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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 2025년 봄호(제79호)

바람재에 앉아 무등의 진경을 그리다

김규성 시, 산문, 문학평론

2000년 『현대시학』에 시 「달동네 2」 외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2015년 송순문학상 우수상, 2021년 디카시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저서로는 시집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신이 놓친 악보』, 『시간에는 나사가 있다』, 『중심의 거처』와 비평집 『남도 시의 현재와 미래』, 산문집 『산들내 민들레』, 『뫔』, 『모경(母經)』, 『산경(山徑)』 등이 있다. 창작 활동과 함께, 이태관 시집 『어둠속에서 라면을 끓이는 법』을 비롯하여 약 85편의 시평 및 시집 해설을 집필하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쳐왔다. 송순문학상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다양한 인문학 주제로 강의 활동도 활발히 이어가고 있다.

백수인과 이지담, 박현우는 남도의 서남해안이 고향이다. 그래서일까 알게 모르게 바다의 원초적 기억과 집단무의식이 심리와 정서의 근간을 이루며 시의 원형적 모태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의 시에는 산해진미가 어우러진 혼신의 생체리듬이 공통분모로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백수인은 선비적 기품과 육화된 지성, 이지담은 참신한 은유와 고결한 성정, 박현우는 원초적 고독으로 연마한 현실 초극의 지혜가 돋보인다. 모두가 남도와 한국 시단의 소중한 자산이다.


우주의 숨결로 흐르는 안분安分의 교향악

- 백수인 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


1.

백수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려면 고향 장흥 기산마을에 있는 그의 서재를 탐방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의 산 증인인 고서古書가 은은한 묵향을 머금고 있다. 한국문학사의 획기적 장르로 꼽히는 가사문학은 남도를 배경으로 꽃을 피웠다. 그 효시인 『관서별곡』은 또 한 권의 기행가사인 정철의 『관동별곡』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관서별곡』을 쓴 백광홍과 삼당시인 중 하나인 백광훈,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기산 팔문장’으로 꼽히는 백광안, 백광성 등을 배출한 백씨 가문의 문학적 적통을 계승한 시인이자 국문학자가 백수인이다. 백수인은 조상의 문혼文魂으로 충만한 종가에서 나서 자라, 청·장년기를 오월의 메아리가 생생한 광주에서 복무한 다음,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집(백씨가문)으로 귀의했다. 이번 제3시집 『겨울 언덕의 백양나무 숲』(2024. 문학들)은 그 귀거래사의 서사緖詞다.


하얀 날개를 널리 펴고

창공을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라 하네

선비의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날고 있는 외로운 섬이라 하네

- 「장재도」 부분


이 시에서 “학”은 “고결한 지조를 장삼자락처럼 휘날리며” “천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수절해 온 고결한 선비정신을 표상한다. 이는 면면이 이어온 백씨 가문의 전통적 가치관을 암유하며 시인 자신에게 해당되는 좌우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행합일의 지표는 시 「겨울의 입구에서」 암묵적 인고와 결연한 의지로 체화된다. 


겨울의 입구에 서서

우리들의 오랜 동안거, 그 아득한 적막을 들여다보네

한 시절 견디고 부대껴야 했던 두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보네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었지


텅 빈 들판에는 찬바람만 가득하지만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

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네 

- 「겨울의 입구에서」 부분 


시인은 "겨울은 늘 우리에게 차디찬 얼음의 두께를 보여 주었지"만 "언덕을 지나 들판을 지날 때 불어닥친 화살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눈초리를 보여 주"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랑물은/아직도 쩌렁쩌렁 들판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고 술회한다. 춥고 엄혹한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저항하며 오늘에 이른 견자의 서슬 퍼런 안목이 가슴을 적신다. 이 시는 시인의 귀향이 단순한 노후의 휴식이 아니라, 본연의 궁극적 자아를 추스르기 위한 새로운 동안거의 출발이라는 불퇴전의 각오를 새삼스럽게 각인시킨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2.

바다를 원형으로 하는 유치환의 시 「파도」는 부드러운 물의 이미지가 난폭한 파도로 격랑을 일으키고, 용광로 같은 사랑의 불길로 달아오른다. 잔잔한 바다는 물의 원형으로 관조적이고 성찰적이다. 반면 물을 원형으로 하면서도 난폭한 바다는 물의 역동적 발화이다. 


