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푸른사상 2024년 겨울호(제51호)
어둠과 침묵 속의 이데아―『희랍어 시간』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규범적 양식 아래서 읽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다. 유기적인 서사와 플롯과 같은 사건의 인과론적 배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작품은 소설어로서는 이례적으로 함축의 밀도가 높다. 자유연상과 직관에 가까운 느낌과 정동이 빈번하게 돌출되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고도로 응축적인 시어를 해독하는 일처럼 독자들은 어떤 모호한 감각적 혼란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2011)은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의 발표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이 두 작품에 대한 뜨거운 평가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집중적 관심으로부터는 일견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의 외형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설을 비평적으로 연결하는 열쇠어는 연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가까운 세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가 사회적 동물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가부장적 폭력을 조명하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구체적 범주로 확대한다.
한강의 작가적 사유구조 속에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선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의 구족 혹은 체제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나는 『희랍어 시간』 역시 ‘폭력’에 대한 한강의 작가적 사유가 ‘언어’라는 소재를 매개로 전개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에게 세계의 폭력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사건성’을 계기로 이해되거나 설명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부조리한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된다.
a)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43쪽).
b)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너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101쪽).
위의 인용문 a)의 경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이 독일에 있는 헤어진 사랑의 대상에게 쓰고 있는 편지의 한 부분이고, b)의 경우는 실어증에 빠진 수강생인 여성이 과거에 있었던 부조리한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a)의 남성은 조부 때로부터 비롯된 유전질환으로 마흔이 되기 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독일인 여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반면, 남성은 어디에선가 읽은 바가 있다는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이라며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다.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일 신이 무능한 존재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성의 논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들이 처해 있는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반발감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의지나 선악과 같은 도덕률의 준수나 위반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인 남성에게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선험적 폭력성으로 체감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설 속의 남성에게 신이란 바로 그 가혹한 폭력과 악의 부조리한 실행 상황에서도 침묵을 본질로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파스칼적 명상을 보충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불가지론을 피력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성의 내적 절망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한편 b)에서 회고되는 상황의 폭력성은 두 겹의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리는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에서 백구가 승합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이것은 백구나 그의 곁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의 의지의 ‘저편’ 혹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 폭력이다. 그 끔찍한 폭력은 백구나 여자아이의 외부에서, 다시 말하면 의지의 저편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공황에 가까운 충격을 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조리는 충격과 연민의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껴안았던 백구가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로 여자아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경험에서 온다. 당시의 여자아이와 그것을 회고하고 있는 실어증에 빠져 있는 여성에게, 선의에 대항하는, 아니 선의와는 무관한 폭력적 체험이라는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외상적 공포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세계를 근원적인 부조리와 폭력으로 인식하거나 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 속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과 문학적 성격을 밝히는 일은 별도의 작가론에서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소설적 질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 이 소설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비평적·논리적 추론과정의 구조와는 달리, 이 소설은 쓰여짐의 당시에 어떤 완결된 플롯을 전제하거나 사건의 골격을 완성한 단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작가는 아마도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하게 혹은 남성 인물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력을 상상하면서 현실을 비원근법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단일한 시점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간다는 식으로, 서사의 불투명성을 의식하거나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장이 전개됨에 따라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잦은 교체를 보인다. 이에 따른 서술자 역시 남성과 여성으로 자주 교차된다. 편지의 형태가 등장할 때는 2인칭으로 전환되며, 3인칭의 경우에도 제한적 전지시점과 작가 전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사건의 서술이기 보다는 기억과 인상의 다층적 묘사로 느껴질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두 인물 그러니까 서서히 시각을 읽어가는 남성 인물과 언어, 더 정확히는 한국어의 발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여성인물은 일단 그들을 주체화해 표상할 고유명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없이 ‘나’ ‘그’ ‘그녀’로 지칭되면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감각적 현실과 얼마간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과 빈틈이 많은데, 그 사이로 ‘유령적인 것’이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와 화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이제는 타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상실된 자기가 현재의 자기와 공존하면서, 간섭하기 때문이다. 상실된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부유하는 듯한 일상 속의 자기를 찾아와 기억을 뒤섞는다.
