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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비평 아카이브

  • 계간 문학과사회 | 2025년 봄호(제149호)

What is Love :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 /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봄날의책, 2024)

최다영 문학평론

2022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공저로 한강을 읽는다, 비평포럼이 있다.

What is Love1)

유선혜,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문학과지성사, 2024)

백인경, 『멸종이 확정된 동물』(봄날의책, 2024)


너도 사랑해버리지 않게 조심해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인식인가, 관습(적 반응)인가, 선언인가, 계약인가. 물론 층위가 다르므로 모두 정답일 것이다. 지배적인 미디어 문법의 경우, 일련의 반응을 거쳐 어떠한 상태의 지속성을 경험함으로써 인식에 도달한 뒤, 계약으로써 배타적 관계를 결단한다. 서로를 익명의 군중이 아니라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존재로서 존중하기를 합의하기에, 어느 때든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기대를 품고 요구할 수 있는 상대로 자신을 설정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인식에 그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그저 계약만으로 사랑을 시작하기도 한다. 혹은 암묵적인 합의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이미 사랑의 수행을 한다. 그런가 하면 우정에서의 친밀감과 로맨스의 구분이 쉽지 않은 무연정자는 특권화되는 사랑의 위계를 거부하며, 모노가미 사랑으로 진입하더라도 이는 상대가 요청하는 책임감의 결심에 가깝다. 성적 접촉을 (식으면 식었지) 사랑의 필수 요소나 심화된 커뮤니케이션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무성애자에게 파트너십의 약속은 섹슈얼한 행위의 전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 폴리아모리에게 사랑은 모노가미로 상상되지 않거나 그러한 관계가 다중화된다. 자신의 상태와 반응에 사랑이라는 명명을 붙이길 거부하는 이들도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

 그간 우리 비평은 규범적 인식 틀에서 사랑으로 명명되지 않았던 사랑들, 승인과 무관하게 이미 자유롭고 활발히 존재하고 있던 퀴어한 사랑들을 가시화함으로써 우리 모두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음을 세밀하게 포착해왔다. 동시에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급진적인 재고를 요구하는 사랑의 퀴어함에도 주목하여 유의미한 성취를 축적해왔다. 이렇듯 그간 비평에서 ‘퀴어한’ 사랑들과 사랑의 ‘퀴어함’을 적절히 자리매김해왔다면, 이처럼 무수한 사랑이라는 포스트잇 아래 각자 전제하는 사랑이 어떠한 함의와 전제를 내포하고 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 다채롭게 정의되는 다른 사랑들에 대한 사전을 우리 안에 더 많이 확보하여 획일화되지 않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상상 가능한 사랑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유성애의 규범화를 비판하고 성적인 것을 주변화하고자 하는 무성애적 관점으로 이전의 문학작품들을 다시 읽을 수도 있고, ‘전체’로서의 개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데이터베이스 섹슈얼리티와 같이 사랑의 대상을 재고할 수도 있다.

 사랑이 시의 첫 생애부터 함께한 시어일지라도, 언젠가부터 시집을 펼치면 사랑과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어가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동원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랜 의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사랑’을 자주 말하는 시인들에게 사랑은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간혹 사랑이 봉합을 위한 기능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는 사랑이라는 시어의 어떠함을 신뢰하는 걸까. 

 그러한 작업의 출발지로서 이 글은 사랑이라는 시어가 자주 발견되는 최근의 두 시집 속 사랑의 양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 시집 모두 사랑에 대한 독특한 함의를 보여주는데, 유선혜 시집의 경우 가장 동시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눈여겨봐야 할 시집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들은 모두 ‘멸종’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공유하고 있어 최근 포스트아포칼립스 시들이 자주 발견되거나 멸종, 멸망 등의 시어가 잦다는 진단5)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들 시에서 이러한 시대적 정조를 함께 포착할 수도 있을까. 백인경 시집의 경우 표제작 외에 ‘멸종’이 등장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동에서도 다소 멀어 보이지만, 종말과도 같은 끝의 순간과 침범에 대한 인식이 사랑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들이 그리는 사랑의 지형도를 차례로 따라가보자.


큐트니스 매니페스토 The Cuteness Manifesto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해, 라고 발음하는 수밖에 없다고.

- 「마녀와 로봇의 사랑」 부분


 사랑을 모른다면서 왜 사랑을 말해야만 하는 걸까. 그에 앞서 유선혜 시의 입구라 할 수 있는 구멍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구멍」은 각 존재의 “비물질적인 부분”에 있는 구멍을 상상한다.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의 / 타고난 결핍 / 타고난 허무 / 타고난 무의미 / 타고난 균열 / 타고난 어긋남”이 구멍이라 칭해지는데,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으로 인해 존재들 간에는 강한 인력이 발생한다. 이러한 구멍의 명령은 “빈 곳을 채워 넣으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시집에는 허기에 패배하여 일단 “뭐든 입에 넣고 보는”(「괄호」) 장면이 빈번히 등장한다. 구멍에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슬픔에 의해 상시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것인데, 이로 인한 과식은 다시 슬픔을 형성하고 슬픔은 또다시 허기와 과식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형성된다.6) 이들은 “폭식과 거식의 배턴 터치”를 멈출 수 없다. “자살 기도 직전에”도 “짜장면 (먹어줘)”(「집단 상담」)를 외친다.

 한편 구멍은 몸에 난 상처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구멍은 화자들 대부분이 일상을 잘 챙기지 못하고 방치하는 점과 연관된다. 가령 「괄호」에서 “괄호 쳐버린”다는 건 시급한 일을 당장 해결하지 않고 미루는 것을 뜻하는데, 정작 괄호를 쳐야 하는 일이 “과도한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일상을 괄호 친 결과 머리에 딱지가 지고 그걸 뜯으니 구멍이 난다. 딱지가 생길 시간조차 못 참고 뜯어버리는 모습은 허기를 못 참고 음식을 퍼먹던 모습과 겹쳐진다. 「악의 문제」에서도 ‘나’의 방은 온갖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데 이 시집에서 방이나 행성은 화자의 확장된 몸이자 내면을 포함하므로 엉망진창인 방의 모습은 함부로 다뤄지고 방치되는 것이 생활 영역에 한정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자주 일상의 방법을 잊어버리”(「흑방의 메리」)는 이들은 “겨우 밥을 먹고 사랑을 하고 잠을 자”(「사이비 리듬」)는 일조차 버겁다. 회피가 습관이 되어 관계에서의 미묘한 감정적 균열마저 방치해버린다(「아이」). 이처럼 망가진 일상을 방치하여 스스로를 상처 입히고는 아물지도 못하게 계속 헤집는 동안 구멍은 자꾸만 커져간다.

 먹어봤자 슬퍼지고 뜯어봤자 커지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당장의 슬픔과 욕구에 복종하는 화자들. 이는 만성적 우울감의 한 증상인 걸까[“나는 단지 우울하다고만 했다”(「반납 예정일」)]. 그러나 이를 단순히 불행에 길들여진 병리적 증상으로만 진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그보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헤집고 뜯어버리는 태도에 다시 주목해보자. 이 화자들은 조금 다치거나 망가질수록 오히려 “안심”(「물어뜯기」)한다. 얼마간 불행해야 안정감을 느끼는 이들은 나아가 일부러 상처를 키워서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에 마음을 쏟아 사랑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제 상처를 귀여워하며 반려 구멍 삼아 키우는 것이다[“제가 키우는 귀여운 구멍이랍니다”(「괄호」)].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에서도 ‘나’는 종양을 침입자나 오염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더러운 자신의 몸에서 이렇게 “귀여운” 덩어리가 자라났다는 것에 놀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며, 악의는 없었다며 종양을 변호하기도 한다. 왜 제 상처를 귀여워하고 상처에 사랑을 퍼붓고자 하는 걸까.

 여기서 귀엽지 않은 것들마저 열렬히 귀여워하는 유선혜만의 독특한 사랑의 양상이 발견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귀여움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당대의 중요한 감수성을 함께 암시한다. 이때 귀여움이란 대상을 장악 가능한 형태로 데포르메 모에화하는 심리적 안정화 기제나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원리에 한정되지 않으며, 그보다는 오래 지속되는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일종의 충동이자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귀여움의 핵심은 “모든 진지한 것이 귀여움으로 녹아내리게 하는 데”7) 있다. “목적 없는 표면들로 욕망을 분산시킴으로써”8) 감당도 통제도 안 되는 일상적 위기에 심각성을 소거해 어떻게든 수용 가능한 형태로 변형하는 것이다. 가령 남자에게 뺨을 맞는 순간 배경으로 등장하는 “<짱구는 못말려>”(「우리는 못 말려」), “이건 내 폐예요 / 조금 지저분하죠? / 제가 골초라......”(「임무」) 너스레를 떠는 모습 등은 다분히 전략적으로 진지함을 사소하게 만드는 데 복무한다.

