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격월간 현대시학 2025년 1•2월호
‘나’를 벗어나려는 존재들의 모험
1. 비대한 자아와의 결별
스티브 테일러Steve Taylor에 의하면, 현재 인류사회에 넘쳐나는 광기와 폭력은 6천 년 전부터 진행된 인류의 ‘타락The Fall’이라는 사건의 산물이다. ‘타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자연/우주/공동체 및 자기 자신과도 분리된 자아ego가 폭발적으로 비대해진 데 따른 인류의 총체적인 퇴보를 뜻한다. 타락의 시대는 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을 특징으로 하는데, 테일러는 지난 6천 년간 “정신분열증과 같은 악몽의 시대”1)를 살아온 인류가 마침내 깨어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 사람의 영적 각성은 곧 인류 의식의 진화이기에, 개개인의 깨어남(영적 수행)은 인류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잃어버린 전체성을 회복하고 멸절의 위기를 극복할 현실적이면서도 근본적인 길이 된다는 것이다.2) 현대인의 영적 수행은 종교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으며, 명상의 대중화 등을 통해 사회‧문화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자아 해체와 의식 정화의 행위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6천 년간 지속된 ‘자아폭발Ego Explosion’과 ‘타락’의 인류 역사는 지금 종말을 향한 ‘붕괴’와 회복을 향한 ‘정화’의 갈림길에 있으며, 먼저 깨어난 사람들은 기형의 비대한 자아를 해체하면서 우주의 전체성 및 인류의 전일성을 다시 살아내고 있다.3)
테일러는 타락의 시대 속에서도 ‘타락 초월 시대’가 열렸으며, 그 근거로 기원전 1천 년경부터 다양한 영적 전통과 종교가 추구한 ‘자아인식의 초월’과 18세기 후반부터 문학이 촉발한 ‘새로운 공감의식의 확산’을 제시한다.4) 테일러의 거대서사를 다소 길게 언급하며 글을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문학과 예술은 ‘타락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를 기록하고 보존하고 애도해 온 인류 공통의 장소이며 장치에 속한다. 둘째, 2000년대 이후 우리 시에 활발하게 나타난 서정적 자아 ‘나’의 권위 해체, 정체성(‘얼굴’과 ‘이름’으로 주로 표상된)과 인칭들의 경계 해체 및 유동적 흐름, 인간과 비인간의 차등적 지위 해제 등은 ‘자아폭발’의 인류사적 사태에서 탈주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우리시에서 시적 자아가 타자들 속으로 스며들고 흩어지며, 유령, 영혼, 천사, 좀비, 흡혈귀, 귀신, 신 등의 실체 없는 존재가 자아 혹은 주체(의 일부)를 대체하고, 언어화할 수 없는 침묵과 미묘한 기류들이 기록되는 현상 등은 시가 자아의 구축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 이탈과 초월의 장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아를 관찰하고 해체하는 과정은 ‘나’에 관해 계속 알아차림awareness을 행하는 명상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명상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해내는”5) 일로, 인류 역사에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 종교를 초월해 활용해 온 자기 수행의 방편이다. 김건영, 김선오, 나금숙의 신작 시집에는 사회․현실에 맞춰 형성되고 자동화된 자아인 ‘나ego’를 벗어나, 근원적인 자아인 ‘나self’를 향해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Daniel Kahneman의 분류에 따르면, 나ego는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에, 나self는 늘 그대로 있는 배경자아에 속한다. “생각, 감정, 경험, 기억, 행위 등은 모두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일종의 소음”으로, 이 모든 소음이 사라진 곳에서 “고요함”으로 떠오르는 배경자아는 “텅 비어 있고 고요하”며 “평온하고 온전하다”.6) 이 글의 초점은 세 시인의 새 시집에 담긴, 경험자아와 기억자아가 일으키는 분란 속에서 배경자아, 즉 텅 빈 본래의 자아를 탈환하기 위한 (무)의식적 노력을 살펴보는 데 있다.
1. ‘나’는 ‘귀신’이 되어가는 중 – 김건영 시집 『널』, 파란, 2024.