남성에게 그것은 환(幻)으로 충만했던 지등의 선명한 불빛이고, 여성에게는 음소와 음운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활력으로 충일하게 느꼈던 최초의 기억이다.
a)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낯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이고 있었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25쪽).
b)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 속에서 만들어 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13-14쪽).
a)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의 회고이며, b)는 그 강의를 수강하고 있으며 실어증에 직면해 있는 여성의 기억이다. 각각 시각-풍경(a)과 청각-인식(b)에서 오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a)가 시각적 감각자극으로부터 오는 희열이라면, b)는 기호로서의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절하면서, 그것을 발화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로부터 오는 감각적 희열로 설명할 수 있다. a)에서는 그 시각적 희열의 경험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b)에서는 그 청각적 희열을 “생생한 흥분과 충격”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적·청작적 희열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현전성(現前性)에 대한 감각적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체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성의 충일한 ‘빛’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의 마술적인 한국어 청각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전율 혹은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렁이는 지등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론적 자기확인과 한국어 음운을 발화/발음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청각적 언어의 현전의 충격 때문이다. 대상과 나의 틈 혹은 간격이 일소되고, 거기에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실성이 마술적으로 감각/지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충일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의 경험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남성에게는 빛이 희미해져 가면서 어둠이 짙어지고, 여성에게는 언어의 청각적 발화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전하는 사건이 거듭 벌어진다.
우선 남성의 경우. 10여 년을 살던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청년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도계 독일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청력을 상실한 것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대신 소통을 위해 말하는 상대의 입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해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읽히게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말하기-듣기 기능의 장애를 ‘시각’을 통해서 보충하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자신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결혼하고 싶다라고 여성에게 말한다.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남성이 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세계의 의미체계나 상징체계로부터의 추방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니, 이제 당신은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에 격분한 여성이 남성을 폭행하고 그들은 돌연한 결별을 맞게 된다. 시력=빛의 잠재적 상실이 부조리와 폭력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존재상실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였던 요아힘 그룬델과의 추억 역시 남성에게 또다른 명백한 상처로 남게 된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운명에 처한 친구는 소설을 읽어보면 철학적 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파트너로서의 욕망도 품고 있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남성에게 너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이라고 말하면서, 남성의 잠재적 미래의 불모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날카롭게 충격한다. 동성과 이성을 막론하고, 그가 사랑한다고 느꼈던 두 대상으로부터의 추방과 이별은 이렇게 ‘빛의 상실’이라는 진행형의 감각적 쇠퇴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에게 ‘말’로 상징되는 언어의 청각적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거기에는 두 개의 언어적 트라우마 체험이 개입된다. 최초의 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을 임신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티프스에 결렸고, 그래서 낙태를 결심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출산했다. 이 체험을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넌 못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이때 고모들, 외사촌들, 이웃집 여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이 말들은 언어가 ‘세계’로 들어가는 친밀한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죽음의 위협 혹은 상징적 거세의 위협으로 화자에게는 인식된다.
두 번째 계기는 이혼과 함께 여성에게 난사되었던 전 남편의 거친 폭력의 언어들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또 한 번의 존재론적 상실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62쪽).”라는 절규 이후의 여성의 실어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빛의 상실’과 ‘말=소리의 상실’이라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두 남녀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의 희랍어 강의를 진행하는 남성은 상실된 시력 탓에 희랍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어렵게 문자를 쓴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실어증의 여자는 그 낯선 문자를 노트에 적으면서, 기꺼이 한국어라는 언어공동체의 외부로, 어쩌면 존재론적 외부로 자기를 부유하는 상태로 위치시키는 데서 비로소 안심한다.