흔히 물과 불은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의 대립관계로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생명체에게 두 원소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필수적 요소다. 두 원소의 보완과 조화에 의해서만 생명체는 존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기운이 있어야 차가운 기온을 따뜻이 할 수 있고, 물이 있어야 뜨거운 열기를 식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사람의 정신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정신세계의 동적 요소인 열정이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 정적 요소인 이성은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이다. 이성은 열정에 의해 실천에 이르고 열정은 이성에 의해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이 둘의 조화에 의해 사랑은 결실을 맺고 정신은 그 건강을 유지한다. 물과 불의 아름다운 조화에 중용의 묘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백수인의 고향은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남해안 산자락 밑이다. 내륙의 끝이자 해양의 시원이다. 그 접점은 통상의 경계와는 개념이 다르다. 대립이 아닌 조화, 반목이 아닌 상생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백수인의 시세계는 바다와 내륙이 경계를 지우는 소실점에 터 잡고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바다의 일상인 조수를 주제로 시 3편을 선보이고 있다. 그 함의와 이미지를 통상의 조수 순서와는 역순(썰물, 밀물과 썰물, 밀물)으로 환치해 더듬어 보기로 하자.


바다가 물러서기로 마음먹을 때

물의 벼랑은 무너지네


세상의 높이와 깊이가 모두 날아가 버리면

남은 건 펄 위에 찍힌 쓸쓸한 발자국뿐이네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

스산한 새벽바람이 일렁이는 뒷골목

희미한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이네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

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네

- 「썰물 이후」 전문


위의 시는 썰물을 “가파른 삶의 언덕에서 모든 걸 다 잃고 난 후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견주고 있다. 이는 시 「밀물」에서의 역동적 반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제장치다. 따라서 “모래밭에 누워 배 속까지 뼛속까지 다 보여주는/해파리의 투명한 고백”이라는 마지막 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열거한 세 편의 시를 단계별로 한 데 아우르는 설계(역순의 배치)는 시 「밀물」에 앞서 중간 역할을 하는 다음의 시 「밀물과 썰물」에서 구체화된다.

 

이제 비로소

밀물은 썰물이 된다


썰물

모든 욕망 버리고 돌아서는

뒷모습이다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진다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

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그들이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

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

그 발자국이 깊고 깊다

- 「밀물과 썰물」 부분


뒤돌아서 가는 썰물의 “텅 빈 등허리에 햇빛 쏟아”지는 정경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꽃상여 매고 돌아가는 골목길에/서럽게 흔들어대는 요령소리”다. “다 떠나고 난 텅 빈 모래밭에는/작은 짐승들이 거닐어도/그 발자국이 깊고 깊”은 것은 새로운 밀물을 기약하는 전조이기 때문이다. 이때 썰물은 사적 욕망의 물결을 잠재우고 멸사봉공의 공동체적 불길/밀물로 역동화한다. 최후의 결전에 임하던 장흥 동학혁명군의 기세, 오월 금남로의 함성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들은

등 떠밀려 마지못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것이다


하늘에 닿고도 남을 저 함성을 들어보아라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을 보아라

- 「밀물」 부분


“하늘에 닿고도 남을” 함성을 “칼날처럼 번쩍이는 파도의 낯빛”으로 재해석한 시적 예지가 예사롭지 않다. “바위를 깎아 다듬은 단단한 신념을 품고 달려드는” 밀물은 고향 바다의 원체험과 오월 광주의 실체험이 시공을 초월해 결합하는 교향악의 마지막 악장이다.


3.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53편의 시 제목들은 대부분 구체적 사물을 지시하는 명사가 주축을 이룬다. 시집 제목도 겨울+언덕+백양나무+숲이라는 네 개의 구상명사를 관형격 조사 "~의"가 홀로 다리 놓고 있을 뿐이다. 추상적인 관념어나 난해한 ‘안개 언어’를 배제하고 담백하면서도 진솔한 실사구시적 테제가 제목에서부터 비롯된다. 이 부분은 시인의 자서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날마다 걷는다. 강가를 걷고, 해변을 걷고, 산골짜기를 걷는다. 걸으면서 거기에 깃들어 사는 존재들과 마주친다. 새들을 만나고 나무들과 마주 서고 꽃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 공간을 지나가는 바람을 만나고, 흙과 돌멩이와 바위와 물결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가오는 빛깔들을 바라본다.


