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들 2025년 봄호(제79호)
모멸과 차별을 넘어, 치유의 글쓰기
Ⅰ. 모멸과 폭력
- 김현주, 『메리골드』, 다인숲, 2024.
1.
김현주의 소설집 『메리골드』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만든 감정의 살풍경을 행간에 숨겨두고 있다. 소설의 화자들이 자행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적 언어가 주는 당혹스러움과 예술로 포장된 인물들의 자기 방어기제는 소설 독해의 일차적 난관이다. 하지만 이는 김현주 소설의 성취점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모욕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인물들이 사실 과거 연약한 주체(버려지거나 유폐되거나 모멸의 대상이기도 했던)였다는 점은 당혹스럽지만, 이들의 방어기제가 연약한 타자에 대한 폭력적 형태로 노출될 때 의도치 않게 감추어진 상처가 드러나면서 해체된다는 점은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김현주의 소설들은 자기 방어에 능숙한 ‘믿을 수 없는 화자’들의 언어를 통해 히스테리적 증상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이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서사를 독해할 때 독자의 시선은 주체에게서 멀어지면서 타자에게로만 고착된다. 그러나 이 길을 역행하고 이중 잠금장치를 풀어내면서 행간에 감추어둔 감정의 풍경을 응시할 때, 우리는 김현주 소설의 입구에 서게 된다.
2.
오독을 유도하는 방어기제와 맥락을 무시한 채 배치된 언어들의 함정을 피하고 마주한 풍경에는 모욕과 모멸과 수치와 같은 감정들이 흥건하다. 때로는 피가 때로는 비겁함이 때로는 자기혐오가 때로는 눈물이 그 자리에서 축축하다. 가령, 「빛의 감옥」에서 직장 내 정치의 희생양이 된 원장의 무고함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 ‘그녀’의 비겁함은 모멸감이라는 깊은 강을 건너야만 했다(“당신이 해고되지 않으려면 쉿, 이라고 음험하게 웃었다. 그때, 모멸감을 느꼈다.”). 애도보다 망각이 정규직의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타인의 죽음을 오래 애도하는 일은 어리석었다. 정상적으로 살려면 빨리 망각해야 했다”). 물론 정규직인 된 이후 ‘그녀’가 겪는 “불면증”과 “우울”과 “가슴 통증”은 모멸감이 남긴 흔적이겠지만, 일요일마다 작은 교회에서 행한 “참회의 기도”는 그것을 투명하게 세탁해주었다. 주식 리딩방을 운영하는 「꿀」의 주인공 ‘그녀’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달려드는 회원들(“꿀단지 옆으로 기어드는 개미들”)을 경멸하고(“가난한데다가 멍청하기까지. 의심 많은 인간들… 구제불능이야.”), 돈을 빌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가사도우미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함으로써 동정을 소비한다(“계좌번호 적어놓고 가. 삼백만원은 없어. 그 대신, 삼십만 원 그냥 줄게. 안 갚아도 돼. 가사도우미는 모멸감을 느꼈다.”). 정작 가족을 포함 누구와도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채 소외된 듯 보이는 ‘그녀’는 우울증, 대인기피증, 편두통, 불안 등 신경증적 증상을 주식시장의 개미들과 하이에나들의 욕망을 잽싸게 포획하면서 치료한다(“그녀의 웃는 표정은 먹이를 낚아챈 한 마리 잔인한 맹수 같았다.”). ‘그녀’는 이빨 사이의 흥건한 피로 자신의 상처를 은폐할 줄 아는 주식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다.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
3.
「붉은, 행간」은 김현주의 소설집에서 모멸과 폭력의 역학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멸감’은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게 되는 괴로운 감정”(김찬호, 『모멸감』, 문학과지성사, 2014, 61쪽. 이 글에 언급된 모멸감에 대한 사유들은 이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이다. 이 정의에는 모욕-경멸-수치의 감정들이 내재되어 있다. ‘모욕’이 타인을 업신여겨 욕되게 하는 것이라면, ‘모욕감’은 타인에게 그러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의 응어리다. 그리고 ‘모멸’에는 모욕과 ‘경멸’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적나라한 공격을 드러내는 언행이 모욕이라면, 무심코 무시하거나 깔보는 태도는 경멸에 가깝다. 즉 경멸에는 적대적 의도가 분명하지 않을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멸시하고 낮잡아 보는 일은 흔하다. 누군가를 직접 모욕하지 않는 방식으로 상대를 낮추고 자신의 우위를 확보하는 행위양식은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포식성을 희석화하는 최소한의 도덕률일 것이다. 모멸은 이러한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김찬호;64)라고 할 수 있다. 「붉은, 행간」의 화자 ‘나’는 두 명의 남자(남편이자 작가인 ‘케이’, ‘나’의 정부이자 연극연출가인 ‘에스’)로부터 받은 모멸감을 그들의 작품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최악의 방아쇠’의 희생자이자 피의자이다.