이 두 남녀 주인공들에게 희랍어는 다만 묵독(默讀)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매개로 한 밀도높은 대화=소통=교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와도 같아서 미끄러지고 빗나가는 상황만 연출할 뿐, 존재론적 의미로 정착되거나 그들의 관계를 결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두 존재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게 되고, 여자가 말 대신 안경이 깨어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상실되었던 흔적 없이 지워질 한국어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일상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나 문화적 유물과도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희랍어의 언어 체계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존재론적 자기회복과 기적 같은 마주침을 묘사하고 있다. 침묵과 결여와 상실이 거꾸로 회복과 구원과 만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어적 질문을 이 소설은 사금파리처럼 일순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그 빛을 숨기는 시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서 읽기보다는 혀와 성대를 간신히 열어 느리게 낭독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된다. 어둠이나 침묵 속에는 과연 이데아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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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규범적 양식 아래서 읽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다. 유기적인 서사와 플롯과 같은 사건의 인과론적 배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작품은 소설어로서는 이례적으로 함축의 밀도가 높다. 자유연상과 직관에 가까운 느낌과 정동이 빈번하게 돌출되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고도로 응축적인 시어를 해독하는 일처럼 독자들은 어떤 모호한 감각적 혼란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2011)은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의 발표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이 두 작품에 대한 뜨거운 평가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집중적 관심으로부터는 일견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의 외형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설을 비평적으로 연결하는 열쇠어는 연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가까운 세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가 사회적 동물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가부장적 폭력을 조명하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구체적 범주로 확대한다. 한강의 작가적 사유구조 속에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선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의 구족 혹은 체제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나는 『희랍어 시간』 역시 ‘폭력’에 대한 한강의 작가적 사유가 ‘언어’라는 소재를 매개로 전개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에게 세계의 폭력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사건성’을 계기로 이해되거나 설명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부조리한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된다. a)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43쪽). b)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너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101쪽). 위의 인용문 a)의 경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이 독일에 있는 헤어진 사랑의 대상에게 쓰고 있는 편지의 한 부분이고, b)의 경우는 실어증에 빠진 수강생인 여성이 과거에 있었던 부조리한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a)의 남성은 조부 때로부터 비롯된 유전질환으로 마흔이 되기 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독일인 여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반면, 남성은 어디에선가 읽은 바가 있다는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이라며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다.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일 신이 무능한 존재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성의 논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들이 처해 있는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반발감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의지나 선악과 같은 도덕률의 준수나 위반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인 남성에게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선험적 폭력성으로 체감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설 속의 남성에게 신이란 바로 그 가혹한 폭력과 악의 부조리한 실행 상황에서도 침묵을 본질로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파스칼적 명상을 보충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불가지론을 피력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성의 내적 절망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한편 b)에서 회고되는 상황의 폭력성은 두 겹의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리는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에서 백구가 승합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이것은 백구나 그의 곁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의 의지의 ‘저편’ 혹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 폭력이다. 그 끔찍한 폭력은 백구나 여자아이의 외부에서, 다시 말하면 의지의 저편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공황에 가까운 충격을 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조리는 충격과 연민의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껴안았던 백구가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로 여자아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경험에서 온다. 당시의 여자아이와 그것을 회고하고 있는 실어증에 빠져 있는 여성에게, 선의에 대항하는, 아니 선의와는 무관한 폭력적 체험이라는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외상적 공포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세계를 근원적인 부조리와 폭력으로 인식하거나 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 속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과 문학적 성격을 밝히는 일은 별도의 작가론에서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소설적 질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 이 소설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비평적·논리적 추론과정의 구조와는 달리, 이 소설은 쓰여짐의 당시에 어떤 완결된 플롯을 전제하거나 사건의 골격을 완성한 단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작가는 아마도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하게 혹은 남성 인물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력을 상상하면서 현실을 비원근법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단일한 시점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간다는 식으로, 서사의 불투명성을 의식하거나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장이 전개됨에 따라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잦은 교체를 보인다. 이에 따른 서술자 역시 남성과 여성으로 자주 교차된다. 