 그런데 이러한 귀여움은 종말의 정동이 팽배한 오늘날, 만성적으로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생존의 기술과 연관된다.9)


강아지 고양이가 귀여운 이유가 뭔지 아니?

귀엽지 않은 개체는 인간이 다 죽여버렸기 때문이란다.

[…]


창밖에는 모텔을 나오는 연인들의 풍경뿐입니다. 그러니까 생존은 아

름다운 것이 아니다, 그게 그때 생각난 문장. 애인은 당분이 듬뿍 들

어간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귀여운 컵에 담긴 푸딩과

요거트를 퍼 먹을 것입니다. 나와 애인은 발암물질과 인공감미료도 아

주 많이 먹을 것입니다.

- 「원룸에서 추는 춤」 부분


 귀엽지 않으면 죽는 건 비단 동물들에만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귀여워하기’를 넘어 자신을 사랑스러운 소비 상품으로 만드는 ‘귀여워지기’ 또한 생존 본능에 근거한 행동으로서 중요하게 포착되기 때문이다.10) “자신의 수동성을 극복하는 데 관심이 없는”11) 것처럼 보이고 “불가피한 것에 자발적으로 항복”12)을 미리 해버리는 유선혜의 화자들은 전 지구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귀여움이 동시대적 감각이 된 현실을 시사한다.

 한편 구멍은 개인의 가장 깊은 심연이기 때문에 숨겨야 할 치부이기도 함을 유선혜의 화자들은 학습을 거쳐 알고 있다. 제 속을 보여주고 싶다 못해 날것의 장기 그대로를 꺼내 보이고 싶은 과잉 고백 욕망의 시기를 지나, 이제 속내를 적당히만 보여주는 ‘나’는 누군가 자신의 구멍을 들여다본다면 어김없이 떠나가버릴 것임을, “어떤 풍경은 흐릴수록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다. 그렇기에 사랑은 일부러 흐리게 보는 “착각”으로 정의된다(「임무」). 서로의 심연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저 아름답다고 일부러 착각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착각까지 해가면서 사랑은 왜 굳이 해야만 하는 ‘임무’가 되는 걸까.

 무엇보다도 이 사랑은 끝을 모르(게 되)는 마음으로서, 예정된 종말을 망각하고 현실을 낙관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는다. 미래를 대비하기보다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 넘어지”(「빈맥」)는 모습에서 암시되듯 사랑은 예정된 결말을 잊어버리게 함으로써 자꾸만 미래를 기약하게 한다. “손쉽게 꿈을 꾸고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는 아이들을 낳고 싶어”(「지질시대」) 하도록, “끝도 모르면서 번식하”(「뼈의 음악」)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사랑은 양가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사랑은 ‘이별’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어떤 무모함으로써 종말의 두려움을 회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자, 그렇기에 현실적인 문제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외면하도록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종의 도피적 속성을 지닌 사랑은 일상을 방치하여 구멍을 커지게 하던 모습과 겹쳐진다. 구멍을 메우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타인을 구겨 넣”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고집스러운 빈자리”(「구멍」)가 결코 메워지지 않는 건 이러한 연유이다. 사랑이 구멍을 메울 거라 ‘착각’하지만 실상 구멍은 나날이 커지고 그에 따라 더욱 강하게 서로를 빨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선혜의 시에서 사랑은 멸종을 잊게 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멸종을 동반한다. 앞서 각 존재가 본래적으로 가진 구멍의 끌어당기는 속성 또한 필연적인 충돌과 파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멸종으로 이어진다(「아쿠아리움」, 「충돌에 관한 사고실험」).13) 이때 운석은 사랑이라는 회피-방치로 인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구멍의 파괴성을 상징한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에서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다가오는 “운석”이 단지 이별의 기척이나 동시대 종말론적 위기의 유비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사랑과 멸종 사이의 독특한 인과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린다”는 언급에서 암시되듯, 사랑과 멸종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무한한 순환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했”다는 언급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생존의 역사”, 멸종하여 사랑하고 다시 멸종하는 “그런 이상한 되풀이”(「어떤 마음을 가진 공룡이」)는 사랑과 멸종의 순환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유선혜의 화자들은 늘 과잉 진실성 욕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에,14) 심연을 숨기고서만 가능한 사랑의 기만을 끝내 견딜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유선혜 시의 특이성이 발견된다. 사랑하긴 하는데 사랑해서 버겁고 버거워서 해치워버리고 싶다. 그래서 차라리 스스로 사랑을 망쳐버리기를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던 모든 사람을 끝으로 몰아넣는 신”이 되기를 자처하여 “내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폭발시키는 것이다(「폭탄이 불량이 아니라는 사실은」). 같은 맥락에서 “생존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원룸에서 추는 춤」)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니, 그렇기에 번식은 징그러운 일이 된다.


녹차가 든 잔이 넘어지고 온 집 안으로 물기가 흘러 들어간다. 원래부터 축축했는지 그저 잔을 넘어뜨린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온통 젖어버린 건지 알 수 없어지고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 유성생식은 그런 징그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낳고, 태어나고, 자라고, 나는 변기 옆에 쪼그려 앉아 타일 사이사이의 검은 자국들을 박박 문질러 닦는다. 

너는 자꾸만 발자국을 남기고 곰팡이는 자라나고 우리의 미래는 끈끈하게 퍼져서 지워지지 않는다. // 그래,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 부분


 이 시는 전반에 드리운 가난으로 말미암아 나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고 사랑의 유지마저 확답할 수 없는 청춘의 무기력한 초상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보다 주목되는 건 “낳고, 태어나고, 자라”는 일의 징그러움에 대한 감각이다. “습기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곰팡이는 다소 더러운 환경에서 안심을 느끼는, 그리고 그런 자신을 더럽게 여기는 유선혜 화자들과 유비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바람은 “세상의 시세를 감당할 수 없”고 “우리의 미래는 뛰어놀 거실이 없다”는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체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곰팡이처럼 하찮은 존재로서 자신의 유성생식이 “징그러운” 것이라는 거부감 또한 드러내는 것이다. 번식 행위를 통해 비참한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음은 물론, 외형상 아름답지 않은 벌레를 사랑하여 벌레의 알을 배고 싶다던 강박적인 진술과 마찬가지로(「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겹고 징그럽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큐트 가속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번식 가능성의 제로 지점에 다가가”15)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끝내버리고자 하는 충동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법칙에 따르면 멸종은 다시 사랑을 형성하는 것이 되므로, 사랑은 제대로 끝날 수도 없다. “어떤 심각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 상승”이자 “끝없이 미완성 상태로 남는 만성적인 애틋함의 연장”16)만이 이어진다. 차라리 모든 게 끝나버려 태어나기 이전으로 “퇴행”17)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절대 극점에 도달하지는 않으면서 예정된 끝을 잘게 쪼개 끝을 미룰 뿐이라는 무력감이 시집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이 시집에서 무언가를 쪼개거나 미분하는 이미지가 빈번한 이유도 이와 같다.18) 그러나 이들이 다만 무기력한 되풀이만을 그리는 건 아니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건 멸종을 미루며 “삶의 입자를 쪼개”(「여자친구」)는 데 골몰하는 일이 아니라 박자를 못 맞추더라도 자유롭게 추는 “춤”이다(「제2외국어」, 「줌바 버전」). 서툴더라도 춤을 추며 무한 순환의 리듬과는 다른 리듬을 만들어보려는 수행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멸종의 댄스」에서 “과거로 가자, [...] 사라진 동물들과 함께, 덜덜 떨며 문명 이전의 춤을 추자” 권유하는 건 “과거”와 같은 모습일 ‘미래’의 멸종 속에서 이미 사라진 동물들과 평등하게 지구 “퇴장”을 맞을 것에 대한 유쾌한 지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수(水)속성 마음


