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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시작 | 2025년 봄호(제91호)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3D 렌티큘러』(천년의시작, 2024) 임경숙,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천년의시작, 2024)

기혁 시, 문학평론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계간 <시인세계>(시)와 2013년 <세계일보 신문문예>(평론)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다음 창문에 가장 알맞은 말을 고르시오>, <소설책> 등이 있다. 제33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대산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 등의 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았다.

동화(同化)와 견딤, 재현 불가능한 ‘자연미’를 드러내는 두 방식

- 서정화 시집, 『3D 렌티큘러』, 천년의시작, 2024.

- 임경숙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 천년의시작, 2024.


기혁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읽고 ‘서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의 본령’ 혹은 학술적으로 합의된 개념이라기보다 정서적 느낌에 가까울 것이다. 난해한 실험성, 자폐적 세계 인식에 따른 파편화와 산문화 경향의 반대편에 선 작품을 언급하기 위해선 진정성과 소통 가능성, 최소한의 리듬감 등을 동시에 충족하는 ‘가정된 일관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실험성이 강한 작품의 경우 그 형식에서 첨단의 사회성을 도출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반면, ‘서정시’ 혹은 ‘정통 서정시’ 등으로 분류된 작품은 대체로 형식보다 내용을 우선시함으로써 인간(자연)의 본성이나 보편성 등 원론적인 문제를 다룬다. 이는 형식과 내용, 형식과 사회의 불화를 해소된 것으로 간주하는 서정시의 독법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로 인해 개인적 경험과 감상에 머무른다거나, ‘지금, 여기’의 현실과는 거리감을 유지하는 시풍으로 인식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다만 서정성이 강조된 작품이라 하더라도 내부적으론 ‘가정된 일관성’의 이탈과 유지가 반복적으로 교차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새로운 시적 형식이나 긴장감 있는 표현에 대한 도전 의식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비루한 삶의 슬픔이나 고통의 진정성만을 읽어 낸다면 서정성의 범위 내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시도마저 평면화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전통 장르인 시조의 형식을 갖춘 서정화의 『3D 렌티큘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여는 시로 배치된 「천수암 인생네컷」은 시집의 서문 격으로 ‘자연’이 상실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접근하고자 하는지 전반적인 의도가 드러난다.


    형형색색 태어나는 행리단길 간판들

    영원 같은 전경으로 변하고 있을 전생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 움직이는 손, 전망은 어딘지 신점 같은 면이 있지 문턱 낮은 입구로 통과하는 호기심들 이음매 빠진 시간 앞 네 개의 컷 네게로의 컷,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


    환생한 천수관음보살 수행같이 넓어지는

    행렬과 행간 사이 세상과 말을 걸며

    압축된 암호를 풀고 나를 올려놓는다

- 「천수암 인생네컷」 전문


 인용한 시편의 1수 초장의 “행리단길”에는 ‘수원 행궁동은 점집 타운이었으나 점집이 나간 자리에 다양한 가게들이 입점되었다’는 각주가 붙어 있다. 신과 소통하던 무당이 사라진 자리에 상업적 논리에 따라 존립이 결정되는 ‘맛집’ 등이 들어섰을 저녁 풍경은 시의 창작 동기이자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설 조로 늘인 1수 중장에서 시인은 “행리단길”의 “전생”이라 할 수 있는 ‘점집 타운’의 풍경을 겹쳐 봄으로써 “형형색색”인 “간판”의 불빛과 사이사이의 어둠 너머로 “천수관음보살”의 “천 개의 보이지 않는 거룩한 눈”과 “움직이는 손”을 떠올린다. 과거세(過去世) 중생을 구원하던 “천수관음보살”은 신이자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거 ‘점집 타운’의 무당을 매개로 공존할 수 있었으나, “인생네컷”을 찍는 방문객들의 “호기심” 앞에선 한낮 미신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에 동화될 수 있었던 마지막 매개체(“이음매”)인 무당이 사라진 시공간 속에서 본성의 박탈과 은폐를 인지하지 못한 계몽된 주체는 통제된 사회가 요구하는 “네 개의 컷”에 맞춰 동일한 셀카를 찍는다. 동시에 구속의 결과물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재생산함으로써 모든 행위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네게로의 컷”) 순환 구조에 갇히고 만다.