시인은 늘 길을 걸으며 사물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어 이를 장자의 소요유적 직관과 후설의 현상학적 사유로 내면화한다. 아래의 시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도 특별한 수식 없이 사물의 생명력과 존재감을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존재자(시인)와 존재(시)는 관념의 늪을 떠나 격의 없이 한 데 어우러져 미분화의 축제를 이룬다.


들판을 걸었네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 있었네

포기 사이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흰 구름이 둥둥 떠가고 있었네


그때 문득 들리는 소리

꽹과리 소리 깨갱 깽깽

징소리 지잉~지잉~

장구소리 덩더꿍 덩더꿍

북소리 둥둥둥

태평소 소리 띠띠 떼떼

잔치 벌이는 소리가 온 들판에 가득했네


뒤를 돌아보니 논 가에 우뚝 서 있는

자귀나무 한 그루

그 안에 수백 송이 꽃들이

상모를 돌리고 있었네

- 「들판에 자귀나무 꽃 피었네」 전문


“벼 포기들이 쑥쑥 자라고”(시각), 덩달아 꽹과리 북소리(청각)가 들판에 가득 차자, 저만치 서 있던 자귀나무도 어느새 다가와 배경에서 전경으로 동참한다. 들판이 온통 “수백 송이 꽃(후각)들이 상모를 돌리”(촉각)는 공감각의 대연회를 이룬다. 오감이 풍성한 자연친화적 감각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는 절창이다.


소동파는 가는 곳 마다 비록 유배지임에도 그곳에서의 정착을 꿈꾼다. 장소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달관의 경지에서 현실에 초연한 단면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첫 유배지 황주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지자 “황주에서 오래 적거한 탓에 이젠 평안하게 이 땅에 안주할 수 있게 되어, 본래의 황주사람과 똑같다”고 여긴다. 또 두 번째 유배지 혜주에서는 “이제는 북쪽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혜주사람이라 생각하고 오래도록 살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 이와 같은 현지에의 귀속 의식은 낯선 마지막 유배지로 위리안치의 형극에 내몰린 해남도조차도 담담히 죽음을 준비하는 종명지로 여기게 한다.


백수인의 시에서도 이와 같은 현존재로서의 공간 의식에 숙련된 여유와 행간의 묘미를 읽을 수 있다. 그는 거추장스런 수식이나 화려한 기교를 배제, 조촐하고 소박한 언어로 자연에 의해 정화된 감성을 소담하게 그린다. 이를테면 자연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한 폭의 수채화로 담아낸다. 그에게 현실은 유토피아로의 공상적 일탈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 속에서 일상의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는 실존의 향연이다. 그 소요유 속에서 지혜롭고 성실한 자기관리에 의한 ‘중용의 자유’가 일상화된다. 따로 상상력의 수고를 빌리지 않아도 주위의 대자연에 눈길만 돌리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만 하면 현실 속에서 탈속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문장으로 새긴 경건한 사유의 향기

- 이지담 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2004. 문학들)


1.

본성, 즉 마음의 바탕은 원래 티 없이 맑고, 두루 밝고 고요해서 어떤 번뇌도 두려움도 없는 지고지순하고 지극한 경지이다. 온전한 마음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자아를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기에 수행자는 혹 그 마음이 잠시나마 흐트러질까 봐 외부의 훼방을 경계하고, 혼자 있는 시간에도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동시에 그 지극한 경지를 어린애처럼 누린다. 온전한 마음에 지극히 머물며, 그 마음 씀을 오롯이 하면 텅 빈 마음이 맑고 고요함으로 충만해진다. 그 상태여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을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우주의 유기적 분업체로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어느덧 이순을 넘어선 이지담의 시에는 본성에 천착하는 구도자적 포즈가 내면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제4시집 『바위를 뚫고 자란 나무는 흔들려서 좋았다』에는 먼 집, 먼 일, 먼 기억, 먼산바라기 등 ‘먼’이라는 시어가 수식하는 시 제목이 눈에 띈다. ‘멀다’의 활용형인 ‘먼’은 거리와 시간, 즉 시공간을 아우르는 수식어로 현재의 자아(가까움)를 부각시키려는 일련의 언어 장치이다. 이는 시의 제목뿐 아니라 다수의 시에서도 그 핵심어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본성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성정의 고삐를 수시로 다잡는 자기 도야의 일환이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시작된 혼자만이 건너야 할 길/아직 멀다(「출렁다리」)