 유선혜의 화자들이 삶의 기본적인 생활 영역들을 방치하고 허기와 같은 기본적인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백인경의 화자들은 인내심도 강하고 바른 자세와 바른 정신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돈을 주고서라도 글씨를 교정하고 싶”(「악필」)다는 단정함에 대한 바람은 유선혜의 시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산다는 건 어쩌면 / 일종의 유행성 허세에 불과”(「OOTD」)함을 알면서도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백인경의 시에는 사물이 단단하게 버티고 선 모습이 자주 발견되는데, 몸 또한 건축물과 같이 중심과 균형을 지키려고 애쓰는 자세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견고한 상태가 한순간 무너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경계가 무너져 침범당하고 마는 장면 또한 어김없이 이어진다. “풍경의 영향을 받지 않기로 결심”하지만 “모래사장의 테두리를 흐트러트리는 파도”(「운동성」)에 의해 결국 발끝이 젖어버리고, “주먹 속에 표정을 가”두지만 “모래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OOTD」)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어렵게 유지해온 최선도 예외는 아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악필」)는 진술은 실상 최선을 다하는 삶에 지쳐가고 있음을 암시하며, “평생 맛있어지는 일에만 골몰해온 것 같은 / 한 컵의 최선”인 파르페는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면서 / [......] / 울기 시작”한 ‘너’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온 힘을 다해 쌓은 “정직한” 노력을 짐작하게 한다(「마스킹」). 어쩌면 “바람이 불어도 흐트러지지 않는 배열과 // 동시에 / 볼링 핀처럼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는 / 그런 힘”(「독설가」)은 백인경 시의 중심을 이루는 이미지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이 최선을 다하는 방식에는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일이 수반된다. “최선을 다해 낯설게 바라보다가 / 무뎌져버린 낮들이 있지?”(「백일장 키즈」) 묻는 건 마음에 흠집을 내가면서 감정에 무딘 사람이 되도록 자신을 단련시키는 시집 속 인물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강하게 만들려고 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백인경에게 마음은 쉽게 짓무르며 망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세한 접촉에도 금방 뒤섞이고 상해버리는 성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여 기어코 상처를 주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마음은 한없이 취약한 수(水)속성으로 그려진다. 파문을 넓게 퍼뜨리거나 축축해지는 모습, 불어서 퉁퉁 부풀어버리는 것까지 모두 물의 속성에 기인한다. 아이들마저도 눈물 없는 “바삭한 슬픔”(「파우더형 인간」)이 필요해서 울지 않도록 마음을 훈련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껍질의 채도가 높아질수록 상하기 쉬운 마음이”(「크로마키」) 되어버리는 것 또한 섞일수록 상해버리는 마음의 성질을 암시한다.

 이러한 무른 마음을 예기치 못한 침범이나 뒤섞임으로부터 보호하기라도 하듯, 이 시집에는 벽이나 문, 테두리가 경계를 구획하는 것으로서 중요하게 활용된다. 여장에 대한 소망을 늘 품고 있었던 ‘그’의 “옷장”에 “가득 찬 레이스 속옷”(「캐시어스 클레이, 자주색 비키니 옷장」)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은 마음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문 안쪽에 걸어 잠가 보호하는 양상을 대표한다. 「유기」에서는 “마음이 / 밖으로 튀어나와버릴까 봐” 겁이 나 “현관문을” 언제나 “극도로 조심스럽”게 여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음을 문 안에 소중히 숨겨놓으며 산책을 나갈 때도 혹여나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쥔 주먹”으로 “너무 많은 목줄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쪽으로 오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 [......] // 물가에 벗어둔 낯선 신발”(「악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나, “우리 반 아닌 애들 다 나가라고!”(「이동 수업」) 소리치는 장면은 완고하게 세워둔 마음의 벽이 외부인에 의해 침입당하며 돌연 그 분리가 무너질 것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그러한 이들이 침범에 대비하여 마음을 단련시키는 양상은 자주 육체단련이 되기도 하다.


턱과 목 사이에 / 방울토마토 하나를 끼운 듯한 자세 / 그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 그 상태를 의식적으로 유지하세요 // 선생님은 그러고선 늘 사라진다 // [......] // 창가 화분 위로 연두색 방울토마토 한 알이 안간힘을 다해 붉어지는 동안 /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덩그러니 살아 숨 쉬는 일에 열중한다 // 언제나 갈비뼈를 닫는다는 느낌으로 호흡하세요 / 또다시 마음을 다친다면 /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한 탓일 테지 / 고개를 끄덕이면 턱 아래 방울토마토가 으깨질 것 같다 // [......] // 오늘 내일은 조금 뻐근할 거예요 /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좋은 상처가 필요하거든요 /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이 말이 듣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것이지만 // 의심이 쌓일수록 베개가 높아졌다 / 밤새 축축한 믿음이 목 소매를 물들였다

- 「올바른 자세」 부분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열중”하는 신체 변화는 방울토마토의 익어감으로 전이된다. 이때 흥미로운 건 “갈비뼈를 제대로 닫지 못”하면 “마음을 다친다”는 인과 관계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을 단련하는 동안 도리어 몸에 상처가 나는데, 이 “좋은 상처”는 다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써도 결국 어딘가는 다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다쳤”음을 알게 된 ‘나’는 원했던 답을 얻었음에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자는 동안 베개가 “축축”해진 건 기껏 꿈속에 가둬놓은 노력이 무색하게 수속성 슬픔이 꿈을 비집고 흘러나올 정도로 화자가 깊이 상처받았음을 알게 한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몸이 다쳐야 하는 이 법칙은 다른 수록시들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 비단 운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혹사시켜가며 마음을 지켜내고자 하는 분투가 시집 전반에 이어지는 것이다. 「이글루」는 마음의 성벽을 오래 지켜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데, 벽에 기대면 자기 체온에 벽이 녹을까 봐 이글루의 가운데에 가서 앉는다. 어딘가에 기대지 못할지언정 그게 ‘나’에게는 안전하기 때문이다. “열이 펄펄 끓도록 앓은 다음엔 / 벽이 더 단단해졌다”는 언급 또한 몸이 아플수록 마음이 단련되는 이 세계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마음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과 그러한 마음의 성벽을 기어코 열어젖히기 위한 다른 최선이 만난다면 어떨까. 마음과 마음의 만남 또한 문이라는 경계를 매개로 알레고리를 그린다. 「가정식 희망」에는 식당으로 착각하고 문을 열라며 난동을 피우다가 대기 번호를 받아 들고 “열리지 않을 문 밖에서 / 언제까지고 서성”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가정식 요리, 즉 문 너머 누군가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노력을 증명받는 것이다. “의지의 발현이 중요했고 / 노력했다는 게 중요했고 /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증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제스처에 중독된 듯한 사람들이 늘어가며 문밖의 줄이 길어질수록 “잘못 보관해 다 버리게 생긴 희망들이 쌓여”간다. 문을 열라고 요구하는 쪽도, 갑작스러운 침입에 대응하는 쪽도 모두 각자의 최선을 다해 원하는 것을 충족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러한 안간힘으로 애써 유지하던 경계는 결국 침범당해 무너지고 만다. 아무리 몸을 훈련해서 마음을 잘 닫아두더라도 도리 없이 마음을 다치고야 마는 것 또한 이 시집에서 빈번히 그려지는 양상이다. “담장 밖에서 별안간 넘쳐 온 불편함”(「담론 [fence]」), “마음의 균열”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이스트」) 쓰는 노력 등은 단단히 잠가두었던 마음이 결국 다른 마음과 뒤섞여 부패해버리고 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벽이나 문으로 마음의 안팎을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가 결국 그 경계가 무너지고 마는 건 백인경이 그리는 사랑의 양상과도 긴밀히 이어진다. 우선 백인경에게 사랑은 “댐의 안팎처럼 문을 가운데 두고 / 서로 다른 습도에서 / 같은 자세로 기대앉는” 것으로 정의된다. 완고한 경계인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공간을 보호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수문이 열리는 순간은 허가 없이 찾아”오고야 만다(「아가미」). 이와 유사하게 「몰입」에서는 화자가 기계 소리의 방해로부터 벗어나 생각을 계속하기 위해 내면의 내밀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구덩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림자의 윤곽이 상해갈수록 / 생각의 테두리가 단단해”짐에 따라 화자는 “더 이상 /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다. 몸이 구덩이와 섞일수록 내면에 둘렀던 경계가 더욱 단단해져 내면의 주인인 ‘나’조차도 입장을 거부당하는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안팎 분리라는 자신의 방식을 고수할수록 그 사랑이 불가능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랑의 의미가 전환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랑은 그토록 두려워하던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인 뒤에야 가능해지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얼렁뚱땅 오렌지」에서는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져서 낯설어지지 않는 상태를 사랑이라 보는 것 같다. 일부러 스스로를 상처 입혀 마음을 무뎌지게 하는 연마로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뒤섞임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무뎌짐’이 ‘익숙함’으로 긍정됨으로써 사랑이라 재명명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또한 마음이 수속성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애착의 형태」에서 화자가 ‘당신’의 형태에 자신을 꼭 맞추고서 그의 “늑골의 곡선을 베”낄 수 있게 되는 것도, 맞닿는 대상의 형태에 따라 있는 그대로 상대를 수용하고 자유자재로 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물의 성질에 근거할 것이다.