김건영의 두 번째 시집 『널』에는 ‘귀신’과 그 유사 존재들인 (잡)신, 괴물, 천사 등이 계속 출몰하며 ‘나’를 분해한다. “신 받드는 모험이 가득”(「혼자」)한 이 시집에서 ‘귀신’은 비(非)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한 유형이거나 가능태이며, 더 나아가 궁극의 모습을 의미한다. 압도적인 유머 감각과 비판의식을 지닌 김건영에게 ‘귀신’은 인간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걸맞은데, 귀신이야말로 오롯이 살아 있고 ‘삶’을 제대로 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 귀신이 살아 있다// (…) //산 사람들은 오답만을 적어내고 귀신들만 삶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아무는 섬/그리고 나선」). 즉 김건영의 ‘귀신’은 “산 사람들”을 대신해 ‘살아 있음’과 ‘사람’의 역할을 대신한다. 살아 있지만 죽은 인간인 ‘나’에게서 죽었는데 아픈, 죽어서도 계속 살아 있는 “남은 사람”을 모은 것이 김건영의 ‘귀신’이다. “살아 있지만 죽었고/죽었는데 아프다/내게 남은 사람을 다 줄게”(「동충하초」).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시인이 된 김건영이 “그의 실존을 걸고” “기어코 귀신으로 거듭난다”7)고 할 때, 김건영은 비인간이나 탈현실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람’의 텅 빈 운동성 자체가 되어 현실 속에 어떻게든 자리를 잡는 중에 있다. 이 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실체가 없으며, 언어화할 수 없다. 없는, 무효의, 가치 없는, 제로의, 존재하지 않는, 특징이 없는 등을 뜻하는 ‘null’(「널」)은 이 ‘없(음으로써 있)는’ 자리를 지칭하고 소환하는 가장 덜 언어화된 언어다. 주문이나 암호에 가까운. 김건영의 ‘null’은 이 세계에 없는 형상으로 존재하는 극히 희박한 형태의 인간이자, 나 아닌 나 혹은 나 이상의 나로 살아가려는 ‘나’인 ‘귀신’의 언어를 표상한다. “현실로부터의 유리감과 유리처럼 투명한 언어 사이에 이격이 없”는 “이 시집은 귀신의 집이다.”(시집 ‘표4’ 중에서) 조강석은 김건영 시의 (비)현실성과 그 언어의 특징을 적확하게 짚어낸다.
김건영은 ‘null’을 ‘널’이라고 한글로도 쓴다. ‘널’은 null이자, ‘너’의 목적격인 ‘너를’의 준말로도 읽힌다. 이 시집 전체에 걸쳐 김건영이 집요하게 서술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 형성된 나-인간을 분해해 나-귀신이 되려는 ‘나’에게 ‘null(없음, 무효)’은 ‘널(너를)’ 향한 지향성과 다른 것일 수 없다. 나를 해체하는 ‘나’는 ‘너’를 이미 포함하고 있으며, 계속 추구하는 중에 있다. 이 점에서 김건영이 여러 텍스트를 경유한 만화방창 스타일의 현란한 언어유희를 통해 교란하는 경계들은 현실의 부정성과 그로부터의 탈주의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유(思惟)와 사유(私有), 전세계(全世界)와 전세계(傳貰界), 제발과 개발, 잡놈과 job놈, 이미 지옥과 Image옥(獄), 김일성과 기밀성 등의 차이가 사라져가는 세계에서 ‘나’와 ‘너’는 각기 자신을 분해하거나 현실에 부정당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로 존재할 수 있고, 서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전철(轉轍)을 밟으며/우리는 서로 미지의 귀신이 된다”(「디지털 미지의 시티」).