그녀는 페이지가 찢겨나간 <중독>을 바닥에서 집어 들더니 책 무덤 위에 펼친다. 책 속에 접시 위의 과일을 집어넣는다. 청포도와 방울토마토가 책 속으로, 책 바깥으로 쏟아진다. 그녀는 책들 위에 올라선 후, <중독>을 밟는다. 토마토와 청포도가 튀어 나가고 일부는 그녀의 발길질에 짓뭉개진다. 다시 책 위를 두 발로 힘껏 내리밟는다. 책 속은 젖어 얼룩 범벅이 된다. 과육은 책 속에서 으깨어지고 과즙은 행간으로 스며들 것이다. 짓밟고, 태워버리고 싶은 책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과즙 범벅이 된다. 책을 모독하고 싶다. (「붉은, 행간」, 23쪽)
그녀는 <중독>을 짓밟으며 무대 위에서 빛난다. 신체의 굴곡이 드러나는 과감한 의상을 선택하면서 보다 파격적인 연기를 시도한다. 매회 무대 위에서 그녀는 에스를 다양한 부위별로 힘껏 물어뜯는다. 그때마다 에스는 신음을 내지른다. 고통과 쾌락을 오가는 에스의 야릇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관객을 열광시킨다. 예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반전이다. 그녀는 침착한 동작으로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젖은 혀로 부드럽게 천천히 핥는다. 객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붉은, 행간」, 39쪽)
인용문의 <중독>은 남편 ‘케이’의 유작이다. 무명 소설가였던 남편의 작품은 ‘나’와 불륜 관계인 ‘에스’에 의해 불멸의 작품으로 포장된 채 연극 무대에서 상연된다. 그리고 ‘나’는 무대에 등장해 남편의 작품을 ‘모독’하는 퍼포먼스를 반복한다. 행위예술 특유의 난해함으로 승화되어버린 ‘나’의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남편의 소설에서 묘사된 아내 ‘나’의 모습은 수동적이며 무기력했다. 실재의 ‘나’는 자유로운 새처럼 마음껏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소설 속의 ‘나’는 “새장 속의 새”이며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묘사되었다. 잠시 나가더라도 “새장 속으로 다시 들어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남편 케이에게 ‘나’는 그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영혼”일 뿐이었다. 남편 케이와 아내 ‘나’ 사이의 이 간극을 소설은 “틈”이라는 언어로 비유한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그녀의 불안과 케이의 애증으로 1502호는 땅 위에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떠다니다가 어느 순간, 지상으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격한 진동으로 실내의 벽, 틈은 무섭게 벌어졌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을 부풀린 틈이 그녀의 무게를 못 이겨 더 크게 벌어졌다.”/ “집요한 틈새는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엘리베이터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틈이 그녀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등)
이 ‘틈’은 남편 케이에게서 받은 ‘나’의 모멸감의 다른 표현이다. ‘틈’에는 1502호의 위장된 평화와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위태로운 행복이 노숙자 같은 불안을 데리고 침실까지 들어온 것”(20쪽)이라는 문장은 남편의 언어적 경멸과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한 모욕으로 인해 ‘나’가 느낀 모멸감이 가장 정제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인용문에서 ‘나’가 남편의 유작인 <중독>에게 가한 행위들(찢고, 밟고, 책 속에 과일을 넣고 짓뭉개는 등의 행위)은 모멸에 대한 되갚음으로써의 ‘모독’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세 가지 층위의 모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의 작품이 타인에게 인정받는 승인 과정을 통해 자기존재감을 확장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라고 할 때, 모욕은 이러난 자존감이 손상되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생전에 무명 작가였던 케이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내 작품이 모호하다고 하는데 그건 인물의 내면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지. … 상징을 잘 이해해봐. 그리고 보이지 않는 행간을 읽어내면 좋겠어.”) 세상은 그의 언어 속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첫 번째 모욕이다. 케이의 죽음 후 그의 소설 <중독>은 에스의 연출에 의해 본래의 의미 맥락에서 이탈된 채 연극 <중독>으로 포장되고 소비된다. 에스는 작가의 죽음을 작품에 중첩시킴으로써 소설 <중독>의 행간을 영원히 감추어버렸다. 이것이 두 번째 모욕이다. 그리고 연극 <중독>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나’는 소설 <중독>을 짓이기고 찢고 밟는 퍼포먼스를 통해 소설에 묘사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지점으로 이탈시킨다. 더불어 연극이 반복 상연되면서 ‘나’의 모독 행위는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것이 세 번째 모욕이다. 이로써 케이의 소설 <중독>은 연극 <중독> 속에서 ‘나’의 예술적 행위의 승인 과정의 소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앞선 두 번째 인용문은 ‘나’의 행위가 연출가 에스의 의도를 완전히 역행하는 장면이다. ‘나’는 한때 ‘에스’와의 관계를 통해 모욕당한 자신의 존재감을 재승인받았다. 하지만 이후 이 둘의 관계에서도 ‘틈’이 발생한다. 남편 ‘케이’와 마찬가지로 ‘에스’ 또한 ‘나’를 자기 예술의 승인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로 수단화한 것이다. 연극 <중독>에서 ‘에스’가 ‘나’를 흡혈하는 장면이 그 증거다. 따라서 앞선 두 번째 인용문에서 ‘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에서 벗어나 ‘에스’를 물어뜯고 흡혈하는 주체가 됨으로써 ‘에스’가 행한 모욕을 되갚는 중이다. 소설의 제목인 「붉은, 행간」은 “에스의 목에 흐르는 피”를 천천히 핥는 ‘나’의 붉은 입술 속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완성한 셈이다. 이로써 연극 <중독>은 ‘나’의 작품이 된 것이다.