 「마음의 준비」에는 함께 살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강아지를 돌보고 사랑할 때의 생활 습관들을 이제 더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내용이 나열된다. 이어 무너진 마음이 건물의 파괴에 빗대어지는데, 단순히 강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을 허물”어버리는 것을 넘어 집-마음을 구성했던 건축자재들마저 모조리 삼킬 거라 말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랑의 양상은, 사랑하는 대상을 문 안 자신의 공간에 들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우리’의 공간으로 재구성하고 ‘우리’의 루틴을 만들어 마음을 동기화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자랄수록 내 집이 폐허가”(「유기」) 된다는 건 사랑의 깊이를 누적시키는 것이 시간의 흐름이므로 종말 또한 예정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기에 사랑이 끝나면 그저 그 대상을 제 마음의 안에서 밖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리’를 이루었던 공간으로서의 마음이 모조리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드러난다. 사랑의 종말에 의해 파괴되는 건 사랑과 함께 변형되고 재구성된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치명적인 것이 사랑이기에 백인경의 화자들은 마음을 열어보이는 일을 극도로 경계하고 마음의 벽을 견고히 지켜내고자 하는 걸까. 

 이처럼 백인경에게 사랑은 불가침의 영역에 상대를 겨우 맞아들여 상처의 주고받음을 허용하고자 하는 결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랑에 의해 새롭게 뒤섞일 마음을 향해 조심스럽게 진입했을 때, 안간힘을 다해 쥐고 있던 주먹이 풀리고 턱 밑에서 방울토마토가 톡 으깨짐으로써 다른 풍경의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 1) 이하 본문에서 유선혜 시집의 괄호가 사랑하는 구멍은 「괄호」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여자친구」로, 「그게 우리의 임무지」는 「임무」로, 「우리의 아이는 혼자서 낳고 싶다」는 「아이」로, 「구멍의 존재론」은 「구멍」으로 표기한다.
  • 2) 유수연, 「사랑은 잊히고 근육은 남는다」,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2024.
  • 3) 에밀리 정민 윤, 「나의 첫 이별 후 아빠는 내게 최초의 이메일을 보냈다」,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2024년 겨울호.
  • 4) 에밀리 정민 윤, 같은 시.
  • 5) 어쩌면 이는 시대적 위기와 긴밀히 얽힌 현상으로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련해 사라 아메드에 의해 다루어지는 사랑의 정치학이 주목된다(사라 아메드, 6장 '사랑의 이름으로', 『감정의 문화정치: 감정은 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시우 옮김, 오월의봄, 2023).
  • 6) 슬픔과 허기의 상관관계는 「일란성 슬픔 쌍둥이 슬픔」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허기는 슬픔과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괴물”과도 같은 “허기”를 달래고자 밤에 라면을 먹어도 오히려 “두 배로 불어나는 슬픔을 겪”는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허기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 구멍과 같다.
  • 7) 한편 인아영은 '귀여움'이 무력하고 연약한 것에 대한 욕망이자 수동 공격이라는 양가성을 지니며, 무가치해 보이는 것들을 교환 논리로부터 보호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제동을 거는 비판적인 수행"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시스템에 대한 순응이자 저항으로서 귀여움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인아영,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은 아름답다: 19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미적인 지도」, 『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 pp. 114~15).
  • 8) Amy Ireland·Maya B. Kronic, 『Cute Accelerationism』, Urbanomic, 2024, p.4. 논외로, 고선경과 유선혜를 함께 주목할 때 동시대 시에 나타나는 귀여움에 대해 더욱 다양한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 9) Ibid., p. 13.
  • 10) "특정한 자기 인식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귀여움"은 "자신을 대상으로 보고, 좋아하고, 공유하는 것을 포함한다"(Ibid., p. 31). 그리고 이는 "소비와 자기 소비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Ibid., p. 20)와 맞닿는다. 김홍중은 “스스로를 보살핌의 대상으로 유지"시키고 "영원한 유아에 머무르"며 양육되기를 자처하는 귀여움 지향이 민주화 이후의 생명권력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김홍중,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귀여움」,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09, p. 69). 이러한 2000년대적 "존재론적 유아들"(같은 책, p. 71)로 포섭되는 것을 넘어, 오늘날에는 자기 소비로써 귀여움의 조합들을 끊임없이 갈아 끼우는 양상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 11) Ibid., p. 5.
  • 12) Ibid., p. 6.
  • 13) 그런데 이러한 충돌과 파괴는 한편으로 내면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된다. 이 세계관의 법칙에 따르면 "내면이 멸종한 행성을 / 불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외로움이 있어"서 몸과 몸이라는 물질의 맞부딪침은 외로움들의 "충돌"을 발생시키고 서로에게 "스며들어 번지"(「충돌에 관한 사고실험」)게 한다. 그렇기에 유선혜 시에서 내면은 폐쇄적이거나 단일성에 갇히지 않는 내면이라 할 수 있다. 「마녀와 로봇의 사랑」에서는 방이나 행성, "껍데기" 안에 있는 "진짜 내가" 내면에 해당하는데, '너'의 "심장을 주물럭거리는" "누군가"(「Nirvana」)는 이미 무수한 타인과 섞인 '너'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너'가 자신의 내면을 견뎌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것이 타인의 외로움에 침범된 내면이기 때문이다.
  • 14) 이 시집에서 허기와 구토감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그려지는 이유는 유선혜의 화자들이 허기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과도하게 진실하고자 하는 충동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토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죠?" 묻는 이들은 "기어이 써버리"(「반납 예정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 15) Ibid., p. 4.
  • 16) Ibid., p. 14.
  • 17) Ibid., p. 5. "그녀는 전생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우리로는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여자친구」).
  • 18) "영에 한없이 다가가지만 절대 영이 될 수 없는 / 무한히 가까워지지만 도착하지는 못하는 / 리미트 영의 마음 // 끝으로 간다는 것에 대해 / 그러나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영으로 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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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희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창비, 2024)