편지의 형태가 등장할 때는 2인칭으로 전환되며, 3인칭의 경우에도 제한적 전지시점과 작가 전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사건의 서술이기 보다는 기억과 인상의 다층적 묘사로 느껴질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두 인물 그러니까 서서히 시각을 읽어가는 남성 인물과 언어, 더 정확히는 한국어의 발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여성인물은 일단 그들을 주체화해 표상할 고유명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없이 ‘나’ ‘그’ ‘그녀’로 지칭되면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감각적 현실과 얼마간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과 빈틈이 많은데, 그 사이로 ‘유령적인 것’이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와 화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이제는 타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상실된 자기가 현재의 자기와 공존하면서, 간섭하기 때문이다. 상실된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부유하는 듯한 일상 속의 자기를 찾아와 기억을 뒤섞는다. 남성에게 그것은 환(幻)으로 충만했던 지등의 선명한 불빛이고, 여성에게는 음소와 음운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활력으로 충일하게 느꼈던 최초의 기억이다. a)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낯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이고 있었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25쪽). b)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 속에서 만들어 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13-14쪽). a)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의 회고이며, b)는 그 강의를 수강하고 있으며 실어증에 직면해 있는 여성의 기억이다. 각각 시각-풍경(a)과 청각-인식(b)에서 오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a)가 시각적 감각자극으로부터 오는 희열이라면, b)는 기호로서의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절하면서, 그것을 발화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로부터 오는 감각적 희열로 설명할 수 있다. a)에서는 그 시각적 희열의 경험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b)에서는 그 청각적 희열을 “생생한 흥분과 충격”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적·청작적 희열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현전성(現前性)에 대한 감각적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체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성의 충일한 ‘빛’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의 마술적인 한국어 청각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전율 혹은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렁이는 지등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론적 자기확인과 한국어 음운을 발화/발음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청각적 언어의 현전의 충격 때문이다. 대상과 나의 틈 혹은 간격이 일소되고, 거기에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실성이 마술적으로 감각/지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충일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의 경험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남성에게는 빛이 희미해져 가면서 어둠이 짙어지고, 여성에게는 언어의 청각적 발화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전하는 사건이 거듭 벌어진다. 우선 남성의 경우. 10여 년을 살던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청년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도계 독일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청력을 상실한 것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대신 소통을 위해 말하는 상대의 입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해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읽히게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말하기-듣기 기능의 장애를 ‘시각’을 통해서 보충하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자신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결혼하고 싶다라고 여성에게 말한다.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남성이 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세계의 의미체계나 상징체계로부터의 추방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니, 이제 당신은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에 격분한 여성이 남성을 폭행하고 그들은 돌연한 결별을 맞게 된다. 시력=빛의 잠재적 상실이 부조리와 폭력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존재상실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였던 요아힘 그룬델과의 추억 역시 남성에게 또다른 명백한 상처로 남게 된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운명에 처한 친구는 소설을 읽어보면 철학적 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파트너로서의 욕망도 품고 있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남성에게 너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이라고 말하면서, 남성의 잠재적 미래의 불모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날카롭게 충격한다. 동성과 이성을 막론하고, 그가 사랑한다고 느꼈던 두 대상으로부터의 추방과 이별은 이렇게 ‘빛의 상실’이라는 진행형의 감각적 쇠퇴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에게 ‘말’로 상징되는 언어의 청각적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거기에는 두 개의 언어적 트라우마 체험이 개입된다. 최초의 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을 임신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티프스에 결렸고, 그래서 낙태를 결심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출산했다. 이 체험을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넌 못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이때 고모들, 외사촌들, 이웃집 여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이 말들은 언어가 ‘세계’로 들어가는 친밀한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죽음의 위협 혹은 상징적 거세의 위협으로 화자에게는 인식된다. 두 번째 계기는 이혼과 함께 여성에게 난사되었던 전 남편의 거친 폭력의 언어들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또 한 번의 존재론적 상실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62쪽).”라는 절규 이후의 여성의 실어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빛의 상실’과 ‘말=소리의 상실’이라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두 남녀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의 희랍어 강의를 진행하는 남성은 상실된 시력 탓에 희랍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어렵게 문자를 쓴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실어증의 여자는 그 낯선 문자를 노트에 적으면서, 기꺼이 한국어라는 언어공동체의 외부로, 어쩌면 존재론적 외부로 자기를 부유하는 상태로 위치시키는 데서 비로소 안심한다. 이 두 남녀 주인공들에게 희랍어는 다만 묵독(默讀)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매개로 한 밀도높은 대화=소통=교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와도 같아서 미끄러지고 빗나가는 상황만 연출할 뿐, 존재론적 의미로 정착되거나 그들의 관계를 결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두 존재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게 되고, 여자가 말 대신 안경이 깨어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상실되었던 흔적 없이 지워질 한국어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일상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나 문화적 유물과도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희랍어의 언어 체계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존재론적 자기회복과 기적 같은 마주침을 묘사하고 있다. 침묵과 결여와 상실이 거꾸로 회복과 구원과 만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어적 질문을 이 소설은 사금파리처럼 일순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그 빛을 숨기는 시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서 읽기보다는 혀와 성대를 간신히 열어 느리게 낭독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된다. 어둠이나 침묵 속에는 과연 이데아가 없는가.