 여기서 시인은 문명을 비판하거나 도래하지 않는 과거를 추억하는 대신 모호한 전언을 남긴다. 1수 중장의 마지막 문장인 “어둠의 눈 감기 위해 빛의 눈을 떠야 하는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하니”에서 시인은 구속의 산물인 ‘셀카’(“이미지”)가 사실상 어둠과 빛의 예술인 사진 작품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다. “행리단길”의 야경 “이미지”에서 과거의 ‘점집 타운’과 “천수관음보살”을 겹쳐 보는 시적 화자(예술가)의 응시는 “이미지” 자체에서 도래한 것이 아니라 계몽 사회에 대한 반성적 태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재현 불가능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자연미’는 예술 작품 속에서 계몽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불러일으키면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모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진정한 ‘자연미’를 담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비록 ‘셀카’라 할지라도 어떻게 향유되느냐에 따라 부여할 만한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천수관음보살”을 떠올리면서 시작된 시적 화자의 자각은 ‘숭고’로 이어진다. “천수관음보살”의 숭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여 주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인간 스스로 “운명도 바꿔 놓을” 수 있도록 지배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발현되는 것이다. 과거세 중생을 구원하는 “천수관음보살”이 미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여기’를 바라본다면, 구원이란 “이미지”에 의해 자신(의 자연)을 구속할 운명에 놓인 계몽된 주체가 “운명도 바꿔 놓을 이미지로 변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일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1수 종장의 “이상의 무한을 열어 환해지는 다른 세계”는 앞서 언급한 아도르노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서, 가닿을 수 없는 ‘자연’과 계몽적 주체의 화해가 인공물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이 반영된 가상의 영역이다. 

 이어지는 2수에서 시인은 별다른 부연 없이 3장 전체를 할애해 예술가로서의 각오를 드러내고 있는데 1수에서 전개한 자각의 과정과 호응 관계를 이루려는 의도로 짐작된다. 예술가의 작업이란 결국 “행렬과 행간 사이” 침묵뿐인 “세상”(자연)과의 대화이며 자연의 “압축된 암호”(‘자연미’)는 작두를 탄 무당이 그러하듯 이성과 논리가 아닌 “나를 올려놓”고 대상과 동화됨으로써만 해독의 여지를 갖는다.


    말도 되지 않는 말과 함께 언어의 들판을 횡단하면서 시 속에 한참 빠져 말무리 가까이에서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의 시는 서툰 말만큼 아직도 미숙한 것임을 깨달았다. 끝없이 펼쳐진 언어의 광야, 그 속에서 말과 시를 구분할 때까지 한 그루 나무가 되고 싶었다. 언어의 뿌리를 내려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말의 나무. 그렇다. 나무의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 「시인의 말」 부분


 하지만 시가 문자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의 소산이라면 가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셀카’가 예술 사진으로 향유될 수 있는 가상의 영역에서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인용한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이 문명 이전과 같은 완전한 동화는 “꿈”에서만 가능하다. 도구화된 일상어를 사용하는 한 “말과 시”를 구분해 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은 실패를 향한 수많은 시도 속에 잠재된 가능성이므로, “말의 나무” 역시 가상이 현실로 육박할 때의 ‘마법’처럼 휘발하면서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마법의 무대 뒤편에는 무수한 실패로 쌓아 올린 “나무의 무덤”이 버티고 있다. 무력감에 빠질 법도 하지만 시인은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은폐하는 대신 창작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해 “무덤이 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시집을 살펴보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긴 자의 허무는 보이지 않는다. AI, 생체공학 등 문명의 발달에 따른 상실된 인간 본성을 다루거나, 자연이 부재한 세계를 채우고 있는 남겨진 존재에 대한 여러 감정을 노출하며 현실을 직시한다. 표제작인 「3D 렌티큘러」를 비롯해 「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호모 라보란스 칸탄스」 「날아가는 침대처럼」 「Butter Book」 「영화 경로당」 「봄날」 등 시조 장르에서 익숙한 소재와 낯선 소재가 혼재되어 있다. 또한 텍스트의 자리에 특정 기호를 콜라주(collage) 하거나(「휴지통」), 여백의 구분을 회화적으로 활용하는(「평화 인쇄사」) 실험적인 형식도 눈에 띈다. 소재가 혼재된 만큼 다양한 어투를 구사하는데 과도한 비판이나 냉소, 관조나 회상에 스며드는 ‘잠언투’ 등은 절제되어 있다. 형식적인 면에선 대체로 시조의 3장 중 중장을 변형한 사설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통념상의 시조 장르와 달리 당사자로부터 한 발짝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현실과 가상의 괴리에 대한 시인의 대응은 무엇일까? 열거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개별 작품의 면면은 ‘서정성’의 범위 내에 있다. 정형시의 제약과 종장의 묘미를 살리는 시상 전개의 관습 등도 유지된다. 실험적인 작품에서조차 시조의 3장 형식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장르적 이탈이나 의도적인 실험이 ‘자연미’를 환기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내비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을 유지하거나 이탈하려는 예술적 행위가 인과적 논리를 언급할 만큼 경직될 때 계몽의 산물로 추락한다는 점이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 앞에서 시인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 예술적 형식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올랐어요