너무 멀다, 보고 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침묵의 꽃」)


어둠과 빛이 출발선상에서 자세를 낮추고/ 멀리 보는 눈으로 또 다른 문장을 쓰는 중이다(「감자북을 쌓다」)


멀리 오름이 지표처럼 보이고 공포가 자라 잡풀이 무성한 곳(「다랑쉬굴 입구에서」)


먼 거리는 태생 이전부터 하나로 엮어 있다는 다른 말일 뿐인데(「먼나무」)


멀리 더 멀리 날아갔다 돌아오는 새를 반긴다(「먼나무」)


아침마다 뻐꾸기 소리 들으며 먼 길 배웅한다(「먼 길」)


먼 나라 아이들에게 손을 뻗어 빛이 되어 준 사람(「여행자 2」)


먼 이방인들이 발길 멈추지 않은 것은/예를 다하고 있는 풍경에 취하고 싶을 뿐(「면앙정에 올라」)


책상 위의 문양이 휘어지는 쪽에 앉아 멀리 보면/더 작아지지 않아도 되는 밤이 아직 남아 있었다(「라플레시아, 안녕」)


장자는 상상력의 무한 확장을 통해 자아와 우주만물의 상대성을 해체해 버린다. 우주 만상을 맘대로 재단하고 누리는 우주적 상상력의 요술대 위에 놓이면 지상의 어떤 상처도 먼지 한 점으로 작아지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허공으로 부풀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아래의 두 연은 시 「구겨진 종이」의 일부인데 연마다 “멀리”라는 수식어가 사건의 전말을 지시하고 있다. 장자의 우주적 스펙트럼을 내밀하게 재구성한 제2의 창조를 연상케 한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하얀 종이를 날려 봅니다

멀리 가지 못하고 발등에 떨어집니다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겨 버립니다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지니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봅니다

- 「구겨진 종이」 부분


아무리 깨끗한 백지도 넓게 펼쳐진 평면 자체로는 날지 못한다. 일단 종이비행기로 접어서 공중에 띄워야 멀리 날아간다. 그런데 시인은 “그늘의 무게를 담은 종이를 던”진다. 그것도 “상처가 많은 마음을 꼬깃꼬깃 구”긴 것이다. 그리고 “멀리 달아나는 구겨진 종이를 바라”본다. 여기에서 종이비행기의 비상은 상처/그늘과의 결별을 뜻한다. 그것은 백지, 즉 순수 본연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구심력의 일환이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고 지금 바로 여기에 자신과 공존한다는 사실을 사물과의 소통을 통해 깨친 시인의 실존적 자기 확인인 것이다. 심원하면서도 비근한 통시적 원근법의 실체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이지담은 화려하지 않게 빛날 줄 아는, 평범 속에서 특별한 가치를 발휘하는 비결을 조곤조곤 일러주고 있다. 인류의 행복이나 위대한 업적에 가려 돋보이지 않을지라도, 작은 개인의 소박한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는 자세는 시인에게 그 어느 것보다 필요한 덕목이다. 이지담은 작고 하찮은 것 속에서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고 닦아 지성의 좌대에 올려놓는 세공사이다. 


2.

개체적 자아의 완성을 통해 전체적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이지담 시의 핵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인인 나와 사회 구성원인 나의 이중적 존재이다. 그 둘이 조화를 이룰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완벽에 이른다. 자아를 도야해 건강한 사회인으로 활동하는 것이 인격의 가장 이상적 경지이다. 인격은 나와 우주/사회의 거리를 측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대부분의 남도 지성이 그렇듯 이지담의 인격적 토양은 참신한 자아에서 사회적 결사結社로 그 영역을 확장한다. 예컨대 건강한 역사의식을 배경으로 발화한 비판적 리얼리즘, 무궁한 생명애, 사회정의를 기표로 한 휴머니즘이 그 바탕을 이룬다. 그리고 시를 통해 새롭게 승화된 역사적 과제는 제주(활주로 무덤)→광주(마지막 승객)→서울(딱 하루만)로 이어지며 꺼지지 않는 촛불의 숭고한 역사성을 공통의 의미소로 재현한다.