김건영에게 귀신-되기는 “Image옥(獄)”(「짐(鴆) – Gym, 그리고 짐」)인 세계에 대한 “나의 무력시위(無力示威)”(「한국문학 망해라」)를, 그러니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한 시인이자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절망과 분노, 비판과 저항을 압축한다. “예언가와 애연가의 사이에서 언어를 빌어 언어로 빌어먹는 무전부주의자(無錢不注意者)”(「차용가」)이며, “모기지(Mortgage)가 길어 슬픈 짐승”(「득음에 이르는 계절」)인 ‘나’에게 ‘귀신’은 인간임을 부정당하며 제발 ‘사람’으로 살고 싶은 희망을 담아 개발한 최후의 존재 방식이다. “나의 장래 희망은 귀신입니다/시인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부모님의 등골을 빨아 최선을 다해 가난해지는 사람이야 도착증에 걸린 귀신이야”(「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 빌리지」). “항복이 가득한 집 나는 귀신을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사후 겸직은 안 되는 겁니까 나는 귀신으로 살고 싶습니다”(「사후의 뱀」). 이 희망과 “믿음으로 간신히 우리가 인간을 견딜” 때, 귀신은 “천사의 얼굴”(「믿음-리듬」)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
김건영에게 귀신-되기는 ‘시-쓰기’의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 시집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나’를 지우고 부정하는 말들은 ‘나’의 축소가 아닌 확장적 해소를 향해 흐르는데, 김건영이 쓴 시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내가 바라는 세계는 만신창이다”(「남의 금산」)라는 시구에서 만신창이는 ‘滿身瘡痍’보다는 수많은 (귀)신들이 모여 다른 세계를 꽃피우는 ‘萬神暢異’로 다가온다. 김건영은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세계에서 형성된 ‘나’를 버리고 비움으로써 그곳에 ‘너’와 ‘우리’가 들어설 자리를 만든다. “이방(異邦)에서 나는 계속 혼자서 같이 있었다 이 방은 나보다 작고 우리보다 크다”(「키메라 루시다」). ‘나’가 ‘우리’보다 큰 현대사회의 현실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방(異邦)에서 수많은 ‘나’들이 “계속 혼자서 같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자아 해체의 존재론적 투쟁을 통해 현대사회에 대한 재구성의 열망을 피력하는 김건영의 시는 각자가 행하는 “탕진”(「Null」)에 가까운 ‘나’의 해체가 그 유일한 방법일 수 있음을 전파한다.
2. “자꾸 내가 되려”는 나, 자동화한 자아에서 벗어나기 - 김선오, 『싱코페이션』, 아시아, 2024.
김선오는 세 번째 시집 『싱코페이션』에서 ‘나’로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을 토로한다. 김선오게 ‘나’라는 자아는 삶의 흐름을 방해하는 성가신 장애물이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은 잉여로 인식된다.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동명의 시의 제목)라고 김선오는 고백하거니와, 이 시집 전반에 걸쳐 그는 거추장스러운 자아 ‘나’를 처리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한다. 김선오는 먼저 ‘나’의 실상을 깊이 들여다보는데, 그가 시집의 핵심 서술어로 삼은 ‘보다’는 단순한 응시보다는 고요한 마음으로 행하는 관조와 통찰의 성격을 띤다.
김선오의 ‘보다’는 ‘명상’의 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시집 전반에 감도는 고요와 침묵, 잔잔하고 느린 목소리로 이어지는 말들, 존재와 사물들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감지하는 장면들은 명상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예컨대, 시 「나는 자꾸 내가 되려고 해서 번거로웠다」에서 ‘나’는 “숨을 느리게 쉬어야 오래 살 수 있어요.”라는 조언을 들으며 “숨 쉬는 법”을 연습하는데, 이는 자신의 들숨과 날숨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는 호흡 명상을 차용한 것이다. “이렇게. 새를 펼쳐보기로 했다”라는 시의 첫 부분에서, ‘내’가 숨을 천천히 쉬면서 “펼쳐보”는 ‘새’는 ‘나’의 내면세계이자 그리로 들어가는 방편의 기능도 겸한다. 알다시피 ‘새’는 김선오의 이전 시집부터 등장한 인간과 동물의 논바이너리(non-binary) 캐릭터의 이름으로, ‘나’의 친밀한 타자와 다른 자아 및 내면세계 등을 함축한 다의적인 상징이다. 김선오는 ‘새’와 ‘나’가 “자신의 시체”를 지닌 존재임을 몇몇 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데, 이 ‘시체’가 ‘새’와 ‘나’가 내적 성찰을 통해 마주한 자아(의 일부)의 죽음/주검임은 말할 것이 없다. 시 「미학적 선택으로서의 경계」에서 김선오는 “새와 나”가 다르면서 같은 존재이며, 기존의 분류 체계에서 벗어난 복수성의 존재(‘They’라고 부를 수 있는)임을 명시한다. “새는 유령도 좀비도 아니었고 그냥 자기 시체를 갖고 있는 새”였고, ‘새’의 “시체는 저 자신이기도 하”며, ‘새’는 “새만의 무인도”에 “자신의 시체를 오백 구쯤 펼쳐놓았을지도 모른다”. 김선오는 사람들이 “새와 나”의 공동 명칭으로 부르는 ‘They’를, 생물학적 성의 논바이너리를 넘어 유령과 좀비, 인간과 비인간,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 사이의 논바이너리”로 규정한다. “살아 있는 몸과 죽어 있는 몸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나’를 성찰하고 정화하려는 자아가 처한 곤경으로, 김선오에게 이는 가장 중요한 시적 과제를 이룬다.