4.
이렇게 보면 김현주의 소설 「붉은, 행간」을 남성 예술가들에 의해 대상화된 여성 인물의 신체와 정신이 자기모멸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예술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서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과 모멸의 헤게모니 관계를 역전시키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모멸의 폭력을 그대로 되갚는 방식으로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로 말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모욕과 경멸에 노출되고 수치심과 분노가 꼬리를 물면서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을 때, 주체와 폭력의 거리는 자못 가까워진다. ‘훼손된 자아(spoiled self)’(어빙 고프먼)의 폭력적 자기 증명. 문제는 이런 방식이 주체의 훼손된 자아를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방식의 예술행위 또는 글쓰기가 자기모멸의 늪에 빠진 주체에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자못 위험해 보인다. 다행히 작가는 「메리골드」에서 이러한 폭력성의 늪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를 스릴러의 양식으로 서사화함으로써 자기 응시를 수행하고 있다.
모멸감은 폭력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모멸감의 해소 방식이 항상 폭력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는 예외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수치심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거나, 낮아진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폭력적 충동을 제어해주는 정서적 역량이 결핍되어 있을 때, 모멸감을 느낀 ‘훼손된 자아’는 자신의 뒤틀린 모습을 타자에 투영하면서 폭력과 폭언을 통한 자기 증명에 매몰될 수 있다.
김현주의 「메리 골드」에 이러한 장면이 등장한다. 갤러리 관장이자 도예가인 화자 ‘나’가 자신의 건물에서 무상으로 ‘꽃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에게 건네는 말들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훼손된 자아가 자신보다 더 연약한 존재를 통해 자기모멸감에서 벗어나려는 뒤틀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몇 개의 문장을 사례로 인용하면, “싸구려 꽃으로 격조 있는 갤러리를 망쳐놓다니, 발코니랑 계단에 유치한 저것들, 당장 다 걷어내요!”/ “이렇게 예술적 센스가 없다니!”/ “당신의 예술적 감각은 형편없어요. 그래서야 카페 운영을 제대로 잘하겠어?”/ “그녀의 원피스는 시장에서 값싼 무명천을 떠다가 만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저급한 취향 때문에 화가 났다.” 등)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에 내몰린 ‘그녀’는 “무조건의 동정과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가여운 존재”(79쪽)였다. 자신의 건물 2층을 내어준 ‘무상임대차계약’은 호의적인 주체가 동정의 대상에게 베푸는 적선으로써 상대적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우울해보였던 그녀의 삶이 메리골드처럼 화사해지면서부터다. 적막했던 갤러리는 그녀가 온 뒤로부터 오히려 활기를 띠기 시작하고(“메리골드 덕분에 행인들이 들어와 일층 전시실을 구경하고 카페로 올라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기도 했다.”), 반면 자신의 작품이 상대적으로 볼품없어 보이이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쫓겨난 듯 한쪽 구석에 몰려 있는, 내 작품들은 이상하리만큼 볼품없어 보였다. 초록으로 뒤덮인 실내에서 박제동물처럼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도자기의 미적 가치를 모르는 그녀를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자기가 업신여기던 사람에게서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자괴감과 자신의 예술이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수치심으로 인해 ‘나’는 모멸의 가해자가 되었다.