    눈부신 디테일의 볼륨은 투명해져요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더군요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사이 루프탑이 솟아나고 시간은 파란색에서 초록색으로 편의점 간판처럼 변해 가도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어요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네요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

성 사이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416 생명안전공원은 노란 리본을 수놓았어요 사라진 그 아이들이 굳어 가는 걸 보았어요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켜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 바다를 증명하려던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회멸이 되지 않도록


    오늘의 뒷면과 앞면을 이제 당신이 이어 주세요

- 「3D 렌티큘러」 전문


 주로 장난감이나 각종 카드, 케이스의 장식으로 사용되는 “3D 렌티큘러”는 빛의 각도에 따라서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 준다. 예를 들어, 앉아 있는 사자의 모습이 정면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포효하는 모습으로 변함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감을 주게 된다. 그런데 “렌티큘러”의 작동 원리1)는 동굴벽화에서 발견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벽화를 그리고 신을 호출하던 주술사(예술가)에게 “렌티큘러”의 원리는 눈속임이 아니라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물의 영혼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신성한 작업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모든 예술가에게 그러한 작업은 이상적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현대 예술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현대 예술가의 “3D 렌티큘러”는 실재로부터 소외되어 더 뛰어난 눈속임으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앞서 열거한 “렌티큘러”의 쓰임새가 말해 주듯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작은 유희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주술사의 작업 방식을 단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예술 형식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리 벽에 안과 밖이 부풀어” 오르고 “3D 렌티큘러”가 작동하는 순간만큼은 고대 주술사가 그러했듯 “세 개의 면이 돌출되는 입체감과 공간 사이 무한의 차원이 되어 새로운 길이 나”는 ‘마술’을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인에게 그것은 종이에 적힌 시조가 입체의 ‘자연미’를 드러내는 순간과 겹친다. 천(天)·지(地)·인(人) 3장의 기본 형식은 ‘자연미’를 재현해 본 기억이 잠재된 형식이다. 비록 근대 이후 재발견된 ‘전통’으로서 ‘자연’과의 화해를 가정할 뿐이라고 해도, 고대 주술사가 그러하듯 진실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눈속임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움직임이다. “보이는 세계와 불투명한 세계를 오가”는 동화의 움직임이 없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렌티큘러”라 해도 입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노랗게 내 마음의 풍경은 은행나무가 되어 기다렸”다는 기대와 믿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고개를 돌려 가며 “투명 인간이 불투명한 인간들을 말”하는 현실의 이면을 함께 보아야만 한다. “재배열되는 건물 앞 피켓 들고 울분을 띠로 두른 사람들 농성 사이”에서 시선의 각도를 달리할 때 “의문의 시간 뒤에 미래를 여는 이유”를 물으며 비로소 ‘자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상의 시인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겹쳐 봄으로써 계몽된 세계의 명령(‘조난 시 안내 방송에 따라 행동하라!’)