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푸른사상 2024년 봄호(제48호)
제주 4·3의 기억과 ‘재일’의 틈새를 통해 본 ‘비평’으로서의 서정 ― 김시종의 시
1. 분단 구조와 ‘재일’의 현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문학 논의의 주요 쟁점은 언어, 민족, 국가에 토대를 둔 이데올로기와 작품의 관련성이었다. 즉 재일조선인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재일의 독자성과 특수성에 주목하기보다는 조선어와 일본어, 남과 북, 민단과 총련 등으로 이원화된 재일조선인 사회의 대립과 갈등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재일조선인문학을 재일조선인 내부의 주체적 시선으로 이해하지 않고 남과 북에 의해 규정된 외부의 시선으로 획일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재일조선인문학의 현재는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지점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소통되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앞으로 ‘재일’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일본에 산다’ 또는 ‘일본에 있다’와 같은 수동적 차원이 아닌 ‘재일을 살아간다’라는 능동적 차원에서 ‘재일’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전면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재일조선인이 살아온 지난 역사에 대한 증언과 기록의 차원을 넘어서 재일조선인 사회를 주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도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즉 남과 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과감하게 허물어뜨린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재일조선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재일조선인문학의 방향성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지점으로부터 모두 일정하게 거리를 둔 작가와 작품을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재일조선인 시문학에 한정할 때 이러한 문학적 지향성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낸 시인이 바로 김시종이다.
김시종은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고 광주에서 학생 시절을 거친 후 다시 제주로 돌아왔지만 제주 4·3 항쟁에 가담했다가 수배를 당하여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에 정착했다. 식민과 해방의 역사적 소용돌이를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했던 우리 민족 구성원들 대다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김시종의 삶 역시 조국과 고향을 등진 채 유민(流民)으로서의 디아스포라적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김시종은 “나를 묶고 있는 운명의 끈은 당연히 내가 자라난 고유의 문화권인 조선으로부터 늘어져 있”지만, “내게 묶인 일본이라는 나라 역시 또 하나의 기점이 되어 나의 사념 안으로 운명의 끈을 늘어뜨리고 있”다고 했다. 또한 “나는 양쪽 끈에 얽혀, 자신의 존재 공간을 포개고 있는 자”1)였다는 고백은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김시종이 직면했던 혼란과 모순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김시종의 시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그 중심에서 읽어내도록 하는 중요한 텍스트로, 재일조선인의 역사적 현실과 실존적 상황에 맞선 ‘부정’과 ‘저항’의 정신은 ‘재일’의 근거이면서 시학의 근본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뒤틀린 계절 의식과 제주 4·3의 기억
김시종은 “‘4월’은 4·3의 잔혹한 달이며, ‘8월’은 찬란한 해방(종전)의 백일몽의 달이다.”2)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잃어버린 두 계절의 역사적 의미를 증언하기 위해 지금까지 ‘재일’의 근거를 찾으며 시를 써 왔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계절은 단순히 자연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역사의 슬픔과 고통이 오롯이 새겨진 뼈아픈 순간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을 찬미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의 생활과 실존이 투영된 대상으로 인식함으로써, ‘계절어에 대한 저항’을 통해 “죽음마저도 미화되며, 그것에 의해 현실 인식이 뒤틀려버려 전해져야 할 역사적 기억의 계승이 불가능해지”3)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고자 했다. 그의 시가 봄에서 겨울에 이르는 일반적인 계절의 순서가 아닌 여름에서 봄까지의 계절을 따라가며 그 시간에 투영된 역사를 증언하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대로 다시 여름이 오고/ 여름은 다시 마른 기억으로 하얗게 빛나고/ 터져 나온 거리를 곶[岬]의 끄트머리로 빠져나갈 것인가./ 염천에 쉬어 버린 목소리의 소재 따위/ 거기서는 그저 찌는 광장의 이명(耳鳴)이며/ (중략)/ 허공에 아우성 끊어지고/ 북적거리던 열기도/ 아지랑이에 불과한 여름/ 벙어리매미가 있고,/ 개미가 꼬여드는/ 벙어리매미가 있고,/ 되쏘는 햇살의 아픔 속에서/ 한 줄기 선향(線香)이/ 가늘게 타는/ 소망일 뿐인/ 여름이 온다./ 여름과 함께/ 지나간 해의/ 끝내 보지 못한 맞꿈이여.
- 「여름이 온다」 중에서4)
김시종의 시에는 ‘벙어리매미’의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나는 겨우 스물여섯 해를 살았을 뿐이다./ 그런 내가 벙어리매미의 분노를 알게 되기까지/ 100년은 더 걸린 듯한 기분이 든다.”(「먼 날」)5)에서처럼 그의 시에서 “벙어리매미”의 형상은 자신을 표상하는 상징적 등가물이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여름이 올 때마다 매미 울음소리에 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는데, “염천에 쉬어 버린 목소리”를 발산하고 죽어버리는 매미를 보면서 재일의 현실 속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이러한 계절의 의미는 8월의 해방이 4·3의 봄을 초래한 원죄가 되어 부모와 고향을 등지고 일본으로 도망쳐 자신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야 했던 ‘재일’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된다. 김시종에게 여름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황국 소년으로 일본의 ‘패전’을 맞이하고 동포에게 뒤처졌다가 겨우 조선인이라는 자각을 되찾은 그 ‘여름’”이고, 봄은 “초목이 싹트는 일반적인 ‘봄’이 아니라 저 4·3 사건의 검은 기억과 하나가 된 ‘봄’”6)을 의미한다. 이처럼 여름에서 시작하여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다시 여름에 이르는, 4·3에 뿌리 내린 뒤틀린 계절의 기억 속을 살아가는 것이 ‘재일’이 마주하고 견뎌야 할 참혹한 현실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장례의 계절입니다./ 소생하는 꽃은 분명히/ 야산에 검게 피어 있겠죠.// 해빙되는 골짜기는 어둡고/ 밑창의 시체도 까맣게 변해 있을 겁니다.// 나는 한 송이 진달래를/ 가슴에 장식할 생각입니다./ 포탄으로 움푹 팬 곳에서 핀 검은 꽃입니다.// 더군다나, 태양 빛마저/ 검으면 좋겠으나,// 보랏빛 상처가/ 나을 것 같아서/ 가슴에 단 꽃마저 변색될 듯합니다.// 장례식의 꽃이 붉으면/ 슬픔은 분노로 불타겠지요./ 나는 기원의 화환을 짤 생각입니다만……// 무심히 춤추듯 나는 나비도/ 상처로부터 피의 분말을 날라/ 암꽃술에 분노의 꿀을 모읍니다.// 한없는 맥박의 행방을/ 더듬거려 찾을 때,/ 움트는 꽃은 하얗습니까?// 조국의 대지는/ 끝없는 동포의 피를 두르고/ 지금, 동면 속에 있습니다.// 이 땅에 붉은색 이외의 꽃은 바랄 수 없고/ 이 땅에 기원의 계절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봄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진달래가 숨 쉬고 있습니다.
- 「봄」 전문7)
“봄”은 분명 제주 4·3의 봄이다. 봄을 일컬어 “기원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시인에게는 “장례의 계절”일 따름이다. 봄은 “검게 피어” 있고, “해빙되는 골짜기는 어둡고/ 밑창의 시체도 까맣게 변해 있”으며, “포탄으로 움푹 팬 곳에서 핀 검은 꽃”으로 뒤덮여 있다. “태양 빛마저/ 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 지독한 어둠을 지나가기 위해서 화자는 봄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장례식의 꽃이 붉으면/ 슬픔은 분노로 불타겠지요”라고 하면서, “동포의 피를 두”른 듯한 “진달래”의 형상에 자신의 심리를 투영한다. “무심히 춤추듯 나는 나비도/ 상처로부터 피의 분말을 날라/ 암꽃술에 분노의 꿀을 모”으듯, 제주 4·3의 기억을 세상에 증언하는 시적 방향을 자신이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성조기를/ 갖지 않은/ 임시방편의/ 해구(海丘)에서/ 중기관총이/ 겨누어진 채/ 건너편 강가에는/ 넋을 잃고/ 호령그대로/ 납죽 엎드려/ 웅크린/ 아버지 집단이/ 난바다로/ 옮겨진다./ 날이 저물고/ 날이/ 가고/ 추(錘)가 끊어진/ 익사자가/ 몸뚱이를/ 묶인 채로/ 무리를 이루고/ 모래사장에/ 밀어 올려진다./ 남단(南端)의/ 들여다보일 듯한/ 햇살/ 속에서/ 여름은/ 분별할 수 없는/ 죽은 자의/ 얼굴을/ 비지처럼/ 빚어댄다./ 삼삼오오/ 유족이/ 모여/ 흘러 떨어져가는/ 육체를/ 무언(無言) 속에서/ 확인한다./ 조수는/ 차고/ 물러나/ 모래가 아닌/ 바다/ 자갈이/ 밤을 가로질러/ 꽈르릉/ 울린다./ 밤의/ 장막에 에워싸여/ 세상은/ 이미/ 하나의/ 바다다./ 잠을 자지 않는/ 소년의/ 눈에/ 새까만/ 셔먼호가/ 무수히/ 죽은 자를/ 질질 끌며/ 덮쳐누른다./ 망령의/ 웅성거림에도/ 불어터진/ 아버지를/ 소년은/ 믿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질질 끌 수 없는/ 아버지의/ 소재로/ 소년은/ 조용히/ 밤의 계단을/ 바다로/ 내린다.