‘나’의 모욕적인 말들과 무상임대를 대가로 그녀를 자신의 조수처럼 부리며 멸시하는 장면들에는 자신과 그녀 사이의 위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려는 하려는 의도가 명백했다. 여기에 ‘그녀’가 남편의 전처를 닮았다는 사실까지 더해지자 모멸과 폭력은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가령, 남편의 전처 사진을 칼로 긋는 장면(“환하게 웃는 신부의 얼굴을 나이프로 천천히 그었다. 후련했다.”)이나, 무기력한 대상이 자신에게 굴복했을 때의 쾌감을 묘사하는 장면(“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쾌감이 내 몸에 전율처럼 흘렀다.”)에서 ‘나’가 느끼는 쾌감은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이 생산하는 감정이다.
소설은 이러한 감정의 근원에 자신의 작품이 예술적 허영을 위한 싸구려 소비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불안감(“내 작품들, 원가에 내놓는다고 홀대하지 마세요. 이거 최상급이야. 전부 팔렸으면 좋겠네.”)과 ‘나’가 과거 엄마에게 버림받은 적이 있다는 트라우마를 배치하고 있다. 마땅히 사랑을 주어야 할 존재에게서 버려졌다는 모욕과 자신의 존재가치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수치가 ‘그녀’에 대한 분노로 착종된 것이다. 그러니까 “내 건물에서…어떻게 나보다 더 행복할 수 있어?”(100쪽)라는 말에는 자신을 버린 엄마가 행복하면 안 된다는 분노, 버림받은 자신이 행복질 수는 없다는 슬픔, 나보다 못한 위치의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억울함의 감정들이 뒤섞인 증상인 셈이다. (한 번도 해소되지 못한 이러한 모독의 감정들은 「떠도는 영혼의 노래」와 「아무도 모른다」에서 각각 국가폭력과 면역 정치에 의해 잊혀진 죽음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모멸과 폭력의 악순환은 작품의 행간에 감추어진 죽음을 통해 스릴러로 서사화된다. ‘나’가 코엑스 전시 후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그녀’가 사라진 사건을 주목해보자. 화자는 “그녀는 노란 메리골드를 뽑지도 않았고, 붉은 샐비어를 심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없는 동안, 갤러리를 비운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99쪽)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화자의 진술은 믿을 수 없다. 이유는 소설의 말미에 아무렇지 않게 슬쩍 언급된 다음의 문장 때문이다. “나는 뒤틀린 손가락 관절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그녀의 겁먹은 창백한 얼굴을 떠올렸다.”(100쪽) 그러니까 일주일 전 ‘그녀’는 ‘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의도적 기억상실은 2층 카페를 가득 채운 “사라지지 않는 소독 냄새”라는 무의식적 진술로만 확인된다. 따라서 소설 맨 앞에 배치된 평범한 문장(“이층 카페의 탁자보를 걷어내면서, 나는 그녀를 느꼈다. 표백제를 푼 물통에 누런 탁자보를 담그고 카페 내부에 소독약을 뿌렸다.”)은 ‘나’의 무의식이 남긴 사후적 증거에 해당한다.
5.
소설의 스릴러적 플롯이 잘 배치되고 있는지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메리골드」는 분명 자신이 자행한 폭력의 기억마저 멸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멸적 폭력의 초라함, 모욕당한 자존감이 자기를 위협하는 외부 인자에 대해 보이는 면역학적 과잉 반응, 연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모멸감의 극단에서 어떻게 역진화하면서 파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단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번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모멸감의 근원에 오랜 시간 글쓰기로부터 멀어진 작가의 자기진단의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현주 작가의 소설을 모멸감과 폭력의 역학관계로 독해하는 이 글의 시작점에는 「빅 블루」가 있었다. 이는 앞서 진술한 바 있는 말, 그러니까 ‘약자에 대한 멸시와 모욕으로 가득 찬 소설의 행간에는 자기혐오와 불안이 감추어져 있다’는 말과 연관된다. 「빅 블루」는 작품을 생산하지는 못하고 문화 소비에만 매몰된 채 문학이라는 질병에 침전된 화자의 모습을 자기혐오와 시대와의 불화라는 방식으로 응시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소설이 자꾸 “아주 오랫동안 소설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겹쳐 읽힌다. 또 김현주의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연약한 존재들이 느끼는 자기혐오와 모멸감이 글쓰기로부터 멀어졌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 것처럼도 보인다. 이러한 섣부른 짐작 때문에 나는 다음의 문장들이 아프게 읽혔다.