이 ‘자연’을 정복하지도 인간을 구원하지도 못했던 사건을 상기한다. 수로의 특성을 분석하고, 침몰의 원인을 찾고, 재발 방지를 위한 기술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문(계몽)의 시간”은 모든 사고의 책임을 ‘자연’에 전가한다. 하지만 “청록색 밤의 감정이 착시를 일으”키게 할 뿐 “바다”도 희생된 아이들의 ‘자연’도 “증명”하지 못한다. 시인에게 ‘자연’과 계몽의 불화는 “거대한 벽의 사막처럼 추인되지 않는 일들”이므로, ‘자연미’ 역시 “불투명”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가상과 현실의 괴리에 대한 앞선 질문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시가 언어를 통해 ‘자연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시인의 기대와 믿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장 형식의 훌륭한 “3D 렌티큘러” 장치를 지닌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의 역할은 ‘불가능한 가능성’에 운명을 내맡기는 것도, ‘형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실험 정신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투명한 그 세계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게” 위장된 화해를 경계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은 “바다”가 불타 버리듯 이내 성질을 뒤바꾸고 “회멸” 되어 버린다. 엄밀히 말해 시인은 현실과 “3D 렌티큘러”의 가상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공존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동화를 꿈꾼다. n개로 분절된 세계의 모습과 입체 사이에 위치하는 볼록렌즈처럼 “오늘의 뒷면(과거)과 앞면(미래)을” 조율하고 매개함으로써 계몽된 주체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다. 모조품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아르고스처럼 백 개의 눈을”(「수상한 푸드 스타일리스트」) 뜨고 “늦은 봄, 개의 목줄은(이) 아직도 팽팽”(「봄날」)해지는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곧 괴물이 되어 버린 계몽의 능력을 온전한 인간의 시선으로 되돌리려는 시도일 것이다. “백 개의 눈”으로 걸러 낸 생의 이유를 벼르고 별러 다시금 이유로 남겨 두려는 응시. 이것이 바로 서정화의 ‘서정’이자 동일자들의 세계에서 비동일자로서의 시인에게 주어진 동화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임경숙의 시집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는 별다른 부연이 필요 없을 만큼 삶의 진정성을 개진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과 행의 구분에서도 낭독을 염두에 둔 듯 자연스럽다. 이것은 작품의 소통 가능성을 중요시한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추전 골목”의 “가교리 언니”와 “태봉 할매”(「봄의 좌판」), “한낮에도 셔터가 내려진 문구점 신발 가게 옷 가게 레코드 가게”(「중동 골목 147」), “베트남 여인, 예쁜이 린이”(「공심채」), ‘공곶이 수목원’을 처음 일군 “아흔두 살 사내”(「공곶이 수선화」), 포로수용소의 “아버지”(「1953년 거제도」) 등등 구체화된 인물과 배경엔 아픈 전사(前事)가 깃들어 있다. 낡고 손때가 탄 사진첩을 꺼내듯 사연을 적어 내는 시인에게 그것은 단순한 소재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산을 끼고 도는 북쪽은 응달이었다

산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하지만

바닥은 늘 보이지 않는 블랙 아이스가 깔려 있다

길은 좁아서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어

모든 그림자는 강물 쪽으로 기운다

위태로운 바퀴는 자주 경계선을 넘었다

어미는 아이 하나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켰지만

바람 잘 날 없는 그 방에선 자주 불을 꺼뜨렸다

길 없는 길로 접어든 순간부터

운전대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가끔은 급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날에는