- 『니이가타』 제2부 「해명(海鳴) 속을」 중에서8)
김시종은 제주 4·3에 대한 침묵의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에 4·3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한 시는 거의 쓴 적이 없음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니이가타』라는 시집 안에서 한 장 정도 제주도의 해변은 모래사장이 아니라 자갈 해변인데 거기에 철사로 손목이 묶여 바다에 던져진 희생자의 사체가 밀려온 상태를 쓴 것과, 그것과 관련해 바다에 가라앉은 아버지를 아이가 찾아다닌다고 하는 것을 쓴 정도지요”9)라고 고백했을 따름이다. 인용시는 바로 그 고백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4·3의 희생자였던 제주의 수많은 아버지의 죽음과 가족들의 상처와 고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제주 4·3의 기억과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겹쳐 바라봄으로써, 해방 이후 일본에서 미국으로 식민의 주체만 바뀐 한반도의 현실이 결국 제주 4·3의 비극을 가져온 결정적 원인이 되었음을 암묵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상처와 질곡이 한국전쟁과 분단을 초래하여 재일조선인의 이데올로기 강요로 굳어졌으며, 그 결과 ‘니이가타’ 항구에서의 북송 사업으로 이어졌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시집이 바로 『니이가타』이다. 이처럼 김시종에게 제주 4·3은 해방 이후 제주의 현실에 국한되는 역사의 한 부분이 아니라 지금도 ‘재일의 현실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고 있고, 제주 4·3의 기억을 증언하고 위무하는 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으로서 삶과 시가 지향해야 할 근원적이면서 궁극적인 가치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재일’의 틈새와 통일의 지평
김시종은 “조선에는/ 나라가/ 두 개나 있어서/ 오늘 나온 것은/ 그중 하나라네./ 이른바/ 한쪽 발로/ 공을 찬 셈이지.”(「내가 나일 때」)10)라고 재일조선인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제시했다. “두 개”의 “나라”와 “한쪽 발”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재일조선인의 삶은 언제나 남과 북 두 나라 사이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그래서 결국 어느 한쪽만을 선택해야 하는 “한쪽 발”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완고한 대립과 갈등의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남도 북도 아닌 ‘재일’ 그 자체를 주목하는 ‘틈새’11)의 전략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재일’의 주체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으로, “본국을 흉내 내서 ‘조선’에 이르는 게 아니라 이를 수 없는 조선을 살아 ‘조선’이어야 할 자기를 형성”12)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당신 속의/분리된 두 사람./나눌 수 없는 간격을/서로 나누고 있어/이렇게 금을 그어놓고/만날 수 없는 만남에/울타리를 친다./나에게는 그것이 사상이지/만/당신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지조일 뿐이다./지조와/사상./어느 것도 하나를/가리키고 있고/따로 따로/완전히 같은 것을 서로 주장하고 있다./아무튼 우리에게/대극(對極)은 없다./재일 세대인/너와 내가/끝없이 증거를 표명하기 위해/같은 심(芯)을 서로 깎고 있다./나는 조선이고/너는 한국./(중략)/재일을 살고/등을 맞대고/한국이 아니지만/조선도 아닌/알다시피/서로 모르는 사이야.
- 「재일의 끝에서 1」 중에서13)
‘재일’은 “나”와 “너”라는 “분리된 두 사람”으로 표상되지만 “나는 당신”이고 더군다나 “당신 속의 분리된 사람”이 “나”라는 점에서 “나”와 “너”의 관계는 처음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다. “금을 그어놓”기도 하고 “울타리를 친다” 해도 그것은 각자의 “사상”이고 “지조”일 뿐 근본적으로는 서로를 구분하고 경계 짓는 대립과 갈등의 논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시종은 “재일 세대”로서 민족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끝없이 증거를 표명하기 위해/ 같은 심을 서로 깎”아야 한다면서, “나는 조선이고/ 너는 한국”이지만 “재일을 살”아간다는 것은 “등을 맞대고/ 한국이 아닌/ 조선도 아닌” ‘재일’의 근거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틀림없는 지평이다.”14)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재일’의 실존적 근거는 남과 북의 대립과 경계를 넘어선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봄이 늦는/ 이 땅에/배는 비에/도연히 흐린 편이 좋다./크게 휘어진/북위 38도의/능선(稜線)을 따라/뱀밥과 같은/동포 일단이/흥건히/바다를 향해 눈뜬/니이가타 출입구에/싹트고 있다./배와 만나기 위해/산을 넘어서까지 온/사랑이다./희끗해진 연세에/말씀까지도/얼어붙은/어머니다./남편이다./현해탄의 좌우 흔들림에/쉬어 버린 것은/억지로 처넣은/콩나물 시루였다./노골적으로/서로 엉킨/이별이/잡아 떼버릴 정도의 뿌리 수염을 떨며/희미한 불빛 아래/무리지어 있다./이만 번의 밤과 날에 걸쳐/모든 것은 지금 이야기돼야 한다./하늘과 땅의/앙다문 입술에 뒤얽힌 바람이/이슥한 밤에 누설한/중얼댐을/어렴풋이/어둠을/밀어 올리고/솟아오르는 위도를/넘어오는 배가 있다.
- 『니이가타』 제3부 「위도(緯도)가 보인다」 중에서15)
분단의 상징인 38도선을 넘어가는 의지적 행위를 판문점이나 비무장지대와 같은 한반도 내의 대립과 경계의 장소가 아닌 “본국에서 넘을 수 없었던 38도선을 일본에서 넘는다”고 하는 발상16)으로 형상화한 『니이가타』는,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의 재일조선인 시문학의 방향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고향이/ 배겨 낼 수 없어/ 겨워낸/ 하나의 토사물로/ 일본 모래에/ 숨어들었”던 “지렁이”와 같은 존재로 살았던 재일조선인에게, “지렁이의 습성을/ 길들여준” 일본을 떠나 조국으로 가는, 그래서 “인간부활”을 반드시 이루어내는 일은 궁극적인 목적과 지향이 아닐 수 없었다. 재일의 근원인 제주 4·3의 봄이 여전히 잃어버린 계절이듯이 “봄이 늦는/ 이 땅”, 즉 일본에서 “뱀밥과 같은” ‘지렁이’의 형상으로 살아온 재일조선인들에게 “크게 휘어진/ 북위 38도의/ 능선(稜線)을 따라” 넘어간다는 것은, 짐승과도 같은 취급을 당하며 살아온 재일조선인들이 비로소 ‘인간’으로 부활하는 절실한 과제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김시종은 ‘조선’이라는 기호를 끝까지 지켜내는, 즉 남도 북도 아닌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으로서의 틈새에 생산적인 위치를 설정하여 분단 극복과 통일 지향이라는 역사적 장소성을 구체화하는 데 자신의 모든 시적 역량을 집중했다. 해방과 분단을 거친 재일조선인의 실존적 의미를 가장 잘 대변한 장소인 ‘이카이노’를 특별히 주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남과 북으로 이원화된 이데올로기의 추상성과 관념성을 뛰어넘어 민족이 하나 되는 ‘재일’의 실존을 가장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문제적 장소가 바로 ‘이카이노’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시종은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지점이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지평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카이노의 역사 안에 갇혀 있는 재일조선인의 상처와 고통을 의식적으로 밖으로 끄집어내고자 했다. 이카이노라는 ‘재일’의 장소성에 근본적 토대를 두면서도 이카이노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즉 이카이노에서부터 이카이노를 넘어서는 ‘재일’의 실존적 근거를 실천적으로 열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4. ‘단가(短歌)적 서정’의 부정과 ‘비평’으로서의 시학
‘재일의 시학’을 올바르게 정립하고 실천하려는 김시종의 시와 시론의 핵심은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재일’의 실존과 언어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김시종은 오노 도자부로의 『시론』에 기대어 서정시의 전통에 대한 보편적 인식과 미학적 규범에 대한 편견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는 새로운 시학의 방향을 열어나가고자 했다. 즉 동일성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일본 전통 서정시인 ‘단가’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오노 도자부로의 시론17)을 통해, ‘재일을 살아가는’ 시인으로서 일본어로 일본어에 보복하는 저항적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확실히 일본은 자연의 혜택을 받은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사계가 있고, 노래에나 나올 것처럼 산은 푸르고 물이 깨끗한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단가나 하이쿠는 국민적 시가의 지위를 전통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도시화 현상 속의 과소화(過疎化)라 함은 사람의 정감을 얽매는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야 할 자연이 흔한 곳일수록 사실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상태와 이어집니다. 그러니 그것은 그대로 소중한 자연을 소외시키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단시 형태의 문학 대부분은 그 자연에 마음을 가득 담아서 정감 넘치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정시라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근대풍의 서정시라 함은 자연의 아픔을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기에 ‘비평’을 안고 있는 창조 의식과는 동떨어진 미의 소산입니다. 요컨대 정감이 빚어낸 ‘자연’입니다. (중략)
자연을 사랑하여 금방이라도 감정이입이 가능한 그런 일본인의 정감이 과다한 감수성은 관련을 맺기보다는 바라보고, 깊이 비평하기보다는 감상하는 방관자적인 기풍을 뿌리내리는 데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 기풍을 밑바탕으로 해서 일본의 시적 서정성은 이어져 왔으니 사회의 동향이라든가 자기 응시라고 하는 활동적인 문제의식은 시라는 형태로는 좀처럼 익숙하지 않아 이상합니다.18)
단가적 서정의 부정은 일본어의 세계에 깊숙이 침윤된 김시종 자신과 같은 재일조선인의 경험적 현실을 의식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나에게 닥쳐온 식민지라는 것은, 아주 정다운 일본의 동요였고, 창가(唱歌)였고, 다키 렌타로[瀧廉太郞]의 ‘꽃’과 ‘황성(荒城)의 달’이었으므로”, “정감이 풍부한 일본의 노래는 내 몸을 완전히 감싸 안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나를 신생 일본인으로 만들어 주었”19)다는 엄연한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운율을 맞춘 음수율 없이는 시가 아니”라는 보편적 서정시의 미학을 그대로 따르려고 했고, “그 때문에 일본어는 아름다운 언어라고 진심으로 생각”20)하기도 했다. 그만큼 단가의 정형시적 율격은 재일조선인들이 일본 전통 서정의 미학에 무의식적으로 침윤되게 하는 아름다운 형식 미학이 아닐 수 없었다.