세헤라자데는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천 일 동안 매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밤, 고통의 밤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이야기가 완성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 불멸의 글쓰기, 나도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점점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아무 책도 읽고 싶지 않게 되었다. 현재는 멍 때리며 노는 인간, 쓰지 못하고 죽어가는 작가가 되었다.(「빅 블루」, 64쪽)
나는 어쩌면 <그랑블루>의 주인공처럼 깊이 잠수하는 병에 걸린 것일까. 빅 블루, 푸른 바닷속으로 책이 떠다니면서 작가가, 작가가 만든 주인공이, 작가가 썼던 문장들이 돌고래처럼 헤엄치거나 솟구쳐 오르는 것을 연상하면서 … 죽는다. 푸른 바다로 몸을 던진다. … 막막한 소설의 바다. … 바다 맨 밑으로 들어간다. 바다 속, 눈이 어두운 심해어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수영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익사한다. (「빅 블루」, 68쪽)
여기서 ‘나’는 가혹한 자기 심문 과정에서 스스로를 모멸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깊고 푸른 어둠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대상화한다. 문학이라는 ‘질병’에 갇힌 화자의 무기력은 예술가로서의 승인과정에서 경험한 어떤 모욕에 대한 자기 심문으로 읽혔다. 글을 쓰기 위해 국가 행정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모독은 그 감정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것이다. 또 생산 없이 소비로만 이어지는 상황에서의 공허함은 한 인간의 자기 실격 보고서임과 동시에 자기모멸의 감정을 통과하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에 대한 기록으로 읽혔다. 무엇보다 이 강도 높은 고해성사는 대단한 용기로 읽혔다는 점도 말해 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서툰 짐작 끝에 생기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어떤 사람들의 자기증명 과정은 세계 전체와 싸우는 방식으로만 가능한지? 왜 어떤 사람들의 구조신호는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찢어야만 겨우 낮은 주파수나마 얻게 되는 것인지? 왜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모욕하고 모멸하면서 그것이 어쩌면 자기 고백일 수도 있는 가혹한 지점에 서야만 하는지?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글을 마주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누구 또한 오랫동안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었으나 오랫동안 글을 읽는 세계에서 유폐되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공감 또는 응원이 될 수 있을까? 믿고 싶은 한 가지는 ‘사건의 지평선’을 빠져나온 힘이라면 무한한 우주 어디라도 이행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작가 김현주의 앞으로의 항해를 응원한다.
Ⅱ. 차별과 환대
- 김성훈, 『길목의 무늬』, 문학들, 2024.
1.
김성훈의 소설집 『길목의 무늬』에는 버려진 아이들의 좌절과 상처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이 미성숙한 자아의 패배적 자전서가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읽히는 이유는 버려진 아이들의 구조신호에 기꺼이 응답하는 인물들의 환대와 연대 때문이다. 김성훈의 소설은 제 몫을 부여받지 못한 채 경제와 사회의 셈법에서 뺄셈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발전의 뒷골목에서 하위주체로 명명되거나, 정당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하고 그늘진 외진 장소로 배치된 채 ‘비체’로 살아가는 인물들이 서사의 대상들이다.
2.
소설집의 표제작인 「길목의 무늬」의 배경인 목포의 ‘다순구미’ 마을은 이러한 인물들의 장소이다. “볕이 잘 들고 따뜻하다”는 의미와 달리 이곳은 “가난을 머리에 이고 지고 사는 동네”(34족)로서 지금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폐허의 장소다. 그리고 이곳에서 태어난 화자 ‘나’는 이른바 ‘파시의 아이’였다.
바다에서 서는 장을 파시라고 한다. 나는 파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서산동 유곽에서 버림받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를 일컬어 누구는 임자도 여자라고 했고, 또 누구는 흑산도 각시라 했고, 더러는 산다이 색시라고도 했다. 동네 사람들의 절구질하는 입방아가 싫었다. (「길목의 무늬」, 37쪽)
그러니까 ‘나’는 바닷사람들의 욕망이 부딪는 장소에서 태어난 존재로서, 부모의 존재나 출생지조차 불분명하여 처음부터 사회적 성원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로 이 세계에 내던져진 우연적 존재였던 셈이다. ‘파시’에서 몸을 팔던 어머니는 “어선이 입항하는 날, 나를 낳고, 기침하고, 다시 유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49쪽) 손님으로 만난 아버지에게 ‘나’를 맡김으로써 그녀는 장차 어린 아이가 겪어야 할 차별과 혐오를 벗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어린 화자의 삶은 “태생의 천박함에 응시한 타인들의 시선”(37쪽)에 노출되었고, ‘다순구미’를 떠나 바깥 세계로 입문하려던 시도도 실패했다. 몸을 파는 어머니의 직업과 버려진 아이라는 주홍글씨는 ‘나’의 태생에서부터 새겨진 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작동했다. 사회의 정상적 성원권을 획득하려던 시도는 모두 실패로 귀결된다.