아마도 2020년대의 가장 자주적인 평론집 내 박사논문의 주제는 1970년대 민족문학이다. 내가 논문 주제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군부독재 시절 민족문학은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지식인들이 민족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문학인들 자신도 진보적 사회운동에 앞장서던 시절이었다. 만약 앞의 두 문장이 옳다면 민족문학에 대한 복기는 문학사 서술에 기여할 뿐 아니라 문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한 예비적 검토로서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한 연구자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970년대 민족문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논문이라든가 평론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곱씹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1980년대~1990년대 문학에 관한 연구는 계속 갱신되는 반면, 1970년대 민족문학에 관한 논의는 정체됐다는 느낌도 든다. 예컨대 황석영의 「객지」의 미학이나 지향점에 대한 단독 논문은 지금까지도 전무하다. 어쨌든 ‘민족문학’에 대한 논의가 사산된 현재의 학계와 문단은 보고 있자면, ‘민족문학’이 1970~80년대 무렵 인기를 끌다가 종결된 ‘구호’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민족문학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은 문학의 사회적 응전력이 약해졌다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도 줄곧 문학은 사회문제에 개입해왔다. 다만 사회의 진보를 염원하는 작가와 독자들도 민족문학에 무관심하다. 따라서 ‘민족문학’은 한국의 진보적 문학운동을 통칭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문학관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민족문학 운동을 주도했던 이론가로 손꼽혔던 백낙청, 최원식, 염무웅은 여전히 꽤 많은 글을 쓰고 있다. 민족문학 담론이 사산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들의 글은 낯선 느낌을 자아내는데, 그래서 되려 ‘참신’하게 읽히는 구석도 있다. 염무웅 평론가의 이번 평론집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도 그렇다. 이 책은 여러모로 최근 문학장의 경향을 벗어나 있다. 지난 10년 동안 문단에서 문학과 현실을 연결하는 담론으로 가장 원용된 것은 페미니즘일 것인데, 이번 염무웅의 책에 「고은 문학의 역사적 의미에 대하여」가 수록됐다는 사실은 이 책이 시대적 흐름과 맞지 않음을 얼마간 방증한다. 물론 이 글은 고은 시인의 논쟁적 사항에 대한 평가나 변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염무웅 평론가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는 문학인을 다뤄낸 것에 불과하리라.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 또한 유사하게 볼 수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김지하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 이후에도 줄곧 출중한 작품을 쓴 것으로 인정받는다. 허나 그의 말년 행적은 뭇사람들의 질타를 받았고, 특히 김지하는 『창작과 비평』(를 대표하는 평론가로서의 백낙청)을 자극적인 언어로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염무웅의 입장에서는 서운함과 씁쓸함을 느꼈을 법도 한데, 이번 평론집에 수록된 글 「시인 김지하가 이룩한 문학적 성과와 남긴 유산」은 그런 부분에 대한 비판 없이(그리고 1980년대 이후 김지하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크게 비판하지도 않는 논조로) 김지하의 문학사적 성취를 찬찬히 되짚을 뿐이다. 이런 글들까지 포함하여 보건대 염무웅의 이번 평론집은 저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삼아 문학의 역사성을 조망하는 일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염무웅 평론가의 관점은 무엇이며 이번 책에서 그 관점은 어떻게 발현됐는가. 2개의 질문에 차례로 답해보자. * 염무웅이 1979년에 출간한 평론집 『민중시대의 문학』(창비)은 유신독재 시기 민족문학론의 결산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사실 염무웅의 첫 번째 평론집은 그로부터 3년 전에 출간된 『한국문학의 반성』(민음사)이다. 『한국문학의 반성』은 저자 자신도 마냥 만족스러워하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저자 소개란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허나 이 책은 사회의식을 기준으로 삼아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정도까지의 내성적 문학을 개괄한 구체적 비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반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의 작품들에 대한 구체적 평가보다는, 한국문학사를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개론적 성격의 글들이 돋보인다. 지금의 시점으로 보자면 『민중시대의 문학』은 동세대 작품을 대상으로 삼은 ‘현장비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는 염무웅의 책이 가진 유별난 특징이 아니다. 민족문학운동의 태동기에 나온 평론집으로 손꼽을 수 있는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백낙청, 1977)이라든가 『민족문학의 논리』(최원식, 1982) 같은 책을 봐도 개별 작품에 대한 해설과 평가보다는 한국문학(과 ‘민족문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거시적 논의가 주를 이룬다. 이 사실은 민족문학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입견을 반박하기 위한 논거로 유용하다. 1970년대부터 민족문학 운동의 비판자들이 주로 제기한 논점은,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작가들에게 특정한 스타일의 작품을 쓰게끔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때의 민족문학 진영으로 분류된 평론가들은 어떤 작품을 쓰라고 요청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주로 탐구한 문제는 한국에서 문학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한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더욱이 이 나라의 대통령은 쿠테타로 집권한 군인 출신으로 무려 20년 동안 장기통치를 했다. 한국의 시급한 과제는 ‘근대화’로 요약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많은 경우 ‘근대화’란 단어는 서구의 ‘선진국’을 본받자는 사대주의적인 주장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나라들의 번영이 약소국을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는 힘들다. 민족문학론자들은 이런 사항들을 지적하고, 마냥 외국의 문학이론을 참조하는 대신, 한국문학의 전통에 주목하자고 했다. 요컨대 민족문학론은 ① 해외의 부르주아적인 문학론은 한계가 있으니 ② 따라서 한국의 전통을 자각하며 문학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①에 대해서는 동세대의 뛰어난 평론가들 또한 동의했을 것이다. 그들이 문제 삼은 것은 ②였다. 가령 김현과 김우창은, 민족문학론이 국수주의적인 아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고, 또한 그것이 서양의 리얼리즘론(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였음에도 김현은 ‘리얼리즘’을 자주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동일시했다.)에 대한 추종으로 귀결되리라 지적했다. 또한 민족 문학론이 국수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고 비판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1970년대 이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줄곧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들 중(혹은 번역서를 부지런히 읽는 사람들 중) 누가 외국의 담론을 누가 먼저 참조하고 소개하는지를 경쟁해 왔다. 이제 한국도 어떤 면에서는 ‘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의 ‘전통’을 복기하고 이론화하려는 사람들은 희소하고, 외국의 이론을 한국문학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넘쳐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외국 이론에 대한 경도는 과거보다 오늘날 훨씬 심해졌다는 생각도 든다. 이는 어쩌면 민족문학론이 오늘날의 문단과 학계에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까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주창자들이 말한 한국문학의 ‘전통’이란, 복고적으로 내려져오는 제반 문화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식민지 시기의 작가 한용운에게 주목했다. 주지하듯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부재하는 ‘님’에 대한 마음을 간절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때의 ‘님’은 연정의 대상일 수도 있겠지만 화자가 간절히 바랐던 모든 것들을 지칭한다고 이해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본다면(그리고 한용운 본인이 독립운동가에 고승이었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님의 침묵』은 부정적인 현실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내세운 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염무웅을 비롯한 민족문학론자들이 그때부터 한용운을 민족문학의 전거로 삼았던 것은, 독립한(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에서도 줄곧 현실의 불편한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인지,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에 수록된 글 「민족문학의 시대는 갔는가」에서도 한용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이 동세대의 문학에 맞선 저항이었다고 한다면, 21세기의 민족문학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무엇에 맞서 싸워야 할까? 염무웅은 혈통주의적 민족 개념이 와해되는 상황임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민족분단의 현실이 엄존하고, 문학은 이 현실에 기여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그리고 박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끌어안은 작가들에게 헌사를 바치고 있다.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1부와 2부는 대부분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해온 작가에 할애되어 있고, 특히 2부에서 (하나의 인터뷰를 제외한) 비평문들은 전부 고인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히 염무웅 평론가가 자신에게 익숙한 연배의 작가들만 다뤄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번 책의 서문과 인터뷰 등등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의식하면서 문학을 해온 작가들에 주목했고, 그러다 보니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경험한 문학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염무웅의 비평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한국의 전체적인 사회상황을 조망하면서 문학인의 삶이 역사와 포개지는 지점을 찬찬히 짚어낸다는 것인데, 이번 책에 수록된 작가론과 작품론들에서도 그런 특징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염무웅은 김지하, 신경림, 김수영, 김남주, 송기숙 등등을 이전의 책에서 다뤘던 적이 있는데, 이번 평론집에서 재평가하는 글을 새로 수록했다. 그 글들은 작가의 오랜 관심과 애정이 묻어나거니와, 작가들과의 경험에 대한 저자의 증언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으니, 후대 연구자들이 참조해야 할 주요한 텍스트가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의 3부는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개괄과 한국문학의 세계화의 문제를 메타적으로 다룬 글들로 채워져 있다. 아무래도 저자가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담아내고 발표한 평문이 대부분인 것 같은데, 이 또한 한국의 고유한 현실과 역사적 관점으로 ‘민족문학’을 조망하겠다는 문제의식을 응축하여 드러내고 있다. 이상의 사항을 거꾸로 말하면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201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상황에 대해서는 사려 깊게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어쩌면 그것 또한 ‘자주적’인 시각만으로는 독해하기 어려워진 21세기의 문단 상황을 방증하는 예후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나(저자)는 민족과 민족문학에서 배타주의의 독선을 걷어내면 쓸만한 요소가 아직 적잖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7쪽)라고 했고, 이번 평론집은 그런 문제의식을 오롯이 구현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약 민족문학론이 동세대의 젊은 작가가 쓴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고 제시해야 한다면, 그 작업은 후대의 평론가들에게 주어진 숙제일 것이다. 염무웅의 『역사 앞에 선 한국문학』은 한국의 현실에 밀착해서 살아온 작가들의 삶을 웅숭깊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전통’을 복원(혹은 창조)해낸 ‘자주적’인 비평집으로 독자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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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준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연민과 공생 - 나희덕의 신작시를 읽는 한 가지 방식 고봉준 “숲속에서 쓰러지는 나무는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도 소리를 낼까?” 영국의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의 이 질문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가 쓰러지고 소리를 내는 자연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 즉 인간이 없으면 ‘지각’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없어도 ‘지각’ 행위는 발생하지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해 줄 인간이 없으므로 그건 무의미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숲’에도 인간 이외의 생명이 존재한다.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사건은 그곳에 살고 있는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지각’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소리를 지각하는 인간이 없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것 혹은 믿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까지의 앎과 믿음에 의하면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의미하거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순간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위기는 이러한 앎과 믿음에 근거해 살아온 인류의 책임이다. 나희덕의 최근 시는 ‘생명’을 주제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많은 것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라는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지구상의 수많은 존재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으며, 이러한 생존의 조건은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별다른 의심 없이 이 복잡한 관계를 ‘주체(주인)’와 ‘객체(대상)’라는 이항식으로 단순화해서 이해했고, ‘대상’에 대한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인간이 아닌 존재를 개발의 대상으로 간주해 왔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는 ‘생태(ecology)’에 관한 사유는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예로부터 심장은 연민의 장소로 여겨져 왔다 또는 영혼이 숨어 있는 곳 친구는 말했다, 몸을 다치면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고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고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심장이 과로하고 있다 며칠 전 부정맥이 다시 찾아왔다 펌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심장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가 지나가기만 가만히 기다렸다, 연민을 연민하며 - 「연민의 장소」 부분 ‘연민’은 자신 바깥의 세계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나희덕은 『시와 물질』(문학동네, 2025)의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으로서의 연민,/그 힘에 기대어 또 얼마간을 살고 썼다.” 