나무 이름도
풀 이름도
그다지 모른다.
새 이름도 곤충 이름도 모른다.
모두 잊었다.
지독히 부정확한 지식과 기억을 더듬어
野外의 초목을 본다. 농작물을 가리킨다.
작은 새들의 이름을 부른다.
자연은 대꾸하지 않는다.
나는 벌써 오랫동안 그것 없이 지내왔다.
오늘 아침 나는 저 埋立地에서
불쑥 종달새 같은 것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것은 종달새겠지)
세상에는 나무도 풀도 새도 곤충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기억 상실 속에서
모리[森]라든가 노구치[野口]라든가
아유카와(鮎川)라든가
그런 이름을 많이 외웠다.
- 오노 도자부로, 「자연혐오」21)
‘자연 혐오’라는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이 오노 도자부로의 시는 인간과 전혀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망각과 부재의 대상으로서 자연에 대한 부정과 혐오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화자가 “나무”, “풀”, “새”, “곤충”과 같은 자연의 세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오래전부터 그것들을 부재의 대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실제로 자연이 현실 속에서 부재했거나 인간과 함께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리[森]라든가 노구치[野口]라든가 아유카와(鮎川)라든가 그런 이름”이 더욱 중요한 기억의 대상으로 자신들의 내면을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즉 화자의 자연 혐오는 자연 그 자체에 대한 혐오라기보다는 자연을 혐오하게 만든, 그래서 “완전한 기억 상실 속에서” “세상에는 나무도 풀도 새도 곤충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극단적으로 인식하게 만든 거짓된 현실에 가장 큰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화자는 자본에 의해 축적된 근대의 이면에 인간과 자연의 순수한 교감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권력적 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레고리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중심 권력에 의해 소외받고 차별받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을 현대시의 방향으로 삼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현대시의 모든 문제를 시인의 사상을 담은 비평적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비평’으로서의 서정이다.
시를 그저 막연한 ‘음악’의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으로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문제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대시란 서정의 내부에 있는 이 비평의 요소를 자각하는 데서 출발하는 시라고 보아도 좋다. (중략) 지금까지의 시적 개념에서 말하면 감정에 호소하는 것, 즉 서정의 작용은 사물을 생각하는 것이고, 비판하는 작용이란 다른 마음의 질서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거기에서 이자택일 식으로 시의 본질은 서정이라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었지만, 오늘날에는 생각하는 일, 비판하는 일은 서정의 작용 그 자체와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 서정의 성질을 좌우하고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라는 견해가 점차 유력해지고 있다. 그리고 비평이라는 것은 사상이 암묵 속에 활동하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시와 사상의 관계 문제로 귀착한다고 해야 한다.22)
“오늘날에는 생각하는 일, 비판하는 일은 서정의 작용 그 자체와 무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실로 그 서정의 성질을 좌우하고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라는 것이 오노 도자부로의 시론적 입장이다. 김시종은 이러한 견해에 기대어 ‘재일’의 시학이 역사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의 성격을 표방해야 한다고 보았다. “서정의 내부에 있는 이 비평의 요소를 자각하는 데서” 재일의 시학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한다고 보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유리된 허위적 자연의 세계에 포섭된 서정적 자아의 내면세계를 외부세계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 정신과 비평 정신이 만나는 지점에서 ‘재일’의 역사적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시와 사상의 관계 문제”가 ‘재일’의 시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때 ‘사상’은 정치사회적 측면의 외적 문제에만 초점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와 현실 앞에 서 있는 서정적 주체의 내면세계를 더욱 집중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서정=비평’이라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내적 세계의 형상화가 보여주는 시와 사상의 관계에서 비롯된 실천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5. 김시종과 ‘재일’의 시학
김시종의 ‘재일’의 시학은 일본어가 아닌 일본어, 즉 ‘재일조선인어’라는 독특한 언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도 상당히 문제적이다. 만일 그의 시가 여느 일본어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일본어로 재일조선인의 삶을 형상화했다면, 굳이 그의 시를 두고 ‘재일’의 시학이라고 명명할 이유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일본어로 일본어를 파괴한다는 역설적 논리 그 자체가 김시종의 시를 구조화하는 시적 방법론이므로, 그의 시에서 ‘재일조선인어’로서의 일본어는 권력화된 식민의 언어인 일본어가 강요한 일차적 기호 체계를 넘어서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언어로 재구조화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즉 ‘재일조선인어’로서의 김시종의 시적 언어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비판하는 아주 유효한 시적 장치가 됨으로써, 재일조선인 사회 깊숙이 억압되고 은폐되어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에 균열을 내는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으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의식의 정형화’라는 이데올로기적 구속 역시 재일의 독자적인 의식과 실존적 경험을 담아내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점도 김시종의 ‘재일’의 시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1955년 총련 결성 이후 자신이 만든 『진달래』 잡지의 시 창작 방향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재일’의 시학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데 있어서 조직의 강령에 구속된 의식화된 정형의 탈피는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재일’의 시학을 이데올로기의 차원이 아닌 재일조선인의 실존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하는 근본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김시종은 ‘재일을 살아간다’라는 명제를 통해 언어, 민족, 국가라는 ‘재일’의 ‘틈새’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사유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자기정체성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근본적 토대 위에서 오노 도자부로의 ‘단가적 서정’의 부정과 ‘비평’으로서의 서정을 시적 전략으로 삼아 ‘재일’의 시학을 독자적으로 열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한 일본 연구자는 “김시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고 있는 ‘나’의 서정과 대면하고 그것을 건드리는 일과 연결된다.”23)라고 말했다. 이는 김시종의 시가 일본인인 자신에게 ‘일본’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일본을 말함으로써 일본을 비판해온 김시종의 시적 지향에 대한 내적 충격을 고백한 것이다. “대다수의 일본인들이 자명하게 생각하는 일본어로 된 시집이 아니라 일본어적 세계를 안으로부터 파괴해서 바깥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24)는 것이 바로 김시종의 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김시종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집요하게 탐색해 왔고, 역사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재일’의 현실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심에 두고 실천했다. 제주 4·3의 기억과 ‘재일’의 틈새를 통해 본 시적 사유와 실천 그리고 ‘비평’으로서의 서정은, 그가 궁극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재일’의 시학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와 방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 1) 김시종, 윤여일 옮김, 『조선과 일본에 살다』, 돌베개, 2016, 234쪽.
- 2) 윤여일, 「부재의 재」, 『조선과 일본에 살다』, 위의 책, 278쪽.
- 3) 오세종, 「위기와 지평-『지평선』의 배경과 특징」, 김시종, 곽형덕 옮김, 『지평선』, 소명출판, 2018, 222쪽.
- 4) 김시종, 이진경 외 옮김, 『이카이노시집 계기음상, 화석의 여름』, 도서출판 b, 2019, 124~125쪽.
- 5) 김시종, 곽형덕 옮김, 『지평선』, 위의 책, 47쪽.
- 6) 호소미 가즈유키, 동선희 옮김, 『디아스포라를 사는 시인 김시종』, 어문학사, 2013, 241쪽.
- 7) 김시종, 곽형덕 옮김, 『지평선』, 앞의 책, 106~108쪽.
- 8) 김시종, 곽형덕 옮김, 『니이가타』, 글누림, 2014, 98~102쪽.
- 9) 김석범․ 김시종․ 문경수 편, 『왜 계속 써왔는가 왜 침묵해 왔는가』, 제주대학교출판부, 2007, 156쪽.
- 10) 김시종, 곽형덕 옮김, 『일본풍토기』, 소명출판, 2022, 73~74쪽.
- 11) 김시종에게 ‘틈새’는 “여러 분단선이 겹쳐 파이는 곳이다. 거기서 여러 힘이 가해진다. 따라서 틈새는 불확정적이고 유동적이다. 거기서 세계는 뒤틀린다. 김시종은 그 틈새에 몸을 두고 ‘틈새에 있음’을 내적 성찰에 나서야 할 상황으로 전유하고자 했다.” 윤여일, 「틈새와 지평」, 『재일의 틈새에서』, 돌베개, 2017, 370~371쪽.
- 12) 김시종, 윤여일 옮김, 「전망하는 재일조선인상」, 『재일의 틈새에서』, 339쪽.
- 13) 김시종, 이진경 외 옮김, 『이카이노시집 계기음상, 화석의 여름』, 앞의 책, 91~99쪽.
- 14) 김시종, 곽형덕 옮김, 「자서」, 『지평선』, 앞의 책, 11쪽.
- 15) 김시종, 곽형덕 옮김, 『니이가타』, 앞의 책, 130~132쪽.
- 16) 김시종, 곽형덕 옮김, 「시인의 말 : 장편시집 니이가타 한국어판 간행에 부치는 글」, 『니이가타』, 앞의 책, 7쪽.
- 17) 오노 도자부로는 “단가의 정형화된 31자의 음수율 속에 거대한 공룡 같은 것이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그 어떤 혁명적인 것도 그 의미를 소멸시켜 버리고 종래의 세계관과 사회관에 용해되어 버리는 강력함이 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시는 단가적 서정에서 벗어난 새로운 서정, 즉 ‘현실로 하여금 부르짖게 한다’는 방법의 새로운 리얼리즘이어야 한다”라고 보았다. 심수경, 「재일조선인 문예지 『진달래』의 오노 도자부로 수용 양상」, 『일본문화연구』 제64집, 동아시아일본학회, 2017, 186쪽.
- 18) 김시종, 곽형덕 옮김, 「시는 현실 인식의 혁명」, 『지평선』, 앞의 책, 204~205쪽.
- 19) 김시종, 「지금 있는 장소」, 『김시종의 시 - 또 하나의 일본어』, 우카이 사토시, 「김시종의 시와 일본어의 미래」, 미우라 노부타카·가스야 게이스케 엮음, 이연숙 외 옮김,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 돌베개, 2005, 516~517쪽에서 재인용.