‘나’의 친구이자 첫사랑이기도 한 ‘달순’은 주인공이 겪은 사회적 차별을 젠더의 측면에서 강화하고 보충하는 인물이다. 경제적으로 외부화된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달순의 희망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좌절되고, 소규모 직장에서 경험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차별은 결국 ‘달순’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야기한다. 소설의 말미에서 ‘나’가 ‘달순’의 기타를 가지고 비행기에 올라 타국으로 향하는 장면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존재들의 바깥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를 띤다.
여기까지만 보면 김성훈의 등단작품인 「길목의 무늬」는 버려진 아이들의 실패서사로 읽히면서 사회적 차별을 서사화한 소설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나’를 기꺼이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희생과 환대의 서사를 통해 소설을 패배주의와 우울에서 건져내고 있다. 양부라는 사실을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머리 검은 짐승 거둬 키워도 잘만 산다는 것”(49쪽)을 동네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임으로써 ‘나’를 차별의 늪에서 건져냈다. 그는 어머니와의 짧은 만남과 약속을 기억하면서 “우짜든지 너랑 나는 잘 살아야 해.”(49쪽)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달순 엄마’는 친모의 빈자리를 그 이상으로 대리보충한 ‘엄마’였다.
운동회고 소풍이면 내 도시락까지 싸줬던 달순 엄마였다. 그 품에 엄마의 젖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아버지가 먼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밤이면 달순네 집에 들어가 그 좁은 방에 꾸역꾸역 발을 들이밀고, 유달산 자락에서 얻어온 도깨비바늘을 그 집 이불에 달라붙게 했다. (「길목의 무늬」, 39쪽)
‘달순 엄마’는 ‘나’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가 “휴학, 복학, 취업, 명예퇴직, 재입학” 등의 말들이 암시하는 거친 시간들을 통과하는 동안 그 “단어들이 빚어낸 내 세월을 흉금 없이”(39쪽)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달순네’는 ‘나’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의 젖 냄새”가 배어있는 장소이면서 외로움과 자기비하에서 화자를 건져내 준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의 출생에 얽힌 공백 위에 ‘아버지’와 ‘달순 엄마’의 무조건적 환대를 중첩시킴으로써 어린 인물을 차별과 혐오의 늪에서 구원했다. 무엇보다 이러한 환대의 힘은 ‘나’가 이후 ‘견습 선교사’가 되어 케냐로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국가폭력과 전쟁의 희생자들이 생산되는 장소, 달리 말해 자신과 같이 버려진 아이들이 있는 장소라는 점에서 상처를 극복한 인물이 자신이 받은 환대를 타자에게 되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소설은 ‘달순 엄마’에게 새로운 임무를 한 가지 더 부여하면서 서사의 의미를 확장한다. ‘달순 엄마’는 버려진 아이가 자기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을 돕는 조력자이면서, 비밀에 부쳐진 인물들의 과거를 현재로 재송신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달순 엄마’는 과거 “일제 강점기 유곽촌이 있던 동네, 서산동, 그곳에서 산다이 색시들의 밥을 만들고, 빨래하며 품삯”(38쪽)을 벌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친모와 함께 “식모 일을 하면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41쪽)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나’의 친모가 비워진 공백의 자리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장소성으로 확장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길목의 무늬」는 어머니의 실종으로 상징되는 공백의 장소에 과거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소녀들이 짊어졌던 희생의 무게와 그녀들이 거쳐 온 사회적 장소들을 기입한 것이다. 산업화 시대 속 도시로 이주한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을 상기할 때, 나’의 친모에 대한 서사적 누락과 죽음을 앞둔 ‘달순 엄마’의 쇠락한 신체는 그 시대 하위주체 여성들의 삶과 존재가 사회에 정상적으로 기입되기 어려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불어 친모의 부재는 여성 하위주체들의 삶이 역사의 서술에서 누락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달순 엄마’의 현재성은 이들의 삶이 이후에도 여전히 사회적 외부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김성훈의 소설 「길목의 무늬」는 ‘다순구미’와 같은 버려진 장소에 얽힌 인물들의 삶을 산업화 시대를 통과한 하위 주체들이 걸어 온 ‘길들의 무늬’로 재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다순구미’라는 장소의 역설적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목포의 특정 장소에 한국 사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덧입히는 작업을 수행하는 작품이다.
3.