1. 글자들을 연달아 읽는다. 또는 연이어 쓴다. 복수의 단어나 문장 중 하나를 선택하고 연결한다. 이 일을 거듭하다 보면 글자와 마주 접촉하기 어려워지는/괴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여기서 ‘글자’란 문학으로 불리는 텍스트뿐 아니라, SNS 안에서 빠르게 휘발되는/스크롤되는 게시물이나 우연히 들른 장소의 벽에 부착된/전시된 글 역시 포함한다. 쓰고 읽는 것을 업으로 받아들였다 해도, 매 순간 글자와 공명하기는 어렵다. 어느 순간에는 내가 글자를 읽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글자 역시 나를 읽지 못해 버벅대는 것 같다. 글자와 내 사이 공간이 흐려지는,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어떤 사건이 제대로 벌어지지 못하는 느낌은 여러모로 불쾌하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체 자체가 글자를 거부하는 듯한 현상이다. 드물지만 종종 읽는 일 자체가 물리적으로 어려울 때가 있다. 몇 문장을 연달아 따라가는 것만으로 눈이 아프고, 머릿속에 지진이 일며, 눈과 뇌 사이에 놓인 통로가 복잡하게 뒤틀린다. 비슷한 순간이면 겁이 난다. 앞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계속되면 어쩌지? 어떤 글을 읽어도 감정의 동요는커녕, 책 읽는 지루함과 싸우는 일에도 번번이 패배하게 된다면? 글을 읽는 것이 가장 즐겁고 흥미로운 시기는 내 삶에서 오래전에 지나갔다. 이후 오래도록 글을 읽고 쓰는 일은 내게 의무적인(부정적인 뜻만은 아니다) 행위이자 그럼에도 분명히 내게 어떤 의미를 가져오는 일, 그러므로 계속해서 뛰어드는 사건이 되었다. 이 같은 점에선 걷거나 헤엄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길 위나 물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매번 번거롭고 피로하며, 직접 움직이는 순간도 썩 신나진 않지만, 행위를 끝낼 즈음에는 매번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을 구성하며 또한 지탱하고 있다고. 따라서 글자를 읽는 것이 내게 아무 반응도 불러일으키지 않거나, 더 나아가 도무지 불가능한 행위처럼 느껴질 때면 나는 슬그머니 두려워졌다. 이것 없이 살아갈 결심을 여러 번 반복했어도, 이 일 없이 살아가는 미래는 여전히 흉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글과 내가 맞부딪히지 못한다면…… 우리 사이에 어떤 칼/스파크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그러나 근래 읽은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이같은 나의 섣부른 고민이나 두려움, 지루함 등을 금세 허물었다. 더불어 내 안에 놓인 줄도 몰랐던 여러 천장과 기둥 그리고 바닥을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2. 한국어로 책을 읽게 된 이후, 그리고 ‘한국문학’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조금씩 접하기 시작한 이후, 근래처럼 한 작가의 이름이 여러 플랫폼에서 오르내리고 또 화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토록 큰일이었으며, 다양한 시사점을 갖고 우리 주변을 휘감았다. 나는 독자·편집자·작가를 비롯한 주변 ‘문학인’들의 SNS에 수없이 오르내리는 한강 작가와 책의 사진을, 작가의 인터뷰나 낭독 영상이 담긴 뉴스를, 그의 소설이 전하는 역사/참사를 겪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의 수상 소감이 각종 글에 인용되어 퍼져나가는 모습 역시 보았다. 몹시 많은 글자였다. 각 글자가 내 안에 불러일으키는 울림도 분명 있었으나, 그 울림의 형태를 살펴보기도 전에 또 다른 글이 밀려와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 읽지 못한 그의 책 한 권과 독대하는 방식으로 이 위기를 거쳐나가고자 마음먹었다. 하나 책장을 펼친 후, 나는 몇 번이고 독서를 멈춰야 했다. 문장들이 쌓일수록 숨이 막혔고 종래에는 몸 안쪽 어딘가가 허물어졌다.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보다 ‘덜 괴로운/어두운’ 책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책은 내가 그간 읽은 한강 작가의 다른 소설과 시, 산문만큼이나 괴로웠다. 