- 20) 김시종, 유숙자 옮김, 『경계의 시』, 소화, 2008, 9쪽.
- 21) 김광림, 「小野十三郞(오노 도자브로)의 편향성 - 정신주의 배격한 비평의식」, 『일본현대시인론』, 국학자료원, 2001, 177쪽에서 재인용.
- 22) 오노 도자부로, 「시의 본질」, 『현대시수첩』, 3~4쪽. 심수경, 앞의 논문, 185쪽에서 재인용.
- 23) 가게모토 츠요시, 「서정 - 생활의 깊이에서 연대로 - 김시종 시를 2018년 한국에서 읽는다는 것」, 『작가들』 2018년 여름호, 166쪽.
- 24) 곽형덕, 「분단과 냉전의 지평 너머를 꿈꾸다」, 『지평선』, 앞의 책,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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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흰색의 엑스터시 색채의 물질성은 다양한 감각적 요소와 함께 체험된다. 한강의 소설 『흰』(문학동네, 2016)에서 '안개', '진눈깨비', '서리', '눈송이', '눈보라', '만년설'은 물이라는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각기 다른 감각적 실재로 다가온다. 위태롭게 부서지는 첫서리의 유약함, 육신을 압도하는 눈보라의 적대감, 원경의 만년설이 환기하는 신비로움은 눈(雪)이라는 추상적인 범주로 동일화할 수 없는 백색의 스펙트럼을 이룬다. 천천히 유동하며 새벽을 불투명하게 감싸는 안개의 움직임은 맹렬히 질주하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혹은 부유하듯이 낙하하는 눈송이의 속도와 선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금, 설탕, 모래, 쌀알, 흰 조약돌은 선연히 다른 맛과 감촉으로 피부에 닿아온다. 사물의 윤곽선을 빠져나온 흰색은 질감, 부피, 무게, 온도, 속도, 냄새, 소리와 같은 무수한 감각성질들과 결합한다. 감각의 총체로서 흰색은 '나'의 지각을 거치며 쉽게 언어화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atmosphere)'를 주조한다. 사물의 성질이 내재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현존을 만들어나가는 일, 독일의 미학자 게르노트 뵈메(Gernot Böhme)는 이를 '사물의 엑스터시(ecstasy)'라고 명명한 바 있다. 황홀경을 뜻하는 영단어 'ecstasy'는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향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έκστασις'를 어원으로 갖는다. 한강의 작품에서 흰색은 사물을 구성하는 일부를 넘어 '나'의 지각과 기억을 일깨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어둠 속 고요히 점멸하는 흰 불빛은 '나'로 하여금 유년의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어린 '나'는 작은 배에 올라 수천 마리의 은빛 멸치 떼가 튀어 오르는 장관을 목격한다. 이 눈부신 놀라움은 곧 "이태 뒤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1) 작은아버지의 웃음과 연결되며 서글픈 연민으로 전환된다. 그런데 한강에게서 흰색이 죽음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날숨이 겨울 공기와 만나 하얀 입김으로 변할 때, 그것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71)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외부의 찬 공기가 몸 안에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데워지고, '나'는 따뜻해진 공기를 대기에 불어넣는다. 하얗게 퍼져나가는 입김은 '살아있음'이라는 상태가 단독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몸의 내부와 외부가 부단히 뒤섞이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흰색의 물질성을 집요히 탐구하고 기록하는 작업은 '언니'에 대한 기억과 연관된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은 '나'의 언니. 사진 한 장, 울음 한 점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한 그녀는 오직 어머니의 이야기 안에서만 존재한다. 얇게 얼어붙은 초겨울의 서리, 하얀 달떡을 닮은 얼굴, 흰 배내옷과 강보는 언니의 기억을 구성하는 사물들이다. 다시 말해 흰색은 '나'가 죽은 언니를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적 실체인 것이다. 이 흰색은 그녀의 현존을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각인시킨다. 일곱 살의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 속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20)의 얼굴을 아직 찌지 않은 쌀 반죽의 형상으로 상상해본다. 희고 고운 가루가 묻어나는, 찰기 없이 보드라운 반죽의 표면, 손가락을 대면 지문이 고스란히 남을 것만 같은 섬세하고 연약한 피부, 달떡의 흰 빛깔이 덩어리진 감각의 생생함으로 몸에 육박해올수록 '나'는 "쇠에 눌린 것같이 명치가 답답해"(21)지는 고통을 겪는다. 흰색의 엑스터시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텅 빈 공간에 선명한 무늬를 남기며 부재하는 언니와 현실의 '나'를 연결한다. 2. 폐허를 증언하는 흰 무늬 작품의 제1장에서 '이 도시'로의 이동은 '나'가 언니를 회상하는 계기로 언급된다. 물론 소설에 도시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치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던 곳", 그 처절한 투쟁의 대가로 "1944년 10월부터 육 개월여 동안"(27) 나치의 무자비한 보복 공습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이 도시'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임을 유추하기란 어렵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폐허화된 바르샤바는 현재 말끔히 복구되었으나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29)된 잔적(殘跡)은 과거의 참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 폐허의 지층을 거니는 동안 '나'는 자신이 죽은 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중세에 지어진 성은 근대에 이르러 병원으로 바뀌었고, 전쟁으로 인해 붕괴된 병원은 미술관이 되었다. 파괴와 재건, 폭력과 저항의 역사가 누적된 '이 도시'처럼 '나'는 누군가의 죽음 위에 올린 작은 벽돌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언니는 '나'와 단절된 존재가 아닌,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29)일지도 모른다. 한강은 『흰』을 통해 "생명을 가지고 나아간다는 게 뭔지, 내가 누구 대신으로 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질문도 더듬어보고 싶었"2)다고 밝힌 적이 있다. '나'가 언니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으며, 그녀의 삶을 대신 이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그녀가 시간을 거슬러 '나'의 삶에 틈입하는 이유가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기 전 두 번의 조산을 겪었다. 만약 "그 생명들이 무사히 고비를 넘어 삶 속으로 들어왔다면, 그후 삼 년이 흘러 내가, 다시 사 년이 흘러 남동생이 태어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117)이라는 사실은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37)인 '지금 여기'에 그녀를 불러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제1장은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39)라는 '나'의 전언으로 끝을 맺는다. 이때 '나'가 언니에게 건네려는 '흰 것'은 나치에게 희생된 바르샤바 시민들을 애도하는 양초의 흰색과 중첩된다. 시민들을 총살했던 붉은 벽의 잔해, 그 잔혹한 학살의 현장 앞에서 고요히 타오르는 흰 심지와 뜨겁게 녹아내리는 촛농은 점차 소멸의 이미지로 번져나가면서 애도의 의미를 가시화한다. 불꽃 속에서 서서히 몸을 낮추고, 마침내 사라지는 흰 양초와 같이, 진정한 애도란 '나'의 소멸을 감내하며 타자에게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건네는 일일 것이다. 제2장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소설의 주어인 '나'와 언니의 자리를 맞바꾸며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는 일이 가능한가. 어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언니의 삶을 어떻게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로 이끌어올 수 있을 것인가. 「빛이 있는 쪽」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에서 친형을 잃은 한 남성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여섯 살 때 죽은 형의 목소리는 남성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에도 계속해서 찾아왔는데, 폴란드어를 배운 뒤에야 남성은 그것이 체포되기 직전에 형이 외쳤던 말임을 알게 되었다. 반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맞은 '나'의 언니는 인간의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말을 남길 수 없었다. 남성의 어린 형처럼 그녀도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 불확실성 속에서 '나'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32)을지도 모른다는 점뿐이다. 이렇듯 한강의 소설은 애도의 (불)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언니를 향한 (불)가능한 애도의 서사는 흰 사물들의 파편적 기록, 그리고 오래전 지구 반대편에서 폐허화되었던 '이 도시'의 슬픔을 헤아리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런데 살아낸 적 없는 과거를 애도하려는 노력은 '나'가 그녀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흰 것'을 오히려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118)라는 말로써 그러한 시도가 녹록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처음 '나'가 의도했던 '흰 것'은 무수한 사물들의 흰빛이 발현하는 엑스터시에 휘말리는 순간 순수와 애도라는 상징의 단일성에 자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안개」의 '나'는 도시를 하얗게 잠식한 안개를 보며 섬에 짙게 낀 안개를 보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안개는 '먼지 낀 마른 웅덩이'를 신비롭게 채색하고, 철조망 뒤에 도열한 소나무들을 "이승의 것 같지 않게 홀연"(24)한 형상으로 만든다. 왜곡과 망각을 함축한 흰빛은 「흰 도시」에 보다 심화되어 나타난다. "1945년 봄 미군의 항공기가 촬영한 이 도시의 영상"(27) 속 나치의 폭격이 휩쓴 바르샤바는 새하얀 눈이 덮은 풍경으로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근접할수록 도시는 흰색의 베일을 벗고 모든 것이 까맣게 전소된 폐허의 민낯을 소스라치게 드러낸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96)이라는 표현처럼, 언니의 흰 배내옷은 죽은 자를 염습할 때 입히는 수의로 변한다.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과 흰빛(blanc), 검음(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79)듯이, 생명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복합된 흰색은 (불)가능한 애도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한강이 축조하는 백색의 알레고리는 망각으로 과거를 깨끗하게 지워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암시한다. 『흰』의 초반부에서 '나'는 오래전 자신의 방을 흰 페인트로 덧칠했던 일을 꺼내놓는다. '나'가 새로 계약한 방의 철문에는 세입자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새겨놓은 '301'이라는 숫자가 지저분하게 남겨져 있다. '나'는 누군가가 '살아있음'을 비명처럼 새겨놓은 숫자, 그 악착 같은 표식을 페인트로 지워보지만 흐려진 칠은 이내 붓 자국을 드러내고 만다. 페인트를 덧칠할수록 뚜렷하게 돌출되는 자국은 “모든 기호는 심지어 부재를 지시할 때조차 존재를 드러낸다”3)는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의 언술과 조응한다. 파괴된 흔적을 걷어낸 도시에 폐허를 증언하는 무늬가 남아 있는 것처럼, 붓이 남긴 하얀 흔적은 이 밑에 무언가가 잔존해 있음을,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덮으려 했음을 은밀하게 알려주는 기호로 작용한다. 은폐와 흔적의 아이러니한 공존을 조우하는 동안 '나'는 "수백 개의 깃털을 펼친 것처럼 천천히 낙하하는 눈송이"(15)를 멍하니 응시한다. 해설(解雪)이 예정되어 있는 백색 허공을 바라본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 깨닫는다. 흰색의 알레고리가 환기하는 애도의 (불)가능성은 무의미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과거의 유실은 아무도 그것을 찾거나 기억하지 않을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총살된 자들을 애도하는 바르샤바의 붉은 벽 앞에서 '나'는 불현듯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렸음을 자각한다. 