가늘어진 손목에 과부하가 걸려서 떨리기도 했다

한동안 밖으로 폭주하던 아이가

이제는 골방으로 들어가 성장통이 끝난

저를 잠가 두고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었다

어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빈다

- 「결빙 구간」 전문


 인용한 시편 역시 불우한 환경을 살아온 모자(母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블랙 아이스”가 깔린 아슬아슬한 삶의 현장에서 시적 화자가 기댈 곳은 없다. “아이 하나에 희망”을 걸고 견뎌 보지만 “길 없는 길”처럼 막막한 일상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브레이크”를 잡은 만큼 “아이”는 “밖으로 폭주”하다 마침내 자신을 “골방”에 가둬 버린다. 그토록 피하고자 애쓰던 “블랙 아이스”의 냉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미의 언어”를 얼리고 “성장통이 끝난” 다 큰 “아이”의 마음까지 얼려 “어미의 언어를 냉동고에 넣”게 만든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어미”의 모습은 시린 손이 서러운 “어미”의 모습으로도, 참회의 합장을 대신한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서정시’로서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은 ‘시 쓰기’의 여정과도 겹쳐 읽을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닌 시인에게 시 쓰기란 “결빙 구간”을 지니듯 조심스럽고 “한번 접어들면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성질일 테다. 착상 이후엔 시인의 의지대로 전개되는 듯했으나 물러나 보면 “모든 그림자는(가) 강물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인다. “강물”의 ‘자연미’와 ‘역사’는 손쉽게 재현되지 않는 것이어서, 형식과 관습의 “경계선을 넘”고 ‘길이 아닌 길’을 찾아 “브레이크를 밟”기도 한다. “그림자에 가려져 햇살 한 점 간절”한 그늘진 현실은 그곳이 어디든 “골방”처럼 주체를 고립시키고, 시인은 자식 같은 작품에 “희망의 심지를 돋워” 작은 “등불”을 “햇살” 삼아 고립된 현실을 견뎌 내고자 한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밟는 기교가 능숙해질수록 자판을 치는 “손목”이 상할 뿐 “강물”을 끼고 도는 ‘진실’은 멀어진다. 그렇게 “폭주”와 자폐의 “성장통이 끝난” 작품을 완성했으나 이제는 작품이 시인의 “언어”를 거부하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한다. “아이”만을 생각하는 “어미의 언어”조차 그것이 ‘시를 위한 시’가 될 때 생기를 잃고서 “냉동고에” 쌓아 놓은 얼음덩어리가 되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부로 “문”을 두드리지 않는 시인의 자세에 있다. 시인은 “성장통이 끝난” 청소년을 인격체로서 대하듯이 작품 역시 하나의 ‘자연’으로서 존중한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시린 손을 비”비는 시적 화자의 행동은 변명이나 체념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세계의 폭력과 억압에 노출된 자들이 그러하듯 “문”이 열리는 순간을 믿고 견뎌 내는 것이다. 그러한 견딤이 추구하는 바는 언어적 소통이 아니라 삶을 견뎌 낸 자들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의 재현을 가리킨다.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데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 오실 때에는

만사를 제치고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 절정이라고

- 「꽃의 초대」 부분


도시에서 세상 소식 물고 오는

박 씨의 차 안이 궁금하다

마땅히 살 물건도 없으면서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다

…(중략)…

시속 삼십 킬로 이하, 저속의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봉지 봉지 들려 있지만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인지 가물거린다

…(중략)…

바람 소리만 채우는 빈 밥그릇 몰고 다니는

구산댁 멍구도 낡은 트럭 지나가는 소리를 알아보고

덩달아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날이다

- 「노인 보호 지역」 부분


 시집 전반에 걸쳐 세련된 도시의 모습보다는 시골 변두리의 풍경과 각종 자연물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인용한 시편들에서 보여지듯이 소재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어딘지 낡은 시어가 동원되어 있고 시상의 전개에서도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그런데 시인이 재현하고자 하는 ‘자연미’는 “그때, 거기가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도래한다. 이는 소외되고 상처 입은 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자연미’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거기”의 풍경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선발로 뛰쳐나가야/ 손이라도 만져 볼 수 있는/ 한순간의 절정”처럼 ‘지금, 여기’의 ‘양말’로는 대체 불가능한 공감의 눈높이가 선행되어야만 “손”으로 “꽃”을 만지는 합리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꽃”이 먼저 “손”을 만지는 ‘한순간의 절정’이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화되어 관리되는 현대 사회에서 계몽과 자연의 화해는 가상이겠지만, 지난날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난 소비를 할 수 있었다. 인용한 두 번째 시편에 드러나듯이 ‘판매자’와 ‘소비자’의 개념으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맺기가 가능했고, 이심전심(以心傳心) “외지 사람 쳐다보는 것이 마냥 좋”은 감정을 언어 없이 소통해 본 경험도 있다. 그러한 진심은 “구산댁 멍구”에게까지 전달되는데 ‘자연’의 언어는 “괜히 한번 짖어 보는” 말 없는 개의 외침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다.