혹은 그보다 더욱 힘겨웠다. 『희랍어 시간』의 두 화자는 어느 날 말을 잃은 ‘그녀’와 점차 시력을 잃어가는 ‘그’다. 이들의 이야기는 각기 특수한 삶의 맥락에 놓인 두 개인의 몹시 사적인,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또 세계를 마주한 존재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거시적인 혼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놓이기 이전, 그리하여 세계의 입술과 눈꺼풀을 거침없이 만지던 짧은 유년기가 끝나면 삶은 도리 없이 복잡해진다/부풀어오른다. 내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타인의 신체처럼, 작동 방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괴물/기계의 몸처럼. 언어도 그 변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적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을 털어놓다가도 문득 미시감을 느낀다. 내가 쓰는 언어 하나하나가 지닌 밀도가 문득 실감나고, 그것들이 어긋나며 생기는 폭발이 보인다. 멀미하지 않으려면 언어의 밀도를 아예 모른 척하거 나, 폭발에 무뎌져야 한다. 이는 이미지/형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세계를 보는 것, 그리하여 인지하는 행위는 간혹 그 자체로 칼이 된다. 내가 방금 찔린 자국을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른 침범이 시작된다. 세계 속에서 무엇이 넘쳐흐르는 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넘쳐흐른다. 『희랍어 시간』은 이 홍수에서 침묵하거나 눈 감은 이들을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침묵하거나 눈 감지 않는 방법을 고민한다. 그 시작점은 고요와 어둠을 그저 부재로만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점차 어두워지는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사랑과 관계된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고, 그녀는 자신의 침묵을 진단하고자 하는 의사에게 거듭 말한다/적는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11쪽) 3. 말을 잃고 빛을 잃어가는 두 인물의 손안에 희랍어가 있다. 낯설고 오래된 언어. 수동태와 능동태 대신 재귀적으로 주어 자신을 향하는 제3의 태를 지닌 말.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26쪽)을 갖춘 채 쓰이던 언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와 소리로 오간다. 희랍어의 중간태/재귀태는 문맥에 따라 주어가 동작에 참여하는지, 혹은 동작이 주어에 가해지는지 등의 여부를 표현한다.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문법 형식처럼, 희랍어를 사이에 둔 그녀/그는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 날로 더해가는 공포 속에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말을 걸거나, 손바닥에 느리게 글자를 적어가는 방법을 터득한다.『희랍어 시간』은 망가진 세계를 복원하거나 잃어버린 것을 제자리로 돌려두지 않는다. 다만 무너진 자리에서/눈 감거나 침묵한 자리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령 끝없이 어긋나는 접촉, 어느 것 하나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계속하여 이어지는 언어 같은 것. 다만 이 소설과 독대한 이후 무너진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다만 그것이 괴로운/외로운 경험만이 아니었음은 확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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