이곳의 시민들은 새하얀 외벽을 두른 기념관에 과거를 유폐시키는 대신, 거리 한복판에 흰 양초를 밝혀 죽은 이의 넋을 기꺼이 자신들의 삶 옆에 둔다. "그녀는 자신이 두고 온 고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생각했고, 죽은 자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그 넋들이 이곳에서처럼 거리 한복판에서 기려질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고, 자신의 고국이 단 한 번도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108~109)라는 대목에 언급되듯이, 우리의 '고국'이 (불)가능한 애도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제주 4·3, 광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애도에 깊이 천착해왔던 작가의 문제의식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너무나 참혹하기에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치스럽고 나약한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침묵해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한강에게 애도란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108) 강인한 의지로부터 온다. 애도는 어두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삶 밑에 파묻힌 폐허를 발굴하여 그들이 겨누었던 칼끝과 총구를 부끄러움으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3. 흰빛의 아카이브 『흰』이 출간된 직후인 2016년 6월, 한강은 차미혜 영상작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스페이스오뉴월에서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열었다. "의식하지는 않아도 우리 안에 있는 것, 이름 지어 부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4)라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의 준비는 한강이 『흰』을 집필하던 시기에 진행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최진혁 작가가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 , , 을 편집한 약 15분 남짓5)의 영상도 전시되었다. 『흰』 초판본에는 차미혜 작가의 사진이, 2018년 간행된 제2판에는 최진혁 작가의 영상에서 발췌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이 실려 있다.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가 번역한 영문판 『The White book』(GRANTA, 2024)에는 일곱 장의 흑백사진이 삽입되었는데, 한국판에 담긴 것보다 크게 작업된 사진들 역시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듯 작가의 글쓰기를 퍼포먼스로 옮기고 이를 영상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매체의 변화 과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점은 애도와 기억, 그리고 기록의 문제를 다시금 들여다보게 한다. 퍼포먼스 아트는 소도구와 무대, 수행자의 컨디션, 관객의 반응, 심지어는 장소의 냄새, 조명, 날씨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를 영상으로 기록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더욱이 책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은 퍼포먼스와 영상이 촉발하는 재현의 문제를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흰』의 제2판에 수록된 여섯 장의 흑백사진은 책의 매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를 재현한다. 이들은 텍스트보다는 분명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퍼포먼스를 영상보다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한 사유와 퇴고를 거친 텍스트에 비하면 퍼포먼스와 영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한 우연의 산물에 가깝다. 영상 속 무수한 이미지 중 단 하나만을 낚아챈 사진은 그러한 우연성이 극대화된 예술의 한 형식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일회성을 순간에 고정함으로써 더 오래, 더 널리 유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사진에 퍼포먼스와 관련된 어떠한 캡션이나 단서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모호하고 파편적인 이미지 속 배내옷, 깃털, 종이와 같은 흰 오브제를 통해 사진이 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따라서 작품 속 사진은 일시적인 것을 영원성 속에 붙들어 매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덧없음을 동시에 함축한 알레고리적 이미지다. 흥미로운 것은 영문판 『The White book』에 수록된 일곱 장의 사진이 한강의 퍼포먼스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시한다는 점이다. 한강의 검은 실루엣이나 손이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수행을 비교적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제2판의 사진들은 한층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호함 속에서 모종의 이야기를 건넨다. 제2판에 실린 첫 사진은 배경과 오브제가 모두 하얗게 인쇄된 탓에 무엇을 찍은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렵다. 독자는 이어지는 사진들에 제시된 손의 명암과 검은 옷을 입은 작가의 모습을 통해 오브제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된다. '흰 깃털과 종이 → 종이 위에 깃털을 수놓는 손 →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작가의 몸'으로 점차 확대되는 세 개의 장면은 시가 쓰인 종이 위에 흰 깃털을 덮는 퍼포먼스인 을 기록한 것이다.6) 지면 전체를 메운 네 번째 사진에는 활짝 펼친 배내옷이, 마지막 두 장의 사진에는 각각 흰 천을 꿰매는 손과 의자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는 죽은 언니의 배내옷을 짓는 퍼포먼스인 을 담고 있다. 부재한 언니의 삶을 상상하고 기록하는 일이 (불)가능한 애도임을 고려한다면, 텍스트를 깃털로 덮는 퍼포먼스는 기록의 불가능성에 대한 재현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배내옷은 결여와 불확실성으로 이뤄진 애도의 결과물이자, 그러한 공허함의 과정을 뚫고 탄생한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의 알레고리는 과거의 파편이면서 동시에 과거를 초과한다. 모호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말을 거는 이미지들의 절합(articulation)은 재현의 진실성에 대한 작가의 사유와 연동되어 있다. 피와 재로 가득 찬 끔찍한 이미지가 과연 실제에 더 가까운가? 이미지의 참혹성은 언제든 왜곡될 수 있고, 공포나 혐오를 유발해 접근을 막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부재하는 것'을 현시해야 한다면? 한강이 포착하는 재현의 (불)가능성은 진실과 망각, 아름다움과 처참함을 너무도 쉽게 오가는 이미지의 기만성에 기인한다. 1945년 미군 항공기가 바르샤바를 촬영한 영상에서 순백의 환영이 폐허로 전환되는 섬뜩한 순간은 그동안 '사실적 재현'을 담당해온 카메라와 눈(眼)의 역량을 의심하게 한다. 때때로 예술은 그 섬뜩함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소금」이라는 글에는 '나'가 다친 손가락으로 소금을 집었을 때의 고통과 전시실에서 바라본 소금 언덕의 정경이 병치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썩지 못하게 하는 힘, 소독하고 낫게 하는"(66) 소금의 치유력은 열린 살갗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따갑게 스며들 때 비로소 발현된다. 반면 전시실의 관람객들은 의자에 유유히 앉아 소금 언덕에 원하는 만큼 맨발을 올려놓는다. 어둠 속 눈부시게 빛나는 소금 언덕의 아름다움은 '곱게 아문' 두 발로만 누릴 수 있기에 기만적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감각할 수 있는 특권은 고통에서 비껴난 자에게만 주어진다. 『흰』의 파편적 이미지들은 사건의 '총체적 진실'을 구성하는 내러티브의 명징함에 저항한다. 소설을 여는 첫 장에서 문득 '나'를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와 "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11)에 비유된다. 백색 이미지들이 연대기적인 시간의 흐름을 베어내고 단숨에 과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에게서 시간은 부단히 갱신되고 돌출하며 융기하는 아나크로니즘적인 것이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표현을 빌리면 이 아나크로니즘은 불가지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을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그녀'의 기록, '이 도시'의 역사, '흰 것'의 엑스터시는 유년의 기억과 기억 이전의 과거를 거슬러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축한다. 그러므로 시간의 흐름은 과거의 망실을 변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흰』이 쓰인 것이라 여긴다. 한강은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81)라는 언술로써 이를 재확인시킨다. 4.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은 존재하는가 하얀 '배내옷'을 펼친 손과 검은 옷에 묻은 흰 실밥들. 한강의 퍼포먼스 아트 을 담은 세 장의 사진은 『흰』이 죽은 언니뿐만 아니라 아기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를 애도하는 작품임을 암시한다. 어머니의 입말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언니의 이야기에는 스물세 살의 어머니가 느꼈을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다. 아기가 죽어가는 동안 산후의 통증을 온몸으로 견디며 홀로 배내옷을 지었을 '나'의 어린 어머니, 그가 언니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그 어두운 기억의 하중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백지 위에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이라는 어머니의 절박한 속삭임을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133)라는 말로 바꾸어 적는다. 한강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텍스트로 옮길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아트를 통해 직접 몸으로 수행하며 죽은 언니와 어머니, '나'를 연결한다. 작가는 경험 이전의 과거를 체현함으로써 과거로부터 격리된 타자에서 그들의 고통 안에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이행한다. 마찬가지로 『흰』에 등장하는 '나'는 부재한 언니의 삶을 재현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어 그녀를 그 안에 직접 살아가게 한다. 텍스트는 허구와 부재를 의미하는 기호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을 뒤바꾸고 재구성하는 수행성을 갖는다. 언니의 조각이 '나'에게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물음처럼, 언뜻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들도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을까. 비연관적인 것들의 연관성,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작품에 기록된 '모든 흰' 것의 아카이브, 같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언니와 '나',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은 자를 향한 애도의 책임을 부여받게 된 지상의 모든 산 자들은 서로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의 단수성은 복수를 지시하는 모든 기표를 초과하는 동시에 존재의 밑바탕에 잠재한 연대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을, 한강은 "더럽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이 우리 안에 어른어른 너울거리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정갈한 사물을 대할 때마다 우리 마음은 움직이는 것일까?"(70)라는 문장으로 되묻는 것이 아닐까. '더럽혀지지 않는 흰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를 '우리'라는 말로 묶어내어 함께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믿음 속에서 흰색은 텅 빈 침묵과 공허의 색에서 벗어나 산 자들이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모든 과거를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흰색은 시간의 흐름이 결코 소멸시킬 수 없는 부재의 흔적으로 가득 찬, 그리하여 부재 속에서 존재를 지속시키는 색이 된다. 1) 한강, 『흰』, 문학동네, 2021, 85쪽. 