 따라서 비루한 농촌의 풍경이나 소외된 존재의 사연 등은 그것이 번화한 도시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자연’의 진실에 가깝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임경숙의 이번 시집에서 그것은 공감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고, 말 없는 개의 외침이 그러하듯 시인은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말 걸기’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목줄 풀린 “푸들”(‘자연’)이 수풀로 내달리는 대신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 낯선 풍경처럼(“급하게 누른 경적에도/ 푸들은 소리 나는 방향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노란 금지선에 멈춰 선다”, 「선을 지키다」) “푸들”의 ‘자연’은 우리의 합리성을 넘어서는 영역에서 의도치 않게 ‘자연미’를 드러내곤 한다.

 대개의 서정시가 ‘일인칭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기본으로 ‘자연’을 전유해 왔다면, ‘자연미’는 대상을 전유하는 과정에서 뒤따르는 억압과 왜곡을 넘어서는 영역을 가정하는 한에서 재현을 기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가정된 영역이 어떠한 형태로 표현되든 ‘비동일자’로서의 시선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결빙 구간」의 “어미”와 “아이”의 관계처럼 동일성 내부에 존재하는 비동일성의 특질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인이 주목하는 ‘가시’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양립 가능성을 여는 시적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표제작에 해당하는 「가시 많은 생」에서 짐작되듯이 “가시”의 은유는 중의적인 성격을 지닌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생선의 경우 수압에 저항해 몸의 형체를 유지하고 장기를 보호하는 ‘뼈’를 뜻하기도 하고, 요리되거나 타자의 소유물인 상태에선 이물질인 “가시”로 표현되기도 한다. 식물의 경우 보호를 위해 진화한 잎사귀를 떠올릴 때 그것은 본체(本體)의 일부지만, 꽃과 열매만을 취하려는 외부적 입장에선 접근을 방해하는 이체(異體)로 간주 된다.


도마 위에 준치 몇 마리

어머니 칼질 소리가 칼칼하다


검푸른 살 속에 무수히 박힌 가시가

납작하게 혼절해 가는 동안

살이 많은 물고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랐을까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들

썩어도 준치는 찬란한 맛이었다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진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

목에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럽다


뜨거운 완자 몇 알 삼키다가

맛있는 생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가시가 박혀야 할까


내가 삼킨 가시는 몇 줌이나 될까

- 「가시 많은 생」 전문


 살에 “가시”가 많은 생선인 “준치”는 대체로 “가시”를 발라 요리한다. 그러한 경우 발라낸 “가시”는 쓰레기로 취급된다. 하지만 “어머니 칼질”로 “잔가시마저 촘촘히 다져”지게 되면 버릴 것 없이 “준치”의 “가시”까지 온전하게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어머니”가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인 정확한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경제적인 요인이나 음식에 대한 추억 등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선택의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성 너머에 위치한다. “어머니”와 “준치” 사이의 비합리성을 공감의 형식으로 재현하려는 시인은 3연에서 “준치”의 본래 모습으로 화제를 전환한다. “물속을 헤엄쳐 다닐 때/ 찔려도 찔린 줄 몰랐던 가시”처럼 “가시”가 ‘뼈’로 인식될 때 “준치”는 크기와 맛으로 규정되는 세계를 벗어난다. 그러한 가상의 영역에서 시인은 생의 잔뼈가 지금처럼 굵지 않았던 “어머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말캉말캉한 준치완자탕”처럼 “걸리는 게 없이 부드”러웠을 소녀의 ‘자연’과 “준치”의 ‘자연’이 서로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만난다. “하필이면 가시투성이를 골”라 “준치완자탕”을 끓이는 “어머니”의 사연은 언어가 아니라 “어머니 칼질 소리”를 통해서 비로소 전달된다. “찬란한 맛”이란 억압과 고통을 견뎌 낸 자가 자신을 닮은 자식에게 내미는 소통의 시도이고, “맛있”다는 시적 화자의 반응은 그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자연’을 경험한 자들과의 소통은 형체를 알 수 없게 갈린 “몇 줌”의 “가시”처럼 소멸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관성적으로 “삼킨” 무수한 “가시”가 실은 뭉개 버린 ‘자연’의 말 걸기가 아니었을까 자문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에 빚진 시의 부채이며, 끊임없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어머니”와 “준치”가 공존하는 가상을 깨트리는 대신 현실 속 “뜨거운 완자 몇 알”만을 ‘자연’에 대한 시 쓰기로 전유한다. 이를 통해 동일자로서 포섭되지 않은 “어머니”의 ‘자연’은 또 다른 시편(「외면」)에서 다시금 말을 걸 수 있다. “준치완자탕”을 끓여 주던 다정한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는 것도, 병 수발에 지친 딸이 “어머니”처럼 생의 잔뼈가 굵어지는 것도, 그런 딸의 “하소연을 단칼에 베어 내듯/ 누가 그렇게 살랬니?”(「외면」) 매몰차게 대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말 걸기라고 할 수 있다. 