유채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착륙하고

꽃에 취한 사람들이 육지를 향해 이륙하는

활주로 바닥 아래

잠겨진 열쇠는 기억을 두드려 빚어내야 한다


한라산 중간산에서 내려가라는 말에

살던 집을 버리고 살기 위해 내려온 사람들

잡풀인 듯 베어져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이름 없는 영혼들이 잠든 활주로


하루에도 수십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 「활주로 무덤」 부분


괜찮니, 물음에 대답이 없다

텅 빈 차 안

유리창이 깨지고

승객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흥건히 고인 피

멸종을 바랐을 밤은 새벽을 끌고 오고 있었다

- 「마지막 승객」 부분


그저 딱 하루만

숨 한 번 크게 내쉬고

소소하게 웃어보자고 나선 길

이태원길에서

해일처럼 밀려든 인파에 웃음은 난파되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SOS 문자를 보냈지만

대답 없는 메아리

- 「딱 하루만」 부분


이지담은 민족적 비극과 비상식적 참극을 떠올리며 그 유훈을 일상의 평화와 새로운 기운에 상응하는 유채꽃(제주4.3), 새벽(광주 5월), 소소한 웃음(서울 이태원)으로 상징화한다. 나아가 사건의 핵심을 절제와 함축, 내면화된 육성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재조명한다.


3.

사색과 명상, 고요한 기도는 자신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칸트가 평생을 시골에 묻혀 오솔길 산책을 즐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별장의 대부분도 그런 고요와 한가함이 주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수행 정진을 일삼는 스님들도 한사코 깊은 산중을 찾는다. 자신과 만나는 것은 자신과의 내밀한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을 의미한다. 소로는 두 해 동안 오지의 숲속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생활한다. 거기서 『월든』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탄생한다.


이지담의 이번 시집에도 자연을 벗 삼아 번뇌를 씻고 사색의 지평을 심화해 문향을 꽃피운 누정 문학의 산실·환벽당·면앙정·연계정 등을 주제로 한 시가 눈길을 끈다.


환벽당 마루 위에서 장삼자락 늘인 채

버선발을 옮기며 영혼에 숨길을 불어 넣는다

춤사위는 이미 누군가에 전이되어

판소리 가락을 열고 들어가 옛 선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니

나무들도 푸르름으로 어깨를 들썩인다

백수를 누린다 해도

연못에 핀 연꽃의 순간에 지나지 않으려나

- 「순간이 영원으로」 부분


죽창처럼 푸르던 벼들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데

면앙정에서 책을 읽고 가르치는 강학소리

- 「면앙정에 올라」 부분


무거운 돌에 눌린 시간이 먼지를 털고 일어나

허허벌판 말고삐를 잡고 달려오는데

멀리서 통행금지 해제를 올리는 파루의 종소리

가슴을 때린 적이 몇 번이던가

묵은 숙제를 풀며

국화주 한 잔 따라마시며 차가운 마음을 녹입니다

- 「미암일기」 부분


편지 사이사이 묻어둔 행간

연못 위의 발자국을 지우며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

연계정은 홀로 앉아

물 위에 뜬 모현관을 들어 올린다

오랜 친구인 침묵을 품에 안고

한 구절도 고쳐 쓰지 않았으므로

먹구름이 세상을 뒤흔들 때마저도

그 너머에서 빛을 내는 볕을 키워냈던 것처럼 

뒤뜰 대숲을 흔든 바람이거나

참새들이 밤낮 소란스레 지껄이는 지저귐도

쌀뜨물 가라앉히듯 하였으니

너무 멀다, 보고싶다를 구름에 띄워놓고

눈 위에 발자국만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시간

뚜렷하게 보이는 침묵을 받아 적어 남긴다

가장 선명하게 피워낸 그 순간들

- 「침묵의 꽃」 전문


마음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마음을 묶어 두려고 일부러 애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음은 억지로 다스리려 들 때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방어기제의 일환인 무의식 속 억압의 심연으로 잠수하여 끊임없이 존재감의 노출과 탈출을 시도한다. 따라서 제멋대로 고삐를 풀고 달아나려는 마음을 일방적으로 제어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는 마음의 고삐를 풀어주고 그 향방을 살피는 내면의 환기와 집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끄는 바깥 환경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산만하고 왜곡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맑고 상쾌하게 다독여 주는 산이나 강, 너른 들판, 고요한 호수, 쾌적한 숲, 한적한 오솔길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이지담은 그렇게 정화된 청정한 마음으로 자아를 다스려 이웃과 만나고, 이를 시로 형상화 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꽃의 수사修辭와 사색의 밀도

- 박현우 시집 『멀어지는 것들은 늘 가까운 곳에 있었다』 (2024.문학들)


1.