산업화 시대의 첨병 공간이었던 여수와 마산을 배경으로 쓰인 「정오의 끝자리, 빛」과 「홍콩빠 이모」는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와 레드콤플렉스에 포획된 인물들을 전면 배치하면서 한국 사회의 국가 폭력이 혐오의 대상을 낙인찍고 그들을 사회의 바깥으로 배제했던 폭력의 역사를 서사화하고 있다. 전자의 소설이 그 대표적 낙인의 서사라면 후자의 소설은 이를 연대의 차원에서 극복하고 있다.
「정오의 끝자리, 빛」의 한덕수는 그 출생부터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덕수의 현재 시점에서 두 세대의 시간을 거슬러야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가혹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이다. 한덕수의 외할아버지는 여수읍의 한 국민학교에서 음악교사로 부임 중이었다. 그러다 1948년 10월 어느 날 그는 빨갱이의 부역자로 내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이후 그의 가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국가폭력의 구성적 외부로 배치되었다.
“울 엄마가 그랬시야, 차라리 고아랑 놀아라, 빨갱이 자석하고 말 섞었다간 네 신세 조져분다고잉.”
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르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아이를 기다리며 놀고 있었는데, 기다리던 아이의 입에서 ‘빨갱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빨갱이’라는 단어의 생김새를 알았다. 피 묻은 돌멩이라는 것을 말이다. 번갯불이 내 몸을 지지는 듯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사건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빨갱이’라는 뜻은 몰라도 그 단어는 무서웠다. ‘빨갱이’는 이후의 내 삶을 내 의지랑 상관없이 끌고 갔다. 땅의 중력처럼, 파도의 출렁거림처럼. 살아 있는 동안 내게 떠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나는 ‘빨갱이’랑 살았다. (「정오의 끝자리, 빛」, 61쪽)
인용문은 억울하게 이데올로기의 피해자가 된 한 인물의 후손들이 단지 핏줄이라는 이유로 친구와 사회로부터 차별화되고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보여준다. 오래 전의 낙인은 사건과 무관한 후손들의 삶을 비극으로 색칠했다. 차이 나는 대상에게 혐오와 배제의 스티그마(stigma)를 라벨링하는 일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했던 시간들이었다. 국가폭력이 생산한 어떤 오염물이 행여라도 주체의 내부로 침투할까 두려웠던 시절이었다. 한때나마 주체의 일부(가족이나 친족)였거나 아주 가까운 대상들(친구나 이웃)까지도 오염물로 치부하면서 주체의 바깥으로 뱉어내는 것이 생존의 기술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오염의 가능성이 있는 이웃을 타자화하고, 이념적 차이를 악으로 규정짓고 차이가 있는 타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국가의 동질성 유지를 위한 정의로 위장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이런 점에 주목할 때 김성훈의 소설은 현재 시점에서 한 인물이 처한 사회적 의미를 역사적 시간을 소환하면서 계통 발생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이다. 여전히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한 차별과 혐오의 시작점을 1948년의 여순사건으로 기점화함으로써 김성훈의 버려진 아이들의 성장 소설로 멈출 수도 있었던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국 사회의 차별적 구조가 생산된 발생지점까지 확장하고 있다.
한덕수의 어머니인 양순임의 탄생과정은 이러한 비극을 더욱 강화한다. 그녀의 출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기입된 국가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너무나 쉽게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극화한다.
외증조할머니의 원망은 그날 1학년 1반 교실에 모인 마흔 명 가까운 사람들이 들었다. 하지만 마흔 명의 사람 중에 엄마를 제외하고, 외할머니의 넋두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생살여탈권을 보장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엄마에게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소리는 엄마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엄마는 알지 못했다. 다만 엄마는 감각적으로 교실의 냉랭한 기운을 느꼈고, 당시의 운동장 흙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모진 말의 생김새를 봤다.
(「정오의 끝자리, 빛」, 67~68쪽. 강조 인용자)
그러니까 한덕수의 어머니 양순임은 한덕수의 외할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죽던 그날 그밤 그곳에서 태어났다. 양순임은 생사여탈권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의해 결정되기도 했던 그 잔인했던 폭력의 시간에, 모두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숨죽이던 그 시간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년, 제 아비를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라는 저주와 원망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아마도 그 순간 태어난 아이가 여자였기 때문에 더 가혹했을 외증조할머니의 저주의 언어는, 그 죽음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는 외증조할머니를 비롯한 당대 민중들의 무지로 인해 죽음과 탄생의 엇갈리는 비극적 아이러니를 봉건주의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만 해석됨으로써 정작 그 본질적 원인에 해당하는 국가폭력의 무차별성과 비인간성을 삭제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존을 위해 유리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라도 해석하지 않고서는 그 죽음을 의미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양순임은 태어난 순간 죽음의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가 태어나는 그 순간 “처음 느낀 감각은 고립”(36쪽)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탄생 자체가 부정당한 양순임은 생의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봉건주의가 생산한 두 층위의 주홍글씨에서 자유롭지 못한 저주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셈이다.