명상의 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도 있다. 시 「아주 조금의 숲」은 명상 속에서 떠오른 기억과 감각, 상상들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 시는 “너는 눈을 감고 있다”라는 문장을 수십 번 반복하면서 ‘너’가 보는 것들을 찬찬히 묘사하다가, “너는 눈을 뜬다. 집은 고요하다.”라고 마무리함으로써 ‘너’의 행위가 명상임을 분명히 한다.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네가 아직 너로 결정되기 이전의 만남들을 본다. (…)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가족들이 살아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본다. (…) 너는 눈을 감고 있다. 너는 너의 과거와 너의 미래가 모두 이 숲에 속해 있음을 본다.” 탄생 이전과 소멸, 삶과 죽음, 과거와 미래 등이 분리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너’는 경험자아나 기억자아가 아닌 배경자아라고 할 수 있다. 김선오의 시에서 명상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물도 인간과 똑같이 명상을 한다. “나무가 의자와 마주한다/자신의 미래를 내려다보듯이// (…) //의자가 나무와 마주한다/자신의 기억을 올려다보듯이”(「밝은 언덕의 물병」).
이 시집에서 김선오는 ‘나’로부터 물러나 자신의 모든 기억과 죽음마저 또렷이 지켜보면서, 길이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시에 밀도 높은 고요가 흐르게 한다.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센박과 여린박의 위치가 바뀌는 당김음을 뜻하는 ‘싱코페이션’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내면, 겉으로 드러나 활개치는 자아와 존재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아의 위치를 계속 역전하는 김선오의 시-명상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의 실상을 바로보고자 하는 자, 명상을 하려는 자는 실은 삶의 고통에 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김선오의 새 시집은 헛된 삶의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허구적 자아의 곤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이게 아니면 달리 무슨 삶이 있겠어.” 이에 덧붙이는 말. “그곳에는 천사가, 한쪽 눈을 감은 천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약하고 어수선한 삶」) “한쪽 눈을 감은 천사”는 텅 빈 고요 자체인 배경자아로 돌아가려는 김선오의 현 상황을 절묘하게 이미지화한다.
3. ‘나’를 덜어낸 만큼 사랑할 수 있어요 - 나금숙,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천년의시작, 2024.
나금숙의 새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나’의 ‘영혼’이다. 영혼을 만물의 본질로 보는 나금숙은 영적인 존재로서 살고 죽고 시를 쓰기를 소망한다. 인간은, 그중에서도 시인은 영(혼의 본)성을 잘 갈무리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해야 할 아름다운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영적 진화를 추구하는 나금숙의 시가 개인의 영적 탐구나 종교적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것은 그가 지닌 열린 영혼관에 기인한다. 나금숙이 보기에 ‘나’의 영혼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우주 전체에 이미-내내 귀속되어 있는 전체성(의 조각)이다. 나금숙이 15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에 “어떤 시적 정신의 여정이 만들어 낸 드라마”8)가 내재하며, 죽음을 통과한 신성의 현현이 그 핵심이라는 탁월한 해석에 조금 부연할 필요가 여기서 생긴다. 나금숙 시에 드리워진 신성은 죽음과도 관련되어 있지만,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겪고 내면화하며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현재진행형이자 영원한 것이며,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지 못해도 이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무조건적 사랑이다. “만물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이 순간”(생일), “더 이상 만나지 못해도 영원히 만나고 있는/호수의 시간”(「사랑 이후의 헤일로」), “육체가 없어도 남는 영혼”과 “사랑”(「자이르」)이 맞이하는 “모든 변신을 사랑하”(무거운 연기)는 ‘나’에게는 “내 사랑 알아보는 것이 생의 전부”(「우연을 담는 컵」)가 된다.