절실하게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치열하게 살아있는 생명의 축제를 의미한다. 『백경』에서 고래와 싸우는 선장이 그랬고 또 소설을 쓰는 멜빌이 그랬다. 과거나 미래를 떠나 현재에 몰입하는 순간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이다. 잡념이나 상대적 관념 따위가 낄 틈이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즉 사물을 향한 순수하고 온전한 상태의 몰입은 작가에게 밀도 깊은 생명력과 창조력을 선물한다. 박현우의 시는 사물과 혼연일체를 이룬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부터 “꽃”을 빌려 그의 시가 사물에 대한 몰입의 소산임을 밝히고 있다.


꽃밭에는 수 없는 풀꽃들이 피고지고

나를 잃어버린 언어들이 윙윙거렸다.

꽃의 수사修辭,

사색에 익숙해질 무렵

꽃의 이면을 탐하는 벌 나비가 부러웠다.

아니다

가까이 잡꽃이 윙윙거리는

소박한 언어이고 싶었다

- 시인의 말에서


이를 방증하듯 이번 시집 2부는 하나같이 다양한 ‘꽃’들이 제목을 이루고 있다. 3부의 「달맞이꽃」, 「11월 철쭉이 피었다」, 4부의 「물봉선 비에 젖는」 등의 시도 꽃을 주제로 하고 있다. 1부의 「분갈이」도 꽃을 가꾸는 작업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호접꽃」을 보자.


생기 잃은 손 잡아주다

향기마저 잃은 채 멍울져 오던 초라함이

꽃이 되는 지상의 역설 마주하며

난감한 현실이 꿈이 되고

꿈꾸는 너의 색에 취한 취객일 뿐이라서

꿈이라도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인데

- 「호접꽃」 부분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을 연상케 한다. 꿈속의 나와 현실의 나를 구분하지 않고, 꿈속의 환상을 전경화 한다. 새삼 꽃에 대한 몰입도를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자기 최면은 아래의 시 「천리향」에서 고차원의 사유를 동반한 실존적 자각으로 의미화 된다.


식목일 시청에서 나눠준 천리향 한 그루

뭉툭하게 잘린 뿌리 마음에 묻은 여러 해

천 리를 간다는 향에 취해 시름을 떨치던 일처럼


살도록 그늘 한 번 된 적이 없는 냉가슴 열어보니

나잇살이나 잡수신 맹환이네 팽나무가 느닷없이 다가와

사랑앓이나 하는 듯 아노래* 골목을 덮기도 하여

보고 싶단 말보다 더한 가슴을 달래주는 것이어서


무심을 붙안고

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이

그늘 됨을 알았네

*진도 고군 자막리 골목 이름

- 「천리향」 전문


시인은 이름처럼 "천 리를 간다는 향"이 실은 "무심을 붙안고/천리만리 마음의 폭을 넓혀가는 은은함"으로 환치되는 사실을 깨친다. 그리고 거기에서 산출된 “그늘”을 사회적 메시지로 부각시킨다.


2.

눈에 띄지 않게 묵묵히 보편적 가치와 자신의 세계를 성실하게 가꾸고 실천해 가는 것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어느 위대한 업적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중요하다. 행복의 요건 중에 크고 작고 따위의 구분은 따로 없다. 행복은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것 속에서 큰 것을, 하찮은 것 속에서 귀한 것을, 숨은 것 속에서 보석을 찾아내는 눈과 귀와 감각이 필요하다. 박현우는 일상의 다반사인 “설거지”(작은 것)를 주제로 적폐 청산(큰 것)의 막중한 과제와 방법론을 환기시킨다.            