 시집 전반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처 입은 여성과 노인, 삐뚤게 커 버린 청년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남편, 가해자이자 역사의 피해자로서 존재하는 아버지까지 이분법적 구도와 진부한 서술 방식, 후반부의 단정적인 감상 등 얼마간의 흠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로 다투지 아니하고// 산까치도 먹고/ 고라니도 먹고/ 밭 임자도 먹는”(「공평」) ‘자연미’를 재현하고자 하는 시인의 견딤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그러한 시작(詩作) 자체가 ‘가시’일 수 있는 것이다.

 부족한 식견으로 아도르노의 변증법적 미학에 기대어 서정화의 『3D 렌티큘러』와 임경숙의 『가시 많은 생이 맛있다』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도르노를 경유하게 된 것은 ‘전통’과 ‘자연’에 대한 조지훈의 문장에서 큰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2) 시에 대한 사랑이 생성해 내는 자연이야말로 ‘서정’의 본령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평에 어울리지 않게 해석에 치중한 것은 ‘서정’에 대한 선입견을 걸러 읽고 싶은 독자로서의 소망임을 고백한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자연에 대한 공포가 고대 주술사로 하여금 미메시스를 통한 극복을 모색하도록 했다는 아도르노의 지적과 더불어 외부에 대한 불안이 추상 충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주장3)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대인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탄핵 정국에 불안을 느끼는 ‘지금, 여기’의 독자들 역시 예술이 어떤 형식적 미학을 취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불안과 공포의 극복을 위해 어떻게 추상과 미메시스를 오가며 ‘운동’했는가가 훨씬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운동성이 서정의 전통에 잠재되어 있다면 ‘자연미’의 재현이란 존재론적 닮기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전통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자유를 얻을 때, 우리는 “공기의 방식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물리적 그물코」)는 시조를 읽을 수 있고, “가끔은// 제 가시(시)에 찔려// 흠칫 놀라”(「양심」)는 서정 시인의 고백도 들을 수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왜 시문학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어째서 무수한 시편들이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지 ‘서정’의 본령을 둘러싼 질문을 좀 더 우리의 삶 쪽으로 밀어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1) 계단처럼 수직과 수평에서 보이는 면이 각각 다를 때, 두 장의 그림을 계단의 수만큼 n등분한 후 수직면과 수평면에 잘라 붙이고 계단의 위쪽 혹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각도에 따라 보이는 면이 달라짐으로써 입체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계단이 아닌 평면에서 구현하기 위해 상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관측하는 각도에 따라 표시하는 지점의 위치가 변하는 작은 볼록렌즈를 붙인 것이 오늘날의 렌티큘러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에서도 벽면의 굴곡과 횃불이 비추는 방향을 활용한 원시 렌티큘러가 발견된다.
  • 2) “참뜻의 전통은 언제나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생명을 고심참담한 노력 속에서 창조적으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생명(詩生命)의 비의(祕義)를 체득하려면 먼저 시를 사랑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말로 말하면 시생명의 본질은 ‘시를 사랑하는 인생 속에 내재(內在)하여 생성(生成)하는 자연(自然)’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조지훈, 「시의 생명」, 『조지훈 전집 2: 시의 원리』(홍일식 외 편), 나남, 1998, 20쪽.
  • 3) “감정이입의 자극은 인간과 외부 현상 사이의 완전무결한 신뢰 관계를 조건으로 하는 반면, 추상의 자극은 외부 현상들에 의해 유발된 인간의 내부가 매우 불안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 영역에서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색조와도 관련된다.” 도라 바이에, 『추상예술』, 문고판, 1980, 21쪽(알랭 봉팡(김은정 옮김), 『추상미술』, 한길사, 2000, 15쪽.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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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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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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