우주의 본성이 사랑이라면, 우주의 개체적 발현인 ‘영혼’의 본성 또한 ‘사랑’이다. 문제는 인류 역사와 인간들의 사회에서 지금처럼 ‘구성된 나’의 존재가 변질과 타락을 겪어온 데 있다. ‘나’ 자신과의 관계도 원만할 수 없다. “나는 아직 나를 사귀지 못했어”(「수선화에게」). 나금숙은 소수부족의 언어와 옛 원주민들의 삶, 야생의 벌판 같은 원시적 자연, 수천수만 년 전 인류의 삶의 장소들, 몇몇 여성과 아이들이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랑의 우주’를 찾아다닌다. “내가 누구야 하고 그대를 부를 때마다 목젖 깊이 차오르는 최초의 감정,/임종 때 사람들이 서로 부르는 간절한 이름,/그 마음으로 천지에 가득한 최초의 감정”(「최초의 감정」). 가졌던 것을 잃어버렸으나 타락하지는 않은 시인은 존재의 열림과 자기의 회복을 강렬히 열망한다. “빛을 뿜고 싶어 안달하는 내 안의 발광체들에게/쉿! 조용히 하라고 했어요/ (…) /모든 나열과 정렬과 수렴과 조합이/뭉게구름처럼 겹쳐/누군가는 이 하지 축제에 오면/존재에 구멍이 뚫려요”(「도취에 대하여」). “어떻게 자신을 만나는가? 라는 질문”(「어떻게 그들은 자신들을 만났는가?」)에 아직 답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금숙이 ‘나’의 존재에 각인된 분리와 차별, 온갖 이념에서 해방되는 출구는 다시 ‘사랑’이다. 시 「장미 도둑」은 연인이 생긴 딸이 엄마에게서 받은 사랑의 “가장 고운 것”을 연인에게 나누어 주러 가는 일을 통해, ‘사랑’이 분리와 차이를 넘어 타자에게 어떻게 퍼져 나가는가를 고도의 미학적인 언어로 노래한다.
내 심장의 가장 고운 것을 우려다가 다른 이의 마음에 물들이러 가는 딸아이의 등을 바라보니, 긴 머리채가 흔들릴 때마다 묵직한 향기의 무게가 철렁 만져집니다.
딸아, 어떤 무거움도 생글생글한 미소로 매다는 법을 배우는 너의 각진 쇄골에 드리우는 생이 환하구나. 다른 이를 향하는 저 붉은 빛은 내가 저를 사랑하던 붉은 빛과 어찌어찌 비슷하여,
드높던 햇살이 잠잠히 졸아드는 해거름, 노을 속에 긴 머리채 흔들며 비탈을 내려가는 딸의 등 뒤로 반짝― 불이 켜집니다. 황홀합니다.
- 「장미 도둑」 부분
어둡고 메마른 삶에 “반짝―” 등불을 켜 주는 것은 사랑이라고 나금숙은 황홀한 기쁨 속에 증언한다. 모든 존재가 소멸하고 변화한다는 사실은 각자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임을, 사랑이 닿을 수 없는 장소나 존재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러니 ‘나’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다른 존재로 계속 몸을 바꾸어갈 것이고, 그러면서 계속 사랑할 것이다. 나금숙은 ‘나’에게서 나를 덜어낸 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를 덜어낸 자리는 내 존재를 여는 구멍이 되고 모르는 이들에게 끝없이 전해질 사랑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기쁘게 깨닫게 한다. 말하자면, ‘자아폭발’의 뇌관을 제거할 비법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또한 진실을. ‘장미 도둑’을 만나면 그가 켠 불을 훔쳐와 다시 누군가에게 나눌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 1) 스티브 테일러, 우태영 옮김, 『자아폭발』, 서스테인, 2024, 9쪽.
- 2) 위의 책, 7~397쪽 참조.
- 3) 한편, 모든 인류가 타락했던 것은 아니다. 5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원시인들, 즉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아시아 등의 원주민들은 ‘타락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지금도 아주 작은 소수인종으로 남아 있다.(위의 책, 77~124쪽 참조)
- 4) 위의 책, 325~389쪽 참조.
- 5) 김주환, 『내면소통』, 인플루엔셜, 2023, 18쪽.
- 6) 카너먼에 의하면, 자아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현재의 순간을 경험하는 ‘경험자아’, 경험한 일을 회상하면서 계속 재구성하는 ‘기억자아’, “인식의 주체이며 경험자아와 기억자아를 늘 알아차리는 존재”인 ‘배경자아’이다. - 위의 책, 17~18쪽 참조.
- 7) 김동진 해설, 「Null라와 시름 한 우리가 자고 니러 우짖더라도」, 김건영 시집 『널』, 파란, 2024, 145쪽.
- 8) 이성혁 해설, 「시, 죽음의 신성이 현현하는 장소」, 나금숙 시집 『사과나무 아래서 그대는 나를 깨웠네』, 천년의시작, 2024,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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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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