날마다 우리 살아 있음을

이토록 진지하게 씻어내는 일


빈부가 문제랴

누린 만큼 눌어붙은 고상한 찌꺼기들

저희끼리 냄새피우는 일 지천인지라

새삼 놀랄 일 아니라 쳐도


잠깐 한눈팔아 보시게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 같은 것들

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니

되도록 빠르게 뽀득뽀득 씻어내야 하네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

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

어디 쉽게 떨어지던가

- 「설거지」 전문


제철이라는 죽순나물 한 잎

오물거리다 말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

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왈칵 소름이 돋았네

- 「안아주기」 부분


시인은 “잠깐 한눈팔다 보”면 “순간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것들이/반드시 죽치고 앉아 오감을 자극할 것”이라고 경계한다.(「설거지」) 그리고 “내 맘대로 보지도 못하고/제대로 만지지도 못하는 등짝을/어루만져 쓸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면 “왈칵 소름이 돋”는다(「안아주기」)고 자신의 무감각에 스스로 일침을 가한다. 이와 같은 무감각은 그 파장이 사회적 적폐로 확산될 때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진다. 따라서 “적폐청산 참 좋은 설거지네만/꽉 달라붙은 밥풀때기 하나라도/어디 쉽게 떨어지던가”라는 자조적 청유를 빌려 무감각한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생은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독으로 크고 작은 상처가 동반하기 마련이다. 큰 것에서 작은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찾아내기는 쉽다. 다만 눈을 감고 사물을 보기 때문에 못 찾을 뿐이다. 상처는 몸을 작게 움츠리고 은밀히 숨어있다. 그러나 그 흉터는 크다. 자기 이외의 몸집까지 욕심껏 껴안고 있기에 덩치는 더 크다. 그럴수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상처의 실물은 비로소 가까이 다가온다.


3.

사물을 새롭게 본다는 것은 종전과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에는 그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겠다는 의지가 숨어있다. 반조가 따르지 않은 개혁은 정교하지 못하다. 신앙에도 믿음의 전제조건으로 반조와 참회가 따른다. 따라서 시의 미학에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뿐 아니라 상처를 다스리는 불완전한 존재, 즉 상처의 주체로서의 자신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철거 아파트 담벼락에

오누이가 앉아

볼록렌즈에 찬 빛을 담는다


참새 두 마리도

간이 빨랫줄에 앉아

시린 볕에 날개를 그을린다.

- 「데칼코마니」 전문


시는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야 하는 종교와, 다분히 관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철학에 비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사물을 새롭게 형상화한다는 점에서는 실제적이다. 그러나 이미 신이 창조한 사물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창조해야 하기에 종교나 철학에 비해 추상적이고 고독하다. 우주를 설계하고 만물을 골고루 특이하게 빚은 신의 손길에 걸맞은 상상력과 언어의 조탁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박현우는 시의 도처에서 “손님은 갔는데 옆 교회 첨탑에서 까치가 운다(「술의 화법」)” “밤이면 구슬픈 여귀곡이 들렸다는 둠벙/비수 품은 달이 꽃단장한다(「궁녀둠벙」)” 등의 절묘한 구절을 선보인다. 아래의 시구도 음미할수록 맛과 멋, 향기를 더해주는 절창들이다.      


갈꽃 날리는 극락강에 낙싯대를 폈다


흔들리지 않는 찌불을 긴장으로 보라보는 것은

상처 난 잎들 가장 가벼운 여행처럼

극락강역 마지막 기적이 환청이길 바라서다.

- 「조락凋落」부분


오는 길 정 맞은 돌 몇 주워

빈틈 많은 생의 구멍을 메워볼까

하는,

- 「모난 돌」 부분


고향집 매화송이 눈을 뜨면

지시락 물 받던 대야 가득

어머니 빨랫물이 주인 없이 넘치겠다.                 

- 「봄비」 부분


짜낸 것만큼 얼룩진 시선들이 있어

비워야 빛나는 것들 주무르며

마음에도 걸레 하나 챙겨둘 일이다

- 「문득」 부분


타들어 가는 사랑이

길게 늘어선 화장터

슬픔이 슬픔을 화장하는 동안

- 「물봉선 비에 젖는」 부분


사위를 날아오르던 늙은 새

갑판 구석에 둥지를 틀어놓고

칠게 구멍 더듬다 와 졸고 있다

- 「벌포리 바닷가」 부분    


시인들은 창작이 원활할 때는 황홀한 자기만족을 맛보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심각한 내적 진통을 앓는다. 그러면서도 그 고통스런 작업에 혼신을 쏟아 몰입한다. 회임의 기대감과 출산의 희열은 고통조차도 산고의 통과의례로 음미하게 부추기기 때문이다. 박현우의 시는 일상의 고통과 고독을 연마해 충일한 생명성으로 형상화한 인고의 결집이다. 그 저변에는 오랜 시적 내공과 연마, 대자연과의 물아일체에서 체화된 심층적 사유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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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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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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