이하 본문에서는 작품의 쪽수를 명기함. 2) 한강·강수미·신형철, 「[대담]한강 소설의 미학적 층위-채식주의자에서 『흰』까지」, 『문학동네』 제23권3호, 2016. 3) 유디트 샬란스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소멸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들』, 박경희 역, 뮤진트리, 2022, 17쪽. 4) 노형석 기자, 「한강의 혼이 어린 8년 전 배내옷 퍼포먼스를 보라」, 『한겨레』, 2024.11.21.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68572.html 5) 문소영 기자, 「글과 공명하는 한강 '퍼포먼스 아트'...그래서 더 큰 울림[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2024.10.26,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7205 6) Sophie Bowman, "Walking Towards the Vanishing Point Cradling a Love of Life," Korean Literature Now Vol. 32(2016): 9.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 독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규범적 양식 아래서 읽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다. 유기적인 서사와 플롯과 같은 사건의 인과론적 배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강의 작품은 소설어로서는 이례적으로 함축의 밀도가 높다. 자유연상과 직관에 가까운 느낌과 정동이 빈번하게 돌출되는 문장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고도로 응축적인 시어를 해독하는 일처럼 독자들은 어떤 모호한 감각적 혼란상황에 자주 직면하게 된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강의 작품에 대한 일관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2011)은 그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2007)와 『소년이 온다』(2014)의 발표 사이에 있는 작품으로, 이 두 작품에 대한 뜨거운 평가에 비하자면 상대적으로 집중적 관심으로부터는 일견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나는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의 외형적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이 두 소설을 비평적으로 연결하는 열쇠어는 연약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에 가까운 세계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채식주의자』가 사회적 동물성에 대한 은유로서의 가부장적 폭력을 조명하고 있다면,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국가폭력이라는 더 큰 구체적 범주로 확대한다. 한강의 작가적 사유구조 속에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선한 존재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의 구족 혹은 체제라고 인식되는 듯하다. 나는 『희랍어 시간』 역시 ‘폭력’에 대한 한강의 작가적 사유가 ‘언어’라는 소재를 매개로 전개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한강에게 세계의 폭력성은 반드시 어떤 구체적인 ‘사건성’을 계기로 이해되거나 설명된다기 보다는 인간 존재가 처해 있는 부조리한 ‘선험적’ 조건 그 자체로 제시된다. a)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43쪽). b) 아홉 살의 여름, 다섯 해 가까이 키운 백구를 앞세우고 집에서 가까운 그 도로를 건너던 휴일 오후가 보인다. 과속으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벼락같이 백구를 치고는 뺑소니쳐 달아났다. 며칠 전에 새로 깔린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개의 허리 아랫부분이 납작한 종잇장처럼 달라붙었다. 앞발과 가슴과 머리만 입체의 형상을 한 개가 거품을 물며 신음한다. 그녀는 무작정 다가가 개의 상체를 끌어안으려 한다. 개는 온 힘을 다해 그녀의 어깨를, 가슴을 물어뜯는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두 팔로 개의 입을 막으려 한다. 팔뚝을 한번 더 물어뜯기는 순간 그녀는 기절했고, 어른들이 달려왔을 때 백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했다(101쪽). 위의 인용문 a)의 경우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이 독일에 있는 헤어진 사랑의 대상에게 쓰고 있는 편지의 한 부분이고, b)의 경우는 실어증에 빠진 수강생인 여성이 과거에 있었던 부조리한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장면이다. a)의 남성은 조부 때로부터 비롯된 유전질환으로 마흔이 되기 전 시력을 완전히 상실할 운명에 처해 있다. 편지의 수신자는 그가 상실한 사랑의 대상인 독일인 여성인데, 그녀는 어린 시절의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여성은 남성에게 말한다. 천국과 지옥 같은 극단적인 장소들이 존재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니는 혼령들은 어쩐지 존재할 것 같다고. 그렇다면 신도 어디엔가 분명히 존재하지 않겠는가. 반면, 남성은 어디에선가 읽은 바가 있다는 신의 부재에 대한 논증이라며 위의 인용문을 거론한다. 이 세계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선하고 전능한 신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일 신이 무능한 존재라서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남성의 논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청력을 잃고 시력을 잃어가는 연인들이 처해 있는 삶의 부조리성에 대한 반발감이다. 그것은 어떤 개인적 의지나 선악과 같은 도덕률의 준수나 위반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화자인 남성에게 그것은 부조리한 세계의 선험적 폭력성으로 체감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소설 속의 남성에게 신이란 바로 그 가혹한 폭력과 악의 부조리한 실행 상황에서도 침묵을 본질로 하는 존재라는 식의 파스칼적 명상을 보충의견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와 같은 불가지론을 피력하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남성의 내적 절망감을 확인하는 일이다. 한편 b)에서 회고되는 상황의 폭력성은 두 겹의 부조리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조리는 전혀 예기치 않던 상황에서 백구가 승합차에 뺑소니 사고를 당했다는 ‘사건’이다. 이것은 백구나 그의 곁에 있던 어린 여자아이의 의지의 ‘저편’ 혹은 ‘바깥’에서 갑작스럽게 도래한 폭력이다. 그 끔찍한 폭력은 백구나 여자아이의 외부에서, 다시 말하면 의지의 저편에서 도래한 것이기 때문에 공황에 가까운 충격을 준다. 그러나 두 번째 부조리는 충격과 연민의 압도적인 감정 속에서 껴안았던 백구가 도리어 날카로운 이빨로 여자아이의 가슴과 어깨를 물어뜯는 경험에서 온다. 당시의 여자아이와 그것을 회고하고 있는 실어증에 빠져 있는 여성에게, 선의에 대항하는, 아니 선의와는 무관한 폭력적 체험이라는 상황은 이해 불가능한 부조리한 외상적 공포와 충격으로 남아 있다. 세계를 근원적인 부조리와 폭력으로 인식하거나 감각하고 있는 인물들이 한강의 소설 속에서는 주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과 문학적 성격을 밝히는 일은 별도의 작가론에서 수행해야 할 비평적 작업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한강이 『희랍어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소설적 질문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이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을 여러 번에 걸쳐 반복해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 이 소설의 의미가 충분히 해명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의 비평적·논리적 추론과정의 구조와는 달리, 이 소설은 쓰여짐의 당시에 어떤 완결된 플롯을 전제하거나 사건의 골격을 완성한 단계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써내려 갔던 작가는 아마도 소설 속의 여성 인물이 처해 있던 상황과 유사하게 혹은 남성 인물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력을 상상하면서 현실을 비원근법적으로, 그러니까 어떤 단일한 시점의 통일성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간다는 식으로, 서사의 불투명성을 의식하거나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장이 전개됨에 따라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의 잦은 교체를 보인다. 이에 따른 서술자 역시 남성과 여성으로 자주 교차된다. 편지의 형태가 등장할 때는 2인칭으로 전환되며, 3인칭의 경우에도 제한적 전지시점과 작가 전지적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명료한 사건의 서술이기 보다는 기억과 인상의 다층적 묘사로 느껴질 때가 많다. 소설 속의 두 인물 그러니까 서서히 시각을 읽어가는 남성 인물과 언어, 더 정확히는 한국어의 발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의 여성인물은 일단 그들을 주체화해 표상할 고유명이 없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고유명이 없이 ‘나’ ‘그’ ‘그녀’로 지칭되면서, 그들은 자신을 둘러싼 물리적·감각적 현실과 얼마간 유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나와 세계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과 빈틈이 많은데, 그 사이로 ‘유령적인 것’이 수시로 드나든다. 여기서 ‘유령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와 화해할 수 없는 또 다른 자기, 그러니까 이제는 타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상실된 자기가 현재의 자기와 공존하면서, 간섭하기 때문이다. 상실된 과거의 자기가 현재의 부유하는 듯한 일상 속의 자기를 찾아와 기억을 뒤섞는다. 남성에게 그것은 환(幻)으로 충만했던 지등의 선명한 불빛이고, 여성에게는 음소와 음운조차도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활력으로 충일하게 느꼈던 최초의 기억이다. a) 그때까지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시각적으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할 수 있을 광경을 그 하루의 낯과 밤에 모두 경험했다. 수십 장의 얇은 홍보랏빛 한지 조각들을 일일이 주름지게 말아 꽃잎을 만들어 붙인 연등들이 햇빛을 받으며 대웅전 앞마당에서 흔들이고 있었다. 그날만 특별히 절에서 준다는 심심한 국수를 공양간 앞의 느티나무 그늘에서 먹은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는데, 마침내 등들이 밝혀지자 나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따스한 촛불의 빛이 안쪽에서 고요히 새어나오는, 먹색 어둠 속에서 겹겹이 흔들리는 수백 송이의 붉고 흰 지등들.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어머니가 채근했지만 나는 걸음을 뗄 수 없었다(25쪽). b) 언어에 관한 한 그 말은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다. 아직 자모음에 대한 인식 없이 모든 글자들을 통문자로 외운 것이었다. 학교에 들어간 오빠가 담임선생을 흉내내어 한글의 구조를 설명해준 것은 그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설명을 들은 순간엔 그저 막연한 느낌뿐이었는데, 그 이른 봄의 오후 내내 그녀는 자음과 모음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마당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음할 때의 ㄴ과 ‘니’를 발음할 때의 ㄴ이 미묘하게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사’와 ‘시’의 ㅅ역시 서로 다른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합할 수 있는 모든 이중모음을 머릿 속에서 만들어 보다가, ‘ㅣ’와 ‘ㅡ’의 순으로 결합된 이중모음만은 모국어에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적을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소한 발견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생생한 흥분과 충격을 주었던지, 이십여 년 뒤 최초의 강렬한 기억을 묻는 심리치료사의 질문에 그녀가 떠올린 것은 바로 그 마당에 내리쬐던 햇빛이었다. 볕을 받아 따뜻해진 등과 목덜미, 작대기로 흙바닥에 적어간 문자들, 거기 아슬아슬하게 결합돼 있던 음운들의 경이로운 약속(13-14쪽). a)는 희랍어 강사인 남성의 회고이며, b)는 그 강의를 수강하고 있으며 실어증에 직면해 있는 여성의 기억이다. 