4.
마산의 자유무역지구의 대폿집을 배경으로 쓰인 「홍콩빠 이모」는 「정오의 끝자리, 빛」이 보여주는 차별의 재생산을 반복한다. ‘홍콩빠’로 불리는 술집의 여주인 김명자가 느끼는 불안과 조바심을 통해 소설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반공주의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한 번 오염물로 분류된 차별과 혐오의 대상은 그 주변까지 오염의 대상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명자는 혹여라도 자신의 가족과 이웃이 낙인의 대상으로 라벨링되지나 않을까 무섭다.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겪은 사실은 그녀의 이런 조바심이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대부분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기록된 온갖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극화되기 때문이다. 가령 홍콩빠의 단골이자 1980년대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들’이 YH사건을 경험하면서 언어와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실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명자의 가족들의 사정을 보면, 직업학교를 다니며 구두닦이 생활을 하던 김명자의 막내동생은 4·19 시절 목숨을 잃었다(“마산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이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동생은 시위대를 이끌다 산화했다.”, 87쪽). 김명자의 남편은 베트남전쟁의 용병으로 참전한 후 고장 난 신체와 정신으로 괴로워하다 자살했다. 대학생인 김명자의 아들은 유신정권의 폭력성과 불합리함을 알리기 위해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아마도 소설이 생략한 작품의 백스토리를 상상건대. 김명자 아들은 이후 부마항쟁과 5·18로 명명되는 한국현대사의 정치적 비극에서 피해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그러나 김성훈 소설이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홍콩빠’를 비롯한 마산자유무역지구 일대를 해방 공간으로 만드는 이곳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연대의 장면에 있다. 다음의 인용문은 김명자가 아들 또래의 노동자 ‘육손이’를 자기 자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고, 그가 국가 폭력의 희생제물로 전락하는 순간을 막아서는 장면이다.
저 멀리 호각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김명자의 가슴팍에는 비가 흠뻑 젖었고 바지단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김명자는 육손이가 길거리에서 몰매는 맞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옴마야. 점마 일 내것다 아입니꺼.”
김명자는 육손이에게 허둥지둥 다가가 포대기 감싸듯 그를 끌어 안았다. 옷을 적신 비 때문에 서늘한 기운이 김명자의 품에 달려들었다. 그런데도 육손이의 입에서 흘리는 몸 냄새는 김명자의 얼굴에 닿아 체온을 데웠다.
“불 끄입시더. 우리! 아, 저…우리 아, 얼굴 별빛에도 비추면 안 되입니더. 불 끄입시더. 이모들이요. 이 야, 어린 것 맨상부터 가리입시더. 퍼뜩 안 하고 뭐하십니꺼. 불 꺼!”
김명자는 기운을 뻗쳐 소리쳤다. 홍콩빠의 불빛이 하나, 둘 소등됐다. 이윽고 마산 시내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홍콩빠 거리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수선스러운 움직임이 육손이를 향해 동심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하늘에서 구름에 가린 조약돌 같은 별이 바다에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사람들은 스크럼을 짰다. (「홍콩빠 이모」, 100~101쪽)
마산자유무역지구의 화려한 야경을 칠흑으로 변신시키는 “불 꺼!”라는 외침은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은폐되는 국가폭력을 일시 정지시켰다. 또 김명자를 비롯한 홍콩빠 사람들의 “스크럼”은 김성훈의 작업이 기입하려고 하는 무조건적 환대와 자기희생의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 장면은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면서 어두운 시대의 좌절을 이겨내는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아마도 이 환대의 자리에 「길목의 무늬」에 등장한 ‘달순 엄마’와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지 말라는 법이 없다.
김성훈 소설집의 해설을 쓰고서 한 달 남짓의 시간이 흐른 후인 2024년 12월 어느 날 계엄 사태가 발생했다. 숨죽이며 상황의 흐름을 응시하던 그 몇 시간 동안 우리는 국회와 그 인근의 거리에서 계엄군을 몸으로 막아선 시민들을 보았다. 그들이 벌어준 30여 분의 시간이 한국사회를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들의 신체가 맞닿은 스크럼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만이 아니라 1980년의 광주와 1987년의 시청 광장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 스크럼과 연대는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지녔던 어느 도시에 대한 부채를 한꺼번에 갚아준 장면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한강 작가의 질문이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국현대사를 소환하면서 2024년에 쓰인 김성훈의 소설들이 뒤늦은 첨언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증명된 시간이었다.추천 콘텐츠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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