시인이 말하는 ‘연민’이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 ‘길러진 열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타고난 자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다중 위기, 그것을 초래한 인간중심의 사고를 뛰어넘기 위해 근대 문명이 만든 인위적인 경계 바깥으로 나가려는 노력으로서의 ‘연민’이다. ‘타고난 자질’이 반응적인 감정이라면 ‘길러진 열정’은 반복적인 노력과 실천적 의지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연민’은 “살고 썼다”라는 진술처럼 시적 태도이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이다. “시인의 직업병은 바로 연민”이라는 진술에는 이처럼 자신의 바깥, ‘나’의 경계 너머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는 시인이라는 존재에 관한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시인은 ‘연민’하는 존재이다. 이 시에서 ‘연민의 장소’는 ‘심장’이다. 화자는 신체에 발생한 ‘부정맥’이라는 질병을 ‘연민’이라는 문제로 전치하고 있다. “부정맥으로 처음 응급실에 실려간 것은/스무 살 때였다”라는 도입부의 진술에서 확인되듯이 화자는 아주 오래전부터 ‘부정맥’을 앓아왔다. 심장에 생긴 이러한 병리적 상태는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에서 “나는 심장을 켜는 사람”(「심장을 켜는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부정맥이란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거나 빠르거나 느린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순환하는 체계로서의 몸을/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것은 부정맥의 병리학적 원인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따금/들이닥치는 통증을 통해서 가늠해볼 뿐”이라는 말처럼 그는 부정맥이 발생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한편 화자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부정맥이 “건강한 부위가 아픈 부위를 연민하는 거”라고 인식한다. 요컨대 “따뜻한 피가 아픈 부위를 향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 병리학적인 의미의 연민이라면, 어떤 생명체가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호소할 때 그 존재를 향해 마음을 쓰는 태도는 시적인 의미의 연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연민은 “사랑을 잃은 손녀가/담당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 장면처럼 상호적 관계로도 행해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생명을 향한 마음과 “빈 자리를 통해서만 만져지는 것”(「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으로서의 상실과 결핍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연민’과 ‘잃어버린 돌에 대한 감각’을 나란하게 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듯하다. 바다에 이르러서야 사나운 불길이 잦아들었다 그는 화염이 동네 뒷산까지 번져오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어야 했다 불길이 고속도로를 넘어오고 산봉우리를 훌쩍 건너뛰어 여기까지 날아왔어요 모든 게 바람의 손에 달려 있었지요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우리 동네는 무사했어요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담고 있다 그러나 불의 혀처럼 어떤 말은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식은 혓바닥에는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다 불의 혀가 날름거리는 지옥을 겪어낸 나무들 능선을 따라 침엽수들이 검은 성냥개비처럼 서 있고 그나마 물기 많은 활엽수 몇은 살아남았다 폐허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검은 흙 위로 어느새 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다 무슨 위로처럼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게 어머니의 고향집과 산소마저 다 타버린 이에게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 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 - 「불의 혀」 전문 이 시는 지난봄의 동해안 산불을 매개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말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인은 타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존재이며, 세계와 타자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타자의 내면은 ‘나’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둠의 영역이다. 재현의 불가능성이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의 불가능성처럼 ‘불가능성’이 예술의 중요한 논점이 되는 까닭은 우리가 ‘타인’의 내면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인이라는 존재가 이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불가능성 속에서 쓰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인용시에서 화자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산불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으로는 “어제 뱉어낸 말들을 주워 담고 있다.” 그는 왜 어제의 ‘말’을 주워 담는 것일까? ‘불의 혀’처럼 자신이 뱉은 ‘말’이 누군가를 태워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자는 ‘불의 혀’라는 익숙한 이미지와 자신의 말하는 ‘혀’, 즉 산불이 초래한 ‘고통’과 자신의 ‘말’이 초래한 ‘고통’을 나란하게 놓는다. 이러한 등치의 밑바닥에는 ‘혀’를 ‘불’에 비유한 성경적 상상력이 놓여 있는 듯하다. ‘불’이 ‘혀’에 비유될 때, “시커먼 재와 먼지가 남아 있”는 땅은 ‘식은 혓바닥’이 된다. 시인은 이 ‘식은 혓바닥’ 위에서 “검은 흙 위로 어느새/여름풀이 돋아나고 있”는 풍경을 목격한다. 시인은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대지에 풀이 “무슨 위로처럼” 돋아난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풀’의 위로의 반대편에 “산불로 거처를 잃은 이”에 대한 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검게 타버린 대지 위에 위로처럼 돋아나는 ‘풀’과 산불로 거처를 상실한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위로의 말’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들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의 혀는/누구의 무릎 하나 일으키지 못한다”라는 진술이 그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는 “타인의 고통은 대체 어떤 혀로 말해질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느끼는 좌절감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운명적인 결핍의 사건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는 타인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한 인간의 삶이 담고 있는 진실은 언어로 온전히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조건이다. 그리고 시인에게 이 말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은 실패가 아니라 ‘말’의 조건이다. 「불의 혀」가 보여주듯이 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수 있고, 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하겠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박하가 담긴 컵을 탁자에 놓아두고 언제 나올까, 잘린 줄기 끝을 들여다보며 기다린다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을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 물에서 흙으로 이주한 박하는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 햇빛이든 물이든 흙이든 바닥이든, 한쪽을 향해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 뻗어감과 휘어짐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 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 남루한 옷과 때묻은 손, 두 사람의 눈빛을 바닥을 향해 있다 어떤 물기도 없이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는 계속 뻗어가고 나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 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었다 거리의 흙먼지도 함께 따라와 자욱해지곤 하지만 박하가 자라는 동안 굴성을 지닌 존재들은 자란다 - 「박하가 자라는 동안」 부분 화자는 박하 몇 줄기를 물꽂이 해놓고 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화분에 옮겨심기 위해서는 뿌리가 3센티 정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식물이 본체에서 잘려져 컵의 물속에서 뿌리내리는 것을 “통점이 발아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통점’은 일종의 상처인데, 식물은 바로 이 ‘통점=상처’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화자는 ‘박하’가 “그녀의 정원에서 나의 집으로, 다시/물에서 흙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주’라고 표현한다. ‘이주’란 본래 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 정착하는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이주’한 생명이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는 데는 얼마간의 시간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며칠 몸살을 앓는 듯하더니 자리를 잡아간다”라는 진술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번식력이 강한 ‘박하’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화자가 ‘박하’의 성장에서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굴성’이다. 굴성이란 식물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요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성장하거나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는 식물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고 민감하게 설계된 생명체이면서 항상 자극에 반응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러한 식물의 굴성 현상에서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는 규칙을 읽는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의/뻗어감과 휘어짐”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굴성을 지닌 모든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에서 ‘굴성’은 식물만이 아니라 자기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모든 생명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확장되며, 이때 “뻗어감과 휘어짐”은 타인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식물이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 외부의 자극이란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거리에서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와/그 곁에서 참담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등장하는 풍경이다. 화자에게 이 풍경은 “메마른 허공을 향해 절망의 뿌리”가 계속 뻗어가는 형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형상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이 궁핍한 형상 앞에서 화자는 “기억의 물을 갈아주며/뿌리가 부서지지 않도록 마음에 옮겨 심”는다. ‘박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굴성을 지닌 존재”에게는 ‘뿌리’가 존재하며, ‘뿌리’는 생명의 장소이다. 이런 점에서 ‘물’을 갈아주는 행위는 ‘뿌리’가 제대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다만, 이 경우 ‘물’은 “기억의 물”이므로 이것은 그들에 대한 ‘연민’의 태도로 그 궁핍한 풍경을 자신의 내면으로 이주시켰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은 세계의 가난한 풍경을 자신의 마음에 옮겨심는다. 탐조의 마지막은 새들이 저수지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머리 숙여 낟알을 쪼던 기러기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떼 지어 저수지로 날아온다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얼음물 위에서의 잠,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슬프게 들리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 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그만 풀어주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 허공에서 날갯소리가 들렸다 - 「탐조의 이유」 부분 탐조(探鳥)는 새를 관찰하는 활동이다. 화자는 오래전 들판에 누워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체온으로 녹인 얼음 위에서 밤을 보내기 위해” 한겨울 저수지로 되돌아오는 기러기들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다. 화자에게 기러기의 모습은 “얼음물 위에서의 잠,/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라는 표현처럼 생존을 위한 고단한 삶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화자는 “새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과거의 그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 떼를 ‘슬픔’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의 그에게 새들의 ‘울음소리’는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는 불현듯 자신이 “새를 보러 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왜, 어떻게 달라졌는지 독자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동일한 대상을 다르게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새’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면 화자는 왜 “새를 보러 가자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따라나선 것일까. 먼저는 그는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어서,” 탐조에 나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진술한다. 오래전의 ‘탐조’의 목표가 ‘새(기러기 떼)’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 화자의 탐조는 ‘새’가 아니라 “새들을 바라보는 내가/새들의 눈에 비친 내가”처럼 ‘나’를 확인하는 것이 목표이다. 후자에서 ‘나’는 ‘새’의 바깥, “맹금류를 피해 살아가는 존재들”의 바깥에 있는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새들의 눈에 비친 내”이다.과거의 ‘나’는 ‘새’와 별개의 존재였던 반면 현재의 ‘나’는 ‘새’와 연결된 존재이다. 이런 생각에 기대어 화자는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그만 풀어주고”자 한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다르듯이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와 지금 얼음물 위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존재들의 울음소리”는 다르다. 전자의 울음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 해석된 인간화된 울음이라면 후자의 울음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인간화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의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 속에 오래 가두어둔” 새들의 울음소리를 풀어준다거나 “하늘을 향해 새들을 토해냈다”라는 표현에는 인간화된 자연 인식을 반성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야말로 인간 중심적인 질서의 바깥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성을 사유하는 ‘공생’의 한 방식이지 않을까.

