피로에 잠식된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이 매 순간 훔쳐 가던 수치심의 적나라한 회수라고 주장하는 피학의 목소리가 있다. 내 몸을 때리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폭포 밖으로 바로 빠져나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던 내가 스스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던 조금 전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던 그것은 나의 수치심 미친 듯이 신나서 나를 때리는 - 「따뜻한 폭포」 부분 피로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내버려둔다. 피로는 '나'의 몸을 그것에 오롯이 헌납하게 한다. 밝은 곳에서 쉬이 납득하기 어렵던 수치는 어둠의 안락함 속에서 껴안을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그것이 '나'를 신나게 때린다 할지라도) 시종일관 사물의 휘광을 쫓던 화자는 그리하여 독자를 빛에서 어둠으로, 지상에서 폭포수 아래로 이끌고 간다. 낮이 생산자들의 시간이라면 밤은 피로 속에 곱게 누운 자들의 몫이다. 수치를 품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시간이야말로 피로한 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그 어떤 긍정이나 부인의 능동적 제스처도 불필요한, 그저 시작도 끝도 바닥도 위도 없는 물줄기의 연속처럼 그 안에 몸을 맡기고 드러눕는 장소. 그러나 이 탐미주의자는 산란하는 빛의 날카로운 끝이 조각내는 아름다움들을 모르지 않고, 다만 그 광채에 현혹되어 제 몸이 찢기는 줄도 모르고 낮의 시간을 살아 내던 이들의 손을 조용히 잡아끌고 폭포의 어둠 속으로 낙하할 따름이다.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시선의 대상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는 주체이기를 자진해서 포기하고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존재의 해방을 만끽한다. 피로를 사실이자 하나의 비유로서 그리고 비유로서의 피로를 다시 한번 현실의 감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과 비유 양측의 생성이 이끄는 물줄기 아래로 그저 침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연덕의 폭포는 관념의 비유인 것만은 아니며 자연주의자들이 찬미하는 대자연의 그것만도 아니다. 폭포는 빛의 세계에서 낡고 지친 자들이 몸을 이끌고 눕는 피로의 세계다. 순도 높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세차게 이글거리는 안락의 세계다. 그렇다면 폭포가 아닌 곳들 또한 폭포가 된다. 가령,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났던 형광등이 깜빡이는 방. 빛을 매장해 두었던 한 그루 나무는 방으로 들어와 '내' 수치심을 양분 삼아 눈부신 꽃 한 송이를 피워 낸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의 기분만큼 보호받는 밤. 침대가 좁아진다. 작고 물컹한 열매가 떨어진다. 천장이 벽이 사각형이 살아 있는 어두운 땀이 백 년 전의 나와 함께 차게 식는다. 눈부신 꽃이 어둠 속에서 휘날리며 얼굴을 감쌀 때 당신은 끌어안을수록 슬퍼지는 사랑을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 「무르고 사적인 나의 방」 부분 이 꽃은 '내'가 언젠가 호텔방에서 본 거대한 흰 백합의 이미지와 겹쳐지는데(「나의 레리안」) 그가 꽃 앞에서 보았던 "적막하고 무서운 감정" 역시 누군가의 수치이자 분노이지만 그것은 '나'의 것처럼 폭포의 어둠 아래에서 아늑하게 향유한 것이 아닌 "제 몸을 마구잡이로 터뜨리는 그런 옛날의 빛" 앞에서 패배한 대가임을 알게 된다. 화자는 흰 백합을 보면서 꽃을 장식한 이의 삶을 앗아 간 빛의 난폭함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아연해진다("그의 삶을 대신 죽여 준 아름다움은 어디 있었을까"). 말하자면 「나의 레리안」은 호텔에 잠시 머무른 '내'가 빛 앞에서 파열한 타인의 흔적을 애도하는 시다. 그렇다면 김연덕의 화자 역시도 이동욱의 '나'와 마찬가지로 은둔을 자처하나 세계로부터 고립된 처지는 아닌 셈이며 시집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인 「이구아수폭포」의 후반부가 말해 주듯, 이 시집의 '나'들은 실상 빛의 폭력에 노출된 사물과 타자들을 구해 내려는 열기로 들떠 있는 것이다("생생한 폭력과 죽음에 지친 수많은 나들이 자포자기한 나들이 / 무척 활기차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면도 있던 그런 나들이 살아남은 나들마저 죽이려는 지금"). 피로는 차갑지 않다. 피로는 그 어느 것보다도 뜨겁다. 에너지의 흐름이 주체를 압도하고 제패하고도 남아서 세계 전체를 유동하는 상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피로는 죽음의 가장 큰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피로함 속에서 방관자가 되거나 도망자가 되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환멸이나 분노가 자주 방문하겠지만 그러나 종말과 죽음만큼은 이곳을 침범할 수 없다. 그래서 김연덕의 '나'는 무수한 '너'인 '나'들에게 계속 폭포 아래를, 그러나 빛이 전혀 눈치챌 수 없게끔 빛의 조각들로 길어 올린 아름다운 조각들로 길을 위장하며 가리키는 것이다. "선명한 시야가 돌아올 때"까지만 그렇게 잠시 폭포의 어둠 속에 함께 머물러 있자고, 우리의 수치와 분노가 생생하게 쏟아져 내리는 이 아늑한 피로 속에 잠시만이라도, 고요히 숨어 있자고 말이다. 1) 김진영, 「사라짐」, 『이별의 푸가』, 한겨레출판, 2019, 77쪽. 2) 아래의 말들을 잠시 빌린다면 시는 또한 피로함 그 자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고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아니다. 시는 사람에 대해서도 증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시는 무엇 자체다. 시는 고독 자체이고 결별 자체이며 또한 사랑 자체다." 김언,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 2」,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난다, 2019, 32쪽. 3)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이상, 「날개」, 1936. 4) 시집의 해설을 쓴 오연경도 이동욱의 화자를 은둔자라고 말한다. "이동욱 시의 주체는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서 간격을 만들어 내고 경계선을 재배치하는 '거리의 은둔자'라 부를 만하다." 오연경, 「은둔하는 삶의 정치성(해설)」, 이동욱, 『우리의 파안』, 문학동네, 2025, 109-110쪽. 5) "사실은 비유를, 비유는 사실을 배제하면서 또 자극한다. 한편으로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면서 자신을 갱신한다. 사실의 폭발은 해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의 밑거름으로 다시 돌아오며, 비유의 극점에서 발견되는 추상화된 현실은 그 자체 현실을 보는 또 다른 눈을 제공하는 것이다." 김언, 「시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시는 이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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