각각 시각-풍경(a)과 청각-인식(b)에서 오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a)가 시각적 감각자극으로부터 오는 희열이라면, b)는 기호로서의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분절하면서, 그것을 발화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청각적 이미지로부터 오는 감각적 희열로 설명할 수 있다. a)에서는 그 시각적 희열의 경험을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서술하고, b)에서는 그 청각적 희열을 “생생한 흥분과 충격”으로 고백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각기 다른 화자의 시각적·청작적 희열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존재론적 관점에서의 현전성(現前性)에 대한 감각적 일체감에서 비롯되는 체험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남성의 충일한 ‘빛’에 대한 인식이나 여성의 마술적인 한국어 청각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전율 혹은 흥분과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일렁이는 지등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론적 자기확인과 한국어 음운을 발화/발음하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청각적 언어의 현전의 충격 때문이다. 대상과 나의 틈 혹은 간격이 일소되고, 거기에 지금-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나’의 확실성이 마술적으로 감각/지각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 충일감에서 비롯되는 희열의 경험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전개되어 가면서 남성에게는 빛이 희미해져 가면서 어둠이 짙어지고, 여성에게는 언어의 청각적 발화가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변전하는 사건이 거듭 벌어진다. 우선 남성의 경우. 10여 년을 살던 한국을 떠나 독일에 정착한 청년은 그곳에서 열병으로 청력을 상실한 인도계 독일 여성을 사랑하게 된다. 그 여성은 청력을 상실한 것과 동시에 말하는 법을 잊게 되고, 대신 소통을 위해 말하는 상대의 입을 또렷하게 바라보면서 해독하는 독순술(讀脣術)을 읽히게 된다. 언어를 매개로 한 말하기-듣기 기능의 장애를 ‘시각’을 통해서 보충하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은 자신이 영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함께 결혼하고 싶다라고 여성에게 말한다. 희랍 철학을 공부하는 남성이 빛을 상실한다는 것은 세계의 의미체계나 상징체계로부터의 추방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하니, 이제 당신은 말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인 셈인데, 이에 격분한 여성이 남성을 폭행하고 그들은 돌연한 결별을 맞게 된다. 시력=빛의 잠재적 상실이 부조리와 폭력의 경험으로 전환되는 존재상실의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철학적 논의의 파트너였던 요아힘 그룬델과의 추억 역시 남성에게 또다른 명백한 상처로 남게 된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운명에 처한 친구는 소설을 읽어보면 철학적 파트너였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적 파트너로서의 욕망도 품고 있던 인물로 제시된다. 그는 남성에게 너는 철학적이기보다는 문학적이라고 말하며, 특히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이라고 말하면서, 남성의 잠재적 미래의 불모성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날카롭게 충격한다. 동성과 이성을 막론하고, 그가 사랑한다고 느꼈던 두 대상으로부터의 추방과 이별은 이렇게 ‘빛의 상실’이라는 진행형의 감각적 쇠퇴와 함께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여성에게 ‘말’로 상징되는 언어의 청각적 이미지는 어떻게 존재를 위협하는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거기에는 두 개의 언어적 트라우마 체험이 개입된다. 최초의 계기는 자신이 태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여성을 임신한 직후 그녀의 어머니는 의사 장티프스에 결렸고, 그래서 낙태를 결심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출산했다. 이 체험을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이 반복적으로 여성에게 말한다. “하마터면 넌 못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이때 고모들, 외사촌들, 이웃집 여자들에 의해 반복되는 이 말들은 언어가 ‘세계’로 들어가는 친밀한 통로가 아니라, 일종의 죽음의 위협 혹은 상징적 거세의 위협으로 화자에게는 인식된다. 두 번째 계기는 이혼과 함께 여성에게 난사되었던 전 남편의 거친 폭력의 언어들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또 한 번의 존재론적 상실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떻게 그애를 데려갈 수 있지. 어떻게 그렇게 멀리. 어떻게 그렇게 오래. 나쁜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62쪽).”라는 절규 이후의 여성의 실어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빛의 상실’과 ‘말=소리의 상실’이라는 위태로운 조건 속에서 두 남녀가 희랍어를 매개로 만나게 된다. 아카데미에서의 희랍어 강의를 진행하는 남성은 상실된 시력 탓에 희랍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어렵게 문자를 쓴다. 결코 입을 열지 않는 실어증의 여자는 그 낯선 문자를 노트에 적으면서, 기꺼이 한국어라는 언어공동체의 외부로, 어쩌면 존재론적 외부로 자기를 부유하는 상태로 위치시키는 데서 비로소 안심한다. 이 두 남녀 주인공들에게 희랍어는 다만 묵독(默讀)의 상징체계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매개로 한 밀도높은 대화=소통=교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강의실에서 그들은 희랍어 강사와 학생으로 기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부유하는 기표와도 같아서 미끄러지고 빗나가는 상황만 연출할 뿐, 존재론적 의미로 정착되거나 그들의 관계를 결속시키지 못한다. 그러던 두 존재들이 우연한 계기로 서로의 몸을 끌어안게 되고, 여자가 말 대신 안경이 깨어져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남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상실되었던 흔적 없이 지워질 한국어 글자를 쓰는 장면에서 이 소설은 끝을 맺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일상어로서는 기능하지 못하고 사어(死語)나 문화적 유물과도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희랍어의 언어 체계 속에서, 빛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는 두 남녀의 존재론적 자기회복과 기적 같은 마주침을 묘사하고 있다. 침묵과 결여와 상실이 거꾸로 회복과 구원과 만남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반어적 질문을 이 소설은 사금파리처럼 일순 반짝이면서 집요하게 그 빛을 숨기는 시적 언어를 통해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소설은 침묵 속에서 읽기보다는 혀와 성대를 간신히 열어 느리게 낭독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런 질문도 던지게 된다. 어둠이나 침묵 속에는 과연 이데아가 없는가.
기후위기로 인한 지구 멸망의 시나리오는 이제 더는 황당한 괴소문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종말은 우리 곁에 바투 다가온 예측 가능한 결말이자 부대끼며 살아가야 할 반려가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2024년 말 우리는 45년 만에 다시 계엄을 경험하게 되었고 참사를 반복적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현재 우리에게 일상이란 반복되는 보통의 나날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수호해야만 누릴 수 있는 놀랍도록 운수 좋은 날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는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일만큼이나 어떠한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것인지, 그 구도의 자세를 설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 전력을 다해 살아남되 생존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더 나은 방향으로 삶을 변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뒤집어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지' 질문하게 되었다는 한강 작가의 말에 힘을 얻어, 지금 물어야 하는 문학적인 질문을 해본다. 도달하고 싶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미리 체험하게 하는 문학이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는 양경언과 인아영의 비평을 읽었다. 두 평론을 만나면서 미래를 새로이 구축하는 서정과 그에 대한 논의의 갱신이 현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그러한 긍정적인 예측이 극복되어야 하는 낡은 장르로 여겨졌던 '서정시'의 가능성을 재탐색하면서 도출될 때, 과거-현재-미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선순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의 평론가들이 미래로 뻗어간 시가 현재를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논의하며 치열해지는 것도 그 이유에서일 것이다. 양경언 「노래가 들리는 곳」 양경언은 「노래가 들리는 곳: 서정시의 변혁성에 대하여」(『창작과비평』 2024년 겨울호)에서 전운이 감돌고 기후위기가 심화된 현사회에서 삶을 '사는 일'이 아닌 '살아남는 일'로 인식하는 경향성이 더욱 공고해졌음을 지적한다. 그는 생존 이외의 선택지를 차단하여 삶을 죽음의 대타항으로만 사유하게 하고 "더 나은 삶으로의 진전이나 변화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치적인 맥락을 비판한다. 살아남기만을 강조하는 사회가 살 만한 삶을 향한 욕망 자체를 소거해버린다는 분석에 동의하게 된다. 양경언은 "우리 시대가 놓치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구상과 내용"(79면)을 회복하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해왔던 분투의 역사를 참조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전환의 노정에서 우리가 다시금 들여다보아야 할 문학형식은 생생한 발화를 통해서 변혁의 비전을 제시해온 서정시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좋은 서정시는 "'사는 일'을 '살아남는 일'로" 축소하지 않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80면)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러므로 서정시와 그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갈망하는 다음 시대로 진입하기 위한 이행의 역량을 고취한다. 가령 양경언은 신경림 시 「상암동의 쇠가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불변의 진리를 전하는 대행자의 역할을 하기보다 "지배적인 체제의 승인을 얻지 못할지라도 주관적인 시선을 진솔하게 가꾸어" "같은 편에 서고자 하는 이들의 편으로 다가가는 태도를 취한다"(84면)고 해석한다. 「상암동의 쇠가락」은 산동네 사람들의 생기와 자력을 존중하면서 그 각각의 삶이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도록 살핀다. 그것은 타자의 고유함을 보편으로 무리하게 확장하거나 함부로 자아와 동일시하려는 움직임과는 다르다. 양경언은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에 종속시켜 타자성까지 동일화하고 만다는 기존의 다소 도식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주관'을 지킴으로써 '대상'을 돌보는 관계를 성립시"(같은 면)키고 이로써 다양한 삶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감각을 길러"(86면)내 생의 전망을 길어올린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서정시에서 발현되는 주관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뚝심 있게 보살피면서 이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노래로 울려퍼지도록 두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85면) 양경언의 글을 읽으며 폭압적인 동일시의 토대로 간주되고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져온 '주관성'이 비대해진 자의식, 혹은 나르시시즘적인 주체성의 동의어로 취급되어온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자아를 비워내야만 타자를 들일 자리가 존재하리라고 믿음으로써 주관성을 소거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산출해낸 것이 어쩌면 윤리적인 여백이 아니라, 개성적인 목소리들이 지워지고 남은 허무한 공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는 한편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을 배격하는 일로 귀결되는 흐름을 저지하는 기능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스트휴머니즘 담론 및 신유물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자는 휴머니즘적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고 이는 긍정할 만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도덕을 요구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기도 한 '인간다움'을 해체하려 애쓰다 인간이 지닌 타자에의 감응력과, 존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까지 허물 위험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적으로 언급되는 문학적 경향을 개선하는 일이 꼭 그것을 소거하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음을 새삼 깨닫는다. 