월간 현대시 고봉준 연민공생생명비인간자연관계 2025
류수연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양안다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

사랑, 정의되지 않을 기록들 - 서윤후와 양안다의 사이, 그 틈 류수연 1. 어둠의 스펙트럼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 서윤호의 세계는 비교적 뚜렷한 색채를 가졌다. 미러볼처럼 한없이 흔들거리는, “규정할 수 없는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형태로 존재”(혜진, 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25쪽)하는 그것. 박혜진 평론가는 이를 가리켜 “움직이는 슬픔”(해설 「내가 되지 않는 시」, 『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 문학동네, 2021, 116쪽)이라 명명한 바 있다. 슬픔은 그렇게 흐릿하면서도 뚜렷한 ‘무엇’으로 서윤후의 시 세계 전반을 묵직하게 덮고 있다. 얼핏 그의 신작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문학과지성사, 2025)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 위에 한 가지 의미가 덧씌워진다. 바로 어둠이다. 그것은 슬픔 자체를 오래도록 응시해 온 끝에 마침내 얻어낼 수 있었던 기원(基源), 그리고 어쩌면 시인의 갈망이 닿은 마지막 기원(祈願). 어둠은 슬픔의 시작이자 과정이며 그 최후의 결론을 가늠하게 하는 강력한 언어가 된다. 그의 시를 둘러싼 오랜 배경이었던 어둠이 비로소 뚜렷한 색채로 가시화되는 것이다. 어둠의 색상은 검은색이다. 그런데 검은색은 대단히 모순적인 색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닌 모든 색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모든 색은 빛의 파장에서 기원하기에 검은색으로 표상되는 어둠은 그 빛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 때문일까?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어둠의 상투적인 이미지는 빛의 반대편, 혹은 빛의 무덤이다. 찬란한 빛의 소명을 마감하고 마지막에 돌아갈 그곳, 거기가 바로 어둠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지독하게도 비과학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빛의 과학적 정의는 빛의 영역을 가시광선에 국한하지 않는다.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그 안에 숨겨진 전자 스펙트럼까지도 빛의 영역에 포함된다.’(한국물리학회, “전자”, 『물리학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tems.naver.com) 따라서 빛을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어둠 역시 어쩔 수 없는 필연으로, 빛의 흔적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서윤후의 시는 이러한 물질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의 시에서 어둠은 빛의 무덤이 아닌 또 다른 빛의 영역, 빛의 모태에서 출발하여 그 모태로부터 가장 멀어진 심연. 그러므로 가장 강렬하게 빛을 갈구하는 결핍으로 재구성된다. ‘나쁘게 눈부신’ 어둠을 그려냄으로써 서윤후가 노래하는 슬픔의 궤적은 더 선명해진다.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볼 만한 어둠이 없다 - 「흑백판화」 부분 우리는 언제 어둠을 인식하는가? 어둠이 어둠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빛과 함께 할 때이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이란 오히려 모호하다. 결국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빛의 남겨진 궤적을 쫓기 때문이다. 「흑백판화」에 그려진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인의 손에 들린 손전등은 그 모순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비추던 ‘미러볼’(「무한한 밤 홀로 미러볼 켜네」)이 아니다. 찬란한 무대 위에서 고독함을 드러냈던 어제의 그는, 이제 손전등을 들고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최단 경로로 검색해 도착한 작은 식당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좁고 오래된 간격일수록 친밀한데 물컵에는 빠져 죽은 초파리 이렇게 풍경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다 입김이 헐거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선 손전등 감추고 싶어서 숨길수록 커지는 게 있어서 내게서 가장 깊숙한 곳을 찾아 더듬는다 숨을 곳이 의외로 많았다 나쁘게 눈부시기 풍경의 보은 나는 여전히 밝은 쪽에 서 있다 - 「흑백판화」 부분 시인이 ‘가보려 했던’ 어둠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둠이 처음 발견되는 공간은 작은 식당이었다. 그곳을 찾았던 이유는 단 하나, 좀 더 친밀해지기 위함이다. 낯선 누군가와 더 친밀해지기를 바라는 그 순간을 애정의 서사와 엮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달콤하고 설레는 감정들이 아니다. “물컵에 빠져 죽은 초파리”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지독한 흑역사의 기억이다. 시인은 저도 모르게 손전등을 감춘다. 손전등은 어둠을 피하는 동시에 탐색하고 싶은 그의 모순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손전등이 그나마 가치 있게 되는 순간 역시 어둠 속이다. 그러니 어둠이 사라진 순간, 손전등의 의미도 퇴색될 수밖에 없다. 이미 망쳐버린 풍경 속에서 어떻게든 제 어둠을 감추고 싶었던 마음. 상대의 어둠에는 함부로 손전등을 들이밀고자 했으면서도 제 어둠을 감추기 위해서 “여전히 밝은 쪽”에서 상대만을 어둠으로 밀었던, 그는 지독하게도 초라한 사람이었다. 오직 이기심에서 시작된 ‘나쁜 눈부심’으로만 남은 그 시간을, 시인은 묵묵하게 되짚어낸다. 이처럼 이 시집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흑백판화」에는 자신의 모순된 마음조차 감추고 싶었던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얼핏 달콤할 것 같은 이 순간들은 사실 그저 지나쳤던 그 찰나, 다시 오지 않을 과거일 뿐임을 말이다. 제대로 고백하지 못한 마음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고, 누군가를 탐색하고자 했던 그 마음의 풍경은 사라졌다. 그토록 간절히 알고 싶었던 ‘어둠’, 그 안에 담겨 있던 누군가의 깊은 마음은 더 이상 그의 곁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의 제목이 「흑백판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좋은 일로 찾아오고 싶었어요 방명록엔 한 줄 여백도 남김없이 내가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손전등을 꺼내어 두 눈을 향해 겨누어본다 - 「흑백판화」 부분 하지만 그 추억은 여전히 가장 눈부신 시간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이 떠나온 사람들의 이름, 그것은 한때 그가 손전등으로 비춰보고 싶었던 어둠이자 이제는 가장 아스라한 추억으로 그를 아프게 하는 눈부심이다. 「흑백판화」에서 떠오른 지나간 시간의 순간들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그의 현재로 이어진다. 망설임을 배웠던 돌을 가벼이 쥐고 뼈대만 남은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떠나고 빈자리에 서본 일은 어둠의 발상이 된다 빛을 철거할 수도 있게 된다 너를 겪어내고 있는 상실의 단원 속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면 잃어버린 길을 영원히 간직하게 된다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치고 멀어질 때 망설임을 끝낸 돌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 「하엽 시간」 부분 시인은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충분히, 그리고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랑할 누군가를 떠나보낸 그 빈자리는 사실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탐색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어둠이 시작되는 자리이고, 스스로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 그 본연의 의미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에게 사랑은 찬란한 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랑은 지독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공포였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의미로 부연하더라도 감출 수 없는 진실, 그것은 그가 어둠을, 그리하여 사랑을 그의 삶 밖으로 밀쳐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윤후의 시에서는 때때로 빛이 어둠보다 차갑다. 아니 냉혹하다. 제 부끄러움을 감출 작은 그림자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리. 시인은 그 자리를 ‘손전등 불빛 하나가 너를 놓친’ 자리라고, 아니 ‘손전등 불빛 하나로 인해 너를 놓친’ 자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시를, 그의 사랑을 그리고 어둠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실연과 상실과 아픔과 추억…… 그리하여 그 모든 것이 지독한 후회처럼 자기 자신을 낱낱이 옭아매고 있는 것 같은 그 쓸쓸하고 차갑고 부끄러운 순간. 놀랍게도 시인은 그 순간이야말로 여전히 그가 사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는 나쁜 이야기를 우리는 다시 쓸 수도 있을까 - 「파본」 놀랍지 않은가? 시간을 되짚어 가장 부끄럽고 어리석었던 지난 사랑의 순간을 끝없이 되풀이한 끝에 내린 그의 결론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수백 가지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반복될지 모를, 그리하여 어쩌면 그에게 흑역사로 기억될지 모를, 그 나쁜 이야기 하나하나가 여전히 좋은 이야기를 꿈꾸게 만든다는 이 고백. 서윤후의 『나쁘게 눈부시기』가 가장 로맨틱한 연서일 수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그가 노래하는 어둠의 틈에는 달콤하고 설레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녹여져 있다. 그리고 어둠이 만드는 가장 찬란한 스펙트럼이 거기에 놓인다. 그의 어둠은 빛보다 다정하다. 2. 위태롭지만 간절한 –양안다의 『이것은 천재의 사랑』 양안다 시인의 시 세계는 ‘사랑의 감정이 세계의 전부로 등치되는 극단적인 명제’(신수진, 해설 「거울과 미장센」,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 2020, 99쪽) 위에서 구축된다. 오직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이게도 세계와의 불화를 표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시는 언제나 세계를 구성한 두 축 가운데 하나, 바로 ‘너’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계의 끝에서 그 상실의 기원을 되짚어보는 일이란 결국 예정된 파멸을 향해 가는 세계의 균열을 들여다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신작 시집 『이것은 천재의 사랑』(타이피스트, 2025)이 그려내는 세상 역시 그 균열에 맞닿아 있다. 눈 쌓인 들판이구나. 들개가 무리 지어 떠돌고 죽은 것들을 물어 가는 밤이었다. 횃불의 배회를 유령이라고 부를까. 연, 네가 천장에 목매달지 않고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죽은 너를 보러 갔을 때 흩날리는 흰 조명이 나를 반겼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 「들개와 천재」 부분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들개와 천재」에서 시인은 ‘너’의 부재를 선언한다. 여기서 ‘너’의 이름은 연. ‘너’는 ‘나’의 절대적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이미 죽어버린 연인을 향한 그리움이자, 죽음으로써 ‘나’를 버린 ‘너’를 향한 원망의 노래다. 그리하여 ‘나’는 차라리 연이 “폭설 속에서 죽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의심도 시작된다. ‘나’가 토로하는 이 절절함의 이면에 깔린 마음은 과연 ‘너’를 위한 것인가? 깊은 밤을 어느 맹인의 사랑이라고 불러 줄까. 맹인의 사랑을 짙은 밤의 풍경이라고 불러 줄까. - 「들개와 천재」 부분 ‘나’의 연정이 사실 지독한 이기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내 드러난다. 바로 바람처럼 떠도는 또 다른 목소리가 ‘나’의 절절한 미련 위에 겹쳐지는 순간이다. 그 목소리는 그리움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맹목적인 집착을 포착한다. 눈이 멀어버린 자의 사랑. 오롯이 그 사람을 바라보기보다 자기 맹목에 갇혀버린 자의 사랑. 그것도 기꺼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나’의 사랑이 ‘너’의 죽음을 야기한 이유였음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나’의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그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곧바로 어딘가에 잠긴 듯 보였고, 나는 그 아이가 잠긴 곳이 슬픔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나, 지금 너를 보니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 그러자 그 아이는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네가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물」 그 답은 이미 이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던, 「물」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아이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묻는다. 아이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그의 슬픔을 추정한다. 그리고 자기만의 추정으로 아이의 상태를 단정해버린 그 순간, 그들 사이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이는 선언한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 시가 그려내는 딜레마는 그대로 사랑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 유일하게 그 이기심을 접는 순간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사랑이란 결국 타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랑은 때때로 인간을 그 어떤 순간보다 이기적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너’를 향한 ‘나’의 헌신과 희생이 맹목이 되는 순간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그 맹목의 본질을 알기 위해 다시 「들개와 천재」로 돌아가 보자. 들개가 죽은 바람을 물어 가는 밤. 새끼 들개는 부모에게서 죽은 바람을 잘도 받아먹었다. 교육인가요. 사랑이군요. 작별을 이해하기 전에 마음을 모조리 깨닫고 싶어. 온 세상 눈보라가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지독해요? - 「들개와 천재」 부분 목매달아 죽음을 선택한 연이 차라리 폭설에 죽었기를 바라는 그 마음 뒤에 숨은 풍경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폭설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어린 새끼에게 제 마지막 숨을 주고자 하는 어미의 바람.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선언은, 연을 향한 ‘나’의 간절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인은 우리가 그 숭고함에 감격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독백 사이로 끼어드는 분열된 목소리가, ‘나’의 허위를 메마른 언어로 짚어낸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숨겨둔 발톱을 내놓는다. “내가 지독해요?”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사랑이 사랑일 수 없을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그리고 이제 시인과 ‘나’의 완전한 분열이 시작된다. 사건이 발생한다. 인간이 불을 사용한다. 인간이 열차를 만든다. 인간이 전기를 만든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 인간이 인간을 만든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 「들개와 천재」 부분 다시 등장한 이 목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그 목소리가 오직 둘만으로 구성된 이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목소리는 말한다. 태초의 사건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불을 사용하고 열차를 만들고 전기를 만들고 기계를 만들어 결국 ‘인간’이 된 우리. 인간이야말로 이 세계의 사랑을 파멸에 이르게 만든 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또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이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본질은 폭로이다. 사랑을 말하는 것이, 사랑을 찾는 것이, 사랑을 잃는 것이,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사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허상임을.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 불과함으로. 그러므로 이 사랑의 실패 역시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파멸 위에 영광을 쌓아 올린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이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다는 것은, 가슴 깊은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은, 무너진 사랑 앞에서 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한 언어인가? 이제 두 눈이 사라져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금방 갈게. 따뜻하게 입고 기다리고 있어. 이것은 천재의 사랑이다. - 「들개와 천재」 부분 그 사랑은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하다. 사랑할수록, 그래서 더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이 지독한 모순. 그러므로 이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너’의 파멸뿐이다. 그것만이 이 위태롭고 그래서 간절한 ‘불안’으로부터 완벽한 탈주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파멸시키고도 사랑을 노래하고, 제 욕심에 가득 찬 집착으로 옭아매면서 그것을 사랑의 언어로 달콤하게 포장하는 폭력. ‘너’의 부재를 통해서만 완벽해지는 사랑. 오직 ‘너’의 파멸 위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사랑. 그것이야말로 양안다가 발견한 인간, 바로 ‘천재의 사랑’이다. 3. 납작해진, 그러나 납작할 수 없는 사전을 펼쳐 보자. 그것을 채운 것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수많은 의미의 연속이다. 1번과 2번, 때로는 그보다 많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단어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단어가, 그리고 그 의미들이 사전 속에 박제되고 있다는 것을. 어휘력이나 문해력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언어의 협소화는 이미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 출발점도 해결점도 명료하다. 결국 언어란 인간과 함께 성장하고 확장되는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펼쳐 꺼내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납작해진, 그 언어들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역시, 우리의 손에 놓여 있다. 바로 거기에 문학, 그리고 시의 꾸준함이 놓인다. 서윤후와 양안다의 시가 그려낸 ‘사랑’도 그러하다. 두 시인의 시는 이미 납작해진 채 상투적인 기표로 떠도는 ‘사랑’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한 편 한 편의 시는 이 납작해진 언어의 틈을 여는 쐐기와 같았다. 협소해진 언어의 틈 사이를 벌려, 거기에 켜켜이 눌어붙은 의미망을 넓히고 그 좁은 틈마다 새롭게 일으킨 의미들을 채워 넣는 일. 이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언어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채워 세우는, 또 다른 의미의 건축인지도 모르겠다.지금 당신이 마주한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납작해진 언어를 펼쳐 당신만의 건축이 시작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오랜 외로움의 끝에서 이제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서윤후의 ‘어둠’을, 고통스럽기만 했던 지난한 사랑을 종결하고 싶다면 양안다의 ‘파멸’을, 당신에게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당신만의 틈을 열 쐐기가 되어줄 것이다. 당신은 어느 세계에 발을 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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