서정시가 극복되어야 할 무엇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그것이 타자를 자아(화자)로 수렴시키는 장르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받아들여짐에 따라 그간 서정적 경험이란 객체에 대한 주체의 일방적 동일시로 이해되어온 경향이 있지만, 이는 자아와 세계가 '서로에게 침투(interpenetration)'하여 동화되는 과정에 가깝다.1) 시적 자아에 부여되는 과도한 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성성, 분열적 주체 등을 고안해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서정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재논의해볼 만하다. 더불어 김승희의 시 「호텔 자유로」에서 자아가 세계와 이미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 한 양경언의 해석을 살펴보자. 꽉 막힌 자유로에서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시적 자아의 감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밀고 가는 자유"를 수행했던 전봉준의 의지와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간절함과 맞닿는다.(88~89면) 물론 이 같은 연결 역시 화자의 의식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창출될 때 여전히 자아가 우위에 놓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는 점은 더욱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시가 세계를 자아화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이해가 세계와 자아를 분리하여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은 확실해진다. 습관적으로 전제되는 이 같은 대립 구도는 자아가 역사성과 계급성, 사회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진공 상태의 개인처럼 느껴지도록 종용한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시에서 "만인의 몸짓"(89면)이 감지되고, 각자의 바람이 여러 존재의 마음과 공명할 수 있는 이유는 자아라는 단위가 근본적으로 타자와의 연결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 자아의 일방적인 지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양경언이 말했듯 '누가 말하는가'를 '누구와 함께 말하는가'로 바꾸어 쓰고 '누구와 함께 나아가는가'로 풀어낼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미래를 불러들이는 서정시는 현재를 구하는 노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인아영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역시 지극한 주관성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인아영은 실제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해도 분명히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내면의 풍경을 말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해 "내 마음이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현실을 이해하고" "꿈속의 장면으로부터 거꾸로 세계를 재구성"(111면)하는 방식이 2020년대 한국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조류라고 이야기한다. 화자의 마음과 세계를 일치시키고 그 세계를 믿기로 결심하여, 현실의 논리에 근간한 사실주의적 접근보다 내면에서 출현하는 세계 및 그에 대한 애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성을 인아영은 '내향성'이라고 명명한다. 인아영의 적극적인 해석에 보태어, 시적 세계의 협소화, 비개연적이고 자의적인 세계관, 현실감각의 결여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는 최근의 시편들이 독해될 때의 효과를 덧붙여 논의해보고 싶다. 시인-화자가 꿈꾸는 환상적이고 주관적인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그 내밀한 세계관을 자세히 정립해나가는 2020년대의 시가 펼쳐 보이려는 것은 자기유폐적인 망상이 아니다. 팬데믹, 전쟁, 기후위기와 같은 거대한 시류 앞에 일상이 무너져가는 현시대에서 개인적인 노력이나 개개인의 영향력에 대한 믿음은 거의 소멸한 상태다. 모종의 개별적 행위가 어떤 변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 어려운 때, 이와 반대로 '나'라는 개인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나'의 마음에 따라 세계가 구축되는 최근 시의 방식은 독자에게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매력적인 세계의 주조 원리가 된다. 그 간극을 채우는 것은 원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꿈꾸는 일이 그 가능성과 무관하게 가치롭다는 판단이자, 극도의 주관성을 응원하면서 자기만의 특수성을 가꾸고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 독자들의 적극적인 지지일 것이다. 인아영은 이러한 내향성의 성행이 "서정적 아름다움의 귀환"이거나 "현실과 긴밀하게 연루된 시적 흐름에 대한 반동"(같은 면)일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한다. '현실적'이라 여겨지는 이성중심 세계의 논리에만 얽매이지 않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으로도, 서정의 창조적 계승으로도 보인다는 말이다. "'미래파'의 실험적 성격보다는" "서정의 계보에 한층 가까운" 느낌을 주는 미래파 이후의 시 경향성을 '서정의 귀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최근의 서정이 지닌 차별성을 희석해버릴 위험이 있어 동의하지 않는 고봉준 평론가 역시 그러한 경향성이 시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서정의 역사성과 가능성을 환기할 수 있음을 긍정한다. 그는 서정이 시인의 진솔한 감정표현 정도로 환원되는 일을 경계하면서 서정시의 정서적 호소력은 시인의 자기고백을 통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이 시인-개인"이라는 주관성을 지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 그러므로 서정적 주관성 역시 개인사로 한정되지 않으며 공동의 경험으로 나아가는 확장성을 지닐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 역시 2010년대 후반부터 생겨난 시적 경향이 억압적 동일시로 퇴행하거나 과거의 유행이 되돌아오는 흐름이라 보지 않는다.3) 그보다는 시인과 화자의 분리와 시적 주체의 분열을 전제하는 시가 주류였던 시기를 거쳐, 가상이라 하더라도 속아주고 싶은 단일하고도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화자-시인-시민'이라는 하나의 통합체를 확인하고 싶은 갈망에 대한 새로운 응답으로 보인다고 해석한 바 있다. 박소란의 시들을 분석하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모두가 헤어짐 없이 평온히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시에서만큼은 선명하게 그리고 실현시킴으로써 불가능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변화된 서정의 방식일지 모른다고 추측했었다. 이처럼 내향성이자 달라진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시를 쓰고 읽는 일은, 각자의 주관을 지닌 개인이 공통된 미적 경험으로 만나 변혁의 주체로 기능할 수 있다는, 행여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최소한 소망해볼 수는 있다는 역능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과정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가 보여주는 내향성은 혼란한 세계를 등지고 자기폐쇄적인 몽상으로 잠기고자 하는 소극성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현실적이지 않기에 무시당하곤 하는 내밀한 세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험하고, 타자인 독자 역시 시와 시에 드러난 주체 내부에 접속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어쩌면 새롭고도 낯익은 얼굴의 '환상적 서정'이라고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인아영은 현대예술에서 고전적 의미에서의 '미적인 것'은 종말했다고 하더라도, 미적이라는 감각 자체는 "보편성에 대한 예감"을 지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자기동일성으로부터"(112면) 벗어나는 방식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운 특수성을 지향할 때도 여전히 다른 이들 또한 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예감은 남는 것이다. 인아영의 논의는 주관성이 보편성 및 객관성과 대립하는 성질이라기보다 타자에게 있을 주관성을 함께 인지하게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보편, 객관과 연루된 특성임을 생각하게 한다. 『문학동네』 3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문학비평 키워드 1994-2024' 특집에 속한 이 글에서 인아영은 미학성에 초점을 맞춰 감성적인 자질로서의 '미적인 것'이 한국문학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발전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이때 인아영은 현실에 얽매이지 않은 아름다움에 집중하는 시편들에 나타나는 미적 범주를 '귀여움'(cuteness)으로 명명한다. 귀여움이란 대상이 되는 사물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무해하게 만들어 소비하려는 욕망에 근거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증상적인 미감이지만, 자본가치로 환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존재를 교환논리에서 지켜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향성이 2020년대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진단에 동의하지만, 이를 '귀여움'으로 범주화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단어가 본래 지니고 있는 약소한 뉘앙스가 부각되면서, 애정하는 대상 혹은 세계가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게 수호하는 소극적인 대응만이 지금의 시가 지닌 정치성인 것처럼 축소되어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귀여움과는 다른 결을 지닌 동시대 미학적 경험의 한축으로 '언캐니'(uncanny)를 꼽는다. 방대한 데이터가 쏟아지는 시대에 달라진 인지방식을 반영하여 "자동화된 알고리즘을 통해 응답하는 기계적인 방법"을 차용하는 시편들은 독자에게 "무언가 비인간적인 것이 압도적으로 끼어"(115면)드는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도 비인간도 아닌 비확정적인 상태에 걸쳐 있으므로 "미래에 대한 열려 있는 감각을 동반"(116면)하는 시는 우리가 인간이기를 그만두거나 인간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게 한다. 이러한 논의는 주관적인 미적 체험이 결코 '타자를 향해 열려 있음'과 대립하지 않으며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맞이하고 싶은 미래세계와 되고 싶은 미래상을 집요하게 꿈꾸고 그것을 언어화하는 일은 반대로 그러한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현재에서 중단되어야 할 것들을 비추면서 지금-여기를 구한다. 바라는 세계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 서정시는 현재로 온다. 이것이 서정의 귀환인지 지속인지, 창조적 계승인지 변혁인지 단언할 수 없지만, 새롭게 쓰이는 우리의 미래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1) 오문석, 「서정적 경험으로서 '상호침투'」, 『한국시학연구』 제80호, 2024, 132면. 2) 고봉준, 「서정의 고고학」,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 b, 2020, 239~42면. 3) 성현아, 「시와 복고: 다시 만난 서정」, 『시와 사상』 2021년 여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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